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마리의 일기
一.
오늘부터 일기를 쓰기로 했다. 글이 좀체 늘지 않아 고민이라고 하니(내 고민은 아니고 글을 가르쳐 주시는 협보 형님의 토로에 가까웠다) 주몽 형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러면서 ‘형님께서 날 무릎에 앉혀 두시고 친히 일기 쓰는 법을 알려주셨지…….’ 하며 추억 팔이를 시작하셨는데 정말 하나도 안 궁금했다. 고개를 돌리자 협보 형님도 나랑 같은 표정이어서 동지애가 조금 생겼다.
二.
오늘은 일부러 획순을 거꾸로 썼다가 혼이 났다. 장차 유능한 신하가 되려면 글을 잘 익혀놔야 한다는데. 내가 높은 자리에 오를 일도 없고,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 저하께서 나와 오이, 협보, 주몽 형님을 불러 놓고 남쪽으로 떠나라 하셨는데 그거랑 관련이 있을까?
三.
오늘이 부여에서 마지막으로 쓰는 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자는데 갑자기 주몽 형님이 깨워서 가람 저하 처소에 갔다 왔다. 사실 난데없이 푹 젖어 물비린내를 풍기는 형님의 모습에 놀라 간 건데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가람 저하가 마태령이랑 그런 계략을 짜고 있었을 줄이야. 당장 돌아가서 일렀더니 주몽 형님이 고민하시다가 당장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 협보 형님이랑 무언갈 심각하게 이야기하던데, 나는 오이 형님을 모시러 가느라 잘 듣진 못했다.
태자 저하랑 같이 안 가는지는 쪼끔 궁금했지만 주몽 형님께서 잘하시겠지.
四.
이게… 무슨…… 일이지…? 분명 물고기 다리까지만 해도 노년에 먹거리 걱정은 없겠다며 좋아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빠르게 문질러봐도 일기장에 묻은 핏자국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럼 이게 모두…….
五.
지난 며칠간 일기를 쓰지 못했다. 예감이 안 좋다는 주몽 형님의 말에 황급히 부여로 돌아왔는데 태자 저하께서…….
다행히 목숨… 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셨다. 이게 목숨을 잃은 게 아니고 뭔가 싶지만….
어쨌든 다시 살아나실 수 있다니까. 그거면 됐다.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하지만 당장 가지는 못했다. 듣기론 태자 저하를 저대로 유지(맞는 표현인지 모르겠다)하기 위해서는 주몽 형님의 피가 계속 필요하다고 했다.
신목이 필요한 건 그래서였다. 참고로 신목은 교대로 지키는 무사가 있었지만 가람 저하가 한 명만 남기고 싹 다 목을 베어버렸다. 남은 한 명조차 벌벌 떨며 나무를 자르고, 이러다 천벌 받을 거라며 지랄하길래 내가 친히 목을 잘라 주었다. 나무에 부정 타면 어떡해.
그리고 나흘간 주몽 형님이 시키는 대로 신목을 사용해 태자 저하를 눕힐 만한 기다란 상자를 만들었다. 물론 그걸 들고 오며 ‘관’이라고 지껄인 인부 새끼도 그 자리에서 당장 목이 날아갔다.
암튼 그 ‘상자’에 태자 저하를 눕힌 주몽 형님은 다시 피를 내어 상자를 적시기 시작했다. 나무를 푹 적시고 그 위에 저하를 눕히기까지 다시 나흘이 걸렸다. 이렇게 해두면 신목이 매… 매개체(이렇게 쓰는 게 맞나? 협보 형님이 없으니 여쭤볼 사람도 없다)가 되어 저하의 몸이 백 일은 버틸 수 있다고 했다.
아무튼 주몽 형님의 망설임 없는 행동들을 보니 저하도 진짜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솔직히 좀 형님이 충격으로 미친 건 아닌가 싶었는데.
태자 저하는 유화 부인이 간간이 들러서 상황을 봐주시기로 했다. 궁인들이 매일같이 모시는 것은 당연했다. 주몽 형님은 태자 저하를 모시라고 목숨을 살려주는 거라며, 태만하게 구는 순간 다시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겁박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궁인들의 눈에서는 나와 같은 다짐이 보였다. 이번에는 저하를 그리 가게 두시지 않겠다는 다짐.
내일은 정말로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형님들께 말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하다.
六.
졸본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진 똑같은 시간이 걸렸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며 협보 형님이 벌컥 화를 냈다. 얼굴에 걱정한 티가 역력했다. 막상 그 얼굴을 보자 말보다 눈물이 더 먼저 나왔다.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질질 짜는데 뒤에서 주몽 형님이 망설임 없이 들이받았다. ‘해가람이 형님을 찔렀어.’ 하고 앞뒤 상황 설명 없이 대뜸 질러 버린 것이다!
덕분에 기절초풍하는 형님들을 진정시키느라 고생 좀 했다. 형님들은 주몽 형님이 태자 저하의 몸을 되살렸다는 이야기까지 듣고서야 겨우 낯빛이 돌아왔다. 다만 영혼이 없어서, 앞으로 백 일마다 가셔서 상태를 봐야 한다는 말에 다시 흙빛이 됐지만.
신이 얽힌 자초지종을 완전히 듣고 난 오이 형님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 그러니까, 지금 태자 저하께서 도, 돌아가신 건 아니라는 거지?’ 하고 다섯 번째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는 목이 메었지만 돌아가시지 않았고 그냥 잠든 것 같았다는 말을 반복해서 돌려줬다.
떠나기 전, 겉에 묻은 핏자국을 모두 닦은 태자 저하께선 정말로 잠드신 것만 같았다. 태자 저하의 꺼진 가슴과 내쉬지 않는 숨이 아니면 모를 거다.
하지만 한 번 죽었다는 것부터가, 아니 멀쩡하던 분이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계신다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소식이었다. 한참을 빙글빙글 돌던 오이 형님이 아무래도 직접 보고 와야겠다며 자리를 박찼다. 주몽 형님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차라리 보고 오는 편이 마음을 가다듬는 데 더 나을 거라 생각하신 거겠지.
그러나 협보 형님은 그 뒤를 따르는 대신 내 팔을 거세게 붙잡았다. 이리 갑작스럽게 가실 분이 아니라며,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냐고 묻는 게 형님도 역시 받아들이지 못했구나 싶어서 눈물이 날 뻔했다.
이상한 점은 신의 등장부터 아주 많았지만 앞에서 전부 말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가람 저하의 상태를 말씀드렸다. 직전에 몇 번이고 성군이 되라는 말을 들은 가람 저하께서 완전히…… 그렇게 됐다고. 말을 다 잇진 못했지만 대신 머리 옆에 손가락도 돌려 보였다.
아, 마지막으로 유화 부인이 하신 말씀도 전했다. 순전히 협보 형님과 그분이 친밀한 관계였다는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그게 태자 저하의 선택일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안 해봤냐는 그 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별것 아닐 거라고 치부했던 게 협보 형님께는 커다란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형님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손을 덜덜 떨더니 입을 틀어막았다. 손 틈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뛰쳐나가 토악질을 시작했다. 그 등을 두드려주는데 다시 눈물이 났다.
지난 열흘 간 다 진정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의연해야 형님들도 빠르게 진정할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아직은 이른 것 같았다. 시뻘겠던 피와 시체의 감촉이 손끝에서 떠나질 않는다.
태자 저하가 보고 싶다.
七.
협보 형님께서 아무것도 드시지 않는다. 오이 형님이 태자 저하를 뵈러 부여로 떠난 뒤로 쭉.
나도 태자 저하가 그리되시고 사흘은 물도 못 넘겼다. 남 일 같지가 않다. 내일은 죽이라도 끓여서 가져다드려야겠다.
八.
어제 다짐한 대로 죽을 끓여서 갔다가 나도 모르게 주몽 형님과 협보 형님의 대화를 엿듣고 말았다. 맹세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문틈으로 말소리가 흘러나오는데 두 분이 태자 저하에 대해 말하고 있었단 말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협보 형님의 속내만 조금 듣고 물러날 생각이었다. 며칠간 곁에서 보았지만 아무래도 슬픔의 근원이 단순히 태자 저하의 갑작스러운 사고 때문만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속내를 알면 좀 더 괜찮은 위로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오간 내용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했다.
‘태자 저하께서 선택하신 게…… 죽음이라면. ……이해, 할 수 없어도 존중해드려야 합니다.’
그걸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죽그릇을 들고 몸을 낮췄다. 차라리 협보 형님이 분노에 미쳐 가람 저하를 암살하자고 했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몰랐다. 근데 되레 태자 저하를 이대로 보내 드리자니.
나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형님께서 그 자리에 직접 계셨더라면 그런 말씀은 못 하셨을 거다. 평생 모시기로 다짐한 태자 저하의 피가 태자궁 온 바닥을 적셨다. 그걸 직접 봤다면, 적어도 모든 걸 수습하고 생명까지 되살린 사람에게 도로 놓아주자 말할 수는 없었다.
예상대로 주몽 형님은 엄청 화를 내셨다. 나처럼 당시 태자 저하의 모습을 되새기며, 자신의 손에 쥘 수 있었던 거라곤 고작 이 편지 쪼가리가 다였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게 형님의 선택이니 나보고 단념하라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사무친 원통함이 내게도 전해졌다. 틈 사이로는 형님의 팔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익숙한 편지를 꽉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협보 형님은 물러나지 않으셨다. 나는 몰랐지만 형님께서도 주몽 형님과 마찬가지로 태자 저하께 함께 남쪽으로 가자고 부탁한 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렸다.
‘그럼에도 저하께서 우리를 등지셨다는 건 우리가 그분의 바닥을 채워드릴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뒤로는 자리를 떠나서 잘 모르겠다. 다만 마지막으로 엿들은 협보 형님의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밤이 되어서야 뺨이 터지고 만신창이가 된 협보 형님께 말없이 약을 가져다드렸다.
하지만 우리가 저하를 채워드릴 수 없었다면 무엇이 저하를 채울 수 있었을까?
협보 형님은 그게 영원한 안식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저하를 보내 드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무엇이 옳은 일이든.
九.
희소식이다!
주몽 형님이 졸본의 군장인 연타발을 만나고 오셨는데 생각보다 일이 빨리 풀릴 것 같다고 하셨다.
十.
소서노.
一. 연타발의 딸.
二. 해부루의 서손과 혼인했다가 현재는 홀로 두 아들을 키우는 상태.
三. 졸본 지역의 토착 세력이며….
막대한 재산을 거느리고 있음.
아주 중요한 부분이니 잊지 말 것.
十一.
바쁘게 뛰어다니다 보니 벌써 부여를 떠나온 지 백 일이다. 날짜를 셈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 하나를 절대 잊을 수 없기에 또다시 주몽 형님과 함께 부여에 왔다. 함께 가지 못하는 형님들은 묵묵히 나를 챙겨줬다. 그걸 먹을 새도 없이 이번에도 말을 타느라 죽을 뻔했지만.
태자 저하께선 다행히 우리가 떠났던 그날과 한 치도 다름없는 모습으로 누워 계셨다. 그게 정말 좋은 일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손을 대는 귀족 무리가 없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주몽 저하는 이번에도 팔을 갈라서 신목을 피로 적셨다. 이미 적갈색으로 물들어 있던 나무는 새빨간 색으로 덧칠되었다.
그 모습을 보다 궁인들을 모두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형님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十二.
이틀 동안 부여에 머물면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들었다. 우리가 떠났다고 쌓아뒀던 인연이 끊긴 것은 아니라서, 심어 둔 궁인이나 무사들로부터 제법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지금 부여는 난리 통이었다. 우리가 떠날 때까지만 해도 태자 저하의 일은 대충 아프셔서 칩거 중이라고 무마할 수 있었는데 기간이 길어지자 그 방법에도 한계가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점차 가람 저하가 태자 저하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날 밤 태자궁에서 피투성이로 나온 채 신목을 베러 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 데다 그 뒤로 태자궁 모든 사람들이 궁에서 나오지 않고, 나오더라도 태자 저하는 옷자락 하나 볼 수 없었을 테니.
그런데 무서운 건 아무도 그걸 입 밖으로 내지 못한다는 거다.
궁인이 쉬쉬하며 말하길 가람 저하께서 태자 저하가 돌아가셨다는 듯한 말만 나와도 칼을 빼 든단다. 벌써 귀족이고 평민이고 가릴 것 없이 여럿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반발하면 또 죽이고……. 그래서 한때는 영고를 지내는 그 넓은 흙바닥이 시체로 가득했다고 했다.
그러자 소문은 한층 변질되었다. 가람 저하가 태자 저하의 귀신에 붙들려 매일 밤 악몽을 꾼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걸 막기 위해 장례조차 치르지 않고, 영혼을 붙들어 놓느라 신목을 베어 갔다고. 원래 태자 저하는 신의 사자이셨으니 신의 힘이 깃든 나무로 영혼을 정화시킬 수 있다는 그런 소문이었다.
누가 봐도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태자 저하의 이야기에 날을 세우는 가람 저하의 태도는 소문에 힘을 실어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요즘 전하와 왕비 마마도 편찮으신 것 같고…. 특히 왕비 마마는 몇 번이나 가람 저하를 밀치고 태자궁으로 들어가려다가 실패하셨다고 한다. 이제는 결국 왕비궁에서 나오지도 않으신단다.
우리가 부여에 있는 동안 가람 저하는 한 번도 태자궁에 얼굴을 비추지 않으셨다.
그래도 백 일 전만큼 원망스러운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조금… 저하도 불쌍했다. 결국 그렇게나 따르던 사람을 잃은 건 가람 저하도 마찬가지니까.
十三.
소서노 누님이 진짜 멋있으시다. 태자 저하만 아니셨다면 주몽 형님을 홀랑 버리고 갈아탔을지도 모른다. 돈이 많다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인 줄, 아니 좋은 일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좋을 줄이야.
그에 비하면 부여를 발밑에 두고 있어도 돈지랄 한 번 못해보고 가신 우리 태자 저하는 얼마나 안타까운지.
十四.
소서노 누님 덕분에 좋은 장수들이 많이 늘어났다. 협보 형님이 민심도 슬슬 기울고 있다고 했다. 이대로라면 몇 년 걸리지 않아 정말 새 나라를 세울지도 모른다.
十五.
졸본의 토착 세력의 중심에 자리를 잡은 덕분에 이번에 부여에서 열린 태자 책봉식에 사절단으로 끼어서 다녀왔다.
사실 사절단 대표는 나 대신 주몽 형님이나 협보 형님을 데려가고 싶어 했지만 부여에서 추방당한 몸들이 그렇게 대놓고 다녀올 수는 없었다. 그나마 내가 유명한 얼굴이 아니라 선택된 거였다.(좋아해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태자 책봉식은 무슨, 그냥 장례식 같았다. 옷과 음악만 화려했지 하나같이 얼굴이 우중충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왕비 마마는 참석하지도 않으셨다. 소문으로는 아예 가람 저하와 연을 끊었다더니. 유일하게 남은 핏줄인 막내 왕자를 끌어안고 여전히 왕비궁에서 나오지 않으시는 듯했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태자 저하께서 그리되신 지 벌써 오백 일이 다 되어가니까.
처음에는 아니라고, 살아 계실 거라고 믿었던 사람들도 이제 모조리 포기했다고 한다. 가람 저하 때문에 실제로 시체를 확인하진 못했어도 태자궁을 지켜보는 눈은 저하가 돌아가셨다고 말했을 것이다. 오백 일 동안 궁인들의 식사를 제외하면 식사 한 끼, 빨랫감 하나 나오는 꼴을 보지 못했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그 사실을 인정한 것은 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지셨다.
그럴 만도 했다. 태자 저하께선 항상 부자간의 정이 눈곱만큼도 없는 듯이 이야기하셨지만 그래도 적자이자 장자셨다. 후계에 잡음 하나 없는 것이 큰 자랑거리셨을 텐데 장성한 아들이 또 다른 아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해 정식으로 저승길을 배웅해주지도 못한다니.
협보 형님은 아마 그래서 가람 왕자를 더더욱 빨리 태자 자리에 앉히려는 거라고 하셨다. 그렇게라도 원하는 걸 쥐여주고 태자 저하의 시신이라도 넘겨받고 싶으신 거라고.
우리야 진짜 사정을 알지만 평소 원한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간의 우애가 단번에 검은 속내로 탈바꿈한 데는 태자 자리 외엔 다른 이유를 찾지 못했을 거다. 모든 게 신이 의도한 그대로였다.
오랜만에 본 가람 저하는 뺨이 움푹 파였다. 눈은 여전히 미친 사람 같았다. 형식적인 식이 끝나자마자 돌아가셨고, 그날 밤 가람 저하를 처음 태자 저하라고 부른 궁인의 목이 잘렸다고 했다.
사절단은 그 소식을 들은 다음 날 아침에 짐을 꾸렸다. 솔직히 타국 사절단한테까지 무례하게 행동할 것 같진 않았지만 나도 묵묵히 짐을 쌌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은 일단 피하고 봐야지.
十六.
일이 좆같이 많다.
허 대감이 죽은 뒤로 욕설은 끊었는데 누구 때문에 다시 시작하게 된 것 같다.
十七.
오늘은 소서노 누님이 주몽 형님을 찾아오셨다. 온조와 비류도 함께 왔길래 오랜만에 활쏘기 시합을 했다. 근데 중간에 애들이 목이 마르다고 해서(곱게 자란 놈들은 이래서 안 된다) 물을 뜨러 안까지 가야 했다.
내가 요즘 잘 쓰지도 않던 일기를 펼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난 물만 대충 뜨고 나가려고 했는데 소서노 누님과 주몽 형님의 대화를 듣고 말았다.
바로 요새 떠도는 남사스러운 소문에 관한 대화였다!
사실 요즘 들어 둘 사이를 엮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긴 했다. 다들 주몽 형님의 훤칠한 낯에 속은 거다. 만약 누님이 주몽 형님에게 시집가겠다고 하시면 치맛자락을 붙잡고 말릴 생각이었다. 인간을 무슨 쓸 만한 화살 취급하는 사람에게 우리 누님을 넘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역시 소서노 누님은 현명하셨다. 원래 왕비 자리라도 달라 말하려 했다는 대목에선 나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누님은 곧바로 ‘나를 바라보지 않는 남자의 여인이 되어 무엇 하겠습니까? 자리는 필요 없으니 당신의 대는 내 아들들이 잇게 해주십시오.’ 하고 딱 잘라 말했다.
나중에 협보 형님한테 이야기하니 형님께선 제정신이면 누구라도 주몽 형님과 혼인하지 않을 테니 당연한 결과라고 하셨다.
듣고 보니 또 그렇긴 했다. 원래도 냉정한 분이시긴 했지만 태자 저하가 저리되시고 정말 감정이라곤 가끔 비치는 분노 외엔 없는 사람 같았으니까. 오늘도 태자 저하가 그립다.
十八.
어느덧 태자 저하께서 영혼을 잃으신 지 천오백 일이 지났다. 나는 또다시 부여에 왔다. 이제는 모두가 주몽 형님이 살을 가르는 모습을 익숙하게 바라본다. 원래 흉터가 잘 남지 않았던 형님의 몸도 반복된 행위에 긴 흉터가 남았다.
시일이 흘러 다시 창백하게 뜬 태자 저하의 낯이 불그스름하게 변해가는 걸 보다 밖으로 나왔다. 이 짓도 오랫동안 보다 보니 안도감보다 서서히 불안감이 들기 시작한다.
정말 태자 저하께서 살아나실 수 있을까?
겨울이 네 번 지나갈 동안 주몽 형님은 신이 정녕 태자 저하의 영혼을 가지고 있을지 그 누구에게도 대답을 구하지 않았다. 저하께서 편지 끄트머리에 적어 두셨다는 낯선 이름의 사람(웬만한 성씨는 다 들어보았지만 이씨(李氏) 성을 가진 가문은 듣도 보도 못 했다.)을 찾는 것에도 급한 기색이 없었다.
반면 백 일마다 태자궁으로 향하는 형님의 낯은 점점 필사적으로 변해갔다. 그 모순적인 행동을 일깨워 드려야 하지 않느냐는 내 말에 오이 형님은 차분하게 날 말리셨다.
아마 주몽 형님도 내가 본 걸 모두 알고 있을 거라고.
‘다만 그분께는 그 고민조차 의미가 없어져 버렸을지도 모르지. 믿지 않으면 모든 게 무너져 버릴 테니까. 살기 위해 믿는 거야.’
그 대답에 감히 불안을 입에 담을 용기가 사라졌다. 전처럼 주몽 형님이 날 벨까 봐 그런 게 아니라, 이제는 형님이 스스로를 베실까 무서워서.
十九.
연타발이 죽었다. 주몽 형님이 졸본의 군장직을 맡게 됐다.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미 우리 편이 더 많았다.
반대하는 이가 적어서 다행이다. 많았다면 일일이 잘라내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말단인 내가 맡았을 게 뻔해서 더 좋았다.
二十.
어느새 한 해가 지났다.
주몽 형님은 또다시 부여에 다녀왔다. 이번에 따라갔다 온 오이 형님 말씀으로는 부여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왕이 돌아가시고 가람 저하가 왕이 될 수도 있다고.
이곳 역시 그쪽으로는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아마 올해가 가기 전에 졸본을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二十一.
모든 게 업적을 쌓기 위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주몽 형님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창백해졌다.
형님이 술에 취하신 것도 이번에 처음 보았다. 형님은 화살촉이 푸른 그 화살을 만지작거리다가 이젠 너덜너덜한 태자 저하의 편지를 꺼냈다. 그러더니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땐…… 형님이 나를 두고 이리 가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 오지 못하신 거라고, 그러니 내가 다시 모셔와야 한다고.’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요새는… 자꾸 협보의 말이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이어진 말에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대로 잠든 주몽 형님의 얼굴을 보는데 새삼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싶었다. 시간은 참 신기했다. 나이를 먹게 하며 사람을 이해하게 만든다.
태자 저하가 떠나신 지 다섯 해가 흘렀고 나는 스물셋이 됐다. 이제야 저하를 잃었던 때 주몽 형님이 왜 그렇게 되셨는지 알 것 같았다. 형님은 그때 고작 스무 살이셨으니까.
그때 열여덟이었던 내게 형님은 엄청 거대해 보였는데 내가 지나 보니 그냥…… 너무 어린 나이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이젠 형님이 저하께서 멈추신 그 나이에 코앞까지 다가갔다.
형님께선 무얼 느끼신 걸까.
그러나 묻는 대신 묵묵히 옷을 덮어드리고 나왔다. 마음이 복잡하다.
二十二.
사흘 전 졸본의 토착 세력을 모두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주몽 형님이 아니라 폐하시다.
아직은 폐하라고 부르는 게 어색하다. 오이 형님도 어엿한 대장군이 되셨고 협보 형님도 새로운 대귀족의 시조가 되셨다.
나도 물론 장군이 되었다. 부여를 떠나온 지 여섯 해 만에 노비에서 장군이라니. 책으로 엮어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거다.
二十三.
새해를 맞아 건국식을 진행하려 했건만 주몽 형님께서 식 자체를 거부하셨다. 새 나라의 이름도 지어주지 않아 이대로라면 졸본을 그대로 잇게 생겼다. 협보 형님이 새 통치는 새 이름을 알리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으신다.
난 아무렴 좋았다. 졸본이든 무명(無名)국이든……. 이제 좀 쉴 수 있겠지?
二十四.
미친 미친 미친!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온다!
성벽 시찰을 돌고 있었는데 병사 하나가 꼬질꼬질한 작은 아이를 데리고 왔다. 듣기론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며 사흘 밤낮을 성문에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원래라면 그냥 내쫓아야겠지만 아이가 아버지 것이라며 들고 있는 단검이 예사롭지 않아 날 찾아온 것 같았다. 어디서 훔친 걸 수도 있으니까.
타당한 말이라 짐을 헤집어 단검을 꺼냈다. 그런데 두껍게도 감아둔 천을 풀자마자 연한 푸른 빛이 내 눈을 먼저 찔렀다.
병사가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도 그럴 뻔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건 이게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난 곧바로 작품에 가까운 검집의 세공을 확인했다. 검을 뽑자 푸른 빛은 더 선명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제야 확신했다. 이건 ‘그 단검’이었다. 그날 궁인이 들고 온 거랑 똑같은 단검! 하지만 그날과 달리 빛을 내고 있었다. 주몽 형님의 서랍에 들어 있는 그 화살촉이랑 똑같은 빛 말이다.
난 그대로 아이를 덜렁 안아 들고 말 위에 올랐다. 일단은 내 처소로 데려온 참이다. 내일 날이 밝자마자 아이를 데리고 폐하를 찾아뵈어야겠다.
***
“망할…….”
끊었던 욕이 다시 튀어나왔다. 마리는 혹시라도 누가 들었을까 봐 입을 가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도 이제 귀, 귀족이니까 이런 말버릇도 고쳐야 하는데. 마리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무도 없는 곳인데 뭐 어떠냐 싶었다. 욕이 안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유화 부인의 별궁 내 뒷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 일의 시작은 난데없이 단검을 들고 찾아온 꼬맹이였다. 아버지를 찾아왔다는 작달막한 아이의 짐에서 나온 건 믿을 수 없게도 주몽 형님이 찾던 ‘그 단검’이었다.
마리는 날이 밝자마자 당장 아이와 단검을 챙겨 궐 안으로 쑥쑥 들어갔다. 폐하를 만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이제 새로운 왕의 측근이었으니까.
‘폐하! 이것 좀 보세요!’
주몽은 그가 헐떡이며 내민 단검을 보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칼을 뽑더니 손끝을 베어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곧장 피를 흡수한 검신이 웅웅거리며 잘게 진동했다. 마리는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지만 그 단검이 정말 주몽이 찾던 단검임을 확신했다. 그가 서랍을 열어 똑같지만 빛은 내지 않는 단검을 꺼내 나란히 두었을 땐 허탈과 충격으로 헛웃음이 나오기까지 했다.
애초에 똑같은 단검이 두 개였다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가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자 저하께서 직접 선물하기 위해 주문을 넣으신 단검이었으니까. 두 개를 주문하셨을 거라고 그 누가 짐작했을까.
‘대체 이걸 어디서 가져왔느냐.’
곁에 있던 협보가 아이에게 다급히 물었다. 아이는 꾸질꾸질한 콧물을 훌쩍이며 제 어미가 줬다고 말했다.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이걸 들고 남쪽으로 가서 주인을 찾으라고 했다고. 그분이 자기 아비가 되어 줄 거라고 했단다.
우리는 모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자 저하께 아이가 있었나? 오히려 하도 혼인을 안 해 난리가 났다고 들었는데, 그게 설마 궐 밖에 마음을 둔 여인에게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오이는 그걸 입 밖으로 냈다가 탁자가 쪼개졌다. 주몽이 꺼멓게 죽은 눈으로 부순 탁자 조각을 발로 차고 나갔다.
늘 그랬듯 따라가는 건 마리의 몫이었다. 주몽은 마리를 힐끗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그는 무언의 허락이겠거니 하고 끈질기게 주몽을 따라잡았다.
그러나 마리는 그가 그대로 애마를 타고 부여로 달려갈 줄 알았더라면 결코 홀로 뒤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부여도 평소라면 졸본 지역의 왕이 된 주몽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했겠지만 하필이면 백 일의 주기가 다시 가까워진 것이 문제였다. 병사들은 막아 세우려다가도 시기를 확인하고 보내주었다. 두어 번 막았다가 이미 강 북쪽에서든 남쪽에서든 분노한 누군가의 칼에 목이 썰리는 걸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곤 지금 이 꼴이었다.
“하아…….”
솔직하게 말해서 마리는 주몽이 부여로 쳐들어간 순간 드디어 가람 저하를 죽이려는 줄 알았다.
새 나라도 세웠고 저하의 영혼이 소멸되지 않은 것도 알았겠다, 더 이상 신을 만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가람 저하를 살려 둔 이유는 결국 신을 만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게 필요 없어졌으니 눈엣가시 같던 놈을 죽여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주몽이 가장 먼저 박차고 들어간 곳은 유화 부인이 계신 별궁이었다.
긴한 말이 오고 갈 게 뻔해 마리는 일부러 안에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초조함을 닮은 궁금증까진 억누르지 못했다. 그는 목을 빼 창가에 귀를 들이대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번엔 정말로 태자 저하께서 되살아나실 수 있는 걸까?
생각만 해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놓을 수 없어 품고만 있었던 헛된 소망이 기적처럼 정말 실현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는 불충하게도 마냥 기대만 할 수는 없었다. ‘진짜 단검’의 등장이 모든 상황을 타개했다고만은 생각되지 않아서였다.
모든 일이 벌어졌던 그날, 빛이 없는 단검을 본 주몽은 신이 태자 저하의 영혼을 소멸시켰다고 오해했다. 그래서 그는 저승으로 가는 대신 신을 만나기 위해 업적을 쌓았다. 이전에는 아직 영혼이 저승의 강을 건너지 않았으리란 생각에 쫓아가려 했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어졌으니까.
하지만 아이가 갖고 온 단검은 여전히 푸른 빛을 내고 있었다. 이건 태자 저하의 영혼의 끈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 부분이 마리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날로부터 여섯 해가 흘렀다. ‘저승의 강’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정상적인 망자라면 벌써 건너고도 남았을 시간이라는 것은 알았다. 과연 이걸 믿고 저하를 찾으러 가도 되는지 두려움이 앞섰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천운이 따라 태자 저하께서 다시 깨어나셨다고 생각해보자. 마리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물론 누군가 그에게 아직도 태자 저하가 돌아오시길 바라냐고 묻는다면 제 생명을 내어줘도 좋으니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그게 정말 저하께서도 바라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정말 이 길이 옳은 걸까? 우리의 이기심이 저하를 잡아먹는 건 아닐까?
‘그럼에도 저하께서 우리를 등지셨다는 건 우리가 그분의 바닥을 채워드릴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아직도 협보 형님께서 부르짖으셨던 목소리를 기억했다. 뭉게뭉게 커진 고민은 다시금 욕설이 되어 내뱉어졌다.
그게 멈춘 것은 머리 위의 창문이 벌컥 열리면서였다. 마리는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문을 연 당사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손짓했다.
“들어오너라. 그렇게 엿듣는 것보다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게 낫겠지.”
마리는 주춤주춤 신을 벗고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유화 부인은 엉거주춤 인사하는 그에게 눈길만 줬을 뿐 예절에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 서안 위에 놓인 단검에 신경이 잔뜩 쏠려 있었다.
초조하게 제자리를 맴돌던 그녀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확실히… 이건 문제가 있구나.”
그건 건네는 말이라기보단 하나의 결심 같았다. 그 즉시 몸을 돌린 그녀는 서랍 하나를 뒤집어 분리했다. 다양한 짐승 인형이 나뒹굴고 압화나 씨앗 따위가 주변에 흩날렸다. 하지만 서랍의 깊이에 비해 물건의 가짓수는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주몽이 서랍을 건네받아 바닥을 부수며 드러났다. 바닥에 합판을 덧대 감춘 비밀 공간이 있었다. 마리는 저도 모르게 이는 흥분감에 주먹을 꾹 쥐었다. 하지만 내부는 그의 예상과 달랐다.
“비어 있는데요……?”
마리의 맹한 말에도 부인은 굳은 입꼬리만 조금 올렸다. 그녀가 물잔을 들더니 망설임 없이 서랍 안쪽에 부었다. 그러나 물은 투명한 바닥에 쏟기라도 한 듯 허공에 판판히 퍼졌다. 그녀는 그걸 앞에 두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손끝에서 연한 물빛의 빛이 반짝이더니 허공이 물에 녹기라도 하듯 서서히 사라졌다.
“…….”
그 속에서 드러난 것은 두툼한 두루마리였다.
아주 낡은 데다 비단 천으로 감싸여 있지도 않은, 보잘것없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그 자체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흘러나왔다. 유화는 그걸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네게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하구나.”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바짝 말라 있었다. 마른침을 삼킨 그녀가 천천히 그것을 꺼냈다.
“다만 너에게 말해주고 싶은 건, 나는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 입을 다물었다는 것이니라.”
“…….”
“이걸 네게 내어주는 것 또한 그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고.”
그녀는 낡은 끈을 풀고 종이를 조금 펼쳤다. 드러난 틈새로 그 어느 때보다도 진하고 푸른 빛이 연기처럼 흘러나왔다.
마리는 빛에 눈을 찡그리면서도 글씨를 읽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빛이 가신 뒤에도 해석할 수 있는 글자는 없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가는 선들은 분명 가만히 있는데도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불(火)이라고 생각하면 어느새 대(大)가 되었고 확신한 순간 옆 글자와 합쳐져 전혀 모르는 글자가 되었다.
눈이 잘못된 줄 알고 비벼도 보았지만 이상한 현상은 그대로였다. 눈치껏 쳐다본 주몽도 읽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유화가 차분한 어투로 의문을 풀어주었다.
“나 역시 읽지 못하니 너무 노력하진 말거라.”
“대체 이게 뭔데 이러는 건가요?”
입을 열 기미가 없는 주몽을 대신해 마리가 대신 물음을 던졌다. 유화는 순순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건 이 세계의 운명을 관장하는 종이란다.”
마리는 놀라 커다랗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신은 믿어도 운명은 믿지 않았다. 어릴 적 노비로 태어나 살았던 게 모두 자신의 운명이라면 그때 그 추악한 손길마저 네 운명에 속해 있었으니 당연한 거라고 속삭이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정말로 세상 모든 운명을 다루는 종이가 있다고 한다.
이 충격적인 진실은 주몽마저 놀라게 한 것 같았다. 그는 드물게 눈을 크게 뜨더니 곧 미간 사이를 좁혔다. 거칠 것 없이 말이 흘러나왔다.
“이걸 왜 어머니께서 가지고 계시는 겁니까.”
그 밑바닥에는 물건의 진위 여부에 대한 옅은 의심이 깔려 있었다. 유화는 잠시 주저했다. 변명을 지어내려는 것보단 힘든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머뭇거림이었다.
“……아주 오래전, 신 그자가 아버지께 자랑하는 것을 보았지.”
벌써 몇십 년은 더 된 이야기였다. 신이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천계로 올리겠답시고 만들어 온 ‘영웅’ 이야기는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당시 벌을 받고 방에 갇혀 있던 그녀는 그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창조주의 핏줄이 대체 뭐라고 해모수를 용서하고 태어나지도 않은 살덩이를 위해 운명을 짜 왔는가.
정작 그 아이를 가진 유화는 술과 음악이 넘치는 연회에 참석하기는커녕 닷새 후면 인간 세계로 쫓겨나야 했다. 그 사실이 몹시도 원통하고 끔찍했다.
그래서 모두가 잠든 밤 몰래 방에서 빠져나왔다. 거나하게 취한 신의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것으로 무얼 할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선 이 쏟아지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을 털어놓진 않았지만 두루마리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는 그 짧은 말로도 충분했다. 마리는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신이 하백 님께 의기양양하게 내밀 만큼 아끼는 물건이라니. 확실히 세상의 운명을 결정 짓는 종이라면 지금까지도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걸로 신을 부를 수 있다.
섬광 같은 짧은 깨달음은 주몽에게도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가 주먹을 꽉 쥐더니 종이를 넘겨받았다. 읽지도 못하는 문서를 펼쳐 훑는 그를 향해 유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전히 신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느냐?”
“저는 반드시 형님을 뵈어야 합니다.”
그 음성은 차라리 피를 토하는 게 덜 고통스러울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리는 멍하니 주몽을 바라보았다. 발끝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운이 좋지 않았다. 이래서 나를 불렀구나. 신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한 그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만일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남은 이들에게 설명할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리는 주몽이 태자 저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려도, 그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바닥을 뒤진 유화가 쏟아진 물건 중에서 작은 자라 인형을 하나 내주었다. 등껍질 무늬가 섬세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이걸 갖고 가거라. 무슨 일이 있으면 물을 끼얹도록 해. 그럼 어디에 있든 나에게로 소식이 올 테니.”
주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두루마리의 양 끝을 쥐더니 힘주어 당겼다. 마리는 경악하여 입을 벌렸다. 협상을 할 거란 생각은 했지만 저리 무식하게 세상의 운명을 가르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종이가 아주 미세하게 찢어지는 순간 틈 사이로 빛 알갱이가 모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순식간에 불어나 푸른빛을 번쩍이며 방 안을 휩쓸었다. 마리는 본능적으로 신이 그가 차지할 몸뚱이를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돼.’
그는 손을 맞잡고 눈을 꽉 감았다. 신앙심이라곤 이미 그날 티끌까지 닥닥 긁어 내다 버렸다. 신이 씐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다행히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푸른 바람은 그를 지나쳐 다시 주몽에게 돌아갔다. 우르르,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리는 아무 말소리도 듣지 못했으나 주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즉시 빛이 그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감싸며 타고 올라갔다. 빛이 천장에 닿는 순간 세찬 바람과 함께 번쩍거리며 눈앞이 하얘졌다.
“…….”
다시 눈을 떴을 땐 빛과 함께 주몽도 사라져 있었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세요.”
마리는 늦은 인사말을 중얼거렸다. 돌아왔을 땐 모두의 위태로움이 사라지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