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27)
  • 9. (1)

    “활 시범을 보이고 왔다고? 고생했네, 이리 와.”

    나는 팔을 뻗어 익숙하게 주몽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품 안에 그를 가두고 머리를 쓰다듬자 주몽이 기분 좋다는 듯이 기대왔다. 요 며칠 자주 안아줬다고 벌써 익숙해진 모양새였다. 그래서인가. 나는 불만족스럽게 눈앞에 뜬 시스템 창을 쳐다보았다.

    [이벤트]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

    경험치 10을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획득 경험치 : 490 / 500

    익숙함에 빠져 소중함을 모른다더니. 겨우 10밖에 오르지 않은 경험치에 입이 불퉁하게 튀어나올 뻔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그 아래 위치한 ‘현재 획득 경험치’가 보이자 사르르 풀렸다.

    그도 그럴 것이 ‘특별한 선물’을 손에 거머쥐게 될 순간이 머지않았기 때문이었다.

    선물로는 뭐가 주어질까? 그동안 퀘스트 완료 시 보상이라고 해봤자 매번 내겐 한 톨 쓸모도 없는 것들만 나왔었다. 그러나 이번에 진행하는 퀘스트는 전과 달랐다.

    나는 처음으로 ‘이벤트’ 퀘스트를 진행 중이었다.

    일명 ‘업데이트’가 진행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뜬 퀘스트였다. 난데없이 ‘시스템 업데이트가 진행됩니다.’라는 경고 문구와 함께 진행 창이 떠서 어찌나 놀랐던지. 반투명한 창 위에 조금씩 채워지던 상태 바는 반나절이 지나서야 100%에 도달하고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업데이트였지만 의심 가는 구석은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시스템 창은 아무런 퀘스트도 뱉어내지 않았다. 간간이 시스템 창을 불러와 ‘진행 중인 퀘스트가 없습니다.’라는 문구를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이대로 부여에 갇힌 거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렇게 확인을 해도 초조한 감정이 불쑥 치솟을 때가 많았다. 특히 내 원래 나이인 열여덟 살을 맞이한 이후론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지나는 하루하루가 이전의 나를 넘어서 알지 못했던 나이를 그린다는 것은 꽤나 불안한 일이었다. 억지로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신이 써넣었다는 ‘종이’의 기원인 ‘동명왕편’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신화 속에서 본격적인 이야기는 사냥 대회 때부터 시작된다. 갑작스러운 업데이트는 드디어 그때가 다가왔음을 알리는 것 같았다. 곧 몰려올 ‘종이’에 적힌 운명들을 맞이해 시스템 창도 새 단장을 하는 모양이지. 애써 태연하게 생각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내리눌렀을 때였다.

    띠링— 오랜만에 듣는 알림음과 함께 ‘이벤트’가 떠올랐다.

    [이벤트]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

    ‘주몽’이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필요합니다. ‘주몽’의 경험치를 쌓아보세요. 경험치는 ‘주몽’의 평판이 올라가거나 히든 능력을 개방하면 올라갑니다. 일정 수준 달성 시 ‘특별한 선물’을 제공합니다.

    Tip : 새롭게 업데이트된 ‘감정 연동’ 시스템을 경험해 보세요. ‘주몽’의 감정 변화에 따라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다음 보상까지 필요한 경험치 : 500

    나는 어쩐지 낯선 기분으로 창을 훑어 내렸다. 대충 주몽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시키고 경험치를 올리라는 내용 같았다. 새롭게 도입됐다는 ‘감정 연동’ 시스템도 눈에 띄었지만 감은 잘 잡히지 않았다. 뭐, 감정 변화라면 극단적인 분노 같은 게 필요하다는 건가.

    특별하다는 선물이 끌리긴 했지만 이벤트 퀘스트라 그런지 ‘실패 시 결말’이 없어서 의욕이 솟진 않았다. 평판을 올리라는 게 말이 쉽지 막상 하려면 신경 써야 할 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나 주몽이나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서 어릴 때처럼 이곳저곳 끌고 다니며 선보이기도 힘들었다.

    기한도 없어 보이는데 설렁설렁 할까. 우연히 건수가 생길 때만 경험치를 올리는 쪽으로 점점 마음을 굳힐 때였다. 별궁에서 태자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몽을 만났다.

    “해야! 어디 갔다 와?”

    반가움에 잠시 대화를 나누는데 지나가던 어린 궁인이 내 쪽으로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서둘러 손을 뻗었지만 주몽이 더 빨랐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그는 미동 하나 없이 팔 힘으로만 궁인을 일으켜 세웠다.

    띠링— 그 즉시 익숙한 알림음과 함께 작은 창이 하나 떴다.

    [이벤트]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

    경험치 5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획득 경험치 : 5 / 500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가리고 원래의 창보다 반은 작은 그 창을 들여다보았다. 분명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경험치가 자동으로 올라간다고?

    “방금! 방금 그거, 다시 해봐.”

    “소, 송구하옵니다. 다, 다시 넘어지란 말씀이시옵니까?”

    내 뜬금없는 물음에 궁인이 다시 넘어질 듯 비틀거렸다. 나는 우선 그녀를 말렸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녀의 발갛게 상기된 귓가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벼락같은 깨달음에 그녀와 주몽을 번갈아 보다 황급히 이벤트 창을 다시 불러냈다. 그리고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살펴보았다.

    ‘주몽의 평판이 올라가거나 히든 능력을 개방하면….’ 그 어디에도 내가 올려야 한다는 말은 없었다. 스스로가 올리든 남이 올리든 올라가기만 하면 경험치가 쌓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제야 편안한 마음이 되어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궁인이 주몽에게 반한 게 틀림없었다. 나도 종종 저 얼굴에 넋을 놓는데, 친절하기까지 하니 평판이 안 올라가고 배길까.

    주몽은 점점 자라면서 모든 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궁술은 말할 것도 없고 검술이나 승마도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머리도 좋아 한 번 들은 것은 잊지 않는다는 괴담 수준의 말이 떠돌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시선을 빼앗는 것은 그의 특출난 외모였다. 갓 태어났을 때도 뽀얗고 아주 어여쁘다고 생각했는데 흔히 마의 구간이라고 불리는 나이에 돌입한 지금도 아이는 흠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신의 아들이라는 걸 활 솜씨가 아니라 외모 때문이라고 해도 납득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성격까지 어찌나 착하고 순한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얼굴을 붉히고, 가다가도 뒤를 돌아보는 게 절로 이해됐다.

    한마디로,

    [이벤트]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

    경험치 5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획득 경험치 : 35 / 500

    가만히 놔둬도 평판은 저절로 올라간다는 뜻이었다.

    나는 차를 마시다 말고 떠오른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누군가 주몽에게 호감을 가진 모양이었다. 경험치가 생각보다 조금밖에 오르지 않았지만, 신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보상을 순순히 내놓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이렇게 놔두면 언젠가 500도 채우겠지.

    태평하게 생각하며 조금 기다리자 주몽이 도착했다. 그는 익숙하게 들어와 내 앞에 앉았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길 기다려 차를 따라주자마자 꺼내는 말이 잔뜩 들떠 있었다.

    “오늘은 우 대사자님께 수업을 받았는데 스승님께서 제 대답에 훌륭한 식견이라고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아까 오른 경험치의 주인공이 우 대사자였나 보다. 주몽은 유독 학문적으로 성과를 올릴 때면 내게 빠짐없이 자랑을 해왔다. 어린 시절 그를 내쳤던 내가 다시 처음으로 그를 받아준 것이 잔뜩 공부한 서책을 들고 왔을 때라는 것을 기억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것이 못내 안쓰럽고 대견해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 쓰다듬기가 무섭게 다시 시야를 가리는 반투명한 창에 멈칫거리고 말았다.

    띠링—

    [이벤트]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

    경험치 20을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획득 경험치 : 55 / 500

    전에 없이 높은 경험치였다. 내가 뭘 했다고……. 설마 머리 조금 쓰다듬어 줬다고 오른 건가? 나는 미심쩍게 내 손을 내려다보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주몽을 덥석 끌어안았다. 띠링—! 그러기가 무섭게 알림음이 맹렬하게 울렸다.

    [이벤트]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

    경험치 50을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획득 경험치 : 105 / 500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높은 수치에 하마터면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경험치가 오르는 데 평판 외에 또 다른 조건이 있었나?

    몇 번이고 읽었던 탓에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금세 답이 떠올랐다. 새롭게 나타난 ‘감정 연동’ 시스템. 극단적인 분노나 슬픔 따위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런 자그마한 애정 표현에 따른 감정 변화도 포함되는 모양이었다.

    “착하다, 해야. 칭찬도 받고 잘… 했어.”

    나는 일단 계속해서 칭찬을 중얼거리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띠링— 띠링—. 그 와중에도 알림음은 두 번이나 더 울리며 올라가는 경험치를 표시했다. 순식간에 획득 경험치가 200을 뛰어넘었다. 한껏 칭찬을 해 겨우 5를 올렸던 우 대사자가 알면 뒷목을 잡을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감정 연동’! 이것 참 좋은 놈이었구나!

    평판을 올려 얻는 것보다 감정 연동 시스템을 이용해 얻는 경험치의 양이 훨씬, 훨씬 더 컸다. 이대로라면 특별한 선물을 그저 기다리고만 있을 이유가 없었다. 퀘스트 난이도가 수직 하락한 기분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나는 그제야 단단히 얽었던 팔을 풀어주었다.

    그 뒤로는 탄탄대로였다.

    주몽에게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묻기만 해도 칭찬해 줄 만한 일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저 아무거나 골라잡고 팔만 벌리면 됐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주몽도 “어릴 적엔 덥석덥석 잘도 안겼는데…….” 하고 서운한 척을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폭 안겨 왔다.

    띠링—

    [이벤트]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

    경험치 30을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획득 경험치 : 325 / 500

    물론 어김없이 뜨는 시스템 창은 덤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고 주몽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발갛게 물들어 있는 잘생긴 볼이 보였다.

    매번 안아주는데도 저렇게 좋은가. 그러고 보니 요 몇 년간 포옹은 잘 안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알이었을 때부터 봐서 그런지 나는 안아 올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주몽이 어느새 그럴 수 없는 덩치가 된 바람에 자연히 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그게 서운해서 지금 이렇게 좋아하는 건가 싶었다. 굶주린 애정을 엿본 것 같아 측은지심이 피어올랐다. 나는 반쯤 충동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쪽—

    발간 볼에 입을 맞추는 행동엔 망설임이 없었다. 어차피 어릴 때 종종 해줬던 볼 뽀뽀였다.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이쁜 짓만 골라서 하는데 어떻게 안 예뻐해. 아주 볼을 물고 빨았었지……. 회상에 젖은 나를 일깨운 것은 사납게 울리는 알림음이었다.

    띠링—!

    [이벤트]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

    경험치 80을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획득 경험치 : 405 / 500

    최고 기록을 갈아치운 수치에 놀랄 새도 없이 주몽이 뒤로 확 끌려갔다. 범인은 그동안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쳐다보기만 했던 오이였다.

    “태자 저하! 이게 무슨 망측한 행동이십니까!”

    게다가 좀체 높이는 법이 없던 목소리까지 큰 소리로 터져 나왔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벌겋게 낯이 익은 채였다. 그 반응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했다.

    “왜 이래. 원래 하루가 멀다 하고 해줬던 건데.”

    “지금은 다 큰 사내자식이 아닙니까! 볼에 이, 입맞춤이라니…….”

    “네 반응이 더 망측해, 오이야…….”

    순수한 우애, 아니, 거의 부성애에 가까운 애정 표현을 한순간에 상종도 못 할 것으로 전락시켜버리는 그의 태도에 내 말문이 다 막혔다. 누가 보면 입에라도 한 줄 알겠네……. 하도 어이가 없어 혼자 중얼거린 말에 오이가 당장이라도 거품을 물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결국 나는 서둘러 뱉은 말을 급급히 주워 담았다.

    “아, 알겠어. 좀 진정해. 우리 해가 너 때문에 부끄러워하잖아.”

    곁눈질로 본 주몽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겨우 볼 뽀뽀가 뭐라도 되는 양 몰고 가니까 괜히 휩쓸려 부끄러워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면 너무 오랜만에 해줘서 놀랐나? 경험치가 무려 80이나 올랐으니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덕분에 내 눈도 못 마주치는 게 영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 저녁도 못 먹이고 북녘궁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이 기세를 몰아 오늘 내에 남은 경험치도 처리해버리려고 했건만 아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뒤론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는 오이 때문에 얌전히 주몽을 끌어안고 토닥이기만 해야 했다. 그때 난리만 안 쳤어도 그 ‘특별한 선물’을 진작에 까고 남았을 텐데. 오늘도 뒤에 서 있을 충직한 호위 무사를 생각하며 나는 남몰래 입을 삐죽였다.

    그래도 곧 500이니까……. 자주 안아줬다고 이젠 10밖에 오르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490을 돌파한 지금에선 상관이 없었다. 끝나면 저녁부터 같이 먹어야지.

    그전에 다과라도 먹을까. 오늘따라 유난히 달달한 게 당기는데.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주몽의 어깨에 턱을 괬다. 목표치가 가까워져서인지 설렘으로 이리저리 튀는 생각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역시 이럴 땐 달콤한……. 띠링— 생각을 다 마치기도 전에 오매불망 기다리던 시스템 창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벤트]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

    경험치 10을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획득 경험치 : 500 / 500

    [이벤트]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 – 목표 달성

    축하합니다! 드디어 목표 경험치를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특별한 선물’이 제공됩니다.

    ‘우편함’으로 가서 주어진 보상을 확인해보세요.

    “잠깐만.”

    연이어 뜨는 창에 나는 우선 주몽을 밀쳐냈다. ‘우편함’으로 가라고? 시스템 창을 불러오라는 뜻 같았지만 모두가 지켜보는 이곳에서 허공을 휘저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인지도 모를 보상을 꺼내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고. 우선 가벼운 흥분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는데 주몽이 어리광을 피웠다.

    “형님. 저 올해 사냥 대회에도 꼭 참가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제가 활을 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는 무사가 한둘이 아니더군요.”

    “어? 응. 잘했어.”

    누가 봐도 다시 안아달라는 제스처였지만 나는 모른 척 말을 돌렸다. 팔까지 작게 벌린 게 귀엽긴 했지만 겨우 얻어 낸 보상이 더 궁금했다. 그리고 이벤트는 끝났으니 지금 안아준다고 경험치가 쌓일 리도 없고……. 아, 이건 취소. 무심코 든 속물적인 생각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우편함부터 열어 보자. 뒷수습은 오이가 해주겠지.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홀로 방을 빠져나왔다. 내가 자리 잡은 곳은 태자궁 가장 안쪽에 있는, 옷으로 가득한 방이었다.

    “우편함이……. 아, 여깄다.”

    익숙하게 불러낸 반투명한 창 한구석에서 반짝이는 편지 봉투 모양 아이콘이 보였다. 설레는 마음을 끌어안고 누르기가 무섭게 창이 바뀌었다.

    [우편함] 이벤트 보상

    □ 신이 만든 사탕 X 10개

    - 특별한 선물로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을 드립니다!

    “……이게 뭐야?”

    창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릴수록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떨리는 손을 들어 화면을 톡 건드리자 손바닥 위로 작은 알사탕 한 개가 떨어졌다.

    포장지는 없었지만 동그랗고 투명한 모습에 살짝 튀어나온 띠까지, 의심할 여지 없이 사탕이었다. 분노가 일기도 전에 허탈함이 더 먼저 찾아왔다.

    “그럼 그렇지…….”

    ‘그’ 신이 제대로 된 것을 내어줄 리가 없었다. 조금 전에 달달한 것 좀 원했다고 사탕을 보상으로 주다니. 아무래도 좋았지만 다만 약이라도 올리듯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이라는 문구가 눈앞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정말로,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건 이게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 이딴 문구를 넣는 것도 참 악취미다 싶었다. 사탕을 꾹 쥔 주먹으로 그 글자를 마구 때렸지만 내 손은 반투명한 창을 뚫고 지나갈 뿐이었다. 마치 닿을 수 없는 곳을 노리지 말라는 것처럼 보여 허망함만이 더 커져 갔다.

    결국 힘이 빠진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열이 오른 손바닥 안이 온통 끈끈했다. 나는 잔뜩 녹은 사탕을 말없이 바라보다 한입에 털어 넣었다. 어느새 손톱만 해진 알을 굴릴 때쯤엔 새로운 창이 떴다.

    [이벤트]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

    ‘주몽’이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필요합니다. ‘주몽'의 경험치를 쌓아보세요. 경험치는 ‘주몽’의 평판이 올라가거나 히든 능력을 개방하면 올라갑니다. 일정 수준 달성 시 ‘특별한 선물’을 제공합니다.

    Tip : 새롭게 업데이트된 ‘감정 연동’ 시스템을 경험해 보세요. ‘주몽’의 감정 변화에 따라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다음 보상까지 필요한 경험치 : 2500

    나는 흰 눈으로 이벤트 창을 노려보았다. 짐작과 달리 일회용 퀘스트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특별한 선물’ 운운하며 사람을 현혹시켜 놓고 정작 가장 원하는 것은 쏙 피해서 주니 곱게 보이지 않았다.

    다섯 배로 뛰어 버린 ‘다음 보상까지 필요한 경험치’는 또 어떻고. 저걸 채우려면 팔이 빠지도록 껴안고 입술이 닳도록 뽀뽀를 해줘도 모자를 게 분명했다.

    도움도 안 되는 이벤트 따위. 어차피 이런 이벤트에 현혹되어 주몽을 온전히 칭찬해 주기는커녕 속물적으로 대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던 차였다.

    나는 사탕의 남은 잔해를 혀로 쓸며 망설임 없이 창을 치웠다. 시도 때도 없이 뜨는 알림을 끄기 위해 옆에 위치한 작은 종 모양 아이콘을 누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포기’ 버튼이 없으니 대신 애초에 없는 듯 잊고 살 생각이었다.

    “태자 저하!”

    마음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무섭게 오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타이밍도 참 좋지. 나는 지친 입꼬리를 겨우 끌어 올리며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가 한숨을 쉬며 옷더미를 헤치고 다가왔다.

    “주몽은 북녘궁으로 돌아갔습니다.”

    “벌써? 석반이라도 같이 들려고 했는데.”

    “……북녘궁에 다시 사람을 보낼까요?”

    오이가 어쩐지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 복잡미묘한 표정에 상황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단단히 삐쳐서 갔구나. 요 며칠 제멋대로 안아주다가 내쳤으니 잔뜩 토라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가서 목표했던 저녁이나 먹고 미처 하지 못했던 칭찬도 마저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아니야. 번거로울 것 없이 내가 북녘궁으로…….”

    띠링— 말하는 도중 울리는 알림음에 나는 짜증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알림을 꺼 두었는데. 그러나 눈앞에 보인 것은 예상했던 경험치 창이 아니었다.

    [메인] 사냥 대회

    영웅은 시련을 겪어야 비로소 탄생합니다. ‘사냥 대회’는 그 시초를 만들기 적당한 무대입니다. ‘사냥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주몽’을 곤경에 처하게 해서 시련의 계기를 만들어 주세요. 곤경의 정도는 ‘주몽’의 ‘감정 연동’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곤란 수치’에 의해 측정됩니다.

    누적 곤란 수치 : □□□□□□□□□□ 0%

    성공 시 보상 : ‘주몽’의 영웅적 면모 발견, 영웅 서사 시작

    실패 시 결말 : ‘하백’과 ‘창조주’의 분노로 세상 멸망

    “저하?”

    나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오이를 돌려세웠다. 도저히 표정 관리를 잘할 자신이 없었다.

    심증뿐이던 ‘사냥 대회’ 퀘스트가 드디어 현실이 되었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성공 시 보상’ 중에서도 ‘영웅 서사 시작’이었다. 이 영웅 서사가 끝나면 비로소 집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 앞으로 몇 개는 남아 있을 ‘메인’ 퀘스트에 대한 부담감보다 그 사실 하나가 더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우선 이 퀘스트부터 완료해야 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퀘스트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동명왕편’에 기초했을 때 영웅이 겪는다는 시련은 마구간에서 일하게 되는 것이 분명했다. 신화 속 ‘주몽’은 사냥 대회에서 태자에게 밉보이고, 그의 모함에 넘어간 왕은 ‘주몽’에게 말을 기르라 한다. 이번 퀘스트는 그 모함의 시초가 될 사건을 사냥 대회에서 일으키라는 것 같았다.

    오래전 내가 어린 주몽을 내쳤던 것은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였다. 신화 속 ‘태자’처럼 주몽을 괴롭히고 모함해서 건국까지 일을 쉽게 만들 속셈이었는데. 그 방법은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니 다른 방도를 생각해 내야 했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아무래도 북녘궁엔 가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돌려세우느라 등을 짚은 오이에게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렇게 걱정하면서도 시킨 대로 뒤 한 번 돌아보지 않는다. 아직 관련 퀘스트가 뜨지 않아서인지 주몽 대신 나를 따르는 오이를 보자 스쳐 가는 깨달음이 있었다.

    ……꼭 원작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

    퀘스트에는 왕이 주몽을 마구간에 취직시키는 것에 대한 계기가 꼭 모함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없었다. 사냥 대회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사냥 대회에서 주몽이 겪어야 하는 곤란이 꼭 태자와 관련돼야만 할까?

    퀘스트에 쓰여 있길 곤경의 정도는 ‘곤란 수치’로 측정한다고 했다. 다르게 말하면 뭐가 됐든 주몽을 곤란하게만 만들면 된다는 뜻이었다.

    마침 내가 숙명처럼 여기는 말이 떠올랐다. 모로 가도 결말로만 가면 된다. 뭐든 내가 악역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모함이든, 곤경이든 남의 손을 이용하면 된다.

    “사냥 대회가 보름 뒤던가.”

    “예. 그렇습니다.”

    내 갑작스러운 말에도 오이는 반문 하나 없이 답했다. 사냥 대회라면 매년 참가하지 않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나도 이번만큼은 말고삐를 쥐고 그 속에 서야 했다. 참가 신청이야 진즉 끝났지만 태자가 참가하겠다는데 말릴 이는 없을 테고.

    결국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하나였다. 곤경을 만들 꽤 괜찮은 악역을 하나 마련하기. 마침 나는 그 역할을 맡을 적당한 자와 연이 닿아 있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됐다. 더 늦기 전에 석반을 들러 가자.”

    “결국 북녘궁으로 가시는 겁니까? 차라리 제가 연통을 넣어 다시 주몽을 불러오겠습니다.”

    “아니. 별궁으로. 오늘 석반은 오랜만에 협보랑 먹어야겠다.”

    아직도 앞만 바라보고 있는 오이를 앞질러 걸어가자 황급히 따라붙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미 내 머릿속은 협보를 어떻게 설득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했다. 어릴 때도 보통 꼬맹이가 아니었는데, 이젠 성인이 되어 완연한 장사치가 된 그 아이를 어떻게 구슬려야 할까.

    주몽을 달래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까맣게 사라진 뒤였다.

    ***

    “정말 가실 겁니까?”

    “아, 그렇대도. 지금이 몇 번째 물음인 줄은 아느냐?”

    결국 주변 이들에게는 잘 쓰지 않는 말투까지 꺼내 들고 나서야 협보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잠깐이었다. 다시 열린 입은 지난 십오 일간 끈질기게 들었던 말을 떠들어댔다.

    “생전 사냥엔 관심도 두지 않으시던 분이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서안 앞에 앉아 붓대만 잡고 무예는 죽어라 하기 싫어하셨으면서! 갔다가 괜히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무뢰배들에게 치이고 오시는 거 아닙니까?”

    협보가 신랄하게 나를 돌려 깠다. 철저한 두뇌파인 그는 무예로 이름난 마가 태생답지 않게 무사의 ‘무’ 자만 들어도 넌더리를 쳤다. 그러나 나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사냥 대회가 치러지는 산 아래에서 비밀스러운 만남을 오래 지속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안 하던 짓을 하시면 큰일이 난다 들었습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안 그래도 퀘스트 때문에 신경이 잔뜩 곤두선 참이었다. 이게 망하면 신들의 분노로 자신도 죽는다는 걸 모르기에 태평하게 할 수 있는 말이겠지. 결국 내 태도에서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을 것이란 걸 깨달은 협보는 말을 멈췄다. 대신 크게 한숨을 쉬더니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장정 다섯을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시키실 일이 정해진다면 머리에 푸른 천을 맨 사내를 찾으십시오.”

    나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해 보였다.

    아직 유화의 사업에 함께하고 있는 협보는 몇 년 전, 반쯤 도박이었던 새 사업을 성공시킨 일등 공신이었다. 그 사업에 필수적이었던 게 바로 장정들이었고. 그런 그가 구해준 만큼 이 방면에선 가장 뛰어난 데다가 뒤탈도 없는 자들로 준비되었을 것이다.

    사례는 두둑이 하겠다는 말에 협보가 무르기 없다며 재차 확답을 받아냈다. 말은 저리 해도 내가 시킨 일 때문에 이 이른 새벽까지 나와준 사람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오이가 초조한 기색으로 다가와 입을 뗐다.

    “저하. 서두르셔야 합니다.”

    사냥 대회는 총 이틀 동안 열린다. 짧다면 짧은 일정에 귀족들은 이른 아침부터 사냥을 시작하는 편이었다. 어느덧 해가 대지를 비추고 있었으니 지금쯤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급히 인사를 건네고 나가려는 나를 협보가 붙잡았다.

    “설마 그 차림으로 참가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투였다. 나는 체념한 기색으로 내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태자로서 참석하는 자리답게 잘 갖춰 입은 흰색 예복에 몇 가지 장신구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말 타는데 흰색이 다 무어냐 싶었지만 거의 몇 년 만에 자발적으로 행사에 참여하는 일에 들뜬 궁인들에게 타협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무슨 바람이 드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사냥은 하지 않으실 테니 가서 위엄이라도 뽐내고 오셔야 한다는 게 유모의 주장이었다.

    이마저도 사냥 대회라며 말리고 말려서 간소화한 차림이라면 믿겠니. 내 초연한 웃음에서 모든 걸 눈치챈 그가 두말없이 무사 귀환을 빌며 뒷걸음질을 쳤다. 나도 이번엔 정말로 작별 인사를 건네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할 말들은 한 마리만 남아있었다. 감히 태자의 말을 훔칠 간 큰 인간은 없을 테니 사라진 말의 주인은 뻔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오이에게 물었다.

    “오이야. 네 말은?”

    “아……. 다른 무사가 필요하다 하여 넘겨줬습니다.”

    “뭐? 누가?”

    하도 어이가 없어 반문했지만 누구일지는 짐작이 갔다. 오이를 처음 데려왔을 적 그를 괴롭히던 놈들은 모두 겁을 줘 쫓아냈지만 뿌리 깊은 폭행의 역사가 그리 쉽게 사라질 리 없었다. 게다가 강산이 바뀌고 그들이 죄다 한 자리씩 차지하게 되니 더더욱 이렇게 뒤에서 교활한 짓거리를 저질렀다.

    “저는 괜찮습니다. 옆에서 걸으며 보좌해도 충분합니다.”

    “보좌할 대상이 말을 타고 있는데 어떻게? 너도 지금 내가 말 잘 못 탄다고 비꼬는 거야?”

    “예? 아닙니다!”

    일부러 내뱉은 말에 오이가 다급히 아니라며 변명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미 속이 단단히 뒤틀린 내겐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나한테 이야기하면 어련히 처리를 해줄 텐데 오이는 매번 묵묵히 감내하기만 했다.

    빨리 주몽 편에 붙여 고구려로 보내버리든가 해야지. 매번 하는 다짐을 되새기며 손짓으로 궁인을 불렀다. 마구간지기에게 새로운 말을 한 마리 가져다 달라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손짓에 애꿎은 사람이 말머리를 돌려 다가왔다.

    “형님! 어디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오늘 내가 함께한다는 소식에 잔뜩 신이 난 가람이었다. 내 주위를 맴도는 그는 꼬리가 달려 있었으면 붕붕 흔들었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너무 높이 있어 그러지 못했다. 내 아쉬운 기색을 읽어낸 건지 가람이가 귀신같이 말에서 내렸다. 나는 웃으며 그래도 높이 있는 가람이의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아니. 오이에게 말이 한 마리 필요할 것 같아서.”

    나는 상황을 설명하며 정말로 목적했던 마구간지기를 다시 불렀다. 부름을 받은 그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순한 말을 한 마리 가져다 달라 운을 떼려 할 때였다.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 파악을 마친 가람이 생긋 웃으며 선수를 쳤다.

    “얼마 전 들어온 말 중 명마가 한 마리 있다던데. 그 말을 데리고 오너라.”

    “도, 동예에서 온 그 말 말씀이시옵니까? 하오나 그 말은….”

    “소문은 익히 들었으니 잔말 말고 데려오너라.”

    무언가를 말할 듯 입을 우물거리던 마구간지기가 어설픈 예를 갖추고 서둘러 멀어졌다. 나는 놀라서 가람이의 팔을 붙잡았다. 대뜸 명마라니, 이미 주인이 있는 말을 빼앗아 오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는 아닐 거라는 모호한 대답만 하더니 끌려오는 말에 시선을 던졌다.

    나는 눈을 비빌 뻔했다. 말은 표현 그대로 ‘끌려오고’ 있었다.

    “허억, 헉. 원체 성질이 사나운 말이라……. 저하, 정말 괜찮으시겠사옵니까?”

    말을 다루는 데 잔뼈가 굵었을 마구간지기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걱정을 내비쳤다. 말이 발을 구르며 크훙! 푸흥!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단단한 고삐도 이 짐승에겐 얄팍한 끈 쪼가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할 말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번에도 가람이가 먼저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런 말이 오히려 사람의 손을 타면 얌전하지. 한번 타보겠느냐?”

    비웃음의 대상은 당연히 오이였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오이에게 눈짓을 보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되돌려보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폐를 끼쳤다는 죄책감에 젖어 있던 충직한 무사는 내 신호를 단단히 오해했다. 그는 말고삐를 단단히 틀어쥐더니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말 등에 올라탔다. 말이 심하게 날뛰었지만 양다리로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고삐를 잡아당기자 차츰 몸부림이 멈췄다. 눈에는 여전히 반항심이 그득했지만 타고 있는 동안은 별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일련의 움직임에 나와 마구간지기는 감탄을 터뜨리며 박수를 짝짝 쳤다.

    “대단한데? 역시 무술계의 떠오르는 샛별.”

    물론 박수는 나만 쳤다. 마구간지기는 감탄사만 조금 얹다 가람이의 눈총을 받고 줄행랑을 쳤다. 가람이는 이 상황이 못마땅한 듯했지만 내가 어깨를 꽉 쥐자 꼬리를 말았다.

    “이래 놓고 어제 뭐? 오늘 같이 사냥을 어쩌고저째?”

    “아, 형님…….”

    “꿈도 꾸지 마. 양심이 있다면 반성하는 셈 치고 남은 시간만큼은 얌전히 지내자, 응?”

    가람이가 질질 말꼬리를 늘이며 내게 용서를 구했지만 쳐다도 보지 않았다. 골탕만 먹이고 그만두려 했다는 변명에 낙마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냐고 응수해도 그럼 자신이 호위해주겠다는 말에 이마를 짚어야 했다.

    “내 호위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제겐 형님 외에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상한 방향으로 깊은 우애에 한숨만 나왔다. 그러나 우애 외의 이타심을 가르치기도 전에 준비를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도 움직이지 않는 우리 둘에게 사람들의 힐끔대는 시선이 쏟아졌다.

    결국 나는 우선 가람이의 도움을 받아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내 어깨쯤에 오는 가람이의 정수리에 이마를 갖다 대고 볼을 마구 주물렀다. 일종의 화풀이였다. 궁인들의 성화로 착용했던 장신구들이 그의 이마와 귀 따위에 부딪히며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얼굴을 떼고 바라본 그는 빛에 반짝이는 보석이 눈부신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힘이 좀 셌는지 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겠다. 나는 미안함을 담아 볼을 살살 문질러주며 속삭였다.

    “오늘 사냥 조심히 잘하고. 낌새가 안 좋은 무리에는 가까이 가지 말고.”

    “제가 앱니까?”

    그가 툭 내뱉으며 내 팔을 치웠다. 마지막 말은 진심이었는데. 그러나 말에 훌쩍 올라탄 곧은 등은 금세 사라졌다. 대신 더러운 성질을 한껏 뽐내는 말의 고삐를 여러 번 잡아당긴 오이가 곁으로 다가왔다.

    “가시죠.”

    저 멀리서 북소리가 둥둥 울렸다. 북소리에 맞춰 말발굽 소리가 지천을 울렸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사냥 대회가 시작되었다.

    저 앞에서 첫 번째로 산어귀에 들어가는 가람이가 보였다. 왕은 노쇠한 몸을 핑계로 참가하지 않았고 나는 기꺼이 입장을 미뤘으니 둘째 왕자가 첫 입장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다음으론 왕보다 더 노쇠한 몸을 이끌고도 빠지지 않는 대사자들이, 그 뒤로 회의 때 종종 보았던 귀족들이 간격을 두고 산으로 들어갔다.

    나는 눈을 굴려 주몽을 찾았다. 크게 애를 쓰지 않아도 대기열의 중간쯤 말을 타고 있는 그는 단박에 눈에 띄었다.

    이번에는 고개를 젖혀 내 머리 위에 떠 있는 화려한 일산을 바라보았다. 등 뒤를 돌아보자 줄줄이 늘어선 수행 궁인들이 보였다. 무기를 쥐고 있는 자들도 있었고 거대한 일산은 물론 물통, 도시락, 심지어 여분의 마구(馬具)까지 들고 있는 자도 보였다.

    “무슨 소풍을 왔나…….”

    나는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나무에 몸을 숨기고 주몽의 기척을 살피다 적당한 때 악역을 등장시켜도 모자랄 판에, 저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온 산에 소문을 낼 것 같았다.

    결심은 빨랐다. 나는 무술계의 샛별에게 조용히 손짓했다.

    “우리 몰래 빠져나가자.”

    “예? 아니 됩니다!”

    “저 행렬 안 보여? 줄줄이 달고 다녔다간 오던 사냥감도 모조리 도망가겠어.”

    “……사냥, 하실 거였습니까?”

    “그럼 넌 내가 뭐 하러 온 줄 알았는데?”

    물론 퀘스트를 해결하러 온 것이었지만. 이어서 그저 바깥바람이나 쐬러 오신 줄 알았다는 기죽은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내가 칼 한 자루 갖고 오지 않았다는 것도 잊고 일부러 황당하다는 티를 팍팍 냈다. 언제나 그렇듯 승리는 권력을 쥔 자의 것이었다. 여차하면 너도 두고 갈 거란 협박에 오이는 순순히 협조를 해왔다. 내가 얼마나 귀신같이 빠져나갈 수 있는지 아는 자의 빠른 포기였다.

    그렇게 우리는 궁인들의 눈을 피해 몰래 대기열에 섞여들었다. 흰 옷자락 한번 비춰주자 새치기는 숨 쉬는 것보다 쉬웠다. 나는 푸른 천을 맨 사내의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산에 발을 들였다.

    말을 다그닥거리며 거니는 숲길은 생각보다 상쾌하고 기분 좋았다. 전혀 오염되지 않은 울창한 숲이 때깔 좋은 이파리들을 우수수 떨어뜨렸다. 우거진 나무는 사이사이로 하늘 조각들을 내보였다.

    옆에서 오이가 하얀 피부에 볕이 드시겠다는 한숨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일산이 가장 거추장스럽다고 답해주려다가 말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이의 걱정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

    “오늘 흐려서 햇빛 한 줄기 비치지 않는데?”

    애초에 하늘이 구름으로 가득했다. 맑고 청명하기로 유명한 가을 하늘답지 않은 날씨였다. 그가 하늘을 쳐다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 숲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갈색 토끼 한 마리가 깡충거리며 뛰고 있었다.

    “토끼라도 잡아 보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릴 적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토끼를 키웠다.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토끼 친구를 학살할 순 없었다. 노루, 청설모, 꿩……. 그가 끈질기게 제안했지만 나는 하다못해 참새까지도 퇴짜를 놓았다. 사냥을 하겠다는 내게 낚여 단둘이 들어온 오이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애초에 내가 생명체의 숨을 끊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나무 사이를 휘적휘적 지나쳐갔다. 경치나 구경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는 중이었다. 일을 벌일 수 있을 만큼 터가 넓지만 사람들 눈에는 잘 띄지 않게 외져야 했다.

    범행 장소를 선정한 뒤엔 ‘곤란 수치’를 한 번 확인하고 이후 일을 결정할 생각이었다. 가능성은 낮겠지만 주몽이 돌부리에 걸린다든가, 오늘따라 사냥감이 모조리 도망가 체면을 구긴다거나. 그런 행운이 일어나 곤란 수치가 제법 쌓인다면 모쪼록 남은 시간에도 행운을 바라며 오늘은 두고 볼 작정이었다. 사람을 써서 곤경에 빠뜨리는 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라며 내 얄팍한 양심이 울부짖었다.

    “저하. 너무 외진 곳까지 들어왔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오이가 걱정스레 말하며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말을 멈추고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확실히 조금 전까진 사람들이 사냥감을 모는 소리가 들렸는데 여기는 나뭇잎 스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외진 곳은 찾았으니 이제 공터만 찾으면 된다. 나는 오이를 뿌리치고 말의 옆구리를 조심스럽게 찼다. 시간이 꽤 흐른 건지 하늘도 제법 어둑해져 마음이 급했다.

    그러나 몇 발자국 내딛기도 전에 하늘이 사납게 목울음을 울리더니 빛이 번쩍였다. 툭, 투두둑. 쏴아아— 여차할 새도 없이 온몸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양동이를 가져다 놓으면 단숨에 찰 정도로 거센 소낙비였다.

    “저하! 태자 저하! 일단 이쪽으로 오십시오!”

    오이가 다급하게 외치며 나를 커다란 나무 아래로 이끌었다. 나뭇잎이 무성하게 나 있어 그나마 빗줄기를 막아줄 거라 기대하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벼락 맞아.”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오이마저 그 아래서 끌어냈다. 여긴 피뢰침도 없는데 저렇게 큰 나무 아래에 서 있다간 정말 벼락을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굵은 빗줄기는 끊임없이, 그리고 아프게 나를 때렸다. 하늘이 어둑했던 건 시간이 많이 흘러서가 아니라 비가 올 것이라는 전조였나 보다. 확실히 산중에 비까지 오니 곤란하긴 했다. 그리도 외면했던 일산이 조금 그리워지긴 했으나 나는 얼른 그 생각을 털어냈다.

    대신 ‘내가 곤란하면 남도 곤란하다’라는 불변의 진리를 떠올리며 퀘스트 창을 켰다.

    [메인] 사냥 대회

    누적 곤란 수치 : □□□□□□□□□□ 3%

    그러나 빗줄기가 가져다준 주몽의 곤란은 고작 3%짜리였다. 어찌나 적은지 게이지 바에는 티도 나지 않았다. 나는 실망에 가득 차 반투명한 창을 치웠다. 물론 그전에 당이 부족한 것 같아 우편함에서 사탕도 하나 꺼내 먹었다. 진하게 익은 자두 맛이었다. 달달하게 퍼지는 사탕을 음미하고 있자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자 이번엔 푹 젖은 옷가지가 신경이 쓰였다. 괜스레 살갗에 달라붙은 천을 떼어냈지만 빗줄기가 거세 소용이 없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오이가 돌연 겉옷을 벗더니 내게 내밀었다.

    “누추하지만 이거라도 위에 걸치십시오.”

    그가 내민 짙은 남색 옷은 비를 머금어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체온이 떨어진다는 그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 받아 들었다.

    그러나 흠뻑 젖은 옷은 입기 위해 펼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나는 한 손은 고삐를 잡고, 남은 한 손으로 낑낑대다 애처롭게 오이를 바라보았다. 두 손으로 펼치면 좀 더 수월할 테지만 승마 초보인 나는 무서워 감히 고삐에서 양손을 모두 뗄 수가 없었다. 마태령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가버린 뒤로 승마는 일 년에 한두 번 할까 말까 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제가 고삐를 잡고 서 있겠습니다.”

    그 모습을 본 오이가 말에서 내렸다. 그전에 우선 옷을 펼쳐드릴 테니 도로 건네달라는 말이 이어졌다. 나는 순순히 옷가지를 내밀었다.

    오이의 말이 날뛰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비가 올 때부터 푸르릉거리며 심기가 불편한 것을 그대로 드러내던 말은 그를 결박하던 사람이 내리자마자 제 성질을 온갖 군데 뽐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뒷발질을 몇 번 하곤 그대로 쏜살같이 달려가 버렸다.

    “야! 어디가!”

    당황해 체통도 잊고 소리쳤지만 짐승이 대답할 리 만무했다. 말을 진정시킬 순간만 노리던 오이도 난데없는 도망에 놀라 몸을 틀었다. 덕분에 손이 엇갈리고 옷이 그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흙탕물에 젖은 옷과 말이 도망간 빈자리를 공허한 시선으로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곤경은 내가 겪고 있는 것 같았다. 말이 사라진 곳으로 몇 발자국 내딛던 오이는 금세 뒤쫓길 포기하고 돌아왔다.

    “말이 갑작스러운 소낙비에 놀랐나 봅니다. 명마이니 산 입구로 잘 찾아갔을 겁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저 더러운 성질머리로 명마가 된 건 아니고?”

    내 투덜거림에 오이가 희미하게 웃었다. 농담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진담이었는데.

    진흙으로 범벅이 된 오이의 옷은 결국 그의 짐 속으로 들어갔다. 감히 내게 땅에 떨어진 옷을 입힐 순 없다는 그의 주장에 의해서였다. 짐을 갈무리한 그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우선 출발지로 다시 돌아가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대로 있다간 고뿔에 걸리실 겁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산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공터를 찾아야 하는 나로선 내키지 않는 결론이었다. 여긴 인근 산 중에서도 손꼽히는 거대한 산이었다. 고작 이런 소나기로 무너질 일은 없었다. 게다가 성인 남자가 비 조금 맞았다고 감기를 걱정하는 것도 우스웠다.

    그러니 비가 그칠 때까지 주변이나 마저 돌아보자는 내 의견은 당연히 묵살되었다. 오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물었다.

    “홀로 가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 말을 같이 타고 가자.”

    낯선 산길은 둘째 치고 빗속에 오이를 혼자 두고 갈 순 없었다. 속도는 느리겠지만 지금으로선 그 방법이 최선으로 보였다. 내 호위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그가 고집을 꺾을 리 만무했으니 차라리 서둘러 돌아가서 차선책을 강구하는 게 나았다.

    침음을 흘리던 오이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말에 오르기 쉽도록 몸을 앞으로 당길 때였다. 확연한 인기척이 빗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오이가 칼자루를 잡으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수풀을 헤치고 등장한 이는 이렇게 빨리 마주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형님? 여기서 무얼 하십니까?”

    “해야! 여긴 어쩐 일이야?”

    나와 주몽의 물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손을 들어 얼굴에 흐르는 빗줄기를 훔쳐낸 그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곰을 쫓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리 외진 곳까지 어떻게 오셨습니까. 여긴 사나운 짐승들도 많아 조금 위험합니다.”

    곰? 머리칼이 쭈뼛 섰다. 귀여운 테디베어가 아닐 것은 자명했다. 그러나 저 태연한 낯이나 말투를 보아하니 야생곰도 주몽 앞에선 ‘곤경’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 같았다.

    ……사내 다섯 명으로 되겠지? 순간 불안한 생각이 엄습했지만 나는 애써 털어냈다. 사기, 공갈, 협박으론 둘째라면 서러울 사람들이라 했으니 순수하게만 자란 주몽이 감당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오이의 말이 도망가버려서 이만 산 아래로 내려가려던 참이었어. 비가 와서 내 옷도 다 젖었고…….”

    나는 거추장스러운 예복을 쭉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흰 예복은 그리 두꺼운 재질이 아니라 더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주몽이 고개를 돌리고 풀숲을 바라보았다. 비를 맞아 열이 오르는지 광대뼈 부근이 붉어져 있었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어? 아니야. 오이랑 같이 가면 돼.”

    오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 말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그 즉시 주몽이 다가와 그의 뒷덜미를 잡고 끌어내렸다. 무사로서 균형 감각이 없었더라면 크게 넘어졌을 만한 힘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과 한마디 없이 생글거리며 내게 바투 붙었다.

    “저자가 말을 잃어버린 것인데 왜 형님께서 수고로움을 감수하십니까. 저와 함께 타시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몽이 팔을 뻗어 내 허리를 옭아매었다. ‘어?’ 할 새도 없이 공중에 뜨더니 낯선 말의 근육이 엉덩이 아래로 느껴졌다. 팔심만으로 날 들어 올려 그의 말 위로 옮긴 것이었다. 과연 장궁을 어린애 장난감 다루듯 하는 주몽다웠다.

    “너는 형님의 말을 타고 먼저 돌아가면 되겠구나. 가서 사람을 부르고 마른 옷가지를 준비해놓거라.”

    “아닙니다! 태자 저하는 제가 모시고….”

    “아냐, 먼저 가 있어. 혼자 말 타고 가는 게 더 편할 거야.”

    주몽의 말은 내 말보다 커서 확실히 둘이 타기엔 더 나았다. 그러나 어쩐지 오이는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떼기 어려워했다. 내 재촉에 결국 그는 빨리 오셔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다섯 번이나 하고 갔다.

    우리는 그가 멀어진 길을 따라 천천히 말을 몰았다.

    타인과 같이 말을 탄 적이 없었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이 걸을 때마다 움직이는 근육에 의해 자꾸만 앞으로 밀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럴 린 없겠지만 말의 목등까지 밀려 떨어질까 봐 불안했다.

    결국 나는 티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뒤쪽으로 움직였다. 차라리 주몽과 딱 닿아 있으면 불안감이 조금 가실 것 같았다.

    잠시 뒤 엉덩이 끝에 단단한 허벅지가 닿았다. 그제야 나는 안정감을 느끼고 꿈질거리기를 멈췄다. 말이 움직일 때마다 주몽과 닿았지만 낙마 걱정을 하는 것보단 나았다.

    “다행히 비가 곧 그칠 것 같네.”

    빗줄기가 조금씩 가늘어지고 있었다. 편안히 자세를 늘어뜨리던 나는 고삐를 쥔 주몽의 손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비를 너무 맞아 오한이 드는지 그의 커다랗고 모양 좋은 손이 간헐적으로 움찔거리고 있었다.

    여섯 살이나 더 먹은 형이 되어 동생의 추위를 모른 척할 순 없었다. 나는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이고 겉옷을 끌어 내렸다. 그러나 다 벗기도 전에 손목이 덥석 붙잡히더니 말이 휘청거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지지대를 찾아 남은 손을 뒤로 뻗었다. 그러나 그의 허벅지를 짚기가 무섭게 그 손마저도 주몽에게 붙잡혀야 했다.

    “형님! 갑자기 무얼 하시는 겁니까!”

    “아니… 너 추운 것 같아서. 비가 그칠 때까지만이라도 내 옷 좀 덮고 있어.”

    그러나 내 손목을 단단히 움켜쥔 손은 풀리지 않았다. 뒤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난감하기까지 한 그 기색에 난 상체를 틀어 뒤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친 듯이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커다란 손 사이로 드러난 눈이 어둡게 빛났다. 비에 젖은 탓인지 어딘가 음습하고 축축한 그 시선은 나를 천천히 훑다가 내 가슴팍에 고정되었다. 그의 턱이 움찔거렸다.

    “…….”

    나는 그 시선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속에 입은 옷까지 흠뻑 젖었음을 깨달았다.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았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하필이면 흰옷이라 맨살이 다 비쳐 드러났다.

    “아무래도 겉옷은 형님께서 덮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그는 반쯤 흘러내린 내 옷을 제대로 올려준 것도 모자라 자신의 옷마저 벗어 내게 덮어주었다. 짙푸른 색 옷은 날 넉넉히 덮고도 남았다.

    말이 다시 제 걸음을 찾았다. 나는 묘한 분위기를 지우려 애써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부끄러워서 그래? 같은 사내끼린데 뭐 어때.”

    “……그러게 말입니다.”

    주몽이 고개를 틀었다. 터질 것처럼 붉어진 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북녘궁에서 홀로 자란 그가 언제 남의 살을 보았을까. 당황할 만도 했다. 나는 괜히 꿈실거리며 엉덩이를 뒤로 밀어 다시 편안한 자세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움직여도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옷을 입다가 짐이 사이에 꼈나? 나는 뒤로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그러나 움켜쥐기도 전에 또다시 손이 붙잡혔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아니, 자꾸 걸리는 게 있어서. 아무래도 화살통 같은데. 좀 치워봐.”

    “……산 아래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몽이 앓는 소리를 내더니 내 손에 고삐를 턱 쥐여주었다. 그리곤 내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댔다. 비를 많이 맞아서 그런지 새어 나오는 한숨이 뜨거웠다. 나는 그런 그의 귀에 이마를 톡 갖다 대었다. 고삐에 손이 묶였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열을 재려는 심산이었다.

    “열은 없는데.”

    부딪히는 숨결이 간지러운지 그가 움찔댔다. 그 순간, 어디선가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온몸이 굳을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주몽이 내 허리를 감쌌다. 낮은 기합 소리와 함께 말이 젖은 땅을 내달렸다. 나는 고삐만 움켜쥔 채 말 등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사이 비가 그치고 어느새 산 입구에 도착했다. 주몽이 내 허리를 감싼 그대로 팔을 들어 말에서 내려주었다. 어릴 적엔 내가 이렇게 비행기를 태워줬던 것 같은데. 감상에 젖을 새도 없이 그가 말머리를 돌렸다.

    “저는… 다시 곰을 잡으러 가보겠습니다.”

    “벌써? 잠깐 들러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

    그가 고개를 저었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는 게 정말 그대로 갈 생각인 것 같았다. 마침 나를 본 오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달려가 그의 손에서 마른 옷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그것을 주몽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네 옷은 날 줬으니까, 넌 내 거 입어.”

    감기에 걸려서 내일 사냥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질 게 분명했다. 주몽은 내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강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달려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는 궁인들의 등쌀에 시달려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푸른 천을 맨 사내를 만나긴커녕 시스템 창 한 번 불러올 여유도 나지 않았다. 나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곤란 수치’를 열어 보았다.

    [메인] 사냥 대회

    누적 곤란 수치 : ■■■■■□□□□□ 47%

    “뭐야? 곰이랑 싸우다 다쳤나?”

    최후의 수단으로 밤에 습격까지 생각했건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절반 가까이 찬 수치를 보고 안도 반, 걱정 반으로 주몽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빈손으로 돌아와 모든 귀족들을 술렁이게 했다. 나는 그가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장정들은 내일 들여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날 새벽, 나는 희미하게 울리는 알림음에 깼다.

    [메인] 사냥 대회 – 완료

    누적 곤란 수치 : ■■■■■■■■■■ 100%

    목표한 ‘곤란 수치’를 모두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주몽’의 영웅적 면모가 그것을 발견한 자들에게 각인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영웅 서사가 시작됩니다.

    둥둥 떠 있는 퀘스트 완료 창을 보자마자 잠이 단번에 깼다. 깊은 새벽과 갑작스러운 곤경. 두 단어가 어지럽게 엉켜 하나의 결론으로 합쳐졌다.

    “……습격.”

    이건 내가 만들어낸 가짜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깨달음과 동시에 임시 천막을 뛰쳐나갔다. 당장 주몽의 무사를 확인해야 했다.

    ***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해야.”

    저 앞에서 형님이 그를 불렀다. 주몽은 묵묵히 빗줄기를 헤치고 그에게 다가갔다. 살짝 뒤돈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형님은 금색사가 수놓아진 흰옷을 입고 있었다.

    거센 비에 푹 젖은 천이 늘어지며 몸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냈다. 도드라진 어깨뼈와 툭 튀어나온 손목뼈 따위가 눈길을 잡았다. 어쩐지 입 안이 마르는 기분에 주몽은 혀로 입천장을 한 번 쓸었다.

    “비가 많이 오네.”

    발돋움을 한 그가 손 우산을 만들어 주며 주몽을 바라보고 웃었다. 늘 그렇듯 다정하고 애정이 깃든 웃음이었다. 그러나 주몽은 마주 웃을 수 없었다. 백옥 같은 뺨을 지나 목줄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빗방울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저 하얗고 가느다란 목을 잡아보고 싶다.

    순간 치밀어 오른 강렬한 열망에 그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그런 그의 속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주몽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목으로 이끄는 손짓이 느릿하면서도 망설임이 없었다.

    “…….”

    기어코 목에 얹은 손이 잘게 떨렸다. 한 손에 잡히는 목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보드라웠고 약해 보였다. 툭 쥐면 분질러지던 사슴의 목도 이보다 강할 것 같았다. 주몽은 낯선 욕망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잡고만 있었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형님이 그의 엄지 마디를 매만지며 고개를 기울였다.

    형님이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그의 뺨이었다.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나긋하게 훔쳐준 그는 천천히 다가와 그 자리에 입을 맞췄다. 비에 젖은 입술이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의 숨에서 평생 알지 못했던 농익은 과일의 단내가 났다.

    그 순간 주몽은 쥐고 있던 목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읍……!”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와 빗소리 사이에 섞여들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차가운 빗속에서 김을 피워올렸다. 옷자락을 쥐고 있던 형님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간신히 입술을 떼어내고 바라본 곳에선 도드라진 어깨뼈가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해야.”

    다정하게 휘어지는 눈을 본 순간 기묘한 열기가 솟았다.

    ***

    얼기설기 짜인 천막의 천장이 보였다.

    “…….”

    입술이 닿은 볼 언저리가 아직도 홧홧하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 어느 것이 실제로 겪은 일이고 겪지 않은 일인지 정신이 온통 혼몽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했다. 이건 지독한 헛꿈이되 비로소 드러난 추악한 속내였다.

    그는 손을 뻗어 침상 곁 고이 개켜두었던 형님의 옷을 집어 들었다. 형님께서 친히 쥐여주고 가신 옷은 애초에 체격 차이 탓에 맞지도 않았다. 그러나 설령 입을 수 있었다 할지라도 이것을 몸에 걸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차가운 비를 줄곧 맞아도 가라앉지 않았던 열기에 오히려 부채질을 하는 격이었다.

    주몽은 옷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켰다. 익숙한 내음이 그의 안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젠 그간 외면하고 있었던 열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형님께서 그를 안아 주실 적마다 정의할 수 없는 만족감이 빠듯하게 차올랐다. 볼에 입맞춤을 하실 때는 어땠는가. 그게 무엇이든 갈무리하지 못한 열기가 튀어나올 것 같아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도망치듯 북녘궁으로 돌아왔다. 제 품을 빠져나가실 땐 도로 붙잡고 싶은 충동을 참은 적도 부지기수였다. 그의 시선은 물론 손톱 하나까지 제게 옭매고 싶었다.

    평생토록 그를 지켜주었던 내음에도 잠재워질 기미가 없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주인처럼 희고 깨끗한 옷이 그의 불측함에 천천히 젖어갔다.

    ***

    “해야!”

    천막으로 들어서던 주몽은 흠칫 몸을 떨었다. 일평생 들어왔던 호칭이지만 꿈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들으니 간신히 진정시킨 불씨가 다시 지펴질 것 같았다.

    설마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나. 그게 아니라면 이 시각에 형님이 자신의 천막 안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원인 모를 걱정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는 얼굴을 보자 속 편히 꿈 타령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서둘러 다가갔다.

    “형님? 이 새벽에 무슨 일이십니까?”

    “너, 너 괜찮아?”

    그러나 형님은 동문서답을 하며 그를 이리저리 살폈다. 몸을 함부로 더듬는 손길에 곤란함이 밀려왔다. 다행히 무슨 일을 당하신 것 같진 않은데, 저를 걱정하는 걸 보니 어디서 무슨 소리라도 듣고 왔나 싶었다.

    낮에 있었던 사소한 마찰이 새어 나간 걸까. 그러나 그 일을 형님께 들키면 좋을 일이 하나도 없단 걸 양쪽 모두가 잘 알았다. 고민을 하는 사이 어깨부터 허리춤까지 짚어 내려오던 형님은 주몽이 어색하게 뒤로 숨기고 있던 손까지 잡아챘다. 손에 들린 물건을 본 그가 멈칫거렸다.

    “…이건 뭐야? 내 옷 아니야?”

    “아……. 낮에 사냥을 하다 흙먼지가 많이 묻었습니다. 깨끗이 빨아 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잠시 강가에 나갔다 온 참입니다.”

    주몽은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들고 있던 옷가지를 자연스럽게 펼쳤다. 이대로 옷을 돌려드릴 순 없으니 대충이나마 헹구고 오는 길이었다.

    주몽은 우선 드러나는 상흔이 없다는 걸 깨달은 형님이 제 옷을 벗기기 전에 양쪽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그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어스름한 빛에도 하얗게 빛났다. 그 위로 꿈속에서 색스럽게 휘어지던 눈매가 겹쳐 보였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대로 놔두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형님은 주몽의 두 뺨을 감싸 올려 눈을 마주했다.

    “해야. 내 눈 좀 봐. 간밤에 무슨 일 있었어?”

    “아닙니다. 그저 꿈을 조금…….”

    주몽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시야 끝에 형님이 입술을 잘근거리는 것이 걸렸다.

    “꿈 따위로 그렇게 될 리가 없는데….”

    그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에도 붉은 입술은 어찌나 깨물었는지 살짝 부풀어 있었다. 그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였다.

    “악몽이었어?”

    “예…. 강가를 걷고 있었는데 식인귀가 튀어나와 저를 덮치는 꿈이었습니다.”

    언젠가 오이에게서 태자궁 연못에 식인귀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주몽은 입술에 시선을 고정한 채 떠오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말하고 나서야 조금 전 강가를 갔다 왔다는 말과 겹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어차피 누가 들어도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그러나 형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강가에서 널 노렸다고?”

    “예? 예….”

    “괜찮아. 무슨 일 있으면 형님한테 말해. 내가 다 해결해줄게.”

    급기야 그는 주몽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정말 악몽을 꾼 어린애를 다루는 듯한 행동이었다. 주몽은 헛웃음을 삼키며 등을 마주 안았다. 지금 보니 형님께선 뒷머리도 헝클어져 있고 옷매무새도 바르지 않은 게 잠자리에서 뛰쳐나오신 것 같았다. 정작 악몽은 누가 꾸고 오신 건지. 우스운 상황이었지만 잠에 취한 와중에도 저를 걱정하는 모습이 기꺼웠다.

    그러나 이 다정함은 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너무나 쉽게 다가오는 것만큼이나 가볍게 떠나가는 손길을 떠올렸다. 이 손은 똑같이 가람 저하를 끌어안고 만졌으며 칭찬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낮에 그 모습을 보고 당장이라도 활을 쏘고 싶은 걸 얼마나 참았던가. 그가 가람의 정수리에 이마를 마주 대고 볼을 만질 땐 진지하게 뒷일을 고민했다.

    뭐…… 결국 조금은 저지르고 말았지만.

    주몽은 등을 잔뜩 구부려 형님의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고개를 비스듬히 눕히자 하얗고 가느다란 목이 시야에 꽉 찼다. 또다시 방금 전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여기가 꿈속이라면 망설임 없이 다시 저 하얀 목을 잡아당겼을 텐데.

    ……그런데 꼭 꿈속에서만 형님을 바라야 하는가?

    주몽은 멍하니 생각했다.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정말 형님께서 다 해결해주십니까?”

    “당연하지. 뭐 곤란한 일이라도 있어? 시, 식인귀가 평소 사이가 안 좋던 사람의 얼굴이었다든가, 음, 그런 거 말이야.”

    애 취급이 틀림없는 헛소리는 무시했다. 선뜻 뭐든지 해결해주겠다고 나서는 형님의 목소리는 어두운 마음이 들게 했다. 그는 그대로 속삭이고 싶은 유혹을 참기 위해 다시 이마를 어깨에 묻었다. 들끓는 욕구를 누르는 목소리가 잔뜩 낮아졌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꼭 해야 하는 일이야?”

    “예.”

    주몽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께선 혼인을 미루고 계시지만 부여의 왕이 될 분께서 언제까지고 비를 들이지 않으실 리 없었다. 피 묻은 발로 첫날밤을 맞이할 순 없지 않은가. 그는 최대한 온건히 형님의 다정함을 차지하고 싶었다.

    품에 안은 몸이 움찔거렸다. 살짝 부은 입술이 신중하게 열렸다.

    “형님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그럴 때는 기회를 노리거라.”

    “기회요?”

    “그래. 저질러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로 치부되지 않을 기회. 기다리면 빈틈은 찾아온단다.”

    기회. 좋은 말이었다. 고작 그거 하나만으로 모든 일이 허용될 수 있다니. 역시 저의 형님은 현명하셨다. 주몽은 얼굴을 묻은 채 소리 없이 웃었다. 어차피 기다림이라면 그가 제일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예. 가만히 기다리겠습니다.”

    기회가 오지 않는다면 찢어발겨서라도 틈을 만들어 내면 된다. 형님께서도 그때가 되면 뭐든 해결해주시겠다는 말씀을 지키셔야 할 것이다.

    주몽은 토닥이는 손길에 맞춰 얌전히 눈을 감았다.

    3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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