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7/27)
  • 14.

    나는 그 질문을 평생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 아들. 기억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단다.

    엄마는 유독 ‘내 아들’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남과 공유하지 않는 온전한 제 것이라는 듯, 내 피의 모든 근원은 그녀뿐이라는 듯.

    -네 아빠처럼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 말아.

    한참 커서야 알았다. 내 아빠는 임신한 엄마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을. 그는 빈말로도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렸던 내 엄마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만 주어진 시간을 다 써야 했고, 눈물이 말랐을 땐 이미 시기가 늦어 있었다.

    -할 수 있지? 네 결과에 꼭 책임을 지기로 엄마와 약속해.

    그녀는 핏덩이나 다름없는 나를 껴안으며 그와 정반대인 사람으로 길러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다정하고, 사람을 내버리지 않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으로.

    직장에서 돌아온 엄마가 술을 한 잔 두 잔 마실 때면 나는 문을 닫고 공부하며 다짐했다. 뭐든 내 행동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럴 수 없을 바엔 그 원인에 섞이지 않겠다고. ‘내 엄마’와 ‘내 동생’ 가람이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지?

    ‘절 이렇게 만든 건 형님이십니다.’

    갑자기 나타난 주몽이 나를 붙잡고 나직이 윽박질렀다. 항상 까만 밤하늘 속 별처럼 빛나던 두 눈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절 두고 가실 생각이셨습니까?’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가 따라와 나를 벽으로 밀쳐 세웠다. 그 앞에선 평생을 품고 살았던 염원도 가닥가닥 쪼개져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나, 난 돌아가야 할 곳이…….’

    ‘무슨 낯짝으로?’

    높낮이가 다른 두 개의 음이 겹쳐 들렸다. 거대하게 버티고 선 주몽의 뒤로 ‘엄마’가 고개를 내밀었다. 만면에 비웃음을 띤 그녀가 검지를 세워 내 가슴을 쿡쿡 찔렀다.

    ‘우리가 너를 받아줄 것 같니?’

    ‘엄마’가 소리 높여 깔깔 웃었다. 유리창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관자놀이를 뚫고 뇌를 헤집었다.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이유는 오직 ‘내 아빠’와 다른 사람을 만들기 위한 오기였다고. 주몽을, 부여를, 이곳을 버리는 나는 그 남자와 다를 바가 없다고.

    시야가 흐려지고 턱에 힘이 빠졌다. 그것만 바라보고 버텼던 목표가 평생의 믿음과 충돌했다. 돌아가고 싶었다.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돌아가더라도 ‘아빠’와 같아진 내게 살 가치가 있을까?

    그 순간, 직전까지 나를 조롱하며 협박하던 주몽이 얼굴을 바꿨다. 눈꼬리가 내려가고 까만 눈에 물기가 고였다. 내가 익히 아는 순한 표정을 지은 그가 애처롭게 애원했다.

    ‘형님. 저를 두고 어떻게 가십니까. 가지 마십시오. 저는 형님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내 옷자락을 잡은 주몽이 천천히 무너졌다. 무릎이 땅에 닿고 고개가 툭 떨어졌다. 잔뜩 웅크린 그는 붙잡을 새도 없이 까만 잿더미가 되어 부서졌다.

    쏟아지는 가루들 틈에서 고개를 든 것은 어린 주몽이었다. 아이는 비틀거리며 내 옷자락을 잡고 섰다. 자라서 본 다섯 살의 해는 너무나도 작았다. 아이가 언젠가 본, 아주 작고 여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누가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알을 보듬던 나부터 그의 성기를 받고 헐떡이는 나까지 과거의 행적들이 모조리 스쳐 지나갔다. 숨통이 옥죄어 왔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와중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나는 참지 못하고 허리를 숙였다. 내 입에서는 까만 덩어리가 토해져 나왔다. 진득한 액체로 뒤덮여 있는 그것은 시퍼렇게 빛나는 종잇조각들이 뭉쳐진 덩어리였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아. 저게 ‘종이’구나. 내가 찢어 삼켰구나. 아이의 운명을 이렇게 바꿨구나. 내 탓이야. 내가 원인이야.

    ……전부 내 책임이야.

    그때 ‘엄마’가 괴물처럼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날카롭게 솟은 이가 딱딱거렸다.

    ‘책임져. 책임져. 책임져. 책임져. 책임져…….’

    ***

    “마리야.”

    직전까지 힐금힐금 곁눈질하던 아이가 정작 내 물음에는 고개를 팩 돌리며 못 들은 척을 했다.

    나는 마리가 건성으로 휘두르는 칼 궤적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렸다. 손에는 의원이 뽑아주고 간 바늘이 있었다. 손가락 길이만 한 이 대바늘은 방금 전까지 말의 혀 아래 박혀 있던 것이었다. 매일 흘렸을 침과 피로 까맣게 부식된 쇠가 현실감 없었다.

    주몽은 잔인하다면 잔인한 이 짓을 마리가 저질렀다고 했다. 오히려 그는 추궁하는 나에게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자신을 의심할 수 있냐며, 자신은 못 본 척한 죄밖에 없다고.

    그마저도 다 형님께서 생각이 있겠거니 한 추측에서 한 행동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는 그 덕분에 명마를 얻게 되었으니 나 역시 이것을 예측하고 벌인 게 아니냐는 추궁에 도리어 내가 꽁무니를 뺐다.

    평소라면 내 오해를 바로잡은 것에서 끝났을 것이다. 누가 바늘을 박아넣었든 내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과정이야 ‘종이’에 쓰인 운명이 이끌었을 테니 결과만 좋다면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갔을 터였다.

    그러나 근간이 무너져 내린 지금,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모든 행동들이 다르게 보였다.

    마리는 왜 말의 혀에 바늘을 박아 넣었을까?

    아이는 말을 소중히 여겼다. 매번 갈 때마다 마구간에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귀찮다면서 말을 꼼꼼하게 빗질해 주었고 툴툴거리면서도 마실 물을 챙겼다. 절대 이유 없이 그런 행동을 할 아이가 아니었다.

    원인이 궁금했다. 내 생각 없는 행동이 불러온 또 다른 나비효과인지 확인해야만 했다.

    “마리야. 이거 네가 한 짓이야?”

    나는 대답이 없는 아이에게 가만히 바늘을 내밀었다. 돌리지 않은 직구에 마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부정하려는 듯 입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마주친 눈이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도 내 눈에서 내가 이미 알고 있음을 읽어냈다. 칼자루를 꽉 쥐었다가 놓은 그가 고개를 푹 떨구고 중얼거렸다.

    “예. 제가 그랬어요.”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몸이 떨렸다. 이미 금이 간 세상이 조금씩 흔들렸다. 미미했던 두통은 어느새 옆머리를 쾅, 쾅 울리고 있었다. 나는 휘청거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바싹 마른 입술이 간신히 열렸다.

    “왜?”

    “…저하께서 그 말을 예뻐하셨으니까요.”

    “…….”

    “금방 빼 주려고 했어요! 그렇게 하면 저하의 관심이 사라질 줄 알았어요. 말이 아프면, 그럼 쓸모가 없어지니까…….”

    나는 말을 잃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저 가치관을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동시에 드러난 진실이 머릿속을 후려쳤다. 주몽의 감정만이 내 행동이 낳은 결과가 아니었다. 또 다른 의미를 가진 하나의 결과가 울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저는 바라봐 주지도 않으면서, 그 말은 소중히 하시는 게 순간 너,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요…….”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나는 어디에 얼마나 손을 댄 것일까. 고작 몇 년 같이 지낸 마리가 이 정도인데 오이는, 협보는, 그리고 태자궁의 궁인들은 얼마나 내 존재에 얽매여 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안타까움과 절망이 뒤섞여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우습게도 지금 가장 묻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내가 뭐라고 그런 위험한 짓까지 해…….”

    “옛날에 저도 입 속에 바늘을 심고 광에 갇힌 적이 있었는데, 그리 위험한 일은 아니에요. 지, 진짜 좀 지나면 견딜 만해요…….”

    그가 줄줄이 말을 잇다 내 얼굴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나는 무시무시하게 변해 있을 게 분명한 낯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이 순간만큼은 허 대감을 죽였다는 그 다혈질 사내가 고마웠다.

    나는 마리가 자수를 하면 따끔하게 혼을 내려던 계획을 버리고 아이를 도닥였다. 보통은 같은 생명이라는 점을 들어 역지사지해 보라고 가르치는데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마리는 영문은 모르지만 상황이 유리하게 변했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그는 주변을 몇 번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곧장 달라붙었다. 이젠 제법 커서 나와 마주 안는 수준이었다. 그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주자 아이가 똥그란 눈으로 물었다.

    “근데 무슨 일 있으세요? 전부터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별일 아니야. …이번엔 참말로.”

    나는 또 뾰로통하게 변하는 마리의 얼굴을 보고 급하게 덧붙였다. 세 번이나 거듭해 말한 다음에야 마리는 내 말을 믿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 말과 달리 내 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주몽과 두 번째 밤을 보낸 날, 나는 새벽에 깨자마자 속에 든 것을 모조리 게워냈다. 긴장한 탓에 끼니를 걸러 노란 위액만 뚝뚝 떨어졌지만 가장 먼저 든 것은 안도감이었다. 아. 검은 덩어리가 아니구나.

    하지만 그 작은 안도감은 곧 거대한 불안감에 잡아먹혔다. 꿈에서 깨어났음에도 귓가에는 여전히 ‘엄마’의 말이 웅웅거렸고 팔다리는 추라도 단 것처럼 무거웠다. 잿더미에서 일어난 어린 해가 아직도 날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만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꿈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이곳에 없고 주몽은 성인이 되어 내 곁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저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엄마는 내게 언제나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했다. 공부든 운동이든 다 필요 없으니 오직 내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라고.

    그 말은 자연스레 내 가치관이 되고 인생의 이정표가 되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생각해보면 당연히 가슴에 새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이곳을 버리고 떠난다면 내 아빠와 다를 바가 뭐지?

    엄마의 단 하나의 바람조차 들어주지 못한다면 내가 돌아가더라도 엄마의 얼굴을 떳떳하게 볼 수 있을까. 아빠 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낳았는데, 그 바람을 흐려버린 나는 존재해도 괜찮은 아이인 걸까.

    반평생 바라온 목표와 평생을 새겨온 가치관이 부딪히고 뒤엉켰다. 그런 날 끌어안고 끝까지 달래려 한 사람은 주몽이었다. 하지만 그를 보고 있으면 내게 연심을 고백하던 장면이 떠올라 더욱 괴로웠다. 그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음에도 이기적인 나는 내가 저지른 일들의 결과를 아직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었다.

    결국 의원을 부르겠다는 그의 말도 거부하고 태자궁으로 돌아갔다. 내 고집을 꺾지 못한 그는 그 새벽에 나를 업어다 주며 몇 번이나 등을 돌아봤다. 나는 잠든 척 등에 얼굴을 파묻고 그 눈을 피했다.

    이후로 몸살처럼 팔다리가 무겁고 두통이 심했다. 끼니때마다 속이 뒤집히는 건 예사였고 밤이면 꿈자리가 사나워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눈을 뜨면 ‘감히 돌아가도 될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고 눈을 감으면 반복되는 꿈속에서 ‘엄마’가 귀에 속삭였다.

    마리를 보러 온 것은 어쩌면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이 주몽뿐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놓지 못해서였다. 그 희망이 절망으로 바뀐 지금, 나는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도 될까? 이 세계를 엉망진창으로 뒤섞어 놓고, 내 운명의 실에 여럿을 엮어놓은 내가 감히 떠나도 될까?

    내 판단에 부여했던 모든 정당성이 사라지며 ‘돌아가야 한다.’라는 근간마저 흔들리는 순간, 나는 줄이 끊긴 꼭두각시처럼 무너져 내렸다.

    ***

    “봄이 오려나 봅니다.”

    태령이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를 매만지며 말을 건넸다. 그의 말대로 앙상하기만 했던 나뭇가지에는 조금씩 나뭇잎이 움트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맞장구칠 기력도 없었다.

    그날 마리를 만나고 돌아온 나는 그대로 태자궁에 쿡 틀어박혔다. 그동안 머릿속을 정리하며 결론을 내리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도무지 선택지를 하나로 좁힐 수가 없었다. 남는다와 떠난다, 합칠 수 없는 두 가지가 명백하게 대립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기 일주일째, 의원이 오늘도 소득 없이 돌아가기가 무섭게 기별이 도착했다. 같이 산책이나 하자는 태령의 연락이었다. 마음 같아선 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세상일이 그렇듯 몇 시간 뒤인 지금 나는 그와 함께 궐을 거닐고 있었다.

    솔직히 마태령이 이렇게 빨리 나를 다시 보자고 할 줄 몰랐다.

    마구간에서 주몽의 무례한 말에 그가 보였던 반응은 틀림없이 수치심을 기반으로 한 분노였다. 그러나 오늘의 그에게선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흥미와 만족감만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저 만족감은 분명 지난번 내 굴복을 완전히 확인했을 때 생긴 것이겠지. 내가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부끄러움을 느꼈을 때를 생각해보면 이렇게 빠른 극복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렇게 대답 없는 대화가 몇 번 오가자 태령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가 나를 위아래로 샅샅이 훑어보았다. 나는 등을 뻣뻣하게 굳혔다. 정신이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지금 내 태도는 그가 충분히 문제 삼을 만했다.

    그러나 그는 내 예상과 달리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뭐?”

    “아니, 안색이 안 좋으셔서요. 어릴 적에도 쪼끄마한 애가 무슨 그리 생각이 많은가 했는데. 그때랑 똑같으십니다, 지금.”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뜻밖의 친절이었다.

    물론 나는 됐다고 넘기려고 했다. 우리가 고민을 나눌 사이도 아니고. 가능하면 멀어지고 싶은 사이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인생사 뭐 있냐는 저 나태한 얼굴을 보자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어차피 내 고민은 주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는 유모나 이 일에 깊게 관여되어 있는 주몽은 당연히 불가능했고, 같은 이유로 오이나 마리, 협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태령이라면 나를 적당히 알고 큰 호의가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마음이 기울었다. 누구보다도 객관적인 해결책을 주되 이 산책길이 끝나면 잊을 것 같았다.

    “……사실 하나가 있는데. 아, 별건 아니고.”

    결국 나는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내 상황을 에둘러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누굴 책임져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어.”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령이 전혀 이해가 안 간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앞뒤를 다 잘라먹은 설명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내가 덧붙일 말을 고르는 사이 나름대로 상황을 추측한 그가 폭탄을 던졌다.

    “상대가 애라도 뱄습니까?”

    “뭐? 미친, 아니야!”

    놀라운 사고방식에 잘 쓰지도 않던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더니, 과연 그 짓을 하다 쫓겨난 사람다웠다. 그러나 내 경악한 얼굴에도 그는 태연하게 팔짱을 꼈다. 그러더니 개의치 않고 또다시 제 생각을 밀어붙였다.

    “사람 사이에 책임질 일이 무어 있겠습니까. 남녀 사이밖에 더 있나. 그럼 그냥 밤만 보내셨습니까?”

    “그, 그런 거 아니라고…….”

    아. 말 더듬었다. 나는 낭패감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도 모르게 주몽이 떠오른 것이 화근이었다. 실제로 잤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 들켜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다.

    역시나 내 반응을 본 태령은 남녀 문제로 확신하는 듯했다.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휘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내놓았다.

    “웬만하면 후궁으로라도 들어 앉히십시오. 신분이 꽤나 낮은 여자인 모양인데 저하 같은 분이 그런 거 신경 쓰고 헤어지시면 나중에 골치 아파집니다.”

    “나 같은 사람?”

    “왜, 몸 따로 마음 따로 안 되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모르냐는 투였다. 나는 발끈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그래? 나도 몸이 간다 하여 마음까지 간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웬만하면 끼고 싶지 않았지만 이 주제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성관계를 하고 사랑에 빠진다면 왜 엄마 홀로 낳은 아이가 그렇게 많고 한 번 자고 나니 태도가 바뀌었다는 고민글이 티비에 나올까.

    나는 씩씩거리며 억울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태령은 반박을 하는 대신 대놓고 비웃으며 나를 무시했다.

    “물론 몸 좀 섞었다고 꼭 마음까지 가는 건 아니지요. 하지만 저하 같은 분은 그게 안 돼요. 제가 이래 봬도 사람 꽤 많이 만나고 다녔는데, 백이면 백 후회하더이다.”

    “……하지만 난….”

    순간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여유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의 말에서는 수많은 잠자리를 가진 자에게서만 나오는 진한 경험의 냄새가 났다. 그가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신이 나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저하께선 정이 많지 않으십니까. 아마 내일 당장 저하께서 예뻐하는 그 꼬맹이가 뒤지면 평생을 그리워하고도 남으실 테지요?”

    “…….”

    “그런 분이 애초에 밤을 보냈다는 것부터가 결론이 난 것 아닙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확신보다 혼란이 더 큰 내 얼굴을 본 태령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럼 이렇게 해보지요. 저하께선 저 궁인을 당장 오늘 밤 침실에 들이실 수 있으십니까?”

    그가 가리킨 것은 저 멀리 지나가고 있는 한 궁인이었다. 멀리서 봐도 눈에 들어올 정도로 탁월한 미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가정을 해보기도 전에 질색했다. 태령이 거 보란 듯 소리를 높였다.

    “보십시오. 저라면 넙죽 받아먹겠지만 저하께선 마음이 없으니까 못 하시는 겁니다. 이런 마당에 무슨…. ……잠시만, 그럼 지금 그 여인에겐 마음도 없다고 생각하시면서 선뜻 밤을 보내셨다는 겁니까?”

    나는 멍하니 그가 북 치고 장구 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미 신이 난 그는 ‘이럴 수가’ 하고 연신 탄식을 내뱉으면서도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이거, 이거. 제 친우 중에 딱 그런 사내가 있었는데. 설마 태자 저하께서도 이미 마음이 갔는데 자각을 못 하신 거 아니십니까?”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잠자리가 가져다주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성관계를 해서 사랑에 빠진다면 내 아빠는 왜 엄마를 버리고 도망갔을까. ‘내 동생’ 가람이의 ‘아빠’는 왜 바람이 났을까. 잠자리는 마음을 동반하지 않는다. ‘몸이 가면 마음이 간다’라는 말은 내가 제일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주몽의 무리한 요구에도 쉬이 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제로 몰아쳐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던 상황은 태령의 말에 주물러지고 뜯어져 재조합되었다. 나는 이미 지난 십 년간의 행동이 실수로 판명 나며 스스로의 판단에 대한 신뢰성을 잃은 상태였다. 그 틈을 교묘하게 파고든 태령의 판단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내 또 다른 가치관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나는 정말 주몽에게 아무런 사랑을 느끼지 못했나?

    굳이 내가 느끼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정의한다면 나는 가족애와 같다고 생각했다. 하다못해 집에서 며칠 기른 짐승에게도 생기는 게 정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애지중지 길렀는데 애정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어느 부모도 자식에게 다리를 벌리고 쾌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럼 나는 뭐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의 근원은 오직 책임감뿐이 아니었던가?

    머릿속이 낯선 혼란과 충격으로 가득 찼다. 성애와 친애의 간극이 무너지고 두 물감이 섞여 탁한 회색을 만들었다.

    뭐라고 더 말하려던 태령은 내 얼굴을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이어진 말투는 조금 더 차분해져 있었다.

    “말씀드렸지만 적당히 상황 보다가 꼭 곁에 들이십시오. 저하께선 한번 미련 남은 채로 보냈다간 상사병으로 천 일을 앓아도 놀랍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책임을 지지 못할 상황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잖아.”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집을 향한 미련은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차마 그 상황이 내 이기적인 바람 때문이라곤 말할 수 없었다.

    태령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왕이 될 내 위치와 고분고분해진 그간의 태도 변화로 내가 망설이는 이유를 미루어 짐작한 것 같았다.

    “정 마음에 걸리면 달리 살 방도를 마련해 주십시오. 보통 좋은 혼처를 알아봐 준다거나, 집이나 땅을 줘서 잘 살게끔 하더군요.”

    그런 식으로 책임감을 덜어도 되는 걸까? 다 필요 없고 나만 있으면 된다는 아이인데. 나만 있으면 반역도 개의치 않겠다는 아이인데.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뭘 할 수 있지?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따라가거나, 돌아가거나. 누가 봐도 이 상황에서 내가 선택해야 할 선택지는 분명했다. 내가 저지른 일인 이상 주몽을 따라가서 날 필요로 하게 된 자들의 곁에 있어 줘야 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내 운명의 실이 그들과 단단히 엮였다고 해도 이 부여에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인기척을 조금만 죽여도 궁인들로 가득 찬 태자궁을 홀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온갖 약재를 안겨주는 왕비님은 내가 그녀의 아들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가람이도, 내가 데리고 온 세 벗도, 하다못해 주몽도 내가 ‘태자’인 줄 알고 있었다.

    그들 곁에 남아 있는다고 해도 거짓된 몸으로 존재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내 자리도 없는 이곳에, 내가 얽어놓은 실 하나만 붙들고 공중에 떠 있는 불안한 삶을 얼마나 더 지속해야만 할까.

    두 다리를 붙이고 서 있을 수 있는 내 세상이 그리웠다. 돌아가고 싶었다. 가족, 친구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

    숨이 점점 가빠왔다. 입을 막고 휘청거리자 태령이 놀라며 나를 붙들었다. 하지만 내 몸을 추스를 여유도 없었다. 식은땀이 확 났다가 오한이 들었다.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귀에 대고 북을 치는 것 같았다.

    ‘……그냥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순간 내 속에서 그리움의 탈을 쓴 악마가 속삭였다.

    태령이 적당한 방법도 말해줬잖아. 우선 돌아갈 수 있을 만큼 발목에 걸린 책임의 무게를 덜어내면 안 될까. 평생 속죄하더라도 ‘내 자리’로 돌아가면 정말 안 되는 걸까.

    한번 떠오른 유혹은 마른 들판에 붙은 불처럼 거세게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막다른 길에 몰린 사람처럼 이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어차피 평생 털어낼 수 없는 책임들이었다. 모든 걸 책임지고자 하면 나는 절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저지른 결과를 그대로 둬도 절대로 떠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지금도 꿈속에서 지겹게 들었던 엄마의 말이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내가 저지른 결과를 어느 정도 수습해야 했다.

    내가 불러온 가장 큰 결과는 주몽의 연심이었다.

    그다음은 마리나 오이, 협보가 미처 털어내지 못한 나에 대한 정. 다행히도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주몽이었다. ‘영웅의 벗’ 퀘스트 당시 그들의 충성이 옮겨가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니 주몽이 내게 품은 것만큼 거대한 마음은 아닐 터였다. 그들의 마음마저 커다랗다면 나는 평생 발목의 족쇄를 덜어내고 떠날 수 없었다.

    하지만 주몽은 그들과 달랐다. 그러니 주몽의 연심만 끊어내면 된다.

    때마침 좋은 핑곗거리도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태령을 밀어내는 척 시스템 창을 불러왔다. 가운데에는 가장 최근 퀘스트가 떠 있었다.

    [도전] 후예를 만들어라

    ‘고구려’의 건국 왕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당신. 그 뒤의 후예까지 만들어 보고 싶지 않나요? 나중에 ‘주몽’을 찾아가게 될 ‘유리’를 탄생시켜 주세요. ‘주몽’이 떠나기 전, 그를 알아볼 수 있는 단서를 남겨두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기한 : 다음 퀘스트 성공 전까지

    성공 시 보상 : ‘고구려’의 안정적인 미래 확보

    실패 시 결말 : ‘고구려’의 후계자 문제 발생 가능성 증가

    ‘준마가 필요해’ 퀘스트의 성공과 함께 나타난 도전 퀘스트였다. 기한을 봤을 때 다음 퀘스트는 주몽을 남쪽으로 보내는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네 번의 밤을 보내기 전에 서둘러 떠나보내려 하고 있는데 촉박한 시일 내 주몽을 혼인시키고 애까지 갖게 할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보상이나 결말도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덕분에 쳐다보지도 않고 넣어둔 지 오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이보다 더 적합한 방법은 없었다. 주몽의 혼인 주선이라니. 그의 마음도 끊어 놓고, 퀘스트도 해결하고. 일석이조였다.

    물론 사람 마음이니 완벽하게 돌릴 것을 기대하진 않았다. 그래도 내 에두른 거절임은 알아들을 터였다. 태령도 방금 제안했듯이 다른 인연을 추천하는 것은 너에게 관심이 없다는 뚜렷한 표현이었으니까.

    물론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 더 이상 밤을 보내지 않으려는 핑계냐고, 고구려로 건너오겠다 약속하지 않았냐고 묻겠지. 애초에 우리의 밤은 내가 고구려로 따라가겠다는 약속의 증표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그저 좋은 형의 위치로 따라가겠다고 설득할 생각이었다. 잠자리는 횟수가 아니라 행위 그 자체가 주는 신뢰가 컸으니 두 번이나 치렀다는 점에서 큰 반박도 하지 못할 것이다.

    “…….”

    사실 성공 여부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실패해도 연심을 끊어 놓는다면 그걸로 족했고, 만일 성공한다면 뜻밖의 이득일 뿐이었다. 나를 대신할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점에서 더 마음을 놓을 수 있겠지.

    그렇게 된다면 서둘러 신방에 밀어 넣고, 부인이 태기가 돌자마자 남쪽으로 내려보내면 딱 완벽할 것 같았다.

    나는 이참에 내 마음도 다잡았다. 태령이 사랑이니 뭐니 헛소리를 하는 것도 다 내가 주몽을 너무 오래 돌봐서 생긴 감정일 게 분명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애가 궁에서만 자라서 그런지 마음이 여리고 약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나 없이는 아니 된다는 소리나 해대고. 괜히 죄책감 때문에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지, 실상은 그저 보호 심리일 뿐이라고 재차 되뇌었다.

    하지만 이 방법마저 실패한다면……. 더 이상 내가 책임을 회피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지난 세월 동안 퀘스트를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번 역시 그럴 게 분명했다.

    나는 스스로 반복된 합리화에 잡아먹혔다. 그 방법이 가진 빈틈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태령은 열흘 뒤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며 약속을 잡고 갔다. 얼핏 듣자 하니 다른 귀족 중 내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 같았다. 내가 순순해진 꼴을 보았으니 본격적으로 정치에서 휘두를 생각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몇 달 후면 떠날 내겐 중요치 않은 이야기였다. 흔들리던 결심을 다잡고 나자 일 처리는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나는 우선 가득 쌓인 태자비 후보 명단을 꼼꼼히 살펴보며 몇 가지 기준에 맞춰 솎아냈다.

    아직은 장래가 확실치 않은 주몽에게 재능 하나만 믿고 딸을 맡길 정도로 진보적이며 무예에 관심이 많을 것. 너무 신분이 높으면 거절할 확률이 높으니 가문도 낮은 편이 좋았다. 주몽은 곧 부여를 배신할 테니 애국심도 크지 않은 게 낫겠지.

    “이 가문은 좀 어때?”

    “충성도는 높지만 든든한 뒷배가 되기엔 가문이 좋지 않습니다.”

    물론 정치에 관심을 끊고 산 내가 이 모든 속사정을 모조리 파악하고 있기란 어려웠다. 덕분에 가람이까지 불러서 자문을 구하며 후보를 골라내고 있었다.

    다행히 내가 하도 혼인을 안 하니 이젠 가문이 낮은 귀족 출신도 후보에 있었다. 나는 제법 쌓인 주몽의 혼처 후보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물론 신랑이 될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점은 나만 알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나의 열정적인 모습에 기뻐하는 왕비님께는 죄송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형님. 대체 왜 이런 기준들로 태자비를 골라내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어…. 안 돼.”

    그리고 입을 삐죽이는 가람이에게도. 기껏 도와줬는데 이유도 말해주지 않으니 심통이 날 만했다. 나는 그를 달래기 위해 서둘러 말을 붙였다.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 별다른 일은 없고?”

    “항상 똑같지요. 형님 건강을 제하면 염려스러운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몸에 신경 좀 쓰라는 잔소리가 줄줄이 이어졌다. 이미 유모와 의원에게서 한바탕 들은 소리였다. 아무래도 근래 들어 앓아누운 횟수가 잦다 보니 살이 빠져 더 약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도무지 뭘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어느 정도 할 말을 쏟아낸 가람이가 뿌듯한 표정을 짓더니 드디어 화제를 돌렸다.

    “요새는 마태령이라고, 예전 형님의 호위를 맡았던 귀족이 자주 찾아옵니다.”

    “마태령이? 왜?”

    “그저 소소하게 담소를 나누고 가던데요. 뭐, 나름 말이 통하는 부분도 있었고요.”

    질겁하는 내 반응에 가람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자세히 캐물으니 정말 신변잡기나 정치에 대한 간단한 대화만이 오간 듯했다. 귀족 자제들이 친분을 쌓을 때 흔히 나눌 법한 대화였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고민 상담이랍시고 떠든 이야기들을 어디 가서 얘기하지 않을까 겁이 났는데 의외로 정말 비밀은 지키고 있나 보다. 나는 둘의 예상치 못한 친분에 고민을 하다 적당히 말을 맺었다.

    “그래, 음…. 적당히 잘 지내.”

    “그 사람을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장기적으로 두고 봤을 때 친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좋아하지 않는 건 사실이었지만 내 개인적인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됐다. 물론 범죄는 충분히 모두가 꺼릴만한 사유 같긴 했지만 내가 태령을 피하는 건 온전히 그 때문만이 아니니까.

    나중에 왕이 될 가람이가 괜히 나 때문에 태령과 대립하기라도 하면 손해였다. 내가 지금 태령을 받아주고 있는 이유도 귀족과 척을 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혹시 이상한 말을 하면 무조건 무시해. 절대로 물들면 안 된다?”

    물론 단단히 당부를 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나는 마태령의 입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말은, 특히 여자에 관한 말은 모조리 거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다행히 착한 가람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곤 지금까지 나온 모든 신부 후보들을 모아 궁인에게 넘겼다. 궁인이 그것들을 비그단 함에 차곡차곡 담았다. 그동안 가람이는 그 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게 갖고 싶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궁인에게 짧은 말을 속삭였다.

    “…….”

    잠시 뒤, 궁을 나서는 가람이의 손에는 같은 디자인의 함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는 왜인지 단단히 삐쳐서 인사도 대강 건네고 가버렸다.

    “이게 아닌가……?”

    그러나 도통 그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긴, 저 속을 대체 누가 알겠어. 어릴 때부터 기상천외한 짓을 골라 하던 아이였다. 나는 고개를 젓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궁인이 그대로 따라붙어 속삭였다.

    “유화 부인께서 시간이 나실 때 한번 뵙자고 청해오셨사옵니다.”

    “그래? 무슨 일이시지?”

    “잘은 모르겠으나 춘아도 함께 대동하면 좋겠다는 말씀이 있으셨사옵니다.”

    그 말에 부탁해 두었던 일이 떠올랐다. 갈 곳을 잃은 춘아의 누이에 대한 부탁이었다. 나는 곧장 별궁으로 갈 채비를 했다.

    다행히 도착하자마자 들은 소식은 발걸음을 재촉한 보람이 있는 내용이었다.

    “부인은 무사히 빼 왔어. 다행히 배 속의 아이는 건강한 것 같더구나.”

    유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춘아가 눈물을 쏟아냈다. 유화가 예상했다는 듯이 부드러운 천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나는 대신 차를 따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화의 이 ‘사업’은 간단하게 말해서 도피를 돕는 사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단 하나 남은 선택지가 불행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뿐인 그녀들에게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 주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사업 진행 방식은 간단했다. 우선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도움을 구할 곳이 없는 사람을 찾는다. 보통은 춘아처럼 앞뒤 사정을 다 아는 지인들로부터 제보가 들어왔다. 그다음엔 어떤 수단을 써서든 그녀를 그 집안에서 빼냈다.

    이 사업을 맡았던 협보가 소위 ‘장정들’을 잘 알고 있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온건하게 빼내는 데는 걸림돌이 많으니 아예 사람을 써서 납치로 위장하거나 심한 경우 살인으로 처리하여 죽은 사람인 척 빼냈다. 범죄자 추적이 쉽지 않은 옛날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집안과 연을 끊게 된 여인은 안전한 곳으로 이송됐다. 미리 마련된 곳에서 새 삶을 꾸려 가는 것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지난 십 년간 이 사업을 거쳐 간 고객들은 많지 않았으나 그만큼 음지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춘아의 누이도 곧 어떤 방향으로든 새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남은 절차를 생각하다 유화에게 물었다.

    “다행이네요. 그럼 안전한 곳으로 옮겨 갔나요?”

    “우선은 이 근방에 있단다. 좀 더 동태를 살핀 다음 준비한 거처로 움직여야 할 것 같아.”

    그녀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솜씨 좋게 도피시켰다곤 해도 한 번에 움직이면 들킬 위험이 컸다. 무엇보다 임신부인 그녀에게 무리가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궐 근처까지 데리고 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러나 나는 유화의 눈짓을 보고 곧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번에 헤어지면 최소 몇 년은 못 보고 지낼 테니 춘아와 한 번 만나게 해주고 싶으셨던 모양이었다.

    “저, 정말 괜찮은 것 맞지요? 원체 몸도 약한데…….”

    대강 눈물을 닦은 춘아가 거듭해서 물었다. 이미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었던 유화가 차분히 달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답답하기만 했던 속이 조금이나마 트인 것 같았다.

    왠지 남은 일도 술술 풀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

    “해야. 바빠?”

    나는 간만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혼자서 마구간 처소 문을 열어젖혔다. 두려움 반, 기대 반이 섞인 두근거림이었다.

    “형님. 기별도 없이 어인 일이십니까?”

    갑작스러운 방문에 탁자 앞에 앉아 있던 주몽이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그는 혼자 있었다. 나는 문을 꼭 닫고 종종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품에 안고 있던 비단 함을 본 그가 탁자 위를 치웠다. 나는 의자를 빼서 앉으며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 물었다.

    “협보랑 마리는?”

    “일이 있어 잠시 나갔습니다. 달이 떠야 돌아올 것 같은데, 급한 일이십니까?”

    “아니야. 잘됐다.”

    마침 타이밍도 딱 알맞았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듣는 귀가 적을수록 좋았다. 내 신부 후보로 들어온 사람을 남에게 넘기는 것은 누가 봐도 무례한 짓이었으니까. 하지만 도저히 따로 혼처를 알아볼 여력이 없었다. 그 때문에 나부터가 궁인들을 모조리 떼어놓고 도망 나온 판국이었다.

    물론 오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낮 동안 내 호위를 맡고 있어야 할 그는 일찌감치 심부름을 보냈다. 답신을 받아오려면 한나절이 걸리기로 유명한 귀족에게 꼭 답을 받아와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했으니 저녁때나 돌아올 확률이 컸다.

    완벽한 상황이라는 것을 확인한 나는 비단 함을 열고 안에 든 두루마리를 꺼냈다. 주몽이 자연스럽게 내 옆에 와서 섰다. 그 팔을 붙잡아 더 가까이 곁에 붙이며 첫 번째 종이를 펼쳤다. 거기엔 이미 지겹게 본 가문 이름과 형식적인 글 따위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붙은 여인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이 여인은 어떠냐? 너도 이제 슬슬 아내를 맞아야지.”

    “…….”

    “내가 네 자식 이름까지 생각해놨어. 첫아들은 유리라고 짓자. 어때?”

    나는 바쁘게 다음 중매 종이를 펼치며 물었다. 퀘스트 마감일까지 ‘유리’를 만들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러나 주몽에게선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신 작게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응?”

    올려다본 주몽은 수줍게 웃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싸하게 훑고 지나갔다.

    “만에 하나라도 제가 자식을 만든다면 그 아이는 형님 배 속에 들어 있을 겁니다.”

    “…….”

    들고 있던 종이가 손에서 툭 떨어졌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는 귀를 때리듯이 탈탈 털었다. 주몽이 내 손을 붙잡았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궐에서 주몽에게 성교육을 시켜주지 않았나? 하지만 그간의 경험을 생각해봤을 때 이놈은 성교육이 과하다 못해 넘치는 수준이었다. 남녀의 신체 구조 차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 대체……. 삐걱거리는 고개를 꺾어 다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붉어진 내 귀를 조심스레 살펴보고 있는 그는 여전히 순수한 낯빛을 띠고 있었다. 그 순진한 얼굴은 내 귀가 잘못되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래, 곱게 키운 우리 해가 그런 상스러운 말을 할 리가 없지. 나는 충격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며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헛걸 들은 거야.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키우셨습니까?”

    “뭐?”

    작은 혼잣말을 귀신같이 잡아챈 주몽이 정말 궁금하다는 태도로 물었다. 어떻게 키웠냐니, 그거야 잘……. 당황한 나는 앞에 그 결과물을 둔 채 말끝을 흐렸다.

    정말 잘 키운 거 맞겠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확신이 있었는데 요새 들어 점차 내 육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몽은 개의치 않고 다행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잘 되었습니다. 한 번 키워보신 형님이시라면 이런 여인들보다 우리 아이를 더 잘 기르실 수 있을 테지요.”

    들뜬 말투와 달리 그는 냉소를 띤 얼굴로 떨어진 종이를 툭 쳤다. 그 작은 손짓에 온몸이 바짝 굳었다. 그는 그런 날 보더니 놀란 듯 박수를 짝 쳤다.

    “아, 안 되겠군요. 그 아이가 제 몫의 애정까지 탐하면 어찌합니까.”

    “지, 지금 무슨…….”

    나는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입 밖으로 욕설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상의 범주를 넘어선 독점욕이 순진한 얼굴과 대비되어 몇 배의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도망가기 위해 몸을 뒤로 밀었다. 끼익— 의자가 밀리며 듣기 싫은 마찰음을 냈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들며 이곳에 온 원래 목적이 떠올랐다.

    주몽의 연심. 여기서 도망가버리면 다시는 이 목록을 들고 이곳에 발을 들이지 못할 거란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 아직 그의 연심을 끊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주몽도 당황해서 내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겠지. 나는 물러나려던 발을 애써 제지하고서 다른 후보를 집어 들었다.

    “노, 농담하지 말고 이거나 봐. 이 여인도 제법 괜찮, 아!”

    주몽이 바짝 다가와 내 팔을 강하게 쥐었다.

    “형님. 제 마음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아직도 제 마음이 와닿지 않으십니까?”

    그럴 리가. 너무 와닿아서 문제였다. 그 마음이 너무도 커서, 그러나 받아줄 수가 없어서.

    나는 말을 잃고 그의 눈을 마주했다. 항상 아름답다 생각했던 눈은 오로지 나만 담고 있었다. 그 속에는 답답함은 차 있을지언정 여전히 실망이나 체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 눈을 마주하니 차마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내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주몽은 곧 헛웃음을 지으며 내 팔을 놓았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변명으로 한 꺼풀 감싼 마음을 더듬거렸다.

    “그래도… 너 나중에 나라 세우면 뒤를 이을 자식도 필요하잖아. 네 대에서 끊을 작정이야?”

    “여태 혼인도 안 하신 형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나는 순식간에 말문이 막혔다. 주몽은 그런 나와 종이를 번갈아 보며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무슨 생각이 오가는지 모를 눈이 까맣게 가라앉았다.

    “뭐…. 좋습니다. 형님께서 그리도 대를 이어야 한다 주장하시니.”

    잠시 뒤 짓씹듯 말을 내뱉은 주몽이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대로 탁자 반대편으로 건너간 그는 한쪽 벽에 붙은 작은 농을 뒤적였다. 나는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드디어 포기한 건가? 생각보다 빠른 포기였다. 그러나 스스로도 의아할 만큼 기쁘지 않았다.

    그사이 그는 원하는 것을 찾은 듯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더니 뜬금없는 화제를 꺼냈다.

    “얼마 전 말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은 갈기 하나까지 값을 쳐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시체 처리를 도와주던 잡부의 말로는 분해해서 파는 맛이 제법이라고 하더군요.”

    내가 당황하건 말건 그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로 말을 이었다.

    “저는 이미 형님의 은혜로 편히 지내고 있으니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마음이 동해 두고 올 수가 없었습니다.”

    뒤를 돈 그의 손에는 검은 천으로 덮인 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주몽이 그것을 들고 탁자로 다가올 때마다 안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설마 열었는데 말머리가 들어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몸을 뒤로 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주몽이 그 속에서 꺼내 든 것은 꽤 길이가 있는 원통형의 무언가였다. 표면이 마른 가죽처럼 주름져 있고 끝이 주먹처럼 두툼하게 부풀어 있는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생경했다.

    저게 뭐지? 나는 본능적인 거부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흉물에 가까운 생김새였다. 그러나 주몽은 그것을 이리저리 살피며 태연하게 말했다.

    “각좆이라는 걸 아십니까? 나무를 사람 성기 모양으로 깎아 만든 도구이지요. 저잣거리에서 은밀히 파는 물건이지만 사실 딱딱하고 유연하지 않아 쓰는 맛은 영 별로라 들었습니다.”

    부여판 성인용품이라고 이해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꺼내기엔 이상한 주제였다. 말이 절로 더듬거리며 흘러나왔다.

    “그, 그걸 왜 지금 나한테…….”

    “때문에 요새는….”

    내 말을 무시한 그가 말을 끌며 뜸을 들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몽이 쥔 물체를 바라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하지만 저건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기엔 매끈하지도, 성기를 닮지도 않았는데…….

    “짐승의 좆을 찾는 귀족들이 그리 많다 합니다.”

    뭐? 크게 뜨인 내 눈을 본 주몽이 예의 그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쇠 좆을 잘라 그늘막에 널어두면 점점 마르는데, 적당히 원하는 크기가 되었을 때 속을 쇠구슬로 채우면 훌륭한 도구가 된다는 것이지요.”

    “…….”

    “말 좆은 취향이 독특한 귀족들이나 사 간다곤 하지만 어차피 쇠 좆으로는 부족하실 테니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그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게 무엇이고 또 뭐가 부족하다는 건지. 그러나 본능은 이성보다 빨랐다.

    익숙하다고 느낀 모양새와 남다른 길이. 거기다가 그의 손에 꽉 찰 정도로 굵기까지 했다. 한 번에 내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저 손에서도 저 정도의 존재감을 자랑하는 모습은 반박의 여지 없이 내 짐작이 맞다고 알리고 있었다.

    “저, 정말 말….”

    좆…. 차라리 말의 시체가 나을 뻔했다. 나는 주춤주춤 일어나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이 더 빨랐다.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는 몸이 저절로 열린다더군요. 아기가 나올 길을 위해서겠지요.”

    “그,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형님께선 그리도 좁은 길을 가지고 계신 데다 몸도 여인과 다르시니…….”

    그가 ‘그것’을 내 앞에 들이밀었다. 정체를 알고 보니 한층 더 흉흉해진 것만 같은 착시가 일었다.

    “제가 미리 도와드리는 수밖에요.”

    나는 그제서야 내가 간과한 치명적인 허점을 알아차렸다.

    바로 주몽은 상상 이상으로 미친놈이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그는 고백과 동시에 잠자리를 요구한 전적이 있었다. 마음을 거절했을 때 고이 접을 거란 것은 상식적인 사람에게나 통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점차 다가오는 그를 피해 발을 뒤로 끌었다. 그러나 눈먼 발끝에 의자가 차이며 몸이 휘청거렸다. 반사적으로 짚은 손에 탁자가 와 닿았다. 순식간에 퇴로가 막혔다. ‘우리 해, 우리 해’ 노래를 부르며 마련해 준 질 좋은 목재 가구는 쉬이 밀리지도 않았다.

    그사이 이 미친놈은 내 앞까지 다가와 상체를 기울였다. 나는 허리를 잔뜩 물린 채로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가까이서 본 눈은 반쯤 맛이 가 있었다. 급하게 피하려고 몸을 뒤로 기울였지만 한계가 있었다.

    “읍, 하, 하지….”

    나는 그대로 맞부딪혀오는 입술을 피하지 못했다. 예고 없이 시작된 키스는 그만큼이나 급하고 격했다. 이가 사정없이 입술을 긁고 혀는 배려 없이 입 안을 헤집었다. 몇 번이나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한 호흡을 끝내기도 전에 다시 하관이 붙들렸다.

    “읍, 흐윽.”

    점점 악화되는 상황에 나는 두 손을 다 들고 그를 밀어냈다. 살기 위한 본능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내 거부에 돌아온 것은 더욱 거센 억압이었다. 나는 그가 밀어붙이는 힘에 속절없이 탁자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지지하던 팔도 없이 그의 힘을 온전히 상체 힘으로만 버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안하게 누운 몸은 그가 내 다리 사이에 바짝 붙어 서자 저절로 위로 밀려 올라갔다. 허벅지 절반까지 올라가자 주몽은 내 어깨를 잡던 손을 물리고 내 옆을 짚었다.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졌지만 퇴로가 막힌 것은 여전했다. 나는 그가 잠시 떨어진 순간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자, 잠시 진정하고. 해야, 응?”

    “후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셨습니까?”

    주몽은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 팔을 단단히 모아 쥐고 목에 입을 맞췄다. 버둥거렸지만 두 손이 잡히고 그가 다리 사이에 버티고 선 이상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젠 혼인 이야기를 꺼낸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되지도 않을 임신을 시켜보겠다고 누구 좆이든 들이밀 것 같았다.

    “하, 하지, 마…. 해야!”

    나는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냈다. 멈추지 않는 내 반항에 주몽이 점차 내리던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짧게 혀를 차더니 내 허리춤을 잡았다. 저항할 새도 없이 끈이 풀리고 바지가 헐거워졌다. 그 틈을 파고든 손은 단숨에 내 성기를 쥐었다.

    “아!”

    갑작스러운 자극에 목이 꺾였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손길은 애무보다 폭력에 가까웠다. 나는 잠시간 꿈쩍도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주몽은 사과라도 하듯 손에 쥔 것을 살살 쓸었다.

    “흐으…….”

    속도 모르고 아래에 열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앞서 느껴진 강렬한 아픔은 부드러운 자극을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했다. 머릿속에 울리던 위험 경고는 열기와 뒤섞여 점차 곤죽이 되어갔다. 그가 손아귀에 힘을 줄 때마다 허리가 바짝 들렸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주몽은 자꾸 움직이는 허리를 고정하기 위해 다리 사이에 더 가까이 붙어섰다. 그러나 한 손으로 내 손목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움직임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결국 그는 한숨을 쉬며 내 성기를 놓았다. 그만하려는 건가? 나는 헐떡거리는 와중에도 겨우 안심했다. 그러나 짧은 안도는 그가 함을 덮었던 검은 천을 집어 드는 순간 빠르게 사라졌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손목에 검은 천이 둘러매였다. 나는 당황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번에도 반항은 소용없었다. 충분히 긴 천은 내 손을 두 번 휘감고 매듭까지 짓고도 남았다. 온 힘을 다해 손목을 벌리려 노력했지만 어찌나 단단하게 묶었는지 아교로 붙여놓은 듯 비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도망치지 못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길을 열어야 한다’며 눈앞에 말 좆을 들이대던 주몽의 모습이 아직도 선했다. 나는 겁에 질려 손목을 마구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너 당장 풀지 못해?”

    “형님.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주몽이 낮게 속삭이며 창가를 곁눈질했다. 지극히 과장된 태도였다. 나는 흠칫 몸을 떨며 뽑아내던 목소리를 삼켰다.

    귀를 기울이니 근처를 지나가던 궁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내가 처한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항상 깊은 밤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북녘궁에서 일을 치렀던 것과 달리 이곳은 밝은 대낮에 위치도 다른 일터와 가까웠다.

    그 순간 얼굴이 훅 붉어졌다. 나는 지금 수십 명의 궁인이 지나다니는 곳에 손은 묶이고 아래는 드러낸 채 탁자에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수치스러운 동시에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혹시 지나가던 누가 안을 들여다보기라도 한다면?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을 나갔다는 협보나 마리가 일찍 돌아온다면? 오이를 심부름 보낸 귀족이 미루지 않고 답을 준다면? 하다못해 내가 사라진 것을 눈치챈 태자궁 궁인이 날 찾아 이곳까지 온다면?

    순식간에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겁에 질려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주몽은 그런 내 팔을 들어 자신의 목에 걸며 한결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 숨결에 점차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우선 눈을 꾹 감고 천천히 호흡을 되찾았다. 반항해서 탈출하는 것보다 그를 달래고 구슬려서 빠져나가는 편이 더 안전할 거란 판단이 섰다.

    나는 납치범을 안심시켜 탈출했다는 과거의 뉴스 사례들을 떠올리며 한껏 다정하게 목소리를 꾸몄다.

    “해, 해야. 여기서는 말고. 응? 나 몰래 나온 거라 언제 궁인이 날 찾으러 올지도 모르고…….”

    “또 몰래 나오신 겁니까? 위험하다고 그리 말씀드렸는데.”

    “지금 그게 중요해? 그보다 여긴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고, 너도 이런 거 들키면 안 좋잖아. 혼….”

    혼삿길도 막히고…. 뒷말은 생명을 건 순발력으로 삼킬 수 있었다. 지금 혼삿길 얘기를 하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데. 머릿속에 남은 미련이 지독하긴 했다. 주몽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아무 대꾸 없이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 다행히 마지막 음절을 문제 삼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내 앞말을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내 손목을 풀지도, 몸을 더듬는 손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가 내 허리를 지분거리며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오히려 소문이 나면 좋겠군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마구간에서 태자와 그가 아끼던 아우가 붙어먹었다. 이 소문이 퍼진다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나는 둘째 치더라도 고구려의 왕이 될 그가 뒷소문에 시달려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철없는 소리를 물리는 대신 의뭉스러운 말을 속삭였다.

    “그래야 형님께 이 짓을 부추긴 그자도 알아들을 것이 아닙니까.”

    “누구를 말하는, 흐읏!”

    반문하기도 전에 다시 성기가 잡혔다. 이번에는 그가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아 피하려는 시도도 할 수 없었다.

    “아…….”

    공포심에 반쯤 죽었던 아래가 다시 힘을 되찾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몽과는 이미 두 번의 밤을 같이 보낸 경험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사실상 두 번만 거쳐 가진 않았던 그의 손은 손쉽게 제 역할을 찾아갔다.

    나는 그의 목을 껴안은 채 몰려오는 쾌감을 견디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들킬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오히려 더 빠르게 끝으로 이끄는 것 같았다.

    사람이 공포심을 느끼면 어떤 호르몬이 과다 분비된다고 하던데, 그 영향 때문일 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생명과학을 떠올렸다.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시도였다.

    “흐읏… 아, 윽!”

    그러나 그 도피마저도 닫힌 입구에 손가락이 닿자 산산이 부서졌다. 느리게 입구를 문지르던 손가락이 뻑뻑한 안쪽 살을 밀고 들어왔다.

    “흐, 아, 아프….”

    무례한 손길에 턱이 절로 움직였다. 주몽은 벌어진 입에 제 혀를 밀어 넣으며 재차 손을 움직였다. 풀리지 않은 내벽이 침입물에 그대로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그 손가락은 안을 몇 번 밀어보더니 꾹 누르며 입구를 벌렸다.

    하지만 뻣뻣한 몸은 쉽게 안을 내어주지 않았다. 긴장이 다 풀리지 않은 데다 윤활제로 쓰던 기름까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주몽은 원인을 따지는 대신 좁은 내 안을 탓했다.

    “두엇은 낳아야 할 텐데 이리 좁으셔서 어찌하십니까.”

    “무슨, 왜, 왜 둘이야!”

    한 명 낳자고 달려들어도 억울할 판에 둘이라니. 나는 남이 정해준 내 가족 계획에 놀라 말을 더듬었다. 낳을 생각도, 낳을 능력도 없었지만 현재 안위와 관련이 있다 보니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영부영 휩쓸렸다간 정말 길을 터야 한다며 저 흉물을 밀어 넣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주몽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부여에도 후계가 없지 않습니까. 사이좋게 하나씩 나누셔야지요.”

    “…….”

    “설마 절 두고 다른 곳에서 만들어 오실 생각이셨습니까?”

    내가 혼인을 했으면 이미 사달이 나도 무슨 사달이 났을 표정이었다. 그럴 생각은 쌀알만큼도 품은 적이 없었음에도 등골이 오싹했다. 어쩌면 내 첫날밤이 혼례 날이 아니라 그에게 혼인 소식을 전한 날이 되었을지도…….

    내 굳은 표정을 본 그가 입매를 풀더니 농이라는 듯 웃었다. 그러나 나는 마주 웃어줄 수가 없었다. 차갑게 식은 공기를 눈치챈 주몽이 다시 입을 맞춰왔다. 절정 직전에 멈췄던 손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읏…….”

    그는 느릿하게 기둥을 훑었다가 예민한 끝부분을 엄지로 문지르길 반복했다. 파인 홈을 손톱 끝으로 긁을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에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럴 때면 뒤에 들어간 손가락 마디마디가 노골적으로 느껴져 어쩔 줄을 몰랐다. 마디가 붉고 도드라진 손가락이 안에서 돌아갈 때마다 뻑뻑한 내벽이 따라붙으며 기묘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힘이 풀리는 순간마다 조금씩 진입한 것이 도톰하게 튀어나온 곳을 꾹 눌렀을 때 내 배 위에는 더 이상 참지 못한 정액이 투둑, 툭 떨어지고 있었다.

    “하아, 하…….”

    나는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한 채 애써 숨을 골랐다. 밝은 햇볕에 얼굴을 가리고 싶었지만 꽁꽁 묶인 손은 아직도 주몽의 목에 걸려 있었다.

    내가 노골적으로 뿌려진 정액의 모습에 얼굴을 붉히든 말든 주몽은 그것을 모아 내 뒤에 발랐다. 조금이나마 액이 발려 밀고 들어오는 손끝이 전보다 수월한 것 같았다. 나는 이미 낸 길을 따라 들어온 두 개의 손가락이 안을 누르는 감각을 견뎠다.

    “그래도 아직 부족한데…….”

    아래를 내려다본 주몽이 미간을 찌푸렸다. 맞닿은 허벅지에는 무시할 수 없는 무게감이 점차 더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그의 것이 들어가기에 내 내벽은 여전히 좁고 뻑뻑했다. 아무리 쾌감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신체 구조상 안이 저절로 젖을 리는 없었다.

    밤이라면 들고 온 등잔불에서 기름을 빌렸을 테지만 그것도 없고. 이 상황에서 손가락으로만 뒤를 풀기엔 반나절이 넘게 걸릴 터였다.

    “그럼 그만하는 건…… 어때?”

    나는 슬쩍 그의 눈치를 보며 꿈실꿈실 엉덩이를 뒤로 뺐다. 그러나 그는 내 허벅지를 단단히 잡고 다시 끌어내렸다. 덩달아 미끄러진 머리가 방향을 잃고 딱딱한 무언가에 부딪혔다. 동시에 그의 눈이 내 머리 옆으로 향했다.

    “흐음…….”

    주몽이 낮게 목을 울리더니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천천히 다가온 손이 나와 부딪힌 물체를 들어 올렸다.

    “그, 그거…….”

    나는 경악으로 가득한 눈을 키웠다. 저걸 옆에 두고 어떻게 태연히 누워 있을 수 있었을까. 바로 앞에서 본 ‘말 좆’은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커진 것 같았다. 공포에 질려 고개를 뒤로 뺐지만 묶인 손이 주몽의 목에 걸려 있어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해, 해야…….”

    이 상황에서 저걸 들어 올린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해야. 아니지?”

    “…….”

    그가 침묵하며 말 좆을 쓸어내렸다. 마른 가죽 특유의 갈라짐이 남아 있는 표면은 속에 찬 쇠구슬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 구슬 개수를 셀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주몽의 것도 겨우 받아들인 게 며칠 전이었다. 그것도 익숙해졌다기보다 몰아치는 자극에 휩쓸려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편이 옳았다.

    그러나 저것은 달랐다. 체감상 사람 주먹만 한 저 귀두부터가 문제였다. 아무리 성적인 용도로 다듬어진 물건이라지만 절대 쓰고 싶지 않았다. 저 흉물스러운 크기와 생김새는 차라리 고문 도구에 가까웠다. 넣는다는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21세기 식약처의 허가를 얻은 정식 성인용품도 꺼려질 판에 기껏해야 태양에 말리기만 했을 날가죽이다. 무엇보다 짐승의 좆이라는 데서 오는 거부감이 너무 심했다.

    주몽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때로는 침묵이 사람의 공포심을 더욱 자극한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그에게 애원했다.

    “제발. 지, 진짜 안 들어가. 어차피 정말 낳을 수도 없다는 걸 너도 알잖아!”

    “그거야 해보지 않고선 모를 일이지요.”

    그가 태연하게 지껄였다. 패닉에 빠진 내 손이 벌벌 떨렸다.

    정말로? 기어코 저 짐승의 좆을 내 뒤에 넣겠다고?

    지난밤 배 속 가득 찼던 정액의 느낌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회복도 안 될 정도로 망가진 뒤에 끝도 없이 그의 씨를 받아내는 미래가 그려졌다. 한계를 넘은 공포와 두려움이 눈가에 고였다.

    “너, 너 왜 그래…….”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그에게 새 나라를 세우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던 밤 이후로 수백 번은 더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후계를 위해 혼인을 하면 좋겠다고 하신 분은 형님이십니다. 왕이 되실 분께서 말을 물리실 셈입니까?”

    답을 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 황금빛 알에서 내가 길러낸 것은 짹짹거리는 아기 참새가 아니라 발톱을 숨긴 맹금류였으니까.

    순진하게 나를 바라보며 기댔던 전과 달리 흉흉한 눈빛으로 날 대하는 그는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해가 아니었다. 순간순간이 쌓이고 쌓여 순진한 웃음으로 감춰왔던 베일을 벗겨냈다. 그 뒤에는 혼인 좀 주선했다고 나를 임신시키려 드는 미친놈이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게 본 성정임을 깨달았다.

    내 부탁에 잠자리를 요구하던 얼굴, 태령을 조롱하던 목소리, 그리고 짐승의 좆을 들이밀던 손짓. 퀘스트가 급해서, 달변에 홀려서, 그 뒤엔 그의 연심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느라 무심코 넘어가 버렸던 모습들이 돌이킬 수 없는 지금이 되어서야 속속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마음은 갑작스럽게 드러난 진실을 부정했다. 내가 평생을 다정히 쓰다듬어 준 얼굴은 순하고 얌전한 쪽이었다. 그러니 그럴 리가 없다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리고 다정해 걱정스러웠던 아이가 거짓일 리 없다고.

    “원래 안 이랬잖아. 갑자기 무섭게 왜 그래…….”

    그 바람은 흐느끼듯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툭 튀어나온 말에 주몽이 몸을 굳혔다. 그러나 나는 그 반응을 살필 새도 없이 연신 목울대를 울리며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켰다.

    한참을 침묵한 주몽이 어딘가 깊숙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무서우십니까?”

    “뭐?”

    “저는 항상 그대로였습니다. 언제나 먹도 못 갈던 그 어린애로 보시던 건 형님이셨죠.”

    짙고 축축한 목소리가 뱀처럼 기어와 나를 휘감았다.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마에 힘줄이 돋고 잔뜩 힘이 들어간 손이 내 허리를 아프게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화를 쏟아낼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를 평생 보아온 나는 알았다.

    “그러니 제가 그리도 연모한다 말하고 입 맞추고, 심지어 몸까지 섞어도!”

    “…….”

    “표정 하나 변치 않고 혼처를 내미시는 것이겠지요.”

    주몽은 겁에 질려 있었다. 정작 무섭다 말한 것은 나였는데도.

    나는 턱 막힌 목울대를 울리며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켰다. 그럼에도 때를 놓친 눈물이 기어코 비어져 나왔다. 그가 조심스럽게 내 눈가를 훔쳤다.

    “울지 마십시오. 진실로 제가 형님을 짐승의 것으로 범하리라 여기셨습니까?”

    “……해야. 나는….”

    “이곳에 제 것 외에 다른 것을 넣게 둘 리가 없지 않습니까.”

    여전히 감당하기 힘든 말을 내뱉는 그는 이상하게도 내 눈물이 옮겨 간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주몽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바짝 마른 내 뒤를 쑤셨다. 손가락이 가위질을 칠 때마다 내벽이 버겁게 늘어났다가 조이길 반복했다. 그러더니 이내 손을 물리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 들었다. 이 상황에서도 묵직한 질량감을 자랑하는 그것은 손 안에 꽉 차서 꺼덕이고 있었다.

    그는 말릴 새도 없이 그 끝을 내 입구에 맞췄다.

    “흑, 아윽……!”

    푹,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잠시간 숨이 멈추고 머리가 하얘졌다. 벌어진 입에서는 억눌린 신음만 간간이 나올 뿐, 그마저도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지난밤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버거운 압박감이 숨통을 틀어쥐었다.

    “괜찮습니다. 조금만…. 편안히 숨을 내쉬어 보십시오.”

    흐려진 시야 밖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나를 달랬다. 나는 익숙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입술을 부드럽게 벌리는 혀에 매달리며 그 입이 불어넣는 숨결에 맞춰 숨을 쉬었다. 막혔던 기도가 간신히 트이자 주몽은 곧바로 아래를 추어올렸다.

    “흐윽, 너무 깊, 아… 흑!”

    얇은 근육이 찢어질 듯 열리고 벌어지는 느낌이 선명했다. 그러나 그는 다정하게 입 맞출지언정 제 것을 물리지 않았다. 나는 손이 묶여 그를 밀어내지도 못한 채 신음하기만 했다. 애매하게 풀어졌던 내벽은 쾅쾅 짓찧는 성기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그대로 길을 냈다.

    “하아, 형님…….”

    그리고 더 이상 들어올 곳이 없어졌을 때, 그는 상체를 무너뜨리며 내 위에 뺨을 묻었다.

    “흐으…….”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맥동하는 심장을 느꼈다. 맞닿은 피부 아래 빠르게 뛰는 박동은 드러나지 않은 불안감을 대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빠듯하게 벌어진 아래가 화끈거렸지만 나는 원망하는 말 한마디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얼굴로 내 침묵을 바라보던 주몽은 천천히 허리를 뒤로 물렸다. 깊숙이 박았던 성기가 빠지며 고통뿐이었던 감각이 결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뻑뻑하게 들어찼던 내벽에 틈이 생기며 긴장 또한 느슨해진 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안쪽의 열리지 않은 곳까지 짓찧는 대신 반쯤 밀어 넣은 성기로 안을 뭉근하게 문질렀다. 손가락으로 헤집었던 안이 꽉 채워지며 밀릴 때마다 나는 허리를 움찔거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 순간 굵은 끝이 예민하게 부푼 살점을 푹 찌르고 물러났다.

    “아, 아! 흐윽!”

    참기 힘든 쾌감이 등줄기를 따라 뇌 속까지 올랐다. 새털같이 흩뿌려지는 입맞춤마저 순식간에 열기로 탈바꿈되었다.

    나는 고개를 저어 그 입술을 피하며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가득 들어찬 성기를 빼내기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는 느릿하게 허리짓을 하며 내 골반을 단단히 붙잡고 아래로 내렸다.

    “형님.”

    “아읏, 해야… 그, 그만, 흐응!”

    “저는 더 이상 북녘궁에서 형님이 오기만 기다리던 그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조용히 속삭이는 말은 체념한 듯 가만가만했다.

    “그러니 제발 저를 그대로 봐주십시오.”

    “하윽, 으, 무슨, 으으응!”

    돌연 주몽이 각도를 비틀어 넣었다. 익숙지 않은 지점을 자극받은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조였다. 내벽이 얻어맞은 것처럼 벌벌 떨리고 열이 올랐다. 아무리 중간에 긴장으로 굳었다 하더라도 한 차례 사정을 했던 몸이었다. 한 바퀴 휘돌았던 성감이 다시금 고개를 들며 눈물을 툭 떨궜다.

    “다섯 살배기 아이도 아니고 나라를 세울 재목도 아닌….”

    “흐으윽…….”

    “지금 형님과 몸을 섞고 있는 저를 말입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젓다 끄덕이길 반복하며 신음을 억누르기에 급급했다. 그 와중에도 더한 쾌감을 아는 몸이 멋대로 움직여 끝을 맞추려 했다. 그러나 주몽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느끼는 그 앞에 멈춰서서 주변만 얕게 찔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때 그가 나를 향해 목을 낮게 울렸다.

    “……이제는 제가 가닿았습니까?”

    그 순간 시야가 맑아지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처연하게 날 바라보는 주몽이 보였다. 하지만 그 간절함 속에는 평정을 잃은 집착이 도사리고 있었다. 몸을 섞으며 온전히 드러난 날것이 내보인 일면이었다.

    쾌감으로 멍해져 있던 머리가 경고음을 보냈다. 이대로 휘말려서는 안 된다고, 이번이 그의 마음을 거절할 정말 마지막 기회일 거라고.

    이 밤이 지나는 순간 더 이상 외면은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그의 민낯을 본 대가였다.

    “나는…. 나는, 해야.”

    불안과 공포는 이지를 무너뜨렸다. 심장 깊숙한 곳에 꾹꾹 눌러 담았던 말이 붙잡을 새도 없이 토해졌다.

    “나는 너와 같은 마음이 아니야…….”

    애초에 이렇게 했어야 했다. 네가 남쪽으로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핑계에 숨어 침묵으로써 동조를 가장해선 안 됐다. 신의 언약이 무서울지언정 어쭙잖은 중매를 서며 간사하게 거절을 내비쳐선 안 됐다. 난 이리도 진심으로 다가오는 아이에게 이제껏 저질렀던 것보다 더 큰 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썩고 썩은 마음이 입 안에 남아 질척였지만 마음만큼은 한결 편안했다.

    “그래도 너를 많이 아끼……!”

    뒷말을 마저 이으며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입이랑 몸이랑 다르신데, 정녕 저와 같은 마음이 아니신 게 맞으십니까?”

    극점을 빗겨 난 곳만 찌르고 그 주위를 살살 맴돌며 농락하던 성기가 단숨에 깊이 찔러 들어왔다. 간신히 참던 신음이 순식간에 높아지고 내벽이 고였던 열기를 터뜨리며 미친 듯이 수축했다.

    점막이 성기에 들러붙을 때마다 성기 모양대로 길이 나는 것만 같았다. 견딜 수 없어 떨리는 등을 탁자에 비빌 때마다 몸에 밀린 신부 후보 명단이 뭉텅이로 떨어졌다.

    “흐으, 아아, 아……!”

    묶인 손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쓰라린 것도 몰랐다. 그가 아무렇게나 찔러 박을 때마다 그와 내 배 사이에 낀 성기가 마구잡이로 문질러지며 견딜 수 없는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주몽이 내 손목을 붙잡아 천을 풀어냈다. 그토록 원하던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나는 그의 목을 감은 손을 풀어내지 못했다. 붙잡지 않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주몽이 그런 내 등을 부드럽게 받쳐 안으며 낮게 웃었다.

    “이리 좋아하시면서, 차라리 제게 실망하셨다고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아니, 흑, 아니야…….”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그가 짓고 있는 웃음을 보면 자꾸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고 싶어졌다. 모든 진실은 뒤에 묻어두고, 내게 보드라운 배만 내밀던 그가 발톱을 세울 정도로 받은 상처에 대해 골몰하게 되었다.

    그런 스스로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 부정을 견디지 못한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조함을 띤 목소리가 다급하게 터져 나왔다.

    “모두 형님께서 이리 만드셨습니다! 형님께만 제가……!”

    마법 같은 말이었다. 내 모든 행동을 가로막고 모든 생각을 작은 상자 안에 욱여넣는 말.

    “…….”

    자극을 견디지 못한 내 성기에서 정액이 터져 나왔지만 나는 신음 한 자락 내뱉지 못했다. 생리적인 반응으로 몸을 떨면서도 머리는 얻어맞은 것처럼 점차 멍해졌다. 다시 한번 새겨진 책임의 속박에 묶여 모든 갈피가 흩어졌다.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래.”

    무슨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 걸까. 이 아이를 길러낸 것은 나인데. 나는 작은 대답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다.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돌아오는 생각은 더 깊이 파고들 이유도 사라지게 했다.

    그러나 주몽은 내 수긍에 오히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쳐올리던 성기를 거칠게 빼내더니 두어 번 훑었다. 성의 없는 손길에 투둑, 툭 떨어진 정액이 바닥에 흩어진 종이를 적셨다.

    나는 희게 물든 색색의 두루마리를 보다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잔뜩 억누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룻밤 남았습니다. 떠날 채비를 해두십시오.”

    띠링—

    [신의 언약]

    ‘주몽’과 네 번의 밤을 보내면 영원히 그의 나라로 건너가야 합니다. (3/4)

    이 언약을 지키지 않을 시 양측 계약자의 영혼이 소멸됩니다.

    그와 동시에 울린 알림음이 내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차라리, 이대로 모든 게 박제되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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