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27)
  • 5.

    발단은 궁인이 지나가는 투로 물은 질문이었다.

    “저하. 오늘 석반도 중해 도련님과 함께 잡수시옵니까?”

    “내가 왜?”

    난데없는 질문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서 진심을 내뱉고 말았다. 멀리하려고 애쓰고 있는 대상이 갑자기 왜 튀어나오나 싶었다.

    그러나 당황한 것치고는 꽤 괜찮은 반문이었다. 내 대답 어디에서도 내가 주몽에게 애정이 있다는 티는 나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심기가 불편하다는 티도 내기 위해 인상을 팍팍 썼다. 효과가 있었는지 궁인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송구하옵니다. 요새 종종 같이 잡수시기에……. 소인은 그저….”

    “나, 나 걔랑 안 친해.”

    나는 조급함에 그녀의 말도 끊고 볼품없는 변명을 내뱉었다. 궁인이 당황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옆에서 같이 고개를 숙이고 섰던 다른 궁인이 잽싸게 나서서 말을 이었다.

    “안심하시옵소서. 비밀은 소인들의 목숨을 걸고 꼭 지키겠나이다.”

    무슨 비밀……? 되묻고 싶었지만 때마침 잠시 나갔던 태령이 방에 들어서고 있었다. 궁인들이 일사불란하게 물러나더니 점심상을 들여왔다. 나는 그만 물어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

    그러나 태령과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도 찜찜함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나보고 주몽과 저녁을 먹을 거냐고 자연스럽게 묻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아무래도 궁인들이 내 위장을 알아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온종일 붙어 있는 태령도 알아차렸을까. 나는 뜨던 숟가락을 멈춘 채 태령을 바라보았다. 그는 태평한 얼굴로 고깃국을 떠먹고 있었다. 나는 고심하다가 슬쩍 떠보았다.

    “나 오늘 석반은 해랑 먹을 거야.”

    “아. 네.”

    “……그게 다야?”

    “음, 그럼 저는 미리 퇴궐하겠습니다?”

    의아함이라곤 전혀 묻어나오지 않는 태평한 얼굴이었다. 주몽이랑 밥을 먹겠다고 선언했는데도 저런 태연한 반응이라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결국 불길함을 털어내지 못하고 그에게 되묻고 말았다.

    “너 왜 내가 해랑 밥 먹겠다는데 순순히 자리를 비켜줘? 처음에는 막 같이 있겠다며 나섰잖아.”

    “이제 와서 새삼 무슨 소리십니까, 그동안 길 가다 자주 데려와 놓으시고선. 그러고 보니 정식 약속은 처음이신 것 같네요.”

    어쩐지 따지는 말투가 되었지만 태령은 오히려 물어보는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는 밥이나 마저 드시라며 수저질을 계속했다.

    그러나 나는 충격을 받아 그대로 굳어버린 뒤였다. 내가 그렇게 자주 데려왔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나름 뜸하게 데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나만의 착각이었던 듯싶었다.

    “……내가 왜 그랬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저하께서 데려와 놓….”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나 걔랑 안 친하다.”

    그가 얼굴 반쪽을 기괴하게 일그러뜨렸다. 말도 안 된다는 소리를 표정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꿋꿋하게 불화설을 주장했다.

    “오늘 석반을 해랑 먹는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내가 왜 그 아이랑 식사 약속을 잡겠어.”

    “예에…. 마저 드세요.”

    먼저 포기한 것은 태령이었다. 그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말투가 협보랑 똑같았다.

    그러나 나는 말을 더 잇기를 포기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데, 어쩐지 내가 그 짓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정황상 들통난 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 새어 나간 건지. 한 거라곤 저녁 먹인 것뿐인데.

    아, 얼마 전에 좋다던 붓을 몰래 챙겨주긴 했었다. 그전에도 보약이랑, 약과랑, 음, 새로 들어왔다던 옷감을 보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차피 모두 협보를 통해 전달한 것이기 때문에 내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렸을 리가 없었다.

    그냥 마음 같아선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며 내가 사실 주몽을 미워하지 않는 걸 아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말도 못 하고 눈치만 보며 식사를 마무리했다. 괜히 캐물었다가 긁어 부스럼만 만들까 봐 무서웠다.

    늦은 오후에는 별궁으로 향했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같은 고민이 머물러 있는 상태였다. 결국 나는 이번 일로 경각심을 가지고 좀 더 열심히 주몽을 밀어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앞으론 같이 저녁 먹자고 찾아와도 열에 한 번만 데려가야지. 아니, 자주 찾아오는 것도 아닌데 다섯에 한 번으로 할까…….

    흐려지는 이성이 감정과 타협하는 동안 발은 부지런히 제 할 일을 했다. 태령이 툭툭 쳐서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별궁에 도착한 뒤였다. 나는 그가 돌아가는 걸 확인한 뒤 별궁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안에는 선객이 있었다. 남자는 손때가 탄 장부를 뒤적거리다 날 보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내가 말릴 새도 없이 큰절을 올리며 외쳤다.

    “어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누군가 했더니. 자네가 와 있었는가.”

    나는 눈가를 찡그리며 마주 웃어주었다. 호들갑을 떨며 날 맞이해주는 자는 바로 그림책 판매를 도맡은 책 장수였다. 그는 정기적으로 보고를 하기 위해 별궁에 들렀다. 오늘이 마침 협보와 장부를 확인하는 날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와 마주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의 과장된 아부성 발언은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장사꾼은 기민한 눈치로 내 신분이 이곳에서 가장 높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어유 도련님. 요즘 도련님 덕분에 아주 그냥 제가 몸이 한 개라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다행히 태자인 것까진 알아차리지 못한 듯싶지만. 나는 하하 웃으며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도 그는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시키지도 않은 말들을 술술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업이 이만큼 번창했고 귀족들이 어찌나 좋아하는지, 심지어 초판을 구하려는 경쟁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의 말대로 지난 1년간 유화의 그림책 사업은 대박을 쳤다. 귀족들은 ‘그림 이야기’라는 새로운 물건에 열광했다. 어린아이가 나가서 평민들 사이에 섞여 이야기를 듣는 것도 꺼려지고, 그렇다고 이야기꾼을 들이기도 좀 그랬던 이들에게 그림책은 딱 좋은 물건이었다. 심지어 이것 하나만 있으면 아이가 글공부에도 관심을 보이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게다가 그림이 아름다워서 성인들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들었다. 초판 경쟁은 대부분 그들이 벌이는 싸움이었다. 아무래도 핸드메이드의 특성상 조금만 풀리는 재고가 귀족들의 소장 욕구를 자극한 듯싶었다.

    책 장수는 이어서 입이 마르도록 내 칭찬을 해댔다.

    “그리고 요새 들어 기부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평민들이 매일 밤 도련님의 은혜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합니다. 아주 명성이 자자해요.”

    “아하하…….”

    우리는 유화의 의견에 따라 몇 달 전부터 기부를 하고 있었다. 그림책 사업이 생각보다 큰 반향을 불러오며 날이 갈수록 재산이 불어나고 있어서였다. 우리는 늘어난 재산을 처리할 곳이 없어 난감함에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그러나 나는 풍족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태자였고 유화는 재산에 미련이 없었다. 아직 어린 데다 마가네 자식인 협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우리는 사업을 기획했던 태초의 목적을 살려 굶주린 사람들을 돕기로 결정했다.

    초반에는 익명으로 기부하려고 했다. 그러나 채색을 돕는 궁인들에게서 자칫하면 재주는 우리가 부리고 명성은 생판 모르는 귀족들이 가져갈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우리는 그림책에 찍었던 도장 그림을 크게 그려 함께 나눠주었다.

    하지만 고작 그 그림 하나로 평민들 사이에 내 명성이 자자할 리는 없었다. 그림책은 귀족들에게만 유통되니 평민들이 그게 우리 문양임을 알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설마 기부자 중 한 명이 태자라는 걸 알아차릴까. 이렇게 얼굴까지 맞대고 있는 책 장수도 모르는걸. 애초에 그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도장을 활용하여 기부자를 알린 것이기도 했다.

    나는 결국 역시 그가 장사꾼이라 그런지 날이 갈수록 아부하는 실력이 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칭찬은 고맙지만 자네 과장이 조금 심한 듯싶어.”

    “과장이 아닙니다, 도련님!”

    그가 답답하다는 듯이 제 가슴을 쳤다. 그 뒤로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나는 시종일관 웃으며 흘려 넘겼다.

    띠링―

    “……어?”

    웃음이 잦아든 것은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난데없이 등장한 이질적인 음에 나는 목을 뻣뻣하게 굳혔다. 이 알림음이 맥락 없이 등장하는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허공에는 지긋지긋한 반투명 창이 떠 있었다.

    [메인] 드러나는 존재 (1/2)

    드디어 ‘중해’가 7살이 되었습니다. 7살이면 숨겨진 재능을 발굴해내기에 적당한 나이입니다. ‘중해’에게 활쏘기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세요.

    성공 시 보상 : 퀘스트 ‘드러나는 존재 (2/2)’ 오픈, ‘중해’의 재능 발굴

    실패 시 결말 : ‘중해’의 재능 박탈, ‘하백’과 ‘창조주’의 분노로 세상 멸망

    메인 퀘스트는 고군분투하며 알을 지켜야 했던 ‘황금빛 알’ 퀘스트 이후로 처음이었다. 몇 년 만에 마주한 메인 퀘스트의 ‘실패 시 결말’은 기억대로 서브 퀘스트나 도전 퀘스트와 비교할 수 없을 만치 끔찍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곳에서 7년을 보낸 뒤 다시 마주하는 메인 퀘스트는 갑자기 뚝 떨어져서 해내기에 급급했던 그날과 느낌이 사뭇 달랐다. 단 한 번의 실수로 그동안 견디며 쌓아왔던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부담감에 양어깨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도련님?”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 내가 이상했는지 책 장수가 나를 슬쩍 불렀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아, 미안하네. 뭐라고 말했지?”

    “그것이….”

    그러나 다시 시작되는 대화에도 집중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내 멍한 정신 상태를 눈치챈 협보가 장부나 마저 확인하자며 책 장수의 주의를 돌렸다. 다행히 그는 지난 1년간 이 꼬맹이가 겉보기와는 달리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겪은 뒤였다. 둘은 곧 장부 정리에 집중했다.

    잠시 시선에서 벗어나게 된 나는 아직 치우지 않은 퀘스트 창을 다시 읽어내렸다.

    “음…….”

    퀘스트 자체는 간단했다. 드디어 7살이 된 주몽에게 활을 가르치고 재능이 있음을 깨닫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성공 시 오픈될 2단계가 무엇일지 궁금했지만 영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아이에게 어떻게 활을 가르치느냔 건데.

    한창 우 대사자와 함께 글공부를 하고 있을 주몽이 무예도 배우고 싶어 할지 의문이었다. 억지로 시킬 순 있겠지만 그랬다간 활쏘기에 반감을 가지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몰랐다. 앞으로 평생 뽐내야 할 재주인데 이왕이면 첫인상을 좋게 가지길 바랐다. 좋아하는 일과 재능이 겹치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고.

    나는 우선 주몽이 활을 쏘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유도하는 일부터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럼 이젠 그 유도하기까지의 과정이 고민인데.

    내가 서안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는 동안 어느새 그들은 장부 확인을 마치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책 장수가 몸을 미적거리며 나에게 깍듯이 절을 올렸다. 그렇게 떠들고도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나는 모른 척 그를 내보냈다.

    뒤이은 협보의 보고가 끝났을 때쯤에는 창밖으로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돌아갈 준비를 했다. 애초에 늦은 시간에 왔기 때문에 머무르는 시간도 짧았다. 작별 인사를 건네고 나온 나는 다시 태령과 함께 태자궁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퀘스트 고민으로 머리가 가득 차 넋을 놓고 걷고 있을 때였다. 모퉁이를 도는데 낯익은 머리통이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춰 세웠다. 태령은 날 힐끗 보더니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났다. 익숙한 상황이었지만 점심에 그런 대화를 나눠서인지 평소처럼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이미 주몽은 날 보자마자 수줍게 웃으며 다가와 있었다.

    아이가 눈을 예쁘게 휘며 내게 인사말을 건넸다.

    “형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응. 뭐…….”

    ‘너도 잘 지냈어?’라는 말은 목구멍에 도로 쑤셔 넣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태령이 신경 쓰였다. 나는 초조함에 발을 탁탁 구르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유모의 잔소리를 떠올리고 멈췄다. 오늘은 꼭 거절해야 하는데. 벌써부터 흔들리는 다짐을 하는 동안 아이는 머뭇거리며 용건을 꺼냈다.

    “혹시 형님께 폐가 되지 않는다면…….”

    말끝을 흐렸지만 매번 들은 말이라 뒷말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초롱초롱한 눈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까 봐 나는 일부러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주몽이 두 손을 귀엽게 모은 모습이 보였다. 지금 부탁한다고 저러고 있는 거야? 진짜 깜찍하다.

    크흠.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게 아닌데. 나는 더 홀리기 전에 서둘러 생각해 두었던 거절의 말을 꺼냈다.

    “어, 오늘은 조금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이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물어왔다. 이런 식의 애매한 거절은 한 번도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여기서 ‘내가 왜 너랑 밥을 먹어.’라고 하면 될 텐데. 얼굴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또 빙빙 돌리는 말만 나왔다.

    “그으런건 아니고….”

    아이는 삽시간에 시무룩해졌다. 한껏 올라갔던 입꼬리가 축 늘어지더니 모았던 양손이 툭 떨어졌다. 푹 숙인 고개에서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말을 물리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오늘만큼은 진짜 데려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태자 자존심이 있지, 태령과 궁인들 모두한테 오늘은 같이 안 먹을 거라고 얘기했었는데.

    한동안 침묵만 오갔다. 태령이 헛기침을 두 번 더 했을 때쯤, 아이는 비단신 앞코로 흙을 이리저리 문대다 조용히 중얼거렸다.

    “제가 괜한 말을 꺼냈나 봅니다. 이런 날이면 괜히 궁이 쓸쓸해서…….”

    어린아이치고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몇 번 깜빡이더니 큰 눈에 금세 물기가 고였다. 아이의 입에선 입김이 하얗게 올라왔다. 때마침 찬 바람도 씽 불어 옷자락을 흔들었다. 내 마음도 빠르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해가 지면 퇴궐하는 궁인들로만 차 있는 북녘궁이 떠올랐다. 같이 저녁을 먹을 사람 한 명 없는 외로운 궁.

    할 말을 찾아 입만 달싹거리는데 주몽이 당황했는지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아, 아닙니다. 하나도 외롭지 않습니다. 형님이 계신 곳은 불이 밝아 보고만 있어도 따뜻합니다.”

    그러면서 배시시 웃는데 마음 찢어진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주몽의 방은 태자궁 쪽으로 창이 나 있지 않았다. 그 작은 궁에서 내 쪽으로 창이 나 있는 곳이라곤 공부방이 다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머리에 돌을 맞은 것 같았다. 그러나 주몽은 끝까지 날 배려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금세 어둑해지는데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그, 제가 괜한 말을 꺼내서, 죄송합니다.”

    “생각해보니까 별일 없는 것 같네! 가자! 형님이랑 밥 먹으러 가자!”

    옆으로 한 발자국 걸어 나온 태령이 어이없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불과 몇 시간 전에 한 말이 떠올라 얼굴이 홧홧했다. 그러나 도저히 죄책감에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자그맣고 말간 얼굴을 봐. 그간 혼자 얼마나 외로웠으면 자신을 박대하는 형을 찾아와 저녁을 같이 먹으면 안 되냐고 물었을까. 자존심 어쩌구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린 뒤였다.

    나는 아이를 앞세우고 태자궁으로 걸어갔다. 옆에서 태령이 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석반 같이 안 잡수신다면서요?”

    “다 사정이 있었어. 사정이…….”

    그래! 퀘스트!

    핑곗거리로 무심코 한 말이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용건이 떠올랐다. 밥을 먹으며 넌지시 활쏘기에 대해 물어보면 될 것 같았다.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차피 ‘진짜’ 태자도 아닌데 자존심 좀 상하면 어떠냐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일은 다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 데려가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런 사정을 모르는 태령은 여전히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혼자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뭐… 어차피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제가 본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결과물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닥치고 마저 걸어갔다.

    문제는 태자궁에 도착했을 때 생겼다. 이곳에도 예상치 못했던 선객이 있었던 것이었다. 하필이면 내 동행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책 장수보다 질이 나빴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가람아. 여긴 웬일이야?”

    “형님을 뵈러 왔지요. 아침에 미리 언질을 해두었는데 전해 듣지 못하셨습니까?”

    가람이는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흉흉한 기세로 주몽을 노려보았다. 주몽이 내 눈치를 보더니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소맷자락 사이로 꼼질거리는 작은 손이 보였다.

    “개판이네…….”

    옆에서 태령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나는 조용히 그의 발이 으스러지도록 밟았다.

    가람이는 미리 말을 했다지만 난 궁인으로부터 아무런 언질을 받은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아침에 주몽과 함께 저녁을 먹냐고 물었던 이유가 가람이 온다는 소식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괜히 내 과민반응에 대응하느라 전하는 걸 잊은 듯 했다.

    “네가 온다는 말은 못 들었어. 미안해.”

    나는 우선 등 뒤로 주몽을 슬쩍 숨기며 사과를 건넸다.

    “저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가람의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유모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확실히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궁인의 잘못이긴 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가 보였던 과민반응에 이미 부끄러운 일들을 충분히 겪은 참이었다. 나는 일을 조용히 묻자는 시선을 마구 보냈다. 유모는 자연스럽게 그 시선을 회피했다.

    대신 가람이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대답했다.

    “일부러 데려오신 게 아니라면 됐습니다.”

    어느 정도 일부러 데려온 건 맞았던 나는 입매를 움찔거렸다. 찔리는 마음에 괜히 시선을 돌리자 가람이 겉옷 한 벌 걸치지 않고 나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추운데 가람이네 궁인들은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나는 깜짝 놀라 아이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춥게 입고 왔어. 안 추워?”

    “잠깐 마중만….”

    그때 뒤에 숨어 있던 주몽이 불쑥 내 옆구리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커다랗고 순진한 눈망울이 아래에서 날 올려다보았다. 때아닌 재롱에 가람의 말을 듣고 있었던 나는 순식간에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버렸다.

    넋을 놓고 눈을 마주하는데 옆에서 내 발뒤꿈치를 툭툭 채는 발길질이 느껴졌다. 태령이 뻣뻣하게 서서 목각인형처럼 발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어 줄 뻔했던 손을 황급히 내렸다. 앞에서 노려보는 가람의 시선이 매우 따가웠다. 나는 서둘러 듣고 있었다는 티를 내기 위해 공감의 말을 주워섬겼다.

    “어, 어? 그치, 많이 춥지.”

    “…전혀 안 춥습니다! 요새 훈련을 열심히 했더니 이 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 떨고 있는데? 호기롭게 외친 것에 비해 아이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뒤에서 주몽이 내 옷자락을 연약한 손짓으로 톡톡 잡아당겼다.

    “형님……. 저는 춥습니다.”

    “어? 추워? 마태령, 너 뭐 덮을 거 없어?”

    태령이 양손을 펼쳐 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내 털장갑을 벗으려다 주변을 의식하고 그만두었다. 차라리 다 같이 안으로 들어가는 편이 눈에 덜 띌 것 같았다. 가람이가 옷을 얇게 입기도 했고.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때마침 유모가 적당한 말을 꺼냈다.

    “일단 바람이 차니 안으로 드시옵소서.”

    “난 안 춥다고 하지 않았느냐!”

    가람이 빽 소리를 질렀다. 뻗대는 말에는 너도 감히 저 아이를 신경 쓰는 것이냐는 물음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유모는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태자 저하께서 추우십니다.”

    “아.”

    아이들의 얼굴에 깨달음의 빛이 스쳤다. 그들은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자연스럽게 장갑을 다시 올려 끼고 뒤를 따랐다. 나이 많은 형이 춥다니까 순순히 자리를 옮겨주는 게 고맙고 기특했다.

    그러나 방 안으로 들어가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마주 앉은 두 아이는 마치 육식동물 앞에 초식동물을 앉혀놓은 형국이었다. 가람이는 시종일관 무시무시한 얼굴로 노려보고 주몽은 잔뜩 기가 죽어서 움츠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면한 것이 아마도 2년 전, 가람이 그를 윽박지르던 모습이었을 테니 주몽이 무서워할 만도 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도 어디서부터 이 상황에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말재주가 좋은 태령이라도 있었으면 했지만 그는 이미 망할 대로 망한 분위기를 파악하고 탈출해버린 지 오래였다. 한동안 침묵만이 오가는데 한 궁인이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태자 저하. 석반 준비는 어떻게 하면 되겠사옵니까.”

    나는 두 아이를 번갈아 보았다. 이쯤이면 한 명이 눈치껏 “저는 다음에 오겠습니다.” 하고 나가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둘은 미동도 없었다. 보아하니 아무도 나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가람이는 당연히 주몽이 나가야 한다는 태도였고 대외적으론 주몽을 미워하고 있는 나도 가람 대신 주몽을 들일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비록 전해 듣진 못했지만 명백히 가람이와의 약속이 먼저였다.

    그렇다고 주몽을 내쫓자니 그것도 마음에 걸렸다. 이 여린 애가 얼마나 북녘궁이 외로우면 가람의 핍박에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나 싶어서였다. 그 생각을 하니 차마 보낼 수가 없었다. 한참 앓는 소리를 낸 나는 결국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셋이서 먹을 테니 그리 알고 준비해줘.”

    가람이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제일 윗사람인 내가 그렇게 말해버리니 궁인을 잡아다 말하진 못하겠고, 대신 얼굴로만 잔뜩 항의했다. 나는 아이와 눈을 마주하고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신 가람이가 오랜만에 태자궁에 왔으니 가람이가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부탁해.”

    대답을 들은 궁인이 허리를 한 번 깊게 숙인 뒤 방 밖으로 나갔다. 가람이는 다시 고개를 홱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드러난 귀가 빨개져 있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몰래 내쉬었다.

    이제 방 안 분위기는 바뀌어 가람이 주몽을 바라보는 시선엔 우쭐함이 조금 섞여 있었다. 하지만 2년 전처럼 소리를 내어 비꼬거나 주몽에게 상처를 주진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새삼 가람이가 자랐다는 것을 느꼈다. 아이의 내적 성장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럴까.

    대견한 마음으로 둘을 지켜보는데 주몽도 아까보다 차분해져 있었다. 가람이가 좀 누그러진 덕분에 잔뜩 위축되어 있던 마음도 안정을 찾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내가 살살 눈치를 보며 대화를 시도하고 있을 때였다. 예상치 못한 일로 조금 늦어졌던 저녁상이 방 안에 차려졌다. 내 특별 주문에 따라 상은 가람이의 달달한 입맛에 맞춘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홍고추를 올려 멋을 낸 육전을 잘라 가람의 숟가락에 얹어주었다. 밥을 뜨던 아이가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는 생긋 웃으며 어서 먹으라고 손짓했다.

    주몽에겐 의도적으로 관심을 주지 않았다. 평소라면 잔뜩 밀어줬을 불고기 접시에 눈길이 자꾸 갔지만 애써 참았다. 내가 사실은 주몽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절대 들켜선 안 되는 사람이 옆에 앉아 있었다. 얘가 알게 되면 다른 의미로 어떤 사달이 날지 몰랐다.

    무엇보다도 열 살의 의젓함이 가람의 짜증을 눌러주고 있는 게 보이는데, 미안해서라도 티를 내선 안 됐다. 다행히 옆에서 가람이가 끊임없이 말을 거니 평소보다 주몽을 챙겨주고 싶은 충동을 참는 게 쉬웠다.

    “…해서, 요즘은 목검으로 대련을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된 주제는 가람의 하루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무술 연습이었다.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요즘 자신이 이뤄낸 성과에 대해 자랑했다.

    나는 무예에 문외한이었지만 종종 만나는 마 대사자로부터 가람의 뛰어난 성적을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초반에 무예를 배우겠다고 나선 가람의 결심을 비웃은 게 미안할 정도로 아이는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배웠다. 나는 새삼 가람을 믿어주지 못한 것을 반성하며 칭찬을 가득 해주었다.

    그리고 칭찬을 듬뿍 받은 아이는 아닌 척하며 계속 주몽을 힐끔댔다. 눈동자에 설렘과 흥분이 가득 차서 어찌나 티를 내는지. 오늘은 주몽에게 관심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한 나마저도 눈길을 주고 말았다.

    “…….”

    처음으로 제대로 본 아이는 눈에 띄게 시무룩한 모습이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그 좋아하던 불고기도 깨작댔다. 옆에서 은근슬쩍 챙겨주던 궁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주몽은 누가 봐도 지금 이 상황에 의기소침해하고 있었다.

    “……음.”

    그러나 그 모습에 오히려 나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주몽은 유독 칭찬에 목말라하는 아이였다. 나를 찾아올 때마다 항상 공부한 책을 가득 싸 들고 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칭찬을 좋아하는 아이가,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남이 칭찬받는 걸 본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 길을 가고 싶어지지 않을까?

    지금이다. 지금이 딱 활에 관심을 갖도록 꼬시기 좋을 때다.

    계시라도 받듯 섬광 같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우선 가람이에게 말을 걸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흐름을 틀어야 했다.

    “매일 검술 이야기만 듣는 것 같은데. 궁술은 안 배워?”

    “스승님께서 제 손은 활보다 검을 잡는 게 나은 손이라 말씀하셔서, 우선은 검만 익히고 있습니다.”

    “그래? 아쉽네…….”

    부정적인 기운을 흘리는 애매한 말에 주몽이 숟가락질을 멈췄다. 나는 괜히 말꼬리를 질질 늘리며 국을 휘적댔다. 이마를 찡그린 가람이 뭐가 아쉬우시냐며 나를 재촉했다. 나는 주몽이 이쪽에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을 확인한 뒤 미끼를 던졌다.

    “아니, 얼마 전에 궁술을 연마하는 궁병들을 보았는데 그게 그렇게 멋있더라고. 활 잘 쏘는 사람이 진짜 최고인 것 같아. 활이라는 게 원래 매력적인 무기잖아.”

    혹시 놓칠까 봐 세 번이나 강조했다. 애꿎게 휘말린 가람이 또다시 주몽을 힐끗 보더니 호기롭게 외쳤다.

    “형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당장 내일 가서 스승님께 활을 가르쳐달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활에 어울리는 손은 아니지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했으니 꼭 잘 쏠 수 있게 될 거예요!”

    재깍 반응이 오는 가람과 달리 주몽은 생각에 깊게 잠긴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미끼는 던져졌고, 나는 누구보다도 기다림에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어차피 오늘 목표는 활쏘기에 호감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배워보겠냐고 묻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도 충분했다. 나는 더 말을 얹지 않은 채 식사를 마무리했다.

    ***

    “저하. 기침하실 시간이옵니다.”

    어스름한 해의 흔적도 비치지 않는 시간에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에는 눈이 되지 못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어제 오전부터 장대같이 쏟아지던 비는 빗줄기만 약해졌을 뿐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더불어 가라앉은 기운으로 세안을 마쳤다.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의복까지 갖춰 입자 궁인들이 조반을 내왔다. 평소보다 느릿한 수저질로 밥을 뜨며 한껏 늦장을 부렸다. 옆에서 보다 못한 유모가 은근히 재촉을 했다.

    “태자 저하. 이러다 회의에 늦겠사옵니다.”

    “응…….”

    하기 싫은 일을 앞뒀으니 속도가 날 리 만무했다. 그러나 나는 애써 밥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해가 되어 가장 달라진 점은 정기적으로 국정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본래 태자는 일정 나이가 되면 나랏일에 참여하며 경험을 쌓아야 했다. 그래도 13살은 상당히 이른 나이에 속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태자 저하께선 충분히 영민하시고 신의 선택을 받으셨기 때문’이라며 내 참석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에 나도 신이 강림했던 효과가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건가 싶어 아무런 의심 없이 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떨리는 마음을 안고 참석한 첫날, 나는 말 그대로 멍청히 ‘구경’만 하다 돌아왔다. 귀족들은 쉴 새 없이 안건을 내놓았으며, 뭣 좀 파악했다 싶으면 다음 안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말 붙일 구석 하나 찾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들은 그들만의 단단한 성벽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첫날이니까, 내가 아직 미숙해서 그럴 거야.’

    나는 회의가 끝나고 터덜터덜 걸어 나오며 스스로를 달랬다. 태자궁에 가서는 곧장 다음 회의를 준비했다. 마음 같아선 포기하고 싶었지만 전날 밤 불안해하면서도 기대감에 차 있던 왕비님의 눈을 떠올리면 목각인형처럼 앉아만 있다 올 순 없었다. 그녀의 진짜 ‘태자’가 아니라는 죄책감이 나를 짓눌렀다.

    칠 일 뒤, 나는 한숨도 자지 않고 만반의 준비를 해서 회의장에 발을 들였다. 오늘은 꼭 한마디라도 해야지.

    소박한 다짐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갔기 때문인지 회의의 흐름은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딱 그뿐이었다. 회의를 마칠 때쯤 나는 발언할 기회를 놓친 게 아니라 애초에 내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마음을 비운 세 번째 회의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국정 회의는 전쟁터였다. 의도를 겹겹이 감춘 말들이 탁상 위를 넘나들었으며 물밑에서는 탐욕스러운 거래가 오갔다. 주도자는 사출도를 다스리는 중앙 귀족들이었고 ‘아버지’인 왕조차 귀족들에게 반박하지 않았다.

    그 한복판 어디에서도 나를 존중하는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귀족들은 끊임없이 힐긋거리며 말 한마디 못 하는 내가 충분히 억눌렸는지를 확인했다. 수천 개의 바늘이 찌르는 것 같았던 시간이 끝난 뒤에는 그들의 의도를 철저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나의 정치적 입지를 줄여놓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른 이유는 머리가 더 크기 전에 ‘정치란 이런 것이다’라며 기를 죽여놓기 위함이었다. ‘감히’ 영역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선 어릴 때부터 서서히 각인시키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몇 년 전 배움의 기회를 끊은 것도 모자라 이렇게 가랑비에 옷 젖듯 허수아비로 만들 모양이었다.

    그럼 신과 소통하는 능력은 정치적인 측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건가?

    문득 의문이 생겼다. 내가 그들에게 신을 위해 쌀을 내놓으라 하면 그들은 가마니를 몇 개고 내놓을 테다. 하지만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위해 내놓으라 하면 과연 몇 개나 내놓을까?

    주몽은 이제 겨우 7살이었다. 나는 어림잡아도 최소 10년은 이곳에 더 있어야 했다. 그동안 매번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귀족들에게 끌려다닐 순 없었다.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왕비님의 간절한 바람을 떠올리면 숨이 턱 막혀왔다. 그녀 때문이 아니더라도 내가 뿌린 나태의 씨앗은 그대로 자라 뒤를 이을 가람이의 사지를 묶을 것이다.

    나를 압박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내세울 무기는 ‘신’밖에 없었다. 과연 ‘신성함’을 방패로 내세운 나의 정치적 참견을 그들이 어디까지 눈감아 줄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나는 과감히 그 마지노선을 향해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다. 아직 회의에 참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철없음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지금이 적기였다. 잘만 활용한다면 떠나기 전까지 왕비님과 가람이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수확을 올리고 편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할 수 있다……. 잘할 수 있어.”

    오늘이 바로 그 첫날이었다. 회의가 이뤄지는 궁에 도착했을 때는 가느다랗던 빗줄기가 다시금 굵어져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회의장에 들어섰다.

    다행히 내 첫 도전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이뤄졌다.

    “전하! 소신의 지방에 산불이 나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사옵니다!”

    회의 도중 장지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쫄딱 젖은 그는 바닥에 엎드려 토하듯 읍소했다. 정제되지 못한 옷차림과 뚝뚝 흐르는 빗물이 그의 다급함을 드러냈다.

    무감각하게 회의를 진행하던 왕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손짓을 했다. 명을 받은 궁인이 그에게 마른 천을 가져다주었다. 그가 물기를 닦으며 숨을 고르는 사이 웅성대던 귀족들은 산불이 적힌 보고를 찾아 상소문을 뒤적거렸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산불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구슬땀을 잔뜩 흘리던 담당 귀족이 결국 지도를 꺼내와 탁자 위에 펼쳤다. 정교하진 않아도 대부분의 큰 지형과 사출도의 구역이 나뉘어 그려진 지도였다. 비 냄새를 풍기는 귀족은 벌벌 떨며 다가와 산불이 난 지점을 짚어주었다.

    “마 대사자의 관할 지방이로군.”

    유심히 바라보던 왕이 지방을 파악하고 중얼거렸다. 지도에서 손을 뗀 그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엎드렸다. 미처 다 말리지 못한 머리에서 빗방울이 튀었다.

    “예, 예. 그렇사옵니다. 저는 마 대사자님 아래서 한 지방을 맡아 관리하고 있사옵니다.”

    부여는 너무 커서 사출도로 나눠 다스린다 해도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각 가문별로 지방을 또 쪼개어 사람을 두었는데 그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고했다.

    “사, 산불이 난 것은 칠 일 전이옵니다. 불길은 잡힐 줄 모르고 타올라 인근 모든 집을 불살라 버리고 나서야 잠잠해졌사옵니다. 그, 그에 사람들이 터전을 잃고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는데, 아직 날이 춥고 비까지 내려 죽어가는 사람이 늘고 있사옵니다…….”

    보통 지방에서 일이 벌어지면 우선 대사자가 처리를 하고, 그의 선에서 처리하기 힘든 일만 국정 회의에 올라왔다. 이렇게 소귀족이 바로 왕에게 읍소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끔찍한 재난에도 모두가 마 대사자의 눈치만 보았다. 다른 사람의 관할 구역 일에 말을 함부로 얹기가 꺼려질 만도 했다.

    조용히 콧수염만 매만지던 마 대사자가 드디어 입을 뗐다.

    “이미 지원을 보냈을 텐데. 자네가 너무 성급히 달려온 것이 아닌가 싶군.”

    “그것이…… 보내주신 양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하하. 그럼 나에게 따로 오면 될 것을. 내 언제 충분히 지원을 하지 않은 적이 있었소?”

    “…….”

    기묘한 침묵이 회의장을 덮었다. 모두들 앞에 놓인 상소문만 내려다보며 그를 외면했다. 끔찍할 정도의 적막 속에서 마 대사자가 자기 몫의 차를 마시는 소리만 들렸다. 이제 소귀족은 안타까울 정도로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지금이 내가 나설 적기라고 판단했다. 과연 나의 ‘무례함’을 어디까지 용인해줄 수 있을까? 나는 침묵이 조금 더 깊어지길 기다렸다가 운을 띄웠다.

    “그의 사정이 안타까운데 다른 분들도 지원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

    마 대사자가 마시던 차를 내려놓았다. 찻잔이 받침대에 부딪히며 달그락, 소리를 냈다. 소귀족의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귀족들은 눈짓을 주고받으며 입을 열었다 닫길 반복했다. 불안한 침묵이 내 전신을 감쌀 때쯤 우 대사자가 입을 열었다.

    “그러지요. 저도 우가에 파발을 보내 재난민을 도울 쌀을 보내라 이르겠습니다.”

    별일이 아니라는 듯 평연한 말투였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가(狗加)의 대사자도 입을 열었다.

    “저하의 마음씨가 참으로 곱습니다. 저도 돕지요.”

    그 외에도 이곳저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날아들었다. 자처하는 이들이 늘수록 마 대사자의 표정은 굳어갔다. 그러나 그는 곧 호탕하게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잠시간 체면치레가 서로를 오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 몰래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의 가벼운 정치적 참견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의 지방에 사는 백성을 돕겠다는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보다 나는 도움을 줘야 하는 다른 귀족들이 더 신경 쓰였지만 다행히 다들 크게 불쾌함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나름 신의 영향력이 있긴 한 모양이지.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회의를 마저 구경했다.

    끝난 뒤엔 유화에게 들러 이번에 산불이 난 곳에 쌀을 기부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다행히 그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쌀들이 합쳐지면 빗물만큼이나 눈물을 흘리던 그 귀족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오늘 내가 이룬 일들에 대해 뿌듯함을 안고 태자궁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오후에 할 일을 점검했다. 특별히 할 일이 없어 마음을 놓는데 느닷없이 ‘띠링―’ 하는 익숙한 소리와 함께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메인] 드러나는 존재 (1/2) - 완료

    ‘중해’가 자신이 활쏘기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그의 궁술은 날이 다르게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보상으로 다음 퀘스트 ‘드러나는 존재 (2/2)’가 오픈됩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주몽과는 지난번 식사를 마지막으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번에 마주치면 꼭 활쏘기를 적극 추천하려고 벼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대뜸 퀘스트 완료 창이라니? 궁인이 왜 그러시냐며 묻는데 너무 놀라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재능을 일깨웠다는 것은 최소 한 번은 활을 쏴봤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활 쏘는 방법을 깨우쳤지? 아니, 그전에 활과 화살은 어떻게 구했단 말인가. 의문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하나의 거대한 충격으로 뭉쳐졌다.

    띠링―

    생각에 잠길 새도 없었다. 완료 창이 예고했던 대로 금세 알림음과 함께 다음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메인] 드러나는 존재 (2/2)

    ‘중해’의 활 솜씨는 하늘 아래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에 걸맞은 새로운 이름이 필요할 때입니다. 새로운 이름 ‘주몽’을 널리 알려주세요.

    - 총 100명에게 ‘주몽’이라고 불리기 (0/100)

    성공 시 보상 : ‘중해’의 호칭 변화, ‘중해’의 인지도 상승

    실패 시 결말 : ‘중해’의 존재감 하락, ‘하백’과 ‘창조주’의 분노로 세상 멸망

    이번 퀘스트는 ‘드러나는 존재 (1/2)’를 받던 날 어렴풋이 짐작했던 내용이 담겨 있었다. 1단계에선 활을 배웠으니 2단계에선 비로소 본 이름인 ‘주몽’을 갖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다만 어떻게 이름을 바꾸나 궁금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름이라는 게 원래 남에게 불려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갖는 것이긴 했다.

    다만 문제는 남들에게 새 이름을 알려줄 사람이 나라는 것이었다. 겨우 밀어내고 있는데 이제 와서 긍정적인 소문을 퍼뜨리라고 하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입맛이 뚝 떨어져 먹던 상도 물려버렸다.

    무엇보다 나 몰래 활을 배워버린 주몽에 대한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어째서인지 아이가 우 대사자 앞에서 의견을 피력하던 그날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그날과 반대로 손대지 않고 코 푼 격이니 좋아해야 마땅한 일인데도 기쁘긴커녕 기분이 좋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하시면 산책이라도 나가시는 게 어떻겠사옵니까.”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유모가 먼저 산책을 권했다. 내 상태가 꽤 안 좋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비도 그쳤겠다, 머리도 정리할 겸 나는 선뜻 태자궁을 나섰다.

    인원은 평소와 달리 단출했다. 유모와 궁인 하나, 호위를 위한 태령이 끝이었다. 유모는 오늘따라 자신이 안내하겠다며 앞서 걸어갔다. 허리에 칼 하나 차고 휘적거리며 걷던 태령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하께서 평소 가시던 산책길과는 다르지 않은가?”

    “소인이 봐둔 좋은 곳이 있사옵니다. 인적이 드물고 바람이 잔잔하여 머리를 식히시기에 적당한 곳이지요.”

    둘이 그러건 말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갔다. 봄이 올 모양인지 살갗을 엘 것 같던 바람도 한층 얌전해져 있었다. 팔자에 없는 정치만 신경 쓰다가 겨울이 다 가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집에 돌아가면 문과로 전향해서 정치나 해볼까. 아냐, 정치는 너무 어렵고 역사 쪽으로 가면 경험을 살려서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근데 또 막상 그렇게 하자니 이과를 포기하기엔 아까웠다. 하지만 원래 컴공을 가고 싶어서 알음알음 배우고 있었던 C언어는 이젠 ‘Hello, World!’만 기억이 났다. ……눈물이 나는 게 문과로 가도 될 것 같았다.

    “이것도 다 돌아가야 하는 짓이지…….”

    나는 곧 의미 없는 희망 회로 돌리기를 그만두었다. 어느새 도착했는지 일행의 발걸음이 멎어 있었다.

    “선객이 있는 모양인데.”

    태령이 미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생각에 잠겨 발밑만 보고 있었던 나는 이상한 낌새에 고개를 들었다.

    “와…….”

    장소는 유모의 추천대로 사위가 고요하고 바람이 불지 않아 휴식을 취하기에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빠르게 날아오는 화살 하나가 평온한 공기를 모조리 깨뜨렸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온 그것은 흉포한 소리를 내며 과녁에 꽂혔다. 이미 정중앙에 꽂혀 있던 화살이 새 화살에 밀려 이리저리 흔들렸다. 등줄기에 소름이 내달렸다.

    완벽한 활 솜씨를 자랑하는 궁수는 다름 아닌 주몽이었다. 아이는 우리가 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과녁만 노려보며 활에 새 화살을 메기고 있었다. 또 다른 화살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과녁에 꽂혔다.

    나는 새삼 저 아이가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 능력은 인외의 것이다. 활에 대한 미끼를 던지고 한 계절이 채 가기도 전에 저만치 성장하다니.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이렇게 살 존재가 아니었다.

    우선 나는 충격을 갈무리했다. 이런 순간에마저 완수해야 하는 퀘스트가 떠올랐다. 마침 딱 좋은 상황이 펼쳐졌으니 감탄해서 이성을 잃은 척 ‘주몽’을 언급해보기로 했다. 나는 잔뜩 놀란 척 삿대질을 하며 궁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서 있는 사람, 내가 아는 해 맞지?”

    “그렇사옵니다.”

    “내가 이름을 지을 때 잘못 지었네. 중해라고 지을 게 아니었어.”

    “진짜 어미 오리도 아니고, 이름까지 저하가 지어주신 거였습니까?”

    태령이 툭 끼어들어 내 메소드 연기에 훼방을 놓았다. 나는 가뿐히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지금 보니 완전 주몽이잖아.”

    띠링―

    [메인] 드러나는 존재 (2/2)

    - 총 100명에게 ‘주몽’이라고 불리기 (1/100)

    됐다.

    내가 아이를 ‘주몽’이라고 부르자마자 퀘스트 창이 떠오르며 스코어가 올라간 것이 보였다. 나는 작은 흥분에 휩싸였다. 기분이 내내 안 좋았던 내가 들떠 보이자 이때다 싶었던 궁인들이 마구 칭찬을 해댔다.

    “주몽이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긴 했지요. 저하의 말마따나 정말 주몽이옵니다.”

    “그렇사옵니다. 참말로 활 솜씨가 주몽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사옵니다.”

    띠링― 띠링―

    [메인] 드러나는 존재 (2/2)

    - 총 100명에게 ‘주몽’이라고 불리기 (2/100)

    [메인] 드러나는 존재 (2/2)

    - 총 100명에게 ‘주몽’이라고 불리기 (3/100)

    그녀들의 말에 맞춰 상태 창이 연이어 떠올랐다. 술술 올라가는 스코어를 보자 뿌듯함이 가득 차올랐다. 나는 그 뒤로도 ‘주몽’ 소리를 여러 번 했지만 스코어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아마도 퀘스트에 적힌 그대로 한 명당 하나만 올릴 수 있는 모양이었다.

    “형님?”

    궁인들과 하하호호 하는데 작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 마주친 아이가 활짝 웃더니 활을 놓고 다가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과녁을 향해 걸었다. 내 뒤로 우르르 세 명이 따라왔다.

    우리는 과녁 앞에 모여 아이의 능력을 다시금 확인했다. 화살 여러 대가 모조리 붉은 원 안에 박혀 있는 모습은 다시 보아도 소름이 돋았다.

    “……이게 일곱 살의 힘이라고?”

    과녁에 박힌 화살을 잡아당기던 태령이 놀라 중얼거렸다. 어찌나 깊게 박혔는지 무가(武家)에서 나고 자란 그가 서너 번 잡아당겨야 겨우 뽑힐 기미가 보였다. “주몽….” 그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맞춰 또다시 퀘스트 창의 스코어가 올라갔다.

    나는 그가 그러건 말건 우선 주몽을 붙잡고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너 활은 어디서 구했어?”

    아이는 눈을 데구루루 굴리더니 말없이 웃었다. 몇 번 더 캐물은 나는 한숨을 쉬며 알아내길 포기했다. 말하지 못하는 걸 보니 유화에게 부탁해서 얻기라도 했나 싶었다.

    “그럼 활은 어디서 배웠는데.”

    “궁 내 궁병들이 연습하는 것을 몰래 구경했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거라. 그것만으로 깨우칠 수 있다고?”

    태령이 거칠게 주몽의 어깨를 쥐었다. 아이가 억울한 눈으로 항변했다.

    “제가 어찌 태자 저하이신 형님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사람들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존재를 바라볼 때 눈 속에 경탄이 아니라 혐오를 담는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무예에 정통한 태령은 아이의 말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잘 알았다. 그가 주춤주춤 주몽에게서 손을 뗐다.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며 그의 새카만 동공이 내 눈과 틈 없이 맞물렸다.

    그 순간, 나는 태령의 눈으로부터 아이를 치우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일단 태자궁으로 돌아가자.”

    나는 태령을 잡아끌며 몸을 돌렸다. 왔던 길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두 궁인이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유모가 주몽을 돌아보며 나를 말렸다.

    “저하! 이곳까지 오신 김에 조금 더 쉬다 가시지 않고…….”

    “선객이 있지 않아. 생각해 준 건 고맙지만 도저히 쉴 만한 장소가 아닌 듯싶어.”

    주몽은 괴물이 아니었다. 천대받고 무시 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 귀하게 대우받아야 할 신의 핏줄이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아직 작고 연약한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나는 내 귀한 해가 나 이외의 모든 존재에게서 사랑받았으면 했다.

    ……나 이외의, 모든 존재에게서.

    2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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