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19화 (23/27)
  • 해연정기 5권 (완결)

    목차

    19. (2)

    20.

    21.

    외전 1.

    외전 2.

    19. (2)

    “왔어?”

    인사 대신 건넨 말에 우원이 손을 대강 흔들었다. 확실히 주변 눈치를 보며 걷는 그의 상의에는 커다랗게 커피 얼룩이 남아 있었다. 나는 더 말을 붙이는 대신 옷이 담긴 쇼핑백을 내밀었다. 단숨에 안에서 하늘색 맨투맨을 꺼낸 그가 활짝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맙다. 이따 밥 같이 먹을 거지?”

    “응. 12시 반에 만나.”

    금요일이면 강의 시간이 겹치는 그와 함께 점심을 먹곤 했다. 나는 김우원과 헤어져 인문관으로 향했다.

    내가 듣는 2학점짜리 ‘자기 이해와 성찰’은 1학년 필수 교양이었다. 정말 졸업을 위해 듣는, 분반 당 수강 인원이 약 100명인 초대형 강의이기도 했다. 보통 그에 알맞게 수업 분위기도 잔잔하다 못해 침체되어 있었고.

    하지만 오늘은 뭔가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조금 들뜬 것 같기도 하고, 수군거리는 것 같기도 한데.

    중간고사가 끝난 뒤 첫 수업이라 그런가? 대부분이 신입생일 테니 그럴 수도 있었다. 비록 나는 수강 신청을 놓치고 놓쳐 3학년인 지금에서야 듣고 있지만…….

    작은 의문은 잠시 고개를 든 자괴감만큼이나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나는 강의가 끝나자마자 앞문으로 빠져나왔다. 그사이 김우원으로부터 학식을 먹자는 연락이 와 있었다.

    군말 없이 학관 식당으로 가자 ‘오늘의 식단’ 샘플 앞에 익숙한 등이 보였다. 나는 다가가 그 등을 툭 쳤다.

    “뭐 해?”

    “숯불 치킨을 먹을까, 돈가스를 먹을까.”

    세상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김우원은 내가 대답을 내놓기도 전에 홀로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를 빼 들었다.

    “그래, 역시 치킨이지. 넌 한식 먹을 거지?”

    “…….”

    나는 습관처럼 한식 코너로 고개를 돌렸다가 잠시 침묵했다. 예상치 못한 음식이 맛깔나게 전시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멈칫하고 넘어갔겠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옛기억이 발목을 붙잡았다. 간밤에 그런 꿈을 꿨기 때문일까. 나는 간신히 외면하며 대답했다.

    “아니. 난 돈가스 먹을래.”

    매번 한식만 고집하던 내가 양식을 고른 게 의외였는지 우원이 덩달아 한식 코너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웬일……. 아, 그래. 너 불고기 안 먹었지.”

    신입생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이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기호쯤은 꿰뚫고 있었다. 금방 납득한 그가 키오스크에 카드를 밀어 넣었다.

    “너도 진짜 웃긴 놈이라니까. 그럼 돈가스로 결제한다?”

    이럴 때마다 한마디씩 사족을 덧붙이긴 했지만.

    사실 이건 내 업보이기도 해서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옷을 빌려준 값이라며 말릴 새도 없이 내 것까지 식권을 구매했다. 우리는 각자 코너에서 음식을 받고 앉을 곳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서 식사를 마친 무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4인용 테이블에 식판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맞은편에서 같은 식판을 든 두 사람이 살갑게 말을 붙였다.

    “우원 선배! 안녕하세요!”

    “혹시 저희도 여기 앉아도 될까요?”

    김우원과 아는 사이였는지 마주 인사를 하는 모습이 퍽 자연스러웠다. 반면 나와는 모두 초면이었다. 김우원이 내게 우리 과 후배라며 하나 낮은 학번을 속삭였다. 학과 모임에 잘 참석하지 않는 나와 달리 그는 학생회까지 하며 두루두루 아는 사람이 많았으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후배들은 먼저 다가온 만큼 친화력이 좋았다. 마주 앉기가 무섭게 그들은 각각 유승하와 이슬기라며 이름을 밝혔다. 나는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을 마주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저는…….”

    “알고 있어요! 아마 선배님 이름 모르는 애들은 없을걸요?”

    “완전 유명하시잖아요!”

    “내가?”

    승하와 슬기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의심스럽게 우원을 쳐다보았다. 내 대학 인생에서 유명했던 적이라곤 새내기 시절 MT 한 번 갔다가 술버릇이 소문났을 때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 그 소문의 주범이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김우원은 실실 웃으며 왜 자기를 쳐다보냐고 말할 뿐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았다. 계속 캐묻는 것도 우스워 나는 그쯤에서 포기했다.

    열성적인 후배들과의 식사는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대화가 이어진다는 점에서 편했다. 입에 맞지 않는 돈가스를 깨작이는데 휴대폰을 빠르게 스크롤하던 승하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지금 여기라는데?”

    “뭐가?”

    “아까 애니타임에 올라온 건데, 이거요.”

    ‘애니타임’은 유명한 학내 커뮤니티였다. 그녀가 휴대폰을 조작하더니 화면을 하나 띄워 내밀었다. 휴대폰을 받아 든 김우원이 나도 보라며 중간에 화면을 놓았다.

    [ㅁㅊ 자이성 듣는데 존잘인 사람 봄]

    나 출튀하려고 맨 뒤에 앉앗는데 각재던 중에 들어옴 존나 잘생겼다 ㄹㅇ 나 이렇게 생긴 사람 첨봣어 존나 고풍스럽고 뭐라 하지? 기품이 흐른다고 해야하나;;; 걍 진짜 어디 조선시대 양반집 자제처럼 생겻어

    중간 저번주에 끝낫는데 왜 이런 존잘이 우리 분반인걸 몰랐지???? 자이성 재수강인데 보람차다 복지가 아주 뛰어나네ㅎㅎㅎㅎ

    근데 필기고 뭐고 하나도 안하고 중간 자리만 쳐다보던데 내 착각인지 거기에 그 분 있더라ㅋㅋㅋㅋㅋㅋㅋ 솔직히 첨엔 웃지도 않고 무표정으로 들어오길래 ㅈㄴ잘생기긴 했는데 쫌 무섭다;;; 이랫거든? 근데 그냥 나한테만 그런 거였어……

    그쪽 보자마자 쌕 웃는데 분위기 ㄹㅇ 싹 바뀌더라…… 걍 미쳣음…… 저기요 여기서 혼자 멜로 찍으시면 안되거든요……

    근데 둘이 진짜 아는 사인가? 거의 전여친 보는 눈이던데ㅋㅋㅋㅋㅋㅋㅋㅋ 아는 사이면 좋겠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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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

    - 몇 분반???

    ┗ (글쓴이) 13분반

    ┗ 나 왜 12분반ㅠㅠㅠㅠㅠㅠㅠ

    - 아 나도 봄 와꾸 돌앗;;;

    - 그 분은 누군데???

    ┗ (글쓴이) 있어ㅎㅎㅎㅎ 13분반 출첵 담당

    ┗ ㅈㄴㄱㄷ 아ㅋㅋㅋㅋㅋ 나 13분반인데 알 듯 자연대 아냐?

    ┗ ㅅㅂ 나랑 개똑같아ㅋㅋㅋ 강의 들으러 (X) 그 분 보러 (O)

    ┗ 아 뭔데 왜 너네만 아는데

    - 나 지금 본 듯 세미 정장 맞아??

    ┗ (글쓴이) ㅇㅇㅇㅇ맞음

    ┗ ㅅㅂ 진짜 존잘이넼ㅋㅋㄱㄱㄱㄱㅋ 개안했다

    ┗ 어디야??

    ┗ 학관 식당ㅋㅋ

    - ㅋㅋㅋㅋㅋㅋ마지막 뭔뎈ㅋㄱㅋㅋㅋㅋ 근데 사실 나도 봄 걍 둘이 찐이던데?

    ┗ (글쓴이) ㄱㄴㄲ 자이성 들을 필요 없다 나 자신을 한번에 이해해버렷음

    ┗ ㅇㅈ 교수님 여기가 제 자아의 끝입니다(할짝

    ┗ ㅁㅊ 왜 핥앜ㅋㅌㅌㅌㅌㅋㅋㅋ

    “자이성?”

    나도 모르게 게시글에 쓰인 강의 이름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자이성’은 내가 방금 듣고 온 ‘자기 이해와 성찰’ 수업의 줄임말이었다. 그 놀람을 빠르게 알아차린 우원이 나를 툭 치며 물었다.

    “아, 맞다. 너 지금 자이성 듣지. 몇 분반이냐?”

    “13분반이긴 한데…….”

    “대박. 보셨어요? 어때요?”

    그 말에 승하와 슬기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한껏 높아진 목소리가 설렘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나는 조금은 당황한 채로 순순히 대답했다.

    “아니. 전 못 봤어요. 중간에 앉았다가 앞문으로 나와서…….”

    “에이, 아쉽다.”

    “뭐가 아쉬워?”

    치킨 살을 바르던 우원이 불쑥 끼어들었다. 승하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태연하게 대꾸했다.

    “잘생긴 남자는 산삼보다 귀하단 말이에요.”

    그 말에 우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괜히 물었지, 괜한 걸 물었어. 한숨을 쉬며 대꾸하는 모습이 장난스러웠다. 거기에 슬기까지 합세해 우원 선배도 노력을 한다면 인삼 정도로는 쳐 줄 수 있다며 맞장단을 쳤다.

    나도 살짝 웃음을 터뜨리며 휴대폰을 돌려주기 위해 팔을 뻗었을 때였다.

    “이제람.”

    나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우원이 내게 어깨동무를 하다 말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산삼 씨……. 왜 그래?”

    “……지금 누가 나 부르지 않았어?”

    “아무도 안 불렀는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는 세 명 외에는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휴대폰을 마저 내밀었다. 그런데 휴대폰을 건네받던 승하가 돌연 낯빛을 환하게 밝히더니 옆에 앉은 슬기의 옆구리를 마구 찔러댔다.

    “야, 저기 있다, 저기.”

    속삭이는 목소리가 잔뜩 들떠 있었다. 나도 얼떨결에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배식대 앞이었지만 한눈에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홀로 우뚝 솟아 있는 남자는 그 자체로 이질적이었다. 고개를 조금 더 든 순간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처음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듯 시선은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 아이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눈이, 얼굴이 모두 내가 매일같이 그리던 사람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붙잡고 확인을 해야 했다.

    나는 다급하게 사람들을 헤치고 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농구부 무리가 눈앞을 지나갔다. 그들을 간신히 밀치고 다가간 자리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학생들만 남아 있었다.

    “야, 왜 그래. 아는 사람이었어?”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사이 빈 식판을 들고 온 김우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팔을 툭 쳤다. 나는 여전히 눈으로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멍하게 대답했다.

    “어? 아니…. 아는 사람, 을 본 것 같은데…….”

    “연락해 봐.”

    별것 아닌 당연한 말 한마디가 심장을 푹 찔렀다. 연락이 닿을 수만 있다면 보냈을 수많은 말들이 가슴 속에 그대로 쌓였다면 내 심장은 진작에 돌로 가득 차 죽었을 것이다.

    나는 간신히 웃으며 됐다고 말했다. 아마 잘못 본 거겠지.

    생각해 보면 그동안 내가 착각했던 일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한창 힘들었을 때는 뒷모습만 비슷해도 붙잡았다가 사과하는 일의 연속이었더랬다. 이번에도 살짝 돌아버린 감각이 실수를 일으킨 게 분명했다.

    그러나 얼마 먹지도 못한 돈가스를 모두 버리고 공강 시간을 때우기 위해 라운지에 앉은 뒤에도 멍한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펜을 쥔 채로 딴생각에 잠겼다.

    “야, 일어나. 커피라도 마시고 오자.”

    보다 못한 우원이 나가자며 나를 일으켰다. 거절하려 했지만 그가 가리킨 에이포 용지는 어지러운 펜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종이를 구겼다. 이건 못 쓰겠네. 과제로 내야 할 문제 풀이보다 화이트 칠을 해야 할 부분이 더 많았다.

    “그래, 나가자.”

    확실히 환기가 필요한 때였다. 나는 이미 절전 모드로 바뀐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원이 잘 생각했다며 지하에 위치한 교내 카페로 이끌었다. 무료한 얼굴의 카페 알바생이 나를 보고 몸을 벌떡 세우더니 서비스용 미소를 환하게 띠며 주문을 받았다.

    “쌍화, 아니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주세요.”

    원래 커피는 잘 먹지 않았지만 오늘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질색하던 우원이 중간에 바뀐 주문에 과장된 행동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 입 얻어먹어 본 게 다면서 내가 시킬 때마다 저런 표정이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그러나 나는 무의미한 토론을 시작하는 대신 아까부터 미루던 연락을 확인했다.

    [엄마] 아들. 이번주도 집 안올거야?

    “너 진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나] 교수님이 시험을 주말에 본다고 하셔서

    [나] 다음에 갈게요 죄송해요

    “일은 무슨 일.”

    나는 답장을 보낸 뒤 태연하게 대답했다. 김우원이 커피 두 잔을 든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한 잔을 내게 건네며 장난스레 투덜거렸다.

    “없으면 말고. 저번처럼 갑자기 사라질까 봐 걱정돼서 그러지. 중도 휴학이라길래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나는 말없이 쓰게 웃으며 음료를 빨아들였다. 그가 말한 날이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했다. 3년 전 이맘때였다. 동시에 내가 부여를 떠나온 지 꼬박 3년이 되던 날.

    신은 말했었다. 영혼이 한 번 이동을 하면 회복하기 위해 최소 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3년 전, 그날이 다가왔을 때 나는 갑작스럽게 부여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감각이 아니었다. 언제나 배 속에 찰랑찰랑 고여 있던 그리움과도 달랐다.

    갑자기 세상 모든 것이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지독하게 외롭다가도 사람을 만나면 시선 하나하나에 숨이 턱 막혔다. 모든 게 날 재단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하루하루를 미친 사람처럼 보내야만 했다. 마치 뭔가가 터져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부여로 돌아가야 했다. 거기서만 비로소 내가 숨을 쉴 수 있었다.

    왜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었지만, 나는 이 뼛속까지 시린 감정에 매 순간 숨을 헐떡여야 했다. 급기야 2주 전에는 모든 강의를 자체 휴강하기 시작했다. 뒷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집에 틀어박혀 있다 시험 날에만 텅 빈 머리로 대충 휘갈기고 나오곤 했다.

    결국 3년째 되는 당일에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앉아 ‘띠링-’ 하고 울릴 그 소리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신은 오지 않았다.

    첫날은 괜찮았다. 그래, 잊었을 수도 있지. 어쩌면 날짜 감각이 이곳과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었다. 뜬 눈으로 셋째 날까지 밤을 새우고 난 뒤에는 맨정신으로는 안 되나 싶었다.

    그래서 여행을 간다 거짓말을 한 뒤 수면제를 먹고 사흘간 잠에 빠져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이곳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날 집에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같이 있던 택시 기사님은 즉사했을 정도로 큰 삼중 추돌 사고였다. 사고가 난 순간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내 생명을 대가로 내놓으라는 신의 부름이구나.’

    지금 생각하면 미친 발상이었지만 당시에는 간절했다. 주몽의 생명을 깎아 먹을 수는 없으니 내 생명이라도 내주고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살아남았다. 다시 눈을 뜨니 하얀 천장이 눈앞에 있었다. 악을 쓰고 모든 치료를 거부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미 그간 꾸준히 이어졌던 치료에 지친 그들은 또다시 일어난 이 사태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엄마는 팔다리와 갈비뼈가 부러져 숨만 헐떡이는 내 손을 붙잡고 애원했다.

    ‘엄마는 다른 거 다 안 바라. 공부 못해도 좋고, 정 힘들면 지금 다니는 대학 그만둬도 뭐라고 안 해.’

    ‘…….’

    ‘그냥 네가 건강히,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만 자라면 더 바랄 것이 없어. 네 아빠 같은 사람만 되지 마, 응? 엄만 그거면 됐어.’

    그날 밤, 또다시 부여가 멸망하는 꿈을 꾸었다. 대학에 입학한 뒤로 처음이었다. 그 꿈에서 깬 나는 그리움과는 달랐던, 그 답답하고 돌아가고만 싶었던 감정의 정체를 확신했다.

    그건 바로 죄책감이었다.

    그것은 부여로 갈 수 있는 틈이 보이자마자 억척스럽게 다시 나에게 달라붙었다. 억지로 잊고 살았던 세월의 무게만큼 곱절이 되어 책임을 지라며 날 종용하고 있었다.

    또다시 약을 먹으며 외면할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병원에 누워 아주,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다.

    다 나았을 때는 그 길로 집을 나와 자취방을 구했다. 이제껏 통학을 하며 한 번으로라도 더 얼굴을 보려 했던 가족이었지만 이젠 그래선 안 됐다. 지난 뼈아픈 경험으로 이별에도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서서히 멀어지다 신이 찾아온 날, 해외여행이든 인턴이든 떠나게 되었다며 연락을 남기고 갈 생각이었다.

    머리로는 당연히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이 영혼이 한 번 이동을 하면 회복하기 위해 최소 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것이 그가 오겠다는 말은 되지 않았다. 헛된 희망에 매달려 시간을 버리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숨통에 물이 찬 것 같은 사람은 나였다.

    다행히 엄마는 내 독립 선언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오히려 눈에서 멀어지니 말로만 상태가 괜찮다고 전해 듣게 되어 점차 안도하는 것도 같았다.

    모든 게 천천히, 그리고 담담하게 흘러갔다.

    3년이 더 흐르자 이제 그냥 신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는 미련을 놓지 못했다. 익숙한 일이었다.

    나는 쓰디쓴 커피를 내려다보다 그대로 엄마에게서 온 답장을 확인하지 않은 채 화면을 껐다.

    “진짜 별일 없어. 그보다 너 열통 과제…….”

    말을 돌리며 김우원을 툭 치려 할 때였다. 누군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키가 큰 김우원보다 반 뼘은 위에 있는 눈이 정확히 나를 마주했다.

    나는 순간 커피를 놓칠 뻔했다. 그 사람이었다. 식당에서 보고 그대로 놓쳐버린……. 가까이서 보니 정말 주몽과 닮아 있었다. 그때도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던 부름이 무심코 입 밖으로 나오려 했다.

    그러나 그가 먼저였다.

    “김우원.”

    “응?”

    김우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그와 아는 사이였나? 나는 놀라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남자가 친근하게 우원의 손을 맞잡았다. 나를 등져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던 김우원은 잠시 뒤에야 탄성을 터뜨렸다.

    “어, 어어! 그래! 형! 안녀, 안녕하세요!”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넋이 나간 듯한 행위였지만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정도는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럴 리 없다는 생각과 당연한 일이라는 반응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승리한 것은 미약한 희망이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김우원에게 물었다.

    “우원아, 누구셔?”

    “아, 나 아는 형. 너 알지, 내가 저번에 알바하는데 우리 학교 사람 한 명 들어왔다고 했잖아. 어, 그… 형이야. 그 형.”

    망설임 없이 돌아온 대답에 맥이 탁 풀렸다. 언젠가 들은 것도 같았다. 새 알바가 들어왔는데 우연찮게 같은 학교 사람이라고 했었나.

    그래, 그 아이일 리가 없는데. 그래도 정말 신원이 확실해지니 드는 탈력감은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은 처음이라 그런가. 나는 다시 눈을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털고 있었다.

    손도 비슷한데…….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아. 나는 다급하게 내 소개를 이었다.

    “아, 저는 우원이 친구예요. 이름은….”

    “이제람.”

    그가 고저 없이 툭 내 이름을 내뱉었다. 나는 민망하게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네. 아시네요. 우원이한테 전해 들으셨나 봐요.”

    그가 무성의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맞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구별이 가지 않았으나 불쾌하진 않았다. 얼굴 때문인가……. 만지작거리는 컵에서 얼음이 요란하게 달그락거렸다.

    그가 내 손으로 고개를 내렸다. 얼굴에 그늘이 지며 마른 뺨이 유독 눈에 밟혔다.

    “혹시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충동적으로 지갑을 꺼내 든 것은 그저 얄팍한 자기만족 때문이었다.

    “…….”

    그가 고개를 모로 꺾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워하나? 나는 김우원을 끌어 어깨동무를 하며 급하게 덧붙였다.

    “우리 우원이 잘 부탁한다는 의미에서 사는 거예요. 애가 워낙 덜렁거려서.”

    “야, 뭔 소리야. 나 완전 일 잘하거드은?”

    우원은 싫은 듯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날 말리지는 않았다. 원래 남의 행동에 크게 의문을 갖는 놈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편하기도 했고. 나는 오히려 내 손목을 붙잡고 팔을 빼지 못하게 하는 우원을 장난스럽게 밀치다 힐끗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주몽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보니 정말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머리도 다르고 옷차림도 잡지에서나 본 것 같은 깔끔한 재킷에 슬랙스였다. 게다가 우원이 형, 형 하고 부르는 걸 보니 나보다 나이도 많았다.

    “뭐 드실래요? 따로 좋아하시는 거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 무표정한 낯. 내가 아는 해라면 분명 나를 마주하자마자 환하게 웃었을 거다. 저렇게…….

    “……그럼 드시고 계신 걸로.”

    …내 손을 노려보는 게 아니라.

    그에 마지막까지 놓지 못하던 의심이 천천히 가셨다. 다만 나는 목소리마저 똑같다는 점에 후한 가산점을 주어 비싼 빵 세트도 쥐여주었다. 처음 만난 사이에 과한 친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더 이상 마르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고도 눈길을 떼지 못하는 날 김우원이 툭툭 쳤다.

    “야, 우리 열통 가야 해.”

    어느새 수업 갈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또… 봬요.”

    아니라는 걸 알아도 왜 이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나는 쓸데없는 생각이 계속 떠오를세라 답인사도 듣지 않고 서둘러 등을 돌려 나왔다.

    물론 그 노력은 하등 쓸모없었다. 소란스러움에 정신을 차리자 열 및 통계 물리학 수업은 이미 끝나 있었다. 부산하게 가방을 챙기던 김우원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야, 바로 갈 거지?”

    “어? 어딜 가.”

    “이 새끼 또 까먹었네. 오늘 끝나고 애들이랑 술 먹기로 했잖아. 중간 끝난 기념으로.”

    “아…….”

    그제야 기억이 났다. 지난주부터 김우원이 벼르고 벼르던 약속이었다. 벼락치기를 하느라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염불을 외듯 중얼거리는 게 어찌나 무서웠는지.

    원래라면 시험이 끝난 당일인 어제 마셨어야 했지만 전공 시험답게 밤 9시에 끝난 게 문제였다. 이제 밤새워 놀기엔 제법 늙은 동기들은 모두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고 미루기로 한 날이 다음 날인 오늘이었다.

    하지만 꼭 가야 할까? 간밤에 꾼 꿈도 그렇고 주몽과 닮은 사람을 본 것도 그렇고, 오늘 술 마시면 정말 사달이 날 것 같은데. 나는 슬며시 김우원의 눈치를 보았다.

    “아아아아! 내일 주말인데 가자아아! 어차피 시험 끝나서 뭐 없잖아!”

    그러나 그 낌새를 귀신같이 알아챈 그가 목소리를 높여 앙탈을 부렸다. 그 목소리에 같이 가기로 이야기가 돼 있던 동기들이 우르르 달려와 함께 나를 몰아붙였다.

    그 소란 끝에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척해도 김우원이 지금 기분 전환 겸 일부러 더 가자고 하는 걸 모르지 않아서였다.

    그래, 오늘 심란한데 차라리 먹고 죽자.

    확실히 주변이 북적북적하니 상념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펼치지도 않은 노트북을 호기롭게 가방 속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동기들의 환호 속에 술집으로 이동했다.

    ***

    “그래서 내가 양자 시험을 조졌다는 게 아니냐! 7단원만 빼고 공부했는데 거기서 2문제가 나오는 게 말이 되냐?”

    문제가 5개인 걸 감안했을 때 좀 심하긴 했다. 그래도 필요한 부분만 짚어서 내셨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나는 굳이 지적하는 대신 동기의 빈 술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 어차피 조금만 있으면 대화 주제가 바뀔 테니까.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최근에 시작한 드라마로 이야기가 옮겨갔다. 내 예측이 맞았다는 생각에 갑자기 기분이 쑥 올라갔다.

    “흐…….”

    나는 다시 소주병을 잡았다. 내 잔에도 찰랑찰랑. 함빡 웃으며 잔을 들어 올리자 마주 앉은 동기가 실실 웃으며 짠을 해주었다. 벌컥벌컥 들이켜자 이번엔 그가 잔을 채워줬다.

    나는 대화에도 끼지 않고 끝 간 데 없이 술을 들이켰다. 익숙한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한 잔씩 마셔주니 아주 꿀떡꿀떡 넘어갔다. 오늘따라 술이 아주 단데. 입맛을 다시며 내려놓은 맥주잔에 다시 소주가 채워졌다.

    소주병으로 볼링핀을 세우고 나왔을 때는 이미 한 바퀴 술기운이 얼큰하게 돈 뒤였다.

    “2차 가자, 2차!”

    “노래방 콜?”

    콜! 주변에서 잔뜩 취한 웃음소리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나는 비틀거리며 누군지도 모를 친구의 가방을 붙잡고 매달렸다.

    “나 노래방 싫은데…….”

    잔뜩 늘어진 목소리로 웅얼거리자 누군가 강아지 달래듯 ‘우쭈쭈’ 소리를 내며 내 머리를 마구 비볐다. 나는 그 손을 쳐내며 인상을 찡그렸다.

    “어허! 이런 무엄, 무엄한…….”

    “아, 이 형 취했나 봐! 존나 웃겨!”

    가방의 주인이 날 가리키며 와그르르 웃었다. 술자리에서 많이 봤던 아이들은 하나같이 익숙하다는 표정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일부러 내 뺨을 만지는 놈들도 있었다. 나이도 어린 놈들이 싹퉁 바가지가 아주 예술이었다.

    모조리 꿇어앉아서 예절 교육 좀 받아야지. 아무리 호통을 쳐도 들어 처먹지 않는 놈들에 저절로 울상이 지어졌다. 그중 한 명이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내려간 눈꼬리를 만졌다.

    “제람 형 술만 먹으면 왜 이렇게 귀엽냐. 입맛도 할배 같아 가지곤, 맨날 쌍화차만 먹으면서!”

    “나 할배 아니야아…….”

    “그럼 몇 살인데?”

    “나… 나 마흔네 살.”

    지금 스물네 살이고 부여에서 스무 해를 보냈으니 이게 맞았다. 홀로 고개를 끄덕이자 애들이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너네 안 믿지. 눈을 부릅뜨니 그제야 믿는다며 손사래를 치는데 영 미심쩍었다.

    많이 봐줘서 부여에서의 20살은 홀랑 날아가 버렸다고 쳐도 내가 너네보다 나이가 많은데. 유급을 한 덕분에 학교를 1년 늦게 들어왔으니 동기들이라 해도 대부분 나보다 한 살 적었다.

    왜 내 인생은 항상 어린놈들이 기어오르는 거지. 그중 한 명은 기어오르다 못해 잡아먹을 생각까지 하고……. 이 정도면 사주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아, 근데 춥다. 술에 취한 탓에 생각이 이리저리로 튀었다. 온기를 찾아 내게 기댄 놈의 어깨에 똑같이 손을 올리며 기댄 순간이었다. 시끄러운 술집 거리 사이 어딘가에서 빠득 이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기다란 그림자가 옆에서 쑥 드리워지더니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팔이 순식간에 지지대를 잃었다.

    “어어……?”

    나는 비틀거리며 날 잡아당긴 사람의 품에 쓰러졌다. 더듬더듬 든 시선 끝에 딱딱하게 굳은 턱이 걸렸다.

    주몽……?

    아니지. 나는 술을 깨기 위해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래, 우원의 아는 형이라던 그 남자였다.

    내가 그리던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 그러나 속도 없는지 내 심장은 비슷한 얼굴만 봐도 반갑다며 마구 뛰었다. 그게 못내 민망하고 슬퍼, 오히려 나는 밝게 웃으며 그에게 매달렸다.

    “어! 우원이 아는 형! 저희 또 만나네요!”

    “…….”

    날 감싸 안은 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나는 굴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똑같은 무표정한 낯임에도 어쩐지 당황한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동기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윤다빈이었다.

    “헐, 대애박. 우원 오빠 아는 사람이라고?”

    “으응, 같이 알바하는 형인데…….”

    “…괜찮다면 이분 좀 모셔가고 싶은데.”

    남자가 우원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목 뒤에 팔을 감았다. 술기운이 오른 탓인가 그 품이 묘하게 익숙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윤다빈이 가뜩이나 큰 눈을 더욱 키우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모습을 보자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퍼뜩 깨달았다.

    아… 곤란했겠다. 오늘 처음 보는 놈이 갑자기 안겨 들었으니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그러고 보니 목과 어깨 근육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나는 서둘러 맞닿은 몸을 떼고 아닌 척 김우원을 붙잡았다.

    “야……. 그냥 나랑 술집으로 2차 가자. 나 더 먹고 싶어.”

    김우원이 당황한 얼굴로 나와 그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꿋꿋하게 남자를 등졌다. 그가 나를 왜 데려가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함께 자리를 떴다가 내가 술기운에 벌일 일이 두려웠다.

    정말 주몽으로 착각하고 울면서 꼬장이라도 부렸다간…….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흑역사는 이미 충분했다.

    그러나 비운의 경기도 통학생은 잠시 머뭇거렸다.

    “나 지금 안 가면 막차 끊기는데?”

    “나랑 밤새워서 술 마시면 되지! 아니면 내가 자취방에서 재워 줄게!”

    나는 허리를 쫙 펴고 호기롭게 외쳤다. 그 말에 안 되는 척 빼던 김우원이 헤실거리며 안면 근육을 무너뜨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워낙 놀기 좋아하는 성격의 김우원은 취했을 때 몇 번 더 찔러보면 매번 넘어왔다.

    거기다 신이 나서 왁왁대던 다른 동기 두 명이 같이 마시자며 끼어들자 일은 더욱 쉬워졌다. 이 정도면 됐겠지. 충분한 인원을 모은 나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돌리다 멈칫 굳고 말았다.

    “…….”

    남자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내 동기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 카페에서 날 바라보던 눈과 똑같았다. 내가 움찔하는 사이 같이 가기로 결정한 놈 하나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그를 향해 제안했다.

    “그러지 말고 형님도 함께 가시죠!”

    “세윤아, 그건 좀…….”

    “왜요옥! 같이 가요! 저희는 진짜 상관없어요!”

    곁에 있던 다빈이 왁 소리를 질렀다. 남자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게 어떻게 읽혔는지 세윤이 정말 괜찮다며 재차 설득했다.

    아니, 저건 네놈들이 상관있건 말건 그걸 왜 신경 쓰냐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 얼굴이 다 읽혔다. 나는 당황해서 그들을 말리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빈을 붙잡은 내 손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더니 안내하라는 듯이 턱을 까닥이는 게 아닌가.

    “그래, 내 친히 가주마.”

    “네?”

    “대체 어디길래 그리 기를 쓰고 가려 하시는지 내 두 눈으로 봐야겠다.”

    동시에 나를 동기들의 틈바구니에 꺼낸 남자가 내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이미 취한 친구들은 말리는 대신 그의 독특한 화법에 ‘제람이 형 놀리시는 거예요?’라며 되려 나를 물 먹이기나 했다.

    그러나 싹퉁머리는 소주와 함께 넘겼냐고 호통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우리는 다섯 명이 되어 근처 술집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술집은 노랫소리가 크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라 대화를 나누기엔 적합하지 않았지만 2차를 즐기기엔 적당한 가게였다. 가볍게 소주 5병과 어묵탕을 시킨 다빈이 눈을 빛내며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오늘 여기 무슨 일로 오셨어요? 우원 오빠랑 알바하다 만나셨으면 여기랑 집이 멀 텐데.”

    “우리랑 같은 학교셔.”

    먼저 나온 마카로니 과자를 집어 먹던 우원이 대신 대답했다. 그에 어째서인지 우원에게 눈총을 준 다빈이 다시 살갑게 웃으며 말을 붙였다.

    “정말요? 그런데 왜 얼굴 한 번을 못 봤지? 혹시 무슨 과세요?”

    “……국, 문과.”

    정자세로 앉아 있던 그가 잠시 침묵하더니 툭 내뱉었다. 나는 탁자 아래를 흘긋 쳐다보았다. 조명 때문인가? 어째서인지 아래에서 파랗게 빛이 나는 걸 본 것 같았다.

    곧 윤다빈은 호들갑을 떨며 우리의 소개를 시작했다. 가만 놔둬도 모두를 소개할 기세길래 나는 얌전히 소주를 깠다. 잔을 하나씩 채우려는데 옆에 앉은 그가 내 팔을 잡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술을 마셔서인지 맞닿은 피부가 뜨거웠다. 나는 머뭇거리며 아까부터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그, 저, 말 놓으세요. 저보다 형이신걸요.”

    “……혹시 나이가….”

    매우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아까와 달리 술이 조금 깬 나는 얌전히 대답했다.

    “저 스물넷이요…. 우원이랑 동갑인데.”

    “…….”

    그러나 그것을 끝으로 그는 침묵했다. 일자로 다물린 입술이 곤란해 보였다. 나랑은 친해지기 싫다는 걸까? 나는 조금 시무룩해져서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 사이 병을 가져간 그는 내 잔만 딱 채우더니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앞에 있던 세윤이에게 병을 밀었다.

    “마땅히 제일 어린놈이 따라야지.”

    팔짱을 끼고 뒤로 깊숙이 기대앉으며 명령하는 것이 지나치게 태연했다. 그는 내가 수저라도 놓으려고 집은 수저통도 빼앗아 함께 밀었다. 그에 신나게 말을 하던 다빈이 멈칫했다. 당황한 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개꼰대 같은데? 잘못 걸렸나?’

    무언의 대화가 오고 갔다. 그녀는 눈알을 굴리며 그의 얼굴을 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순간 이상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세윤이 얼른 분주하게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나 역시 서둘러 생긋생긋 웃으며 그의 이름을 물었다.

    “하하, 하, 그러고 보니 형은 이름이……?”

    “주…….”

    입을 열려던 그가 멈칫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살짝 나를 보는 눈이 뭔가를 가늠하는 듯했다.

    혹시 내가 쭉 신경 쓰고 있던 걸 들켰나. 나는 얼른 그렇게까지 궁금하지 않은 척 고개를 돌리고 조금 전부터 멍하니 있던 우원을 챙겼다. 직접 물도 따라주고 가방도 벗겨주고. 그러나 그러기가 무섭게 남자가 가방을 빼앗아 아래로 휙 던져버렸다.

    “어, 저기 노트북 있는데…….”

    탁자 아래로 꾸물꾸물 허리를 수그리자 위에서 긴 한숨이 들렸다. 나는 가방을 되찾기 위해 팔을 뻗다 그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주섬주섬 끈을 붙잡고 다시 올라오기 위해 소파를 짚었을 때였다.

    “……저게 뭐지?”

    나는 술기운이 돌아 점점 흐려지는 눈을 손으로 비볐다. 남자의 팽팽하게 당겨진 슬랙스 위로 의심스러운 굴곡이 있었다.

    아……. 너무 마셨나? 나는 올라올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아래에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눈을 살짝 올리자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광이라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쿵쿵, 쿵. 옆으로 직원들의 다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입을 벌렸다.

    “……소서노.”

    “어묵탕 나왔습니다!”

    대답은 어묵탕을 들고 온 직원의 고함과 겹쳐 들렸다. 흐릿하게 묻혀 사라져 버린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휘청거리며 서둘러 소파 위로 기어 올라왔다.

    “이, 이름이 뭐라고… 다시 한 번만….”

    “선호 형이래. 손선호.”

    맹하게 되묻는 나를 향해 세윤이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주잔을 들어 한 번에 꺾었다. 또다시 뭘 기대했던 건지. ‘손선호’라는 이름 그 어디에서도 부여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옆에서 긴 한숨이 들렸다. 그도 잔을 집어 들며 본격적으로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자, 한 잔 더!”

    “쭉 들이켜, 쭉!”

    이미 취한 상태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하는 짓이라곤 뻔했다. 새롭게 환기된 분위기에 감화되어 주량도 잊고 마구 들이켜기.

    거기다 곁에 처음 보는 사람이 있다면 어색함을 이겨내고 싶다는 갈망에 속도는 두 배가 되곤 했다. 나처럼 그 사람이 심란함의 원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남자는 예의범절과 청결에 예민한지 내가 남의 술을 따르지 못하게 하고 숟가락을 같은 어묵탕에 담그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그것만 빼면 술자리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국문과 어때요? 물리는 진짜 개 오바인데.”

    “…….”

    한차례 소란이 가신 뒤 찾아온 것은 거나한 술기운에 걸맞은 인생 타령이었다. 어느새 새로 주문한 맥주와 소주를 따며 세윤이 머리를 마구 쓸어 넘겼다.

    “고등학교 때 물리 좀 잘해서 왔는데 그거랑도 너무 다르고…. 거기다 자연대 교수진 유명하잖아요. 학점 진짜 짜게 주는데, 끅. 좀 먹고 살려면 대학원 가야 한다 그러고. 과탑인 제람 형은 상관없겠지마안…….”

    이제 조금 있으면 4학년이니 진로와 취업에 대해 고민이 많을 만도 했다. 주변에 엎어진 애들이 코러스로 곡소리를 냈다. 그러나 매번 무시와 단답으로 일관하던 남자는 예상외로 되물었다.

    “과탑?”

    “예! 더 웃긴 건 컴공 가려고 했는데 고3 때 갑자기 물리로 바꿔서 물리학과 온 거라잖아요! 그래놓고 과탑까지 해? 진짜 세상도 불공평하지. 저 얼굴에, 저 성적이라니.”

    세윤이 세상 억울하다며 맥주잔을 들어 소주를 꽐꽐 따랐다. 마지막에만 아주 조금 소주를 따르는 폼이 익숙했다. 색이 바뀌는 순간 내게 내밀며 “형! 꿀주, 꿀주! 빨리!” 하는 기세에 억눌려 나도 모르게 입을 댔다. 두 모금이 넘어가는 순간 눈앞이 빙빙 돌았다.

    커다란 손이 내 입에서 잔을 억지로 떼고 흘러내린 술도 닦아주었다. 동기들은 내가 넘어가건 말건 잔이 다 비지 않았다는 것에만 집착했다.

    그러나 눈을 잠시 감았다 뜨자 잔은 모조리 비어 있었다. 뭐지? 마법인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그들은 이어서 내 꿈을 떠들어댔다.

    “물리 온 썰도 개웃기잖아. 타임머신 만들고 싶다고 했었나.”

    “그거 교수님 앞에서 말한 게 개쩔었는데. 그래놓고 갑자기 학교에 안 나와서 당황했잖아.”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내 중도 휴학으로 흘러갔다. 교통사고를 당해 늑골과 팔다리가 부러지면서도 살아남은 이야기는 2년여를 지나 남의 입에서 영웅담처럼 회자되고 있었다.

    사람 속도 모르고, 저놈들이. 그러나 말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가만히 있어도 눈앞이 울렁거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리 지내실 것이면 왜 떠나셨습니까…….”

    “…….”

    누군가 머리 위에서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술기운이 끝의 끝까지 오른 눈이 멋대로 초점을 흐렸다. 흔히 일어나는 약의 부작용 중 하나였다. 약을 끊은 지 한참 됐지만 술기운이 오르면 여전히 시력이 떨어지곤 했다.

    나는 뿌연 시야에 눈을 가늘게 뜨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목구비가 바르고 얼굴형이 예쁘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누군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순간 샘솟는 가정에 입을 틀어막았다.

    “설… 마…….”

    주몽일까…? 나를 찾아오지 않는 신 대신 그가 나를 보러 온 거지!

    머리끝까지 오른 술은 이성을 날리고 본능과 함께 깊숙한 그리움을 끌어왔다. 혹시나 하는 가정 하나에도 순식간에 초조함과 두근거림이 치솟았다.

    정말 주몽인지 당장 확인해야 했다. 나는 그 뺨을 꽉 붙들었다. 주몽이냐고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 이름은 너무 독특하고 유명해서 아닐 경우 미친놈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대신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추억들 중 적당한 것을 골라잡았다.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툭 내뱉었다.

    “……혹시 불고기 좋아해?”

    “아! 또 시작이다, 얘.”

    주위에서 웃음과 함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건 말건 내 입에서는 술에 취한 목소리가 마구잡이로 흘러나왔다.

    “불고기 좋아하냐고오……!”

    “…….”

    그러나 내가 붙든 얼굴은 묵묵부답이었다. 비척비척 일어나 소맥을 타던 우원이 낄낄거리며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쟤 술만 먹으면 잘생긴 애 붙잡고 불고기 좋아하냐고 묻거든요. 진짜 골 때려.”

    “맞아! 새내기 때는 엠티 한 번 갔다가 거기 온 오빠들 붙잡고 저 짓거리 했잖아. 다들 표정 진짜 대박이었는데.”

    다빈이 생각났다는 듯이 깔깔 웃으며 박수를 쳤다. 세윤이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아, 미친. 나 소문으로만 들었어. 진짜?”

    “너 준우 오빠 몰라? 그때 붙잡혀 가지고, 결국 그 오빠…….”

    앞에서 수군대는 동기들의 목소리가 둔한 귀를 타고 한쪽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상체까지 기울이며 듣던 세윤이 꼬부라진 혀로 크게 외쳤다.

    “실화야? 그 정도라고? 우원이 형, 형도 그때 잡혔다고 하지 않았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큰 소리와 함께 맥주잔이 놓였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흐린 눈에도 김우원의 얼굴이 벌겋게 붉어진 것이 보였다. 평소에 얼굴도 잘 안 빨개지는 놈이, 많이 취했네. 나는 눈꼬리를 내리며 그가 콧김을 내뿜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얼굴에 더운 숨이 와 닿았다. 여전히 남자의 얼굴은 코앞에 있었다. 그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예. 좋아합니다. ……정말로.”

    붉고 노란 조명이 뒤섞인 어둑한 술집 안에서 나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손을 들어 천천히 콧대를 쓸어내렸다. 입술을 지나 뺨, 귀, 그리고 다시 이마로. 이번에는 아예 눈을 감고 그렇게 다시 한번.

    손끝에 닿는 감촉은 흐린 두 눈을 속이고 끝내는 마음마저 속였다. 나는 다소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잘래?”

    “씨발, 그럼 그 하얗던 애가 술에 꼴아가지고 저러는데, ……어?”

    그 순간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던 우원이 어버버거리며 굳었다. 내게 잡힌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가장 먼저 변한 것은 남자의 표정이었다. 조명 탓인지 살짝 상기되어 보였던 얼굴은 하얗게 굳어지더니 점차 뜨거운 분노로 가득 찼다. 턱관절이 악물리고 모양 좋은 입술이 일자를 그렸다. 나는 전에 본 적 없을 만큼 강렬한 분노를 풀린 눈으로 응시했다. 호모포비아였을까. 위기감 없이 그런 생각만 들었다.

    그 순간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원이 테이블을 내리치는 소리였다. 그가 씩씩대며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야, 야! 너, 이씨, 너 나랑 잔다며!”

    “…….”

    마주하고 있던 얼굴이 소리 없이 돌아갔다. 어째서인지 우원이 눈을 꾹 감더니 덜덜 떨며 말했다.

    “자, 자, 자취방에서 나 재워 준댔잖아!”

    “아, 맞다.”

    나는 낮은 깨달음의 소리를 냈다. 우원의 낯이 기대로 밝아졌다. 그러나 내가 깨달은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곧장 맨투맨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탄탄한 복근이 손바닥에 닿았다. 손이 찼는지 우원이 격하게 몸을 펄떡이며 소리를 질렀다.

    “야! 뭐 하는 거야!”

    “내 맨투맨 내놔. 그리고 넌 동방 가서 자.”

    “이 새끼 또 이러네! 이거 아주 상습범이야! 경기도인 꼬셔놓고 맨날 내빼면 다냐! 어?”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옷을 마저 벗기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그때마다 필사적으로 상의를 내리는 우원의 얼굴이 시뻘겠다.

    내 손을 제지한 것은 아직도 굳은 얼굴을 한 남자였다. 그는 작지 않은 키의 나를 덜렁 들더니 테이블 바깥쪽으로 뺐다. 그 타이밍에 맞춰 세윤과 다빈도 슬슬 일어날 준비를 했다. 저만 빼고 분주해진 분위기에 우원이 분통을 터뜨렸다.

    “야! 너네들 지금 다 가냐!”

    “응, 뭐… 지금 막차 타고 가면 딱 알맞겠다. 형은 학교 가서 자라. 미안.”

    안타깝게도 두 사람 모두 서울에 본가가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매정하게 물로 입을 헹구고 가방을 챙겼다. 한두 번이 아닌 듯 우원을 내팽개치는 솜씨가 익숙했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가방만 간신히 챙겨 든 채로 허정허정 남자에게 끌려갔다.

    골목으로 나와서도 휘청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술기운에 가방 무게까지 더해진 탓이었다. 보다 못한 그가 가방을 빼앗았다. 그러나 그도 취했는지 가방 걸이가 아닌 가방끈 한쪽을 어색하게, 그것도 거꾸로 들고 있었다. 마치 가방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 하윽…….”

    “…….”

    “……윽, 우욱…. 해야. 해야….”

    그 높은 웃음소리가 울음으로 바뀌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새벽녘 술집 골목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자그마해졌다. 나는 그의 다리를 붙들고 한참이나 주인 없는 이름을 불렀다.

    위에서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나는 몸을 펄떡이며 다급하게 눈물을 닦았다.

    “…죄송해요. 자, 자자고 해서……. 형 아닌 거 아닌데, 그런데 자꾸, 흑, 자꾸 그 아이로 보여서…….”

    “…….”

    “그냥… 형과 자면, 오늘은… 오늘 밤은 그 애를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꿈에, 꿈에 더 이상 그 애 얼굴이 안 나와요……. 다시 보고 싶어도…….”

    그의 얼굴이 나오지 않는 꿈을 꾸기 시작한 지 몇 해나 흘렀다. 처음에는 좋았다. 꿈에서 얼굴을 보았다 하면 하루 종일 그것들을 그리며 지내야 했으니까. 처음으로 얼굴을 보지 않은 날엔 드디어 내 심장 깊숙한 곳의 소금 내를 지울 수 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해가 거듭되며 어느덧 파도 같던 그리움도 잔잔한 호수 같아졌을 땐 모든 것이 후회스러웠다. 매일 밤 단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비쳐달라 바라며 잠드는 일들이 이어졌다.

    부여에서 내가 가족들을 그리던 때와 똑같았다. 바라고, 사과하고, 그리워하고, 결국 또다시 기억을 붙잡고. 종내는 그 기억조차 맞는지 의심하며 미쳐 갈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단 하룻밤이라도 좋으니 그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다. 잊지 않도록 쓰다듬고, 기억하고…….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내 생명을 내어줘서라도 전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야 했다.

    이렇게 해봤자 그 말이 정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저 내 이기심이었다. 꿈일지언정 그가 대답을 해준다면 나는 그걸로 다시 몇 년은 숨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오늘 처음 본 남자에게 대뜸 자자고 한 것은 술기운을 빌린 추악한 욕망의 표출이었다.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라면 그 위에 주몽을 투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 둘만이 공유했던 약조를 재현하면 무슨 짓을 해도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도 빼꼼 고개를 내미리라.

    그 순간 까만 밤하늘로 헛웃음이 흩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내 몸만 빌려 쓰시겠다는 건가.”

    “아…….”

    “평소에도 이리 아무나 붙잡고 잠자리를 갖자 하십니까?”

    분노가 드리워진 얼굴은 무섭도록 창백하고 아름다웠다. 부정할 때를 놓친 것은 찰나였다.

    “이러려고…….”

    그가 나지막이 뇌까렸다. 그 순간마저도 나는 비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런 나를 본 그가 다시 한번 헛웃음을 터뜨렸다. 몸이 거칠게 일으켜 세워졌다. 얼굴 위로 새카만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읍, 우웁….”

    입술이 짓씹히고 혀가 목구멍 끝까지 쑤셨다가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당하는 강압적인 키스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틈이 생길 때마다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진득한 알코올 향에 다시 취하는 기분이었다.

    이건 무슨 뜻일까.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배 안쪽이 꽉 죄어왔다. 풀리려던 다리 사이에 남자가 허벅지를 끼워 넣었다. 다리 사이가 진득하게 비벼졌다. 입술은 기어코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어서야 떨어졌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어둑한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묘한 기시감이 전신을 감쌌다. 꿈, 알코올, 밤, 키스. 모든 단어가 혼잡하게 얽혔다. 술에 취한 입이 인지하지도 못한 새 열렸다.

    “혹시, 전에도, 저랑 키스한 적….”

    “…….”

    “분명 그때도 술 먹고…. 아… 왜 기억이 잘 안 나지…….”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분명 내가 누구시냐고, 연예인이냐고 물었던 것도 같은데…. 정확한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주몽은 아닌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소리에 남자의 기세가 험악하게 변했다. 그가 다시 고개를 숙여 내 입술을 물어뜯었다. 머리가 가로등 불빛을 가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낮은 목울음을 낸 그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짓씹듯 내뱉었다.

    “원래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지만…….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하아, 하…….”

    “원하는 대로 맞춰 드릴 테니, 대신 모든 게 끝나면 제 질문에 솔직히 답해주십시오.”

    하나면 됩니다. 그가 이어서 속삭였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맞닿은 입술이 은밀한 흔적을 남기며 뭉개졌다.

    승낙의 말은 필요 없었다. 나를 다시 버티게 할 숨과 꿈을 사기 위해서라면 생명도 팔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

    ***

    남자의 인내심이 끝난 것은 도어락의 잠금 소리와 함께였다. 내가 문을 여는 내내 처음 보는 것처럼 도어락을 노려보던 그는 짧은 기계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뒷목을 잡고 고개를 내렸다.

    “자, 잠깐… 윽….”

    이가 부딪히고 성급하게 혀가 빨렸다. 좁은 현관은 조금만 뒷걸음질을 쳐도 신발장에 머리가 닿았다. 정적 속에 울려 퍼지는 문짝 소리는 타액이 질척이는 소리와 섞여 그 자체만으로도 외설적이었다. 나는 덜컹거리는 문에 뒤통수를 비비며 입을 더 벌렸다.

    “읍, 으읍… 하아….”

    진득한 숨소리를 내뱉으며 목을 꺾었다. 숨 쉴 틈조차 주지 않는 그를 피하려는 발버둥이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드러난 턱과 목에 연달아 입을 맞췄다.

    “조, 금만 천천히…….”

    그가 눈만 들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다른 한 손이 상의를 파고들었다. 등줄기를 쓸어내리다 옆구리로 빠져나오는 손이 뜨거웠다. 그 손은 곧 늑골을 세며 올라가 가슴께에 다다랐다. 나는 남자의 팔을 잡았다. 좁은 이곳에서 이러지 말고 침대로 가자는 무언의 몸짓이었다.

    그러나 그는 눈매를 날카롭게 좁히며 내 상의를 들어 올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목 부근까지 올라온 웃옷을 쥐었다. 그 모습을 본 그가 바람 같은 웃음을 흘렸다. 큰 손이 있지도 않은 가슴살을 그러모았다. 그는 그것을 느릿하게 주무르더니 도드라진 유두에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배 속이 달아오르고 밑이 저릿해졌다. 그가 속삭였다.

    “제가 뭐라 부르면 됩니까? 선배? 형?”

    나는 이 이야기가 아까의 연장선임을 깨달았다. 내게 ‘해’인 척 하룻밤을 보내주겠다는 것이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하나씩 호칭을 읊었다.

    “아니면…… 형님?”

    “…….”

    순간 뒤틀리는 허리를 그가 붙잡았다. 어둑한 탓인지 올려다보는 얼굴이 정말, 정말로 주몽 같았다.

    나는 그대로 숨을 헐떡였다. 그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먼저 들었던 축축한 감정 대신, 아주 오랜만에 배덕감이 몸에 차올랐다. 그는 빠르게 그것을 눈치챘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가가 유순히 접혔다.

    “형님.”

    “흐윽, 읏.”

    “그동안 얼마나 많이 몸을 굴리고 다니셨으면 이리 붉은 빛을 띱니까?”

    “그, 그런 말, 하지 마…….”

    “전에 만난 사람들은 이런 저속한 말 따위 쓰지 않았나 봅니다.”

    뭐라 말하는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살짝 마른 입술이 말랑하고 예민한 부위를 스쳤다. 나는 고개를 젓다 아래로 내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날카로운 콧대, 그 아래 붉은 혀. 다시 고개를 뒤로 젖혔다. 곧 축축하게 젖어 들며 간질거렸던 감각이 점차 밑으로 옮겨갔다.

    “흐으…….”

    잠깐 입을 뗀 사이 바깥으로 드러난 유두가 찬 공기와 맞닿아 꼿꼿하게 섰다. 그가 작게 웃으며 그것을 꼬집었다.

    나는 신음을 삼키며 허리를 떨었다. 반대쪽 유두까지 손끝으로 살살 굴리던 그가 마른 배에 입을 맞췄다. 다리에 힘이 풀려 신발장에 간신히 기대어 섰다.

    그는 그 앞에 몸을 낮춰 앉았다. 좁은 현관 앞에 그의 몸이 꽉 들어찼다.

    나는 슬리퍼와 운동화 따위가 구겨지는 것을 보다 그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침대로 갈 시간조차 부족해 갇힌 열기를 당장 이곳에서 해결한다기엔 자취방이 4평이었다. 뒤돌면 침대가 있는데…….

    그러나 그가 내 중심부 위로 콧대를 문지른 것이 먼저였다. 간질거리는 숨조차 잘 닿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밑이 뻐근해졌다. 청바지 안에 갇힌 열기가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그대로 고였다.

    줄곧 코를 문지르던 남자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벨트를 몇 번 만지작거리던 그가 그것을 그대로 잡아 뜯었다.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싸구려 가죽 벨트라지만 살면서 저것이 찢어질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경악할 새도 없이 청바지 버클마저 뜯어졌다. 무식한 행태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하지만 괴력을 보인 당사자는 태연하게 벌어진 틈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빠듯한 안을 견디지 못한 지퍼가 툭 내려갔다. 이미 둥그렇게 젖어 있는 부분을 그가 매섭게 웃으며 문질렀다.

    “벌써 젖으셨습니까?”

    “아, 아니…….”

    그러나 부정하는 말과는 달리 속옷이 내려간 순간 성기 끝에서부터 실이 끈적하게 이어졌다. 그가 비웃음을 흘리며 그것을 쥐었다. 마른 손이 기둥을 쥐고 엄지로 천천히 귀두를 문질렀다. 작은 자극에도 곧장 성기가 빳빳하게 섰다.

    그 끝에 입술이 닿는 순간 허벅지가 크게 떨렸다. 마른 허벅지를 꽉 쥐어 지탱한 그가 성기를 단숨에 삼켰다. 선액을 흘리던 선단이 금세 뜨겁고 축축한 열기로 뒤덮였다. 혀가 민감한 귀두를 문지르고 그 아래를 쓸고 지나갔다. 움찔거리는 다리를 토닥인 그가 성기를 깊이 삼키며 빨아올렸다.

    “흑, 흐으, 읏…….”

    이미 오르고 있던 성감이 단숨에 끝까지 치달았다. 나는 결 좋은 검은 머리칼 속에 손을 찔러 넣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정말 내가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약간의 죄의식과 떨림이 몸을 빠르게 달궜다. 그가 혀와 입천장 사이를 부드럽게 조였다. 성기가 입 안으로 부드럽게 밀려 들어가는 모습과 뒤따르는 쾌감이 비현실적이었다.

    “으, 서, 선호 형…….”

    순간 날카로운 이가 기둥 표면을 쭉 긁어내렸다. 고통을 닮은 쾌감에 등골이 쭈뼛 섰다. 나는 아프다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도 성기를 바짝 세웠다. 금방이라도 성기가 잘리고 몸뚱이마저 잡아 먹힐 것만 같았다.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치뜬 눈과 마주쳤다. 새카만 눈동자가 감히 누구 이름을 부르냐고 묻는 듯했다. 저도 모르게 흐릿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해, 해야…….”

    “…….”

    남자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잘했다는 듯 내 허리를 쓸어내리더니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귀두만 머금은 채 드러난 기둥을 손으로 척척 쳐올렸다. 귀두 끝 갈라진 틈을 파고드는 혀끝이 부드러웠다.

    원체 자위행위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나였다. 나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성적 욕구는 순식간에 나를 지배했다. 술기운이 채 빠지지 않은 머릿속이 연이은 강한 자극으로 뜨거워졌다.

    사정감이 빠르게 치달았다. 급히 눈앞에 있는 어깨를 밀었지만 남자는 오히려 나를 힐긋 보더니 성기를 더욱 깊이 삼켰다. 목울대가 꿀럭일 때마다 입 안이 좁아지며 성기를 자극했다.

    “흣, 아, 흐윽……!”

    그는 끝내 내가 모든 것을 쏟아내고 나서야 몸을 뒤로 물렸다. 나는 온몸에 힘이 풀려 숨만 헐떡였다. 그 순간 갑자기 발이 공중에 들렸다. 지지대를 잃은 나는 허겁지겁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작은 발버둥에 헐거운 바지가 신발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를 안은 그가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놀라 급히 그의 등을 두드렸다.

    “형, 혀엉…. 신발, 신발 벗으셔야죠…….”

    그가 멈칫하더니 나를 침대 옆 바닥에 내려놓았다. 욕을 짓씹으며 구두끈을 찢듯이 헤치는 모습이 어색했다. 비싸 보이는데 저렇게 다뤄도 될까. 그나저나 침대를 바로 옆에 놔두고 굳이 바닥에 내려주는 심보는 뭐란 말인가. 나는 침대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너덜너덜해진 신발이 저 구석으로 던져졌다. 미간을 좁힌 그가 성큼 다가왔다. 신발장 놔두고 왜 그러냐고 항의할 새도 없이 허리가 잡혔다. 나는 침대 위에 무릎만 올린 채로 그대로 끌려갔다.

    이어서 투둑, 뜯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뒤에서 뜨겁게 커다란 무언가가 허리 위에 턱 얹어졌다. 그것은 두어 번 허리 위를 문지르더니 곧장 엉덩이 사이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추삽질을 하듯 골 사이와 허리 위를 오가는 물건은 무게감부터가 의심스러웠다.

    나는 무릎을 침대 끝에 댄 불안정한 상태로 허리를 틀었다. 크게 애를 쓰지 않아도 곧장 보였다. 하얀 셔츠 아래로 남다른 크기의 무언가가 튀어나와 있었다.

    저게 뭐지?

    분명 나와 같은, 아니 모든 남자들에게 있는 물건일 텐데도 내가 알던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살면서 저만한 크기는 딱 한 명만 봤다. 나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더듬더듬 물었다.

    “혀, 형, 아니, 너…….”

    “…….”

    “너 정말 해… 아니야…?”

    마주친 눈이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어둑했다. 오랫동안 눈을 마주하던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제법 나와 닮았나 보지.”

    낯선 반말이 흘러나왔다. 내 면면에 서려 있는 불신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이. 나는 멈칫했다. 정말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저런 얼굴에 저런 크기가 또….

    “아!”

    순간 꽉 다물린 아래에 손가락 하나가 파고들었다. 한 차례 사정을 했다 하더라도 밑은 여전히 뻑뻑한 채였다. 마른 내벽이 손가락에 그대로 달라붙었다. 그는 느리게 문지르며 안을 쑤셨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뒤는 쉽사리 안을 내어주지 않았다.

    혀를 찬 그가 어디선가 스틱 형태의 투명한 비닐 포장지를 꺼내 들었다. 겉에 쓰인 글씨와 안에 든 액체가 지나치게 평범하고 익숙했다.

    저걸로 뭘 하려는 거지? 그러나 묻기도 전에 그가 이로 끝을 물어뜯더니 입구 위로 쭉 짜냈다. 코끝에 달달한 향이 훅 끼쳤다. 그가 낮게 목을 울렸다.

    “아, 꿀.”

    “아니, 한글 못 읽, 아!”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는데 몰랐다는 태도가 참으로 뻔뻔했다. 어디서 난 거냐고 묻지 않아도 알았다. 낮에 카페에서 만났을 적 들려주었던 빵에 포함되어 있는 꿀 스틱이었다.

    그는 내가 뭐라 하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적당히 점성이 있는 꿀의 도움을 받은 진입은 조금 전보다 더 수월했다. 어느새 두 개로 늘어난 손가락이 천천히 안쪽을 짚어냈다. 앞뒤로 움직이는 것뿐만 아니라 손목을 둥글게 돌리는 등 내벽을 문지르는 움직임이 점차 농밀해졌다. 나 역시 뭉툭한 손끝이 안쪽을 스칠 때마다 허리를 움찔대며 떨었다.

    꿀이 안쪽으로 흐를 때마다 느낌이 기묘하고 이상했다. 차라리 다른 방법으로 윤활제를 대신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신음이 새지 않게 조심하며 그의 손목을 잡았다.

    “코, 콘돔 없어요?”

    “그게 뭡니까.”

    “피임, 도구……?”

    황당한 질문에 반사적으로 정석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이 형, 사실 외국인인가? 신발도 그렇고, 영 이상한 곳에서 핀트가 자꾸 엇나갔다. 하지만 콘돔은 영어인데…. 전공도 분명 국문과라고 들었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턱이 단단히 굳었다. 미세하게 풀어져 있던 눈꼬리는 단박에 하늘로 솟았다. 부드럽게 안을 풀던 손이 거칠게 밀고 들어오며 한 곳을 정확하게 눌렀다.

    “하윽!”

    “얼마나 이 짓을 하고 다니셨으면 사내가 임신을 걱정하십니까?”

    “그게, 흣, 아니, 잠깐, 아! 흐아!”

    콘돔은 성병 예방을 위해서도 갖추는 물품이었다. 다짜고짜 몰아가는 상황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벌어진 입이 완성된 말을 내뱉는 일은 없었다. 그가 엉덩이 살을 손으로 쥐고 벌리며 손목을 빠르게 움직였다. 귓가에 철퍽철퍽한 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가 낮게 쉰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염려 마십시오. 여기까지….”

    “으, 흐읏, 으응……!”

    “제 씨물로 씻어드릴 테니.”

    커다란 손이 내 명치 부근을 짚었다. 동시에 어느새 세 개로 늘어난 손가락이 거칠 것 없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내가 느끼는 곳만 찔러 들어왔다. 나는 속절없이 신음하며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상체가 쓰러지며 엉덩이가 더욱 들렸다.

    잊고 지냈던 쾌감이었다. 보지 않아도 앞이 바짝 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벽이 홧홧하다 못해 배 아래까지 뜨거워졌다. 나는 감당할 수 없는 감각에 휩쓸려 몸을 뒤틀었다. 애원이 절로 튀어나왔다.

    “좀 더… 천천히, 나, 나 처음, 읏!”

    “처음이라고?”

    머리 위에서 찬 웃음소리가 터졌다.

    “당신이 처음이 아닌 건 내가 제일 잘 아는데.”

    “흐, 무슨… 흐윽!”

    “매번 이렇게 거짓말로 사내를 홀리셨습니까?”

    “아무, 하, 아무와도, 흐으, 안 만났….”

    “그걸 제가 어떻게 믿습니까?”

    반복되는 물음이 귓가에 떨어졌다. 그가 숨을 들이쉬며 내 등 위에 상체를 붙였다.

    “……이제람.”

    누구보다 주몽과 닮은 얼굴로 내 이름을 부른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냐고.”

    쉴 새 없이 다그치는 모습에 억울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영혼을 걸고넘어지면 할 말은 없겠지만 이 몸으로는 정말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먼저 원나잇을 제안한 것은 나니까 처음이 아니라고 믿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자기도 단번에 수락했으면서 혼자 깨끗한 척 고고한 척 과거를 따지는 모습에 오기가 일었다.

    나는 등 뒤에 있는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몸이 떨어지며 깊이 박혀 있던 손가락도 딸려 나갔다. 끝까지 내벽을 쭉 긁어내리는 손길에 허리가 벌벌 떨렸다. 하지만 꾹 참고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봤다.

    “확인해보면 되, 잖아…….”

    그대로 모았던 다리를 살짝 벌렸다. 손가락이 빠져나간 입구가 스스로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벌겋게 핏줄이 선 눈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제가 어찌 확인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미 알고 있지… 않아?”

    나는 태연한 척하려 애쓰며 아래를 눈짓했다. 뻣뻣하게 선 남자의 성기가 꽉 다물린 입구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타인의 날것의 온기는 뜨거움에 가까웠다.

    저게 들어오면 죽는 게 아닐까. 비슷한 걸로 이미 죽지 않는다는 걸 몸소 경험해봤지만 두려움이 물씬 밀려왔다. 하지만 관두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그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뜨거운 손이 허벅지를 더욱 벌렸다. 그가 단번에 허리를 쳐올렸다.

    “흐으, 아, 아아!”

    절로 목이 뒤로 넘어갔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손이 얽혔다. 내 손을 꽉 마주 잡은 그가 땀을 뚝뚝 흘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보지 않아도 아래에 힘이 들어가 빠지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꾹 감았다. 낯익은 감촉이 내 입술을 짓눌렀다. 쪼듯이 부드러운 키스가 이어지다 입술이 맞물렸다. 나는 허겁지겁 숨을 받아들이며 몸에서 힘을 빼기 위해 노력했다. 조금씩, 조금씩 그의 것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금도 헤매지 않고 안쪽 구석을 짓눌렀다.

    착각이 아니었다. 허공에 뜬 다리가 떨렸다.

    “흐으윽, 읏, 흑…….”

    눈물이 흘러나왔다. 맞닿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겹쳐진 입술과 허리를 잡은 손, 밑을 들쑤시는 감각까지. 온 얼굴이 눈물로 젖었다. 그의 손을 강하게 잡고 눈을 떴다. 작은 물줄기는 곧 강이 되고 파도가 되어 모든 것을 쓸어갔다.

    남은 것은 확신뿐이었다.

    “왜… 왜 거짓말해…. 너 해 맞잖아.”

    “…무슨…….”

    “해야, 이제 내가 싫어진 거야? 그래서 나 모른 척하고, 흑…….”

    마주한 얼굴이 당혹으로 굳었다. 그러나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얼굴에, 목소리에, 말투는, 그래. 백번 천번 양보해서 그것뿐이었다면 내 착각이라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이렇게 몸을 섞었는데 몰라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를 향한 모든 것이 내가 알던, 내가 키운, 끝내는 내가 버린 그 주몽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마른 뺨을 향해 손을 뻗어 쓸어내렸다. 그가 움찔거리며 입을 열었다 닫았다. 부정하려던 얼굴은 피하지 않는 눈에 무너졌다. 그가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제가.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억눌렀던 눈물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짐승을 닮은 울음을 토해냈다.

    기어코 널 버린 나를 찾아 네가 건너오고 말았구나. 그 길이 어떤 길인데. 너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배를 꿰뚫려야만 오갈 수 있었을까. 질책을 닮은 걱정이 가장 먼저 튀어나왔다.

    “왜……. 왜, 흑, 그 험하고 먼 길을….”

    “보고 싶었습니다.”

    애절한 목소리에 피 냄새가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너무 보고 싶어서… 밤낮으로 나라를 세워 다시 모셔올 생각만 했습니다. 형님께서 업적을 쌓으라 하셨으니, 그걸 다 마치면 다시 모셔올 수 있을 거라고…….”

    축축한 숨을 들이켰다. 그 편지 조각에 매달려 너는 나를 계속해서 찾고 기다렸구나.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날, 헛된 희망에 매달려서.

    그래, 헛된 희망이었다.

    나도 알았다. 신은 오지 않는다. 그때의 내 선택이 사실은 신이 종용한 것임을 돌아와서야 깨달았다. 그러니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신이 다시 나타날 일은 없었다. 완벽한 꼭두각시의 수명은 다했기 때문이었다.

    타임머신? 말이 쉽지. 그 또한 내가 미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만든 동아줄에 불과했다. 그 끝이 하늘이 아니라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알면서도 끝끝내 놓지 못하는 꼴이란.

    난 평생 이곳에서 남은 생을 보내야 했다. 그게 신이 원한 것이었으므로. 그러니 주몽이 이곳으로 오기까지의 길이 순탄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과정을 묻지 않았다. 대신 떨리는 손으로 두 뺨을 끌어당겼다. 코끝이 맞닿고 새카만 눈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물기에 젖은 입술이 파들거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건넸다.

    “그동안 잘 지냈어?”

    때론 성대한 환영보다 진심을 눌러 담은 평범한 인사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끝없이 생각했습니다. 끝없이, 계속…….”

    마주한 눈에서 시커먼 감정들이 툭툭 튀어 올랐다. 그건 원망 같기도, 의문 같기도, 체념 같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차지한 것은 그리움이었다. 내가 홀로 수백 수천 번의 밤을 지새우며 내린 결론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목이 메도록 슬프고 안타까웠다.

    너는 잘 지냈으면 했다. 떠나오면서도 이리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잘 지냈으면 했다. 마찬가지로 헛된 희망이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그가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나는 내리깐 속눈썹을 살살 쓸어주었다. 그가 묻지 못한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난 잘 지냈어…….”

    환상통에 몸을 웅크리고 약을 털어먹던 6년 전은 홀로 묻었다. 모든 것이 답답해 미칠 것 같던 3년 전도 등 뒤로 숨겼다. 개중에 너를 덜 그리워하고 덜 고통스러워하던 날을 꺼냈다.

    그리움을 겪는 모든 사람은 상대의 안녕을 바란다. 그러니 나는 이 대답이 그의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줬으면 했다. 원하던 대학도 가고, 마음이 맞는 친구들도 사귀고……. 줄줄이 늘어놓는 말에 역시나 그의 눈에 안도가 조금씩 차올랐다. 그가 흐리게 미소를 지었다.

    “…이곳이 형님께 잘 맞아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 말에는 말문이 콱 막혔다. 어디선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는 주몽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내가 아는 주몽이라면 당장 자신과 함께 부여로 돌아가자며 잡아끌 줄 알았다. 혹은 왜 그때 자신을 버리고 갔느냐며 원망하고 캐묻거나. 그러다 끝내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날 붙잡고 조르리라 생각했다.

    “해야.”

    갑자기 치닫는 불안에 나는 그의 팔을 잡았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을 놓아버린 사람 같았다. 초연하던 낯이 움찔했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급하게 화제를 바꿨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요.”

    그가 고개를 내려 내 볼에 입을 맞췄다. 그 유순한 행동에 기묘한 감각이 온몸을 쓸고 지나갔다. 낯선 누구도 아니고 주몽이다. 나는 정말 다시 주몽을 만나 그와 몸을 섞고 있었다. 주몽을 그리기 위해 저지른 일의 상대가 사실은 그였음을 깨닫자마자 안도감과 함께 성감이 확 올랐다.

    절로 배 아래가 뜨거워지고 뒤가 조여들었다. 나는 목구멍을 얕게 울리며 몸을 뒤틀었다. 아래에 저런 것이 박혀 있는데 어떻게 잊고 있었는지 믿기지 않았다. 안에서 한참을 머물렀던 그의 성기는 죽긴커녕 더 크게 성이 나 있었다. 긴장한 내벽이 움쭉거릴 때마다 성기에 달라붙으며 그 크기를 가늠케 했다.

    그가 불시에 허리를 꾹 밀어 올리며 속삭였다.

    “김우원이라던 놈과 밤을 보내셨습니까?”

    “하, 하아… 뭐……?”

    김우원? 이 상황과 지독히 이질적인 단어에 몸이 움찔 떨렸다. 질문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밤이야 공부하랴 술 마시랴 종종 같이 새웠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는 대답은 아닐 것 같았다. 눈치를 보는 사이 그가 사납게 입을 벌리며 웃었다.

    “듣자 하니 준우라는 놈과도 꽤 재밌는 일을 벌이셨던 모양인데.”

    준우, 준우가 누구지? 분명 아는 이름인데도 탁 떠오르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할 정도로 열기가 올랐다. 그가 말랑한 속살을 더듬듯 성기 끝으로 누르고 비볐다. 그럴 때마다 보이지 않는 안쪽이 발갛게 부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얼굴을 가렸다. 주몽이 내 손을 치우더니 허리를 툭툭 쳐올리며 내 배를 눌렀다. 어디까지 들어갔는지 가늠하는 손길에 나는 그보다 한참 위를 손으로 감쌌다. 약간의 엄살도 섞인, 압박감으로는 이곳이 분명하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가 그 손등 위에 입을 맞추더니 내 골반을 단단히 잡았다.

    “그놈들에게도 뺨을 쓰다듬고, 입술을 만지고, 얼굴을 가까이하시고…….”

    “아, 잠, 아윽, 잠깐, 흐, 흐으….”

    “몸을 섞자 애원하셨습니까?”

    그가 말 중간중간 허리를 쳐올리며 나를 추궁했다. 나는 속절없이 흔들리다 눈을 크게 떴다. 준우 선배! 그제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있었다.

    새내기 시절 엠티 때 내 주사의 첫 피해자이자 한때 친했던 선배였다. 1학기가 끝나자마자 종강 파티를 했었는데 그때 필름이 끊기고, 선배와의 연락도 끊겼다. 2학기에 휴학을 하셨다고 건너 건너 들었는데, 그마저도 내가 중도 휴학을 하며 잊고 지낸 지 한참은 된 이름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보고 김우원과 준우 선배와도 잤냐고? 어이가 없어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둘 다 엠티 때 내 술주정에 피해를 입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애초에 깨고 나면 좀 민망할 뿐이지, 불고기 좋아하냐고 묻는 게 어때서! 얼굴을 들이밀긴 했지만, 보, 볼도 좀 만지작거리긴 했지만…… 맹세코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술만 먹으면 필름이 자주 끊겼지만 그렇다고 잠자리를 갖고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들과 이런 짓을 한다는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입을 막은 손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얕게 오가기만 하던 성기가 입구 끝까지 빠졌다.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낯설었다.

    뚫린다. 이건 직감이었다.

    “하으, 읏, 아!”

    뭉툭한 끝이 부드러운 살을 벌리고 억지로 길을 냈다. 좁은 내벽이 빈틈없이 긁혔다. 채 열리지 않은 곳까지 밀고 들어오는 성기가 지나치게 버거웠다. 동시에 예민해진 안은 그것만으로도 자극을 받았다.

    분명 죽을 거야. 이 이상 들어오면 죽고 말 것이다. 나는 고개를 마구 흔들며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아냐! 아무 사이도 아니었, 아, 제발, 흐으응!”

    “…….”

    “그냥, 흐으, 밥 몇 번 같이 먹고! 흣, 족, 족보도 주시고……!”

    “아무 사이도 아닌 놈이 제 집안 계보를 넘깁니까? 거짓말도 적당히 하셔야지요.”

    그가 나지막이 윽박질렀다. 가당치도 않은 오해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이제야 ‘선호 형’이 왜 그렇게 핀트가 어긋난 행동을 해댔는지 이해가 됐다. 평생을 부여에 살던 애가 현대에 왔으니 얼마나 모르는 게 많았을까! 신발, 벨트, 콘돔 그리고 족보까지 뭐 하나 멀쩡히 넘어가지 않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억울함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흐으, 그 족보가, 그, 아, 지, 진짜 아닌데…….”

    나는 흐느끼며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차마 밀어낼 수는 없으니 더 이상 움직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가 헛웃음을 삼키더니 재차 허리를 뒤로 뺐다. 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부푼 것 같은 성기가 폭력적으로 밀고 들어왔다.

    “읏, 하으, 으응!”

    나는 고개를 젖혔다. 귀두가 깊은 곳으로 밀고 들어온 순간 안이 열리며 그의 것을 쑥 빨아들였다. 사지가 발발 떨리고 내벽이 경련했다. 안이 오물거리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저 감당할 수 없는 쾌락에 휩쓸리며 뒷머리를 침대에 마구 비벼댔다. 낮은 목소리가 귀를 지나 머릿속을 꿰뚫었다.

    “이제람…….”

    그 음성은 나를 부르는 것 같기도, 입 안에서 홀로 굴려보는 것 같기도 했다. 주몽이 흐리게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잘 어울리십니다.”

    눈이 마주쳤다. 새카맣던 눈이 파랗게 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 속에서는 물비린내가 났다. 동공에 가둬져 지워지지 않는, 익숙한 냄새가.

    여섯 해가 흘렀다. 그동안 갓 성인이었던 아이는 떠나왔을 때의 내 나이가 되었다.

    문득 그가 끝없이 했다던 그 생각이 궁금해졌다.

    그리움을 담은 세월은 지독하고 허상에 가까운 목표는 고통스럽다. 홀로 멈춰 있는 나와 한 해씩 차이를 좁히며 너는 무엇을 느꼈을까. 내 죽음을 외면하고 영혼을 쫓으며 기어이 내 나이가 되었을 때 널 채운 것은 과연 어떤 것이었나.

    평생을 함께한 자의 낯선 이름을 잘 어울린다고 속삭이기까지 넌 대체 무엇을—

    “흐으…….”

    그 순간 진득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맞닿은 입과 입 사이로 토막 난 단어들이 오갔다. 평생 그의 입으로 불릴 일 없다 생각했던 온전한 ‘나’를 불리며 그대로 사정했다. 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안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우리는 그대로 한참 동안 서로를 껴안고 침묵했다.

    “…….”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부여는 괜찮은지, 나라는 잘 세웠는지, 내가 두고 온 모든 사람들이 많이 아파하지는 않았는지. 왜 처음에 나를 모른 척했고 ‘선호 형’은 또 무엇인지.

    내가…… 네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는데도 너는 왜 돌아가지 않았는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점차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작게 하품을 했다. 내일 일어나서 물어보면 되겠지. 깨어 있는 것이 용할 정도로 기력 소모가 심했던 하루였다.

    나는 그날 이후 처음으로 온전한 꿈을 바라는 대신 곁에 있는 진짜 온기를 붙들고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띠링…….

    잠에서 깬 것은 푸른 새벽빛이 눈을 찔러서였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간신히 눈을 떴다. 눈앞에서 네모반듯한 무언가가 희끄무레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신의 언약]

    ‘주몽’과 네 번의 밤을 보내면 영원히 그의 나라로 건너가야 합니다. (4/4)

    언약의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양측 계약자는 해당 언약을 속히 이행하십시오.

    이 언약을 지키지 않을 시 양측 계약자의 영혼이 소멸됩니다.

    “……뭐?”

    눈물이 말라붙은 눈이 크게 뜨였다. 푸른 여명 따위가 아니었다. 지겹도록 익숙한 시스템 창이 푸른 빛을 뿜어냈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빛나는 글자 하나하나가 뇌리에 박히는 것 같았다.

    그래, 분명 저런 약조가 있었다. 예기치 않은 첫날 밤을 보낸 이후 내가 내 꾀에 넘어가며 체결된 계약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감은 들지 않았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게 왜 여기 있지?’였다.

    분명 그날 죽어가며 마지막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창을 보았다. 그 보상으로 원래 세계로 돌아오며 ‘시스템 창’도 함께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동안 수없이 불러내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대뜸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타나다니. 아니, 애초에 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건…….

    그때 옆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얌전히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자던 주몽이 천천히 눈을 뜨고 있었다. 눈이 부신 듯 살짝 눈가를 찌푸리던 그는 망연한 내 얼굴을 보고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내 뺨을 쥐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형님. 무슨 일이라도…… 잠깐, 이게 무엇입니까?”

    날카로운 눈이 나를 빗겼다. 나는 당황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너, 너 이게 보여?”

    불안한 시선에 그가 의아함과 당혹감이 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대로 숨을 들이켰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상황이었지만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허공을 더듬는 손길은 정확하게 시스템 창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선이 반투명한 창에 정확히 꽂혀 있는 것에 반해 뭔가를 읽어 내리는 낌새는 아니었다.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한자만 접해본 그는 한글을 몰랐다.

    다행인 걸까?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퀘스트 창이라니, 이러다 내가 받았던 지난 퀘스트들까지 들통날까 봐 두려웠다. 일단 이걸 치우고, 헛걸 본 거라고 속이면…….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보이게 했느니라.”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단둘뿐이던 4평 원룸에 낯선 발이 보였다. 하지만 그 자체로 놀랄 겨를도 없었다. 벽을 뚫고 나온 발은 이내 다리까지 드러나더니 곧 부드럽게 전신이 벽에서 나왔다. 흡사 벽을 뚫고 나온 듯한 모양새였다.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더벅머리에 뿔테 안경, 검은 눈동자에 키는 어중간한 모습. 가끔 얼굴을 마주하는 옆집 대학생과 똑같이 생겼지만 그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신…….”

    아무리 불러도 응답하지 않았던 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침음에 그가 맞다는 듯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내가 계속 네 옆에서 지내며 감시했다는 망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이번 일만 아니었어도 너 같은 미물은 평생 재회할 일이 없었을 텐데.”

    그러니 영광인 줄 알라는 저 품성은 시간이 오래 흘렀어도 한결같았다.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전혀 웃지 않는 눈동자가 섬뜩했다.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다시 올 리가 없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음에도 본인의 입으로 들으니 입 안이 썼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에게 휘둘릴 수는 없었다. 나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며 아무 말이나 꺼냈다.

    “이번에는 제 옆집 대학생의 몸을 빌리셨나요.”

    “그럴 필요도 없이 외관만 빌렸지. 현신도 오랜만에 하려니 외형을 다듬는 것도 일이더구나.”

    그가 투덜대며 어깨를 주물렀다. 나는 예상치 못한 말에 몸을 굳혔다. ‘현신’이라니. 영고 때를 제외하면 그간 빙의만 계속했던 신이었다. 그러고 보니 빙의를 할 때면 항상 하늘빛을 띠던 눈동자도 이번에는 검은색이었다.

    갑자기 왜? 다른 세계라 기운을 갈무리하기 한층 쉬운 것일까. 그렇다기엔 걸리는 점이 많았다. 그러나 고민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터벅터벅 걸어오는 신을 향해 주몽이 씹어뱉듯 말을 던졌다.

    “아직 약조한 시일이 다 지나지 않았을 텐데. 여긴 왜 온 거지?”

    “이곳으로 오기 전 내가 신신당부한 것이 있지 않느냐?”

    “…….”

    주몽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혀를 차더니 주몽을 노려보았다.

    “절대 몸을 섞지 말라 했었지.”

    “그건…….”

    “덕분에 일이 아주 꼬였어.”

    나는 살짝 몸을 틀어 그의 시야에 주몽이 들어가지 않게 했다. 나와 몸을 섞어서는 안 됐다니. 주몽은 그 경고를 가볍게 생각하고 나와 밤을 보낸 모양이지만 나는 신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신은 내가 다시 부여로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행여라도 주몽이 ‘신의 언약’에 얽힐까 우려되어 그런 당부를 한 것일 터였다.

    그러나 주몽은 일이 꼬였다는 말에도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신이 한쪽 입꼬리를 삐뚤게 올리며 팔짱을 꼈다. 미묘하게 승리감이 감도는 낯이 의아했다. 주몽이 계약 내용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데려갈 명분이 생겼다며 좋아할 텐데.

    하지만 신은 망설임 없이 시스템 창을 향해 손짓했다. 한글이 모조리 한자로 바뀌었다. 동시에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것 좀 보거라. 저 아이는 너와 첫날밤을 보내던 날 이걸 신의 언약으로 묶었어. 덕분에 다 채워진 오늘, 너는 네 형님을 데리고 부여로 가지 않으면 꼼짝없이 영혼이 소멸되게 생겼구나.”

    “……. 형님께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라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긴 침묵 끝에 튀어나온 것은 잔뜩 긁힌 목소리였다. 차분하던 얼굴이 깨지고 거센 동요가 일었다. 신이 검은 눈을 올려 뜨며 오히려 되물었다.

    “한낱 미물의 안위 따위야 무언들 큰 문제겠느냐? 게다가 이미 죽은 몸이거늘.”

    “…….”

    진실로 의아하다는 태도에 주몽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내 귀에 꽂힌 것은 그가 가볍게 덧붙인 말이었다.

    내가 죽은 몸이라고?

    떨리는 손으로 몸을 마구 더듬었지만 어제와 달라진 점은 없었다. 기억도 모조리 헤집어 봤지만 짚이는 점도 없었다. 오히려 큰 사고를 당해도 매번 살아나 고통스러웠던 적이 부지기수였다. 나는 양손을 맞잡으며 애써 평온한 척 되물었다.

    “잠시만요. 제가 죽었다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시는…….”

    “귀찮게 된 것은 너와 나지.”

    그는 내 질문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원칙적으로 산 자는 명계에 발을 디딜 수 없다. 그걸 깨뜨리면서까지 널 이곳에 데려온 것은 네가 저 아이를 다시 데리고 올 마음이 없다 말했기 때문이었어.”

    그가 나를 손가락질했다. 쿵. 귓가에 둔탁한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얼굴은 단단히 굳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시종일관 묘했던 지난밤이 떠오른 것은 찰나였다. 함께 부여로 돌아가자 이끄는 대신 이곳에서 잘 지낸 것 같다며 조용히 미소를 짓던 모습. 내 이름을 곱씹으며 잘 어울린다던 칭찬. 날 추궁하는 말 아래 감춘 낯.

    신이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비아냥거렸다.

    “설마 하룻밤을 보내고 나니 마음이 바뀌었느냐? 떠나간 마음도 단번에 되돌리다니, 대단한 명기가 따로 없….”

    “거기까지만 지껄이거라.”

    분노를 가득 품은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나는 검은 상념에서 퍼뜩 깨어났다. 주몽의 눈과 손이 파랗게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사태 파악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신에 대한 공포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주몽이 그리될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심기를 거슬러 화를 입을까 두려웠다.

    다행히 신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그는 비웃음을 머금으며 물었다.

    “이게 네가 바란 것이었느냐?”

    주몽이 다시 침묵했다. 그의 목울대가 몇 번 울컥였다.

    그는 더 이상 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내리깐 시선이 맞잡은 손으로 옮겨갔다. 샤프를 잡느라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간지러웠다.

    천천히,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을 덮은 내 손등에 온기가 와 닿았다. 문질러지는 이마가 뜨겁고 또 뜨거웠다. 그 열기 속에서 꽉 억눌린 음성이 새어 나왔다.

    “이러려고….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야.”

    “저는 단지…….”

    말을 이으려던 그가 물기를 삼켰다. 불안으로 쿵쿵 뛰던 가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역시 내가 싫어졌나?

    아니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20년을 본, 내가 직접 키운 아이였다. 그는 예의 바르지만 고집이 세고 마음이 떠나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정말 내가 싫어졌다면 이곳까지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숨을 헐떡이는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잔뜩 웅크린 그는 고작 다섯 살 같았다. 내게 애정을 구걸하던 아주 작고 어린 내 해. 어떤 운명이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르고, 알에서 태어난 스스로에게 의문도 갖지 않고, 오직 나만 바라보며 매일 밤 나를 기다리던.

    저런 모습이 이젠 내가 미워져 부여로 데려갈 마음이 없다 말하는 것일 리가 없었다. 맹목적인 애정이라는,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저주는 너무도 강력해 한 번도 나를 외면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저 안타까웠다. 내가 떠나간 6년 동안 너는 대체 어떤 세월을 보내고 느낀 것일까. 끝내 무엇이 남았기에….

    “……형님께서 원하신다면 이곳에 남으셔도 됩니다. 신의 언약 하나쯤이야 무효로 돌리는 것은 쉽지요. 미리 알았더라면 마음고생 하실 필요 없이 진작에 깨드렸을 겁니다.”

    …네 얼굴에는 애원 대신 결연한 빛이 멍처럼 물들어 있는 것일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이 코웃음을 쳤다.

    “신의 언약이 그리 쉬이 깨질 리가. 다 아는 놈이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을 말하는구나.”

    “믿지 마십시오. 그간 몇 번이나 형님을 겁박하고 속였던 자입니다. 제 힘으로도 충분히 깰 수 있는 언약입니다.”

    그러나 주몽은 단박에 그의 말을 잘랐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가슴이 체한 것처럼 답답했다. 계속 뭔가 놓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비단 이곳까지 찾아온 주몽이 나를 밀어내려 하는 것처럼 보여서만은 아니었다. 언약을 단숨에 부술 수 있다는 주몽과 어림도 없다는 듯이 비웃는 신, 내가 이미 죽은 몸이라는 말과 이곳이 명계인 양 이야기하던 대화. 모든 게 가시처럼 나를 찔렀다.

    평생을 군림한 자는 그 빈틈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신이 나를 향해 몸을 틀었다.

    “정말이지 네놈은 염치도 없구나.”

    검은 눈이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번뜩였다.

    “이번에는 주몽에게 빌붙어 살겠다는 것이냐?”

    “그게 무슨 소리…….”

    “이대로 고구려로 가게 되면 네 영혼은 육신에 붙어 있기 위해 그의 생명력을 끌어다 쓰겠지. 이건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닌 육신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타인의 숨결이 필요하다. 이미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남는다면? 그건 정말 너 스스로 지탱하는 거라고 생각하느냐?”

    손끝에서부터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애써 침을 삼켜보았지만 마른 목구멍은 뻑뻑한 고통만 호소했다. 주몽이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나는 팔을 뻗어 그를 저지했다. 지금 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신이 그런 나를 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언약을 깨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어. 소멸할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것. 지금 저 철모르는 아이가 자신의 생명력을 모두 너에게 주고 자신이 소멸하겠다는 거다.”

    소멸은 그렇다 치고 난데없이 나에게 생명력을 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즉시 반박했다.

    “언약을 깨면 이곳에 남아 있어도 된다는 건데, 그럼 주몽의 생명력이 왜 필요한가요? 제 몸으로 살아가는 건데 대체 왜……!”

    “네가 지내는 이곳을 구축하는 데 쓰여야 하기 때문이란다, 무지한 아이야. 지금껏 네 어머니와 동생이 그리해 주었듯이 말이야.”

    흘러나오는 말은 잔인하도록 단조로웠다.

    “그런 짓을 당하고도 여전히 순진해 빠졌구나. 아주 오래전, 내가 처음 네 영혼을 빼내 올 때 넌 이미 죽었어. 정녕 가벼운 충격만으로 영혼을 분리해 낼 수 있다는 말을 믿었느냐? 그리 쉬웠다면 또다시 빼내야 했을 때 해가람이라는 인간이 널 죽이도록 만들지도 않았겠지.”

    “뭐……?”

    “혹 부여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적은 없느냐? 그때마다 이상한 환상을 보진 않았고? 이를테면 네 가족이라든가. 죽은 영혼이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니 회수하기 위해서라도 명계의 유혹이 제법 들어왔을 텐데.”

    매끄럽게 이어지는 신의 말을 들을수록 숨이 턱 막혔다. 옛날부터 나는 종종 호수에 빠지는 꿈을 꾸었다. 물이 숨통에 들어차면 그리운 얼굴들을 보았고, 그 꿈이 아니더라도 정말로 호수에 들어가 주몽이 기겁한 적도 있었다.

    나는 그것들이 모조리 내가 드디어 미쳐 가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은…… 내가 이미 죽었다는 증거였다니.

    게다가 부여로 건너오기 전 마지막 기억은 계단에서 구른 뒤 뒷목에 닿았던 손길이었다. 영혼을 빼내기 위한 ‘가벼운 충격’ 운운하길래 당연히 낙상을 이야기하는 줄로만 알았다. 사실은 뒷목을 향한 손이 진실을 품고 있을 줄 그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속에서 울컥 신물이 올라왔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지금껏 살아서 내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리도 발버둥을 쳤던가. 억눌러야 한다는 이성적인 판단도 들지 않았다. 비명을 닮은 소리가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그럼 이곳은 뭐야. 내가 죽었다며! 그런데 여기 멀쩡히 살아 있는 엄마는, 가람이는! 내 친구들과 하다못해 네가 모습을 빌린 옆집 남자마저 다 뭐냔 말이야!”

    “그러니 생명력이 필요하다는 게야. 명계에는 꽤 괜찮은 몽술사가 많거든. 생명력을 대가로 너같이 떠도는 영혼들에게 실제와 같은 꿈을 제공해주지. 하급이지만 그들도 신이니만큼 부족함 없는 환상이었을 거다.”

    “서, 설마 그동안 생명력을…….”

    “그래. 네 가족으로부터 받아왔지. 네가 아직까지 구천을 떠돈다는 말에 덥석덥석 정기를 내놓더구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나 신의 얼굴은 소름 끼치도록 태평스러웠다.

    “안 그래도 몇 년 전 크게 죽을 뻔한 적이 있지 않았더냐? 슬슬 가벼운 사고사로 위장해 이 꿈을 끝낼 예정이었건만, 생각보다 네 가족들이 끈질기게 생명력을 나누어 주더구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이런 것들은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지. 죽은 지 스무 해는 더 지난 사람을 위해 제 살을 깎아내다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반사적으로 부정의 말이 새어 나왔지만 힘 따윈 실려 있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증거는 속속들이 떠올랐다. 3년 전 느닷없던 사고와 평소와 달리 현신을 한 신, 건너와도 변함없는 주몽의 외형. 다른 세상으로 오려면 영혼을 꺼내야 한다는데 주몽이 어디서 저렇게 제 몸과 똑같은 육신을 찾았을까.

    그는 그저 제 몸 그대로 온 것뿐이었다. 이곳은 다른 차원이 아닌 그저 명계니까.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돌려보내 준다고 약속했잖아…. 시간을 멈출 수는 없지만 되돌리는 건 가능하다고, 내가 온 그 자리에 그대로 보내주겠다고…….”

    “참으로 멍청한지고. 어찌 멈출 수 없는데 되돌릴 수는 있단 말이냐? 무언가를 되돌리기 위해선 우선 멈추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아주 미세한 순간만 어긋나도 모조리 어그러지는 것이 시간이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않느냐.”

    “…….”

    “속인 것은 미안하구나. 하지만 앞말과의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한 네 잘못도 있느니라.”

    궤변이었다. 나는 오로지 피해자이고 저 말에 휘둘릴 필요는 없었다. 그걸 아는데도 머리 위로 쏟아지는 진실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다.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 눈을 감싸 쥐었다. 울컥대는 목에서 피 맛이 났다.

    “그럼 나는 지금까지 왜……. 대체 왜 그렇게, 내가, 내가 어떻게 부여에서 버티고 그곳을 떠났는데…….”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수천 수백 밤을 그리워하고 몸부림치고 눈물을 흘렸는데. 그러고도 고작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모든 인연을 버리고 끝내 돌아왔다. 돌아와서도 그리움은 대상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였다. 죄책감까지 겹쳐져 때론 죽음을 바라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꾸역꾸역 매일을 살아냈다. 기다리면 열매가 맺힐 것이라고, 그것만 바라고 마른 땅에 물을 주었다. 작은 새싹 같던 묘목을 커다랗게 키우고 주변을 가꾸어 주었다.

    하지만 이 나무에서 내가 원하는 열매는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그걸 모르고 키운 내가 잘못한 거라고.

    매 순간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죽지 못해 산 그 시간은 대체 어디로 흘러갔는가.

    가치를 잃어버린 시간은 끈을 놓친 풍선처럼 공중에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펑 하고 터지는 순간 내 몸도 함께 터질 것이다. 이건 직감이었다. 나는 더 이상…….

    “형님! 정신 차리십시오!”

    그 순간 허공을 허우적대던 손에서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내 흘러간 시간이 모두 모여 타는 듯이 뜨거운 열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자란 나무가 한 치의 틈도 없이 내 풍선을 막아서고 있었다. 나의 모든 것을 부어 기른 나무였다. 어서 자라 고구려를 세워, 나에게 귀환이라는 열매를 가져다주길 바랐던 나무.

    거대한 나무가, 나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자란 아이가 말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제가 그 증거입니다. 형님의 지난 시간들은 모두 제게로 흘러들어 왔단 말입니다…….”

    그가 바로 그 가치 자체라고.

    그제야 나는 열매가 맺히는 위가 아니라 아래를 바라보았다. 나무는 한 품에 안을 수 없을 정도로 자라 있었다. 두 번 살피지 못한 발밑도 예쁜 꽃과 식물들로 아름다웠다.

    모두 내가 일군 것이었다. 그와 이 부여가 그 증거가 되어, 그간의 내 시간이 의미 없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뜨겁고 축축한 손이 나를 껴안았다. 어디선가 쓰고 단 향이 훅 올라오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린 지금, 유일하게 남은 가치가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 떠나시고……. 매일 밤 생각했습니다.”

    “…….”

    “저에겐 되돌려야 할 죽음을 누군가는 존중해야 할 ‘선택’이라고 하더군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누가 말했을지는 묻지 않아도 알았다. 나에게 집이 되어주겠다 말하던 청년은 끝내 나의 집이 죽음이라고 받아들였구나. 목구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곳의 삶을 끊어내기로 결정한 것은 맞았지만 그것은 선택이 아닌 교묘한 강요였다. 그러나 나조차 뒤늦게 알고 만 것을 전후 사정도 모르는 그들이 알았을 리 없다.

    “처음에는 그럴 리 없다 생각했습니다. 형님께서 저를 버리고 그 길을 가실 리가 없다고…… 저와 함께하기로 약조해 주셨으니, 그 믿음을 저버리실 리가 없다고. 형님은, 형님은… 언제나 저를 우선으로 여겨 주셨으니까…….”

    “…….”

    “…형님의 마음이 아닌, 제가 최우선이셨으니까.”

    그가 울음을 닮은 웃음을 흘렸다. 회색빛 웃음소리에는 자조와 후회 따위가 뒤섞여 있었다.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그 맹목적인 애정은 어디서 나왔을까. 대체 무엇 때문에 고작 알이었던 때부터 나를 필사적으로 지키셨을까.”

    나는 멍하니 일렁이는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울었던 때가 언제였지? 모든 것이 흐릿하기만 했다. 손끝으로 눈물을 조심스레 훔쳐냈다. 그가 내 젖은 손에 입을 맞췄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넌 아무것도 몰랐잖아. 네 번의 밤을 받아들인 것도 나이고…….”

    그가 무엇에 얽매여 있는지는 알았다. 모든 일이 다 자신 때문에 벌어졌다 여겼겠지. 그리움에 빠진 자는 스스로의 눈을 가리고 두 귀를 막고 모든 원인과 잘못과 슬픔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나 역시 아주 오랫동안 겪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내 애정의 근원에 강요가 있었다 한들 작고 반짝이던 알이 무슨 죄가 있었을까. 다 큰 뒤에도 모조리 내가 놓지 못한 미련에 의해 벌어진 일들뿐이었다.

    그가 흔들리는 내 뺨을 붙잡았다.

    “거부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자에게 내민 제안 말입니까?”

    자조적인 웃음이 허공에 터졌다.

    “저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말을 해도 형님께서 거부하실 리가 없다는 것을.”

    “…….”

    “그러니 저도 결국은 형님을 옭아맨 쇠사슬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에게 내 애정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졌던 것이었다. 그 당연한 명제를 스스로 깨기까지 그는 얼마나 괴로워해야 했을까.

    “모든 게 거짓이었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선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형님께 유일한 선택이 그 죽음이었더라면…….”

    “…….”

    “저는 단지 얌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속죄라고, 그리 결심했을 뿐입니다.”

    그것조차 못해 매번 피를 내서 육신을 붙들어 놓았지만…. 그가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만 보았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그 어느 꿈속 발치에서 뒹굴던 독배를 떠올리게 했다. 울컥 토해지던 피는 정녕 꿈속에만 존재했는가.

    “속죄라. 그걸 네가 할 필요가 있느냐? 어차피 백 년도 안 되어 죽을 한낱 인간이 좀 이르게 죽은 것뿐인데.”

    신이 지루한 듯 발로 바닥을 툭툭 찼다.

    “그래서 넌 어느 쪽을 바라느냐? 이대로 부여로 가 저 아이의 숨결을 빼앗으며 살 것이냐, 영혼을 집어삼키고 계속해서 안온한 꿈속에서 살겠느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신은 주몽에게 해가 될 일을 할 인물이 아니었다. 내가 이곳에 남는 게 진정으로 주몽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주몽의 영혼을 삼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교묘히 이곳에 남길 종용했을 것이다. 결국 저 끔찍한 결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내가 부여로 가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분명 저 두 가지 외 다른 선택지를 내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늘 그렇듯이,

    [어느 쪽도 고르지 못하겠느냐? 그렇다면 네 영혼이 소멸되어 언약을 깨면 된단다.]

    날 짓누르고 희생을 요구하는 제안의 탈을 쓴 강요일 것이었다.

    [그럼 ‘신의 언약’의 불이행으로 주몽이 피해를 볼 일도 없고, 너의 가족들이 너에게 더 이상 정기를 지원해주지 않아도 되겠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한다면 그 공을 높이 사 주몽이 ‘태자’의 빈 육체를 붙들기 위해 쓴 생명력은 물론이고 네 가족들의 정기마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마.]

    달콤하게 꾸며낸 목소리로 속삭이는 말은 귀가 아닌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졌다. 나에게만 전하는 전언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몽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그는 어느새 다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뜨거운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형님. 저를 믿으십시오. 저에게는 아무런 해도 없을 겁니다.”

    “……해야.”

    “그저 한 가지만 약조해 주십시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형님만을 생각하시겠다고. 저는 정말로 괜찮으니……. 아무것도 앞에 두지 말고 오로지 ‘이제람’의 행복만 떠올리겠다고.”

    나는 죽음을 결심한 얼굴을 아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너는 정말로 나를 보낼 마음을 먹었구나. 내가 그의 거짓말을 눈치챌까 봐, 또다시 불행한 선택을 할까 봐. 나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고 그 사실마저 감추고 있었다.

    대체 내가 뭐길래. 속이 울렁거려 입을 열면 온 내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는 현대에서 태어났고 평생을 부여에 섞이지 못한 다른 세상의 영혼이었다. 그것을 알게 됐는데도 넌 어떻게 한 점의 얼룩 없이 나의 행복을 바랄까. 의문은 조용히 흘러나왔다.

    “……나는 널 평생 속였어. 그런데도 넌 정말 괜찮아?”

    그러나 주몽은 오히려 이상한 얼굴을 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몸이 누구의 것이든 저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사람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영혼이었던 것을.”

    “…….”

    “형님이 어떤 세상의 어느 몸으로 무슨 이름을 가지든, 제 형님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담담한 어조는 때로 진실한 호소보다 더 강력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왜 그토록 부여에 가고 싶었는지 깨닫고 말았다. 이기심 때문에 부여를 버리고 말았다는 죄책감 때문이 아니었다. 밤을 갉아먹었던 그리움 따위도 아니었다.

    ‘내 아들. 기억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단다.’

    ‘네 아빠 같은 사람만 되지 마, 응? 엄만 그거면 됐어.’

    엄마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숨이 점점 가빠왔다. 그 위로 동생의, 선생님의, 친구들의, 한 번쯤 들어본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얹혔다. 그건… 그건…….

    “형님!”

    그 순간 바닥이 우르르 진동했다. 갑작스러운 지진에 주몽이 나를 단단히 붙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조차 놀란 얼굴이었다.

    신이 한 짓이 아니라면 대체 뭐지? 예고도 없는 자연재해일 가능성은 낮았다. 그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방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공간을 찢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았다. 벽에 생긴 구멍은 옆집을 보이는 대신 거대한 공허만 남겼다. 무(無)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 물건은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나는 창문에 생긴 구멍 너머로 하늘 대신 공허가 검은 아가리를 벌리는 것을 보고 끝내 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여긴 정말로 명계가 만든 꿈속이었구나. 내가 현실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은 정말로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 환상을 이루던 모든 공간이 깨졌을 때였다.

    “또 무슨 말로 저 아이를 해치려 하십니까?”

    허공에서 한 여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놀라 그녀를 크게 불렀다.

    “유화 님!”

    유화가 나를 보더니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녀의 옆에는 자라도 한 마리 있었다. 그러나 옅은 갈색을 띤 그것은 자라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잽싸게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 뽈뽈뽈 기어 온 자라가 주몽의 발치를 맴돌았다.

    그가 자라를 집어 들었다. 자라가 입을 벌려 크게 ‘외쳤다’.

    [제가, 제가 모조리 모셔왔습니다! 시키신 대로 하백 님께도 전해드렸어요!]

    “그래. 잘했구나.”

    [그런데 아까 전부터 심장이 두근두근두근 뛰고 토끼의 간이라도 먹은 듯 팔다리가 움직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대체 이게 뭐죠?!]

    주몽이 곤란한 낯으로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자라가 말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 굳은 상태였다. 심지어 자라 등껍질에서는 커피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조합이지? 누가 커피라도 쏟았나? 나는 당황한 눈으로 유화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무얼 잘못 먹였는지 눈 맞은 강아지처럼 시종일관 저리 기어 다니는구나. 덕분에 빨리 도착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무엇이 되었든 그녀 역시 6년 만에 만나는 그리운 얼굴이었다. 항상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유화의 얼굴을 다시 보자 속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감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눈살을 찌푸리고 그녀를 바라보던 신이 그제야 누군지 깨달은 듯 낮은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래. 오랜만에 보는구나. 이곳은 왜 왔느냐?”

    “내가 오시라고 했다.”

    주몽이 대답을 가로챘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여유로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에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해 자만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내가 알던 원래의 주몽이었다. 유화가 언제 다정히 웃었냐는 듯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말을 받았다.

    “신께서 저지르신 모든 일들을 바로잡기 위해서이지요.”

    “허, 감히 네가?”

    “창조주께서 오실 겁니다.”

    손끝이 움찔 떨렸다. 창조주? 그 명칭만큼이나 거리감이 느껴지는 존재였다. 퀘스트 창에서나 보던 존재가 어떻게 이곳에 온다는 것인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천계의 일원이어서 그런지 나보다 더 믿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가 가벼이 코웃음을 쳤다.

    “감히 네가 함부로 입에 올릴 분이 아니다. 그분께서 이 사소한 일에 오실 리가 없지 않느냐.”

    [내 손자가 직접 나를 부르는데 그것이 어찌 사소한 일이겠느냐.]

    첫 감상은 모든 공기가 유의미한 무게를 가지고 주변을 짓누르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중후하지만 성별을 짐작하기 힘든 음성이 주위를 가득 채웠다. 무채색으로 가득하던 빈 공간이 순식간에 보이지 않는 생명으로 가득 찼다. 듣는 것만으로도 햇살과 바람과 풀 내음이 한꺼번에 느껴졌다. 다만 내가 평소에 알던 옅고 자연스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날것 그대로의 존재가 사방에서 날 압박했다. 형체는 없었지만 모든 게 창조주 그 자체였다.

    나는 그제야 신이 왜 나를 ‘미물’ 따위로 여기는지 깨달았다. 이러한 존재감을 갖고 위에서 군림하는 이들이라면 몇십 년도 안 되어 생을 다하는 작고 유약한 인간을 미물로 취급할 만했다.

    “창조주시여.”

    가장 먼저 무릎을 꿇은 것은 유화였다. 사태를 파악한 신이 뒤를 이었고 나는 어물어물 몸을 낮추다 주몽의 손에 의해 끌어 올려졌다.

    그는 고개조차 숙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따스한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대상이 내가 아님은 자명했다. 아마 내 뒤에 서 있는 그의 손자를 다정히 어루만지고 있을 터였다.

    [무사히 자라고 있다는 보고는 들었지만 이리 만나는 것은 처음이구나. 과연, 천가(天家)의 일원답게 잘 자랐어.]

    “다 창조주께서 굽어살펴 주신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내용과 달리 조금의 고저도 없는 말투였다. 나는 몸을 움츠렸다. 혹시라도 창조주가 주몽의 태도에 노기를 비칠까 두려웠다. 유일하게 만나본 신의 성격은 포악했고 ‘창조주의 분노로 세상 멸망’ 따위의 문구만 봤던 탓이었다.

    다행히 우려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듯 와 닿는 공기가 무겁게 일렁였다. 기민하게 눈치챈 신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여, 여긴 어쩐 일로 오셨나이까. 미리 언질을 주셨다면 제가 맞이할 채비를 해두었을 텐데요.”

    [내 손자를 보러 오는데 왜 네게 대접을 받느냐. 필요 없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순식간에 권태가 깃든 음성이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신을 쳐냈다. 악감정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신경 쓸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나온 무심함이었다. 신이 더더욱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떨었다.

    저 뻣뻣한 목도 저렇게 굽힐 수 있는 거였구나. 나는 기묘한 기분으로 그 등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슬프고 또 화가 났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상에 빠져 있기엔 공간을 가득 채운 존재가 너무나도 위대했다. 나는 바람 하나라도 잘못 들이쉴까 조심하며 숨을 죽였다. 지루함이 가득하던 음성은 다시금 다정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래, 어인 일로 나를 불렀느냐? 하백이 말하길, 자라 저놈이 하도 난리를 치길래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지 뭐냐.]

    “영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당장이라도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으니.”

    가벼운 농이 섞인 음성에 돌아온 답은 서글픈 미소였다. 주몽이 눈을 내리깔며 애처로이 웃었다. 별 같던 눈동자가 가려지고 눈물에 짓무른 눈가가 더욱 붉어졌다.

    나는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를 악문 턱이 슬픔을 삼키듯 가늘게 떨리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고 달랠 뻔했다.

    반평생을 봐온 나도 이러한데 다른 이들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처연한 음성이 심장 깊이 그대로 파고들었다.

    “생을 끝내는 것은 억울하지 않으나 살아생전 존경하던 할아버님 한 번 뵙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침통하여 이리 만남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늘이 널 위해 움직이는데 네가 죽긴 왜 죽는단 말이냐? 설령 보다 이르게 인간의 몸을 벗는다 하여도 너의 영혼은 곧장 천계로 인도될 것이다. 넌 아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느니라.]

    당황한 듯 곧장 돌아온 호통은 부드러이 손자를 달래며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주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목숨이 문제가 아닙니다. 제 영혼은 신의 언약에 묶여 있는데 그것을 지킬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반사적으로 몸이 먼저 떨렸다. 내용이 귀에 들어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나는 망연히 그를 쳐다보았다. 언약을 깨는 것은 이행할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리 속삭이던 신의 음성이 귓가에 바로 울리는 것 같았다.

    자신에겐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을 거라고 재차 강조하던 사람은 어디 갔는가. 거짓이라 확신하는 것과 당사자로부터 그걸 인정하는 말을 듣는 것은 확연히 달랐다. 하물며 나를 위해 가지 않아도 될 길을 스스로 걸어가려는 자의 처연한 목소리로는.

    공기가 짧게 요동쳤다. 주몽을 샅샅이 훑고 내려간 그것은 빠르게 나를 한 바퀴 둘렀다.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목소리가 물었다.

    [저 아이를 네 나라로 데려가면 되는 것을. 무어 다른 곤경이라도 겪고 있는 것이더냐?]

    창조주답게 그는 단숨에 언약의 내용까지 파악했다. 더불어 이어진 당연한 해결책은 내가 가지 않을 리 없다는 속내를 담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내 의사는 고려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빠르게 그것을 눈치챘다. 그저 개미를 다루는 데 있어 개미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손자를 앞에 두고 다정한 조부의 모습을 내비치고 있지만 본질은 나를 부리던 신과 같다. 악의는 한 줌도 섞여 있지 않은 순수한 말투가 그것을 증명했다.

    이미 익숙한 취급이라 상처조차 받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들과 나의 존재가 너무나도 달랐으니까. 그러나 주몽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온 뒤 나를 가리듯 살짝 몸을 틀었다.

    “이분은 제가 친형님처럼 모시고 따르는 분입니다. 지금까지 목숨 걸고 절 길러주시고 지켜주셨지요. 아마 형님이 없었더라면 저는 마구간 지푸라기를 조각난 알 껍데기로 더럽히는 것으로 세상에 난 소임을 다했을 겁니다.”

    아직 습기를 머금고 있지만 한층 단단해진 목소리는 시선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신의 품으로 돌아가셨는데…….”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감정을 갈무리하듯 가늘게 떨렸다.

    “이제야 겨우 그 슬픔을 추슬렀는데 얼마 전 형님의 영혼이 아직 명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하여, 신에게 부탁해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저 잘 지내시는 모습을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쉬이 넘길 수 없는 진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 기억이 난다. 넌 저곳의 영혼이 아니구나. 내 분명 차원의 문을 열어준 일이 있었지.]

    무게감 있는 음성이 귓가에 꽂혔다.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토록 거대한 존재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생명의 본질에서 오는 기묘한 희열이 척추를 관통했다. 동시에 모든 시작의 문을 열어준 자를 마주한 짙은 원망도 함께 느꼈다.

    그럼에도 그 원망을 온전히 토해낼 수 없는 무력감, 자조, 절망. 감당하지 못할 감정들에 흔들리는 몸을 주몽이 가만히 지탱했다. 어깨를 감싼 손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그 깊이를 알고 있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에게 기대어 눈을 감았다. 주몽이 마저 말을 이었다.

    “그의 숭고한 희생은 마땅히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지킬 수 없는 보상을 제시하고 끝내 환상으로 오감을 속인 뒤 그의 가족에게서 생명력마저 갈취했지요.”

    […….]

    “저는 비록 육신에 머물러 있지만 당신의 피를 이어받은 영혼이기에 언제나 하늘의 도리를 지키며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 제가 어찌 이 세상의 신이라는 자의 극악무도한 행태를 보아 넘길 수 있겠습니까? 제 선에서는 처리할 일이 아니라 판단되어 창조주께 전해드리오니 부디 하늘의 두려움을 일깨워주십시오.”

    살짝 숙인 고개는 순종적이고 신실해 보였다. 오로지 하늘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일생을 바친 성자의 모습이 이러할까. 그의 평소 행실이 절대 신의 종이라고 여길 수 없었다는 것을 아는 나로서도 넋을 빼앗길 정도로 완벽한 태도였다.

    하물며 그 믿음을 온전히 받는 자는 어떠할까.

    [허허… 그래, 그랬구나.]

    손자를 귀애하는 조부는 사탕발림 속 거짓을 분간해낼 의지도 없어 보였다. 대체로 온화하던 공간은 순식간에 그 모양을 달리했다. 앞뒤를 분간할 수 없던 공간이 형체를 갖추고 뾰족하게 솟은 칼날이 모조리 한 방향을 향했다.

    그 가운데 꿇어앉은 자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벼락같은 음성이 내리꽂혔다.

    [귀중한 ‘종이’를 잃어버렸을 때 너를 내쳤어야 했다. 수습한답시고 날뛰는 것을 내버려 두어선 아니 되었어.]

    “차, 창조주시여… 그, 그런 게 아니오라, 저는 그저 운명이 뜻대로 흘러가도록 이끌고자……!”

    [이게 네가 수습하는 방법이었느냐? 무고한 생명에게 거짓을 말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응축된 분노가 나직하게 깔렸다. 구원을 바라는 몸짓이 지탱할 곳을 잃고 허우적댔다. 어울리지 않는 억울함을 가득 담은 그것은 보잘것없는 변명이 되어 처절히 터져 나왔다.

    “저, 저는 그저 천계의 질서를 생각하여…. 한낱 미물에게 과분한 보상을 내리면 추후 운명이 어찌 얽힐지 모릅니다! 대의를 맡을 자는 모두 정해져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까.”

    [누가 들으면 네가 그 대의를 정하는 줄 알겠구나! 강등까지 당한 한낱 신 주제에 네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거라. 감히 바라서도 안 될 것을 신경 쓰느라 정녕 중히 여겨야 할 본분을 저버렸구나!]

    세상 그 자체인 자의 분노는 매서웠다. 기(氣)가 뒤틀리고 바닥이 우릉우릉, 진동하며 흔들렸다. 알 수 없는 음성이 고막을 쾅쾅 때렸다.

    나는 두 귀를 감싸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분노가 나를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존재하는 모든 공기가 폐 속에 돌덩이처럼 차올랐다.

    컥컥대는 나의 하관을 붙잡은 주몽이 푸른빛을 흘려 넣었다. 숨 대신 삼킨 그것은 따스하게 몸 곳곳에 퍼졌다. 간신히 열린 귓가에 가장 먼저 꽂혀 든 것은 겁에 질려 모든 것을 망각하고 만 자의 회피였다.

    “그, 그때 분명 다른 차원을 열어 주신 것은 창조주님이셨습니다! 제게만 책임을 강요하실 순 없사옵니다!”

    [건방진 것! 천계에서 내치려던 날 붙잡고 단 한 번만 기회를 달라며 열흘 밤낮으로 읍소한 것은 누구였느냐? 그 열의를 보아 문을 열어주었지. 영혼을 제멋대로 다뤄도 눈감아 준 것은 신이 된 자로서 당연히 합당한 보상을 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리 명계의 환상에 던져 놓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쿵 얻어맞은 것 같았다. 창조주 또한 신과 같은 족속이라 영혼 하나쯤은 대의에 희생되어도 괜찮다 여기는 것은 분명했다. 신이 내 영혼을 꺼냈을 때 반대하는 대신 차원의 문을 열어 준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존재의 격차라는 탈 뒤에 숨어 주어지는 폭력과 그 폭력을 ‘당연함’으로 받아들이도록 학습한 것은 내가 받지 않아도 될 피해였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내 탓이 아니야.

    내 잘못은 티끌만큼도 섞여 있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차올랐다. 잘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나는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마주하고 내 죄를 찾기 위해 스스로를 뒤지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비록 ‘한낱’ 인간일지라도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얻을 자격이 있었다. 돌고 돌아 얻은 깨달음이 가슴 속에 울음처럼 차올랐다.

    주몽이 안타깝다는 듯이 손을 모아 가슴 앞에 붙였다. 살포시 드리워진 속눈썹이 가늘게 흔들렸다.

    “세상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자가 어찌 모두를 아우르는 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지……. 장차 무고하게 피해를 입는 이가 늘어날까 두렵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구나.]

    “제게 넘겨주십시오. 이리 와주신 것만으로도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온데 어찌 이 이상 마음을 쓰시게 하겠습니까. 제가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만들겠습니다.”

    애석한 빛을 띤 얼굴이 정말 그 외의 의도는 없다는 듯 눈꼬리를 내려뜨렸다. 나는 그 순수함이야말로 속내를 감추는 데 가장 능한 가면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름 아닌 내가 홀려서 어화둥둥 달래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넘겨질 자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우그러진 공간에 갇힌 신이 사지를 꿈틀거렸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민낯을 드러낸 발악이 가감 없이 쏟아졌다.

    “닥치거라! 차, 창조주시여! 어찌 충직한 제 말이 아니라 저 어린놈의 견해를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주몽의 운명을 짠 자는 저였습니다, 저토록 무사히 자랄 수 있도록 굽어살핀 것은 모조리 저였단 말입니다! 그 공을 높이 사 부디 선처를!”

    [시끄럽구나.]

    명백히 흥미를 잃은 음성에서는 옅은 분노조차 쓸려나가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펼쳐진 가관스러운 형태에 분노할 힘도 사라졌다. 내가 연약한 알을 말발굽 아래서 지키고 사람 구실을 하게 키워낼 동안 내려와 보지도 않았으면서 참 당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심으로 신은 자신이 모든 것을 만들어 냈다고 믿는 듯했다. 나는 그저 미물이라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는 신으로서 그 길을 만들어 주었으니까. 내가 그 길을 걷든 뛰든 기든 간에 발 디딜 땅을 마련해 주었으니 모든 공은 자신의 것이라는 태도가 끝까지 그다워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창, 창조주시, 윽, 우욱, 으…! …….”

    가장 먼저 잃은 것은 목소리였다. 처절한 외침이 사라지자 주변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짙은 침묵 속에서 이목구비가 무너지고 손끝이 무르게 변했다. 팔다리가 끊어지고 그 사이에선 피 대신 푸른 안개가 새어 나왔다.

    나는 한때 나를 두려움에 밤을 지새우게 했던 존재가 진흙처럼 뭉개지는 것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한 줌의 흙색 덩어리로 변한 몸을 두고 푸른빛은 공중을 방황했다. 주몽은 손을 들더니 허공을 그어 내렸다. 찢어지듯 벌어진 공간 속에는 짐작도 하지 못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이게 왜 여기…….”

    “형님께서 주신 것인데 어찌 소홀히 다루겠습니까.”

    청산유수로 돌아온 대답과 달리 보관되어 있는 빵 봉지는 마구잡이로 뜯어져 있었고 커피는 어디다 쏟았는지 사 분의 일만 차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제야 지난 밤 난데없이 등장한 꿀 스틱의 출처를 깨달았다. 먹으라고 줬더니만…….

    그는 원래 아메리카노가 담겨 있었을 플라스틱 컵을 꺼내 들더니 남은 커피를 바닥에 쏟았다. 그 즉시 뭔가가 쌩하니 발등을 스쳐 지나가더니 고개를 박고 커피를 할짝이기 시작했다. 구석에 박혀 오들오들 떨던 자라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왜 커피 냄새가 그렇게 나나 했더니 사 분의 삼은 얘가 먹어 치웠구나. 그래도 일단 먹여도 되는지 몰라 등껍질을 조심히 잡아 올렸다.

    [익, 놓으십쇼!]

    어찌나 힘이 좋은지 버둥거리는 것을 붙잡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내가 씨름하는 사이 주몽은 빈 컵에 푸른 연기를 옮겨 담았다. 나는 뚜껑이 딸각 닫히고 빈틈마저 엷은 막으로 감싸이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위로 뜨거운 빛줄기가 내렸다. 태울 듯한 열기는 밀봉된 영혼을 점차 하얀빛으로 바꾸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신력이 거둬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희미한 알람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신의 언약]

    양측 계약자는 해당 …을 속히 이행하십… 오.

    이 언약을 지키지 않을… 양측 계약자의 영혼이 소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형용할 수 없는 긴장과 경악에 저도 모르게 옷가지를 꽉 쥐었다. 손아귀에 잡히는 것이 뜨거운 손으로 바뀌었을 땐 익숙한 음이 마치 경고음처럼 연달아 울렸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無’의 언약]

    언약의 심판자는 ‘존재하지 않는 자’입니다! 언약에 깃든 힘이 사라집니다!

    언약이 파괴되었습니다!

    시스템을 구성하던 힘이 끊깁니다. 3, 2, 1…….

    “이, 게 무슨…….”

    “‘신의 언약’을 깨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언약을 말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심판자를 잃은 계약이 자연히 해지되지요. 형님의 판단력을 흐릴 작정이었는지, 아니면 두 번째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 여겨서인지 그가 한 가지라 단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물론 이제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그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그러나 나는 웃지 못했다. 몰아닥친 일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엔 고통의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

    내 사지를 묶던 속박이 완전히 풀렸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살아나 나를 윽박지를 것 같은데.

    눈이 저절로 ‘신’이었던 영혼으로 옮겨갔다. 커피 찌꺼기와 섞인 연기는 그저 당장이라도 내버릴 수 있는 쓰레기 같았다. 나를 수없이 짓밟았던 자가 아니라…….

    주몽이 컵을 가볍게 흔들었다.

    “제가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겐 아무런 해도 없을 거라고.”

    그게, 이런 거일 줄은… 몰랐지……. 나는 마지막으로 떠오른 시스템 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스템이 종료되었습니다.

    그 짧은 문장은 마치 정말로 이 모든 것이 끝났다는 선언 같았다.

    건드리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손을 뻗은 주몽이 반투명한 창을 파삭 깨뜨렸다. 빛 조각이 산산이 흩어졌다. 날 서 있던 공간은 천천히 원래 모습을 찾았다. 햇빛을 닮은 생명의 냄새가 다시 코끝을 간질였다. 한숨 섞인 음성이 잔잔히 깔렸다.

    [네가 있어서 참말로 다행이구나. 아니었다면 이대로 몇백 년이 흘러도 몰랐을 게야. 이 자리는 지독히 무료하고 또 무료해 잠에 취하지 않고선 세월을 버텨낼 수 없으니.]

    “푸른 피가 흐르는 영혼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주몽은 원하는 것을 얻어낸 후에도 끝까지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조부는 크게 기꺼워했다.

    [이리 장성한 것을 보니 마음이 놓여. 이만 천계로 올라오지 않겠느냐? 이리 출중하니 조금 이르게 천계에 올라와도 흠 잡힐 구석은 없을 게다. 무엇보다 이 세상을 다룰 자가 사라지지 않았느냐. 너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구나. 해모수에게 이 자리를 맡기기엔 그 애가 너무나……. 음.]

    부드러운 바람이 흩어지더니 침음을 흘렸다. 듣지 않아도 뒷말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비 앞에서 자식의 흠을 입 밖에 낼 자는 없었다. 모두가 하고픈 말을 꿀꺽 삼켰다.

    불편한 침묵을 깬 이는 주몽이었다. 곤혹스러운 미소가 얼굴을 조심스레 물들였다.

    “제겐 아직 과분한 자리입니다. 무엇보다 아직 제 나라가 완벽히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저를 믿고 따라와 준 자들을 위해서라도 조금 더 세상에 머무르며 소임을 마치고 싶습니다.”

    때론 위에서 다스리는 것보다 밑에서 함께 머물며 해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다. 생명을 소중히 여겨 창조주께 직접 고발까지 한 행동과 맞아떨어지는 의견이었다.

    어떡해, 우리 해가 진짜 다 컸나 봐. 나는 짧은 감격에 젖었다. 내가 없으면 나라고 뭐고 다 필요 없을 것처럼 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역시 직접 나라를 세워보니 없던 애국심도 생겼나 보다. 두고 온 그의 벗들이 들으면 뒤로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나는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홀딱 빠진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허허, 네 뜻이 그렇다면야 내 어찌 말릴 수 있을까. 부디 오래 기다리게만 하지 말거라.]

    흔쾌히 떨어진 허락에 주몽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만족스럽게 웃은 바람이 또 다른 고민을 시작했다.

    [그럼 누구에게 이 자리를 맡겨야 할까……. 골치가 아프구나.]

    “창조주시여. 드릴 물건이 있사옵니다.”

    그 순간 높고 단단한 목소리가 허공을 시원하게 갈랐다. 결연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 유화가 주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낡은 두루마리를 건넸다. 끈으로 대충 휘감아 둔 모양새와 달리 살짝 벌어진 틈으로는 척 봐도 고귀해 보이는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받은 그녀가 두루마리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바쳤다. 허공에 둥실 떠오른 종이 뭉치가 펄럭이며 펼쳐졌다. 기다란 종이가 허공을 한 바퀴 휘감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거기에 쓰인 글씨가 저절로 발광한다면 더더욱.

    빛무리는 두루마리가 펼쳐진 것만큼이나 빠르게 다시 말렸을 때 끝났다. 옅은 분노가 섞인 의문이 뒤따랐다.

    [하백의 여식이구나. ‘종이’를 감추다니, 천계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댄 것은 천벌을 받아도 마땅한 일인 것을 알 텐데. 직접 나에게 바치다니 무슨 생각이더냐?]

    ‘종이’? 고개가 홱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잘 말린 종이는 더 이상 빛을 흘리지 않았지만 창조주가 말한 이상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그러나 왜 유화가 저것을 가지고 있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신이 잃어버렸다고……. 멍하니 눈을 뜨고 있는데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미안함이 담긴 눈이 나를 피하더니 허공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종이를 감춘 것은 만신의 지탄을 받을 죄이옵니다. 무슨 벌을 주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그 일로 무고한 영혼이 끌려올 줄 몰랐사옵니다. 그것을 안 뒤에도 이미 어그러진 운명이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치달을까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요.”

    […….]

    “만일 종이가 도로 신의 손으로 돌아갔다면 저 영혼은 어떻게 되었을지……. 짧은 식견에도 저자가 합당한 보상을 치를 것이라 믿긴 어려웠사옵니다.”

    [으음…….]

    “결국 이 종이로 가엾은 이를 구하고 신에게 죗값을 치르게 할 수 있었으니 저는 제 행동을 후회하지 않나이다.”

    나는 그녀의 마른 등과 목, 형형히 빛나는 두 눈 따위를 바라보았다. 몸을 낮추고 있음에도 전혀 비굴해 보이지 않았다. 드높은 자를 마주하고도 굴종하지 않는 모습은 같은 자리에 꿇어앉아 있었지만 몹시도 달랐던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다.

    깊은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떨리는 팔을 감싸며 툭 끼어들었다.

    “창조주시여. 저는 괜찮으니 유화 님을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말을 꺼낸 것은 충동적이었으나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녀가 ‘종이’를 빼돌린 것은 내가 이곳에 오기도 전의 일이다. 그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뻔히 아는데도 그녀를 원망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정말로 ‘종이’가 신의 손으로 돌아왔다 한들 내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나는 이미 죽은 몸이었다. 중간에 쓸모가 없어진 영혼은 환상 속에 살게 해주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그대로 폐기 처분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젠 그저 누굴 탓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이미 주어진 모든 원망과 미움을 소진한 지 오래였다. 나는 유화를 보며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린 인간아. 내 모든 결정은 네가 감히 좌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주몽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나를 가리려고 했다. 그러나 따스한 바람이 우리를 한 바퀴 감싸고 돈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갔으니 그 점을 보아 죄를 묻진 않겠노라.]

    “……이 은혜 잊지 않겠사옵니다.”

    가늘게 떨리던 그녀의 눈꺼풀이 그대로 감겼다. 미안함과 다정함이 범벅된 눈이 다시 열렸을 때는 나를 피하지 않았다.

    창조주의 은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가벼운 만족감에 취한 그는 이번 기회에 모든 흠을 메우고 가리라 결심한 듯했다.

    [무엇보다 네겐 오래전부터 빚이 있었지.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줄 터이니 말해 보거라.]

    창조주가 유화에게 질 만한 빚이라곤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겠다는 말은 놀랄 만한 제안이었다. 물론 망나니 아들을 두고도 사후 대처가 미흡해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하면 하나가 아니라 세 개는 들어줘도 부족하겠지만.

    모두가 그녀를 주목했지만 긴장감은 감돌지 않았다. 인간 세상으로 쫓겨나 별궁에서 갇히듯 오래 살았으니 이제 그만 그 세월을 청산하고 싶다 말하지 않을까 싶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제게 세상을 돌볼 기회를 주십사 청하고 싶사옵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 것이었다.

    “또 다른 간사하고 간악한 이가 신을 맡을까 두려워하느니 제가 직접 발 딛고 살아온 땅을 지키고 싶사옵니다. 제 자식이 머무를 땅을 어미의 손으로 지킬 수 있게 부디 관용을 베풀어주십시오.”

    간절한 호소가 이어졌지만 나는 확신했다. 그녀는 주몽 때문에 대의를 짊어지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몽의 어머니라는 역할을 내세운 것은 창조주를 설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녀가 세상을 짊어지겠다고 말하기까지 어떠한 결심이 오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단단하고 곧은 심지만큼은 굳이 캐내려 하지 않아도 보였다. 무엇보다 곱게 모은 두 손에서 채 숨기지 못한 열망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세계의 탄생과 동시에 눈을 뜬 자가 그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했을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고민은 길게 이어졌다. 온화하지만 침묵을 지키는 바람 사이에서 유화는 눈을 감았다. 체념의 빛이 드리워지는 찰나 신실한 목소리가 말을 얹었다.

    “저로서도 어머니께서 맡아 주신다면 한결 마음이 놓일 것 같습니다, 할아버님.”

    ‘할아버님’을 말하는 목소리가 나긋나긋했다. 공기가 가늘게 떨렸다. 관습과 관념 사이에서 헤매던 마음을 끌어 올리는 것은 작은 도움만으로도 충분했다. 꽃내음이 팡팡 터지고 낮은 웃음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허허, 그리하거라. 하백이 참으로 좋아하겠구나. 제 가문의 여식이 영광된 자리에 올랐으니.]

    아마 그의 조부께서는 하나뿐인 손자가 창조주라고 꼬박꼬박 부르는 것이 불만족스러우셨던 모양이었다. 오늘 처음 만났으면서, 양심도 없지. 심지어 손자가 부르기 전까지는 내려와 보지도 않았으면서. 오랜만에 내 안의 육아의 피가 깨어나 분노를 일으켰다.

    [그나저나 언약이 깨졌으니 저 인간은 어찌하면 좋을꼬. 창조주가 되어 천계의 잘못을 책임지지 않을 수 없구나.]

    다음 빚 청산이 나를 향하지 않았다면 한마디 꿍얼거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가온 나의 차례에 덜컥 몸이 굳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나의 ‘처분’에 관한 것이었다. 학습된 몸이 더 이상 날 옭아맬 자가 없다는 것을 단번에 인식하지 못했다.

    “형님. 괜찮습니다.”

    익숙한 손이 굳은 팔을 주물렀다. 나는 차츰 어둠 속에서 깨어났다. 돌아온 시야에 주몽이 가득 담겼다.

    또다시 그 얼굴이었다. 갈망을 가득 채우고서 나를 놓아줄 결심을 말하던 얼굴.

    지지 않는 얼룩처럼 그리움이 물든 얼굴을 하고서 너는 죽음을 숨기고 내 행복을 바란다. 옅은 희망의 불은 불씨를 내비치는 것만으로도 죄악이기에 수없이 불을 죽이느라 덴 맨손이 내 손목을 단단히 잡았다. 나는 그 손길이 나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당부를 기억해 달라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만을 생각하라고. ‘태자’도 ‘형님’도 아닌 ‘이제람’, 나의 행복만을 떠올려 달라고.

    눈을 마주했던 그가 천천히 내 손목을 놓았다. 몸을 돌리고 투명한 컵을 들어 올리는 몸짓이 느릿했다. 안에 갇힌 하얀 연기가 몸부림치듯 일렁거렸다.

    “그의 모든 희생은 저를 위한 것이었으며 고통은 겪지 않아도 될 것이었습니다. 늦었지만, 죄인의 생명력을 써 이제라도 그가 바라는 것을 들어줄까 합니다.”

    [그러려무나. 원한다면 기억을 잃고 생을 다 할 때까지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몽술사를 불러주마.]

    고구려로 갈 필요도 없고,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도 없다.

    달리 말하면 나는 어디든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처음으로 주어진 온전한 선택의 순간이었다. 그 앞에 서서 나는 내가 지나왔던 모든 길을 떠올렸다.

    지나치게 수동적인 삶과 그것을 위화감 없이 받아들이는 나를 만들었던 과거들. 그리움과 죄책감, 그 모든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으며 지나치게 괴로워했던 밤. 돌아오고도 원인 모를 답답함에 가슴을 쥐어뜯었던 시절들과 그 속박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세월.

    그것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 간극을 인정하게 하는 눈은 절대 스스로 뜨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잔잔하던 호수에 던져 넣은 돌은 누가 쥐여주었는가. 나는 어째서 그 돌을 던져넣었는가.

    튀어 오른 물방울에 반사된 나를 보았다. 뿌옇게 흐려진 물을 헤치고 진탕이 된 호수 안에서 진실을 꺼내 들었다. 나는 작게 헐떡였다. 역류하려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기필코 해야 하는 일을 먼저 뱉어냈다.

    “……그전에 제 진짜 가족을 만나고 싶어요. 이런 허상이 아니라…. 정말 숨을 쉬며 살고 있는 제 가족이요.”

    이전에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갔다. 과연 신이 짓누르기 이전의 나는 달랐던가?

    “그다음에, 선택해도 될까요?”

    대답 대신 내려온 것은 조금 전에도 보았던 빛줄기였다. 반짝이는 빛이 컵 안에 맴돌 때마다 하얗던 영혼의 색이 차츰 회색빛으로 빛깔을 잃어갔다. 빠져나온 생명력은 그대로 푸른 연기가 되어 내 발치를 감쌌다.

    [너에게 꿈을 선물하마. 이 꿈은 환상 따위가 아닌 네 핏줄의 실제 꿈이니라. 그 속에서 원하는 만큼 과거를 보고 현재를 살피거라. 원한다면 앞에 나설 수도 있겠지. 어떠한 방향으로든 네 결심이 섰을 때 그 꿈은 깨질지어니.]

    한껏 커진 음성이 귓가에 북소리처럼 둥둥 울렸다. 연기가 천천히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주몽이 나를 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그는 ‘잘 다녀오라’ 같은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시 못 볼 것을 확신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 네게 그런 확신을 심어 주었을까. 가슴이 꽉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손이 내 뺨을 감쌌다. 손바닥은 메마르고 또 메말라 있었다.

    “…가시기 전에, 한 가지만 여쭙고 싶습니다.”

    “…….”

    “제 연심이…… 형님을 떠나게 만들었습니까?”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이 네가 나에게 솔직히 답해달라던 단 하나의 질문이라는 것을.

    너는 이게 묻고 싶어 그 먼 길을 자처해 내게로 왔구나.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지난 6년간 그는 내 안식처가 죽음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부정했다. 그의 말처럼 단순히 내가 그를 떠날 리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의 연심은 단순한 사랑이 아니었다. 부모, 형제, 정인을 향한 모든 감정이 뒤섞여 그를 이루는 세계를 향한 당연한 갈망을 만들어냈다. 그러니 그 갈망이 되레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 너는 무너지고 싶어 내게 이 질문을 던졌다.

    그는 내게 물으면서도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이미 답은 그의 안에서 완성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내 말을 기다리는 것은 꺼멓게 죽은 심지를 잘라내지 못해서……. 내가 그랬듯 지긋지긋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였다.

    내게 확신을 얻는 순간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놓고 완전히 무너져 내릴 수 있으리라.

    이제야 네 눈에 왜 그리 죽음이 차 있었는지 알겠다. 나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목까지 차오른 푸른 연기가 폐를 채우는 것이 더 빨랐다. 그 눈을 마주하며 말없이 눈을 감았다.

    “…….”

    그럼에도 끝까지 원망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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