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이곳에서의 내 위치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대신 나는 해야 할 일을 찾아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한 것은 역시 방치해 둔 퀘스트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서서 다시 불러낸 반투명한 창을 노려보았다.
[메인] 드러나는 존재 (2/2)
‘중해’의 활 솜씨는 하늘 아래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에 걸맞은 새로운 이름이 필요할 때입니다. 새로운 이름 ‘주몽’을 널리 알려주세요.
- 총 100명에게 ‘주몽’이라고 불리기 (7/100)
성공 시 보상 : ‘중해’의 호칭 변화, ‘중해’의 인지도 상승
실패 시 결말 : ‘중해’의 존재감 하락, ‘하백’과 ‘창조주’의 분노로 세상 멸망
마태령과 주몽이 엮일 일을 최대한 피했더니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주몽의 활 솜씨를 목격한 날 포섭한 4명 외 나머지 3명도 내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한 칭찬에 맞장구를 쳐 주다 건진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태령도 없으니 본격적으로 소문을 퍼뜨릴 생각이었다.
물론 언제나 방법이 문제였다. 궁인의 입을 빌린다면 사흘 내 100명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본 뒤 그 계획을 철회했다. 궁인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퍼뜨릴 수 있는 대상도 한정되어 있었고 듣는 사람들도 가벼운 소문 정도로 여길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활 솜씨로 명성을 떨쳐야 하는 아이답게 이왕이면 소문의 발원지와 종착지 모두 최소 무예와 관련된 사람이면 좋을 것 같았다.
여기까지 결정을 내리자 고민은 더 길지 않았다. 살면서 남자들만 모인 곳치고 입이 무거운 곳을 보지 못했다. 고대라고 현대와 남자들의 특성이 뭐 얼마나 다를까. 연무장에 가면 내가 찾는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을 터였다.
“태자 저하. 이곳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그러나 연무장에 도착한 나는 이곳을 이용하려던 생각을 금세 철회해야 했다. 어린아이를 우습게 여기는 분위기는 둘째 치더라도 무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던 마 대사자와 마주친 탓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무책임한 그의 아들놈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나인데 왜 그가 나에게 눈을 부라리는지.
“아, 이왕 오신 김에 저하께서도 활쏘기 시합에 참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비록 지금은 스승직을 내려놓았지만 일전에 검술만 가르쳐드린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아, 아니…… 저는 괜찮…….”
그것도 모자라 마 대사자는 내게 즉석에서 궁술 시합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거절은 통하지 않았다. 결국 간계에 휘말린 나는 끔찍한 솜씨에도 모두의 앞에서 활을 들어야 했다.
“…….”
“…….”
분명 쐈는데 발치에 화살이 떨어졌던 그 순간이란. 평소라면 그냥 창피만 당하고 끝날 것을, 옆에 가람이가 있어서 일이 더 커졌다.
“형님! 괜찮습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대뜸 저렇게 외치더니 상대 무사들을 모조리 협박해 기권패를 시켜놓은 것이다. 그래놓고 뻔뻔하게 내 우승을 주장했다.
마 대사자는 어느새 웃음을 그치고 있었다. 한참 뒤 그가 뒷목을 느릿하게 주무르며 입을 뗐다.
“허허, 참……. 태자 저하께서 인망이… 무척 두터우시군요.”
나는 아직도 홧홧하게 달아오른 볼에 손부채질을 했다. 이대로라면 연무장에는 주몽을 세우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러나 일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얼마 후면 궐에서 무술 대회가 열립니다. 원래 출전권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닌데, 아무래도 이번 대결의 상품으로 적절할 듯합니다. 이곳의 정예 궁병들도 가뿐히 이기셨으니 태자 저하께선 그곳에서 우승을 노려보셔도 될 겁니다.”
마 대사자가 뻔한 부정 우승을 못 본 척하며 나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한 것이다. 입을 쩍 벌리고 서 있던 나는 순간 스쳐 간 생각에 그 기회를 붙잡았다.
“외람되지만 그 자리에 제가 추천하는 사람을 대신 세워도 되겠습니까.”
“대리 참가를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마 대사자님의 호의를 거절하긴 어려우니 저를 대신할 사람을 그 자리에 세워 대회를 빛내고 싶습니다.”
그가 못마땅한 듯 주름진 눈매를 찡그렸다. 그러나 주변 무사들과 내가 등 뒤에 숨긴 가람이를 한 번 보더니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관대한 척 고개를 끄덕여 내 부탁에 가까운 제안을 승낙했다. 아무리 그가 대귀족이라 하더라도 나를 굳이 참가시켜 부하들이나 왕가의 불만을 사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대신 그는 이대로 넘어가긴 아쉬웠는지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물론 정예 무사를 모두 이기신 저하께서 보증하는 자이니 참가 전 저하의 추천을 받았다 밝혀도 되겠지요.”
내가 대리로 세운 사람이 우승을 하지 못할 경우 비웃음을 살 각오를 하라는 경고였다. 더불어 그렇게 된다면 왕가의 위신도 함께 떨어질 수 있었다. 마 대사자의 시선이 다시 느릿하게 내 등 뒤를 훑고 지나갔다. 내가 기껏해야 둘째 왕자를 대리로 내보낼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가 아는 사람 중 무술을 배운 사람이라곤 이제 가람이뿐이었으니 영 틀린 추측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신이 직접 운명에 활을 새겨 넣은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다행히 주몽에게 말할 타이밍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아직 왕비님의 당부대로 주몽과 같이 잠자리에 들고 있었다.
물론 적당한 때를 봐서 강경하게 북녘궁으로 돌려보내도 되었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더운 여름인데도 옆구리에 착 감겨오는 온기가 싫지 않았다. 항상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차지하고 있던 죄책감이 해결되어서인지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평소보다 가뿐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주몽을 외면하던 지난 2년을 이렇게라도 보상하고 싶었다.
“해야. 오늘 이야기는 어땠어?”
“너무 좋았습니다. 특히 못된 사람들이 벌을 받아서 참 다행이었어요.”
나는 요즘 밤마다 그림 이야기를 읽어주고 있었다. 글은 진작에 떼고 어려운 책도 술술 읊는 주몽에게 그림 이야기는 필요 없어 보였지만 나는 꿋꿋하게 낭독을 이어나갔다. 한창 그림 이야기를 만들던 시절, 주몽에게는 선물해주지 못한 게 안타까워 시작한 일이었다.
그간 발매한 이야기 전권은 협보가 구해다 주었다. ‘드디어 포기하신 거냐’며 이상한 소리를 해대긴 했지만 누구보다 기쁘게 책을 건네준 친구였다.
다행히 주몽은 내가 읽어주는 책들을 모두 좋아했다. 한 권, 한 권이 끝날 때마다 선물로 책도 함께 주었더니 베개 밑에 숨겨놓고 자기까지 했다. 그렇게 좋으면 끌어안고 자라 했더니 그러면 나에게 안길 수 없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던가. 너무 귀여워서 솔직히 그날은 잠든 게 아니라 기절을 해버린 것 같았다.
아무튼 오늘은 아이에게 해야 할 중요한 말이 있었다. 나는 목을 고른 뒤 일상적인 것을 이야기하듯 툭 물어보았다.
“해야, 너 활쏘기 대회 한번 나가보지 않을래?”
“대회… 요?”
“응. 네가 활을 잘 쏘니까, 거기 나가서 우승을 하면 되게 멋지고 좋을 것 같지 않아?”
“거기서 우승하면 뭐가 좋습니까?”
정말 순수하게 우승을 했을 때의 좋은 점을 묻는 투였다.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우승 상품을 들은 기억은 없었다. 그러나 유독 초롱초롱한 눈에 뭔가 바라는 게 따로 있나 싶었다. 나는 내친김에 아예 받았으면 하는 상품을 물어보았다. 그게 진짜 상품이 아니어도 직접 구해서라도 품에 안겨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생각지도 못한 바람을 내놓았다.
“혹시 제가 우승을 한다면 가을에 첫 사과는 저와 함께 먹어 주시면 안 될까요?”
“사과?”
“네! 사과나무 중에서도 태자궁 사과나무에 열리는 첫 사과요.”
달력이 없는 부여에서는 한 가지 반복되는 일을 기준으로 날을 세는 경우가 많았다. 태자의 생일도 그런 경우였다. 태자궁 뒷마당에 있는 사과나무에 첫 사과가 열리면 그날은 태자의 탄생일이 되었다.
사이가 멀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 첫 사과는 항상 주몽과 나눠 먹었다. 큰 의미는 없었다. 당시 매일 아침 북녘궁에 다녔는데 나눠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져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에겐 하나의 특별한 의식으로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소원에 나는 흔쾌히 약속을 해주었다.
“당연하지. 대신 꼭 우승해서 형님 기를 살려줘야 해?”
보지 않아도 주몽이 우승을 할 것은 나도 알고 아이도 알았다. 이미 확정이 되어버린 것과 다름없는 약속에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아, 그런데 해야.”
나는 말이 나온 김에 매번 고민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아이의 생일에 대한 문제였다.
“너는 생일이 언제였으면 좋겠어? 알이 태어난 날? 아니면 알에서 깨어난 날?”
“둘 중 하나를 꼭 골라야 하나요?”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하는 거지만, 네가 태어난 정확한 날을 찾기가 어려워서 고민이야. 매해 당일에 축하를 해주고 싶은데 매번 대중없이 날이 추워지면 생일로 삼고 있잖아.”
주몽은 그게 대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날짜 개념 없이 평생을 살아왔으니 의아해할 만도 했다.
나는 차근차근 내가 원하는 ‘정확한 날’이 무엇인지 설명을 해주었다. 영특한 아이는 첫 사과가 열리는 날이나 추워지기 시작하는 날이 매해 같은 간격을 두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을 이해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찾으려 하는 것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인 듯했다.
“꼭 매번 반복되는 날에 생일을 축하해야 하나요?”
“특별한 날은 한 해에 단 하루인데 그날이 아니면 무슨 소용이겠어…….”
아직은 더운 바람이 이마를 맴돌았다. 순간 잊어버린 날들이 떠올라 울컥하는 속을 달래야 했다. 여름이 되면 동생과 엄마의 생일선물을 고민하던 나는 이제 그날이 언제인지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 바람이 싸늘한 공기로 바뀌기 전까지 매일 죄책감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주몽은 순진한 눈망울로 대답했다.
“그날이 아니어도 축하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잖아요. 저는 제가 태어난 날에서 열흘이 지나도, 혹은 열닷새나 일러도 형님께서 축하를 해주신다면 언제든 기쁠 것 같습니다.”
“……막상 네 생일날은 내가 지나쳐 버려도?”
“그래도 저를 잊지 않아 주신 거니까…….”
그렇다면 그게 당장 내일이어도 행복할 거예요. 주몽이 작게 속삭였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때, 누가 봐도 아이의 생일은 내일이 아니었음에도 주몽은 정말로 기뻐 보였다.
감출 새도 없이 눈물이 고이더니 무릎 위로 툭툭 떨어졌다.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내 머리를 후려쳤다.
“혀, 형님. 울지 마세요. 제가 오늘부터 날짜를 세겠습니다.”
“아니야……. 네 말이 옳아. 날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데, 난 왜 거기에 집착을 하고…….”
정확한 날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게 어느 순간이든 내가 그들을 그리워하고 기억하며 분리된 세계에서도 축하하고 있다는 점이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당황한 아이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쩔쩔매는 얼굴이 흐려졌다 맑아지길 반복했다. 곧 조막만 한 손이 다가와 나를 다독였다. 그 어설픈 위로가 우스워 나는 작은 품에 고개를 처박고 눈물만 펑펑 흘렸다.
그날 밤, 나는 새로운 꿈을 꾸었다.
그 속에서 나는 끝나지 않는 길을 홀로 정처 없이 헤매지도,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걷지도 않았다. 다만 흰 꽃이 흐드러지게 핀 꽃밭에 앉아 커다란 케이크 두 판에 차례대로 촛불을 붙였다. 나는 조용히 노래를 부르다 다시 눈을 감았다.
날을 가늠할 수 없는 날씨였지만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곁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잊지 않아 줘서 고맙다며 끊임없이 속삭여서일까.
문득 그 목소리의 주인이 보고 싶었다.
“…….”
그러다 잠에서 깼을 때는 품 안에 작은 아이가 안겨 있었다. 나는 그 온기를 힘껏 끌어안고 다시 잠을 청했다.
이번에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이었다.
***
“정말이십니까? 정말 제가 아니라 그 애를 내보내시겠다고요?”
처음 주몽이 나갈 거란 말을 들은 가람이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나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참에 내쳤던 아이를 다시 받아들였다는 말까지 하자 가람이는 더더욱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작은 목울대를 여러 번 울리곤 울음기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형님께선 제가 못 미더우신 거지요. 더 어릴 때도 그 아이만 아끼셨잖습니까!”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가람이가 서운해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격렬한 반응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주몽과 눈만 마주쳐도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댔던 2년 전과 달리 점차 크면서 누그러지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자연스럽게 자기혐오로 이어지는 모습은 충격이기까지 했다. 나는 우선 아이를 안고 가장 큰 오해부터 바로잡아 주었다.
“가람아, 해를 더 아껴서 내보내는 것이 아니야. 다만 그 애가 꼭 해줘야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란다.”
“제가 할게요! 그게 무엇이든 제가 하겠습니다.”
“우승. 우승을 해야 해.”
“…….”
두 주먹을 옹골차게 쥐고 씨근거리던 숨이 점차 가라앉았다. 본인도 스스로 우승만큼은 할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어서 대꾸를 하는 말은 한풀 기세가 꺾여 있었다.
“그럼 제가 활을 잘 쏘는 다른 자들을 추천해드리겠습니다. 그 자식은 진짜……. 형님, 제가 아직도 어린아이인 줄 아십니까?”
나는 당과를 내밀었던 손을 머쓱하게 거뒀다. 가람이가 날 흘겨보더니 말과 다르게 내 손에서 당과를 가로채 갔다.
나는 아이가 오물거리며 먹는 동안 차분히 주몽의 활 실력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가람이는 고작 일곱 살짜리가 성인을 능가할 만한 실력을 가졌다는 것에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듯했지만 대놓고 내 말에 반박하지는 못했다. 대신 아이는 연신 투정을 부리며 내 결정을 돌리려 했다.
“형님, 내일 꼭 우승을 하셔야 합니까? 어차피 그 자식이 나가서 우승을 해도 형님 몫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형님은 그저 좋은 기회를 주고 그대로 내쳐지는 거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다른 무사를, 아니 저를 내보내셔서 우승을 하지 않도록 해요. 그럼 모든 게 완벽하지 않습니까?”
가람이는 궤변을 늘어놓는 내내 신이 나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벌써 홀로 만족감에 젖은 얼굴을 한 채였다.
반면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애매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주몽을 내보내는 이유에는 퀘스트도 한몫했지만 우승도 빼놓을 수 없었다. 내가 추천한 자의 성과는 곧 왕가의 위신과 직결된다. 그러나 가람이는 마 대사자가 그렇게 대놓고 말했음에도 속뜻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가람아.”
나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예전 같았으면 아이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어린 동생은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하게 지냈으면 했다. 그래서 우 대사자가 갑작스럽게 내 스승직을 그만뒀을 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고, 마 대사자가 내 호위 무사로 태령을 추천했을 때 가람의 스승이 되어주는 조건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가람이의 눈을 가리고 무작정 밝은 일면만 보여줘선 안 됐다. 그것이 왕비님과의 대화 후 깨달은 사실 중 하나였다.
내가 간신히 찾은, 해야 하는 일에는 퀘스트 수행 외에도 가람이가 훌륭한 왕이 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도 있었다. 태자라는 명목으로 내가 배워버린 제왕학을 아이에게 서서히 가르치고 능구렁이 같은 귀족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미리 알려줘야 했다. 내가 갑작스럽게 떠나도 가람이가 한 치의 부족함도 없는 왕이 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 내가 그나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람아. 저번에 마 대사자께서 하신 말 기억 나?”
나는 아이에게 찬찬히, 그러나 숨김없이 모든 걸 이야기해 주었다. 참가 전 저하의 추천을 받았다 밝히는 것이 그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아니며, 내가 왕권을 지키기 위해 물러설 수 없는 이유까지.
똑똑한 아이는 그 부분만 듣고도 덮어뒀던 다른 일들까지 모조리 알아챘다. 개중에는 나조차 듣고 잊어버렸던 귀족들의 모욕적인 언사도 많았다. 이윽고 아이의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더니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겁을 집어먹었나 싶어 서둘러 가람이를 달랬다.
“많이 놀랐어? 괜찮아. 내가 태자라 더 그렇지, 너한테까지 그러진 않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 떻게, 흑, 어떻게 걱정을 안 합니까! 형님께서 온전히 그 짐을 다 짊어지고 계셨는데!”
가람이는 울음 중간중간 소리를 지르며 내 목에 팔을 감았다.
그 순간 나는 묘한 기분이 들어 달래주던 손을 멈추었다. 방금 전만 해도 자신이 못 미덥냐며 떼를 쓰던 아이가 지금은 나를 걱정하며 울고 있었다. 언제나 뻔뻔하고 자신만 생각할 줄 알아서 더욱 사랑스러웠던 아이가 자신에 대한 걱정 따윈 한 톨도 하지 않으며 내 안위만 살핀다.
“울지 마. 정말 괜찮으니까…….”
똑똑한 아이이니 내가 오늘 알려준 것을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항상 예민하게 주변을 생각하고 행동거지 하나에도 책임이라는 무거운 추를 매달게 되겠지. 그 짐을 지게 만든 나는 죄책감에 양팔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팔을 들어 눈물만 쉼 없이 닦아주는 일뿐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괜찮아?”
아이는 간밤에 운 게 누구냐는 듯 팩하니 고개를 돌렸다. 실컷 울고 나서 아닌 척하는 것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나는 살살 웃으며 맞잡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드디어 궁술 대회 날 아침이 밝았다. 하늘에선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고 허공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무예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활을 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게다가 주몽에게 안겨 한바탕 울음을 쏟아낸 뒤로 밤마다 찾아들던 꿈들이 모조리 떠나갔다. 덕분에 며칠째 잠도 깊게 자서 그런지 머리도 맑았다.
우리는 궁인의 안내에 따라 미리 준비된 상석에 앉았다. 무술 대회는 예상과 달리 규모가 큰 대회였다. 왕까지 보러 왔다면 말 다 했지. 나는 옆을 차지한 거대한 의자를 힐끔대다 고개를 돌렸다. 궁술만 겨룰 것이라는 내 생각과 달리 대회는 검술, 기마술, 그리고 궁술 이렇게 세 가지 분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검술 대회였다. 넓은 공간에서 검술을 겨루는 무사들을 보고 있자니 시간은 금방금방 흘렀다. 애초에 나는 스포츠를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다.
“이번 판은 붉은 띠를 두른 무사가 우승할 겁니다.”
가람이는 자신이 잘 아는 분야가 나오자 신이 나서 경기의 승패를 점쳤다. 아이가 고른 무사는 많이 쳐줘야 십 대 중반일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몸집도 호리호리했는데, 반면에 상대는 우락부락한 덩치에 척 봐도 스무 살은 가뿐히 넘긴 듯했다.
“그래? 아직 어려 보이는데.”
“두고 보세요. 결승까지 올라갈 테니까요.”
가람이의 호언장담대로 붉은 띠를 보호 장구에 맨 무사는 가뿐하게 상대를 이겼다. 그는 그 뒤로도 막힘없이 승리를 거머쥐고 결승까지 올라갔다. 상대가 모두 건장한 청년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믿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내심 우승까지 바랐으나 아쉽게도 그는 2위에 그쳤다. 안타까워하는 내게 가람이는 그가 매년 준우승에 그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연무장에서 같이 수련했을 땐 실력이 남달라 놀랐는데 우승 운은 없나 봅니다.”
“그래도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준우승까지 하고 대단하네.”
“몇 년만 기다리세요, 제가 저 나이가 됐을 땐 꼭 우승을 안겨드릴게요!”
가람이는 나이에 비하면 실력은 제가 더 뛰어나다며 주먹을 불끈 쥐어댔다. 뛰어난 무사를 상대로 하는 질투가 귀여워 나는 흐뭇하게 웃어주었다. 아이가 정말이라며 외치는 동안 무도장에는 과녁들이 차례로 놓였다. 드디어 궁술 대회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호명에 맞춰 활을 든 무사들이 줄지어 나왔다. 주몽을 찾기 위해 수많은 얼굴들을 샅샅이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작달막한 아이는 태산처럼 큰 사내들 사이에서 한눈에 띄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뿐만이 아닌지 무도장을 가득 둘러싸고 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점차 수군거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곁눈질로 훔쳐본 마 대사자는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얼굴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 미소는 모든 참가자가 과녁 앞에 열을 맞추어 설수록 더더욱 진해졌다. 나는 불안 반, 기대 반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 다시 주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주몽은 긴장했는지 전에 본 적 없던 단단한 얼굴로 서 있었다. 손이라도 흔들어줄까 싶었지만 가람이가 워낙 형형한 낯으로 쳐다보고 있길래 그만두었다. 그러는 동안 제지하는 자가 없는 수군거림은 점차 커져만 갔다.
그러나 마 대사자는 몇몇 귀족들이 견디다 못해 엉덩이를 들썩이기 시작했을 때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쪽을 바라보고 허리를 깊게 숙이더니 큰 목소리로 왕께 고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신성한 궁술 대회를 진행하기 전에 미리 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저 아이는 태자 저하의 추천으로 친히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최연소 참가자인 만큼 전하께서도 각별히 지켜봐 주시길 간청드리옵니다.”
왕께 바치는 말이었지만 지나치게 컸던 그의 목소리는 무도장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그 즉시 모호한 의문만 담고 있었던 수군거림은 실체를 가지고 비난으로 바뀌어 소리를 키웠다. 여기저기서 ‘태자 저하께선 대체…….’, ‘저 어린아이를…….’, ‘이건 대회에 대한 모욕…….’ 따위의 말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더더욱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았다. 어차피 대회가 시작되고 나면 쏙 들어갈 소리들이었다. 가람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그 역시 내 눈총에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럼 대회를 시작하거라.”
다행히 왕은 별말 없이 대회를 진행시켰다. 귀족들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낯이었지만 대회 진행을 막진 않았다.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처음으로 활대를 잡은 무사는 꽤 괜찮은 수준의 성과를 냈다. 화살 두 대가 붉은 원의 가장자리에 꽂혔으나 대부분은 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이어서 활을 쏜 다른 무사들도 비슷했다. 거의 모두가 원 안에 화살을 맞히긴 했으나 개중에 몇몇만이 정중앙에 화살이 적중했다. 그마저도 다섯 대 중 한두 대는 빗맞기 마련이었다.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는 동안 어느새 절반의 무사가 모두 활을 쏘았다. 남은 이들 중 다음으로 나선 자는 주몽이었다.
“드디어 저 아이로군.”
아이가 앞으로 나서기가 무섭게 귀족들의 속닥거림이 다시 노골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충년(沖年, 열 살 안팎의 어린 나이)은 되었을까 모르겠소. 저하께선 대체 무슨 생각으로…….”
“듣자 하니 어린아이들을 싸고돌기 좋아하신다 하더이다. 분명 호기심에 조르는 것을 정에 이끌려 들어주신 것 아니겠소.”
퍽―
그 순간 화살이 폭력적인 소리를 내며 과녁에 박혔다. 잠시 굳어 있던 과녁 지기가 세차게 붉은 깃발을 휘둘렀다. 과녁의 정중앙을 표시하기 위해 검은 물감으로 찍어둔 점이 사라져 있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명중이었다.
주몽은 차분히 다음 화살을 집어 들었다. 다리를 알맞게 벌리고 곧게 든 팔꿈치가 교본에라도 나오는 것처럼 발랐다. 그 화살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첫 번째 화살 옆에 몸이 놓였다. 휘날리는 붉은 깃발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주변은 고요해져 있었다. 아이는 조금의 기다림도 없이 다시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허어!”
무사들 사이에서 경악에 찬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세 번째 화살은 첫 번째와 두 번째 화살의 틈을 가르고 그 사이에 박혔다. 동일한 위치에 계속해서 충격이 가해진 탓인지 단단한 나무로 된 과녁이 갈라지며 검은 틈을 드러냈다. 그 순간 어디선가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리나라에선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한다더니, 저게 주몽이 아니면 누가 주몽인가!”
내가 궁인을 시켜 미리 심어둔 바람잡이였다. 또 다른 바람잡이가 감동에 벅찬 목소리로 그 소리를 받아쳤다.
“그러게 말이오! 참말로 주몽이네, 주몽이야!”
띠링― 띠링―
[메인] 드러나는 존재 (2/2)
- 총 100명에게 ‘주몽’이라고 불리기 (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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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시스템 창이 차례로 쌓였다.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기 위해 팔걸이에 기대는 척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바람잡이가 제 역할을 잘 해내 준 덕분에 사람들은 이제 달라진 분위기에 휘감겨 수런거렸다. 여기저기서 ‘주몽’을 언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몽은 여전히 변함없는 태도로 네 번째 화살을 쏘고 있었다. 반복해서 화살들이 명중하자 사람들은 홀린 듯 새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내 앞에는 반투명한 창이 겹겹이 쌓여 하얀 배경을 만들어낼 정도였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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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성공에 가까워지는 것은 좋았지만 연이어 울리는 알림음에 귀가 다 멍멍했다. 결국 나는 시스템 창 구석에 위치한 작은 종 모양 아이콘을 찾아내 알림을 껐다. 그리고 더위를 쫓는 척 허공을 휘저어 창을 날렸다. 그제야 시야가 환하게 트였다.
그동안 다섯 대의 화살을 모두 쏘았는지 아이는 활을 내리고 있었다. 화살들은 직접 가서 꽂기라도 한 듯 모조리 과녁 한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더 볼 필요도 없이 명백한 주몽의 우승이었다.
홀로 뿌듯하게 웃으며 아이를 바라보는데 지금껏 아무 말 없이 경기를 구경하던 왕이 갑작스럽게 입을 뗐다.
“저 아이를 태자가 추천했다고 하였느냐?”
“예, 그렇사옵니다.”
왕은 감탄을 흘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대답을 올리는 마 대사자의 얼굴에는 처음 주몽을 보았을 때 지었던 웃음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솔직히 쌤통이었던 탓에 나는 아닌 척 그 모습을 힐끔거렸다.
그런데 왕에게 주몽의 활 솜씨가 생각보다 더 흥미롭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다른 무사들이 활을 쏘고 있음에도 그의 눈은 주몽과 아이의 과녁에서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딘지 붕 뜬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저리 대단한 아이는 어디서 발견하였느냐? 궁에 있는 어린아이라곤 몇 없을 텐데……. 왕자들 중 한 명이더냐?”
제 자식이냐고 묻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워서 말문이 막혔다. 데면데면한 내 태도 때문에 나에게만 부모의 역할을 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모든 자식들에게 똑같이 도리를 다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쩐지 불편한 기분에 나는 몸을 앞으로 당겨 왕의 시야로부터 가람의 의자를 가렸다. 그리고 나서야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아닙니다. 혹 유화 부인을 기억하십니까? 저 아이는 그녀의 아들입니다.”
“유화라 함은……. 아, 그때 그……. 벌써 저렇게 컸군. 그나저나 핏줄은 핏줄인 모양이야.”
껄껄 웃는 그의 눈이 불현듯 탐욕으로 빛났다. 그 웃음소리가 낮아질수록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팔걸이를 꽉 쥐어야 했다. 황공하게도 왕이 주몽을 욕심내기 시작했으나 마냥 기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왕의 관심이 전혀 달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왕이 주몽의 활 솜씨에 감탄을 표한 만큼 아이의 처우는 나아질 것이다. 무술 교육도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을 테고 북녘궁에 상주하는 궁인들도 생길지 몰랐다.
그러나 나중에 주몽이 부여를 배신하고 새 나라를 세우게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아이가 왕에게 충성이라도 하게 될까 봐 골치가 아팠다.
게다가 왕은 분명 갓 태어난 알을 깨뜨리려 하고, 그것이 실패하자 어미에게 돌려준다는 핑계 아래 방치한 자였다. 그러더니 재능을 확인한 이제 와서 신의 핏줄 운운하며 좋아하는 꼴이 가증스러웠다.
하지만 왕이 거두어 가르치겠다 하면 고작해야 어린 태자인 나는 막을 길이 없었다. 궁술 대회가 끝나갈수록 나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어서 기마 대회를 시작하도록 하여라.”
설상가상으로 왕은 모든 무사가 활을 다 쏘자마자 손짓을 하며 마 대사자를 재촉했다. 주몽을 제외한 다른 일에는 흥미도 없다는 태도였다.
“…….”
나는 고개를 돌려 분주하게 뒷정리를 시작하는 무도장을 내려다보았다. 한쪽에서 궁술 대회 참가자들의 뒤를 졸졸 쫓아가는 작은 머리통이 보였다.
기마 대회가 끝나면 바로 시상식이 시작된다. 왕이 상을 수여하며 사탕발림을 건네기 전에 짤막한 당부라도 해줄 틈은 오직 기마 대회가 진행될 때뿐이었다.
다행히 마침 나는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마저 살짝 빠져나가도 아무도 모를 만큼 존재감이 없었다. 나는 우선 무사들이 각자의 말을 끌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경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잠깐 주몽에게 들렀다 올 생각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은 몸을 일으켰을 때 일어났다.
“형님. 어딜 가십니까?”
“어? 아니…….”
경기에 집중하는 줄 알았던 가람이가 내가 슬그머니 엉덩이를 떼자마자 곧장 돌아본 것이었다. 태자궁 궁인들도 내가 사라지는 걸 알아채지 못하는 때가 대부분이었는데. 갑작스러운 변수에 당황한 나는 엉거주춤 일으킨 몸을 다시 주저앉혔다. 아이는 날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다 다시 무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
“……형님?”
그러나 눈치를 보다 시도한 두 번째 탈출마저 아이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다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느새 기마 대회는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이도 저도 못 한 채 시상식에서나 주몽을 만날 판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궁인들은 여전히 조금 전 두 번의 시도를 모르는 눈치였다. 역시 가람이만 잘 구슬리면 될 것 같았다. 나는 몸을 기울여 가람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림 이야기 두 권에 사흘 내내 같이 있어 줄게.”
“…….”
“물론 이야기는 내가 읽어줄 거야.”
격하게 흔들리던 가람의 눈이 질끈 감겼다. 탁자 아래로 늘어뜨린 작은 손이 결심이라도 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눈이 다시 뜨이기 전에 살금살금 의자를 벗어났다. 기척을 죽이고 단상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나는 땅을 밟자마자 위에서 봐두었던 길을 따라 대회장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안쪽으로 이동하면 눈에 띌 테니 인적이 드문 바깥쪽을 빙 둘러서 주몽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와 실제로 내려와 땅을 마주했을 때의 시야에는 차이가 있었다. 앉아 있을 당시 눈에 띄지 않았던 사각지대들은 생각보다 큰 존재감을 과시하며 내 방향감각을 무너뜨렸다.
“저기, 궁술 대회 참가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아느냐?”
결국 나는 주변 무사를 한 명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던 그는 내 부름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검술 대회에 참가했는지 아직까지 몸통에 보호 장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우연찮게도 붉은 끈이 매여 있는 보호 장구였다. 게다가 비록 고개는 숙이고 있었지만 투구를 벗고 있어 얼굴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자세를 낮춰 준우승자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거친 무사들에게선 보기 힘들 만큼 단정하게 생긴 사내, 아니 소년이었다. 내 예상대로 아직 십 대 중반에 불과한 것 같았다. 나는 그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다 광대뼈 쪽 피부가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련을 하다 생긴 상처가 창피해 고개를 숙이고 다닌 모양이지.
그 추측이 맞는지 그는 여전히 내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고 손짓으로 길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친절하게 설명도 덧붙여주었다.
“이쪽으로 쭉 가셔서 왼쪽으로 꺾으시면 대기실 입구가 나옵니다. 아마 앞에 다 쓴 화살들이 가득 쌓여 있을 테니 어디가 궁병 대기실인지 알아채기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띠링― 그 순간 지독하게 들었던 익숙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나는 느닷없는 상황에 잠시 굳어서 무사를 바라보았다. 꺼두었던 알림창의 알림이 다시 켜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건 지금…….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니. 없어. 고마워.”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대답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머뭇거리던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반대편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붙잡기 위해 팔을 올렸지만 곧 다시 천천히 내릴 수밖에 없었다. 기마 대회가 끝날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은 주몽을 만나 언질을 주는 일이 우선이었다. 나는 일단 그에 대한 생각을 뒤로 미룬 채 대기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형님!”
다행히 나는 대기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주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는 입구 밖에 나와 활을 매만지고 있었다. 반갑게 부르는 목소리에 맞춰 곁에 다가가자마자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아이가 아직 너무 어려서 그런 건지, 혹은 범접할 수 없는 실력에 질린 것인지 주몽은 궁병들 사이에서 겉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우선 아이의 손을 잡고 인적이 드문 바깥쪽으로 이끌었다. 이 정도면 엿듣는 사람이 없겠다 싶을 정도가 되자 곧장 자세를 낮추고 아이의 눈을 마주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해야. 잘 들어. 전하께서 네게 흥미를 보이고 계셔.”
“전하께서요?”
“그래. 이런 말은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전하가 하시는 모든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아줘.”
왕을 경계하고 의심해라.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게 다였다. 복잡하게 얽힌 사정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고, 납득시킬 마음도 없었다. 나는 간절함을 담아 아이의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주몽은 그런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형님께서 하신 말씀만 믿습니다.”
이어진 말은 기특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궁에서 자란 아이라 왕을 믿지 말라는 말이 아이의 짧은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는 말이었을 텐데, 날 더 믿고 따른다는 대답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는 고마움을 듬뿍 담아 아이를 꼭 껴안아 준 뒤 서둘러 돌아가는 길목으로 나왔다. 주몽은 금세 돌아가야 하는 내 입장을 이해한 듯 나를 붙잡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기마 대회가 끝나기 전에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가람이는 내가 간 곳을 내려다봤는지 불퉁한 얼굴이었지만 말을 더 얹진 않았다. 대신 “형님,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하며 재차 확답을 요구했다. 나는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여 주었다.
시상식까지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갔다. 기마 대회는 애저녁에 끝났지만 폐회식의 식순이 어마무시하게 길었다. 대회가 끝나자마자 상을 주고 끝날 것이라는 내 생각은 착각이었던 것이다. 나는 연설을 하는 마 대사자를 바라보다 가람이와 다과를 바꿔먹었다.
다과상이 세 번은 바뀌고 궁인이 눈치를 주기 시작해서야 비로소 검술 대회 우승자의 시상이 시작되었다. 준우승까지는 나름 총사령관인 마 대사자가 상을 내렸지만 우승자는 왕이 직접 우승을 치하했다.
듣자 하니 이번 검술 대회 우승자는 아마도 왕의 직속 무사로 진급할 모양이었다. 우승자가 감읍하여 땅에서 이마를 떼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미리 주몽을 만나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반복했다.
“다음! 궁술 대회 우승자는 앞으로 나오시오.”
천천히 걸어 나온 주몽이 궁인의 손에 떠밀려 흙바닥에서 절을 올렸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초조하게 왕을 흘깃거렸다. 이전까지는 무심하다 못해 귀찮기까지 한 표정이었던 왕이 기대고 있던 등받이에서 상체를 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의 인사치레가 끝나자마자 왕은 다정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말을 건넸다.
“네 활 솜씨는 잘 보았다. 하늘에서 내려준 귀인이 따로 없더구나. 그런데 아직까지 좋은 무예 스승 하나 없는 것이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최고의 스승들로만 붙여줄 테니 어디 그 실력을 더욱 갈고닦아 보지 않겠느냐?”
왕자들의 교육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왕이 직접 나서서 스승을 붙여주겠다는 말에 좌중이 술렁거렸다. 방금 전 이야기는 왕의 최측근으로 키우겠다고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봤을 최고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몸을 엎드린 상태에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공하옵니다. 그러나 소인은 그런 과분한 상을 받을 재목이 되지 못합니다. 부디 상을 거두어주시옵소서.”
“감히!”
무사 중 한 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왕이 한 손을 들어 그를 물렸다. 그러나 웅성대는 주변 귀족들과 무사들까지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아직 어려 저 말이 갖는 무게감을 모른다는 둥 안타까움의 탈을 뒤집어쓴 비난이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아이의 태도는 확고했다.
결국 재차 권하기를 포기한 왕은 마지막 다정함을 끌어모아 다시 말을 건넸다.
“그럼 혹 따로 원하는 것이라도 있느냐? 우승을 하였으니 마땅히 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제가 원하는 것은 모두 태자 저하께서 약속해주셨사옵니다. 제가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저하의 은혜 덕분이니 허락해주신다면 그 상을 저하께 바치고 싶사옵니다.”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이가 자라는 데 내 도움이 전혀 없었다곤 말하지 못하겠지만 주몽이 행한 모든 일의 보상은 그의 몫이 되어야 마땅했다. 이렇게 아이가 자신의 공을 나에게로 돌리는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였다. 그러나 내가 사양의 말을 내뱉기도 전에 주몽과의 공방에 지친 왕이 먼저 선수를 쳤다.
“허허, 맹랑한 놈이로구나. 하지만 저 어린 나이에 은덕을 아는 모습이 기특하도다. 그래, 저 아이의 말대로 이번 상은 태자가 원하는 것으로 내리도록 하마.”
그 말에 시상을 지켜보던 모든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귀족들은 행여 내가 또 거슬리는 제안을 할까 봐 눈을 세모꼴로 떴다. 무사들은 무예에 관심도 없던 태자가 대체 뭘 바랄까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정작 나는 줄지어 서 있는 무사들을 구석구석 헤집어보았다. 순간 머릿속에 번뜩인 생각이 있어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 고개를 푹 숙인 머리꼭지 하나를 발견해냈다. 거기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 검술 대회의 준우승자, 오이를 제 호위 무사로 임명해 주십시오.”
번쩍, 고개가 들리고 희고 단정한 얼굴이 드디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온전히 마주한 그는 아까 훔쳐본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잘생긴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피하지 않고 생긋 웃어주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눈동자가 격하게 떨리더니 곧 다시 아래로 푹 가라앉았다.
“형님! 근본도 모르는 무사를 호위 무사로 들이다니요!”
옆에선 가람이가 때와 장소도 잊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진정도 시킬 겸 손을 한 번 휘저었다.
[힌트]
축하합니다! 당신은 ‘주몽’의 벗이 될 세 사람 중 ‘오이’를 만났습니다.
줄곧 시야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반투명한 창이 그제야 모습을 감췄다. 믿지 못해 몇 번이고 바라보느라 여태 치우지 못한 창이었다.
드디어 맑게 갠 시야에 크게 놀란 채로 굳어버린 주몽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얻어걸린 떡에 정신이 팔려 아이의 불손한 눈빛까진 눈치채지 못했다.
이 일을 향후 몇 년은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라고 당시의 나는 까맣게 몰랐다. 그랬더라면 분명 다른 방도를 생각해 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