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8/27)

15.

“…님. 도련님!”

“…어, 어? 무슨 일 있느냐?”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역시 오늘은 궐에 계시는 편이 좋겠사옵니다.”

춘아의 마지막 말은 소리를 죽여 내 귓가에만 속삭여졌다. 그러나 나는 대꾸하는 대신 작게 웃어 보인 뒤 앞장을 섰다.

궐 밖으로 나온 게 얼마 만인지. 확실히 잡생각이 조금이나마 사라지는 것 같았다. 소란스러운 저잣거리의 소음도 활기차게만 느껴졌다. 비록 거리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오이가 안쪽의 조용한 골목으로 이끌어 오래 느낄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지금 춘아의 누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원래라면 춘아 혼자 걸었을 길이다. 거기에 내가 동행하게 된 이유에는 사실 별다른 것이 없었다. 첫째로는 그녀 곁에 붙일 적당한 호위 무사가 없었던 탓이고, 둘째로는 이대로 궐에만 있다간 정말로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세 번째 밤’ 이후로 나는 죽은 사람처럼 누워만 지냈다. 조용한 방에 누워 한없이 복잡한 마음들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 보면 밤낮이 분간 없이 바뀌곤 했다. 식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궁인들의 애원에 밥숟갈을 들라치면 위가 쥐어짜이는 것처럼 고통스러워 몇 숟갈을 채 넘기지 못했다.

오죽하면 내 출궁을 염려했을 유모도 차라리 잘 생각하셨다며 차림새를 다듬어줄 정도였을까. 그간 내가 얼마나 시체같이 누워만 있었는지 알 만했다.

그리하여 나는 조금 미안한 웃음을 지어 보인 채 오이를 끌고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어차피 휘적대는 나뭇가지 같은 팔을 가진 나로는 춘아의 호위를 맡을 자질도, 신분도 되지 않았으니 겸사겸사 잘된 일이었다.

“이쪽입니다.”

오이는 별궁에서 받아온 약도를 들여다보며 우리를 인도했다. 유화가 마련해준 은신처로 가는 길은 대낮임에도 어둡고 인적이 드물었다. 어째서 호위 무사가 필요했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평범해 보이는 오두막이었다. 마당을 쓸며 무료하게 하품하던 사내가 우리를 보고 설렁설렁 다가왔다.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지기에 살짝 긴장했다. 나태해 보여도 누더기 아래 감춰진 팔은 단단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을 게 분명했다. 유화 님께 따로 언질을 받은 것이 없었는데, 약도라도 내밀어야 하나.

그러나 그는 오이의 얼굴을 보더니 입꼬리를 쭉 찢어 웃었다. 그 정겨운 웃음에 놀랄 틈도 없이 그가 조악한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나는 이 간단하다 못해 어이없는 보안 절차에 놀라 오이를 쳐다보았다.

“너 쟤랑 아는 사이야?”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별다른 일을 한 건 아니고…. 그, 협보와 아는 사이길래….”

“아, 그래. 협보와 아는 사이겠다. 그런데 건너 건너 볼 수도 있지 뭘 그리 머뭇거려.”

이 사업에는 유화뿐만 아니라 협보도 손을 대고 있었으니 저 사내를 알고 있어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눈에 띄게 변명하는 오이가 이상해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눈길에 그가 내 눈을 피하더니 척척 소리가 날 것 같은 발걸음으로 대문을 향했다.

다행인지 내 추궁은 소란스러움에 밖으로 나온 춘아의 누이를 보며 끝이 났다. 긴장한 낯으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춘아가 단숨에 달려 나갔다.

“형님!”

“춘아야!”

한껏 목소리를 죽인 인사말이었음에도 기쁨과 그리움이 여기까지 넘실거렸다. 가족의 눈물겨운 상봉은 안으로 들어선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몸은, 몸은 괜찮으셔요? 아기는?”

“모두 괜찮으니 너는 신경 쓰지 말아. 궐 생활은 괜찮고?”

두 자매는 서로를 껴안으며 안위를 확인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조차도 억누르고 살았던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나는 남몰래 가슴께를 툭툭 두드렸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저는, 흑, 음식 준비를 좀 해오겠습니다.”

한창 누이를 붙들고 울음을 토해내던 춘아가 치마를 걷고 일어섰다. 궐에서부터 좋다던 음식과 약재는 모조리 싸 와서 보따리가 큼지막했다.

“…….”

그녀가 빠져나가자 순식간에 방 안이 어색한 공기로 가득 찼다. 애초에 나와는 연이 없는 여인이었다. 나는 남은 감정을 추스르는 그녀에게 비단 손수건을 건네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당에라도 나가 있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그녀가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몸을 낮췄다. 당황하는 사이 울음으로 가득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쇤네를 구해주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이 은혜를 평생 어찌 갚아야 할지…….”

“아니, 그 감사 인사는 내 몫이 아닌 것 같구나. 난 언질밖에 준 것이 없고…. 홑몸도 아닌데 그만두거라.”

“그 한 말씀이 아니었더라면 전 이렇게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황급히 다시 주저앉아 그녀를 달랬다. 한참 말리다 결국 감사 인사를 받고 나서야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몸을 일으키는 대신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한 채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내 발을 부여잡았다. 옆에서 오이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엄한 짓을 막아야 하나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내가 둘 중 누구를 말리기도 전에 발치에서 애원이 토해졌다.

“미천한 제가… 염치 불고하고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조금 전보다 더욱 숨죽인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가 이 대화가 춘아의 귀에 들어가지 않길 바란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눈치껏 오이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망을 보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녀를 한결 편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고도 한참을 머뭇거리던 여인은 다시 내 발치에 고개를 파묻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제가 원체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대로 떠난다면 주변에 연고도 없이 살게 될 텐데, 제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홀로 남을 아기 생각에 밤잠이 오지 않습니다…….”

언젠가 춘아에게서 그녀의 누이가 몸이 약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았다. 하지만 죽음을 걱정할 정도인 줄은 몰랐다. 딱딱하게 굳은 내 몸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그녀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이 아이도 도련님께서 살려주신 목숨입니다!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가엾이 여겨 거두어 주십시오. 지금 당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죽으면 그때… 잡일꾼이어도 좋으니 제발 목숨만은 부지하고 살 수 있도록……!”

확실히 어린아이 혼자서 길바닥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떻게든 귀족 집에 들어가는 게 여러모로 나은 길이겠지. 자세한 신분을 밝히기 어려운 만큼 나는 처음부터 어느 귀족 가문의 아들이라고 둘러댄 상태였다. 그러니 나를 붙잡고 저리 부탁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나는…….

“…….”

나는 거절하기 위해 벌렸던 입을 그대로 닫았다. 내가 거둘 수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꽉 쥔 주먹 아래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양자를 하나 들이는 것도 괜찮겠지.”

나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였다. 양자 운운한 것은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실패했다곤 하나 유리의 탄생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내가 이곳에 남게 된다면 가정을 꾸리기란 물 건너간 것 같은데. 나처럼 가족을 잃은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다 흠칫해서 가슴팍을 틀어쥐었다.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곳에 남았을 때의 미래를 입에 담고 있었다.

비단 지금만의 일은 아니었다. 주몽의 마음을 접게 해서 책임을 피하겠다는 헛소리는 말 그대로 헛소리로 끝났다.

그날 밤을 겪으며 다시는 내 입에 혼인을, 아니 마음을 거절하려는 시도조차 올리지 못할 것을 짐작했다. 마지막 회피가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다.

그렇게 내겐 단 한 번의 유예가 남았다.

나는 일주일 뒤라도, 아니 당장 몇 시간 뒤라도 언제 고구려로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이렇게 되자 자의든 타의든 이곳에서의 미래를 그려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상상은 어렵지 않았다. 남쪽으로 가서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 걸 지켜보고, 지금처럼 세 벗들과 종종 차를 마시는 일상. 거기에 더하여 가끔씩 부여로 건너가 가람이도 만나는 상상은 눈만 감아도 며칠이고 펴낼 수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평온하고 즐거웠다.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악몽을 꾸지도 않았고, 닿지 않는 사죄를 건네는 일도 없었다. 이젠 잊어버린 고등학생의 일상보다 훨씬 다채롭고 생생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눈을 뜨면 다 쓰러져가는 나무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 나무는 지난 이십 년간 내 마음속에 뿌리를 박고 무럭무럭 자라난 그리움이었다. 그 굳건하기만 했던 나무는 언제부턴가 끊임없는 도끼질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책임감과 죄책감이라는 도끼는 무자비하게 살을 갈라내고 속을 파냈다.

동시에 나는 드러난 속이 수없이 많은 세월을 견디며 썩어들어 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너지는 중심을 보고 있으면 폭삭 썩은 나무구멍 사이로 벌레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냥 네가 먼저 무너져. 도끼질에 쓰러졌다간 너는 평생 죄책감과 그리움을 모두 떠안아야 할 거야. 하지만 네가 ‘선택’하는 거라면 말이 다르지. 이번에야말로 네 의지대로 행동하는 거야.’

벌레가 보이지 않는 혀를 날름거릴 때마다 나는 그동안 선택이라는 이정표를 박은 채 펼쳐졌던 외길을 떠올렸다. 그렇게 다시 눈을 감으면 하루가 지나가 있었다.

“……이걸 받거라.”

그 속삭임을 떠올리던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품 안에 손을 넣어 비단 뭉치를 꺼냈다. 둘둘 감아놨던 천을 풀자 은은하게 푸른 빛이 도는 우아한 검이 드러났다. 검집 밖으로도 빛이 새어 나오는 바람에 가죽 주머니라도 맞춤 제작할 요량으로 들고나온 단검이었다.

“만일 아이가 홀로 남게 된다면…… 남쪽으로 가서 이 물건의 주인을 찾으라 이르거라.”

내 말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척 보기에도 귀중한 물건이라 그런지 그녀는 손까지 떨며 칼을 받았다. 남의 손에 주기 조금 남사스러운 물건이었지만 지금 지니고 있는 것 중에 나의 것임을 정확히 드러낼 만한 것은 저것뿐이었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발광하는 검을 천으로 덮어 가리며 재차 되뇌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여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여지를 준 마음을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이미 알았지만 모른 척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주몽에겐 내가 필요하고 나는 더 이상 그것을 내 이기심을 앞세워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띠링!

그 순간 평소보다 더 날카로운 알림음이 정신을 깨웠다.

퀘스트 조건 충족 검증이 진행 중입니다.

… ■■■■■■■□□□ …

뿌옇게 흐려진 시야 앞으로 검은 게이지 바가 점멸하며 천천히 차올랐다.

순간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을 느꼈다.

[‘주몽’을 찾아가게 될 ‘유리’를 탄생시켜 주세요. ‘주몽’이 떠나기 전, 그를 알아볼 수 있는 단서를 남겨두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퀘스트에 쓰여 있던 문장이 조각조각 흩어져 뇌 속을 떠돌았다. 나는 일정 수준 이상 오르지 않는 게이지에 눈을 고정했다. 떨리는 입술이 느릿하게 말을 뱉었다. 그건 본능과도 같은 직감이었다.

“아이 이름은 유리, 라고 짓는 게 어떻겠는가?”

여인이 눈물을 훔치며 ‘유리….’ 하고 여러 번 되뇌었다.

“유리… 유리. 예, 참으로 좋은 이름입니다. 이, 이름까지 친히 내려주시고, 이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띠링— 띠링—

[도전] 후예를 만들어라 – 성공

당신은 무사히 ‘유리’가 ‘주몽’을 찾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훗날 서로를 알아볼 ‘단서’로 ‘주몽의 단검’이 등록되었습니다.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고구려’의 안정적인 미래가 확보됩니다.

나는 멍하니 퀘스트 완료 창을 바라보았다. 선명하게 떠오른 글자는 현실이 아닌 듯 몇 번이고 읽어도 뇌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퀘스트는 영원히 성공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만큼 예상치 못했던 성공이었다.

‘유리’가 꼭 주몽의 피가 섞인 자식이 아니었어도 괜찮았던 걸까. 분명 이 퀘스트를 내린 신의 초기 의도는 이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모든 퀘스트는 ‘동명왕편’을 기반으로 했으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은 굳이 ‘퀘스트 조건 충족 검증’을 진행하고, 최소 조건을 만족시키자 완료 창을 띄워주었다.

나는 상대방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모르고 퀘스트 창을 빤히 바라보았다. 단서로 등록된 ‘주몽의 단검’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하…….”

이 단검은 주몽이 내게 준 것이었다. 그의 손을 거치긴 했지만 종내에는 내게 도로 쥐여준 ‘내’ 단검이었다.

그러나 이 황당하기까지 한 퀘스트 성공 창을 통해 신은 말하고 있었다. 주몽이 다시 내게 주었어도 단검은 여전히 주몽의 것이라고. 다시 말해, 내 존재는 이 세계에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이며 자신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주몽의 단검’이라는 표시가 그 증거였다. 그 한 줄이 이 모든 서사에 내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었다.

“형님! 왜 또 울고 계십니까…….”

상 하나 가득 음식을 내오던 춘아가 서둘러 달려왔다. 나는 서로를 달래는 자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모습 위로 나에게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을 부탁하던 방금 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내게도 저런 가족이 있는데. 내 안위를 걱정할 어머니가, 눈물을 쏟으면 달래줄 형제가. 그 순간 뼈저리게 느꼈다. 무엇을 선택하든 깊게 뿌리 박힌 그루터기는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네가 설 자리는 ‘종이’에 적혀 있지 않아.’

차가운 빛을 뿜어내는 시스템 창 위로 그런 속삭임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럴 바엔 마지막으로 나무꾼에게 호소해보고 싶었다. 이 나무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모든 걸 털어놓는다면 그는 보내줄지도 모른다. 내가 기른 작은 아이는 비록 발톱을 숨기고 있었지만 여린 속내만큼은 항상 진심이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신의 냉정한 밀어냄이 나에게 마지막 힘을 준 셈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창을 걷어냈다.

[메인] 남쪽, 새 땅으로.

‘주몽’을 시기하는 자들이 그를 내쫓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들을 피해 ‘주몽’을 남쪽으로 도주시키세요. 물론 그의 절친한 세 벗들도 뒤를 따를 겁니다. ‘강’을 건너는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마세요.

성공 시 보상 : 마지막 퀘스트 오픈

실패 시 결말 : ‘하백’과 ‘창조주’의 분노로 세상 멸망

그러자,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퀘스트가 떠올랐다.

***

춘아의 누이와 헤어진 뒤로 나는 틈틈이 내 진심을 털어놓을 기회만 엿봤다.

그러나 좋은 장소와 시간대를 고르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주몽이 내 말을 듣고 설득당한다면 다행이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생각해 두어야 했다.

최악의 경우는 그가 감추고 살던 일면을 다시 드러내는 것이었다. 인적이 드물고 둘만 있다면 이번엔 말 좆 따위가 아니라 그대로 고구려로 끌려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아니, 사실은 궁인이 여럿 있는 대낮이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가장 섬뜩한 사실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번째 밤’이 벌어질 만한 여지를 남겨둬서는 안 됐다.

그렇게 나는 둘만 있을 장소도, 그렇다고 여럿이 있을 장소도 고르지 못한 채 하염없이 시간만 보냈다.

물론 내가 무슨 고민에 빠져 있든 건국은 별개의 일이었다. 퀘스트를 실패한다면 세상이 멸망하니까.

웬만하면 주몽에게 사정을 털어놓은 뒤 진행하고 싶었지만 퀘스트 창에 쓰여 있던 ‘시기하는 자들’이 마음에 걸렸다. 잘만 하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상황이 생기겠지만 예상치 못한 때 일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었다. 덕분에 은밀히 그들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지만 영 잡히는 구석이 없었다.

이럴 땐 경험상 먼저 기반을 다져 두는 편이 나았다.

“다들 계셨습니까? 제가 조금 늦은 모양이로군요.”

“아니야. 딱 맞게 왔어.”

그것이 지금 내가 남쪽으로 내려갈 네 명의 주역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은 이유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들어서는 협보에게 손짓하며 궁인을 내보냈다.

이윽고 찻잔이 달그락거리고 가벼운 안부 인사가 오갔다. 나는 대화를 나누며 한 명씩 눈을 맞췄다. 언제 다들 이렇게 자랐나 싶게 훤칠한 사내들뿐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키우긴 했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나를 마지막으로 말이 끊겨 있었다. 나는 초조하게 떨리는 손을 들어 따스한 잔을 감쌌다. 다행히도 여러 번 고른 말이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음…. 내가 오늘 너희를 이렇게 모은 이유는 말인데. 조만간 주몽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줬으면 좋겠어.”

“남쪽 지방에 시찰할 곳이 있습니까?”

오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협보는 어째서인지 굳은 얼굴이었고 마리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는 일부러 주몽 쪽을 쳐다보지 않으며 오해를 정정해주었다.

“아니. 너희는 졸본까지 가서 새 나라를 세울 거야.”

아무리 ‘도망’이라지만 내려가는 당일에 모든 걸 알게 할 수는 없었다. 먼저 사실을 알리고 차분히 마음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래야 부여에 남은 일들도 정리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하겠지. 어쩌면 새 나라를 위해 준비할 것이 있을지도 모르고.

사실 명색이 벗들에 개국 공신인데 이미 주몽이 계획을 공유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똑똑히 말해줬음에도 머리가 핑핑 돈다는 얼굴을 한 오이를 보니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오이가 더듬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부여는… 확실히 오래된 나라지만 태자 저하께선 충분히 바꾸실 수 있을 겁니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졸본에 건국하실 이유가…….”

“물론 나는 그럴 필요가 없지. 주몽이 왕이 될 거야.”

오이가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허리에 찬 칼에 부딪힌 다기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건 반역이 아닙니까! 주, 주몽, 저자가 저하께 부, 불충한 마음을 품은 것입니까?!”

“네? 바, 바, 반역이요?!”

약과를 야금야금 먹던 마리도 놀라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주몽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짜증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르르 풀어진 얼굴로 웃어주었다. 앞에서 무슨 소란이 일든 여전히 변함없는 태도였다.

……어서 말을 꺼내 봐야 할 텐데. 나는 괜히 찔리는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시선을 피하기가 무섭게 주몽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가 다기를 들더니 내 빈 찻잔을 채워주었다. 언제나 듣기 좋은 목소리가 평연하게 울렸다.

“태자 저하께서도 같이 가실 테니 반란은 아니겠지.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던 협보가 “결국…….” 하고 작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짚었다.

협보에게만은 이 계획을 털어놨던 걸까. 어느 쪽을 추궁하는 대신 오이와 마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여전히 눈을 크게 뜨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시원스레 답을 하는 대신 꿋꿋하게 이어서 말했다.

“아무튼 그리 알고 채비를 해 둬. 웬만해선 때를 맞춰 내려가면 좋겠지만 요새 낌새가 좋지 않은 자들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 걱정이 되네.”

“그런 자들은 못 봤는데…….”

“네가 모든 귀족들을 다 알아?”

나는 마리의 이마를 콩 때렸다. 상체를 한껏 앞으로 내밀었던 아이가 억울한 표정으로 머리를 감쌌다.

오이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누가 들어도 반역인 내용에 놀라 일어섰지만 상황을 살펴보니 혼란스러울 만도 했다. 직접 언급한 자가 부여의 태자인데다 그걸 주도하는 모양새였으니.

그의 표정은 점차 의심과 슬픔, 작은 분노를 거쳤다. 그가 천천히 앞으로 나오더니 대뜸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다.

“어찌하여……. 제가 태자 저하를 배신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부디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오이야.”

“제가, 제가 부족한 점이 있다면 뭐든 고칠 터이니 제발…….”

나는 짧게 스쳐 간 분노가 자기혐오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역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 결론에 내가 그를 내쫓는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 미련한 호위 무사는 이 순간마저도 내가 아닌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었다.

잘못이 없는 자가 꿇는 무릎에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이 퀘스트의 가장 큰 난관은 주몽일 거라 생각했었지 그의 벗이 될 줄은 몰랐다. 내가 할 말을 고르는 사이 오이가 하는 모습을 보던 마리도 덩달아 엎드렸다.

“저, 저도요!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충성심 시험이라면, 저는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으니 곁에만 있게 해주세요!”

“너희…….”

너희 안 친하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주몽과 그들 자신을 분리하는 고백에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간신히 삼켰다. 마리는 어느새 작게 흐느끼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역효과가 날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좀 해보라는 시선으로 협보를 바라보았다. 그는 세 벗들 중 유일하게 이 계획을 알고 있었으니 차분히 달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입을 연 사람은 삐딱하게 휜 입매를 숨기지 않은 주몽이었다.

“네가 새 나라의 가신이 되는 게 곧 저하를 따르는 것이니 염려 말거라. 남하하는 날 형님께서도 같이 오시겠다 이미 약조해주셨다.”

“그, 그게 참말이십니까?”

당황과 불신, 체념이 섞인 세 쌍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것들 대신 당당한 빛을 띤 다른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는 뻔뻔하게도 제 말이 맞지 않냐는 듯 내 소맷자락을 꾹꾹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 순간 요 근래 한가지 생각만 하던 내 레이더망이 신호를 울렸다.

어두운 밤인가? 아니요.

둘만 있는가? 아니요.

곁에 있는 사람들이 무시해도 좋을 사람인가? 아니요.

적절한 분위기인가? 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나는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다 천천히 운을 뗐다.

“그거… 말인데. 꼭 같이… 가야 할까?”

“……형님?”

주몽의 미소가 깨지고 야차 같은 얼굴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제가, 무언가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만…….”

저 눈을 보니 역시 그는 남 위에 군림하고 살아야 할 운명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급격하게 떨리기 시작한 심장을 꾹 누르며 준비해 두었던 1차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가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일 때를 대비하여 만들어둔 완충 장치였다.

“아니, 알다시피 나는 이곳에서 정리할 일도 많고…. 태자라는 게 사직 상소를 낸다고 그만둘 수 있는 자리가 아니잖아?”

호적에서 팔 수도 없고. 내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자리였으면 나는 진작에 가람이와 직위를 맞바꿨을 것이다. 지금 보니 정말 불쌍한 신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주몽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내 변명을 딱 잘라 기각했다.

“정리는 다른 사람이 해줄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금방 될 일이 아니니 다른 자에게 맡기고 함께 가시지요.”

“그래도 도리가 있는데 마무리는 하고 가야….”

“형님. 저와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탁자 위에 올려 둔 손 위로 주몽의 손이 덮였다. 그가 눈매까지 접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사랑하는, 순하고 착한 웃음이었다.

“왕이 되실 분께서 말을 물리실 셈입니까?”

‘후계를 위해 혼인을 하면 좋겠다고 하신 분은 형님이십니다. 왕이 되실 분께서 말을 물리실 셈입니까?’

녹을 듯이 달콤한 미소 위로 그날의 형상이 겹쳐 보였다. 내 손목을 묶고 말 좆을 넣겠다 협박하던, 내가 모르는 일면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 그 모습이.

갑자기 속이 답답하고 구토감이 들었다.

그가 나를 순순히 보내주었더라면, 아니, 조금이라도 공감하며 고민하는 눈치라도 보였더라면 나는 용기를 얻고 이 자리에서 내 진실을 토해냈을지도 몰랐다.

신이 내게 얼마나 무자비한 짐을 지웠으며 퀘스트 창의 푸른 빛은 얼마나 시린지, 난데없이 끌려와야 했던 열여덟의 순간 뺨에 닿았던 복도 바닥은 얼마나 차가웠는지.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속에 고여 썩은 빗물을 모조리 쏟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저 미소는 끝까지 단 한 번의 틈도 주지 않았다. 눈앞이 까맣게 흐려지며 숨이 막혔다. 인지할 새도 없이 꾹 누르고 있던 심장이 펑 하고 터졌다.

“내가 싫다고 하잖아! 안 된다고, 그러지 못하겠다고!”

갈기갈기 찢어진 심장 조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입을 크게 벌렸다. 내 손 위에 올려졌던 손이 툭 떨어져 나갔다.

“너에겐 떠나는 게 장난이야? 여기, 이곳! 네 집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 너는!”

“…….”

“너는… 뭐가 다 그렇게 쉬워?”

주몽의 멍한 얼굴이 보였다. 나는 조여오는 목을 쥐어뜯었다. 원래라면 물러나 다음 기회를 노렸어야 했다. 날이 선 주몽을 달래고 다음에는 조금 더 신중하게 다가가야만 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이해를 구하려 한 시도가 막힌 순간이었다. 그 사실이 참을 수 없는 압박감으로 다가와 견딜 수가 없었다.

조용한 방 안에 내가 숨을 고르는 소리만 들렸다. 주몽이 멍한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내 천천히 돌아온 고개는 툭 떨어져 제 손끝만을 바라보았다. 잔뜩 잠긴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제가 쉬워 보이십니까?”

“…….”

“제가 정말로 쉬워서, 온몸으로 약조까지 해주신 형님께 이리도 되묻는 것 같습니까?”

우는 건가? 나도 모르게 흠칫 몸이 떨렸다. 맹세코 울릴 생각은 없었다. 그저 감정이 격해져 목소리가 높아졌을 뿐인데…. 평생 내게 큰 소리 한 번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 놀랐어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달래는 대신 등을 돌리기를 택했다. 아직은 나 스스로도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 손을 뻗었다간 또다시 미운 소리가 나갈 것만 같았다.

다행히 등 뒤에서 협보가 조곤조곤 주몽을 달래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생을 사셨던 곳인데 힘드시겠지요. 워낙 정도 많으신 분이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지요.”

나는 침묵으로써 물러나는 것을 허락했다. 그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 순간이었다.

커다란 손이 내 시야 안쪽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 손은 망설임 없이 내 곁에 놓여 있던 찻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쨍그랑—!

동시에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스멀스멀 흐른 미지근한 찻물이 내 옷자락을 적셨다.

“이, 이게 무슨…….”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발밑에 다기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떨리는 시선을 올리자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던 주몽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제야 낯에 만족스러운 빛을 띠며 손바닥을 털었다. 나를 향해 다정하게 휘어지는 입꼬리가 보였다.

“제게 불안한 등을 보이지 마십시오.”

나는 그제야 잠긴 목소리의 원인이 울음이 아닌 분노였음을 깨달았다. 그는 협보를 향해 깨진 다기 조각을 툭 차곤 방을 나갔다.

“저 미친놈…….”

문이 닫히고서야 누구 것인지 모를 낮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나는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궁인을 최대한 멀리 물려서 다행이지……. 그러나 그 와중에도 운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나도 문제였다.

주변 정리는 협보가 나서서 했다. 내게 튄 조각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피고 눈물 바람으로 호소하다 봉변을 당한 두 사람은 잘 달래서 보냈다. 다행히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느꼈는지 아무 말 없이 가 준 덕분에 상황은 금세 수습되었다.

“고마워. 덕분에 정신이 좀 드네.”

“아닙니다.”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건넨 감사 인사에 협보가 손을 내저었다. 나는 사과와 함께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물러가는 대신 찻물에 젖은 손을 앞자락에 반복해서 닦았다. 그 불안해 보이는 모습에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저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멈칫멈칫 걸음을 떼던 그가 대뜸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희미한 떨림을 품고 흘러나왔다.

“정말 ‘집’이 여기십니까?”

“……뭐?”

그 누구의 입에서도 흘러나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그들 앞에서 ‘집’을 언급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가 머뭇거리며 다시 물었다.

“주몽을 따라오신다는 건, 진심이 맞으십니까?”

“당연히…. ……가야지.”

“어디로요?”

그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던지는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가 내 비밀을 알아차렸나? 그러나 티가 날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눈치를 채더라도 부여에 오고 몇 년이 지난 뒤 만난 그가 아니라 태자의 가족이나 궁인이 알아챘어야 했다.

그러나 협보가 꺼낸 말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저하께는 제 냄새가 납니다. 이리 말하면 언짢으실 수도 있겠지만…….”

나는 괜찮으니 계속하라는 시선을 던졌다. 그가 짧게 심호흡을 하더니 두 손을 맞잡았다.

“저는 태어나 단 한 번도 마가의 커다란 대문 안이 편안했던 적이 없습니다. 그곳은 집이 아니라 하나의 감옥에 가까웠죠.”

“…….”

“제게 집이라고 하면 차라리 별궁이나 마구간 처소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담담히 말하는 얼굴에는 씁쓸한 빛이 감돌았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서자라고 핍박받던 그를 가문에서 꺼내 온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그가 집에서 겪어야 했던 아픔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협보는 지금 자신에게 ‘집’이란 그렇게 태어나고 자란 곳이 아니라 안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 말하고 있었다.

“저하께서도 이곳이 집이 아니신 거지요?”

그리고 나에게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난…….”

나는 확신에 가득 찬 눈빛을 마주하며 주춤주춤 몸을 뒤로 물렸다. 내가 이리 쉽게 들킬 정도로 평소 태도가 좋지 않았었나? 매번 티가 났다면 뒤에서 어떤 소문이 돌고 있을지 몰랐다. 한 나라의 태자가 자신의 나라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것은 백성 전체의 애국심 추락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사실 유화 부인께 하신 말씀을 엿듣지 않았더라면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황한 내 모습에 아차 싶었는지 그가 서둘러 잘못을 고백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유화 님께 주몽이 태어나기도 전 내 비밀을 들킨 이후로 원래 세상을 언급했던 적은 딱 한 번이었다. 하필이면 그걸 들을 게 무어란 말인가.

그러나 오해가 풀렸다고 안심이 되진 않았다. 집이 어디냐고 추궁하면 어쩌지? 뭐라고 둘러대야 의심을 사지 않을까. 밝히기로 마음먹은 주제에 막상 감춰왔던 속내가 눈앞에 들이밀어지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솔직히 내가 겪은 일은 헛것에 들렸다며 무당을 불러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협보는 캐묻지 않았다.

“그분께 말씀하신 집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제넘은 말이 아니라면….”

“…….”

“…이젠 저희가 집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담담히 말을 잇던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 시선 아래 꽉 쥔 주먹이 보였다.

“그러니 부디…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집이 되어주겠다니.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어쩌면 허울 좋은 위로일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 외로움을 간파하고 던지는, 그저 듣기 좋은 말. 하지만 그의 눈을 보는 순간 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치받았다. 목이 메어 침을 삼키는 것조차 힘들었다. 마주한 눈이 그의 모든 말이 진심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분노였다. 나를 이리 위해주는데, 누구보다도 진심인 게 눈에 보이는데. 그럼에도 도저히 그 말을 받아넘길 수가 없었다.

“너희… 너희가 뭔데…….”

감히 집이 되어주겠다고 말해. 내게 그것이 어떤 의미인 줄이나 알고.

분노로 말이 토막토막 끊어져 나왔다. 협보는 담담한 눈으로 벌벌 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충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지 않았다.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으며 나를 이해한다는 듯이 굴지도 않았다. 다만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을 뿐이었다.

“집이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곳이라면, 그곳을 만들어 주신 건 저하셨습니다.”

“…….”

“사람 된 도리로서 받은 은혜를 돌려드리고자 했을 뿐입니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오이나 마리도 항상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낮게 덧붙였다. 반듯하게 꿇어앉은 몸가짐에서 진심이 뚝뚝 떨어졌다.

아. 아아. 나는 낮게 탄식했다. 거대한 절망이 머리를 쿵 때렸다.

나는 결국 영원히 진심을 털어놓지 못하겠구나. 내 썩은 속살을 파내어 보이고 집으로 가는 길을 구걸하지 못하겠구나.

내가 생각하는 사람의 도리가 책임감이듯,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도리’가 있었다. 어떻게 감히 그것을 지키고 싶다 말하는 이들 앞에서 나는 내 도리를 저버리고 싶다 말할 수 있을까. ‘집’이 되어주겠다는 이들 앞에서 집에 너무도 가고 싶어 너희를 배신하려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분노는 겁에 질린 무의식이 내세운 방어기제였다. 그의 위로를 듣는 순간 나는 그 말 조각이 내가 가장 염원하던 것을 포기하게 할 것을 알았다. 엉뚱한 과녁을 겨눈 비난의 화살은 그것을 감추기 위한 발버둥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추악한 발버둥은 끝내 나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지 못했다.

나는 무엇이라도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그러나 거대한 감정이 목을 막아 새어 나온 것이라곤 작은 신음 같은 탄식이었다. 그 버거운 표정을 마주한 협보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오해하진 마십시오. 그 미친놈처럼 불충한 뜻은 아니오니.”

분위기를 풀려는 듯 긴장한 웃음이 섞인 농지거리였다.

그러나 나는 따라 웃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가졌던 희망이 닿기도 전에 증발했다. 그리움을 먹고 자란 나무가 불길에 휩싸여 무너졌다. 그 재난 속에는 남은 갈망만이 타닥타닥 튀었다.

“그래도 모두 진심이니 부디 어려운 결정 내려주십사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협보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나는 그 발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웃으며 배웅해줘야 하는데. 내 곁에 있겠다 말해줘서 고맙다고, 네 충성을 잊지 않겠다고 말해줘야 하는데. 머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무너지는 마음이 미소조차 지을 수 없게 했다. 그들의 탓이 아닌데도 원망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너희가 아니라면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너희가 나를 제 운명 속에 얽어 넣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이렇게 망설일 이유도 없었을 텐데.

그러나 나는 이제 가게 해 달라고 빌 수조차 없었다. 차라리 그가 화려한 위로를 던졌으면 했다. 담백한 그의 말은 겉모습에 홀려 본질을 회피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 맹목적인 충성이 되레 나를 빈털터리로 만들었다.

“아니 됩니다, 저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 태령 님!”

그때 밖에서 소란이 일더니 문이 거칠게 열렸다. 나는 떨어뜨렸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시야 안에 거대하게 선 태령이 쿵쿵거리며 들어오는 것이 잡혔다.

그가 분노로 붉어진 얼굴을 한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미처 나가지 못한 협보는 온몸을 딱딱하게 굳히며 제 이복형제를 바라보았다.

“이 버러지 같은….”

태령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협보에게 다가가더니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딱딱하게 굳은 협보가 방 밖으로 내동댕이쳐지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러고도 몇 번 더 발길질을 퍼붓는 태령을 서둘러 안으로 잡아끌었다. 태령이 씩씩거리며 물러나기가 무섭게 궁인 여럿이 나와 협보에게 달라붙었다.

협보는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덜덜 떨면서도 나에게 다가오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런 그를 조용히 밀어냈다. 어린 시절부터 태령의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되었던 그는 있어봤자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이 분명했다.

협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무사를 불러오겠다며 몸을 돌렸다. 나도 말리는 대신 궁인들을 대동하고 태령을 마주했다. 확실히 지금의 그는 홀로 상대하기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행히 다시 마주한 그는 분노가 조금 가라앉은 듯했다. 그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더니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였다. 중간중간 이를 악물긴 했지만 꺼내는 말투도 정중했다.

“저하, 저와의 약조를 잊으셨습니까? 열흘 전 분명히 소개시켜 드릴 분이 있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 그랬었지.”

나는 낭패한 심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듣고 보니 그와 상담 아닌 상담을 하던 날 그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조한 기억이 났다. 무슨 일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도 날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 같기도 하고…. 태령의 기색을 훔쳐보니 여간 높은 자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누가 봐도 새카맣게 잊었다는 내 표정을 보더니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저하를 위해 어렵게 마련한 자리인데 잊으시면 어찌합니까.”

“…미안. 내가 요새 정신이 없어서.”

나는 작게 사과만 건네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달력도 없는 세상에 열흘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요 근래는 밤낮이 바뀌는 것도 모를 만큼 정신을 놓고 살았던 탓이 컸다.

내 퀭한 안색에 태령도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가 조금 누그러진 기색으로 나를 붙잡았다.

“됐습니다. 제가 다시 사정해서 모셨으니 지금이라도 가시면 됩니다. 거기서 잘 말씀드리면 이제부터 저하께서도 입지를 다지실 수 있을 겁니다.”

“그거 그냥 가람이랑 가면 안 돼?”

나는 그의 손을 툭 떨치며 여상히 물었다. 태령의 얼굴이 단박에 굳었다.

“너 요즘 가람이랑 친하게 지낸다며. 걔랑 가. 나는 일이 있어서…….”

솔직히 말하자면 이 모든 일에 짜증이 났다. 내가 아무리 그를 거절하기 힘든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나는 ‘태자’였다. 약조 한 번 잊었다고 귀족의 분노를 받아낼 이유는 없었다.

아니, 그 때문이 아니다. 나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평소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끊임없이 태령의 기분을 살피고 맞춰줬겠지.

그러나 나는 지금 매우 지치고 피곤한 상태였다. 평생 바라왔던 목표가 처참히 무너졌다. 그 상실감에 침몰할 새도 없이 남은 갈망을 스스로 죽이느라 괴로웠다. 당장 나 자신을 지탱하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지경이었다. 그런 때 끼어든 ‘왕권’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는 나를 한계까지 몰아가기에 충분했다.

“무슨 일 말입니까?”

그러나 오늘따라 유난히 깨진 사기 조각처럼 예민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 거절에 낯빛을 싹 바꾼 태령이 매섭게 추궁했다.

“또 주몽 그 새끼와 관련된 일입니까?”

“뭐?”

“저와의 약조를 어기신 것도 그놈과 함께 계셔서가 아닙니까.”

요 며칠 동안 주몽과 붙어 있었던 것은 맞았다. 나의 진실된 상황을 털어놓을 최적의 때를 찾기 위해 매분 매초 장소와 시간대, 그의 기분 등을 탐색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결국 소용없어졌지만. 나는 또다시 꽉 죄어오는 심장의 감각을 참으며 태령의 오해를 부인했다.

“그 아이와 같이 있었던 건 맞지만 그 때문에 잊은 건 아니었어.”

“대체 그놈을 왜 감싸고 도십니까? 정녕 놈의 실체를 모르시는 겁니까!”

내 말을 들은 태령이 벌컥 화를 냈다. 나는 반사적으로 움츠러들면서도 뾰족한 눈매를 숨기지 않았다. 감싸고 돌다니, 태령을 잊은 건 정말 주몽 때문이 아니었다. 당장 내가 어찌 될지 모른다는 고민에 빠져 잊은 것이지.

그러나 거짓을 말한 적 없어 떳떳한 내 목이 그의 분노에 부채질을 한 모양이었다. 그가 왼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미동도 없는 오른팔을 움켜쥐었다.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음산했다.

“그자를 곁에 두지 마십시오. 언젠가 저하를 배신할 놈입니다.”

“그럴 리가…….”

막을 새도 없이 튀어나온 말은 하도 어이가 없어 나온 대꾸에 가까웠다. 차라리 주몽이 날 배신했으면 지금 내가 이렇게 괴로워할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며 한 나라의 태자를 데려갈 생각까지 하는 놈이었다. 그런 아이와 배신이라는 단어는 한데 묶여 듣는 것만으로도 이질적이었다.

누가 봐도 그의 말을 비웃는 내 모양새에 태령이 나를 노려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새카만 감정으로 번들거렸다.

나는 그 모습에 움칫 몸을 떨었다. 저 눈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어디였지? 기억을 뒤지는데 그가 왼손으로 움켜쥔 오른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직각으로 들린 팔은 손목이 꺾이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인형처럼 축 늘어져 기괴했다. 그가 악에 받친 듯 웃으며 그것을 두어 번 흔들었다.

“저하. 누가 이리 만든 건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이 주제가 왜 튀어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불안한 낌새가 신경을 긁었다. 불안한 낯빛을 띠는 순간 그가 걸렸다는 듯 입을 쭉 찢어 웃었다.

“주몽입니다. 그 어린 새끼가 제 팔을 불구로 만들어 놓았단 말입니다.”

“뭐? 대체 언제…….”

나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 놀라 반문했다. 지금의 그는 오른팔을 잃은 지 한참 되어 보이니 최근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궐 밖으로 나가지 않은 주몽이 따로 그를 만났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태령이 내 호위 무사였던 시절.

그러나 그때 주몽은 고작 일곱 살이었다. 내 얼굴에 떠오른 의심에 그가 쐐기를 박았다.

“제가 왜 자취를 감췄는지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으셨습니까? 모두 그날 밤 그놈이 제 팔을 이 꼴로 만들어놨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깊은 증오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태령은 그 드높던 자존심을 깨면서까지 내게 주몽을 고발하고 있었다. 고작 일곱 살짜리에게 당했다는 절망과 그 사실을 드러냈다는 수치가 물감처럼 온 얼굴에 번져 있었다.

그 절규가 거짓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적어도 주몽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맞을지도 몰랐다. 나도 이제는 알았다. 무작정 부정하기보다 시기를 물은 것도 무의식중에 주몽의 본모습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두 진실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주몽이 다소 감정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유 없이 그럴 리는 없어. 분명 그날 네가 궁인을 희롱하다 걸렸다고 들었는데. 도가 지나쳐 저지하려다 그런 게 아니야?”

“그놈이 그럽니까? 제가 그랬다고?”

“아니야? 그럼 네가 말해봐.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주몽이 네게 활을 쐈는데?”

“…….”

사납게 나를 몰아붙이던 태령이 일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얼마간 기다렸지만 굳게 닫힌 입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말리듯 내 팔을 쥐는 것은 곁에 서 있던 유모였다.

그럼 그렇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세수하듯 쓸어내렸다. 고작 일곱 살짜리가 성인 남성을 해쳤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때의 주몽은 정말 무해하고 가여운 어린아이였다. 내게 애정을 갈구하며 눈치를 보던 순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지금 내가 왜 이딴 말을 들어주고 있어야 하는지. 나는 잔뜩 지친 말투로 싸움을 종결했다.

“네가 주몽을 좋아하지 않는 거 알아. 그래도 모함은 너무했어.”

“그 새끼는 괴물이라고요!”

태령이 결국 분노를 이기지 못한 듯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 눈, 머리, 행동거지! 개중 아무것도 정상인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 잔혹한 성정이 언젠가 저하를 잡아먹을 게 분명한데!”

“그 애는 괴물이 아니야!”

저 눈. 드디어 생각이 났다. 주몽의 활 솜씨를 처음 보던 날 태령이 아이를 바라보았던 눈이었다. 그와 동시에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닮은 부정이 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활 솜씨 하나 비범하다고 십 년이 넘도록 괴물 취급하는 네가 더……!”

“…….”

침묵이 방 안에 감돌았다. 파삭. 신조차 벗지 않은 태령의 발이 깨진 찻주전자 조각을 지르밟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이었다. 파삭, 파삭. 꺼멓게 죽은 낯이 반복해서 조각을 밟았다.

나와 궁인들은 숨을 죽이고 그의 행태를 지켜보았다. 한참을 가루로 짓이기고 나서야 그는 다시 나지막이 입을 떼었다.

“어째서 제가 아니라 그놈입니까?”

“…….”

“저희 가문은 대대로 부여에 충성해 왔습니다. 저 또한 진심으로 저하를 위했습니다. 제가 지켜드렸던 수많은 밤을 잊으신 겁니까?”

나는 움칫 몸을 떨었다. 마치 그 평온했던 밤들에 위협이라도 있었다는 듯한 말투는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그가 여름밤마다 호위를 섰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태령을 비호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어쩌면 주몽이 정말 그에게 화살을 쐈을지도 모른다. 어렸던 그 밤이 아니더라도 사냥 대회나, 내가 모르는 다른 날에 마찰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진실을 캐내고 주몽의 잘잘못을 가리고 싶지 않았다. 이 일이 진실이라면 주몽은 큰 벌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주몽은 내가 길렀어. 내가 제일 잘 알아. 날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놈도 저하를 어버이 대하듯 섬기고 있답니까?”

“당, 연—”

“대체 어느 자식이 부모를 그런 눈으로 바라본답니까! 지금 단단히 착각하고 계….”

“…….”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던 주몽의 연심이었다. 그걸 태령이 어떻게….

그러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한 가지를 더 들켰음을 깨달았다.

아, 제발. 나는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며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그의 손이 입가를 가리는 것이 더 빨랐다. 간절히 빈 것이 무색하게 경악에 휩싸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지금 아… 알고…….”

태령이, 알아차렸다.

“나가!”

인지할 새도 없이 내 입에서 비명 같은 명이 떨어졌다. 새된 소리에 모두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당황으로 까맣게 흐려진 시야 속에서 궁인이 있을 법한 위치를 향해 크게 팔을 휘둘렀다.

“당장 물러나. 내가 부르기 전까지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

“하오나….”

유모가 작게 외치며 내 팔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그 팔을 붙잡아 떼어내곤 직접 문밖으로 이끌었다. 유례없던 내 거친 행동에 모두가 당황해 허둥지둥 물러났다.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모두가 복도 끝까지 사라질 때까지 앞을 지켰다. 뒤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친 게야……. 둘 다 제정신이 아니야.”

나는 근처에 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문을 굳게 닫았다. 탁, 닫히는 소리와 함께 대답이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난 그저 그 애의 운명이 나 때문에 어그러진 책임을 지려는 것뿐이야.”

“책임감? 개소리 마세요! 그거 아니잖습니까!”

단둘만 남은 태령은 전보다 더 화가 나 보였다. 그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소리를 지르며 나를 노려보았다.

“얼마 전 주몽이 찾아와 그러더군요. 혼담은 알아서 할 테니 저하와 말도 섞지 말라고요. 그저 미친 소리겠거니 하고 넘겼지만 이제야 아귀가 맞아. 제가 저하께 혼담에 대해 말씀을 드린 일이 열흘 전 그 일 빼고 더 있습니까?”

“뭐?”

“그때도 부정하시는 게 이상하다 했지만, 정신 차리십시오!”

나는 난데없는 소리에 당황해 그를 바라보았다. 주몽이 태령을 찾아갔다니. 대체 태령이 내게 ‘혼인’이라는 방법을 알려준 당사자라는 것은 어떻게 알고 찾아갔단 말인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서둘러 그날 태령과 나눈 대화를 되짚었다. 그가 내게 상대를 단념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이전에 그는 분명 나를 비웃고 있었다.

어찌…….

“대체 어느 미친 부모가 고작 책임감 때문에 자식과 몸을 섞는단 말입니까!”

……밤을 보내고도 사랑이 아니라 하시냐고.

무릎이 푹 꺾였다. 나는 휘청거리다 등 뒤에 부딪힌 문을 짚고 간신히 섰다. 애써 묻어두었던 성애와 친애의 간극이 다시금 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이 이야기가 화두에 오른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에게 상담을 했을 때는 제쳐 두더라도 주몽도 내게 엇비슷한 소리를 했었다. 그리고 상대방을 알게 된 태령도 여전히 같은 소리를, 아니 그때보다 더 강하게 내 감정을 확정 짓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그 간극을 쉬이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니, 모두 내가 가진 사정을 몰라서 할 수 있는 헛소리였다.

내가 주몽을 사랑한다면 왜 그토록 그를 떠나고 싶어 할까. 평생의 목표가 무너진 나는 지금도 온몸이 저릿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내 감정이 정말 사랑이라면 이토록 괴로울 리가 없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 낯선 단어를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나, 난 오히려 벗어나고 싶어.”

그리고 그러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나는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실패로 끝난 시도들을 돌이켜보다 울컥 치미는 울음을 삼켰다. 저렇게 나를 강렬하게 붙드는 감정이 사랑이라 외치는데 떠나려고만 하는 내가 같은 감정을 품고 있을 리 만무했다.

질척이는 진흙 같은 내 진심을 들은 태령이 눈을 번득였다.

“그럼 여기서 고발하십시오. 그놈이 저를 불구로 만들었다고.”

“뭐?”

“벗어나고 싶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직접 잡아다 무릎 꿇리십시오. 그럼 제가 부여 밖으로 내쫓아 드리겠습니다.”

나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망연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태령은 부여에서 손꼽히는 대귀족의 자제였다. 그가 한낱 마구간지기를 쫓아내고자 하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내가 한마디 말만 한다면 그는 당장 내일, 아니 오늘 밤에라도 군사를 동원해 주몽을 쫓아낼 것이다.

그럼 그렇게 갑작스러운 추방에 나를 데려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그저 깊숙한 곳에 숨어 그들이 강을 건너기만을 기다리면 됐다. 어쩌면 군사에 쫓기다 부상을 입을지도 모르지만 주몽의 뛰어난 활 솜씨와 그를 지켜보는 하늘이 그가 죽게 놔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 내가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해 볼 것도 없었다. 태령이 내 마음을 밝히기 위해 내뱉은 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내 감정은 정말 사랑이 아니니까. 주몽에게 느끼는 정은 원체 순진하고 마음이 여린 그에게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걱정에 생긴 마음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주몽이 내 생각만큼 약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는 충분히 제 이득을 취할 수 있을 만큼 강했다.

딱 한 마디. 그저 ‘그리할게.’ 이 한마디면 주몽을 쫓아낼 명분도 얻고, 나도 편안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윽….”

“…….”

“그리… 윽, 흐윽…. 못… 못 하겠어…….”

그런데도 나는 그를 향한 걱정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선물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회다. 수백 번, 수천 번 고민해봐도 이보다 더 좋은 길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손으로 주몽을 고발할 수 없었다.

어차피 부여를 떠나야 할 몸이라 해도 그 아이가 타인에 의해 ‘내쫓김’을 당한다는 것이, 어쩌면 그 도망 중에 다칠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 모든 가정이 내 발목을 잡았다. 내가 그를 해하는 일에 동조한다는 그 짧은 의사 표현마저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이런 스스로를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도저히, 도저히 나는…….

“그냥 인정하십시오. 그 애가 좋다고, 곁에 두고 싶으시다고!”

그 모습을 본 태령이 악에 받쳐 고함을 질렀다. 내 선택을 보란 듯이 비웃으며 내 눈먼 감정을 손가락질했다.

“제 존재는 십 년 전 그대로 잊어버렸지만 그 새끼는 떠나면 평생을 그리워하실 것을! 그 차이를 어찌 저하만 모르시는 것입니까!”

그리움을 먹고 자란 나무가 드디어 무너졌다. 짙은 그늘을 만들던 나무가 사라지며 그 아래서 자라던 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하께선 어렸을 때부터 그러셨습니다. 제가 그토록 쓸데없는 것에 미련을 두지 말라 말씀드렸거늘……!”

그것들은 내 원래 세계보다 더 오래 살았던 이곳을 향한 미련이었다.

눈만 크게 뜬 내 앞에 태령이 바싹 다가와 얼굴을 들이댔다. 핏발 선 눈이 나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나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오롯이 그 시선을 마주했다. 자만이 깨지고 무지가 돌이킬 수 없는 해일을 불렀다. 그 파도에 휩쓸려 깨달음의 숨을 헐떡였다.

태령의 말이 맞았다. 나는 원래 뭐든 미련을 놓지 못했다.

수십 년째 이어온 집을 향한 그리움이나 결국 바꾸지 못한 가치관, 쉬이 떼지 못하는 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여름 어느 날이면 나는 여전히 엄마와 동생의 생일을 홀로 축하했다. 여태까지도 명령에 익숙해지지 못해 부탁을 더 자주 했다. 외면했던 말의 혀는 다 아문 지금도 종종 들여다보았다.

그런 내가 이곳을 떠난다고 다를까. 집으로, 가족들에게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곳에서의 하루는 정말 바랐던 것처럼 항상 행복하고 충족된 삶일까.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 어쩌면 정상적인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런 것쯤은 다시 배우면 된다. 가족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다시 시작될 ‘그리움’이었다.

나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그리움을 안고 지내왔다. 부여에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종종 심장이 불타는 것 같았고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눈물이 주룩주룩 났었다. 여름밤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악몽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십 년이 훌쩍 넘도록 이곳에서 지내며 내 하루는 점차 그리움에 빠져 지내는 시간보다 이곳에서의 삶으로 채워진 시간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나는 한글을 쓰는 것보다 한자를 쓰는 것에 익숙해졌고 언젠가 걱정했던 것처럼 때때로 설날에 기뻐하기도 했다. 내게 집을 향한 그리움은 이제 한 번씩 쑤셔지는 칼이었지 모든 순간을 잠식하는 고통이 아니었다.

집에 가게 된다고 부여에서의 내 기억은 썩둑 잘리지 않는다. 내가 이곳에 두고 온 가람이, 왕비님, 태자궁의 궁인들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유화 부인은 물론이고 그 밖에 날 챙겨주던 모든 사람들도 두고두고 남아 불쑥 떠오를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주몽…. 그리고 오이, 마리, 협보까지.

돌아왔다는 기쁨이 가시고 나면 이번에는 이들을 향한 그리움이 시작될 것이다. 죄책감에 몸부림치면서도 보고 싶어서, 어쩌면 매 계절 모든 밤 악몽을 꿀지도 몰랐다.

또다시 그 고통을 견디고 싶지 않았다. 희석되지도 않고 새롭게 시작될 그리움을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다시 그리워하고 싶지 않았다…….

주몽에 대한 내 감정은 이제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정말로 어쩌면 태령이 말했듯이 사랑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나는 이곳을 평생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를 집에 두고 왔듯이, 내가 집에 돌아가더라도 또다시 ‘나’는 이곳에 남아 있을 터였다.

“그 감정 정리, 서두르시는 편이 이로우실 겁니다.”

태령이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그는 잡는 대로 인형처럼 흔들리기만 하는 나를 노려보다 입술을 짓씹었다. 새카맣게 흐려진 두 눈 속에 강한 증오와 분노, 견디지 못한 수치가 엿보였다. 그는 곧 대답이 두려운 사람처럼 나를 밀쳐내고 문을 열었다.

그 성난 발걸음 소리를 듣다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 작지만 빽빽하게 자라났던 미련의 풀이, 머릿속을 넘어 온몸에 돋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홀로 팔다리를 쥐어뜯다 눈물을 툭툭 떨어뜨렸다.

나는 왜 어느 한쪽을 버려야만 하는 운명인지.

집에 가지 않는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간다면 남게 될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까. 나를 연모한다는 주몽과 내게 집이 되어 주겠다고 말하는 내가 거둔 사람들은.

그리고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할 상실의 고통은.

너무나도 무거운 내 선택에, 나는 이제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게 되었다. 이곳을 떠나지도, 이곳에 남지도 못한 채…. 나에겐 여태 그랬던 것처럼 운명이 나를 휩쓸어가길 기다리는 수밖에 남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떠날 준비만 했지 정작 떠나보낼 준비는 하지 않았다는 것을.

***

주몽이 다시 찾아온 것은 며칠이 지났는지 모를 어느 깊은 밤이었다.

나는 궁인 서넛을 뒤에 매달고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게 떠 있는 하늘 아래 호수는 달이 하얗게 비쳐 아름다웠다.

그 창백한 물결을 바라보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주몽이 어느새 내 뒤까지 성큼 다가와 있었다. 입가에는 내 얼굴을 볼 때면 언제나 지었던 환하고 순한 웃음을 지은 채였다.

“형님.”

나는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달빛이 섬세한 이목구비 위로 부서지는 것을 보다 그 콧잔등을 쓸어내렸다. 그때 무언가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주몽이 코끝을 찡긋거리는 걸 보며 궁인들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들어가 있어.”

“하오나, 저하…….”

궁인들이 곤란한 낯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태령이 다녀간 뒤로 그들은 내 곁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그날 태령이 무슨 일이라도 벌일 것 같은 기세로 나간 게 큰 위협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만일 위협을 하더라도 대상은 내가 아닐 텐데. 그러나 태령의 ‘태’ 자만 꺼내도 하얗게 질리는 유모를 몇 번 보고 나자 오해를 풀 기력도 사라져 버렸다.

사실 요새는 깨어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 불편하지도 않았다. 모든 길을 잃어버린 나는 그날 이후로 하루의 대부분을 죽은 듯이 자는 것으로 보내고 있었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잠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잠시 깨면 퀘스트 창을 불러내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끔은 손을 뻗어 닿지도 않는 ‘보상’ 글씨를 휘젓기도 했다. ‘마지막 퀘스트 오픈’이라는 글씨는 더 이상 기대로만 다가오지 않았다. 엔딩 커튼이 사실은 또다시 끝없는 고통의 길을 알리는 서막임을 엿보았으므로.

하긴, 기대면 어떻고 절망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이곳에 남아도 매한가지인 것을.

나는 손끝에서부터 차오르는 무기력함을 가만히 놔두며 주몽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에 그가 미간을 찡그리더니 궁인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끄덕임에 궁인들이 한숨을 삼키며 절을 올렸다. 그나마 주몽이 곁에 있으니 겨우 물러나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마지막 발이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곤 입을 뗐다.

“저들이 요새 쓸데없는 걱정이 많아.”

“이리 쓰러질 것처럼 휘청대시니 그러는 게 아닙니까. 석반은 들이셨습니까?”

“들였지. 너무 걱정하지 마.”

밥상을 들였냐고 물었지, 드셨냐고 물은 건 아니니까. 나는 그리 합리화하며 시선을 피했다. 비록 사위가 깜깜해져서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밥상을 들인 건 맞았다. 한술 뜨기도 전에 위가 뒤틀리고 쥐어짜이는 것처럼 조여서 문제지.

나는 일어난 게 무색하게 다시 쓰러져 수십 개의 바늘이 찌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복통을 견뎌야 했다. 오늘은 기필코 죽이라도 넘기시게 하겠다는 각오로 온 수라간 궁인도 내가 식은땀을 뚝뚝 흘리는 것을 보고 황급히 의원을 부르러 달려갔다. 간신히 침을 다 맞고 나자 산보라도 좀 하시라는 의원의 잔소리에 못 이겨 달밤에 산책을 나온 것이었다.

다행히 주몽은 미심쩍다는 낯을 지우진 않았지만 캐묻지도 않았다. 주변의 궁인을 물려서 다행이었다. 아니었더라면 억울해서라도 진실을 고해바치고도 남았을 테니. 나는 안도의 숨을 삼키며 내 손목을 만지작거리는 그에게 얌전히 팔을 내주었다.

그는 툭 튀어나온 뼈를 짚어가다 돌연 깍지를 꼈다. 붓만 잡아 보드라운 손바닥과 무기를 잡아 거칠고 투박한 손바닥이 맞닿았다. 그 상태로 잠시 침묵하던 주몽은 조용히 입을 뗐다.

“암암리에 태령이 절 쫓아내려 한다는 소문이 돌더군요.”

“……그래?”

태령이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결국 그는 주몽을 이 나라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만들 작정인 모양이었다. 어쩌면 온갖 이유를 들어 궐 대문에 목을 매달지도 모르지. 그랬다간 당장 하늘에서 천벌 같은 벼락이 칠 테지만.

나는 하늘의 보호를 받는 아이를 물끄러미 보다 작게 웃었다. 그럼에도 기어코 걱정이 들고 마는, 스스로를 향한 자조였다. 그가 그런 나를 보다 초조한 듯 혀를 내어 마른 입술을 적셨다.

“떠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응. 그런 것 같아.”

“이번에는 묻지 않으십니까?”

무엇을 말하냐고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이미 어느 쪽으로도 후회하고 말 길을 스스로 선택할 용기조차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주몽은 그 순종하는 빛에 도리어 흐릿한 낯이 되었다. 나는 쉬이 열리지 않는 입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시야에 가죽 목화에 감싸인 발이 담겼다. 어느새 그의 키만큼이나 쑥쑥 자란 발을 보다 불쑥 치솟는 걱정을 입에 담았다.

“발은 괜찮아? 그때 찻주전자.”

“아……. 정말.”

그 순간 주몽이 못 이기겠다는 듯 웃음을 닮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깍지를 끼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여러 번 쓸어내렸다.

다시 드러난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결심이 선 듯했다. 그가 말을 몇 번 고르더니 축 내리깐 목소리를 냈다.

“형님께서 하신 말씀, 여러 번 곱씹어 봤습니다.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진 않더군요. 이곳이 소중하다 하셨지만 제게 먼저 함께 가주시겠다 하신 분은 도리어 형님이셨고……. 저는 형님 외에 어떤 것에도 미련을 둬 본 적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원래는 절대 안 된다 못을 박으러 찾아뵀습니다. 제게 오지 않으실 거라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꾸만 불안한 바람이 스며드는데, 이러한 곳에 제 직감이 빗나간 적은 드물어…….”

그가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최근 주몽이 저지른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확실히 나에게만은 순하게 굴었던 그가 할 행동들은 아니었다. 내 애매모호한 태도가 그의 원인 모를 불안과 초조함에 기름을 부었던 게 틀림없었다.

주몽은 아직까지도 맞잡은 손에 힘을 꾹 주더니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나는 여러 번의 망설임을 묵묵히 기다렸다. 내 얼굴을 꼼꼼히 살피는 눈길이 와 닿았지만 이제 더 숨길 것도 없었다. 그 시선을 몇 번 받아내다 다시 그의 발을 쳐다보았다. 내 시선을 따라간 그가 짧게 웃음을 터뜨리며 내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하지만 형님은 이리 다정하셔서 또 제 마음을 흐리십니다.”

다시 고개를 든 그는 드물게 패배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다릴 테니 늦지 않게만 와주십시오.”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그토록 ‘바랐던’ 말을 들었다. 멈췄던 운명의 돌이 기울어지는 경사면을 따라 가열차게 굴렀다.

“다만 마지막까지 약조를 지켜주시는 것으로 제 불안을 잠재워 주시겠습니까?”

그 끝에 추락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아아.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벌어진 입에서 웃음이 실실 샜다.

나는 이게 그가 내밀 수 있는 끝임을 알아차렸다. 그 스스로도 말했듯이 주몽은 감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내게 마지막 밤을 내세웠겠지만 이 역시 약조를 마치면 내가 그에게 갈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놓아줄 그가 아니었다.

그래. 이렇게 될 운명이었나보다. 그 웃기지도 않은 신의 언약에 묶였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아예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품 안에 쏙 들어오던 알을 살렸을 때부터 나는 이 운명에 깊게 개입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수면에 비친 달이 참으로 하얗고 동그랬다. 그 모습을 보자 아까부터 자꾸만 새어 나오던 웃음이 그대로 터져버렸다. 결국 나는 손뼉을 치고 허리까지 꺾어가며 웃었다.

짝, 짝짝. 손바닥이 부딪히며 건조한 마찰음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다 딱딱하게 굳은 주몽의 얼굴을 마주하며 더없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러자.”

작게 새어 나온 긍정의 대답에 그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러고도 나는 작게 키득거리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갑자기 기분이 들뜨고 머리에 천이 한 겹 덮인 것처럼 이지가 흐려져 참을 수가 없었다.

덩달아 몇 번 짧게 미소 짓던 주몽의 입가가 점차 불안으로 물들어갔다. 그는 참지 못하고 내게 물었다.

“형님.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 저 달을 봐. 우습지 않아?”

“…….”

주몽이 내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는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을 보다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침묵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실실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내가 저 달이라고 생각했거든.”

“어째서입니까?”

“저 그림자를 봐봐. 호수와 하나같잖아.”

이번에는 달그림자를 가리켰다. 그의 눈동자가 수면 위로 옮겨갔으나 침묵은 여전했다. 나는 전혀 우습지 않다는 그 얼굴을 뻔히 보고도 손가락을 까닥였다.

“사실 둘은 정말 다른 존재인데. 그래서 나도 호수에는 잠깐 비추는 거라고, 해가 뜰 때가 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라질 수 있을 줄 알았지.”

“…….”

“근데 사실 나는 저 달그림자였던 거야.”

나는 그의 손을 떼어내고 호수 근처에 조경을 위해 놓여 있던 돌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 하나, 둘 던지자 수면이 돌이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넓게 일렁였다.

“호수가 일렁거리면 같이 일렁이는…….”

“형님.”

단단히 굳은 목소리가 나를 낮게 불렀다. 그를 무시한 채 남은 돌을 모조리 던져 넣었다. 호수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거세게 흔들렸다. 그 혼란 속에 달은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나는 그저 하얀 물이 되어버린 것 같은 모습을 빤히 보았다.

이제 정말로 이 세계에 남게 되었다. 저렇게 잉크 탄 물처럼 섞여버린 달그림자가 내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나는…. 아니 저 달은….

갑자기 어떤 충동이 내 가슴을 두방망이질 쳤다. 나는 그대로 호수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형님!”

뒤에서 울리는 잔뜩 높아진 목소리도 웅웅거리는 이명과 섞여 흐리게 들렸다. 다급히 따라 들어온 주몽이 내 팔을 잡아챘지만 어떻게 뿌리쳤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끊임없이 호수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달빛이 비쳤던 곳에 도착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는 그곳에 멈춰서서 오목하게 모은 손으로 끊임없이 물결을 떠냈다.

“달… 달이….”

내 어깨를 잡다 밀려나길 반복한 주몽이 내 허리를 감싸 안아도, 그 팔에 이끌려 뭍으로 끌려가는 중에도 나는 손을 휘젓고 팔을 벌려 물을 가득 떠 올렸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팔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은 하얀 빛을 머금고 있음에도 도저히 하나로 합쳐지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무리 애써도 달이 꺼내지질 않아. 아무리 애써도! 왜!”

나는 절규하며 다시 손을 뻗어 수면을 움켜쥐었다. 뺨에는 언제부터 흘렀는지도 모를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비린내가 나는 숨은 삼켜도 삼켜도 부족하기만 했다.

“나는 왜 달이 될 수 없는 거야? 왜 이렇게 잡을 수도 없이 섞여서, 어디에도 온전한 나를 바랄 수 없게 해?”

물을 아무리 퍼내도 달그림자는 마치 호수의 일부분처럼 남아 있었다. 그게 못내 부여를 떠나지 못하는 나 같아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마구 그것을 퍼냈다.

내 거센 발버둥에 그가 결국 멈추어 섰다. 우리는 호수 가운데 둥둥 떠서 호흡을 골랐다. 주몽이 잔뜩 불안한 얼굴로 나를 달랬다.

“제발, 형님. 해가 뜨자마자 호수를 모두 메우라 하겠습니다. 몸이 너무 찹니다. 어서 나가야….”

“아니야…. 호수가 무슨 죄가 있겠어.”

호수를 메운다는 그의 말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부여는 죄가 없었다. 있다면 오만하게도 제가 달인 줄 알았던 달그림자에 있었다. 나는 어느새 잠잠해진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이대로 가라앉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저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다 숨이 부족해 들이켜다 보면 어느새 내 숨결 안에도 달이 차오르지 않을까. 그렇게 마지막 숨으로 달을 삼켜버리면 속에 가득 들어찬 그리움이 비로소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런데 고작 그렇게 모든 걸 품을 수 있다면…….

나는 왜 살아 있는 걸까?

그건 아주 사소한 의문이자 충동이었다. 나는 그대로 내 몸을 아래로 가라앉혔다. 내 허리를 둥글게 감싸 안은 두 팔은 내 반항이 잦아들며 긴장이 풀렸는지 느슨한 상태였다. 그 틈을 타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수면 아래로 잠겨 들었다. 달빛이 닿지 않는 수면 아래는 새카맸다.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이 수면 아래를 언젠가 보았던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분명…….

그 즉시 머금고 있던 모든 숨을 와그르르 토해냈다. 그것도 모자라 뻐끔거리며 폐에 남아 있던 기포들도 모조리 빼냈다.

금세 숨통이 옥죄어 왔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조금만 더. 나는 흐릿해지는 시야를 애써 붙들었다. 위에서 하얀 물보라가 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발버둥을 치며 나를 향해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피해 도망갔다.

조금만 더 한계에 다다르면 분명 그리웠던 세상이 눈앞에…….

“푸하—! 콜록, 콜록, 켁, 으….”

그 순간 강한 힘이 내 팔을 붙잡고 수면 위로 끌어당겼다.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켜며 물을 토해냈다. 온 얼굴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려 기침을 그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간신히 눈을 뜨고 나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하얗게 질린 주몽의 얼굴이었다. 그는 달빛보다 새하얀 얼굴로 나를 붙들고 고함을 질렀다.

“정녕 미치신 겁니까!”

“아냐. 해야. 해야. 내 말 좀 들어봐. 저 아래에….”

“저 아래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형님 말고는!”

잡힌 어깨가 탈골될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그는 공포에 질려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격한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정말로 죽어가고 있진 않았다. 난 그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을 뿐인데.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몰아붙이는 그가 의아하기만 했다.

“아, 그렇지. 미안해.”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그래, 그가 나를 그렇게 다급히 건져낼 만도 했다. 나는 생긋 웃으며 그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내 태평한 반응에 움칫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그의 양 뺨을 단단히 붙들고 아래로 끌어 내렸다.

“너와의 약조를 지키기로 했는데. 그치?”

그게 아쉬워서 나를 붙잡은 게 분명했다. 나는 쨍하니 깨질 것만 같은 그의 눈을 보다 고개를 깊숙이 기울였다. 차게 얼어붙은 입술이 맞닿고 뜨거운 호흡이 오갔다. 그는 평소와 달리 가만히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비린 맛이 나는 입술을 핥고 축축한 안쪽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굳어 있는 살덩이에 혀를 얽는 동시에 두 손으로는 내 옷고름을 잡았다. 당겨서 푸는 것엔 망설임이 없었다. 다만 축축하게 젖은 옷이 어깨 너머로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바르작대는 날 억지로 떼어낸 주몽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형님, 갑자기 무슨……!”

무엇이냐니. 나는 도리어 눈을 크게 떴다. 당연히 그와 밤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말을 내뱉기도 전에 드러난 어깨에 그의 손이 닿았다. 그 순간 나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닿은 살갗에서부터 개미가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우욱, 먹은 것 없는 속에서 질리도록 본 위액과 함께 호숫물이 역류했다.

분명 내가 방금 전까지도 붙잡고 입을 맞추던 사람의 손이었음에도 이상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진 나는 온몸으로 그를 밀어냈다. 깊은 속에서부터 무언가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은 본능에 가까웠다. 나는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 마! 제발! 건들지 마!”

“…형님이 원치 않으시면 하지 않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그가 표정 없이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 말에 더 강한 공포심을 느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차라리 억지로 해줘. 나에게 선택권을 주지 마. 이제껏 하던 대로 날 밀어붙이고 어쩔 수 없는 운명 속으로 끌고 가줘.

걷잡을 수 없이 떠오른 말이 입술 안에 갇혀 맴돌았다. 방금 전 접촉이 그와 닿게 되면 벌어질 모든 일들에 대한 공포를 가져왔다면 이번에는 내게 여지를 줌으로써 행해질 모든 일들이 공포가 되어 나를 덮쳤다.

나는 잔뜩 짓눌려 신음을 뱉어냈다.

“으…….”

“형님, 형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주몽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그러나 대답해 줄 정신도 없었다. 한계에 다다른 온몸이 덜덜 떨렸다. 뒤집어진 속이 꽉 조여들며 또다시 위통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파들거리는 팔로 배를 감쌌다. 힘없이 고꾸라지는 상체를 주몽이 급히 받아 안았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거세게 문질렀다. 이젠 머리마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춥고 또 추웠다. 설한에 얼음 조각이 되어 정을 맞는 것 같았다.

“형님!”

끝내 고통을 이기지 못한 몸이 축 늘어졌다. 높낮이가 다른 두 목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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