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으…….”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눈앞에 푸른 빛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뜨지 못하고 그대로 얼굴을 부여잡았다. 그 희미한 빛에도 눈이 타들어 갈 것처럼 아팠다.
“형님? 정신이 드십니까? 형님!”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재차 불렀다. 의원을 불러오겠다는 궁인의 목소리가 소란에 섞여 들었다.
대답 대신 감은 눈을 붙잡고 신음하다 반사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다행히 푸른 빛이 사라지며 그 자리를 하얀 자연광이 채웠다. 그제야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뜰 수 있었다.
“……가람아?”
“예, 접니다.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나는 예상치 못한 얼굴에 당황해 입만 뻐끔거렸다. 조금은 마른 듯 얼굴선이 날카롭게 선 가람이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보통 그는 낮이나 저녁에 많이 찾아왔기 때문에 이런 이른 방문이 낯설었다.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일으키려고 시도했다. 내 몸 같지 않게 팔꿈치로 지탱하자마자 무너져 내리는 상체를 가람이가 급히 받쳤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사흘이나 잠들어 계셨습니다.”
“사흘? 잠시만, 아…….”
나는 극심한 어지러움에 이마를 짚었다. 뇌가 아래로 쑥 꺼지는 것만 같았다. 말도 채 잇지 못하는 모습에 가람이가 나를 다시 살살 눕혔다.
다행히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자 어지럼증은 금세 가라앉았다. 그사이 도착한 의원이 침통을 펼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일어나셔서 참말로 다행입니다! 그간 제가 어찌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진료나 보거라.”
가람이가 매섭게 눈을 치켜뜨며 의원을 노려보았다. 그 즉시 의원이 자라처럼 목을 쑥 집어넣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 쭈그러든 모습이 안타까웠다. 윗사람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흔치 않은 심성의 소유자인데. 나는 두둔이라도 해주고자 입을 열었다.
“왜, 우리 친해……. 하도 자주 봐서, 윽!”
그러나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이마 정중앙에 기다란 침이 꽂혔다. 여러 번 맞았어도 생경한 느낌을 참는 사이 가람이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내 말에 대꾸했다.
“의원을 자주 만난 게 자랑이십니까?”
평소 같지 않게 불손한 말투였다. 다행히 안절부절못하던 의원이 침을 맞는 동안에는 말씀을 하시면 안 된다고 타이르며 말싸움은 끝났다. 대꾸를 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얼굴 곳곳 걱정이 서려 있는 모습을 보자 미안함이 먼저 느껴졌다.
사흘이라니. 꽤 오래도 잠들어 있었다. 가만히 누워 침을 맞고 있으려니 점차 마지막 기억이 되살아났다.
“…….”
결국 호수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주몽이 하얗게 질려서 소리를 지를 만도 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정말로 사소한 충동조차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나는 내 것 같지 않던 팔다리를 가만히 주물렀다. 그렇게나 들뜨고 우습고 토악질이 올라오던 기분은 다시 잠잠해져 있었다.
아무튼 끌고 올라오느라 꽤나 힘들었겠네. 침을 다 맞으면 주몽 얘기부터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내가 깨어났다는 얘기를 들었을 법도 한데 오지 않는 걸 보면 쓸데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됐습니다. 당분간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식 위주로 잡수시고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많이 어지러워하시는 것 같던데. 처음에는 눈도 잘 뜨지 못하셨고.”
“너무 오랜만에 깨어나셔서 그런 것으로 사료됩니다. 처음 일어나실 땐 반드시 천천히, 등 뒤에 이불을 받쳐 적응하신 다음 움직이셔야 합니다.”
다행히 내가 쓰러진 사이 많이 왔다 갔는지 치료는 금세 끝이 났다. 나 대신 궁금한 것을 모두 물어본 가람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끝으로 의원이 물러나기가 무섭게 궁인이 갈색빛의 탕약을 들이밀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싫은 낯빛을 띠었다. 몇 번 먹어봤는데 걸레 빤 물 같은 끔찍한 맛에 뜨듯하기까지 해서 더 고역인 탕약이었다.
그러나 위통으로 쓰러지기까지 한 사람에게 거부할 권한은 없었다. 궁인들은 내가 숨을 참고 약을 모두 비우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죽을 들여왔다. 나는 그동안 비스듬히 앉아 어지럼을 달랬다.
간신히 입을 뗀 것은 숟가락이 손에 쥐어지고 나서였다.
“주몽은?”
“그놈 이야기는 왜 또 물으십니까?”
아니 나 처음 물어본 건데…….
그러나 억울함을 토로하기엔 가람이의 얼굴이 너무 흉흉했다. 주몽의 이름을 꺼내기가 무섭게 그는 이를 악물었다. 가람이 단단히 굳은 얼굴로 숟가락을 빼앗더니 뜨거운 죽그릇을 휘저었다.
그러나 식히려는 의도보다 이 주제를 피하려는 낌새가 너무 강했다. 그가 주몽을 싫어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나는 덩달아 얼굴을 굳히며 다시 캐물었다.
“무슨 일인데. 혹시 고뿔이라도 걸렸대? 그날 호숫물이 찼는데.”
“지금 그날이라고 하셨습니까? 그 밤의 기억이 살아 있으시면서도 제게 그놈의 안부를 물으십니까?”
재차 돌아온 날카로운 반응은 내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해주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주몽의 상황을 입에 올리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게다가 말하는 투가 흡사 내가 쓰러진 날 밤 나와 주몽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기라도 하는 듯했다.
나는 밀려오는 불안한 예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가람이 단언을 하며 내 생각을 끊었다.
“형님께서도 이제 관심을 거두십시오. 그놈을 부여에서 다시 보실 일은 없으실 테니.”
“그게 무슨 소리야. 주몽이 떠났다고?”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나는 황급히 퀘스트 창을 불러왔다. 손짓 한 번에 곧장 새로운 내용을 담은 창이 떴다.
[메인] 남쪽, 새 땅으로. – 완료
‘주몽’과 ‘오이’, ‘마리’, ‘협보’가 모두 지정된 강을 건넜습니다. 남쪽 땅에 들어선 그들은 이제 안전합니다. 보상으로 마지막 퀘스트가 오픈됩니다.
눈을 떴을 때 시야를 잠식하던 푸른 빛은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설마. 나는 가장 먼저 떠오른 가정에 초조하게 떨리는 손을 들어 ‘신의 언약’ 창을 불러왔다. ‘(3/4)’. 한편에 새겨져 있는 카운트 표시는 지난밤과 다를 바가 없었다.
“…….”
나는 잠시나마 정신을 잃은 나를 강제로 안았다고 의심한 주몽에게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다행히 주몽이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약조를 지키지 않은 나를 놔두고 떠날 사람 또한 아니었다. 그는 직감을 꽤 신뢰하는 편이었고 불안감을 남겨둘 만큼 허술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부여를 떠날 명분도 준비가…….
그 순간 나를 낮게 윽박지르던 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른 가정을 입에 담았다.
“너… 설마 추방령을 내렸어?”
가람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곧 피할 이유가 없다 생각했는지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어찌나 원한을 사고 다녔던지 별로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제게 제안하는 자도 있더군요. 덕분에 그를 선봉장으로 세워 내려보낸 지 이틀이 넘었습니다.”
이틀이라면 내가 쓰러진 다음 날 아침에 바로 군사를 꾸려 내쳤다는 의미였다. 둘째 왕자인 그가 마구간지기를 추방하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실의 병력을 사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대역 죄인도 아닌 자를 사적으로 내치겠다고 군대 사용 허가가 내려질 리도 없고, 그만한 대역죄가 모두가 잠든 밤사이에 인정될 리는 더더욱 없었다.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깊은 밤에 가람이와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분이 있으며 주몽을 미워하는 자. 거기다가 가문에서 거느리고 있는 사병의 수가 많고 그들을 무리 없이 부릴 수 있는 자라면 한 명밖에 없었다.
“마태령이야? 그자를 앞세워서 보냈어?”
“…….”
그는 침묵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너 정말 순수하게 추방을 위해 내려보낸 게 맞아?”
마지막 말은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추방형을 말하는 그의 눈에서 마태령과 같은 빛을 보았다.
설마하니 우리 착한 가람이가. 아무리 주몽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그 정도는 아니겠지. 스스로에게 아무리 속삭여도 나는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태령이 주몽을 죽일 작정이라는 걸 정말 몰랐냐고!”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무섭도록 똑똑한 아이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아니나 다를까 가람이는 짧게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알아채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는지 낭패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 기색은 곧 분노로 물들었다. 그가 떨리는 손을 주먹 쥐어 감추며 낮게 외쳤다.
“전… 저는 그저 기강을 어지럽힌 죄를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자가 어찌 감히……!”
“……너 대체 무엇을 본 거야.”
“그날 밤 형님께서 그자와 접문하시는 걸 봤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높게 올라갔다. 가람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나는 아연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형제의 사생활을 엿본 부끄러움? 남색을 목격한 당황? 아니다. 저건 분노였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의 입에서 분노 가득한 음성이 쏟아져 내렸다.
“형님께서 괴로워하시는 것도 모조리 보았습니다. 보나 마나 그 미친 새끼가 이 사달을 냈겠지요. 하지만 계속해서 식사를 거르시는 형님이 걱정되어 밤중에 찾아뵈려던 제 마음은 헤아려 보셨습니까!”
“네 마음이 뭔데?”
속사포처럼 말을 토해내던 그가 근육을 단단하게 굳혔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의아하고 조금은 화도 났다.
“염려해주는 건 고마워. 하지만 이건 내 사적인 일이야. 고작 형제의 일에 이렇게까지 하는 건 좀 과하다 생각해본 적 없어?”
나는 지금 내 마음을 헤아리는 것조차 벅찼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주몽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상황이었다. 그 증거로 퀘스트 완료 창까지 떠올라 있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도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하나의 운명이 나를 끌어당긴 것이다.
하지만 이게 정말인지 믿어지지 않았다. 혼란과 불안이 뒤섞여 뇌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안도가 섞여 있었다. 차라리 내가 잠든 사이 앞길이 선택되어 다행이라는 자그마한 안도.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 주몽은 결국 태령에게 쫓겨나듯 부여를 떠났다. 목숨조차 위험할지도 모르는 추격이 벌어졌다는데 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는 것에 안도를 느끼고 있었다. 주몽에게 죄책감이 들고 난데없이 일을 당했을 세 벗들에게도 너무나 미안했다.
이 상태에서 안타깝게도 동생 마음까지 신경 쓰며 행동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무엇보다 입을 맞춘 상대가 주몽이 아니라 정식 태자비였어도 그가 이렇게 반응했을까 싶었다.
친형제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니 주몽에 대한 원한으로 뱉은 말이겠지. 나에겐 살인 행위를 방조한 것에 대한 변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이제야 스스로도 의문을 가진 걸까. 가람이는 어쩐지 강한 충격을 받은 듯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급기야 덜덜 떨리는 손에서 숟가락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는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형님. 그게 아니라 저는….”
길게 침묵하던 그가 입을 뗐지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착잡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가람이가 나를 많이 따르고 나도 그를 아끼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독단적으로 내 사람을 내친 것은 솔직히 정말로 선을 넘은 일이었다. 마침 주몽이 해야 하는 일과 맞아떨어져서 다행이지. 친형제라 하더라도 지켜야 할 정도가 있는 법이다. 애초에 원래 ‘친동생’과도 살갑지 않았던 나로는 그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내가 이곳에 남든 집으로 가든 가람이와는 떨어져야 할 텐데……. 그러나 그에게 더 말을 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이미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내 눈조차 마주치고 있지 못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그만 물러가. 지금은 나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미안해. 짤막하게 덧붙인 사과를 그가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뒤로도 그가 한참이나 앉아 있다 나갔다는 것뿐이었다.
차갑게 식은 죽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눈치를 보던 궁인이 새로운 죽을 내왔다.
“저하, 이럴 때일수록 몸을 보존하셔야 합니다.”
나는 그것을 휘젓기만 하다가 숟가락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다시 속이 살살 아팠다. 고통을 참으며 죽을 밀어 넣는 대신 계속해서 깜빡이는 시야 한구석을 건드렸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퀘스트를 읽어봐야 했다.
이윽고 눈앞에 익숙한 푸른 창이 펼쳐졌다.
[메인] 마지막 퀘스트
갑작스러운 이별은 부강한 나라의 상징인 ‘오곡’ 중 하나를 놓고 가게 했습니다. 오늘이 가기 전에 ‘주몽’에게 ‘보리 씨앗’을 전달해주세요. 신모의 사자가 그것을 도와줄 것입니다.
제한 시간 - 11:53:47
성공 시 보상 : ‘이야기’의 결말에 무사히 도달, ‘집’으로 귀환
이전 퀘스트 완료 창과 한꺼번에 떠올랐는지 제한 시간은 이미 제법 줄어 있었다. 나는 짤막한 내용을 두세 번 거듭해서 읽었다.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내용을 억지로 구겨 넣고 나서야 ‘동명왕편’에서도 유화가 보리 씨앗을 뒤늦게 비둘기의 입에 물려 날렸던 기억이 났다.
신모는 아마도 유화 님이겠지. 나는 보상 칸에 쓰인 글자를 천천히 더듬어 보았다.
나는 정말 ‘집’으로 돌아가게 될까?
그러나 늘 그렇듯 내 마음과 상관없이 퀘스트는 해결해야 했다. 나는 궁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별궁으로 가자.”
언젠가부터 죽어버린 기대감은 없었다.
***
“그 애가 떠났더구나.”
달그락, 뚜껑이 미세한 소음을 내며 죽그릇과 부딪혔다. 나는 숟가락을 들던 손을 멈칫했다. 뚜껑을 열던 궁인이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내 눈치를 보았다.
별궁에만 있는 유화가 먼저 말을 꺼낼 정도면 내가 누워 있는 사이 주몽이 추방당했다는 소식은 이미 궐을 한 바퀴 돈 모양이었다.
어쩐지 다들 내 눈치를 보더라. 나는 웬일로 별궁에 가겠다는 나를 막지 않은 유모를 떠올리다 홀로 납득했다. 주몽이 내 총애를 듬뿍 받고 있다는 건 유명했으니 분명 상심했을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했다.
한 입도 대지 않은 죽그릇이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지만.
세 번째 데워진 죽그릇을 흰 눈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다소 뜬금없는 나 홀로 식사에도 흔쾌히 자리를 내어준 유화는 홀로 찻잔을 든 채였다.
나는 죽 표면을 살살 긁다가 궁인들이 모두 물러나기가 무섭게 툭 내려놓았다. 목구멍에 턱 걸렸던 늦은 대답이 잔뜩 잠긴 채로 흘러나왔다.
“예, 그랬더라고요.”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끝으로 한동안 침묵만이 흘렀다.
나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손가락만 쥐어뜯었다. 퀘스트를 해결하러 왔지만 모순적이게도 정작 입을 떼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녀였다.
“보리 씨앗과 비둘기가 필요해서 온 게지?”
나는 놀라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덤덤한 말은 퀘스트의 내용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아셨냐고 묻는 대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끝나가는 마당에 더 궁금한 것이 뭐가 있을까. 내 태도에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걸 내어주는 건 어렵지 않단다. 다만 너는 어찌할 건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집으로, 돌아가야지요. 주몽도 떠났으니…….”
나는 더듬더듬 말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게 진정 네 바람이더냐?”
가장 두려웠던 물음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유화의 물음에는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 바람처럼 묻어 있었지만 나를 붙잡는 기색은 아니었다. 정말 이것이 내가 원한 것인지 마음을 써서 걱정하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이미 주몽이 떠나고 마지막 퀘스트가 등장했다. 이제 와서 내가 무엇을 원하든 나는 이미 버스에 아이를 태워 보낸 것이다.
“저는…….”
더 쓸모가 없어진 정류장에 남은 운명은 철거뿐이다. 익히 알고 있던 운명이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걸 간절히 바라기까지 했다.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그 바람을 더듬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최소한 이곳에 남을 소중한 사람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설레고 행복한 모습만 보여줘야 했다.
그러나 입을 뗀 순간 나를 지켜보던 유화와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올렸던 입꼬리를 그대로 일그러뜨렸다.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덧씌운 가면은 나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표정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결국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속마음은 ‘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두서없이 터져 나왔다.
“가족들이 보고 싶어요. 저 없이 둘이 살아갈 생각을 하면 막막해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 주몽을 버리고 갈 수 있죠?”
“…….”
“저는 무사들이 그 아이를 쫓아갔다는 소리를 듣고 제 손으로 이 운명을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꼈어요. 제가 그랬다고요!”
나는 계속해서 쥐어뜯던 손을 눈앞에 들어 보였다. 잔뜩 긁혀 피가 배어 나오는 모습이 추악하고 끔찍했다. 손마디가 뻣뻣해질 정도로 손에 힘을 주다가 벌벌 떨리는 손바닥에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짓눌린 목소리가 기어이 울음에 잠겨 흘러나왔다.
“그 뒤로 주몽의 생각이 떠나지 않아요. 아니, 사실은 그전부터……. 평생토록 그 아이를, 내가 거둔 사람들을, 이 땅, 이 부여를 그리워할 게 분명한데!”
“얘야…….”
“이런 제가 감히 어떻게 떠날 수 있나요? 저는 두 번 다시 이걸 견딜 자신이 없어요…….”
따스한 손길이 나를 끌어안았다. 사람의 온기를 가까이서 느낀 순간 나는 이런 식으로 끌어안겨 본 적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자’인 나를 감히 이렇게 안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나를 휘두르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는 사람의 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손에 쥔 온기에 매달리며 애원했다.
“유화 님, 유화 님께선 지혜로우시잖아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제발 제게 답을 알려주세요. 제발…….”
말도 안 되는 고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붙잡은 옷자락을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주몽과 닮은 손이 내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러나 상냥한 목소리는 내 구걸을 단호하게 밀어냈다.
“그건 네가 스스로 선택해야 할 문제 같구나. 네가 살아갈 인생이니.”
“…….”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네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말을 달려 넘어가도 된다는 것이란다. 신과 맺은 조약이 무언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아직 여기 남아 있다는 건 그게 끝나지 않았다는 거겠지.”
그녀의 말이 맞았다. 신은 모든 것이 끝나면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조했지만 ‘신의 언약’처럼 강제성을 띤 것은 아니었다. 내가 원한다면 거부하고 이곳에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애써 의식 저편으로 밀어냈던 선택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기울었다고 생각한 운명의 추는 다시 평행을 찾았다. 이제는 원치 않아도 ‘신의 언약’으로 나를 질질 끌어당길 주몽도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온전히 나의 힘으로 선택을 해야 했다.
나는 그 버거움에 짓눌려 숨을 헐떡였다. 한 번 놓았던 선택은 다시 돌아왔을 때 더욱 무거워져 있었다.
유화는 그런 나의 팔을 재차 쓸어내렸다. 화구를 잡느라 굳은살이 박인 손이 끊임없이 온기를 전달했다. 내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그녀는 심지가 굳은 말투로 말했다.
“이번만큼은 네 마음 가는 대로 하거라. 주몽이든 가족이든 남을 사람은 걱정하지 말고 오로지 네 마음만.”
“그, 럴 수는 없어요. 저, 저는 그래서는….”
나는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나는 나만을 위해 행동해선 안 됐다. 그게 내가 태어난 이유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흔들리는 고개는 그녀의 손에 단단히 붙잡혔다.
“단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잖느냐. 네 모든 삶은 그 애를 위해 살아왔으니…….”
“…….”
“그러니 이곳에서의 모든 순간을 바쳐 얻어낸 결과마저 남을 위해 쓰지 말거라.”
내가 언젠가 그녀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녀가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너는 이미 넘치게 할 일을 다 했고, 이대로 버텨준 것만 해도 대견하다고.
눈물이 뚝 떨어졌다. 나조차 잊었던 고생이었다. 시간과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뭣도 모르고 마구간에 던져져 말발굽에 차였던 첫날만 해도 나는 신에게 빽빽 소리를 질러대다 죽을 뻔했다. 난데없이 끌려온 게 그렇게 원통하고 억울할 수가 없었더랬다.
그러나 그 뜨거운 분노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며 인지할 새도 없이 사라졌다. 반복되는 날들 속에서 이게 당연하지 않다는 주장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바뀌지 않는 현실은 어느새 비일상을 일상으로 만들었다. 나는 어느새 그렇게 태어난 사람처럼 주몽을 챙기고 보호하고 퀘스트를 해결했다.
하지만 유화는 계속해서 그렇게 살다간 나의 남은 인생 또한 온전히 나를 위해 살 수 없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주몽에게 그대로 물려준 맑고 깊은 눈이 나를 마주했다. 틀에서 벗어나라고 나를 깨웠다.
그녀가 그랬듯, 너 역시 원치 않게 일어난 일에 얽매여 남은 인생마저 남을 위해 살지 말라고. 그 말을 속삭여 주었던 그때의 내가 되어 나만을 생각하라고.
나는 어떻게 하고 싶지? 모든 그리움과 책임감을 잊는다면 결국 내가 원했던 바람은 무엇이지?
내 마음만을 생각해 본 적이 아주 오래되어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유화의 말이 맞았다. 해야만 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내가 행복한 길로 걸어 들어갈 수만 있다면 나는…….
“…….”
유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를 품 안에서 놓아주었다. 손을 뻗어 서랍을 연 그녀는 가득 쌓인 헝겊 인형 중에서 손바닥만 한 새 인형을 꺼냈다.
날개의 깃털까지 한 땀 한 땀 수놓인 그 인형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생생한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쓰다듬더니 내게 내밀었다.
“이 비둘기는 네가 가져가는 게 낫겠구나.”
그러더니 다른 서랍을 열어 갈색빛의 씨앗 몇 알도 함께 쥐여주었다. 묻지 않아도 보리 씨앗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물끄러미 인형을 내려다보자 닦지 못한 눈물이 몇 방울 그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날개가 퍼드덕거리는 환영이 보였다. 당황해 눈물을 재차 닦는 날 향해 유화가 살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결정되면 그 위에 물을 뿌리렴. 기꺼이 내 사자가 되어 씨앗을 전달해줄 게야.”
이렇게나 솜이 푹신한데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인형의 통통한 배를 꾹꾹 누르다 잘 갈무리해 넣었다. 어느새 눈물은 그쳐 있었다. 한 손으로 허공을 휘젓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메인] 마지막 퀘스트
갑작스러운 이별은 부강한 나라의 상징인 ‘오곡’ 중 하나를 놓고 가게 했습니다. 하루가 가기 전에 ‘주몽’에게 ‘보리 씨앗’을 전달해주세요. 신모의 사자가 그것을 도와줄 것입니다.
제한 시간 – 10:17:38
성공 시 보상 : ‘이야기’의 결말에 무사히 도달, ‘집’으로 귀환
남은 시간은 10시간 남짓. 줄어드는 시간에 고정했던 시선을 내렸다. 벌써 몇 번이고 읽었던 ‘성공 시 보상’이 변함없이 빛나고 있었다. 내가 한때 가장 바랐던 일이었다.
이 모든 것 이전에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뭘까.
이제야 고민하는데 오랫동안 쌓아온 마음들이 한 번에 한쪽으로 기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조금 전부터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은 있었다.
이것이 가리키는 쪽이 내가 가장 바라는 완벽한 마음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은 알 것 같았다.
나는 시선을 조금 더 내렸다. 그제야 너무도 익숙해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했던 부분이 보였다.
평소라면 ‘실패 시 결말’이 있었을 부분이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다 울듯이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성공’은 나에게 귀환이라는 엔딩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렇다면 안배되지 않은 ‘실패’는 나에게 어떤 엔딩을 가져다줄 것인가.
뭐든 상관없었다. 나는…….
파삭-
더 이상 신이 가져다주는 보상에 매여 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작은 파열음과 함께 반투명한 창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반짝이는 빛 조각들은 발밑에 고였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잠시 숨을 참았다. 꽉 쥔 손 안에서 단단한 솜이 뭉개졌다.
[제한 시간 – 00:00:00]
나는 결국 비둘기를 날리지 않았다.
***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지도 않았고 높게 뜬 달이 갑자기 떨어지고 그 자리를 해가 차지하지도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땀으로 축축해진 손에 힘을 풀었다. 설마 이대로 끝인 건가. 항상 칼같이 보상을 지켰던 지난 퀘스트들을 떠올려 보면 비어 있던 ‘실패 시 결말’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뜻한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
…아니. 그렇진 않을 것이다. 나는 남은 시간 동안 필사적으로 생각했던 모든 시나리오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선 가장 우려했던 일은 피했으니 조금 더 기다려 봐야 했다. 그러고도 잠잠하다면 비둘기를 날리자. 나는 새하얗게 질린 주먹을 펴고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그때였다.
“컥, 커억—!”
구석에 있던 궁인이 갑자기 목을 부여잡더니 고개를 뒤로 기괴하게 꺾었다. 나는 놀라 그대로 굳었다. 괴상하게 뒤틀린 목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경련을 일으키며 팔다리를 떨던 그녀는 이내 몸을 뻣뻣하게 곧추세웠다. 뒤집혀 흰자만 드러난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어딘가 익숙한 현상에 잔뜩 긴장한 심장이 마구 펌프질을 했다.
띠링—!
순간 유난히 커다랗고 날카로운 알림음이 귀청을 찢었다. 동시에 얇고 투명한 막을 통과하는 듯한 느낌이 전신을 감쌌다.
이벤트 구역에 입장하셨습니다.
과거에도 이 알림 창을 보았던 적이 있었다. 나는 단 한 번이었던 그날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십 년도 더 전의 추운 겨울날이었다. 나는 제천의식을 치르느라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그때도 비눗방울 같은 얇은 막을 통과했었다. 그리고…….
“그동안 잘 지냈느냐?”
오만한 미소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돌아온 궁인의 눈동자는 하늘을 담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신’.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다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힌트’와 나무 묘목을 주고 간 뒤로 처음이었다.
그 묘목은 신의 손이 닿아서 그런지 볼 때마다 쑥쑥 자라 벌써 몇십 년 된 나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경이로운 성장 속도는 나무의 신격화에 한층 불을 붙였다. 이제는 살랑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쓰러질까 전전긍긍 귀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정작 신이 준 ‘선물’을 믿고 한계를 시험해보겠다며 나섰던 나는 그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있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어느새 서늘해진 등을 의식적으로 바르게 폈다. 학습된 공포가 몸을 짓눌렀지만 벌써 두려움에 빠져선 안 된다.
나는 스스로를 다잡으며 신을 똑바로 마주했다. 무섭긴 했지만 크게 놀라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오히려 예상이 맞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퀘스트를 실패로 끝내며 내가 노린 것은 신의 강림이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퀘스트를 내가 망쳐 버렸으니 직접 모습을 드러내리라 생각했었다.
물론 신을 마주하는 것이 내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냥 비둘기를 날리는 편이 더 확실했을 것이다. 보상을 지키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강림해야 했을 테니.
“제법 컸구나. 저쪽에서 널 집어올 때보다 더 큰 듯해.”
궁인의 탈을 쓴 신은 팔짱을 끼더니 나를 위아래로 쓱 훑어보았다. 나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요.”
그를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물론이고 원래 세상에서의 내 나이보다 나이를 먹어도 한참은 더 먹었다. 바라던 답이 아니었는지 신은 건방지다는 듯 코웃음을 치긴 했지만 꼬투리를 잡진 않았다. 오히려 작게 고개까지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 해모수 님의 아들도 잘 자랐더구나. 다 네 덕이다.”
“…….”
이제 보니 기분이 제법 좋은 듯했다. 그러나 그는 만족스럽게 깜박이던 눈을 순식간에 번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마지막 퀘스트를 완료하지 않았느냐? 그걸 마치면 네가 그리도 원하던 네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전…….”
“무얼 망설이고 있지?”
궁금한 듯 말꼬리가 올라갔지만 내 말을 무섭게 자르는 질문은 내 대답을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바라서는 안 될 것을 바라는 버러지를 보는 듯한 태도. 나에겐 익숙한 취급이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지금부터는 신과 맞서야 한다. 두려움으로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을 애써 꿈지럭거렸다. 신중하게 고른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 비둘기를 날리면 전 영원히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요?”
“무어라?”
“이곳에 다시 돌아… 오고 싶을 것 같아요. 아니, 돌아오고 싶어요.”
그가 황당하다는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퀘스트 창과 똑 닮은 맑은 빛의 눈동자가 서서히 탁해졌다. 그러나 나는 두 주먹을 꾹 쥐고 신을 똑바로 마주했다. 이번에는 온전히 나만을 생각하라는 유화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의 조언을 들은 이후로 계속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가장 먼저 바랐던 것은 역시나 집이었다. 내 오랜 그리움의 근원이자 ‘나’를 돌려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손에 쥔 인형에 물만 부으면 되는 간단한 선택지였다.
그러나 그토록 바랐던 운명이 펼쳐졌음에도 군사에 쫓긴 주몽이 다치진 않았을까 걱정하는 날 발견한 순간 나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곳을 잊고 떠나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이미 한 번 선택을 저버린 내가 이제 와서 단번에 마음을 결정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집에 가고 싶다가도 밤중에 쫓겨났을 주몽 일행이 눈에 밟혔고 이곳에 남고 싶다가도 집이 그리워 미칠 것 같았다.
그 혼란 안에서 내가 겨우 건져낸 것은 이번에는 힘없이 끌려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다.
나는 더 이상 신이 내어준 보상을 얌전히 받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싶었다. 비둘기를 날리지 않은 이유는 이를 위해서였다. 보상을 거부하려면 그 틀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가장 하고 싶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결국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신과 독대를 하게 되었으니 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정면으로 맞부딪쳐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한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그러니 잠시만 제 세상에 다녀오는 것으로 보상을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이것이 내가 오직 나만을 위해 내린 결론이었다. 끝도 없이 이기적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바람.
신이 얼굴을 와작 일그러뜨렸다. 매일 내게 세숫물을 떠다 주며 웃던 궁인의 선한 얼굴이 원래의 모습을 떠올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변했다. 그가 분노가 서린 말투로 비아냥거렸다.
“미천한 네가 나를 마주하다 보니 정신줄을 놓은 모양이구나. 영혼이 오가는 일이다. 그게 그렇게 쉬이 되는 일인 줄 아느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제게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잖아요. 제가 이곳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가장 잘 아시잖아요.”
“…….”
“절 막무가내로 데려오시며 이 모든 일이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영광스러운 일이라 하셨지만… 제겐 너무, 너무 버거웠어요…….”
떠오르는 기억들에 저절로 몸이 수그러들고 고통이 토해지듯 튀어나왔다. 나는 어깨를 웅크리고 고통의 파도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시종일관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손바닥을 펼쳐 하관 전체를 덮은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고개를 숙인 와중에도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샅샅이 살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대로 영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이윽고 그에게서 쯧, 하고 낮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간들이란 참으로 연약하기 짝이 없구나. 나약하고 미련해.”
한심한 미물을 보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즐거워 보이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그는 무지한 아이에게 차근차근 알려주듯이 나긋하게 말마디를 놀렸다.
“어리석은 인간아. 영혼의 이동은 육신에 커다란 부담을 준단다. 네 세상으로 돌아가면 며칠 만에 다시 이곳의 몸에 넣을 수 없어. 그랬다간 충격을 견디지 못한 육신이 부서질 거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 틈으로 멍청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그, 그럼 얼마나…….”
“한 번 이동을 하면 회복하기 위해 적어도… 그래, 삼 년의 시간이 필요하지. 그동안 가족을 만난 네가 과연 다시 그들을 버리고 이곳으로 올 수 있을 것 같으냐? 지금도 이리 정을 준 곳을 못 버려 고민하는 네가?”
물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확신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한계에 부딪혀 멍하니 신을 바라보았다.
삼 년. 절대로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금세 익숙해질 가족과의 안락한 생활을 내가 정말 버리고 올 수 있을까? 후련하게 헤어져서 주몽만을 위한 삶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루, 이틀. 혹은 일주일. 기껏해야 그 정도 머무르며 마음을 정리하려 했다. 잊었던 얼굴을 실컷 보고 하고 싶었던 말도 건네려 했다. 엄마에게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던 그 약속을 지키러 간다고, 동생에게는 엄마를 잘 부탁한다고.
이기적이지만 정말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그것조차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더 머무르는 건 고려도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더 견디지 못할 스스로를 알았으니.
신은 턱을 들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입꼬리를 찢어 웃으며 나를 비웃었다.
“거 보거라. 돌아오고 싶다 말하는 지금조차 고개 한 번 끄덕이지 못하는데. 정녕 이곳에 남고 싶은 것은 맞느냐?”
“당, 연히…….”
“내가 보기에 너는 그저 죄책감을 덜고 싶은 게야.”
냉소적으로 웃은 신이 고개를 까닥 기울였다. 너무나도 많은 생명체를 봐 온 그에게서는 권위자 특유의 염세적인 태도가 묻어났다.
“솔직한 심정으로 모든 걸 버리고 집에 가고 싶지만 네 진심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려니 막상 스스로가 추악했던 게지. 그러니 ‘난 돌아올 거야’, 핑계를 대며 그 뒤에 본심을 숨기는 것이 아니더냐?”
“난… 아니, 전, 그럴, 그런 게 아니…….”
나는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그러나 부정하면서도 의심은 시작되었다. 정말 그런가? 나는 그들을 향한 걱정을 단지 집에 가고 싶다는 몰염치를 가리기 위한 방패로 쓴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모든 것에 죄책감을 가지고 살던 나였다. 끝이 다가온 요즘 들어서는 더더욱 그랬다. 어떨 때는 숨 쉬는 것조차 죄악으로 느껴져 헐떡거리기도 했다. 잔뜩 낡고 약해진 마음에 침투하는 것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보다 쉬웠다.
신은 내가 더듬거리며 뱉은 말들이 그대로 스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천천히, 그러나 매끄럽게 내 부정을 짓밟았다.
“네가 정녕 네 가족들보다 이곳이 마음에 남았다면 보상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주저 없이 이곳에 남게 해달라 빌었겠지.”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날카로운 말들이 몸을 꿰뚫는 것 같았다. 그 구멍으로 겨우 마음먹은 결심들이 피처럼 철철 쏟아져 내렸다.
신의 말대로 내가 정말 주몽을 걱정했다면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주저 없이 말을 달려 고구려로 갔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의심하지 않았던 이곳에 대한 애정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점차 오염되어 갔다. 이십여 년간 쌓아왔던 정은 너무나도 쉽사리 핑곗거리로 전락해버렸다.
신은 눈을 빛내며 그런 나를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그러나 나는 다시 떨리는 사지를 꽉 움켜쥐느라 그 뱀 같은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내 곁으로 다가와 내 팔을 가볍게 잡았다. 떨리는 팔을 쓸고 내려간 손은 이윽고 내 손을 잡고 토닥이기 시작했다.
그간의 짓을 떠올리면 우스운 행태였지만 그 사실을 인지할 정신조차 없었다. 따스한 온기와 함께 잔뜩 낮아진 목소리가 속살거렸다.
“네 선택에 솔직해지거라. 내가 보아도 넌 너무 고생했어. 나도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모두 들어주고 싶단다. 그러니 내가 네 터무니없는 말도 모조리 들어주고 있는 게 아니냐.”
“…….”
“아직도 결심이 서지 않았느냐? 널 잃은 가족들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널 그리워하고 있는데.”
스치듯 지나간 마지막 말에 저절로 눈이 커졌다. 나는 내 손을 잡고 있던 신의 팔을 단숨에 움켜잡았다. 흥분으로 말이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어떻, 어떻게…! 제 엄마와 동생을, 보셨, 아니 그전에 분명 나를 원래 시간으로 돌려준다고……!”
“그래. 하지만 시간은 멈출 수 없다 하지 않았느냐. 흘러가는 세월에 몸을 맡긴 그들을 종종 내려다보았지. 이대로 같은 고통을 계속 겪게 할 셈이냐?”
소식을 말하는 신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러나 나는 이보다 더할 수 없이 무너져 내렸다.
처음으로 들은 가족의 소식이었다. 그 위로 그 언젠가 들었던 신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시간을 멈추는 일은 창조주님이 오셔도 불가능한 일이다.’
열여덟, 시험을 보고 나오던 그 순간으로 돌려 보내준다는 말만 되뇌느라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럼 내가 여기서 웃고 있는 동안, 즐거워하는 동안, 남을 것을 고민하는 동안 가족들은 한결같이 나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걸까?
가족을 잃은 고통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아는 나였다. 그나마 나는 엄마와 동생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열심히만 한다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내가 죽은 줄로만 알고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보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에 누워 있을지도 몰랐다.
고작 중학생인 내 동생과 홀로 자식을 키우던 엄마가 그 무게를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네 선택이 너무 이기적이라 생각하지 말거라. 내 이것까지 이야기하진 않으려 했건만….”
아니. 아니다. 나는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무엇이든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저 말이 나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가 이곳에 남으면 네 숨결마다 주몽의 숨결이 빠져나갈 게다.”
“…그, 그게 무슨…….”
“네가 지금 누구 덕택으로 남의 육신을 빌려 살아 있는 것 같으냐? 맞지 않은 영혼을 육체에 넣어 살도록 하는 것은 보통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생명이 필요하지. 지금까지는 내가 해주고 있었지만 퀘스트가 끝났으니 더 이상 그럴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하, 하하…….”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와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생각해보면 영혼을 빼내 남의 몸에 넣는 것도, 그 몸으로 살아가는 것도 모두 쉬울 리가 없었다. 유화와 나눴던 대화가 아주 오래전 일 같았다. 감히 나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다 믿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런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끝까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 아이는 할 일이 많아. 네 가족들이 보고 싶지 않으냐?”
신이 속살거렸다. 나는 마구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그의 말이 다 맞았다. 주몽은 나 따위에게 생명력을 뺏겨선 안 될 만큼 중요한 아이였고 나는 내 가족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그 둘이 너무도 거대해 나의 소망은 아무것도 중요치 않아졌다.
그래. 원래 그런 운명이지. 나는 건국을 시켰으면 말끔히 떠나야 하는 사람인데.
모두 욕심을 부린 내 잘못이었다. 엄마와 동생이 그런 고통을 겪은 것도, 주몽이 나 때문에 생명을 빼앗길 뻔한 것도. 모조리, 다.
웃음은 점차 잦아들었다. 대신 끔찍한 침묵이 그 자리를 메웠다. 나는 적막 속에 짓눌린 채 간신히 숨을 내쉬었다. 잔뜩 쉬어 갈라지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나는 이제 그냥 모든 걸 그만하고 싶어.”
주몽, 영혼, 집, 생명, 그리움…….
꼿꼿하게 폈던 척추가 스르르 무너졌다.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이대로 웅크려 태아가 되고 싶었다. 평화로운 양수 속을 헤엄치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냥 엄마가 보고 싶어…….”
이 모든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고 싶었다.
“그래. 내가 집으로 돌려보내 주마. 그동안 고생 많았다.”
머리 위에서 다정한 음색이 들렸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이 나를 집으로 돌아가라고 떠밀고 있었지만 이상하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게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이 있느냐?”
멍한 정신에도 그 말은 머릿속에 박혀 들었다. 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간신히 뗐다. 이 상황에서 반드시 챙겨야 할 일이 있었다.
“가람이를…. 이 부여의 둘째 왕자인 해가람과 왕비님을 부탁드려요…….”
주몽과 그 주변인들은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안배된 운명이 탄탄대로로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부여에서 살아가게 될 가람이와 왕비님은 달랐다. 하루아침에 태자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들이 겪을 고통은 남들의 수백 배일 것이다. 참 아프게도 가족이란 게 원래 그랬다.
“그래……. 확실히 부여는 기틀이 탄탄하지 않았지. 이대로라면 많은 게 무너지겠구나.”
신이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의 눈이 일순 반짝이며 빛났다.
“마침 잘됐구나. 내 너에게 떠나가는 길에 선물을 하나 주마. 이거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엇을……?”
“해가람이라는 자를 불러오거라. 너도 작별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속내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말 그대로의 의미라면 감사한 배려였다. 나는 비틀거리며 문을 열었다.
문틈을 메운 공기는 희미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궁인을 불렀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궁인은 내 얼굴을 보고 잔뜩 놀란 낯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흐릿한 미소조차 지을 힘도 없었다. 그저 벌겋게 변했을 게 분명한 눈가를 두어 번 쓸고 용건을 전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신신당부도 했다. 잔뜩 싸우고 헤어졌으니 내 부름에 답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게 마지막일지도 모르고.
다행히 눈치가 빠른 궁인은 반드시 모셔오겠다며 왕자궁으로 떠났다.
“그동안 너는 신모의 사자를 날리면 되겠구나.”
신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손짓 한 번에 서안이 발치에 놓였다. 나는 그 위에 놓인 문방사우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
너를 따라가겠다 그리도 약속했는데 결국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떠나더라도 적어도 사과의 말은 남겨야 했다. 쪽지 하나라면 비둘기의 발치에 충분히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신은 내가 붓을 집어 드는 걸 힐끗 보기만 했을 뿐 막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작은 종이를 펼치고 가느다란 붓에 먹물을 묻혔다.
[해야.]
오직 나만이 불렀던 이름이 흔적을 남겼다. 쓰고 싶은 말은 바닷물처럼 가득했지만 막상 먼저 넘친 것은 내 눈물이었다. 나는 점점이 젖은 종이를 치우고 새 종이를 꺼냈다.
[언젠가 네가 모두 나 때문에 이리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
서너 번 그것을 반복하고 나자 무사히 첫 마디를 떼는 것에 성공했다. 그 아래로 한 글자 한 글자 간절한 심정으로 글을 적었다. 남은 이들이 나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했다.
[꼭 부강한 나라를 세우고 네 벗들을 소중히 해. 특히 가람이와 사이좋게 지내. 귀한 사람들끼리 귀중한 인연만 맺으면 좋겠구나.]
마지막 당부를 적고 나자 이제 빈 공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잠시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다시 울음이 북받쳐 숨이 가빴다. 떨리는 손이 늘어져 글자에 길게 꼬리가 늘어졌다.
[나는… 나는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말거라. 원래 이리될 운명이었으니. 나중에, 아주 나중에 네 할 일이 끝나고 나면…….]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이곳에서의 네 ‘이야기’도 막을 내리고 저곳에서의 내 삶도 끝이 날 때가 오면. 우리 둘 모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지면.
그때가 되면 염치없지만 다시 만나러 가도 되지 않을까. 순하고 다정한 우리 해는 보고 싶었다며 나를 다시 맞아줄지도 몰랐다.
아니, 사실은 나를 그리워하지 않았으면 했다. 뼛속 깊은 곳까지 갉아먹는 그 무거운 감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를 내칠지도 모르지만, 아니 차라리 원망했으면 하지만…….
[그때 누군가 찾아가면 한 번은 맞아주거라. 날 알고 있는 자일지도 모르니.]
언제나 그렇듯 나는 미련을 놓지 못하고 끝마디에 세 글자를 더 적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불린 지 수십 년이 되어 나조차도 어색한 이름이었다. 이제는 되찾을, 평생을 함께해야 할 진짜 ‘나’.
서신 위로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이 몇 방울 떨어졌다. 하지만 다시 쓸 여력은 남지 않았다. 나는 글자를 말리는 동안 비둘기를 찾았다. 하도 꽉 움켜쥐어 짓뭉개진 인형은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신의 손짓에 맞춰 날아온 물 주전자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누군가 가까이 오고 있구나.”
이 시간에 올 사람이라곤 가람이밖에 없었다. 신의 의도는 명백했다. 그가 오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낼 것.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나는 인형 위로 느릿하게 주전자를 기울였다. 조르륵, 떨어진 물에 천이 짙은 색으로 변하며 점차 크게 부풀었다.
퍼드득—
마침내 새하얀 비둘기가 생명력을 얻었다. 천에 박음질되어 있던 날개가 활짝 펼쳐지는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새가 불만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털을 골랐다. 왜인지 잔뜩 짓눌려 있던 한쪽 깃털이 부리짓에 커다랗게 부풀었다.
나는 작은 향주머니에 보리 씨앗을 넣었다. 편지는 발목에 묶으려 했지만 발길질에 차이고 얌전히 그것도 주머니에 함께 접어 넣었다. 주머니를 입에 물려주자 비둘기가 날개를 퍼덕였다.
“가람 저하께서 오셨사옵니다.”
그때 밖에서 고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두 손가락으로 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 몸을 일으켰다. 직접 문을 열자 궁인과 가람이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들어오라고 말을 했겠지만 ‘이벤트 구역’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리는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손짓해 가람이를 불러들이고 문을 닫았다.
“늦은 밤에 불러서 미안해.”
“아닙니다. 형님께서 부르시는데… 어차피 잠이 안 와 검술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머뭇거리며 대답한 그는 어딘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벤트 창이 떴을 리는 없고 아무래도 경계를 통과한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그보다 더 걱정이 되는 신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들킬 일은 없겠지만 혹시 궁인이 이곳에 있는 것에 의문을 갖진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가람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곁에 궁인이 없는 걸 더 이상하게 여기는 타고난 왕족다웠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다른 쪽이었다.
“형님. 이 새는 무엇입니까?”
“아…. 잠시 쓸 곳이 있어 놔둔 것이야.”
나는 급히 새를 안고 창문을 열었다. 먹이라도 먹이고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마땅히 줄 것이 없었다. 다행히 유화 님의 사자답게 착한 새는 별 반항 없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마치 제 목적지를 아는 것 같았다
부디 별 탈 없이 잘 전달해주길. 나는 간절히 바라며 하얀 꽁지깃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가람이가 부드럽게 밀어내며 창문을 닫았다.
“아직 바람이 찹니다.”
동시에 나를 챙기지 않는 궁인을 향해 매서운 시선을 던졌지만 신이 그런 시중을 들 리가 없었다. 나는 신이 뒤틀린 성격을 뽐내기 전에 황급히 가람이를 막아섰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는 재빨리 시선을 내리깔았다.
뭐지? 미묘하게 이상한 느낌에 나는 그의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가람이는 날 보는 대신 머뭇거리며 중얼거렸다.
“저… 형님. 낮에는 송구스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놈, 아니 주몽이 형님께 불경한 짓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감정이 격해져…….”
“……아냐. 나도 너무 정신이 없고 놀라서 과하게 반응을 했던 것 같아. 생각해보면 네가 그리 반응하는 것도 당연한데.”
아무리 형제라 하더라도 사람 관계에 함부로 손을 댄 것이 과하다 생각하는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차분히 되짚어 보니 형제가 호수에서 그런 일을 당하고 있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그 딴에는 내가 걱정되어 벌인 일이겠지. 내가 주몽과 그런 일을 이미 몇 번 치른 사이라는 것을 모르니 더욱이 오해할 만도 했다.
가람이가 눈가를 움찔거렸다. 그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더니 혀를 내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어딘가 긴장한 낯이 사과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한 나는 그를 재차 토닥였다. 그러자 등을 굳힌 그가 천천히 내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그 뒤로 궁인의 탈을 쓴 신이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의 재촉이었다. 나는 가람이의 등을 쓸어내리며 느릿느릿 속삭였다.
“가람아. 내가 부탁할 일이 하나 있어.”
“무엇입니까?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그가 반색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내게 도움이 될 수 있어 기쁘다는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나는 손을 옮겨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착한 아이인데. 오래전 내가 그에게 처음 제왕학 공부를 제안했을 때 내 속도 모르고 훗날 날 도울 수 있을 테니 좋다며 웃던 아이였다.
그래서 더욱 미안하기만 했다. 끝에 도달한 지금, 내가 자각도 없이 뿌렸던 기만의 칼날이 모조리 나를 겨눴다. 나는 몸을 웅크리며 마지막이 될 부탁을 내뱉었다.
“꼭 성군이 되어줘.”
가람이가 천천히 상체를 들었다.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몇 번 굴린 그가 멋쩍게 웃으며 되물었다.
“제가 잘 못 들었는데, 한 번만 더 말씀해주십시오.”
“나 대신 네가 왕위에 더 적합한 걸 알잖아.”
나는 그 얼굴을 외면했다.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그, 게 무슨…….”
“난 이미 오래전 귀족 사이에서 입지를 잃었어. 하지만 넌 아니야. 너라면 그들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을 거야.”
“형님! 대체 왜 이러십니까!”
단호한 내 태도에서 돌이킬 수 없는 진심을 느낀 그가 나를 역으로 붙잡았다. 나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이미 주몽에게 잡혀 시퍼렇게 멍이 든 팔이 통증을 호소했다.
그러나 가람이는 그걸 알아챌 정신조차 없는 것 같았다. 커다랗게 뜨인 눈이 나를 샅샅이 훑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의, 의원이 이상한 말이라도 하덥니까? 아니면 제가, 제가 불충한 마음을 품어 이런 식으로…….”
“아니야. 모두 내가 부족해서…. 그래서 네게 큰 짐을 지우는 것 같아 미안해.”
“그런, 왕권, 그런 건 충분히 형님도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껏 노력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전, 저는 추호도 그 자리를 탐낸 적이 없습니다. 그 자리는 형님의 것입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고함이 잦아들고 거친 숨이 그 자리를 채웠다. 차분한 눈이 흥분으로 커진 눈을 정확히 마주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서로의 진심을 읽었다.
나는 그의 간절함을, 그는 나의 간절함을.
“……저는 형님 없이 아무것도 못 합니다…. 그러니 어디 가실 것처럼 그리 보지 마시란 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나에게 그것을 끝 간 데 없이 호소했고 나는 이미 그럴 힘조차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왕권이라……. 그건 내가 도와주마.”
그때 뒤에서 손가락만 까닥이던 신이 맑은 목소리로 존재를 알렸다. 공간을 파고든 이질적인 목소리에 가람이가 고개를 홱 돌렸다. 스치듯 지나간 얼굴에 분노가 가득 서려 있었다.
“감히 무엄하게…….”
“그만. 가람아. 하지 마.”
나는 사색이 되어 그를 말렸다. 오늘은 신의 기분이 유난히 좋은 편이었지만 본래 그는 ‘신’이었다.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안 된다. 무엇에도 연고가 없는 가람이는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
그 사실을 모르는 가람이 분노와 억울함이 뒤섞인 얼굴로 나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윽…….”
가람이의 목이 뻣뻣하게 굳더니 근육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마비 현상은 상체를 타고 내려가 팔다리까지 번졌다. 손가락 끝까지 그대로 굳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는 단숨에 돌처럼 굳은 가람이를 보고 놀라 소리를 질렀다.
“가람아!”
“혀, 형님…….”
이해할 수 없는 괴현상에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움직여 보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지만 손끝만 가늘게 경련할 뿐 팔은 조금도 올라오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그 손을 붙들고 마구 주물렀다. 동시에 하나밖에 없는 원인을 향해 다급히 애원했다.
“이, 이게 무슨…. 아직 어려 철모르는 아이입니다! 부디 선처를….”
“내가 도와주겠다 하지 않았느냐. 마침 좋은 물건을 갖고 있구나.”
그러나 신은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딱딱하게 굳은 가람이의 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궁인의 조그만 손이 칼자루를 망설임 없이 잡았다.
잘 벼려진 검이 맑게 스치는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매끄럽게 빠져나왔다. 검 자루 끝에서 내가 직접 매달아준 파란 술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가람이 혼란과 분노, 당황이 섞인 눈으로 나와 신을 번갈아 보았다.
그 순간 등불에 표면을 이리저리 비추며 검을 구경하던 신이 그를 보며 샐쭉 웃었다.
그제야 하늘빛 눈동자를 발견한 가람이 당황해서 입을 벌렸다. 그는 궁인의 변화와 자신의 이상한 상태를 빠르게 연결 지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굳어 있는 그의 손을 간절히 붙들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내 두려움을 읽은 가람이 핏대가 선 목을 울컥댔다.
다행히 그는 분을 토해내는 대신 신을 노려보기만 했다. 분노로 가득 찬 시선을 받은 신이 짧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미천한 것이 저를 살릴 은인도 몰라보는구나.”
“네놈… 아까부터 대체 무슨 짓을…….”
“너는 그 입을 조심하는 게 좋겠구나. 두 번은 없단다, 아이야. 감히 신을 거역할 셈이냐?”
“……뭐?”
결국 참지 못하고 노성을 터뜨리던 가람이 멍하니 외마디 물음을 토해냈다.
그러나 신은 답해주는 대신 가람이의 굳은 손을 들어 칼자루를 쥐여주었다. 파르라니 빛나는 검신은 그대로 그의 손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흡족하게 웃은 신이 우리의 옆으로 완전히 물러났다.
“좋아. 준비가 다 되었구나.”
만족스러운 음성과 함께 짝, 박수가 한 번 울려 퍼졌다. 동시에 가람이의 팔이 천천히 올라갔다. 팔은 직각이 되는 순간 가늘게 떨리며 멈췄다.
“…….”
나는 반사적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경악으로 벌어진 입 너머로 비명이 새어 나오려 했다.
칼끝은 완벽하게 나를 겨누고 있었다.
“지, 지금 무슨….”
“왕의 권력을 높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무엇인지 아느냐?”
내 등 뒤로 다가온 신이 내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나보다 키가 작은 어린 궁인이었지만 속이 뒤바뀐 그녀의 힘은 인간을 초월했다. 헛발질조차 막아 세운 그가 노래하듯 읊조렸다.
“공포심이느니라.”
“…….”
“날뛰는 귀족들도 제 목숨이 아까워지면 입을 다무는 법이다. 하물며 제 형을 죽이고 자리에 오른 왕에게 그 누가 감히 입을 놀리겠느냐?”
“안 돼!”
찢어질 듯한 비명은 가람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 역시 가람이와 같은 심정이었다. 나는 움직일 수 없는 가람이를 대신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분, 분명 다른 좋은 방법이…. 이건, 이건 아니에요.”
안 그래도 내가 떠나면 너무나 많은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아이였다. 그에게 직접 나를 죽이게 하는 일까지 시킬 수는 없었다. 강제로 행하게 된 일이라 해도 가족을 죽이는 일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는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 것이다. 대가가 무엇이든 너무나도 잔혹한 일이었다.
날카롭게 날이 선 칼의 반대편에서 파랗게 질려 안간힘을 쓰는 가람이가 보였다. 그의 몸은 여전히 굳은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무엄한 것도 잊은 채 신의 팔을 잡아 뜯으며 뒤로 물러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신은 내 어깨를 놓지 않았다. 대신 귀가 아닌 머릿속에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는 돌아오지 않을 게 아니냐. 그런데도 그저 가사 상태로 남아 헛된 희망을 주려 하느냐?]
무게감 있는 목소리는 거대한 진동 같아 부드러운 뇌를 갈아내고 뭉개는 듯했다. 영고 때와는 다른 진명이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두개골을 가르고 그 틈에 한 가지 생각만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같은 목소리가 은근하게 속삭였다.
[태자가 앓아누운 나라는 시름에 잠겨 금세 무너질 것이다. 귀족들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어깨를 펴고 다니겠지. 그런 뒤 네가 결국 깨어나지 않아 떠밀려 자리에 오르게 된 저 아이가 무슨 힘을 쓸 수 있겠느냐? 아니, 그전에 다른 왕자가 왕위에 오르지 않는다는 보장은 있느냐?]
“그, 게 아니…. 난, 난 아니야…….”
[무엇이 더 나은지 잘 생각해 보거라.]
신은 내 어깨를 잡은 채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주춤주춤 뒤로 끌려갔다. 동시에 새파랗게 질린 가람이가 칼을 겨눈 채 나를 향해 다가왔다. 팔다리가 덜덜 떨리면서도 칼은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았다.
“모, 몸이 멋대로……. 형님! 피하십시오!”
“…….”
“제발! 차라리 절 먼저 찌르십시오! 형님!”
[어차피 이 몸에서 네 영혼을 빼내기 위해서는 약간의 충격이 필요해. 그때도 겪어 보지 않았느냐.]
그 말에 이곳에서 눈을 뜨기 직전 계단에서 밀쳐졌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역시 신이 나를 밀쳤구나. 마지막 순간 내 목에 닿았던 서늘한 손의 감촉이 떠올라 뒷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 뒤로 부여에서도 한동안 앓아누웠던 것을 생각하면 양측 모두 충격을 주어 영혼을 빼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왕 가는 길에 겸사겸사 좋은 일도 하고 가라는 게지.]
그 울림을 마지막으로 신은 날 잡아끌던 손을 놓았다. 나는 멍하니 다가오는 칼끝을 바라보았다. 앞에서는 가람이의 고운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일그러져 있었다.
“형님!”
그가 쉬어빠진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등에 병풍이 닿았다. 칼은 아주 느릿하지만 끊임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내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지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반항하며 질질 끌리던 발바닥도 제자리에 멈췄다.
도망가야 하는데.
왜?
가람이를 위해서.
“…….”
가람이를 위해서라면 나는 그의 손에 죽어줘야 하는데?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개미처럼 기어 다녔다. 그 목소리는 내 목소리 같기도 하다가 신의 음성 같기도 했고, 어떨 때는 가람이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맞아. 이게 가장 옳은 방법이야.”
계속해서 맴돌던 사각거리는 음성은 내 의지를 거치지 않은 채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내 입을 거친 말을 다시 귀로 듣는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래. 기약 없이 잠드는 것이야말로 남은 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가람이의 손에 죽어야 했다. 이것이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이 몸뚱이로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신이 미소를 지었다. 반면 가람이는 눈물을 툭툭 떨어뜨렸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우리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피하지 않는 내게 더 애원하는 대신 바깥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결계에 막혀 있는 공간의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 리가 없었다. 가람이는 빠르게 그 사실을 눈치챘다.
까만 눈에 절망이 스치더니 느리게 다가오던 칼이 더욱 속도를 늦췄다.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과 팔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온통 부풀고 핏줄이 돋아 있었다. 하얗던 얼굴도 붉게 변해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신을 거역하고 있었다. 나는 필사적인 싸움을 지켜보며 마찬가지로 울음을 삼켰다. 어느새 칼은 심장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 죽음은 반드시 그의 손을 거쳐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이 순간이 오로지 그의 책임으로만 남지 않도록 돕는 일이었다. 가람이가 이 모든 일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똑똑히 알았으면 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칼날을 맨손으로 움켜잡았다. 손바닥이 베여 피가 떨어졌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단단히 잡은 칼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안 돼!”
칼은 망설임 없이, 빠르게 내 배를 파고들었다. 마지막 순간 칼이 아래로 휘었지만 딱 그뿐이었다. 신의 힘을 간신히 막아두고 있던 둑은 작은 도움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벌어진 일에 가람이 절규했다. 온 얼굴이 공포로 물들고 광기가 그 틈을 메웠다. 자제심이 무너진 것은 순간이었다. 그 즉시 칼은 나를 뚫고 병풍까지 함께 꿰뚫었다.
“커억, 쿨럭—”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이것을 막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 걸까. 나는 어쩔 수 없이 역류하는 피를 토해내며 연신 기침을 했다. 그 충격으로 몸이 흔들리며 아직도 박혀 있는 칼에 꿰뚫린 구멍이 넓어졌다. 그 틈으로 피가 줄줄 새어 나오며 주변을 피바다로 물들였다.
나는 울부짖는 가람이의 양 뺨을 두 손으로 잡았다. 하얗던 얼굴도 어느새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나는 얼굴을 닦아주는 내 손도 피에 젖어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만두었다.
대신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마지막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가장 건네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사랑해, 가람아.”
여전히 굳어 있는 몸으로 칼을 빼내려 애쓰던 그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두 눈에 담았다.
원래 세상에서 마지막이라고 인지하지도 못한 순간 끝을 맞이한 나는 죽음을 알 수 있는 이 순간이 감사했다. 이곳에 온 뒤에 가장 후회했던 것은 가족과의 마지막 기억이 시험에 지쳐 엄마와 동생에게 짜증을 내던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마지막’이 사람을 얼마나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다.
“나는… 진심으로 널 내 동생이라고 생각해. 그 오랜 세월을 함께 했는데 어찌 널 가족이라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진짜 가족을 잃고 이곳에 떨어졌을 때 나를 지탱해준 사람은 가람이었다. 나는 그리움에 몸부림칠 적마다 그에게 내 동생을 투영하며 이곳에서의 삶을 견뎠다. 주몽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라면 가람이는 이곳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버팀목이었다.
그런데 내가 어찌 너에게 선을 긋고 너를 타인으로만 여길 수 있을까. 그는 이미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며들어 또 다른 진짜 가족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얼굴을 마주하며 또박또박 내 진심을 건넸다.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부끄럽다며 결코 내뱉지 않았던 속마음을 끝까지 말하지 않으면 손해 볼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왕비 마마께도… 컥, 으….”
울컥거리며 또 다른 핏덩어리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가람이 소리를 질렀다.
“말하지 마십시오! 여봐라, 의원, 의원을—!”
“소용… 없어. 바, 밖, 에선, 흐으, 안 들려.”
순간 강한 힘이 내 어깨를 붙들었다. 드디어 신의 주술이 풀린 모양이었다. 자유를 되찾은 그는 곧장 겉옷을 벗어 내 배를 지혈하려 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데다 상처가 너무 컸다. 여기서 몸을 관통한 칼을 뽑으면 피는 더 걷잡을 수 없이 뿜어져 나올 것이다.
가람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를 붙들고 울었다. 달래주고 싶었으나 팔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바로 앞에서 토해지는 벼락같은 비명도 점차 흐릿하게 들렸다.
“신이, 신께서 왜! 어째서 제겐 이런 운명만 내려주시는 겁니까!”
“그러게 왜 반항을 하느냐. 노린 대로 심장을 찔렀으면 고통 없이 갔을 텐데. 그래도 인간 주제에 대단한 의지구나. 꼴에 잘도 저런 아우를 만들었어.”
가물거리는 시야 끝에 신의 재밌다는 웃음이 걸렸다. 궤변을 들은 가람의 얼굴 위로 당장이라도 그를 죽이고 싶다는 강렬한 분노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나를 놓고 가지 못했다. 내 피가 그의 무릎을 적시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그의 절망이 차올랐다.
나는 땀과 피에 젖은 속눈썹을 깜빡이며 애써 웃어 보였다.
“네 어머니… 잘 보살펴드리고. 콜록, 꼭, 성군이… 돼.”
“혀, 형님. 형님! 안 돼, 정신 좀 차려 보십시오!”
하지만 대답 대신 목구멍을 타고 넘어온 것은 검붉은 피였다. 함께 토해진 내장 조각을 보며 나는 한계를 직감했다.
띠링— 그 순간 익숙한 소리가 잃어가는 청력에 희미하게 걸렸다. 반쯤 감긴 눈에 반투명한 창이 보였다.
[메인] 마지막 퀘스트 – 완료
‘주몽’에게 ‘보리 씨앗’이 전달되었습니다. ‘이야기’의 결말에 무사히 도달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마지막 퀘스트의 보상으로 귀환이 시작됩니다.
분명히 제한 시간이 끝나고 저절로 산산조각이 났던 퀘스트가 달성되었다.
이게 무슨…….
간신히 고개를 돌리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신이 보였다. 그 순간 허탈한 웃음이 토막토막 끊어져 나왔다. 나는 이제야 ‘실패 시 결말’이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애초에 이 마지막 퀘스트는 성공밖에 길이 없도록 짜여 있었다.
신의 미소와 실패하지 않은 퀘스트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실패할 수 없는 퀘스트에 다른 길을 만들어 보겠다 달려든 스스로가 한심했다. 동시에 알 수 없는 후련함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래. 애초에 내 마음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는데. 웃음을 흘리는 나를 붙잡고 가람이 빌었다.
“제발, 제발! 제가 모두 잘못했습니다!”
“…….”
“사, 사랑, 저는 아니에요, 그게 뭐든 전 아니라고요! 제발 이대로 가지 마십시오! 형님!”
끝없는 절규가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배가 타들어 가는 고통에도 끝까지 웃기 위해 노력했다. 마지막 순간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젓는 가람이가 안타까웠다.
한 번만 웃어주지. 내가 아니라, 결국 이 순간을 수백 수천 번 다시 그리게 될 너를 위해.
하지만 그 조언은 끝내 새어 나오지 못했다. 새까만 어둠이 물결처럼 밀려올 때마다 눈앞에 그리운 얼굴들이 어른거렸다.
“형님!”
산산이 흩어지는 결계의 빛무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기꺼이 그 바닷속에 몸을 내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