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오이의 보고 일지
一.
개국 185년, 여름 끝 무렵.
* 관찰 사항 :
태자 저하께선 매일 이른 새벽에 기침하신다. 하루아침에 태자 저하의 호위 무사가 되고 며칠 밤을 꼴딱 새우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일부러 밤을 새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책임감과 부담감, 혼란이 섞여 도저히 한숨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오늘도 밤을 지새운 채 침실 앞을 지키는데 의복을 정제하고 나오신 태자 저하께서 곤란한 얼굴로 말을 거셨다.
“오이야. 밤새워 지킬 필요 없다 하지 않았느냐. 이래서 낮엔 힘들어 어찌하려고?”
태자궁에 머무르게 된 첫날 이후 매일 아침 건네시는 말이었다. 그러나 저 다정한 말에 속아 일을 소홀히 한다면 난 다음 날 궁 밖으로 내쳐질지도 몰랐다. 덕분에 나 또한 매번 같은 대답을 돌려드렸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 괘념치 마시옵소서, 태자 저하.”
“그리 격식 차리지 않아도 된다니까. 난 존대만으로도 충분하니 편히 말하거라.”
“……송구하옵니다.”
나는 눈치를 보다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윗사람의 의중을 파악하기 힘든 말에는 십중팔구 무릎을 꿇는 편이 나았다. 그럼 대부분이 코를 씰룩이고 입매를 찌푸리면서도 별말 없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아니야! 사과하지 말거라! 네가 편한 대로 해!”
……그러나 저하께선 극히 드문 한둘에 속하는 모양이었다.
서둘러 달려와 자세를 낮추는 모습에 나야말로 대경실색을 하여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차마 위를 바라볼 수 없어 바닥만 바라보는데도 보여서는 안 되는 귀한 장신구가 근처에 아른거렸다. 저리 계신데 내가 몸을 일으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속해서 “송구하옵니다.”만 반복했다. 이윽고 비단 버선이 내 눈앞을 바쁘게 오가더니 머리 위에서 한껏 높아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집불통이 따로 없구나. 이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나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저 말은 낮에 호위를 제대로 서지 못할까 봐 질책하는 말이 틀림없었다. 그제야 천천히 마음이 놓였다. 이제 화가 나신 태자 저하의 뒤를 다시 그림자처럼 조용히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러고도 버선은 떠나지 않았다. 한참 뒤에서야 나는 태자 저하께서 내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시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지만 저하께선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다시 무릎을 꿇을 새도 없이 나는 저하의 뒤를 따라 궁을 나서야 했다.
다행히 새벽부터 어디를 가시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태자 저하께선 사흘째 눈만 뜨면 곧장 왕자궁으로 향하셨다.
나는 첫날 저하의 뒤를 따르며 태어나 처음으로 왕자궁에 발을 들여보았다. 그리고 해가 기울기도 전에 그곳을 꺼리게 되었다.
궁 자체나 태자 저하께 그 연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궁은 왕자 저하께서 머무시는 곳답게 크고 눈이 돌아가도록 화려했다.
“어서 검을 들거라! 나와 검술 대련을 하재도!”
다만 나를 가장 난감하게 하는 것은 계속해서 목검을 들고 달려드는 왕자 저하였다.
왕자 저하께선 나이에 비해 뛰어난 재능을 가지셨지만 당연히 대여섯 살은 많은 나와는 견줄 수 없었다. 어영부영 검술 대련을 하다 혹여 털끝 하나라도 스치면 그날로 내 목은 날아갈 것이다. 살벌한 예감에 나는 오늘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태자 저하의 뒤에서 땀만 뻘뻘 흘렸다.
그러자 뒤를 힐끔 돌아본 태자 저하께서 다정한 어투로 그의 아우에게 말을 건넸다.
“가람아. 약조를 지키러 왔는데 계속 내 호위 무사에게만 관심을 가지면 이 형님이 섭섭해. 그만하고 어서 이리 오거라.”
“형님……!”
왕자 저하께서 감동한 표정으로 목검을 내던지고 우다다다 달려갔다. 태자 저하께선 앉은 자리 그대로 익숙하게 작은 몸을 받아 안으셨다. 나는 우애가 깊은 모습을 바라보며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곤란한 상황이 끝날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신기하기는 했다. 연무장에서 본 왕자 저하는 항상 오만한 분위기에 미소조차 짓지 않는 분이셨다. 그래서 막연히 왕족들은 모두 저리 타고났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요새는……. 나는 눈만 힐끔 들어 신이 나서 재잘대는 왕자 저하와 다정하게 웃고 있는 태자 저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생 말 한 번 나눠볼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귀하신 분께는 남을 깔아뭉개는 권력자의 낯이 조금도 보이지가 않았다. 검술 대회 날 나에게 길을 물었던 귀족 도련님이 사실 태자 저하였음을 알고 얼마나 놀랐던가.
‘……아니야. 속아 넘어가선 안 돼.’
나는 귀족들이 얼마나 제멋대로 낯짝을 꾸며내고 속내를 감출 수 있는지 뼈저리게 겪은 사람이었다. 저 다정함 또한 시일이 지나면 감쪽같이 사라지고 본색을 드러내리라. 나는 마음을 다잡고 저하의 뒤를 지키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한 발자국을 내딛기가 무섭게 머리가 어질해져 왔다. 늦여름이라고 해도 아직 햇볕이 쨍쨍했다. 그런데 검술 대회 날 밤부터 한숨도 자지 못하고 긴장 상태를 유지했더니 잠시 현기증이 인 듯했다.
다행히 다리에 힘을 주고 눈을 여러 번 질끈 감았다 뜨자 정신이 돌아왔다. 기분 탓인지 태자 저하께서 자꾸 내 쪽을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더욱 정신을 바짝 차렸다. 새벽에 호통을 듣기까지 했으니 오늘만큼은 호위에 실수가 없어야 할 것이었다.
마침 그는 다른 일을 하려는지 왕자 저하께 먹여주던 다과상을 밀어내고 있었다.
“가람아. 우리 잠깐 낮잠 좀 잘까?”
“낮잠이요? 원래 잘 안 주무시지 않습니까?”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하네. 그러고 보니 같이 낮잠 자는 건 처음인가?”
처음이라는 말에 왕자 저하의 눈이 반짝 빛난 것도 같았다. 고개가 떨어져라 세차게 끄덕이는 모습에 태자 저하께서 궁인을 불렀다. 잠시 뒤, 짧은 오수를 즐길 수 있도록 침실이 마련되었다. 저하께선 통통 뛰어 들어가는 왕자 저하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셨다.
나는 두 분이 들어가신 침실 앞에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침실 문이 닫히고 태자궁의 궁인이 나를 그 왼쪽 방으로 이끌었다.
“오이 님께선 이쪽에서 호위를 서시면 됩니다.”
그 방에는 벽에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아마도 침실과 이어지는 문 같았다. 두 분께 무슨 일이 생기면 이쪽으로 곧장 들어가면 된다는 소리겠지.
그러나 바닥에는 푹신해 보이는 이불과 간단한 요깃거리도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오른쪽 방과 헷갈린 것이 아닐까. 실수한 궁인이 무안하지 않도록 모른 척 물러나려 할 때였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부르십시오. 노파심에 말씀드리지만 왕자궁에선 큰일이 벌어질 일이 잘 없습니다.”
궁인은 특히 왕자궁이 평화롭다는 이야기를 두 번 더 강조했다. 그리곤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예를 갖추고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
이렇게까지 하는데 날 이 방으로 데려온 것이 실수일 리가 없었다. 물론 그녀의 독단적인 행동일 리는 더더욱 없을 테고.
이곳을 준비하라 명하신 분은 아마도 태자 저하시겠지.
나는 시원한 바람이 통해 선선한 방을 둘러보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혼자 조용한 공간에 남게 되니 그간 몰렸던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높으신 분들은 믿을 것이 못 됐다. 태자 저하의 다정함도 그저 한순간의 놀음에 지나지 않으리라.
끊임없이 마음을 다잡던 나는 의식할 새도 없이 그만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 보고 사항 :
“별다른 일은 없었느냐?”
“낮잠을 잠깐 주무신 것 빼곤 여타 다른 날과 같았습니다.”
나는 마 대사자님의 재촉에 태자 저하에 대한 보고를 시작했다. 며칠 전 호위 무사를 맡게 된 이후부터 내게 새로 생긴 하루 일과였다.
“그리고 둘째 왕자 저하를 매우 아끼시는 것 같았습니다. 다만…….”
나는 태자 저하의 성정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성정은 나보다 스승까지 맡으셨던 마 대사자님께서 더 잘 아시리라. 대신 그가 의문을 갖기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오늘도 새벽같이 왕자궁으로 향하셨습니다. 같이 조반을 드시고 검술 대련을 구경하셨으며, 당과 세 개와 약과 하나를 직접 먹여주셨습니다. 차는 향기가 좋은 과실 차였는데 입맛에 맞으셨는지 두 잔이나 드셨습니다. 그다음엔 책도 같이 읽으셨는데 그 내용이….”
“그만. 됐으니 물러가거라.”
마 대사자님께선 내 말을 도중에 끊더니 손을 휘저으셨다. 사흘 내내 반복된 일상이었으니 지겨우실 만도 했다. 나는 서둘러 예를 갖추고 뒤로 물러났다. 반갑지 않은 면면들을 마주하기 전에 태자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 특이 사항 :
왕자 저하께서 아직 진검을 다루지 못하시는 게 참 다행이다. 목검은 얻어맞아도 죽지 않으니. 그나저나 아무래도 연무장에 있을 적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모양이다. 그게 뭘까?
二.
개국 185년, 가을.
* 관찰 사항 :
벌써 태자 저하를 보필한 지 사십 일이 지났다. 오늘도 저하께선 주몽을 보러 북녘궁에 가겠다며 태자궁을 나서셨다.
주몽은 잊을 수 없는 무술 대회 날 궁술 부문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아이였다. 무술을 하는 자들이 으레 다른 무기들도 배워보듯 나도 활을 배워본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더더욱 주몽의 솜씨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건 정말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러니 전하께서 한 번 거절 당하시고도 재차 스승을 보내주겠다는 내용을 담아 사람을 보낼 만도 했다. 궁술 하나로 궁 안의 화제가 된 아이를 누군들 놓치고 싶었을까.
얼마나 화제냐면, 궁술 대회가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태자 저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였다.
“장담하는데 족히 백 명은 주몽의 이름을 말했어.”
처음엔 과장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기분 탓인지 태자 저하께서 저 말씀을 하신 이후론 모든 사람들이 주몽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나조차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니고 싶었다면 말 다 했지. 분명 주변에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이 있었더라면 가장 먼저 꺼낸 화두가 주몽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아무튼 전하께서 주몽에게 사람을 보내셨을 때 우연히 (우연이라고 말하긴 어렵겠다. 저하께선 대부분 북녘궁에서 시간을 보내시니.) 그곳에 있던 태자 저하께선 그 말을 듣고 고운 미간을 찌푸리셨다. 그러더니 주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물었다.
“내 말 잘 기억하고 있지?”
주몽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하를 향한 신뢰를 가득 담은 웃음을 지은 채였다. 태자 저하께선 마주 웃어주곤 기다리던 궁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하께 은혜에 감읍하다고 전해 드리거라. 수업은 사흘 뒤부터 시작하면 좋을 것 같구나.”
주몽의 일을 대신 결정짓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주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혹시 원치 않는 일인데 권력이나 신분 차이로 인해 강제로 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였다. 물론 최고의 스승에게 받는 무술 수업은 아이에게 나쁠 것이 없어 보였지만, 윗사람들의 속내는 항상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편이 좋았다.
거기다 아직 주몽이 일곱 살이라는 생각까지 떠오르자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었다. 나는 드물게 태자 저하께 맞설 각오까지 마친 뒤 저하가 자리를 비웠을 때 주몽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수업을 받고 싶지 않다면 언제든 저에게 말씀해주십시오.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태자 저하께서 마음을 돌리시도록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무슨? 아…….”
내 이야기를 들은 주몽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누가 보아도 강요당한 얼굴은 아니라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사이 상황 파악을 마친 아이가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형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 쓸데없는 관심은 끄거라. 설사 그게 네 안위를 해치는 일이어도 입을 다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예?”
“안타깝게도 누구에게나 다정하신 형님은 네게 그런 일을 시키시지 않겠지만.”
마치 자신은 할 수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심지어 살짝 아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저하께서 시키시면 스스로 배를 칼로 찌르는 행위라도 마땅히 해야 할 거라고 말하는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저하와 있을 땐 참 순해 보였는데……. 내가 심각한 착각과 함께 꼴사나운 오지랖을 피웠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 보고 사항 :
“오늘은 주몽과 함께 계시다 전하께서 보내신 사람을 함께 만나셨습니다. 주몽의 스승에 대해 논하시더군요.”
“다른 일은 없었느냐?”
“예. 그 외엔 평소와 같으셨습니다.”
주몽의 경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 대사자께선 태자 저하의 일상을 원하셨지 내 일상을 원하신 건 아니었다.
나는 그 뒤로도 묻는 말에 대답을 하다 서둘러 태자궁으로 돌아갔다. 보고를 하러 가던 길에 반갑지 않은 얼굴들을 만난 탓에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 특이 사항 :
어린 나이에 궁술이 신의 경지에 도달하면 다른 부분에서도 남다른 모습을 보이는 모양이다. 한번 의식하니 그 뒤로 나를 바라보는 주몽의 눈이 도저히 일곱 살짜리로 보이지가 않는다.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다며 저 아이(!)를 걱정한 사람은 대체 어디 사는 누구인지.
三.
개국 185년, 초겨울.
* 관찰 사항 :
아침부터 태자궁 궁인들이 잔뜩 들뜬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 웃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나는 살짝 경계를 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아, 오이 님께선 올해 처음 부임하셔서 모르시는구나. 오늘은 한 해에 딱 한 번 있는 특별한 날이랍니다!”
그게 무슨 날이냐고 물어도 궁인은 알려주지 않은 채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웃기만 했다. 그러나 저렇게 즐거워하는 걸 보니 대비를 해야 하는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가 붙잡은 팔뚝을 정중히 뒤로 물리고 다시 태자궁 안으로 돌아갔다. 이곳 궁인들은 모두들 모시는 분의 영향을 받은 건지 다가오는 데 스스럼이 없었다.
“아, 오이야. 이제 들어와도 돼.”
저하께선 방을 용도에 맞게 쓰시는 편이 아니셨다. 덕분에 태자궁은 드넓었음에도 실상 사용하시는 방은 서너 개에 그쳤다. 저하께선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계시는 방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계셨다.
대체 무얼 하시느라 모두를 물리시고 들어가 계시는지. 이상하게도 그는 잠시라도 눈을 떼면 귀신처럼 사라져 버리기 일쑤라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자, 이거.”
손바닥 위에 작은 물건을 올려놓으신 태자 저하께서 나에게 손을 내미셨다. 작고 가벼워 보이는 그것은 색색의 고운 종이에 싸여 있었다. 나는 물건을 건네받으며 태자 저하께 여쭈었다.
“주몽 도련님께 전해 드리면 되겠사옵니까?”
“아니. 이건….”
“아, 송구하옵니다. 가람 저하께….”
“아니야! 이건 그러니까, 네 거야.”
제 것이요? 여쭙는 말이 목구멍에 턱 걸려 나오지 않았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꽃잎 색 포장지를 내려다보았다. 태자 저하께서 조급한 목소리로 나를 재촉하셨다.
“선물이야. 어서 열어 봐.”
이제 내 손 위로 옮겨온 ‘선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도 무거워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모두 잊었을 거라 생각한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나는 간신히 그것을 꿀꺽 삼켜 넘겼지만 꽁꽁 싸맨 진심이 조금 새어 나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전 이런 걸 받을 자격이 없사옵니다.”
“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너 올해 한 번이라도 운 적 있어?”
“…….”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걸 묻는 사람은 살면서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고 나서야 고갯짓이 무엄한 행동이라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바로잡을 새도 없었다. 태자 저하께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턱짓으로 선물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그럼 선물 받아도 돼. 그게 내가 정한 자격이야.”
얼토당토않은 자격이었다. 울지 않는 것은 내게 언제나 당연한 일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라,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나는 군말 없이 포장지를 뜯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붉은색 술이었다. 무술 대회 날 보호 장구에 매달았던 천과 꼭 같은 색이었다. 옆에서 그가 고개를 들이밀고 종알거렸다.
“예쁘지? 내가 고심해서 골랐는데. 무사들은 자기 검이나 활에 작은 장식을 매달고 다닌다며?”
무사들이 매달고 다니는 장식은 그들의 가족이 무운을 빌어주며 건네는 일종의 부적이었다. 안 그래도 내년이면 자신의 무기를 가질 수 있는 나이가 되는 가람 저하께서 요새 태자 저하께 미리 작은 장식을 조르시는 걸 보았다.
저하께선 이 의미를 아시고 나에게 건네신 걸까.
나는 붉은 술을 한 번 꾹 쥐고 묵묵히 허리춤에 매단 검을 풀었다. 받을 자격이 없다고 욕을 먹어도 좋았다. 나는 텅 비어 있는 검 자루를 매만지다 묶인 천을 느슨하게 하고 술을 매달았다. 매듭을 연달아 짓는 손짓에 맞춰 풍성하게 늘어진 술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태자 저하께선 더 이상 내게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해지면 새 술을 사다 주겠다고 약조하셨다.
나는 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이젠 울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될 것 같았다.
* 보고 사항 :
“선물… 을 나눠주셨습니다.”
“아, 올해는 오늘인가 보군. 그래. 특별한 물건이 있었느냐?”
“왕자 저하께는 검술 대련에 쓰는 보호 장구를 선물하셨습니다. 주몽 도련님께선 깃대가 화려한 화살 몇 대를 받으셨고요. 태자궁 궁인들은 여러 종류의 선물을 나눠 받았는데, 한 명은 새로 물들인 옷감을, 한 명은 꽃이 수놓인 작은 천을, 또 한 명은….”
“됐다. 그만 말하거라.”
마 대사자님께서 질리신 표정으로 말을 막았다. 나는 즉시 보고를 멈추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내 선물을 수많은 궁인들 뒤로 감춘 연유는 나조차 알지 못했다.
* 특이 사항 :
술이 부들부들하다. 멍하니 만지고 있자 드물게 왕자 저하와 주몽 도련님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불충을 저지를 순 없으니 사실대로 말씀드렸는데. 어쩐지 그 뒤로 꿈자리가 사나운 것 같다.
四.
개국 185년, 겨울.
* 관찰 사항 :
오늘은 올해 들어 가장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본 태자 저하께선 태자궁을 방문한 주몽과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하셨다. 나는 저하께서 눈을 굴리려 멀리까지 가지 않으셔도 되도록 먼 곳에 있는 눈을 퍼다 주변에 쌓아드렸다.
그런데 오늘따라 가람 왕자 저하께서도 태자궁을 방문하셨다. 날 돕던 궁인은 두 손 가득 들었던 눈송이를 푸스스 떨어뜨렸다. 평화롭던 태자궁 앞마당이 눈싸움 전쟁으로 돌변하기까진 순식간이었다.
“오이야. 네가 주몽이랑 같은 편을 먹으면 되겠다.”
“아니옵니다, 저는 바라보기만….”
“그럼 쪽수가 안 맞지 않느냐. 이리 와서 주몽과 같은 편 해.”
대체 ‘쪽수’라든가, ‘편을 먹다’라는 말은 어디서 배워 오신 건지. 오늘도 격의 없는 말투에 당황하는 동안 태자 저하께선 내 등을 주몽 쪽으로 떠미셨다. 그러며 작게 “이참에 좀 친해지고.”라고 속삭이셨는데, 난 도저히 그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정녕 저 흉흉한 눈이 보이지 않으시는 건지.
차라리 태자 저하와 같은 편을……. 그러나 나는 왕자 저하의 눈을 보고 그 생각도 얌전히 접어야 했다. 주몽과 왕자 저하를 모두 나와 다른 편에 두는 것보다 한 명이라도 같은 편인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아, 실수.”
“…….”
물론 어디까지나 같은 편인 주몽조차 나에게 눈덩이를 던질 줄은 몰랐을 때의 착각이었다. 나는 울상을 짓는 가식덩어리를 바라보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눈을 피해 몸을 웅크렸다.
나름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무사였지만, 또 겨우 무사일 뿐이었다. 그런 내가 감히 두 저하께 눈을 던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주몽에게 똑같이 눈덩이를 던지기에도 일단은 같은 편인 상황이었고.
“……얘들아? 우리 그만 들어갈까? 해야, 빨리 그 손 내려. 가람아! 넌 뭘 줍는 거야!”
결국 나를 발견한 태자 저하께서 두 아이를 뜯어말리시다시피 해서 궁 안으로 끌고 들어가셨다. 그때 지으신 표정이란. 어딘가 일이 단단히 틀어졌다는 얼굴에 나는 차마 ‘그걸 이제 아셨냐’며 되물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묵묵히 머리 위에 쌓인 눈만 털어냈다.
* 보고 사항 :
“오늘은 주몽과 눈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왕자 저하와 함께 눈싸움도 하셨고요.”
“…….”
“그다음엔 다 같이 다시 눈사람을….”
나는 마 대사자님의 눈치를 보다 말을 줄였다. 계절이 두 번 바뀌도록 변함없는 태자 저하의 일상에 슬슬 질리신 듯했다. 그러나 보고를 그만두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셔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와서 보고를 드려야 했다.
내가 불쑥 드는 죄책감에 머뭇거리는 날이면 마 대사자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곤 했다. 대귀족의 의무 중 하나가 저하께서 잘 지내는지 살피는 것이라고. 이전 호위 무사도 자신에게 보고를 했으니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며 말이다.
그래서 아무런 의심 없이 태자 저하의 일상을 낱낱이 고해바쳤다. 그러나 하루가 갈수록 그 믿음은 옅어졌다. 간간이 보게 된 둘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깨달아도 보고를 멈출 수는 없었다. 마 대사자님께선 보잘것없는 나와 달리 거역할 수 없는 대귀족이셨다.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도 그날 처음 본 나를 데려오신 저하의 속뜻을 알아내지 못했다.
지금 이 보고는 그저 저하께서 단물이 다 빠진 나를 내버렸을 때 붙잡을 동아줄을 마련해 놓으려는 방책일 뿐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하는지도 모를 변명을 몇 번이고 되뇌며 검에 매달린 술을 만지작거렸다.
* 특이 사항 :
그나저나 눈덩이에 얻어맞은 팔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누군가 돌을 섞어 눈을 뭉친 게 아닐까?
五.
개국 186년, 봄.
* 관찰 사항 :
“너 여기 왜 이래?”
나는 뒤에서 옷깃을 잡아 오는 손길에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돌아본 곳에는 눈을 커다랗게 뜬 태자 저하께서 계셨다. 항상 태자궁 안쪽 방에 계셨던 분이 오늘따라 왜 앞마당에 나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덕분에 몰래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려 했던 계획이 무산되었다. 나는 낭패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뒤로 걸음을 물렸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마 대사자님께 보고를 올리고 태자궁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다만 돌아오는 길에 몇몇 달갑지 않은 얼굴들을 만나 꼴이 엉망이었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보고를 올리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일을 태자 저하께선 단체 훈련을 위해 연무장에 가는 것으로 알고 계셨다. 나는 조금이라도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변명을 지어냈다.
“거, 검술 대련을 하다 미처 검을 피하지 못했사옵니다.”
“대련을 하다가 그랬다고?”
“예? 예, 그렇사옵니다. 흔한 일이오니 신경 쓰지 마시옵소서.”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잘생긴 얼굴에 흠집이 났는데.”
저하께선 안타까운 얼굴로 내 광대뼈를 문지르셨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얼굴을 내민 상태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 친밀한 접촉은 둘째 치고 나보다 고우신 분께 그런 소리를 들으니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홧홧해지는 귓불을 모른 척하며 불쑥 다가온 얼굴을 피하려 눈을 굴리는데 뒤쪽에 서 계시던 왕자 저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왜 밖에 나와 계시나 했더니 가람 저하께서 찾아오셔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 예상치 못한 만남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왕자 저하께선 어린 나이답지 않게 눈치가 귀신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불만스러운 눈을 하면서도 나를 꼼꼼히 뜯어보던 아이가 이내 입만 쭉 찢어 웃더니 그 조그만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어느 검에 얻어맞으면 저렇게 넓고 크게 멍이 들 수 있는 건지. 보통 검신은 폭이 좁아서 저리되지 않는데요.”
“응?”
“게다가 옷자락도 흙으로 엉망진창인 게, 요즘 무사들은 검술뿐만 아니라 체술까지 함께 배우는 모양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저도 오이에게 한 수 배워보고 싶군요.”
왕자 저하께선 이제 거의 신이 난 표정이셨다. 내가 이리저리 둘러댄 것을 꿰뚫어 보고 저지른 짓이 틀림없었다. 반면 태자 저하께선 오묘한 얼굴로 천천히 손을 떼셨다. 나는 그 손을 바라보다 이를 악물고 서둘러 변명을 내뱉었다.
“전장에선 순수한 검술로만 목숨을 지킬 수 없지요. 하지만 아직 내보이긴 부끄러운 실력이옵니다.”
“흥, 그러지 말고 사실대로….”
“가람아. 그만해. 오이가 대련을 하다 다쳤다잖아. 아니라는 사람을 무작정 몰아가면 안 되지.”
태자 저하께서 다정한 어투로 그의 아우를 달랬다. 내 말을 우선시하는 모습에 안 그래도 마 대사자님께 보고를 하며 너덜너덜해졌던 양심이 쿡쿡 찔려왔다. 다행히 형님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왕자 저하께선 이번에도 그 재앙에 가까운 입을 다물어주셨다. 나는 두 저하의 눈치를 보다 그만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송구하옵니다.”
“나한테 미안할 일은 아니지. 많이 아파 보이는데. 약은 발랐어?”
그의 다정한 말투는 이제 내게까지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궁인을 시켜 약을 가져오게 하고 약을 바르는 내내 곁에서 지켜보셨다.
나는 이제 송구스러워 땅으로 꺼지고 싶을 정도였다. 마 대사자님께 몰래 보고한 일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기만 했지 사소한 일, 그러니까 돌아오는 길에 얻어맞았다거나 하는 일에 신경을 더 쏟으실 줄은 몰랐다. 이건 너무도 일상적이라 나조차 신경 쓰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별것도 아닌 일로 걱정을 끼쳤다는 사실에 죄송스러우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나는 그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약을 발라주는 궁인의 손길을 따라 두 눈을 감았다.
“요새 별일 없지?”
그래서일까, 나긋나긋한 이 물음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 말았다.
* 보고 사항 :
“그래, 지난 며칠간 별일 없었느냐?”
“예. 왕자 저하께서 태자궁을 방문하셨을 뿐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저하께서도 얌전히 석반만 잡수시고 돌아가셨고요.”
“흐음. 알았다. 이만 물러가거라.”
나는 마 대사자님께서 먼저 등을 돌리실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늘처럼 얼굴에 멍을 달고 있던 날 고개를 들고 있다가 ‘네까짓 게 시위하는 거냐’며 얻어맞은 뒤로 생긴 습관이었다.
물론 이번에 생긴 멍도 작지 않았으니 마 대사자님께서도 분명 보셨을 터였다. 예전 같았으면 모른 척 지나가는 그의 태도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을 테지만 태자 저하께서 한참 호들갑을 떠신 후라 그런지 괜스레 다시 한번 의식하게 되었다.
가면일지도 모르는 다정함에 속아 넘어가서는 아니 되는데…….
그러나 계속해서 그 생각을 이어갈 틈도 없었다. 나는 또다시 돌아가는 길목에서 익숙한 면면들을 마주치고 말았다.
* 특이 사항 :
언젠가 궁병들이 대화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가람 왕자 저하께서 눈은 웃지 않고 입만 쭉 찢어 웃으셨는데 담력이 조금만 약했으면 바지춤을 축축이 적셨을지도 모른다.’고 했었나.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그 표정을 오늘 본 것만 같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들이 잠시 보고 싶어졌다.
六.
개국 186년, 봄
* 관찰 사항 :
“이건 좀 해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던 팔을 치우고 가늘게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그간 엎드리며 지겹도록 보았던 고급스러운 비단신이었다. 이곳에 절대 있어선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혼란스러운 정신으로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곳엔 태자 저하께서 황당하다는 얼굴로 팔짱을 끼고 서 계셨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정말 두 눈을 꾹 감고 땅속으로 꺼지고 싶었다.
‘아니라는 사람을 무작정 몰아가면 안 되지.’
사실 그 말은 의심하되 우선 증거를 모아야 한다는 말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들킨 마당에 더 이상의 변명은 필요치 않았다. 나는 일단 나를 짓밟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자들의 다리를 툭툭 쳐서 치워냈다. 그리고 대강이나마 차림새를 가다듬고 그대로 몸을 엎드렸다.
“태자 저하.”
“태, 태자 저하! 태자 저하를 뵙습니다!”
내 뒤를 따라 나를 폭행하던 무사들이 궐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엎드렸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엎드려 잠깐 마주했던 저하의 얼굴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낯에는 분명히 은은한 분노가 섞여 있었다.
분노하실 만도 했다. 이 길을 우연히 지나가시다 나를 보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분명 몰래 궁을 빠져나오셔서 내 뒤를 밟으신 게 틀림없었다. 그러자 혹시나 했던 기대도 사그라들고 체념만이 남았다.
나는 지금 마 대사자님께 보고를 마치고 태자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여기까지 오신 저하께서 그 모습을 보지 못하셨을 리 없다. 거기다가 다른 무사들에게 얻어맞는 추한 모습까지. 감춰뒀던 밑바닥까지 모조리 탈탈 들켜버렸다.
“…….”
그러나 우습게도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졌다. 버려지는 것이 가장 두려워 온갖 자존심을 내버리고 살았던 내가 버려질 게 분명한 상황을 앞두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었다. 아마 그간 저하를 배신하는 행위에 나도 모르게 상당히 죄책감이 들었나 보다. 정말 양심도 없지. 나는 그런 스스로를 비웃으며 당장이라도 떨어질 불호령을 기다렸다.
“나는 예보다는 대답을 원하는데. 왜 내 호위 무사를 폭행하고 있었던 거지? 이건 나를 무시하는 행위라고 생각해도 되겠느냐?”
그러나 그의 분노가 향한 곳은 내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었다. 일 년 남짓 태자 저하를 모시며 들어봤던 목소리 중 가장 찬 목소리가 그들을 향해 떨어졌다.
“아니옵니다!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저희가 어찌 그런 불경한 마음을 품겠사옵니까!”
무사들이 하나같이 쩔쩔매며 고개를 흙바닥에 찧었다. 진짜 ‘불경한’ 짓을 했던 나는 저리 해명할 자격도 없었다. 다시 고개만 푹 숙이는데 그중 한 명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저자는 몰락 귀족 태생이옵니다! 그럼 진급을 하여 마땅히 가문을 살릴 생각을 해야 하거늘,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수습 무사들 사이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놀면서 제 몸뚱어리 하나만 생각하고 다른 무사들을 농락하는 게 아니고 뭐겠사옵니까! 저희는 선배로서 오이를 바른길로 가게끔 가르침을 주고 있었을 뿐이옵니다.”
“아, 그랬군. 그런데 그대들의 말에 어폐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이젠 내 호위 무사가 되어 ‘진급’한 상태인데도 가르침을 주고 있으니 말이야.”
그 말에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사정을 입맛대로 끼워 맞추느라 앞뒤는 신경 쓰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저하께선 조용해진 그들 사이를 거닐며 내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문장을 읊었다.
“그게 언제까지나 네 자리일 것이라는 환상은 일찌감치 버려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놈이 무슨 짓을 해서 태자 저하의 눈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하께서도 곧 네 천한 면을 알아차리실 테니까.”
“…….”
“조금 전 그대들이 한 말이 아닌가?”
저런 비꼬는 말투는 그간 태자 저하를 모시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꿈을 크게 가지는 것은 좋으나 내가 네놈들을 호위 무사로 들일 일은 없을 것이다. 난 마음이 천한 자는 곁에 두지 않거든.”
그 뒤로도 저하께선 한 번만 더 나를 괴롭히다 걸리면 마 대사자님께 벌을 내려달라 청할 것이라 단단히 을러두었다. 무사들은 새하얗게 질려 내 앞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하께선 모르고 하신 말씀이실 테지만 마 대사자님의 손으로 넘어가면 군법 특성상 최소 퇴출, 최대 사형이었다. 지금까진 내 상황을 아시면서도 묵인하셨지만 태자 저하께서 직접 말씀을 드리면 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법대로 다스릴 것이다.
“그만 썩 물러가거라.”
그들이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엎드려 이제 내게 내려질 처벌만을 기다렸다. 내가 몰락 귀족 태생이라는 사실까지 듣고도 그들을 내쫓으신 것은 의외였으나 내가 저지른 다른 짓은 이처럼 쉬이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넌 따라와.”
태자 저하께선 태자궁으로 가 처벌을 내리실 모양인지 따라오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시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묵묵히 거리를 두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궁 안에 들어서자마자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다가오는 태자 저하의 유모가 보였다. 그녀는 저하께서 또 몰래 나가신 것에 대해 할 말이 아주 많아 보였지만 뛰어난 궁인답게 우리의 분위기를 보고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이윽고 마음을 가라앉힌다는 따뜻한 차가 향을 풍기며 태자 저하의 앞에 놓였다. 나는 피어오르는 김을 불안하게 쳐다보다 온몸을 긴장시키고 그 앞에 꿇어앉았다. 그간 살펴본 바론 저하께선 그러실 분이 아니셨지만, 종종 화가 나면 찻잔을 집어 던지는 귀족들도 많았기 때문에 항상 주의해야 했다.
다행히 저하께선 찻잔을 들어 후후 불더니 그대로 쭉 들이켜셨다. 찻잔을 탁 내려놓는 손길이 매서워 절로 몸이 움찔거렸다. 그는 그대로 입술을 꾹 깨물더니 고개를 번쩍 들고 내게 캐물었다.
“그래서, 후…. 그 개 같은, 아니, 그 무사들은 언제부터 널 괴롭힌 거야?”
“예?”
“말하는 꼬라지를 듣자 하니 들어올 때부터 그랬던 것 같긴 하더만. 몰락 귀족은 또 무슨…… 아니, 그 자식들 말은 믿지도 못하겠어. 이러지 말고 네가 직접 하나씩 알려줄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당장이라도 마 대사자님께 몰래 올린 보고를 캐물으실 거라고 짐작했건만 주제는 여전히 좀 전에 있었던 사소한 폭력이었다.
내 배신을 억지로라도 납득하시기 위해 과거를 물어보시는 건가. 평소 과할 정도로 다정하신 태자 저하였으니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해가 되었다. 어차피 애써 숨겨야 할 만큼 대단한 과거도 아녔다.
한 무사가 소리쳐 밝혔듯이 나는 몰락 귀족의 자식이었다. 어렸던 나는 사정을 잘 몰랐지만 아버지께선 모종의 일로 그 지역을 다스리던 대사자에게 밉보이신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내가 무예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궐에 들어갔을 때까진 가문이 남아 있었다. 그전에 평민이나 노비가 되었다면 생계를 신경 쓰느라 무예를 갈고닦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궐의 무사가 되기 무섭게 결국 가문은 몰락했고 부모님은 목숨을 잃으셨다.
원래대로라면 나까지 처형당해야 했지만 애초에 죄목이 불분명한 탓에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던 대사자께서 일을 덮으셨다. 무사가 된 날 처형한다면 마 대사자님이나 전하께 보고가 들어가야 하니 말이다.
그러나 가문의 지원이 끊긴 내 처지를 들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한 귀족 태생 친구에게 마음을 열고 터놓은 사정은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그 즉시 모든 무사들의 태도는 나를 암암리에 무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검술 외에 별다른 재주가 없었던 나는 그럴수록 더욱 훈련에 매진했다. 연줄이 없는 나는 무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진급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회 전날, 기대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내게 나와 함께 우승자로 점쳐지던 무사의 아버지가 찾아왔다. 그는 대귀족 가문 중 하나의 수장이었다.
‘내일 내 아들을 꺾고 네가 우승을 차지한다면 너는 진급 첫날 궐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나는 다음 날 결승전에서 내 목을 향하는 칼을 보고도 가만히 있어야 했다.
이러한 일은 매해 일어났다. 어떨 땐 당사자가, 어떨 땐 그들의 아버지가, 또 어떨 땐 그들의 추종자가. 찾아오는 사람은 매번 바뀌었지만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위치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손을 놓을 순 없었다. 가문도 잃었는데 궐에서마저 버려진다면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준우승이라도 차지해 내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 수습 무사로라도 남아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그런 나를 다른 무사들은 자존심도 없다며, 귀족의 수치인 몰락 귀족 태생답다며 조롱했다. 조롱이 폭력으로 이어지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 모든 이야기를 들은 태자 저하께선 짧게 헛웃음을 터뜨리셨다.
“와, 내가 널 호위 무사로 뽑지 않았더라면 곧 궐에서 쫓겨났겠는데? 아니면 그전에 잔뜩 얻어맞아 큰일이 났겠어.”
“그럴지도 모르겠사옵니다.”
나는 담담히 인정했다. 마지막 무술 대회가 가까워졌을 땐 정말로 분위기가 험악했으니까. 평소처럼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다른 대회가 끝나기도 전에 무도장 뒤에서 얻어맞았을 정도였다. 어쩌면 태자 저하의 호위 무사가 된 일은 내 마지막 행운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나를 보며 태자 저하께선 두 손으로 탁자를 쿵 내리치셨다.
“안 되겠다. 영 마음이 안 놓여. 너 앞으로 그냥 마 대사자님께 가지 마라. 꼭 직접 가서 보고를 해야 해?”
나는 깜짝 놀라 무엄함도 잊고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저 말은 마치 내가 걱정되어 보고를 하지 말라는 것처럼 들렸다. 내가 그를 배신하고 그간 일거수일투족을 고해바쳤다는 것은 전혀 신경 쓰시지 않는 건가?
설마 나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걸까. 생각은 점차 해서는 안 되는 착각으로까지 번져나갔다. 저 다정함은 가면일 게 분명한데! 그러나 배신을 목격한 순간에도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 가면을 쓰고 계실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 스며드는 다정함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결국 나는 이 모든 의혹과 죄책감, 그리고 혼란에 짓눌려 스스로 죄를 토해냈다.
“제가… 태자 저하를 배신했단 말입니다. 저하께선 이리 가벼이 넘어가 주시면 아니 되옵니다. 어떠한 벌이든 달게 받을 테니 부디 저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괜찮아. 어차피 나 보고할 것도 없지 않았어? 하도 지루한 일상이라 아마 듣는 마 대사자님이 더 지루하셨을걸.”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반응이었다. 망설임 없이 대답하시는 태자 저하의 모습은 너무도 태연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그 순간 모든 사고를 멈췄다. 입이 저절로 움직여 깊은 내면의 소리를 꺼냈다.
“저를 버리지 않으십니까?”
“내가?”
그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수많은 달콤한 말보다 그 웃음 하나가 내 마음을 안정시켰다.
나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엎드려 중얼거렸다.
“제가… 제가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마 대사자님께 보고는 당장 그만, 아니, 저하께서 원하신다면 거짓 정보라도 나르겠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나의 가정이 들어맞았다. 저하께선 진실로 다정한 성품이셨으며 감히 내가 의심해선 안 되는 존재였다. 내 모든 행운을 다 써버린 날 충성을 맹세해도 모자랐을 텐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 대사자님과 그가 움켜쥐고 있는 모든 것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 죄를 용서받을 수만 있다면 내장을 모두 꺼내 뒤집어 보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저하께선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씀하셨다.
“정말 개의치 않아. 지금은 전혀 중요하지 않거든. 나중에, 정말 나중에 중요한 일을 맡았을 때. 그때 네 곁에 있는 사람을 배신하지만 않으면 돼. 오늘의 기억을 가슴에 새겼다면 그걸로 됐어.”
그는 정말이지 그 모든 게 필요 없다는 듯 굴었다. 다만 ‘중요한 일’을 강조하시며 그때 믿음을 보이면 된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자연히 그 일이 뭘까 생각하는 사이 저하께서 앓는 소리를 내셨다.
“다만 네가 그곳에 계속 가는 건 걱정되는데. 갔다가 또 얻어맞으면 어떡해.”
송구하게도 아직까지 내게 일어난 폭력에 대해 고심하고 계신 듯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굳힌 나는 담담히 대안을 말씀드렸다.
“아예 보고를 하지 않으면 그만이옵니다. 더는 심려 끼쳐 드리지 않겠사옵니다.”
“아니, 아니야. 그랬다가 마 대사자님께 밉보이면 어쩌려고. 내 호위 무사여도 궐 내에서 마 대사자님을 무시할 수 없을 텐데……. 그러지 말고 앞으로는 글로 보고 일지를 보내자. 그럼 일석이조잖아?”
“……송구하오나, 제가 까막눈이옵니다.”
아주 어릴 적 글을 배운 적은 있었다. 그러나 공부 쪽으론 영 재능이 없었던 나는 책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목검이나 휘두르기 일쑤였다. 심지어 그마저도 집안이 몰락한 뒤론 모조리 잊어먹은 듯했다.
“…이래서 미리 알려준 거구나. 어떻게 살고 있을지 정말 알 수 없네…….”
저하께선 그런 나를 멍하니 보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셨다. 그러더니 굳게 주먹을 쥐고 호기롭게 외치셨다.
“내가 가르쳐 줄게!”
“아니옵니다, 태자 저하. 제가 어찌 저하께 글을…….”
나는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으나 이번만큼은 저하께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자세를 낮췄다. 나는 무엄함도 잊고 반짝 빛나는 두 눈을 홀린 듯이 마주 보았다. 저하께서는 그런 나에게 바싹 얼굴을 붙이고 귓가에 속삭이셨다.
“넌 가장 고귀한 자가 첫 번째로 신뢰하는 무사가 될 거야.”
‘가장 고귀한 자’. 이 부여에 그 칭호를 얻을 자는 단 한 분밖에 없었다. 내 앞에서 바로 그 자리에 오르실 분이 하얗게 웃고 계셨다.
태자 저하께선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 그 말은 아버지도 포기했던 내가 다시 붓을 잡게 했다.
* 보고 사항 :
[태자 저하께선 오늘도 무탈하셨습니다. 다만 요새 제가 며칠 간격으로 연무장에 들르는 일에 의문을 가지시는 듯했습니다. 따라서 큰 변고가 생기지 않는 한 앞으로 계속 글로 보고를 드리려 합니다.]
“춘아야. 이 편지 좀 마 대사자님께 전해줄래? 오이가 전해달라 했다면 알아들으실 거야.”
궁인이 태자 저하께서 내미신 편지를 품에 안고 조용히 물러났다. 나는 그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었다. 내 옆에는 온통 먹물로 얼룩진 종이가 굴러다녔다. 잘 봐줘도 다섯 살배기 서체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에 결국 태자 저하께서 직접 붓을 드셨다. 유려한 형태로 써지는 글씨를 보면서 어찌나 송구했던지.
“형님. 저 호위 무사는 팔을 쓰지 못합니까?”
그런 내 곁에서 주몽이 순수한 얼굴로 태자 저하께 물었다. 간간이 드러난 본성을 일전에 마주하지 못했더라면 꼼짝없이 내 팔 상태를 걱정하는 모습이라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야. 오이는 아직 글을 몰라서, 완벽히 익힐 때까지 내가 잠시 대신 써주는 것뿐이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정하신 저하께선 아직 아이의 좋은 면만 보신 모양이었다. 친절하게 돌아온 대답에 주몽이 다시 한번 순수하게 웃으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와. 다음엔 제가 한번 도와주고 싶습니다.”
우리 해, 이렇게 착해서 어떡해. 머리를 쓰다듬는 태자 저하의 손길에 맞춰 주몽이 헤실헤실 웃음을 흩뿌렸다. 나는 그 사랑스러운 겉모습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며 오늘 밤을 새워 공부할 것을 다짐했다. 한시라도 빨리 글을 떼지 않는다면 다음 편지에는 무슨 내용이 담겨 전달될지 알 수 없었다.
* 특이 사항 :
나중에 궁인이 귀띔해주었는데 태자 저하께선 글을 7살에 떼셨다고 했다. 가람 왕자 저하께선 4살에, 주몽은 5살에! 나는 회초리를 수없이 얻어맞고도 여덟 살까지 다 떼지 못했는데. 가끔 나를 미묘하게 바라보시며 “부여의 평균이 이게 아니었나?”라며 중얼거리시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七.
개국 186년, 가을.
* 관찰 사항 :
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봄이었는데 어느새 낙엽이 지고 있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아직까지 글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저하께선 지겨운 기색도 없이 나를 앉히고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다. 오늘도 석반을 먹고 앉아 얼마 남지 않은 한자를 외우고 있을 때였다.
“역시!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더니 왕자 저하께서 씩씩거리며 들어오셨다. 나는 놀라 붓을 놓고 서둘러 예를 갖췄다. 가람 저하께서 그런 나를 가리키며 분통을 터뜨렸다.
“형님! 어떻게 저 호위 무사와만 공부를 하실 수 있습니까!”
“사람한테 삿대질하는 거 아니야. 거기서 그러지 말고 이리 오자.”
저하께서 들여다보던 종이를 내려놓으시더니 양팔을 활짝 벌리셨다. 왕자 저하는 작은 발을 쿵쿵 구르면서도 얌전히 다가가 풀썩 안겼다. 태자 저하께서 잔뜩 심통이 난 볼을 살짝 꼬집었다 놓으며 물었다.
“내가 오이와만 공부해서 섭섭했어?”
아이가 나를 흘깃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나가버렸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난 당연히 나갈 생각이 없었기에 모른 척 눈을 피했다. 가람 저하께선 어린 나이에 영악한 면이 있으셔서, 내가 나가면 어떻게든 태자 저하를 구슬려 내 공부 기회를 빼앗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태자 저하께선 우리의 오고 가는 눈치 싸움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대신 그는 은근하게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너도 같이 공부할래?”
달콤한 약과를 들고 어린아이를 꾀는 듯한 목소리였다. 반면 가람 저하의 태도는 회의적이었다.
“저 호위 무사랑요?”
표정을 보지 않아도 질색하는 게 느껴졌다.
“저는 배워야 할 것을 모두 배운 지 오래입니다. 이제 와서 한자나 배우는 누구와는 전혀 다르다고요.”
“당연히 나랑 공부하는 거지. 안 그래도 슬슬 같이 공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어.”
그 말이 거짓이 아닌지 태자 저하께선 쓰고 계시던 종이를 들어 올리셨다. 윗부분에는 알아볼 수 없는 동그라미와 선 따위가 섞인 기호가 쓰여 있었고 아랫부분에는 어려운 한자들이 보기 좋게 나열되어 있었다. 모두 지금 저하의 서안 위에 가득 쌓여 있는 서적들의 제목이었다.
저하께선 잠시만, 하고 중얼거리시더니 기호들을 죽 찢어 등잔대에 던져 넣고 아랫부분만 가람 저하에게 내미셨다. 나는 타들어 가는 종이를 보다 다시 두 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당연히 기뻐하며 수락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가람 저하께선 종이를 바라보며 조금 머뭇거리셨다.
“제가 이것들을 공부해도 되는 겁니까?”
“왜? 너무 어려워?”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건 형님께서 공부하시는 게 아닙니까. 제가 감히…….”
나는 놀라서 다시 한번 책 제목들을 훑어보았다. 간신히 읽을 수만 있을 정도로 어려운 저 제목들은 모조리 제왕학에 대한 것들이었나 보다. 그러나 태자 저하께선 아무렇지도 않게 그중 하나를 펼쳐 펄럭펄럭 흔들었다.
“내가 나중에 잘못될 수도 있잖아. 그럼 네가 왕위에 올라야지.”
“형님! 농으로라도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왕자 저하께서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 말이 담고 있는 불길한 내용은 둘째 치고 확실히 누가 들을까 두려운 내용이었다. 나는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어 태자 저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평소 비관적인 분이 아니셨던 만큼 방금 전 말이 더욱 이상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런 반응에 당황한 듯 손사래를 쳤다.
“아니, 내가 꼭 잘못된다는 게 아니라……. 갑자기 머리가 백지가 되거나, 기억을 잃을 수도 있잖아? 그럼 네가 옆에서 나를 도와줘야지.”
“형님께서 기억을 잃으신 것은 아주 어릴 적이시지 않습니까. 그때도 고작 글이나 잊으셨고요.”
왕자 저하께서 안타깝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태자 저하께선 더욱더 어렸던 왕자 저하가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 데 더 놀라신 것 같았다. 그는 눈을 몇 번 도르륵 굴리더니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배워둬서 나쁠 건 없잖아? 너도 내가 오이와만 공부해서 섭섭하다며.”
“그건 그렇지만……. 확실히 제가 공부해두면 나중에 형님께서 왕위에 오르셨을 때 곁에서 도와드릴 수 있겠네요. 물론 형님께선 그때도 건강하시겠지만요.”
아이는 특히 마지막 말에 강세를 두어 말했다. 태자 저하께선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다행히 저하의 걱정은 과거 경험을 기반으로 한 합당한 우려였던 모양이었다. 확실히 기억을 잃으신 경험이 있으니 어느 날 다시 기억을 잃지 않을까 걱정이 되실 만도 했다.
나는 불길한 기운을 떨쳐내고 다시 붓을 잡았다. 두 분은 책을 이리저리 펼쳐보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느새 왕자 저하의 눈에는 서운함이 가시고 대신 총기와 신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 보고 사항 :
슬슬 다시 편지를 보낼 때였다. 나는 그동안 배운 지식을 총동원하여 천천히 한자를 적어 내려갔다. 고심해서 고른 문장이 종이 위에 반듯이 적혔다.
[보고 사항 없습니다.]
마 대사자님께 가람 저하께서 태자 저하와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적을 순 없었다. 꾸며 쓸 수도 있었지만 내가 택한 방법은 모르쇠였다. 이렇게 몇 번 더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편지를 보내지 않아도 의심을 사지 않으리라.
* 특이 사항 :
가람 저하께선 태자 저하와 대부분 토론을 하며 공부를 하신다. 태자 저하께서 최근 회의에 있었던 안건을 들고 오면 그에 답하는 것 같은데, 두 분의 말씀을 듣고 있다 보면 생각이 깊으셔서 놀랄 때가 많다. 특히 태자 저하께선 백성들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정말 남다르시다. 같이 공부를 하시며 그런 모습을 왕자 저하께서 충분히 배우고 계신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八.
개국 187년, 가을.
* 관찰 사항 :
오랜만에 왕비 마마와 독대를 마치신 태자 저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왕비궁에서 태자 저하의 태도는 대부분 무덤덤했기 때문에 이렇게 기분을 드러내시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나는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혹여 안에서 좋지 못한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나보고 혼인을 하래.”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느새 태자 저하께선 열다섯이 되셨다. 평범한 가문이라면 열다섯에 혼인은 조금 이른 감이 없잖아 있겠지만 국혼이라면 말이 달랐다. 나는 이제 좋지 못한 일을 듣기 위해 뒷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저하께선 그런 나를 보더니 인상을 팍 찌푸리셨다.
“난 할 생각이 없단 말이야.”
예상치 못한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혼인은 그저 혼기가 차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혼인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은 난생처음 보았다.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내 뒤에서 대신 대꾸가 날아왔다.
“내 살다 살다 태자비를 맞지 않았다는 태자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정녕 이 부여의 대를 끊을 셈입니까?”
안에서 이미 잔뜩 싸우고 나온 듯 왕비 마마께선 한참 지친 투였다. 그러나 저하께선 태연하게 대답했다.
“대는 나중에라도 충분히 이을 수 있습니다. 혼인은 그때 해도 늦지 않고요.”
“그게 대체 언제랍니까?”
“십 년, 아니 십오 년 후……?”
나를 비롯해 주변에 서 있던 모든 궁인들이 입을 쩍 벌렸다. 십오 년이면 아직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주몽도 성년이 되고도 한참 남을 시간이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를 때까지 혼인을 하지 않겠다니, 어떻게 들어도 농락하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왕비 마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지금 나와 농지거리를 하자는 건가요! 잔말 말고 이 중에서 마음에 드는 처자가 있나 살피기나 하세요!”
그녀의 날 선 손짓에 따라 내 품에 묵직한 두루마리가 가득 안겼다. 언뜻 보아도 귀족 처녀들의 초상화와 신상 명세가 적혀 있는 중매 종이였다. 태자 저하께선 한숨을 푹푹 내쉬긴 했지만 그것마저 물리진 않았다.
다시 태자궁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궁 앞을 서성이던 궁인이 우리를 보자마자 급히 다가왔다.
“태자 저하! 가람 왕자 저하께서 태자궁에 찾아오셨사옵니다.”
“그래?”
“하오나 방금 전 주몽 도련님께서도 태자궁에…….”
그녀는 끝말을 흐렸지만 나는 충분히 숨겨진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주몽이 단순한 면이 있는 가람 저하의 속을 잔뜩 긁고 있을 게 뻔했다. 가람 저하께서 그걸 두고 보실 리 없으니 궁인이 저리 다급하게 왔겠지. 태자 저하께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하셨는지 얼굴이 창백해지셨다.
“가람이가 또 해를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니겠지?”
예? 나는 귀를 의심했다. 궁인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저하께선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곧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셨다. 나 또한 그의 뒤를 따르려 했으나 쏟아질 듯한 종이 뭉치 때문에 도저히 뛸 수가 없었다.
“이쪽에 두시지요.”
눈치 빠른 궁인이 가까운 빈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품 안에 안고 있던 모든 걸 탁자에 우르르 쏟아내었다. 그리고 뒤를 도는데 하마터면 놀라서 주저앉을 뻔했다. 그곳에는 태자 저하의 앞에 있어야 할 두 분이 있었다. 나를 안내한 궁인이 몹시 미안한 눈으로 조용히 문을 닫았다.
가람 저하께선 아무 말 없이 나를 밀치고 탁자로 다가갔다. 중매 종이를 뒤적이는 손길이 거칠었다.
“내 말이 맞지 않느냐. 어마마마께서 형님의 혼처를 알아보고 계신다고!”
어느새 곁에는 주몽까지 와 있었다. 아이는 가람 저하께서 던지듯 건네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펼쳐서 꼼꼼히 훑어보는 눈이 묘하게 번들거렸다.
찌이익―
그러더니 종이의 상단 부분을 잡고 망설임 없이 둘로 찢었다. 아리따운 처자의 얼굴이 알아볼 수도 없게 조각났다. 가람 저하와 나는 너 나 할 것 없이 경악해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무어 문제라도 있습니까? 저는 형님의 눈을 지켜드리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초상화를 반으로 가르는 얼굴은 뻔뻔했다. 잠시 뒤 가람 저하께서 다른 종이를 집었다.
“네가 간만에 옳은 말을 하는구나.”
공동의 적을 둔 두 아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했다. 나는 멍하니 박박 찢겨 나가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분명 말려야 하는데 입을 여는 순간 다음에 찢기는 것은 종이가 아닐 것 같았다.
종잇조각이 바닥에 수북하게 쌓일 때쯤엔 문밖에서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소란이 일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대체 왜 하는지 모를 걱정이 아직도 얼굴 가득 서려 있던 태자 저하께선 방 안을 확인하자마자 경악하셨다.
“가람아! 이걸 다 찢어놓으면 어떡해!”
그제야 뒤를 확인한 왕자 저하께서 화들짝 놀라 두 손을 펼쳤다. 미처 덜 찢긴 두루마리가 땅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는 잔뜩 당황한 얼굴로 주몽을 쳐다보았지만 아이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두 손은 이미 비어 있는 채였다.
가람 저하께선 억울한 얼굴로 다시 형님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태자 저하의 눈초리는 뾰족하게 서 있었다.
“혀, 형님. 제가 안 그랬, 아니, 제가 그러긴 했지만….”
“이걸 누가 다 치우라고! 세상에, 종잇조각이 바닥까지 가득하네.”
“……네?”
가람 저하께서 맹하게 되물었다. 종이 무덤에서 은근슬쩍 한 발자국 물러나 있던 주몽마저도 멍하니 태자 저하를 바라보았다.
“이 꼴이 되어서 어째. 어마마마께서 혼처를 고르라 하셨는데 그러지도 못하겠네.”
그가 잔뜩 높아진 목소리로 말하며 찢어지다 만 두루마리를 집어 다시 탁자 위에 올렸다. 어쩐지 즐거우신 것 같다면 내 착각일까. 나는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 보고 사항 :
[보고 사항 없음]
* 특이 사항 :
찢어진 초상화는 두 배가 되어 다시 태자궁으로 왔다. 이번엔 왕자 저하께서 ‘실수로’ 차를 엎으셨다. 그나저나 나라면 형님께서 어여쁜 부인을 맞이하신다면 기뻐서 잠도 오지 않을 텐데. 저리도 싫어하시는 게 의아해 가람 저하께 여쭤보았다가 아… 믿을 수 없는 답변만 들었다. 궐에선 왕족에게 성교육을 따로 시키지 않는 건가?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움이 가시지 않는다.
九.
개국 188년, 겨울.
* 관찰 사항 :
눈이 소복이 내리는 평화로운 겨울이었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다 화로를 한 번 들쑤셨다. 별궁은 태자궁과 달라 날이 조금만 추워져도 찬바람이 들었다. 내가 불을 다시 살피는 동안 말없이 손만 놀리던 협보가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책 장수를 만났는데 저하께서 그림 이야기에 손을 떼신 것 같아 안타깝다고 하더군요.”
“그래?”
“문양을 바꾼 게 확실히 효과가 있나 봅니다.”
원래 문양은 하얀 눈송이 아래서 싹을 틔운 초목이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말을 맺는 것과 동시에 눌렀다 뗀 도장 아래에서는 활짝 핀 꽃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꽃잎이 제 허리를 다 편 모습이 길가에 흔히 피는 들꽃과 기세부터가 달랐다.
이게 무슨 꽃이냐 묻는 물음에 저하께선 ‘해바라기’라고 하셨다. 햇빛을 좇아 고개를 돌리는 상상 속 꽃은 보기만 해도 희망에 차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나저나 새로운 기부처를 찾아야 하는데 어디가 괜찮을 것 같습니까?”
협보가 쉼 없이 도장을 찍어 누르며 무신경한 태도로 물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손놀림이었다. 나는 그 짧은 사이 벌써 완성한 다섯 권의 책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하께선 가끔 협보를 가리켜 ‘일하는 기계 같다.’라고 평가하셨는데 ‘기계’가 무언진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협보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하께서 소개해주신 이 친구는 올해 열여섯 살로, 하얗고 마른 생김새에 어울리게 꼼꼼하고 셈에 밝았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책 사업을 도왔다는데 그 때문인지 살짝 예민한 기질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문제의 핵심을 집어내는 능력은 무식하게 검만 잘 휘두르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몇 번 만나지 않아 나는 곧 저하와 동갑내기인 이 친구를 꽤 좋아하게 되었다. 태자 저하께서 매번 날 협보 옆에 앉히시니 친해지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
이 우정에 징검다리를 놓아주신 분은 찍힌 도장이 잘 마르도록 살살 부채를 부치다 협보의 말에 흥미를 보이셨다.
“새로운 기부처?”
“예. 여름에 침수된 지방 지원도 다 끝났고, 몇 년 전부터 유화 님께서 여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기 시작하신 것 아시지요?”
“응. 인상착의만 듣고도 귀신같이 얼굴을 그려내시는데 그 모습이 하나같이 아름다워 인기가 좋다며.”
“그런데 일이 년 전부터 대귀족 여식들의 초상화 주문이 그렇게 많이 들어온다지 뭡니까. 그림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는지 동일한 주문도 여러 번 들어온다고 합니다.”
태자 저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다행히 협보는 보지 못한 듯 도장에 먹을 묻히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창고에 곡식이 넘치다 못해 썩어나갈 정도입니다. 유화 님께서 새로이 곡식을 쓸 곳을 찾고 계시더라고요.”
“그래…….”
저하께선 곰곰이 생각에 잠기셨다. 그가 다시 입을 뗀 것은 협보가 새로이 쌓은 책이 내 앉은키를 넘어섰을 때쯤이었다.
“이 문양, 정말 나와 관계없어 보이지? 백성들도 그 기부가 이제 완전히 유화 님께서 하시는 거라 생각하게 됐고.”
“예. 집에서 몰래 엿듣기론 귀족들도 저하께서 완전히 손을 뗐다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협보의 확답에 그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두신 기부처가 있는 듯했다.
마침 별궁 뒤쪽에 위치한 별채에 가신 유화 님께서 돌아오셨다. 그녀가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 주변을 정리하는 동안 저하께선 그녀에게 다가가 몇 마디 말을 꺼냈다. 여인, 기부, 지원……. 두 분은 대화를 나누며 다른 방으로 건너가셨다.
“뭐 하십니까? 부채나 부치세요.”
협보가 저하께서 두고 가신 부채를 냉큼 집어 내게 건넸다. 나는 조금씩 들렸던 단어를 짜 맞추길 포기하고 부채를 이어받았다. 무얼 하시든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 보고 사항 :
[無]
옆에서 내가 쓰던 보고 일지를 보고 계시던 저하께선 참말이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종이를 팔락였다.
“너 이럴 거면 그냥 편지 보내지 마……. 이것 보고 오히려 더 혈압 오르시겠다.”
“그러겠습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편지를 집어 화로에 넣었다. 어차피 특별한 보고 사항을 적어 보내지 않은 지 꽤 시일이 흘렀다. 지금껏 보고 일지를 보낸 것도 모두 태자 저하께서 마음을 쓰셨기 때문이었다. 저하께서 다급히 내 팔을 붙잡으셨지만 종이는 이미 타오른 뒤였다.
* 특이 사항 :
저하께서 유화 부인과 대화를 나누신 뒤로 별궁을 찾으시는 빈도가 잦아지셨다. 나와 협보를 한 방에 두고 다른 방에 가셔서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도통 무슨 일을 하시는 건지 짐작할 수가 없다.
……혹시 그림 이야기 신간이 나오려는 건 아닐까?
十.
개국 190년, 여름.
* 관찰 사항 :
몇 해가 지나도 태자 저하를 향한 혼인 이야기는 끊임없이 태자궁을 두드렸다. 그때마다 태자 저하께선 질색하며 거절하셨지만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국혼이 없는 일이 될 리가 없었다. 지금까진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해 설득과 제안만 하고 있었지만. 이제 혼기가 꽉 찼으니 강제로 밀어붙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걸 저하께서도 느끼신 모양이었다. 그것은 결국 왕비 마마께서 태자궁으로 걸음 하신 날 조금 더 극단적인 형태로 터져 나왔다.
“제가 혼인 안 한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혼인을 하느니 차라리 저기 저 연못에 빠져서 죽겠습니다!”
“태자! 이 어미 앞에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문밖으로 비명에 가까운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는 놀라서 궁인을 쳐다보았다.
마침 그곳에 서 있던 사람은 저하의 유모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경악한 얼굴을 한 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윽고 안에서 왕비 마마를 달래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의논하시는 편이 낫겠사옵니다. 우선 마음을 추스르시고….”
곧 왕비 마마께서 숨을 헐떡이며 방 밖으로 걸어 나오셨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부축을 받아 멀어지는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그리고 그 뒤를 우르르 따르는 궁인들이 모두 멀어지기가 무섭게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태자 저하 역시 숨을 고르며 앉아 계셨다. 나는 어떠한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숨이 가라앉으실 때까지 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동안 왕비 마마를 배웅해드리고 온 유모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저하의 앞에 다과상을 조심히 내려 둔 뒤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그 앞에 앉았다. 나는 그녀가 방금 전 태자 저하께서 왕비 마마께 보인 무례에 대해 말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초조한 듯 주먹을 말았다가 풀길 반복한 그녀가 꺼낸 말은 내가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였다.
“어째서 하필 연못인지……. 그 이유를 여쭈어봐도 되겠사옵니까.”
태자 저하께선 잠시 머뭇거리셨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장소가 아닌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가 조심스럽게 그 이유를 털어놓았다.
“가끔 이상한 꿈을 꾸거든. 저 안에 분명 내가 원하는 게 있었던 것만 같은…….”
그 순간 유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태자 저하께서 놀라 몸을 일으키실 정도였다. 그녀는 저하의 걱정에도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치맛자락 아래 감춰진 손이 떨리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양해를 구하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태자 저하께선 걱정스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안 되겠다는 듯이 나에게 말했다.
“오이야. 네가 좀 따라가 봐줄래? 나는 의원 좀 불러야겠다.”
나는 다른 궁인을 부르는 저하를 뒤로하고 서둘러 그녀의 뒤를 밟았다. 다행히 그녀는 연못 앞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부축이라도 해드리기 위해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다가가기가 무섭게 그녀가 나를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다급한 기색으로 말했다.
“태자 저하께서 연못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간절하고도 필사적인 말투였다. 어쩐지 깊은 사정이 있어 보여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저하를 지키기 위해선 사소한 정보 하나마저 귀중히 여겨야 했다. 그녀도 내 뜻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정을 털어놓았다.
“몇 년 전, 삿된 것에 홀리신 태자 저하께서 연못에 스스로 빠져 죽으려 하신 적이 있습니다. 천운인지 그날의 기억은 잊으셨지만 저는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해요. 그런데 조금 전 하신 말씀이 꼭 그날 밤과 같아서…….”
다행히 요새는 그런 일이 없지만 그녀는 방심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충격에 대꾸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 있었으니 그녀가 태자 저하께서 하신 말씀에 소스라치게 놀랄 만도 했다.
“혼인 건은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오이 님께선 태자 저하께서 연못을 가까이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결연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호위 무사의 임무를 다할 때였다.
* 보고 사항 :
* 특이 사항 :
연못에 가까이 가시려는 태자 저하를 막으며 거기 식인귀가 나온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둘러댔다. 그때 나를 바라보시던 저하의 표정이란……. 나를 한참이나 어린아이 보듯 보셨는데, 어째서 나보다 서너 살은 더 어린 그에게서 십몇 년은 더 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十一.
개국 192년, 가을.
* 관찰 사항 :
오늘은 경사스러운 관례 날이었다.
성년 의례인 관례는 보통 십오 세에서 이십 세 사이에 올렸다. 올해 스무 살이 되신 태자 저하께선 늦되어도 한참 늦되게 치르시는 것이었다. 혼례와 동시에 관례를 올리려 했던 왕비 마마의 계획이 틀어지며 생긴 참사였다.
그 모습에 나는 남몰래 혀를 내둘렀다. 결국 혼례를 하지 않은 채 관례를 허겁지겁 치르시게 되지 않았나. 평소에도 이상한 데서 고집이 세다 느끼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지키고 있던 문이 열렸다. 나는 문 사이로 단장을 마치고 나오시는 태자 저하를 보고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성대하게 갖춘 예복은 말랐지만 큰 키를 알맞게 감싸고 떨어졌다. 붓만 쥐고 실내에서 생활하신 탓인지 티 없이 하얀 얼굴은 고급스러운 옷감 아래서 더더욱 고귀해 보였다. 평소엔 착용하지도 않으시던 화려한 장신구와 관은 덤이었다. 색을 발랐는지 평소보다 붉은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였다.
“어때?”
“너무 마르셨사옵니다.”
그의 유모가 마뜩잖다는 듯 말했다. 어쩐 일이신지 열여덟 살 이후로 식사량이 눈에 띄게 적어지신 탓이었다. 태자 저하께선 그저 작게 웃으셨다. 긴 속눈썹이 드리워지며 오늘따라 짙게 깔린 수심이 그늘을 만들었다.
나는 그 커다랗고 순한 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평소에도 고우시다 느끼긴 했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평소에도 처연한 분위기를 휘감고 계신 분이었다. 왕자 저하나 주몽이 찾아와 밝게 웃고 계실 때조차도 그 분위기는 그를 둘러싸고 사라지지 않았다. 궁인들은 마음을 퍼주느라 정작 자신의 마음 둘 곳 하나 없으신 분이라 그렇다며 뒤에서 속닥거렸다.
외로움을 빚어 사람을 만든다면 태자 저하가 아닐까. 그만큼 쓸쓸해 보이고 안아드려야만 할 것 같은 분이셨다. 성년을 맞이한 경사스러운 날 홀로 드리운 깊은 수심은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더 깊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건 성년이라는 단어가 주는 미묘한 감상을 극대화하는 면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준비를 돕기 위해 들어갔던 궁인들이 모두 볼이 붉어진 채로 방을 빠져나왔다. 나는 검에 달린 술을 매만졌다. 어쩐지 오늘따라 저하의 주변을 빈틈없이 경계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 다짐은 있을 수 없는 일을 마주한 뒤로 더욱 커졌다.
“가람아!”
“…….”
평소라면 마주 외쳤을, 아니 그전에 반갑게 달려왔을 가람 저하께서 태자 저하의 부름에도 고개를 팩 돌리셨다. 태자 저하께서 다가가 말을 건네도 고개를 휙휙 돌리거나 위만 쳐다보고 시선을 도통 내리질 못했다.
“쟤가 왜 저러지?”
결국 원래 자리로 돌아오신 저하께서 의아하게 중얼거리셨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태자 저하와 달리 가람 저하와 동일한 눈높이를 가진 탓에 보아선 안 될 것을 봐버린 탓이었다.
나는 눈앞에 자꾸 잔상으로 남는, 새빨개진 누군가의 귓바퀴를 지우려 노력하며 검집을 더듬었다. 이번엔 술에 달린 부들부들한 털을 두 가닥이나 뽑고 나서야 손을 거둘 수 있었다.
***
복잡하고 화려한 식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수많은 등불이 하늘로 떠오르며 밤을 밝혔다. 나는 그 빛을 받아 새빨간 색을 드러내는 사과를 바라보다 태자궁 안으로 발을 들였다.
캄캄한 방 안에는 먼저 빠져나오신 태자 저하께서 홀로 앉아 계셨다. 창 너머로 들어오는 빛만이 그의 얼굴을 어스름이 밝혔다. 그의 고갯짓에 따라 관에 달린 구슬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그 사이로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낮게 중얼거렸다.
“첫 스무 살을 결국…….”
아침에 본 그의 수심이 넘실거리며 차올랐다. 이윽고, 파도가 쳤다.
“……간절히 바라는 일이 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지. 매일 그걸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작은 물방울이 말의 형태를 띠고 점점이 튀어 올랐다.
“그런데도 끝이 보이지 않아. 이룰 수 있을 거란 확신도 점점 사라져만 가……. 내가, 내가 할 수 있을까?”
차르륵, 차르륵……. 입이 열리는 작은 움직임에도 무거운 장신구가 끊임없이 소리를 내었다. 마치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그걸 보던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소리를 내었다.
“그게 무엇이든 이루실 겁니다.”
내가 지켜본 태자 저하께선 의미를 알 수 없는 일을 벌일 때조차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가야만 하는 길을 표시해 둔 지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길 끝에 그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음을 짐작했다. 끝끝내 되돌아가거나 멈춰 서지 않았던 그를 떠올리며 감히 확언을 입에 담았다.
그런 날 보며 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만둘까 하고 흔들리는 순간도 많았어. 그런데 그러지 못하겠더라. 미련한 짓인 거 알겠는데도.”
찰나였지만 내가 처음 뵈었을 때도 가지고 계셨던 원인 모를 외로움이 언뜻 엿보인 것 같았다. 나는 문득 두려워졌다.
그 끝을 마주하신 태자 저하께선 어떻게 될까? 혹여나 저 목표를 이루지 못하시는 날에는?
너무 오래도록 강렬히 바라면 그것은 목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가 되어버린다. 아직 저하께서 그 단계엔 이르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 보고 사항 :
* 특이 사항 :
관례 뒤로 가람 저하께서 태자궁을 찾으시는 빈도가 확 줄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꾸만 태자 저하를 보시면 귓바퀴가 붉어지셨다.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안한 낌새가 자꾸만 나를 찌른다. 결국 오늘 몰래 약방에 가서 왕자궁에 열을 내리는 탕약을 보내라 말하고 말았다. 요샌 얼굴마저 벌게지시던데, 조만간 안면 홍조와 화병을 가라앉히는 데 좋다는 치자차를 보내야 하나 고민이다.
十二.
개국 193년, 봄.
* 관찰 사항 :
“너네 좀 친해진 것 같아.”
느릿하게 움직이던 두 개의 수저질이 우뚝 멈췄다. 그러나 태자 저하께선 젓가락질에 집중하시느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가 신중하게 콩자반을 집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어릴 땐 하도 싸워서 내 속을 다 썩이더니……. 그래도 컸다고 제법 친해지고,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
나는 하마터면 헛웃음을 터뜨릴 뻔한 입을 서둘러 막았다. 태자 저하의 뒤에 앉아 있어 눈에 띄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다.
눈치를 보며 바라본 가람 저하께선 어색한 웃음을 입에 달고 계셨다. 찔리는 구석이 많을 터였다. 그러나 뻔뻔하기가 활 솜씨 못지않은 주몽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어찌 감히 왕자 저하와 싸우겠습니까. 당치도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다면 당하기만 했을 것이다.’라는 투에 가람 저하께서 눈을 매섭게 떴다. 그러나 방금 태자 저하께서 하신 말씀이 있어서인지 대놓고 험한 말을 꺼내진 못했다. 대신 태자 저하께서 쓰읍- 소리를 내며 주몽을 바라보셨다.
“너 은근슬쩍 가람이가 있는 연무장에서만 활 쏘았다며? 내가 다 들었어. 가람이가 너보다 활을 잘 못 다룬다고 그러면 안 되지.”
어린아이를 혼낼 때나 쓰는 입소리를 열다섯이나 먹은 사내아이에게 쓰고 계신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햇살 좋은 곳에 심은 콩보다 더 쑥쑥 자라 키가 웬만한 무사를 뛰어넘은 아이에게 저 무슨 가당치도 않은 위협이란 말인가.
그러나 주몽을 태어날 적부터 돌보셨다는 태자 저하께선 아직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주몽의 얼굴이 조금 울적해지자마자 다급히 달래기 시작했다.
“괜찮아. 요샌 안 그런다며. 그럼 됐지.”
가람 저하께서 밥알을 헤집으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오랜만에 그의 심정에 백번 동감했다. 주몽이 더 이상 왕자 저하의 앞에서 활 솜씨를 과시하지 않는 이유는 연무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그 짓을 실컷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짓을 가장 많이 목격한 자도 나였다.
나는 매년 태자 저하의 등쌀에 밀려 사냥 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저하께선 나와 주몽을 자꾸 붙이려 드시며 사냥 대회 날마다 그를 보호할 것을 명했다. 설마 정말로 ‘저’ 주몽을 걱정하시는 건 아니겠지. 나는 그저 그가 화살 하나로 나는 새 세 마리를 떨어뜨리는 모습을 구경하다 올 뿐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제 앞의 노루를 놔두고 저 멀리 가람 저하의 앞에 있는 토끼를 노리는 그의 행태를 구경하거나. 물론 토끼가 얼마나 멀리 있든 그가 맞추지 못할 린 없었으므로 사실상 더욱 질이 나빠진 과시였다.
내가 그런 감상을 떠올리든 말든 팔을 뻗어 주몽의 잔뜩 처진 어깨를 도닥인 태자 저하께선 가람 저하께로 눈을 돌렸다.
“가람이 너도 험한 말 안 하니까 얼마나 좋아. 옛날 같았으면 이렇게 마주 보고 밥을 먹으면 사달이 났어도 벌써 났을 텐데. 예뻐 죽겠어.”
그는 가람 저하의 머리를 쓰다듬다 말끝에 가선 아예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도닥이셨다. 나는 상 위에 올라온 매운 젓갈과 가람 저하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색이 똑같은 게 역시 내가 보낸 탕약은 영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태자 저하께서 이번에 하신 칭찬도 욕을 먹은 당사자가 들으면 억울해 뒤집어질 말이었다. 역시나 주몽의 매끈한 이마에 핏줄이 살짝 솟아 있었다.
내 귀에도 주몽이 그의 사냥감을 뺏을 적마다 걸쭉하게 쏟아지던 험한 말이 스쳐 지나갔다. 어쩜 저렇게 귀족적이고 오만하게 온갖 저주를 퍼부으실 수 있는지……. 훗날 부여의 미래가 걱정될 정도였다.
“하하…… 그렇지요.”
“그럼요, 형님.”
저 둘이 방긋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저 태자 저하 앞에서 두 사람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더 이익인지 깨달을 만큼 자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바라보다 다음 사냥 대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불참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보고 사항 :
* 특이 사항 :
기어코 주몽도 태자궁을 나가기 전에 태자 저하의 품을 한 번 파고들었다. 가람 저하께선 그 모습을 보시고 씩씩대셨지만 태자 저하께서 방금 하신 칭찬이 있어서인지 대놓고 주몽에게 험한 소리를 하진 못하셨다.
……설마 태자 저하께선 이걸 노리신 걸까? 그럴 리 없다는 건 알지만 저하의 착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기적을 보고 있자니 절로 존경심이 들었다.
十三.
개국 195년, 가을.
* 관찰 사항 :
요즘 태자 저하께서 이상해지셨다.
주몽이 마 대사자님께 불려가 활 쏘는 시범을 보였을 때부터, 아니, 그전에 우 대사자님께 칭찬을 받았다 자랑했을 때부터.
아니면 그가 태자 저하와 함께 있다 넘어진 궁인을 일으켜 세워줬을 때부터인가.
시기를 종잡을 순 없지만 태자 저하께서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신다는 데는 태자궁 그 누구를 붙잡아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처음에는 저하께서 그저 허공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져있기만 하셨다. 이 정도는 평소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라 그러려니 했었다. 가끔 혼잣말을 중얼거리시긴 했지만 크게 염려할 만큼은 아니었다.
이변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때 일어났다.
오늘도 한 어린 궁인이 비틀거리며 태자 저하께 부딪힐 듯 몸을 기울였다. 혼인을 하지 않으시니 멋모르는 궁인들이 불충한 마음을 품고 종종 저지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제지하기도 전에 주몽이 손을 뻗더니 그녀의 팔을 턱 움켜쥐었다.
그리고 넘어지려던 그녀가 중심을 잡기가 무섭게 태자 저하께서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셨다.
“방금! 방금 그거, 다시 해봐.”
“소, 송구하옵니다. 다, 다시 넘어지란 말씀이시옵니까?”
발갛게 물들어 있던 궁인의 뺨이 삽시간에 창백해지며 다시 넘어질 듯 자세를 낮췄다. 주몽은 내밀었던 팔을 재빨리 거뒀다. 어차피 태자 저하께서 앞에 계셔서 내민 손길이었다는 티가 팍팍 묻어나왔다.
안타깝게도 저하께선 그런 주몽의 모습 대신 비틀거리는 궁인만 보시고 다급히 외치셨다.
“아니야!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그러나 ‘아무 일’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다음 이변은 주몽이 우 대사자님께 칭찬받은 일을 말했을 때 일어났다. 평소와 다름없이 주몽을 칭찬하며 머리를 쓰다듬던 태자 저하께서 멈칫거리며 손을 멈추신 것이었다.
“형님?”
그러나 저하께선 그가 아닌 허공을 바라보고 계셨다. 멍하니 허공을 훑던 그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주몽을 덥석 껴안으셨다.
“착하다, 해야. 칭찬도 받고 잘… 했어.”
난데없이 끌어안긴 주몽의 몸이 덜컥 굳은 것이 내 눈에도 보였다. 그의 귀가 화르르 불타는 것처럼 붉어졌다. 열일곱이면 다 큰 형님께 안기는 것이 부끄러울 나이이긴 했다.
그러나 태자 저하께선 다른 생각에 빠져 있어 주몽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하신 것 같았다. 그는 고저 없이 반복해서 칭찬을 읊으며 등을 두드렸는데 시선은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당연히 안겨 있는 시간은 길어졌고 주몽의 혈색은 원래대로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 기묘한 모습은 태자 저하께서 왜인지 깨달음과 뿌듯함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손을 푸셨을 때야 끝났다.
그리고 그 뒤로 저하께선 칭찬할 일만 생기면 주몽을 껴안기 시작하셨다.
“활 시범을 보이고 왔다고? 고생했네, 이리 와.”
저번에 한번은 다 큰 사내의 볼에 대뜸 입맞춤을 하시기에 기겁을 하며 막았더니 이번은 얌전히 머리를 도닥이기만 하셨다. 껴안기 편하게 허리를 숙이고 저하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댄 주몽을 보자니 방금 전 연무장에서 과녁을 박살 내고 왔다는 사내는 누구인가 싶어졌다.
주몽이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려 기댔다. 그러자 오늘도 어김없이 발갛게 열이 올라온 뺨이 보였다.
“…….”
그 순간 나는 어쩐지 언젠가 느껴본 것만 같은 불안한 낌새가 다시 닥쳐오는 것을 느꼈다. 저리 부끄러워할 것이면서 안기는 걸 마다하지 않는 모습이 어딘가 내 직감을 쿡쿡 찔러왔다.
……북녘궁에도 탕약을 달여 보내야 할까? 약방에 재료가 남아 있을지 고민을 할 때였다.
“잠깐만.”
꼭 껴안고 계시던 태자 저하께서 돌연 주몽을 밀쳐냈다. 갑작스러운 몸짓에 한참 큰 주몽의 몸이 풀썩 밀려났다. 그는 잠시 당황스러운 낯을 하다 곧 사르르 웃음 지으며 어리광을 피웠다.
“형님. 저 올해 사냥 대회에도 꼭 참가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제가 활 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는 무사가 한둘이 아니더군요.”
“어? 응. 잘했어.”
다시 안아달라며 팔까지 작게 벌리고 있던 주몽은 이번에야말로 굳어버렸다. 그러나 저하께선 대체 무슨 생각에 빠지신 건지 허공을 보며 입가를 매만지실 뿐이었다. 작게 도리질마저 치시던 저하께선 급기야 주몽을 내버려 두고 방을 나가버리셨다.
“…….”
처량하게 변해가던 눈이 한겨울에 몰아치는 폭설보다도 차게 식는 것이 보였다. 그의 손이 움찍거렸다. 동시에 빈 품을 내려다보는 얼굴에 미묘한 감정이 서렸다.
나는 약재를 헤아리던 것을 곧장 멈췄다. 열이 아니라 한기를 잠재우는 탕약을 찾아야 할 때였다.
* 보고 사항 :
* 특이 사항 :
한기를 잠재우는 데는 생강차만 한 것이 없다고 한다. 북녘궁에 보내는 김에 치자차까지 왕자궁에 보냈다. 특히 왕자 저하께선 증상이 드물어졌다 뿐이지 사라지진 않으셔서 걱정이다. 대체 몇 년째인지. 부디 치자차만큼은 효험이 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