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27)

3.

다시 하루하루가 무난하게 흘러갔다. 변화라곤 날이 제법 더워졌다는 것과 궁인들의 건강 염려가 심해졌다는 것 정도였다. 어찌나 유난인지 작년에 보았던 의원에게 다시 진찰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뭐 별일 없으시냐.’와 같은 안부 인사만 몇 번 주고받고 끝났다. 그나마 이번에는 탕약 하나 지어줘서 자기 전마다 마신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일까.

그리고 나는 책 한 권을 더 끝냈다. 유난히 두꺼웠던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 날, 하마터면 기뻐서 책을 던져버릴 뻔했다. 다행히 나는 꾹 참고 기쁨을 삭였다. 앞에선 우 대사자가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다음엔 무슨 책을 할까 고민하고 있는 거겠지……. 좋았던 기분이 푸스슥 식는데 그가 질문을 하나 던졌다.

“구가(狗加)가 다스리는 지방에 현재 길바닥에서 굶어 죽는 백성들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태자 저하라면 어찌 해결하시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생활 속 정치 질문에 두드러기가 오소소 돋았다. 그는 종종 이렇게 질문을 던져 내 성취도를 확인했다. 구석기시대부터 근현대시대까지 역사교육을 받은 게 다행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내 같잖은 역사 지식과 대한민국 생활 시스템을 닥닥 긁어 의견을 내놓았다.

“농업과 목축이 생업이 아닙니까? 귀족들이 일할 린 없을 테고, 평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십시오. 수입이 생기는 자가 늘면 자연히 굶어 죽는 이도 줄 것입니다.”

“노비들을 부리면 공짜로 일을 시킬 수 있는데 왜 임금을 주고 평민들을 시켜야 합니까?”

“정당한 대가를 받는 평민들의 노동이 더 효율이 좋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먹이고 재울 필요도 없습니다. 노비들과 달리 세금도 내니 그 지방은 더욱 살기 좋아지겠지요.”

“그럼 그 많은 집안 노비들은 뭘 한단 말입니까.”

“노비 문서를 태우고 평민으로 만들어주면 됩니다. 그럼 걷히는 세금도 늘어나고 더불어 평판도 좋아질 것입니다.”

우 대사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 내 대답을 썩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실로 놀라우신 통찰력입니다. 어린 나이에 책만 배우시고 이런 생각을 해내신다니요. 그러나 장차 국정 회의에 참여하게 되면 말처럼 쉬이 되는 일은 없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 대사자도 한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우가(牛加)의 대귀족이었다. 그 집 재산인 노비를 풀어 평민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대답이 좋게 들렸을 리 없었다. 정작 그 대답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방법이라 한들 말이다.

하지만 평등한 나라에서 18년 동안 산 사람은 대답을 쥐어짜 내도 저런 대답 밖에 할 줄 몰랐다. 애초에 난 정치와 역사 모두에 영 젬병이었다. 우 대사자는 내 대답을 여러 번 곱씹는 듯했다. 이윽고 그가 다시 말문을 뗐다.

“그동안 쉼 없이 공부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이레 동안 태자 저하의 수업은 없습니다. 이번 책을 끝내신 보상입니다.”

“정말이십니까?”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휴가라니! 5년간 한 번도 없었던 휴식이었다. 엉덩이가 절로 들썩거렸다. 가득 갈아놓은 먹물이 마를 때까지 절대로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던 가람이 기회를 노렸다.

“스승님. 그럼 저도…….”

“제가 왕자궁으로 가지요.”

단호한 대답에 가람이 햇빛 못 본 식물처럼 시들시들해졌다. 하지만 우 대사자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번복 없이 태자궁을 나섰다. 입맛을 잃은 가람도 일찍 왕자궁으로 돌아갔다. 나는 손뼉을 치며 꼴도 보기 싫은 책들을 싹 다 침실에서 치웠다. 어차피 일주일 후면 다시 들여놓아야 할 테지만 당분간은 한자의 획 하나 보지 않을 심산이었다. 당분간은 누워서 일어나지도 말아야지!

그리고 이 바람은 사뭇 다른 방향으로 실현되었다.

***

“……하! 태자 저하! 제발 눈 좀 떠 보시옵소서!”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시야가 온통 검었다. 바닥에 눌린 볼은 까끌까끌했으며 팔다리는 기형적으로 꺾여 있었다. 금세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귓가에서는 여전히 궁인이 악을 쓰고 있었다. 머리가 어디 심하게 부딪힌 것처럼 둥둥 울렸다.

눈을 두세 번 깜박이고 나서야 나는 내가 흙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었지만 그 즉시 끔찍한 고통에 상체가 무너졌다. 팔이 미친 듯이 아팠다. 처음에 나는 어디 잘못 디뎠나 싶었다. 그러나 곧 섬뜩한 느낌과 함께 팔에서 피가 후드득 떨어져 웅덩이를 만들었다. 날카로운 비명이 다시 울려 퍼졌다. 달빛에 비쳐 웅덩이의 검붉은 빛이 드러났다.

피가… 저만큼 고이려면 대체 얼마나 다쳐야 하는 거지? 고개를 돌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입을 떼 신음을 뱉었다.

“아파…….”

“저하! 움직이지 마시옵소서! 의원이 곧 올 것입니다!”

달빛에 드러난 궁인의 얼굴은 저 달보다 하얬다.

“팔이 너무 아파……. 내가 왜 여기 있어? 분명 난 자고 있었는데….”

“…습격이 있었습니다. 자객이, 자객이 저하를 둘러업고…….”

얼음장 같은 심연 속에서 단숨에 끌려 나온 듯 등골이 서늘했다. 습격이라니. 일평생 연관이 없을 거라 생각한 단어였다. 18살 고등학생으로 살던 때는 물론이고 부여에 넘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노릴 가치가 없는 태자였다. 얼마나 하찮으면 그 흔한 개인 호위 하나 없이 궁을 쏘다녔을까.

팔에서 다시금 피가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운이 나빴더라면 배가 뚫려 있었겠지. 어쩌면 목이 그여 이미 차갑게 누워 있었을 수도 있었다. 난생처음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온몸이 벌벌 떨려왔다. 내가 왜? 대체 뭘 잘못 했지? 무엇 때문에 이런 꼴을…….

“저하! 정신 차리옵소서! 저하!”

궁인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나는 까맣게 흐려지려던 눈을 부릅떴다. 피가 빠져나가서인지 여름인데도 전신이 서늘했다. 삶을 향한 갈망이 감각을 날카롭게 벼렸다.

“……자객은?”

“도망쳤사옵니다. 다른 궁인이 알리러 갔으니 걱정 마시옵소서. 분명 잡혀 천벌을 받을 것이옵니다.”

잡지 못할 것이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태자를 암살하려는 이가 실력 없는 자객일 리 없었다. 바로 뒤쫓아도 어려울 판에 늦게 출발한 궁궐 순찰대가 잡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나는 굳이 궁인의 희망을 깨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돌아와 암살을 재시도할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 던진 질문일 뿐이었다. 약한 궁인과 다친 어린아이를 처리하는 건 순식간이다. 지금 습격을 시도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성공하리라.

잠시만. 그럼 왜 방금 전에는 성공하지 못한 거지? 그러고 보니 분명 아까 자객이 날 둘러업고 나왔다고 했다. 애초부터 암살이 아니라 납치가 목적이었던 건가? 그럼 왜 날 찌른 거야?

머리가 아파 왔다. 날카롭게 선 신경줄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나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발을 동동 구르던 궁인들이 다가와 날 일으켜 앉혀주었다. 그 짧은 새에도 팔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한 명이 흰 천을 잔뜩 가져와 팔에 칭칭 감았다. 꽉 악문 잇새로 어쩔 수 없이 비명이 흘러나왔다.

“의원님은 대체 왜 안 오시는 거야!”

한 명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달랠 힘도 없어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반쯤 감은 눈이 궁인의 어깨 너머 빛나는 횃불을 보았다. 철컥철컥, 쇠갑옷이 부딪히는 소리도 들려왔다.

“저하! 정신 차려 보십시오! 저하!”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횃불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나는 그냥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궁인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지독한 팔의 고통도 점점 흐려졌다.

***

눈을 감고 있음에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이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냈다. 누군가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눈을 뜨자 그리운 엄마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어쩐지 눈물이 왈칵 났다. 장기 출장을 밥 먹듯 다니기 시작하신 뒤로 엄마가 내 곁에 있는 건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 손에 얼굴을 비볐다.

“엄마…….”

엄마는 멈칫하더니 다시 내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갑자기 가람이가 몹시도 보고 싶었다. 평소엔 그리 귀찮고 데면데면하던 동생이었는데 왜 그런지 모를 일이었다. 아마 아프니까 서러워졌나 보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엄마에게 물었다.

“가람이는 어딨어?”

“지금 여기 안 계셔요.”

“없다고? 지금이 몇 신데. 밤 아니야?”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달이 이제 막 뜨고 있어요.”

“또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손이 멈칫하더니 이마에서 떨어져 나갔다. 잡고 싶었으나 가슴이 답답해 몸을 웅크렸다.

그나저나 엄마 말투가 왜 저러지? 아니, 그전에 우리 엄마 목소리가 저랬던가? 지끈거리던 두통이 점차 커져 이젠 머리가 둥둥 울렸다. 나는 계속해서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려보려 했으나 이상하게도 생각나지 않았다. 두통을 견디고 있자니 문소리와 발소리가 번갈아 가며 들렸다. 나는 인기척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동생이 눈앞에 있었다.

“가람아!”

분명 오늘 아침에도 학교 가면서 본 얼굴인데.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은지 알 수가 없었다. 환히 웃는 나에 비해 가람이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괜, 흑, 괜찮… 피가, 형, 어허엉…….”

기억 속보다 크고 마른 동생은 이상하게도 어린 목소리를 냈다. 쟤가 저런 목소리였던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잠시 고통에 눈을 찌푸린 사이 내 동생이 쑥쑥 줄고 일그러지더니 뽀얗고 귀티 나는 어린애로 변했다. 그 아이가 내게로 다시 팔을 뻗었다.

“형, 형님… 흑…….”

“너, 너 누구야?”

나는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바닥을 짚은 팔이 미치도록 아팠지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아이가 눈을 크게 뜨더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혀, 형님! 접니다! 저 가람이요!”

“네가 가람이라고? 거짓말하지 마! 내 동생 어딨어? 우리 가람이 돌려놔!”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모르는 여자가 다가와 아이를 끌어냈다. 아이는 계속해서 자기가 가람이라고 주장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나는 눈 뜨고 동생을 잃었다는 패닉에 빠졌다.

내 동생. 내 동생은 어딨지?

나는 나를 바로 눕히려는 다른 여자들을 모조리 밀쳤다. 그러나 나랑 동갑으로 보이는 여자의 힘도 당할 수 없었다. 눕혀지는 와중에도 동생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신이 가람이라며 서럽게 울던 아이가 끌려 나간 문가에 누군가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보였다.

다섯 살이나 됐을까? 아직 한참 어린아이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얘네 엄마 지갑에 소속사 명함만 가득 차 있겠다 싶은 미모였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순간 이상하게도 온몸에 힘이 빠졌다.

내 저항이 잦아들자 낯선 사람들도 날 놓고 물러섰다. 아이가 터벅터벅 다가왔다.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기묘한 환희와 안도감이 전신을 쓸고 지나갔다. 더 이상 사라져 버린 동생이 걱정되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에서 정의할 수 없는 확신이 싹 텄다.

이 아이가 내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아 줄 것이다.

갑자기 왜 그런 확신이 든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신념처럼 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진 동생도, 목소리를 잃은 엄마도. 태양같이 빛나는 이 아이가 모두 내게 돌려줄 것이다. 싹은 무럭무럭 자라 내 혈관에 뿌리를 내리고 심장을 휘감았다. 나는 바짝 다가온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놓친다면 모든 게 돌이킬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어디 가지 마… 너만, 너만 있으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작은 손이 내 등을 마주 안았다. 미칠 것 같은 고통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고 다시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

여기가 어디지.

나는 눈을 뜨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신이 들기가 무섭게 지난 밤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끔찍이 아프던 팔과 철철 흘러내리던 피. 자객이 들었다며 울부짖던 궁인의 목소리가 귀에 선했다.

나는 바싹 굳어 오른손을 슬그머니 움직여 보았다. 엄지, 검지, 그리고 주먹. 다행히 손이 모두 움직였다. 불행한 점은 팔의 고통이 다시 올라왔다는 점이었다.

“으으으…….”

가만히 누워 신음 소리만 흘리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릇을 들고 들어오던 유모와 눈이 마주쳤다.

“저하! 정신이 드셨사옵니까!”

“응…….”

열이 올랐는지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나는 간신히 대답을 내뱉었다.

그 뒤로는 모든 일이 느린 듯 빠르게 흘러갔다. 의원이 와서 내 팔의 상처를 살피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침을 놓고 갔다. 한의원 한 번 안 가본 나는 이 치료를 사흘이나 당해야 했다. 다행히 열이 내리면서 그 이후에는 상체만으로 범위가 줄었지만.

악재가 든 게 틀림없다며 굿판도 벌였다. 아무도 미신이라 치부하지 않고 당연한 의식처럼 행했다. 그렇게 나는 병풍 뒤에 누워 한참이나 방울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또 사흘이 지나갔다.

사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팔의 상처였다. 길게 베인 상처이니 원래라면 꿰매고 진통제를 맞으며 하루 누웠다가 퇴원할 일이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으면 수혈을 받으면 됐다. 나는 그저 시간 맞춰 항생제를 먹으며 잘 아물길 기다렸을 것이었다.

그러나 여긴 부여였다. 효과 좋은 진통제는 당연히 없었고 구역질 나는 쓴 풀만 먹였다. 봉합술도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치료를 위해 몸에 칼을 댄다는 걸 아직 상상도 못 하는 듯했다. 그저 상처에 짓이긴 풀을 덕지덕지 붙인 뒤 천으로 싸매 두었다.

남는 시간은 누워서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내가 곧바로 깨어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사흘 동안 열이 심하게 올랐다고 했다. 그동안 나는 가람을 찾고 막상 보면 네가 아니라며 내쫓길 반복했단다. 그러다 주몽이 오면 끌어안고 놓질 않아 둘째 왕자 저하가 많이 서운해하셨다고.

정작 나는 전혀 기억이 안 났다. 꿈을 꾼 기억도 없었다. 궁인은 ‘서운’이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곤란한 얼굴만 봐도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억도 안 나는 무의식 상태의 나 때문에 궁인들이 진땀을 뺐을 게 눈에 선했다.

자객의 이야기도 들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날 밤 자객은 놓쳐버렸다고 했다.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았다. 대신 그곳에 있었던 궁인을 불러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밤 멀쩡하지 않은 정신으로도 의문스러운 구석이 분명 있었다.

아쉽게도 그녀도 많은 걸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저 자다 뒷간에 가고 싶어 나왔는데 어떤 사내를 마주치고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고. 그러자 그 사람이 둘러메고 있던 사람을 칼로 베고 도망가 버렸는데 그게 다름 아닌 나였다는 것이다.

의문인 점은 정말 나를 납치하고자 했다면 그대로 업고 뛰어도 됐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나는 11살짜리 어린애였다.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또, 나를 업고 나오는데도 내가 깨지 않았다는 점이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이 점은 자객이 내가 자는 사이에 기절을 시켰을 수도 있으므로 넘겼다.

애초에 목적이 납치가 아니라 상해를 입히는 것이었나? 하지만 그것도 그거대로 이상했다. 굳이 마당까지 날 끌고 나왔어야 했을까.

그러나 이런 내 의견을 들은 순찰대장은 내 말을 가뿐히 무시했다.

“그들의 머릿속을 이해하려 하지 마십시오, 저하. 태자궁은 제가 지킬 터이니 걱정 말고 계시면 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취급하는 게 다 드러났다. 그러나 나는 그의 성의 없는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야간 근무가 추가되었는데 새파랗게 어린애의 추리를 듣고 있으려니 짜증이 날 만도 하지. 왕족을 향한 올바른 태도는 아니었으나 자객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굳이 마찰을 빚고 싶지 않았다.

몇 명은 병문안도 왔다. 왕비님은 내 몸 하나 못 지키냐며 쌀쌀맞게 말하셨지만 눈에 서린 걱정을 숨기지 못했다. 내 몫이 아닌 ‘자식을 향한 걱정’을 받고 있자니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뻣뻣한 태도로 인사치레를 해서 그녀를 돌려보냈다. 우리가 그동안 데면데면하던 사이여서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걱정했던 가람과의 사이는 금세 풀렸다. 처음에는 서운함을 가득 담고 발을 쿵쿵 구르며 들어왔지만 이 아이 또한 나에 대한 걱정이 더 큰 아이였다. 내가 그를 알아보는 것을 확인한 뒤 가람이는 한참 동안 울었다. 나는 조막만 한 손이 내 이마를 짚다, 팔을 감은 천을 만지다, 다시 우는 것을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내가 멀쩡한 걸 확인한 뒤 가람이는 끅끅거리며 헛소리를 했다.

“저 무예를 연마하기로 했습니다. 오늘부터 형님을 지키려면 강해져야 합니다.”

“뭐라고? 고작 8살이 위험천만하게 무슨 무예야.”

“다른 귀족 자제들은 걸음마를 할 적부터 칼 쓰는 법을 배운다 합니다. 저는 한참이나 늦되었으니 지금부터라도 죽기 살기로 배워 형님을 꼭 지킬 겁니다. 다시 이리 다치는 일 없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내 부상이 이상한 헛바람을 불어넣은 듯했다. 그러나 아프다 보니 언쟁하는 것도 지쳐서 나는 네 마음대로 하라는 심정으로 가람을 내보냈다. 연무장 백 바퀴를 돌고 찌르기만 삼백 번을 하면 곱게 자란 왕자님께서 어련히 지쳐 나가떨어지겠지 싶었다.

이상한 점은 주몽이 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가 깨어나면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달려올 거라 생각했는데. 듣자 하니 아주 오지 않는 건 아니고 내가 잘 때만 몰래 왔다 가는 모양이었다. 왜 그러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며칠은 서운해도 참았지만 계속해서 그러니 걱정마저 생겼다. 내 서브 퀘스트의 완료 창이 뜨지 않는 점도 한몫했다. 뭐 얼마나 좋은 스승을 구해주려는 건지 아직도 퀘스트는 진행 중이었다.

답답함에 우 대사자를 만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지만 부상을 당하며 수업도 그대로 멈춘 상태였다. 주몽의 스승 건에 대해서라면 한없이 잘 보여야 할 신세에 바쁜 그를 오라 가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오늘에야말로 주몽을 만나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를 불러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옆을 봤을 때였다. 그곳에는 한없이 초췌해진 유모가 앉아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바느질거리를 들고 내 옆을 지키는 모습이 시름에 가득 차 보였다.

그제야 내가 아팠던 동안 돌아보지 못했던 궁인들이 생각났다. 모두들 살이 빠졌거나 눈 밑이 거뭇해지는 등 안색이 좋지 않았다. 나는 미처 그들을 챙기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했다. 한 번 든 자객이 또다시 들지 말란 법은 없었다. 또한 다음번에도 태자만 해치고 나가란 법도 없었다. 나 때문에 궁인들은 언제 또 자객이 들까 무서워 잠이 들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날 간호해야 하니 얼마나 피곤했을까. 나는 안쓰럽게 유모를 바라보다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혹시 다른 곳에서 일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도 돼. 다른 궁인들한테도 말해주고.”

유모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침 물을 들고 오던 궁인은 잔을 떨어뜨렸다.

“죄, 죄송합니다!”

궁인이 서둘러 깨진 조각과 물바다를 치우기 시작했다. 유모가 뭐라 한 소리 하고 싶은 듯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나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작은 실수에도 궁인을 크게 혼냈는데 모두 ‘태자궁’ 소속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럴 때마다 막상 그 태자는 부담스럽고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바닥을 거의 다 치웠을 때였다. 유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자객이 들어 태자 저하의 안위를 살피지 못한 일은 전적으로 저희 궁인들 잘못이옵니다. 목숨을 백 번, 천 번 내놓아도 모자라지요. 어떤 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나이다. 다만… 오래 모신 태자 저하께서 다 낫는 모습은 뵙고 가고 싶었는데……. 이번 일로 저희를 금방이라도 내치고 싶으실 저하의 마음은 고려하지 못했나이다. 송구하옵니다.”

유모가 갑작스레 머리를 크게 조아렸다. 그녀를 따라 다른 궁인들도 모두 자세를 낮추고 엎드렸다. 나는 당황해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태자궁에 자객이 든 원인은 볼 것도 없이 나였다. 여기 살던 궁인들은 피해자나 다름없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급히 외쳤다.

“일어나!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왜 내가 벌을 내려?”

“저희가 미천하여 저하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물론 모시던 귀한 신분이 다치면 나라도 놀랄 것이었다. 하지만 이게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애초에 궁인은 호위 무사가 아니다. 지키지 못했다고 벌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나는 서둘러 그 말을 부정했다.

“목숨 앞엔 귀한 것과 천한 것이 나뉘지 않아. 똑같이 하늘신께서 내려준 목숨인데 신분이 낮다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어찌 그분의 말씀을 대신하는 자리에 오를 수 있겠어.”

“저하…….”

그제야 모든 궁인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정말 너희들이 잘못한 것은 없으니까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하나둘씩 얼굴을 들자 모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한 명이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송구하옵니다. 태자 저하. 저하께서 살려주신 이 목숨, 저하를 위해 바치겠사옵니다.”

그대로 큰절을 올리자 나머지 궁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큰절을 올렸다. 정작 나는 드라마 사극에서나 듣던 대사에 닭살이 돋았다. 무슨 목숨까지야. 내가 한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감동을 받는 신분제 현실이 새삼 씁쓸했다.

어색한 침묵과 감동의 순간은 내가 다시 이불보 위로 쓰러지듯 누우며 끝났다. 다 낫지도 않았는데 열을 냈더니 다시 팔이 쑤셨다. 한 궁인이 급하게 나가 또 그 쓴 풀을 달인 물을 가져왔다. 나는 오만상을 찡그리면서도 받아 마셨다. 그 뒤론 유모가 쉬셔야 한다며 모든 궁인을 끌고 나갔다.

맞다. 주몽 불러달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제야 잊었던 용건이 생각났다. 역시 오늘도 그른 모양이었다. 밖에서 철이 철그렁철그렁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이미 기운을 다 빼버린 나는 무사들이 태자궁 순찰을 도는 소리를 듣다가 다시 까무룩 잠들었다.

***

“저하. 우 대사자님께서 찾아오셨사옵니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가람이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상을 물리고 가람이에게 약과나 쥐여줄 참이었는데 궁인이 들어와 뜻밖의 소식을 고했다.

“스승님께서?”

바쁘신 양반이 무슨 일이지. 그러나 마침 잘됐다 싶었다. 서브 퀘스트 성공이 뜨지 않아 조마조마한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째서 아직도 주몽의 스승을 구하지 못하셨는지 물어봐야 했다.

“어서 드시라 해.”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지문이 열리고 우 대사자가 들어왔다. 궁인들이 서둘러 상을 물렸다. 가람이도 눈치껏 일어났다. 기다리기 지루하면 왕자궁으로 돌아가도 된다 했지만 아이는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며 나갔다.

나는 상석을 내어드리고 그 앞에 앉았다. 헛기침을 몇 번 한 우 대사자가 입을 열었다.

“좋지 못한 일을 당하셨다 들었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심하게 움직이면 욱신거리고 새 살이 돋느라 간질거리긴 하지만 이 정도면 순조롭게 낫는 중이었다. 나는 생긋 웃으며 입에 발린 말을 했다.

“예. 모두 걱정해주신 덕분입니다.”

“다행이로군요. 저하께선 이 나라의 미래이시니 몸을 잘 보전하셔야지요.”

그러더니 우 대사자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침묵 속에 눈만 굴리다 먼저 궁금한 점을 묻기로 했다.

“혹시 해에게 스승을 구해주시기로 한 일의 진척에 대해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해…? 아, 북녘궁 아이 말씀이시로군요.”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에 불안감이 들었다. 이제 와서 안 된다는 건 아니겠지? 얼마 남지 않은 기한 내에 더 좋은 조건으로 스승을 구해줄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들은 말은 그보다 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제가 그 아이를 가르쳐보고자 합니다.”

“예? 스승님께서요?”

“그렇습니다. 재능이 출중한 아이이니 잘 가르치면 장차 큰 쓸모가 있을 거라 생각되어 그리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미래 건국 왕이시니 장차 큰 인물이 될 건 맞았다. 그러나 너무 갑작스러워 조금 놀랐다. 인재 욕심이 많은 건 알았지만 저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우 대사자에게 수업을 받고 싶어 하던 주몽이 떠올라 좋기도 했다. 나는 어서 주몽에게 소식을 전해줄 생각에 들떠 마구 질문을 던졌다.

“참으로 잘 되었습니다. 그럼 수업은 언제부터 하시는 겁니까? 정무로 바쁘실 텐데 너무 밤늦게 하면 아이가 어려 힘들지 않을까요?”

“수업은 당장 내일부터, 해가 하늘 정중앙에 뜨면 시작할 생각입니다.”

그 시간대는 나와 가람이가 수업을 받던 시간이었다.

“아, 설마 저희와 같이 수업을 듣는 겁니까?”

“아닙니다. 저는 오늘부로 저하의 스승직을 그만두려 합니다. 그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얼굴이 단호했다. 반면 지금 내 얼굴은 얼이 잔뜩 빠져 멍청해 보일 게 틀림없었다. 나는 너무 놀라 이유를 물어야 하는데도 어버버거리기만 했다. 우 대사자가 몹시도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마저 말했다.

“저하의 팔 부상이 심해 수업을 더 이상 이어가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저하의 건강을 염려해 내린 결정이니 부디….”

“예? 혹시 제 팔 잘렸나요?”

하도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질책은 커다란 헛기침 소리로 돌아왔다. 마지못해 무례한 언사에 대해 사과는 했지만 내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공부를 좋아하진 않았다. 오히려 휴가를 줬을 때 덥석 받았을 정도로 지긋지긋했다. 만일 우 대사자가 3개월을 쉬자고 했으면 옳다구나 하고 받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예 내 스승직에서 물러난다고 했다. 조금 전 안부를 물으며 내 팔이 잘 낫고 있다는 걸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상’이라는 핑계를 대며 말이다. 심지어 다친 팔은 왼팔이었고 난 오른손잡이였다. 그리고 우 대사자는 평소 하는 걸 봤을 때 내가 오른팔을 다쳤다고 해도 왼팔로 붓을 들라고 했을 인간이었다.

나는 우선 당황스러움을 가라앉히고 우 대사자에게 다시 물었다.

“스승님. 이리 갑작스럽게 그만두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제 건강이 이유라면 잠시 쉬었다 다시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저하의 건강 회복이 우선이기 때문에…….”

“아니, 그러니까 제가 머리를 찔린 것도 아니고 왼팔만 베였는데 왜 아예……. 혹시 저 죽습니까?”

“저하! 예의를 갖추십시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치뜬 눈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우 대사자는 불만이 가득한 내 얼굴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저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실 정말로 건강이 문제라면 잠시 쉬었다 수업을 재개하는 게 맞지요.”

“…….”

“제가 태자 저하의 스승직에서 물러나는 이유는 저하께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귀족회의에서도 이미 말씀드렸고 모두들 동의하셨지요.”

안타깝다는 표정에 반해 말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기묘한 위화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귀족들이… 모두 동의를 했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모두 태자 저하의 수학능력을 들으시곤 감탄을 금치 못하셨지요. 하나같이 입을 모아 더 배우실 게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귀족들이라곤 신년 행사 때 태자의 의무를 다하느라 본 게 전부였다. 한 해에 한두 번 마주치는 사이에 날 얼마나 봤다고 그런 말을 해.

반박하기 위해 입을 뗐을 때였다. 나는 순간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 표정에 멈칫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바라보는 듯한 저 표정. 과거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실로 놀라우신 통찰력입니다. 어린 나이에 책만 배우시고 이런 생각을 해내신다니요.’

정치적 질문에 내가 내놓은 답변을 듣던 때 그가 딱 저런 표정이었다.

‘그러나 장차 국정 회의에 참여하게 되면 말처럼 쉬이 되는 일은 없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그는 여러 번 이런 말을 했지만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왕이 되기 전에 돌아가 버릴 거니까. 하지만 그전에 내가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봤는데…….

내 습격을 지시한 것은 우 대사자였다.

순간적으로 그런 직감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정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내 감이 그렇게 말을 했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라는 말은 사실상 ‘더 이상 배울 필요 없이 그저 꼭두각시 왕이나 되어라.’라는 말이었다.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귀족들의 것을 빼앗고 평민들의 힘을 키워줘야 한다. 그러나 제 것만 챙기기 급급한 귀족들에게 내가 내놓은 답변들이 좋게 들렸을 리 만무했다.

넓은 옷자락 아래 숨긴 주먹이 덜덜 떨렸다. 힘을 너무 주었는지 왼쪽 팔이 다시 욱신거렸다. 나는 애써 얼굴 근육을 움직여 기쁨을 미처 숨기지 못한 표정을 꾸며냈다. 스승을 잃게 되어 슬프지만 귀족들에게 칭찬을 들어 설레는 표정. 우 대사자의 얼굴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눈치채지 못했다고, 사실 나는 무능하다는 티를 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존경하던 스승님께 더 이상 수업을 받지 못하다니 너무 아쉽습니다. 그래도 제 동생은 계속해서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거지요?”

나는 한껏 아쉬운 티를 내며 가람의 공부를 걱정했다. 속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동생이나 걱정하는 순진한 태자로 보였으면 했다. 다행히 바람대로 우 대사자는 느긋하게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건 왕자 저하와 이야기해 보지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화끈거리는 팔의 고통을 참으며 절을 올렸다. 그런 날 보던 우 대사자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저하. 이 못난 스승이 마지막으로 드리는 충고입니다. 지금처럼 남만 신경 쓰신다면 본인이 무얼 잃는지 보지 못하게 될 겁니다.”

충고는 필요 없으니 어서 꺼지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차피 난 여기에 주몽을 지키러 온 사람이었다. 지켜야 할 ‘나’는 이곳에 없었다. ‘태자’로서 모든 걸 내버려도 주몽의 안위와 내 목숨만 무사하다면 족했다.

하지만 나는 얌전히 속말을 삼키고 방을 나왔다. 장지문을 넘자마자 무릎이 꺾여 주저앉을 뻔했다. 그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를 5년이나 가르쳐 준 스승이었다. 그런 그가 귀족들을 주도해 나를 습격했다는 건 큰 충격이었다.

“형님!”

숨을 몰아쉬며 서 있는 나를 향해 가람이가 달려왔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는 아이를 우 대사자가 있는 방으로 들여보냈다. 궁인은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또 쓴 약을 한 대접 들고 왔다. 나는 그 약에 혀를 담갔다 빼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동안 얇은 문짝 너머로 가람이 소리치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형님과 함께가 아니라면 저는 스승님께 글을 더 이상 배우지 않을 것입니다!”

“영영 배움을 추구하지 않고 살겠다는 소리이십니까?”

“저는 무예를 갈고 닦을 것입니다. 형님을 지켜드리려면 강해져야 합니다!”

강한 외침 뒤로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우 대사자도 저 철없는 소리에 할 말을 잃은 게 틀림없었다.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대접을 한 번에 들이켰다. 우 대사자의 지위면 우리나라에서 수능 평가원 출제원장한테 족집게 과외를 받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지도 못하고 귀한 기회를 걷어차는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우 대사자의 일면을 맛본 지금, 굳이 싫다는 아이를 끌고 가 맡길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아파 오는 머리를 싸안고 방에 들어가 그대로 누워버렸다. 저녁상도 물리고 이불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궁인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우 대사자의 결정이 태자궁 내에 퍼진 것 같았다.

그러나 얌전히 누워 고민하고 있으려니 또 어쩐지 나쁜 일 같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래……. 차라리 잘 되었어.”

안 그래도 요새 주몽과의 관계 때문에 고민이 많던 차였다.

우리는 너무 가까웠다. 주몽이 아직 알이었던 시절 내가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그때의 나는 적절히 거리를 두고 아이가 잘 자랄 수 있게 뒤에서 뒷받침만 해줄 생각이었다. 주몽은 나중에 고구려를 건국해야 했다. 원작 ‘동명왕편’에서는 그 원인이 태자의 강한 질투심과 괴롭힘이었다.

과연 그 외에 주몽이 자라나면서 고향을 배신하고 새 나라를 세우게 할 만큼의 큰 사건이 생길까? 아닐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도 않아서 나는 주몽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나중에는 그를 괴롭혀서 원작의 흐름대로 고구려를 세우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이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이며 내가 북녘궁의 도련님을 아낀다는 것을 모르는 궁인이 없게 되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주몽도 나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눈치였다. 초장에 계획했던 거리감 따위는 없었다.

나는 이번 기회에 무너져 내리는 계획을 다잡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보니 시기도 딱 좋았다. ‘고작 5살 먹은 아이에게 스승을 뺏겨 질투하는 못난 형’ 정도의 컨셉이면 될까. 이참에 주몽과의 사이를 악화시킬 생각이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찾아오는 아이를 내치고 배척하면 금세 사이가 멀어질 것 같았다.

게다가 5살이면 나중에 컸을 때 기억도 잘 안 나는 시절이다. 이대로 몇 년 지나면 곧 주몽은 날 쏙 잊고 나는 왕궁 어딘가에 존재하는 ‘태자 저하’가 되겠지. 정상 궤도로 돌아오게 될 계획에 마음이 들떴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누워서 침을 맞고 있는데 때마침 퀘스트 완료 창이 떴다.

[서브] 오 나의 스승님 – 완료

드디어 ‘중해’에게 스승이 생겼습니다. 아이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빠르게 성장할 것입니다. 보상으로 ‘중해’에게 ‘모든 능력치 점진적 상승’ 버프가 활성화됩니다.

※주의 : ‘모든 능력치 점진적 상승’ 버프는 쌍방으로 사제관계가 인정되어야만 발동됩니다.

우 대사자가 주몽을 찾아간 모양이었다. 몇 개월간 공을 들였던 서브 퀘스트가 끝나니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어제저녁부터 날 괴롭혔던 체기도 싹 내려갔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의원의 요청에 따라 몸을 뒤집었다. 시스템 창의 ‘주의’ 문구는 무시했다. 주몽은 원래 우 대사자한테 배우고 싶어 했으니 사제관계를 거절할 리가 없었다.

그다음 날. 내가 낮잠을 자는 사이에 또 주몽이 왔다가 갔다고 전해 들었다. 나는 “그래?”라고 한마디만 했을 뿐 더는 묻지 않았다. 전과 달리 시큰둥한 태도에 궁인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무시했다. 왜 자꾸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지 궁금해도 지금은 꾹 참을 때였다.

또 이틀이 흘렀다. 거동은 가능하지만 궁인들의 과보호 때문에 태자궁을 나서지 않는 나를 위해 가람이 찾아왔다. 기운 좋게 궁궐을 휘젓고 다니는 아이는 매번 새 소식을 물고 와 조잘거렸다.

“그런데 형님. 왜 요새는 그 애랑 놀지 않으십니까?”

연무장에서 기초 체력 훈련을 받은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던 아이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은 주몽에 관한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가람이는 절대로 주몽을 ‘중해’나 ‘해’라고 부르지 않았다. 내 앞에서 칭하는 ‘그 애’면 백발백중 주몽을 말하는 것이었다.

“음…….”

나는 잠시 대답을 고민했다. 가람이가 주몽을 질투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무엇 때문에 갖고 싶은 것 다 가지고 자란 왕자가 외롭고 딱한 주몽을 질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순하던 아이가 주몽에 한해서만 매번 날을 세우는 것을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아이에게 진실을 말해줄 순 없었다. ‘사실 나는 주몽을 좋아하지만 대의를 위해 잠시 거리를 두는 거야.’라고 말하는 순간 가람이는 어떤 식으로든 방해를 할 게 분명했다. 나는 생각해두었던 핑곗거리를 말해주었다.

“스승님이 가시고 나서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내가 어린애랑 놀아서 뭘 하겠어. 걔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걸? 장차 도움도 안 될 어린아이랑 노느니 그 시간에 공부나 더 하려고.”

말이야 이렇게 했지만 어른들이 보면 주몽을 질투해 변명이나 하는 열등감 덩어리로 보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직 어려서 순수한 가람이는 내가 한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어린애랑은 이제 상대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응? 음, 뭐… 그렇지…?”

저렇게 말하니 뉘앙스가 이상했지만 딱히 변명할 이유를 찾지 못해 그냥 긍정해버렸다. 어째서인지 아이는 두 주먹을 꼭 쥐고 나를 향해 외쳤다.

“형님! 제가 꼭 무예를 열심히 연마해서 형님께 도움이 되겠습니다!”

아이는 종종 이상한 부분에서 열정을 뽐냈다.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찻잔만 기울였다. 괜히 애를 이상하게 자극한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내가 그러고 있든 말든 가람이는 기분이 좋은지 활짝 웃으며 또 조잘조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말을 하랴, 약과를 야무지게 먹으랴, 작은 입이 쉴 틈 없이 움직였다. 한참을 떠들던 아이가 이건 비밀 이야기라며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형님. 이거는 제가 형님께서 이제 더 이상 그 애랑 안 노신다니까 특별히 말씀드리는 건데요.”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닌데 의외의 특종이 낚일 모양이었다. 가람이는 내가 드디어 자신이 싫어하는 아이에게 등을 돌렸다는 사실에 기쁜 듯했다. 아직 눈치가 없어 더 귀여운 아이는 혼자만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던 비밀을 마구 풀어놓았다.

“그 애가 주제도 모르고 우 대사자님의 가르침을 거부한다지 뭐예요. 버릇없이 북녘궁을 걸어 잠그고 스승님을 내쫓았대요. 어찌나 패악을 부리는지 궁인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답니다.”

“진짜야?”

평소의 순하던 주몽에게선 상상도 할 수 없던 모습이었다. 애초에 나는 주몽이 우 대사자를 스승으로 거부할 거라곤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예상외의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일단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가람이는 연신 거짓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나는 다과 시중을 위해 옆에 앉아 있던 궁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침 궁 내 소문에 밝아 내가 종종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 듣곤 하던 아이였다.

내 눈빛을 받은 궁인이 왕자 저하의 말씀이 맞으시다며 긍정의 답을 돌려주었다. 하도 어이가 없고 믿기지가 않아 나는 다시 묻고 말았다.

“진짜? 정말로 해가 패악을 부리며 스승님을 내쫓았단 말이야?”

“패악까진 아니옵고…….”

궁인이 슬쩍 곁눈질을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려보니 가람이 눈에 힘을 꽉 주고 궁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가람의 입에 약과 두 개를 쑤셔 넣으며 궁인을 재촉했다.

“도련님께서 우 대사자님을 스승으로 모시기를 거부하고 계신 것은 사실이옵니다. 우 대사자님의 앞에 계속해서 몸을 엎드리고 읍소하셨다 하옵니다. 모든 궁인과 심지어 우 대사자님께서도 말리시는데 매번 그런다고…….”

“뭐라고 읍소하는데?”

“이대로 수업을 받으면 자신이 정말로 태자 저하의 스승님을 빼앗은 꼴이 되니 저하의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모실 수 없다고 하옵니다.”

사실을 부풀려 험담을 한 게 1초 만에 밝혀진 가람이는 민망함에 두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험담하는 버릇이 들면 고치기 어려우니 제때 혼내야 했지만 나는 이번만 가람을 봐주기로 했다. 목적이 너무 투명해 헛웃음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대신 다음에 물을 질문은 가람이 듣기에 민감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가람을 내보냈다. 나는 아이가 아예 멀어진 것을 확인한 뒤에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혹시 궁궐에서 나에 대한 어떤 소문이 돌아?”

“모두 잡것들이 알지도 못하고 나불대는 헛소리들뿐이옵니다. 마음에 두지 마소서.”

“뭔지 알아야 마음에 두든 말든 할 것 아니야. 게다가 진정한 군자라면 자신의 허물을 알고 고쳐야 한다고 하였다. 아니 땐 아궁이에서 연기가 날까. 그 소문을 직접 듣고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하니 어서 말하거라.”

“저하…….”

내 번드르르한 헛소리에 넘어간 어린 궁인은 곧이곧대로 소문들을 털어놓았다.

듣자 하니 궁에는 나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소문이 돌고 있는 듯했다. 한 가지는 내가 원했던 대로 내가 주몽을 질투해 만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지만 나머지 하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바로 주몽이 내 스승을 빼앗아 갔다는 헛소문이었다.

우리 해가 얼마나 착한데 내 스승을 빼앗아 가. 그리고 애초에 우 대사자는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이 원한다고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 그의 단독 결정이었고 우리는 통보 당한 피해자에 가까웠지만 그런 진실은 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주몽은 첫 번째 소문을 듣고 읍소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퀘스트 창을 봤을 때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주의’ 문구가 다시금 떠올랐다. ‘모든 능력치 점진적 상승’ 버프는 쌍방으로 사제관계가 인정되어야만 발동된다고 했었나. 그땐 몰랐지만 지금의 상황이라면 버프는 물론이고 애써 스승을 붙여준 의미도 없이 성장하게 생겼다.

나는 직면한 문제에 머리를 싸매며 태자궁으로 돌아왔다. 거리를 둬도 일단 애를 달래서 공부를 시킨 다음에 둬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그 기회는 빠르게 찾아왔다. 언제쯤 찾아가야 괜찮을까 간을 보던 중 주몽이 나를 먼저 찾아온 것이었다.

“태자 저하. 북녘궁에서 도련님이 찾아오셨사옵니다.”

오늘도 반쯤 누워서 가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놀라 몸을 일으켰다. 내가 다친 뒤로 내가 잘 때만 몰래 오고 가던 아이였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랐으나 얼굴을 통 보여주지 않는 데다 원인을 파악하기도 전에 거리두기 작전이 시작되어 만나질 못했다.

나는 서둘러 주몽을 들이라 했다. 장지문 너머에서 축 처진 아이가 걸어왔다. 움츠린 어깨와 숙인 목, 힘없는 걸음걸이가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지난 5년간 애지중지 키운 아이가 저러고 있는 걸 보자 나도 모르게 끌어안고 둥둥 달랠 뻔했다.

그러나 나는 먼 훗날을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달래서 공부는 시키되 이참에 거리를 확 둘 생각이었다. 나는 주몽이 다가와 앞에 무릎을 꿇을 때까지 고개를 돌리고 앉아 있었다. 목소리도 최대한 차갑게 뽑아냈다.

“무슨 일로 나를, 아니, 무슨 일이야. 얼굴이 왜 그래?”

그러나 그 계획은 얼굴을 마주한 지 1초 만에 틀어졌다. 조막만 하던 하얀 얼굴이 울긋불긋한 멍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누가! 누가 우리 잘생긴 아기 건국 왕 얼굴에 상처를 냈어! 나는 경악하며 주몽을 끌어당겼다. 연하게 노란 기가 도는 것을 보니 이미 한참 전에 생긴 멍이었다. 옷자락까지 벗겨서 몸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건 한줄기 남은 이성이 막았다. 나는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억누르며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해야. 누가 너 때렸어?”

“…….”

그러나 주몽은 고개만 푹 숙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속이 답답해 천불이 났다. 하지만 피해자를 다그칠 수는 없었다. 주변에 얘를 때릴 사람이 누가 있지? 나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주몽은 평소 신의 아들인 듯 아닌 듯한 애매한 위치와 태자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조용했고 나쁘게 말하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궁인들이 그랬을 리는 없고. 우 대사자가 했다기엔 묘하게 상처가 난 시기가 맞지 않았다. 혹시 손버릇이 나쁜 어린 시동들이 그랬나? 저맘때의 어린 남자애들은 대부분 순간의 감정에 잘 휘둘리니 충분히 그랬을 수도…….

“…….”

나는 고개를 휙 돌려 옆의 ‘어린 남자애’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가람이 먹던 약과를 툭 떨어뜨렸다.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진짜 넌 투명해서 좋구나…….

그러나 이번에도 마냥 귀엽다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손찌검은 잠깐 하는 험담과 차원이 달랐다. 그간 시켰던 인성 교육은 죄다 민무늬토기에 밥 말아 먹었냐. 궁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착한 왕자 저하라는데 왜 주몽에게만 저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나는 훈계를 뒤로 밀어두었다. 피해자 앞에서 가해자를 혼내봤자 반감만 더 커지고 주몽에게는 위압감이 들 수도 있었다. 때린 사람을 알았으니 더 이상의 추궁은 무의미했다. 더 다그쳐봤자 주몽이 입을 열 것도 같지 않고, 열 상황도 아닌 것 같고.

보아하니 내가 잘 때만 몰래 왔다 갔던 이유는 멍든 얼굴을 보이기 싫어서인 듯했다. 나는 한숨만 내쉬며 한 손으로 이리저리 주무르던 주몽의 뺨을 놓았다.

“그래서 태자궁엔 무슨 일로 왔어.”

옆에서 가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장이라도 크게 혼쭐이 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 놀란 모양이었다. 나는 무시하고 이제라도 주몽에게 차가운 태도를 내보였다. 이미 한바탕 걱정을 해서 늦은 것 같지만 뭐든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법이었다….

주몽은 한참 우물쭈물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요새 자꾸 우 대사자님께서 저를 제자로 삼겠다며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저, 저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

나는 일부러 차갑게 딱 잘라서 이야기했다.

“내 전 스승님이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우 대사자님은 정말 학식이 높으신 분이다. 그런 분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건 다시 오질 않을 영광이야.”

“저도 압니다. 다만, 다만…….”

다급하게 말하던 주몽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평소에 잘 따르던 형님이 하루아침에 존경하던 스승을 잃었는데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소문이 도니 그간 힘들었을 만도 했다. 게다가 용기를 내서 해명하려고 찾아왔는데 그 형님은 자신을 봐주지도 않고 있었다.

서글피 우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줄 뻔했다. 인형같이 섬세하게 생긴 조막만 한 아이가 얼굴에는 멍을 달고 우는 모습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애처롭게 보였다. 그런데 그 애처로운 아이가 더 애처로운 말을 꺼냈다.

“형님…. 정말 소문대로 제가 형님의 스승님을 빼앗아 가서 저를 더 이상 좋아해 주지 않으시는 건가요?”

못되게 말해서 사이를 벌려야 하는데…….

“아니야. 그럴 리가 있겠어.”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부인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주몽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물기에 젖어 반짝거리는 두 눈이 일말의 희망을 품고 일렁거리고 있었다. 며칠 동안,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노골적인 냉대를 받고 있는데도 내 한마디에 희망을 품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더 이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만 우물거리는데 가람이 툭 치고 들어왔다.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애초에 네까짓 게 감히 뭐라고 스승님을 빼앗아 갔다는 표현을 쓸 수 있으며, 또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형님께서 그걸 신경 쓴단 말이냐? 형님께선 고작 그런 이유로 널 멀리하는 게 아니다.”

가람이 고개를 한껏 쳐들었다. 아무래도 아까 혼내지 않은 일로 내가 자기 편을 들어준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릴 적엔 왕비님 눈치 꽤나 보고 자랐던 거 같은데, 아무래도 4살 이후로 내가 너무 어화둥둥 키웠나 봐. 그렇게 곱게 자란 왕자 저하는 이번 기회에 눈치 따위 키우지 않았다는 것을 마음껏 뽐냈다.

“바로 네가 쓸모가 없어서이다. 이제야 네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것임을 알아차리신 거지.”

주몽의 눈이 커졌다. 나는 순간 팔을 뻗어 가람이의 입을 막을 뻔했다. 다친 팔 쪽에 앉아 있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그랬을 거다.

주몽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정말 제가 쓸모가 없어서, 그래서 이제 더는 봐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나는 당연히 부인하려고 했다. 평소 내가 쏟은 정성과 사랑이 얼마인데 고작 저런 말 하나에 넘어가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입을 뗀 순간 못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이 상황, 손 안 대고 코 푸는 상황이 아닌가?

내가 여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자연히 긍정의 침묵으로 보일 것이다. 그럼 따로 모진 말을 하지 않더라도 사이가 벌어지겠지. 동시에 주몽은 ‘쓸모’ 있어지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할 터였다.

그래서 나는 침묵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치졸했지만 지금으로선 가장 나은 길이었다.

역시나 주몽은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지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주몽이 “형님, 형님.” 하며 기어와 내 옷자락을 잡았다. 무릎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나는 푸른 색이던 옷이 떨어진 독기를 머금고 검은색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시 마주한 눈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각오가 차 있었다.

주몽은 내 옷자락을 놓고 물러나 큰절을 올렸다.

“형님의 곁에 걸맞은 사람이 되라 주신 기회로 생각하겠습니다.”

나는 그대로 나가는 아이를 붙잡지 않았다.

사실 나는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야!’ 하고 주먹을 꼬옥 쥐고 발을 콩콩 구르며 나가는, 그런 귀여운 그림이 아니었다. 무슨 각오를 다지는 스케일이 저렇게 남달라…. 여긴 다들 옛사람이라 그런가, 하나같이 결심하는 모습이 대하드라마급이었다.

어쨌든 ‘모로 가도 결말로만 가면 된다.’라고 드디어 퀘스트를 완벽하게 해결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남은 일 하나만 해결하면 발 뻗고 잘 수 있겠다.

“해가람. 너 이리 와봐.”

나는 허허 웃으며 가람의 귀를 잡았다. 가람이 길 가다 날벼락 맞은 얼굴로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그 맹한 얼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렸다.

“너 무술 배운다며. 그게 다 약한 사람 때리려고 배우는 거였어?”

“저하……. 애들은 모두 싸우면서 크는 법….”

보다 못한 궁인이 나를 말렸지만 나는 붙잡힌 팔을 뿌리쳤다.

“진짜 싸우기라도 했으면 몰라, 이건 일방적인 폭행이잖아.”

나도 맞고 들어올 바엔 차라리 때리고 들어오라는 생각이었지만 이건 이야기가 달랐다. 한참을 우물거리며 변명을 하려던 가람이 고개를 푹 숙였다. 궁인도 내 기세에 밀려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나는 몇 번 더 다그치다 그대로 팔을 늘어뜨렸다. 저번처럼 그 아이는 천한 것이니 운운하면 더 때려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잘못한 것은 아는가 보다 싶었다.

“한 번만 더 그러면 다시는 태자궁에 발도 못 들이게 할 줄 알아.”

나는 결국 엄포를 놓으며 훈계를 마무리했다. 그제야 가람이는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더 혼낼 힘도 없어 나는 아이를 그만 내쫓았다. 머뭇거리며 계속 뒤를 돌아보던 아이가 사라지고 궁인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까 나를 말리던 궁인이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다 입을 떼었다.

“태자 저하께서 습격을 당하시고 사흘간 열이 심하게 오르셨던 것 기억나시옵니까. 그동안 왕자 저하를 찾고 내치기를 반복하시면서도 도련님은 놓지 않아 왕자 저하가 많이 섭섭해하셨다고 말씀드렸사온데…. 주먹질도 그때 한 번 하신 것이옵니다.”

“…….”

“아직 어리신 왕자 저하께서 태자 저하가 다치신 것을 보고 충격을 많이 받으셨사옵니다. 그런 와중에 그런 혼란까지 겪으니 이치가 조금 흐려지신 것 같사옵니다. 너무 미워하진 마시옵소서.”

궁인이 말을 마치고 조용히 물러갔다.

“욱…….”

나는 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먹먹함에 무릎을 세우고 그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고작 며칠 지나면 사라질 멍을 남긴 아이에게 훈계를 한 나는 정작 평생 가도 사라지지 않을 마음의 상처를 남긴 사람이었다.

나는 결국 그날 가람이를 다시 불러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아이는 잠에 빠져들기 전 내 품을 파고들며 울었다. 나에 대한 원망은 한 톨도 섞이지 않은, 사죄로만 가득한 울음이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찌르르, 풀벌레가 울었다. 짠 내음이 가득한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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