소설리스트

21화 (25/27)
  • 21.

    “진짜 폐하가 그동안 저희를 얼마나 갈구었는지 아십니까? 그분 때문에 혈압이 올라 잠을 못 잔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투덜, 투덜, 투덜. 저렇게 말을 많이 하면 아무리 욕이라고 해도 피곤하지 않을까? 나는 팔짱을 낀 협보가 앞에 서서 쉼 없이 입을 놀리는 것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지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게 그 나름대로 평정을 유지하려는 방법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나를 보면 입을 우그러뜨리며 눈물을 참기 바빴던 그였다. 그것도 막 만났을 때에 비하면 나아진 거라고 하면 믿을까. 들고 있던 종이들을 우수수 떨어뜨리며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하는데, 나는 그날 집무실이 침수되는 줄 알았다.

    코끝이 새빨개져서 뛰어온 오이는 또 어떻고. 지금은 우직하게 내 뒤에 서 있지만 그는 밤이 깊도록 엎드려 울기만 했다. 갖은 괴롭힘에도 묵묵하게 털고 일어났던 과거를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짐작이 갔다.

    마리는…… 말을 말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예정보다 이르게 부여를 떠난 이유에는 그 아이의 몫도 상당했다. 궐이 떠나가라 요란하게 반겨주는데, 내가 깨어난 것을 온 부여 사람들이 다 알까 봐 좀 무서웠어야지.

    “게다가 건국을 한 지가 언젠데……. 계절이 바뀌고 나서야 건국식을 여는 왕은 저놈밖에 없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저하?”

    그동안 협보의 말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나름 주몽을 높였던 말이 점점 예전 버릇대로 짧아지는 것을 보며 나는 살짝 웃었다. 하지만 저 말에는 고쳐야 할 부분이 더 있었다.

    “저하라고 부르지 마. 이제 태자도 아닌걸.”

    실컷 떠들어대던 협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공기 중에 감돌았지만 점차 익숙해져야 할 일이었다.

    부여를 뒤로하고 강을 건넌 순간부터 나는 태자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사실 그보다 조금 더 이른 순간부터 그랬던 것일지도.

    며칠 전, 내가 막 깨어나 주몽을 한창 보듬고 있을 때였다.

    “저하… 저하…!”

    문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숨죽인 목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마구 뒤섞여 들렸다. 그 사이로 무언가가 바닥에 질질 끌리며 나무를 긁는 소리가 섞였다. 의원은 아닌 것 같은데. 기괴한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저하, 손에 드신 그것만이라도 내려두시옵고…….”

    “혀가 길구나.”

    잔뜩 죽인 속삭임 위로 홀로 큰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주변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저 날카로운 말과 태도는 또 다른 그리운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점차 커지는 소리들을 듣다 가만히 주몽을 밀어냈다. 허리를 끌어안은 손이 쉬이 풀리지 않아 간신히 떼어내야 했지만, 아무튼. 겨우 침상에서 혼자 몸을 세우기 무섭게 궁인이 방문을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중간에 끊은 사나운 손길이 직접 장지문을 열어젖혔다.

    “나를 농락한 것이라면 내 손수 너희들을…….”

    “가람아.”

    열린 문틈 사이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날카로운 턱이었다. 예민해 보일 정도로 마른 얼굴은 신경질적인 눈빛과 어우러져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냈다. 나는 쿵쿵 뛰는 심장을 내리누르며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문을 잡고 있던 그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형, 님……?”

    살짝 벌어진 입에서 바람을 닮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긴 장검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마룻바닥을 긁던 물건의 정체는 저 칼이었나 보다.

    칼자루 끝에 매달린, 새카만 액체로 뒤덮여 뻣뻣하게 엉긴 술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파란색이 낯설지 않았다. 내 시선을 따라간 가람이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형님께서 깨어나셨다고……. 궁인이, 당연히, 저는…….”

    “가람아.”

    “거짓, 이면 목을 자르려 했습니다.”

    불신과 희망이 뒤섞인 참담한 얼굴이 나를 향했다. 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저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피에 적셔진 술을 매달고 다니기까지 그가 겪어야 했을 고통이 해일처럼 나를 덮쳤다.

    그가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누워 있던 다리에는 아직 힘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앉아 애써 웃으며 팔을 벌렸다.

    가람이 내 품에 쓰러지듯 무너지며 안겼다. 뭐가 그리 무서운지 꽉 끌어안지도 못하는 팔이 등 뒤를 배회했다.

    “형님…… 형님…….”

    “그래, 나야. 내가 돌아왔어, 응?”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왜… 저를 아예 말려 죽이시지 왜…….”

    숨죽인 울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주몽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가 발을 동동 구르는 궁인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는 것을 보다 다시 품속으로 고개를 내렸다.

    키는 더 크고 어깨는 기억보다 더 벌어졌다. 힘껏 매섭게 떠도 둥글었던 눈매는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곳곳에 흉터처럼 남은 변화를 더듬었다. 홀로 이곳에 남아 내가 지운 무거운 짐을 이고 버틴 흔적이었다.

    “아닙니다. 이제라도 오셨으니 다행입니다.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주몽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이지만 그래도 헛말을 하지 않으니…….”

    원망의 말을 내뱉던 가람이 필사적으로 내 소매를 붙들었다.

    “제가, 제가 그동안 부여를 잘 맡아 두었습니다. 형님께선 그저 도로 가져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시끄러운 무리들도 제법 정리를 해두었으니 전처럼 골머리를 앓으실 일도 없을 겁니다. 만일 생기더라도 제가 다……. 아.”

    쫓기듯 다급하게 말을 잇던 그가 순간 눈을 크게 뜨며 말을 멈췄다. 나는 천천히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묘한 두려움에 휩싸여 바라보았다.

    “아아, 아. 제가… 쓸 만한 자들을 마련해 두고 가겠습니다. 저는 이제 죗값을 치러야 하니까요.”

    익히 아는 웃음이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웃음. 마지막 말은 몹시도 평연했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준비한 일인 양…….

    가람이 나를 놓더니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뒤꿈치에 걸린 칼을 집어 드는 모습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가 칼자루를 내 쪽으로 돌려 내밀었다.

    이 구도가 지나치게 익숙했다. 애써 묻어두고 살았던 끔찍한 기억이 스멀스멀 발끝부터 기어 올라왔다.

    신이 주도한 우리의 마지막 순간은 그리 아름다운 모양새가 아니었다. 칼자루를 잡는 순간 칼끝은 반대를 향하여 다시 재현될 것이다. 벼락과도 같은 직감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칼자루가 아니라 그 위에 있는 칼집을 단단히 잡았다. 가람이 곤란하다는 듯 작은 미소를 지었다.

    “형님. 다치십니다. 그 아래를 잡으셔야지요.”

    “가람아!”

    “예, 형님. 이리 다시 불러주시니 정말 좋습니다.”

    마주한 눈의 동공이 크고 초점이 자꾸만 어긋났다. 나는 그가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헤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가람이 잠시 멈칫하더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 아직 그 화살이 남아 있었지. 그래…. 그걸 부러뜨려야 하는데. 여봐라, 주몽을 불러오너라.”

    나는 서둘러 문밖을 향해 들어오지 말라며 소리를 질렀다. 가람이 이러는 이유는 묻지 않아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그날 내게 칼을 꽂은 것이 결국 네게 무덤이 되었기 때문이겠지.

    그건 아무렇지도 않게 견디고 살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너는 매 순간 죽음을 바라고 있었나. 내게 이렇게 속죄할 날만을 기다리며…….

    그러나 그 상황 속에서 가람의 잘못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는 그 자리의 가장 큰 희생양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 진실이었다.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뒤섞여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를 향해 모조리 토해냈다.

    “가람아, 그날 넌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정말이야. 넌 그저 신한테 조종당했을 뿐이잖아. 제발, 난 이렇게 돌아왔어. 응? 나한테 사과할 필요도, 그렇게 마음먹을 필요도 없어.”

    “아닙니다. 제가, 제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조금만 더 힘이 세고…….”

    “가람아!”

    “형님 곁에서 형님을 잘 보필했다면…. 심려를 끼쳐드리지 않고 평안히 지내실 수 있도록 신경을 썼더라면…….”

    가람이 횡설수설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그날을 후회하던 말들은 점차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나는 점점 묘해지는 내용을 듣다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날, 나와 신은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눴고 체념한 나는 기꺼이 몸을 던졌다.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가뜩이나 똑똑한 아이는 많은 것을 유추해 냈을 것이다.

    너는 어디까지 알아차렸나. 피와 푸른빛으로 뒤덮여 어지럽게 빛나던 그 방에서 주운 혼란의 조각은 그의 심장을 겨눴을 것이다. 그 조각은 나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절망일까, 아니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누군가 죗값을 치러야 한다면 그건 나일 거야.”

    “당치도 않습니다! 형님께선 아무 잘못 없으십니다. 모조리 제가……!”

    “알고 있잖아. 칼에 찔렸다고 해서 그러고자 했던 마음의 죄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너와 부여를 등진 값은 치러야겠지.”

    …그 죽음이 사실은 나의 의지였다는 진실이었을까.

    마주한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짧은 동요도 없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서글프게 웃었다. 내 예측이 맞았다는 것이 기쁘지 않았다. 제 손으로 형님을 죽였지만 사실은 그게 자살이었다니, 그걸 깨달았을 때 네 고통은 배가 되었겠지.

    “……그리하여 모두 제 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형님께서 그토록 먼… 길을 선택하셨던 연유는……. 이곳이 그만큼 끔, 찍해서였겠지요. 제가 지켜드리기로 약속드렸는데. 더 이상 상처받으실 일 없게 하겠다고, 형님께서 자객에게 칼을 맞으셨을 때, 마 대사자님 앞에서 검을 쥐면서…. 제가 그랬는데…….”

    돌처럼 굳은 내 손을 내려다보며 가람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자객이라는 말에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팔을 베이고 열이 절절 끓었던 열 살 남짓의 어느 날이었다. 겨우 깨어난 날 붙들고 울던 아이는 오늘부터 형님을 지키기 위해선 강해져야 한다며 조막만 한 손으로 주먹을 쥐었더랬다.

    그리고 정말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검을 쓰게 되었다. 신이 내린 주몽의 궁술에 가려 크게 회자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검집을 강하게 당겼다. 검은 힘이 빠진 가람의 손에서 손쉽게 빠져나왔다. 그것을 떨어뜨리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대로 어느새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큰 아이를 가득 끌어안았다.

    품 안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움츠러든 등과 어깨를 보듬어 가슴팍에 묻은 뒤 등을 차분히 토닥였다.

    “응, 알아. 그날부터 네가 한 노력을 알아. 네가 나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것도 알아. 그래서 그 뒤로도 이렇게, 내가 없는 동안에도 부여를 지켜줬잖아…….”

    “저, 저는, 흑, 제가 모두…….”

    “가람아. 그리움에 빠진 사람이 제일 많이 저지르는 실수가 뭔지 알아?”

    처음에는 원래 세계에 두고 온 동생이 눈에 밟혀 보살피기 시작한 아이였다. 하지만 말랑하고 조그맣던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의젓해지더니 말버릇처럼 날 지키겠다는 소리를 해대곤 했다. 그리고 정말 쑥쑥 자라서 날 지탱해주었다.

    나는 그게 항상 미안하고 고마웠다. 주몽을 챙기기에 바빠 가끔씩만 뒤를 돌아보았는데도 언제나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이, 내가 지켜줘야 하는데 도리어 날 지키고 있다는 것이.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으려 한다는 거야.”

    그 든든함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부여를 떠나지 못했을 터였다. 내 이기심을 채우고자 너에게 너무나도 많은 짐을 지우고 말았다.

    “넌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가람아. 그저… 우리가 너무 다정한 사람들이라 그래.”

    너와 주몽과 협보, 마리, 오이, 그리고 왕비님과 궁인들. 내 가족들과 ‘태자’와 ‘이제람’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기릴 사람들까지.

    받지 않아도 될 고통까지 끌어다 괴로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상대에게 다정을 쏟고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내 갈증을 해결할 한 잔의 다정도 남기지 않고 우물 밑바닥까지 퍼서 나르는 사람들이었다.

    “다정해서 고마워. 우리 이제 다정을 죄책감의 양분으로 삼지 말자. 스스로에게 쏟아붓고, 남은 걸 서로에게 나누어주자.”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 역시 그러기 위해 돌아온 만큼.

    품에 안겨 조용히 내 말을 듣던 가람이 작게 중얼거렸다.

    “……가십시오.”

    “뭐?”

    “부여는 제가 잘 다스릴 테니, 형님께선 다른 곳으로 가십시오.”

    물빛 진심이 눈물에 매달려 반짝이며 빛났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원래 부여에 남을 생각도, 그럴 수도 없었지만 가람이 먼저 저렇게 말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우리는 피로 엮이기 이전에 그 피가 부여한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분이었다. 현재 부여의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나 가람의 옷차림은 내가 알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있는 궁도 익숙한 태자궁이었고. 그렇다는 건 아직 가람이 태자나 왕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였다.

    내가 죽었는데도 태자 자리가 비어있다는 게 가람이 필사적으로 그 자리를 거부했다는 것이 아니면 뭘까. 그렇게 지켜왔던 자리이니 당연히 나에게 그대로 내밀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당장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그러나 심지가 굳은 미소였다.

    “이곳 말고 다시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으실 곳으로 떠나십시오. 그 자리가 형님을 다시 돌아오시게 만들었다면 저는… 저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가람은 그것이 그의 행복이라 말하고 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편안한 곳에서 다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행복하다면, 그것 또한 나를 지키는 것이므로.

    나를 찔러야 했던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느꼈기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이 나라를, 그것을 부탁한 나를 지키지만 종국엔 그 선택이 자신을 지키게 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종종 보러 올게. 보고 싶을 거야, 내 동생.”

    “…제가, 형님을…….”

    순간 가람의 눈이 낯선 빛으로 일렁거렸다. 어디선가 마주한 듯 익숙한 빛이면서도 처음 보는 낯이었다. 선득한 기운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뒤를 흐리던 그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느리게 다물었다.

    “…참으로 많이,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잊으시면 아니 됩니다.”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어째서인지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뜨거운 손이 내 등 위로 내려앉았다. 그의 팔은 언제 방황했냐는 듯 전에 없이 나를 꽉 끌어안았다. 숨이 막혔지만 나는 말없이 가늘게 떨리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가 삼켰을 뜻 모를 수많은 말들에 대한 위로였다.

    그리고 그 뒤로 삼 일도 채 지나지 않아 부여를 떠났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길 바라서였다. 용케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태자궁과 내 몸을 잘 보존해 놨다곤 하지만 세간에는 이미 태자가 죽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내가 죽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귀족들에게 내 생존을 알려 왕위를 잇고자 하는 가람의 앞길을 막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 사실이 알려졌을 경우 왕비님께 미칠 파장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첫째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왕비궁을 폐쇄하고 지낸 지 오래라고 했다. 여기서 그녀를 만나 사실은 내가 살아 있었으며 부여를 떠나고자 한다 전하면 충격을 받으실까 두려웠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고통은 시간이 지난다고 잊히는 것이 아닐 터였다. 나는 섣불리 들쑤시는 대신 가람이 편에 천천히 편지를 보내 상황을 알리기로 했다. 아마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시 원래의 태자로 지낼 수는 없으니 고심 끝에 결정한 일이었다.

    부디 괜찮으셔야 할 텐데. 나는 어젯밤에 다 써서 부친 편지를 떠올리며 줄곧 다른 방향으로 흐르던 생각을 돌렸다.

    “……아무튼, 더 이상 태자가 아니라는 거지. 이젠 평민이나 다름없는걸. 말도 놓아볼래?”

    “큰일 날 소리 마십시오! 누구 목이 달아날 일 있습니까!”

    내가 반말 좀 했다고 목을 칠 정도로 막돼먹은 윗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진심으로 치를 떠는 협보의 모습에 더 놀리지도 못했다. 아쉬운 대로 오이라도 놀릴까 했건만 그는 이미 새하얗게 질려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들던 장난기도 사라졌다.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종종 내가 시선을 줄 때면 저렇게 감정이 북받치는 모양이었다.

    다 내 죄다, 내 죄야. 나는 팔을 한 번 토닥여 주곤 궁인의 안내에 따라 몸을 일으켰다. 나야 이들과 편안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주변 궁인들은 바쁘기 그지없었다. 역사상 다시 없을 중요한 행사가 오늘 거행되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고 보니 슬슬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나?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느냐? 어서 나가지 않고. 건국식 시작이 코앞이더구나.”

    “유화 님!”

    반가운 외침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왔다. 부여를 떠난 뒤로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분이었다. 신의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어 하루라도 빨리 땅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하늘로 올라가신다고 하셨는데.

    내 의문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그녀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이 나라의 시작을 보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들렀단다.”

    “이리 오랜만에 뵙는데 좀 더 머물다 가시지 그러십니까.”

    반가움과 아쉬움이 뒤섞인 얼굴을 한 협보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네 얼굴을 봤으니 되었구나. 어서 가보지 않고 무얼 하느냐?”

    건국식이 코앞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궁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라의 큰 행사에 왕의 오른팔이라는 신하가 늦을 수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 법칙은 나라 최고 장군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미련이 남은 얼굴을 한 협보와 오이가 뒤를 돌아보며 방을 빠져나갔다. 특히 오이는 철옹성 같은 궐 안에서도 내 호위가 걱정되는지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하고 갔다.

    “저 아이는 여전하구나.”

    유화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전보다 한결 편안해진 표정의 그녀에게 의자를 권했다. 사양하지 않고 앉던 그녀가 순간 의아한 얼굴로 내 옆자리를 향해 턱짓을 했다.

    “고맙구나. 그나저나 어찌하여 저걸 아직도 가지고 있느냐?”

    “아… 티가 나나요?”

    “그런 기운이 버젓이 놓여 있는데 모를 수가 있겠느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방 안에 남아 있던 모든 사람들을 물렸다. 비로소 단둘만 남고서야 옆자리에 놔두었던 비단 주머니를 열었다.

    안에는 투명한 플라스틱 컵이 하나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어 가볍게 손 안에서 굴렸다. 흔들거림에 맞춰 살짝 옅어진 노란 색 연기가 휘적휘적 움직였다.

    이제는 한낱 영혼이 되어버린 신.

    창조주가 마음대로 하라며 주몽의 손에 넘겨준 그것은 부여로 돌아온 직후 내 손에 쥐어졌다. 나를 위해 받아왔으니 내가 처분을 결정하는 것이 옳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거다 싶은 방도는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나는 게 딱 하나 있긴 했는데 주몽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그 뒤로 고민만 하다 이곳까지 들고 왔다. 어디 두었다가 누가 볼까 봐 함부로 두고 다니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주몽은 그게 몹시도 불만스러운지 어젯밤에는 ‘영혼을 반으로 갈라 반은 지옥으로, 반은 미물로 세상에 돌리면 그 꼴도 꽤나 볼만할 것입니다.’ 하고 속삭이기까지 했다.

    정 마땅한 방법이 없다면 그리하겠지만 그전에 유화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때마침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행여 남이 들을까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이 영혼의 생명력을 이용해 제 가족들에게 빼앗긴 정기를 돌려줄 수 있나요?”

    “어려운 일은 아니구나.”

    조심스러운 물음과 달리 그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란 무한에 가까운 생명력을 지닌 영혼이지. 그 생명력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이 있느냐?”

    “지난 6년간, 이 몸이 썩지 않은 이유가 주몽이 매번 생명력을 부었기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지금 제 영혼이 맞지 않는 몸에서 살 수 있는 이유도요. 그 아이에게도 도로 생명력을 채워주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앞으로 제가 살아가려면 필요할 생명력도요. 해에게 피해를 입히며 살고 싶진 않아요.”

    “물론 전부 이뤄줄 수는 있단다. 하지만 그 아이가 반대하진 않더냐?”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날카로운 지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주몽에게 신의 생명력으로 엄마와 동생의 잃어버린 정기를 채워주겠다는 말을 건넸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그의 생명력을 채우겠다는 말에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지만 그리하여 내 마음이 풀린다면 자신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앞으로의 내 생명을 유지하겠다는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 자신의 생명력만으로도 내가 생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데 왜 ‘그딴’ 생명력을 사용하냐는 것이 주 골자였다.

    그럼 나는 지금 ‘그딴’ 걸 가족에게 주겠다는 거냐? 기분이 팍 상했지만 가장 속상한 것은 그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때때로 자신을 해쳐도 좋으니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것으로 채우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결국 그날 다툼은 그대로 끝났지만 나는 절대로 주몽의 생명력으로 살아갈 생각이 없었다. 우리 사이에 더 이상 부채감이 아닌 다른 것만이 남았으면 했다.

    나의 침묵만으로 유화는 모든 것을 눈치챘다. 그녀가 작게 웃었다.

    “만일 네가 주몽의 생명력을 받아 그 아이의 명줄이 줄어들까 우려하는 것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단다. 내가 신계에 올라가면 가장 먼저 ‘종이’를 없앨 것이니.”

    “제가 아는 신계의 ‘종이’라면, 그곳에는 모든 운명이 적혀 있다고 들었는데…….”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만물의 운명을 그곳에 적어 둔다 한들 무어 의미가 있겠느냐. 내가 운명 없이 지난 수십 년을 살아보니 그것도 꽤 나쁘지 않더구나. 이제는 주어지는 운명 없이 모두가 자신이 일군 대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수명 또한 마찬가지야. 지닌 육체에 한계가 있어 영원히 살지는 못하겠지만 정해진 목숨 없이 스스로 행한 만큼 살게 될 거란다.”

    정해진 운명 없이 모두가 자유 의지대로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그녀에게도 큰 부담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의지를 확고히 굳힌 듯했다. 거기엔 만일 그날 ‘종이’를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자유 의지를 잃고 송두리째 뒤바뀌었을 그녀의 삶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니 그 아이의 남은 생명력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단다. ‘종이’가 사라진 순간 정해진 생명력의 끝은 사라질 테니. 네가 평생을 끌어다 쓴다 한들 밑바닥이 없는 우물에 티가 나겠느냐?”

    무한대에서 10을 빼든 100을 빼든 여전히 무한대와 같은 이치였다. 주몽에게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는다면 나 역시 신의 생명력으로 남은 삶을 살아갈 것을 고집할 마음은 없었다.

    나는 그럼 가족과 주몽이 잃어버린 생명력만 채워 달라며 그녀에게 플라스틱 컵을 내밀었다. 투명한 표면을 곱지 않은 손길로 툭 친 유화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혹여 이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은 없느냐? 의식은 남아 있을 텐데.”

    나는 조용히 부유하는 영혼을 내려다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넘쳐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건지, 이럴 때 옳은 답은 무엇인지,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왜 하필 나였는지.

    “아니요. 이젠 없어요.”

    그러나 지금에서는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았다. 정말 나였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거나, 설사 아무나 집어 온 것이라고 해도 이젠 상관없었다.

    궁금하지도 않은 물음을 오직 미련을 없애기 위해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한 가지로 결론 내려진 미련은 끝까지 나를 따라와 다시 과거에 골몰하게 하리라.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나를 마지막까지 고통에 몸부림치게 만들려 했던 신이 바라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럼 드디어 이자에게 남은 것은 치러야 할 죗값뿐이구나.”

    “혹시 남은 영혼은 미물로 환생하게 만들어도 될까요? 직접 겪어봐야 조금이라도 반성의 기미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그럼 영혼을 반으로 갈라 한쪽은 지옥으로, 한쪽은 미물로 돌리자꾸나. 환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귀한 일이니 이래야 수지가 맞지.”

    누가 피 섞인 모자 관계가 아니랄까 봐 내놓는 해결책이 똑같았다. 이번에는 나 역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나만큼이나 신에게 원한이 깊었다. 그들이 같은 제안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처벌이 알맞다는 것이겠지. 가장 중요한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후는 아무렴 어떻게 되든 좋았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유화가 플라스틱 뚜껑에 감도는 푸른 빛을 거두었다. 저절로 열린 뚜껑 사이로 익숙한 연기가 빠져나왔다. 연기는 도망치려는 듯 희미하게 꿈틀거렸지만 그녀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더 빨랐다.

    “…….”

    나는 그 색이 하얗게 바래는 것을 빠짐없이 바라보았다. 드디어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신이 힘을 빼앗기고 한낱 영혼으로 전락해버렸을 때는 고통스러웠던 시절에 비해 모든 게 너무 쉽게 끝나버린 것 같아 슬픔과 분노도 일었더랬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신에게는 이게 가장 알맞은 결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으로 남을 찍어 누르던 자가 더 높은 권력자에 의해 패망한다니. 창조주와 같은 윗사람이 아니라 평소 깔보던 자가 그를 억눌렀다면 자신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옥과 미물을 함께 오가다 보면 그 생각도 좀 달라지겠지. 영혼이 마지막 한 줄기까지 모조리 사라지고 나자 유화가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손을 탁탁 털었다. 놓인 물을 들어 목까지 축인 그녀는 뒤로 편안히 기댔다.

    “그러고 보니 ‘종이’에는 지난 일들이 저절로 기록된다는 것을 아느냐?”

    통쾌하다는 얼굴에 어느새 장난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녀가 턱을 쓰다듬으며 은근한 말투를 냈다.

    “내 잠깐 읽어보았는데 아주 파란만장하게 애를 키워놨더구나. 내가 ‘종이’를 없애는 것만 아니었다면 끝까지 보고 새로운 책으로 엮어 내고 싶을 정도였어.”

    그 말에 주몽과 있었던 지난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릴 적 아이를 싫어하는 척 연기를 했던 흑역사는 예사였다. 건국 하나 시키겠다며 애와 그, 그 짓을 한 것도 지금 친모가 다 봤다는 것이 아닌가.

    걷잡을 수도 없이 얼굴이 훅 붉어졌다. 먼저 잠자리를 제안한 것은 주몽이라지만 여섯 살, 아니 최소 스무 살은 더 어린 애와 그 짓을 하겠다고 나선 나도 아이의 엄마 앞에선 떳떳하지 못했다.

    부끄러움과 착잡함, 자괴감과 같은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는 내 얼굴을 본 유화가 소리 높여 웃었다.

    “무얼 그리 부끄러워하느냐. 어차피 네가 다 키운 아이인 것을. 그 아이에겐 어미 노릇도 하지 않은 나보다 네가 더 친부 같을 것…. 아, 그게 더 이상한 일인가?”

    “유화 님!”

    “저하. 이만 가셔야 할 시간이옵니다.”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날 애타게 불러댔다. 나는 그 목소리가 구원자라도 되듯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낯익은 유모가 보였다.

    태자궁에서 날 모셨던 궁인 대부분이 나를 따라 이곳으로 건너왔다. 내가 부여를 떠날 때 자신도 데려가 달라며 읍소를 하는 것을 받아 주긴 했지만 정말로 올 줄이야.

    그들은 전부 내가 다시 살아났는데 고국을 배신하는 것이 무어 문제냐는 태도였다. 아무래도 그 땅에 악재가 끼어 내가 계속 시름시름 아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거기다가 나를 도로 살린 주몽이 세운 나라라고 하니 금상첨화였겠지. 내가 다시 쓰러지기라도 하면 주몽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숙덕거리는 것을 들었다.

    “어서 가보거라. 왕과 함께 입장하려면 준비해야 할 것이 꽤 있을 텐데.”

    “……그거 안 하기로 했습니다. 동반 입장.”

    “어찌하여? 듣자 하니 오랜 약속이었다던데.”

    “그렇게 입장하는 건 왕후나 하는 거라면서요! 겨우 말려서 식의 시작을 알리는 술을 따라주는 것으로 합의했어요.”

    “이제 와서 그 구별을 두기엔 이미 네가 머무르는 처소부터 잘못된 것 같구나.”

    이건 무슨 소리지? 분명 귀빈들이 머무는 궁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마주한 유화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그동안 정말 고생했다. 이젠 모두 끝났으니 평안히 지내거라.”

    “……예. 유화 님도요.”

    마지막 인사에는 항상 목이 멘다. 다시 만날 줄도 알고 서로가 행복하게 지낼 것을 아는데도 그랬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청량한 물 내음이 나는 다정한 미소였다. 이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개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를 알았다.

    둥둥둥- 거대한 북소리가 지천을 울렸다. 안이 옅게 비치는 천으로 얼굴을 가린 나는 단 위에 서서 기나긴 길을 걸어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미모는 햇살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붉은 원단에 목과 소매에 황금색 천을 덧대고 황금 실로 화려하게 수를 놓은 의복은 그의 미색을 더욱 밝힐 뿐 결코 억누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저 외모를 퇴색시킬 수 있는 물건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설령 저 왕관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의 머리 위에 얹힌 황금색 관을 보다 다시 주몽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어느새 그는 내 앞에 서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 함께 입장하는 것으로 다툼을 벌였기에 그의 눈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치장을 하지 않아도 항상 붉은 그의 입술은 나를 본 순간부터 시종일관 올라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으니.

    나는 식순에 맞춰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경건하게 내 손을 받든 주몽이 손등에 조심히 입을 맞췄다.

    뭔가 이상했지만 이게 예법이라고 하니까…….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하늘의 기운을 담은 성스러운 술잔을 내려 새로운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분은 마치 하늘과 같아 손등에 입을 맞춰 예를 기린다고 했다.

    이상한 예식이었지만 주몽이 하니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누구의 강요 하에 수십 번의 예행 연습을 했지만 그때마다 얼굴에 홀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나는 저 멀리까지 늘어선 대신들이 모두 기가 차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예식을 끝낸 그가 황금으로 만들어진 술잔을 공손히 들어 올렸다. 나는 신중하게 술잔을 채웠다. 술은 예행 연습 때보다 딱 두 배 올라온 높이에서 찰랑거렸다.

    나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곧바로 주몽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나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뗀 적이 없다는 것처럼.

    “해야.”

    처음에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애지중지 길렀던 아이였다. 갈망에서 탄생한 애정은 결국 내게로 돌아와 깊숙한 결핍을 채웠다.

    명계로 회수되지 못한 내 영혼은 종종 호수가 부를 테지만 이제 그 물결이 띄우는 허상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제 내 결핍을 충족해 주는 것은 호수 밑바닥이 아닌 옆자리에서 찾을 수 있을 테니.

    나는 평생토록 내 옆자리를 지킬 이를 향해 다정히 웃어 보였다.

    “약조를 기억해?”

    그 순간 하얀 새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모두가 하늘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나는 주몽의 술잔을 들어 훌쩍 마셔버렸다.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되돌려 준 잔에는 술이 절반만 남아 있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말이 없어도 충분했다.

    곧 눈을 접으며 환하게 웃은 주몽이 술잔을 기울이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가린 천이 걷히고 익숙한 향이 그 속을 채웠다. 맞닿은 입술이 짧게 움직이며 작은 바람을 불어넣었다. 나는 마주 웃으며 그의 양 뺨을 감쌌다.

    이제 나를 그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은 오직 너만이 남았다.

    그 사실이,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게 만들었다.

    ***

    ……대왕께선 그를 길러주신 형님을 매우 아끼시어 열 걸음도 떼놓고 가는 법이 없으셨다. 매일 밤 그의 형님을 찾아뵙고 조언을 구하시매 아침이 밝아오도록 나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대왕의 형님께선 다정하시어 하늘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으셨다. 부여의 왕이 군사를 이끌고 오는 날엔 손수 출정을 하시어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모두 물리치곤 하였다. 그에 만백성의 칭송을 들으니 대왕께는 어진 비가 따로 필요치 않았다.

    ……이러하듯 그분만이 대왕을 ‘해’라 부르시니 나라에 어둠이 내려앉을 길이 없으리라.

    하여, 감히 해의 연정을 담은 기록이라 여겨 ‘해연정기’라 이름 붙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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