迎秋 : 가을을 맞이함
가을이 깊은 산길에 붉은 단풍잎이 바람에 휘날렸다.
“워워…….”
호쾌하게 말을 달리던 진혁위는 멀리서 보이는 간판 하나를 확인하고는 속도를 줄였다. 그러자 간판의 문양이 좀 더 확실하게 보였다.
태경성 인근의 얕은 산자락에 위치한 신사는 부적이 영험하다 소문난 곳이었다. 거기다 신사 뒤쪽으로 흘러내리는 폭포가 절경이라 계절을 가리지 않고 방문객이 끊이질 않았다.
그에 맞춰 신사의 산문 양쪽으로는 크고 작은 객잔이 영업 중이었다. 대부분은 차와 음식을 파는 곳이었다. 진혁위의 눈에 띈 곳은 길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 중에 제일 끝자락에 위치한 작고 초라한 다점(茶店)이었다.
다점의 간판에 그려진 문양은 신궁의 예식에서 쓰이는 고문자와 닮아 있었다.
신녀는 죽어서야 신궁에서 나올 수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닌 경우도 왕왕 있었다. 설마, 신녀가 다점을 차렸을까? 작은 호기심에 진혁위는 말을 세워 내렸다. 뒤따르던 호위들에게 기다리라는 수신호를 보내고는 다점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에 놓인 노란 국화 화분이 눈길을 끌었다. 탁자 네 개가 전부인 내부는 좁고 평범했다. 특별한 것은 찾지 못했지만 진혁위는 돌아 나가는 대신에 입구와 가까운 탁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대인. 차를 내어드릴까요?”
찻잎을 고르고 있던 노부인이 다가왔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부인의 모습은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의복도 장신구도 미묘하게 낯설었다. 특히 길게 늘어뜨린 목걸이가 그랬다.
굳이 따지자면 북방의 풍습이라고 할 수 있는 긴 목걸이의 구슬마다 간판에 그려진 문양과 닮은 것들이 새겨져 있었다. 신궁의 신녀라기보다는 북방에서 흘러들어 온 무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이 없군. 먹고살 만은 한가?”
“예. 그러하옵니다.”
“점을 보나?”
충동적으로 물은 것이었다. 그런데 주름 가득한 노부인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알고 오신 분은 아닌 듯하옵니다.”
“모르고 왔는데. 이걸 보니 알겠더라고.”
진혁위는 손가락 끝으로 목걸이를 가리켰다. 그러자 노부인이 빙긋 웃었다.
“소인의 모친께서 주신 거랍니다.”
“그래서 점은?”
“무엇을 알고 싶으신지요. 대인.”
노부인이 부정할 거라고 생각했던 진혁위는 잠시 멈칫했다. 다점에 든 것부터 반쯤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점을 보냐고 물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막상 무엇이 궁금하냐는 질문을 받으니 할 말이 없었다.
무엇이 알고 싶어져서 이곳에 들었을까.
“그가 왜……. 아니 됐다.”
무의식중에 류희겸이 왜 나를 배신한 것이냐고 물으려 하던 진혁위는 중간에 말을 끊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이미 죽은 사람의 의중을 산 사람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사실 제정신이 아니기는 했다. 멀쩡한 얼굴로 황제 노릇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속은 시커멓게 곪아갔다. 오늘도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소수의 호위와 함께 사냥에 나섰다. 잠시 기분 전환은 되었으나, 또 이렇게 그리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대인께서는 정인을 잃으셨군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으니 자릿세라도 내려고 품속의 주머니를 찾던 진혁위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공손히 서 있는 노부인이 주름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요사스러운 소리를 하려거든 그만둬라.”
“그분을 다시 만나고 싶으십니까?”
작은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매일 밤 죽어가는 그를 끌어안고 죽지 마라 외치는 꿈을 꿨다. 눈을 뜨면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다.
후회와 분노가, 그리움이, 미련이 진혁위를 갉아먹었다. 다시 보고 싶었다. 류희겸을 다시 만나 왜 그랬느냐고 묻고 싶었다. 끌어안고 싶었다.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망상이었다. 이제 류희겸은 없었다.
“헛소리.”
진혁위는 피가 역류하는 느낌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다점을 나왔다. 손가락에 끼고 있던 아무 반지를 빼어 탁자 위에 올려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분을 다시 만나실 겁니다. 미천한 점복이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인연을 놓치지 마십시오.”
등 뒤에서 노부인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진혁위는 듣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다시 만나다니. 그녀는 아주 노련한 사기꾼이었다. 죽은 사람은 오로지 꿈에서만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현실에서 만나게 된다면 환상일 터이니, 그건 자신이 미쳤다는 증거이리라.
진혁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에 올라 다시 숲길을 달렸다. 가을바람은 상쾌했지만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리움이 쌓이면 독이 된다. 매일같이 독을 들이키고 있으니 오래 지나지 않아 질식하여 죽을 것이다.
홀가분해지겠지.
죽음 이후를 생각하며 진혁위는 더욱 박차를 가했다.
*
선잠에서 깨어나던 진혁위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서탁 위에 놓인 붓통과 연적, 종이 등을 보아하니 편전이었다. 조금 전까지 말을 달리고 있던 자신이 왜 여기에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기억이 뒤죽박죽 뒤섞였다. 정확히는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꿈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다점에서 사기꾼 노부인을 만난 기억은 또렷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다시 류희겸을 만난 것은 믿기지 않았다.
어찌 사람이 다시 생을 반복해서 살 수 있을까. 그리고 류희겸 역시도 지난 생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은 너무 형편 좋은 꿈이었다. 오해를 풀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자신은 황제가 되고, 그는 황후가 되는.
그것이 꿈이라고? 너무 간절히 바라기에 꿈을 꾸었다고? 이토록 기억이 생생한데?
허무함과 무력함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진혁위가 편전을 나서려는데 막 찻잔을 들고 오는 우소진과 마주쳤다.
“폐하. 어쩐 일이시옵니까?”
“류희겸은?”
“예?”
“황후 말이다. 어디에 있느냐?”
제 입으로 물어놓고는 절로 헛숨이 삼켜졌다. 사기꾼 노부인을 만났던 날까지 황후는커녕 후궁전에 사람 한 명 들이지 않았다. 대신들의 성화가 빗발쳤지만 꿋꿋하게 내쳤다. 환몽을 꾸고는 황후를 찾고 있는 자신에게 광증이 생긴 것인지도 몰랐다.
“영복궁(永福宮)에 계실 것이옵니다. 오늘은 다른 일정이 없는 것으로 알고……. 폐하.”
진혁위는 우소진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걸음을 옮겼다. 영복궁은 황후의 거처였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분명 류희겸이었다.
편전을 나와 몇 걸음 걷자 머리가 맑아졌다. 영복궁이 있는 방향에서 류희겸의 기척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제 음인이 된 류희겸이 어디에 있는지 마음만 먹으면 알 수 있었다.
긴장으로 뻣뻣해진 뒷목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그러나 아주 안도하지는 못했다. 머리로는 저곳에 류희겸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지만, 놀란 가슴은 진정되지 않고 계속 뛰었다.
“폐하. 황후마마께 연통을 넣으오리까?”
“아니다. 짐이 직접 영복궁으로 가겠다.”
눈치 빠른 우소진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하지만 진혁위는 고개를 저었다. 류희겸을 이곳으로 부르는 것보다 자신이 직접 가는 것이 더 빨랐다.
악몽 아닌 악몽이 찾아든 것은 오랜만이었다. 편전에서 북서쪽. 영복궁까지는 한 식경이면 충분했다.
*
황궁은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길이 바둑판처럼 이어져 있었다. 편전에서 영복궁으로 가는 길모퉁이를 돌아선 진혁위는 뜻밖의 인물과 조우했다. 통통하고 발그레한 뺨과 선명한 눈이 예쁜 아이였다.
진윤서(陳錀徐). 진혁위의 첫째 아들이었다.
“윤서가 아니냐?”
“부황을 뵙습니다. 강녕하셨습니까?”
작은 다리로 단숨에 진혁위 앞에 선 진윤서가 정중히 예를 올렸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이는 어려도 의젓했다.
“일어나라. 어디를 가는 것이냐?”
“낮 공부를 끝내고 모후께 인사드리러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 나도 영복궁으로 가는 길이다. 같이 가자.”
“예.”
“오랜만에 안아보자.”
진혁위는 웃으며 답하는 진윤서를 안아 올렸다. 가을에 태어난 아이는 또래보다 몸집이 큰 편이었다. 그래도 품에 안으면 한없이 가볍기만 했다. 한 팔에 안긴 진윤서가 불편한 듯 꾸물꾸물거렸다.
“왜? 불편해? 업어줄까?”
“괜찮습니다.”
“우리 윤서가 너무 가볍다. 밥을 많이 먹어야겠어. 그래야 쑥쑥 크지.”
“예. 부황.”
진혁위는 조용히 대답하는 진윤서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면서 걸었다. 의젓함은 첫째의 덕목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첫째 아들은 그 정도가 심했다.
어려서부터 잘 울지 않는 아이였다. 달리다 넘어져도 혼자서 벌떡 일어나곤 했다. 이것저것 가리는 것이 없이 무던하였고, 떼쓰는 일도 거의 없었다. 유모들은 이렇게 순한 아이는 거의 없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러다 올해 봄에 쌍둥이 동생들이 태어나자 더욱 어른스럽게 굴기 시작했다. 살갑게 애교를 부리던 아이의 말수가 부쩍 줄었다. 안아달라는 소리도 이제 하지 않았다. 겨우 다섯 살인데 말이다.
황제의 적장자다운 행동이라고 하지만 진혁위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종종 이렇게 기회가 되면 일부러 안아 들어 올렸다. 류희겸은 편애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이제 겨우 일어섰다가 주저앉기를 반복하는 쌍둥이들보다는 또랑또랑한 첫째 아들이랑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좋았다.
“오늘은 주강에서 무엇을 배웠더냐?”
“논어요. 배움만 있고 생각이 없으면 망령되고, 생각만 있고 배움이 없으면 위태롭다고 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면서, 배운 것을 어찌 쓸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 윤서는 아직 어리니까 우선은 배우는 게 먼저다. 아, 그렇지. 전에도 말했지만 공부하다가 힘들면 몰래 도망쳐도 돼. 열심히 놀다가 혼나고, 그리고 다시 공부하면 되니까.”
“소자는 열심히 공부할래요.”
진혁위는 어린 아들을 타락의 길로 살살 꼬여 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착하고 심지가 곧은 아이는 류희겸을 닮았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이고 사랑스러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영복궁까지는 금방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심양설을 비롯한 궁녀들이 내원에 가득한 국화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황제가 적장자를 안고 나타나자 심양설이 제일 먼저 나섰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홍복을 누리십시오.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황후는 어디에 있는가?”
“후원에 계십니다.”
“연무장에?”
“예. 그러하옵니다.”
류희겸은 만삭이었을 때 황귀비가 되었고, 그리고 첫째 아들인 진윤서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가 되었다. 반대가 엄청났지만 그만큼의 지지도 있었기에 진혁위는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리고 진혁위는 류희겸이 아이를 낳기 전부터 영복궁을 보수하라 명했다. 후원에는 작은 개인 연무장도 만들게 했다.
지금껏 진혁위는 류희겸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주었다. 보석과 장신구, 비단 등의 값비싼 것들 중에 류희겸이 가장 반긴 것은 혼자서 쓸 수 있는 개인 연무장과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거창이었다.
“아이들은?”
“낮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황자님들을 부르오리까?”
“아니다. 자고 있는데 깨울 필요는 없다. 황후를 보러 가겠다.”
진혁위는 진윤서를 안은 채 후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류희겸이 용맹하게 목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부지런한 류희겸은 거의 매일같이 목봉을 들고 단련을 하곤 했다. 검은 무복을 입고 신중하게 보법을 밟는 류희겸의 기세는 날카롭고 묵직했다.
진혁위는 저도 모르게 류희겸을 처음 보았던 날을 떠올렸다. 피투성이가 되어 절박하게 검을 휘두르는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어지러운 꿈을 꾸고 류희겸을 보기 위해 이리 달려 온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 여기에 있었다. 그것도 아주 행복한 생이었다.
진혁위가 연무장 가까이 다가가자 류희겸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목봉을 대기하고 있던 태감에게 맡기고는 진혁위를 향해 절을 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얼른 일어나라.”
“윤서와 어찌 같이 오셨습니까?”
“오는 길에 중간에서 만났다. 윤서도 모후께 인사드려야지.”
진혁위는 품에 안고 있던 진윤서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아이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
“소자가 모후를 뵈옵니다.”
“주강을 마치고 오던 길이더냐?”
“네.”
“때맞춰 폐하께서도 오셨으니 함께 간식을 먹자. 네가 좋아하는 홍시가 들어왔단다. 홍시 좋아하지?”
“네. 홍시 좋아해요.”
류희겸이 활짝 웃는 진윤서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진혁위는 새삼스러운 감동에 빠졌다.
제 손등을 꼬집지 않아도 이제 이것이 현실임을 알았다.
“폐하께서도 홍시를 좋아하시죠?”
진혁위는 그렇지 않냐고 묻는 류희겸에게 다가가 와락 끌어안았다. 품 안에서 살짝 굳어버린 사내에게서 체열이 느껴졌다. 좋은 향기는 여전했다. 시리고 날카로운 두려움은 가셨다. 하지만 류희겸을 끌어안고도 그리움은 남아 있었다.
“폐하?”
“안고 싶어서 안았다.”
“예. 이제 차를 마시러 가셔야지요.”
“좀 더 이렇게 있으련다.”
제 말대로 진혁위는 한참 동안 류희겸을 끌어안았다. 자주 있어왔던 일이기에 진윤서도, 그리고 영복궁의 궁인들도 황제를 위하여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
다과회는 화기애애하기 그지없었다. 달콤한 홍시가 분위기를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 제 몫의 차와 간식을 모두 먹은 진윤서는 활 연습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활짝 열린 창 너머로 진윤서가 영복궁을 완전히 나가는 것을 확인한 진혁위는 슬쩍 류희겸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윤서가 요즘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윤서가요?”
“형이 되었다고 의젓해진 것까지는 좋은데, 이제 안아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공부도 너무 열심히 해. 저 나이 때면 공부하기 싫다고 떼도 쓰고, 울기도 하고, 사고도 치고 그러는 거잖아. 원래 점잖은 편이기는 했지만 요즘은 안쓰러울 지경이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진혁위의 설명에 류희겸은 설핏 웃었다. 윤서가 점잖다니. 류희겸은 첫째 아들에게 속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진혁위의 걱정과 달리 진윤서는 평범한 개구쟁이였다. 점잖게 구는 것은 진혁위 앞에서만 그랬다. 쌍둥이들이 태어나고 형이 되었으니 이제 의젓해져야 한다는 진혁위의 말 한마디에 내숭을 떨기 시작했다.
진윤서가 제 아버지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은 류희겸 앞에서 천자의 훌륭한 아들이 될 거라고 다짐하기까지 했다.
진혁위 앞에서는 얌전히 굴었지만 류희겸에게는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재잘거리기를 즐겼다. 전처럼 업어달라고 애교를 부리거나, 혹은 말을 타고 싶다고 떼를 쓰다가 거절당하자 부루퉁히 볼을 부풀리고는 뛰쳐나간 적도 있었다.
모든 진실을 진혁위에게 밝히고 싶었지만, 그래도 애쓰는 아들을 위해 류희겸은 적당히 모르는 척해 주었다.
“아직은 개구쟁이입니다. 며칠 전에 새를 잡겠다고 나무에도 올라갔는 걸요.”
“하하하. 나무에 올랐다고?”
류희겸의 폭로 아닌 폭로에 진혁위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무에 오를 정도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나무를 잘 탑니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말을 들을까 모르겠습니다.”
“힘이 넘치니 나무 정도야 탈 수 있지. 아, 황후에게 할 말을 깜빡할 뻔했군. 내일 아침 일찍 사냥을 가야 하니 준비해 두거라.”
“갑자기 사냥이라니.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큰일은 아니다. 진짜 사냥을 가는 것도 아니고. 태경의 남서쪽에 있는 함월산 중턱에 신사가 하나 있다. 부적이 영험하다고 소문난 곳인데, 신사 뒤에 폭포도 있어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이다. 산문 양쪽으로 객잔과 다점이 여럿 있고. 그곳에 만나 볼 사람이 있다.”
거기까지 말한 진혁위가 손짓을 하여 시립하고 있던 우소진과 심양설을 내보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류희겸은 바짝 긴장했다.
사냥을 핑계 삼아 황궁 밖으로 나가 만날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중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화진국에서 대연국으로 넘어온 연림군 장수들이었다.
누명을 쓰고 광산과 염전에서 노역을 하고 있던 이들을 빼돌린 것은 진혁위였다. 목숨을 건진 이들은 저마다 살 길을 찾았다.
남준해 장군의 누명은 벗겨졌지만 연림군 출신으로 군부에서 출셋길에 들지 못할 게 뻔했기에 대부분은 대연국에 정착했다. 몇몇은 상인을 따라 서역으로 떠났고, 또 몇몇은 고향을 찾아 다시 화진국으로 돌아갔다.
황제의 귀비가 되어 입궁한 류희겸은 그들 중에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그저 편히 정착할 수 있게 금전을 보내고, 잘 살고 있다고 한 번씩 진혁위나 고영수에게서 전해 들을 뿐이었다.
다들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진혁위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류희겸은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를 만나야 합니까?”
“이전에 황제가 되고 함월산으로 사냥을 갔다가 작은 다점에서 웬 노부인을 만났다. 북방의 장신구를 한 노부인이었는데, 너를 다시 만날 거라고 했어. 그때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너는 이미 없었으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억났다. 그래. 황후에게 축례를 해주었다는 무녀가 아닌가 싶다.”
“……?!”
“제법 거리가 있는 곳이라 지금 가기에는 시간이 애매해. 내일 일찍 가자. 가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자.”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얼어버렸던 류희겸은 진혁위가 손을 잡아주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매일같이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탓에 능하족 무녀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능하족의 무녀는 신의 계시를 받아 남서쪽으로 갈 거라고 했다. 태경은 초원의 남서쪽이었다.
그녀가 태경에 있다고? 이렇게 가까운 곳에? 깨달음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놀라지 마라. 세상에는 기이한 일이 많이 일어나지만, 이유가 있지. 몇 년 전, 황후의 빈 궤짝에 황금이 채워진 것은 용이 은혜를 갚은 거라며? 너도 나도 다시 살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첩은…….”
“말하거라.”
“신첩도 지금까지 잊고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다시 만나자 약속해 주셨기에 아무 걱정도 없었고요. 한데 지금은……. 생을 다시 시작하면 윤서를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건해도, 동화도요. 그건 안 됩니다. 무녀를 만나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확답을 받아야 합니다.”
류희겸은 가장 무서운 일부터 떠올렸다. 무녀는 다섯 명의 목숨을 구했으니 다섯 명의 생을 더한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은 여섯 번을 더 살고 있었다.
축례는 빗겨 났다. 여섯 번이 끝이 아니라 일곱 번도, 여덟 번도 있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다음 생에 진혁위를 다시 만난다면 다시 복수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 명의 아이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없다니. 그건 끔찍했다.
“무녀에게 신통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황금을 잔뜩 들고 가자. 신령한 용이 준 것이라고 하면 무녀가 좋아할지도 몰라.”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정리하는 것은 진혁위의 특기였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손을 꽉 붙잡았다.
밤바람이 부는 초원 위에서 축례를 읊던 무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라면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산길은 색색의 단풍으로 물들었다. 신사의 산문 앞은 이른 아침에도 마차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최소한의 호위만을 데리고 황궁을 나선 류희겸과 진혁위는 천천히 말을 몰았다. 헌앙한 두 사내의 등장에 몇몇 사람들이 시선을 주었지만 당사자들은 다른 것에 집중했다.
“저기다.”
류희겸인 진혁위가 가리키는 곳으로 말을 몰았다. 거리 끝에 위치한 작은 다점은 입구에 국화 화분이 놓여 있는 것 말고는 다른 특색이 없어 보였다.
“화분도 간판도 그대로군. 가자.”
“예.”
말에서 내린 류희겸은 진혁위를 따라 움직였다. 다시 무녀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진혁위가 괜찮을 거라고 달랬지만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서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용이 준 황금은 물론이요 귀한 보석도 잔뜩 챙겨 왔다. 만반의 준비를 했음에도 심장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작은 다점 안으로 들어서자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쪽에서 나타난 사람 역시 무녀가 아니라 평범한 인상의 장년 사내였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류희겸은 당황했다. 그래도 티를 내지 않고 진혁위를 따라 입구 가까이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차를 드릴까요? 백차와 청차가 있습니다.”
“차는 됐고. 잠시.”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제지한 진혁위가 품속에서 금전을 탁자 위에 꺼내 보였다. 그러자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진혁위가 올려놓은 금전은 차를 백 잔을 넘게 팔아도 손에 쥘 수 없는 것이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대인.”
“물어볼 게 있네.”
“예? 예. 물어보십시오.”
“자네가 이곳의 주인인가?”
“예. 그렇습니다.”
사내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진혁위와 류희겸이 소리 없이 시선을 마주 보았다. 사내가 주인이라면 무녀는? 류희겸의 의문을 진혁위가 물어보아 주었다.
“사람을 찾고 있다. 목걸이를 길게 늘어뜨린 노부인이 이곳에서 일하고 있을 터인데.”
“아. 추씨 할머니. 알죠. 여기 다점의 전 주인이었습니다. 추씨 할머니 찾아오신 분은 또 오랜만이네. 할머니가 여기 뜬 지도 몇 년 되었습니다. 서역으로 간다면서 가족들 모두 데리고 떠났죠. 한 오 년쯤 되었나? 어디 갔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예전에 할머니가 살던 집도 주인이 바뀌었고요. 저기 장순현에 집이 있습니다.”
사내는 자신이 아는 것을 한꺼번에 모두 말했다. 이렇게 해야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산문을 중심으로 발달한 다점 중에 절반 정도는 복술가가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신사에서 부적을 쓰고, 객잔에서 차를 마시며 점사를 보러 오는 손님들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 추씨 할머니는 용하기로 알음알음 소문이 났었다. 탁자가 네 개뿐인 다점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그런 그녀가 아무 소리도 없이 사라지자 단골들이 난리가 났다. 다점을 찾아와 주인은 어디 있냐며 뒤집어엎는 이들까지 있었다. 대부분은 돈으로 회유를 하며 이것저것 물었는데 금전을 내민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랬기에 사내는 최대한 친절하게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말했다. 금전이 탐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사내 역시도 점복으로 먹고 사는 처지였다. 반쯤은 사기꾼이었지만 그래도 관상과 사주는 조금 볼 줄 알았다. 보기 드문 미남자 두 명은 그냥 봐도 보통 관상이 아니었다. 특히 두 사람 모두 눈빛이 범을 닮았다.
평범해 보이는 검은색 무복은 값비싼 비단이었고,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장신구 하나까지 비범하지 않은 게 없었다. 무엇보다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는 게 제일 중요했다.
사내는 이들이 무림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친절함과 미소를 잊지 않았다.
“추씨 할머니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하. 여기 거리에서 활동하는 복술가 중에 추씨 할머니만 한 분이 없으셨거든요. 손님도 많고 돈도 많이 버셨는데, 갑자기 사라지셔서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류희겸은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했다. 가족 모두 서역으로 떠났다면 상인들을 수소문해 추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과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망설이는 사이에 진혁위가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주인 사내에게 무녀에 대한 것을 이것저것 캐물었다. 정확하게 떠난 시기와, 무녀의 식솔과 가솔들의 숫자, 생김새와 나이까지 꼼꼼하게 알아내고 나서야 주인 사내에게 금전을 던져 주었다.
“나중에 볼일이 있으면 다시 찾겠다.”
“예.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나도 물어볼 것이 있다. 추씨에게 손녀가 있다고? 그것도 쌍둥이?”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류희겸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녀에게는 딸과 쌍둥이 손녀가 있다 했다. 그리고 종복은 셋. 류희겸의 기억에는 손녀가 없었다.
주인 사내는 류희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예. 그렇습니다. 소인이 기억하기로는 딸의 남편이 일찍 죽었다고 했습니다. 배가 부른 채 이곳에 왔지요. 난산이라 거의 죽을 뻔했다고도 들었습니다.”
류희겸은 만약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초원 위에서 만난 무녀의 딸은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기에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때 쌍둥이를 임신 중이었다면 자신이 구한 목숨은 다섯이 아니라 일곱이 된다.
가능성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확신은 할 수 없는 것이 답답하였다.
더 이상 알아낼 것이 없기에 류희겸과 진혁위는 다점을 나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진혁위였다.
“무녀의 가족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보겠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네가 이리 실망한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얼른 돌아가서 건해와 동화를 보러 가자. 아기들을 보면 기분이 풀어질 것이다.”
진혁위의 다정한 위로에 류희겸은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심란함이 많이 가라앉았다.
“예. 아이들이 보고 싶습니다.”
류희겸은 타고 온 말에 훌쩍 올랐다. 정말로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
두 사람이 황궁으로 돌아온 것은 정오가 되기도 전이었다. 낮잠을 자고 있는 쌍둥이들의 얼굴을 확인한 진혁위는 편전으로 향했고, 류희겸은 황후궁에서 밀린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황태후인 금채영은 진윤홍과 함께 경치 좋은 곳으로 불공을 드리러 다니는데 재미를 들렸다. 금채영이 일 년 중 절반 넘게 황궁을 떠나 있으니, 황궁의 살림살이는 온전히 류희겸의 것이었다.
일거리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혼란하니 글이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결국 류희겸은 장부를 내버려 두고는 머리를 짚고 생각에 빠졌다. 최근에 이렇게까지 심란했던 적은 드물었다.
진혁위가 만났다던 노부인이 능하족 무녀인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서역으로 떠나버린 그녀를 찾아 진실을 들을 수는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초원에서 구한 목숨이 다섯이 아니라 복중의 쌍둥이까지 포함한다면 일곱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한 번의 생이 더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싹하다 못해 진정 무서워졌다.
어쩌면 진혁위가 생을 다시 사는 것은 무녀를 만났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확신이 서질 않았다. 모든 것이 모호했다.
진혁위는 사람을 시켜 서역으로 떠났다는 무녀의 가족들을 찾을 거라고 했다. 분명 상인들을 따라 떠났을 테니 무녀를 찾는 것은 아주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악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모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이 밝은 목소리에 끊겼다. 주강을 마친 진윤서가 내전에 들었다. 야무지게 예를 올린 진윤서가 류희겸의 안색을 살폈다.
“아버지. 아프세요? 밖에 나가셨다가 다치셨어요? 아파 보여요.”
진윤서의 눈초리는 제법 매서웠다. 류희겸은 근심을 숨기기 위해 얼굴에 힘을 주었다.
“아니야. 다치지 않았어. 아프지도 않고. 장부를 보다가 잠시 쉬는 중이란다. 윤서가 왔으니 이제 간식을 먹어야겠다. 어제 먹었던 홍시가 아직 남아 있는데, 홍시 먹을까?”
“아니요.”
간식을 좋아하는 진윤서가 고개를 젓는 바람에 류희겸은 깜짝 놀랐다. 최근 황제 앞에서 얌전하게 구는 아들은 기본적으로 활달한 성격이었다. 아플 때 말고는 간식을 싫다고 한 적이 없었다. 불퉁하게 볼을 부풀리며 화를 내다가도 떡을 먹자고 하면 사르르 풀리곤 했다.
간식을 마다하다니. 배탈이라도 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왜 그러느냐? 윤서야말로 아파?”
“안 아파요.”
“그럼 우리 윤서가 왜 이렇게 힘이 없을까?”
류희겸은 아이를 가까이 불러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양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 살이 오른 통통한 볼도 쓰다듬자 그제야 진윤서의 입이 열렸다.
“모후.”
“그래. 무슨 일이냐?”
“소자는 태자가 되기 싫어요.”
모후라고 부를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결국 진윤서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류희겸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것이었다.
얼마 전에 다섯 살이 된 진윤서에 대한 태자 책봉 이야기가 슬슬 나오고 있었다.
황자들은 보통 다섯 살이 되면 어머니의 거처를 떠나 황궁 일각에 마련된 곳에서 지내는 것이 예법이었다. 진혁위는 때에 맞춰 새해가 되면 진윤서를 태자로 책봉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대신들의 의견은 크게 셋으로 갈렸다. 아직도 황제의 장인이 되는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은 진윤서가 이제 겨우 다섯 살이라고 반대했다. 뒤에서는 류희겸의 출신을 문제 삼았다.
또 다른 쪽은 황제의 적장자가 총명하고 명석하다고 하나 이른 태자 책봉은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직 쌍둥이 황자들이 어리고 능력을 알 수 없으니 더 기다려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적극적으로 진혁위를 지지하는 쪽이었다. 진혁위는 후궁전을 채우는 대신에 적장자의 스승들과 사형들을, 그리고 친우들을 심혈을 기울여 선별했다. 황제의 후계자라는 끈을 잡은 이들은 기회를 놓지 않으려고 했다.
진혁위의 의지는 확고했다. 어린 아들을 태자로 삼아 빠른 시일 내에 양위를 하겠다는 꿈에 불타올랐다.
진윤서도 적극적이었다. 부황을 본받고 싶다며 태자가 되어 더욱 열심히 정진하겠다고 한 것이 엊그제였다.
그런데 갑자기 태자가 되기 싫다니. 류희겸은 진윤서를 쓰다듬던 손을 뚝 하니 멈췄다.
“갑자기 왜?”
“그냥, 싫어요.”
아이의 대답은 단순했고 고집스러웠다. 그래서 류희겸은 아득함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삶의 근원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당장에 코앞에 닥친 일이 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진리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
“태자가 되기 싫다고?”
“예. 그리 말하였습니다.”
진혁위가 늦게까지 일을 한다는 소식에 류희겸은 간식을 챙겨 편전을 찾았다. 류희겸이 낮 동안에 있었던 일을 전하자 율황고를 깨물던 진혁위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왜?”
“입을 도통 열지 않아 태감에게 알아보았는데, 태자가 되면 태자궁에서 지내야 한다는 걸 오늘 알았다 합니다. 그때 깜짝 놀라여 황자사부에게 두 번이나 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
“혹시나 싶어 석반을 먹으며 윤서를 살살 달래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폐하도, 저도, 그리고 동생들도 모두 영복궁에서 자는데, 자기 혼자만 태자궁에 자기 싫다면서……. 울지는 않았는데 너무 서운해 하는 바람에 신첩이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웃지 마십시오. 등 뒤에서 식은땀이 다 났습니다.”
부모가 된 것은 처음인 류희겸에게 육아의 모든 것이 새로운 도전이었다. 유능한 유모가 여럿 있었지만 그래도 시행착오를 몇 번이고 겪었다.
진윤서는 순한 아이였다. 가리는 것 없이 잘 먹고 잠투정도 거의 없었다. 건강하기까지 해서 고뿔 한 번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호기심이 많아서 혼자서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자 온갖 사고를 쳤다. 꽃이 예쁘다고 삼켰다가 배탈이 나기도 했다. 어린아이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가르치고, 옳고 그름을 교육시키는 것이 제일 어려웠다.
혼자서만 다른 곳에서 자야 한다며 서러워하는 어린 아들을 위로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첫 전투에서 칼을 놓쳤던 때만큼이나 아득한 기분이었다.
“하하하. 서운해 할 만하지. 그래도 윤서가 다섯 살이 되었으니 영복궁에서 지낼 수 없어.”
“신첩도 그리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알았다고는 하는데, 시무룩해져서는 석반도 먹는 둥 마는 둥하였습니다.”
“태자는 여전히 하기가 싫대?”
“그건 못 물어보았습니다. 내일 폐하께오서 윤서와 한번 이야기해 주십시오. 폐하께서 잘 다독여주시면 윤서도 힘이 날 것입니다.”
태자가 되기 싫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그건 그것대로 난감할 것이다. 하지만 혼자만 영복궁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지내야 한다는 게 싫다는 아이를 위로하는 것은 어려웠다. 이럴 때 진혁위의 도움이 필요했다.
“우리 아들이 착해. 알았다. 내가 한번 불러 이야기해 보겠다.”
“부탁드립니다.”
“황후는 어떤가? 밤잠도 설치고 기대하였는데 무녀를 만나지 못했잖아. 괜찮다고 하지 마라.”
“폐하께서 보내 주신 단 과자를 먹고 쓰린 속을 달랬습니다.”
화제를 바꾼 진혁위가 다정히 손을 잡아 왔기에 류희겸은 웃었다. 태자가 되지 않겠다고 한 진윤서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혁위가 보낸 단 과자가 도착했다. 달콤한 것을 먹고 기운을 내라는 의미였다.
류희겸은 단 과자를 씹어 먹은 후에 한쪽으로 치워둔 장부를 마무리했다. 확실히 단 과자는 효과가 있었다.
“운문형에게 무녀의 가족들에 대해 다시 알아보고, 추적하라 했다. 실마리를 잡았으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능력이 출중하고 입이 무거워 진혁위의 신임을 받은 운문형은 황제의 운검(雲劍)이 되었다. 은밀히 일을 처리하는 데 뛰어난 운문형은 무녀의 행방을 찾는데 최적의 사람이었다.
“운 별장(別將)이 고생하겠군요. 신첩이 생각해 보았는데……, 무녀는 다섯 명을 구하여 다섯 목숨을 더한다고 축례를 내렸습니다. 만약 그때 무녀의 딸이 쌍둥이를 임신하고 있었다면, 신첩은 일곱 명의 목숨을 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맞다. 나도 그리 생각했다. 그래서 남은 두 목숨 중에 하나를 황후에게, 또 하나를 내게 준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희미랑(姬美郞)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군. 찌푸린 얼굴도 서시(西施)처럼 예쁘다. 그래도 근심은 만고의 병이니 털어버려라. 내가 꼭 무녀를 찾아주마.”
진혁위의 추론에 류희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명이 아니라 일곱 명을 구했다면, 그중에 하나를 진혁위가 가진 것일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은 가정일 뿐이었다. 확신할 수 없는 미래에 불안하고도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것은 한순간이었다. 진혁위의 가벼운 농담에 정말로 근심이 사라졌다.
찌푸린 얼굴조차 아름다웠다는 서시를 언급하는 진혁위의 고약한 말솜씨야 오래 경험했기에 그냥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희미랑이라는 단어는 머릿속에 콕 박혔다.
희 자는 자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미랑은 아름다운 낭군이라는 뜻의 애칭이었다.
세상에. 류희겸은 정말 오랜만에 진혁위의 심미안을 한번 따지고 싶었다. 겸이라고 부르던 애칭은 황후가 되자 아랑(阿郞)과 함께 번갈아 불렀다.
아랑. 보통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애칭이었다. 그러시면 안 된다고 해도 네가 나의 낭군이지 않냐면서 진혁위는 꿋꿋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희미랑이란다. 도대체 이런 단어는 어떻게 생각해 내는 것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희미랑이요?”
“황후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서.”
화사하게 웃은 진혁위가 손등으로 류희겸의 뺨을 쓸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손길에 류희겸은 뭔가를 깨달았다.
진혁위에게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듣기 싫다고 하였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자신이 꽤나 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이를 제법 먹은 지금에도 둔한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 자신은 진혁위를 애칭으로 불러준 적이 없구나.
한 번의 깨달음이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한 번쯤은 애칭으로 불러보아라 할 진혁위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이상했다. 자신이 지금껏 너무 무심했던 게 아닌가 반성도 하게 된다.
“신첩이…….”
“응? 왜?”
“그러니까……. 음. 나중에 말씀 올리겠습니다.”
류희겸은 진혁위를 어떤 애칭으로 불러야 할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이런 일에는 재주가 없으니 시간이 필요했다. 적당히 넘어가고 다음을 기약하고 싶은데 진혁위가 문제였다.
“그리 말하면 더 궁금해진다.”
“제대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어차피 내가 알 거 아니냐? 얼른 말하거라.”
“신첩이 놀라게 해드리겠습니다.”
“지금 놀라게 하면 된다.”
재촉하는 진혁위와 작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 우소진이 나타났다. 운문형이 급히 보고할 것이 있어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류희겸과 진혁위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녀를 조사하라 보낸 운문형이 돌아온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진혁위가 운문형을 들라 이르면서 류희겸에게도 남아 있으라 명했다. 조용히 나타난 운문형이 정중히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급한 일이라고?”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추씨에 대해 수소문하는 와중에 다점의 주인이 깜빡 잊고 전하지 못한 말이 있다 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아 급히 찾아뵈었습니다.”
“무엇이냐?”
“추씨가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전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다섯이 아니라 일곱이었고, 일곱 중에 하나는 짝에게 주었다고 말입니다. 다시 반복할 일은 없다고도 하였답니다. 의미심장한 말이나, 그 뜻을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하옵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신은 암어라 여겨지옵니다.”
류희겸은 진혁위를 보았다. 진혁위 역시 류희겸을 보았다. 눈빛만으로도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읽었다. 그것은 암어가 아니었다.
오랜 비밀이 해결되었음을 깨달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 ◇ ◇
구름 하나 없는 가을 하늘은 높고 청명하였다. 그리고 푸른 하늘 아래 진윤서가 꼿꼿한 자세로 장현전 앞에 서 있었다.
“전하. 안으로 드십시오.”
우소진은 정중히 예를 갖추어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진윤서는 장승이라도 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앞을 바라보는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전하. 어디 미령하시옵니까?”
진윤서에게서 심상찮음을 느낀 우소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제의 적장자인 진윤서는 사랑스러운 황자였다. 진혁위의 어린 시절을 꼭 빼닮은 고운 얼굴로 다정하게 말하는 법을 알았다.
황제의 부름을 받고 장현전을 찾을 때면 진윤서는 늘 밝은 모습이었다. 우소진에게도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어깨를 반듯이 펴고 섰으나 어째서인지 진윤서는 힘이 없어 보였다. 우소진이 알기로는 진윤서가 이렇게 축 처진 적은 몇 번 없었다.
류희겸이 쌍둥이를 낳을 때는 심했다. 피를 많이 흘린 류희겸은 하루 내도록 정신을 잃었다. 진혁위는 그때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고 진윤서는 겁먹은 얼굴을 하고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류희겸이 깨고 나서도 진윤서는 이레 동안 영복궁 내전에 들지 못했다.
그때 내원에서 기다리던 진윤서의 얼굴이 딱 저랬다.
황후께서 아프시나? 황궁에서 가장 밝은 귀라고 자부하는 우소진은 류희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 어젯밤에 편전에서 진혁위와 함께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린 것은 우소진도 똑똑히 들었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나 그래도 시무룩해 보이는 어린 황자님에게 마음이 쓰였다.
“태의를 부르오리까?”
“아니야. 괜찮아.”
고개를 내저은 진윤서는 장현전 안으로 들었다. 우소진은 집무실이 아니라 내실로 안내했다.
진윤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셀 수도 없이 지나다닌 곳이지만 오늘따라 낯설어 보였다.
모후께 태자가 되기 싫다고 했을 때는 혹시나 책봉이 미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에 잠들기 전에는 부황께서 실망하시면 어떻게 하나 덜컥 겁이 나고 말았다.
밤잠을 설치다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고 말았다. 부황께서는 할머니께 아침 문후를 먼저 올리고 정전으로 떠난 다음이라 만날 수가 없었다. 모후께서는 부황께서 따로 부르실 거라면서 언질을 주었다.
그때부터 하루 종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강이 끝나고 편전의 태감이 나타나 황제께서 찾으신다 하셨을 때는 드디어 올 게 왔다 싶었다.
못난 황자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지? 진윤서는 천근만근 무거운 마음으로 진혁위 앞에 섰다.
“소자가 부황께 인사 올립니다. 홍복을 누리십시오.”
“그래. 일어나라.”
진혁위가 앉으라고 하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반응에 진윤서는 불길함을 느꼈다. 예상은 했지만 심장이 두근두근하였다.
“황후께 태자가 되기 싫다고 했다며?”
혹시나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진윤서는 공손하게 손을 모았다.
“예. 소자가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진혁위는 폭 고개를 숙이는 진윤서를 보며 웃었다. 아무리 의젓하고 어른스럽다고 해도 아이는 아이였다. 맛있는 간식을 먹으면 기뻐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주눅 들었다.
조그마한 머리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다섯 살이 되어 어머니의 궁을 떠날 때는 아무렇지 않았다. 매일같이 어머니께 문후를 올리니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여겼다.
물론 그렇다고 아들의 서운함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자신도 영복궁이 아니라 황제의 침궁에서만 자야 한다고 하면 같은 반응을 보일 터였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달래기만 할 수는 없었다. 진윤서는 태자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류희겸이 한 발 물러나며 이번 일을 진혁위에게 맡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섯 살 생일이 지나면 황자는 새로운 거처로 옮겨야 한다. 알고 있느냐?”
“예. 알고 있습니다.”
꾸중을 들으리라는 것을 예상했는지 진윤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만큼 목소리도 작아졌다.
“황후를 근심케 한 것이 너의 가장 큰 잘못이다. 그리고 태자가 되는 것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가벼이 입에 올린 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 알겠느냐?”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진윤서의 어깨가 좁아졌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알고 있었다. 부황의 말대로 모후를 근심케 하고 태자의 자리를 두고 가볍게 말을 했으니 꾸중을 듣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어도 막상 부황께 한 소리 들으려니 괜히 억울하고 슬펐다. 그저 자신 혼자만 영복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서운하고 싫었던 것뿐이었다.
눈물이 차오르려고 했지만 꿋꿋하게 참았다. 잘못하고도 우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마. 진윤서. 이리 오거라.”
“예. 부황.”
진혁위의 부름에 진윤서는 주춤주춤 다가갔다. 아래만 보고 진혁위에게 다가가자 진혁위가 진윤서를 덜렁 안아 올려 무릎 위에 앉혔다.
진혁위는 첫째 아들인 진윤서를 유독 아꼈다. 사적인 자리에서 진윤서를 안거나 업고 다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무릎에 앉히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꾸중을 듣고 난 다음에는 특별하기 마련이었다.
뻣뻣하게 굳은 진윤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예전에는 꾸중을 듣고도 안기면 그냥 좋아서 웃었는데 오늘은 그러는 게 힘들었다.
“네가 왜 그랬는지 안다. 서운한 거지? 응?”
“……네.”
다정히 머리를 쓰다듬는 진혁위의 손길에 진윤서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좋아하는 부황에게 꾸중을 듣는 것은 심장이 쿵쿵 뛸 정도로 무서웠다. 하지만 이렇게 안기자 또다시 울고 싶어졌다.
“태자가 되기 싫어?”
“아니요.”
“신년이 지나면 태자 책봉례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겨울에 태자부는 추울 때니까 조금만 미뤄야겠다. 날이 풀리고 봄이 될 때까지.”
“그래도 돼요?”
책봉례가 조금 미뤄지면 영복궁을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진윤서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거의 다 정해져 있는 일을 미뤄도 되나 싶었다.
“조금 늦게 하는 것뿐인 걸. 괜찮아. 봄이 되면 태자궁에 꽃이 많이 핀다. 친구들을 불러서 구경시켜 주면 되겠다.”
“예.”
“나도 다섯 살이 되어서 태후 마마 곁을 떠나 새로운 거처로 옮겼는데, 평소랑 크게 다를 건 없었어. 매일 아침 일찍 문후 인사를 올리고 어마마마와 같이 조반을 먹었고, 낮 동안에는 공부하고 훈련도 하고, 그리고 저녁 문후 올리고 석반을 먹는 건 다 똑같았거든. 윤서도 그럴 거야. 태자부에 가도 얼마든지 모후를 찾아뵐 수 있어. 알고 있지?”
“알고 있어요.”
진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태자궁에 가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잠자리에 들 때 혼자만 멀리 떨어지는 것 말고는. 여전히 조금 싫지만 봄이 되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이거 하나 먹어보아라. 윤서가 좋아하는 거잖아.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진혁위가 진윤서 앞에 떡 그릇을 슬쩍 내밀었다. 다홍색의 떡은 진윤서가 좋아하는 홍시를 넣어 만든 감홍고(甘紅糕)였다.
먹음직스러운 감홍고의 등장에 진윤서는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왜 갑자기 감홍고를 먹으라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것이라 슬그머니 손이 갔다.
홍시맛이 나는 달콤한 떡을 한입 베어 물자 정말 기분이 좋아졌다. 거기다 진혁위가 머리를 살살 쓸어주니까 모든 근심이 사라졌다.
“우리 윤서가 태자가 되면 봄 사냥에 같이 갈 수 있어.”
“진짜요?”
꾸중을 하고 달래주었으니, 이제는 회유를 할 때였다. 이제껏 황궁 밖에 나간 것이 몇 번 되지 않은 진윤서에게는 잘 통했다. 조금 기운을 차리던 아이는 기대에 찬 눈을 빛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말 타는 연습은 잘하고 있지? 봄이 되면 조금 더 능숙해지겠지.”
“스승님이 잘한다고 칭찬해 주셨어요. 그리고 청묵은 정말 순하고 착해요.”
청묵은 진윤서가 진혁위에게서 다섯 살 생일 선물로 받은 말이었다. 검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모색의 아주 잘생긴 말은 순하고 착했다. 어설픈 진윤서의 명령도 잘 들어주었다. 사부님들은 입을 모아 명마라고 말해 주어서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태자가 되면 여러 제의에도 같이 참석해야 할 거야. 힘들 때도 있어. 제의가 길어질 때도 있거든.”
“잘할 수 있어요.”
“그럼. 나도 잘할 거라 믿는다.”
황제의 후계자를 의미하는 태자의 권한은 막강했다. 그리고 그만큼 책임과 의무가 따랐다. 다섯 살 아이가 단번에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일이기에 어려서부터 천천히 체득해 가야 했다.
진혁위가 보기에 자신의 첫째 아들은 제법 괜찮았다. 아니, 꽤 훌륭했다. 애정에 눈이 먼 아버지의 평은 아니었다. 명석하고, 활달하고, 착하고, 강단 있고, 동생들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성실했다. 가끔 고집을 부리기는 하지만 그건 장점이 될 수도 있었다.
옛 성현의 말씀대로 아이들은 부모의 뜻대로만 자라지 않는 법이었다. 그래도 진혁위는 진윤서를 쑥쑥 잘 키워 빠른 시일 내에 양위한다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부황. 이만 모후께 인사드리러 가야겠어요. 모후께 죄송하다고 하지 못했어요.”
현명한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깨달았다. 진혁위는 진윤서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황후께 인사드리고 돌아오너라.”
“다시 와요?”
“윤서 활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보려고.”
진혁위는 한 달에 두어 번씩 시간을 내어 진윤서의 훈련에 참관하거나, 혹은 직접 참여했다. 진윤서는 진혁위가 방문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진혁위의 궁술은 대단하다는 말로 모자랐다. 멀리 있는 과녁은 물론이고 말을 내달리면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꿩을 단번에 꿰뚫었다. 진혁위의 활 실력을 본 날 이후로 진윤서는 활 연습에 매진했다. 활 사부님은 실력이 엄청 늘었다고 칭찬해 주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느긋하게 기다릴 터이니, 서두르지 말거라.”
“예. 부황.”
굳은 얼굴로 내실에 들었던 진윤서는 환하게 웃으며 나갔다. 발걸음은 뛸 듯이 빨랐다. 아이가 사라졌지만 활달한 미소가 남긴 반짝거림이 공기 중에 남아 진혁위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
악몽의 흔적은 사라지고, 오래 묵은 의문은 해소되었다. 착한 아들의 마음 여린 반항도 어렵지 않게 해결했다. 그러나 인생의 고난이란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닥쳐오는 법이었다.
일과를 끝내고 영복궁을 찾은 진혁위는 류희겸의 왼손에 감긴 붕대를 확인하고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두텁게 감긴 붕대는 그저 긁힌 정도의 상처가 아니라는 반증이었다.
“무어냐? 어딜, 얼마나 다친 것이야? 어떻게 다친 것이고?”
예를 올리는 류희겸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운 진혁위는 붕대가 감긴 왼손을 들어 보였다. 진혁위는 다급했지만 류희겸은 느긋했다.
“우선은 앉으세요. 폐하.”
“겸아.”
“신첩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설명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류희겸이 진혁위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기 직전의 진혁위는 얌전하게 의자에 앉았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손을 놓지 않고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닙니다. 옥안인이 붕대를 감아야 한다고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친 것은 운이 나빴습니다. 건해가 가지고 놀던 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밟았다가 휘청거렸습니다. 하필이면 화병을 쳤고, 그게 깨지는 바람에 손을 다쳤습니다. 살짝 긁힌 정도인데 옥안인이 붕대를 꼭 감아야 한다고 이리 만들어놓았습니다. 상처가 얕은 것은 붕대를 풀어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아, 그리고 탕약도 먹었습니다.”
몇 년이나 함께 부대끼며 살아온 탓에 류희겸은 진혁위를 다루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예민해진 진혁위를 달래려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최고였다.
깨진 화병 조각에 손이 베인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화병이 깨지는 요란한 소리와 류희겸의 손에서 피가 펑펑 흐르는 바람에 쌍둥이들이 놀라기는 했다. 하지만 상처 자체는 깊지 않았다.
한때 검과 창을 쥐고 휘두르며 살았던 류희겸의 손에는 크고 작은 흉터가 잔뜩 남아 있었다. 그만큼 다치는 것은 익숙했고 아물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도 예측할 수 있었다. 오늘 상처는 약만 제대로 바르면 금방 나을 거였다.
하지만 옥안인은 야단을 부렸다. 제대로 방비하지 않으면 황제 폐하께서 불호령을 내리실 거라며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꽁꽁 감았다. 거기다 쓰디쓴 탕약까지 지어 올렸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성정을 알기에 과한 붕대도 쓰디쓴 탕약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진혁위가 야단스레 굴지 않았다. 대신에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는 진실을 가늠하듯 하다가 심양설을 불렀다.
“황후가 얼마나 다쳤느냐?”
“처음에는 피가 많이 나시어 걱정하였는데, 소인이 피를 닦고 나자 천천히 멎었습니다. 옥 태의의 말로는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연고를 바르고 탕약을 마시면 금방 낫는다고 하였고, 붕대는 상처가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심양설의 설명은 류희겸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진혁위의 미간은 계속 찌푸려진 상태였다.
“아프지는 않느냐?”
“약간 욱신거리지만 괜찮습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손보다는 어깨가 더 불편하옵니다.”
진혁위를 향해 슬쩍 몸을 기울인 류희겸은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조용하게 속삭였다. 그러자 진혁위가 허를 찔린 듯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 의문과 근심을 해소한 어젯밤의 교합은 격렬했다. 한껏 흥분한 진혁위가 교합 중에 류희겸의 왼쪽 어깨를 아프게 물었다.
교합 중에 순흔과 치흔이 생기는 일은 흔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꽤나 심한 편이었다.
아침나절에 심양설의 도움을 받아 연고를 바르다 거울을 보니 시퍼렇게 멍이 들다 못해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심양설은 폐하께서 너무하셨다고,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진언해야 한다며 걱정했다.
솔직히 류희겸은 아무렇지 않았다. 약간 아프기는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계속 깨물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심양설의 말대로 다음부터 이런 일이 없도록 약속을 받아야 했다. 덤으로 다친 왼손에서 진혁위의 관심을 돌리는 효과가 생겼다.
“미안. 너무 흥분하여 그랬다. 다시는 그러지 않으마. 많이 아파?”
“파랗게 멍이 들고 이빨 자국도 남았습니다.”
“내가 정말 잘못하였다.”
진혁위는 갑자기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라도 된 것처럼 시무룩해졌다. 이럴 때면 다섯 살인 진윤서랑 반응이 똑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연고를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
“그래.”
“태후께서 월해사(鉞海寺)에 불공을 드리러 가는 길에 윤서를 데려가면 어떨까 하고 물어보셨습니다. 월해사에 있는 천년 은행나무를 윤서에게 보여주고 싶다 하였습니다. 하여 신첩도 동행할까 하옵니다.”
류희겸은 화제를 바꾸었다.
진혁위가 제좌에 오르고 황태후가 된 금채영은 황궁을 떠나 있는 일이 많았다. 여러 해 전의 겨울에 류희겸이 금채영에게 순행을 권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봄과 가을에는 풍광이 좋은 전국의 신사와 불사를 찾아다녔고 여름에는 행궁에서 지냈다. 겨울이 되어서야 황궁으로 돌아와 연말과 신년을 보내곤 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여러 곳을 돌아다닐 거라며 의욕이 넘치는 금채영이 월해사에 진윤서를 데려가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곳에 천년이나 된 은행나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월해사를 방문한 금채영은 엄청난 은행나무의 위용에 감동하여 내년에는 반드시 장손과 함께 오겠노라 마음먹었다고 했다.
진윤서는 금채영을 좋아하고 잘 따랐다. 하지만 체력도 기력도 넘치는 아이를 제어하려면 류희겸이 동행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물론 모두 진혁위의 재가가 필요한 일이었다.
잠시 시무룩하던 진혁위가 곧 자세를 바로잡았다. 눈이 반짝거리며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지금 나를 따돌리고. 아니지. 나와 건해와 동화를 따돌리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나도 갈 것이다. 건해와 동화도. 월해사까지는 마차를 타고도 반나절이 걸리지 않지. 하룻밤 자고 돌아오면 되겠다. 가족 여행을 가는 것은 처음이 되겠군.”
류희겸은 들뜬 얼굴을 하고 단번에 계획을 세워버리는 진혁위를 말리지 못했다. 첫 번째 가족 여행. 무척 마음에 드는 단어였다.
진혁위도 금채영도 황궁이 거대한 새장이라고 하였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갇혀 지내는 것만은 아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진혁위와 함께 황궁을 나선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신분을 감추고 태경의 시가지를 거닐기도 했고, 말을 타고 벌판을 달리기도 했다. 마음대로 황궁을 나고 들 수는 없었지만 류희겸은 그것이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래도 가족 여행이라는 울림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겨우 일어서기를 하는 쌍둥이들이 반나절 동안 잘 버틸 수 있을까 살짝 걱정이 들었다. 황제의 행차이니 규모가 커지는 것도 신경 써야 했다.
“일이 커졌군요.”
“좋으면 좋다고 해라.”
“예. 좋습니다.”
“태후께는 내가 말씀드리겠다. 그런데 날 놀라게 한다는 것은 어찌 되었어? 더 기다려야 하느냐? 응?”
이번에는 진혁위가 화제를 바꾸는 바람에 류희겸은 잠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이틀 전부터 진혁위의 애칭을 고민하고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것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연국 제일미남에게 미랑이라고 불러주고 싶었지만 그건 진혁위를 따라하는 것 같아 별로였다. 사실 가장 무난한 것은 진혁위의 마지막 이름자를 쓰는 것이었다.
위위. 하지만 성정에 맞지 않을 일을 하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고민하지 말고 지금 말해라. 얼마든지 놀라주마.”
비밀을 싫어하는 진혁위가 재촉했다. 류희겸은 진혁위를 보다가 시립하고 있는 심양설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빛을 이해한 심양설이 조용히 물러났다.
“심각한 것이냐?”
“아니요.”
“그럼?”
“신첩이…… 신첩이 감히 폐하의 애칭을 찾고 있었습니다. 쉬이 입에 올리기 힘들어 그럽니다. 예. 애칭이라 하였습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진혁위를 향해 류희겸은 애칭이 맞다고 해주었다. 그러자 곧 진혁위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입에 올리기 힘들다니. 그냥 불러라. 뭐가 어려워? 희미랑은 은근히 부끄러움이 많아. 귀가 다 빨개졌어.”
진혁위의 말대로 귀가 뜨거워진 류희겸은 아주 오랜만에 울컥하는 기분을 맛보았다. 말로는 진혁위를 이길 수가 없었다.
“신첩이 부끄러움이 많아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런. 그렇다면 내 이름을 불러보아라.”
“……?”
이번에는 류희겸이 놀랄 차례였다. 진혁위의 이름을? 기억을 더듬어보자 진혁위의 이름을 불렀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왕야, 전하, 당신, 그리고 폐하. 그것이 전부였다.
“불러봐. 혁위라고.”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서방님보다는 낫지 않느냐.”
예전부터 서방님이라고 불러보라고 하던 진혁위가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서방님이나 황제 폐하의 이름이나 부담감은 비슷했다.
류희겸은 여전히 대연국 제일미남이라고 불리는 진혁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감히 황제 폐하의 이름을 부르려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혁위.”
“그래.”
“마음에 드십니까? 서방님.”
“……?!”
한번 마음을 먹자 소리가 나오는 것은 쉬웠다. 깜짝 놀란 진혁위가 곧 사르르 웃는 것을 보자니 잘했다 싶었다.
“귀가 빨개지셨습니다. 폐하.”
“황후 때문에 심장이 마구 뛰어서 그런다. 황후는 사람 속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가 있었지. 큰일이다. 황후에게 예쁨을 받고 싶은데, 손이 아프니 좀 참아야겠어.”
“손은 그다지 아프지 않습니다.”
“유혹하지 마라. 상처가 아물거든 서방님이라고 다시 불러라. 그럼 철썩같이 알아들을 테니까.”
“폐하를 위해 빨리 나아야겠습니다.”
“당연하지.”
작은 실랑이 끝에 류희겸과 진혁위는 서로를 마주 보며 조용히 웃었다. 특별하고도 평범한 하루의 마무리였다.
크고 작은 삶의 굴곡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튀어나왔다. 눈코 뜰 새 없이 하루하루가 바쁘게 지나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닥쳐올 고난과 아픔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행복의 반석이 될 것임을 이제는 알았다. 또한 그 모든 순간에 서로가 함께할 것임을 믿기에 내일을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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