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안녕하세요. 저는 태자궁 소속 궁인이에요. 배정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막내라 주로 태자궁 청소를 도맡아 하고 있어요.
저희 태자 저하는 아주 조용하고 얌전하신 분이랍니다. 가끔 몰래 궁을 빠져나가셔서 혼을 쏙 빼놓는 것만 빼면 정말 어린아이 같지 않을 정도예요. 게다가 어찌나 마음씨도 고우신지, 둘째 왕자님과 별궁 도련님을 하루도 빠짐없이 챙기세요.
요새는 글공부에 매진하고 계신데요. 저는 저하의 일기를 몰래 훔쳐보는 낙으로 아침 청소를 한답니다. 자주 쓰지도 않으시고 한자도 엉망진창이지만 꼬물거리는 글자가 어찌나 귀여운지 몰라요.
게다가 항상 알아보기 힘든 그림을 그리셔요. 은근히 규칙적으로 나열되어 있긴 하지만, 모두 처음 보는 모양들이니 그림이 맞겠죠? 일기보다 그림이 더 많아 이게 일기장인지 그림장인지 알 수가 없네요.
제가 저하의 첫 일기를 살짝 보여드릴까요?
- ???. 맑음. -
[해 좋다. 동생 놀았다. 해 봤다. 해 웃었다. 말해라 빨리. 형이 너 지켜.]
첫 일기다. 스승님이 한자가 잘 늘지 않는다며 일기를 추천했다. 그런데 날짜 적는 것부터 막혔다. 대체 오늘이 며칠이지?
……궁인이 “토끼별이 태자궁 바로 위에 걸려 있는 날이네요”라고 했다. 어쩌라는 걸까. 눈은 언제 오냐고 물으니 서른 밤은 자야 한댔다. 아마 오늘은 11월인가보다. 달력도 없는 망할 부여. 그냥 내가 여기 온 날짜와 부여의 날짜가 같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딱 33일째이니 (어지럽게 수학 공식이 쓰여 있다) 오늘은 11월 24일이다. 연도는 모르니까 그냥 주몽 1년이라고 하자. 이제 하루하루 혼자서라도 날짜를 세야겠다. 말도 못 하는 한 살짜리, 걔가 몇 살이 되어야 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 주몽 1년 11월 30일. 바람. -
[바람 많다. 아침 먹고 해 봤다. 해 건강해. 글공부했다, 동생 같이. 동생 좋아.]
스승님이 밑에 기호들은 뭐냐고 해서 모형 놀이를 한 거라고 얼렁뚱땅 둘러댔다. 짜증 나게 남의 일기를 왜 보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오늘은 팔자에도 없는 개와 고양이도 위장용으로 몇 개 그려놨다.
글을 배우는 건 정말이지 너무 힘들다. 붓도 익숙하지 않아 제멋대로 획이 그어진다. 샤프 쓰고 싶다. 아니, 붓펜이라도. 그냥 태자 때려치우고 붓펜 개발해서 장사꾼이나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뒹굴거리는데 가람이가 쪼르르 달려와 글공부를 하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요새 글을 배우고 있다고 책을 펼치는데 글쎄, 막힘없이 읽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보니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라 우 대사자에게 가람이와 함께 공부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4살짜리의 천재성을 본 우 대사자도 쉽게 허락했다. 아이를 왕비님으로부터 빼내겠다는 약조를 지키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했었는데. 이제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고 왕비궁에서 빠져나와도 된다고 하니 가람이 너무 좋아했다. ‘형님. 그럼 저희 이제 같이 공부하는 겁니까?’라며 어찌나 기대하던지, 마음이 짠했다.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주몽도 새 궁에서 살게 되었으며 가람도 눈치 보지 않고 태자궁으로 올 수 있게 되었다. 그건 다행이지만… 다음 퀘스트는 언제 나올까? 한 달째 똑같은 일과만 계속되니 더 불안한 것 같다.
- 주몽 1년 12월 25일. 눈. -
[첫눈 내렸다. 동생과 해를 봤다. 선물을 줬다. 구리수마수이다.]
첫눈이 내린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니. 엄마가 봤으면 낭만적이라고 좋아하셨을 텐데. 지금은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님이 태어나긴 하셨을까? 그러나 내 세상의 기념일을 잊기 싫어 혼자 선물을 준비했다. 가람에게는 새 붓을, 주몽에게는 비단을 꼬매 만든 인형을 주었다. 궁인들에게도 종이마다 꽃을 그려 하나씩 나눠주었다. 겨울이라 꽃이 없지 뭐야. 그래도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기뻤다.
***
우 대사자님은 태자궁에 일찍 오신 날마다 태자 저하의 일기를 꺼내 몰래 읽으십니다. 오늘도 태자 저하가 점심을 드시는 동안 장롱에서 일기장을 꺼내시네요. 그런데 항상 읽으며 허허 웃으시던 대사자님이 오늘따라 미간을 찌푸리십니다.
“구리수마수가 무엇인지 아느냐?”
“모르겠사옵니다.”
“아무 뜻이 없는 한자를 이어놓았으니 분명 발음이 가진 의미가 있을 텐데…….”
저는 오늘 아침 청소를 하며 미리 봤던 터라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리수마수’는 저 또한 의문이었던지라 아무런 대답도 드리지 못했네요. 태자 저하께 여쭤보자니 일기를 몰래 봤단 걸 이실직고하는 꼴이겠지요? 아무래도 ‘구리수마수’는 영원히 궁금증으로 남을 모양입니다.
***
- 주몽 2년 1월 1일. 맑음. -
[호랑이 별, 언제 태자궁 모퉁이에 걸리는 걸까?]
오늘은 새해이다. 그러나 다들 그런 기색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넌지시 유모에게 새해는 언제 오냐고 물었다. 유모가 호랑이 별이 태자궁 처마 구석에 걸려야 한다고 말했다. 하늘을 30분이나 봤는데 뭐가 호랑이 별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내 달력이 양력이어서 차이가 났다는 걸 깨달았다. 고칠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늘이 음력으로 며칠인지 모르거든. 그냥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 주몽 2년 1월 30일. 맑음. -
[해가 드디어 말을 한다!! 내가 자주자주자주 가서 말을 해줘야지. 그럼 더 잘 자라난다.]
오랜만에 퀘스트가 떴다. 너무 놀라서 밥 먹다가 코로 밥풀을 뱉을 뻔했다.
[서브] 언어 도우미 D - 100
‘중해’가 옹알이를 시작했습니다. 유모가 말을 걸어주지만 그것으로 말을 트기엔 한계가 있네요. 당신이 가서 매일매일 한 시간씩 말을 걸어준다면 좀 더 빨리 언어를 구사하게 되지 않을까요?
성공 시 보상 : ‘중해’의 언어 구사력 상승, 빠른 성장
실패 시 결말 : ‘중해’의 느린 성장
느린 성장? 고구려의 초대 왕을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영재 천재 소문이 나도 모자랄 판에……. 그나저나 처음으로 디데이 표시가 생겼다. 백일 완성 프로젝트 같은 건가 보다.
어차피 매일같이 주몽을 보러 가고 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새로운 퀘스트를 가지고 북녘궁에 가니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가서 쉼 없이 말을 걸어줬는데 확실히 옹알옹알하는 게 옹알이를 시작했구나 싶었다. 시스템 창은 그걸 어떻게 알고 퀘스트를 내려준 걸까? 감시라도 하나? 하여튼 신 새끼.
- 주몽 2년 3월 9일. 흐림. -
[오늘도 해에게 가서 말을 걸어주었다. 요즘 동생이 같이 간다. 해가 어서 말을 잘하게 됐으면 좋겠다.]
D-71. 주몽에게 가서 꾸준히 말을 걸어준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그런데 요새 자꾸 가람이가 북녘궁에 따라온다. 원래 점심 먹고 글공부를 할 때나 왕비궁에서 넘어왔는데. 막으려다가 여러 사람이 말을 걸면 주몽의 말도 금방 트이겠지 싶어서 놔뒀다.
근데 아기한테 말을 걸라고 말해도 자꾸 나에게만 말을 건다. 낯을 가리는 건가?
- 주몽 2년 4월 1일. 맑음. -
[스승님 사랑해요. 글공부 너무 재밌어요.]
세상에서 신 새끼 다음으로 우 대사자가 제일 싫다. 내 일기 훔쳐보지 말라고!
- 주몽 2년 7월 9일. 더움. -
[내 동생 보고 싶다.]
가람아. 나 없어도 잘 지내고 있지? 생일 축하해.
- 주몽 2년 7월 11일. 더움. -
[여름 꽃이 활짝 피었다. 보고 싶다.]
우리 엄마 오늘 생일이시네. 가람이가 나 대신 잊지 않고 챙겼어야 할 텐데.
엄마. 아직도 슬퍼하고 있는 건 아니지? 내가 꼭 돌아가서 지금 그 시간 모두 없던 시간으로, 모조리 꿈으로 돌려줄게.
보고 싶다.
- 주몽 2년 9월 13일. 맑음. -
[태자야 생일 축하해.]
오늘도 힘겹게 일어났는데(이 시대는 아침이 너무 빠르다) 일어나자마자 궁인들이 축하해줘서 깜짝 놀랐다.
물어보니 오늘이 내 생일이란다. 그러니까 ‘태자’ 생일 말이다. 달력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나 했더니 뒷마당 사과나무에 첫 사과가 열렸다고 했다.
알고 보니 저 나무에 첫 사과가 열린 날 태자가 태어나서, 매년 그날을 생일로 기념하고 있었다. 그해에 사과가 풍작이면 생일이 빨라지는 거고 흉작이면 생일이 느려지는……. 그런 무슨 웃기는 시스템이었다. 태풍이 와서 아무것도 안 열리면 어떻게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대신 그 첫 사과를 북녘궁에 가서 해와 나눠 먹었다. 생일이라니까 눈이 동그래지는 게 어찌나 귀여웠는지. 보고 있다 보면 얘를 구슬려서 고구려를 건국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건국 왕이랑 이렇게 둥가둥가 하고 있어도 되는 건가? 가끔씩 나는 세종대왕 같은 위인 동상에 가서 우쭈쭈 턱 간질이기를 하고 있는 듯한, 그런 불경함을 느낀다…….
- 주몽 3년 2월. 추움. -
[설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떡국을 먹고 왕비궁에 세배를 하러 갔다. 가람이와 함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북녘궁에 가서 해에게 덕담을 해줬다. 올해도 다들 건강했으면 좋겠다.]
몰랐는데 오늘이 설날이란다. 놀라서 날짜를 셈해 보니 얼추 맞는 것 같긴 한데…. 여긴 음력으로 세니까 정말 맞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나는 한참 전부터 날짜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내년부터는 나도 10살이니까 설날이면 왕과 함께 제사를 도와야 한다고 했다. 어린애니까 뭐, 자리만 지키다 오겠지? 왕은 분명 태자 아빠인데 날 자주 부르지 않아서 데면데면하다. 나야 좋지만, 음, 태자의 가족관계가 심히 염려스럽다.
- 주몽 3년 7월… 7월…… -
[미안… 미안…….]
…여긴 날짜가 없다. 요일도 없다. 이곳의 사람들은 달력에 따라 날짜와 요일이 바뀌는 것으로 시간 가는 걸 가늠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들판에 핀 꽃으로, 쌀쌀해진 아침 공기로, 어느 날 올려다본 밤하늘로 자신이 흐르는 시간 속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런 세상에서 살게 된 나도 점차 오늘이 며칠인지 셈하는 것을 잊었다. 어느 순간부터 “벌써 7월이야!”라고 말하지 않고 “벌써 앞 들판에 흰 꽃이 폈어!”라고 말하게 됐다. 의무적으로 종이 뭉치에 획을 긋고, 서른 개의 획이 그어지면 한 달이 지났음을 깨닫고, 그것들을 뭉칠 때야 이달이 몇 월이었음을 깨닫고……. 그마저도 날짜에 대한 확신을 잃으며 그만뒀다.
어제 내가 획을 그었나? 일주일 전에는? 혹시 지난 일 년 동안 빼먹고 긋지 않은 날은 없었나? 올해가 윤년은 아닐까? 획을 더한 종이가 수십수백 장 쌓여갔지만 모순적이게도 정확한 날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이제 가족의 생일이 다가왔음을 짐작해도 그날이 언제인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미안해 엄마. 미안해 가람아…… (종이가 군데군데 우그러져 있다.)
그냥… 빨리 돌아가고 싶다.
- 주몽 3년 7월. 더움. -
[아침과 점심을 걸렀다. 유모가 너무 걱정을 해서 저녁밥은 먹었는데 속이 안 좋다.]
엄마 밥 먹고 싶다. 밥에 고추장만 비벼줘도 좋으니까 집밥 먹고 싶어. 궁인들이 먹고 싶은 건 없냐고 묻는데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자꾸만 계단에서 밀리던 그날 결국 먹지 못했던 점심밥만이 생각난다.
- 주몽 3년 7월. 아니, 7월은 맞을까? -
[며칠째 자고 일어나면 이마가 묘하게 아프다. 누가 나 자는 사이에 딱밤이라도 때리고 갔나. 불만이 있으면 말로 했으면 좋겠다.]
- 주몽 3년 늦여름. 더움. -
[요즘 날씨가 많이 더워졌다. 어제는 자다가 깼는데 내가 문가에 널브러져 있었다. 유모가 아무리 더워도 잠은 이불에서 주무셔야 한다며 날 달랬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얼마나 더웠으면 그랬을까 스스로가 안쓰러웠다.]
선풍기도 에어컨도 아무것도 없는 좆같은 부여. 올해 여름은 또 어떻게 나야 할지 고민이다. 석빙고에서 얼음 꺼내먹는 것도 이제 너무 먹어서 눈치 보이는데…….
***
요새 태자궁에 비상이 걸렸어요.
글쎄, 저하께서 어느 날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시더니 밥도 거르고 통 방에서 나오지 않으시는 거예요. 처음에는 저희 궁인들 모두 저하께서 더위를 드셨나 했어요. 한 3년 전인가부터 갑자기 더위를 많이 타시기 시작하셨거든요.
그런데 세상에, 저희는 곧 이 일이 더위 따위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어요. 아니, 글쎄…….
“얘! 뭐 하니? 그분께서 오셨어. 얼른 와!”
아! 가봐야겠어요. 유모님께서 외부에서 특별히 들여오신 분이 도착했다네요. 부디 그분께서 이 끔찍한 일을 해결해주시길 간절히 바라요.
***
- 주몽 4년 설날 이레 전. 추움. -
[가람이랑 해랑 놀았다. 이제 해가 완전한 아이 같다. 그러니까, 아기 말고 아이. 말도 잘하고 잘 뛰어다니고, 가람이 4살 적보다 더 잘 자라는 것 같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나도 4년 배우니까 웬만큼 하고 싶은 말은 다 한자로 쓸 수 있는 것 같다.
그래도 공부 싫다. 왜 안 끝나는 걸까. 가끔은 여기가 신이 만든 곳이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바란다. 그러면 내가 살던 세계와 달리 발전도 하지 않았을 거고, 자연히 글과 종이도 없어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 주몽 5년 봄. 맑음. -
[그동안 바빠서 일기 쓰는 걸 까먹고 있었다. 책 한 권을 끝내고 새 책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다.]
오늘은 군자의 바른 정치를 배우는데 갑자기 울컥했다. 스승님이 양식, 군대, 백성 셋 중 하나를 꼭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리겠냐고 물었을 때였다. 아니 내가 왜 여기서 정치를 배우고 있어야 하냐고.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고 난 여기서 왕이 되기 전에 돌아갈 건데.
그래서 난 그냥 왕 자리를 버리겠다고 대답했다가 진짜 뚜드려 맞을 뻔했다. 아니, 세 개 다 중요한데 그걸 버리게 만드는 왕이면 필요 없지 않나?
그러나 우 대사자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가 있냐며, 태자 저하의 대답은 자꾸 도리와 관습을 무시한다고 화를 냈다. 내가 여기 떨어진 게 내 죄냐고.
주몽아, 얼른 크자. 형이 다 네 미래를 설계해 놨어. 대체 메인 퀘스트는 언제 나오는 거야?
- 주몽 5년 봄. 흐림. -
[잠시만, 진정이 안 된다. 아…….]
퀘스트가 떴다.
***
“……저하. 태자 저하!”
“네?”
“방금 제가 읽은 부분을 해석해 보십시오.”
주몽을 생각하느라 잠시 흐름을 놓쳤던 나는 말끝을 흐리며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세필(細筆)로 빼곡하게 써놓은 한자는 몇 문단 몇 번째 줄이라고 알려줘도 찾기 힘들어 보였다. 옆에서 가람이 애처롭게 바라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도 나를 도와줄 수가 없었다.
“쯧. 집중하십시오.”
다행히 우 대사자는 혀만 차고 넘어갔다. 그가 끝 문단을 마저 읽었다. 가람이 내게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형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다음엔 알려드리겠습니다.”
“…….”
아이는 요새 부쩍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해가 지나고 우리의 진도가 벌어지기 시작한 뒤부터였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가람이가 영민하다고 해도 뇌가 18살인 나와는 배우는 속도부터 차이가 났다. 10년 넘게 국어, 수학, 영어, 과학, 사회 등등 열 가지가 넘는 과목들을 머릿속에 구겨 넣었던 경험은 한자도 구겨 넣게 해줬다. 투호와 공기놀이가 최고로 재밌는 놀이인 줄 아는 이 시대에서 내가 매진할 만한 건 공부뿐이었다. 이래서 스마트폰을 없애라 하는 거구나. 내 지난 5년 중 가장 큰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가람이는 벌어진 진도가 못내 아쉬워 보였다. 처음에는 그냥 형이 하는 거라면 다 따라 하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속 이러는 걸 보니 혹시 왕비님이 배움이 느리다며 구박이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가람이는 8살치고 진도가 빠른 편 같은데. 물론 까막눈으로 7살에 빙의된 내 기준이었다. 사실은 저게 세간에선 평균인 게 아닐까.
결국 나는 그냥 가람이에게 생각해줘서 고맙다고 속삭였다. 아이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스승을 어디서 구하나. 나는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내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떠오른 퀘스트 때문이었다.
[서브] 오 나의 스승님
방년 5세. 한창 궁금한 것도 많고 모르는 걸 알고 싶어 할 나이입니다. 이 시기에 적절한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아이에게 커다란 악영향이 미칠 수도 있답니다. ‘중해’가 재능을 싹틔울 수 있도록 그에게 스승을 만들어주세요.
성공 시 보상 : ‘중해’의 모든 능력치 점진적 상승 버프 제공, 원활한 성장
실패 시 결말 : ‘중해’의 느린 성장, ‘북녘궁의 지진아’ 칭호 획득
내 가치관 속 5살은 꺅꺅대며 놀이터나 뛰어놀아야 할 나이였다. 아무리 조기 교육이 판을 친다지만 부여에서마저 이럴 줄은 몰랐다. 가혹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었다.
지난 4년간 나는 주몽이 최대한 잘 자랄 수 있도록 애썼다. 매일 오전 찾아가서 시간을 보냈고 옹알이도 걸음마도 모두 내가 도왔다. 그러나 아무래도 방향성이 없다 보니 가끔씩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아직 원작에서 주가 되던 사건들이 일어나려면 멀었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드는 불안이었다.
메인 퀘스트는 아니지만 이걸 해결하고 나면 그런 기분도 좀 덜해지겠지. 이왕이면 좋은 교육을 위해 좋은 선생을 붙여준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선 우 대사자가 딱인데.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저는 바쁜 사람입니다. 부디 제 귀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여 글을 읽는 척했다. 그는 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빈말이 아니라 그는 실제로 고위 관직에 앉아 있었다. ‘대사자’라는 관직이 우리나라로 치자면 장관급이라는 걸 알았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태자 정도면 교육부 장관에게 과외를 받는구나 싶었다.
아무튼 그리 바쁜 사람이 왕자도 아닌 다섯 살짜리를 가르칠 시간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미 우리를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빠듯해 보였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사실 아무나 구하고자 하면 구하는 게 썩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난 태자였다. 궁인에게 말하면 사흘 안에 다섯 명도 더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1살짜리 태자가 존재감조차 희미한 북녘궁의 아이에게 붙여줄 스승을 구한다? 어쭙잖은 신생 하급 관리나 오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것도 툴툴대며 책이나 대강 휙 읽어주고 가겠지. 좋은 선생을 구하려면 실질적인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야 했다.
나는 다시 우 대사자를 곁눈질했다. 그가 나서서 구해준다면 꽤 좋은 스승을 구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순순히 들어줄지가 문제인데. 태자라는 위치를 사용해서 명령할 수도 있지만 그럼 저 인간은 분명 아무나 구해오라고 궁인을 시키겠지. 그래서야 결말이 똑같았다. 결국 그가 직접 나서서 주몽에게 스승을 구해줄 마음이 들게 해야 했다.
나는 그가 가람을 받아주던 날을 떠올렸다. 인재 욕심에 가득 찼던 그 눈.
조금씩 해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슬며시 고개를 숙여 웃음을 감췄다.
태자궁을 나선 것은 밤이 내려앉으려는 때였다. 저녁까지 먹고 눌러앉아 있으려는 가람은 오늘따라 일찍 자야겠다며 돌려보냈다. 아이는 아쉬운지 미적거렸지만 따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앞선 궁인이 든 등잔불을 따라 길을 걸었다. 북녘궁은 내 궁 뒤편에 있었지만 길이 닦여 있지 않아 빙 둘러 가야 했다. 머지않아 아주 희미한 불빛이 하나 보였다.
북녘궁은 지원금이 미흡한 만큼 퇴궐 궁인을 썼다. 주몽이 아기일 땐 유모가 곁에서 상시 지켰지만 나이가 찬 뒤론 그마저도 저녁이면 퇴궐했다. 이제 고작 5살이 나이가 찼다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유모 대신 상주 궁인을 붙여주는 것은 내 능력 밖이었다. 덕분에 북녘궁은 저녁상을 물리고 난 시각이면 텅 빈 채 방 하나만 호롱불로 빛을 냈다.
나는 그 방문 앞에 멈춰 섰다. 이제부터 할 일은 소문이 나지 않아야 했다. 나는 길을 밝혀준 궁인에게 옆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손짓하곤 문을 열었다.
안에는 주몽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손에는 지난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나무 칼을 들고 있었다. 제대로 휘두르는 법도 모르는 게, 몇 달 동안 어찌나 매만졌는지 벌써 반질반질했다.
아이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아, 형님.”
“뭐 하고 있었어?”
“검을 닦고 있었습니다. 궁인이 장군님들은 매일 검을 닦는다고 해서요.”
그냥 손때가 더 탈 거 같은데. 하지만 미래 건국 왕이 고작 장군님 운운하는 게 귀여워서 나는 그대로 두었다. 대신 늦은 시간에 여기에 온 이유를 꺼냈다.
“해야. 이거 봐봐. 이게 뭔지 알아?”
“이건 형님께서 공부하시던 서책이 아니옵니까?”
“어떻게 알았어?”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날 보며 아이는 더듬더듬 책 겉장에 쓰여 있는 한자를 읽었다. 글을 가르치는 궁인은 없었으니 주몽은 까막눈이어야 했다. 믿기 어려워하는 날 보며 아이가 부끄러운 듯 발갛게 볼을 붉혔다.
“형님께서 제 어릴 적 종종 들고 와 공부하지 않으셨습니까.”
한창 주몽의 입을 트이게 하려던 시절, 나는 끊임없이 말을 걸다 지치면 책을 들고 와 소리 내어 읽었다. 그것도 이 부여엔 어린이용 서책 따윈 없대서 궁상맞게 내가 공부하던 책이나 읊어줬더랬다.
그래도 저게 된다고? 말이 ‘어릴 적’이지 그냥 아기일 때였다. ‘으부바바’나 하던 시절에 들은 단어들을 기억하다니. 몰래 교육시켜서 영재인 척 우 대사자의 눈에 띄게 하려던 작전은 애초에 필요가 없었다. 그냥 우리 애가 천재인걸요!
“그럼 이거는? 이거는 무슨 한자인지 알아?”
나는 마구잡이로 책을 펼쳐 한자를 짚었다. 신의 핏줄의 효과가 이 정도일 줄이야. 주몽은 몇 가지를 더듬더듬 읽었다. 나는 금세 감격에 겨웠다. 흡사 영어 라디오 좀 틀어줬더니 원서를 읽는 꼴이었다.
“우리 해, 천재네! 예쁘기도 하지. 이리 와.”
주몽이 얌전히 다가와 내게 안겼다. 나는 어화둥둥 얼싸안고 궁둥이를 두드려주었다.
“이 형님이 매일 밤 와서 우리 해 글공부 좀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 없겠다. 혼자서도 이리 잘하는걸.”
“……예? 방금 뭐라고….”
“볼수록 믿기지가 않네. 정말 들은 것만으로도 깨우쳤단 말이냐? 이건 무슨 한자야? 이건? 여기는?”
나는 흥분에 겨워 다시 책을 펼쳐 한자를 가리켰다. 주몽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한참 동안 그 한자를 쳐다봤다. 눈빛으로 뚫을 수 있다면 한참 전에 뚫었을 만큼 노려보고 나서는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모르겠습니다.”
“응?”
“이 한자는 도저히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래? 그럼 이거는?”
“그 또한 처음 보는 한자입니다.”
그 뒤로도 주몽은 10개 중 한두 개만 빼고 모조리 모른다 답했다. 천재성은 그저 잠깐의 우연이었던 걸까? 아니, 그 몇 개 아는 것도 분명 천재가 맞긴 한데……. 혼란에 빠져 침묵하는 내게 주몽이 울먹이며 말했다.
“형님……. 제가 한자를 잘 알지 못하여 싫으신 겁니까?”
“뭐? 아니, 이야기가 왜 갑자기 거기로 가.”
“그리 어려운 표정을 지으시니 무섭습니다.”
내 떨떠름한 표정이 아무것도 모르는 5살에겐 무서워 보였겠다 싶었다. 나는 전혀 아니라며 주몽을 둥둥 달랬다. 아이가 다시 애처롭게 어리광을 부렸다.
“형님이 글 읽으시는 소리가 듣기 좋아 기억한 것뿐인데 듣기만 하고 그 글자를 본 적은 없으니 모두 하나같이 낯섭니다. 형님께서 가르쳐주시면 아니 됩니까?”
“어…….”
듣고 보니 또 그렇겠다 싶었다. 어차피 매일 밤 와서 가르치려 했던 공부였다. 애가 똘똘하니까 금방 배우겠지. 나는 흔쾌히 주몽과 매일 밤 글공부를 약속했다. 언제 우울했냐는 듯 금세 주몽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난 내일 밤에 올게. 졸려도 조금만 꾹 참고 기다리고 있어야 해?”
나는 그를 품에서 떼어놓고 몸을 일으켰다. 아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따라 일어섰다.
“벌써 가십니까? 조금만 더 있다가 가시지…….”
“아냐. 이제 가봐야지.”
“전 오늘부터 글을 배워도 좋은데…….”
“해야. 형님이 진지하게 인생 충고를 해주겠는데, 공부는 쉴 수 있을 때 쉬는 거란다…….”
주말도 없이 5년간 공부를 한 내 뼈저린 경험에서 나온 충고였다. 나는 손을 흔들어주고 문지방을 넘었다. 잠옷 차림으로 배웅하겠다고 나서는 아이를 두고 그대로 문을 닫았다. 칭얼거리는 소리는 “이러면 내일 안 올 거야.”라고 속삭이기 무섭게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당으로 내려섰다. 주몽은 한번 꽂히면 집착하는 기질이 있어서 잘못 걸리면 빠져나오기가 어려웠다. 생각해보면 티비 속 영재 프로그램에 나오는 애들도 다 수학이나 영어, 음악같이 뭔가에 집착하는 성격이었다. 주몽도 건국 왕이 될 천재니까 내가 납득하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가자.”
“예, 저하.”
나는 다시 태자궁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한두 번은 괜찮겠지만 매일 밤 북녘궁으로 걸음을 하면 분명 소문이 날 터였다. 내 계획은 ‘우리 해가 스스로 글을 깨우쳤어요!’라고 포장하여 우 대사자 눈에 띄게 하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주몽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사실이 퍼지면 곤란했다.
“흐음…….”
나는 침소로 들어가며 뒷마당, 정확히는 그 뒤의 수풀을 살폈다. 오랜만에 다른 세계 영혼인 덕을 볼 때였다.
***
어느새 한 계절이 다 흐르고 더위가 찾아왔다. 나는 아침밥을 먹으며 익숙하게 말문을 열었다.
“있잖아, 내가 어제 북녘궁을 갔는데 말이야.”
식사 시중을 들던 궁인이 귀를 기울였다. 나는 정말 깜짝 놀라고 자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태도로 말을 이었다.
“우리 해가 스스로 글을 외고 있는 게 아니겠어! 놀라서 누가 가르쳐 준 거냐고 물으니 내가 일전에 두고 간 책을 보고 스스로 깨쳤다고 하더라.”
“참말이옵니까? 도련님께서 매우 영특하신 게 틀림없사옵니다.”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어쩜 그리 영특한지.”
궁인이 그렇다며 맞장구를 쳤다.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에서 나는 사회생활의 향기를 맡았다. 남의 집 아이 자랑은 지금이나 미래나 똑같이 관심 없기로 손에 꼽히는 주제였다. 하지만 꼭 필요한 사전 작업이었기 때문에 나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주몽 자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얼마나 더 자랑을 해댔을까. 어쩐지 초조한 기색으로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유모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하. 요즘 잠자리는 평안하시옵니까?”
“왜, 왜?”
뜬금없는 물음에 심장이 방망이질을 쳤다. 요 몇 달간 몰래 빠져나간 걸 드디어 들킨 건가 싶었다.
“오늘 아침 앞마당에 꽃이 핀 걸 보았사옵니다. 계절이 바뀌고 있으니 저하의 잠자리가 걱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다행히 다른 연유였다.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는 부여의 여름밤은 나에게 쥐약이었다. 작년에는 골골대다 나도 모르게 방 밖으로 나와 자고 있지 않았나. 그때 날 보던 궁인의 눈을 생각하면 그들이 지금부터 걱정하는 게 당연했다.
더 더워지면 밤에도 날 살필 텐데. 아무리 내가 존재감이 없다 해도 방에 없는데 있는 것처럼 보일 순 없었다. 더는 미루지 않고 주몽에게 스승을 구해줄 때였다.
그동안 계획은 다 짜두었으니 차질 없이 실행하기만 하면 됐다. 나는 씩씩하게 남은 아침밥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은 아주 오랜만에 북녘궁에 가지 않았다. 궁인들이 모두 의아하게 물었지만 나는 숙제가 많다는 핑계를 대며 오전 내내 태자궁에만 머물렀다.
수업 시간은 금세 다가왔다. 떨리는 마음을 감추고 평소와 다름없이 수업을 듣고 있을 때였다. 궁인이 조용히 다가와 주몽이 태자궁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우 대사자에게 말했다.
“스승님. 중해가 제게 급하게 줄 것이 있다 하는데 잠시 들여도 괜찮겠습니까.”
“중해라 함은…….”
“일전에 말씀드렸던 북녘궁 아이입니다.”
내 주몽 자랑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우 대사자도 아이를 알고 있었다. 잠시 턱수염을 쓰다듬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궁인에게 아이를 데려오라고 속삭였다. 중요한 순간이니만큼 가람이의 불만스러운 표정은 무시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주몽이 서책 하나를 꼭 안고 방으로 들어섰다. 주몽은 책을 곁에 내려놓고 우 대사자에게 절부터 올렸다. 미리 언질을 준 대로 잘하는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우 대사자의 표정을 보니 역시나 이 작달막한 아이를 썩 나쁘지 않게 느낀 모양이었다.
사실 주몽은 길 가다 뽀뽀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외모를 자랑했다. 태어날 때부터 완성되어 있었던 미모가 어디 가지 않은 덕분이었다. 그런데 예의까지 깍듯하게 차리니 어여쁘게 보일만도 했다.
절을 깔끔하게 마친 아이가 나에게 서책을 내밀었다. 일부러 두고 간 내 서책이었다. 내가 오전에 북녘궁에 오지 않으면 그날 오후에 이 서책을 들고 태자궁에 오라 말을 했었다. 물론 나는 모른 척 놀라며 받았다.
“내가 북녘궁에 두고 갔었구나. 가져다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도움을 드릴 수 있어 기쁠 따름입니다.”
이 상황에서 심기가 불편한 것은 둘째 왕자뿐이었다. 가람이는 우리의 대화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형님께서 왜 네 방에 책을 두고 가셨느냐!”
“지난번 저를 보러 오셨다가…….”
“그러니까 왜 형님께서 너같이 천한 것을 보러 가셨냐는 말이다!”
주몽이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깜짝 놀라 가람의 궁둥이를 찰 뻔했다. 누가 우리 동생 인성을 저렇게 바닥으로 만들었지? 아무래도 너무 오냐오냐 키운 모양이었다. 내가 붉어진 낯빛으로 인성 교육을 다짐하는 동안 우 대사자가 “어흠, 어흠!” 헛기침을 해댔다.
“네가 그 북녘궁의 아이구나. 내 네 소문은 익히 들었다. 글을 스스로 깨쳤다지?”
“과, 과찬이십니다.”
“태자 저하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더구나. 태자궁에 네 명성이 아주 자자해.”
주몽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그를 칭찬하고 다닌 것을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칭찬 조금 한다고 생색내는 것도 웃겨서 따로 말하진 않았었다. 옆에서 가람이 씩씩댔다.
“괜찮다면 그 솜씨 한번 보자.”
우 대사자가 궁인에게 손짓했다. 거절은 고려하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주몽은 얌전히 종이와 붓, 벼루 따위 앞에 꿇어앉았다. 나는 주먹을 꼭 쥐고 긴장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날만을 위해 매일 밤 북녘궁으로 건너가 붓 쥐는 법부터 하나하나 주몽을 가르쳤다. 아이가 영특해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넘게 알았지만 매번 쉽기만 하지는 않았다. 중간부터는 왜인지 갑자기 배우는 속도가 느려지기도 했고. 이 책을 다 끝내야 새로운 스승님을 만날 수 있다고 달래도 더 느려지기만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주몽의 늦은 진도에 맞춰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외진 북녘궁에 사는 주몽 곁에는 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오가는 궁인 두셋은 주몽을 마치 닦아야 하는 도자기처럼 취급했다. 그의 유모도 이상하리만치 주몽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다.
저렇게 곱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대체 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러니 아이에겐 더 넓은 세상이 필요했다.
다행히 주몽은 우 대사자가 내는 모든 시험을 통과했다. 우 대사자가 흡족한 목울음을 냈다.
“호오, 인재로구나. 저하께서 온 궁궐에 소문을 내실만 해.”
중간중간 어눌한 티도 내주며 독학한 척하는 게 어찌나 자연스러웠던지. 우리나라였다면 당장 데려가서 아역 배우를 시켰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가 충분히 감탄할 시간을 준 뒤 본론을 꺼내 들었다.
“스승님. 이리 영특한 아이에게 좋은 스승이 생긴다면 장차 큰 인물이 되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확실히 놓치기 아까운 인재로군요.”
“저는 아는 이가 없으니…….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신 스승님께 참된 스승을 구해주십사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존경하는 스승님 어쩌구. 스승님만큼 뛰어난 분을 저쩌구. 퍼붓는 칭찬에 우 대사자가 턱수염을 마구 쓰다듬었다.
“크흠! 그렇게까지 부탁하신다면야, 제가 한번 구해보겠습니다.”
됐다! 나는 감사의 절을 올리며 주몽에게 마구 눈짓했다. 해야! 이 형님이 성공했어! 그러나 어쩐지 주몽은 퍽 만족스러워 보이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가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우 대사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 인사를 어찌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미천한 제가 감히 부탁 하나를 드리고 싶습니다.”
계획되지 않은 돌발 상황에 눈이 커졌다. 드물게 기분이 좋은 그가 흔쾌히 말을 허락했다. 주몽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
“저도 태자 저하와 함께 우 대사자님 밑에서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기회를 노려 말하는 모습은 분명 용기를 칭찬받을 만했다. 하지만 계획을 세우고 차질이 없길 바랐던 내 입장에선 걷다가 갑자기 달걀에 맞은 꼴이었다. 우 대사자가 주몽의 당돌함을 주제도 모르는 부탁으로 여겨 기분이 상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반투명한 시스템 창은 이런 내 사정 따위 고려하지 않고 ‘실패 시 결말’을 실행할 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 대사자는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그 연유가 무엇이냐.”
“제 재능을 알아봐 주신 분이니 절 잘 이끌어 주실 거라 믿습니다. 무엇보다 태자 저하의 스승님이 아니십니까. 좋은 말씀 많이 듣고 자란 터라 항상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우 대사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그맣고 예쁜 아이가 오물쪼물 제 칭찬을 하는데 싫어할 할아버지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는 호감 하나로 스승직을 맡기엔 너무 바쁜 사람이었다.
“안타깝지만 나는 너무 바빠서 시간이 나지 않는구나. 대신 내 꼭 좋은 스승을 구해다 주마.”
주몽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쯤에서 주몽이 입을 다물었으면 했다. 이번엔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다음에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입을 우물거리던 아이는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럼 제가 존경하는 다른 분께 글을 배우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냐?”
“저를 계속 보살펴주셨던 태자 저하이십니다. 그동안 죄송해서 말씀은 못 드렸지만 이렇게 기회가 찾아왔으니 정식으로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뒷골이 띵했다. 마치 처음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하는 모습이 아주 영악했다.
사실 주몽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형님과 오래 있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이라 치부하고 넘어갔고, 그 뒤로 아이도 더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은 마음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있던 모양이었다. 부여에도 연기대상이 있다면 올해 대상을 차지했을 텐데. 내게 계속 부탁해봤자 거절당할 게 뻔하니 여기서 말을 꺼내 허락받으려는 심산이 분명했다.
우 대사자는 당황한 듯 허허, 웃기만 했다. 그러나 나는 점차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 왜 자꾸 얌전히 있지 않는 건지. 내가 널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하고 감당하고 있는데, 너는 왜 고작 별것도 아닌 일로 떼를 쓰고 있는 거야.
이해는 됐지만 하마터면 일을 망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화가 났다.
“우 대사자님께서 친히 네게 스승을 구해주시겠다는데, 어찌하여 계속 토를 다느냐! 이런 영광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기쁘게 기회를 받아들이거라. 계속해서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간 크게 혼을 낼 것이야.”
결국 나는 평소 친근하던 말투도 집어치운 채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주몽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얌전히 고개를 조아렸다.
시무룩해진 게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주몽에겐 좀 더 좋은 스승이 필요했고 나는 여러모로 적합하지 않았다. 지식의 차원을 넘어, 나는 이 지긋지긋한 퀘스트들을 깨고 엔딩을 보기 위해 달리는 사람이었다. 이미 내 도로 위에는 장애물이 차고 넘쳤다. 넘어지지 않으려 하는 것만 해도 버거웠다.
우 대사자가 다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하지만 시무룩한 아이 하나와 시름에 잠긴 아이 하나, 그리고 화난 아이 하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이례적으로 오늘 수업을 일찍 끝내고 말았다. 우리는 그를 기운 없이 배웅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먼저 가람이 씩씩대며 화를 터뜨렸다.
“너! 네 주제도 모르고! 형님이 받아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으냐!”
나는 놀라서 주몽을 내 등 뒤로 숨겼다. 뒤에서 주몽이 내 옷자락을 슬그머니 쥐는 게 느껴졌다. 가뜩이나 어리고 외로운 애한테 저게 무슨 폭언이야. 더는 가람의 인성 교육을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는 곧장 주몽을 북녘궁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궁인에게 화를 가라앉히는 차를 부탁했다. 그녀가 차를 우리는 사이 나는 가람을 앉혀놓고 이야기했다.
“가람아, 내가 전에 언행을 주의하라고 하지 않았니? 왜 자꾸 해에게 천한 것이니, 잡것이니 하는 말을 담는 것이야.”
“저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개를 보고 개라 하는데 무어가 잘못되었습니까?”
“이 씨발 천한 잡놈의 새끼야.”
“…….”
매끄럽게 떨어지던 차 줄기가 식탁을 적셨다. 궁인이 내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흘린 차를 닦았다. 가람이는 입을 벌리고 몸을 움찔거렸다.
“누가 너한테 이렇게 말하면 좋겠어?”
가람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차 줄기는 다시 평온하게 찻잔으로 떨어졌다.
“…아니요.”
“해는 천한 잡놈의 새끼가 아니야. 그의 어머니께선 별궁의 유화 님이라는 걸 모르니? 그녀는 하백 님의 따님이시잖아.”
“하지만 그녀는 하백 님께 쫓겨나신 지 오래잖아요.”
“그렇다 해도 핏줄은 사라지지 않아. 끊으려 해도 끊기지 않는 게 피로 얽힌 사이다. 그는 귀한 태생이야.”
고구려를 세우기 위해 도망갈 때 하백이 물고기와 자라로 다리를 만들어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핏줄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들의 손자를 지키기 위해 안달 나 있었다. 주몽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흠집 없이 하늘로 데려오기 위해 신화를 쓰고, 계획이 어그러지자 나까지 납치해온 걸 보면 훤했다. 가람이는 모르겠지만 주몽께선 먼지 같은 우리들보다 훨씬 귀한 존재셨다.
“그리 귀한 존재가 왜 저런 대접을 받고 자란단 말입니까? 진정 귀하다면 응당 그에 맞는 대우를 받고 있었겠지요.”
가람이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널따랗고 사람들로 가득한 궁에서 자라는 아이는 궁궐 구석에서 자라는 아이가 대체 왜 귀하다는 건지 몰랐다. 당장의 환경 차이만 와닿을 나이였다. 나는 그에게 얽히고설킨 권력과 눈치 싸움에 대해 말해줄 능력이 없었다. 심지어 대부분이 눈치로 파악한 내용이기에 더 그랬다.
그래서 나는 그냥 좀 더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로 했다. 신분제 없는 자유로운 국가에서 나고 자란 내 자아가 오랜만에 입을 나불거렸다.
“가람아, 그런 걸 따지기 전에 원래 사람에게 귀천이란 없어. 신분으로 귀하고 천함을 나누어 대하는 것은 정말 옳지 못한 일이야.”
가람이 경악하여 눈을 크게 떴다.
“천하에서 가장 귀한 분이 되실 분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가람이는 왕자로 태어나고 자란, 세포 하나까지 왕족이었다. 높은 신분인 이런 애한테 내 의견을 말해봤자 먹힐 리 만무했다. 천주교를 극심하게 탄압했던 양반들의 역사가 떠올랐다. 나는 서둘러 조잡한 변명으로 무마하기를 시도했다.
“그, 원래 귀할수록 스스로를 낮춰야 하는 법이다. 난 신분으로 타인을 내리누르는 사람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 신분의 높낮이를 신경 쓰지 않고 나를 낮춘 후 다가가야 한다. 그렇게 진심 하나로 사람을 얻어야 진정한 내 사람이 생기는 법이야.”
내가 말하면서도 민망해 온몸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저게 무슨 허무맹랑한 자기계발서 같은 소리야. 가람이는 입을 불퉁하게 내밀었지만 다행히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옆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궁인이 찻물 닦은 천으로 눈가를 훔치고 있었다. 서로 당황한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모아쥐고 급히 일어섰다.
“소, 송구하옵니다, 저하. 제가 주제도 모르고 주책맞게……. 말씀들 편히 나누소서.”
나는 멍하니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람의 인성 교육은 이상한 곳으로 튄 것 같았다.
그 뒤로 나는 ‘그러니까 해에게 막말을 하지 말라’는 말만 몇 번 더 했다. 그리곤 서운한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애를 달래는 데 남은 저녁 시간을 다 쏟았다.
“저는, 끕, 저는 형님이, 형님이 자꾸 그 애만 이뻐하시니까…….”
“아니야, 가람아. 내가 널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데.”
“아까도… 걔한테 뭔 말만 해도 혼내시구…….”
그건 네가 걔한테 욕밖에 안 하니까……. 그러나 서러운 게 많았는지 아이는 내 품에서 한참이나 눈물을 쏟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네 진짜 형님이 아닌데. 우리 둘 다 가짜에게 위로를 받는 모습이 비슷하구나. 내가 정작 그 너머로 보려 했던 ‘진짜’는 이제 흐릿해져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진실은 속에 담아둔 채 가람을 끌어안았다. 아이가 품속에서 어리광을 부렸다.
“형님은, 흑, 계속해서 제 옆에 계실 거지요?”
“…….”
순수한 눈망울에 말문이 턱 막혔다. 어린아이의 의미 없는 편 가르기임을 알고 있었다. 따뜻하게 웃으며 고개 한 번 끄덕여주면 안심하고 돌아갈 작은 투정. 그러나 입에 발린 말이라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 돌아갈 사람이었다. 돌아가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내가 계속해서 너를 기만하는 게 옳은 일일까?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가람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기껏 달래놓은 울음이 다시 차오르고 있었다. 밖에서 모두들 발을 동동 구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무래도 오늘따라 집 생각을 너무 많이 한 모양이었다. 쓸모도 없는 죄책감은 온전히 나의 죄이자 안고 가야 할 벌이었다. 나는 장난스럽게 상황을 수습했다.
“가람이는 어여쁜 색시가 생기면 그 옆에 서야지. 어찌 내 옆에 있겠느냐.”
“아닙니다! 저는 형님이랑 혼인할 겁니다!”
가람이 소리를 빽 질렀다. 이번에는 당황스러움에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건… 그건 안 돼.”
“왜 아니 됩니까!”
“법이, 법이 그래. 우리나라가 아직 근친혼, 아니지 동성혼이 합법이 아니라……. 인간들이 보수적….”
“태자 저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결국 왕자궁의 궁인이 들어와 서둘러 가람이를 데려갔다. 아이는 심통이 단단히 난 얼굴로 끌려갔다. 나는 그제야 겨우 진땀을 닦아냈다. 아무래도 아이는 인성 교육보다 성교육이 시급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