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 멀리서부터 낮게 웅성대는 소리에 천천히 정신이 들었다. 눈을 작게 뜨자마자 새어 들어오는 빛이 날 고통스럽게 했다.
여긴 어디지? 병원인가? 계단에서 구르고 기절했으니 당연한 수순으로 병원일 터였다. 그러나 그 당연한 생각은 등 뒤로 다가오던 수상한 기척이 떠오르며 점차 스러졌다. 날 밀어버린 게 분명한 그 사람이 얌전히 병원에 데려다줬을 것 같진 않았다.
등 아래 닿는 딱딱한 감촉이 그 생각에 힘을 실어줬다. 몸이 묶여 있진 않았지만 분명 난 바닥에 누워 있었다. 결국 나는 실눈마저 감아버리고 일단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별궁에 있는 여인 있잖아. 왜, 덜컥 임신해서 이제 산달에 가까워지신 분.”
“저번에 전하가 데리고 오신 분? 그분이 왜?”
“글쎄. 그분이 하백 님의 따님이시라네!”
나는 일그러지려는 미간을 애써 폈다. 하백? 신화에 나오는 물의 신이 갑자기 여기서 왜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여자들의 영문 모를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뭐? 거짓부렁이 아니고?”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어부의 아내의 동생에게서 직접 들었단 말이야! 물속에서 해괴한 것이 헤엄치길래 임금님의 명으로 잡았더니 그게 저 여인이었대. 입술이 오리만치 댓 발은 나와 괴물 같은 모양새였다더라.”
“세상에나. 하백 님이면 물의 신 아니여! 그런 귀한 분의 따님이 왜 그러고 있었대?”
“입술을 세 번 잘라 돌려놓으니 그제야 입을 여는데, 세상에. 다들 이리 모여봐. 이건 정말 비밀인데 말이야.”
한 여자가 목소리를 낮추며 뜸을 들였다. 나는 들으면서도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범죄 암호 같은 건가. 확실한 건 내가 납치됐다는 것이었다. 일반 병원에서 저런 헛소리가 태연히 오갈 리 없었다.
그동안 충분히 뜸을 들인 여자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기가 하백의 딸인데 해모수 님과 정이 통한 걸 들켜 쫓겨났다지 뭐야!”
“그, 그 해모수 님? 낮이면 내려와 정사를 돌보고 밤에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는 하늘신의 아드님?”
“그래! 몰래 정분이 난 걸 들켰으니 부모가 노할 만도 하지! 그래가지구 지금 전하께서 거두어 별궁에 계신 거래!”
“어쩐지! 별궁 문지방을 넘은 사내가 없는데 누구 애인가 했더니, 해모수 님 애였구만!”
이게 무슨 소리야.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때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큰 소리로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얘들아! 애가 나오려나 봐! 의원님이 세 명만 별궁으로 오라 하셨어!”
나는 더는 참을 수가 없어 눈을 번쩍 떴다. 시린 눈을 참고 고개를 돌리니 들썩거리는 궁둥이가 보였다. 어린아이가 문 쪽으로 고개를 쭉 뺀 채 집중하고 있었다. 들리던 목소리는 문지방 너머의 소리였다.
그 순간 하마터면 몸을 벌떡 일으킬 뻔했다. 문은 전통 한옥에서나 보던 생김새였다. 이게 뭐지? 날 한옥에 가둬둔 건가? 혼란의 연속에 나는 넋을 놓다 빽 울리는 목소리에 몸을 떨고 말았다.
“태자 저하! 정신이 드십니까?”
“뭐? 이게 무슨 소리…….”
“제가 얼른 세숫물을 떠오겠습니다!”
엿듣고 있던 걸 들킨 게 민망했는지 아이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급하게 사라졌다. 나는 순식간에 홀로 남겨졌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띠링―
갑자기 이질적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니 반투명하고 네모난 물체 두 개가 허공에 떠 있었다.
[메인] 프롤로그 : 별궁의 여인 – 완료
궁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무사히 엿들었습니다. 보상으로 ‘유화’에 대한 정보를 습득합니다. 그녀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갑니다.
이게 뭐야? 놀라서 손을 휘저으니 반투명한 막이 사라졌다. 그러자 그 아래 겹쳐 있던 다른 하늘색 창이 드러났다.
[메인] 프롤로그 : 별궁의 여인
별궁에는 임금님이 데려온 묘령의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은가요? 궁인들의 대화를 엿듣다 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공 시 보상 : ‘유화’에 대한 정보 습득, 이해도 상승
실패 시 결말 : ‘유화’에 대한 이해도 하락
“이게 무슨…. 대체 여긴 어디야?”
이제 상황은 이해할 수 없는 정도를 넘어서 괴이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때마침 아까 나갔던 어린아이가 돌아왔다. 아이는 물이 찰랑이는 대야를 낮은 탁자에 올려놓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 애의 팔목을 붙들었다.
“넌 누구야? 내가 왜 여기 있지? 여긴 어디고?”
아이가 깜짝 놀라 몸을 파드득 떨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그 눈이 순식간에 뒤로 돌아가고 흰자만 내보였을 땐 나야말로 놀라서 몸을 떨었다. 나는 잡았던 손목을 내치듯 놓고 뒤로 물러섰다.
돌아온 눈동자는 투명할 정도로 하늘색을 띠고 있었다.
“일어났느냐?”
“미친… 사, 사람 눈이…….”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태연하게 인사를 하던 아이가 가볍게 인상을 찡그렸다.
“첫 만남부터 욕설이라니,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내가 사람을 잘못 고른 걸지도 모르겠어.”
“나, 날 알아?”
“미천한 인간이라 그런지 상황 파악이 느리구나. 내 친히 차근차근 설명을 해줄 테니 좀 앉지 않으련?”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말투였지만 인지할 정신은 없었다. 나는 우선 다시 이불에 앉았다. 아이는 조금 전 궁둥이를 들썩이던 자리에 앉았다.
“어디서부터 설명할까…….”
아이가 뜸을 들이는 동안 손이 덜덜 떨렸다. 나는 축축한 두 손을 맞잡고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어딘지, 난 분명 학교 계단에서 굴렀는데 왜 여기 누워 있는지부터 설명해.”
“그러도록 할까. 여긴 부여란다. 넌 내가 친히 그 세계에서 이동시켜 온 행운아지.”
“…….”
하나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 나는 울컥해서 조막만 한 아이를 윽박질렀다.
“그걸 지금 설명이라고 해? 너 같으면 지금 이 상황에서 이해가 되겠어?”
“아가야. 한 번만 더 건방지게 말하면 그 입술을 다섯 발로 늘려주마. 네 번 잘라 정상으로 만들면 네놈도 좀 닥치지 않을까 싶구나.”
“…….”
그제야 다시 위기감이 찾아들었다. 실현성 없는 협박이라고 하기엔 방금 들은 여자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무리 소문이 없던 일도 만들어낸다곤 하지만 비현실의 정도가 지나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방금 전 어떤 여인의 입술을 세 번 잘랐다는 이야기는 모두가 믿는 눈치였다.
굉장히 비현실적이지만 모두가 믿는다는 건 그게 진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이곳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는 이상 섣불리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좀 조용하구나. 방금 전 궁인들의 이야기는 잘 들었느냐? 퀘스트 완료라고 뜬 걸 보니 잘 들은 것 같긴 하다만.”
“…….”
“무언가 떠오르는 것은 없었느냐?”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해할 수 없었던 여인들의 대화 중 낯설지만 친숙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해모수, 하백, 그의 딸….
순간 어젯밤 머리가 터지도록 봤던 국어 지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백의 딸, 유화, 주몽의 어머니……. …동명왕편.”
“그래. 다시 말하지만 여긴 부여다. 이제 막 유화가 알을 낳을 참이지. 나는 너희가 ‘동명왕편’이라고 부르는 신화를 쓴 신이자 널 이곳에 데려온 장본인이란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너무 잘 꾸며진 연극이라고 하기엔 회까닥 돌아가던 아이의 눈동자가 눈앞에 선했다. 떨리는 손이 멈추질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애써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던졌다.
“날 왜 이곳에 데리고 온 거야?”
“내 너에게 친히 나를 돕는 영광을 베풀고자 이동시킨 것뿐이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란다. 그저 이 ‘이야기’가 엔딩을 볼 수 있도록 조금만 노력하면 되는 일이지.”
아이는 흘러 내려온 머리를 뒤로 넘기고 팔짱을 꼈다. 물빛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이어서 신이 들려준 이야기는 ‘동명왕편’의 첫 부분과 판박이면서도 묘하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 하늘 위에는 창조주가 있는데 그분은 할 일이 너무 많아 휘하의 여러 세계를 여러 신에게 맡아 다스리도록 했다고 한다. 내 앞의 신은 그중에서도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이곳을 맡게 됐다.
그런데 창조주에겐 해모수라는 골칫거리인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는 이 세계 저 세계 다 떠돌아다니며 여인을 희롱해 하늘의 위신을 떨어뜨렸다. 골머리를 앓던 창조주는 그를 귀양 보내 낮에는 정사를 돌보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오도록 했다. 거기서 당분간은 얌전히 살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여기에서도 해모수는 세 자매를 가두고 그중 한 명을 강제로 취했다. 이것만으로도 큰 문제였는데 그녀가 물의 신 하백의 딸이었던 게 일을 키웠다.
하백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해모수와 딸을 결혼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일단 해모수가 술에 취한 사이 두 사람을 같이 수레에 실어 하늘로 올려 보냈다. 그러나 뒤늦게 깬 해모수에게 책임을 질 생각도, 결혼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그 즉시 수레에서 뛰어내렸고 홀로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남은 건 분노한 하백과 버려진 유화, 그리고 침묵하는 창조주뿐이었다.
그러나 창조주는 하백에게 있어 신들의 신 같은 위대한 존재였다. 감히 따질 처지가 아니었던 하백은 사흘 밤낮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모수가 유화 배 속에 애도 남기고 갔다는 게 밝혀졌다. 제 손자이기만 했으면 당장이라도 없애버리고 치부를 덮을 텐데. 이 아이는 창조주의 손자이기도 했다!
제 핏줄이 인간 세상에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된 창조주도 이번만큼은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 조심하라고 일렀거늘. 어미가 인간도 아니고 하백의 딸이니 그도 이번만큼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두 사람은 결국 그 인간 세상을 다스리던 신을 불러 사건을 포장할 방법을 내놓으라고 닦달했다.
“며칠 동안 날밤을 새워가며 고심했었지.”
아이가 한숨을 내쉬며 그때를 회상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이야기가 이어지길 기다렸다.
창조주의 손자가 인간 세상에서 인간처럼 평범하게 살다 죽을 순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하늘로 올렸다간 구설수에 휘말려 천계에서의 평판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결국 신은 아이를 인간 세상에서 키우되, 나중에 하늘로 올려보내도 납득할 정도의 업적을 만들어주자는 계책을 냈다. 그렇게 일주일을 꼬박 새워서 내놓은 이야기가 ‘동명왕편’이었다. 창조주와 하백은 무척이나 기뻐하며 그 ‘이야기’를 승인했다.
남은 것은 완성된 ‘이야기’의 기초 뼈대를 바탕으로 동의서를 받는 일이었다. 아이에게 건국 왕으로서의 적절한 배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인간 세상에 진실의 일부가 소문으로 퍼지는 데 대한 동의서였다.
창조주와 하백은 이 치부가 천계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지 인간 세상에 퍼지는 것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렵지 않게 창조주의 동의를 얻은 신은 하백에게도 동의서를 받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 하백 역시 흔쾌히 동의했고 5일 동안 연회를 열어 신을 대접했다.
“……그리고 진탕 취해 깨어나고 나니 ‘이야기’를 적은 종이가 사라졌더구나.”
“그거 없으면 안 돼? 어차피 네 머릿속에 다 있을 거 아니야.”
“신계의 종이에 적고 창조주님 승인까지 받은 거라 아니 된다. 그 자체만으로도 효력을 발휘하는 신통한 물건이지. 그래서 일부러 뼈대만 적어놓았다. 중간중간 조율을 하며 살을 붙여 채워 넣으려 한 건데…….”
신의 말에 따르면 ‘종이’가 사라진 건 신의 자격을 잃을 정도로 큰 죄라고 했다. 실제로 신은 하백과 창조주의 분노 아래 강등당하기도 했다. 그마저도 제가 최대한 ‘이야기’는 멀쩡히 흘러가도록 만들겠다고 싹싹 빌어 이 정도로 그친 거라고…….
듣자 하니 ‘이야기’를 적은 ‘종이’는 대본 같은 거였다. 완벽한 상태의 ‘종이’는 인물들을 주어진 상황에서 알맞은 대사를 하도록 해 상황을 원하는 대로 만든다. 그리고 그 속의 ‘이야기’는 운명 같은 역할을 했다. 신의 말에 따르면 요즘 사람들이 운명을 거스른다 어쩐다 하는데 그 ‘운명을 거스른다’라는 생각조차 모두 ‘종이’에 쓰인 ‘이야기’라 했다. 우리가 의지를 갖고 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행동들이 다 ‘종이’ 위에 짜인 ‘이야기’인 셈이었다.
그만큼 ‘종이’ 속 주인공들은 자신이 싸우고 사랑하고 건국하는 것에 아무런 의문을 느끼지 않고 행동한다. 한마디로 우리 인간들은 자유의지가 없는, 인형극 속 인형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이 ‘종이’가 사라지며 문제를 불러왔다. 더 이상 인형은 시키는 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의지를 갖고 마음대로 행동할 것이며 그만큼 ‘이야기’는 어그러질 가능성이 컸다.
“정리하자면, ‘종이’에 적힌 ‘이야기’는 무조건 일어나는 운명이다. 그런데 그 ‘종이’를 잃어버렸다. 심지어 그 ‘종이’에 적힌 ‘이야기’는 완성본이 아니다. 맞아?”
“그래. 한 세계의 운명이 구멍이 뚫린 채로 진행되는데 막을 수가 없구나.”
난리가 날 만도 했다. 미래가 뒤틀릴 수도 있으니 그 죄로 신의 자격을 잃어도 할 말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은 ‘동명왕편’이 제대로 결말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했다.
“그래서 내 너를 이리로 데리고 온 것이다. 넌 그저 이 영광에 감사하며 이야기가 옳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면 된단다.”
“그냥 종이 하나 더 쓰면 안 될까?”
“미천한 인간이 뚫린 입이라고 나불대는구나! 그건 세계를 구축하는 뼈대라고 하지 않았느냐! 운명의 흐름이 두 개가 생기면 서로 충돌하여 크게 엉키고 만다는 것을 모르는 게냐!”
“아니, 답답하니까 그렇지! 너라면 대뜸 납치되어서 듣는 말이 저따위인데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하겠냐!”
소리치고 나서야 건방진 말투를 지적하던 신의 협박이 생각나서 움찔했다. 하지만 신은 못 들은 척해 주는 모양인지 내 입술을 늘리진 않았다. 대신 날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어려울 것 하나 없느니라. 이미 ‘종이’에 뼈대는 적었으니 그 ‘이야기’는 무조건 일어날 게다. 네가 있던 세계에는 ‘게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지? 이것도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라. 내가 ‘이야기’에 맞춰 ‘퀘스트’를 내려주마. 그걸 해결하면 넌 무사히 다음 뼈대로 넘어가고, 옳은 결말에 도달할 수 있겠지. 간단하지 않느냐?”
정말 진심으로 이게 간단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이가 없어 말문이 다 막혔다. 도무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눈을 본 신은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아이가 선심 쓰듯 말을 이었다.
“무사히 ‘엔딩’을 보고 나면 널 집으로 돌려보내 주마. 물론 네가 온 장소에, 그 나이 그대로.”
“……그게 가능해? 그, 그럼 내가 여기 있는 동안 그쪽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 거야?”
“시간을 멈추는 일은 창조주님이 오셔도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가능하지.”
나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집……. 그제야 내가 다른 세상으로 끌려왔다는 게 실감 났다.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더니, 시험이 끝나고 집에 가던 내가 이렇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우습게도 일을 모두 끝내면 돌려보내 준다는 말에 안도감이 들었다. 신의 말에 따르면 여긴 부여였다. 온전히 내 힘으로 돌아갈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순순히 굴복해야 하는 스스로에게 울화통이 치밀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신에게 마땅한 분노를 돌렸다.
“그건 멋대로 데려온 네가 당연히 해줘야 하는 일이고. 내가 그 외에 얻는 게 뭐지? 뭐가 아쉬워서 내가 여기 남아 널 도와야 하느냔 말이야.”
“아가야. 착각하지 말려무나.”
아이의 눈 전체가 천천히 물빛으로 차올랐다. 거대한 존재감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빳빳하게 세웠던 척추를 허물어뜨렸다. 도저히 마주할 수 없는 엄청난 위압감이었다. 허락된 일이라곤 고작 엎드려 헐떡이는 일밖에 없었다.
“나는 신이다. 너 따위는 얼마든지 죽여버리고 새로운 아이를 데려올 수도 있단 말이다. 주제에 맞게 굴어라. 내버릴 수도 있는 걸 내 친히 집으로 돌려보내 주는 은혜를 베풀겠다는 거란다.”
“헉… 쿨럭…….”
“한낱 인간 주제에 날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고, 어찌 반발하는 것이냐?”
정말로 의아해하는 말투라 소름이 돋았다. 온몸의 피가 역류해 입을 열면 모조리 토해버릴 것 같았다.
“네놈은 경어를 쓰지 않아도 살려둔 것부터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겠구나.”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압박감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나는 헐떡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다시 눈을 마주하진 못했다.
“어때, 할 수 있겠느냐?”
이게 도움 요청이냐, 협박이지. 그렇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거부했다간, 아니 투정이라도 다시 부렸다간 이번엔 정말로 죽을 것이다.
“……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긍정의 답을 작게 내놓았다. 그래. 엔딩 보면 집 보내준다잖아…. 지금은 그것만이 내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이제야 좀 말귀를 알아듣는구나. 아, 벌써 유화가 알을 낳은 모양이로군.”
신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보아하니 영 어리석은 것 같은데,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겪는 게 낫겠지.”
띠링―
의미심장한 말과 동시에 이질적인 알림음이 공중에 울려 퍼졌다. 또다시 아까의 그 반투명한 창이 떠 있었다. 나는 반쯤 체념한 상태로 창에 쓰인 문장을 읽어내렸다.
[메인] 황금빛 알
‘유화’가 ‘황금빛 알’을 낳았습니다. ‘왕’은 불길한 징조라 여겨 ‘알’을 마구간에 갖다 버리라 하는군요. 이런, 얼른 가서 ‘알’이 깨지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성공 시 보상 : ‘알’의 무사 탄생
실패 시 결말 : ‘하백’과 ‘창조주’의 분노로 세상 멸망
“이게 지금 무슨, 아니 알이 깨지지 않는 건 그냥 특별한 존재여서 그런 게 아니었어요?!”
지켜주기까지 해야 해? 무슨 해모수의 아들이 저래! 신은 묘하게 웃었다.
“줄거리만 존재하는 대본이라고 했거늘. 사소한 사항은 미처 적어두지 못했단다. 이럴 시간에 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
나는 마음속으로만 욕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평소보다 눈높이가 낮은 것 같았다. 몸도 영 내 몸 같지가 않고. 옷차림과 팔다리를 둘레둘레 보던 나는 곧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원래의 내 몸이 아니었다!
짧은 팔다리와 낮은 눈높이를 보아하니 한참 어린아이 같았다. 왜 이제서야 깨달았는지 싶을 정도로 확연한 차이였다.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신에게 소리쳤다.
“아니, 데려올 거면 얌전히 데려오면 됐잖아요! 대체 지금 이게 무슨 꼴……!”
“당연히 영혼만 빼 와서 이곳 사람에게 넣었느니라. 진정 몸까지 이동시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럼 적어도 비슷한 사람을 구해주든가, 다섯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이 아이는 대체 무슨 의도예요?”
“그래 봬도 일곱 살이란다. 게다가 이곳의 태자이기까지 하지. 결말을 보려면 주인공 곁에 있어야 하는 법이 아니겠느냐? 개중 가장 나은 인물을 골라 주었건만 잘 알지도 못하는 하룻강아지가 함부로 짖어대는구나.”
그나저나 빨리 가지 않으면 알이 말발굽에 밟힐지도 모르는데? 신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황급히 문을 열어젖혔다. 달음박질을 치자 뒤에서 “어머, 태자 저하! 어디 가세요?” 하는 목소리가 따라왔다. 그러나 나는 대충 “산책!”이라고 외치고 마저 뛰었다. 시스템 창이 띄운 것이 분명한 화살표가 발아래에서 빛났다. 그게 마구간으로 향하는 길을 알려주고 있다는 건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허덕이며 얼마나 뛰었을까. 이름 모를 건물을 두 채나 더 지나치고 나서야 위에서 조그만 삼각형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건물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말 냄새가 지독하게 풍겼다. 역시나 마구간이었다.
들어가야겠지? 안에 알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너무 빠르게 퀘스트에 적응한 것 같아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도 문가를 기웃거리는데 마침 한 남자가 나왔다. 행색이 궐에서 일하는 일꾼 같았다. 나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남자의 짚신과 저고리 따위를 훔쳐보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가 날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태자 저하? 여기서 무얼 하십니까?”
“아, 말 좀 보려고… 요오.”
태자니까 반말을 써야 하나? 그래도 어른인데 존댓말 써야 하는 거 아닌가? 갑작스럽게 처하게 된 신분제에 말끝이 급격하게 흐려졌다.
다행히 일꾼은 제대로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말을 조심하라며 주의만 간단하게 주고 사라졌다.
7살짜리 태자가 홀로 마구간에 간다는 걸 놔둬도 되나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알을 지켜야 하는 내 입장으로선 달가운 일이었다. 말이 어지간히 순한 모양이네. 나는 그런 생각 따위를 하며 마구간으로 들어섰다.
알은 찾기 어렵지 않았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알은 마구간 중앙에 덩그러니 버려져 있었다. 아마도 방금 마주쳤던 일꾼이 알을 버리러 왔던 것 같았다. 벌써 호기심 많은 말 몇 마리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콧잔등으로 툭툭 건드려보고 있었다.
데구루루, 알이 굴러갔다. 말 한 마리가 앞발굽을 쳐들었다.
“안 돼!”
나는 빽 외치고 말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았다. 울타리 하나에 빗장이 질러져 있었다. 달려가 빗장을 빼려고 노력했지만 작고 약한 어린아이의 몸은 단단히 질러 놓은 나무판자를 빼지 못했다.
이 쓸모없는 몸뚱어리!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야? 나는 씩씩대며 여물통 위로 기어 들어갔다. 말이 쉽게 먹이를 먹을 수 있게 그 위의 공간은 여유를 두고 트여 있었다. 나는 여물통을 밟고 우리 안으로 굴러떨어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말의 앞발굽이 알에 내려꽂히기 전, 알을 감쌌다.
“아악!”
나름대로 알을 감싸고 굴렀지만 팔이 말발굽에 스치는 것까지 피하진 못했다. 연약한 피부와 그 아래 뼈가 고통을 호소했다.
자연스레 눈물이 줄줄 나왔다. 어리기 짝이 없는 몸은 눈물샘마저 고장 난 모양이었다. 나는 혹시라도 울음소리가 말을 자극할까 봐 끕끕대며 소리를 삼켰다. 그러면서도 일단 알을 안고 착실하게 구석으로 기어갔다.
모서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자마자 알 표면을 살폈다. 다행히 금 간 구석도 없이 멀쩡했다. 내 팔이 아파죽겠는데 알에 흠집이라도 났나 살피는 꼴이란. 지금 이 상황이 어이없고 허탈해 헛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이 어린 태자의 정신은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새어 나오는 눈물을 닦고 팔을 살폈다. 벌겋게 열이 오른 게 곧 붓겠지만 뼈가 다치진 않은 듯했다.
나는 다시 알을 꼭 안고 말들을 보았다.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자 말들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자기들끼리 털을 고르는 걸 보다 알을 슬슬 쓰다듬었다. 언제까지고 여기서 버틸 순 없었다. 기회를 봐서 알을 가지고 마구간을 나설 생각이었다.
일꾼은 아마 내일 아침에나 깨진 알을 치우러 들를 테니 새벽에 돌려놓으면 되겠지. 새벽부터 아침까지는 말도 잘 테니 큰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큰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다.
‘알’은 지정된 구역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뭐?”
알을 둘러 안고 다시 여물통을 넘을 때였다. 멀쩡하던 여물통 위 공간이 투명한 막에 막힌 듯 나를 튕겨냈다. 불안정한 자세로 넘고 있었던 나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앞에 나타난 상태 창에는 저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알은 지정된 구역을 벗어날 수 없다고?”
나는 조심스레 알을 내려놓고 우리 밖으로 다리를 내밀었다. 막히는 것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번엔 다시 들어가 알을 들고 다리를 뻗었다. 허공은 또다시 무언가에 막힌 듯 내 다리를 튕겨냈다.
나는 주저앉아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망할 놈의 퀘스트. 마구간에 버려졌으니 알은 마구간에서 나갈 수 없다는 건가. 꼼짝없이 하루는 이 우리에 갇혀 있어야 할 성싶었다.
다행인지 나는 안 되는 일은 금세 포기하자는 주의였다. 나는 다시 구석으로 돌아가 알을 끌어안고 앉았다. 바닥에서 짚을 퍼다 앞에 바리케이드도 만들었다. 간간이 말 울음소리만 들으며 그곳에 앉아 있자니 그리 아늑할 수가 없었다.
“…….”
아니, 아늑은 무슨. 주변 상황이 진정되니 다시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느닷없이 학교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기절하고, 깨어나니 부여였다. 이런 황당한 일이 또 있을까. 지금 생각하니 계단에서 누가 밀었던 것도 다 신 그놈의 짓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뒤에 따져봐야 소용없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집에 돌아가기 위해선 이 이야기의 엔딩을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퀘스트 내용을 보니 주몽이 무사히 고구려를 건국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내 주 업무 같았다.
나는 서둘러 중간고사를 보기 위해 공부했던 ‘동명왕편’의 내용을 떠올렸다. 교과서에는 고구려 건국까지의 내용만 실려 있었다. 그래도 기억하기론 전체 신화에는 주몽이 죽을 때까지의 내용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설마 여기서 주몽이 늙어 죽을 때까지 지내야 하는 거야? 문득 든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럼 집에 돌아가는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어. 최소 여기서 몇십 년은 살아야 한다는 건데.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러나 나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서 내 위치는 ‘태자’였다. 주몽은 따로 고구려를 건국하니 이 태자는 후에 부여의 왕이 될 테다. 엔딩이 고구려 건국 후에 존재한다면 분명 신은 나를 태자가 아닌 다른 몸에 넣었을 것이다. 난 계속해서 그를 도와야 하는 입장인데 태자는 누구보다도 주몽을 따라 고구려에 가기 힘든 위치였으니까.
한마디로 이 ‘이야기’의 엔딩은 주몽이 물고기 다리를 건너가면 맞이할 확률이 높았다.
몇십 년이 십몇 년으로 줄자 조금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 여기서 왕족 생활 좀 누리다가 집으로 돌아가자. 양심은 있는지 18살 그대로 돌려보내 준다니까. 나는 눈물을 닦으며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난 아무 데서나 잘 살 거라는 소리도 제법 들었으니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알을 좀 더 세게 끌어안았다.
“건강하게 태어나야 해. 한 치의 흠도 없이…….”
부디 무사히 자라서 고구려를 건국해주렴. 지금은 이 아이만이 내 희망이었다.
기분 탓인지, 알이 잘게 떨린 것도 같았다.
***
“으음…….”
까무룩 잠이 든 것 같았다. 알도 나름 안에 아기가 들어있다는 건지 뜨끈뜨끈한 게 안고 있다 보면 졸음이 왔다. 하긴, 그게 아니어도 7살이면 한창 먹고 잘 나이지. 나는 새삼 달라진 내 나이를 자각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밖이 제법 소란스러웠다.
“얘들아. 저녁 먹을 시간이다.”
한 남자가 어깨 가득 건초를 지고 들어왔다. 아마도 말의 저녁을 챙기러 온 마구간지기인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는 새삼 태자라는 내 위치를 다시 자각했다. 그냥 어린 시동이면 몰라도 태자가 마구간에 들어앉아 있다는 건 있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다 일단 알을 내려놓고 볏짚으로 덮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그래도 일단은. 그런 뒤 일어나서 옷을 탁탁 털었다.
그때까지도 마구간지기는 날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구석이라곤 해도 어린아이가 말 우리에 있는데 못 볼 수가 있나?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그의 앞으로 나섰다. 매도 빨리 맞자는 생각이었다.
“저기…….”
“아이고, 시부럴! 뭐야!”
여물통에 건초를 채워 넣고 있던 그는 건초를 흩날리며 뒤로 넘어졌다. 까무러치는 게 정말로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 내가 다 민망해졌다. 멀뚱히 서 있는 내게 욕설을 뱉던 그는 내 옷자락을 보자마자 대뜸 엎드렸다.
“태, 태자 저하! 미천한 제가 감히 저하를 몰라뵙고!”
벌벌 떨며 소리치는 목소리가 방금 전 놀라 뒤집어질 때보다 컸다. 나는 내 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소매마다 구름과 해가 멋들어지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제야 마구간지기면 한참 어린 태자의 얼굴을 몰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 벗어두고 올걸. 옷만 아니었으면 신분을 감출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후회는 짧고 판단은 빨랐다. 이 사람의 입을 막아 내보내는 게 급선무였다.
“그냥, 놀다 잠들어서…….”
나는 대강 변명을 중얼거렸다. 믿기 어렵겠지만 우기면 어떻게든 되겠지. 어린아이가 그럴 수도 있지, 뭐 어쩔 거야.
여전히 반말을 써야 할지 구분이 가지 않아 말끝은 흐린 채였다. 지위상 반말로 마음이 굳혀지고 있었지만 내 안에 뿌리 박힌 유교 사상이 자꾸만 머뭇거림을 만들어냈다.
두근거리며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데 그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뭐지? 너무 놀라서 기절했나? 다가가 봐야 하나 고민하는데 갑자기 그가 몸을 잘게 떨더니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고개를 드는 것은 그보다 더 느렸다.
“아아악!”
그리고 나는 눈을 마주치고 깜짝 놀라 자지러졌다. 고개가 들린 그의 눈은 까뒤집어져 흰자만 드러난 상태였다.
와, 심장 떨어질 뻔했네. 두근거림이 가시고 나자 한 번 본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제자리로 돌아온 그의 눈은 하늘을 담고 있었다.
“알은 잘 지키고 있는 모양이구나.”
흥, 그가 새침하게 콧방귀를 뀌더니 온몸에 묻은 건초더미를 털어냈다. 나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켜 짚 더미를 털었다. 머리카락마저 매만지던 그가 툭 말했다.
“내 말대로 어려울 것 하나 없지 않느냐?”
“저 팔 부러질 뻔한 거 안 보이세요?”
소맷자락을 걷어 내민 팔은 이제 시퍼렇게 멍이 올라와 있었다. 힐끔 본 그가 운이 좋다는 투로 말했다.
“부여는 전투마로 유명한 나라지. 별것도 아니구나.”
“아니, 무슨…. 지금 절 어디로 밀어 넣으신 거예요?”
“알을 마구간에 버린 네 아비를 탓하거라.”
아비는 무슨,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데. 눈앞의 신은 물론이고 임금님, 하다못해 날 말리지 않은 일꾼에게까지 원망이 샘솟았다. 왜 날 막지 않으셨어요. 말을 조심하라는 가벼운 주의만 주니 난 꼼짝없이 말이 순한 줄 알았잖아요.
안 그래도 말이 숨겨둔 알을 깰까 봐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전투마라는 소리까지 들으니 더 걱정되었다. 나는 짚 더미를 힐끔대며 무신경한 투로 그에게 물었다. 그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는 생각이 드니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근데 어쩐 일로 다시 오셨어요?”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슬슬 다시 하늘로 올라가 봐야 하기도 하고.”
“강등되셨다고 들었는데…….”
“무엄하구나. 강등되어도 신은 신. 할 일이 천계에 쌓여 있으니 언제까지고 인간 세상에 남아 지켜볼 수는 없지. 작별 인사도 할 겸, 내 친히 너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볼 기회를 주마.”
신이 남아 날 도와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막상 간다니까 덜컥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이제 온전히 내가 주몽을 지켜 엔딩을 봐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궁금했던 점을 모조리 쏟아내었다. 하나라도 더 알아야 죽지 않고 살아남아 집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던 사람들의 태도였다.
“제가 명색이 태자고 어린아이인데 아무도 저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보통 막, 시종들이나 호위가 따라와서 막지 않나요?”
“넌 다른 세계 영혼이라 이 세계 사람들에겐 네 존재감이 아주 옅을 거란다. 네게 특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네가 있는지도 잘 모를 게다. 궁금하면 한번 실험해 볼 테냐?”
“아니, 괜찮…….”
띠링―
[도전]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알’을 지키기 위해 마구간에 있는 당신. ‘태자’가 ‘알’을 지켰다는 소문이 나지 않게 하세요. 마구간에 갔다는 소문조차 나지 않으면 더욱 좋겠죠?
성공 시 보상 : 주몽 탄생 설화에 신비감 조성
실패 시 결말 : ‘태자’의 예의범절 수업 10시간, 체벌
“…….”
지긋지긋한 알림음과 함께 반투명한 창이 떴다.
내용은 ‘도전’이라는 명목 아래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담고 있었다. 특히 보상과 결말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 퀘스트의 결말이 ‘세상 멸망’이 아닌 건 다행이었지만 보상은 왜 주몽에게 돌아가는데? 나는 어이가 없어 말을 잃었다. 신은 그런 내가 막막해서라고 판단한 듯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말했듯이 네 존재감은 거의 있는 듯 없는 듯한 수준이라 심한 추태를 부리지 않는 이상 널 기억하지 못할 거다. 이 마구간지기도 널 봤지만 조금만 지나면 누가 다시 묻지 않는 이상 그대로 잊어버리겠지. 다른 세상의 영혼인 넌 그 정도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단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퀘스트를 해결해야 하는 제겐 좋은 일이지만 왕이 될 태자에겐 나쁜 일이 아닌가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남아 있었느냐? 어차피 넌 왕이 되기도 전에 이곳을 떠날 텐데. 몸 주인이 존경받는 왕이 되지 못한들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그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는 비웃음이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영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과장된 말투로 안타까이 얘기했다.
“너무 신경 쓰진 말거라. 어차피 원래의 태자도 존재감이 약하고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어. 그렇지 않았다면 왜 주몽에게 그리 쉬이 열등감을 느끼고 질투했겠느냐?”
그제야 원작 속 내 위치가 떠올랐다. ‘동명왕편’에는 주몽을 시기해 끈질기게 괴롭히던 ‘태자’가 있었다. 주몽이 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건국하는 계기가 된 인물이기도 했다.
그 ‘태자’가 바로 지금의 나라니. 주몽만 신경 쓰느라 미처 살피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또 다른 충격이 뒷목을 뻣뻣하게 굳혔다.
“……그를 미워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던 제가 어떻게 주몽을 무사히 엔딩까지 가게 하죠?”
“그래서 더더욱 너를 태자의 몸에 밀어 넣은 것이다. ‘종이’의 제약을 받지 않는 그는 정말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그리고 너희 세계에는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라는 속담이 있다 들었는데. 원래 ‘이야기’의 태자가 주몽을 미워했다고 해서 지금의 너까지 그를 미워할 필요가 있느냐?”
“…….”
“이미 많은 것이 자유로워졌어. 나는 유동적으로 그에 대처할 인물이 필요하다. 그래서 굳이 이세계에서 인간을 데려온 게야. 모로 가도 좋으니 퀘스트만 완료하거라. 그럼 엔딩도 볼 수 있을 테니.”
나는 허망하게 입을 벌렸다. 자유로움은 늘어났지만 부담감은 배가 되었다. 신이 그런 나를 무시하고 말했다.
“더 물어볼 것은 없으리라 생각하마. 그럼 나는 이만 하늘로….”
“잠깐만요!”
나는 소리를 지르며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보낼 순 없었다. 나는 애써 궁금증을 짜냈다.
“나, 내가 태자라는데. 제가 태자였던 적이 한 번도 없어서요. 아랫사람들한텐 반말을 해야 해요, 존댓말을 해야 해요?”
“그 정도는 네가 알아서 좀 하면 안 되겠느냐? 인간이라 그런지 질문 수준도 미개하기 짝이 없구나.”
그가 날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나름 말할 때마다 고민인 부분이었는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생판 처음 보는 세상에 떨어져 마구간에만 박혀 있으니 모르는 것도 쌓이지 않았다. 이래서 선생님들이 맨날 ‘뭐 아는 게 있어야 질문거리도 생기지’라며 애들을 타박했구나.
하지만 창피함도 잠시였다. 목숨이 걸려 있는 나는 억울한 얼굴로 항변했다.
“대뜸 부여에 떨어졌는데 제가 아는 게 뭐가 있어요. 고구려도 세워지기 전이면 완전 ‘우가우가’ 하던 시절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니라.”
“뭐가 아니에요! 여기 아직도 임금님 죽으면 막, 고인돌 짓고 그러죠?”
그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이곳은 네가 살던 곳과 다른 세계라고 하지 않았느냐! 네가 지내던 곳의 ‘부여’는 그랬을지 몰라도 나는 내가 다스리는 세계를 그리 뒤떨어지게 할 생각이 없느니라! 천 년은 족히 발전시켜 두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러니까 나름 살 만할 거란다. 그렇게 말하며 의기양양하게 웃는데, 나는 할 말을 그대로 잃어버렸다. 그래도 양심은 있다고 해야 하나. 아니, 날 강제로 데려온 것부터 그에게서 양심을 찾을 순 없었다.
“이런, 정말 가야 할 시간이구나.”
신이 마구간에 난 창으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생각보다 더 늦고 말았어.’라며 혀를 차기도 했다. 난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살면서 시계 외에 다른 방법으로 시간을 알아본 적이 없었다. 하늘의 색을 보고 때를 알아맞히는 능력 같은 건 키우지 못했다.
“그럼 무사를 비마. 살다 보면 또 만날 때가 있을 거란다.”
그가 마지막으로 날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게 제가 죽을 때는 아니겠죠. 나는 튀어나오려는 불길한 소리를 삼켰다. 허리를 꾸벅 숙였다 펴니 마구간지기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곧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돌아보는 눈동자가 까맸다. 그제야 나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토해냈다. 그 소리에 어리숙한 모습으로 뒤통수를 쓰다듬던 마구간지기가 날 발견하고 다시 엎드렸다.
“태자 저하! 왜 여기, 아니 죄송…….”
나는 한동안 횡설수설 여러 가지 단어를 남발하는 그를 달래야 했다. 그냥 놀고 있었던 거라고, 비밀로 해주면 안 되냐고 부탁하니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그러겠다고 답했다. 나보다 한참 어른이신 분이 엎드려 계시니 내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과연 내가 익숙해질 수 있을까. 나는 태자 행세에 급격한 피로감을 느끼며 마구간지기를 내보냈다. 그런 뒤 곧바로 다시 볏짚을 헤집어 알을 꺼냈다. 따끈한 온기가 좋아 끌어안자 알이 잘게 떨리며 들썩였다.
“뭐지?”
나는 놀라 알을 떼어내고 들여다보았다. 이번만큼은 착각이 아니었다. 이게 태동인가? 안에 아기가 들어 있으니 합당한 추측이었다. 바닥에 내려놓고 고심하자 알이 더 격렬하게 이리저리 흔들렸다. 발차기라도 하는 모양이네. 멈추지 않던 움직임은 내가 알을 품에 안자 언제 그랬냐는 양 싹 멈추었다. 나는 간헐적으로 부르르 떨리기만 하는 알을 쓰다듬었다.
“그래. 네게 무슨 죄가 있겠냐.”
따지고 보면 얘도 신의 아들인데 인간 세상에서 자라게 되었으니 기구하다면 기구한 팔자였다.
“아냐. 그래도 내가 더 기구해.”
나는 그대로 짚 더미에 드러누웠다. 말들은 내게 관심도 안 주고 밥만 퍼먹고 있었다. 내 존재감은 짐승한테까지 없는 모양이었다. 좋아해야 하는 건가. 나는 이왕이면 이 존재감이 알까지 덮어주길 바라며 몸을 웅크렸다. 알을 몸으로 덮은 채 그러고 있자니 다시 잠이 왔다. 굶주린 배와 아픈 팔은 7살의 정신을 수면 속으로 끌어당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말들도 이미 모두 잠들어 있었다. 솔직히 이쯤이면 날 찾으러 누군가 왔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밖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 정도면 존재감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직무태만 아닌가? 그래도 태자가 마구간에서 이러고 있다는 걸 들키면 곤란한 사람은 나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알을 옆에 내려놓았다. 알은 내가 내려놓은 게 심통이 나는지 다시 발차기를 해대고 있었다. 나는 대충 토닥이곤 내가 누웠던 짚 침대를 보완해 짚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아침이 오기 전까지 전투마들로부터 알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런 짚 따위는 발길질 한 방에 무너질 테지만, 일단은 뭐라도 했다는 심리적인 안정감이 생겼다.
“잘 있어. 태어나면 또 보러올게.”
보고 싶지 않아도 보러 오게 되겠지. 퀘스트가 또 띠링띠링 울릴 생각을 하니 골이 아팠다. 그래도 나는 작별 인사를 건네고 마구간을 나왔다. 곧장 싸늘한 바람이 몸을 덮쳤다. 이번엔 방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주는 화살표 따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심 기대했던 나는 실망을 담아 한숨을 푹푹 쉬었다.
다행히 돌아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마구간을 벗어나 닦인 길로 나오자마자 궁인과 마주친 덕분이었다. 그녀는 나를 찾고 있던 건지 내 얼굴을 보고 후다닥 달려왔다.
“태자 저하! 대체 어디 계셨던 거예요!”
“잠깐 산책하다 길을 잃어버렸어… 요. 그리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고… 요.”
“웬 존댓말이세요? 아직 열이 있으신가.”
반말을 쓰면 되나 보다. 나는 새로운 깨달음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서 가요. 가서 좀 씻으셔야겠어요. 저하께 짐승 냄새가 진동을 하네요.”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내가 깨어났던 궁으로 돌아갔다. 다 씻은 뒤 멍든 팔 위에 야무지게 약초까지 얹고 나자 잘 준비가 끝났다. 그녀가 내 팔을 보고 경악하긴 했지만 넘어져서 크게 부딪혔다고 하자 의심하지 않았다. 아마 평소에 태자가 거짓말 하나 하지 않고 얌전히 지낸 모양이었다.
“그럼 주무세요, 저하.”
나는 대꾸하지 않고 이불을 코끝까지 덮었다. 날 씻겨준 여인이 내 잠자리마저 봐주는 걸 보니 아마 전담 궁인인 것 같았다. 7살이면 유모에 가깝겠지만. 뭐든 다행히 마구간에 갔다는 소문은 퍼지지 않은 듯했다. 마구간지기가 정말 날 까먹은 건지, 비밀을 엄수한 건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밤사이에 알이 깨지지 않아야 할 텐데. 나는 밤새 알 걱정으로 몸을 뒤척이다 어느 순간 까무룩 잠이 들었다.
***
“태자 저하.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제가 소셋물을 떠 왔답니다.”
나를 깨우는 낯선 목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눈앞에는 시스템 창이 떠 있었다. ……부여 그딴 거 다 거짓말이었으면 했는데. 안타깝게도 어제 일은 모두 현실인 모양이었다. 나는 울컥 치미는 울음을 삼키며 황급히 글씨를 읽어내렸다.
[메인] 황금빛 알 – 완료
말발굽으로부터 ‘알’을 무사히 지켜냈습니다. ‘왕’이 ‘유화’에게 ‘알’을 돌려주라 명령하였습니다. ‘알’은 무사히 부화할 것입니다.
그 위에는 간절히 바랐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손을 휘저어 반투명한 창을 날렸다. 태자의 유모가 날 이상한 애 보듯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누워 웃더니 손을 휘젓는 게 해괴해 보일 만도 했다.
난 변명 없이 일어나 세수를 했다. 씻겨주려 다가오는 손은 억지로 물렸다. 내 몸이 7살이라는 건 알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한 내 정신이 이 나이 먹고 눈곱까지 남의 손으로 떼는 건 수치라고 외쳤다.
그러나 옷은 입을 줄 모르니 얌전히 시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겉옷 고름을 매는 손길을 보며 내가 한 짓이 들켰는지 알아볼 만한 때를 노렸다. 마침 유모가 나가고 어제 내 옆에서 궁둥이를 들썩이던 어린 궁인이 들어왔다. 소문에 밝고 입도 제법 가벼워 보였다. 나는 아이를 향해 넌지시 운을 띄웠다.
“혹시 나 자는 사이에 재밌는 이야기 없었어?”
“무슨 이야기 말씀이세요? 냇가의 두꺼비 왕자나 산속 호랑이 영감 이야기요?”
완연히 애 취급하는 모양새에 진실이 목 끝까지 올랐지만 애써 참았다. 앞으로 지겨워도 몇 년은 당할 일이니 하루빨리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대신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원하는 바를 말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궁 안에서 일어난, 음, 바, 반짝반짝하고 신비… 로운 이야기 없어?”
생전 해보지 않은 어린아이 연기에 혀가 말렸다. 다행히 아이는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박수를 짝 쳤다.
“음, 태자 저하는 혹시 별궁 여인이 알을 낳았다는 소문을 들으셨나요?”
“응? 아니? 그런 일이 있었어?”
어제 다 들었지만 나는 시치미를 뚝 뗐다. 어린 궁인도 어제 내가 들었는지 확인해보려고 떠본 모양이었다. 얼굴이 밝게 피더니 금세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네. 정말 기괴한 일이죠?”
기괴하긴, 내가 어떻게 살린 알인데. 하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방긋방긋 웃었다. 알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은 일절 꺼내지 않았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주 먼 미래를 위해서라면 지금부터 포석을 깔아야 안전했다.
“그걸 보신 임금님이 그 알을 마구간에 버리라 명 하셨거든요. 그런데 세상에, 아침에 다시 가보니 그 알이 멀쩡한 거 아니겠어요!”
“우와, 진짜로?”
“네! 거기 말들은 험해서 금세 깨뜨릴 게 분명했거든요. 그런데 금도 안 갔을뿐더러, 사실 이게 제일 놀라운 대목인데요.”
아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뜸을 들였다. 물어본 나보다 더 흥분한 기색이었다.
“말이 보호라도 한 것처럼 주변에 짚이 쌓여 있었대요!”
“우, 우와…….”
“시종의 말로는 그렇게 정교할 수가 없었다는데, 이게 다 신비로운 알을 지키라 하늘이 명하신 게 아니고 뭐겠어요?”
“그렇구나…….”
“암튼, 그래서 임금님이 그 예사롭지 않은 알을 다시 어미에게 돌려주라 말하셨답니다.”
아이가 연극조로 말을 마쳤다. 띠링― 그 즉시 익숙한 알림음과 함께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도전]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 완료
‘태자’가 간밤에 한 일을 숨기는 것에 성공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알’의 탄생이 좀 더 신비로워집니다.
아무도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걸 소문내지 않았다는 게 증명된 셈이었다. 진짜 나 존재감 없나 봐. 좋은데 좀 싫었다. 태자가 이 모양이니 부여의 앞날이 어두웠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아이에게 부탁했다.
“냉수, 아니 얼음물 한 잔만 가져다줄래?”
얼음물을 마시고 속이나 차려야겠다 싶었다. 옷시중을 마친 궁인이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지금 석빙고에 가서 남아 있는 얼음이 있나 확인해 볼게요.”
“석빙…. 아냐. 괜찮아. 그냥 냉수로 가져다줘…….”
나는 갑자기 훅 들어온 낯선 단어에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이 고대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
나는 알을 조심스럽게 들어 내 다리 위에 얹었다. 알이 웅웅 떨리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왜 이제 왔냐’며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 같았다. 그걸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살살 쓰다듬자 ‘띠링―’ 소리와 함께 그새 익숙해진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서브] 부화를 도와줘! - 완료
‘알’이 당신의 손길에 만족스러워합니다. 보상으로 부화 시기가 앞당겨집니다.
나는 안도의 숨을 삼키며 알을 내려다보았다. 아침을 먹고 유모의 손에 이끌려 누운 것도 잠시, 또다시 떠오른 퀘스트에 따라 별궁에 와 있던 참이었다.
이름하여 ‘부화를 도와줘!’.
[서브] 부화를 도와줘!
별궁에서 ‘유화’의 ‘알’이 부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들 기웃거리기만 할 뿐 대할 방법을 모르는 것 같군요. 당신이 ‘알’을 찾아가 쓰다듬어 주세요.
성공 시 보상 : ‘알’의 빠른 부화
실패 시 결말 : ‘알’의 정상 부화
‘메인’이나 ‘도전’ 외에 새로운 ‘서브’ 퀘스트였다. 실패 시 결말이 메인 퀘스트와 달리 약한 축에 속했다. 아마 ‘종이’와 관련된 부분이 메인 퀘스트이고 그 외에 부가적인, 다시 말해 꼭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하면 좋은 퀘스트들이 서브 혹은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알의 부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점이 끌렸다. 실제로 와보니 그보다 다른 것에 조금 더 마음이 쓰이게 되었지만.
“…….”
나는 착잡한 눈으로 정말 알만 있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따뜻한 화로도, 푹신한 이불도, 하다못해 얇은 방석 하나 없었다.
나는 당연히 알이 유화 곁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읽었던 ‘동명왕편’에는 유화가 알을 이불에 감싸 따뜻한 곳에 두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보통 어머니는 갓 태어난 자식을 곁에 두기 마련이었다. 내가 읽은 ‘유화’는 주몽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였다. 이리 알을 방치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알이 이런 상황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고민하다 순간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렸다. 그렇게 생각하니 알의 방치가 조금은 이해되었다. 출산 직후인 데다 아프기까지 하니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그 누가 알을 이리 맨바닥에 덜렁 두고 말았을 거라 생각하겠나.
이불이라도 하나 얻어서 감싸주면 좋을 텐데. 유화를 찾아가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알을 잠시 내려놓고 옆방으로 건너갔다. 디귿 자 모양의 건물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예상대로 몇 개의 문을 더 거치자 유화의 방이 나왔다.
들어가자마자 태자의 유모가 놀라 일어섰다. 그녀는 출산을 도와줬던 여인이 아프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며 건너가 있던 참이었다. 그녀가 급히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태자 저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유화 님을 뵈러 왔어.”
“아니 되어요. 유화 님은 지금 많이 편찮으세요.”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유화에게 다가갔다. 유모가 “태자 저하!” 하고 낮게 소리쳤지만 난 알의 상황을 전하는 게 더 급했다. 갓 낳은 자식이 이런 꼴을 당하고 있다는 건 늦게 알수록 마음이 더 아플 것이었다.
유화는 내가 다가가는데도 누운 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많이 아픈 건가 싶었다. 난 개의치 않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알의 상황을 듣는 데는 누워서도 문제없었다.
“유화 님. 지금 유화 님이 낳으신 알이 좋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어요.”
“…….”
“땅바닥에 버려져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니까요.”
“…….”
“유화 님?”
유화는 고개 하나 돌리지 않았다. 큰 눈을 굴려 날 한 번 바라보고 다시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 내가 예상했던 반응과는 한참 달랐다. 대신, 나는 어떠한 위화감을 강하게 느꼈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왕은 왜 알을 유화에게 돌려주었을까?
물론 어머니에게 자식을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부여는 신을 강하게 믿는 나라였다. 내가 아무리 역사에 무지해도 고구려 이전 즈음의 나라들은 모두 왕이 제사장 역할도 했다는 상식은 있었다. 궁인들조차 하백의 딸이나 해모수의 존재를 그대로 믿을 정도로 온 나라가 진심으로 신을 모셨다.
그런 나라에서, 만약 나라면 ‘신성한 존재’라는 알을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았을 것 같았다.
정말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떠받들어야 했다. 신의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죄인이나 다름없는 유화에게 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깊은 곳에서 온갖 귀중한 것으로 감싸고 부화하기까지 매일 밤 제사를 지냈겠지. 그러나 왕은 이 껄끄러운 존재를 ‘어미’에게 돌려줬다는 핑계 아래 방치했다. 나는 그게 무슨 화를 불러올지 모르니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사 표시로 보였다.
‘왕은 이 알이 인외의 것임을 인정하고 깨뜨리기를 포기했다.’
인외의 존재에는 신성한 존재도 있었지만 상스러운 존재도 있었다. 왕은 ‘알을 낳았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불길한 일이라며 깨뜨리기를 명했다. 과연 말이 보호했다는 일 하나만으로 그 시각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었을까?
사람의 인식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나는 이번에도 그럴 것임을 확신했다. 왕은 알을 챙기는 것을 잊은 게 아니었다. 어린아이나 낮은 위치의 궁인들은 신비롭다며 꺅꺅댔지만 그는 그저 ‘성스러움’으로 포장하여 미지의 존재를 거부한 것뿐이었다. 높으신 분들은 이미 다름을 수용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똑똑한 신계의 여인 유화가 그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쉬세요.”
그녀는 알이 방치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왕은 그렇다 쳐도 어미인 유화가 알을 외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되묻는 대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알을 위한 허락을 구했다.
“그래도 알에게 이불 한 채는 허락해주세요.”
“…….”
유회는 대답 없이 몸을 돌려 누웠다. 그 몸짓에서 나는 침묵 속 묵인을 읽었다.
그대로 다시 작은 방으로 건너가 궁인에게 명했다. 곧 궁인이 푹신하고 두꺼운 이불을 한 채 가져왔다. 그 이불은 알을 두 번 감싸고도 남았다. 나는 궁인이 보는 앞에서 직접 알을 싸매며 말했다.
“유화 님이 내게 부탁하신 일이야.”
궁인은 ‘그럼 그렇지.’라는 반응이었다. 한 치의 의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모도 “아픈 와중에도 자식을 위한 마음은 남아 있는 법이지요.”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렇듯 어미가 자식을 챙기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유화는 왜 알을 외면하게 되었을까?
나는 알을 뒤로하고 별궁을 나오며 계속해서 고민했다. 아직 몸을 다 추스르지 못해서, 라는 건 적절한 답이 되지 못했다. 아무래도 알을 낳았다는 게 껄끄러워서 그런가? 멀쩡한 아기가 태어나면 좀 나아질까 싶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여전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이제야 ‘종이’가 존재하지 않는, 날 것의 인간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왜 위험한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래도 일단 깊어지려는 상념을 털어내고 막 태자궁으로 들어서려는 때였다.
“저하! 왕비 마마께서 부르십니다!”
궁인의 다급한 외침이 발걸음을 잡았다. 왕비 마마면 태자의 어머니? 태자도 당연히 엄마가 있을 텐데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닥친 일이 너무 많았던 탓이었다.
안 가면 안 되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삼켰다. 보통 어린애들은 엄마라면 죽고 못 살았다. 태자도 어머니와 관계가 좋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속으로 울상을 지으며 서둘러 옷시중을 받았다. 어머니라면 자식의 변화를 누구보다 기민하게 알아차릴 텐데.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을 눈치챌까 두려웠다. 아들의 영혼이 바뀐 것까진 알아채진 못해도 귀신에 씌었으니 굿을 하자며 끌고 갈지도 몰랐다. 이 시대에선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에 찬찬히 적응하고 태자로서의 습관을 익힌 채 만나도 두려울 판에 벌써 어머니를 만나게 되다니.
대책을 강구하기도 전에 나갈 채비는 끝났다. 조금 전보다 더 화려하고 격식을 갖춘 모양새였다. 나는 발을 질질 끌며 태자궁을 나섰다. 옆에서 궁인이 서두르셔야 한다며 재촉을 해댔다.
“……아냐, 괜찮을 거야.”
나는 애써 스스로를 달랬다. 항상 같이 있던 유모도 내가 태자가 아니라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왕비님이 내 행동에 의문을 품어도 유모 때처럼 태연히 넘기면 됐다. 아니면 그 자리에서 어리광을 부릴 생각이었다. 처음으로 어린아이인 몸이 감사했다.
“왜 이렇게 몸을 떠세요.”
내 긴장이 몸 밖으로 드러난 모양인지 유모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어? 아냐. 그냥, 음, 몸이 덜 나았나 봐.”
“그러게 제가 얌전히 누워 계시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쏘다니시더니…….”
“어느 궁인이 감히 태자에게 그런 말투를 쓰느냐!”
옆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던 유모가 입을 다물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고개를 돌리자 화려하게 꾸민 미인이 서 있었다. 내가 부여에 와서 본 여인들 중 가장 위풍당당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는 주변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궁인들이 아니더라도 한눈에 그녀가 왕비임을 알아보았다.
그녀가 날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태자. 이제 이 어미를 보아도 인사조차 하지 않는 겁니까.”
“어…….”
나는 당황스러움에 입을 우물거렸다. 뭐라 인사드려야 하지? 호칭은 또 뭐라고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어머니? 어마마마? 왕비님? 솔직히 다른 궁인이었으면 대충 뭉뚱그려 넘어갔겠는데 ‘어머니’라는 존재가 날 긴장시켰다.
일단 그녀가 계속해서 내 인사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나는 최대한 괜찮아 보이는 단어들을 골라 말했다.
“그간 안녕… 하셨습니까, 어머니…….”
“어머니가 아니라 어마마마라고 불러야 한다 내 몇 번을 더 말해야 합니까!”
시작부터 저지른 실수에 어깨가 굳었다. 다행인 점은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이미 여러 번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타이밍 좋게 유모가 나서서 수습을 하기 시작했다.
“왕비 마마. 태자 저하께선 아직 어리셔서 가르침을 종종 잊으십니다. 너그러이 넘어가 주십사 간청드리옵니다.”
“쯧. 얼마나 멍청한 겐지…….”
역시 유모였다! 다행히 왕비님은 혀를 찼을 뿐 그대로 넘어가는 기색이었다.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의심보다 멍청이 취급이 훨씬 나았다. 어차피 부여에 관해선 멍청이가 맞기도 했다.
“갑시다, 태자.”
“네…….”
나는 왕비님의 뒤를 따라 그녀의 궁으로 향했다.
“…….”
“…….”
그리고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 말도 오가지 않았다.
이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보통 모자 사이가 아니었다. 왕비님은 태자를 못마땅해했고 태자는 그런 어머니를 무서워했다. 태자가 우물쭈물할 때 재빠르게 나선 유모는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게다가 왕비님의 그 차디찬 눈은 계모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러니 소심한 태자가 안 무서워하고 배기나. 근데 설마 진짜 계모는 아니겠지? 이쪽 족보를 모르니 그런 의심까지 들었다.
어지러운 왕실 족보를 추측하는 동안 우리는 왕비궁에 도착했다. 대문을 넘어 들어가자 커다란 기둥 뒤에 고개를 내밀고 선 어린아이가 보였다. 나보다 더 작은, 네다섯 살은 되었을까 싶은 아이였다. 시동이라기엔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보고 누군지 추측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를 향해 왕비님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람 왕자. 나와서 태자께 인사드리지 않고 뭐 하고 섰습니까?”
‘가람?’
다른 어떤 말보다 그 이름이 먼저 귀에 꽂혔다. 작은 몸이 오도도 달려왔다. 왕비님이 무서운지 잘게 떨리는 몸이 익숙한 잔상과 겹쳤다.
밖에서 자주 맞고 들어오던 작은 아이.
쫓아가 보면 항상 담벼락 뒤에 몸을 욱여넣고 벌벌 떨고 있었다. 멍청하게 반격도 못 하냐고 혼내도 ‘형, 형!’ 하며 붙어오던 작은 생명체가 떠올랐다. 그땐 나도 너무 어렸고 내 상황만으로도 버거워 달래기보다 다그침이 더 컸던 게 후회로 남아 있었다.
“아, 앙녕하셨습니까, 형님.”
나는 혀 짧은 소리로 인사하는 어린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태자의 동생.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는데 동생 하나쯤 있어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내 동생.
저 아이는 내 동생이 아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내 동생이었다. 닥친 상황에 눌려 있던 그리움이 후회와 섞여 울컥 터져나왔다.
“왕자. 다시 인사해보세요. ‘안녕하셨습니까’라고 발음하는 겁니다.”
“아, 아, 앙녕…….”
“앙녕이 아니라 안녕! 왕자의 궁인을 매질해야겠어요. 나이가 벌써 몇 살인데 아직도 미숙한 소리를 내는 겝니까!”
아이가 벌벌 떨며 고개를 숙였다. 나도 모르게 그 작은 몸을 끌어다 내 등 뒤로 감췄다. 여기저기서 궁인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내가 대들기라도 해서 왕비님을 자극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대거리하기에 적절한 어휘도 몰랐다. 대신 아이를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가람아. 괜찮아. 나는 잘 지냈어.”
아이는 몸을 굳힐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유약한 태자는 제 동생을 살갑게 감싸준 적도 없는 모양이었다. 왕비님도 이런 내 행동이 의외였는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적막 속에 가람이 훌쩍이는 소리만 들렸다. 왕비님이 입술을 달싹이는 동안 뜬금없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혀, 형제간에 우애가 아주 좋사옵니다, 왕비 마마.”
이번에도 유모였다. 그녀는 수명이 십 년은 깎여나간 표정으로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바쁘게 눈알을 굴리던 주변 궁인들이 서둘러 맞장구를 쳤다.
“그, 그렇사옵니다. 형제가 저리도 사이가 좋으니, 얼마나 기쁨이 가득하실까…….”
“우애는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거라 하지 않사옵니까.”
왕비님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한동안 열렬한 박수와 칭송 소리만 왕비궁 앞마당에 울려 퍼졌다.
“흐흠, 그만하면 됐다. 형제간에 정이 두터운 일은 당연한 것이거늘. 어찌 호들갑이냐.”
드디어 왕비님이 넘어갈 기색을 보였다. 그녀는 새침하게 일갈하곤 궁 안으로 발걸음을 틀었다. 체면을 살려줬다는 생각 때문인지 눈매가 누그러져 있었다. 나는 그녀가 궁 안에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뒤늦게 ‘태자’로 보이려면 이런 돌발 행동은 하면 안 됐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왕비님이 들어가고 나서야 궁인들이 우르르 달려와 우리 둘을 떼놓았다. 유모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를 다그쳤다.
“저하! 하마터면 곤란한 일을 당하실 뻔하셨어요!”
“응, 미안…….”
“왕비님의 엄격한 성정을 아시면서도…….”
모두 내 잘못이 맞았기 때문에 나는 묵묵히 고개만 주억거렸다. 확실히 왕비님은 자식에게 엄격한 어머니 같았다. 고작 네 살 먹은 어린아이가 발음 좀 샜다고 야단치는 기세가 아주 무서웠다. 유모는 내가 풀이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래도 왕자 저하를 감싼 건 참 잘하셨어요.”라며 날 달랬다. 주변 궁인들도 내심 나의 형 노릇에 감동한 눈치였다.
나는 궁인들 사이에 폭 파묻혀 있는 가람을 보았다. 아이가 여전히 훌쩍거리며 날 마주 보았다. 말없이 다가가 작은 손으로 더 작은 손을 붙잡았다.
“…가람아.”
“혀, 형님.”
“가람아…….”
가람아. 너는 왜 이름마저도 가람이니.
이것도 신의 농간질일까. 나는 평생 묻지 못할 물음을 삼키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 동생. 너는 거기서 잘 지내고 있을까?
“…다 괜찮을 거야.”
형이 깨어나지 못한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 할 텐데. 난 여기서 아득바득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갈게.
“네?”
나는 어리둥절하게 되묻는 가람에게 옅게 웃어주었다. 차오른 그리움은 외로움이 밀어 닮은 존재에게 쏟아졌다.
“저하, 이제 들어가셔야 합니다.”
나는 어려진 나보다도 한참이나 작은 손을 붙잡고 있다 궁인들의 재촉에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가 앉자마자 먹음직스러운 반찬들이 작은 그릇에 담겨 각자의 앞에 놓였다.
왕비님은 별말씀 없이 젓가락을 드셨다. 나도 눈치를 살피다 숟가락을 들었다. 기름이 둥둥 떠 있는 고깃국을 떠먹고 밥도 한 숟가락 떴다. 간간이 왕비님의 식사를 관찰하기도 했다. 그녀의 교육열을 보았을 때 식사 예절은 한참 전에 교육받았을 게 분명했다. 일단은 눈치껏 왕비님을 보고 전생의 예의범절까지 짜내어 흉내 낼 생각이었다.
그녀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면 젓가락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들면 숟가락을 들었다. 나물을 집으면 고기를 먹고 고기를 집으면 나물을 먹고. 그렇게 밥그릇을 절반 정도 비웠다. 이번엔 궁인이 발라 준 생선을 집는데 왕비님이 탁- 소리를 내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는 긴장감에 눈을 마구 굴리다 먹으려던 생선을 내려놓았다. 따라 하는 걸 눈치챘나? 나름 비밀스럽게 한다고 했는데…….
“가람 왕자. 아직도 젓가락질이 그리 엉망이어서 어찌합니까?”
예상과 달리 왕비님은 가람이를 다그쳤다. 놀란 아이가 어설프게 들고 있던 젓가락마저 놓쳤다.
내가 본 가람이의 젓가락질은 네 살치고 뛰어난 축에 속했다. 집는 게 불안하고 젓가락보다 숟가락질 빈도가 높았지만 우선 젓가락을 잡는 법이 발랐다. 그래서 가끔 흘려도 저 나이에 당연하다고만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왕비님 눈에는 차지 못한 모양이었다.
밥을 앞에 두고 이어지는 훈계를 듣다 보니 내가 다 체할 것 같았다. 시무룩해지는 가람이 안타까웠지만 도와줄 방법도 없었다.
“태자 저하. 물이라도 드실래요?”
답답해 보이는 게 드러났는지 어린 궁인이 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괜찮다며 싱긋 웃었다. 그러나 무엇이 왕비님의 신경에 거슬렸는지 이번에는 내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태자! 저 꼴을 가만 보고 놔둡니까!”
깜짝이야.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라 너무 놀라 온몸을 후드득 떨었다.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걸 다스리면서도 대체 뭣 때문에 화내시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다행히 왕비님은 내게 되묻는 대신 직접 ‘그 꼴’을 혼내셨다.
“대체 어느 궁인이 태자에게 그런 격 낮은 말투를 쓰느냐! 태자 저하가 네 동무도 아니고, 존대만 쓰면 예의를 갖춘 것이더냐? 태자, 그대가 이 잡것들을 놔두니 이렇게 기어오르는 일이 발생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존대만 쓰면 다가 아니었나? 난 이미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로부터 존댓말을 듣고 반말을 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아무렇지도 않게 ‘잡것들’이라 칭하고 그걸 묵묵히 듣고 있는 궁인들이라니. 현대라면 9시 뉴스에 떠도 이상하지 않을 갑질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자니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칼 같은 신분제는 아직 익숙지 않았다.
그러나 유모는 그녀의 분노에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왕비 마마. 부디 노여움을 푸소서. 아직 태자 저하께서 어리셔서 극존칭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셨습니다. 이리 낯설어하시면 언어 발달이 늦어질 수도 있다 하셔서 당분간만 모두들 존칭을 조금 낮추어…….”
“그럼 너만 낮추면 될 것이 아니더냐! 태자궁 궁인들이 모두 낮추다니, 태자의 격마저 떨어뜨릴 셈이느냐!”
“…….”
그러나 왕비님의 막무가내식 분노에는 아무런 말도 통하지 않았다. 아이가 어린 탓에 극존칭을 쓰면 혼란스러워하니 당분간만 낮게 통일했다는 게 그리 큰 잘못이었나. 차분히 생각하면 유모의 말이 모두 옳은데 다짜고짜 혼을 내는 왕비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서서 불난 집에 부채질하진 않았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최대한 예스러운 반성의 말을 골랐다.
“어마…마마. 그만 노여움을 푸시지요. 모두 소자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옵니다.”
맹렬하게 궁인들을 비난하던 왕비님이 말을 뚝 멈추셨다. 성공한 건가? ‘소자’가 아니라 다른 말을 썼어야 했나? 최대한 왕비님이 쓰신 어휘 중 골라서 말했는데도 걱정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슬쩍 들어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아닙니다. 태자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갑자기 왕비님이 부드러운 표정을 짓더니 날 달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화를 내며 다그쳐놓고선, 태세 전환이 무섭도록 빨랐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가람이의 태연한 얼굴을 보니 자주 있는 일인 모양이었다.
“태자만 남고 모두들 나가거라.”
이것도 익숙한 일인가보다. 상을 치우고 가람이를 일으켜 나가는 행동이 신속했다. 멍하니 앉아 있는 사이 반만 비운 내 밥그릇이 나가고 난 순식간에 왕비님과 둘만 남게 되었다.
“태자. 이리 가까이 오세요.”
난 눈치껏 그녀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마를 짚은 그녀의 모습은 아까와 달리 전혀 위풍당당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지친 웃음을 보이더니 옆 서랍에서 약과 하나를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긴장이 되어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기에 갖고만 있었다.
“태자. 이 어미가 항상 하던 말을 기억하고 있지요?”
“…….”
기억날 리가 없었다. 첫 질문부터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둘러 약과 포장을 뜯어 입 안에 쑤셔 넣었다. 난 알지만 먹느라 말을 못 하는 것뿐이라는 티를 팍팍 냈다. 그런데도 왕비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까와는 태도가 너무 달라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태자도 익히 알고 있겠지만, 우리 부여는 왕권이 약하답니다. 흉년이 들면 흉년이 들었다고, 홍수가 나면 홍수가 났다고……. 하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왕이 무능한 탓이 되고 목숨을 잃을 정당한 사유가 되었지요. 그대의 할아버님까지만 해도 귀족들이 끌어내려 처형한 것을 알고 있지요?”
“…….”
몰랐다. 고대 왕국에서 왕을 제사장쯤으로 여기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마구잡이로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왕권이 바닥이었을 줄이야.
“이제는 그리하진 않지만, 그것도 다 왕으로 올릴 사람이 부족해서 금지된 것이지요. 즉위했다 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데 그 누가 왕이 되겠다고 나서겠나요? 권력으로 지켜낸 것이 아닌 왕위는 여전히 귀족들에겐 대용품에 지나지 않아요. 하루아침에 갈아치워도 입도 벙긋 못할 처지란 말입니다, 우리는.”
“……어마마마.”
“태자. 왕권을 공고히 해야 합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위엄을 갖춰서 감히 넘볼 수 없게 해야 해요. 저들이 태자의 목숨까지 호롱불 취급하게 할 순 없어요. 불면 꺼질 게 아니라 더 활활 타오를 산불이 되어야 합니다.”
그 모습은 내게 이르기보다 스스로 다짐하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그제야 나는 어린아이에게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 다그치고 과하게 완벽하길 요구하던 그녀의 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식이 그의 선조들처럼 흩날려 사라질까 두려워했다. 엄한 교육은 그녀가 궁 안에 박혀 할 수 있었던 최대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나는 그동안 내가 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는지도 깨달았다. 왕권이란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 어린 태자는 누구의 목표물도 아니었다. 노려서 무얼 할까, 마음만 먹으면 쉬이 갈아치울 수 있는 대상인데. 암살해봤자 분란만 일으키고 다음 왕위에 올릴 적절한 대용품 하나만 사라지게 만드는 꼴이었다.
“태자. 이 어미와 약속해요. 꼭 훌륭한 왕이 되어 왕권을 강화하겠다고.”
“…….”
“응? 태자. 왜 답이 없어요. 그간 했던 모든 약속들은 잊은 건가요?”
왕비님. 전 태자가 아닌걸요. 저는 저를 위해 태자의 평판을 망치고, 주몽의 배신을 도울 생각이에요. 그리고 언젠가는 제 세상으로 돌아갈 거죠.
그리고 나에게 유년을 모두 빼앗길 태자는 그녀가 바라는 왕이 될 수 없을 게 뻔했다.
“네. 어마마마. 꼭 그리할게요.”
그러나 내 손을 부여잡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슬퍼서, 나 하나만 바라보고 이 답답한 궁 안에서 사는 그녀의 인생이 불쌍해서 나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버리고 말았다.
***
왕비궁에서 돌아온 나는 당분간 앓아누웠다.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열이 오르고 자꾸만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하루아침에 부여에 떨어지고, 목숨을 건 퀘스트를 해결하고, 남의 엄마를 만나 자식인 척까지 했으니 그러고도 멀쩡하면 오히려 이상했다.
혼곤한 잠에 빠져서는 끊이지 않는 꿈을 꾸었다. 엉엉 울고 있는 내 동생, 허망한 표정의 친구들, 눈시울을 찍어내는 담임 선생님. 장면들은 집과 병실, 교실을 차례대로 스쳐 지나갔다. 꿈은 엄마의 환히 웃는 얼굴 앞에서야 멈췄다. 그립다. 돌아가야 하는데. 생각하기가 무섭게 엄마의 얼굴이 물에 번진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러지 마. 오랜만에 보는 웃는 모습인데. 그렇게 일렁거리면 마치 우는 것 같잖아……. 내가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이마에 스치는 다정한 손길이었다.
“어머, 태자 저하. 깨셨어요?”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내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놓던 유모가 괜찮냐며 말을 걸었다.
“응…….”
나는 한동안 멍하니 누워 꿈을 곱씹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손안의 모래알처럼 빠져나간 기억은 벌써 희미했다. 결국 일렁이던 엄마의 얼굴마저 지워지고 나서야 나는 몸을 일으켰다. 부지런한 유모는 벌써 죽을 한 대접 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흘 동안 열이 떨어지지 않아서 다들 걱정이 많았어요. 그래도 이제 열은 다 내리셨네요.”
“그래? 다행이네.”
“남 일처럼 말씀하시지 마시고요, 태자 저하. 귀한 몸을 보존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남 일같이 느껴져 우스웠다. 나는 그런 티를 내는 대신 죽그릇을 싹싹 비웠다. 적어도 할 일을 마치려면 몸이 건강해야 한다는 건 맞았다. 나는 빈 그릇을 치우는 궁인을 보다 유모에게 말했다.
“나 나가도 돼? 너무 누워만 있었더니 힘들어.”
“낫자마자 어딜 가신다고 그러세요.”
“별….”
별궁을 간다면 허락해줄까? 알에 꿀이라도 발라놨냐며 핀잔과 의심만 얻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나는 급하게 노선을 틀어 가람이를 핑계로 댔다.
“…건 아니고. 가람이나 찾아가 볼까 해서.”
“어린아이는 병이 옮기가 더 쉽답니다. 왕자 저하를 생각하신다면 오늘은 궁에 계시며 몸을 회복하시지요.”
“알겠어…….”
나는 깔끔하게 알도 같이 포기했다. 내 건강에 극성인 유모가 동생도 못 찾아가게 하는데 별궁에 가는 것을 허락해줄 리 만무했다. 며칠 더 쉬면서 완전히 건강해졌다는 걸 보여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요새 왕자 저하를 많이 찾으시네요. 평소 형제끼리 데면데면하셔서 걱정이 많았는데……. 저번 일도 그렇고, 이리 의젓해지셨으니 더는 염려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나는 움찔했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 눈치 보기 급급한 어린아이 둘이서 서로를 살갑게 챙겨줬을 것 같진 않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다행히 유모는 7살짜리의 변심을 다행이라고만 여기는 듯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나이니 이번에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는 거겠지. 나로서도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게 먹고 자고 가끔 앞마당 거닐기를 한 지 사흘. 드디어 의원으로부터 다 나았다는 확진을 받았다. 데운 물을 자주 마시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라는 말이 있었지만 그건 그냥 예의상 하는 말에 가까웠다.
나는 오전에는 알을 보러 가고 오후에는 가람이를 보러 갔다. 아이는 처음에 날 많이 낯설어하며 잘 다가오지 않았다. 본 척 만 척 하던 형이 갑자기 다가오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어린아이답게 꾸준히 찾아가며 웃어주자 곧 나를 잘 따르게 되었다. 놀아주느라 젓가락으로 옮긴 콩이 대체 몇 개인지. 손아귀가 저릿해 매일 밤 손을 붙잡고 잠들 정도였다.
가람이는 아직 나이가 어려 왕비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왕비님과 같은 공간에서 아예 살고 있다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아이가 엄마랑 사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점차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람이를 보러 몇 시간만 가는데도 갈 때마다 날 붙잡고 훈계하는 왕비님의 교육열을 견디기 힘들었다.
하물며 가람이는 얼마나 힘들까. 저번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왕비님은 아이가 4살이라고 절대 봐주시는 분이 아니었다.
결국 학대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은 아이가 아끼던 새가 죽은 날이었다. 가람이는 뒷마당 나무에 둥지를 튼 새 가족에게 정을 줬었다. 어미 새가 알을 낳은 날에는 뽀얗고 귀여운 새 형제가 태어나면 형님과 저 같을 거라며 수줍게 웃기도 했다.
그러나 몰래 먹이를 주던 것이 걸린 날, 왕비님은 ‘사사로운 것에 정을 주면 아니 됩니다.’라며 둥지 속 새 알을 모조리 깨뜨려 버렸다.
가람이는 그날 왕비님께 처음으로 대들었다가 회초리로 온 종아리가 멍들도록 맞았다. 소식을 듣고 놀란 내가 갔을 때는 이미 체벌이 끝나고 가람이는 이불 위에 엎드려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내게 무엇보다 충격으로 다가온 부분은 가람이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소리 없이 눈물만 가느다랗게 흘렸다. 젖니에 짓눌린 입술이 모조리 터져 있었다.
“가람아……. 왜 그렇게 울어.”
“어마마마가 우, 울면 안 된다 하셔써요. 사내대장부는 우는 게 아니라구…….”
그 말에 나는 분노를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나한테 들이대는 엄격한 잣대는 참을 수 있었다. 태자인 나에게는 불안해하는 왕비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그러나 이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적어도 4살짜리에게까지 지울 부담은 아니었다.
“그거 다 거짓말이야. 사람이 울고 싶으면 울어야지. 안 그러면 병난다?”
가람이 울먹거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아이가 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왕비궁 내에서 왕자에게 그런 소리를 했다간 경을 칠 게 분명했다. 궁인들이 안타까워하면서도 모른 척하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나 역시 이 자리에서 펑펑 울어도 된다고 말해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난 아직 부여가 낯설었고 그만큼 왕비님이 무서웠다. 처음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들킬까 조마조마한 게 자식 몸을 빼앗은 도둑의 마음이었다. 대신 가람의 손을 붙잡고 태자궁으로 갈 정도의 용기는 있었다.
태자궁에 도착한 나는 아이를 뒷마당으로 이끌었다. 곧 궁인이 부탁했던 방석을 가지고 왔다. 그걸 받아 들고선 사람들을 모조리 물렸다. 그러나 흙바닥은 더럽고 딱딱해서 방석 하나로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내 몫의 방석까지 겹쳐 놓고 그 위에 가람을 앉혔다. 나는 앞에 쪼그리고 앉으면 됐다.
낮아진 눈높이에 맞춰 아이의 눈 밑을 다정히 쓸어주었다.
“여기서는 울어도 돼. 마음껏 울어.”
“아니 울 겁니다.”
가람이는 울 것 같은 눈을 하고선 그렇게 말했다.
“왜? 여기도 무서워? 괜찮아. 멀어서 어마마마는 듣지 못할 거야.”
“아닙니다. 그냥, 그냥 이젠 울음이 안 나옵니다. …형님이 이렇게 계시니까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사랑스러웠다. 정말로 아이는 이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반면에 나는 어찌 된 일인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아이를 꽉 껴안았다. 가람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형님?”
“가람아. 우리 이제 태자궁에서 놀자.”
나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가람’이 즐기지 못했던 유년을 채워주기로 결심했다. 멋모르고 작은 고개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
“우움…….”
“가람아, 자?”
내 등을 힘껏 껴안았던 팔에 점차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이 풀린 건지 가람이는 내 품 안에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아침부터 마음고생에 몸 고생까지 다 했으니 지쳤을 만도 했다.
나는 아이를 그대로 안고 일어섰다. 나도 작아서 쉽진 않았지만 궁인들이 있는 곳까지 가는 데는 성공했다.
“태자 저하! 이리 주십시오.”
가람이는 내 품에서 유모 품으로 넘어가는데도 깨지 않았다. 나는 미끄러지려 하는 아이를 서둘러 넘기곤 적당히 앉았다.
가람이가 태자궁에 와서 놀게 하려면 왕비님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
난 정말로 아이를 왕비궁에서 최대한 머무르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아예 여기서 살게 할 순 없었지만 왕비님과 같이 있는 시간을 줄여야 했다. 그러나 대놓고 왕비님께 말씀드릴 순 없으니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적어도 다섯 살은 되어야 왕자궁으로 옮길 수 있다고 들었으니 그때까지만이라도 다른 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으면 좋겠는데……. 나는 빈둥거리며 고민하다가 내리쬐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그 순간, 익숙한 알림음과 함께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서브] 너의 이름은
드디어 아기가 ‘알’을 깨고 나왔습니다. 참으로 어여쁜 아이지만 걸맞은 이름이 없어 궁인들이 머리를 싸매고 있네요. 가서 당신의 작명 센스를 뽐내주세요.
성공 시 보상 : 특별한 존재의 이름을 짓는 영광 획득
실패 시 결말 : ‘이름 없는 아이’로 성장. (기한 : ‘주몽’ 별칭을 얻기 전까지)
예상치 못한 소식을 담고 있는 내용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드디어 주몽이 태어났다! 알을 깨고 나오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지 못한 게 안타까웠다.
그나저나 갑자기 이름을 지어달라니. 나는 새삼 주몽에게 ‘진짜’ 이름이 있었을 거라는데 충격을 받았다. 주몽은 왠지 태어나자마자 ‘주몽’이라고 불렸을 것 같았다. 그가 그런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활을 잘 쐈기 때문임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부여는 아이의 이름을 부모가 짓지 않나? 지난번에 본 유화는 어째서인지 알을 외면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아기의 이름을 모르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가보자. 가서 유화를 설득하든, 내가 이름을 직접 짓든 하면 되겠지. 나는 살그머니 일어나 뒷마당에 가는 척 태자궁을 빠져나왔다. 궁인들은 내가 바로 뒤에 서 있어도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아주 수월한 작업이었다. 유모가 가람이를 왕비궁에 데려다주러 갔기 때문에 더 쉬웠다. 이럴 때마다 느끼지만 새삼 다른 영혼의 존재감이라는 게 정말 대단했다.
별궁의 앞마당은 비어 있었다. 나는 손쉽게 들어가 왼쪽 건물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항상 알이 있던 자리에는 빈 이불뿐이었다.
이제 아기가 태어났으니 엄마 곁에 두었으려나? 그대로 몇 개의 문을 넘어 유화의 방으로 들어갔다. 유화의 침상 옆에서 세 명의 궁인들이 꿇어앉은 채 작은 원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원 틈에 불쑥 몸을 들이밀었다.
“뭐 해?”
“어머나! 태자 저하!”
“깜짝이야! 이리 기척도 없이 어떻게 오셨사옵니까!”
궁인들이 화들짝 놀라 뒤집어졌다. 오시는 티라도 내라며 혼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기척이 없는 건 내 잘못이 아닌데. 나는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대신 편하게 자세를 잡고 앉았다. 예상대로 가운데에 놓인 이불 위에는 아기가 누워 있었다. 보자마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와, 진짜 예쁘다.”
“그렇지요? 저도 갓 태어난 아기가 이리 어여쁜 것은 처음 보옵니다.”
신생아니까 쪼글쪼글할 거란 생각과는 달리 아기는 뽀얗고 통통한 모습이었다. 아마 바로 배 속에서 나온 게 아니라 알에서 꽤 지내다 나와서인 듯했다. 게다가 무슨 잡지에 나오는, 모두가 그리는 아기처럼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경탄이 나올 정도로 어여뻤다.
“신의 아들은 신의 아들이구나…….”
“예? 뭐라고 하셨사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이름은 지었어?”
궁인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퀘스트에 쓰여 있던 대로 난항을 겪고 있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나는 유화를 힐끔 보았다. 이 난리 통에서도 그녀는 꿋꿋하게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아기에게 일절 관심도 없어 보이는 모습에 나는 그녀에게 물으려 했던 말들을 망설임 없이 포기했다. 아기가 알에서 깨어나면 좀 달라질 거란 모두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은 게 확실했다.
대신 나는 내 서브 퀘스트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그럼 내가 이름 지어줘도 돼?”
“예? 아무리 그래도 자식의 이름은 부모가 지어야…….”
“괜찮아! 난 형이니까!”
“태자 저하. 엄밀히 말하자면 저하께선 이 아기와 친….”
눈치 없기는. 다행히 옆에 있던 궁인이 그녀의 옆구리를 세게 찔러 입을 막았다. 저리 들떠 계신데 심기를 거스르지 말자는 수신호가 오고 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 왕족이었다. 이 나라의 태자가 친히 이름을 지어주겠다는데 누가 뭐라 할 거야. 나는 오늘 이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고 갈 생각이었다.
“음….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
나는 손을 휘두르는 아기에게 손가락을 내어주며 고민했다. 그 순간 아까 보았던 퀘스트 창이 다시 한번 눈앞에 떠올랐다.
[서브] 너의 이름은
드디어 아기가 ‘알’을 깨고 나왔습니다. 참으로 어여쁜 아이지만 걸맞은 이름이 없어 궁인들이 머리를 싸매고 있네요. 가서 당신의 작명 센스를 뽐내주세요.
성공 시 보상 : 특별한 존재의 이름을 짓는 영광 획득
실패 시 결말 : ‘이름 없는 아이’로 성장. (기한 : ‘주몽’ 별칭을 얻기 전까지)
다음 ▶
‘다음’? 아까는 보지 못했던 버튼이었다. 나는 궁인들의 눈치를 보다 볼을 긁으려는 척 버튼을 클릭했다. 창이 넘어가며 이름 몇 개가 주르륵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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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름을 추천해드려요.
1. 추모(鄒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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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오행과 발음 오행을 만족시킨 오늘날 최고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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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광고 찌라시가……. 전봇대에 붙어 있을 것만 같은 현란한 문구가 눈을 어지럽혔다. 진짜 여기서 이름을 골라야 해? 퀘스트 창에 있었으니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영 신용이 가지 않았다.
건국 왕의 어릴 적 이름을 이렇게 막 지어도 되는 걸까. 왠지 랜덤 뽑기로 자식 이름을 정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나는 고민을 하다 결국 개중에 가장 나아 보이는 이름을 말했다.
“어……. 중해는 어때?”
“중해, 라 하셨사옵니까?”
“응. 중해.”
나머지는 모두 하나씩 연상되는 단어가 있어서 도저히 아이 이름으론 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한자야 봐도 모르니 적혀 있으나 마나였다.
“어머. 아기님이 웃으십니다. 아기님. 중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세요?”
갓 태어난 아기는 말을 할 줄 몰랐다. 그러나 내 손가락을 꼭 쥐고 꺄륵 웃어대는 모습이 무척 즐거워 보였다. 궁인 한 명이 이미 단단히 홀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희가 그렇게 이름을 쏟아낼 땐 들은 척도 안 하시더니……. 태자 저하가 오셔서 이름을 지어주시니까 단박에 웃으시네요.”
“에이, 그럴 리가. 그냥 우연이겠지.”
태어난 지 하루도 안 됐는데 앞은 보이나? 커다란 눈이 또랑또랑한 게 다 보이는 것 같았지만 난생처음 보는 신생아라 내 착각일 수도 있었다. 궁인 한 명이 반응 없는 유화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화 님. 아기님 이름을 중해라 하여도 괜찮을까요?”
“……마음대로 하거라.”
처음 듣는 그녀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듯 잔뜩 갈라지고 잠겨 있었다. 나야 별궁에 잠깐 놀러 오는 손님이었으니 처음 들은 게 당연하다지만 상주하는 궁인들도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궁인답게 곧 표정을 갈무리하더니 분주히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섰다. 궁인 한 명이 나에게 넌지시 말했다.
“태자 저하. 유모님께서 저하를 애타게 찾고 계실 게 분명하옵니다.”
여기 앉아 있지 말고 그만 너네 궁으로 돌아가란 소리였다. 하지만 나도 다 사정이 있었다. 나는 아직도 아기가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손가락을 흔들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억지로 떼 놓을 순 없잖아.”
힘이 아주 장군감이었다. 아, 장군보다 더 출세할 예정이지. 궁인들이 다가와 떼어놓으려 해보았지만 아기가 입을 움찍거리며 울 태세를 취하길래 화들짝 놀라 포기했다. 듣자 하니 알에서 나올 때조차 울지 않았다고 했다. 정작 붙잡혀 있는 나는 태연한데 궁인들이 더 안절부절못했다.
결국 아기가 손을 놓으면 바로 태자궁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한 뒤 그들을 내보냈다. 아기는 뭐가 그리 좋은지 생글생글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방금 지은 이름을 중얼거렸다.
“중해야. 중해…….”
신이 내준 퀘스트 창이 거기서 고르라니까 고르긴 했는데 솔직히 중해도 썩 마음에 차지 않았다. 차라리 줄여서 ‘해’라고 애칭으로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해야. 건강하게 자라야 해.”
나는 반대편 손을 뻗어 아기의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아기란 건 다들 이렇게 하얗고 예쁘나? 그러나 내가 그렇게 주접을 떨 동안 유화는 단 한 번도 등을 돌려 아기를 바라보지 않았다.
자기 자식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어디가 아픈 걸까. 나는 유화의 병을 걱정했다. 이대로라면 주몽이 성장하는 데 큰 문제가 있을 게 뻔했다.
그나저나 진짜 유모가 나 찾고 있겠는데. 나는 몇 번 더 용을 쓰다가 급기야 해에게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해야. 형 가야 해. 이것 좀 놓아줄래……?”
“흐앵.”
“또 보러 올게.”
다시 오겠다고 네 번이나 더 말하고 나서야 아기는 내 손을 놓아주었다. 우연이라면 무서울 정도였다. 나는 또 붙잡힐세라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가기 위해 방문을 열려 할 때였다. 문밖으로 궁인들의 대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그런데 유화 님 좀 너무하시지 않아? 자기 애인데 어떻게 이름 짓는 거에 관심 한 번 안 두셔.”
“조금 더 기다려보자. 아기님을 내치진 않으셨잖아…….”
“그래도 애 아빠 없이 키우려면 한시라도 빨리 기운 차리셔야 할 텐데.”
나는 그대로 손을 툭 떨어뜨렸다.
해모수! 내가 왜 그를 잊었을까?
나는 서둘러 신이 말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해모수는 그녀를 강간하고 임신시킨 뒤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런 해모수를 탓하지 못하고 자신의 딸을 추한 꼴로 인간 세상에 버렸다. 그리고 낳은 아이가 주몽이었다.
충격으로 손발이 떨렸다. 신에게 들었을 땐 어릴 적부터 듣고 자란 너무 익숙한 이야기였고, 당장 내 현실이 급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씨발, 지금 보니까 해모수는 함부로 폐기 처리도 못 할 엄청난 쓰레기였다. 유화가 배 속의 아이를 낳은 게 대단할 지경이었다.
자신의 자식이라고? 이 아이는 그저 강간범이 남긴 끔찍한 기억이 눈앞에 현신한 것뿐이었다.
나는 느릿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생기를 잃은 채 누워 있는 하백의 딸이 보였다.
“…….”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아기를 치워버리고 싶었다. 당신은 그저 피해자일 뿐이며 책임질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는 위치였다. 난 이방인이었고, 집에 돌아가야 했으며, 그러기 위해선 주몽이 잘 자랄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줘야 했다. 제일 이상적인 방법은 유화를 잘 어르고 달래서 아기를 여느 아이처럼 기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그녀에게 또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힐까.
나는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별궁을 빠져나왔다. 저녁도, 야식도 모두 거른 채 이불에 똬리를 틀고 누웠다. 궁인들이 모두 걱정했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내 아들. 너는 아빠 같은 사람이 되지 마. 항상 기억해야 해, 엄마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끊임없이 맴돌았다. 나는 이불에 고개를 처박고 양손으로 귀를 짓눌렀다. 엄마라면 분명 이 상황에서 유화에게 도움이 될 조언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이런 내가 아니라…….
새롭게 동이 트고 질 때까지 주름진 엄마의 얼굴이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
가람이 꼬까신에 흙만 묻힌 채 돌아가길 서너 번. 새벽달이 기우는 깊은 밤에 나는 태자궁 창틀을 넘었다. 별궁의 낮은 담도 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바르게 누운 몸에 마른 어깨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비우지 않은 밥그릇을 치우고 그녀의 침상 옆에 앉았다. 아기는 다른 방에서 자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유화 님.”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 낮게 그녀를 불렀다. 어떻게 깨워야 하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천천히 뜨이는 그녀의 눈에는 잠기운이라곤 없었다. 그녀가 눈동자만 굴려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깊은 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왔는데도 놀란 기색이 하나 없었다. 삶을 포기한 자 특유의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 눈을 두고 사흘간 많은 고민을 했었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생긋 웃곤 일부러 발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유화 님. 어서 힘을 내셔야지요. 이렇게 밥도 남기시고 그럼 어떡해요.”
“…….”
“아, 오해하실까 봐 그러는데 전 아기 때문에 어서 기운을 차리시라는 게 아니에요.”
그녀의 어깨가 움찔했다. 수없이 들었을 바르고 뻔한 말에는 반응하지 않던 눈에 의아함이 아주 조금 깃들었다.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신랄하게 말을 이었다.
“유화 님의 문제점이 뭔지 아시나요?”
“지금 무슨…….”
“유화 님은 너무 착하셔요. 그래서는 ‘해모수, 그 개 같은 게 내 인생을 망쳤고, 좆같은 그놈의 아이를 빨리 내버렸어야 했는데’라는 걸 깨달았을 땐 유화 님의 청춘이 다 끝나 있을 거예요.”
“…….”
갑작스러운 욕설에 유화의 눈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애써 진정하려 해봐도 자꾸만 북받치는 감정에 말이 빨라지고 숨이 찼다.
“유화 님은 이미 넘치게 할 일을 다 하셨어요. 저라면 배 속의 아이를 낳기는커녕…….”
“…….”
“…그리 인도적이진 않지만, 유화 님도 스스로 모든 책임을 떠맡으려 하지 마세요.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걸 잃으셨잖아요.”
유화가 일어나 앉았다. 처음으로 본 그녀의 앉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 할 말을 그녀가 수용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렇다고 이미 태어난 아이를 죽이라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꼴도 보기 싫을 테니 그냥 궁을 따로 줘서 내쫓아버리세요. 유모 하나만 붙여주면 젖도 뗐겠다, 알아서 살지 않겠어요? 유화 님도 이제 유화 님 생각만 하고 사세요.”
이게 내가 사흘간 고민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유화가 더는 상처받지 않고 그녀의 인생을 살았으면 했다. 물론 그리하면 필연적으로 주몽은 자라나기 어렵게 되겠지. 그 정도는 내가 최대한 해결해볼 생각이었다. 궁만 따로 내준다면 유모와 궁인을 붙여주고 내가 자주 찾아가면 된다.
유화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메마른 입술 사이로 버석거리는 말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수군거릴 거야. 어떻게 어미가 되어서 아이를 저리 잔인하게 내칠 수 있냐고…. 죄 없는 아이가 불쌍타 외치겠지.”
“그럼 유화 님께는 무슨 죄가 있어서 저 아이를 떠맡아야 하나요?”
“…….”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곁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유화가 주몽을 떠맡아 기를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아무도… 아무도 너 같이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어…….”
그녀가 낮게 흐느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여린 살을 파고들었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들 그녀에게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왜 이름을 지어주지 않냐, 한번 안아봐라, 참으로 어여쁜 아드님이시다. 그 말 모두가 폭력으로 다가왔지만 그녀는 폭력으로 느끼는 자신에게 또다시 환멸감을 느꼈으리라.
사실 아이 따위 낳고 싶지도 않았을 텐데. 해모수가 아니었더라면 오늘도 세 자매는 강가에서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있었을 것이다.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실컷 울고 난 그녀가 꺼낸 것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넌 이곳의 아이가 아니구나.”
“……음.”
“그래. 알고 있었어. 저 위에서 자기 핏줄을 인간 세상에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지. 분명 입맛대로 만들기 위해 방법을 찾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너 같은 돌연변이일 줄이야.”
솔직히 들키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어휘부터가 7살이 할 만한 것도 아니고 어화둥둥 떠받들려 자란 태자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주몽의 안전한 거취 확보 다음으로 내가 가장 고민한 부분이기도 했다.
“비밀로 해주세요…….”
이것만큼은 온전히 도박이었다.
유화는 아무 말 없이 생긋 웃었다. 그녀를 알게 된 이후로 처음 보는 미소였다. 아무런 확답도 없었지만 나는 자연히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우린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동이 트는 창가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아무도 제 인생을 찾아가겠다는 사내에겐 못됐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제야 겨우 좀 살아보겠다는 여인에겐 못됐다고 말하는 거지?”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었기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사실 유화에게 한 말은 다른 사람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 사람에겐 이미 한참 전의 일이고, 아이도 결국 키웠지만……. 그래도, 바꿀 수만 있다면 돌아가 바꾸고 싶었다.
“…….”
그러니 내가 유화를 외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애초에 잘못된 기대였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리라. 나는 쓰게 웃었다.
창밖으로 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정말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이번에도 몰래 나간 것이 걸리면 정말 태자궁에 감금될지도 몰랐다. 나는 빠져나가기 쉽게 창문을 완전히 열었다. 창을 넘으며 작별 인사 대신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건넸다.
“그리고 ‘못된 어미’라는 칭호 좀 얻으면 어떻나요? ‘착한 어미’라는 칭호는 유화 님 평판엔 도움은 주겠지만, 인생의 전부를 갉아먹을 거예요.”
“틀린 구석은 없구나.”
“하지만 굳이 남의 입에 나쁘게 오르내려서 좋을 일은 없지요. 유화 님께선 분명 현명한 방법을 아시리라 믿어요.”
돌아본 유화는 여전히 불안이 남아 있는 듯했지만 눈만은 본 적 없던 빛으로 차 있었다. 나는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했던 일이 만족스러운 결과로 끝날 것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며칠 뒤, 아침밥을 야무지게 먹던 나는 궁인으로부터 새 소식을 들었다. 별궁 아기님이 북녘궁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유화는 아기를 떼놓으며 이리 말했다고 했다.
‘신성한 아이를 감히 내가 키울 수 없다. 게다가 출산 후 몸이 좋아지지 않아 아이에게 해를 끼칠까 두렵구나.’
자식에게 해가 갈까 두려워 떼어놓는 어머니라니. 정말 눈물겹지 않냐며 궁인들은 신성한 여인과 그 아이에 대해 떠들어댔다. 나는 홀로 고기를 집어 먹으며 웃었다.
“어서 밥을 다 먹고 북녘궁으로 가봐야겠네.”
떼어 온 사람이 지켜줘야지. 어서 해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유모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됩니다, 태자 저하. 오늘부터 다시 우 대사자님이 오시기로 하셨습니다.”
“……뭐라고?”
“그간 하지 못하셨던 공부를 속히 재개하라는 명이십니다.”
……망할 태자의 일상이 돌아가기 시작하지만 않았더라도 분명 그리했을 것이었다. 잠시 뒤, 나는 공부방에 앉아 단정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녕 글을 삼 주 만에 싸그리 몽땅 까먹으신 겝니까!”
나는 핏대를 올리며 뒷목을 잡는 할아버지 앞에서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