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27)

4.

“이제 더 이상 환부를 살피지 않아도 될 듯하옵니다. 탕약도 앞으로 사흘만 더 드시옵소서.”

내 팔을 꼼꼼하게 살피던 의원이 놓아둔 침을 뽑으며 말했다. 나는 기쁨을 숨기지 못한 채 저고리를 끌어 내렸다.

더위가 가시고 날씨가 점차 선선해지고 있었다.

글공부와 북녘궁 방문이 한꺼번에 일과에서 빠져버린 나는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날을 보냈다. 습격이 있던 날 이후 태자궁 근처는 항상 무사들이 순찰을 돌았다. 트라우마가 남았는지 종종 칼에 찔리는 악몽을 꿨지만 나로선 가족들을 찾아 헤매는 꿈보다 백번 나았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덕분에 악몽은 빠르게 사라지고 이젠 모든 꿈자리가 편안해져 있었다. 심신이 평안하니 자연스럽게 상처도 빨리 나았다.

주몽은 그렇게 나간 뒤로 우 대사자를 스승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공부한다는 소문이 주몽에 관해서라면 쉬쉬하는 태자궁에까지 들려왔다.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이가 가끔 뒷마당을 거니는 나를 담장 너머로 훔쳐봐도, 연꽃을 구경하는데 연못 저 너머에서 시선이 느껴져도. 나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마저 걷고 마저 구경했다. 날 달래려던 궁인들도 내 강경한 태도에 나가떨어진 지 오래였다.

하루하루가 평화롭게 흘러갔다.

그러나 이제 슬슬 나도 할 일을 찾아야 했다. 언제까지고 마냥 놀고먹기엔 남의 몸을 차지한 입장에서 양심에 찔렸다. 마지막으로 배웠던 책을 뒤적거리는데 궁인이 와서 고했다.

“왕비 마마께서 찾으시옵니다.”

“어마마마가?”

갑작스러운 호출에 의아함이 일었다. 하지만 왕비님은 종종 날 불러 저녁을 들며 똑같은 당부를 늘어놓곤 하셨다. 나는 의심 없이 일어나 신을 신었다. 이젠 그 언젠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망설임은 없었다.

왕비님은 다과상을 차려놓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습격을 당한 뒤로 조금은 살가워진 그녀가 날 맞이해주었다.

“태자. 몸은 좀 괜찮습니까?”

“예.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마마마.”

“그래요…….”

그녀가 찻잔 테두리를 매만졌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손짓이 평소처럼 당부나 하려고 부른 게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차가 식기를 기다렸다. 태자궁이었다면 누가 보든 말든 후후 불어 식혔겠지만 여기서 그랬다간 저녁도 못 먹고 쫓겨날 수도 있었다.

저 약과, 가람이가 좋아하는 건데. 이따 궁인한테 조금 싸달라고 할까. 몸이 배배 꼬이는 걸 참으며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이제 다시 공부를 시작하셔야지요. 그간 이 어미가 좋은 스승을 물색해보았답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귀족들이 하나같이…….”

그녀는 말을 잇다 말고 이마를 가볍게 찡그렸다. 작게 벌어진 입술에서 “미천한 것들이….”라는 말이 새어 나왔다.

나는 못 들은 척 어색하게 하하, 웃어 보였다. 저 짧은 말로도 충분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내 사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교육을 끊어버린 귀족들이 왕비님의 성에 찰 만한 스승을 붙여줄 리 없었다. 지원자도 죄다 태자의 스승이라는 겉껍데기라도 뒤집어쓰고 싶은 하급 귀족들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왕비님 입에서 나온 귀족은 그런 내 예상을 빗나가도 한참을 빗나간 사람이었다.

“그나마 개중에선 마 대사자가 제일 낫더군요.”

“예? 마 대사자님께서 제 스승을 자처했단 말씀이십니까?”

놀란 나는 집어 들었던 당과를 내려놓았다.

부여는 ‘사출도’라 하여 수도를 중심으로 지방을 4개 구역으로 나눈 뒤 수도는 왕이, 각기 지방은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가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마 대사자는 무려 마가(馬加)와 같은 집안 출신인 데다가 마가(馬加) 가신 중 높은 위치인 ‘대사자’를 맡고 있는 대귀족이었다. 그런 면에서 우 대사자와 동급인 그는 태자의 스승으론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이 마당에 자원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왕비님은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망설이다가 꺼리는 이유를 말했다.

“대신 자신의 둘째 아들을 태자의 호위 무사로 임명하겠다 합니다.”

“갑자기 호위 무사라니요?”

“언제까지고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하기 위해 태자궁 순찰을 도는 것은 인력 낭비이니 대신 호위 무사를 붙이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보직에 마가 집안의 핏줄을 앉히면 과연 집 지키는 개가 될지, 주인을 무는 개가 될지 모를 일입니다.”

왕비님의 추측은 타당했다. 나로서도 마 대사자의 조건은 밤낮으로 가까운 곳에서 감시하겠다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하필 ‘마 대사자’인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는 부여에서 알아주는 무장으로, 평생 붓대만 잡은 내가 가르침을 받기엔 과목부터가 영 맞지 않았다. 하물며 시험도 문과와 무과를 따로 보는데 말이야. 귀족들은 여전히 태자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생각이 없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하지만 거절하기에도 난처한 입장이었다. 흠잡을 곳 없는 그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거절을 한다면 귀족들은 단박에 내가 그들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럼 애써 멍청한 척 우 대사자를 안심시킨 것도 모두 물거품이 된다. 내가 거절을 해도, 마 대사자를 스승으로 받아들여도 그들로선 손해 하나 볼 것 없는 장사였다.

그럴 바엔 속내라도 들키지 않는 게 낫겠지.

“마음에 걸리는 면이 없진 않지만, 마 대사자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나는 찜찜하지만 그를 스승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나도 그를 조금 이용할 생각이었다.

“대신 제가 가람이의 수업도 함께 봐 달라 청했다고 말씀드려 주십시오. 어차피 저보단 무예에 뜻을 둔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여러모로 더 이득일 것입니다.”

가람이는 칼질 한두 번에 포기할 거란 내 예상을 가뿐히 뛰어넘고 지금껏 무예를 연마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재능도 있는 것 같으니 하고 싶다면 형으로서 도와주고 싶었다.

물론 왕자의 스승으로 두기에 마 대사자는 조금 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태자가 직접 ‘스승님께 동복형제의 가르침을 부탁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차피 그도 내세운 조건이 있으니 이 정도는 받아들이리라.

왕비님은 내키지 않아 보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녀도 불안하다고 거절하기엔 그 결과가 더 두렵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럼 사흘 뒤 수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한 뒤 왕비궁을 나섰다. 식사 때인데도 제안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왕비님은 끼니를 거르실 모양이었다.

나도 속이 답답한 건 매한가지였다. 태자궁에 돌아와 밥풀만 깨작거리고 있자 유모가 이유를 물었다. 어차피 밝혀질 일, 감출 것도 없다 싶어 나는 마 대사자가 내 스승이 되었으며 그 둘째 아들이 호위 무사로 들어올 것이라 말해주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반응은 거셌다.

“저하! 그 집 둘째 아들은 한량으로 유명하옵니다!”

“아니 되옵니다! 아직 관직도 없는 그 무능하고 한심한 작자를 어찌 저하의 호위 무사 자리에 놓는단 말입니까!”

“저하, 절대 받아주셔서는 아니 됩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거센 반발을 들었다. 저런 시각에서 반대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콕 집어 둘째 아들을 앉히겠다 해서 그나마 능력 있는 놈인 줄 알았더니 낙하산인 모양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 정도로 별로야? 마 대사자님이 추천하셨다는데.”

“구더기도 제 새끼는 예뻐 보이는 법이옵니다. 현혹되지 마시옵소서.”

찬그릇을 이리저리 옮기던 궁인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구더기…. 만나기도 전에 구더기가 된 마가네 식구들을 생각하자 웃음이 쿡쿡 나왔다. 내 반응에 신난 궁인이 한참 그의 소문에 대해 떠들었다. 나는 홀린 듯 밥을 먹으며 모두 경청했다. 그 입담이 끝났을 땐 깨작거리던 밥그릇도 어느새 모두 비어 있었다.

“아무튼, 그 작자는 천성이 게으르고 말투가 천박하니 가까이하지 마시고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궁인이 뿌듯하게 웃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덕분에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감시자일 것만 같았던 마가네 둘째 아들에 대한 선입견이 와장창 깨졌다. 이젠 두려움보다 대체 얼마나 난장판이기에 저런 소문이 도는지 호기심이 먼저 들 정도였다.

만약 저 소문의 반의반만 진실이어도 주인을 물어뜯을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제 기대감에 차서 그 ‘작자’를 기다렸다.

수업은 사흘 뒤로 약속되어 있었지만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틀 만이었다. 그는 칼 한 자루를 허리춤에 차고 설렁설렁 걸어왔다. 확실히 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품위 있는 걸음걸이는 아니었다.

나는 내다보던 창문을 닫고 그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장지문이 열리고 훤칠한 남자 한 명이 들어와 절을 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젊은 귀족과 가까이에서 대면한 것은 처음이었다. 내 주변엔 항상 어린아이들이나 젊은 여성, 혹은 나이 든 귀족들만 있었으니까. 짧게 절을 마친 그가 인사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태자 저하. 저는 마 대사자의 둘째 자식 마태령이라 합니다. 오늘부로 저하의 호위 무사가 되어 저하를 지킬 것을 명 받았습니다.”

“이리 만나게 되어 기쁠 따름입니다. 앞으로 노고가 많겠지만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부여에서 5년이나 지냈지만 거의 쓸 일이 없었던 말투를 흉내 내느라 혀가 굳었다. 어색하게 웃는 나에게 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저하. 저는 그저 저하의 호위 무사일 뿐입니다. 곁에서 항시 지켜야 하니 편하게 대해주시는 편이 제게도 좋습니다.”

“아……. 그래.”

거리낌 없이 다가오는 모습에서 사랑받고 자란 귀족 자제인 티가 났다. 그는 한참 동안 자기 이야기를 떠들며 방어적인 태도의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입담은 뛰어나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긴장감을 풀고 듣게 되었다.

무엇보다 올해로 18살이라는 태령은 나와 심리적 동년배였다. 매일같이 어린 동생들이나 어른스러운 궁인들과 지내다 태령을 만나니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나는 맞장구까지 치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그도 내가 이야기를 잘 들어주니 신이 나서 실컷 떠들었다.

“태자 저하께선 어리신데도 말이 잘 통해서 정말 좋네요. 집에서 이렇게 떠들면 무서운 아버지나 형님이 엄청 혼내셔서 무슨 말도 못 하거든요.”

“형제가 있어?”

그가 차로 목을 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한 분과 누이가 둘, 아래로 동생들이 셋은 더 있지요.”

“엄청 대가족이구나.”

“태자 저하께서도 형제가 여섯은 있지 않으십니까.”

그가 약과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동복과 이복을 모두 섞어 아래로 여섯이나 있었다. 자식 일곱 정도는 특별할 것 없는 모양이었다. 그 뒤로도 그는 특유의 격 없는 태도로 나와 금세 친해졌다. 그렇게 소문만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내 감시 역일지 모르니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지냈다.

그러나 내가 남은 긴장을 모조리 풀어버린 것은 태령과 만난 지 불과 닷새가 지났을 때였다.

그날은 마 대사자에게 수업을 받기 시작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마 대사자는 내 요청대로 가람이의 훈련을 맡아 주었다. 그러나 그가 문예에 재능이 없었던 만큼 나도 글공부가 아닌 무예를 배우게 되었다. 물론 나는 전혀 그쪽에 뜻도 재능도 없었으므로 가볍게 기초 체력 단련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수업을 들었다.

수업은 대부분 기마술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 한 부분이기도 했다. 부여의 특산물이라는 말에게 당근이나 주고 있을 때였다.

태령이 건들건들 다가와 내게 속삭였다.

“저하.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 아십니까?”

“…….”

‘그자는 한심하고 천박한 작자예요!’

입꼬리를 쭉 늘려 웃는 얼굴 위로 열변을 토해내던 궁인의 모습이 겹쳤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왕비님과 내가 추측한 마 대사자의 큰 그림은 보기 좋게 빗나갔구나. 그는 나를 감시하려고 아들을 호위 무사직에 꽂은 게 아니라 애물단지 자식놈에게 체면치레라도 하라고 꽂은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똑같이 내가 방탕해지길 원하며 넣은 게 분명했다.

그래…. 나름 그래도 내가 태자라고 닷새나 참은 거겠지.

나는 인자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당근을 그의 입에 쑤셔 넣었다.

그 뒤로 나는 모든 경계를 풀어버렸다. 저자는 손에 건성으로 든 칼보다 아랫도리와 주둥이가 더 위험한 인간인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마 대사자와 함께 하는 수업은 우 대사자의 수업과 달리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는 불만이 있으면 헛기침을 하는 우 대사자와 달리 거리낌 없이 말로 감정을 표현했다. 그는 사흘 동안 칼을 휘두르는 날 지켜본 뒤 이렇게 평했다.

“고라니에게 칼을 쥐여줘도 저하보단 잘 쓰겠군요.”

그리곤 곧바로 내 수업에서 검술을 빼버렸다. 지나치게 빠른 포기에 당황한 나에게 태령은 슬쩍 귀띔을 해주었다.

“아버지 말버릇이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황판단이다.’ 이거거든요.”

마 대사자는 나에게 나무칼을 빼앗고 말고삐를 쥐여줌으로써 그의 신념을 훌륭하게 증명해냈다. 나도 검술엔 영 흥미도, 재능도 없었기 때문에 행복한 결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기마술에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부여의 특산물이 말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여에서 나고 자란 귀족 중 말을 못 타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만큼 마 대사자도 이 수업에 있어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내가 첫 일주일 내내 말에게 당근만 먹여도 절대 기마술을 수업에서 빼지 않았다. 나에게 말 하나만큼은 다룰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가 폴폴 풍겼다.

실제로 그랬던 덕분에 ‘고라니만도 못한’ 나도 겨울이 왔을 땐 그럭저럭 말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오늘도 나는 말을 타고 궁궐 뒤 공터를 한 바퀴 돌았다. 곁에는 여유만만한 태도로 말 위에 앉은 태령이 있었다. 내가 공터를 한 바퀴 돌 동안 그는 숲을 한 바퀴 돌고 왔다. 한껏 땀을 뺀 그의 몸과 말에게서 하얀 수증기가 올라왔다. 반면 뛰긴커녕 조심조심 걷느라 땀 한 방울 안 흘린 나는 추운 손을 데우느라 하얀 입김을 불어야 했다.

그가 그런 나를 보고 경박하게 웃어댔다.

“저하. 언제까지 귀한 말을 아장아장 걷게만 하실 겁니까? 그러니까 추워서 오들오들 떨고 계신 게 아닙니까. 함께 질주할 날이 대체 언제 올지 모르겠습니다.”

“스승님께 네가 나 버리고 혼자 말 타다 왔다고 말할까?”

“…아이, 왜 그러십니까. 다정하고 착하신 태자 저하, 이번 한 번만 눈감아주세요.”

그가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렸다. 마 대사자는 종종 거친 무사답게 솥뚜껑만 한 손으로 직접 가르침을 주는 것을 즐겼다. 나는 태자라는 신분 뒤에 숨어 맞지 않았지만 아들인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얻어맞기 일쑤였다.

다행히 요 근래에는 마 대사자가 내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내가 어느 정도 말을 탈 수 있게 되자마자 홀라당 나를 버리고 간 지 오래였다. 태령이 말을 잘 타니 그가 도와줄 것이라는 게 그 핑계였다. 덕분에 태령만 마음 놓고 종종 오늘 같은 일을 벌였다. 세상 어느 천지에 호위 무사가 태자를 버리고 놀고 와. 이 사실을 전하면 그는 또 아버지에게 얻어맞을 게 뻔했다.

“됐어. 사흘 뒤에 있을 영고 때나 그러지 마. 그땐 나도 못 봐주니까.”

그러나 이미 봐준 게 한두 번도 아니었다. 이번에도 나는 밀고하는 대신 사흘 뒤 있을 행사를 주지시키고 말았다.

‘영고’는 부여에서 매 연말에 행하는 제천의식이었다. 나라에서 주최하는 행사인 만큼 그날은 모든 중앙귀족들이 모여 신을 향해 제사를 지냈다. 작년까진 나도 구경하는 입장이었지만 올해부터는 왕을 도와 제사를 지내야 했다. 그 자리에서마저 호위 무사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마 대사자의 호통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염려 마십시오. 제가 그런 자리는 또 잘 챙기거든요.”

태령이 걱정 붙들어 매라며 가슴께를 툭툭 쳤다. 물론 그간 해 온 꼴을 봐선 영 신용이 가지 않았다. 거르고 걸러도 들은 음담패설과 목격한 질 낮은 행동거지가 이미 한 트럭이었다. 그러나 혼나도 내가 혼나냐는 생각에 나는 그저 말머리를 태자궁으로 돌렸다. 그가 쉼 없이 쫑알대며 내 뒤를 따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린 많이 친해진 상태였다.

사흘 뒤, 나는 아침이 밝기도 전에 유모의 손에 일으켜 세워졌다.

나는 졸린 눈을 하고 새벽부터 꽃단장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대로 물 한 잔 입에 대지 못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끌려 나갔다. 신께 제사를 드리려면 깨끗한 몸과 맑은 영혼을 유지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비몽사몽 한 눈으로 거대한 북이 둥둥 울리는 것을 보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때맞춰 절만 잠깐 드리면 되었다. 그러나 올해부턴 나이가 찼다는 이유로 직접 제천의식의 한 부분을 이끌어야 했다.

원래 세계에서도 지내지 않던 제사를 여기서 지내게 될 줄이야. 그것도 날 이곳에 끌고 온 원흉인 신한테……. 헛웃음을 삼키는 동안 식은 빠르게 진행됐다. 하늘을 향해 절을 하던 왕이 땅에 술잔을 기울이고 물러났다.

작은 북이 세 번 울렸다. 이제 내 차례였다. 나는 지난 한 달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외웠던 순서를 생각했다. 제사상 앞까지 가서, 우선 절을 올리고…. 웅얼대며 제사상을 향해 걷는데 어느 순간 얇은 막을 통과한 듯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거대한 비눗방울을 통과하면 이런 기분이 들까? 멈칫하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효과음이 들렸다.

띠링―

이벤트 구역에 입장하셨습니다.

이벤트 구역? 낯익은 시스템 창 위에 쓰인 문구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당황했지만 여긴 멈춰 서면 안 되는 자리였다. 차오르는 불안감에도 우선 행사를 마저 진행했다. 음악에 맞춰 절을 올리고, 술잔에 술을 따랐다. 놓인 청동 방울을 들고 한 바퀴를 돌았을 때였다.

갑자기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제사상 위로 내리쬐었다. 회색 돌로 만든 제사상이 하얗게 반짝반짝 빛났다.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었다.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 ‘강림’, ‘영광’, ‘있을 수 없는 일’ 따위의 말이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자 나를 중심으로 햇빛이 커다란 원을 만들며 내리쬐고 있었다. 나도 당황스러움에 방울을 흔들던 손을 늦췄다. 딸랑, 딸, 랑. 손에서 방울이 무성의하게 흔들렸다.

“아가야. 빨리 방울을 흔들려무나. 네 부름이 모자라 내가 온전히 내려오고 있지 못하잖니.”

갑자기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란 나는 몸을 휙 돌렸다. 쥐고 있던 방울이 격하게 몸을 흔들었다.

“옳지, 잘한다.”

목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남자라기엔 높고 여자라기엔 낮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그 정체를 알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춤을 다시 추었다. 박자를 알리던 북소리가 잦아들었다. 나는 춤을 끝내고 흙바닥에 꿇어앉았다. 아지랑이가 일듯이 허공이 일그러졌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바람 한 점 없던 날씨에 공기가 제멋대로 흐르며 내 머리칼을 휘날렸다. 한참을 그러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곧 다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신’이었다. 날 이곳에 떨어뜨린 원흉. 실로 오랜만의 조우였다.

나는 갖가지 말이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감추고 살았던 원망과 두려움이 동시에 솟았다. 그 와중에 ‘진짜’ 나를 알고 내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가진 유일한 존재라는 점이 우습게도 반가움을 자아냈다.

이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신은 다시 말을 걸었다.

“‘영고’는 강등당한 나도 현신할 수 있게 하는 좋은 행사이지. 여기서 아무리 말해도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하니 안심하고 말하거라.”

낯선 ‘이벤트 구역’은 그가 현신할 구역임을 알려주는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실제로 ‘이벤트 구역’ 밖에 위치한 모든 귀족들은 웅성거리며 이 기묘한 현상을 혼란스러워하기만 했다. 나도 그의 목소리를 듣기보단 ‘느끼고’ 있었다. 인간들 속에서 초음파를 듣는 돌고래가 된 것 같았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실체도 없는 그에게 달려들어 케케묵은 원한을 풀기엔 나는 이미 너무 자라있었다.

“왜 오셨어요?”

“말했지 않느냐, 오늘은 나도 남의 몸을 빌리지 않고 내려올 수 있는 날이라고. 네게 줄 것도 있었는데 마침 네가 제천의식을 치르길래 때맞춰 내려왔을 뿐이다.”

그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퀘스트를 모두 잘 해결하고 있더구나. 특히 마지막 서브 퀘스트에선 정말 감명을 받을 정도였어. 대강 아무에게나 스승을 맡겨도 충분히 성공했을 텐데, 굳이 최고의 스승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너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는 말을 우선 전하마.”

신님 보기 좋으라고 노력한 거 아닌데요. 그런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다행히 말로 내뱉진 않았다. 그의 말대로 사실 주몽의 스승을 구해주는 퀘스트는 아무나 구해줘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던 것은 미래의 건국 왕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 뿐이었다.

“…….”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다 핑계였다. 그저 작고 소중한 아이에겐 항상 최고의 것만 가져다주고 싶은 내 욕심 때문이었다. 나는 새삼 내가 5년간 아이에게 정이 들어도 많이 들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말았다.

그럼 뭐 하나. 현재 나는 주몽을 내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신이 이 상황을 해결해주었으면 했지만 한편으론 내 계획이 낳은 결과라 따지기가 애매했다. 내가 침묵하는 동안 신은 직접 현신까지 한 이유를 꺼내놓았다.

“흠, 아무튼 그런 너에게 작은 도움을 주고 싶어서 잠깐 내려온 것인데… 앞으로 내려올 한 퀘스트에 대한 힌트를 주고자 한단다.”

“힌트요?”

“그래. 부디 영광으로 알거라.”

젠체하는 건 여전히 봐주기 어려웠지만 힌트 제공은 정말이지 의외의 좋은 소식이었다.

지금까지 내려온 퀘스트들은 어찌어찌 해결했다 하더라도 앞으로 내려올 것들까지 그럴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동명왕편’을 그대로 모방한 ‘종이’에 쓰여 있을 진짜 ‘메인’ 퀘스트는 아직 근처에도 못 간 상태였다. 일을 쉽게 만들어 줄 동아줄이 있다면 하나라도 더 붙잡아야 했다.

나는 기대감이 서린 눈으로 일렁이길 반복하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 힌트가 뭔가요?”

5년간 우 대사자 밑에서 구르며 얻은 눈칫밥으로 자연스럽게 아부가 나왔다. 입에 발린 말을 들은 신은 바람을 일으키며 만족스러움을 표했다. 목소리는 금세 다시 들려왔다.

“우선 퀘스트에 대한 설명부터 듣거라. 오이, 마리, 협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느냐?”

“아니요.”

원작도 가물가물할 지경에 다른 역사적 인물이 생각날 리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지금 내 주변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마리와 협보는 그렇다 치고 ‘오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사람까지 잊었을 리는 없었다.

“그들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울 때 큰 도움을 줄 벗들이지. 나중에 나올 메인 퀘스트 중 한 가지가 바로 이 세 사람을 찾아 주몽의 벗으로 만들어주라는 것이다.”

“…친구라는 게 제가 맺어준다고 맺어지는 인연이었던가요.”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지. 원래라면 ‘종이’가 옷자락까지 스치게 만들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으니 네가 그 역할을 하라고 퀘스트가 내려오는 게 아니냐. 계기만 제공한다면 인연은 ‘종이’가 알아서 맺어줄 게다.”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그 세 명을 찾아다 주몽 앞에 데려다 놓으라는 소리였다. 확실히 이건 단기간에 해결하기 어려워 보였다. 많은 부여인 중에서 사람을 찾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은 그 점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 사람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을 수도 있지. 퀘스트가 시작되면 해당 인물의 머리 위에 붉은 표시가 떠오를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힌트를 주신다는 건가요?”

힌트를 제공한다면 당연히 사람을 찾는 것에 관련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부분이 어렵지 않다니 굳이 왜 퀘스트에 대해 일찍 언질을 하고 힌트를 주는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줄 것은 퀘스트가 내려오기 전부터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다. 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눈앞에 ‘힌트 창’이 뜰 것이야. 너는 그것을 보고 나중에 번거롭게 찾아다닐 필요 없이 미리 포섭해두면 된단다.”

“어차피 퀘스트가 시작하면 붉은 점이 뜬다는데 굳이 미리 찾을 필요가 있나요?”

물론 미리 알아볼 수 있으면 편해지기야 할 터였다. 표식이 뜬다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결국 직접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이었다. 짧은 시일 내에, 그것도 태자가 부여를 돌아다니면서 붉은 점을 찾는 게 쉬이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힌트 제공자가 ‘신’이다 보니 작은 호의도 의심이 들었다. 역시나 신은 내 추궁에 순순히 본심을 털어놓았다.

“네 성실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 않았느냐. ‘종이’가 없으니 오이, 마리, 협보도 어중이떠중이로 자랐을지도 모른다. 네가 미리 거둬서 사람 구실 좀 하게 만들어 놓거라.”

뻔뻔한 작태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의 고압적인 태도와 거절을 고려하지 않은 말투는 여전했다. 마음 같아선 그딴 놈들 거둘 것 없이 모조리 위치만 파악한 뒤 퀘스트가 떴을 때 주몽에게 던져주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러겠다며 입에 발린 말을 내뱉고 막상 힌트 창이 떴을 땐 모른 척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러지 못할 것을 알았다. 신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미 주몽에게 정이 많이 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대의를 위한다며 내쳤지만 나에게 의지하던 작은 아이를 떠올릴 때면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어쩌면 지금의 작은 이별은 훗날 닥쳐올 큰 이별을 학습시키기 위한 내 방어기제에서 나온 계획일지도 몰랐다. 주몽은 나보다 좀 더 확실한 버팀목이 필요했다. 그 역할에는 사라져 버릴 형님이 아니라 언제나 곁에 있을 든든한 동료가 더 어울려 보였다.

따라서 나는 기꺼이 그 책임을 떠맡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거절도 못 할 처지였다. 그럴 바엔 신이 아니라 주몽을 위해 좀 제대로 된 친구를 만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괜히 신에 대한 반항으로 신경 안 써줬다가 오이, 마리, 협보 중 한 사람이라도 마태령처럼 자라면 어떡하나 싶기도 하고. 친구 한번 잘못 사귄 죄로 그 순수한 아이가 물들어버리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해서 온몸이 떨렸다. 만약 마태령이 주몽의 호위 무사였다면 마 대사자고 뭐고 당장 잘라 버렸을 것이다.

나는 순식간에 이상한 정의감에 불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의욕적인 몸짓에 햇살이 더 따사로워졌다.

“내 요새 보아하니 작은 곤경을 겪는 듯하더구나. 기분도 좋으니 작은 선물 하나 해주마.”

내 주위만 동그랗게 비치던 햇살이 점차 넓게 퍼지더니 귀족들이 앉은 자리까지 다다랐다. 몇몇 귀족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절을 하기 시작했다. 두 손을 꼭 모으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산들바람까지 불어오자 대부분의 귀족들이 엎드려 신을 부르짖었다.

“이까짓 것 하나에 절절매는 저 모습들 좀 보거라. 귀엽지 않느냐?”

신이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아무 대꾸 없이 소름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이질적인 존재로부터 느껴지는 본능적인 거리감이 구토를 유발시켰다.

신의 농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새 떼를 날아오르게 하더니 온갖 동물들이 숲속에서 머리를 내밀게 했다. 기이한 현상에 왕과 왕비님도 너 나 할 것 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기도문을 읊조렸다. 그토록 높아 보이던 우 대사자도,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천박한 언행을 일삼던 마태령도 마찬가지였다.

“이 부여에 영광과 부가 끊이지 않기를…….”

“제 처자식의 건강을 돌봐주십사…….”

“제게 닥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나는 괴기스럽기까지 한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사위가 고요한 아래 각자의 염원을 담은 속닥거림이 지글지글 귓가에 들끓었다. 북을 찢을 것처럼 울려대던 북지기도 지금만큼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강등당한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이 조그만 힘에도 금세 굴복하는 저 인간들을 보거라.”

신은 그렇게 한참을 농락하더니 난데없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내렸다.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눈앞이 번쩍하더니 번개가 내리꽂혔다. 돌로 만든 제사상이 단숨에 두 쪽으로 부서졌다. 이곳저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나도 깜짝 놀라 뒤로 조금 나동그라졌다.

“지, 지금 이게 무슨…….”

너무 놀라 말도 더듬거리며 나왔다. 금세 추스르긴 했지만 몇 발자국 앞에 벼락이 내리꽂히니 심장이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놀랐느냐? 인간들은 간이 참 작구나.”

신이 낄낄댔다. 그는 비웃는 태도를 감추지 않으며 나에게 부서진 제사상 가운데로 나가라 말했다. 솔직히 나갔다가 똑같이 벼락 맞을까 봐 두려웠지만 꾹 참고 시키는 대로 했다. 뿌옇게 일어난 돌먼지를 가라앉히고 깨진 토기 그릇들을 치우니 작은 묘목 하나가 돋은 게 보였다.

“선물이란다. 물을 줘보지 않으련?”

다행히 바닥에 놓여 있던 물동이는 깨지지 않은 채였다. 나는 삼십일 동안 새벽이슬을 받아 채웠다는 ‘정화수’를 모조리 묘목에 쏟아부었다.

주위를 넓게 비추던 햇빛이 줄어들더니 나와 묘목을 비췄다. 한 뼘이나 될까 하던 새싹이 순식간에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느새 무릎께에 도달한 나무를 나를 비롯한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져 바라보았다.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신, 신의 힘이다! 태자 저하의 기도를 받고 신께서 이 땅에 강림하셨다!”

콧대 높던 귀족들이 체면을 던지고 감격에 찬 소리를 질렀다. 가장 먼저 달려 나온 것은 이름 모를 한 귀족이었다.

“하늘 신이시여. 제 가문이 지금보다 더 큰 번영을 누리도록…….”

그는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눈이 반쯤 돌아가 있었다.

그를 필두로 여러 귀족들이 뛰쳐나왔다. 그들은 묘목에 절을 하다, 내 몸을 더듬다, 감격에 차서 울부짖기를 반복했다. 나는 광기 어린 눈을 마주하기가 힘들어 고개를 숙였다.

그때 머릿속에서 신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이것으로 당분간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진 않겠지만, 인간의 탐욕은 때때로 눈과 귀를 멀게 하는 법이다. 너도 자중하는 편이 좋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내리쬐던 햇빛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띠링―

이벤트 구역을 벗어나셨습니다.

이어서 떠오른 투명한 창은 정말로 그가 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눈물을 쏟는 왕비님의 품에 끌어안기며 조용히 시스템 창을 날렸다.

“태자 저하만이 이 부여의 진정한 영광의 길을 이으실 수 있음을….”

나를 칭송하는 말이 남은 바람결을 타고 들려오고 있었다.

***

신이 간 뒤로 이레 동안은 정말이지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우선 남겨진 묘목은 성물로 여겨져 그 일대 주변을 모조리 통제하고 경비를 세웠다. 귀족들은 내가 진정한 신의 종이라고 떠들어대며 칭송하길 멈추지 않았다. 듣기론 백성들도 셋 이상 모이면 내 이야기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말 오만가지 사람들이 태자궁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왕과 왕비님은 물론이고 손 한번 잡아보려는 귀족들과 힐끗거리는 궁인들까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심지어 전국에서 용하다는 무당들도 몰려왔다.

정작 나는 습격 이후 지겹도록 굿을 했던 기억이 안 좋게 남아 있었다. 궁인들은 굿이라면 기겁을 하는 날 위해 그들을 거절해주었다. 꿩 대신 닭인지, 그들이 묘목 앞에서 굿을 하는 소리가 사흘 밤낮으로 들려왔다.

그러나 그 뒤론 딱히 지위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며 지냈다.

먼저 태자궁 궁인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호들갑스럽지 않았던 게 가장 컸다. ‘태자 저하신데 이건 당연한 일’이라나. 아무래도 지난 습격 사건 때 받은 감명이 미처 다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런 면에선 날 졸졸 따르는 가람이도 마찬가지였다.

내 평소 동선에 있는 유일한 귀족이었던 마태령(마 대사자는 수업 때도 나타나지 않은 지 오래였다)도 며칠 쭈뼛쭈뼛하더니 금세 원래대로 돌아와 치근덕댔다. 그는 신의 현신은 난생처음 봤다며 한참을 떠들더니 내 손을 덥석 붙잡고 예쁜 색시를 얻게 해달라며 졸랐다. 한결같기론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오늘도 잠시 태자궁을 나서는데 그는 평소와 같이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요즘 저희 집 막내가 글을 배우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꾀를 부릴 수가 없다니까요.”

이번에는 자신의 막냇동생 이야기였다. 하도 들어 이름, 나이, 성별, 심지어 생일까지 꿰고 있는 나도 익숙하게 받아쳤다.

“너 닮았나 보지.”

“아, 그런가? 이런 건 닮으면 안 되는데…….”

막냇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그는 욕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헤벌쭉하기만 했다. 그저 닮았다는 얘기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저번에 장터 나갔다가 본 이야기꾼에게 홀려서는…. 글공부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온종일 이야기만 조르는데 미치겠습니다.”

“글공부 한 번에 이야기 한 번, 이렇게 달래는 건 어때?”

“말이 쉽지요. 제 이야기보따리는 그렇게 두툼하지 않답니다, 저하.”

제 다른 물건과는 달리 말이죠. 그가 뿌듯하게 웃으며 말을 마쳤다. 나는 질색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저 더러운 입 때문이라도 고운 색시 구하기는 글렀을 게 분명했다.

떠들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해 있었다. 마태령이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궁에 드나든 지 꽤 되었지만 별궁에는 처음 와봅니다.”

“그럼 구경이나 하고 있어.”

그는 따라 들어오지 말라는 내 말을 한 번에 알아들었다. 눈치껏 이 근처에 있겠다는 그를 놔두고 나는 별궁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나를 부른 장본인이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왔느냐? 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구나.”

유화가 다기를 내려놓으며 따뜻하게 웃었다. 안부 인사만 종종 주고받았을 뿐 이렇게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유화는 주몽을 북녘궁으로 보낸 뒤에도 계속해서 궁궐 안에 머물렀다. 여기만큼 여자 혼자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어차피 가고자 해도 왕이 신계의 여인을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녀는 줄곧 별궁에 머무르며 나와는 간간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별일 있으신 건 아니죠?”

별궁 궁인이 갑작스럽게 전한 전갈에 열 일 제쳐놓고 온 상태였다. 말이야 시간 날 때 한번 들르라는 것이었지만 전에 없던 일이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걱정스러운 내 얼굴에 유화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내게 별일이 무어 있겠느냐. 너야말로 얼마 전 큰일을 겪었다던데. 신이 강림했다지?”

“아…. 그 소식이 여기까지 왔나요.”

나는 괜스레 차를 후후 불어 식혔다. 진짜 신계 사람한테 그런 얘기를 들으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둘 다 ‘신’에 대해 좋은 기억 따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주제가 껄끄럽기도 했다.

“그놈이 내려왔다길래 걱정이 되어서 널 부른 것이다. 신은 네 생각보다 교활한 놈이야.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 언제나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나는 쓰게 웃었다. 이번 선물과는 별개로 신이 상종도 못 할 쓰레기인 것은 잘 알았다. 무엇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잔혹한 성정 때문에 내가 여기 있는 것이기도 했다.

떠오르는 좋지 못한 기억에 나는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충고 감사합니다. 그래도 그놈 욕을 들으니 좀 낫네요. 요 며칠 세뇌당할 수준으로 신에 대한 찬사를 들었거든요.”

“그럴 만도 하지. 그러나 탐욕에 가득 찬 사람일수록 신을 저버리기 쉬우니 너무 겉만 보고 믿진 말거라.”

유화가 고운 이마를 찡그리며 여러 번 강조했다. 그날 보았던 맹목적인 모습에 정말 그럴까, 의문이 들었지만 걱정해주는 그녀의 앞에서 굳이 말을 덧붙이고 싶진 않았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요즘은 뭐 하고 지내세요?”

말을 꺼내고 보니 그녀의 주변에는 화구가 널려 있었다. 나는 허락을 받고 바닥에 있는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거기엔 색색으로 곱게 칠해진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까만 하늘 아래 손을 붙잡고 선 어린 오누이의 모습이었다. 막 눈인 내가 봐도 수준급의 그림 솜씨였다. 옆에는 짧은 글도 쓰여 있었다.

“‘오누이는 밤새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렸어요.’ 유화 님, 이게 뭔가요?”

“어린 궁인들이 글을 떼기 어려워하길래 만들어본 거란다. 이리 해주면 재밌는지 술술 읽고 배우더구나.”

유화가 종이 몇 장을 더 건네주었다. 모두 그림과 함께 짧은 글이 쓰여 있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글에 사용된 한자도 모두 쉬운 한자들뿐이었다.

나는 건네받은 종이를 그 자리에서 모조리 살펴보았다. 먼저 본 종이와 매끄럽게 이어지는 내용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며 으르렁대는 호랑이를 보다 감탄에 찬 눈으로 유화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도 재밌고 그림도 너무 잘 그리시는데요? 유화 님은 진짜 대단하신 것 같아요.”

“대단은 무슨, 그저 별궁에 있다 보니 할 것도 없고 해서 심심풀이로 해본 것이란다. 어린 궁인들이 좋아해 줘서 몇 개 만들어봤을 뿐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림을 바라보는 유화의 눈에서 다정함이 뚝뚝 흘러넘쳤다. 나는 유화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주몽이 말을 트던 시절, 읽어줄 동화책이 없어서 내가 배우던 책이나 읽어줬던 기억이 났다. 그때도 이런 게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직 친했더라면 당장 오늘 밤이라도 가서 자기 전에 읽어줬을지도 모르겠다.

“…….”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나는 쓰게 웃으며 종이를 가지런히 모았다. 그러다 문득 요즘 배우라는 글은 내팽개치고 이야기만 조른다는 태령의 막냇동생이 떠올랐다. 그 집 아이도 올해로 5살이었지. 나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유화 님. 이 그림 이야기를 한 편만 빌려 가도 될까요?”

“특별히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느냐?”

“제 호위 무사에게 어린 동생이 있는데 요즘 글공부를 어려워해서요. 이걸 보여주면 무척 좋아할 것 같아요.”

그녀는 날 말없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될 건 없지. 이걸로 더 많은 아이가 글을 쉽게 배울 수 있다면 나로선 오히려 좋은 일이로구나.”

그녀는 별말 없이 ‘해님 달님’ 이야기가 담긴 종이들을 엮어주었다. 나는 감사히 받아서 옆에 내려놓았다.

그 뒤로도 우리는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내가 일어섰을 땐 어느새 해가 기울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밖에 놔둔 태령도 걱정되고, 슬슬 저녁도 먹을 시간이었던 터라 나는 조만간 다시 들르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별궁을 나섰다. 걱정했던 마태령은 옆방에서 어슬렁거리며 나왔다. 뒤이어 화로를 가지고 나온 궁인이 내게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넌 그새 궁인을 꼬셔서 방에 들어가 있었어?”

“꼬시다니요. 그저 친절한 궁인이 추위에 떨고 있는 절 가엾이 여겨 방 한편을 내어줬을 뿐인걸요.”

태령이 억울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런 것치곤 화로를 얼마나 쬐었는지 곁에 서기만 해도 뜨끈뜨끈한 공기가 느껴졌다. 이번에도 잘생긴 얼굴로 수작을 부렸을 게 뻔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됐으니까 이거나 가져가.”

“이게 뭡니까?”

“유화 님께서 만드신 건데 네 막냇동생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아서 빌려왔어.”

동생 이야기에 태령은 그 자리에서 종이를 훌훌 풀어헤쳤다. 훑어보는 그의 얼굴이 점차 감탄으로 물들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뛰어난 그림 솜씨로군요. 실례지만 어디서 배우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오백 년 된 자라한테 배우셨다는 거 같던데.”

“…….”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내 말이 진실인지 농인지 가늠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나는 진심이었으나 그는 허무맹랑한 내용에 헷갈리는 듯했다. 결국 태령은 진실을 알아내길 포기하고 종이를 소중하게 말아 쥐었다.

그 뒤로도 가볍게 티격태격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저 너머로 태자궁 처마가 보였다. 오늘따라 유독 추운 날씨에 종종걸음을 걸으며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그곳엔 낮은 담벼락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작은 아이가 하얀 입김을 뿜으며 서 있었다. 그는 품 안에 서책을 잔뜩 안은 채였다. 얼마나 있었던 건지 추위에 발갛게 부르튼 뺨이 시선 끝에 걸렸다.

“…….”

그러나 나는 애써 고개를 돌리고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빨리 사라져야 주몽도 북녘궁으로 돌아가리란 판단에서였다.

“혀, 형님…….”

그러나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을 땐 나도 모르게 걸음을 우뚝 세우고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주몽을 내쳤던 계절이 가고 눈이 올 때까지 우리는 여러 번 마주쳤었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칠 때도 있었고 산책을 하는 나를 아이가 몰래 지켜보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가 날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걱정이 치솟아 오르며 몸이 먼저 반응을 했다.

돌아본 주몽은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서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가 조그맣게 미소 지었다. 아이는 머뭇거리며 다가오더니 안고 있던 서책을 날 향해 쭉 내밀었다.

“지난 백 일 동안 공부한 서책입니다. 우 대사자님도 글을 빨리 뗀다며 칭찬을…….”

그 순간 버거울 정도로 안겨 있던 서책이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상기된 얼굴로 말을 늘어놓던 아이가 당황하더니 서둘러 책을 주웠다. 그러나 다급한 손놀림이 오히려 서책 사이에 껴 있던 종이들마저 쏟아지게 했다. 나풀대며 흩어지는 종이에 주몽이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몸을 낮춰 같이 종이를 줍기 시작했다. 집어 올린 종이 위엔 한자가 작은 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여백이 보이지 않도록, 심지어 위에 몇 번이고 덧쓴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아이가 급히 손을 뻗더니 내 손을 잡아 말렸다.

“형님! 제가 할 테니 그러지 마시고…….”

나는 내 손 위에 겹쳐진 작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뽀얗고 여려야 할 5살짜리의 고사리 같은 손은 거듭된 붓질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아이는 내 시선에 서둘러 손을 치우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사과를 중얼거렸다. 이미 차갑게 얼어 곱은 손을 더욱 움츠리는 모습이 내 얼마 남지 않은 양심을 쥐어짰다.

게다가 가까이서 보니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었던 뺨은 어느새 홀쭉해져 있기까지 했다. 이번만큼은 나도 미처 삼키지 못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맞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들던 내 계획에 대한 의심이 다시 강하게 올라왔다.

주몽은 어느새 서책을 모두 주운 상태였다. 아이가 급히 일어서더니 울먹이며 쓸모도 없는 사과를 다시 중얼거렸다.

“죄송, 죄송합니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띠링―

뚝 떨어지는 눈물이 허공에 떠오른 반투명한 창 너머로 보였다. 아이는 서책을 두 손 가득 끌어안아 눈물을 닦을 손도 없었다. 대신 급하게 뒤도는 작은 등을 나는 일단 불러 세웠다.

“잠깐 기다려봐.”

주몽이 멈칫거리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발을 질질 끌며 뒤도는 모습을 배경으로 나는 서둘러 퀘스트 창을 읽어내렸다.

[도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오지 않는 형님을 기다리며 몇 시간이나 서 있었던 아이. 오늘따라 유독 그의 뺨이 야위어 보이는데요. ‘중해’에게 따뜻한 한 끼를 선물해주세요!

- ‘중해’에게 식사 제공 (0/1)

성공 시 보상 : ‘중해’의 공부 의욕 상승, 기타 감정의 변화

실패 시 결말 : ‘중해’의 공부 의욕 상승, 기타 감정의 변화

우습지도 않은 내용의 도전 퀘스트였다. 심지어 성공 시 보상과 실패 시 결말이 같기까지 했다. 그러나 마침 떠오른 퀘스트 창은 갈팡질팡하던 내 마음에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주었다.

나는 안도감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을 건넸다.

“마침 저녁때인데 밥이나 먹고 가. 그 커다란 상에 숟가락 하나 얹는 게 대수겠어.”

아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찬바람을 쌩쌩 일으키며 뒤를 돌았다. 주몽을 데리고 태자궁으로 들어가자 궁인들이 한차례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태자궁에서 주몽의 이야기는 금기시될 정도로 아이를 밀어내던 내가 다시 그를 들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물러남으로써 궁인다운 눈치를 보여주었다.

순식간에 둘만 남은 우리는 자리에 앉아 멀뚱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밥을 먹이려고 들이긴 했지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이의 두 눈은 약간의 기대감과 설렘, 그리고 두려움 따위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그나마 골랐던 말들도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 매일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정말 아역배우를 시켰으면 대성했을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식사라도 시작하면 이 어색한 분위기가 좀 풀릴 텐데. 평소라면 벌써 저녁 식사를 시작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왜 상이 들어오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저하. 석반을 들이겠사옵니다.”

그러나 나는 차려진 상을 본 순간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그 이유를 깨달았다. 상은 주몽이 좋아하던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급히 저녁 메뉴를 바꾸느라 고생했을 수라간 궁인들이 눈앞에 선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궁인에게 칭찬을 해주려다 주몽과 지금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먼저 식사를 시작하는 것을 확인한 주몽도 쭈뼛거리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나는 고깃국을 떠먹는 척하며 몰래 젓가락의 경로를 살폈다.

역시나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달달하게 양념 된 불고기였다. 아이는 그 접시에서 연달아 젓가락질을 하더니 곧 한 쪽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작은 손을 뻗어 슬그머니 접시를 내 쪽으로 밀었다.

“…….”

옆에서 식사를 돕던 궁인이 흡, 하는 억눌린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상전을 코앞에 두고 할 만큼 예의 있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나도 백번 이해했기 때문에 조용히 눈감아 주었다. 나에게 꾸준히 외면받고도 감히 고기 님을 밀어주는 아이의 심성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저렇게 착해서 어디다 써. 나쁜 데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모습에 한탄이 절로 나왔다.

“넌 진짜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물론 답을 알고 있기에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다르게 다가왔는지 그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커다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맑기만 하던 눈동자가 일렁이기 시작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늘 제 모습이 형님께는 아직 많이 부족해 보인다는 것을 잘 압니다. 아직은 제가 쓸모없다는 것도요. 하지만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해서 꼭 형님 곁에 서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 그래. 앞으로도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도록 해.”

다섯 살 적 장래 희망이 소방차였던 나는 남다른 포부에 마땅히 어울리는 격려를 찾지 못했다. 대신 내 쪽으로 밀려온 불고기를 집어 아이의 숟가락 위에 얹어주었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떨떠름한 말투에 대한 나름의 포장이었다.

“…….”

그러나 아이는 제 숟가락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어쩐지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급기야 주몽은 먹으라고 준 고기를 곱게 밥그릇 한구석에 두더니 맨쌀밥만 입 안에 볼록하게 넣었다.

그 기행은 내가 남은 불고기를 모조리 부어 불고기덮밥으로 만들어버린 후에야 그쳤다. 아이는 놀랐는지 눈을 깜빡이며 나와 밥그릇을 번갈아 보다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미래의 내가 곧 들을 식사 예절에 대한 훈계의 보상으로 충분했다.

물론 퀘스트 창이 정직하게 뱉어낸 완료 문구에 쓰여 있는 ‘기타 감정의 변화’가 기쁨일 거란 생각에 확신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나는 훈계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아무 생각 없이 퀘스트 완료 창도 같이 치워버렸다. 이미 내 머릿속은 북녘궁으로 몰래 불고기를 보낼 생각으로 가득 차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

평소와 같이 조반을 먹고 아침 산책을 준비할 때였다.

“태자 저하. 그거 또 없으십니까?”

간만에 제시간에 출근한 마태령은 오자마자 날 붙잡고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주어가 생략되었음에도 나는 단박에 그림 이야기를 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올 만큼 획기적인 아이디어에 아름다운 그림이긴 했다.

그래도 불건전한 놀이가 아니면 눈길도 주지 않던 놈이 이러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이야기는 서너 편 더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얌전히 빌려다 주는 대신 장난기가 돈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맨입으로 받아먹으려고?”

“어차피 별궁의 그 여자, 아니 그 여인이 만든 게 아닙니까?”

그 여자? 내 눈치를 보고 급히 단어를 바꾸긴 했지만 이미 노골적인 무시는 전해진 다음이었다.

평소에 가볍게 행동하니 잊고 있었지만 마태령은 부여의 가장 큰 가문 중 하나의 적자였다. 여러 가지 사정상 유화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지극히 귀족적이고 오만한 사고방식은 이렇게 때때로 튀어나와 나를 차갑게 식혔다.

당과나 하나 얻어먹고 빌려다 주려 했던 생각은 이미 흔적도 없이 싹 사라졌다. 나는 삐딱하게 서서 툭 내뱉었다.

“마태령 호위 무사. 유화 님이 만들었으면 뭐. 아무런 대가도 없이 턱턱 내놓아야 한단 말입니까?”

“아니, 당연히 아니지요, 저하. 저는 다만 그분이 애초에 어린아이들의 글공부를 돕기 위해 만들었다 하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을까 하여 여쭤본 거지요.”

날 선 내 말투에 태령이 능글맞게 웃으며 살살 기었다.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애써 참았다.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신분제의 정점에 앉은 주제에 ‘진짜 귀족’과 굳이 입씨름을 해서 분란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태령이 가람이만 한 어린 나이도 아니고, 훤칠한 장정이 뿌리박힌 사상을 손쉽게 갈아치울 리 만무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싸움 대신 그림 이야기의 제값이라도 받아내야겠다. 오기가 치민 나는 손바닥을 펼쳐 척 내밀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얻고 싶으면 정당한 대가를 치러.”

“제가 이런 건 처음이라……. 뭘 드려야 하나요?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는 나도 조금 놀라고 말았다. 부여는 아직 화폐와 시장이 발달하지 않은 나라였다. 대신 원하는 게 있으면 보통 물물교환으로 거래를 진행했다. 그런 상황에서 뭐든지 주겠다는 말은 백지수표나 다름없었다. 평소 헛소리는 자주 하지만 마음 없는 소리는 거의 하지 않는 태령이었다. 이게 그렇게 갖고 싶냐는 물음에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글 읽기 싫어하던 놈이 어젯밤엔 책을 세 번이나 읽더군요. 종국엔 모르는 한자를 스스로 찾겠다며 책을 펼치는데 기특해 죽을 뻔했습니다.”

“그래……?”

생생한 후기를 듣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마태령은 행동거지는 천박해도 귀한 것만 보고 자라 안목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런 그가 선뜻 사겠다 할 정도면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고작 한 명의 말만 듣고 일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오늘 당장 한 권을 더 빌려 가람이에게도 읽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또 의견을 물어볼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볼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던 나는 곧 태령에게도 동생이 셋은 더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런 것치곤 이야기를 많이 못 들은 것 같지만. 내친김에 나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넌 다른 형제들 이야기는 잘 안 하는 거 같네? 맨날 막냇동생이나 큰형님 얘기만 들은 거 같아.”

“당연하지요. 저희 셋과 누이 한 명을 제외하면 모조리 천한 핏줄이니까요.”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런 말을 뱉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듯한 평범한 태도가 오히려 당혹스러움을 증폭시켰다.

“뭐?”

“누이 한 명과 남동생 둘은 모두 첩의 자식입니다. 아버지가 너그럽게 여겨 모두 거뒀지만 사실 비첩의 자식인데 아우라 말하기도 그렇지요.”

첩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비첩은 종의 신분으로 첩이 된 여성을 말했다. 일하던 식솔을 취해 자식까지 낳게 해놓고, 당연히 책임져야 하는 것을 ‘너그럽다’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에 새삼 환멸이 났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당당히 내 의견을 피력할 수 없었다. 신분제 사회에서 혼자 ‘인간 평등’을 외쳐봤자 끌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내 가치관을 받아들일 리 없는 태령과 말싸움을 하다 서로 감정이 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내 최선이 침묵뿐이라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고민하다가 서자에 대한 그의 거부감이라도 줄여보기로 결심했다. 본디 거부감이란 주변 환경에 의해 습득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주변 사람 중 한 명인 내가 거부감을 표하지 않는다면 태령도 자신도 모르게 그들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지 않을까?

“이름이 뭔데?”

이름을 물은 것은 단순히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관심은 호감의 표시로, 거부감과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 저하, 제 말 못 들으셨습니까? 저하께서 관심 둘 가치도 없는 자식들입니다.”

“응, 들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그가 순순히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은 예상한 바였다. 나는 빈곤한 변명을 둘러대며 끈질기게 이름을 물었다. 그러나 의외로 태령은 금세 납득했다.

“하긴, 요즘 저하께선 궁인의 육촌 오라버니 이름까지 묻고 다니셨죠. 저는 진심으로 저하가 부여 백성들의 모든 이름을 외우시려는 건지 고민했다니까요?”

“그 정도는 아닌데…….”

나는 민망함에 말끝을 웅얼거렸다. 신에게서 주몽의 벗이 될 세 명의 이름을 들은 뒤로 기회만 나면 주변 인물들의 이름을 묻고 다닌 것은 맞았다. 모두 말을 걸고 다닐 순 없으니 유일하게 가진 정보인 ‘이름’으로 우선 찾아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태령은 이런 나의 행동을 떠올리며 이 상황을 스스로 납득한 모양이었다.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그는 순순히 이름을 알려주었다.

“한 놈은 협보, 한 놈은 협우입니다. 나이는 뭐, 열두 살, 일곱 살쯤 먹었겠네요.”

“협보?”

신이 알려준 세 사람의 이름 중 하나가 ‘협보’였다. 그 순간 나는 얼굴을 봐야겠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아닐 수도 있었지만 그 정도는 대화만 나눠보면 ‘힌트 창’이 알려줄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실마리를 잡은 나는 태령을 졸랐다.

“협보라는 애 만나보고 싶은데 한 번만 데리고 오면 안 돼?”

“예?”

그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설득했다.

“나이가 나랑 똑같은데 말동무나 하려고 그러지.”

“제가 말동무해 드리잖아요.”

“넌 이상한 말만 하잖아.”

그가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무슨……. 그래도 아니 됩니다. 천하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실 귀한 분께서 급에 맞는 자랑 노셔야지요.”

“그놈의 핏줄, 핏줄. 그게 뭐기에 사람 한 번 만나겠다는데 기를 쓰고 반대해?”

원래라면 좋은 말로 구슬리고 달래서 협보를 데려와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말이 모양만 달리하여 반복되는 동안 내 신경줄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진 뒤였다. 나는 결국 혐오하면서도 가진 것 중 가장 강력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네 논리대로라면 내 급에 맞는 신분은 없는데. 어쩌지?”

“…….”

“나한텐 너나 걔나 똑같단 소리야. 우리 괜히 힘 빼지 말자. 네가 그러니까 내가 꼭 걔 얼굴을 봐야겠잖아.”

마지막엔 괜히 어리광 피우듯 책임을 떠넘겼지만 태령의 굳은 얼굴은 풀릴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껄끄러운 분위기에 나는 결국 축객령을 내렸다. 확답을 듣진 못했지만 태자의 명령이니만큼 그는 내일 협보를 데리고 올 것이다. 마지막 분위기가 좋진 않았지만 본래 성격상 꽁한 것도 하루 이틀이면 풀리겠지 싶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짐작대로 다음 날 작은 아이를 옆에 끼고 온 태령은 기분이 크게 나빠 보이진 않았다.

“저하. 데리고 왔습니다.”

그는 평소처럼 건들거리며 인사하더니 데리고 온 아이를 짐짝 던지듯 앞으로 휙 밀었다. 아이는 한눈에 봐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격식에 맞춰 절을 하는 모습이 기특하다면 기특했다. 나는 탁자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바로 협보구나. 네 형님께 얘기 많이 들었다.”

“태, 태자 저하를 뵈, 뵙사옵니다…….”

협보가 덜덜 떨며 대답을 했다. 나는 대답을 미루며 힌트 창이 뜨는지 잠시 기다렸다. 띠링― 곧 내 직감이 맞았음을 알리는 반가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힌트]

축하합니다! 당신은 ‘주몽’의 벗이 될 세 사람 중 ‘협보’를 만났습니다.

첫 번째로 만난 ‘협보’가 당사자라니, 운이 좋았다. 나는 새어 나오는 만족감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꾹 말아 넣었다. 그러나 그런 나와는 달리 협보는 아직도 엎드려 떨고 있었다.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해 보이는 모습에 나는 긴장을 풀어주고자 먼저 말을 건넸다.

“내가 널 왜 불렀는지 아느냐?”

“소, 송구, 송구하옵니다…. 소인이 죄를 저질렀다면 벌을 달게 받을 것이오니…….”

대뜸 날아온 사과에 나는 당황해서 태령을 쳐다보았다.

“너 내가 왜 얘를 불렀는지 얘기 안 해줬어?”

그가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 들었다 놓았다.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끌고 왔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애가 저렇게 덜덜 떨고 있지. 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우선 무언가를 잘못해서 불려온 게 틀림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저 아이의 오해부터 풀어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무해하고 친절한 목소리를 냈다.

“그런 거 아니야. 다만 내 너에게 궁금한 점이 있어 부른 것뿐이란다.”

“…….”

“참말이야. 내 주변엔 또래 친구가 아무도 없어 적적하기도 했고.”

진실 반, 거짓 반의 달램이 통했는지 아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한 아이는 험상궂은 이름과는 달리 섬세하고 단정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태령이 밖을 휘젓고 다니게 생긴 잘생김이라면 협보는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리는 잘생김이었다.

나는 이름에 가졌던 편견을 반성하며 본격적인 대화를 나눌 준비를 했다. 미래에 주몽의 벗이 될 사람인 것을 확인했으니 별 탈 없이 잘 크도록 도와줘야 했다. 그리고 그전에 우선 가장 걸림돌처럼 보이는 인물을 치우기로 했다.

“마태령. 잠깐 나가 있어.”

“예? 저요?”

팔짱을 끼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는 놀라며 스스로를 가리켰다. 나는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전에 하나만 여쭤보고 싶은데, 정말 그 그림 이야기 제게 팔지 않으시겠습니까? 매일 밤 막내가 아주 성화입니다. 저하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제가 아끼던 책이라도 드리겠습니다.”

마태령이 아끼는 책이라고 해봐야 그 종류가 뻔했다.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양손을 펴 내밀었다.

“거래를 할 땐 상대방이 원하는 걸 가지고 와야지. 내가 그걸 어디다 쓰겠어? 쌀로 내놔, 쌀로.”

그가 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곳간이 쌀로 꽉꽉 차 있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태자가 그런 소리를 하니 이상해 보일만도 했다.

그러나 이 시대에서 돈처럼 잘 쓰이는 거래 물건을 찾자면 단연 쌀이었다. 그림 이야기의 가치 측정을 위해선 거래 수단으로 쌀을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 뻔뻔스러움에 먼저 포기를 한 것은 태령이었다.

“음, 그럼 얼마만큼의 쌀을 원하십니까?”

그는 진지하게 고민을 하다 되려 내게 가격을 물었다. 문제는 나 역시도 부여식 경제 관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먼저 가격을 제시하라 한 처지에 되묻는 것도 우스워 보여 눈만 굴릴 때였다.

“그, 그림 이야기가 저 서책이라면 한 가마니가 저, 적당할 듯싶사옵니다.”

어디선가 작지만 명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태껏 침묵하며 눈치를 살피던 협보였다.

그는 차분하게 한 가마니면 부부가 지금부터 먹기 시작해서 여름이 다가올 때쯤이면 동날 양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래도 아직 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화폐 가치로 측정하긴 힘들었지만 확실한 건 가격에 대한 감이 어느 정도 잡혔다는 것이었다. 소심하고 어리숙하게만 보였던 협보에 대한 신뢰도가 급상승하는 순간이었다.

이어진 물가에 관한 질문에도 아이는 작지만 확신엔 찬 목소리로 모조리 답했다. 궁 안에서만 지낸 탓에 바깥 상황을 전혀 몰랐던 나에겐 꼭 필요한 정보였다. 순식간에 얻은 귀한 정보에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너 진짜 대단하다.”

“화, 황공하옵니다. 어머니를 따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것일 뿐, 그저 흔하고 잡스러운 지식이옵니다. 태자 저하께서 감탄하실 것이 못 됩니다.”

협보가 안절부절못하며 다시 자세를 낮추었다.

“잡지식이라니, 무슨 소리야.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데. 참말로 영리하고 보는 눈이 있구나.”

그러나 나는 이때다 싶어 양껏 칭찬을 쏟아부었다. 실제로 감탄한 것도 있었지만 순간 아이를 보고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잘하면 주몽의 벗이 될 재목으로도 키우고, 나도 득을 볼 수 있는 일거양득의 아이디어였다.

그를 위해 나는 우선 협보를 살살 꼬드기기 시작했다.

“너 나랑 말동무할래?”

“예?”

뜬금없는 제안에 협보가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꿋꿋하게 밀고 나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별것 아니야. 그냥 오늘처럼 종종 내 궁에 놀러 와서 같이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글공부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마태령이 폭발한 것은 그때였다.

“태자 저하! 기어이 말동무로 삼으시겠다니요! 오늘은 고집을 부리셔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왔지만 더 이상은 아니 됩니다! 저 핏줄은 대대로 불여우 같아 저하께서 잠시 홀리신 것뿐, 천한 것과 같이 지내실 수는….”

“그만해.”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내용에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길길이 날뛰던 그가 제 숨에 잡아먹혀 헐떡이며 애꿎은 협보를 노려보았다. 아이가 따갑게 내리꽂히는 시선을 피해 몸을 더욱 옹송그렸다.

계속해서 마주하게 되는 불편한 주제에 나는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설득할 수 없다면, 나를 위한 방향으로 맞부딪쳐야 했다.

……그렇다면 나의 벗인 태령보다 주몽의 벗이 될 협보를 지키는 것이 옳았다.

나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최대한 차갑게 말을 뱉어냈다.

“마태령. 여기서 정말 천한 티를 내고 있는 게 누구라고 생각해?”

“…….”

“손님과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주위를 물리거라.”

나는 태령의 눈을 피하며 궁인에게 손짓했다. 눈치만 보던 궁인이 재빠르게 태령의 팔을 잡고 방 밖으로 끌어냈다. 그가 내치듯 궁인의 손에서 팔을 빼낸 뒤 성큼성큼 제 발로 걸어 나갔다. 고요하게 닫히는 장지문은 성난 발걸음 소리를 모두 감춰주지 못했다.

나는 그 발소리가 모두 멀어지길 기다렸다가 조용히 입을 뗐다.

“마태령은, 내가 나중에 달래면 돼.”

아직까지도 덜덜 떨고 있던 협보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반면에 나는 주먹을 꾹 쥐고 옷자락 아래로 손을 숨겼다. 아이의 떨림이 옮겨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나는 횡설수설 말을 내뱉었다.

“어차피 그의 가치관은 나와 맞지 않았어. 물론 자란 환경이 있으니 이해, 이해는 하지만, 존중까진…. 나로선 이게 최선이었어.”

누구에게 말하는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나는 곧 입을 다물었다. 말 하나하나 모두가 협보가 아닌, 스스로를 향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퀘스트라는 나만의 이익을 위해 친구에게 세 치 혀로 칼날을 휘두른 주제에 나는 끝까지 이기적이었다.

어느새 협보는 웅크렸던 몸을 모두 펴고 있었다. 마주한 아이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나는 애써 머릿속에서 태령을 털어내고 작게 미소 지어 보였다. 협보는 내 미소를 보고 몸을 움찔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태자 저하. 하나만 여쭤보아도 되겠사옵니까?”

“응. 편하게 물어봐.”

“왜 이리 저를 감싸주시는지 모르겠사옵니다. 다 들으셨겠지만 저는 천한 서자이옵니다. 사람들은 모두 제 어머니가 부, 불여우니 저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합니다. 저하께서도 분명 불명예스러운 일을 겪게 되실 것이니…….”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반대하는 자를 겨우 쫓아냈더니 이번엔 협보 스스로가 거부하고 있었다.

이젠 에라 모르겠다 싶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는 협보의 자존감이나 올려주기로 결심했다. 썩어빠진 신분제도에 얽매여 제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게 할 순 없었다.

“잘 들어. 나는 네가 서자든 뭐든 상관 안 해. 그러니 설령 안 좋은 소문이 돈다 한들 난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고작 소문이 무서워서 널 놓치면 너무 아까울 것 같거든.”

이번에 놓쳐버리면 또다시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몰랐다. 아까운 기회를 그냥 날려버릴 순 없었다.

협보는 멍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생전 처음 칭찬을 들어본 아이처럼 넋을 빼놓은 표정에 마음이 아팠다.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어서 ‘불여우’ 운운하는 소리를 듣고도 참아야 하는 건지, 신분제를 이해는 했지만 이럴 때마다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리고 네가 이렇게 착하고 바르게 자란 걸 보니 어머니께선 분명 현명한 분이실 것 같은데. 맞지?”

협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이의 흔들리는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럼 다른 사람들 말은 듣지 마. 네가 아는 진실을 믿어. 나도 내가 아는 진실을 믿을 테니.”

환경은 생각보다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본인이 아니라고 믿어도 주변에서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면 어느 순간 잠식되기 마련이었다.

협보는 그러기 딱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의외로 강해서 단 한 명이라도 믿어주는 사람이 생긴다면 계속해서 버틸 수 있다. 나는 주몽이 그 역할을 넘겨받기 전까지 그 ‘한 명’이 되어줄 생각이었다.

“……저하께서 아는 진실은 무엇이옵니까?”

“네가 장차 커서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거지.”

개국공신이 될 테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협보는 영 믿지 않는 눈치였다. 살짝 웃기도 하는 게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참말이야. 그러니 그깟 핏줄에 얽매이지 마.”

내 진지한 태도에 협보의 얼굴도 다시 진지해졌다.

“내 말동무가 되어달라는 건 농담이 아니었어. 너만 괜찮다면 자주 놀러 왔으면 좋겠는데. 와서 부디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줘.”

이번의 그는 떨지도 않았고 농담으로 치부해 웃지도 않았다. 대신 단단히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말이 절로 나왔다.

“아, 다행이다.”

겨우 이뤄낸 첫 단계에 진이 다 빠졌다. 나는 안심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나 아직 용건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궁인을 불러 간단한 다과상과 유화에게 내가 잠시 와 달라 했다고 말해줄 것을 부탁했다.

우리는 잠시 다과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우선 나는 예의를 과하게 차릴 필요 없으니 편하게 대해달라고 했다. 협보는 망설였지만 내 끈질긴 권유 끝에 극존칭을 존칭으로 한 단계 낮추었다. 그 뒤론 시시콜콜한 일상을 얘기하며 친밀감을 쌓았다.

차를 반쯤 비웠을 때 궁인이 들어와 유화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나는 협보에게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협보야. 사실 네가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하나 있어.”

“그게 무엇입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이는 마시던 차도 내려놓고 내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말동무라는 관계가 이상한 의무감을 심어 준 건지 꽤나 의욕적인 태도였다. 나는 일단 들어보고 이야기하라며 아이를 말렸다.

때마침 유화가 차분한 걸음걸이로 방 안에 들어섰다. 나는 생긋 웃으며 협보에게 유화를 소개했다. 아이는 당황했는지 눈만 굴리다 일어나서 절을 올렸다. 나는 그사이 유화에게도 협보를 소개했다.

“오늘부로 제 새로운 벗이 된 아이입니다. 이야기를 조금 나눠봤는데 유화 님께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해드리려고요.”

그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곤 계속해서 생각해오던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유화는 자신이 이해한 게 맞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림 이야기를 판다니? 값을 받고 넘기라는 것이냐?”

“네! 제가 생각하기엔 큰 값을 내고서라도 얻으려는 귀족들이 많을 것 같아요.”

그녀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미간을 설핏 찌푸리고 말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로구나. 난 이걸로 이익을 낼 생각이 없어. 그저 많은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이지. 차라리 원하는 이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것이 내 뜻에는 더 맞다고 생각되는구나.”

주몽이 누굴 닮아서 간도 쓸개도 없이 착한지 알 것 같았다. 유화는 악덕 고용주에게 붙잡혀 탈탈 털리기 딱 좋은 사람이었다. 태령이 그녀에게 직접 그림 이야기를 더 달라고 했으면 그녀는 분명 별말 없이 갖고 있던 모든 걸 내어줬을 것이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를 설득했다.

“유화 님의 마음은 저도 잘 알아요. 그러나 귀족들에게 무료로 책을 뿌리는 것보다 차라리 그에 맞는 값을 받아내어 그 쌀을 굶주린 사람들에게 뿌리는 게 백번 나을 것 같지 않으세요?”

그간 마태령을 보면서 철저하게 느낀 바였다. 그가 이런 수준 높은 글과 그림을 선뜻 내어준 유화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으면 나는 기쁘게 더 빌려다 줬을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가 내게 정신 차리고 정당한 대가를 받아내야만 한다고 외치게 해주었다.

유화는 깊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동안 적당히 식은 차로 목을 축이고 여러 번 그녀를 설득했다. 선한 마음과 호구는 다르고,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말을 돌리고 돌려 말한 끝에 결국 유화는 판매를 결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팔릴지 모르겠구나. 가지고 있는 이야깃거리도 슬슬 떨어져 가고…….”

“자신감을 가지세요. 잘되면 좋고 안돼도 그만이라고 생각하시고, 이야깃거리는 제가 제공해드릴게요.”

“네가?”

“네. 저 아는 이야기 엄청 많거든요. 유화 님은 그림만 그리세요!”

한국 전래동화는 물론이고 외국 동화까지 끌고 오면 몇십 권은 금방이었다. 기본적으로 보고 자란 애니메이션과 영화, 그리고 드라마도 꽤 있었다. 이야기는 믿고 맡기라고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모습에 유화도 걱정을 한시름 놓는 듯했다. 나는 한술 더 떠서 협보를 손짓하며 환하게 웃었다.

“게다가 여기 유통을 맡아 줄 귀한 인재도 있으니까요.”

나는 그동안 유화에게 내가 느낀 협보의 상업적 재능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무리 판매는 다른 사람을 통한다 하더라도 우리 쪽에서도 상업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엔 그녀도 동의했다. 그녀 역시도 바깥 사정에 대해 무지하기론 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어떠하냐. 할 수 있겠느냐?”

우선 협보를 믿어보기로 결정한 유화가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믿고 맡겨 주신다면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아이는 곧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굳은 결심으로 가득 찬 눈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나는 마주한 눈을 향해 고마움을 가득 담아 웃어주었다. 이렇게 유화의 사업을 맡겨 잘 키운 다음 주몽에게 넘겨주면 제 몫은 능히 해내겠지. 그렇게 나는 세 벗 중 한 명을 무사히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

“저하. 밤이 깊었사옵니다.”

어느새 모두가 돌아간 깊은 밤이 되고 태자궁에는 적막만이 내려앉았다. 멍하니 앉아 달을 바라보던 나는 몸을 일으켜 준비된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유모가 든 등잔불이 그녀의 걸음에 맞춰 흔들리며 너울거리는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얌전히 이불을 젖히고 누웠다. 미리 데워둔 이불 안은 내 몸을 금세 노곤하게 녹여주었다. 잠시 주어진 평화를 만끽하는 동안 유모는 평소처럼 침실 안에 남은 궁인들을 모조리 물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 나직이 물었다.

“마태령 말이야. 화 많이 난 것 같았지?”

유모는 창문이 꼼꼼하게 닫혔는지 확인하던 손을 멈칫했다.

언쟁이 오가던 그 자리엔 유모가 아닌 다른 궁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통 험악한 분위기가 아니었으니 대화 내용이 태자궁을 통솔하는 그녀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 만무했다. 예상대로 유모는 상황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더 설명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잘못된 일을 했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아니옵니다. 제가 지켜본 저하는 모든 행동에 이유가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이번 역시 그러시겠지요.”

답하는 말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이윽고 창문을 모두 확인한 그녀가 자리끼를 따라 머리맡에 두었다.

“그러나 감히 한 말씀 올리자면, 마태령 님을 내치시고 그 집 서자를 들이신 것은 정치적으로 미숙한 결정이셨사옵니다.”

“정치는 공적인 일이잖아. 이건 친우 사이의 일인데 그렇게까지 영향을 미칠까?”

“저는 저하의 그런 마음씨를 몹시도 존경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저하와 같다고 생각하지 마시옵소서. 그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좋은 결정이 아니옵니다. 아무리 사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이미 한번 상한 감정은 정치적으로 대립할 일이 생겼을 때 반드시 이빨을 드러낼 것입니다.”

유모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낮에는 욱한 감정과 협보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섞여 태령을 내쳤지만 듣고 보니 그녀의 말이 옳았다. 내가 잃은 것은 우정뿐이라 생각했었는데 내 발목엔 생각보다 많은 일이 얽혀 있었다.

“송구하오나 당분간 협보라는 아이는 자주 부르시지 않는 게 좋겠사옵니다.”

유모는 우선 태령과의 관계에서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조치를 내놓았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협보는 유화의 사업을 돕기로 결정 난 상태였다. 볼 일이 있다면 별궁으로 부르고 내가 가서 만나면 되었다. 태령은 별궁에 갈 때면 항상 떼놓았으니 우리가 만나는 것을 알아차릴 가능성은 적었다.

그녀는 이미 지나간 일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며 촛불을 끄고 나갔다. 그러나 말처럼 쉬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내일 태령을 만날 생각에 밤새도록 뒤척였다.

하지만 밤새 짜놓은 열한 가지 시뮬레이션이 모조리 쓸모없게도 마주한 태령은 평소와 같았다.

“저하. 간밤에 평안하셨습니까? 오늘은 어쩐지 어제보다 더 춥네요.”

그는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더니 날이 춥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꼼꼼하게 살펴봐도 시종일관 웃는 얼굴에서 기분이 상한 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게. 너도 잘 잤어?”

그래서 나도 입을 싹 닫았다. 솔직히 먼저 모른 척해주는 행동이 고맙기까지 했다. 이런 태령의 행동을 보고 유모는 훌륭한 정치적 판단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니 어제 미숙하게 반응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태자’라면 모름지기 정치적 감각이 중요할 텐데. 유모는 이런 내 고민에 우선 행동을 하기에 앞서 정치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을 들여보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러나 꽤 오래 노력했지만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간 살면서 정치라곤 뉴스를 보거나 학급 내 편 가르기를 할 때 접했을 뿐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미 나는 어떤 행동을 할 때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면을 배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종종 현대적 가치관이 튀어나와도 이미 익숙해진 궁인들이 오냐오냐해주니 실수를 인지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성과도 없이 스트레스만 잔뜩 받은 나는 고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어차피 왕이 되기 전에 여길 떠버릴 건데 왜 애쓰냐는 악마의 속삭임이 크게 한몫했다. 사실 태자는 왕이 되기 전부터 국정 회의에 참석해야 했지만 이미 내 안의 악마가 괜찮다며 자기합리화까지 끝내버린 뒤였다.

그렇게 어리석은 자가 유모의 조언마저 잊어가고 있을 때쯤 사업 준비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

나는 오늘도 태령을 떼놓은 채 별궁에 앉아 있었다. 방에는 모두가 힘을 합쳐 만들어낸 그림책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나는 완성된 책들을 마지막으로 검토하며 겉면에 도장을 찍는 일을 했다. 내 손짓에 따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가운데 잎이 몇 장 돋은 채 서 있는 묘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책이 우리 것임을 증명하는 용도로, 유화가 사흘 밤낮을 고민하여 그려낸 것이었다. 이 책을 읽고 한겨울에도 꿋꿋하게 버티는 나무처럼 강인하게 자라나길 바라는 그녀의 마음이 보이는 듯했다.

“하아…….”

그러나 정작 또 다른 제작자인 나는 고민에 휩싸여 연약해져 있었다. 나는 도장이 잘 찍혔나 확인하다 책을 툭 내려놓았다. 간단한 반복 작업이라 머릿속 상념을 몰아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선택한 일이었는데 효과는 없는 듯했다. 나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십니까?”

연이은 한숨에 옆에 있던 협보가 이유를 물었다. 우리는 별궁에 모여 각자 맡은 일을 하던 중이었다. 지금은 유화가 잠시 볼일이 있다고 나가 둘만 남아 있었다.

“아냐. 나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마저 해.”

“옆에서 계속 그러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집중을 합니까. 고민이 있으시면 말씀해 보세요, 들어드릴 테니까.”

협보가 들고 있던 장부를 내려놓으며 내 고민을 털어놓을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나는 머뭇거리며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내가 요즘 골머리를 앓는 일은 주몽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배불리 먹여서 돌려보낸 뒤로도 주몽은 두세 번 더 책을 껴안고 날 기다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아이는 또 야위어 있었다. 처음에는 안쓰러움에 착각한 건가 싶었지만 시스템 창이 또다시 ‘한 끼 제공’ 퀘스트를 띄우는 걸 보니 착각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그를 잔뜩 먹이고 돌려보내는 길에 궁인을 시켜 북녘궁 재정 상태를 알아보게 했다. 그동안 좋은 것만 먹이진 못해도 부족함은 없었는데 요새 자꾸 마르는 모습이 이상해서였다. 그리고 궁인이 들고 온 소식은 나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아…….”

나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이걸 협보에게 털어놓을지 고민했다. 며칠 내내 생각했지만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긴 했다. 주몽과 나의 진짜 속사정은 남이 들어서 좋을 것이 없으니 최대한 혼자 해보려 했는데…….

“얼른요. 유화 님 돌아오시겠어요.”

협보가 다시 한번 나를 재촉했다. 확실히 주몽에 관한 이야기는 유화가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하기 곤란했다. 결국 주저하던 나는 그에게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바로 속사정을 밝힐 순 없었으니 일단 남의 이야기인 척 말문을 열었다.

“내가 아는 사람 이야기인데 말이야. 그 사람이 한 아이를 아는데 그 아이가 요새 자꾸 말라서 걱정스럽대.”

“가서 먹을 걸 주거나 직접 챙겨주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게, 사정이 있어서 지금 일부러 피하는 중이래. 그래서 직접 챙겨줄 수는 없고 몰래 알아봤는데 그 사람 때문에 아이한테 가던 지원금이 팍 줄었다지 뭐야. 원래는 이 사람이 아이를 잘 챙겨줘서 주변 사람들도 아이를 잘 챙겨준 건데 이제 모른 척하니까 덩달아 홀대하는 거지.”

이것이 바로 궁인이 전해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내 결정이 아이에게 감정적 피해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 뒤로 밤에 잠도 이루지 못하고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요즘 고민이래. 다시 잘해줄 순 없는데 지원금은 점점 끊기고……. 아이가 마른 걸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파, 아니 아프대. 어떡하지?”

고민을 대강 털어놓은 나는 간절한 눈으로 협보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도 좋은 방안을 내놓지 못하면 그냥 다시 주몽에게 잘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던 협보는 답변 대신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놓았다.

“유화 님 아들이랑 사이 안 좋으신 거 아니셨습니까? 일부러 모른 척하시는지는 몰랐네요.”

“어?”

“북녘궁에 사는 아이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너는 그걸 알아챌 눈치는 있으면서 모른 척해줄 눈치는 없어?”

“…….”

사실 안 들키는 게 더 이상할 정도의 위장이긴 했다.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고민 상담의 대상으로 굳이 협보를 고른 이유는 그가 믿음직스러워서가 아니었다. 주몽과의 관계를 해명할 일이 생긴다면 그가 제일 나을 것 같아서였다.

협보는 주몽의 벗이 될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내 친구였다. 이맘때 아이들은 친구에게 물들기 쉬웠다. 계속해서 내가 주몽을 싫어하고 피하는 모습을 보이면 덩달아 협보도 주몽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러니 내가 주몽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협보에게 말하는 것이 제일 낫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적어도 부정적인 선입견을 없애는 장점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차라리 지금이 좋은 기회일 수도 있었다. 물론 진실을 말할 순 없었다. 다만 이럴 때를 대비하여 만들어둔 변명이 있었다. 나는 과장되게 한숨을 한 번 더 내쉰 다음 말문을 뗐다.

“네 말이 맞아. 사실 나 사정이 있어서 일부러 해를 내쳤던 거야.”

“무슨 사정이요?”

호기심 넘치는 어린 남자아이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나는 극적인 연출을 위해 일부러 머뭇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다시 입을 연 것은 아이가 답답해 미쳐버리겠다는 얼굴을 했을 때였다.

“내가 습격을 당했던 적이 있거든. 다행히 그땐 운이 좋아 목숨은 부지했지만 또 자객을 보내면 이번에도 대상이 나라는 보장이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해가 제일 위험할 것 같은 거야. 가람이는 그나마 왕자라서 괜찮은데 해는 아무런 뒷배도 없어서…….”

“…….”

“멀리한 건 그 이유 때문이었어. 나랑 멀어지면 자객도 눈을 뗄까 싶어서. 어린아이들은 원래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하니까 좀 멀리하고 시일이 지나면 날 금방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말끝을 흐리며 슬픈 생각을 하자 금세 눈물이 삐죽 배어 나왔다. 협보가 허둥지둥하더니 눈에 보이는 천을 냅다 집어 건네주었다. 닦고 보니 찻물이 축축한 게 찻잔을 닦을 때 사용하는 다도용 행주였다. 궁인이 보았더라면 감히 태자한테 행주를 건네준다고 뒤로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모른 척 눈물을 닦고 내려놓았다. 협보 혼자만 차건을 건넨 줄도 모르고 천이 젖은 게 모두 내 눈물 때문인 줄 알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속사정이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다 내 잘못이지 뭐……. 그 순하고 착한 아이가 이젠 나 때문에 밥 먹을 돈도 없다 하고……. 이제 와서 다시 잘해줄 수도 없는데, 흑!”

“저하. 일단 울지 마시고……. 차! 차라도 드실래요?”

다시 눈물을 쥐어 짜내자 협보가 당황하며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식은 찻물을 버리고 닦을 행주를 찾길래 눈물을 닦던 차건을 내밀었다. 그제야 그는 천의 정체와 더불어 눈물의 진실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귓가를 새빨갛게 물들인 아이가 배신감에 찬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번엔 내가 딴청을 피우며 말을 돌렸다.

“그래도 들어보니까 내가 왜 고민하는지 알겠지? 해답이 없다니까.”

“확실히 어려운 문제네요.”

그가 이를 갈며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네가 태자라서 참는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고민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아요. 그럴 시간에 최대한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야죠.”

“좋은 방법이 있어? 뭐부터 해야 할까?”

“일단 맡은 일부터 하세요. 그거 오늘까지 도장 다 찍어야 하는 거 알고 계시죠?”

“…….”

협보가 내 앞에 놓인 일거리를 향해 턱짓을 했다. 그러고 보니 협보는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장부를 살펴보고 있었다. 손에서만 놓으면 다냐, 눈동자가 굴러가고 있는데. 지독한 일 사랑에 헛웃음만 나왔다. 결국 나는 꿍얼거리면서도 다시 도장을 집어 들었다. 다음 책의 표지에 반듯하게 도장을 찍어 누를 때였다.

“그 고민이라면 내가 해결해줄 수 있겠구나.”

장지문이 열리더니 부드러운 목소리가 집중을 흩뜨려놓았다. 유화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빈 서안에 짐을 내려놓으며 태연하게 폭탄을 던졌다.

“중해는 내 자식이 아니더냐. 끊겼다는 지원금은 내가 도로 채워놓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정말 그럼 되겠네요!”

협보가 남의 속도 모르고 박수를 짤깍짤깍 쳐댔다. 그러나 나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한참이나 말을 고르고 나서야 유화에게 물었다.

“……혹시 다 들으셨어요?”

“그래. 어찌나 시끌벅적하게 떠들던지, 내가 밖에 서 있는 것도 모르더구나.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나로선 다행이지만 말이야.”

나는 시끌벅적함에 일조한 협보를 노려보았다. 그가 입매를 움찔거리더니 서둘러 장부를 보는 척했다. 그의 기민한 눈치는 내가 정말 화났을 때를 귀신같이 쏙쏙 알아채는 재주가 있었다. 유화가 “그만.” 하며 내 시선을 막아주었다.

“그토록 중해를 감싸고 돌던 네가 하루아침에 돌아서길래 사정이 있으리라 짐작했지만 그런 연유인지는 몰랐구나. 그래… 끈 떨어진 연을 궁에서 챙겨줄 리가 없지.”

“…….”

“네가 무얼 걱정하는지는 안단다. 그러나 이것 또한 나의 결정이니 존중해주지 않으련?”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내 눈에서 모든 걸 읽어낸 눈치였다. 상냥하게 건네는 말에 내가 말을 얹을 곳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화는 환히 웃으며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정작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였는데도 말이다.

며칠 뒤 다시 알아본 북녘궁의 사정은 전보다 훨씬 나아져 있었다. 유화가 지체 없이 약속을 지킨 덕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궁인의 말을 듣고도 모자라 협보까지 염탐꾼으로 보냈다. 주몽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날, 그 언제인지도 모를 날을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이제 내 사정을 다 안다고 오해하는 협보는 투덜거리면서도 기꺼이 염탐꾼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생각보다 금세 돌아와 나에게 소식을 전해주었다.

“마르긴 했지만 크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건강해 보이던데요.”

“다행이다. 그래도 조금 더 살펴보고 오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어.”

협보가 어쩐지 곤란한 낯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쪼끄만 게 눈빛이 아주 매섭던걸요. 절 어찌나 노려보던지 잘 살펴보지도 못했습니다.”

내놓은 대답은 믿을 수 없는 말로 가득했다. 주몽이 태어날 때부터 지켜봤지만 아이의 매서운 눈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헛걸 본 게 틀림없는 협보에게 친절하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그럴 리가. 걘 널 알지도 못하는데 그랬을 리가 없어. 우리 해가 얼마나 순하고 착한 아이인데.”

“예? 거의 절 구워 먹고 싶어 하는 눈이던데요.”

“구워…. 불고기가 먹고 싶나?”

어떡해. 소고기를 좀 더 보낼까?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나는 수라간에 기별을 넣었다. 곧 따끈한 불고기가 나무로 만든 통에 정갈하게 담겨 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도시락을 협보의 손에 쥐여주었다. 손쓸 틈도 없이 이어진 행동에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날 쳐다보았다.

“태자 저하? 그럴 바엔 그냥 다시 잘해주세요. 이게 무슨 눈 가리고 아웅인 짓입니까.”

“뭐래. 얼른 가서 유화 님이 보냈다고 하고 주고 오기나 해.”

유화라는 든든한 핑계가 생긴 나는 주저할 것이 없었다.

이 외에도 ‘유화’라는 존재는 내 행동에 자주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었다.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역시 심리적 죄책감이 좀 더 줄어들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 어째서인지 날이 갈수록 주몽이 날 기다리는 빈도수가 늘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지치지도 않고 찾아오는지 한 번은 협보에게 내가 잘 무시하고 있는 게 맞냐고 물어봤을 정도였다.

“나 잘 박대하고 있는 거 맞지?”

“예에……. 잘하고 계셔요.”

그럴 때마다 협보는 맞다며 긍정해주었다. 어쩐지 시큰둥한 목소리였지만 딱히 또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잘하고 있다는데 뭐…….

사실 의심이 들다가도 앞에서 주몽이 배시시 웃는 모습만 보면 모든 생각이 잊혔다. 매번 모른 척 지나쳐야 하는 숙명을 지닌 나에겐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내 총애같이 감정적 혜택이 아닌 유화의 금전적 혜택을 누리게 된 아이는 날이 갈수록 미모가 빛을 발하게 되었다.

“형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퀘스트가 뜨지도 않았는데 아이와 마주 보고 밥을 먹고 있었다.

“……뭐지?”

뭔가 아닌 것 같다는 걸 느꼈을 땐 이미 1년이 지나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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