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연정기 2권
목차
6.
7.
8. 오이의 보고 일지
9. (1)
6.
앞 들판에 흰 꽃이 폈다.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태자궁을 나섰다. 날이 부쩍 더워지고 꿈자리가 사납다 싶더니 정말 여름이 다가온 모양이었다.
봄날이 갈 동안 나는 주몽의 활 솜씨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태령의 귀에 그 이야기가 다시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퀘스트를 완료하기 위해서는 널리 널리 소문을 퍼뜨려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호위 무사 특성상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붙어 있는 그를 따돌리고 주몽의 칭찬을 하기란 불가능했다.
애초에 마음 놓고 칭찬을 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지만.
그러다 보니 요새 퀘스트를 위해서라도 다시 관계를 회복시켜야 하는지 고민이 들었다. 주몽이라면 당연히 좋아할 게 분명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쉽게 납득할까? 그래도 2년 남짓을 모른 척했던 아이인데 아무런 계기도 없이 하루아침에 돌변하면 태자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 것 같았다. 아무리 평판을 신경쓰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좀 그렇지 않나 싶었다.
“태자 저하께서 드십니다.”
회의가 이루어지는 궁에는 미리 온 귀족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가 오간 뒤 그들은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처럼 조용히 자리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회의 직전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일상적인 내용이 많아 주변 소식을 얻거나 사람을 파악하기에 용이했다.
“이번에 마 사자의 둘째 아들이 변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쯧쯧. 안타깝게 되었소.”
“젊은 나이에 갔다지. 덕분에 자식도 여아 하나밖에 보지 못한 모양이오.”
오늘은 아들을 잃은 마 사자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대사자보단 한 단계 낮은 직급이었지만 꽤 높은 귀족답게 그 집안의 변고는 여러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재산은 어찌할 생각인지. 내어준 가축이 제법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오.”
“다행히 그 집에 삼남이 있다고 하더군. 한시름 덜었겠소.”
나는 붓 따위를 매만지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삼남이 튀어나오는 대화 흐름에 이질감이 들었다. 뭔가가 떠오를 듯, 말 듯 머릿속을 맴돌았다. 불행히도 나는 다음에 이어진 말에서 곧바로 그 정체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렇군. 그와 재혼을 시키면 되겠소. 더욱이 아직 손자를 보지 못했다고 하니 삼남과 하나 낳아주면 금상첨화겠구려!”
형사취수제. 가물가물한 역사 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났다. 부여에 대해 설명하던 교과서 귀퉁이에는 독특한 관습이라며 ‘형사취수제’가 적혀 있었다. 재산을 지키기 위한 방법 중 한 가지였던 시동생과의 재혼.
귀족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부인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남편을 잃은 것도 슬플 텐데 시동생과 재혼을 해야 한다니. 심지어 아이를 낳는다는 소리까지 오가는 것을 보아 단순 형식상의 결혼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취지는 이해했지만, 마치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저 태도에 나는 여전히 거부감이 들고 익숙해지지 않았다.
“…….”
하지만 이번 일은 이 자리에서 함부로 말을 얹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끔찍할 것이라는 건 귀족들의 대화를 바탕으로 한 내 짐작일 뿐 실상은 다를지도 몰랐다. 이 제도가 시행된 배경에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고, 무작정 내가 거부감이 든다는 이유만으로 주장하기엔 형사취수제는 뿌리 깊은 전통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내 마지노선을 가늠하기엔 더 적절하지 않을까?
순간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다. 나는 여전히 슬금슬금 민감한 주제에 발을 들이밀며 신성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내가 그들에게 중요한 전통까지 건드리려 한다면?
문득 회의에 참석하며 계속해서 고민했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과연 내가 품은 ‘신성함’은 나의 정치적 참견을 어디까지 용인해 줄 수 있을까?
나는 본능적으로 이번 제의가 그 한계선을 결정지으리란 것을 느꼈다. 동시에 어쩌면 뭔가를 변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리석게도 그 언젠가 나를 향했던 여러 조언들은 까맣게 잊은 채였다.
***
내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기 전, 짧은 틈에서였다.
“형사취수제 말입니다. 사별한 여인에게 혼인 선택권을 주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허허. 제가 늙으니 가는 귀도 먹었나 봅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여인에게 혼인 선택권을 주자고 말했습니다.”
나의 직설적인 발언에 인자하게 웃던 귀족들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갔다. 그중 가장 크게 반응을 하고 나선 이는 마 대사자였다. 그는 아직 어린 내가 철없는 소리를 한다고 여겼는지 간신히 미소를 걸친 얼굴로 나를 가르쳤다.
“아직 어리신 태자 저하께선 그 제도가 생긴 배경을 모르시나 봅니다. 형사취수제는 여인이 함부로 재혼을 하여 가문의 재산이 밖으로 나도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입니다. 또한 갈 곳을 잃은 부인을 가문에서 계속 보호한다는 의미도 있지요. 여인에게도 잃을 것 하나 없는, 꼭 필요한 제도라는 말입니다.”
“정말 득이 되는 제도라면 여인에게 선택권을 주어도 그 집안과 재혼을 하겠군요. 문제 될 것이 없겠습니다.”
나는 태연하게 이미 생각해 두었던 반박을 꺼내 들었다. 마 대사자는 이제 딱딱한 무관의 얼굴이 되어 나를 윽박질렀다.
“재산이 섞이고 과부가 보호받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
“그럼 재혼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선택권을 주도록 하지요. 그럼 재산도 오직 그 부인만 사용할 테니 밖으로 나돌지도 않고, 부인 또한 생활력을 갖출 수 있게 되는 게 아닙니까. 어떻습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모습에 마 대사자가 책상을 쾅 내리쳤다. 덩달아 여기저기서 각종 문방사우를 들썩이며 귀족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사실 단번에 이 제안이 통과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 제도가 나타난 배경과 더불어 뿌리 깊게 존재하는 그들의 사상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선 지나가는 투로 이야기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안건이 넘어가는 짧은 틈에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나 반복되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가볍게 넘어가려던 나도 화가 났다. 귀족들은 내 의견을 들어보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 의도가 너무도 명백히 보여 나는 그만 멈출 때를 찾지 못하고 논쟁을 이어가고 말았다.
“대체 왜 고민도 않고 반대하시는 겁니까? 필수가 아니라 선택권이라 말했습니다. 혼인 당시 자신을 잘 대우해줬고 남편의 아우와 연을 맺는 것이 정말 가족의 안위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게 느껴지면 여인들도 그와 재혼을 하겠지요.”
만약 나가려 한다 해도 본인의 행복을 위해서니까 축복을 빌어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은 꾹 참았다. 솔직한 심정으론 재산 챙겨줘도 모자랄 판에 악착같이 거두려만 한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럼 이런 법은 어떻습니까? 그 가문과 재혼을 진행하되 부인이 원하면 언제든지 재산 싸 들고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지요.”
“……저하께선 언제나 놀라운 면모만 보여주시는군요. 정말 이 늙은이의 좁은 식견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빈정거리듯 튀어나온 말에 마 대사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이전까지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던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분노의 흔적은 검은 눈 깊은 곳에서만 일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마주친 눈을 떼지 못한 채 그만 머뭇거리고 말았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왕이 무거운 입을 떼었다.
“그만. 의미 없는 논쟁은 여기서 멈추도록 하지. 기강을 어지럽힌 죄로 태자는 삼십 일간 회의 참석을 금한다.”
그의 손짓에 무관 두어 명이 다가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끌려가듯 걸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귀족들은 제각기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호의적인 기색은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마주친 마 대사자의 눈을 마지막으로 회의장 밖으로 쫓겨났다. 그들은 내 팔을 놓고 정중히 인사하더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온몸에 감기는 공기가 끈적하고 더웠다. 나는 천천히 걸어 태자궁으로 돌아왔다. 한 바퀴 소문이 돌았는지 궁인들은 한결 조심스럽게 나를 대했다. 그들을 모두 물리고 홀로 남아 내 두 발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노선. 그토록 원했던 경계를 찾았음에도 어째서인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내가 밟은 곳은 금 바깥쪽이었을까. 손바닥 뒤집듯 바뀌던 태도에 가늠이 잘 가지 않았다.
식사를 거부하고 생각에 잠긴 사이 밤이 다가왔다. 요새 반복된 꿈에 잠들고 싶지 않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온갖 잡념이 뒤섞여 머릿속을 떠돌다 천천히 나를 잡아먹었다.
그곳에서 나는 또다시 익숙한 길 위에 서 있었다. 이정표도 없는 이 길 위에서 나는 한없이 가족들을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오늘도 정처 없이 걷는 내 손을 누군가 감싸 쥐었다. 그 단단한 손에 붙잡혀 천천히 걸었다. 어쩐지 이 손이 나를 그리운 얼굴들에게로 데려다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안도에 가득 차 여전히 끝없는 길을 같이 걸었다.
깨어났을 땐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두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항상 눈물로 푹 젖어 있곤 했던 얼굴이 물기 하나 없이 보송했다. 나는 멍한 얼굴로 비쳐 들어오는 햇살을 보았다.
날짜를 잊은 그 밤 이후, 여름이 되고 처음 겪는 일이었다.
***
환하던 보름달이 저 아래로 지고 있었다.
큰 나무에 기대선 태령은 스러지는 달빛과 동시에 밝아오는 하늘을 보다 고개를 내렸다. 태자의 침소에서는 작달막한 꼬맹이가 나오고 있었다. 그 몸짓을 눈으로 좇던 그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아이는 태연하게 걸어오더니 고갯짓으로도 인사를 하지 않고 그대로 그를 지나쳤다.
“…….”
평소 성질머리 같아선 뒷덜미를 확 잡아채다 단단히 교육을 시켰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것은 겨울의 끝 무렵, 그날의 잔상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태령은 작아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바로 세웠다. 일부러 아이가 왔던 길을 그대로 밟고 침소에 들어섰다. 궁인이 부드럽게 열어주는 마지막 문까지 통과하고 나자 둥그런 이불 더미와 그 옆에 놓인 비단 방석 하나가 보였다. 그는 누군가가 앉았을 게 분명한 비단 방석을 발로 툭 차서 치우곤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주몽이라는 어린놈이 이곳에 다녀간 지도 벌써 여드레째였다. 아이는 밤마다 이곳에 앉아 태자의 손을 붙잡고 그 곁을 지켰다.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 것은 태자의 유모 출신이라는 궁인이었다. 주몽이 태자궁에 발을 들인 첫 밤, 태령은 그녀의 판단에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절대 새어 나가선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때 주몽을 데려와서 어쩌겠다는 건가 싶었다. 그녀가 아이를 침실로 밀어 넣었을 땐 분노마저 일었다.
그러나 주몽이 이불 옆에 앉아 태자의 손을 잡자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안쓰러울 정도로 몸을 말고 인상을 쓴 채 잠든 태자는 서서히 몸에 힘을 풀기 시작했다. 표정이 편안해지고 긴장이 풀리는 것이 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기적과도 같은 모습에 태령과 모든 궁인들은 할 말을 잃었다. 차이라곤 그녀들은 손을 모아쥐고 기쁨의 탄성을 흘렸지만 그는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원인 모를 불쾌감을 참기 위해 주먹을 쥐어야 했다는 것뿐이었다.
궁인들은 주몽이 손을 붙잡고 있는 동안 재빠르게 태자의 사지를 펴고 이불자락을 정리해 주었다. 한참을 지켜봤지만 아이의 팔다리는 계속해서 편안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동안은 아무리 애써도 다시 웅크렸던 몸이었다. 놀란 그녀들은 서로 속닥거렸다.
“참말로 이런 일이…….”
“쉿.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네.”
태령은 잔뜩 굳어서 태자를 지켜보는 그녀들을 보다 방 밖으로 나와 버렸다. 가만히 있어도 더운 밤에 붙어 있는 두 아이를 보자 더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대신 그는 침실 문 밖에 앉아 별을 셌다. 문이 열리면 단박에 알아챌 수 있도록 신경을 가득 쏟은 채로.
그러나 날이 새도록 닫힌 문이 다시 열리는 일은 없었다.
그제야 그는 태자의 유모가 옳았음을 인정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녀가 쥐고 온 작은 손은 생각보다 꽤 쓸모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점이 그의 기분을 가장 더럽혔다.
하지만 이 일에 있어 태령의 기분은 전혀 중요치 않았으므로 주몽은 매일 밤 태자궁을 드나들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로 태자궁은 벌써 여드레째 진정한 여름밤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태령의 기분이 나아지는 일은 없었다.
태령은 둥글게 말린 이불 더미를 바라보다 그 끝을 살짝 들추었다. 주몽이 나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잠든 태자가 보였다.
그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비밀을 알게 되었던 작년 여름날을 떠올렸다.
그날은 눈에 띄게 덥던 날이었다. 햇볕이 따가운 오후, 늘어지게 누워 부채질을 하던 태령에게 태자의 유모가 다가왔다.
그는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태자도 별궁에 가 없는 지금 그의 유모가 자신에게 다가올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외람되지만 오늘부터 낙엽이 지기 전까지 밤마다 태자 저하의 처소를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난데없는 부탁에 태령은 이마를 찡그렸다. 그가 호위 무사로 지내며 살펴본 태자의 일상은 평화 그 자체였다. 아이 자체가 조금 독특하긴 했지만 주변은 별문제가 없었다.
비록 낮에만 근무했지만 밤이라고 무어가 다를까. 그는 고민도 않고 궁인의 청을 거절했다.
“거의 일 년을 지켜보았지만 태자 저하께 위협을 가하는 자는 없었다. 밤이라고 굳이 다를 것 같진 않군. 낮에 있기도 좀이 쑤시는데 밤까지 내가 궁에 남아 있어야 하겠느냐?”
“태자 저하께서 습격을 당하신 것은 작년 여름날 밤이었습니다. 올해 여름밤도 안심할 수 없으니 한 계절만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궁인은 물러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를 설득하는 말을 듣던 태령은 날카롭게 되물었다.
“왜 하필이면 여름이지? 밤이라는 시간대도 아니고 계절을 특정 짓는 것이 일반적이라 보긴 어렵군.”
“……그것은 오늘 밤 저하의 곁을 지키신다면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태령은 호기심이 넘치는 사내였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흐릿하게 맺은 말은 그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기꺼이 하룻밤을 희생하기로 했다.
그러나 풀벌레와 함께하는 여름밤은 길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괜히 하겠다고 했나…….”
머지않아 싫증이 난 태령은 그대로 누워 지금쯤이면 만나고 있었을 여인들을 떠올렸다. 젊고 매력적인 그는 쉬는 날 없이 바쁘게 밤을 보내기 일쑤였다. 한 바퀴 유흥가를 돈 생각의 꼬리는 궐 내 궁인들에게까지 미쳤다. 수라간 그 아이도 참 괜찮았었지.
그러나 그마저도 지루해진 그는 설렁설렁 부치던 부채마저도 내던져 버렸다. 태자궁은 자객이 습격하기는녕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역시, 그 궁인의 말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태령은 자책을 하며 몸을 한 바퀴 뒤집었다. 섬뜩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드르륵―
태령은 뒷목을 빳빳하게 굳혔다. 태자의 침실 문이 저절로 열리고 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궁인을 보았으나 그녀는 문에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있었다. 문틈으로 태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태령은 그대로 칼을 뽑아 들었을지도 몰랐다.
문은 태자가 스스로 연 모양이었다. 아이는 비틀거리며 두어 걸음 걷더니 이윽고 방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앞을 지키던 궁인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지만 아이를 말리진 않았다. 대신 야밤의 기행에 놀란 태령이 단숨에 벌떡 일어섰다.
“태자 저하!”
태령은 속삭이듯 낮게 소리치며 태자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인형처럼 휘청거리는 아이는 작게 뜬 눈만 빼면 마치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무식하게 옥죄인 팔이 아프지도 않은지 아이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소름 끼치는 모습에 그는 반사적으로 팔을 놓았다.
태자는 다시 멍한 얼굴로 태자궁을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두 눈에는 생기가 없었고 입은 작게 달싹거렸지만 흘러나오는 말을 알아들을 순 없었다. 궁인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이 아이를 따라다녔다. 그가 마당에 내려설 때면 때를 맞춰 신을 신겼으며 모퉁이를 돌 때는 팔꿈치를 부드럽게 잡아 보행을 도왔다.
태령은 태자만큼이나 멍한 상태가 되어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달이 완전히 기울자 태자는 스스로 침소로 돌아가 누웠다. 웅크리고 누운 그의 위로 궁인은 조용히 이불을 덮어 주었다. 태령은 여전히 넋 빠진 상태가 되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방 밖으로 나온 궁인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태자 저하께선 여름밤이면 매번 삿된 것에 혼을 빼앗기십니다.”
“…그게 참말이냐?”
궁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일을 겪은 지는 꽤 되었습니다. 저희로서도 이걸 말씀드리는 건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모두 저하의 안전을 위해서이니 모쪼록 이 일이 새어 나가지 않게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궁인이 흙바닥에서 절을 올렸다.
“하…….”
여름밤마다 자신을 잃고 궁을 배회하는 태자라니. 태령은 하룻밤 사이에 알게 된 비밀의 깊이에 이를 꽉 악물었다.
지난해, 태자가 습격을 당한 경위를 지나가는 말로 들은 적이 있었다. 자객이 태자를 둘러업고 나와 마당에서 찔렀다고 했나. 업혀 나올 동안 반항하지 않은 태자도, 굳이 마당에서 찌른 자객도 모두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관심이 없어 금방 잊었던 주제였지만 지금만큼은 그 말이 생생했다.
업혀 나올 동안 반항을 하지 않았던 것도, 굳이 마당으로 끌고 나와 찌른 것도 아니었다. 귀신에 씌었던 태자가 스스로 걸어 나온 것이며 운 좋은 자객이 그 자리에서 칼을 휘두른 것이었다.
태자궁 궁인이 소문날 위험을 무릅쓰고 태령에게 도움을 청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무방비하게 배회하는 태자는 방 안에서 얌전히 잠든 것보다 천 배는 더 위험했다. 이미 당한 적이 있으니 이번 여름을 그냥 나기엔 불안했으리라.
태령은 조금 전 발소리도 내지 않고 걷던 태자를 떠올렸다. 지켜보고 있음에도 아이는 어째서인지 금세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을 풍겼다. 외롭고 쓸쓸해 보이던 등과 이따금씩 두리번거리던 작은 얼굴. 그 모습을 되감던 태령은 궁인에게 조용히 손짓했다.
그 해, 짙게 물든 나뭇잎이 떨어질 때까지 그는 풀벌레와 기나긴 밤을 보냈다.
“그걸 생각하면 이건 분명 좋은 일이어야 하는데 말이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태령은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손을 살짝 쥐어보았다. 그러나 한참을 있어도 아이의 표정이 편안하게 변하는 일은 없었다. 어쩐지 기분이 가라앉아 그는 잡고 있던 손과 함께 이불을 홱 놓았다. 때아닌 이불자락에 얻어맞은 태자가 신음 소리를 내더니 이불을 걷고 눈을 떴다.
“우움……. 뭐야.”
아무것도 모르는 태자의 얼굴은 말갛게 개어 있었다. 아, 그래. 주몽이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아침마다 두 뺨이 눈물로 젖은 것을 모른 척해줘야 했던 일도 사라졌다. 어쩐지 심술이 난 태령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긴 뭡니까. 이 시간에 저 말고 또 여기 있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정을 아는 자에겐 속이 뻔히 보이는 심술이었다. 그러나 내막을 모르는 아이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게 밤까지 호위 설 필요 없다니까.”
“한창 더울 때만 반짝 야간 경계 서는 것인데요, 뭐. 작년에도 이맘때쯤 밤샘 호위를 했는데 매번 그러십니다.”
“미안하니까 그렇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사과에 태령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사과를 쉽게 입에 담는 것은 처음 본 그날부터 이상하기 짝이 없던 제 윗사람의 남다른 특징 중 하나였다. 밀려오는 당황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그는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다.
“별로 힘들지도 않습니다. 제 육체는 모든 밤일에 탁월하거든요.”
“진짜 새벽부터…….”
태자가 진저리를 치며 궁인이 떠온 세숫물로 귀를 팍팍 씻었다.
태령은 튀는 물을 피하는 척 뒤로 물러나며 태자의 안색을 살폈다. 최근 한바탕 궐이 뒤집힌 다음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을 일으킨 주인공은 생각보다 안색이 괜찮아 보였다.
저것 또한 건방진 꼬맹이 덕분이라고 생각하면 배알이 뒤틀리지만. 하필이면 아이가 드나들기 시작한 날과 일이 터졌던 회의 날이 겹쳐서 진위를 판가름할 수가 없었다.
사실 태령은 태자가 벌인 일로 인해 난감한 위치에 서 있었다.
심성이 남다르게 곱고 생각이 이상하게 올곧다 싶더니 한 번쯤 사고를 칠 줄 알았지. 더 어릴 때도 우 대사자를 건드려 곤란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이번엔 마 대사자라니.
이렇게 상대가 매번 좋지 않은 것도 재주였다. 그때 태자가 영민한 것치곤 아무것도 깨달은 바가 없었던 것 같다는 게 진실인 모양이었다.
그는 태자가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찾아왔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산불과 관련된 일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도 태령은 길길이 날뛰며 태자를 처리하겠다는 아버지를 말리느라 꽤 고생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하위 귀족에게 권력을 실어주는 수준의 발언이 아니었다.
“쯧. 수틀린 우리 아버지는 말리기가 힘든데.”
태령은 마 대사자가 들었으면 버릇없다며 뒷목을 잡았을 평가를 내리며 별궁 담을 거닐었다. 그는 지금 태자를 별궁에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중간에 별궁 궁인 미향이와 살짝 만남을 가지느라 돌아가는 길이 조금 늦어졌지만 어차피 당분간 자신을 찾을 사람도 없었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다 무심코 담 너머를 보았다.
“어?”
우연찮게도 그곳에 태자와 협보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이 떠난 줄 알고 별궁 툇마루로 나온 모양이었다.
태자는 나름대로 태령이 모르게 하겠다고 협보를 별궁으로 부르는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집안에서 알 사람은 다 알았다. 다만 서자가 주제도 모르고 날뛴다며 구설수에 오르는 게 싫어 입단속을 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순수한 건지 멍청한 건지. 가끔 태령은 태자가 정말 협보를 몰래 부르는 것만으로 자신의 눈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지금껏 태령은 봐주고 있었을 뿐이었다. 기본적으로 태령은 태자를 싫어하지 않았다. 아이는 종종 ‘거슬리는’ 발언을 했지만 똥개도 끌어안고 가려는 그 심성을 생각하면 영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머리가 조금 크고 나면 저 착한 심성도 봄날 눈 녹듯 사라지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한편으론 아쉬워하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었다. 천한 것들을 신경 쓰는 태도야말로 어린 태자가 아직 환상에 빠져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니 이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었다. 어차피 저 천한 놈은 자신과 달리 태자 곁을 그저 스쳐 갈 잡놈에 불과했으니.
그런 생각을 하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아마도 바람결에 자신의 이야기가 흘러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대로 자리를 떴으리라.
“태령 형님께선 왜 제가 저하를 만나는 걸 싫어하실까요? 제가 잘되면 가문에도 도움이 되는 건데…….”
듣자 하니 고민 상담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서자가 아무리 뛰어나봤자 서자였다. 그가 하는 일은 아무리 잘된다 하더라도 가문에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었다. 협보가 진정으로 가문과 태자를 위했더라면 말동무 따위 싹싹 빌어 거절하고 대문 밖으로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저도 인정을 받고 싶은데. 역시 신분이 문제일까요?”
어리석기는. 담에 기대서서 협보의 이야기를 듣던 태령은 코웃음을 쳤다. 사실 신분은 그가 협보를 미워하는 데 있어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바람이 나 낳은 자식을 어느 누가 좋아하겠느냐만, 그런 식으로 배다른 형제가 여럿이니 특별히 미워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더니 굴복시키고 꿇어앉히고 짓밟고 싶었다. 이유는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뭐, 서자 따위를 미워하는 데 이유가 필요할까. 다만 그는 협보의 징징거림보다 태자의 반응이 더 궁금했다. 심성 고운 태자 저하답게 아이에게 곧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헛바람을 불어넣어 주시겠지만.
그러나 태령은 들려온 태자의 대답을 듣고 온몸을 굳혀야 했다.
“그보단, 근본적으로… 질투심 때문이지.”
협보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묻는 것이 들렸다.
“질투, 말씀이십니까? 그건 여인들이나 하는 게 아닙니까.”
“누가 그러던? 질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거야. 마태령도 예외는 아니지. 그 강한 자존심이 어디 갈까. 나이도 어리고 신분도 미천한 네가 감히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겠지.”
“믿기지가 않습니다. 형님 같은 분이 어째서 저같이 별 볼 일 없는 애를…….”
“원래 사람은 종종 본인도 모르게 자신이 동경하는 걸 미워해. 끔찍이도 싫어하던 사람을 뜯어보면 사실은 내가 되고 싶은 모습들로 가득 차 있는 경우도 많을걸? 특히나 나와 동일 선상에 놓여 있거나 나보다 못났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런 면모를 가지고 있을수록 흠모 대신 경멸을 하기 쉬워.”
머뭇거림도 없이 담담하게 이어진 말은 태령의 귀로 들어와 머릿속을 후려쳤다.
“걔는 그저 널 부러워하는 거야. 다만 질투도 심하면 추하다는 걸 자기만 모르지. 그런 놈들은 그냥 무시해.”
사람은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정곡을 찔렸을 때 가장 심하게 분노한다. 본인도 알지 못했던 밑바닥이 들추어졌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창피함을 깨닫기도 전에 분노로 치환시키는 것이다. 자아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태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순식간에 머릿속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의식할 새도 없이 열린 입으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엿듣게 된 태자의 진심은 그의 이성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나한텐 너나 걔나 똑같단 소리야. 우리 괜히 힘 빼지 말자.’
‘마태령. 여기서 정말 천한 티를 내고 있는 게 누구라고 생각해?’
그 언젠가 태자가 했던 말들이 다시금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땐 심성 고운 아이가 욱해서 내뱉은 말인 줄 알았다. 어차피 사라질 인연들이었으니 곁에 남아 있을 자신이 봐주는 거라며 여유도 부렸었다. 그러나 아이는 정말로 자신을 ‘천한 것’들보다 낮은 급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삽시간에 모멸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너는 장차 크게 될 사람이야. 스스로를 낮추지 마.”
담 너머로 협보를 달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령은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담벼락에서 몸을 떼어냈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태자의 사상은 그저 어린아이가 품은 다정한 마음씨 정도로 여길 게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자신이 착각했을 뿐, 지난 모든 것이 태자의 온전한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태령은 애써 화를 억누르며 태자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 상태로 태자의 얼굴을 태연하게 마주 볼 순 없을 것 같았다. 혼자서 조기퇴궐을 결정짓는데 길목에 있던 무사 한 명이 그의 팔을 잡아 세웠다.
“…….”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익숙한 얼굴이 취하는 손짓을 본 태령은 고갯짓으로 그를 보내고 발걸음을 틀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고요하고 넓은 들판이었다. 이곳은 주몽의 활 솜씨를 처음으로 확인한 곳이기도 했다. 당시 태자의 유모가 휴식을 취하기 좋다며 데려간 곳이었는데, 궁 외곽에 있는 데다가 숲과 가까워 정말로 인적이 드물었다. 덕분에 이곳에 발걸음도 하지 않는 태자 대신 태령이 쏠쏠하게 써먹고 있었다.
그는 들판을 한 번 휙 둘러본 뒤 옆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이 숲은 나무가 빽빽해서 여러 종류의 밀회를 즐기기에 적합했다. 오늘의 밀회는 그가 선호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멋대로 난 길을 따라 평소보다 조금 더 걸어가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보였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전령을 보낸 지가 언젠데 어딜 갔다 이제 오느냐!”
“……송구합니다, 아버지”
태령은 사실을 말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평소와 달리 순순한 아들의 태도에 마 대사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더 책망하는 대신 태령의 옷자락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짙게 깔린 목소리에서 분노가 묻어나왔다.
“너도 귀가 있다면 그 어린 것이 저지른 일에 대해 들었겠지.”
“예. 들었습니다.”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한 태자는 초반에는 기가 팍 눌려 있었다고 했다.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책상만 바라보다 나가는 꼴이 조금만 더 찌르면 울 것 같았다고, 낄낄 웃으며 조롱하던 아버지를 그는 기억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태자는 귀족들을 슬슬 건드리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시작은 마 대사자의 아래에 있던 소귀족에게 힘을 실어주는 말을 꺼낸 것이었다. 그 귀족은 마가가 견제하던 대표적인 사람으로, 이번 산불 사태로 무너뜨릴 계획을 모두 세워둔 참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선 태자로 인해 오히려 그 지방에 힘이 실렸다. 재난 지원을 모조리 끊는 등 차근차근 계획을 진행해 나가고 있었는데 그게 한순간에 무너진 것은 물론이고, 다른 귀족들 앞에서 체면까지 구겼으니 마 대사자의 분노가 대단할 만도 했다.
하지만 저지른 일이 이것뿐이었다면 아버지도 감정을 갈무리하고 넘어갔을 터였다. 문제는 태자의 세력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그의 남다르다 못해 충격적인 사상에 동조하는 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진정한 이유는 그 듣도 보도 못한 ‘그림 이야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나타난 ‘그림 이야기’는 특유의 독특한 이야기와 아름다운 그림으로 귀족 문화를 휩쓸었다. 초본을 구하겠다며 금덩이를 내놓는 집안들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훔친 것은 곳간의 쌀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마음이었다. 대부분이 ‘태자’와 혼인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 이야기들은 꼼짝없이 아이들에게 태자에 대한 환상과 함께 무의식적인 호감을 심어주었다. 태자와 동갑내기일 이 아이들이 자라서 그와 같이 일하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아주 영악한 짓이 틀림없었다.
이 ‘그림 이야기’ 사업을 태자가 주도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별궁에서만 작업을 하는 둥 남모르게 한다고 하는 모양이었지만 정말로 밝히길 원치 않았다면 책 앞장에서부터 떡하니 도장을 박아 넣지 말았어야 했다. 한겨울에 싹을 틔운 초목 그림은 누가 보아도 영고를 지내던 겨울날 신의 손짓으로 자라난 나무를 뜻하는 모습이었다. 이보다 더 태자를 가리키는 증거가 어디 있을까.
덕분에 그가 종이에 대문짝만하게 도장을 찍어 뿌리며 행하는 기부도 태자가 하는 짓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특히 백성들 사이에서 태자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이유도 이것이었다.
게다가 다정한 성품으로 궁인들은 또 얼마나 구워삶았는지. 태자를 스쳐 지나간 궁인들치고 아이를 싫어하는 이는 없었다. 특히 태자궁 소속 궁인들은 태자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였는데, 아이가 여름밤이면 귀신에 들린 지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문 하나 돌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충성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귀족들의 경계 대상이 되었건만 마지막으로 형사취수제에 대한 발언까지. 죽고 싶어 환장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평소라면 터무니없는 꿈을 꾼다며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어갔을 발언들도 그림 이야기 사업으로 암암리에 키운 세력들과 합치자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일로 다가왔다.
특히나 형사취수제는 마가와 아주 깊은 인연이 있었다. 대대로 무가(武家)인 탓에 전쟁에 나갈 일이 많았던 그의 가문에서는 그만큼 남자들이 죽는 일이 빈번했다. 당장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도 원래 태령의 큰어머니, 즉 마 대사자의 형수였다. 게다가 아버지가 큰아버지의 대를 끊기게 하지 않겠다며 큰어머니에게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한 것은 집안 내에 이미 파다했다. 그랬으니 아버지가 태자의 발언에 위협을 느낄 만도 했다.
“건방진 놈, 봐주었더니 주제도 모르고 끝없이 기어올라…….”
‘어린 것’, ‘건방진 놈’. 모두 이 나라의 태자 저하를 일컫는 말론 적당하지 않았지만 마 대사자는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태령은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서 있었다. 평소라면 능글거리는 말로 아버지의 화를 달랬겠지만 이젠 굳이 그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더 놔두었다간 두고두고 후환이 있을 게야. 늦기 전에 싹을 잘라내야 해.”
“…….”
오늘따라 침묵 속에 깔린 동조를 눈치챈 마 대사자는 더는 미루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날을 잡아 자객을 보낼 터이니 넌 그날 하룻밤만 태자궁 궁인들을 좀 치워놓거라.”
결국 아버지는 태자를 제거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습관처럼 아버지를 말리는 말을 꺼내려던 태령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태자를 살려서 자신에게 득이 될 만한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태령의 입장에서도 끊임없이 전쟁에 나가야 하는 집안 특성상 재산이 나돌 수도 있는 위험은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저 말 같지도 않은 사상이 단지 아직 어리기 때문에 품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 그대로 둔다면 앞으로도 두고두고 장애물이 되리라.
그럼에도 머뭇거리는 태령에게 마 대사자가 의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설마 정이라도 든 것이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제야 태령은 자신이 생각보다 태자를 훨씬 아꼈음을 깨달았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태자 주위의 모든 것들을 쳐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협보는 물론이고 그래, 그 주몽이라는 꼬맹이까지도. 그것도 주몽도 미워하는 척 챙기는 태자가 귀여워 놔두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장단에 맞춰준 대가는 일곱 살짜리보다도 못한 취급이었다. 연이은 충격에 말을 잃은 태령에게 마 대사자가 쐐기를 박았다.
“아들아, 착각하지 말거라. 태자의 마음속엔 네가 없어. 그 어린 것이 진정으로 널 생각했더라면 우리 가문을 능멸하는 일을 그리도 저질렀겠느냐?”
귓가가 웅웅거리고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자신과 같은 급은 없다면서 협보는 곁에 두는 태자. 별 볼 일 없는 주몽을 그리도 더 챙겨주지 못해 안달하던 모습. 그 위로 진짜 천한 것들은 곁에 두면서 태령에겐 거리낌 없이 천하다고 운운하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마지막으로 주몽이 손을 잡아주면 편하게 잠들었으면서 자신이 잡으면 여전히 찡그린 채 잠들어 있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이것보다 더 자신이 그의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디 있을까. 치밀어 오르는 허탈함과 배신감에 태령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러나 그 배신감마저도 자신에겐 사치였다. 애초에 상대방은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 않았으니.
“여름이 가기 전에 처리하자꾸나. 내가 뒤탈 없는 자를 물색할 테니…….”
“제가 하겠습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이라도 배웅해 드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웃음을 뚝 멈춘 태령은 단단히 굳은 얼굴로 이야기했다.
마 대사자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지만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자객을 쓰는 편이 꼬리를 잘라내긴 쉽겠지만 자식은 일이 새어 나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안심이었다. 게다가 태자의 호위 무사라는 허울 좋은 명분까지 있으니 처리하기가 더 쉬우리라.
무엇보다 태자를 감시하라며 꽂아놓은 자리임에도 갈수록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며 속을 썩이던 둘째 아들이었다. 그런 그가 청한 일이 그의 단단한 결심을 보여주는 것 같아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반면 태령의 생각은 그런 단단한 결심과는 조금 달랐다. 그가 직접 처리하겠다는 것은 태령이 태자에게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에서 나온 결심이었다.
아버지가 보낸 자객이 태자를 처리한다면 자신은 아버지의 명대로 궁에서 사람을 비우는 일을 해야 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여름밤에 태자궁 궁인들과 주몽이 쉬이 자리를 비울 리가 없었다. 어찌어찌 비운다고 쳐도 주몽이 곁에 없는 태자는 또다시 귀신에 씌어 태자궁을 배회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목격한 자객에 의해 태자의 비밀이 아버지의 귀로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비밀을 알게 된 아버지는 온갖 곳으로 소문을 퍼뜨려 태자가 이미 주검이 된 후에도 끝끝내 명예를 실추시켜 지위를 끌어내리리라.
태령은 비록 죽은 뒤라도 태자의 신분과 평판을 지켜주는 것이 그가 행할 수 있는 마지막 호의라고 여겼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자신이 처리하는 게 최선이었다. 이것이 그가 그간의 정을 봐서 내린 결정이었다.
단단히 결심을 한 서늘한 눈이 마주치고 주름진 손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 대사자는 자랑스러운 아들을 격려한 뒤 먼저 숲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태령은 하얗게 질린 손을 몇 번 주먹 쥐었다. 하얗고 고운 얼굴로 재잘거리던 아이가 떠올랐다. 좀 더 크면 그 얼굴로 분명 궐을 가득 채울 정도의 여인을 홀릴 수 있을 거라는 농담에 아이가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유독 그런 농담을 싫어했으니 분명 질색하던 표정이었겠지.
“……흠.”
생각에 잠겼던 태령은 핏기가 돌아온 손으로 허리춤에 찬 칼을 몇 번 두들겼다. 결심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그가 떠난 자리에 서 있던 커다란 나무만이 나뭇잎 몇 장을 쏟아냈다.
***
아이는 활을 처음 쏘던 그날을 잊지 못했다.
“후에 부탁 하나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냉정한 얼굴의 여인은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물건을 쏟아내었다. 시위가 풀린 활 하나와 끝이 뭉툭한 화살 세 대. 낯선 모양새였음에도 아이는 단박에 이것이 ‘활’이라는 걸 알았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활대를 구부려 시위를 걸었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아이는 본능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발을 어깨너비만큼 벌린 채 정면을 바라보고 섰다. 화살을 하나 집어 시위에 걸고 그 끝과 활시위를 한꺼번에 모아 쥐었다. 손아귀가 욱신거릴 때까지 잡아당기고 놓자 화살은 빠르게 날아 가까운 나무에 꽂혔다.
“…….”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엔 같은 자세에서 오른발만 살짝 뒤로 뺐다. 팔꿈치를 뒤로 당기고 수평을 유지하되 화살촉은 살짝 올렸다. 뒤쪽 어깨까지 활짝 벌려 당기자 제법 긴 화살이었음에도 화살촉이 활대에 가깝게 닿았다. 아이는 망설임 없이 시위를 놓았다.
이번 화살은 조금 더 뒤쪽에 있는 나무의 작은 옹이에 꽂혔다. 옆에 선 여인의 눈이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화살을 집었다.
‘바로 네가 쓸모가 없어서이다. 이제야 네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것임을 알아차리신 거지.’
그 언젠가 들었던, 악의가 분명하게 서려 있던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세 번째 화살은 운이 나쁘게도 날아오르던 겨울 참새에게 꽂혔다.
푸드덕거리다 축 늘어지는 작은 생명체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인 아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건 제법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
형님의 밤을 지키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주몽은 형님의 곁에 앉아 그의 손을 붙잡고 제게 주어진 시간을 마음껏 즐겼다. 찌푸려진 미간을 꾹꾹 눌려 펴기도 했고 살살 부채를 부쳐 식은땀을 식혀주기도 했다.
오히려 너무나도 쉬워 유모가 활을 내민 대가로 요구한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주몽은 굳이 진실을 캐묻지 않았다. 뭐가 되었든 그녀가 하는 일이라면 형님께 해가 될 리가 없었다. 지난겨울에도 아무 말 없이 활을 순순히 받은 것도 그래서였다. 이번 일 역시 그게 무엇이든, 설사 제 살을 베어내는 일이라도 기꺼이 할 용의가 있었다.
그 다짐은 아이가 아직도 밤이면 종종 꿈으로 꾸는 그날의 기억과 맞닿아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밤을 어찌 잊을까.
형님께서 습격을 당하셨다는 말에 태자궁이 정신없는 틈을 타 그의 침실에 몰래 들어갔었다. 그곳에서는 궁인 여럿이 달라붙어 형님의 사지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형님은 피가 배어 나와 시뻘겋게 물든 팔로 울부짖으며 발버둥을 쳤다.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는 동안 거듭해서 내쳐진 둘째 왕자는 궁인들 손에 의해 끌려 나갔다.
처음에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나도 저렇게 잊히고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러나 형님께서 멍한 눈으로 자신을 끌어안았을 때, 그 두려움은 기묘한 환희로 탈바꿈되었다.
‘어디 가지 마……. 너만, 너만 있으면….’
그는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차오른 배부른 만족감에 주몽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형님께서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고통을 겪고 계시는데 기쁨을 느끼다니. 죄책감에 휩싸인 아이는 그가 정신을 잃자마자 도망치듯 태자궁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언제나 하늘같이 우러러보던 형님이 유일한 동아줄을 붙잡듯 자신의 팔을 허겁지겁 쥐는 것은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주몽은 그가 열이 오른 사흘 내내 태자궁을 들락거렸다. 고작 피 하나 섞였다고 자신이 형님께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으스대던 가람이 내쳐지는 모습 또한 쏠쏠한 볼거리였다. 형님께 억세게 붙잡혀 결국 멍이 들고 만 팔뚝은 볼 때마다 치료받기가 싫어 감추고 다녔다.
나흘째 되던 날 아침에는 궁인으로부터 형님이 깨어날 기미를 보인다고 전해 들었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주몽은 또다시 그런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고 말았다. 형님께서 아프신데 미치지 않고서야 그것을 즐기다니. 아무리 아프신 동안 단비 같은 애정을 나에게만 쏟아주셨다 하더라도 형님께서 자신께 해준 일을 생각하면 그래서는 아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 아침만큼은 가람이 분을 못 이겨 휘두른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불경한 마음을 품은 자신이 부끄러워 도저히 맨정신의 형님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
지금은 도망쳐 버렸던 그 날을 후회했다.
얼굴에 멍이 들었건 불온한 마음을 품었건 가리지 말고 곁에 붙어서 떨어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쉴 틈 없이 웃어 보이고 가련한 척을 해서 자신을 냉대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 생각을 정리할 틈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하지 못해 결국은 밤에나 몰래 이 손을 쥐어보는 처지가 되지 않았나.
다행히 유모로서의 직감이 맞았는지 자신의 곁에 있는 형님은 편안해 보였다. 모두가 우려했던 ‘악몽’ 또한 나타나지 않았다.
주몽 역시도 그 ‘악몽’의 정체를 알았다. 밤을 새워 공부를 하다 지친 날이면 태자궁 뒤 수풀에 숨어든 적이 부지기수였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그리우면 숨어들었던 탓에 모를 수가 없었다. 가능하다면 계속해서 형님의 곁을 지키고 싶었던 주몽으로선 자신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사실 형님이 자신을 진심으로 미워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진작 깨달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봐온 자신의 형님은 고작 쓸모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분이 아니었다. 무엇이 형님을 그렇게 이끌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게 그가 원하는 거라면 주몽은 기꺼이 따라줄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는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고, 가람을 애써 외면했으며, 이 틈을 타 형님의 곁에 생겨난 근본 없는 새 얼굴들을 노려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불안한 날이면 끼니를 여러 차례 거르고 그동안 공부했던 책들을 싸안아서 수척해진 얼굴로 형님을 기다렸다. 그럼 형님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남들 보란 듯 한숨을 푹 내쉬면서 저를 태자궁으로 데려가곤 했다.
동정심을 자극하는 것보다 배시시 웃어서 형님을 홀리는 게 더 쉽다는 걸 깨달은 뒤부턴 일이 조금 쉬워졌지만, 딱 그뿐이었다. 잠자코 따르기로 마음을 먹었어도 주몽은 어쩔 수 없이 점점 불안해졌다.
형님이 하시는 일에는 모두 이유가 있으니 그것이 해결되고 나면 언제고 다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도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맞물리며 자신을 밀어내는 정도는 약해졌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주몽은 더, 더, 더 필요했다. 속에 담아둔 마음뿐만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행동도 모조리 차지하고 싶었다.
그랬던 때에 이번 일은 메말라 갈라지던 애정의 독을 조금이나마 적셔 줄 수 있는 단비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아이는 형님의 곁을 지키며 치솟는 갈망을 잠재울 만한 한 가지 짐작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랐으나 형님은 자신을 의지하고 있었다.
항상 어린아이 다루듯 자신을 어르는 그를 보면 확신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밤마다 손을 잡으면 안도의 숨을 내쉬는 모습은 그 언젠가 자신을 간절하게 붙잡았던 그날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초조하고 불안에 떠는 그를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은 또다시 기묘한 만족감이 들게 했다.
따라서 아이는 조용하게 이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시간을 즐기다 갈 생각이었다. 거슬리는 얼굴이 있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서 내색하지 않았다. 언젠간 형님을 구슬려 저 호위 무사를 갈아 치워버릴 거라고 다짐만 하고 있었다.
그가 평소처럼 멍청한 소리만 지껄이며 자리를 지켰다면 그 순간이 조금 늦게 찾아왔을지도 모르는데.
“……벌써 닷새나 지났던가.”
주몽은 작게 중얼거렸다. 슬슬 미끼를 던질 때였다. 주몽은 곁에 자리하고 있던 궁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가 불안한 기색으로 치맛자락을 꾹 쥐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주몽은 그녀가 조심스레 침실을 벗어나는 것까지 본 뒤 잠든 형님께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풀어진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는 동안 일부러 열어둔 문 사이로 대화 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꽉 차올랐던 달이 제 모습을 덜어내는 동안 아무런 일이 없던 것을 보아하니 태자 저하께서도 드디어 안정을 찾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태령 님도 더 이상 호위를 서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나 또한 저하를 두 해 남짓 봐온 몸이다. 아무리 안정을 찾으셨다 한들 걱정이 되어 이번 여름까진 호위를 서고 싶구나.”
주몽은 태령이 추가 근무를 자처하는 것을 들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근무 중에도 종종 농땡이를 피우며 책임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사내였다. 그가 대낮에도 형님을 지키지 않고 제가 활을 연습하는 곳에 발을 들인 횟수가 열 손가락을 넘어갔다.
혼자 왔으면 눈총이라도 줘서 내쫓았을 텐데, 어찌나 항상 남과 쪽쪽거리며 오던지. 저는 형님 외엔 볼에 입맞춤도 꺼려지는데 매번 다른 사람과 입을 맞추는 게 비위도 좋다 싶었다.
게다가 그는 사내가 되어 부끄럽지도 않은지 매번 여인을 깔아뭉갰다. 여인을 귀히 여기는 형님이 본다면 분명 경을 치실 텐데. 그 작태가 한심하고 보기 좋지 않아 그가 왔다 싶으면 숲 안쪽 깊숙한 나무 위로 몸을 숨기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 덕에 진짜 깊숙한 대화를 들어버렸지만.
“저희는 내일부터 물러가 궁인들 처소에서 잠을 청할 예정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태령 님께서도….”
주몽이 그날을 되새기는 동안 궁인은 재차 태령을 설득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 더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너희는 원래 태자 저하의 침실에 상주하며 시중을 드는 것이 아니었느냐?”
“원래라면 그래야 하지만 태자 저하께서 저희를 모두 물리신 지 오래입니다. 밤새도록 침실 밖에 사람을 둔 채 편히 주무실 수는 없다고……. 아무리 말렸지만 도저히 듣질 않으셔서 밤이면 침실을 비운 지 꽤 되었습니다.”
“알 만하군.”
태령이 혀를 차는 소리가 문 너머로 들렸다. 귀족가의 자제답게 이 상황이 마뜩잖다는 투였다.
“그래도 나는 남아 있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저 꼬맹이와 태자 저하 둘만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개의치 말고 가서 쉬거라.”
그러나 그는 궁인들더러 남아 있길 종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에는 없던 배려심을 베풀며 자신이 있을 테니 안심하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연이은 거절에 궁인도 더 권하지 않고 물러갔다. 주몽은 그 모든 상황을 엿들으며 형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이제 시일을 기다릴 일만 남았다. 그것은 아이가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다. 기다림이라면 이골이 나 있었으니.
그리고 그 장담대로 시간은 평화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며칠 밤이 지나가며 달라진 일이라곤 밤에 형님을 모시는 궁인의 수가 줄었다는 것뿐이었다. 태령과의 대화 후에 두 명으로 줄었던 것도 얼마 전 한 명이 되었다. 태령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찼지만 주몽은 그 위로 바쁘게 굴러가던 눈동자를 보았다. 주몽은 기분 나쁘게 빛나는 그 눈이 그녀의 동선을 파악하고 자신의 동태를 살피길 충분히 기다렸다.
“야.”
그리고 드디어 태령이 다가와 자신의 팔을 붙잡았다. 오늘도 형님이 단잠을 잘 수 있도록 도운 다음 북녘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당에 나왔을 때였다.
주몽은 늘 그를 무시했던 대로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뒤를 돌아봤다. 태령은 그와 닿기도 싫다는 듯 붙잡은 손을 탁탁 털더니 말을 툭 던졌다.
“너 내일은 나오지 말라고 궁인이 전해달란다.”
주몽은 말없이 고개를 기울였다. 평소라면 형님의 곁에 붙어 있을 자신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했는데 꽤나 온건한 방법으로 치울 모양이었다. 주몽에게도 반가운 일이었지만 한 번에 받아들이면 공연히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그걸 왜 유모님이 아닌 호위 무사가 전해줍니까?”
“건방진 새끼. 내가 누군지나 알고 그렇게 지껄이는 것이냐?”
신분이라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알 바 아니었다. 주몽에겐 자신이 없는 틈을 타 형님 곁을 꿰찬 이물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 요즘은 특별히 관심을 쏟고 있는 이물질이긴 하지. 대답이 없는 아이를 노려본 태령이 이마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꼬치꼬치 캐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나 하거라. 태자 저하께선 내일 회의 준비로 밤을 새우신다는 모양인데 정 그러면 내일도 오든지. 괜히 왔다가 변명을 늘어놓을 네 꼴이 꽤 볼만하겠군.”
생각해주는 척 말하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핑계도 그럴듯한 걸 대든가, 회의 참석이 금지된 삼십 일이 아직 채 지나지도 않았다. 태령은 주몽이 거기까진 모를 것이라 생각해 핑계로 가져다 썼겠지만 형님을 향한 자신의 열망을 간과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꼬투리를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지만 주몽은 더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큼은 작별 인사도 건넸지만 화답 대신 뚫어져라 노려보는 시선만 돌아왔다. 그러나 아이는 이번에도 반응하지 않고 조용히 등을 돌렸다.
일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고 있는데 괜히 나서서 그르칠 필요는 없었다.
***
유모는 원래 궐에 쌀을 납품하는 부서의 여종이었다. 고민이라곤 3년째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것뿐, 하루하루가 평범하고 조용하게 흘러갔다.
그녀의 인생은 드디어 첫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급속도로 바뀌었다. 애지중지 몸을 돌본 것이 무색하게도 아기는 태어나기가 무섭게 숨을 거두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죽는 일은 주변에서 밥 먹듯이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3년 만에 겨우 생긴 아기인 만큼 기대가 남달랐던 남편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출산의 고통과 아이를 잃은 슬픔에 허덕이는 부인에게 모든 원인을 돌리고 폭력을 휘두른 다음 집을 나갔다. 혼절해버린 그녀가 깨어났을 땐 이미 남편이 질 나쁜 무리에 잘못 걸려 싸늘한 주검이 된 후였다.
몸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상을 치르고 나자 홀로 세상에 남아버리게 된 처지에 눈앞이 깜깜했다.
이렇다 할 재산도 없는데 시동생과 재혼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그는 그녀의 남편보다 손버릇이 더 나쁘고 성격이 좋지 않기로 유명한 사내였다. 절망한 그녀에게 손을 내민 것은 평소 그녀를 좋게 보았던 부서의 관리자였다. 윗선과 연이 닿아 있었던 그는 원자의 유모로 그녀를 추천해주었고 그녀의 성품은 높이 평가되어 기적처럼 유모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서 아직 갓난쟁이인 원자를 돌보았다. 자신의 아기에게 먹였어야 할 젖을 먹이고, 옷을 갈아입혔으며, 진자리 마른자리를 가려 눕혔다. 그때마다 아기가 어찌나 빵실빵실 해맑게 웃던지.
처음에는 맑게 뜬 눈 한 번 보지 못했던 자신의 아기를 투영하여 돌보던 그녀도 진심으로 원자를 위하고 돌보게 되었다. 덕분에 원자가 3살이 된 후에도 그녀는 왕비의 호의로 태자궁의 궁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가 태자궁에서 일한 지도 어언 13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태자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또 어딜 가신 게야…….”
그녀는 방에서 얌전히 책을 읽고 있던 태자가 사라져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찌나 발걸음이 귀신같은지, 조금만 다른 일에 집중하면 곁을 떠도 떠난 줄을 몰랐다. 다행히 아이는 멀리 있지 않았다. 그는 태자궁 입구 쪽 담에 붙어 서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거 가져가서 나눠 먹어.”
“참말이옵니까?”
“그럼. 다음에 기회를 봐서 또 줄게.”
어린 궁인 두셋이 작은 탄성을 지르며 당과를 받아들었다. 태자는 무릎을 굽히고 낮게 앉아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와중에 한 손은 등 뒤로 돌려서 옷자락을 붙잡고 있다. 긴 자락이 땅에 끌릴까 봐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귀한 신분으로 나고 자라신 분이 가끔 저렇게 궁상을 떠는 이유를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알 수 없는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제 자식처럼 지켜보며 키운 태자는, 이런 말을 하기엔 무엄했지만, 좀 이상한 아이였다.
아기 때부터 조용하고 순한 성정은 그대로였다. 투정도 적었고 훈육을 하면 고분고분 따랐다. 마구 뛰어다닐 나이가 되었을 때도 오냐오냐 큰 도련님들이 대부분 그러듯 신분만 믿고 아랫것들을 괴롭히는 짓도 저지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러한 모습도 모두 안타까웠다.
태자는 유독 왕비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존재였다. 왕비는 태자가 모든 일에서 조금의 허점도 없이 완벽하길 바랐다. 그런 과도한 열망은 그녀로 하여금 아직 아이가 뛰지도 못할 적부터 똑바로 걷지 않는다며 다그치게 만들었다. 태자는 울면 안 됐고 칭얼거리면 혼쭐이 났으며 즐거워 손뼉을 치면 눈총을 받았다.
왕비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원자를 낳았을 때의 왕비는 비교적 늦게 아이를 가졌던 자신보다 어린 나이였다. 어린 나이에 왕에게 시집을 와 가지게 된 첫 아이는 그녀의 숨통이자 희망 그 자체였을 것이다. 다만 그녀의 육아에 대한 무지와 앞선 욕심이 섞여 그리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렀을 뿐이었다.
과도한 신분과 환경에 짓눌려 자란 태자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예의범절이 깍듯하고 의젓했다. 좀 소극적이고 조용하긴 했지만 크면서 나아지겠거니 했다.
변화는 주몽이 태어나면서 시작되었다. 태자는 주몽이 아직 알에 있을 적부터 호기심을 가지며 별궁에 들락거렸다. 그러더니 그 뒤로 갑자기 데면데면하던 친아우를 끔찍이 챙기며 학업에도 열심히 정진하기 시작했다.
추측하기론 갓 태어난 존재를 처음 본 태자의 마음속에 보호 본능 같은 것이 일어난 것 같았다. 자신에게 바라는 것만 많은 환경에서 지내다 작고 무해한 존재를 보니 긴장이 풀어진 게 아닐까. 이것이 궁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가설이었다.
나쁜 일이라 생각되진 않았다. 동생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가 보다. 궁인들은 그저 항상 걱정될 정도로 의젓했던 태자의 귀여운 면모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가 커갈수록 그러한 부분은 점점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어느새 태자는 지나치게 다정했고 아랫것들에게 과하게 신경을 쏟았다. 궁인들의 일상적인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였고 건네는 말투에 윗사람 특유의 위엄이라곤 없었다. 실수를 해도 혼내는 법이 없었으며 겨울철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선물도 하나씩 건네주었다.
제 사람들을 챙기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이는 후에 천하를 발밑에 둘 신분이면서 막상 본인은 신분제에 대해 은근한 반감을 드러냈다. 귀족을 멀리했고 궁인, 서자, 버림받은 아이 따위를 가까이했다. 만사에 미련이 없다는 듯 굴다가도 특정 일에는 온 열의를 다해서 몰두했다. 그 일도 두고 보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 남을 위한 것이었다. 게다가 지나치게 똑똑하기도 했던 덕에 그가 벌이는 모든 일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녀는 이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태자를 보면 자꾸만 궐 밖에서 지내던 시절 이웃집에 살던 노인이 생각났다. 그 영감은 고아로 자라 천민과 가정을 꾸렸지만 종국엔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살았다. 입버릇처럼 ‘나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를 외치며 도통 굽힐 줄을 모르던 사람이었다. 그러다 귀족의 심기를 거스른 뒤엔 하루아침에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곱고 다정한 태자 저하를 아집만 남은 늙고 추한 노인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엄했지만 불나방이 불에 달려들듯 제 목숨을 아낄 줄 모르는 모습이 꼭 그랬다. 그녀는 종종 아이에게서 삶에 미련이 없는 자의 향기를 맡았다. 누군가는 태자가 챙기는 사람이 몇인데 그럴 수가 있냐고 묻겠지만 남만 챙기고 정작 자신은 돌보지 않는다는 게 그 증거였다.
그래서일까, 삿된 것에 영혼을 빼앗기게 되신 것이.
일은 아무런 전조 없이 발생했다. 원래도 여름만 되면 더위를 먹는지 시름시름 기운이 없던 태자였다.
그러나 4년 전부터 날이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하면 갑자기 잘 자던 아이가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태자궁을 배회하는 일이 반복됐다. 두 눈은 멍했고 불러도 반응이 없었으며 단순한 잠버릇이라기엔 문을 열고 주변을 걷는 등 행위가 복잡했다. 무엇보다 아침에 일어나면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 궁인들은 결국 태자 저하께서 밤마다 귀신에 들리시는 게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일이 새어 나가면 저하께 어떤 화가 닥칠지 몰랐다. 발만 동동 구르던 유모는 철저히 입단속을 시킨 뒤 궁 밖에서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 엉덩이만큼이나 묵직한 금덩이를 받아먹은 무당도 이 일을 해결하지 못했다. 부적은 이미 수십 장 썼고 대들보 밑에 짚 인형도 파묻은 지 오래였다. 재작년에는 귀신이 싫어한다는 약물을 달여 먹이기도 했고 심지어는 습격 후 앓아누우셨을 당시 악재를 쫓는다는 핑계로 굿판도 며칠이나 벌였다.
그마저도 태자가 무당이라면 치를 떠는 결과만 낳았을 뿐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여전히 여름만 되면 궁인들은 노심초사하며 태자를 살펴야 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한 채 손을 놓고 지낼 순 없었다. 유모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다른 궁인이 추천한 무당을 불러왔다. 사실 이미 너무 많은 실패로 무덤덤해진 탓에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꼬박 몇십일은 말을 달려야 하는 거리에서 온 무당은 안광이 형형하고 기백이 남달랐다. 그녀는 아침나절 태자를 지켜보더니 그가 별궁으로 떠난 사이 태자궁 곳곳을 꼼꼼히 살폈다. 오후 느지막이 무당이 내린 결론은 그간 거쳐 간 여타 무당들과는 사뭇 달랐다.
“정처 없이 헤맨다고 했나? 삿된 것이 뭔가를 찾지 못해 이승을 떠나지 못한 모양이야.”
주변을 물리고 홀로 이야기를 듣던 유모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4년간 수많은 견해를 듣고 그보다 더 많은 시도를 했지만 이런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손바닥에 부채를 탁탁 내리친 무당이 혀를 쯧쯧 찼다.
“태자 저하께선 영혼이 외로워. 그러니 갈급한 귀신들의 딱 좋은 먹잇감이지.”
유모는 스쳐 지나가는 태자의 모습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태자는 여러모로 그 나이대 같지 않았지만 가장 아이답지 않은 면모는 애정을 갈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린아이들은 보통 주변에 사랑을 바라고 그것을 양분으로 성장해 나간다. 그러나 태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가장 친밀감을 느끼고 애정을 바라야 할 어버이에게도 무관심했다. 왕비궁에 가서 숨통을 옥죄이는 당부만 듣고 나와도 원망은커녕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사실 속은 얼마나 곪아 터져가고 계셨을까. 천 갈래로 찢어지는 가슴에 그녀는 간절히 물었다.
“원하는 걸 바치면 해결이 될까요?”
“4년이나 그랬다며? 그럼 걔가 바라는 건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아무도 주지 못할 걸 그리워하는 게지. 방도가 없어.”
“그럼 태자 저하께선…….”
“이대로라면 말라 죽지.”
단호히 내뱉는 말에는 여지라곤 조금도 없었다. 유모는 단단히 굳은 무당의 얼굴을 마주하고 한동안 입만 열었다가 닫았다.
그러기를 한참,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궁인 한 명이 조심스럽게 들어오더니 태자 저하께서 북녘궁 도련님을 데리고 오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유모는 무당에게 양해를 구하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울컥거리는 속을 애써 갈무리하느라 무슨 정신으로 그들을 맞이했는지도 몰랐다.
석반까지 무사히 들여보내고 다시 돌아온 방에선 무당이 눈을 시퍼렇게 빛내며 앉아 있었다. 그녀가 입맛을 다시며 말문을 열었다.
“한 가지 방도가 있는데…….”
“차, 참말인가요? 그게 무엇이든 제발 알려주세요!”
유모는 버텼던 다리를 무너뜨리며 주저앉았다. 반쯤 기어가 그녀의 무릎을 잡고 매달리자 무당이 비쩍 마른 검지를 펴서 창밖을 가리켰다.
“방금 데리고 들어온 저 아이. 기운이 아주 강고하고 거대해. 육십 평생 무당 일을 했지만 저런 건 처음 봤어. 저만한 그릇이 아니면 담지 못할 정도로 아주 대단한 게 장차 나라 하나는 가뿐히 세울 영혼이야.”
그녀는 방금 전 태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들어오던 작달막한 아이를 떠올렸다. 시일이 오래돼 잊고 있었지만 그 아이는 사실 신(神)의 핏줄이었다. 무당이 확고한 말투로 태자 저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저 아이를 태자 저하의 액받이로 써. 저하께 달라붙은 것은 보통 것이 아니야. 평범한 기운으론 액을 대신 받긴커녕 화를 북돋울 게야.”
“…….”
태자 저하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태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아이가 거절할 수 없게끔 활을 건네고 그것을 핑계로 빚을 지웠다. 활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예측하지 못했던 바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녀는 아이가 활을 연습하는 곳으로 태자를 데려갔다. 예상대로 태자는 아이가 활을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고 ‘주몽’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기뻐했다.
그녀는 그렇게 주몽에게 해준 일을 늘려 빚을 눈덩이처럼 불렸다. 훗날 진실을 알고도 도망갈 수 없게 발목을 잡을 속셈이었다.
다행히 후에 시일이 다가왔을 땐 빚을 운운할 필요도 없었다. 주몽은 크게 묻는 일 없이 고분고분하게 태자의 밤을 지켰다. 정말 액받이로서의 효험이 있는지 그날 태자 저하는 처음으로 편안히 잠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유모는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순진한 아이를 속여 액받이로 쓴다는 죄책감이 남아 있었지만 태자 저하를 위해서라면 더한 짓도 할 수 있었다. 태자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모든 일이 다 제 탓 같았던 그녀였다. 다행히 삿된 것을 대신 받으면서도 주몽은 큰 탈 없이 무사한 것 같았다.
어쨌거나 아이를 속인 죄는 후에 자신이 온전히 받아 가리라. 그녀는 그리 다짐하며 평온한 여름밤 하루하루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그것도 다 잠시간의 평화일 뿐이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유모는 지금 방 안에서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앞에선 다른 궁인이 자세를 바짝 낮추고 문구멍 너머로 밖을 살폈다. 엎드린 등 위로 나타난 잔떨림이 그녀의 두려움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윽고 그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다.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그녀는 유모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춘아가 잠들었습니다. 아니, 쓰러진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유모는 무릎께에 단정히 올려놓은 두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주몽이 말을 꺼낼 때만 하더라도 어린아이의 과한 망상인 줄만 알았는데. 실제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주몽이 처음 말을 꺼낸 것은 여름밤이 시작된 지 열흘 가까이 지났을 때였다.
아이는 태령의 낌새가 이상하다며 덫을 놓길 제안했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게 있다고만 주장하는 그의 말을 온전히 믿진 않았지만 태령을 경계해서 나쁠 것 없다는 것에는 동의하였다.
하지만 주몽이 요구한 대로 밤 동안 태자궁을 지키는 궁인을 한두 명만 두고 모두 물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태자 저하가 위험하다면 오히려 밤낮으로 상주하는 궁인을 늘리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심을 한 태령이 준비가 미흡한 상태에서 일을 치르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선뜻 허락하기 어려운 그 말을 들어준 것은 단지 십수 년간 궁인으로 지내며 얻은 감 때문이었다. 일곱 살 먹은 저 아이의 눈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늘, 태자 저하의 뒤를 달랑달랑 쫓아 석반을 먹으러 온 주몽은 답지 않게 밥을 먹다 물잔을 쏟았다. 유모는 허둥지둥 제가 나서서 닦으려는 태자의 기행을 말리며 주몽을 바라보았다. 실수를 한 것이 민망하고 죄송스럽다는 듯이 울상을 짓던 아이는 눈이 마주치자 바닥을 구르는 잔을 향해 힐끗 눈짓을 했다. 사전에 약속한 신호였다.
그렇게 유모는 일단 오늘 밤 약속대로 궁인 한 명과 함께 태자궁 구석의 작은 방을 지키고 앉았다. 그러면서도 사실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건만.
“저하께서 잠드신 지가 언제인데 도련님께선 아직도 오지 않으시네요. 아무래도 북녘궁에 가봐야겠어요.”
일은 태자궁을 지키는 당번이었던 춘아가 시간에 맞춰 와야 할 아이가 오지 않는다며 의아함을 품었을 때 시작되었다. 유모는 서둘러 미리 뚫어둔 문구멍에 눈을 갖다 대었다. 곁에서 농을 던지고 있던 태령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궐 내라지만 이 시간에 여인이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하지. 내가 갔다 오마.”
“번거로우시지 않습니까. 다른 궁인을 깨워서 함께 갔다 오면 되오니 그리하지 마소서.”
“사실은 내가 조금 답답해서 그런다. 적당히 농땡이를 부리다 오고 싶어 그러니 한 번만 눈감아 주어라. 자, 여기.”
그가 소맷자락에서 작은 당과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춘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것을 받았다. 그가 그녀의 손 위에서 직접 포장을 까주며 달콤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다 먹기 전에 돌아오마.”
춘아는 홀린 듯이 당과를 입에 넣었다. 그녀가 쓰러지고 자리를 비운 줄 알았던 태령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정신을 잃은 춘아를 툭툭 쳐서 의식을 확인한 뒤 구석으로 밀어 치웠다. 문밖 사정을 보고 떨기 시작한 궁인을 토닥여 달랜 유모는 그가 태자의 침실 앞에서 정좌를 하고 앉는 것을 확인했다. 태령은 무슨 생각인지 태자가 다시 귀신에 씌어 스스로 침실 밖으로 나오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유모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덜덜 떨리는 마음을 애써 달랬다. 쉬이 가라앉지 않는 심장은 기어코 창문에 낸 구멍으로 태자궁 밖 큰 나무를 올려다보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옆에서 한껏 질린 얼굴로 입술을 말아 넣고 있던 궁인이 축축해진 손으로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순간 한순간이 피가 마르는 것 같았던 기다림의 시간은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끝났다.
가벼운 듯 묵직하게 울리는 저 소리는 태자가 잠든 침실의 큰 문이 여닫힐 때 나는 소리였다. 어깨를 빳빳이 굳힌 그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자세를 낮추어 작은 문구멍으로 동태를 살폈다.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태자가 또다시 멍한 눈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
아이는 오늘도 매번 걷는 궁 안의 길을 똑같이 따라 걸었다. 그리고 태령은 그 뒤를 조용히 따라다녔다. 당장이라도 위해를 가할까 두려워 숨마저 참은 그녀들의 우려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잠시 뒤, 태자는 마당으로 내려오고 싶은지 디딤돌 앞에 멈춰 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평소라면 때맞춰 신을 신겼을 궁인은 정신을 잃고 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태령은 그저 손을 움찔거리더니 팔짱을 끼고 섰다. 그녀들이 시야가 막힌 문 쪽 구멍 대신 창가에 내놓은 구멍으로 몸을 돌렸을 땐 이미 태자는 흙발로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유모는 호위 무사라는 작자가 그 발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저는 뻔뻔하게 신을 신고 걷는 걸 보며 화를 간신히 삭였다. 아니, 이미 오늘 밤과 같은 일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저 이는 호위 무사 자격을 박탈당한 지 오래였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태자궁을 걸어 다녔다. 태령은 여타 궁인처럼 태자를 세심히 살피진 않았지만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태자의 발걸음이 한쪽 구석에 있는 적당한 크기의 연못에 다다르자 지켜보던 그녀들은 다시 숨을 참아야 했다. 태령의 분위기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점차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유모는 그가 불안한 표정으로 턱을 쓸다, 주먹을 반복해 쥐다, 칼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고 애써 비명을 삼켰다. 황급히 커다란 나무 위를 올려다봤지만 무성한 나뭇잎만 더운 여름 바람에 사륵사륵 흔들리고 있을 뿐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지금이라도 나서서 그를 말려야 할까. 그러나 그게 좋은 선택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여기까지 온 이상 쉬이 알 수 있었다. 자신만큼,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 더 태자에게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그 아이가 감히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이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했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 이후까지 아이를 믿어 주어야 했다.
그녀가 반복해서 튀어 오르는 수많은 망설임들을 애써 내리누르는 사이 태자는 어느새 연못 가까이에 다가가 있었다.
평소라면 궁인이 애초에 위험한 장소는 가지 않도록 태자의 방향을 잡아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를 방치하는 사람만을 곁에 둔 아이는 아무런 제지 없이 연못에 코앞까지 다가가 자세를 낮추고 앉았다. 그러더니 상체를 기울인 채 물 안을 빤히 들여다본다.
매일같이 보는 제 얼굴 어디가 생소하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들여다보고 계실까.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한참 동안이나 불안한 자세로 멈춰 있었다.
태령이 성큼성큼 다가가 그 가느다란 목을 쥐고 물속에 처박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우읍……!”
유모는 순간적으로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 옆 궁인의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읍읍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옆을 바라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손을 풀어 옆 사람을 던지듯이 놓고 다시 창구멍에 눈을 고정했다.
태령은 여전히 태자의 목을 쥔 채 연못 속에 담근 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아이가 반사적으로 버둥거렸으나 올해 성인이 된 남성의 힘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힘껏 버둥거리던 사지에서 천천히 힘이 빠지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사위는 고요하고 여름밤 공기는 흐트러짐 하나 없는 것이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태자를 내려다보던 태령이 천천히 고개를 꺾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모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창문을 열어젖히려 할 때였다.
그 순간 익히 들어본 소리가 귓가에 작게 걸렸다. 차분하던 공기를 강제로 찢어발기는 소리였다.
태령이 낮게 신음을 울리며 팔을 확 잡아 뺐다. 다급한 몸짓에 태자가 덩달아 끌어 올려졌다. 태령의 팔에는 기다란 화살 하나가 깊게 박혀 있었다.
“이 개 같은…….”
낮고 작게 퍼진 욕설이었지만 모두가 잠든 밤중이었던 덕에 멀리서 지켜보던 그녀들의 귀에까지 들렸다.
그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더니 아직도 쥐고 있던 태자의 목덜미를 놓치듯 내려놓았다. 용케 정신을 잃지 않은 아이가 울컥거리며 물을 토해냈다. 그사이 태령은 간간이 신음이 섞인 욕설을 내뱉으며 화살이 꽂힌 팔을 들어 올렸다. 화살을 뽑으려는 것인지 머뭇거리며 허공에서 헛손질을 하던 다른 손을 가져다 댔을 때였다.
그 순간 또다시 파공음이 들리더니 그 옆에 나란히 하나의 화살이 더 꽂혔다. 태령이 본능적으로 손을 빼지 않았더라면 화살은 손을 꿰뚫고 팔에 박혔으리라.
하지만 그의 동물적인 감도 연달아 날아와 배에 꽂힌 다른 화살 하나만큼은 피하지 못했다. 화살촉이 보이지 않을 만큼 화살이 깊이 박힌 배를 끌어안은 태령은 이번에야말로 고통을 참지 못했는지 반쯤 무릎을 꿇으며 무너져 내렸다.
그제야 유모는 지켜보던 궁인과 함께 밖으로 뛰쳐나왔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들고 얼굴을 확인했다. 마주친 눈이 잠시 커졌다. 그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와중에도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유모는 그는 안중에도 없이 곧장 태자에게로 달려갔다. 한참 물을 토해내던 태자는 멍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는 다급히 손발을 주무르고 소맷자락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주었다.
“이, 이거 놓, 꺅!”
계속해서 상태를 살피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작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유모는 황급히 태자를 놓고 온몸으로 그를 가리며 뒤를 돌았다. 같이 나왔던 궁인이 태령에게 붙잡혀 연못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팔 하나는 배에서 꿈질꿈질 흘러나오는 피를 누르기에도 벅차 보였지만 그는 남은 한 손으로도 충분히 궁인을 제압할 수 있는 건장한 사내였다. 마주친 두 눈에서 피할 수 없는 광기가 보였다.
“이게 무슨……!”
다급히 달려가려 했지만 태령이 쓰러지는 것이 먼저였다. 궁인을 놓고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무너진 그는 어느새 다리 한쪽에 또 다른 화살이 꽂혀 있었다.
유모는 놀랄 새도 없이 서둘러 달려가 그의 손아귀에서 궁인을 빼냈다. 그녀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어깨를 쓸어주며 연못가에서 먼 곳으로 데려가는데 터벅터벅 걸어오는 작은 인영이 보였다. 한 손에는 활을, 다른 한 손에는 화살을 서너 개 쥔 그는 이 모든 일을 만들어 낸 주역이었다. 주몽은 평소와 다름없이 순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형님께선 괜찮으십니까.”
그녀의 품 안에 안겨 있던 궁인은 고개를 푹 숙였지만 유모는 꼿꼿이 들고 아이를 마주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했다.
“익사 직전까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신 도련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것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는지 아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 또한 변명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쯤에서 원망은 그쳤다.
이윽고 궁인은 마음을 다 진정시켰는지 한결 단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맡은 일이 따로 있는 그녀는 놔두고 유모는 주몽과 함께 태령에게로 다가갔다.
태령은 쓰러졌던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하늘을 보고 누워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지막한 신음에 웃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온 두 사람을 눈만 굴려 힐끔 바라보았다. 목에선 여전히 허탈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기침을 두어 번 한 그가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어, 쩐지. 활 솜씨가 기가 막힌 게, 네놈일 줄 알았지. 씨발, 더럽게 아프네.”
“형님을 해하려 하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도….”
차분히 흘러나온 말에 태령이 악에 받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그놈의 형님, 형님! 갓 태어난 오리 새끼도 저렇게 따르진 않겠구나! 알에서 태어났다고 들었는데 정녕 네가 짐승 새끼인 줄 아는 것이냐? 세간에는 네 머리가 하도 뛰어나 알 속에 있었던 일들까지도 모조리 기억한다던데!”
주몽은 아랑곳하지 않고 준비해온 끈으로 태령의 두 다리를 묶었다. 태령은 발을 내지르다 다리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처참한 상황에 그는 누굴 향한 것인지 모를 분노를 토해냈다.
“이놈이든 저놈이든 죄 천한 새끼들만 골라다 끌어안고 가시니 내가 이런 짓을 저지른 게 아니냐! 네놈도 보거라. 내 충고 하나 하겠는데, 지금 당장은 다정히 대해주시겠지만 그건 천성이 그런 것이지 널 진심으로 아끼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모든 믿음이 그를 향해 있을 때 그는 널 버릴 것이야! 두고 보….”
끊임없이 주절거리던 태령이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유모의 등 너머를 보았다. 그녀는 그제야 등 뒤로 다가온 인기척을 알아차렸다. 쭈뼛 소름이 돋아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멍한 얼굴을 한 익숙한 몸이 보였다. 그녀는 즉시 몸을 돌리고 그를 낮게 불렀다.
“태자 저하!”
“……찾았다.”
난데없는 말에 그녀는 잠시 주춤거렸다. 그러나 곧 아직도 태자의 몸속에서 귀신이 빠져나가지 않은 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난리 통에도 여전히 붙어있다니 정말 징하기론 둘 없을 귀신이었다.
태령도 태자의 상태를 알아차린 것인지 뒤에서 한숨이 작게 들려왔다. 반역을 저지른 주제에 꼴에 걱정은 되는 모양이지. 그녀는 속으론 태령을 비웃으며 겉으론 다정하게 태자를 얼렀다.
“무엇을 말이옵니까? 그러지 말고 들어가셔서….”
“내가 찾던……. 한참을 걸어 다녔는데 여기 있었네…….”
그러나 아이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쯤은 평소에도 있던 증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늘따라 유독 태자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가끔씩 웅얼거리며 천천히 걷던 보통 때와 달리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빠르게 걸어갔다. 유모는 멍하니 그녀를 지나치는 태자를 바라보다 다급히 그를 쫓아갔다.
“저하!”
그러나 연못에 다다른 아이가 곧장 물에 머리를 처넣는 것이 더 빨랐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어쩌면 간절해 보이기까지 한 몸짓이었다. 그녀는 경악해서 황급히 상체 끝까지 물속으로 기어 들어가려는 태자를 끌어냈다. 그러나 아이는 쉴 새 없이 발버둥을 치며 다시 물속에 머리를 들이밀려 들었다.
“놔! 내가 봤다고! 분명히 저기 있었단 말이야!”
“제발! 저하!”
“막지 마! 내가,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 드디어 만났는데, 갈 수 있다는데!”
울음기 섞인 쨍한 미성이 밤공기를 갈랐다. 대체 귀신은 물속에서 무얼 보았던 것일까. 이 영혼이 찾는 건 이 세상에 없다던 무당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조금 전 태령에 의해 다다른 죽음의 문턱에서 그 그리움의 대상을 본 걸지도 몰랐다.
그 세상으로 가고 싶어 설마 자살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등골이 서늘해져 유모는 꿈틀거리는 태자의 몸을 강하게 껴안았다. 곁에는 어느새 주몽이 다가와 있었다. 고개를 비틀어 얼굴을 빼낸 태자는 눈물로 범벅이 되어 주몽과 눈을 맞췄다.
“제발 나 좀 보내줘. 넌 할 수 있잖아. 제발, 제발…….”
주몽은 아무 말 없이 그 얼굴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애절한 부탁에 유모는 주몽을 향해 턱짓을 했다. 밤마다 그랬듯 다가와 태자를 진정시켜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주몽은 태자가 제풀에 지쳐 정신을 잃을 때까지 끝끝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
태자가 정신을 잃자 허공에는 허덕이는 세 사람의 숨소리밖에 남지 않았다. 유모는 우선 당황스러운 마음을 삼킨 채 태자를 추슬러 안고 일어섰다.
태령은 놀랐는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야 이런 일은 지난번 태자 저하께서 습격을 당해 열이 올랐을 때 지겹도록 겪었다. 반면 그는 이번이 처음 보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몰아친 사건에 지친 그녀는 뭐라 쏘아붙일 기운도 없었다. 그녀가 쓰러진 태자를 방 안에 눕히고 나오자 태령의 눈동자는 흐릿해져 있었다. 얼굴도 창백한 것이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모양이었다. 그 옆에 선 주몽이 태령에게 예의 그 순진한 말투로 말을 건넸다.
“마음 같아선 죽여서 후환을 없애고 싶은데, 그랬다간 여러모로 선을 넘을 것 같아 살려 돌려보내는 것뿐이에요. 혹시라도 허튼 마음을 품고 조금이라도 떠벌렸다간 다음엔 마가네 지붕 위에서 절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하, 하하…. 어차피 날이 밝으면 저하께서도 내가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아실 텐데. 이미 잃을 것 없는 내가 대체 무얼 위해 참아야 하지?”
“아니요. 형님께선 아무것도 모르실 예정입니다. 그저 오늘도 평안히 잠드셨을 뿐이지요.”
안 그래도 태자에게 이 상황을 알릴 생각에 골머리를 앓던 유모는 놀라 주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주몽은 이것마저도 미리 계획했는지 미동도 없는 얼굴이었다. 다만 태령이 멍한 얼굴로 반문했다.
“……무엇을 위해? 네놈을 위해서라면 내가 저하께 끔찍한 놈으로 남는 것이 나을 텐데.”
“어떤 식으로라도 당신이 형님께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기는 건 싫으니까.”
태령이 나지막하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주몽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입도 벙긋하지 말라는 건 형님의 오랜 악몽에 대해서였습니다. 괜한 복수심에 마 대사자님에게 말이라도 꺼냈다간….”
“내가?”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인지 흐릿해져 가던 태령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스스로 한 말을 곱씹는 듯 잠시 조용해졌던 태령은 곧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팔을 들어 배에 꽂힌 화살을 움켜쥐고 대를 꺾었다.
“아, 윽……. 미친 새끼, 깊게도 박았네.”
성한 팔이 하나뿐이라 화살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더 깊게 박혀 고통을 자아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기어이 대를 꺾어 내던진 그는 쇳소리가 나는 목으로 말을 이었다.
“너는 저하께서 앓는 악몽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하긴, 네가 직접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겠지. 네놈이 오면 항상 편안히 잠들어 계셨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말은 못 하지…….”
“…….”
“넌 모르겠지만……. 그 작고 외로운 등을 단 한 번이라도 봤으면 그 누구라도 함부로 떠벌리지 못했을 거다.”
넌, 모르, 겠지만……. 허탈한 숨을 내쉰 그는 점점 정신을 잃는 듯 목소리가 작아졌다. 주몽은 입을 꾹 다물었다. 태령이 금세 고개를 툭 꺾지만 않았더라면 당장이라도 활을 꺼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러나 그는 기절해버렸고, 주몽은 침묵한 채 남은 화살을 거칠게 꺾었다.
유모는 그동안 피가 묻고 억지로 꺾여 지저분한 화살대를 집어 들었다. 귀족들은 멋을 내기 위해 화려한 깃털을 화살 끝에 장식하고, 훈련을 받는 무사는 소속을 표시하기 위해 끝을 물감으로 물들인다. 그러나 투박하기 짝이 없는 이 화살들은 주몽이 직접 만든 것인지 모조리 끝부분이 장식 하나 없이 밋밋했다. 그의 몸에 그대로 꽂혀 있었더라면 분명 추적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윽고 화살대를 모조리 꺾어 내던진 주몽이 생각에 잠긴 그녀에게 물었다.
“형님께선 침실에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유모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대답을 들은 아이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뒤처리는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듯 주 관심사에만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유모는 주몽이 가기 전 아이를 붙잡았다. 아무리 그의 선택이라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어서였다.
“정말 태자 저하께 이번 일을 알리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예.”
아이는 어디가 잘못됐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유모는 그 순수한 얼굴을 마주하고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상식에선 저하께 당신이 당한 일을 알려야 할 것만 같았다. 작은 일도 아니고 자신의 호위 무사가 배신한 큰일이라면 더더욱. 그녀는 용기를 내어 주몽을 설득했다.
“그래도 알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번 일이 작은 일도 아니고…….”
“기억하셔 봤자 좋을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실 겁니까? 호위 무사의 배신? 오랜 기간 앓아온 악몽의 정체? 또다시 죽을 위기를 넘기셨다는 것?”
“…….”
“사실을 말씀드린다 한들 태령을 믿으셨던 형님께서 쉬이 납득하실지도 의문입니다. 차라리 그가 형님을 물속에 넣었을 때 형님께서 깨셨더라면 모든 사실을 밝혔겠지만.”
그러나 깨지 않으셨죠. 주몽이 태평하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순간 유모는 주몽이 왜 태령이 태자를 죽음의 상황까지 몰아넣길 기다렸는지 깨달았다. 그는 그저 태령이 빠져나갈 구석이 없도록 기다렸던 것이었다. 혹시라도 태자가 정신을 차렸을 때 연못에 제 발로 걸어가는 것과 물속에 처넣어진 것, 어느 쪽이 더 확실한 배신감을 느낄지는 자명했다.
……그리고 주몽의 도움이 극대화되는 부분도 명백히 후자일 터였다. 그래도 설마 이것까지 생각했을까, 하고 유모는 애써 불안한 기분을 떨쳐냈다.
“그럼 저는 이만 형님께 가보겠습니다.”
그녀가 침묵하는 동안 주몽은 이만 가보겠다며 침실 쪽으로 향했다. 이번만큼은 유모도 주몽을 붙잡지 않았다. 어차피 홀로 두고 온 태자가 마음에 걸리던 참이라 내심 곁에 있어 주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아이가 떠나기가 무섭게 멀리서 들려오던 발걸음 소리가 태자궁을 넘었다. 발소리의 주인공은 조금 전 같이 있었던 궁인이었다. 그녀의 뒤로 낯선 얼굴의 장정 둘이 들것을 들고 들어왔다. 맡은 일을 무사히 해낸 그녀가 발걸음을 재게 놀려 유모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 저하께선 괜찮으신 거지요?”
“그럼. 걱정 말고 뒷일이나 무사히 마무리하자꾸나.”
유모는 굳이 좀 전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녀는 안심한 궁인과 함께 장정 둘을 도와 태령을 들것 위에 올렸다. 그 위로 준비한 천을 덮자 피가 배어 나와 부분 부분이 검게 물들었다. 혀를 찬 궁인이 천이 더 필요하겠다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동안 유모는 머리끝까지 덮은 천을 내려 하얗게 질린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
눈을 곱게 감은 얼굴에는 언제 튄 것인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유모는 망설이다 이미 더러워진 소매지만 그의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태자궁을 지키는 그녀의 입장에서 그는 저주를 퍼부어도 모자랄 배신자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유모는 반역자에게 감히 왜 이런 선택을 했느냐고 묻고 싶었다.
비록 부상을 당했지만 살아 돌아갈 테니 태자를 죽이러 간 태령보다 주몽의 죄질이 가벼웠다. 들추면 역풍을 맞을 마 대사자는 감히 이쪽에 따져 묻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화살을 꺾어버려 추적을 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고통을 참으며 스스로 그 일을 행한 태령이 진실을 말할 리도 없었다.
결국 마가(馬加)가 침묵을 하며 이번 일은 오히려 모든 귀족들에게 경고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태자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고 심지어 후에 있을지도 모르는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다. 결국 태령은 목적과 달리 본인만 희생한 꼴이었다.
하지만 이미 심연으로 빠져든 정신은 유모의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대신 유모는 궁인이 갖고 온 천을 덧씌워 덮으며 그녀에게 단단히 언질을 주었다.
“오늘 밤에 일어난 일은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할 것이야.”
“물론이지요. 이미 저하께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지 오래입니다.”
태자궁 소속 궁인들은 모두 태자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아마 지난번 습격 때 그가 궁인들을 감싸준 일이 크게 한몫했을 것이다. 유모는 고개를 끄덕이곤 꼼꼼히 천 틈을 여몄다.
이윽고 모든 준비를 마친 태령은 밤에 묻혀 거대한 천 뭉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장정 둘에게 묵직한 금덩이를 쥐여주자 그들이 고개를 꾸벅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궁인들만 쓰는 쪽문으로 빠져나가면 소달구지에 태워져 마가의 대문까지 전달되리라.
아침에 일어난 마 대사자가 아끼는 둘째 아들을 발견할 모습에 전신이 이상한 긴장에 휩싸였다. 그 위론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이 불어와 살갗을 덥혔다.
그 열기에 문득 매일 노심초사하며 지내야 했던 지난 여름밤이 생각났다. 태령이 사그라지는 목소리로 남긴 마지막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아서일까.
“……그러고 보니.”
그는 작년 여름밤 하루도 빠짐없이 그 등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궁인들은 돌아가며 태자궁을 지켰지만 그 하나만큼은 늦잠을 자는 일은 있어도 먼저 등을 보인 적은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옆에서 주변을 정리하던 궁인이 의아한 어투로 물었다. 유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시를 했다.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유모는 핏자국이 묻은 흙을 떠서 연못 안으로 던져넣는 것으로 모든 생각을 마무리했다.
***
나는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을 안고 천천히 눈을 떴다. 이런 두통은 올해 여름이 되고 꽤 오랜만에 겪는 일이었다. 게다가 때아닌 여름감기라도 오려는 모양인지 코 안이 맹맹하고 귓속도 웅웅거렸다.
잠시간 이불에 얼굴을 묻고 끙끙거리는데 옆에서 평소와 달리 이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눈만 삐쭉 떠서 바라본 나는 곧 소스라치게 놀라 들리지도 않던 상체를 번쩍 일으키고 말았다. 널따란 침상 위에 주몽이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너무 놀라 크게 내뱉지도 못했지만 아이는 그 기척만으로도 깬 모양이었다. 눈을 살짝 뜨고 눈가를 비비던 주몽은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울상으로 일그러뜨렸다. 커다란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라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형님…….”
“아니, 무슨, 잠시만. 일단 울지 말고…. 왜 그래, 응?”
당황한 나는 우선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주몽을 달래기 시작했다. 지금 보니 얼굴에 울다가 잠든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쉴 새 없이 눈물이 나오는 눈가를 쓸고 작은 등을 두드려주다 입 모양으로 궁인을 불렀다. 마침 들어오던 한 궁인이 눈치 빠르게 나가서 물수건을 가져왔다.
나는 그걸로 얼굴을 닦아주며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애썼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꼭두새벽에 마태령의 시답잖은 농담으로 잠에서 깨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잠들 땐 있지도 않았던 주몽이 내 곁에서 퉁퉁 부은 눈으로 자고 있었다.
잠시만, 그럼 마태령은 어디 있지? 가뜩이나 주몽을 싫어하는 그가 순순히 아이를 침실 안에 들여보내 줬을 리가 없었다. 나는 마침 안으로 들어서던 유모에게 물었다.
“마태령은 어디 있어?”
안 그래도 둘의 만남을 기피하던 나는 우선 주몽을 달랠 동안만이라도 그를 내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몽이 울음을 뚝 그쳤다. 그러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 소맷자락을 꼭 붙들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당황한 눈으로 유모만 바라보았다. 그녀가 망설이는 얼굴로 주저하며 답을 돌려주었다.
“태자 저하. 그자는 지금 이곳에 없사옵니다.”
“아, 그래? 어딜 또 놀러 갔나 보네.”
“형님…. 그분은 어젯밤 이곳을 떠났습니다.”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던 주몽이 대뜸 끼어들었다. 설마하니 도망을 갔을 거란 생각도 하지 못한 나는 맹하게 되물었다.
“떠났다고? 급한 일이 있어 잠시 본가로 돌아간 건가?”
“송구스럽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번에는 곁에 묵묵히 서 있던 궁인이 말했다. 과도한 충격에 내용이 한 번에 인식되지 않았다. 이런 게 퇴사… 심지어 듣도 보도 못한 잠수 퇴사라는 건가.
그래도 2년 가까이 마주 보고 지낸 사이인데 아무런 언질도 없이 벌어진 도망에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는 말까지 더듬으며 되물었다.
“왜, 왜? 이렇게 한마디 말도 없이?”
“그것이…….”
그러나 궁인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다. 급기야 주몽은 다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단순한 변덕으로 호위 무사 자리를 그만둔 게 아닌 것 같았다. 밀려오는 불길한 예감에 나는 얼굴을 단단히 굳히고 설명을 요구했다. 주몽과 궁인이 더듬더듬 내놓은 전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재작년, 주몽을 내친 뒤로 내가 그리웠던 아이는 종종 밤이 깊으면 태자궁을 찾아왔다고 했다. 물론 들어가진 못하고 태자궁 뒤 수풀에서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고. (여기서 나는 죄책감이 강하게 들었으나 간신히 참아 넘겼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한밤중에 몰래 찾아와 그리움을 달래던 주몽은 궁에서 작은 소란을 들었다.
아이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기둥 뒤에 숨어 안을 훔쳐보았다. 그곳에선 태령이 한 궁인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자세한 대화는 듣지 못했으나 태령의 낯은 벌게져 있었고 궁인은 손목을 빼내려 하는 것 같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태령은 한숨을 쉬며 손목을 놓아 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옷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태령은 잠시 사라지더니 곧 차 두 잔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태령 님께선 사과와 함께 궁인에게 진정하라며 차를 건네주셨어요. 저, 저는 말리고 싶었는데… 그걸 마신 궁인이 쓰러져서, 너무 무서워 옴짝달싹도 못 하고 있었어요…….”
주몽이 두서없이 말을 흘렸다. 당시 상황을 말리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뚝뚝 묻어나왔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아이를 고쳐 안았다. 아이가 침을 연신 꼴깍꼴깍 넘겨 호흡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궁인이 쓰러지자 태령은 그녀를 안아 들고 어디론가 가려고 했다. 그것마저 지켜볼 수 없었던 주몽은 용기를 내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태령은 오히려 눈을 부라리며 주몽을 협박했다.
갖은 폭언이 오갔지만 아이는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그는 궁인을 내려놓고 욕을 질펀하게 퍼부으며 가버렸다. 남겨진 주몽은 그녀를 깨우려 애썼지만 도무지 일어나질 않았다. 결국 궁인들이 머무르는 처소로 가 한 명을 깨웠고, 그녀는 곧장 달려와 쓰러진 궁인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그래서 지금 그 궁인은 어때? 위험한 약을 먹거나 그런 건 아니지?”
“다행히 깊이 잠이 드는 약이었사옵니다. 춘아는 제가 잘 눕혀두었고 날이 밝자마자 의원에게도 보였사옵니다.”
밤새 그런 일을 겪고 한숨도 자지 못했는지 궁인의 얼굴은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내가 쿨쿨 자고 있던 사이 태령이 벌인 일에 충격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감히 미치지 않고서야 궁인을, 그것도 약을 먹여서까지 강제로 데려가려 하다니. 그 행태를 믿을 수 없으면서도 중간중간 그가 보여 왔던 방탕한 태도들이 떠올라 신뢰를 온통 헤집어 놓았다.
“다만 그 뒤에 다시 태령 님을 보았는데…….”
혼란스러운 나를 두고 궁인은 설명을 이어갔다.
춘아를 눕히고 나온 그녀는 주몽도 달래 저하의 침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사내아이를 여인들뿐인 궁인의 처소에 데려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북녘궁으로 돌려보내기엔 밤이 너무 깊어 있었다. 우선 안전한 곳에 두고 새벽녘 몰래 데리고 나와 북녘궁에 돌려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태자궁을 통솔하는 유모를 깨우기 위해 처소로 돌아가던 그녀는 담장 너머에 선 두 인영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태령과 처음 보는 무사였다.
그는 무사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전해 듣더니 곧장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곤 태자궁을 곁눈질하며 초조하게 달의 위치를 가늠했다. 궁인은 용기를 내어 몸을 숙이고 담장 벽에 달라붙었다. 그녀가 엿들을 수 있었던 말은 오직 ‘나는 발을 뺄 터이니…….’ 하는 말뿐이었지만 충분히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대로 얼마간 숨을 죽이고 있자 다급히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되돌아오는 발소리는 없었다.
“발을 뺀다고……?”
“외람되지만 태령 님께선 그동안 여자 문제가 적지 않았사옵니다. 이런 말까지 드리긴 송구하오나…….”
“아니, 남김없이 이야기해줘.”
“궁 안엔 이미 태령 님께서 궁인은 물론이고 아녀자까지 희롱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옵니다. 게다가 그분의 평소 말버릇이 여차하면 발뺌하고 도망가면 된다는 것이었다고……. 가볍게 농지거리하신 것 같지만 일이 이리된 이상 쉬이 넘길 수 있는 말이 아닌 듯하옵니다.”
머뭇거리며 이야기하는 궁인의 눈에는 한 치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미처 몰랐던 태령의 뒷모습을 받아들였다. 그놈이 원래 여자를 밝히고 행동거지가 가볍다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그래도 그렇지, 궁 안에서까지 아랫도리를 놀리고 다녔을 줄은 몰랐다. 궁인은 아직 어린 나를 배려해서인지 ‘희롱’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했지만 단순 희롱이었다면 대귀족 자제가 꼬리를 말고 야반도주를 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2년 남짓 친구로서 지내며 남아 있던 정도 싹 사라졌다. 애초에 음담패설을 늘어놓을 때부터 연을 끊었어야 하는 건데. 나는 배신감과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당장 잡아 와 희롱 죄로 벌을 내리면 안 되냐고 물었지만 궁인들은 달라붙어 나를 말렸다. 그렇게 해봤자 태자궁이 피할 수 없는 추문에만 휩싸인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이를 갈며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태령에겐 잠수 퇴사를 한 게 여러모로 행운이었다. 안 그랬으면 무슨 짓을 동원해서라도 내가 당장 이 궁에서 내쫓아 버렸을 테니까.
“저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한창 열이 올라 씩씩대는데 유모가 할 말이 있다며 주몽을 내 품에서 빼냈다. 아이는 반항하지 않고 다른 궁인의 손에 이끌려 침실을 벗어났다. 나는 본능적으로 주몽에 대한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초조하게 이불자락만 만지작거리는 내게 유모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저하. 송구하오나 이만 도련님을 다시 받아주시는 게 어떠하시옵니까.”
“……왜?”
“저하께서 결정하신 일을 믿고 따르는 것이 소인의 참된 도리겠으나, 충언을 드리는 것 또한 제 도리라 생각되어 감히 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얼마 전 도련님을 멀리하신 이유가 도련님께서 저하 때문에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셨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들었사옵니다.”
나는 이불을 만지던 그대로 빳빳이 굳어버렸다. 저 이유는 내가 협보에게 늘어놓았던 변명 그대로였다. 그 외엔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
그러나 나는 곧 협보를 용의선상에서 제했다. 아무리 내가 아낀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서자인 협보는 궁인들 사이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내 위신을 떨어뜨린다며 눈총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지. 그런 유모와 협보가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며 내 이야기를 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남은 건 유화뿐이었다. 내가 걱정된 유화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인 유모에게 나에 대한 상담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저하. 주변에는 저하를 도울 사람들이 많사옵니다. 천하가 모두 저하의 발밑에 있사오며 모두가 저하를 믿고 따를 사람들뿐이옵니다.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도움을 청하길 주저하지 마시옵소서. ……아직 저하께선 충분히 어리시고, 도움을 받는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이유 따윈 하등 없는 나이이옵니다.”
역시 유화구나. 나는 유모의 태도로 진범을 확신했다. 그래도 영 달갑지 않은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주몽을 대하는 내 태도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였다.
“으음…….”
원래의 목적은 주몽과 나의 사이를 악화시켜 주몽이 보다 쉽게 고구려를 건국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5살이면 나중에 컸을 때 기억에도 잘 안 남는 시기이니 쉽게 멀어질 수 있을 줄 알았지. 그러나 예상과 달리 2년이 흐른 지금도 주몽은 날 일방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냥 초기의 계획은 집어치우고 다시 잘해줄까. 안 그래도 멀어진 사이가 종종 퀘스트를 깨는 데 발목을 잡아 불편했다. 많은 사람에게 활 솜씨를 선보여야 하는 이번 퀘스트도 그렇고, 후에 친우를 사귀게 도와줘야 하는 퀘스트 또한 원수지간이어서야 성공하기 힘들 터였다.
“무엇보다도 이번 일로 도련님께서 충격을 많이 받으신 듯하옵니다. 듣자 하니 마태령 그자가 도련님께 ‘끈 떨어진 연’이라든가, ‘어차피 태자 저하께선 널 신경도 쓰지 않으시는데’ 따위의 말을 했다 합니다. 아무래도 그 말에 그동안 감추었던 상처가 드러난 듯하여…….”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그 말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순간 퉁퉁 부어 있던 눈과 서럽게 쏟아내던 눈물, 마태령의 이야기만 나와도 하얗게 질리던 작은 손이 떠올랐다. 나에게 태령이 떠났다고 전해주던 그때의 얼굴은 또 어땠었지.
유모는 고개를 끄덕여 내 불길한 예감을 긍정해주었다.
“그 와중에 자신 때문에 저하께서 아끼시던 호위 무사가 떠나버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옵니다. 도련님 때문이 아니시라 아무리 달래도 어찌나 고집불통이신지, 조금 전에도 우시다 겨우 잠드신 것이옵니다.”
“아…….”
나는 머리를 감싸며 이불보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쩜 저리 어리석을 정도로 착할까. 난 고작해야 퀘스트나 생각하며 어떤 태도를 취해야 좋을지 고민했는데 아이는 오로지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당장 상처만 남긴 거짓 연기를 집어치우기로 했다. 어차피 원래의 목적과 변명이 뒤섞여 엉망이 된 이 상황에서 더 끌고 나갈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다시 침실로 들어오는 주몽의 발갛게 짓무른 눈가가 너무 안쓰러워서…….
나는 다가오는 아이를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꼭 껴안았다. 내 어깨에 작은 머리통이 톡 닿았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모두 다. 마태령과 관련된 일은 물론이고 고작해야 다섯 살이었던 네가 아무 설명 없이 내쳐졌던 것마저 모조리 다. 아이는 그저 내 오랜 바람의 피해자일 뿐이었다.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나름대로 손을 썼다 하더라도 눈앞에서 외면한 수많은 날들을 덮어 주진 못했다. 나는 아이의 귓가에 자그맣게 사과를 속삭였다.
“미안해…….”
이 사과가 네 상처를 덮어 주진 못할 것이다. 오히려 미래를 아는 내가 저지르는 기만이었다. 태도를 바꾼 이상 나는 앞으로 손수 칼을 들어 네 마음을 찢어야 했다. 넌 똑똑하니 훗날 그때가 왔을 때 이 순간도 기억하겠지. 염치없게도 미처 건네지 못할 그 순간에 지금의 사과가 닿았으면 했다.
“이제 제 옆에 항상 계시는 거지요?”
아이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순수한 열망만을 물으며 내 등을 마주 안았다.
“…응. 그럴게.”
그래도 조금은 괜찮겠지. 내가 돌아갈 그날까지는 아직 멀었으니. 나는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아이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
나는 같이 아침밥을 먹자마자 아이를 북녘궁으로 돌려보냈다.
아이는 가기 싫은 기색이었지만 깐깐한 우 대사자의 수업을 듣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다시 다정하게 대해주니 형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시작했던 공부를 놓을까 걱정이 되어 더욱 강경히 돌려보낸 것도 있었다. 다행히 주몽은 착한 심성만큼 순진하기도 해서 순순히 수업을 받기 위해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곧장 유모의 손에 이끌려 침상에 누웠다. 지나가는 말로 ‘일어날 때부터 머리가 아프고 코와 귀가 물 속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듯 멍멍하다’ 했더니 당장 의원을 부르고 날 눕힌 것이었다. 그 호들갑은 그저 여름 고뿔일 거라고 한참을 말하고 나서야 겨우 잦아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창백한 얼굴을 한 그녀는 소일거리를 붙잡고 내 옆을 지켰다.
하긴, 간밤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충격이 가시지 않을 만도 하지. 나는 나름대로 납득하며 온몸에 힘을 뺐다. 새벽부터 기운을 빼서인지 누워 있으려니 잠이 솔솔 왔다. 그러나 오늘따라 유모는 그것도 기를 쓰고 막았다. 유달리 피곤하다고 호소해도 그녀는 지금 주무셔선 아니 된다며 강경하게 날 깨웠다.
한창 실랑이를 하는데 밖에서 유모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왕비궁에서 전갈이 도착했사옵니다.”
아, 맞다. 왕비님. 나는 징징대던 행동을 뚝 멈췄다. 지금쯤이면 그녀에게도 태령의 소식이 들어갔을 터였다. 궐을 한 바퀴 돈 소문은 부풀려지기 마련이니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전갈을 보낸 모양이었다.
유모는 긴장한 낯으로 일어서서 침실을 나갔다. 직접 왕비궁까지 갔다 왔는지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땐 이미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태자 저하. 석반을 함께 하자는 왕비 마마의 말씀이 있으셨사옵니다.”
다른 궁인들과 모여 담소를 가장한 태령의 욕을 듣고 있던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태령의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잊고 있었지만, 나는 형사취수제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가 근신을 하는 중이었다. 그 뒤로 온갖 핑계를 대며 왕비님을 피하고 있었지만 유모의 얼굴을 보니 이번만큼은 도망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늦장을 부려도 왕비궁으로 가는 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궁에 들어서기에 앞서 유모는 잔뜩 굳은 얼굴로 나를 붙잡고 이야기했다.
“주제넘은 판단일지도 모르겠지만, 왕비님께 그간 있었던 일을 모조리 말씀드렸사옵니다. 왕비님께선 궐내에서 저하를 가장 위하고, 또 지켜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옵니다.”
유모는 ‘유일한’을 말하며 잠시 멈칫거렸지만 다시 단단히 당부했다.
“왕비님께선 저하를 아끼신다는 걸 항상 잊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많이 화나셨어……?”
나는 잔뜩 움츠러들어 긴장한 말투로 물었다. 어린 궁인들에게 몰래 당과를 챙겨준 것이 걸렸나. 그것도 아니면 공부하는 척 잠깐 낮잠을 잔 일? 근신을 당한 일은 너무 유명해 따로 말씀드릴 것도 없을 텐데.
모조리 말씀드릴 만한 ‘그간 있었던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로운 방향은 아닐 것 같았다. 흡사 어릴 적 방문 학습 선생님이 학습지를 몇 장 찢어 내밀었던 내 꼼수를 모조리 눈치채고 엄마를 불렀을 때와 같은 긴장감이었다.
그러나 유모는 내 말에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고요한 복도를 지나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문을 열어주는 궁인의 표정으로부터 왕비님의 기분을 짐작해보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어차피 한 번은 마주해야 할 일이었다.
“태자. 어서 오세요. 이리 석반을 함께 하는 것은 참 오랜만이지요?”
그러나 마주한 왕비님은 평소보다 더 다정한 모습이었다.
원래라면 내 사소한 손짓 발짓 하나마저 호통을 치며 깐깐하게 굴었을 그녀는 내가 대답이 늦어도, 손이 미끄러져 젓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아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는 게 눈치뿐인 나는 그녀의 가늘게 떨리는 입꼬리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식사는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흘러갔다. 젓가락이 밥그릇을 벗어나지 않는 것은 왕비님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녀는 다과상만 남긴 채 주변을 모두 물렸다.
“…….”
잠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땀이 배어 나온 손바닥을 몰래 옷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마침내 그녀가 간신히 웃는 모양새로 말문을 열었다.
“태자. 오래도록 이어져 온 전통에 반발하는 일은 그만두세요.”
나는 단박에 그것이 형사취수제에 대한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어쩐지 허탈해지는 기분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회의에서 지겹게 들었던 말처럼 그녀 또한 나를 말리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습관처럼 반박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차분히 생각해보니 이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귀족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재산을 챙기느라 내 주장을 무시했지만 애초에 왕비님은 그들과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밖으로 나돌까 봐 걱정해야 하는 가문의 재산도 없는 데다 영향력 또한 여느 대귀족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힘을 실어준다면 내 발언도 이대로 묻히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설득할 말을 골랐다.
“어마마마께서도 형사취수제로 고통받는 백성들이 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 조금 더 나은 나라를 만들고 싶었을 뿐입니다.”
“더 나은 부여……. 그래서 그렇게 백성들에게 곡식을 퍼줬나요? 고작 나무 하나 그려진 종이 뒤에 숨어서?”
그녀가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이제껏 품위를 잃지 않았던 왕비님의 손에서 찻잔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탁자에 놓였다. 유모가 모조리 말했다던 내용이 이거였나? 나는 빳빳하게 굳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은 유모도 모르게 진행된 일이었다.
그때, 불현듯 평민들이 나를 소리 높여 칭송한다던 책 장수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요새 들어 기부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평민들이 매일 밤 도련님의 은혜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합니다. 아주 명성이 자자해요.”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내가 비밀리에 행했다 생각한 기부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과하게 늘어놓는다 생각하고 넘어간 아부에는 뼈가 있었던 것이다.
“신께서 그대에게 축복을 내려주신 날, 드디어 목숨만은 안전해졌다는 생각에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 두 번 다시 없을 기적을 태자 스스로가 모조리 다 갉아먹고 있군요!”
그녀의 낮은 목소리는 나를 질책하는 것 같기도,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렇게까지 분노하는 이유를 깨닫긴 어려웠다. 백성들을 위해 곡식을 기부한 것은 마땅히 칭찬받아야 할 일이 아니던가? 귀족들의 재산을 빼앗아 행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내가 가진 것을 나누었을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했다. 내가 아는 종교 속 대부분의 신은 어려운 이를 돕고 살 것을 권했다. 귀족 회의에서 ‘마지노선’을 시험하며 유독 남을 돕는 이야기를 많이 꺼낸 것도 이 주제라면 겉보기엔 신의 사자인 내 말을 듣는 시늉이라도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왕비님은 마치 이 일이 귀족들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실제로 내가 살펴본 귀족들도 백성들의 생활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나는 결국 그동안 품어왔던 의문을 드러냈다.
“그토록 신을 믿는 자들이 왜 구휼에는 관심이 없는 겁니까? 응당 신을 믿는 자라면…….”
“대체 태자는 왜 남을 위하는 일에 신을 들먹이는 겝니까? 신께선 자연재해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매해 풍년을 가져다주시는 존재입니다. 그대가 하는 일을 신의 뜻이라 생각해보려 했지만 도저히 이 어미는 모르겠어요!”
그녀가 내 말을 잘랐다. 순간 나는 강한 충격에 휩싸였다. 너무도 익숙해져 잊고 있었지만, 이곳은 부여였다.
고대의 신은 자연의 질서를 담당했지, 자애와 사랑의 신이 아니었다. 그동안 나는 이 당연한 전제를 잊고 신을 운운하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무교였지만 초중고 내내 미션스쿨을 다녔던 흔적이 나로 하여금 신을 남을 위해 베푸는 이로 이해하게끔 이끈 탓일까.
그제야 낯부끄러움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그동안 기부를 행하며 신의 뜻이라도 되는 양 설치고 다닌 내가 얼마나 황당해 보였을까.
“백성 구휼? 물론 해야지요. 다 좋다 이겁니다. 그런데 다들 그걸 몰라서 안 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
“그저 제 몸뚱어리 하나가 우선이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들 그리도 챙기지 못해 안달인 제 몸을, 대체 왜 태자만 챙기지 않는 겁니까?”
내가 말문이 막힌 동안 왕비님은 격정에 휩싸였다. 그간 쌓여왔던 모든 감정이 결국 댐을 무너뜨리고 범람했다.
“제발 이 어미를 봐서라도 스스로를 챙겨주세요! 이 어미와 약속하지 않았나요? 훌륭한 왕이 되겠다고. 착하고, 모난 데 없으며, 백성 따위에게 존경받는 태자가 아니라 귀족들을 내리누를 수 있는 살아있는 왕이!”
“저는… 단지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영 지어낸 소리는 아니었다. 애초에 아슬아슬하게 귀족들의 심기를 거스른 이유도 내가 가버린 뒤 가람이가 지탱할 왕관의 무게를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숨을 헐떡이던 왕비님은 또다시 내 말을 끊고 소리를 토해냈다.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태자, 들리지 않나요? 애초에 왕권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그대가 안전히 살았으면 해서라고!”
그녀의 잔뜩 긁힌 목소리는 흡사 절규와 같아 보였다.
“왜 남을 챙기느라 태자 자신의 미래는 보지 못하는 겝니까? 귀족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세요! 그곳에서 다정한 소꿉장난을 받아줄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참고, 맞추고, 이빨을 숨겨서 우선 왕위에 오르란 말입니다. 서서히 잠식시키는 일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아요. 하지만 목숨을 챙기는 일은 언제 해도 늦습니다!”
“…….”
“가끔 저는 태자를 보면 무섭습니다……. 한낱 부나방도 아니고 왜 그리 불에 몸을 던지지 못해 안달인가요? 다들 태자를 보고 다정하다 하지만 난 그대만큼 무정한 이를 본 적이 없어요. 텅 빈 눈을 하고 앉아, 훌훌 떠날 수만 있다면 팔 한 짝도 순순히 잘라 건넬 것만 같아서…….”
점점 작아지던 목소리에 결국 울음기가 섞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텅 빈’ 눈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가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당장이라도 집에 갈 수만 있다면 다리 한쪽도 손수 잘라 건넸으리라. 어쩌면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앞뒤 가리지 않고 일을 저지른 것도 무의식 속 내가 이곳을 ‘현실’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순간 한 가지 의문이 내 머릿속을 후려쳤다.
내가 한 모든 일은 정말 가람이를 위한 것이었나?
가난하고, 차별받고, 대우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안타까웠다. 현대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권력과 신분제 아래서 일어나는 것이 보기 싫어 고치기 위해 애썼다. 다정한 태자라는 겉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때론 가람이를 위한다는 핑계를 대고 일을 벌였다.
그러나 그게 정말 그들을 위해서였나?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리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 약자를 외면하진 않았지만 날 희생하면서까지 그들을 지키진 않았으며 다정한 말보다 욕을 더 자주 섞어 쓰는 고등학생이었다.
내가 한 것들은 그저 내 죄책감을 보상받기 위해 저지른 일이 아니었을까?
손끝이 차갑게 굳었다. 내가 반항적인 정책을 대안으로 내놓았을 때 우 대사자는 자객을 보냈다. 형사취수제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회의장의 공기는 차가운 소낙비를 맞은 것 같았다. 이렇게 휘저은 일이 과연 왕권에 도움이 되었을까?
일이 이렇게 된 지금은 우습게도 내가 떠난 뒤 왕위에 앉을 가람이가 내 덕분에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이기심으로 눈을 가리고 같잖은 도덕심으로 저지른 일이 그제야 꺼풀을 벗고 눈앞에 드러났다.
“아…….”
내 최선은 쥐 죽은 듯 가만히 있다 가람이에게 무탈하게 왕위를 넘겨주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하지 말아야 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주몽을 잘 키워 고구려를 건국하게 돕고 돌아가야만 했다.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나는 울음을 삼키는 왕비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온전한 걱정과 슬픔을 받아야 하는 이도 내가 아니었다. 그녀의 아들을 눌러놓고 신의 꼭두각시가 되어 앉아 있는 내가 아니었다. 그녀가 나를 붙잡고 토해낸 절규가 내 겉껍데기만 두드린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그대가 모른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윽고 눈물을 닦은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몇 마디 더 덧붙이려는 듯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그뿐이었다.
다시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동안 나는 아무런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 그마저도 내 몫이 아니었다. 대신 ‘나’를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과 이 몸이 다시 비기만을 기다리며 떠돌고 있을 ‘태자’의 영혼 따위를 생각했다.
먼저 침묵을 깬 쪽은 왕비님이었다.
“오늘 내 말은 그대가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부디 이 어미의 당부를 잊지 마세요.”
“……예, 어마마마.”
“……그리고, 당분간은 중해라는 그 아이와 함께 주무세요.”
구더기도 쓸데가 있다고, 그 천덕꾸러기 같은 아이도 쓸모는 있는 모양이니. 뒷말은 그녀가 작게 중얼거려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이해할 힘도 없었다. 나는 축객령에 맞춰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힘없이 절을 하고 나오니 앞에서 유모가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하. 괜찮으시옵니까?”
“괜찮아……. 안 괜찮을 건 또 뭐 있겠어.”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얼굴이 오히려 더 신경을 쓰게 만든 모양이었다. 태자궁으로 돌아가는 내내 입술을 잘근거리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나를 달랬다.
“왕비 마마께서 하신 말씀을 모두 마음에 담아 두진 마시옵소서.”
“아니야. 다 맞는 말씀만 하셨는걸.”
‘아들’을 걱정하고 꾸짖는 말에는 하등 틀린 곳이 없었다. 내 위치를 일깨워 줬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모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더니 대뜸 말문을 열었다.
“……세상엔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도 많사옵니다.”
“어?”
“일례로, 소인은 하루아침에 지아비와 갓 태어난 자식을 모두 잃은 적이 있지요. 그때 소인은 혼례를 다시 치를 바에야 목숨을 끊으려 했사옵니다.”
덤덤한 말투였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잠시 뒤에야 간신히 멍청한 대답을 꺼내놓을 수 있었다.
“……몰랐어.”
“다행히 은덕을 입어 이리 태자 저하를 모시게 되었으니 과거 일을 들출 일이 뭐가 있겠사옵니까.”
유모의 얼굴은 그녀의 말대로 정말 다 잊은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기억은 평생을 걸쳐 노력해도 떨쳐낼 수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때 누군가 제게 몸 성히 도망갈 기회를 주었더라면 필경 붙잡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여에는 소인과 같은 사람들이 더 살고 있겠지요.”
나는 유모가 과거를 털어놓으면서까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알아차렸다. 내가 왕비님께 형사취수제를 들쑤신 일로 단단히 혼이 났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나는 그저 이곳이 내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모는 ‘태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힘주어 속삭였다.
“저하. 저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모두가 옳다고 여길 순 없을 것이옵니다.”
“…….”
“그러나 적어도 누군가에겐 옳은 일이옵니다.”
그녀가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 가득한 진심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는 그대로 들리지 않을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알까?
“겪지 않고도 그 아픔을 헤아릴 줄 아시는 태자 저하의 심성은 장차 왕위에 오르셨을 때 가장 빛을 발할 것이옵니다.”
왕위에 오를 자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겪지 않아도 남을 헤아릴 수 있는 심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겪었기에 그 아픔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뿐이라는 것을.
정작 당신의 진실된 충성과 걱정을 받아야 할 이는 이곳에 없는데.
타인의 진심을 가로채는 일은 독을 먹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나는 멍하니 서서 유모가 내미는 독을 그대로 받아 삼켰다. 이것이 그릇된 껍데기가 주제도 모르고 활개를 친 것의 대가라면 기꺼이 감당해야 했다.
“그러니 조금만 귀한 몸을 아껴주십사 간청드리옵니다. 저하께서 마음에 새기셔야 할 부분은 오로지 그뿐이옵니다.”
“알겠어. 어차피 그러려고 했어. ……이젠.”
내 몸도 아닌 것을 함부로 다룰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무엇이든 더 고민하고 생각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며칠 후, 근신이 풀리고 참석한 첫 회의에서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회의장을 나왔다. 그저 목각 인형처럼 자리만 채웠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