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天一天 : 날마다
대연국의 태자 진윤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활터로 향했다. 진윤서를 뒤따르는 태감의 걸음 역시 덩달아 빨라졌다.
계절은 여름에 가까운 가을이었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이 약해서 활쏘기 딱 좋은 날씨였다.
태자의 일과는 엄격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황제와 황후, 황태후께 문안 인사를 올렸다. 조강과, 주강, 석강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 사이사이에 무예를 익히고 글자 쓰기 연습을 했다.
모후나 부황과 말을 타고 황궁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가끔씩 있는 일이라 일과라고 볼 수 없었다.
하루에 해야 할 일 중에 진윤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말타기와 활쏘기였다. 태자사부와 단둘이 마주 보고 앉아야 하는 공부와 달리 활쏘기도 말타기도 모두 같이 배우는 사형들이 있었다. 모두 진윤서보다 나이가 많지만 그래도 며칠에 한 번씩 어울려 겨루기를 하는 것이 좋았다.
무엇보다 무예 수업이 좋은 이유는 한 번씩 부황이나 모후가 참관하거나 직접 어려운 기술을 알려줄 때가 있기 때문이었다.
말을 타고 달리며 날아오르는 꿩을 명중시키는 부황의 솜씨에 감탄했다. 그리고 금군시위들의 훈련에 참석한 모후가 말을 내달리며 채찍으로 상대의 목을 휘감아 낙마시키는 장면에는 압도되었다.
그날 저녁에 모후께 편술을 배우고 싶다고 부탁드려 보았지만, 아직은 어려서 어렵다는 답변만 들었다. 그래도 진윤서는 포기하지 않았다. 몇 살에 편술을 배울 수 있냐고 정확하게 알려달라고 매달렸다.
모후께서는 부황을 꼭 닮았다고 웃으시고는 일곱 살 생일이 지나면 편술을 가르쳐주겠노라 약속해 주었다. 그전까지는 모후께 창술과 격구를 배우기로 했다.
해야 할 것은 많았고 이상은 높았다. 그랬기에 진윤서는 언제나 부지런했다.
삐뚤빼뚤한 글자를 멋지게 쓰기 위해서는 하루에 수십 장의 종이로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멀리 있는 과녁을 명중시키려면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부황께서는 가끔씩 게으름도 부리고 도망을 쳐도 된다고 하였지만 진윤서는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부황처럼 백발백중의 신궁이 되고 싶고, 모후처럼 채찍을 휘두르고 싶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과녁을 더 멀리 두고 활쏘기 연습을 하기로 했다. 과녁이 멀어지면 처음에는 명중률이 형편없이 떨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나아졌다.
진윤서는 그런 순간을 좋아했다. 어제 못한 것을 오늘 할 수 있을 때 제일 신났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활터에 들어선 진윤서는 뜻밖의 인물이 사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았다. 커다란 덩치, 희끗한 머리, 붉은 관복을 입은 딱딱한 얼굴을 한 사내는 진윤서의 외조부인 희범영이었다.
가끔씩 외조부와 외종숙부가 활터를 찾아오기는 했다. 두 사람 모두 공사가 다망한 분이라 자주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한 번씩 이렇게 만날 때마다 기쁘고 반가웠다.
진윤서는 무서운 얼굴을 한 외조부를 무척 좋아했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관록에서 오는 노장군의 박력이 어린 진윤서의 마음을 매료시켰기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
커다란 목소리로 부르자 희범영과 진윤서의 활 사부인 용고준(龍高俊)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진윤서가 한달음에 다가가자 희범영이 부드럽게 웃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예. 아주 튼튼합니다. 외할아버지. 오랜만에 뵈어요.”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아주 많이 자라셨사옵니다.”
진윤서가 희범영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지난여름에 피서 행궁에서였다. 석 달 전이라서 아주 오랜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때보다 컸다는 말에 진윤서는 활짝 웃었다. 부황만큼 크게 자라는 것이 진윤서의 목표 중에 하나였다.
“외할아버지. 오늘은 전보다 과녁을 더 멀리 두고 연습하기로 했어요. 용 사부님이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칭찬해 주셨어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의젓하다는 소리를 듣고 있기는 했지만 진윤서는 여섯 살 생일을 앞둔 아이였다. 진윤서는 그간의 성취를 뿌듯한 마음으로 희범영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 기뻤다.
*
활쏘기 연습이 끝난 이후의 일정은 석강이었다. 진윤서는 태자부로 가지 않고 영복궁부터 먼저 찾았다.
영복궁에 들자마자 내원에서 모후와 쌍둥이 동생들이 같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후께 먼저 예를 올리기도 전에 동생들이 달려들었다.
“형.”
“형아.”
“잠시만 기다려. 모후께 인사부터 드리고.”
진윤서는 자신의 양다리에 달라붙는 동생들을 다정하게 타일렀다. 진건해(陳建楷)와 진동화(陳潼華). 한 살과 두 살의 중간에 있는 쌍둥이들은 아직 말이 어설펐다. 겨우 몇 마디씩 이어 말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말귀는 잘 알아들었다.
“소자가 모후를 뵈옵니다.”
“잘 왔다.”
다시금 자세를 다잡은 진윤서가 류희겸에게 예를 올리자마자 진건해와 진동화가 소란을 피웠다.
“형. 여기.”
“여기 울어.”
“울어.”
“이거.”
“이거.”
“뚜루루루. 울어.”
“뚜루루루.”
마치 어린 새처럼 열심히 형을 부르는 쌍둥이들은 진윤서를 잡아당겼다.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뒤지고 있던 화단 쪽이었다. 화단에 놓인 대나무통 안에서는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다.
“귀뚜라미?”
“응.”
“뚜루루루.”
작은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에 내원에 나와 있는 류희겸은 물론이고 심양설과 궁녀들은 저마다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진건해와 진동화는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생김새도 성격도 완전히 달랐다. 진건해는 활달한 성격에 자기주장이 강했다. 진동화는 아이치고도 말수가 적었지만 반면에 몸을 먼저 움직였다. 하지만 이럴 때면 둘의 합은 굉장히 잘 맞았다.
둘 모두 형을 무척 좋아했다. 지난봄에 진윤서가 태자가 되어 영복궁에서 태자부로 거처를 옮기면서 문제가 생겼다. 진윤서가 영복궁을 찾는 일은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올리거나, 혹은 낮 동안에 간식을 먹을 때가 전부였다.
진윤서가 어린 동생들과 어울려 노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찾은 진윤서를 보고 흥분해 버린 것이 눈에 보였다.
평소라면 어린 동생들과 어울렸을 진윤서였지만 오늘은 사정이 있었다.
“놀아주는 건 나중에 할게. 형은 해야 할 일이 있어. 모후. 소자가 키를 재고 싶어요. 조금 전에 활터에서 외조부님을 뵈었는데, 소자가 많이 컸대요.”
진윤서를 모후를 향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복궁에서 진윤서가 머물렀던 근복각(勤福閣) 한쪽 기둥에는 그동안 키 재기를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부황께서 아들이 얼마나 크고 있는지 알고 싶다며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태자가 된 이후로 키 재기를 했던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외조부의 말을 듣고서야 기억났다. 그래서 활쏘기 연습이 끝나자마자 영복궁으로 달려왔다.
“그러고 보니 우리 윤서의 키를 재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알았다. 가자.”
류희겸의 허락이 떨어지자 진윤서는 옆에 달라붙어 있는 동생들의 손을 잡았다. 오른손은 진건해를, 그리고 왼손은 진동화를 붙잡고 근복각으로 향했다. 류희겸과 쌍둥이들의 유모들이, 그리고 태감과 궁녀가 우루루 따라붙었다.
반년 가까이 비어 있는 근복각은 깔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진윤서는 침방 안쪽의 기둥 앞에 섰다. 그곳에는 오래전에 생긴 흔적들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진윤서는 아래에서 위로 이어지는 흔적을 보고 빙긋 웃었다. 이곳에 살았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다시 보니까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잠시만 기다려봐.”
동생들의 손을 놓은 진윤서는 기둥에 등을 대고 섰다. 옛날처럼 까치발은 하지 않았다.
“많이 컸어요?”
진윤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류희겸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같이 온 동생들이 진윤서를 따라했다. 진윤서의 양쪽으로 나란히 선 형제들의 모습이 귀여워서 류희겸과 유모들이, 궁녀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형제들의 우애가 깊다. 어린 황자님들이 태자 전하를 너무 좋아한다. 훈훈한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류희겸이 바로 직전에 키를 잰 흔적을 찾아냈다.
“보자. 진짜 많이 컸네.”
“얼마나요?”
“이만큼.”
“와.”
류희겸이 왼손 검지의 마디 하나만큼 내보이자 진윤서는 기뻤다. 이렇게 많이 큰 것은 처음이었다. 류희겸이 작은 가위로 기둥에 흔적을 남겼다.
“할래요.”
“나도.”
진건해와 진동화가 모후를 향해 손을 뻗으며 졸라댔다. 그리고 그 때 마침 굵은 목소리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찌 이곳에 다들 모여 있는 것이냐?”
갑작스러운 진혁위의 등장에 소란스러움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모후를 필두로 근복각에 모인 이들이 분분히 예를 올렸다. 쌍둥이들 역시 진윤서를 따라 허리를 숙였다.
진혁위에게 상황을 설명한 사람은 당연히 류희겸이었다.
“태자의 얼마나 자랐는지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태자부로 옮긴 이후에 이곳에서 키를 잰 적이 없어 그런지 손가락 한 마디만큼이나 컸답니다.”
“매일 봐서 잘 몰랐구나. 어디 볼까? 정말이네. 많이 컸어.”
직접 기둥을 살펴본 부황이 감탄하는 바람에 진윤서는 활짝 웃었다. 부황께서 많이 컸다고 하니까 정말 커진 기분이었다.
“건해랑 동화도 키를 재고 싶대요.”
진윤서는 아직도 자신의 옆에 있는 동생들을 챙겼다. 이름이 불리자 쌍둥이들이 환호했다.
“이거요.”
“할래요.”
활짝 미소를 지은 아이들이 진윤서가 했던 것처럼 기둥에 등을 대고 섰다. 그 모습에 다시 소리 없는 웃음이 번져나갔다.
“건해랑 동화는 부원각(芙元閣)에서 해야지. 부원각으로 가자.”
부원각은 진건해와 진동화의 거처였다. 부황의 말 한마디에 다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모들은 쌍둥이들을 안아 올렸다.
진윤서는 진혁위에게 손이 잡혔다. 이제 태자가 되었기에 예전처럼 부황에게 자주 안기지는 못했다. 그래도 커다란 손이 잡아주는 것은 좋아서 활짝 웃었다.
황제를 위시한 무리가 근복각에서 나와 부원각으로 이동했다. 거처의 기둥을 등지고 서게 된 어린 황자들은 흥겨운 소리를 냈다. 쌍둥이 황자들의 키를 잰 것은 황후였다. 황제는 태자의 귀에 너도 저렇게 작았던 적이 있었다며, 이제는 많이 컸다고 속삭였다.
그렇게 평화로운 오후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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