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2/27)
  • 10.

    사냥 대회가 끝나고 겨울이 찾아왔다.

    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회의장에서 걸어 나왔다. 귀족들이 “어흠, 어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나를 힐끔댔다. 명백히 질 낮은 호기심이 어린 눈길이었다.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한 오이가 이상한 분위기에 칼자루를 꽉 쥐는 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표정을 관리할 노력도 하지 않고 태자궁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형님. 이제 오십니까.”

    날 맞이해준 사람은 주몽이었다. 회의가 끝나면 같이 차를 드는 게 어떻겠냐는 말에 그는 때를 맞춰 태자궁에 와 있었다. 딱 맞는 타이밍에 나는 속으로 웃음 지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몇 번 머뭇거리며 그의 눈치를 보다 한숨을 쉬길 반복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주몽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져갔다. 조금 전부터 불안한 낌새를 느낀 오이는 아예 흙빛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검 자루에 매달린 술이 다 뜯어지기 전에 입을 뗐다.

    “해야. 우선 미안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뭐든 형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주몽이 얌전히 놓여 있던 내 손을 잡고 손등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내 말에 불안해졌을 텐데도 나를 위로하는 모습에 죄책감이 물씬 들었다. 나는 저절로 숙여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다음 말은 애쓰지 않아도 침통하게 흘러나왔다.

    “전하께서…… 너를 마구간으로 보내라 명하셨어.”

    “……예?”

    주몽이 멍하니 반문했다.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으니 한 번에 받아들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놀람에서 의문으로, 이어 분노로 바뀌는 눈을 지켜보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먼저 분노를 터뜨린 사람은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주몽이 느릿하게 눈만 들어 화를 내는 오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오이는 납득할 수 없는 일에 주변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가 제 몫으로 주어진 차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항변했다.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주몽이 딱히 정치 세력에 위협이 되는 일을 벌인 적도 없지 않습니까!”

    나는 그런 그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주몽과 오이의 사이는 빈말로도 친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주몽은 가람이처럼 오이를 대놓고 미워하진 않았지만 데면데면하게 굴고 말도 잘 붙이지 않는 게 십 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오이 역시 어딘가 주몽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티가 났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열심히 둘을 붙여봤지만 그렇게 굳어져 버린 관계에 제아무리 퀘스트가 떠도 동료애가 생길까 의문일 지경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이가 주몽의 부당한 처사에 나보다 더 크게 화를 내주고 있었다. 정말 호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착한 사내였다.

    “하지만 귀족들이 너무 강경하게 밀어붙여서 내가 말릴 수가 없었어……. 이게 다 내가 무능한 탓이겠지.”

    정작 화를 내야 마땅할 사이인 나는 가만히 있는데. 대신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자책을 했다. 내 의기소침한 모습에 오이가 허둥지둥 날 달랬다.

    주몽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천대를 받았다지만 제 몫의 궁에서 궁인들과 자란 아이였다. 심지어 무술 대회 이후엔 왕이 직접 스승을 붙여주며 호의를 드러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왕이 지저분하고 낡은 마구간에서 고된 일을 하라는 명을 내렸으니 충격일 만도 했다.

    출신이 애매한 주몽은 그가 하는 일이 곧 신분이 되었다. 내가 어여삐 여기고 왕이 신경을 쓴 그는 귀족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마구간에서 일한다면 더 이상 전과 같은 대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고된 건 둘째 치더라도 아무리 좋게 보아도 마구간지기는 귀족이 할 일이 아니었다.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안해. 나도 전하께서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 귀족들이 갑자기 널 마구간으로 보내야 한다고 청을 올리는데 몇 번 고민해보지도 않으시고 어찌 그렇게 승낙하실 수 있는지…….”

    물론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왕이 눈여겨보던 주몽을 망설임 없이 마구간으로 보낸 이유는 그 사건이 ‘종이’에 쓰여 있기 때문이었다. ‘종이’에 쓰여 있는 일은 바뀔 수 없는 운명이나 다름없다. 그는 그저 피와 살에 입력된 명령을 따랐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귀족들은 의심할 기회조차 없던 왕과 처지가 달랐다. ‘종이’가 미완성인 채로 사라진 대가는 항상 그렇듯 내가 톡톡히 치러야 했다.

    [서브] 의심을 지워라

    ‘왕’이 ‘주몽’을 마구간에 보내려 합니다. 갑작스러운 명에 귀족들이 당황하는군요. 그들이 ‘왕’의 결정에 의심을 품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성공 시 보상 : 귀족들의 간섭 제거, ‘주몽’의 원활한 마구간 입성

    실패 시 결말 : ‘왕’의 자질 의심, ‘주몽’의 뒷조사, 영웅 서사에 균열 발생

    며칠 전 떠오른 퀘스트 창이었다.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회의가 멀지 않았기 때문에 그날 왕이 명을 내릴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실패 시 결말’이 유독 극단적인 메인 퀘스트가 아니라 서브 퀘스트라는 점도 한몫했지만 사실 전부터 이러한 내용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냥 대회부터는 비교적 ‘주몽’의 이야기가 동명왕편에 잘 나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영감은 이미 의외의 곳에서 얻어 대비를 해두었다. 사냥 대회 날, 내가 사내들에게 건넨 쪽지는 바로 이런 날을 위해서였다.

    [주몽은 그대로 두었다간 장차 화가 될 인물이니 마구간에 보내 그 충성을 시험하소서.]

    나는 주몽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가문 다섯 개에 모조리 모함을 담은 글을 보냈다. 물론 그 다섯 가문은 그날 수풀 뒤에서 숙덕거린 두 명을 포함해 가람이의 뒤를 쫓아다니던 다섯 명이 속한 곳이었다.

    다가올 퀘스트도 해결하고, 혹시 모를 해코지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바랐던 일석이조의 효과는 오늘 드러났다. 원래라면 왕의 결정에 의심을 품어야 할 귀족들은 저들이 먼저 나서서 주몽을 마구간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입술만 움찔대고 초조한 티를 내면서도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총애하던 아이가 부당한 일을 당하는데도 입도 벙긋하지 않는 게 의심스러워 보일만도 했지만 다행히 그들은 조롱하는 눈빛만 보낼 뿐 내 태도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십 년 전 그날 이후, 회의장에서 내 위치는 줄곧 허수아비 태자였던 탓이었다.

    안타깝게도 오늘 그 회의장에서 가장 만족스러워하는 사람은 나였지만.

    “음……. 해야.”

    그러나 막상 주몽의 얼굴을 마주 보니 애써 잠재워 놓았던 측은함이 밀려들어 왔다. 비록 내가 내린 명은 아니었지만 숟가락을 얹은 입장에서 마음이 불편한 것은 당연했다. 나는 눈치를 보다 나 역시 오이처럼 분노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 내가, 내가 다시 가서 이야기해 볼게. 전하께 사흘 밤낮으로 청을 드리면…….”

    정말 갈 생각은 없었지만 가게 되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왕이 명을 물리지 않을 것은 내가 제일 잘 알았다. 하지만 순해 빠진 주몽은 팔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형님. 무리하지 마십시오.”

    그는 내가 걱정이라도 할세라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직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게 훤히 보이는데도 티를 내지 않았다.

    “그간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던 것 다 압니다. 이번 일로 관심이 줄어든다면 형님께서도 편해지시겠지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눈을 내리깔며 말하는 그의 자태가 처연하다 못해 가슴이 아렸다. 어떻게 저렇게 착하고 여린 아이가 태어났을까. 나는 충격을 받고 슬퍼하는 그를 달랠 생각만 했지,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그의 심성에 안 그래도 죄책감으로 너덜너덜한 가슴이 찢어져 형체도 남지 않은 것 같았다.

    “해야…….”

    “그보다 혹시 형님께 무례하게 군 귀족들은 없었습니까? 말씀을 들어보니 회의장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심지어 그는 나를 걱정하기까지 했다. 나는 맞잡은 손을 살살 흔들며 눈을 피했다. 귀족들과의 회의에서 무시를 받은 지 꽤 되었지만 동생들에게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태자로서 지켜야 할 위엄은 둘째 치더라도 매번 걱정시키기 싫어서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내 태도에서 주몽은 답을 얻어간 듯했다. 무능해서 미안하다는 둥 자책을 해댔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불편한 주제에서 나를 꺼내준 사람은 칼집을 쥐락펴락하던 오이였다.

    “그럼 언제부터 마구간에 가야 한답니까? 설마 오늘은 아니겠지요?”

    “아직 정식으로 교서가 내려오지 않았어. 빠른 시일 내로 보낼 것 같긴 하지만…. 그건 내가 최대한 늦춰 볼게.”

    “무슨 방도라도 있으신 겁니까?”

    오이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닌데. 나는 볼을 살짝 붉히며 대답했다.

    “마구간을 부수고 다시 지을 작정이야. 제아무리 왕이라 해도 보낼 곳이 없는데 어떡하겠어?”

    “…….”

    방 안에 잠시간 침묵이 감돌았다. 무엄한 발언이었지만 이곳에서 그걸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마구간으로 쫓겨난 것까지 내가 바꿀 순 없었다. 그건 내가 손댈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그 후의 일은 달랐다. 원래라면 허름한 마구간에서 일을 해야겠지만 나는 주몽을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대대적으로 증축을 하고 보수를 해서 좀 더 편안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도록 만들 예정이었다.

    “그… 래도 되는 것입니까?”

    “하지 말라는 말은 없었잖아. 내가 태자인데, 누가 뭐라고 해?”

    나는 뻔뻔하게 우겼다. 이미 마구간도 다 보고 왔다. 말이 아무리 귀하다지만 당연히 사람이 사는 궁만은 못했다. 마구간지기가 지내는 공간도 옆에 따로 있었는데 어찌나 작고 누추한지 주몽 때문이 아니더라도 마구간지기의 노동 인권을 위해 들고 일어날 뻔했다.

    “귀족들이 반대하면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바꿨다고 하면 돼. 뻔히 보이는 수작이겠지만 어쩌겠어. 왜 마구간이냐고 물고 늘어지면 수라간이랑 세답방까지 싹 바꿔버리지 뭐.”

    태자라서 좋은 점은 돈 쓰는 일에 있어 제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만만한 내 태도에 오이가 헛웃음을 짓다 급히 헛기침으로 노선을 틀었다. 주몽은 터지려는 웃음을 참는지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입꼬리를 움찔거린 그가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그럼 저는 언제쯤 마구간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빨라야 봄이 오고 나서겠지. 날도 추운데 겨울에 일하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떡해.”

    “감사합니다. 형님 덕분에 편안히 제 할 일을 할 수 있겠습니다.”

    주몽이 웃음기 섞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마구간 일이 편해지면 얼마나 더 편해지겠냐마는, 저렇게 듣기 좋은 말이라도 해주니 기분이 나아졌다.

    “일단 푹 쉬어. 곧 설인데 갖고 싶은 것은 없어? 성년이 된 기념으로 선물을 해주고 싶은데.”

    주몽은 얼마 전에 성년식을 치른 참이었다. 처음 왔을 땐 알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언제 이렇게 자랐담. 대견하면서도 못내 씁쓸한 맛이 입 안에 맴돌았다. 그동안 고민을 마친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형님께선 궐 밖에 나가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얼마 전 사냥 대회 때 나가보았지.”

    “그런 것 말고, 개인적으로 말입니다. 궐 앞 저잣거리에는 온갖 구경거리가 넘쳐난다고 합니다. 경치 좋은 언덕에는 봄이면 꽃들이 산들산들 흔들린다고 하더군요.”

    눈을 반짝이는 아이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한창 힘이 넘칠 시기에 궐에만 갇혀 있으려니 답답할 만도 했다. 궐 밖엔 나가 보고 싶은데 첫 나들이라 겁도 날 테고. 선물로 고작 보호자 역할을 해달라는데 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설이 지나고 날이 풀리면 한번 나갔다 오자.”

    갑작스럽게 막중한 업무가 생긴 호위 무사가 어이없게 쳐다보았지만 나는 슬며시 눈을 피했다.

    “감사합니다. 형님.”

    주몽이 마구간 따위는 잊은 듯 환하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 모든 시선을 빼앗겼다. 내가 떠나지 못한 나이를 목전에 앞둔 그는 짙붉은 색 꽃이 막 피어오르려는 것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확실히 엄중한 호위가 필요할 것 같았다.

    ***

    “아바마마께서 그놈을 마구간에 보내라 명하셨다고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격한 반응을 예상했던 가람이는 생각보다 무덤덤한 태도를 보였다.

    “그 약삭빠른 놈이 사고를 쳤을 리는 없고. 그게 말이 됩니까?”

    심지어 그럴 리 없다며 미간을 찡그리기까지 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가람이를 바라보았다. 당장 북녘궁으로 달려가 ‘드디어 네게 어울리는 자리로 가게 되었구나.’ 하고 비웃을 줄 알았는데. 의젓한 척해도 상처받았을 주몽을 들쑤실까 봐 걱정이 되어서 여태껏 말하지도 못했다. 지금도 오랜만에 말을 타러 간 가람이가 뚝딱뚝딱 공사 중인 마구간을 보고 나서야 내게 달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그는 주몽을 옹호했다. 그제야 안심을 한 나는 웃으며 가람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가람이, 다 컸네. 솔직히 꼴 좋다며 비웃을 줄 알았는데.”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그나마 격이라도 맞추게 북녘궁에 남아 있는 편이 훨씬 낫지요. 어차피 형님께선 그놈이 노비가 되어도 보살피실 분이지 않습니까.”

    “설마…….”

    나는 반사적으로 부정했지만 돌아오는 시선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곁에 있던 유모와 오이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맞장구를 치기엔 민망했다. 어색하게 웃는데 인상을 팍 찌푸리고 있던 가람이 내게 바싹 붙었다. 그가 내 팔을 붙잡고 어리광을 부렸다.

    “마구간을 새로 해주실 것까지 있습니까. 어차피 이제 마구간지기인데 이참에 연을 끊으시지요.”

    나는 하하 웃으며 가람이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이미 진심을 본 뒤라 괜히 심술을 부리는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그가 “형님!” 하고 빽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로 뺐다. 나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알겠다는 포즈를 취해 보였다. 분위기가 가볍게 풀렸다.

    그 틈을 타 적당한 때를 고르고 있던 질문을 넌지시 던졌다.

    “왜 그렇게 됐는지 궁금하지는 않고?”

    “마구간에 떨어지든 돼지우리에 떨어지든 저랑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다시 생각하니 그 재수 없는 낯짝이라면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일입니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가람이 숨을 몰아쉬며 대꾸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일순 표정을 굳혔다.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음산했다.

    “설마 그 자식이 형님께 폐를 끼친 것은 아니지요?”

    “아니야.”

    나는 단박에 그 말을 부정했다. 가람이는 귀족들이 주몽을 마구간으로 쫓아낸 일로 나까지 꼬투리를 잡혔을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주몽은 내가 총애하던 아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잘 나가던 그의 인생에 폐를 끼친 사람은 도리어 나였다. 아무리 승승장구할 미래를 알고 있다지만 죄책감은 물과 같아서 마음 사이사이 생겨난 흠에 귀신같이 스며들어 마르지 않았다.

    아무튼 가람이는 주몽이 마구간으로 가게 된 연유에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주몽을 쫓아낸 귀족들이 알고 보니 모두 자신을 따르던 무사의 가문이라니. 나였더라도 한 번쯤 조사해보고 싶을 수상쩍은 우연이었다.

    물론 배후에 내가 있는 걸 들킬까 우려한 것은 아니었다. 나야 솜씨 좋은 사기꾼을 썼으니 들통날 염려는 없었다. 다만 친우들이 나쁜 사람들이었다는 걸 깨달은 가람이가 충격을 받을까 봐 걱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장본인은 내가 내어준 다과를 먹으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나는 엉덩이를 한 번 더 두드려 주려다 손목을 붙잡혔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팔을 놓아주었다.

    “그럼 됐습니다. 저는 이만 연무장에 가보겠습니다.”

    “다시 말 타러 가보지 않고? 궁인에게 물어보면 임시로 말을 보호하고 있는 곳을 알려줄 텐데.”

    “다음에요. 형님과 있다 보니 벌써 훈련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가 하늘을 힐끔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나는 태자궁을 나서는 그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평소에도 배웅을 하기 위해 흔히 있던 일이었다.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한 가람이가 궁 입구에 멈춰서서 인사를 건넸다. 나도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가는 그의 뒤를 쫓았다. 걸음을 돌리려 했던 오이가 서둘러 쫓아와 나를 붙잡았다.

    “태자 저하. 어디까지 배웅하실 생각이십니까.”

    “나 지금 배웅하는 거 아닌데? 나도 연무장에 갈 거야.”

    “아니…… 저하께서 거길 어인 일로 가십니까.”

    오이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이마를 짚었다. 순간 너무나도 힘들어 보이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러나 그 행동이 오히려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날 말 안 듣는 막냇동생처럼 보던 그가 심호흡을 하더니 답답함을 토로했다.

    “대체 요새 왜 이렇게 궁을 헤집고 다니시는 겁니까. 함부로 돌아다니시면 위험하다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잘생긴 호위 무사가 지켜줄 텐데 뭐가 문제야?”

    “…….”

    오이가 대화를 포기했다. 타협할 생각이 없던 나도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내가 저지르는 이상 행동이 대부분 그렇듯 이번 역시 얼마 전 모습을 드러낸 퀘스트 때문이었다.

    [메인] 영웅의 벗

    대의는 혼자 이룰 수 없습니다. 모든 영웅에게는 그와 목숨을 함께한 벗이 있었지요. 훌륭한 벗과 함께라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해낼 수 있는 법입니다. ‘주몽’에게도 큰 도움이 될 벗들이 필요합니다. 그 영광의 자리를 차지할 세 사람을 찾아주세요.

    - ‘오이’ (1/1)

    - ‘마리’ (0/1)

    - ‘협보’ (1/1)

    성공 시 보상 : ‘주몽’과 ‘오이’, ‘마리’, ‘협보’ 사이의 우정 발생, ‘주몽’의 정신적 성장

    실패 시 결말 : ‘하백’과 ‘창조주’의 분노로 세상 멸망

    아주 오래전 신이 힌트랍시고 귀띔해주었던 내용이 정식 퀘스트가 되어 내려왔다. 그때 신은 ‘종이’의 지배를 받지 않는 그들이 어떻게 자랐을지 모른다며 미리 거둬 살피라고 말했었다. 덕분에 오이와 협보는 모두 내가 데리고 있었지만 마리는 아직까지 찾지 못한 채였다.

    본격적으로 ‘마리 찾기’에 돌입한 하루 이틀 동안은 사람 하나 찾는 것쯤이야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제 정식으로 퀘스트가 내려왔으니 이전에 신이 말했듯이 ‘마리’의 머리 위에는 붉은 화살표가 둥둥 떠다니며 존재감을 알리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생각보다 넓은 궐은 아무리 돌아다녀도 붉은 화살표는커녕 붉은 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번엔 가람이를 따라가서 연무장 무사들 중에 있나 살펴볼 생각이었다.

    마침 혼자 앞서나가던 가람이가 뒤에서 소란이 벌어진 것을 깨닫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상황을 금세 파악한 그는 반색을 하며 내 손을 잡았다.

    “저를 보러 오시는 거지요? 얼마든지 오십시오! 저는 형님께서 오신다 하니 너무 좋습니다.”

    가람이의 손은 널찍하고 마디마디가 붉었다. 나는 그 손을 맞잡고 어린아이들이 하듯이 위아래로 흔들었다. 신이 잔뜩 난 우리를 보던 오이가 작은 한숨을 삼켰다. 무언의 동의에 나는 그의 마음이 바뀔세라 걸음을 재촉했다.

    연무장에 도착하자 훈련을 감독하던 무사가 헐레벌떡 뛰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태자 저하! 여긴 어인 일로 오셨사옵니까?”

    “그저 가람이가 훈련받는 모습을 구경하러 왔을 뿐이다. 나는 없는 셈 치고 할 일들 하거라.”

    연무장을 가득 메워야 할 무사들은 절반 정도만 나와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가람이를 보내놓고 빠르게 사람들을 훑었다. 혹시 내가 놓친 사람이 있을까 봐 구경한다는 핑계로 구석구석 헤집기도 했다. 거의 탐방을 하는 나를 무사들이 아닌 척 힐끔댔다. 아랑곳하지 않고 무기 보관소까지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역시 허탕이었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도 얼마 뒤면 설이니까…….”

    설을 맞이해 열리는 궁내 연회에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참석한다. 평소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보기 힘들었던 귀족들까지 모조리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거기서는 마리를 찾을 수 있겠지.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 끈이 사실은 썩은 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국 나는 아무런 실마리도 얻지 못한 채로 주몽과 약속한 날을 맞이했다.

    ***

    “나 이렇게 어두운색 옷 진짜 오랜만에 입어 봐.”

    나는 주몽의 귓가에 입을 붙이고 작게 소곤거렸다. 더운 김에 그의 귓바퀴가 연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가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눈을 시퍼렇게 뜬 오이가 내 팔을 붙잡고 당겼다.

    “도련님. 눈에 띄는 행동은 자중해 주십시오.”

    “아우한테 귓속말하는 게 뭐가 어떻다고.”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몸을 바로 세웠다. 궐을 나오기 전 오이와 굳게 약속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에 띄는 행동 하지 않기, 주몽이나 그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기, 노을이 지기 전에 돌아오기.’

    오이는 이 세 가지만큼은 꼭 지켜달라며 불안한 눈빛으로 단단히 일렀다. 옆에서 나갈 채비를 돕던 유모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신신당부를 했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입니다, 저하.’

    아주 오래전 수학여행 안전교육 때나 듣던 소리를 어찌나 들었는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성년을 훌쩍 넘은 성인 남자가 들을 소리는 아니지 않나.

    그러나 그 작은 불만마저도 두근거림에 묻혀 저 아래로 사라졌다.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던 이곳에서의 삶을 증명하듯 나는 십몇 년을 살며 궐 밖으로 한 번 놀러 나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밖을 제대로 구경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설렘을 내리누르며 짙은 색 옷자락을 매만졌다. ‘태자’의 복식은 흰색 위주라 어릴 적 이후 처음 해보는 유색(有色) 옷차림이 어색했다. 놓인 수를 훑는 내게 주몽이 말을 걸었다.

    “먼저 어딜 가고 싶으십니까?”

    “음……. 나 잘 모르는데. 너 그때 저잣거리에 나가보고 싶다 하지 않았어? 거기부터 갈까?”

    “저잣거리가 어느 쪽이지?”

    주몽이 눈을 깜박거리며 오이를 바라보았다. 꼼짝없이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된 오이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도 십 년 가까이 나를 보필하느라 궐 안에서만 지냈던 건 매한가지였다.

    그가 자신 없는 표정으로 우리를 큰길로 이끌었다. 다행히 일정 기간마다 열린다는 장은 오늘 열려 저 멀리서부터 보였기 때문에 찾기 어렵지 않았다.

    나는 장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살짝 벌렸다. 처음 마주한 부여의 저잣거리는 상상보다 훨씬 활기차고 부산스러웠다. 사람들은 저마다 물건 보따리를 이고 다니며 소리 높여 손님을 찾았다.

    나는 툭툭 부딪혀 치이면서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구경했다. 오이가 표정을 굳히며 칼집을 들어 막았지만 사람이 워낙 많아 아예 닿지 않기란 어려웠다. 거기다 보호하는 대상마저 정신을 빼놓고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자꾸 두어 걸음 뒤처지길 반복하자 주몽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손을 내밀더니 내 손을 꽉 잡았다. 나는 그의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질질 끌려다니는 모양새였지만 주변을 구경하기엔 한결 편했다. 그대로 쉴 새 없이 물건을 가리키며 물음을 던졌다.

    “저건 뭐야? 경단인가? 평소에 먹던 거랑 다르게 생겼네.”

    “쑥개떡입니다. 도련님께서 입에 대실 만한 것은 아니온데….”

    “이건 탕후루인가? 근데 여기도 탕후루가 있나.”

    “탕….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으나 이건 과일에 모양을 낸 뒤 나무 꼬치에 꿴 것입니다.”

    “저기 있는 건 뭐야? 맛있겠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내가 입을 마저 떼기도 전에 오이가 말없이 나가 노란 호박엿을 사 왔다. 나는 물고 있던 유밀과를 호박엿과 맞바꾸며 주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이미 내가 넘겨준 쑥개떡과 과일 꼬치가 들려 있었다.

    표정이 살짝 어이없어 보이기도 하고. 나는 눈치를 보다 엿을 뚝 부러뜨렸다. 주몽의 보호자 역할로 나온 것인데 어째 내가 더 신나 보였다.

    “상권 살리기야, 상권 살리기…….”

    나는 아무도 묻지 않은 변명을 중얼거리며 엿 조각 중 큰 것을 주몽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그가 볼을 볼록하게 부풀리며 눈꼬리를 휘었다. 맛있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다. 오이에게도 주려고 손을 뻗었는데 주몽이 또 덥석 받아먹었다. 어지간히 입에 맞는 모양이었다.

    수라간도 호박엿을 만들 줄 알까. 혹시 모르니 하나 더 사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저 멀리서부터 우당탕탕― 하고 소란이 일더니 남자들이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이 새끼야! 너 거기 안 서!”

    “이보게! 다들 저놈 좀 잡게나! 허 대감 댁 패물을 훔친 도둑놈이야!”

    이 대낮에 도둑이라니. 멍청한 건지 간이 큰 건지 분간이 안 갔다. 소란이 가까워지자 우리는 혹시라도 휘말리지 않게 옆길로 피했다. 그 앞으로 오이가 칼자루를 쥐고 굳게 섰다. 주몽은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팔만 뒤로 돌려 나를 그의 뒤로 보냈다.

    나는 몰래 그의 손에서 과일 꼬치를 쏙 빼내어 호박엿과 바꿔 쥐었다. 그러느라 주몽의 옆구리 쪽으로 얼굴을 빼고 있는데 원색적인 욕설이 귓가에 때려 박혔다.

    “허억, 헉. 씨팔 새끼들이, 좆나게 끈질기네.”

    아직 앳된 목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들었다. 인위적인 붉은빛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며 직선을 그렸다. 나는 멍하니 그 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빠르게 사라지는 남자애의 작은 뒤통수 위에 달랑거리는 것은 분명 붉은 화살표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먹던 꼬치로 앞사람의 등을 쿡쿡 찔렀다.

    “저, 저, 저거. 저거 잡아.”

    “예?”

    “저 애 잡으라고!”

    등이 찔린 주몽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가 이마를 찡그렸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다 주몽의 손을 홱 뿌리치고 달려 나갔다. 그러나 채 다섯 걸음을 가기도 전에 그가 다시 나를 붙잡았다. 크게 놀란 오이가 뛰어와 큰 소리로 외쳤다.

    “태, 아니 도련님!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분명 도둑질은 나쁘지만 저희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 제발! 이것 좀 놓아봐.”

    나는 붙잡힌 팔과 아이가 사라진 길을 번갈아 바라보다 꼬치로 허공을 휘저었다. 쪼끄만 게 어찌나 빠른지 이제 화살표는 점이 되어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애원하건 말건 나를 잡은 강한 힘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울상을 짓고 주몽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평온한 태도로 물었다.

    “중요한 일입니까.”

    내 다급한 얼굴에서 대답을 확인한 주몽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사라진 길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단단히 틀어쥐었던 내 팔에서 손을 미끄러뜨렸다. 그 손은 원래 그 자리였다는 듯이 내 손을 움켜쥐었다. 다시 돌아온 그의 얼굴은 내가 좋아하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대신 다시는 이 손을 놓으시면 아니 됩니다.”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입을 떼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내 손을 고쳐 잡은 그가 뛰기 시작했다. 저잣거리의 위치를 물었던 것치고 능숙한 뜀박질이었다.

    그러나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헐떡거리며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

    “아니, 헉, 뭐가, 허억, 저렇게 빨라?”

    아이, 아니 마리는 빨랐다. 얼마나 빠르냐면 다람쥐도 아닌 것이 그새 골목 사이로 쏙 사라져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화살표를 볼 수 있는 내 눈에도 띄지 않았다. 화살표의 존재는 인파 속에 파묻힌 사람을 찾아내기엔 좋았지만 골목 사이로 숨어들어 길이 갈라졌을 땐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여는 고대답게 법이 간단명료하고 처벌은 가차 없었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그 일가족은 노비가 되었으며 도둑질을 하면 그 물건의 12배를 배상해야 했다. 거친 욕을 뱉고 시장 바닥을 제집처럼 돌아다니는 아이가 뭘 훔쳤든 그 열두 배를 배상할 능력이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배상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더라.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마리가 멀쩡한 꼴로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굳이 법이 아니더라도 저기서 숨을 몰아쉬며 이를 벅벅 가는 사내들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같은 목표물을 둔 덕분에 우리는 비슷한 장소를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그들보다 더 빨리 아이를 찾기 위해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치려 할 때였다.

    “허억, 씨팔, 똥통에, 헉, 빠져 뒤질 새끼.”

    “우라질, 하아, 노비 주제에…….”

    그들이 토해내는 욕설 속에 섞인 특정 단어가 발걸음을 붙잡았다. 나는 곧장 걸음을 멈추고 주몽의 손을 당겨 되돌아갔다.

    “방금 뭐라고 했지?”

    “씨팔, 뭐야? 안 그래도 바쁜데.”

    숨을 고른 사내가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들었다. 나와 마주친 얼굴이 곧 오묘하게 변했다. 그는 입술을 모으고 내 전신을 두 번 훑어보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매를 찡그렸다. 그러나 끈적하고 더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은 사내는 입술을 삐딱하게 올렸다.

    “곱상하게 생긴 도련님께선 이런 일에 관심 가지시는 거 아닙니다, 예? 좋은 말로 할 때 꺼지세요.”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얼굴을 굳힌 오이가 칼을 뽑았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이 사내의 목을 겨눠졌다. 그제야 조금은 상황 파악이 됐는지 내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눈이 주몽과 오이를 번갈아 오갔다. 목에 칼이 들어와 있지 않은 다른 남자는 이미 엎드린 뒤였다. 나는 한 발자국 다가가 물었다.

    “노비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마, 말 그대로입니다! 허 대감님 댁에서 부리던 노비가 그 댁 패물을 가지고 도망을 쳤습니다. 주인의 은혜도 모르는 아주 고약한 놈이지요!”

    “그 도둑놈이자 노비가 네놈들이 쫓던 아이라 이 말이지.”

    바로 나오지 않는 대답에 오이가 칼날을 좀 더 들이댔다. 목에 가느다랗게 실선이 생기자 남자가 새된 소리를 냈다. 동료의 처참한 꼴을 보던 다른 남자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간절해 보이는 눈에 거짓은 없었다.

    나는 낭패한 심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도둑질도 막막한데 노비라니. 몸 성한 건 둘째 치고 잡히면 빼 오기도 쉽지 않겠다. 한시라도 더 빨리 찾아야 하는 이유가 늘어났다.

    그때 꺾어진 골목 중 한 곳에서 붉은 점이 아른거렸다. 시선을 주기가 무섭게 사라졌지만 분명 시스템 창이 내는 인공적인 빛이었다. 나는 가빠지려는 숨을 참으며 천천히 말했다.

    “그리 경계할 것 없다. 내가 그 아이를 본 것 같아서 전해주려 했을 뿐이니.”

    “차, 참말입니까? 그게 어딥니까! 내 이놈을 당장…….”

    “저쪽으로 숨어들더군.”

    나는 정반대 편으로 쭉 뻗어있는 길을 가리켰다. 눈에 불을 켠 사내들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는 오이에게 칼을 거두라고 손짓했다. 그의 칼이 칼집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사내들이 내가 알려준 길 쪽으로 사라졌다. 조금 전보다 훨씬 다급해진 걸음이 누가 본다면 그들이 도망치는 것으로 오인할 정도였다.

    잠시 그 모습을 보다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주몽이 내 걸음을 따라잡으며 눈치 빠르게 물었다.

    “이쪽에서 보셨습니까?”

    “응. 오른쪽에서 두 번째 골목.”

    그제야 상황을 눈치챈 오이가 먼저 달려 나갔다. 그러나 골목을 꺾어 들어갔을 때 날 마주한 것은 막다른 길과 우두커니 서 있는 오이였다. 주막에서 사용하는지 삼면의 담벼락에는 온갖 음식물 쓰레기와 장독대, 낡은 포대 자루들이 널려 있었다.

    주몽은 홀로 그쪽으로 다가가 꽉 찬 포대 자루들을 발로 툭툭 찼다. 안에서는 푹신푹신한 소리가 나거나 챙그랑, 하고 집기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황당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짜 마리가 들어 있으면 어쩌려고 저렇게 걷어차. 다행인지 오이가 헤집은 포대 자루에서는 깨진 잔 조각과 구황작물 껍질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가 손을 탈탈 털며 내게 다시 확인했다.

    “정말 이쪽이 맞습니까? 숨을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아니면 그사이에 담벼락을 넘어 도망친 걸 수도 있겠습니다.”

    “이쪽 맞아.”

    나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앞에 버티고 선 두 사람을 헤집고 들어가자 골목 안쪽에 옹기종기 독을 모아둔 장독대가 보였다.

    나는 그중 작은 독을 열어 보았다. 간장독이었는지 짜고 쿰쿰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거 냄새 잘 안 빠지겠는데…….”

    나는 안타깝게 중얼거리며 개중 큰 축에 속하는 독 뚜껑으로 손을 뻗었다. 골목에 들어온 순간부터 어찌나 이 위에서 붉은 화살표가 깜빡거리던지. 당장이라도 달려가 열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무거운 뚜껑을 들어 올리자 이번에는 독한 술 냄새가 콧속을 찔렀다. 여긴 술독이구나. 나는 방긋 웃으며 찰랑이는 술 속에 손을 담갔다가 꺼냈다. 손끝에 그토록 찾아다니던 마지막 사람이 딸려 나왔다.

    “컥, 콜록콜록! 하아…….”

    끌어내진 아이가 거세게 기침을 하며 침과 술을 쏟아냈다. 입은 물론이고 코와 눈, 가릴 것 없이 모든 구멍에서 분비물이 흘러나왔다.

    “저하!”

    “쉿. 잠시만.”

    아이는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몸을 움츠리고 등을 돌려 기었다. 나는 다가오려는 오이를 제지한 뒤 아이의 등을 두드리고 옷소매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드디어 드러난 얼굴은 목소리나 체구에서 짐작했듯이 앳된 티가 완연했다. 유난히 커다란 눈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연달아 깜박였다. 그러나 질식사의 문턱에서 건너온 눈은 다시금 멍하니 풀리길 반복했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의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생존 본능은 위대해서 마리는 금세 눈꼬리를 표독스럽게 세우고 몸부림을 쳤다.

    “이거 놔! 너네들 다 누구야? 내가 그 집으로 순순히 잡혀 돌아갈 것 같아!”

    다행히 마리는 오이가 외친 ‘저하’ 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나는 이번에는 다가오는 오이를 막지 않았다. 날뛰는 마리는 그의 손에 간단하게 제압되었다.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이는 통에 주몽이 입부터 막으라며 손짓했다. 소리가 커지면 아이를 찾던 사내들이 듣고 다가올 수도 있었다.

    주몽은 읍읍거리면서도 반항하는 마리를 지나쳐 내게 다가왔다. 그가 내 허리를 잡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더니 내 젖은 소매를 마뜩잖다는 듯 문질렀다.

    “소매가 더러워졌습니다.”

    “빨면 되지. 그보다 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나는 팔을 빼내며 마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이의 살갗에는 온갖 흙먼지와 술이 뒤섞여 땟국물이 흘렀다. 머리카락은 젖었음에도 거칠고 푸석푸석한 티가 났다. 옷차림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그의 팔다리를 훑다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아무리 노비라지만 밥도 먹이지 않는 건가. 비쩍 마른 꼴이 길바닥 거지라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아이가 바둥거리는 팔을 피해 그 앞에 다리를 접고 앉았다. 독기가 서린 눈이 날 마주 보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최대한 다정하게 물었다.

    “나랑 같이 갈래?”

    “네놈이 어떤 새끼인 줄 알고 내가 따라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의 머리통이 아래로 푹 꺾였다. 주몽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손을 털었다. 아이는 한참 동안 신음만 흘리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뻑뻑한 활시위를 능숙하게 당기는 손이 후려갈겼으니 아플 만도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주몽이 발로 땅을 툭툭 차며 말했다.

    “형님. 그냥 저 사내들에게 넘겨주고 가시지요. 어차피 도로 잡혀도 별일 없을 겁니다. 열두 배를 갚지 못한들 이미 노비가 아닙니까.”

    마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배상을 하지 못하면 그 집 노비로 귀속된다는 게 내가 마저 떠올리지 못했던 법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부들부들 떠는 마리는 복귀의 두려움 외에 다른 이유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대신 몸을 낮추고 오이의 손을 툭툭 쳐 입막음을 풀었다. 숨통을 틀어막던 손이 풀렸음에도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몸과 다시 풀리기 시작한 눈에는 반항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

    나는 과호흡을 일으킬 것 같은 작은 입에 아직까지 들고 있던 과일 꼬치를 쏙 넣어주었다. 아이가 반사적으로 턱을 움직였다. 입 안에 퍼지는 단 과즙에 순간 눈에 또렷하게 초점이 잡혔다.

    나는 아이의 양 뺨을 붙잡고 눈을 마주쳤다. 까맣고 커다란 눈이 내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더니 점점 크기를 키웠다. 아이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아.”

    나는 그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보다 꼬치에서 마지막 과일을 빼 또 쏙 넣어주었다. 달콤하게 익은 복숭아가 허겁지겁 뭉개졌다. 나는 연신 꼴딱대는 목울대를 보다 은근하게 속삭였다.

    “내 집엔 이것보다 맛있는 게 훨 많은데. 나랑 같이 갈래?”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안….”

    이번에는 주몽의 손에 들린 쑥개떡을 넣어주었다. 아이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굳었던 볼살이 느슨하게 풀리고 눈썹 뼈 부근 피부도 판판하게 펴졌다. 아이가 쉴 새 없이 내 손에 들린 유밀과를 힐끔거렸다.

    “나랑 가자.”

    “안 되는데…….”

    그러면서 입은 야무지게 오물거린다. 그러나 바쁜 입과 대비되게 눈동자는 다시 풀리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유밀과도 쑤셔 넣었다. 벌어진 입에서 훅하고 술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상체를 뒤로 기울이고 마리를 뜯어보았다. 지금 보니 얼굴도 붉고 발음도 불분명했다. 때마침 아이가 확연히 꼬부라진 혀로 웅얼거렸다.

    “너…. 네가 예뻐서 따라가는 건 아니야… 요.”

    마리의 팔을 결박하고 있던 오이가 황당함을 감추지 않으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순순히 유밀과를 뺏기던 주몽도 마찬가지였다.

    “취했네.”

    반면 나는 깔끔히 단정 지었다. 그러고 보니 어린애가 저 커다란 술독에 빠졌다가 나왔는데 취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맛있는 걸 먹고 긴장이 풀린 덕에 술기운이 이제야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작은 주정뱅이는 이미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그냥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착각하지 마… 요….”

    “그래, 그래. 조금만 자고 있어. 형아 집에 가자.”

    나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마리의 고개가 푹 떨궈졌다. 오이가 축 늘어진 작은 몸을 건져 올리듯 들며 물었다.

    “정말 데려가실 겁니까?”

    “응. 제법 쓸모가 있을 것 같지 않아? 사정이 딱하기도 하고.”

    대체 손버릇 나쁜 노비의 어느 부분에서 쓸모와 딱함을 느낀 거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오이는 평소 그러하듯 그쯤에서 되묻길 멈추고 묵묵히 아이를 업었다. 대신 나를 붙잡은 사람은 주몽이었다.

    “데려가서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글쎄. 일단 밥부터 먹이고. 음, 뭐라도 할 게 있지 않을까?”

    마리는 굶고 자란 탓인지 작고 말랐지만 체력도 좋고 깡도 있어 보였다. 글을 배우진 못했을 테니 협보 같은 문관 체질은 아닐 테고 오이처럼 무사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나는 굳이 훌륭한 무사가 두 명이나 있는 자리에서 ‘무사나 시킬까.’ 하고 묻는 실례를 범하지 않았다.

    내 애매한 대답에 주몽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눈치였다. 미래의 절친한 벗이자 부하가 될 인재인데 잘 대해 주지는 못할 망정.

    나는 좀 친해지라는 의미를 담아 오이의 등에서 마리를 끌어내려 주몽의 등에 얹었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그 순간 반가운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져 눈치채지 못했다.

    띠링— 띠링—

    [메인] 영웅의 벗

    - ‘오이’ (1/1)

    - ‘마리’ (1/1)

    - ‘협보’ (1/1)

    [메인] 영웅의 벗 – 완료

    축하합니다! ‘주몽’의 벗이 될 세 사람을 모두 찾았습니다. 보상으로 ‘주몽’과 ‘오이’, ‘마리’, ‘협보’ 사이에 우정이 발생합니다. ‘주몽’의 정신 또한 성장을 겪으며 한결 성숙해집니다.

    ‘마리’를 찾았다는 알림창과 퀘스트 완료 창이 연달아 떴다. 나는 새삼스럽게 오이와 주몽, 그리고 마리를 번갈아 보았다. 저렇게 다른 세 사람이 협보까지 섞여 서로 죽고 못 사는 절친이 된다니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긴, 우리 모두의 의사는 중요치 않았다. 나는 아직 퀘스트 완료 효과가 돌지 않는지 여전히 찡그린 주몽의 미간을 슬슬 쓸어주었다. 그리고 손을 내려 아이를 대충 업어 든 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손 마디마디에 스며들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그에게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손. 안 놓기로 약조했잖아.”

    “…….”

    주몽이 드물게 무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뭔가를 가늠하듯 가늘게 접혔다. 설마 억지로 업게 해서 화났나. 눈치를 보며 슬슬 손마디를 매만지는데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으니 이만 돌아가시죠.”

    마리를 고쳐 업은 그가 먼저 발걸음을 뗐다. 좀 더 편하게 업도록 손을 놓을까 했지만 단단하게 맞잡아온 손은 힘을 빼지 않았다. 그는 한 손으로도 업을 수 있으니 걱정 말라며 살살 웃었다. 이제야 내가 아는 순하고 착한 주몽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마리의 위에 겉옷을 덮어 가렸다. 그리고 오이가 망을 보는 동안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왔다. 저잣거리에 다시 들어선 뒤엔 더더욱 쉬웠다. 나는 주몽이 잘 먹던 주전부리까지 야무지게 사 들고 태자궁에 돌아왔다. 마리에 호박엿까지. 이보다 더 든든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 든든함은 나만의 것이었다는 사실이 곧 밝혀졌다.

    ***

    “지난날에 분명 노비는 보살피지 않는다 하시지 않았사옵니까!”

    날 꾸짖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인 유모는 당연히 마리를 보자마자 뒤로 넘어가려 했다.

    “내가 그랬나? 하하…….”

    나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만졌다. 셋이 나갔다 넷이 돌아온 상황에 놀랄 만도 했다. 오이에게 곁눈질로 구조 요청을 보냈지만 그는 날 외면했다. 주몽은 태자궁에 들어오기도 전부터 왕의 전령이 찾고 있다는 말에 북녘궁으로 건너가고 없었다.

    결국 나는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유모의 꾸지람을 들었다. 기나긴 잔소리의 바다에서 날 꺼내준 것은 문을 열고 들어온 협보였다. 나는 문지방을 넘는 그에게 서둘러 손짓을 해 보였다.

    “어, 왔어?”

    “예, 저하. 웬일로 태자궁으로 다 부르셨습니까.”

    그는 돌아다녀서 좋을 것 없는 신분 탓에 태자궁으로 직접 오는 일이 드물었다. 그래도 나는 그에게 최대한 빨리 마리를 소개시켜 주고 싶었다. 그 때문에 궐에 도착하자마자 별궁에 기별을 넣어 부른 참이었다.

    그러나 술독에 빠졌던 마리는 여태껏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우선 저녁이나 먹고 가라고 협보를 붙잡아 앉혔다. 그리고 목욕을 할 더운물을 준비해달라며 유모를 내보냈다. 의아한 얼굴을 하던 그는 오이의 곁에 순순히 자리를 잡았다. 오이가 쥐고 있던 호박엿을 내밀었다.

    “이것 좀 들겠어?”

    별궁에 갈 때마다 오이를 데리고 다닌 덕분에 두 사람은 제법 친분이 있는 상태였다. 무심코 받아들던 협보가 그 곁에 산더미처럼 쌓인 엿을 보고 질린 눈을 했다.

    “아니, 무슨 호박엿을 이렇게……. 오이 형님, 혹시 태자궁에서 굶깁니까?”

    “그거 내가 산 거야.”

    “……엿이 아주 달고 쫀득하네요.”

    “그렇지? 해가 잘 먹더라고.”

    협보가 입을 다물었다. 불고기 도시락 셔틀의 과거를 가진 그는 내가 주몽을 챙길 때마다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어댔다. 이번 역시 꼴사납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은 채였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태자라는 사실까지는 잊지 않은 그는 다른 주제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마침 적당해 보이는 낯선 얼굴이 근처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호박엿을 질겅질겅 씹으며 마리의 곁으로 옮겨 앉았다.

    “얘는 누굽니까?”

    “아. 소개시켜주고 싶은데 깨어나질 않네. 일어나야 씻고 밥도 먹을 텐데.”

    걱정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리가 눈을 떴다. 멍한 얼굴을 한 아이는 사태를 파악하듯 눈동자만 좌우로 굴렸다. 까맣고 큰 눈이 높은 천장과 비단 이불, 화려한 장롱을 오갔다. 그러다 멀뚱히 저를 보며 호박엿을 씹는 두 남자에 닿는 순간 아이는 이불 속에서 뛰쳐나와 벽에 달라붙었다. 아직 비틀거리면서도 날카롭게 날을 세운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러나 잔뜩 경계하던 태도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천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 틈을 타 양손을 펼치고 아이를 달랬다.

    “일단 진정해. 나 누군지 기억나?”

    “……여긴 어디예요?”

    존댓말을 쓰는 걸 보니 기억이 끊기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고민하다 우선 무난한 답을 골랐다.

    “음, 내 집이지.”

    짧고 불분명한 답이었지만 마리의 눈매는 점차 누그러졌다. 마지막으로 건넸던 말을 지키지 않고 이상한 곳으로 끌고 왔을까 봐 걱정한 눈치였다.

    나는 이제 거의 진정한 것 같은 그에게 다가가 비단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이가 꼬물거리며 부드러운 천을 만졌다. 다음 질문은 머뭇거리며 새어 나왔다.

    “너…. 혀, 형은 누군데요.”

    ‘너’라는 말머리는 오이가 바닥에 위협적으로 내리치는 칼집 소리에 ‘형’으로 바뀌어 나왔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머쓱한 기분에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왕족을 전설 속 인물처럼 여기며 자랐을 아이에게 스스로를 부여의 태자라고 설명해야 한다니.

    다행히 이런 고난은 조심스럽게 들어와 아뢰는 궁인에 의해 해결되었다.

    “태자 저하. 더운물을 준비해 두었사옵니다.”

    “그래? 고마워. 일단 씻고 올래? 오면 설명해줄게.”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뜬 마리를 향해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아이는 많이 놀랐는지 몸까지 떨기 시작했다. 점차 경련에 가까워지는 움직임에 놀라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아무래도 의원을 먼저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궁인을 부르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마리가 내 가슴팍을 거칠게 밀쳤다.

    “꺼져! 가까이 오지 마! 이 씨팔,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믿은 내가 등신이지!”

    “뭐? 잠깐만. 갑자기 무슨….”

    “개 같은 변태 새끼들! 역시 너도 그 늙은이랑 똑같은 새끼였어! 나한테 손끝 하나라도 대 봐, 당장 물어뜯어 버릴 테니까!”

    마리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뒤로 넘어진 자세 그대로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를 세우고 더 물러설 곳도 없는 벽으로 발을 미는 그는 간절하다 못해 처절해 보였다. 협보와 궁인이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오이는 칼을 뽑아 들고 내 앞을 막아섰다.

    위협적인 분위기에 공황에 빠진 마리가 붓과 서적, 도자기 인형 따위를 손에 집히는 대로 던져댔다. 방 안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당황해 온몸이 굳은 내 어깨를 누군가 뒤에서 감싸 안았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언제 돌아왔는지 주몽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와 반대로 그의 손에서 넘어온 따뜻한 온기가 내 피부 아래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멈췄던 머리가 천천히 돌아갔다. 멍청이도 아니고 대낮에 패물을 훔쳐 달아난 노비. 씻으라는 일상적인 말에 발작을 시작한 모습과 쉬이 넘길 수 없는 내용의 고함이 차례로 떠올랐다.

    “미친…….”

    의식하지도 못한 새에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나는 서둘러 몸을 바로 세웠다. 우선 공황에 빠진 마리를 달래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는 오이를 밀치고 다가가 몸을 낮췄다. 쨍그랑— 날아온 작은 접시가 오이의 칼에 부딪혀 산산이 깨졌다. 다른 이들이 뒤로 가 계시라며 말렸지만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을 건넸다.

    “난 널 그런 목적으로 데려온 게 아니야.”

    “그걸 믿으라고?”

    벼루를 위협적으로 든 마리가 쉰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씻으라고 한 건 그저 네가 깨끗하게 씻고 좋은 옷을 입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런 거야. 정말 다른 의미는 없었어. 내 신분을 걸고 맹세할게.”

    “태자 저하!”

    뒤에서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목소리가 겹쳐 누가 말한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리의 귀에는 똑똑히 들어간 모양이었다. 아이의 손에서 벼루가 툭 떨어졌다.

    “태자… 저하? 내가 아는 그, 그 태자 저하? 다음에 임금님이 될?”

    씻으란 소리에 놀라 내가 태자라는 사실은 지금에서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중얼거리는 말이 딱 마리의 머릿속 ‘태자’의 인식 정도를 보여주었다. 물론 여기서 난 임금님이 되지 않을 거란 말을 꺼내 초를 치진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억울함을 마저 호소했다.

    “그래. 그리고 상식적으로 너같이 어린 애를 무슨…….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말하고 보니 어느 범죄자가 ‘난 그런 사람이오’ 하겠나 싶었다. 그러나 의외로 마리에게는 먹혀든 모양이었다. 경련이 가라앉고 바짝 치켜떴던 눈에서도 독기가 빠졌다. 지켜본 모두에게서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도 긴장을 풀고 장난스럽게 타박을 주었다.

    “생각해 보니 어이없네. 너 이거 왕족 모독죄야, 알아?”

    “흥, 알 게 뭐야, 요.”

    마리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면서도 눈치를 보았다. 스스로도 어색하게 붙인 존댓말이 부끄러웠는지 귀가 새빨개져 있었다. 나는 그쯤에서 멈추고 궁인의 손에 마리를 넘겨주었다. 마리는 나를 힐끔대면서도 순순히 욕탕으로 따라갔다.

    문이 닫히고 그림자마저 멀어졌다. 협보가 박수를 짝짝 치며 침묵을 깼다.

    “다시 봤습니다, 태자 저하.”

    그 말 하나에 긴장이 와르르 풀렸다. 오이는 칼을 집어넣고 궁인은 깨진 집기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주몽은 날 난장판에서 데리고 나와 방석에 앉혔다. 협보가 박수를 멈추지 않으며 내 앞에 마주 앉았다. 나는 식은땀을 닦으며 차갑게 식은 차를 들이켰다.

    “와, 식겁했네. 나 진짜 불순한 의도로 데리고 온 거 아니었어. 내가 변태야? 어린애 좋다고 달려들게.”

    “오. 그럼 남자인 건 상관없으시고요?”

    “좋다는 데 성별이 무슨 상관…… 근데 그러려고 데리고 온 거 아니라고!”

    협보가 낄낄거리며 나를 놀렸다. 휘말린 나는 씩씩거리다 결국 같이 웃음 짓고 말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내 긴장을 풀어주려는 의도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주몽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으며 내 곁에 앉았다. 나는 그에게도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 찻잔을 쥔 그가 눈을 접어 웃으며 물었다.

    “저 아이가 몇 살일 줄 아시고 어리다 하십니까.”

    “글쎄. 너보다 어리지 않을까? 그럼 어린애지, 뭐. 너도 나보다 한참 어린 마당에.”

    “그렇다면 곧 신념을 바꾸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지금 나보고 쓰레기가 되어야 한다고 돌려 말한 게 맞나? 그러나 주몽은 태연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 평연한 낯을 보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협보를 보았다. 그는 또다시 특유의 그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주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내 어긋난 해석을 바로잡아 주었다.

    “요즘 혼기가 꽉 찬 여인들은 모두 주몽 또래가 아닙니까. 대체 태자비는 언제 들이실 겁니까?”

    “아……. 그렇지?”

    “그렇긴 뭐가 그렇습니까. 어휴.”

    협보가 속이 터진다며 제 가슴을 퍽퍽 두드려댔다. 왕비님도 아니고 내 혼인에 왜 자기가 열불을 내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리가 돌아오기까진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동안 궁인들이 방을 쓸고 닦아 원 상태로 돌려두었다. 나는 마리가 돌아오면 바로 식사를 할 수 있게 수라간에 기별을 넣었다. 덕분에 때 빼고 광을 낸 다음 빳빳한 새 옷까지 차려입은 아이가 돌아왔을 때 바로 밥상이 들어올 수 있었다.

    “어서 와. 많이 배고프지?”

    나는 머뭇거리며 다가오는 아이의 손을 잡아 내 곁에 앉혔다. 박박 씻어 말간 얼굴을 드러낸 마리는 이제 보니 제법 귀여운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아이가 큰 눈을 도르륵 굴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바짝 털을 세우고 있었지만 말을 붙이고 싶다는 티가 팍팍 났다.

    나는 모른 척 쪼글쪼글해진 손에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저 홀쭉한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는 게 우선이었다.

    “일단 먹자.”

    상을 앞둔 마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잣거리 주전부리와는 비교도 안 될 진수성찬이 상 위에 가득했다. 나는 특별히 부탁한 맑은 북엇국을 마리의 앞에 놓아주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홀로 해장국을 홀짝이는 게 웃겼지만 진동하던 술 냄새를 떠올리면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의원을 부르지 않은 것이 용했다.

    “근데…… 진짜 태자 저하세요?”

    한참을 정신없이 먹던 마리가 턱을 닦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응. 왜? 안 그래 보여?”

    마리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다시 날 바라보는 눈이 어쩐지 반짝거렸다. 그러더니 몸을 배배 꼬고 숟가락을 무는 둥 수선을 떨더니 또 질문을 던졌다.

    “그럼 태자비 마마는 어디 계셔요?”

    “뭐?”

    예상치 못한 질문에 모두의 수저질이 멈췄다. 제일 황당한 사람은 나였다. 오늘따라 내 혼인에 관심을 갖는 자들이 많았다. 이어진 침묵에 마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자그마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인당수에 빠지셨던…… 심청 님이요. 저는 항상 궁금했어요. 저는 우물 속에만 처박아져도 고통스럽던데 어떻게 바다에 빠져도 참으셨대요?”

    순수한 물음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건 그동안 아이의 삶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었다. 노비의 삶이 평탄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지만…….

    저절로 두 눈이 협보와 오이를 향했다. 내가 십 년 전부터 온 부여를 뒤져 널 미리 찾아냈더라면 지금쯤 넌 이 아이들처럼 안정되어 있었을까. 측은지심 위에 죄책감이 덮여 입맛이 썼다. 신이 시킨 일을 하지 않아 후회된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지나간 일을 후회해봐야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나는 마리를 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태자의 혼인은 민감한 주제라 모두가 말을 얹지 못하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들은 건 심청전 같은데. 맞지?”

    “……제목은 몰라요. 저잣거리에서 알음알음 들었는데 거기 아저씨가 진짜 있었던 일이라고 했어요.”

    “그래……. 그런데 아쉽겠지만 난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단다.”

    그건 그냥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는 대답에 마리는 시무룩해졌다. 동시에 나는 아이가 왜 ‘나 그런 사람 아니야’라는 밑도 끝도 없는 부정을 금세 믿었는지 깨달았다. 그가 아는 세상 속 ‘태자’는 착하고 다정하며, 항상 친절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내가 저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 철석같이 믿었겠지.

    결과적으론 다행이었지만 마리의 세계가 얼마나 좁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턱을 톡톡 두드리다 다정하게 아이를 달랬다.

    “대신 나한테 그런 이야기책이 많은데 밥 다 먹고 한번 구경해볼래? 여기 있는 형이 읽어줄 거야.”

    작은 우물에서 마리 개구리를 꺼내려면 우선 많은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 것 같았다. 세상에 ‘심청전’만 있지 않다는 걸 알면 그게 진짜 있었던 일이 아니라는 것도 금세 이해하게 되겠지. 뜬금없이 지목당한 협보가 인상을 찡그렸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놈이 웬일인가 싶었다.

    이것도 ‘우정’의 영향인가? 심증은 있었지만 감정은 원체 눈에 보이지 않으니 확신하긴 어려웠다. 나는 잡생각을 털어내고 그보다 시급한 문제를 꺼냈다.

    “그나저나 어디서 지내야 하나…….”

    “저, 저 정말 궐에서 살아요?”

    “응? 당연하지. 내가 같이 가자고 했잖아. 이제 돌아갈 일 없어.”

    손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던 마리가 내 확답에 고개를 들었다. 커다랗게 뜬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달랠 새도 없이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가, 끅, 감사합니다. 저, 저 뭐라도 할게요. 마당, 흐윽, 마당도 잘 쓸고, 아궁이 청소도 잘해요. 여, 여기 있게만 해주세요.”

    축축하게 젖어 나온 목소리는 안도와 간절함이 뒤섞여 있었다. 모두가 말을 잃고 마리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그 상태로 입 안의 밥이 죽이 되도록 울었다.

    나는 애써 달래려 들지 않았다. 다만 그 울음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준비시킨 물수건으로 얼굴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말을 꺼냈다.

    “난 널 청소나 하라고 데리고 온 게 아니야. 이왕 인생 핀 거 사내대장부라면 큰일 한번 해봐야 하지 않겠어?”

    “예……?”

    눈물에 엉긴 속눈썹이 천천히 들리는 게 보였다. 마리가 멍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나는 자세한 설명을 피한 채 아직 묻지 못했던 이름을 물었다.

    “음. 이름이 뭐야?”

    “마리, 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이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색다른 쾌감이 차올랐다. 나는 저릿한 손끝을 꾹꾹 누르며 밥상을 같이한 이들을 둘러보았다. 툭툭 튀는 대화의 흐름 탓인지 반 공기도 비우지 못한 이들이 태반이었다. 나는 속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쭉 손짓해 보였다.

    “마리야. 이쪽은 차례대로 협보, 오이, 주몽이야. 앞으로 널 많이 도와주실 분들이니 잘 기억해둬.”

    소개를 받은 사람뿐만 아니라 소개를 당한 사람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곧 시선에 의문 혹은 불손함을 섞어 나를 바라보았다. 마리를 데려온 것까지는 내 결정이니 토를 달지 않겠지만 대체 자신이 도울 일이 뭐가 있겠냐는 태도였다.

    나는 이번에도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빙긋 웃기만 했다. 당장은 없어도 곧 생길 ‘우정’이 자연스럽게 서로를 돕게 할 터였다. 원래 친구란 그런 거니까.

    “우선 지낼 곳이 필요한데. 일단 태자궁에서 지낼래? 여기 방도 많아서 괜찮을 것 같은데.”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지금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몽이 나서서 마리의 거취 마련을 자처하고 있지 않나. 생각보다 빠른 퀘스트 보상 효과에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했다. 주몽은 내가 예의상 하는 거절에도 이를 악물며 자신이 데려가겠다고 우겼다. 마리가 안쓰러운지 아이를 돌아보는 입꼬리는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나는 그쯤에서 양보하며 아쉬운 척 물었다.

    “그럼 북녘궁에서 같이 머무는 거야?”

    “아닙니다. 마구간에도 방이 있으니 거기서 머무르면 되겠지요.”

    “마구간? 거긴 좀…… 불편하지 않을까?”

    “아니에요! 저하, 저 정말 어디든 괜찮습니다. 돼지우리 한편을 내주셔도 좋아요!”

    마리가 펄쩍 뛰며 내 말을 부인했다. 정말 안심시키고 싶었는지 이전에는 광에서 볏짚 하나 깔고 옹기종기 잤다는 말까지 꺼냈다. 그러나 안심은커녕 측은함만 깊어졌다. 주몽은 마리의 주인이었던 허 대감에게 원한이 솟는지 눈꼬리에 점점 짜증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한숨을 푹 쉬며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드러난 얼굴에는 우울과 쓸쓸함이 맴돌았다.

    “실은…… 조금 전 전하께서 마구간 완공이 머지않았으니 곧 들어갈 준비를 하라 이르셨습니다.”

    입가에 걸린 자조적인 미소가 마음을 쿡쿡 찔렀다. 아까 왕의 전령이 찾았다는 일이 마구간으로 가라는 독촉이었던 모양이었다. 마리의 일이 급해 잊고 있었지만 지금 가장 심란하고 속상할 사람은 주몽이었다. 마구간을 뜯어고쳐서 봄이 올 때까지 시간은 벌었다지만 대뜸 쫓겨난 상처가 어떻게 그렇게 금세 아물까.

    “형님의 은혜로 마구간지기의 숙소도 증축이 되어 제가 머무를 곳은 넓고 편안해 보였습니다. 여럿이서 지내도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걱정할까 봐 좋은 말만 골라서 해주는 착한 아이였다. 나는 아무도 먹지 않는 밥상을 치우라 일렀다. 그리고 주몽에게 다가가 축 늘어진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가 내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고개를 툭 떨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걱정이 들었다. 전부터 순하고 외로움도 많이 타던 아이였다. 내가 그를 멀리하던 시절에도 북녘궁이 외로워 꿋꿋이 찾아왔을 정도였다. 왕의 눈에 들고 대우가 나아져 요즘은 상주하는 궁인이 있었지만 마구간으로 가면 다를 것이었다.

    “외롭지 않겠어? 아무리 마리가 있다지만 전과는 다를 텐데.”

    “제가 감내해야 할 일인 것을……. 다만 지금처럼 형님을 자주 뵐 수 없을까 봐 그것이 걱정일 따름입니다.”

    풍성한 속눈썹이 두 눈에 그늘을 드리웠다. 나는 말도 안 되는 걱정에 내가 더 자주 찾아가겠다고 단단히 약속을 해주었다. 그제야 주몽은 엷은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저렇게 작은 일에도 기뻐하는 걸 보니 더욱더 걱정이 가시질 않았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리가 헤 입을 벌리고 우릴 바라보고, 그 옆에서는 오이가 성실하게 분지르는 호박엿을 협보가 날름 받아먹고 있었다. 사실은 마가네에서 협보를 굶기는 게 아닐까. 주몽 먹으라고 사 왔더니 제가 다 먹고 있었다.

    나름 합당한 의심을 하는데 이쪽을 힐끔대던 오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 든든한 얼굴을 보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오이야. 너 내 호위 무사 관두고 주몽 곁으로 옮기자.”

    “예?”

    “협보 너도 마찬가지야. 유화 님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앞으로는 해의 곁에서 힘이 되어줬으면 좋겠어.”

    협보가 먹던 엿을 툭 떨어뜨렸다. 오이는 새하얗게 질려 나를 바라보았다. 주몽도 내게 묻었던 고개를 세우고 날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꺼낸 말을 취소하지 않은 채 그들을 마주 보았다. 내 눈에서 진심을 확인한 오이가 삽시간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피를 토하는 것 같은 고함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태자 저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달게 벌을 받을 테니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네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음, 이건 나중에 이야기할까?”

    나는 마리를 힐끔거리며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날카로운 공기에 마리가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인지 불안해하는 것이 나에게까지 느껴졌다.

    “갑자기 옮기라는 건 아니야. 마구간이 언제 완공된다고 했지?”

    궁인이 조그맣게 “이레 뒤이옵니다.” 하고 속삭였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이면 고민할 시간은 물론 ‘우정’이 생길 시간으로 충분할 것 같았다.

    “해가 마구간으로 가는 날까지 천천히 고민해 봐.”

    어차피 ‘종이’에 주몽의 벗이라고 적혀 있는 이상 운명은 알게 모르게 그들을 조작하여 새겨진 길로 이끌 것이다. 나는 조금 더 빨리 그 길로 들어서도록 인도할 뿐이었다.

    유하지만 물러서지 않는 내 태도에 셋은 머뭇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눈치를 보는 마리는 주몽이 잡아다 세웠다. 나는 그들을 배웅하며 손을 살살 흔들어주었다. 그러나 오이와 협보의 발길은 한참 동안이나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마지막엔 주몽의 곁에 서게 될 운명임을 안다면 저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텐데. 나는 희미하게 웃어준 다음 먼저 등을 돌려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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