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9화 (11/27)
  • 해연정기 3권

    목차

    9. (2)

    10.

    11.

    12.

    13. (1)

    9. (2)

    “형님! 오늘은 무얼 하실 겁니까?”

    “나 다시 들어가 잘 거야.”

    나는 하품을 참으며 대꾸했다. 신나서 달려왔던 가람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나 나는 맥없이 까라지는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안 그래도 퀘스트 때문에 잔뜩 긴장했던 몸이 어제 비를 맞고 새벽에 그 난리까지 치고 나자 파업을 선언했다. 그나마 두 아우를 배웅하기 위해 억지로 나온 것이었다.

    어젯밤, 나는 시스템 창을 확인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러나 막상 천막에는 침소의 주인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사람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온기가 공기 중에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무사들을 모두 깨워 행방을 쫓았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주몽은 금방 돌아왔지만 그에게서 묘한 열기가 훅 끼쳐왔다. 약간의 땀 내음과 흥분이 어린 눈동자. 무술 대회에서 흥분에 절어 겨루던 무사들의 눈이 딱 저랬다. 최소한 어디선가 싸우고 온 게 분명했다.

    나는 내 추측이 맞았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주몽의 몸을 마구 더듬었다. 천만다행으로 발견되는 상처는 없었다. 그러나 사정을 캐묻는 내 말에도 주몽은 그저 악몽 때문이라며 고개를 돌렸다.

    당연히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곤란 수치’가 꽉 차고 퀘스트가 완료되었다. 고작 꿈 때문에 그렇게 될 리가 없었다. 옷을 빨러 갔다기엔 뜬금없는 시간대와 채 떨치지 못하고 온 열기도 설명할 수 없었다. 듣자 하니 강가에서 습격을 당했는데 내가 걱정할까 봐 식인귀가 덮쳤다는 헛소리로 둘러대는 것 같았다.

    밤에 얼마나 무서웠을까. 나는 주몽의 등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혹시 평소 원한 관계에 있던 놈이 달려들었나 싶어서 떠보았지만 넘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감옥에서 썩게 해주려고 했는데.

    대신 그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마도 주몽은 직접 복수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사람을 해치는 일이거나, 그에 준하는 비도덕적인 일이겠지. 평생 사람 한 번 위협해본 적 없을 아이가 제 몸을 지키기 위해 활을 들게 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무슨 조언을 해줘야 할까. 응당 바른 형님이라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며 설득해야겠지만……. 나는 언젠가 다가올 미래를 떠올렸다. 고구려를 건국하는 일도 부여를 배신하는 것이니 도리에 어긋나도 한참은 어긋난 일이었다. 나는 고민을 하다 미래에 다가올 퀘스트를 위한 투자라 생각하고 대답을 골랐다.

    ‘형님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그럴 때는 기회를 노리거라.’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이 너무 순해서 걱정이 차올랐지만 퀘스트를 완수하기 위해 이리저리 굴리는 입장에서 더 말을 얹는 것도 우스웠다. 나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는 말만 반복하다 천막으로 돌아왔다.

    “하암…….”

    그리고 아직까지도 잠을 떨치지 못한 채 이곳에 서 있었다.

    “많이 피곤하십니까? 아무래도 먼저 궐로 돌아가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됐어……. 명색이 태자인데 끝까지 남아 있어야지.”

    주몽과 헤어진 뒤, 퀘스트를 완수했다는 기쁨이 뒤늦게 찾아와 한참 잠을 이루지 못했더니 더 피곤한 것 같았다. 나는 무거운 어깨를 통통 두드리다 다시 터져 나오려는 하품을 삼켰다.

    “명색이라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오이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는 몇 년 전부터 내가 태자 역할에 자신감 없어 한다고 생각하는지 꾸준히 용기를 주려는 듯한 말을 했다. 그러나 진짜 태자가 아닌 나로서는 당연한 생각을 지적받으니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말을 돌리려는데 마침 시야 한구석에 허겁지겁 다가오는 관리가 걸렸다. 사냥 대회의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였다. 그는 격식을 갖춰 예를 올린 뒤 어제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왕이 없어 내가 임시로 최고 통솔자가 되었다지만 고작 이틀간 열리는 사냥 대회에서 보고까지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보고를 올린 이유는 곧 밝혀졌다. 인상을 찌푸린 채 끝까지 들은 나는 관리를 돌려보낸 뒤 가람이에게 다가갔다. 마침 그곳엔 주몽도 있었다. 나는 먼저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며 보고받은 사항에 대해 말을 꺼냈다.

    “해야. 너 어제 사냥감을 잔뜩 잡았다며? 왜 돌아올 땐 빈손으로 왔어?”

    나는 그저 그가 곰을 잡는 데 실패하여 빈손으로 돌아온 줄 알았지만 주몽이 짐승을 보는 족족 귀신같이 잡아 포대에 담았다는 귀족들의 증언이 빗발쳤다. 그런데도 정작 밤에는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이상하다며 보고가 들어올 만도 했다.

    내 물음에 주몽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그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가람 저하의 무사들이 공을 세우고 싶었는지 제 사냥감을 탐내더군요. 소란을 피우기가 싫어 그대로 드렸습니다.”

    “뭐?”

    돌아본 가람은 억울해 미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소에도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아이답게 거짓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나도 이 말만큼은 주몽을 믿을 수 없었다. 아무렴 가람이가 주몽의 사냥감을 빼앗았을 리가.

    두 사람은 매년 함께 사냥 대회에 참가했지만 한 번도 가람이가 주몽의 것을 갈취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우승을 차지할 거였으면 한참 전부터 그랬겠지. 무엇보다 가람이가 그 정도로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이번 일은 아무래도 그의 일행이 단독으로 벌인 일 같았다. 나는 의연하게 대처한 주몽을 칭찬하며 말을 돌렸다.

    “잘했어. 우승 그게 뭐 중요하다고. 가람이 너는 안 다쳤어? 듣자 하니 네 일행 중 한 명이 산사태에 휩쓸려 행방불명이라던데.”

    “아…. 다행히 저는 무사합니다. 운이 아주… 좋았죠.”

    가람이 말꼬리를 늘이며 형형한 눈빛으로 주몽을 노려보았다. 흡사 그가 아니라 주몽이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시선을 무시한 주몽이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다 형님께서 도우신 게 아니겠습니까. 왕자 저하께는 형님과 똑같은, 고귀한 피가 흐르시니까요.”

    “내 피가 무슨 부적이라도 돼?”

    나는 황당함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가람이가 산사태를 피해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왜 왕족의 피가 나오는지. 신의 가호라도 말하는 건가 싶었다.

    주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을 살포시 접으며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에 갑작스럽게 분노한 가람이는 칼이라도 뽑을 것처럼 굴었다. 나는 점점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미간을 찌푸렸다.

    “너네 무슨 일 있었어?”

    놀랍게도 그 한마디에 두 사람 모두 진정했다. 나는 서로 노려만 볼 뿐 다시 소란을 피우지는 않는 두 사람의 모습에 눈매를 좁혔다. 무언가 있는 것 같긴 한데, 경험상 이런 일은 가람이에게 물었을 때 입을 열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무리 옆구리를 찔러도 답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도리어 의심만 깊어지던 때 오이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며 나를 불렀다. 나는 주몽이 가람이를 향해 몸을 기울이는 것을 보다 자리를 피했다. 주변을 살핀 오이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방금 전 사내와 접촉했습니다. 오늘도 시킬 일이 없냐고 묻더군요.”

    “아, 맞다. 이제 필요 없는데 어쩌지?”

    “대체 무슨 일이었습니까?”

    “알 것 없어. 그래도 보수는 줘야 하니 이따가 찾아가겠다고 전해줘.”

    운 좋게 퀘스트가 완료된 덕분에 준비해두었던 장정들도 투입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도 이곳까지 와서 대기한 수고료는 마땅히 챙겨줘야 했다. 오이는 그렇게 전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협보에게 질 낮은 자들을 부탁할 때부터 나를 말렸던 그는 필요 없다는 내 말에 내심 안심한 듯했다.

    떠나온 자리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네놈이 지금 왕가를 모독하는 것이냐!”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서둘러 뒤를 돌았다. 가람이 칼을 뽑아 들고 주몽의 목에 겨누고 있었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살기가 그의 주변을 감쌌다. 그러나 오히려 주몽은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설마 자각도 못 하신 거였습니까?”

    평소와 같은 말투가 그가 겁에 질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순수하게 놀라고 있었다. 그러더니 쿡쿡 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가람이 역시 저게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냐는 표정이었다. 그는 칼날을 주몽의 목에 조금 더 들이댔다. 잠시 굳어 있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서둘러 달려갔다. 혹시 잘못될까 무서워 팔을 잡지도 못하고 말리는 내게 가람이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형님! 저놈이 제게 형님과 같은 피가 흐르는 것이 저주로 느껴지겠다며 비꼬았습니다!”

    “송구합니다. 모독이라니,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다만 신분 차이로 인해 저와 편히 겨루기 힘드신 것 같아 올린 말씀이 왜곡된 것 같습니다.”

    주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사나운 짐승이라도 달래듯 느릿하고 모나지 않은 말투였다. 그 순순한 태도에 가람이 미간을 찡그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를 달랬다.

    “그래, 가람아. 설마 해가 그런 의도로 말했겠어? 그랬다면 나도 욕보이는 셈인걸. 그땐 나부터 나서서 왕실 모독죄로 엄히 다스릴 테니 걱정 말고 진정하거라.”

    내 눈짓에 오이가 눈치껏 주몽을 뒤로 빼냈다. 다행히 가람이도 진정됐는지 뻔히 보이는 수작에도 가만히 있었다. 나는 일부러 주몽에게도 따끔하게 한소리를 해주고 두 사람을 멀리 떼어 놓았다.

    그리고 대회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나기 무섭게 가람이를 산속으로 들여보냈다. 입장 1순위라는 신분이 지금처럼 반가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마찬가지로 주몽을 놓아주고 온 오이가 식은땀을 닦는 내게 물었다.

    “이제 천막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아니. 나온 김에 그 사내들이나 만나고 가자.”

    갑작스러운 사고 덕분에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잠도 싹 깨버렸다. 요 몇 년간은 좀 친해진 것 같더니 지금 보니 그것도 바람 앞 등불 같은 평화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제 하품 대신 나오는 한숨을 쉬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너무 일찍 왔는지 인적이 드문 수풀 구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도착하고 나서야 보수로 건넬 금덩어리를 들고 오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천막에 들르지 않고 곧장 오는 바람에 생긴 실수였다. 나는 곁에 우직하게 선 오이를 쿡쿡 찔렀다.

    “오이야. 내 침상 옆에 붉은 천 주머니가 하나 있을 거야. 가서 그것 좀 가져다줄래?”

    “홀로 계시면 위험합니다. 차라리 같이 가시지요.”

    “여긴 참새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는걸. 오히려 비밀 장소인데 여럿이서 자주 드나들면 더 눈에 띌 것 같아서 그래.”

    일리가 있는 말에 오이가 망설였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를 여러 번 설득했다. 결국 이러다 상대방이 오겠다는 재촉에 오이가 무거운 발을 움직였다. 그가 수풀을 헤치고 나가면서 신신당부를 했다.

    “서둘러 다녀올 테니 꼭 얌전히 계셔야 합니다.”

    “알았다니까. 어차피 나 가만히 있으면 다들 있는 줄도 몰라.”

    “저하. 그런 말씀은 좋지 않습니다.”

    떠나가는 와중에도 끝끝내 잔소리를 멈추지 않는 오이의 등짝을 밀어 보내자 금세 주위가 조용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옷자락을 모아 쥐고 앉았다. 어차피 인적이 드문 만큼 숙소와 멀어 갔다 오려면 꽤 시간이 걸릴 터였다.

    멍하니 앉아 다음 퀘스트에 대해 고민하는데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만나기로 한 장정들이 벌써 왔나 싶었지만 이쪽 수풀로 오는 입구는 비어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온몸을 굳혔다. 신경을 곤두세우자 수풀 뒤쪽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그냥 지나가길 바랐지만 그들은 나와 나무를 사이에 둔 채 멈춰 작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시체는? 잘 묻은 거 맞지?”

    “걱정 마. 미친 새끼, 활만 잘 쏘면 다야? 운 좋게 태자 저하의 눈에 들어 지금껏 살아 있는 주제에.”

    한 남자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입을 틀어막고 눈만 굴렸다.

    저들이 말하는 ‘미친 새끼’는 주몽이 분명했다. 그런데 시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일까. 짐작이 가는 구석은 간밤에 일어났던 습격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습격을 당했는데도 주몽이 멀쩡히 돌아왔다는 것은 상대방 측에서 피해를 입었다는 소리였다. 그게 아니면 순순히 놓아줬을 리가 없다. 결국 저 남자들이 주몽을 습격하고 그 대가를 동료의 죽음으로 치른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지 남자는 부들거리며 주몽을 짓씹기 바빴다.

    “어제 그놈을 잘게 다져놓았어야 했는데. 사내새끼가 곱상하게 생겨선, 그 활만 없다면 그 자식은 나한테 한주먹감도 안 돼.”

    “……근데 알잖아. 난 자다가도 그 화살이 생각나 벌떡 일어났어. 도저히 잊히지 않더라.”

    이어지는 다른 목소리는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주몽의 솜씨를 말할 때는 음색에서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욕을 쏟아내던 남자도 그 말에는 십분 동의했다. 간밤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주몽의 실력이 뇌 속 깊이 새겨진 모양이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 남자가 다시 분노를 토해냈다.

    “그래도! 넌 분하지도 않냐? 그 새끼가 대체 뭐가 잘났다고…….”

    “…내 말은 다른 방도를 생각해보자는 거지. 꼭 정면승부를 하라는 법은 없잖아?”

    두려워하던 남자가 돌연 목소리를 낮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검은 악의가 뚝뚝 흘러넘치는 목소리였다. 한동안 비열한 웃음이 수풀을 뒤흔들었다.

    그동안 나는 저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는 아니니 내 주변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주몽과 훈련을 같이 하는 무사일 것 같은데. 그나마 아는 무사들을 쭉 대입시켜 보던 중 남자가 툭 말을 던졌다.

    “아무튼 난 오늘 무서워서 사냥 못 나가겠다. 어차피 어제 그놈에게서 가져온 사냥감이 상당해서 괜찮아.”

    순간 관리가 올린 보고와 주몽이 우울하게 중얼거린 말이 떠올랐다. 분명 가람이의 무사들에게 사냥감을 넘겨줬다고 했었지. 용의자가 단박에 좁혀졌다.

    오늘 가람이를 산속으로 들여보냈을 때 그의 뒤를 따랐던 사람들은 둘이었다. 그들과 이곳에 있는 둘, 아니 시체를 포함하면 총 다섯 명.

    무리를 지어 다니는 그들이 오늘 가람이를 따라간 둘을 제외하고 일을 저질렀을 리는 없으니 범인은 다섯 명 전부라고 해도 무방할 터였다. 어제도 가람이 몰래 단독으로 일을 저지르더니 습격마저 감행한 모양이지.

    나는 떠들던 남자들이 사라진 뒤로도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고민을 거듭했다.

    어쩌면 ‘사냥 대회’ 퀘스트 완료 보상이 이야기했던 ‘각인’이 저들에게 새겨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워하면서도 달려들고, 지우고 싶어 하면서도 잊지 못하는 것이 딱 각인과 어울렸다.

    다만 퀘스트를 내렸을 신이 고려하지 못한 점은 애초에 ‘종이’에 운명이 부실하게 새겨진 탓에 모두에게 자유 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 원래라면 주몽의 영웅적 면모를 보고 열광했어야 할 자들은 그들의 감정에 따라 주몽에게 질투를 느끼고 적개심마저 가졌다.

    “저하? 태자 저하!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사이 천막에 다녀온 오이가 나를 보고 놀라 달려왔다. 그는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내 안위를 살폈다. 나는 우선 아무 일도 없었다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머릿속은 여전히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주몽을 한 번 해코지하려 한 놈들이 두 번은 안 그러리라는 보장도 없다. 실제로 비겁한 수를 계획하는 모습까지 보았다.

    나는 아주 오래전 우 대사자가 보냈던 자객에게 베였던 팔을 떠올렸다. 운이 나빴다면 난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 주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아무리 활을 잘 다뤄도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비라도 할 수 있게 최대한 내가 잘 알고, 어쩌면 꾸밀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습격’을 당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마침 내게 적당한 소재가 있었다. 다만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끌어가기 위해선 몇 가지 도움이 필요했다.

    때마침 만나기로 했던 사내들이 수풀을 헤치고 다가왔다. 이미 오이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시키실 일이 없다 들었소만. 보수는 약조보다 가볍게 받겠소.”

    “그럴 필요 없다. 보수는 그대로, 아니 더 얹어 주지. 대신 한 가지 해줘야 할 일이 생겼어.”

    나는 잽싸게 말을 바꿨다. 언질도 없이 벌인 일에 오이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반면 돈을 더 벌게 된 사내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들이 전서구용으로 구비하고 다니는 붓과 종이를 빌려 몇 마디를 짧게 적었다. 그리고 오이가 보지 못하게 꼭꼭 접어 사내에게 건넸다.

    “여기에 적힌 글을 다섯 가문에게 전달하면 되네. 활에 묶어 대문에 쏘아도 좋고 소문인 척 귀에 흘려도 좋아. 다만 반드시 그 집안 사내들에게 말이 들어가게 해야 할 것이야.”

    특정인을 노리지 않고 가문 전체를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추적을 피하고 영향력은 넓힐 속셈이었다. 해당 가문명은 추가금과 함께 협보를 통해 전달하겠다고 하자 사내는 맡겨만 달라며 물러났다. 씨익 웃으며 이를 드러내는 모습이 이런 일에 능숙한 티가 났다.

    나 역시 그 새카만 이를 마주 보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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