結 : 맺음
화창한 푸른 하늘에 색색의 지연(紙鳶)들이 날아올랐다.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독수리, 나비, 방패 모양을 한 지연이 바람을 타고 춤췄다.
황궁의 서쪽에 위치한 비원(秘園)은 연줄을 하나씩 손에 쥔 아이들과 그들을 보살피는 유모와 궁녀, 태감들로 북적거렸다.
그리고 흥금정(興錦亭)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는 진혁위는 흐뭇하게 웃었다.
사흘 전이 청명이었다. 연과 함께 한 해의 액운을 날려 보내는 청명절 행사에 감동한 것은 진혁위의 셋째 아들인 진동화였다. 얼마 전에 네 살이 된 아이는 직접 연날리기를 하고 싶다며 류희겸을 졸랐다.
여러 가지 이유로 황궁에서는 연이나 풍등을 날려 보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류희겸이 어린 아들에게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진혁위가 우연찮게 보게 되었다.
말수도 적고 욕심도 적은 진동화가 무언가를 조르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어린 아들이 연을 날리고 싶다는데 들어주지 못할 건 없었다. 당장 다음 날에 연날리기를 하자고 약속을 잡았다.
다행히도 날씨가 좋았다. 봄이 한창인 비원은 적당히 바람이 불어 지연을 날리기 딱 알맞았다.
크고 작은 아이들이 복작복작 연날리기를 하는 모습은 어여뻤다. 여덟 살이 되어 전보다 더욱 의젓해진 진윤서조차 방패 연을 높이 날리며 흥분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일찍 폐하께 부탁드려 볼 걸 그랬습니다.”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며 류희겸이 안타까워했다. 류희겸은 아이들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승마도 활도 창도 직접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좋은 것은 다 주고 싶어 했다.
“윤서야 연날리기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자, 좋은 날이니 한잔 마시자.”
“폐하. 태후 마마께서 곧 오실 것이옵니다.”
좋은 날이었기에 술과 음식이 간단히 준비되어 있었다. 진혁위가 술잔을 들어 올리자 류희겸이 만류했다.
원래는 금채영 역시 이 자리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깊은 오수에 들어버린 금채영은 류희겸과 아이들이 마중을 가서야 겨우 일어났다. 기다리지 말고 얼른 비원으로 가라고 류희겸의 등을 떠민 금채영은 조금 늦을 예정이었다.
“괜찮아. 한 잔쯤이야 어마마마께서 무어라 하지 않는다. 잔을 들어라.”
“만수무강하시옵소서. 폐하.”
류희겸이 준비된 잔을 들어 올리고는 축례를 읊었다. 두화주(杜花酒)는 향기로웠다. 진혁위는 류희겸이 술을 살짝 입술에 묻히고 내려놓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바로 작년 여름이었다. 진혁위는 작정하고 류희겸을 취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그가 술을 마시고 기억이 끊겼는데, 남준해 장군으로부터 취하도록 마시지 말라는 명을 들었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굉장했다. 술에 취한 류희겸은 침잠하는 대신에 흥을 내는 성격이었다. 평소에는 거의 볼 수 없는 눈웃음을 치며 다정한 목소리로 좋아한다 속삭이더니, 노래를 부르겠다며 의자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연군가(戀君歌)를 커다란 목소리로 부르고는 그대로 침상으로 향한 다음에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 류희겸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진귀한 광경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진혁위는 재미있는 일이 있었노라 하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하지만 류희겸에게는 심양설이 있었다.
진혁위는 심양설에게 모르는 척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지만 류희겸은 속아주지 않았다.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낸 류희겸은 금주를 선언했다.
제의나 행사, 혹은 연회에서는 최소한으로만 술을 마셨고, 오늘 같은 날에 진혁위가 권하면 입술을 살짝 축일 정도였다. 진혁위가 취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해도 류희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것 때문에 아주 오랜만에 말다툼도 했다. 결국은 한 잔을 조금씩 나누어 마시며 어울려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눈웃음을 치는 류희겸을 보는 일이 요원해지기는 했다. 하지만 진혁위는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든 기회가 오는 법이었다.
“오전에 대장공주님께오서 서신을 보내오셨습니다. 대공주께서 태후 마마께 문후 인사를 올려야 하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아이가 공주부에 든 것이 보름 전이던가? 어마마마께 인사 올릴 때도 되었지.”
얼마 전, 진윤홍은 양녀를 들였다. 선황제의 후궁이었던 양 태빈(太嬪) 소생의 진약금(陳藥檎)으로, 진혁위에게는 막내 여동생이었다.
아이를 낳고 몸이 약해진 양 태빈이 남상별궁(南祥別宮)에서 숨을 거둔 것이 초봄의 일이었다. 이럴 때면 선황제의 다른 후궁 중에 한 명이 진약금을 맡아 키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진혁위는 진약금을 진윤홍의 양녀로 삼았다.
오래전에 남편과 사별한 진윤홍은 삼십 년을 넘게 혼자 살았다. 최근 시댁에서 가문의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 것이 어떻겠냐고 이야기가 몇 번 있었지만 진윤홍은 완강히 거절하고 있었다.
진윤홍이 두문불출하며 칩거하고 있을 때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시댁이었다. 그러다 황제가 된 진혁위가 진윤홍을 극진히 모시자 안면을 몰수하고 끊어졌던 인연을 이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갈등이 깊어지기 전에 진혁위가 움직였다.
어머니를 잃은 열두 살 아이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했다. 혼자 살다 죽겠다는 진윤홍에게는 가족이 있어야 했다. 진혁위는 진윤홍의 반대에도 밀어붙였다. 그리고 설득은 류희겸이 했다.
작은 소란이 있기는 했지만 진약금은 진윤홍의 양녀가 되었다. 여러 준비를 마치고 그녀가 공주부를 찾은 것이 보름 전이었다.
복잡한 종법에 따라 진약금의 성은 바뀌지 않았기에 그녀는 여전히 장공주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진혁위는 데릴사위를 들여 공주부를 시끌벅적하게 만들 계획을 세웠지만, 어쨌든 그건 미래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탐탁지 않아 하던 진윤홍이었지만 조카이자 양녀가 된 진약금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며 환영했다는 것은 여러 경로를 통해 진혁위의 귀에 들어왔다. 아직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신첩이 태후 마마께 말씀드려 날을 잡겠습니다.”
신년이나, 혹은 특별한 행사가 있지 아니하고서야 선황제의 자식들이 황태후에게 문안 인사를 드릴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진윤홍의 딸이 된 진약금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 터였다.
“그 일은 황후에게 일임하지.”
“맡겨주십시오.”
진혁위는 류희겸의 능력을 믿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인생사의 복잡함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진혁위는 진윤홍에게 재혼을 권한 적이 있었다. 민간에서는 합의 이혼도, 그리고 여인의 재가도 아주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진윤홍은 신분이 발목을 잡았다.
그래도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진혁위는 진윤홍에게 류희겸의 양모가 되어주시겠냐고 우회적으로 물었다. 상대는 당연히 류희겸의 양부인 희범영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채로 한참을 침묵하던 진윤홍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평생을 수절하며 살던 공주가 이제 와 재혼을 한다 해버리면 사나운 비난에 다칠 사람이 한둘이 아님이 이유라고 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하는 진혁위로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삶의 선택임을 이해했다.
진윤홍과 희범영은 깍듯이 예의를 지키며 서로를 대했다. 황자들의 외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의 위치에서 덕담을 주고받았다. 그래도 매년 봄이면 희범영은 희일준을 화봉사로 보내어 꽃을 바쳤고, 진윤홍 역시 화봉사를 찾아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었다.
한 번 어긋나 버리면 제자리를 찾기 힘든 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진혁위는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오점이 될 수 없다며, 자신을 버리라고 하던 류희겸이 황후가 되어 옆에 있으니 말이다. 착하고 똑똑한 아들도 셋이나 있으니 복이 많았다.
새삼스러운 기분에 진혁위는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거둬 옆에 앉은 류희겸을 보았다. 흐뭇하게 웃고 있는 류희겸의 옆모습에 심장이 뛰며 기뻤다.
황궁이 커다란 감옥이라도 둘이 함께라면 괜찮을 거라는 류희겸의 말은 옳았다. 둘이 함께라서, 아이들이 있어서, 그리고 어머니를 모시며 살아가니 평범하게 행복해졌다.
류희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류희겸은 용맹하고 무서운 황후가 되어 내궁을 군대처럼 휘어잡았다.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상벌을 엄격하게 하자 태감과 궁녀 모두가 납작 엎드렸다.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래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는 류희겸이 없으면 죽을 것 같았다. 또 홀연히 사라질까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건 류희겸을 황궁으로 들이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평생을 그럴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르자 천천히 바뀌었다. 집착은 여전했다. 곁에 없으면 초조해지는 것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함께 있기에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집중하고 있던 류희겸이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는 눈빛에 진혁위는 조용히 웃어주었다. 그러자 류희겸이 몸을 슬쩍 기울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황후가 예뻐서.”
예쁘다는 말은 너를 좋아한다는 뜻으로 통했다. 처음에 류희겸이 그것을 모를 때는 진혁위를 차게 식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디가 예쁘냐고 항의하는 것이 소리 없이 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웃었다.
“폐하의 상찬에 신첩의 심장이 빨리 뜁니다.”
거기다가 능숙하게 화답을 주기도 했다.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황후가 놀란 모양이군. 손을 잡아주마.”
“예. 부탁드립니다.”
진혁위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수작을 부리는 일은 늘 있었다. 류희겸 역시 별 말 없이 손을 내어주려고 했다. 그 때 마침 높고 낮은 목소리의 탄식이 터졌다.
“앗!”
“떨어진다!”
아이들이 연을 날리는 곳이 소란스러워졌다. 진건해와 진동화의 연줄이 서로 얽히면서 나비 연와 독수리 연이 추락하고 말았다. 연줄이 한참 길었기에 연못 건너 나무들 너머로 사라졌다.
눈치 빠른 태감 하나가 줄을 따라 뛰어가 얼른 연을 챙겨 왔다. 엉킨 줄은 잘라버리고 새로운 줄을 잇는 것은 금방이었다.
독수리 연은 다시금 하늘을 날아올랐다. 그런데 진동화의 나비 연은 어딘가 문제가 생긴 듯 바람을 타지 못하고 자꾸만 바닥에 내리꽂혔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유모가 새로운 연을 권했지만 진동화는 부루퉁히 볼을 부풀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진윤서가 하늘 높이 떠 있는 방패 연의 줄을 내밀었지만 진동화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건해가 내민 연줄도 거절한 진동화는 나비 연을 꼭 쥐고는 정승처럼 서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진동화가 울음을 꾹 참고 있는 게 선명해서 진혁위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럴 때면 아들이 너무 귀여웠다.
아들 셋은 저마다 성격이 다 달랐다. 첫째는 진윤서는 영리하고 성실했다. 맏이답게 아량도 넓었다. 둘째인 진건해는 누구보다 씩씩하고 용맹함에도 눈물이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셋째인 진동화는 애교가 넘쳤다. 그리고 말보다는 몸을 먼저 썼다.
또한 셋째는 형들보다 아끼는 물건에 대한 집착이 강한 편이었다. 손에 쥔 나비 연 말고 다른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분명했다.
진동화의 상태를 알아본 류희겸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신첩이 가보겠습니다.”
“같이 가자. 저러다 울겠다.”
진혁위는 류희겸과 함께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등장에 진동화가 울망울망한 눈을 하고는 나비 연을 들어 보였다.
“부황. 모후. 연이 자꾸 떨어져요.”
“찢어지거나 부서진 곳은 없는데. 한번 볼까? 이런, 여기 줄이 끊어졌구나.”
나비 연을 받아 든 류희겸은 단번에 문제점을 찾아냈다. 옆에 선 진혁위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았다. 연의 중심을 잡아주는 끈이 두 개나 끊어진 탓에 균형이 무너진 것이었다.
“고장 났어요?”
진동화는 당장에 울어버릴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줄만 이으면 돼. 금방 고칠 수 있어.”
“정말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라.”
류희겸은 능숙하게 새 줄을 이었다. 때마침 부는 바람에 연을 띄우자 안정적으로 날아올랐다. 방금 전까지 울기 직전이었던 진동화가 환호했다.
“이제 떠요. 모후. 고맙습니다.”
활짝 웃은 진동화가 연줄을 들고 제 형제들 옆으로 뛰어갔다. 진동화의 나비 연은 하늘 높게 떠서 방패 연과 독수리 연과 함께 춤을 추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금채영이 비원을 찾았다. 마침내 황제의 가족이 모두 모이자 준비되었던 행사가 시작되었다.
나라의 평안과 다복을 바라는 글을 적어 넣은 수십 개의 연들이 일제히 하늘로 치솟아 장관을 이루었다.
청명한 푸른 하늘에 봄바람이 불었다. 좋은 날이었다.
화화몽(火花夢)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