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5/27)

13. (1)

“하아…….”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이 산더미 같이 쌓인 걸 봐. 없던 고민도 생길 판인데.”

나는 뒤적이던 예비 태자비 명단을 툭 내던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가람이도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던지고 내 곁으로 붙었다. 우리는 한 손으로 종이 더미를 무의미하게 뒤적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이 참 좋았다. 나갈 수 없는 나와는 대조적으로.

결국 그날은 북녘궁에서 하루 종일 주몽과 보내다가 돌아왔다. 다행히 하루 온종일 누워서 지내니 몸이 많이 괜찮아졌다. 유모의 잔소리(‘다시는 그리 말씀도 없이 홀로 나가시면 아니 되옵니다!’)를 좀 들어야 했지만 그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마무리였다.

예상치 못했던 왕비님의 호출만 아니었다면 ‘만족스러운’ 마무리까지 갈 수 있었을 텐데.

가볍게 석반이나 먹고 올 생각으로 갔던 자리에서는 왕비님께 혼만 잔뜩 나다가 왔다. 누가 어떤 말을 흘린 건진 몰라도 격에 맞지 않게 누추한 곳에 자주 드나들면 되겠냐는 것이 주 골자였다. 물론 누추한 곳은 말할 것도 없이 마구간이었다.

안 그래도 왕비님께 죄책감과 미안함을 가지고 있는 나였다. 이 나이 먹도록 혼례도 안 올리고 귀족들 사이에서 마땅한 위치를 차지한 것도 아닌 아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속을 썩이기엔 충분한데 나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왕이 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평소와 다름없이 마구간을 들락거릴 수 있을까. 왕권을 강화하지 못할망정 깎아 먹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돌아오는 길에 새로이 쌓인 신부 후보 목록을 한 아름 들고 와야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는 가람이가 태자궁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를 감시하라는 왕비님의 명을 받은 것 같았다. 첫날만 해도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듯 시종일관 웃고 있던 그는 궁인이 끙끙대며 문서 더미를 들고 오기가 무섭게 표정이 굳어졌다.

‘이게 전부 형님께 들어온 예비 태자비 명단이느냐?’

‘전부는 아니옵고, 이만큼은 왕자 저하의 것이옵니다.’

그녀가 눈치를 보며 절반을 뚝 떼어 그에게 밀어주었다. 가람이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하게 굳었다. 하지만 출처가 왕비님이신 만큼 그도 끝까지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며칠째 태자궁에 앉아 관심도 없는 명단을 뒤적이는 중이었다.

원래도 산처럼 쌓였던 후보 목록은 이제 가람이의 몫까지 합쳐져 산맥을 이뤘다. 나는 다시 한숨을 푹푹 쉬었다. 대체 누가 왕비님께 내 행동반경을 고해바친 건지. 마음 같아선 잡아다가 이 종이들을 대신 읽히고 싶었다. 화가 단단히 나신 왕비님이 친히 검사까지 하신댔으니 평소처럼 대충 밀어두고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가람이도 지겨운지 나를 따라 한 손으로 그것들을 헤집으며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방도를 찾아보는 건데…….”

“방도? 무슨 방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가 뒷말을 얼버무리며 시선을 피했다.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 기울였던 몸을 바로 했다. 문득 묻어뒀던 궁금증이 떠올라서였다. 나는 눈을 굴리다 결국 말문을 뗐다.

“근데 가람아. 너는 왜 장가를 안 가?”

나야 사정이 있어서 못 간다지만, 뭐 하나 빠지는 곳 없는 둘째 왕자님은 왜 여태껏 장가를 가지 않는지는 오래전부터 궁금했다. 왕비님께 몰래 여쭈어봐도 ‘그러니 윗사람이 모범을 보이셔야지요!’ 하고 되레 혼나기나 했다.

그러나 같이 신부 후보 목록을 뒤적이고 있는 지금이라면 넌지시 물어봐도 될 것 같았다.

“혹시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어?”

나는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가람이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문서를 보는 시종일관 어렸을 때 내게 들어온 예비 태자비 문서를 찢어 놓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 않고서야 저렇게 혼인에 학을 뗄 리가.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물심양면으로 도울 생각이 있었다. 그가 왕이 된 다음 혼처를 고르려면 제약이 많아질 테니 왕자 신분인 지금이 적기였다.

그러나 가람이는 펄쩍 뛰며 화를 냈다.

“아닙니다! 제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 알았어. 있을 수도 있지. 뭘 그리 부정을 해.”

오히려 격렬한 반응에 당황한 사람은 나였다. 스물 넘은 사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게 뭐 어떻다고. 없으면 없는 대로 이상한 나이였다. 그러나 가람이는 내 말에 도끼눈을 뜨더니 난데없이 나를 물고 늘어졌다.

“그건 형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게 어떻게 그런 말이 돼?”

황당하다는 내 반응에도 가람이는 끝내 ‘없으니까 그만하라’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왈왈댔다. 입에 당과를 물려주고 나서야 겨우 조용히 하는 모습이 정말 강아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내가 후보 두 개를 더 읽을 동안 바닥을 노려보며 턱만 움직였다.

뜬금없는 질문이 날아온 것은 목을 돌리며 찻잔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형님께선 몽정을 해보셨습니까?”

“모, 컥, 몽…. 잠시만, 뭐라고?”

마시던 찻물이 기도로 넘어가는 바람에 고통스러운 기침이 새어 나왔다. 곁에 있던 궁인이 다급하게 새 수건을 건넸다. 나는 입가를 닦고 눈물이 배어 나온 눈을 훔쳤다. 몽정이 딱히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워낙 갑작스러운 주제라 당황스러웠다.

내 되물음에도 가람이는 이미 듣지 않았냐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뻔뻔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슬쩍 차를 마시며 그를 흘긋 건너다보았다. 과거에 내 친구들은 성적인 말을 쏟아냈을 때면 얼굴이 상기되었는데, 그들과 달리 정말 진지해 보이는 자세라 나 또한 절로 진지한 태도가 되었다.

일단 물어봤으니 답을 해줘야겠지……. 사실 대답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나도 해봤지. 지극히 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고. ……왕자궁에서는 이런 거 안 가르치니?”

“물론 배웠습니다. 다만 그 설명만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의문점이 남아 있어서요.”

마지막 질문은 나와 결혼하겠다며 난리를 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 넌지시 물어본 말이었다. 그러나 가람이는 배웠다며 단칼에 내 추측을 깨부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가 작게 말을 이었다.

“그럼 그 꿈속에 나온 대상이 제가, 그, 좋아… 하는 사람입니까?”

“꼭 그런 건 아니지?”

나는 침음을 흘리며 내 경험을 되짚어 봤다. 내 경우에는 꿈도 꾸지 않고 자고 일어났는데 몽정을 했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 외에도 떠벌리기 좋아하는 친구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말 다양한 상황들이 쏟아져 나왔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왔다는 이야기부터 생판 모르는 남이나, 심지어 트럭이 나왔는데 몽정을 경험했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걸 보면 꼭 몽정에 등장한 상대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또 아예 아니라고 못 박을 수도 없고. 가람이의 꿈속 상황이나 감정 상태를 모르니 내가 속단할 일은 아니었다.

혹시 나와서는 안 되는 사람이 나와 혼란을 겪고 있나? 나는 고개를 조심스럽게 틀고 그에게 손짓했다. 그가 의아한 얼굴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두 손을 모은 뒤 그의 귓가에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혹시 그 꿈에 나온 사람이 궁인이나 누구의 부인이야? 궁인이라면 내가 밀어줄 수 있는데 부인은 조금 어려울….”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가람이가 귓등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뒤로 빠르게 몸을 뺐다. 충격으로 얼룩진 얼굴이 배신이라도 당했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더듬거리며 외쳤다.

“저, 저를 대체 어떤 파렴치한으로 보신 겁니까? 제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알지, 당연히 알지. 다만 네가 너무 고민하길래…. 내가 미안해. 응?”

나는 곧장 말을 물리고 싹싹 빌었다. 그러나 가람이는 귀를 감싼 손을 떼지 않았다. 마치 더러운 것으로부터 귀를 보호하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보자 황급히 주제를 돌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순진한 반응이 귀엽긴 했지만 더 놀렸다간 울 것 같았다.

“아, 가람아. 너 그거 알아? 마가의 귀족 중 한 명이 며칠 전 명을 달리했대.”

“…예. 들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내 티 나는 말 돌리기에도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폭설 때나 수해 때 도움을 많이 줘서 이왕이면 오래 앉아 있었으면 했는데.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것 같아.”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 죽은 이는 회의 때도 종종 얼굴을 보았던 귀족이었다. 마가의 관할 지방 중에서도 꽤 큰 구역을 다스리고 있었고 최근 들어 구휼에 힘을 썼다는 단편적인 기억만 났다. 밀어뒀던 태자비 후보 명단이나 뒤적거리는데 가람이 그것을 빼앗으며 무심히 말했다.

“하늘이 점지한 죽음이라기엔 마 대사자님의 입김이 작용했을 겁니다. 밉보인 것도 그렇지만, 자리가 비자마자 떡하니 자기 자식을 앉히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래?”

협보에게 조심하라고 해야겠네, 궐에서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마가 사람들치고 협보에게 호의적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치에 관심을 끊은 지 오래인 나에겐 그 정도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가람이는 내 반응이 만족스럽지 않은지 미간을 좁혔다.

“마태령이 올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으십니까?”

그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다. 나는 놀라 눈을 크게 키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성적인 판단이 들며 놀람도 사그라들었다.

“설마. 둘째 아들이 뭐 좋을 게 있다고 그걸 맡겠어. 아무리 구역이 커도 본 가문만은 못할 테니 별 볼 일 없는 자식들에게 자리가 돌아가겠지.”

“아…. 혹시 모르십니까?”

“무얼?”

“아니, 실언입니다. 그냥 잊어주십시오.”

뭔가 말을 이으려 했던 그는 내 반문에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대신 가져간 명단 귀퉁이를 작게 접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보고도 모르는 척 넘어가길 택했다. 마태령에 관한 이야기까지도 함께 묻히길 바라며. 그는 내 어리고 미숙했던 선택이 불어온 바람을 고스란히 맞은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좌절을 겪고 꺾이기 전에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러나 나는 고개를 흔들어 기억을 떨쳐냈다. 다시 만나지도 못할 텐데 의미 없는 고민은 필요 없었다. 대신 가람이가 풀어 저 멀리 던져둔 칼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선물하려 했던 단검이 하나 있었다.

그대로 몸을 일으켜 수납장을 열어 보았다. 그곳에는 하나만 있어야 할 단검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이 단검들은 칼자루에 새겨진 무늬 하나마저도 같았지만 은은하게 발광하는 빛이 모든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날 북녘궁을 나서는 내게 속삭이던 주몽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것 같았다.

‘제 선물입니다. 이 빛을 볼 적마다 제 마음이 변치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세상천지에 받은 것을 다시 선물로 돌려주는 파렴치한 놈이 어디 있나 했더니. 하지만 주몽의 손에 내 영혼이 묶인 단검을 내버려 두는 것도 영 찜찜했다. 기분도 그렇고, 저 사연이 담긴 단검을 남이 본다는 생각만 해도 남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같은 이유로 가람이에게 쌍둥이 단검을 선물하는 게 망설여졌다. 분명 가람이는 좋다고 매일같이 차고 다닐 텐데. 내가 문제의 단검과 똑같이 생긴 칼을 보고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생각해보니 주몽과 커플 아이템이라고 하면 싫어할 것 같기도 하고.’

결국 나는 아무것도 꺼내지 않은 채 수납장을 닫았다. 혹시라도 하늘빛이 새어 나오기라도 할까 봐 아주 꼭꼭. 그리고 찾으시는 게 있냐며 물어오는 가람이에게 손을 내저었다. 가람이에게는 이번에야말로 하나밖에 없는 단검을 새로 제작해서 줘야 할 것 같았다.

***

‘동명왕편’에는 ‘유화’가 명마를 고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마구간에 가서 긴 채찍을 매섭게 휘두른다. 여러 말들이 놀라 달아났지만 그중 한 마리 말이 두 길이나 되는 난간을 뛰어넘고, 그리하여 그 말이 준마인 것을 알아차린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일단 채찍으로 말을 후려친다는 것부터 무서웠다. 난데없이 채찍으로 맞은 말들은 흥분해 날뛸지도 몰랐다.

난간을 넘어간 말을 다시 붙잡아 오는 건 또 어떻고. 분명 궁인이나 주변 마구간지기가 그 뒤처리를 할 게 뻔한데 나를 미친 태자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그럼 겨우겨우 마구간에 갈 수 있게 된 내 처지가 다시 예비 태자비 선별반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금 전에 뜬 이 퀘스트를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지.

[메인] 준마가 필요해

먼 여정에는 말이 필요한 법입니다. ‘주몽’이 맡은 마구간에는 부여에서 제일가는 준마가 있습니다. 그 준마를 ‘주몽’의 것으로 만들어주세요. ‘왕’이 마구간을 방문하는 시기를 노리면 해결이 한층 수월할지도 모릅니다.

성공 시 보상 : ‘주몽’의 말 획득, ‘남쪽으로 도망’의 조건 달성

실패 시 결말 : ‘하백’과 ‘창조주’의 분노로 세상 멸망

내 발목에 신의 언약이라는 족쇄가 걸린 만큼 나는 속전속결로 퀘스트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길로 주몽이 좌천되기 전 왕의 마구간을 담당하던 마구간지기를 불렀다. 다행히 아직 궁에서 다른 마구간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는 말들에게 애정이 많았는지 주몽의 마구간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말들을 두루두루 살피고 다녔다.

이윽고 다 돌아본 그가 후다닥 달려와 다시 몸을 낮췄다.

“허이구, 순진한 도련님께서 말을 돌보신다기에 쇤네가 걱정이 많았는데 모두 건강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제게 이 말들을 보여주시는지…….”

“별것은 아니고, 내 궁금한 것이 있어 너를 불렀다. 이 중에서 어떤 말이 제일 명마지?”

“워, 원래는 저 하얗고 검은 얼룩이 있는 말이 제일 뛰어납니다.”

나는 그가 말한 말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택한 방법은 ‘전문가를 불러서 물어보기’였다. 신뢰성까지 겸비한 아주 온건한 해결책이지.

다행히 그는 내 바람대로 전문성을 뽐내며 그 말이 왜 준마인지 줄줄이 늘어놓았다. 확실히 골격과 근육이 균형 있게 발달하고 피모에도 윤기가 흘렀다. 하지만 내 주의를 잡아끈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원래는? 그럼 지금은 다른 말이 있다는 소리인가?”

“예, 예. 아뢰기 황송하오나 얼마 전 제 마구간에서 건너간 말이 한 마리 있습니다. 워, 워낙 성격이 사나워 그렇지, 아마 이곳, 아니 부여에서 제일가는 명마일 것입니다.”

엉망진창인 예법이었지만 나는 트집을 잡는 대신 그가 가리키는 말을 살펴보았다. 과연 그의 말대로 내가 다가가자마자 발을 구르는 모습이 보통 성격이 아닌 것 같았다.

근데 어딘가 낯이 익은데……. 그때 어느새 내 옆에 와 얼쩡거리고 있던 마리가 마구간지기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어? 이 말 진짜 성격 더럽던데. 아저씨, 이 말 아저씨네 마구간에서 데려온 거였어요?”

“응, 그렇지. 너에겐 미안하게 됐다. 얼마 전에 뻑적지근하게 난간을 빠개놓는 바람에…….”

그에 그는 내 눈치를 보면서도 말이 이곳에 오게 된 정황을 풀어놓았다. 정말 성격이 사납긴 한 모양이었다. 그러던 도중 발길질을 하던 말이 크흥! 푸흥! 하고 내 얼굴에 콧김을 내뿜었다.

그 순간 긴가민가했던 게 싹 풀렸다. 사냥 대회 날 잠깐 오이에게 빌려주었다가 빗속에 우리를 버리고 도망친 그 말이었다.

“이 말은 아직도 사람 태우기를 거부하는가?”

“아이고! 절대 안 됩니다. 저하께서 타셨다간 단박에 뼈마디가 분질러지실 겝니다.”

“아니, 나 말고……. 전에 내 호위 무사가 탔던 적이 있었는데.”

내 설명에 당황한 그가 고개를 조아리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이걸 묻는 이유는 오이가 제법 잘 다뤘던 기억이 남아 있어서였다. 성격이 더럽다면 그때 잘 타던 오이에게 주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나 마구간지기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한 번 내버리고 도망칠 만큼 우습게 봤으니 다시는 태우지 않을 거란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이 말이 주몽의 몫인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타면 뼈가 부러진다니. 엄연히 성인 남성인데 그렇게 약해 보이나?

나는 마구간지기를 보내며 괜히 소매를 걷어 내 팔목을 보았다. 좀 마른 것 빼고는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기가 무섭게 마리가 매우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팔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저하. 근데 편찮으셨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괜찮으세요?”

“내가 아팠다고 누가 그래?”

“주몽 형님이요. 그러니 저하 귀찮게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마리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지난 며칠간 내가 아팠다고 말할 만한 일이라곤 그와 잤다가 허리가 아작 난 일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당당히 마리에게 내가 아프니 귀찮게 하지 말라고 말했다니.

그의 뻔뻔함에 부끄러움은 왜 나의 몫인지 모르겠다. 나는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에 대답을 뭉뚱그렸다.

“응…. 그랬구나.”

“어디가 편찮으셨던 거예요? 제가 도와드릴 만한 일은….”

“아냐. 다 나았고,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

마리가 바닥에 깔린 짚을 툭툭 찼다. 하지만 더 해줄 만한 마땅한 말이 없었다. 궁금하다면 네 형님의 그곳을 한번 보라고 할 수도 없고. 나는 어색하게 밖을 향해 손짓했다.

“가서 일 봐. 검술 연습한다고 그러지 않았어?”

“……오늘 치는 이미 다 했습니다. 저하께서 오신다고 해서요.”

시들었던 눈이 일말의 기대를 품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한마디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가서 실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애써 그 기대를 모른 척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오늘의 행차도 말을 보겠다는 핑계로 우겨서 빠져나온 것이었다. 당분간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피해야 했다.

“……더 안 물어보세요?”

마리가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나는 평소와 달리 나를 잔뜩 따라온 궁인들을 흘긋 보다 재빨리 마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지나쳤다. 나머진 주몽이 잘 달래주겠지. 이것이 지금 할 수 있는 내 최선이었다.

그 뒤로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마구간을 드나들었다.

전처럼 주몽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친밀하게 지내서는 안 되는 마구간의 일원에는 그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신 나는 성질이 더러운 그 말 앞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발길질에 쏟아지는 짚을 맞는 게 즐거워서는 아니고, 어떻게 하면 저걸 주몽의 소유로 넘길까 하는 고민에서였다.

물론 검증된 방법은 신화가 알려주고 있었다. 말의 혀 밑에 바늘을 박아 밥을 못 먹게 한다면 큰 어려움 없이 왕에게 하사받을 수 있었다. 퀘스트 창도 그것을 이용하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저 입을 벌리다가 내 손이 잘리지 않으면 그것부터가 기적이었다. 어찌어찌한다고 해도 말 못 하는 짐승의 혀에 바늘을 심는 것은 너무 잔인한 것 같았고. 일부러 밥을 주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런다 한들 옆 마구간 울타리를 부수고 이곳으로 온 말이 남의 여물통이라고 가만히 놔둘 것 같진 않았다.

고민이 이어지는 동안 마리는 끊임없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오늘도 오셨습니까?”

“응. 저 말 좀 보고 싶어서.”

“맨날 오셔서 말만 보고 가십니까. 저 검술도 많이 늘었습니다.”

“…….”

“……평소엔 말에 관심도 없으셨으면서! 왜 유독 저 말만 예뻐하십니까!”

며칠째 그런 일이 반복되자 마리는 결국 화를 내며 마구간을 나가버렸다.

나는 아이를 매섭게 노려보는 궁인을 그저 손짓으로 제지하고 말았다. 평소라면 쫓아가서 토라진 걸 달랬을 테지만 왕이 언제 행차할지 모르는데 또다시 왕비님 눈 밖에 나 태자궁에 감금당해 있을 수는 없었다. 하루하루 퀘스트에 쫓기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주몽에게 이 준마를 줄 다른 방법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역시 좀 잔인해도 바늘을 꽂아야 하나.

결국 오늘은 말의 입을 벌릴 입 무거운 일꾼을 두셋 떠올리며 마구간으로 향했을 때였다.

“너 왜 그래?”

평소와 다름없이 찾은 마구간에서 오늘따라 말이 유독 힘이 없어 보였다. 나는 다가가도 꿈쩍도 안 하는 말을 당황스레 쳐다보았다. 원래 이쯤 다가가면 짚을 날리거나 콧김을 쉭쉭 내뿜었어야 했다.

그러나 말은 나를 힐금 보고 코로 건초 더미를 뒤적이기만 했다. 이제 보니 건초도 잔뜩 남아 있었다.

“어디 아파?”

나는 웅크린 말을 둘레둘레 둘러보았다. 말이 귀찮은 듯 입을 작게 벌렸다가 닫았다. 그에 나는 더욱 당황스러워졌다. 평소라면 입을 쩍 벌려서 건치를 자랑했을 텐데. 입에 건초를 가져다 대 보았지만 조금 우물우물하다가 퉤 뱉어냈다. 그러곤 아예 털썩 눕는 것이었다.

“야…. 너 왜 그래. 의원이라도 불러야 하나?”

나는 나무판자에 가로막혀 다가가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며칠간 마르길 바라긴 했지만 정말 아픈 모습을 보니 양심 한구석이 쿡쿡 찔렸다. 그러나 주몽을 부르려 몸을 돌리려던 순간 말이 뱉어낸 건초가 눈에 띄었다.

침으로 범벅이 된 그것에는 피가 옅게 묻어 있었다.

“…….”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말의 입을 벌렸다. 말은 귀찮은 건지, 매일같이 얼굴을 본 내게 경계를 푼 것인지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혀가 말려 올라간 순간, 나는 투박한 빛을 내는 은색 바늘을 보았다.

누가 꽂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주몽이겠지.

이런 적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지만 곧 납득했다. 이 또한 ‘종이’가 이끈 일일 게 분명했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그는 운명에 맞춰 차근히 건국 준비를 해 나가고 있었다.

나는 바늘을 뽑아달라는 듯 얌전히 입을 벌리고 있는 말에게서 천천히 물러났다. 커다란 눈이 나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지만 외면했다. 안타까웠지만 순탄히 흘러가는 퀘스트를 막을 생각은 없었다.

‘며칠만 참아줘.’

나는 입 모양으로 벙싯거리고 마구간을 나섰다. 고민이 해결되었으니 이제 마구간에 올 이유는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구간을 찾았다.

가만히 왕이 올 날을 기다리려 했지만 자꾸만 씹다 뱉은 건초가 눈에 밟혔다.

물론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만 말라가는 짐승의 눈을 가만히 마주하다가 돌아올 뿐이었다.

***

“손님께서 오셨사옵니다.”

오늘도 마구간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태자궁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유모가 다가오더니 작게 속삭였다.

“그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걸음을 옮겼다. 이곳을 찾을 손님이라고 해봐야 주몽이나 가람이, 더 세어보면 왕비님 정도밖에 없었다. 특히 앞의 둘은 연락도 안 하고 들어오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서로 마주친 적도 부지기수였는데 어느 한쪽도 피하지 않으니 어떨 땐 일부러 그러나 싶을 정도였다.

마구간에서 별다른 이야기를 못 들었으니 오늘은 가람이려나.

나는 곧장 손님을 맞이할 때 쓰는 방으로 향했다. 유모가 머뭇거리며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시라 했지만 새삼스럽게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어느새 문턱까지 다가온 내 발걸음에 맞춰 궁인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나는 방 안으로 들어서는 대신 스치듯 보았던 궁인에게로 몸을 틀었다. 평소라면 밝게 웃고 있었을 그녀의 안색이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가도 붉고 손에 힘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몸을 낮추고 걱정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소, 송구하옵니다. 태자 저하.”

놀란 그녀가 문을 놓고 몸을 낮췄다. 하지만 나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물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태자궁 궁인으로 지냈던 그녀와는 오랫동안 얼굴을 본 사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게 내어준 휴가에 가족들을 보고 오겠다며 신이 나 있었는데. 나는 다시 한번 부담스럽지 않게끔 조곤조곤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면 좋겠는데.”

“태자 저하. 손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옆에서 유모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재촉했다. 어차피 내가 한두 번 이런 것도 아니고, 주몽이나 가람이라면 봐도 그러려니 할 텐데 유난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설마 왕비님인가? 이어지는 의문은 내 위로 그림자가 지며 끊겼다.

“저하께선 여전히 이런 사소한 일에 관심을 가지시는군요.”

나는 멍하니 ‘손님’을 바라보다 입을 벌렸다. 꽉 죄인 목구멍으로 잊고 지냈던 이름이 튀어나왔다.

“……마태령.”

10여 년이 지났지만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얼빠진 나를 보며 웃었다.

“너무 어릴 때 뵈어서 절 잊으셨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절 기억해주시니 이리 좋은 걸 보면 말입니다.”

“…넌 정말 달라진 게 하나도 없구나.”

“그렇습니까? 전 제가 제법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소년과 청년 사이의 경계에 서 있던 그는 이제 미성숙한 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럼에도 알아본 까닭은 말려 올라간 입꼬리 끝에 익숙한 장난기가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능구렁이 같은 웃음을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러운 만남이 으레 그렇듯 여러 기억들 중에서도 즐거웠던 추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인 만큼 이 만남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나는 그를 안쪽으로 이끌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그것도 이렇게 오랜만에.”

“이번에 오납 쪽 관리를 명 받았습니다. 얼마 전 그곳 관리가 죽었는데. 듣지 못하셨습니까?”

“아…. 들었어. 그 자리에 네가 왔구나.”

저번에 가람이로부터 마 대사자가 그 구역 관리자로 자기 자식을 앉히려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마태령이 올 거라 생각하진 않냐고 묻더니, 이제 보니 물음이 아니라 떠보는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줄줄이 동생들을 놔두고 둘째 아들이 왜 이 자리에 앉았지? 그때도 들었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그다지 높은 벼슬이 아닌 것은 둘째 치고, 내가 그가 궐로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진짜 권력이 무섭네. 궐에서 궁인을 희롱하다 걸려 야반도주를 한 사람에게 관직도 주고.”

아무리 낙하산이어도 마 대사자가 양심이 있다면 궐에는 드나들지 않는 관직으로 챙겨줄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굳은 입매를 찻잔을 들어 가렸다. 잠깐의 반가움이 가시자 자연스럽게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자고 일어나니까 마태령은 사라지고, 그가 태자궁 궁인에게 나쁜 짓을 하려 했던 것도 모자라 사실은 그런 문제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말을 들었던 일이었다.

원래도 문란하게 노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건 범죄였다.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땐 이미 그가 야반도주를 한 뒤라 유야무야 넘어갔었지만 다시 마주한 지금은 이 자리가 가시방석 같았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다시 친하게 지낼 마음은 없었다. 마태령에게는 내 기억이 떠오르는 것보다 반가움이 빨랐던 게 다행일 것이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태자궁에 들여 차를 마실 일도 없었을 테니까.

“아…. 그랬었죠. 아버지께 얼마나 혼이 났던지. 꼬박 몇 년을 집에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 말에 한 발짝 늦은 반응을 돌려주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딘가 찝찝한 수긍이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런 일은 그에게 일상적인 것이라 이미 잊은 것일 수도 있었다.

대신 계속해서 날 빤히 바라보는 그에게서 어색하게 상체를 물렸다. 왜 그러냐는 물음을 담은 내 몸짓에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기분이 좀 묘하네요. 저하께서 이리 장성하신 모습을 절대 못 볼 줄 알았는데.”

달그락. 그 순간 유모의 손에서 미끄러져 내린 다기가 둔탁한 소음을 냈다. 태령은 묘한 웃음을 짓더니 그녀의 손을 제지하고 손수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만 찻잎을 던져 넣고 따르는 모양새가 썩 예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내 찻잔에 차를 따르며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저하께서야말로 어렸을 때 그대로이십니다. 성정도 그렇고, 외모도……. 어릴 때 고우면 커서 밉다는 말도 모두 거짓인가 봅니다. 정말 여인 여럿 울리셨겠는데요.”

“여인은 무슨. 그런 일 하나 없었어.”

나도 모르게 주몽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지만 서둘러 떨쳐 냈다. 그 애는 여인도 아니고 울지도 않았는데 왜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가 연심을 거절당하고 눈물을 떨구는 모습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제외하면 내가 좋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유부단하고 입지만 낮은 태자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정말 그대로라는 말을 반복했다. 계속 부정하는 것도 꼴이 우스워 가만히 있었다. 내가 그러든 말든 그는 한 손으로 차를 들어 마시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목소리가 낮아지며 은근한 낌새를 풍겼다.

“여전히 여름밤이면 그 해인지, 달인지 하는 놈이랑 같이 주무십니까?”

“그게 언제 적인데 그래. 겨우 몇 번이나 그랬다고.”

느닷없는 화제에 나는 당황스레 대답했다. 아주 어릴 때 왕비님의 명으로 잠깐 지낸 것 빼곤 같이 잔 적은 손에 꼽았다. 그럼에도 마치 내가 매일 그랬다는 듯이 말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마태령이 있는 동안 주몽과 같이 잔 적이 있었나? 그땐 내가 한창 아이를 밀어내던 때였는데.

왕비님의 말에 따라 한두 계절 보낸 것도 그가 떠난 이후였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정황이 맞지 않는 말이 신경 한구석을 긁었다.

마태령이 그런 날 보며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아무래도 그 귀신이 제게 옮아온 것 같거든요. 여름밤이면 이 태자궁이 생각나 잠을 못 이룹니다. 어찌나 팔이 쑤시던지.”

“귀신이라니? 팔은 또 무슨 소리야?”

“설마 했지만 정말 모르고 계신 겁니까? 아직도?”

“…….”

나는 입을 다물었다. 계속해서 주파수가 어긋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그 전파의 간극이 평소보다 더 강한 불쾌감을 주었다. 역시 잠깐의 반가움이 앞서 그를 들인 것이 잘못이었다.

그는 내 눈에 서린 짜증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웃음을 흘리며 의미 모를 말을 덧붙였다.

“이거야 원. 고마워해야 하는 일인지는 십 년이 넘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태자 저하의 앞이십니다. 언행을 주의해 주시옵소서.”

결국 조용히 시중을 들던 유모가 작은 목소리로 주의를 건넸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얼마나 내 기분이 티가 났으면 그녀가 다 나섰을까. 평소라면 날카롭게 벼려진 공기를 다시 훈훈하게 데웠겠지만 한편으론 꼭 그래야 하나 싶었다.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태령이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잠시 안부 인사만 드리려 찾아뵌 겁니다.”

안부 인사 한번 불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배웅을 하기 위해 따라 일어났다.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은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역시 아직은 모르겠네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만나서 뭐 할 게 있다고. 이제 오지 마.”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진심이었다. 회의 때는 어쩔 수 없겠지만 사적으로 만나는 자리는 피하고 싶었다. 확인하고 싶었다는 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말을 늘어놓고 내 반응을 살피는 일은 방금 전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태령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짧게 끊어 웃었다.

“여전히 농도 과하십니다.”

“…….”

“다음에, 또, 뵙지요.”

그가 생긋 웃으며 한 음절 한 음절 강하게 뱉었다. 흔한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나는 확연한 명령조를 느끼고 몸을 굳혔다. 얼떨결에 고개를 올리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질 낮은 흥미와 의심, 기대감 따위를 발견했다.

그 순간 나는 내 처지를 깨달았다. 그가 내 소속 궁인을 희롱했다는 사실과 책임감 없이 떠났다는 과거, 알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 찬 대화와 불편한 공기는 오직 나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었다.

이제는 팔다리가 꺾였지만 여전히 뻣뻣한 가치관이 남아 있는 나에게만.

마태령은 정치판에 발언을 얹을 수 있는 정식 관리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대귀족답게 자신의 위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서로가 그대로라고 말했지만, 글쎄. 나는 그만 새어 나오려는 헛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마가의 둘째 아들을 멀리한다는 선택지는 정치판의 허수아비인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상종의 권한은 내게 없었다. 아니, 태자의 껍데기를 쓰고 흠이 되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는 ‘지금’의 내겐 없었다.

마태령의 눈빛은 끊임없이 내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마주 보고 웃었다. 끌어 올린 입꼬리는 오랜 세월 가면처럼 굳은 것이라 어색한 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뱃속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내장을 모조리 녹이는 것 같았다. 명치가 돌처럼 굳고 위벽이 요동쳤다.

10여 년 만에 만난 그에겐 무지해서 용감했던 내 어린 시절이 그대로 갇혀 있었다. 그를 보면 내게도 영향력이 있을 거라 믿던 그때가 생각났다. 우리가 보낸 시간들이 개인의 영역에만 작동할 거라 믿었던 시절이었다. 제 생각을 꿋꿋하게 밀고 나가던 아이는 한심했지만 또 그래서 빛났었다.

그 퇴색된 시절을 마주하는 것은 침묵을 택한 지금을 더욱 부끄럽게 했다. 나는 정말이지 태령을 마주한 이 순간이 너무나도 창피했다. 도망치고 싶다가도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며 내가 아직은 꺾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은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그도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고개는 얼마나 의미 없이 흔들릴 수 있는지.

“……다음엔 미리 기별이라도 하고 와.”

다만 태자궁에는 다시 들일 생각이 없었다. 아직 춘아가 태자궁 소속 궁인이었다. 손님 대접이야 경치가 좋은 곳으로 이끌고 나가서 하면 된다. 이것만이 내가 입 밖으로 겨우 꺼낼 수 있는 말이었다.

다행히 그러한 속뜻이 읽히지 않았는지 나를 샅샅이 살피던 태령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갔다.

나는 떠나는 그를 보며 불순물처럼 떠도는 거부감을 겨우 억눌렀다. 허수아비 노릇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동안 더한 일도 못 본 척, 개한테도 ‘예’ 하고, 소한테도 ‘예’ 하며 지냈다. 이번에도 어려울 것 없었다.

그래, 그랬는데도…….

나는 그가 방을 벗어나자마자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체통 따윈 생각하지 않고 무릎을 세워 그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조각난 자존심이 바스락, 바스락 소리를 내며 발끝에 챘다.

새삼스럽게 지금까지의 내 침묵이 원망스러웠다.

“저하. 정말 괜찮으시옵니까?”

“……괜찮아.”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조심스럽게 묻는 유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유모는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멍하니 그녀를 보다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던 손을 내렸다. 조금 전부터 두통이 가시질 않았다.

“저하…….”

내 앞에 앉아 있던 춘아가 코를 훌쩍이며 나를 불렀다. 나는 정말 괜찮다며 그녀에게도 손을 내저었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까 스쳐 지나갈 때도 느꼈었지만 확연히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우연인지 내가 조금 전 붙잡고 걱정했던 그녀는 마태령과 마지막으로 얽혔던 춘아였다.

마태령이 찾아온 것이 며칠 전이기만 했어도 그놈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여러 가지로 마음이 걸려 그녀를 붙잡고 사정을 캐물었다. 그녀는 내 호의를 극구 거절했으나 결국 눈물을 떨구며 속을 털어놓았다.

들어보니 내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정말 간절한 상황에 처해 있기는 했다. 나는 무릎을 톡톡 두들기며 들은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래서 지금 네 형님이 갈 곳을 잃었다고?”

“예…. 마음 같아선 저희 집에서 편히 몸도 풀고 지내게 하고 싶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집에 보내기도 영 마음에 걸려…….”

말끝을 흐린 그녀는 다시 울음을 삼켰다. 마음에 걸린다고 하지만 그녀도 제 언니가 그곳으로 가야 함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언니는 몇 년 만에 아기를 얻었는데 원래 약했던 몸이 더욱 나빠져 잠시 친정에 내려와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사이 시댁이 있던 마을에 역병이 돌아 마을 전체가 시체 밭이 되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배 속에 있는 아기와 함께 혈혈단신이 되었다.

다행히 분가를 했던 시동생이 찾아와 그녀를 거두겠다고 했다. 그러나 마냥 좋은 일이라곤 할 수 없었다. 장가를 들자마자 다른 지방으로 분가를 했던 것도 모조리 그가 손쓸 수 없는 망나니로 소문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주 보진 못했지만 집안에 일이 있어 뵈는 날이면 온 집안이 그의 비위를 맞추느라 벌벌 떨었다고 했다.

“저는 그 얼굴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어머니 말로는 코가 부리부리하고 눈이 괴괴했다고 합니다. 형님도 그날 이후로 한숨도 푹 자지 못하고 있고요…. 홑몸도 아닌데 이러다 정말 잘못될까 무섭습니다.”

하지만 따로 방도가 없는 것이 현 상황이었다. 시동생이 찾아왔듯이, 보통 이럴 땐 남편의 동생이 형수를 새 부인으로 맞이하여 집안의 재산과 형수 모두를 보호했다.

이번에는 역병이 돌면 으레 그렇듯 마을을 통째로 태워 남은 재산은 없었지만 그녀의 배 속에는 아기가 있었다. 집안의 일원이 부족해진 만큼 새 생명을 쉬이 놓아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아이를 품고 있는 여인이 당장 그 집으로 가기가 싫다는데 그게 다 무슨 상관이지?

나는 서서히 달아오르려는 속을 삭이며 소매 안으로 주먹을 숨겨 쥐었다.

가고 싶지 않지만 가지 않을 수 없어 선택한 길이라면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싸워보려 했던 적도 있었고. 그 시도는 내 처지를 인식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때 들었던 몇몇 이야기가 항상 묵직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였다, 몇 년 전 기부금이 남아돈다며 골머리를 썩이는 유화 님께 새로운 제안을 드린 것은.

다행히 그때 드린 제안은 그녀의 적극적인 추진과 자본에 힘입어 거의 십 년이 지난 지금 안정적인 사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나는 현재 그 ‘사업’에 남아 있는 자리를 떠올리다 붓을 들었다. 요새는 유화 님이나 협보가 크게 바빠 보이지도 않으니 갑작스럽게 부탁해도 춘아의 누이를 맡아줄 인력은 충분히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간단하게 사정을 적은 종이를 곱게 접어 밀봉했다. 춘아에게 내밀자 그녀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받았다.

“이걸 들고 별궁에 가. 거기 부인이 한 분 계실 텐데 내가 전해달라고 했다면 아실 거야.”

“예? 예. 금방 다녀오겠사옵니다.”

“천천히 와도 돼. 그분께서 널 도와주실 거야.”

나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에게 부드럽지만 확실하게 말했다.

눈을 크게 뜬 그녀가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렸다. 그녀는 절을 올리더니 그대로 엎드려 한참 동안이나 일어나지 못했다.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가 가늘게 흘러나왔다.

“화, 황공하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나는 그녀를 말리며 침을 연신 삼켰다. 태령이 저지른 일을 알면서도 그를 거부하지 못한 주제에 그녀의 감사 인사를 받고 있자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을 턱 막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죄책감은 내가 응당 가져가야 할 몫이었다. 나는 그녀를 잘 달랜 뒤 유화 님께 내 안부도 전해달라고 덧붙였다. 겨우 뺨을 닦은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나갔다.

곁에 남아 있던 유모는 말없이 내 찻잔을 채워주었다. 그제서야 춘아에게 직접 묻지 못한 말이 작은 목소리로 새어 나왔다.

“춘아에게 넌지시 물어봐서 혹시라도 태자궁을 떠나고 싶다면 그렇게 하도록 도와줘.”

태령을 태자궁으로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 확실히 기별을 달라고 언질도 해두었다. 그러나 그가 오늘처럼 강요한다면 나로선 막을 방도가 없었다. 혹여나 마주칠 것을 대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이 정도였다.

왜 아무 잘못 없는 이가 상처를 받고 또 떠나야 할까. 춘아의 뒷모습 위로 혀에 바늘이 박혀 고통스러워하던 말의 모습이 겹쳤다.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앉아만 있던 나는 이번에도 방관자이자 주범이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어린 날, 도덕심 때문에 어설프게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닌 일은 모조리 화살이 되어 돌아왔었다. 그 뒤로는 내 가치관을 꺾고 부당한 일도 외면했다. 모두가 다치지 않게끔 나의 존재감을 지웠다. 나는 이 부여에서 완벽한 이방인이었고 충실한 ‘껍데기’였다.

그러니 내 판단대로라면 지금까지의 나의 행동은 더 이상 아무런 ‘결과’도 만들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 선택이 나와 오랜 시간 함께한 궁인조차 지키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가 그렇게 존재감 없이 살지 않았더라면 지금 태령에게 고개를 숙일 일도, 춘아가 태자궁을 떠날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내 과거 모든 행동들이 스스로 의미를 갖고 지금 그 결과를 눈앞에 내보이고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 다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심장이 뛰고 머리가 쿵쿵 울렸다. 내 선택에 대한 확신이 한번 무너지자 모든 행동들이 의심스러워졌다. 내 다른 행동들이 또 어디선가 다른 의미를 갖고 내가 모르는 결과를 만들어 내진 않았을까 두려웠다.

그 가능성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곧장 떠올랐다.

“……주몽.”

그 애가 날 왜 좋아하지?

순간 누군가 머리를 거대한 돌로 내려친 것 같았다. 그가 날 좋아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건… 그냥 예외였다. 이 부여라는 게임 속에서 일어난 작은 버그. ‘종이’가 제 기능을 하게 되는 날 바로잡힐 아주 사소한 에러였다.

어차피 그들의 감정은 모조리 퀘스트가 좌우했다. 협보가 그랬고, 마리가 그랬다. 그리고 그 힘은 운명이라는 종이에서 나왔다.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변화가 생겨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차피 ‘종이’에 맞닿아 있을 테니까. 죽은 듯 살았던 내가 일으킨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이 모든 ‘예외’라 생각한 것들이 사실은 내 행동의 결과라면? 나는 결국 붕 뜬 존재가 되지 못했고 내 행동 역시 그들과 긴밀하게 얽혀들었다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나는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손톱 끝이 따각따각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내가 이곳에 떨어진 첫날 신이 말했듯 여긴 ‘종이’라는 시나리오가 존재하는 게임일 뿐이었다. 나는 그들이 운명에 맞춰 걸을 수 있도록 퀘스트를 진행했다. 나는 단순히 정해진 시나리오를 따르는 플레이어였지 이야기를 휘저을 힘 따위는 갖추지 못했다. 철저한 외부인이었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만들어 낸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나는 가슴팍을 두드리다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속이 답답하고 구토감이 들었다. 몸을 벌떡 일으키자 현기증이 돌며 눈앞이 일순 까매졌다.

“저하!”

유모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나를 다급히 불렀다.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귀 바로 옆에서 뛰는 것처럼 쿵쿵대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나는 비틀거리며 방을 나서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입술을 막은 손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모든 사람은 지나온 길에 책임을 져야 한다. 세상이 두 쪽으로 갈라져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지나온 길은,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었나?

그렇지 않다면 나는…….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해냈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

“형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궁인들이 너무 호들갑을 떤 것이라니까.”

“……그래도 어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당분간 몸을 보존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주몽이 내 겉옷을 여며주며 걱정스레 말했다.

며칠 전 속이 뒤집힌 나는 그대로 닷새간 앓아누웠다. 주몽과의 잠자리나 연이은 퀘스트로 부담이 갔던 몸에 여러 가지 정신적 스트레스가 겹치니 몸이 과부하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러나 멀쩡해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열이 펄펄 끓기 시작하니 당연히 태자궁은 난리가 났다. 한달음에 불려온 의원은 마음을 안정시킨다는 혈 자리에 침을 잔뜩 놓고 탕약을 지어 주었다.

나는 심각한 얼굴로 마음을 가다듬으셔야 한다는 의원에게 밖에는 독한 겨울 고뿔로 앓아누웠다고 말해달라며 부탁했다. 그리고 옮을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모든 면회를 거절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하루에도 열댓 번씩 찾아온 주몽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오히려 지금 가장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그였다. 뒤흔들리고 있는 내 세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왕이 말을 보기 위해 마구간에 들르는 오늘까지 자리를 보전하고 있을 순 없었다. 나는 주변인들의 만류에도 몸을 씻어 병색을 지운 뒤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눈매가 날카롭게 선 주몽에게 줄곧 붙잡혀 있었다.

“정말 괜찮다니까. 이제 다 나았어.”

나는 시종일관 좁혀져 있는 그의 미간과 올라간 눈꼬리를 살살 쓸어주었다. 잠을 잘 자지 못했는지 눈가 근육이 경직되어 있었다. 내 손길에 그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졌다. 그가 깊은숨을 내쉬더니 내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나는 그 뒷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우습게도 내가 내린 결론은 부정과 외면이었다. 내 모든 추측은 오직 심증뿐이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답게 ‘종이’가 틀어쥐고 있는 주몽의 감정이 고작 제삼자로 살아온 나 때문에 생겼다는 보장은 없었다. 비겁하지만 나는 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는 진실을 들춰냈을 때 나타날 책임을 마주하기 두려웠다.

그를 더 달래는 대신 눈에 띄게 바짝 마른 말을 쳐다보았다. 근 일주일이 넘도록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짐승은 누가 보아도 이 중 가장 비루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형형히 빛나는 안광을 보며 저보다 더 명마는 없을 것임을 직감했다. 남은 것은 왕이 말을 주몽에게 하사하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예상대로, 잠시 뒤 방문한 왕은 주몽의 공로를 치하하며 말을 한 마리 하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내가 한 가지 예측하지 못했던 점이 있다면 왕 혼자만 마구간에 방문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의 옆에는 상태 점검을 핑계로 동행한 마 대사자와 마태령이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태령은 놀란 듯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눈썹을 으쓱이며 입술을 모았다. 나는 그 흥미 가득한 시선을 피했다. 반면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충분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저 말 좀 보십시오.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듯 보이는군요.”

표면적으론 아버지인 마 대사자에게 건네는 말이었지만 노골적으로 나를 향한 발언이었다. 내가 주몽을 아낀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도 가장 좋지 않은 말을 고른 그의 의도가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에게 가치 없는 것을 줌으로써 그의 뒷배인 나까지 모욕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반대하지도, 그렇다고 동의하지도 않은 채 침묵만이 공기 중에 맴돌았다. 그동안 마태령은 또다시 뱀 같은 눈으로 나를 훑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 대사자가 먼저 입을 뗐다.

“저도 저 말이 가장 적합해 보입니다, 전하.”

“저 말을 하사하도록 하마.”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향해 손짓했다. 하나의 의견일 뿐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것은 무언의 압박이 되어 왕을 조종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말을 보관할 장소 모두 이곳에 있었으니 일 처리는 빠르게 끝났다. 목적한 바를 마친 왕은 미련 없이 마구간을 떠났다. 마 대사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뒤를 따라야 할 태령은 팔짱을 끼고 섰다. 그의 눈은 이제 영문 모를 만족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입가에 오만한 미소를 드리우며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저하께서 정신을 차리셨다는 말씀을 하시긴 했지만 정말인 줄은 몰랐습니다.”

손끝이 움찔 떨렸다. 나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맞지만 이토록 노골적으로 들을 줄은 몰랐다. 뒤로 밀려나려는 발뒤꿈치를 꾹 누르며 작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가 과장된 손짓과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로 다행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언제까지고 저희도 어린아이들처럼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일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

“…….”

“참말로,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가 환하게 웃고 있어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줄곧 나를 관찰하던 눈은 내가 완전히 순응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던가. 간신히 주워 담았던, 나를 이루는 조각들이 다시금 틈을 벌려내었다.

“형님.”

그때 주몽이 작게 속삭였다. 나는 퍼뜩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그가 이곳에 함께 있다는 것마저 잊고 있었다.

그제야 떠오르는 걱정에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아무리 그가 의도한 상황이라지만 대놓고 가장 안 좋은 말을 주겠다는 태도에 상처받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주몽의 얼굴에서는 한 점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이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는 만족감도 없었다. 대신 그는 태령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분노나 억울함도 아닌 정체 모를 질척한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시선이었다.

“…….”

그것을 훔쳐본 것만으로도 뒷덜미가 선득해졌다. 언제부터 그가 태령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태령이 다시 온 뒤로 둘은 이번이 첫 만남이었다. 주몽이 그를 기억하고 있을까?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주몽은 고작 일곱 살이었다. 어쩌면 존재조차 잊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것이 내 헛된 바람이었음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몽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앞으로 나섰다. 인사를 하는 듯 마는 듯 애매한 고갯짓이었다. 동시에 내 팔을 잡아 그의 뒤로 당겼다. 당황해 두어 발자국 끌려간 게 다였지만 그의 의도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태령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반면 주몽은 계속해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리 바로 가시지 않아 다행입니다. 덕분에 감사 인사를 제때 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게 무슨 소리냐?”

태령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똑같이 어리둥절해하던 나는 순간 그가 왜 난데없는 감사 인사를 하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말릴 틈도 없었다. 주몽은 여유로운 태도를 감추지 않으며 진실을 폭로했다.

“이 말은 본디 명마인데 요새 입병이 생겨 끼니를 걸렀지요. 다시 먹이면 곧 부여에서 제일가는 말이 될 것입니다.”

“……뭐?”

“다 두 분이 힘을 써 주신 덕분입니다.”

주몽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의 한 듯 만 듯한 인사와는 확연히 다른 예의 바른 태도였다. 그 간극이 오히려 더 태령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그는 그럴 리가 없다며 화를 내더니 비쩍 마른 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더니 한 손을 뻗어 우악스럽게 말의 입을 벌리려 했다. 갑작스러운 폭력에 놀란 말이 앞발을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기운이 없다고 해도 독이 바짝 오른 저 성질이 어디 갔을까. 이빨을 딱딱거리며 그의 손을 씹으려는 모양새에 태령이 급하게 손을 뺐다.

주몽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이런, 조심하십시오. 남은 팔마저 쓰지 못하게 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뼈가 있는 내용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나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태령의 팔을 쳐다보았다. 그는 말에게서 빼낸 왼손을 공중에 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가 오른팔을 얌전히 늘어뜨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원래 태령이 왼손잡이였던가?

기묘할 정도로 순진한 의문은 무심코 넘겼던 몇 가지 행동들이 떠오르며 깨져 나갔다. 한 손으로 찻잎을 던져 넣던 모습이라든가, 왼손만 말의 입에 구겨 넣던 방금 전 행동까지. 분명 한 손만 사용하기엔 힘든 일이었음에도 그는 단 한 번도 오른손을 올리지 않았다.

경악으로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바뀐 게 별로 없는 것 같다던 내 말에 그가 무어라 답했던가.

‘그렇습니까? 전 제가 제법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예의상 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던 말이 지금은 너무도 크게 다가왔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정말로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태령도 내가 그것을 눈치챘음을 알아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의 눈이 피할 새도 없이 나와 마주쳤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그가 주몽을 향해 씹어뱉듯 분노를 토해냈다. 나는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수치심과 원망, 감추고 싶던 것이 밝히고 싶지 않았던 이에게 드러났을 때의 분노. 불과 얼마 전 내가 태령의 앞에서 느꼈던 감정이 지금은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태령이 거침없이 다가와 주몽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러나 주몽은 밀려나지 않았다. 쟤가 언제 저렇게 자랐지? 나는 급박한 상황에도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눈을 크게 떴다. 태령의 허리춤에 올까 말까 했던 아이는 어느새 그보다 조금 더 커져 있었다.

자라난 이가 멈춘 이에게 태연히 말했다.

“순수한 걱정이었는데 고깝게 들리셨나 봅니다.”

“네놈이 그럴 자격이나 있느냐?”

“누가 누구의 자격을…. 얼마 전에는 제 형님의 장성을 축하하셨다지요?”

주몽이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려 웃으며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을 좇은 태령이 나를 보더니 턱을 굳혔다. 다시 시선을 돌린 그가 주몽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가 잡은 멱살을 밀치듯 놓고 나가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태령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주몽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목덜미를 살피는 내게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반면 나는 다행히 옷감이 상한 것 외에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분노가 밀려왔다. 아무리 태령이 무례하게 군다 해도 그는 대귀족인 데다가 이제 정식 관리이기까지 했다. 지금은 한낱 마구간지기인 주몽이 감당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나는 숨을 고르다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냈다.

“너는 어쩌자고 쟤 앞에서 그런 말을 해!”

불안함을 기반으로 한 분노는 다그침의 형태로 터져 나왔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쌓였던 화는 그에 그치지 않았다.

“팔…. 팔은 또 뭐야? 넌 알고 있었어?”

“…….”

익숙한 침묵은 긍정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눈을 피하며 모로 돌리는 그의 고개를 다시 붙잡아 마주 보았다. 검게 일렁이는 눈은 그가 이미 알고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었다. 나는 순간 치솟는 미안함과 난처함, 당혹감을 이기지 못하고 원망의 말을 뱉었다.

“왜 안 말해줬어? 미리 말해줬을 수도 있잖아!”

길 잃은 원망이었다. 그가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되었을 수도 있고 나에게 알려주겠다고 약속한 적도 없었다. 십 년도 더 된 인연이었으니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주몽도 내 말이 한낱 고집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드물게 얼굴을 굳히더니 여전히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말을 하면, 뭔가 달라집니까? 그가 영원히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요.”

“……너 왜 말을 그렇게 해?”

“…….”

충격 어린 내 말에 그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냥… 미리 알았으면 배려할 수도 있었을 거잖아.”

그의 말대로 미리 알았다 한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주몽이 그런 말을 했을 때 하지 말라고 혼을 낼 수는 있었다. 하다못해 멍청하게 그의 팔을 볼 게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해 더한 상처를 주지 않을 수는 있었다.

태령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의 장애까지 기꺼워할 정도로 미치진 않았다. 자존심을 다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더욱더 그렇게 가버린 그가 걱정되었다.

“이럴까 봐…….”

주몽이 작게 중얼거렸다. 어느새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제가 이럴까 봐 말씀드리지 않은 겁니다.”

“…….”

“형님은 너무 다정하십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축축이 젖어 있었다. 그가 손끝을 내어 내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끄트머리만 간신히 쥔 모습이 더없이 약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말을 잃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적반하장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탓하지 못했다. 주몽이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에서 무언가 반짝이더니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흐트러진 옷자락과 바닥에 깔린 짚에 흔적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가 젖은 숨을 몇 번 삼키더니 원망스럽다는 듯 나를 탓했다.

“가끔은 형님이 아주 못된 분이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싫어 죽이려 들고, 마구간으로 내쫓고, 종국에는 이 나라에도 못 붙어 있게 하는 것이지요.”

“해야…….”

“그럼 저는 아무 죄책감 없이 형님을 납치해 갔을 텐데요.”

익숙한 위화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들었다. 눈물로 흐려진 눈동자 속에 사나운 욕망이 빛을 번뜩였다. 분명 그의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은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엉망으로 꼬이는 퀘스트와 영영 갈 수 없게 되는 집.

그러나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자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안타까움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넌 어쩌자고 이렇게 여릴까. 나에게 외면받는 것조차 견디지 못해 나로 하여금 원작을 틀게 했던 아이가 이젠 스스로 미움받길 바라고 있었다. 동시에 저만 사랑해주길 바란다.

모순적이었지만 우습게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내 소맷자락을 붙드느라 뺨을 닦을 손조차 없는 그가 가여울 뿐이었다.

“해야 나는…….”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었다. 대체 무엇을 말하려 한 걸까. 사실 나는 너와 같이 갈 수 없다고? 나는 돌아가야만 하는 곳이 있다고? 그러기 위해 너와의 약조 따위는 내버릴 생각이라고?

그중 단 하나라도 이야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스스로 목적도 모른 채 열린 입은 그만큼이나 쉽게 닫혔다. 주몽은 그런 나를 바라보다 눈썹을 늘어뜨리며 한숨과 닮은 웃음을 지었다. 그가 떨어진 내 손을 다시 잡아 올려 그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마르지 않은 눈물이 다시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

“제 말을 마음에 담아 두실 필요 없습니다. 형님께서 타고나신 다정한 성정을 어찌할 순 없지요.”

그는 단지 투정이었다며 희미하게 웃었다. 태어날 때부터 곁을 지켜왔음에도 그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는 듯 쓸쓸하고 고독한 얼굴이었다. 거짓이었지만 동시에 참인 그 본질이 마음 한구석을 섬뜩하게 도려냈다.

“다만…….”

그가 말끝을 늘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젖은 코끝이 이마를 스치고 내 뺨에 그의 눈물을 옮겼다. 나는 얼어붙은 듯 가만히 서서 그 흔적을 받아냈다. 그가 늘어뜨린 팔을 들어 천천히 내 허리를 감았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듯 흘러들어 왔다.

“오늘 밤은 저와 함께 보내주십시오.”

“…….”

대체 내가 뭐라고 너는 나를 좋아할까. 나는 이 세계의 불순물 같은 존재일 뿐인데.

정말 내 행동이 너를 이런 최악의 선택지로 밀어 넣었나. 머리 터지게 고민하다 결국 묻어두었던 의문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어진 입맞춤을 거부하지 못했다. 고작 두 번 남은 잠자리 횟수와 불안감, 그러나 그가 의심하게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뇌 속에서 뒤죽박죽 섞이다 한꺼번에 녹아내렸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짠맛은 그를 밀어내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이유를 찰흙처럼 뭉쳐 결국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젠 나조차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4권에 이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