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20/27)

17.

봄이 가까워졌는데도 싸늘한 바람이 몸에 부딪혔다.

새벽녘이라 그런지 남쪽으로 내려와도 기온이 올라가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주몽은 별이 빼곡하게 박힌 하늘을 올려다보다 인기척에 고개를 내렸다. 무릎께까지 올라온 마른 풀을 헤치며 다가오던 오이가 짧게 보고를 올렸다.

“아직도 버티고 있습니다.”

“아마 내일까진 있을 겁니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도 면이 팔리는데 바로 돌아가면 무슨 낯으로 고개를 들겠습니까.”

곁에서 불을 쑤시던 협보가 입가에 비웃음을 걸며 말했다. 주몽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벌써 이틀 전인가. 그는 무심하게 지난 일을 되짚었다.

새벽녘부터 급하게 말을 달려 떠난 길이었다. 주몽은 마구간에서 유난히 성질이 더러운 그의 말을 잡아끌며 이 순간이 그의 인생에서 최악의 때가 될 것을 직감했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 더 조금 전부터.

그 밤은 유난히 밝고 둥근 달이 호수 위에서 빛을 뿌리던 밤이었다. 평생을 곁에서 함께한 사람이 보인 적 없던 고통스러운 얼굴로 쓰러졌다. 주몽은 품 안에서 늘어진 사람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더랬다. 팔 위에 얹힌 무게가 부력을 감안해도 인간의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에서 형님이 무너져 내렸는데도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무력감이었다.

‘저하! 이게 다 무슨 일이옵니까! 태자 저하!’

저 멀리서 고함이 울리고 나서야 천천히 정신이 들었다. 그는 태자를 안은 채 물을 헤치고 뭍으로 나왔다. 소란에 뛰쳐나온 궁인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었다.

주몽은 물에 젖어도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가벼운 무게를 궁인에게 넘겼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직접 태자궁으로 모시고 싶었지만……. 그는 축 늘어진 팔을 한 번 쳐다보고 고개를 돌렸다.

그 뒤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꼬리가 매섭게 올라가 죽일 듯이 노려보는 부여의 둘째 왕자와 마주쳤던 것도 같다. 그러나 말 한마디 얹지 않은 채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에게 변명할 이유도 의무도 없었다. 중간에 팔이 붙잡혔지만 그뿐, 자격도 없는 말을 지껄이길래 몇 마디 쏘아붙이자 부들부들 떠는 꼴이 우스웠다.

그러나 기분은 좋아지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마구간 처소로 돌아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협보가 의아하게 쳐다보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눈을 돌리라는 소리도 하지 못했다.

‘너와의 약조를 지키기로 했는데. 그치?’

머릿속은 온통 형님의 텅 빈 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어진 갑작스러운 입맞춤부터 스스로 옷을 벗어 내리던 손, 곧장 밀쳐내고 속을 게워내던 뚜렷한 거부까지.

주몽은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았던 형님의 미소를 되새겼다. 언제나 다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던 입가였다. 그러나 모든 게 발작적인 웃음으로 변질되었을 때조차 그는 형님을 막지 못했다.

어쩌면 그때는 이미 늦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그는 이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하나씩 되짚으며 온 새벽을 지새우다 맞이한 추방령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리가 다급하게 알려줬다. 마태령이 가람의 처소로 들었다길래 예방 차원에서 보내뒀더니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들고 왔다.

마리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물었다.

‘태자 저하의 아우님이라 죽일 수도 없고…. 어쩌시려고요?’

‘……이곳을 떠나야겠지.’

아직 정식으로 내려진 형벌은 아니었지만 얌전히 앉아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질질 끌려 동서남북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쫓겨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주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작은 주머니들을 몇 개 챙기던 협보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물었다.

‘태자 저하는, 어찌 모실 생각입니까.’

‘…….’

주몽은 활대를 챙겨 들던 손을 멈칫했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본능은 지금 태자궁으로 가 형님을 모셔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저번부터 자꾸만 형님이 그의 곁을 떠날 것만 같은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형님께선 분명 그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단 한 번도 그를 진심으로 떠난 적이 없으신데도.

연심을 고백하면 할수록 불안은 더욱 커져만 갔다. 지난번 등을 돌리는 형님을 보다 찻주전자를 집어 든 것은 그 불안이 불러온 실수였다. 그런데도 형님은 자신의 발을 걱정했다. 그 다정함은 결국 불안함을 품고도 한발 물러서게 만들었다.

마지막 남은 네 번째 밤을 조건으로 건 것은 정말 직감이 시킨 행동이었다. 이제 와서 함께 보내는 밤이 커다란 의미를 주진 못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마저 걸지 않는다면 그가 이대로 훌쩍 떠나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제약이 과연 형님께도 기꺼운 일이었을까.

주몽은 미친 사람처럼 호수 속으로 뛰어들던 태자를 떠올리며 처음으로 의문을 품었다. 그토록 밀쳐내며 토악질을 하던 형님을 네 번의 밤을 보내질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며 말에 태우는 것이 옳은 일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

짐승 같은 감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주몽은 본능적으로 올라오는 끔찍한 불안과 거부감을 억눌렀다. 그 기반에는 아무것도 쥔 것 없던 저를 언제나 믿고 지지해주던 그의 뒷모습이 있었다. 그 위로 몇 번이고 약조를 해주시던 형님의 목소리가 겹쳤다.

‘그래……. 내게 오신다 하셨으니.’

너무 늦는다면 내가 모시러 가면 된다. 형님께선 날 저버리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

‘우선 우리만 떠난다.’

주몽은 처음으로 본능 대신 그의 믿음을 선택했다.

그렇게 떠나온 길은 말이 도망길이지 크게 고될 것도 없었다. 추방령이 정식으로 내려오기 전에 한발 일찍 떠나온 탓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일부러 추격자가 말 뒤꽁무니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따라붙게 두었다가 강가에 다다랐다. 거대한 강을 보는 순간 누가 주입하기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에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주몽은 본능에 따라 피 아래 도사리고 있는 천계의 힘을 개방했다. 천지 만물을 다루는 힘에 가장 먼저 반응한 미물이 펄떡펄떡 뛰어올랐다. 그것들이 스스로 제 몸을 내어 다리를 만들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리가 입맛을 다시며 그때를 회상했다.

“그 물고기 다리… 참 신기했는데 말이죠.”

“절경이었지.”

동조하는 협보의 두 눈이 만족감으로 반짝였다. 주몽은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마리라면 몰라도 협보는 물고기와 자라가 만든 다리에 감탄하는 것이 아닐 터였다. 눈앞에서 다리가 무너져 내렸을 때 목도한 마태령의 표정을 되새기고 있겠지.

제법 큰 강이었지만 모두 경악으로 가득 찬 군사들 사이에서 홀로 분노한 마태령의 표정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찢어 죽이고 싶은 상대를 앞에 두고도 잡지 못하니 얼마나 속이 아플까.

그것은 주몽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오래전 그가 형님의 호위 무사를 했던 시절부터 거슬렸던 상대였다. 반쯤 죽여 내보낸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대귀족답게 그는 다시 궁에 입성했고 최근 형님께 자신의 혼인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형님께선 그런 자가 없다며 발뺌하셨지만 중매를 서겠다는 생각이 직접 나왔을 리 없다. 그런 새로운 사고는 주변에서 오래 머물렀던 자에게서 나올 확률이 낮으니 후보는 하나뿐이었다.

이리 뒷맛이 좋지 않을 걸 알았다면 어떻게든 그가 돌아오기 전에 죽여버렸을 텐데.

주몽은 낮게 혀를 찼다. 형님께서 자신의 연심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알았다. 그로선 아주 오랫동안 품어온 마음이었지만 그 시간만큼 형님 또한 그를 동생으로만 보셨을 테니.

그래서 더욱 공을 들이고 있었는데 재를 뿌리진 말아야 할 게 아닌가.

그의 마음을 드러내고 밤을 거듭해도 기어이 혼처를 내미시는 모습에 잘 감춰왔던 성정까지 드러내고 말았다. 그뿐인가. 정식으로 연심을 거절당하기까지 했지.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기분이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그러니 이건 일종의 화풀이이자 경고였다.

강을 건너간 그는 활을 들어 마태령이 타고 있는 말의 대가리를 명중시켰다. 사실 입술을 잘라 다시는 말 한마디 입 밖에 내지 못하도록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강 하나가 아니라 협곡을 두고 있었어도 화살 하나로 해결할 자신이 있었지만 태령이 다치면 당장 태자에게 해코지가 갈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처리는 형님이 자신의 곁으로 넘어오고 나서 해도 늦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옆에서 협보가 짤깍짤깍 박수를 치며 통쾌한 웃음을 흘렸다. 주변 무사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는 꼴이 꽤나 모양 빠지긴 했다.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그 장면이 다시 생각났는지 협보가 흡족하게 중얼거렸다.

“그놈 낙마한 김에 다른 팔도 부러졌으면 소원이 없겠네.”

“저기 별이 떨어지는데 소원이라도 빌어 보십시오!”

마리가 해맑게 외쳤다. 그 외침에 주몽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총총히 박힌 별 중 두어 개가 긴 궤적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별이 떨어지는 것은 필시 거대한 힘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인데…….

별이 한두 개 정도 떨어지는 일은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으니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피 아래 흐르는 천계의 힘이 아직 가라앉지 않고 요동치는 탓에 평소보다 많은 것이 느껴졌다.

이를테면 불안하게 일렁이는 별들의 기운이라든지.

이것은 본능의 영역이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갈무리하던 기운을 다시 활짝 개방했다.

두근.

그 순간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울렸다.

두근, 두근.

원인 모를 불안감이 발끝에서부터 찌릿하게 차올랐다. 활짝 열린 감각이 이 직감을 절대 그냥 넘겨서는 아니 된다고 경고했다. 주몽은 저도 모르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돌아가야 해.”

머리가 아니라 살갗 아래 타고 흐르는 피가 그를 이끄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불을 쬐다 난데없이 귀가 결심을 들은 협보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니…. 어딜 가신다고요?”

“가서 형님을 모셔와야겠다.”

“예? 농이시죠? 제게 분명 기다린다 하신 지 이제 겨우 이틀 지났습니다!”

심지어 무박이라며 협보는 가슴을 퍽퍽 쳤다.

그는 정말이지 답답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자신도 저하께서 함께 오시길 바라긴 했지만, 이건 너무 갔다. 어쩜 저 배은망덕한 놈은 중간이라는 걸 모를까.

어차피 새 나라를 세우려면 할 일은 많았고 그 대다수가 과히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터였다. 그러니 저하께선 이참에 푹 쉬시다 정리가 되면 오셔도 좋겠거니 생각하던 참이었다. 때마침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주몽의 입에서도 당장 태자 저하를 모시지 않겠다는 말을 들어 잘 됐다 싶었는데.

그러나 협보의 어이없다는 시선을 마주하고도 주몽은 주장을 꺾지 않았다. 그가 하늘과 강을 번갈아 보더니 활을 꽉 쥐었다.

“형님께 아무래도…. 아니다. 아무튼 감이 좋지 않아.”

머뭇거리며 흘러나오는 말이 섬뜩했다. 확신은 충분했지만 말이 씨가 될까 두려워 내뱉지 않는다는 투였다.

주몽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은 그대로 우뚝 굳었다. 면면들이 단숨에 심각함으로 물들었다. 이들은 지난 몇 년간 주몽과 같이 일하며 그의 짐승 같은 감이 얼마나 위대한지 뼈저리게 겪은 사람들이었다.

주몽이 아침에 기분이 안 좋다 하면 그날은 꼭 누가 저하께 시비를 걸었고 어깨가 쑤신다 하면 직접 화살을 시위에 매길 일이 생겼다. 다 세워둔 계획을 두고 굳이 다른 길로 가고 싶다 하여 투덜거리며 따랐더니 매복하고 있던 적을 서넛 잡아들인 적도 있었다.

그렇게 몇 번 목숨도 빚지고 나자 그들은 이제 주몽의 ‘감’이라고 하면 산에서 미역이 난다 해도 군말 없이 그러려니 할 정도였다.

그런 주몽도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이미 멀리 떠나온 길이었지만 모두가 저하께 무슨 일이 생겼다면 당장이라도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이견이 없었다.

주몽의 동행자로 선택받은 자는 마리였다. 다들 직접 따르고 싶어 애가 달았지만 천상 문관인 협보와 그를 지킬 오이는 이곳에 남아 새롭게 생길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협보는 수통 따위를 점검하며 걱정스레 말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 상류에서 다시 부여로 넘어가야 할 겁니다.”

주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건너온 하류에는 아직 마태령들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든 건너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다. 원인 모를 초조함이 몸 안에 감돌았다. 그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조금씩, 더 빨리 떨어지고 있었다.

***

“자, 잠시만, 우욱, 욱.”

헐떡거리며 말 등에 붙어 있던 마리가 더는 못 참겠는지 입을 틀어막고 나무 아래 머리를 박았다.

주몽은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지금 한시가 급한데 뭐 하는 짓인지.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조금도 쉬지 않은 채 말 위에 올라 있던 마리가 들으면 억울해 죽을 소리였다.

물론 이틀 반을 쉬엄쉬엄 달려왔던 길을 하루 조금 넘는 시간 안에 주파하려니 멀미가 날 만도 했다. 그러나 주몽은 마리가 아니었고 그의 말 또한 평범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흥분을 삭이지 못해 연신 투레질을 하는 말을 토닥였다. 저 멀리 궐의 끄트머리가 보이는 것을 보니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으어…. 으? 저 향주머니, 태자 저하의 문양이 아닙니까?”

그때 요란하게 구역질을 하던 마리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먹은 것도 없는 위장을 비워내고 겨우 물을 들이켜던 찰나였다.

그 말에 주몽도 고개를 들었다. 과연 흰 비둘기 한 마리가 삐익삐익 울며 근처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입에 문 천을 유심히 살피던 그는 챙겨온 활을 집어 들었다. 작은 짐승이 목이 꿰뚫려 떨어지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마리가 익숙하게 주워온 새를 받아 들었다.

“…….”

그러나 화살을 회수하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마리도 덩달아 제 두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왜 피가 없지?”

목에 구멍이 뚫렸는데도 새의 깃털은 여전히 새하얬다. 괴기스럽기까지 한 그 모습에서 주몽은 익숙한 향을 맡았다. 부드럽고 청량한 물의 냄새.

그는 짐승의 입에서 향주머니를 빼내고 신의 힘을 불어넣었다. 옅은 푸른 빛이 감돌고 구멍이 차올랐다. 그러더니 툭, 손바닥에 채 차지 않는 솜인형으로 변해 나뒹굴었다.

“……!”

마리는 벌러덩 뒤로 넘어가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러나 주몽이 제 수통을 빼앗아 그 위로 물을 붓고, 인형이 까만 두 눈을 번쩍 뜨며 다시 날아올랐을 때는 정말 엉덩방아를 찧을 수밖에 없었다.

“미친, 이젠 죽은 것도 살리세요?!”

“원래부터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어.”

유화의 물건이 분명했다. 주몽은 더 설명하는 대신 다급하게 향주머니를 풀어 헤쳤다. 안에서는 씨앗 몇 알과 작게 접힌 종이가 들어 있었다. 곁에서 목을 빼고 보던 마리가 아는 척을 했다.

“어? 협보 형님이 가져오라고 부탁하신 씨앗이네요?”

주몽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마리가 단박에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보리 씨앗이잖아요. 급하게 떠나느라 놓고 오셨대요. 안 그래도 왜 가져오라 했는지 궁금했는데.”

주몽은 쫑알대는 그에게 씨앗을 주머니째 넘겼다. 대신 그는 정갈한 글씨가 비치는 종이를 펼쳤다. 손끝에 와닿는 익숙한 질감이 고급스러웠다. 그는 읽기도 전에 제 형님이 쓰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짧은 편지는 다 읽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주몽은 두세 번 거듭해서 종이 쪼가리를 읽어 내렸다. 종이가 우그러들며 끝이 구겨졌다.

‘해야.’

첫마디가 형님의 목소리와 겹쳐 웅웅거리며 귓가에 울렸다.

“……형님.”

주몽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항상 다정히 답해주던 목소리는 없었다.

당연했다. 여긴 아무도 없는 한밤중의 길바닥이었으니까. 제 형님은 푹신한 비단 솜이불에 누워 따스하게 잠들어 계실 거다. 그럼에도 당장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미칠 것만 같았다.

그 목소리가 필요했다. 이딴 짙은 체념의 냄새를 풍기는 글씨나 눈물에 젖은 종이가 아니라. 다정하고 언제나 변치 않았던, 나를 떠나지 않는다고 속삭여 주던 그 목소리를 원했다. 뭐든 다 좋으니 조곤조곤 이 편지를 읽어 우매한 자신을 이해시켜 줬으면 했다.

주몽은 말고삐를 거칠게 휘어잡았다.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푸르릉대던 말이 내달렸다.

“어? 아니, 잠시만요! 같이 가요!”

뒤에서 마리가 황급히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살아난 새가 한발 앞서 날아오르며 길을 안내했다.

동시에, 머리 위로 별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태자궁의 마루를 밟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몽은 신을 벗을 새도 없이 성큼성큼 궁 안으로 들어섰다.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고 가슴이 선득한지. 자주 계시던 방이 가까워질수록 일평생 느껴본 적이 없던 불안이 온몸을 잠식했다.

시린 손끝으로 방문을 붙잡았을 때였다. 그를 알아보고 서둘러 달려온 궁인들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막아섰다.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저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비키거라.”

“이번 한 번만 눈 감아 드릴 테니 어서 가십시오! 이러시면 태자 저하께서 곤란……!”

주몽은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옆으로 밀었다. 덜컹, 문은 나무 살이 부딪히는 소리만 낼 뿐 열리지 않았다.

그 기묘한 현상에 붙잡던 궁인도 말을 멈췄다. 순간 적막이 복도를 감쌌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들릴 것 같은 그 적막 속에는 선객이 들었다는 방 안의 대화 소리 역시 들리지 않았다.

“……물러서거라.”

그제야 덩달아 이상함을 느낀 궁인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모조리 물러섰다. 마리가 앞으로 나와 다시 한번 문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틈은 벌어지지도 않은 채 문짝 두 개가 함께 흔들렸다. 게다가 문짝이 떨어질 것처럼 덜컹거려도 안에서는 기척조차 없었다.

대신 물결이 일 듯 문 앞이 투명하게 일렁거렸다. 그 모습을 확인한 주몽은 칼을 뽑으려다 화살을 하나 집어 들었다. 대를 잡고 힘을 주자 화살촉이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그대로 그것을 벌어지지 않는 문틈에 박아넣었다.

콰직, 콰드득.

나무는 스치지도 않았건만 문짝은 폭력적인 소리를 내며 통째로 부서졌다. 하늘빛 빛무리가 반짝거리며 내린 것도 같았다. 뿌옇게 가려진 시야 속에서 발이 축축하게 물든 것을 느낀 궁인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꺄아아악!”

주체하지 못한 비명이 그들 사이를 갈랐다. 하얀 버선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부서진 문틈 사이로 피가 한 줄기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먼지가 가시고 훤히 트인 안쪽이 드러났다.

“이, 이게 무슨…….”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이게 가능한가 싶도록 바닥 전체를 적신 피였다. 그 웅덩이는 새롭게 열린 공간으로 꿈질꿈질 몸집을 불렸다. 저도 모르게 주저앉은 궁인들의 치마가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쓸 정신조차 없었다. 그 피가 흘러나오는 곳에는 가람이 앉아 있었다. 멍한 눈, 피 칠갑이 된 얼굴, 붉게 물들어 원래의 색을 찾을 수 없는 두 손.

그러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궁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가 고심해서 골랐던 병풍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그 위에는…….

저의 주군이 배에 칼이 꽂힌 채 병풍에 박혀 있었다. 어찌나 칼이 깊숙이 박혔는지 칼자루만 드러난 몸이 쓰러지지도 못하고 선 채로 사지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입을 틀어막았다.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간 것은 주몽이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태자를 바라보더니 손을 덜덜 떨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입가에서 흐르는, 채 굳지 않은 피가 그의 손에 옮겨 묻었다. 그 입술을 문질렀지만 말랑거리는 살이 다시 오밀조밀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아, 안 돼…. 형님… 형님…….”

이번에는 입술을 맞대고 숨을 불어넣었다. 이러면 형님은 숨을 받아먹지도 못하고 헐떡이며 모조리 다시 토해내곤 했다. 가빠오는 숨에 발개진 볼이 저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줍어 보였더랬다.

그러나 도로 터져 나오는 숨 따위는 없었다. 고요하게 흉곽이 부풀다 소리 없이 꺼졌다. 생기랄 것이 사라져 버린 그의 얼굴은 겨울날 첫눈보다 새하얬다. 몸속의 피란 피는 모조리 빠져나간 것처럼.

주몽은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찰박거리는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누가, 그 누가 자신의 형님을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었던 강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달았다. 뒷목이 뜨겁고 눈이 터질 것 같았다. 기를 주체하지 못한 손에서 희미하게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주몽이 들이닥쳐도 멍한 눈으로 앉아만 있던 가람이 흠칫 어깨를 떤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그 몸짓에 그제서야 눈을 돌린 주몽이 형형한 낯으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

“무슨 일이냐고 묻잖아!”

우레와 같은 분노를 담은 목소리에 인지할 새도 없이 신의 힘이 실렸다. 공기가 공명하며 칼날을 담은 바람이 가구를 부수고 창을 뜯어냈다.

그러나 가람은 쏟아지는 파편을 모조리 맞으면서도 표정 하나 변치 않았다. 그는 혼이라는 게 아예 없는 사람 같았다. 나무 탈처럼 무표정하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은 바람이 잦아들고 나서야 천천히 움직였다.

“내가 죽였다.”

“뭐?”

이곳저곳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주몽은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쥐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손바닥이 쇠와 맞닿으며 타는 것 같은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그대로 칼을 휘두르지 않은 것은 마지막 이성이 그를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해가람이 형님을 죽일 리가 없다.

주몽은 그를 알았다. 제 형님을 끔찍이 아끼던 그가 태자를 죽였을 리가 없었다. 그는 마지막 인내심을 끌어모아 다시 한번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내가 죽였어…. 내가 이 손으로 내 형님을…….”

같은 말만 중얼거리는 가람은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손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점점 팔과 어깨로 번지더니 이제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고 있었다. 그가 피가 굳은 손을 손톱으로 벅벅 긁어냈다. 흐트러진 머리를 흔들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반쯤 미친 것 같았다.

그러나 주몽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람의 답이 정상적인 대답이 아니라는 것쯤은 저도 알았다.

그래서 뭐?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겨우 나흘이었다. 고작 나흘간 형님 곁을 비운 대가로 발치에는 형님의 피가 고여 있었다. 그는 차마 올라가지 않는 고개를 들어 그의 형님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겨우 당신이 원하던 것을 해내려 하는데.

자신은 나라를 세우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평생 마구간지기가 되어 그의 말을 돌보라 해도 형님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형님은 내가 왕이 되길 바랐다. 그가 나의 곁에 있어 주겠다 할 만큼 그것을 원하니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비록 홀로 떠났지만 태자를 아끼는 자들이 가득한 이곳이라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안전하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그 대가가 가장 믿었을 동생으로부터의 배신이었나.

주몽은 멈췄던 손을 지체 없이 움직여 칼을 뽑았다. 흐르는 이 피의 양만큼 가람의 피를 뽑아내고 싶었다. 태자궁 모든 궁인들의 목을 베어내고 이리될 동안 아무것도 몰랐던 이들의 눈과 귀를 모조리 파내고 싶었다.

그는 칼을 그대로 가람에게 겨누었다. 칼끝을 마주한 가람이 설핏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두 팔을 내리뜨리고 눈을 감았다. 일견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에 간절함이 배었다.

이 순간 맞이할 죽음을 바라왔다는 듯.

그 순순한 태도에 더더욱 분노가 끓어올랐다. 주몽은 애써 그것을 감추지 않았다. 어차피 편히 죽여줄 생각은 없었다. 형님과 똑같은 자리에 칼을 꽂아 궐 벽에 건 뒤 신력을 담은 화살로 영혼을 소멸시킬 것이다. 어떠한 식으로든 다시는 형님을 만날 수 없게 영원히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말리는 자들도 똑같이 만들어 주리라. 시뻘겋게 달아오른 머릿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칼을 고쳐 쥐었다. 내지르는 팔에는 망설임 따위 없었다.

“이런.”

그 순간 어딘가 익숙한 듯 낮은 목소리가 공간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태자의 몸에 꽂혀 있던 칼이 저절로 뽑혀 나오더니 챙강, 쇠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주몽의 칼을 막았다.

그 반동으로 태자의 몸에서 막혀 있던 피가 모조리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눈앞이 뜨거운 피로 물들었다. 그 앞에 꿇어앉아 있던 가람은 쏟아지는 피를 모조리 맞았다. 정작 주몽의 칼은 스치지도 않았는데 온몸이 붉게 물든 모습은 흡사 난도질을 당한 것 같았다.

그 참혹한 광경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적막 속에 지지대를 잃은 태자의 몸뚱이가 풀썩 쓰러졌다.

“형님!”

주몽은 황급히 칼을 던지고 그 몸을 받아 안았다. 꿇은 무릎 위로 형님의 피가 꿀렁거리며 새어 나왔다. 작은 비명과 소란 사이에서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인사가 들렸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구나.”

자박자박 걸어오는 그녀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뒤에서 숨을 참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이름일 성싶은 부름이 터져 나왔다. 주몽도 그녀를 금세 기억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태자궁에서 오래 일한 궁인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는 궁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이 공간에서 홀로 웃는 얼굴이었다.

“저 아이를 지켜달라는 것이 네 형님의 마지막 부탁이느니라. 내 어찌 신이 되어 가엾은 아이의 유언을 무시할 수 있겠느냐.”

안쓰럽다는 말투와 달리 궁인은 발을 뻗더니 태자의 몸에서 빠져나온 칼자루를 툭 찼다. 무성의한 몸짓에 군데군데 푸른색이 남아 있던 술 장식이 피 웅덩이에 빠지며 적갈색으로 완전히 물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깨끗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들어 버선을 살폈다. 피로 물든 것을 확인하고 혀를 차는 모습이 태평했다.

오만한 저 몸짓과 개의치 않고 형님께 손을 대는 모습.

“신…….”

주몽은 공포에 질린 가람을 쳐다보았다. 푸른 빛에 몸을 떨었던 그의 모습은 마지막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저놈이 이 사태에 깊게 개입되어 있구나.

그는 어느새 붉게 물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다친 곳이 없는데도 뜨겁고 아프다. 형님의 피는 닿는 곳마다 절절 끓게 하더니 이내 머릿속마저 새빨갛게 달궜다.

다시 흐려지는 이성을 도로 깨운 이는 기어 오듯 휘청거리며 다가온 마리였다.

“저… 저하…. 안 돼요, 태자 저하…….”

문이 열린 순간부터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했던 그였다. 마리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가 손을 뻗어 태자의 턱과 목을 더듬더니 횡설수설 중얼거렸다.

“의원, 의, 의원을…. 아직 경직이 시작되지 않았으니, 아니, 그래도 피가 너무…….”

시체 처리에 이골이 난 마리였다.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죽은 사람이 어떻게 굳는지 생생하게 알았다. 태자 저하께선 이리되신 지 아직 식사 한 끼 마칠 정도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주몽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태자의 몸이 품 안에서 부드럽게 허물어졌다.

“과연…….”

그는 반사적으로 그 몸을 추슬러 안았다. 종이 위에 떨어진 먹 한 방울이 퍼지는 것처럼 천천히 정신이 돌아왔다.

마리가 짚어낸 흔적이 사실이라면……. 주몽은 몸을 틀어 곁에 다가와 있던 마리의 허리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칼을 잡고 휘두르기까지의 동작이 일련의 춤사위 같았다.

촤아악, 다시 한번 피 분수가 터졌다. 깔끔하게 잘린 궁인의 머리가 데굴거리며 구르더니 가람의 발치에 닿았다. 남은 몸뚱이는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홀로 깨끗하던 차림이 순식간에 그녀 자신의 피로 물들었다.

예고 없이 일어난 일에 좌중이 경악의 침묵에 빠졌다. 하지만 침묵도 잠시뿐이었다.

“저, 저것이 무슨……!”

동료의 죽음을 두 눈 크게 뜨고 보던 궁인이 손가락질을 했다. 드러난 목의 단면에서 푸른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구름처럼 뿌옇고 뭉글한 형체는 둥글게 뭉쳐지더니 갑작스럽게 밝은 빛을 뿜어냈다. 주몽을 제외한 모든 이가 눈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이윽고 진노한 목소리를 품은 공기가 웅웅 울렸다.

[어리석구나. 그런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거늘.]

주몽은 신의 음성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품 안의 형님을 꽉 끌어안았다. 누가 머릿속에 가위를 쑤셔 넣고 썰컹썰컹 가위질을 하는 듯했지만 되레 두 눈을 똑바로 떴다.

내게 잠들어 있는 힘이 더 깊고 거대하다.

본능이 그리 속삭였다. 이 땅과 바람, 태양과 달을 지배하는 자의 핏줄은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

한참 그를 마주하던 신은 이윽고 흔적도 없이 주변으로 퍼지며 사라졌다.

그제야 겨우 가시는 고통에 한두 명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안면에는 피가 점점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가람은 비릿한 혈향에 절여지면서도 기어코 눈 한 번 뜨지 않았다. 서늘한 안색이 그대로 죽은 것만 같았다. 유일하게 그가 살아 있음을 알리는 것은 시뻘건 뺨을 타고 흐르는 붉은색의 물줄기였다.

신이 사라졌다. 이렇게 간단하게.

가람은 그 사실이 한없이 고통스러우면서 동시에 환희를 느꼈다.

“드디어…….”

이제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님께서 마지막으로…… 내게 성군이 되라 하셨다.”

“…….”

작은 소리였지만 주변이 조용한 탓에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한참을 소리 없이 울던 가람이 천천히 눈을 떴다. 핏줄이 모두 터진 눈은 벌겋게 변해 괴기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걸 지킬 자신이 없어…. 형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나은 방법이야.”

더듬더듬 제 칼을 쥔 그가 팔을 부들거리며 그것을 들어 올렸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신께 저항하느라 과도하게 쓴 근육에 문제가 생겼는지 가만두어도 팔다리가 떨렸다.

그는 얇은 쇳덩어리 하나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무렴 그 순간만큼 무력할까. 눈꺼풀 안 점막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잔상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마지막이라 말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 간절한 바람은 주몽의 손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는 너무나도 손쉽게 가람의 손에서 칼을 앗아갔다. 간절한 염원을 또다시 제지당한 가람이 고함을 질렀다.

“지금 뭣 하는 것이냐! 당장 내놓거라!”

“저승의 강을 건너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형님의 영혼을 되찾아올 겁니다.”

“……뭐?”

비현실적인 말에 가람이 멍하니 되물었다. 그러나 주몽은 내뱉은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차분한 말투와 달리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지만…. 그리하면 형님의 영혼이 제일 먼저 마주하시는 게 저하일 테니.”

마치 그게 끔찍해 죽이지 않는다는 듯한 말이었다. 그러나 저 말은 마치 주몽이 영혼을 볼 수 있는 데다 데리고 올 수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가람의 죽어가는 눈이 희망의 빛을 띠었다. 형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수만 있다면 버러지 취급을 받아도 기꺼웠다. 어차피 형님께서도 그를 죽인 자신은 꼴도 보기 싫어하실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주몽은 가람이 염치도 모르고 형님을 바라는 것에 속이 뒤틀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 말한 이유도 이유였지만 형님이 깨어나셔서 죽은 가람을 보았을 때를 생각하면 잠깐 견디는 것이 백번 나았다. 섣불리 죽였다가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그는 형님의 편지에 해가람과 잘 지내라는 내용도 있었던 것을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일단 형님을 모시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희망을 가진 자는 가람뿐만이 아니었다. 줄곧 주저앉아 넋을 놓고 있던 태자의 유모가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사, 살릴 수만 있다면…. 도울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해주십시오.”

“……그럼 형님의 물건 중 단검 하나를 찾아오너라. 검집에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고 옅은 푸른 빛을 내고 있을 것이다.”

가까스로 혼절하지 않은 다른 궁인이 굳게 다문 입매를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몽은 그녀가 방을 뒤지기 시작하는 걸 보며 마리에게는 별궁으로 가 유화 부인을 모셔오라고 시켰다.

지금부터 하는 일은 아는 것 없이 오로지 감에 의존하여 벌이는 일이었다. 한때 천계의 일원이었던 어머니가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주몽은 차분하게 저승에 다녀올 준비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을 모시고 오는 동안 육체가 힘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선 남은 궁인들과 함께 태자의 상처를 동여맸다. 칼이 관통한 탓에 배와 등 모두 상처가 깊었다. 완벽하게 처치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그는 이미 너무 많은 피가 흘러 손바닥마저 창백한 형님을 바라보았다.

“…형님.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작은 속삭임을 듣지 못했더라도 상관없었다. 주몽은 근처에 떨어진 칼을 주워들다 고개를 젓곤 화살을 뭉텅이로 뽑아 들었다. 결계를 깰 때도 느꼈지만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무기여서 그런지 칼보단 화살이 더 힘을 주입하기에 편했다.

이윽고 모든 화살에 푸른 빛이 감돌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것으로 자신의 상완부터 손목까지 그어 내렸다. 날카로운 날이 피부를 소리 없이 갈라냈다. 그런 뒤 쩍 벌어진 상처에서 쏟아지는 피를 모조리 태자 위로 쏟아부었다.

그의 기행에 태자의 상처 압박을 돕던 유모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지금 무얼 하시는 겁니까!”

“내 피라면 일시적으로나마 생명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신의 힘을 스스로 깨달았던 그날처럼 뼈와 살이 말하는 직감이었다. 그의 의지를 담은 피가 기묘한 빛을 품고 반짝거렸다.

이미 피로 물들어 있던 태자는 순식간에 타인의 피로 또다시 젖어 들었다. 주몽은 그의 몸 전체를 충분히 적신 뒤 다른 팔을 그어 입에도 피를 먹였다. 섭취 능력을 잃은 몸이었지만 입 안이 넘쳐 차오르는 일은 없었다.

유모는 금세 그 연유를 깨달았다. 물수건으로 닦아본 뺨이 전과 달리 사람의 피부색을 띠고 있었다.

“하. 하늘이시여…….”

그녀는 안도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변화가 있는 것은 몸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돌아온 혈색만으로도 이미 태자 저하께서 다시 살아난 것만 같았다. 충격에 빠져나오지도 못했던 눈물이 그제야 흘러나왔다. 그녀는 제 옷이 피로 물드는 것도 모르고 태자의 옆에 엎드려 흐느꼈다.

주몽은 묵묵히 상처를 갈무리했다. 이 정도면 열흘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신의 힘을 가둘 매개체가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선 사치였다.

가기 전에 어머니께 몇 가지를 여쭤보고 싶은데.

그의 바람이 통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급한 뜀박질과 함께 유화가 문밖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산산이 부서져 파편만 널브러진 문짝을 보더니 이내 방 안의 참혹한 현상과 마주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끔찍한 광경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가장 경악한 것은 팔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주몽과 그 아래 누워 있는 태자였다. 한달음에 달려온 그녀가 주몽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 무얼 하는 게냐!”

“어머니.”

그녀는 마주친 눈과 짧은 부름만으로 모든 사태를 파악했다. 같은 피가 흐르는 신의 혈통이었다. 흐르는 피가 미세하게 반짝이는 것만으로 그가 하려는 짓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유화는 떨리는 고개를 내려 태자를 바라보았다. 피로 물든 그의 흉곽은 잠잠했다.

저도 모르게 나지막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아이가 결국…….”

원하는 것을 고르라 했더니 기어이 이곳을 떠났구나.

원망이나 아쉬움은 없었다. 아이가 바라던 게 이루어졌다면 그걸로 되었다. 자신만큼은 이 아이의 선택을 지켜줘야 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다짐을 새기며 주몽을 바라보았다. 드물게 단단한 얼굴에서 다그침이 쏟아져 나왔다.

“생명을 넣는 것은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하물며 아직 완전한 신이 아닌 너는 더더욱!”

온전한 신이라 하더라도 생명은 암묵적으로 건드리지 않았다. 짐승 하나라도 가벼운 목숨은 없다. 운명을 거스른 생명이 추후 어떤 문제를 불러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에 아예 술수부터 기밀로 분류되어 있었다. 유화 역시 억지로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주입하는 자의 생명력이 필요하다는 것만 알 뿐, 자세한 것은 몰랐다.

하지만 주몽은 제 생명이 깎여 나간다는 말을 듣고도 태평했다. 오히려 고작 그것뿐이냐며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어차피 형님이 없으면 자신도 살 필요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보다 조금 전에 무어라 하셨습니까.”

그가 관심을 보인 것은 유화가 짧게 중얼거린 탄식이었다. 분명 태자의 죽음을 예측하기라도 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어머니께선 이리될 줄 미리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가 날카롭게 유화를 추궁했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해 짧게 머뭇거렸다. 대답을 고르는 사이 주몽은 흥미를 잃은 듯 홱 고개를 돌렸다.

“무어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형님을 되찾아올 테니.”

그럴 수 있다는 확신에 가득 찬 말투였다. 그 모습에 유화는 말을 잃었다.

그때 검을 찾으러 갔던 궁인이 다급하게 돌아왔다. 그녀는 주몽의 팔과 태자를 번갈아 보더니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찾은 것을 고했다.

“저, 다, 단검은 오직 이, 이것뿐이었습니다.”

그녀가 내민 것은 아름답게 세공된 단검이었다. 주몽은 서둘러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칼집을 뽑는 순간 그는 망연하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빛이…….”

빛이 사라졌다.

그는 다급하게 칼을 살폈다. 그러나 양각으로 세공된 검집부터 가운데 깊숙이 파인 홈까지 제 기억 속과 똑같았다. 유명한 외부 대장장이에게 직접 주문을 넣어 제작한 단검이 세상에 둘 있을 리도 없다.

분명 단검에 형님의 영혼의 끈을 묶어 두었다. 설사 망자가 되어 저승에 있다 하더라도 강을 건너지 않았다면 끈은 끊어지지 않는다. 주몽은 그 끈을 따라 형님의 영혼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손에 쥔 단검은 언제 빛을 뿜어냈냐는 듯 철 특유의 무거운 색만 띠고 있었다. 빛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이 세상에 없다는 말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벌써 저승의 강을 건넜다고?

“아니. 이럴 수는 없어…. 밤이 채 가기 전에 영혼이 사라질 수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주몽은 그 순간 입을 다물었다. 강을 건너지 않고도 단번에 끈이 끊기는 방법.

그것은 영혼의 소멸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짓을 저지를 만한 인물은 단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신.”

그자가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잠시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것을 느꼈다. 제 형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만으로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었던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제 명을 재촉하는구나. 그는 시뻘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태자가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더라면 신이 직접 죽음에 관여했을 리가 없다. 형님께서는 어렸을 때 제천 행사를 이끌며 신의 목소리를 들으신 적도 있었다. 신목까지 손수 선물해 줄 정도이니 여간 깊은 사이가 아니었을 터. 지금까지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특별한 존재를 단숨에 소멸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주몽은 스스로를 세뇌하는 것처럼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분명 그가 알지 못하는 해괴한 방법으로 감춰둔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해서든 형님을 되찾아와야 했다. 이대로… 이대로 보낼 순 없었다.

주몽은 참지 못하고 마른세수를 했다. 채 굳지 않은 피가 얼굴에 얼룩져 더욱 흉흉해 보였다. 그는 그대로 유화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무심히 넘겼던 말 하나조차 지금은 간절했다. 무언의 압박에 유화가 짧게 입술을 깨물었다. 묻지 않아도 아까 무심코 새어 나온 말에 대한 물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몰랐어. 이리 잔인하게 가리라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태자를 바라보는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녀가 짧게 덧붙였다.

“하지만 뭐든 그 아이의 선택이었을 거다. 이만 놓아주거라.”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제게, 제게 돌아오시겠다, 꼭 와주겠다 약속하셨단 말입니다. 제게 이러실 수는 없다고요!”

유화의 말에 꾹꾹 눌러왔던 분노가 드디어 터졌다. 주몽은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제 형님의 영혼마저 되찾을 수가 없게 된 마당에 이젠 그것이 그의 선택이었을 테니 붙잡지조차 말라고 한다.

자신은 떠나는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했는데. 그의 마음이 무엇이건 자신은 그의 입으로 단 한 번도 낱낱이 들은 적이 없는데!

형님을 마주했던 마지막 순간이 그 빌어먹을 호숫가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럴 순 없었다. 반드시 형님을 만나야 했다. 그가 정녕 자신을 버리고 떠났을 리가 없다.

그는 유화를 노려보았다.

“신… 그자를 만나야겠습니다. 어머니께선 그 방법을 알고 계시겠지요. 제게 알려주십시오.”

“……나도 모른다. 네가 그자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신계에 오를 수 있는 업적을 쌓는 것뿐이야.”

잠시 침묵하던 유화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리 금세 본래의 세상으로 건너가리라곤 생각지 못했지만 어쭙잖게 명계에 남아 있다가 도로 붙들려 오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태자의 성격에 한참을 괴로워하다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그 결정을 지켜주는 것만이 이곳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머니!”

“나는 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구나.”

그래서 그녀는 이어진 노성에도 꿋꿋하게 침묵을 이어갔다. 더 이상 무엇도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아챈 주몽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또 다른 발작적인 외침이 들렸다.

“형님… 형님께선 어찌 되는 것이냐. 다시 살려낼 수 있다 하지 않았느냐!”

곁에서 멍하니 사태를 지켜보던 가람이었다. 그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머리로도 불길한 기운이 흐르는 것을 빠르게 알아챘다.

이어진 두 사람의 침묵은 차마 믿을 수 없었던 짐작에 쐐기를 박았다. 가람이 더듬거리며 칼을 쥐었다.

“모두 내 잘못이야…. 내가 죽어야만, 죽음으로 사죄드려야만…….”

“……저하.”

“돌아오실 수 없다면 지금이라도 길동무가 되어드리겠다. 형님께서 외롭지 않으시도록…….”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그는 이미 단단히 미쳐버린 것 같았다. 동공이 탁 풀리고 입가에는 침이 흘렀다. 주몽은 다시 한번 그의 칼을 빼앗았다. 그 즉시 마리가 가람을 단단히 붙잡았다. 가람이 버둥거렸지만 이미 근육이 망가진 몸은 힘을 쓰지 못했다.

주몽은 결박된 가람의 앞에 몸을 낮추고 앉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끝없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가까이 마주한 눈이 기괴하게 번들거렸다. 주몽은 그대로 품 안에 넣어두었던 편지를 꺼냈다. 깔끔하게 접혀 있던 편지 겉면에 핏자국이 남았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꼼꼼하게 읽어 내렸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말거라. 원래 이리될 운명이었으니.’

“원래 이리될 운명 따위…….”

이렇게 친아우의 손에 찔려 피투성이로 누워 계시는 게 정녕 스스로가 선택한 운명일 리가 없다. 무엇이 그의 잘못이고 원래 이리될 운명 따위는 대체 어디 있는지.

‘부강한 나라’. ‘네 할 일’. 주몽은 드문드문 눈에 띄는 단어를 짓씹었다. 신을 만나기 위해선 신계에 오를 수 있을 만한 업적을 쌓아야 한다고 했었지. 이 단어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 또한.

그는 마지막에 적혀 있는 세 글자를 엄지로 문질렀다. 낯선 이 이름이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릴 인내심은 없었다.

바닥에 늘어진 화살을 하나 집어 제 손바닥에 박았다. 살에 반쯤 묻혔다 빠져나온 화살촉이 신선한 피를 뚝뚝 떨어뜨렸다. 주몽은 피가 흐르는 손바닥으로 가람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이 가는 길마다 짙은 핏자국이 남았다.

이윽고 옷까지 찢으며 어깨로 내려간 손은 어깨뼈를 꽉 쥐더니 망설임 없이 그곳에 화살을 꽂았다.

“크윽……!”

가람의 몸이 고통에 펄떡였다. 그러나 주몽은 커다란 화살촉 전체가 어깨를 파고들고 나서야 다시 화살을 거뒀다. 천천히 빠져나오는 화살은 기묘하게도 푸른 빛으로 빛났다.

가람이 그 빛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주몽은 그의 얼굴 전체에 서린 공포심을 무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이 화살에는 저하의 영혼이 매여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가지고 있는 한 저하께서는 죽음을 맞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게 무슨…….”

“영혼이 떠나더라도 몇 번이고 붙잡아 다시 넣을 테니까요.”

제가 하는 짓을 보지 않았느냐며 주몽이 누워 있는 태자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가람은 그대로 굳어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협박은 거짓이 아니었다.

“형님은 제가 반드시 모셔올 겁니다.”

“…….”

“그러니 그때까지 저하께서도 살아 계십시오. 형님이 아끼셨던 이 부여를 부강하게 만들며 살아 있는 하루하루를 고통에 잠겨 지내십시오.”

주몽이 화살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래야 제가 이 화살로 손수 저하를 죽여 드리는 날, 형님께서 돌아오실 테니.”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형님께서 돌아오실 때면 자신은 이미 왕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거대한 부여의 왕을 죽인다면 확실히 ‘신계에 오를 수 있는 업적’을 충족시킬 수 있겠지.

대놓고 반역을 이야기하다니, 뻔뻔하기도 하다. 아니, 제 손으로 추방령을 내렸으니 이젠 반역도 아니려나. 가람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길고 긴 부여의 역사에서 가장 부강한 시대가 될 미래를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왕위에 올라 웃음 지은 채로 화살을 맞을 자신 또한.

“……그래. 그리하자.”

그는 자신이 죽은 뒤 그 자리를 되찾으실 형님을 떠올렸다. 주몽이 부여의 왕을 죽이면 잠시간 혼란은 일겠지만 어차피 형님께서 왕위에 오르시려면 자신은 없어져야 하는 존재였다.

누구보다 화려한 추락은 동시에 잊을 수 없는 비상을 가져올 것이다. 자신은 오직 형님께서 돌아오시기까지 그 물건들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올리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

유화는 망하기 위한 나라를 길러달라 말해도 환희에 찬 얼굴로 웃는 가람을 착잡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선택들이 스스로를 갉아먹을 것을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구나.

대체 어쩌자고 이런 아이들 앞에서 그리 잔인한 모습으로 갔느냐. 그녀는 짙은 안타까움을 담아 태자를 내려다보았다. 영혼을 잃은 빈 몸에 억지로 쑤셔 넣은 생명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것은 임시방편일 뿐이야. 영혼이 떠난 몸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주몽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현실은 냉정한 법이었다. 애초에 얼기설기 엮은 주머니에 모래를 담은 꼴이었다. 아무리 넘치도록 부어도 시시각각으로 빠져나가는 생명력을 매번 채울 수는 없었다.

주몽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부족한 피는 둘째 치더라도 새 나라를 세워야 하는 자신이 언제까지나 이곳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짧은 생각을 마친 그가 가람을 돌아보았다.

“신목이 필요합니다.”

가벼운 눈짓만으로 그는 자신의 할 일을 알아챘다. 가람은 마리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걸음 걷자마자 마리를 홱 뿌리치고 나가는 모습을 보던 주몽은 하얗게 질린 유화를 다시 마주했다. 그녀가 다시 한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아이가 원치 않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느냐?”

“그 또한 제가 판단할 것입니다.”

이보다 더 불통인 이는 없을 것이다. 유화는 끝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보니 그 아이는 끝까지 널 놓지 못했겠구나.”

주몽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는 체념한 투로 덧붙였다.

“그 아이가 온몸을 바쳐 쏟아부은 애정이 아니고서야 네 그 오만한 태도가 설명되지 않으니.”

모든 일이 다 제 생각대로 돌아갈 것이며 자신의 판단만이 옳다는 저 모습. 저 모습을 보니 처음으로 태자의 선택이 온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타고나는 기본 성정이 있다 하더라도 변변찮은 상황에서 저렇게 오만하게 자라기는 쉽지 않았다. 누군가의 끊임없는 지지와 애정이 있었을 것이다.

홀로 이곳에 떨어져 살아가야 했던 그 아이가 유일한 희망이었을 주몽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는 장면은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그렇게 제 전부를 담고 있는 걸 끊어 내는 것은 누구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맹목적인 태도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

주몽은 더 이상 유화와 말을 섞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그녀가 이러는 이유 또한 형님의 입으로 직접 들으면 될 일이다. 그는 가지런히 눕힌 태자의 손을 잡았다. 말을 달리며 간절히 바랐던 부름을 고대하며 작게 속삭였다.

“형님.”

“…….”

그는 밤새도록 곁에 앉아 그의 형님을 불렀다.

그러나 꺼진 가슴이 다시 부푸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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