淺春 : 이른 봄
봄 날씨는 변덕이 심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짙은 구름이 가득하여 비를 흩뿌릴 것 같던 하늘은 정오가 지나자 화창해졌다.
이른 꽃을 피우는 나무에 환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의 찬란함은 웅장한 옥좌에 앉아 있는 황제에게 닿지 않았다. 장계를 일독하는 진혁위의 미간은 불편한 심기를 대변하듯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편전 한가운데 서 있던 진영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형제들 중에 가장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이는 누가 뭐래도 진혁위였다. 웃으면 만개한 꽃처럼 화려한 미모를 자랑했는데, 얼굴이 수척해진 지금은 어딘가 위험해 보였다.
황제의 단 하나뿐인 후궁의 회임을 알게 된 것은 한 달 전쯤의 일이었다. 그날부터 진혁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내인 것처럼 웃고 다녔다. 조회도, 어전 회의도 모두 순풍에 돛 단 듯이 잘 풀렸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황제의 미간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황제가 입덧을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처음에는 다들 반신반의했으나 진혁위가 본인의 입으로 직접 입덧을 하고 있노라 말해 버리는 바람에 확정되었다.
대신들은 황제의 총애가 유별나다며 한마디씩 했다. 한동안 후궁전이 비어 있을 수밖에 없구나 하고 납득하면서도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입덧에 시달리는 황제가 배를 곯은 호랑이처럼 예민해지자 다들 몸을 사라기에 바빴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굶주리면 흉포해지는 법이었다. 그건 만고의 진리였다.
진혁위는 빈말로도 인자한 군주라고 할 수 없었다. 대신에 합리적이고 공정했다. 제 일을 잘하고 바보 같은 소리만 하지 않으면 실수를 해도 기회를 주었다. 냉철한 이성으로 신하들을 굴리며 조율하는 데 뛰어났다. 어지간해서는 호통치는 법도 없었다.
그런 그가 요 며칠 사이 부쩍 말이 줄어들면서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진혁위가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진영겸은 내각대학사가 되었다. 한때 제좌를 가지려 했던 형제를 신하로 부려먹는 동생님의 대범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고지식한 진영겸은 맡은 바 소임을 다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황제께서 입덧으로 몸이 상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황제의 개인 보좌라고 할 수 있는 내각대학사의 일은 넘쳐 났다. 여번국의 반란은 수월하게 진압되었지만 급박한 사고는 늘 일어났다. 즉위 초기에 황제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고 알려지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다.
장계를 읽은 진혁위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미간은 여전히 살짝 찌푸려진 상태였다.
“인선은 충분하군. 이대로 하면 되겠어.”
“명 받들겠습니다.”
공식적으로 정무를 처리하는 자리였지만 진혁위는 스스럼없이 진영겸을 대하였다. 반면에 진영겸은 깍듯이 예를 올렸다
“그리고, 8제는 아직도 싫대?”
“아직 나설 때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삼 년이나 지났는데 때가 아니기는.”
진혁위는 가볍게 혀를 찼다. 쓸 만한 인재는 알뜰히 써먹어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는 진혁위는 유능한 형제들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진영겸을 내각대학사에 제수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에 성인이 된 진영서와 진충가는 국경 지대를 순회하며 군의 기강을 다잡게 했다. 아직은 경험이 일천한 어린 형제들을 위한 인선이었다.
진혁위는 바로 손아래 동생인 경군왕 진현도(陳現渡)도 중용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는 무환행궁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겠노라 하며 계속 칩거를 고집하고 있는 중이었다. 진영겸을 보내어 몇 번 의견을 타진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았다.
“조금 더 두고 보시죠.”
“이미 마음의 준비는 끝났을 테니, 교지를 내릴 거야.”
“폐하. 8제가 폐하의 뜻을 알고도 응하지 못하는 것은 분란이 생길 것을 알기에 그런 것이옵니다.”
황친이 정치에 가담하는 것은 황제의 재량이긴 했다. 하지만 대신들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했고 그것은 고스란히 황제의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진영겸의 조언에 진혁위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반대하는 이도 있으면 찬성하는 이도 있지. 형님을 내각대학사로 제수하는 것도 그랬어. 방법은 다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해.”
황제에게 형제란 평생을 견제해야 하는 정적이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진혁위는 그럴 생각이 거의 없었다.
반역, 반란, 모반 등등의 이름이 붙여지는 사건은 시시때때로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황위를 이을 수 있는 황친들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얽힐 수밖에 없다. 불미스러운 일을 미연에 방지할 가장 간단한 방법은 형제들을 치워버리는 것이었지만 진혁위는 그러지 않았다.
욕심이 많고 멍청한 형제들은 이제 없었다. 남아 있는 형제들은 모두 야심보다는 평범한 부귀영화를 바라고 있으니 적당히 부려먹어 주는 것이 황제 된 도리였다. 쓸모 있는 인재란 언제나 귀한 법이었다.
사실 진혁위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토대를 쌓고 있는 중이었다. 황제의 힘이 되어줄 처족 대신에 형제들을 포섭하기로 했다.
그중에서도 진영겸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류희겸에게 말한 것처럼 만에 하나의 순간이 온다면 진영겸에게 모든 것을 떠안기고 튀어버릴 계획도 있었다.
진영겸은 진혁위의 계획을 정확히 몰랐다. 다만 고금의 황제들처럼 형제들을 견제하지 않고 모두 껴안으려는 배포만큼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소신이 경군왕에게 황제 폐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그럼 됐어. 다른 안건이 더 있어?”
중요한 것은 얼추 다 처리되었다. 그래도 달리 할 말이 있을까 여지를 주자, 진영겸이 말을 받았다.
“오늘 오후에 석강이 있사옵니다.”
“그야 알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진영겸의 물음은 온갖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평소 진혁위는 유교 경전을 논하는 경연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신들과 유학자들이 경전의 구절을 빌어 헛소리하는 것을 싫어했다.
과거에 비하여 경연의 중요성이 많이 축소되기는 했지만 명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진혁위는 보름에 한 번 있는 경연에 빠지지 않았다. 대신에 명석한 두뇌와 현란한 말솜씨로 꼬장꼬장한 대신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럴 때면 진영겸이 나서서 진혁위를 진정시키곤 했다.
진영겸은 아주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입덧으로 고생하고 있는 진혁위가 경연에서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진혁위는 진영겸의 걱정을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대로 하면 되지.”
“오늘은 건너뜀이 어떠신지요.”
“보름에 한 번 있는 경연을 건너뛰었다가는 더 귀찮아져. 그래도 걱정이라면 형님이 빨리 끝낼 수 있도록 힘 좀 내주면 좋지.”
장난스럽게 부탁을 하는 진혁위의 미소는 어딘가 위험해 보였다. 진영겸은 왠지 협박당하는 기분이었다.
“소신이 노력하겠습니다.”
협박이든 뭐든, 입덧을 하는 황제 폐하께오서 힘을 좀 써달라고 하니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때였다.
*
“그래. 형님이 무어라고 하더냐?”
붓을 들고 글을 쓰고 있던 진혁위는 조심스럽게 편전 안에 들어서던 우소진에게 캐물었다. 같은 양인인 진영겸의 기척은 꽤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하여 그가 편전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은 금방 알아차렸다.
“정군왕 전하께오서 폐하의 옥체 미령함을 걱정하였나이다.”
“오늘 석강이 있어 그럴 것이다.”
진혁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눈치챘다. 자신이 입덧 때문에 예민해져 있으니 진영겸의 걱정이 컸다. 하니 황제 폐하께 뭐라도 먹이라고 우소진에게 청탁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 결과, 우소진이 진짜 움직였다.
“소인이 화영궁에 기별을 넣어두었습니다. 폐하께서 찾아가실 거라 말입니다. 몸이 무거우신 분께 두 번 걸음하라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청산유수 같은 우소진의 말에 진혁위는 붓을 든 채로 쓴웃음을 삼켰다.
류희겸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진혁위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사내가 되었다. 임산부와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수소문하여 하나씩 준비하는 것이 기쁨이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임신도 출산도 모두 임산부에게 부담을 주다 못해 위험하다고 말이다. 특히 임신 중에 입덧이 제일 고약하다고 한마디씩 더했다.
입덧의 증상은 제각각이었다. 아예 입덧을 하지 않기도 하지만, 임신 시간 내내 제대로 된 음식을 입에 넣지 못하기도 했다.
류희겸은 강건한 육신의 소유자이긴 했다. 그래도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진혁위는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혹여나 하는 우려는 묘하게 빗나갔다. 류희겸이 아니라 자신이 대신 입덧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아주 심각했다.
처음에는 그저 입맛이 없는 줄 알았다. 조반으로 먹은 쌀밥에서 풋내가 나고 생선은 비린내가 심했다. 입가심을 하기 위해 마신 차는 텁텁한 맛이 났다.
약을 먹으면 나아질 거라고 여겼지만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입에 넣는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토해 낼 지경이 되자 태의들에게 진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의 태의들은 한참 동안 논의한 끝에 입덧이라고 조심스럽게 알려 왔다.
아이를 가진 부인이 아니라 부군이 입덧을 하는 것은 유별나기는 하나 아예 없는 일은 아니라고 했다. 문제는 입덧이 끔찍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냄새에 민감해졌고 특히 음식은 역한 맛과 향 때문에 억지로 삼켰다가는 토하기 바빴다.
입덧을 한 지 보름이 넘게 지났다. 묽은 미음과 꿀차로 겨우 버티고 있기는 했지만, 굶주림이 사람을 괴롭혔다.
그나마 류희겸이 곁에 있어야 차든 미음이든 마시고 먹었다. 류희겸에게서 나는 향이 역함을 억눌러 주었기 때문이었다.
조반과 석반은 매일 잠드는 화영궁에서 먹었다. 중반의 경우는 진혁위가 화영궁으로 가거나 류희겸이 편전을 찾거나 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진혁위가 거의 매일같이 바빴기에 대부분은 류희겸이 움직였다.
오늘은 이미 류희겸이 편전을 왔다 갔다. 아직 배도 거의 나오지 않은 임신 초반이긴 하지만, 홑몸도 아닌 사람이 자꾸 움직이는 것은 맞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우소진이 좋은 태감임은 분명했다.
“잘하였다.”
“소인이 가마도 불러두었습니다.”
“이것만 쓰고 가겠다.”
“예.”
진혁위는 잽싸게 상주문을 마무리했다. 사실 배는 그다지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도 평소보다 예민해져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경연에서 성질을 죽이려면 배를 채워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류희겸이 보고 싶어졌다.
*
아무것도 넣지 않은 미음에서는 쌀의 고소함과 담백함 대신에 미묘한 풋내가 났다. 식감도 이상했다. 그럼에도 진혁위는 깨끗하게 그릇을 비워 냈다. 희멀건 미음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것은 지금밖에 없었다.
진혁위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류희겸이 빈 그릇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물었다.
“더 드시겠습니까?”
“아니다. 이거면 됐다.”
“꿀차를 내어 오게.”
류희겸의 손짓에 빈 그릇을 치운 심양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를 내어 왔다. 진혁위는 따뜻한 꿀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꿀은 지나치게 달게 느껴졌고, 꽃향기는 이상했다. 그래도 비위가 아주 상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마지막까지 마셨다.
빈속에 먹을 것이 들어가자 날 선 기분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 생에서는 불면을 밤을 보내며 수면의 중요성을, 그리고 이번에는 입덧을 하면서 원활한 식사가 축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나마 아이를 가진 류희겸이 이런 괴로움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류희겸이 입덧을 하면서 빼빼 말라간다면 지금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속이 뒤집어졌을 터였다.
“폐하. 태후 마마와 대장공주님께서 보내신 서신에 입덧에는 신 것이 좋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특히 매실이 좋대요.”
“매실?”
“예. 한번 드셔보겠습니까?”
류희겸은 눈에 힘을 주며 매실을 강조했다. 친인척을 통틀어 가깝게 지냈던 누이가 없었던 류희겸은 임신도, 그리고 입덧에 대해서도 그저 풍문으로만 들었다.
그랬기에 임신을 하고도 얼떨떨함 말고는 별다른 자각이 없었다. 그저 심양설이 조언하는 대로 격한 움직임은 삼가고 자극적인 음식도 멀리하며 아이가 건강하고 무탈하게 태어나기만을 바랐다.
진혁위가 입덧을 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신기하다가 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는 진혁위를 보자 심각해졌다.
심하게 입덧을 하는 진혁위를 보자 죄책감이 들었다. 보름 넘게 차와 미음만 먹은 남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수척해지는 것이 눈에 보이자 더욱 그랬다.
태의가 지어 올린 탕약은 통하지 않자 류희겸은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여 입덧을 가라앉힐 만한 것을 찾았다. 고영수가 추천한 가물치는 끔찍했다. 가물치 진액을 한 모금 마신 진혁위는 그대로 뱉어 내버렸다. 그리고는 하루 종일 비린내가 가시지 않는다며 괴로워했다.
류희겸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맛이라고 헛구역질을 하는 진혁위에게 연신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입덧에 좋은 음식을 계속 찾아 바쳤다.
청매실절임은 영주에 있는 흥원사에 불공을 드리러 간 진윤홍과 금채영이 알려준 것이었다. 정확히는 진윤홍의 추천이었다.
금채영의 경우 진혁위가 매우 순한 태아라서 입덧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반대로 진윤홍은 입덧이 심하였는데 매실을 먹고 조금이나마 나아졌다고 서신에 적혀 있었다.
다행히도 황궁의 어선방에는 매실절임이 있었다. 매실은 소화에 좋고 진액은 요리에도 많이 쓰인다는 것이 심양설의 설명이었다.
평소 무심하던 류희겸의 얼굴에 간절함이 드러났기에 진혁위는 웃고 말았다. 용종을 품은 것은 류희겸인데, 어찌 보살핌을 받는 것은 자신이 되고 말았다.
매실은 끔찍하게 신맛이 날 터였다. 그래도 초조해 하면서도 기대에 반짝거리는 류희겸을 얼굴을 봐서라도 한 번은 입에 넣어봐야 했다.
“모후께서 추천했다 하니 한번 먹어는 봐야지.”
진혁위의 허락이 떨어지자 심양설이 매실을 가져왔다. 하얀 그릇에는 청매실을 네 등분한 조각이 예쁘게 담겨 있었다.
멋모르고 가물치 진액을 크게 한 모금 마셨다가 낭패를 봤던 진혁위는 젓가락으로 집은 매실 조각을 작게 한입 베어 물었다. 입 안에 온통 신맛이 퍼지다 못해 몸이 꼬일 것 같았다.
“셔…….”
진혁위는 입매를 당기며 한마디 했다.
“역하지는 않으십니까?”
“음……. 역하지는 않아. 그냥 셔.”
아무것도 넣지 않은 미음조차 풋내나 기름 냄새가 나곤 했다. 반면에 매실절임은 매실 특유의 향과 함께 신맛만 났다. 또한 류희겸의 말대로 역하지 않았기에 또 먹을 만했다. 진혁위는 저도 모르게 젓가락을 놀리며 그릇에 담긴 매실 조각을 하나씩 해치웠다.
조각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진혁위의 미간은 찌푸려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평소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에 류희겸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미남은 이럴 때면 더없이 귀여웠다.
류희겸은 옆에 선 심양설과 슬쩍 눈이 마주쳤다. 안도하며 웃고 있는 그녀를 보자니 자신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진혁위가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 내는 것을 보며 류희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매실이 입에 맞으시는 것 같습니다. 더 내어 올까요? 아니, 먹지 마십시오. 신 것을 한 번에 많이 먹으면 속에 안 좋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그건 맞다.”
“괜찮으시면 미음에 한번 넣어보겠습니다.”
“야식으로 먹으면 좋겠다.”
석강은 밤늦게 끝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저녁 식사도 경연 도중에 해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진혁위는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할 테니 야식은 더욱 필요했다.
“아, 그렇지. 도둑들을 다 잡았다지?”
젓가락을 내려놓던 진혁위가 갑자기 화제를 전환했다. 류희겸은 황제의 내탕고에서 귀품을 훔친 궁인들을 쫓고 있었다. 익문사까지 동원한 수사는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도망갈 곳이 없는 태감이나 궁녀를 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다만 훔친 물건을 사들인 업자와 최종적인 구매자를 은밀히 알아내느라 시간이 제법 걸렸다. 지금은 최종 구매자의 자택에 훔친 물건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만 남아 있었다.
진혁위가 그걸 알고 있는 이유는 실질적인 수사를 하고 있는 익문사의 수장인 엄조철에게 보고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이 가능했다. 류희겸은 진중하게 답했다.
“예. 그러합니다. 물건을 사들인 이들이 대부분 신분이 높은 자들이라 확실하게 증거를 찾는 중입니다.”
“확인만 하고는, 죄인을 처벌하는 것은 조금 기다리도록 하자.”
“예. 폐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야지. 네가 지금까지 고생한 일인데, 그러겠습니다 하고 넘어가면 안 되지. 속상하지도 않느냐? 나였다면 얼른 말하라고 채근했을 거라고.”
살짝 눈웃음을 지은 진혁위의 툴툴거림은 익숙한 것이었다. 서로의 성향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오래전이었다.
진혁위는 류희겸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굴었다. 숨기는 것은 귀신같이 알아내며 채근했다. 반면에 류희겸은 진혁위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 굳이 묻지 않았다. 특히 정무와 관련된 일이면 사정이 있으려니 하고 넘어갔다.
“속상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오나,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 그러시는 것 아닙니까?”
“현명한 귀비가 내 속에 들어앉아 있구나. 네 말대로 시기가 아닌 게 맞아. 정확히는 따로 쓸 때가 있어.”
“신첩이 얼른 알려달라 채근할 때군요. 폐하께서 무슨 일에 따로 쓰실 겁니까?”
이번에는 진혁위가 슬쩍 눈짓을 했기에 류희겸은 그에 맞춰주었다. 그러자 진혁위가 흥겨운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을에 태어날 아이는 짐의 적장자가 될 것이다. 왜? 아들이 맞다니까. 몇 번이나 말했지만 장담한다. 귀비는 황후가 될 것인데, 예언 아닌 예언을 하자면 눈치 없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반대하는 놈들이 반드시 나올 거란 말이지. 그중에서도 가장 골치 아픈 자가 바로 설관해(雪寬楷)다. 귀비가 찾아낸 명단은 그때 쓸 생각이야.”
단순하지만 사실은 복잡한 이야기였다.
황제의 후궁전은 여전히 텅텅 비어 있었다. 지난겨울에 금상란이 저지른 사건으로 진혁위는 간택령을 주청하는 자는 간신이라고 천명했다. 그런 연유로 황제에게 간신이라고 찍히고 싶은 신하가 어디 있겠는가.
대신들은 한동안 몸을 사렸지만 그렇다고 권력의 달콤한 유혹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상서령이 용감하게 나섰다. 스스로를 간신이라 지칭하며 간택령을 내려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쳤다.
하필이면 마침 그때 류희겸이 회임을 한 것이 알려지면서 간택령은 또다시 흐지부지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논란의 불씨가 완전히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다.
진혁위가 류희겸을 황후로 삼으려고 한다면 조정은 한바탕 뒤집어질 것이다. 배신자, 변절자, 노비, 타국 출신. 그 모든 것이 류희겸의 약점이었다. 아무리 희범영을 양부로 모시고, 진혁위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하나 공격은 매서울 게 뻔했다.
그중에 가장 선봉에 나설 사람이 종인령 설관해였다. 재작년에 황후와 사사로운 결탁을 하여 귀양을 간 유월춘의 후임자인 설관해는 좋게 말하면 고지식했고 나쁘게 말하면 편협했다.
황친으로서의 자부심이 큰 설관해는 신분과 혈통이 제일이며 모든 것이라고 여겼다. 선황 시절에 황후의 소생인 태자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던 그가 노비 출신에다 변절자인 류희겸의 황후 책봉을 결사반대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발이 넓은 설관해가 황친들을 선동한다면 정국은 혼란스러워질 터였다.
정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여럿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논란을 논란으로 덮는 것이었다.
설관해는 이번에 황궁 내탕고에서 사라진 그림 중에 하나를 사들였다. 정황상 장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지만, 설관해를 압박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거기까지 단숨에 생각을 이어간 류희겸은 빙긋 웃고 있는 진혁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적의 정보를 수집하고 약점을 찾아내어 때를 기다리는 것은 진혁위의 특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정쟁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
류희겸은 자신이 황후가 될 수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진혁위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알기 때문이었다.
“예. 폐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흔들림 없는 류희겸의 대답에 진혁위는 웃었다. 굶주림으로 인한 허기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뿌듯한 만족감이 넘쳐났다.
음인이 된 류희겸이 자신의 곁에 있었다. 류희겸은 황후가 될 것이다. 곧 아이도 태어난다. 자신이 바라던 것이 모두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짧은 깨달음이 감동이 되었다. 그리고 눈앞의 사내가 더없이 사랑스러워졌다.
곧은 눈빛도, 결코 보드라워지지 않을 모양 좋은 손도, 그리고 입덧에 좋은 것을 백방으로 알아보려는 마음도.
“큰일이군.”
“무슨 일이십니까?”
진혁위의 작은 중얼거림에도 류희겸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것도 좋았다. 자신의 정인은 명령을 내리면 당장에라도 검을 들고 전장으로 달려갈 진지한 사내였다.
“귀비가 예뻐서 경연에 가기 싫어졌다.”
“……!”
가벼운 농담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빛이 흐려지는 것도 귀여웠다. 무심한 사내는 여전히 애교가 없었다. 물론 그게 매력이었다.
“경연에 가지 말고 귀비랑 놀까 보다.”
진혁위는 눈으로 웃으며 은근하게 말했다. 반쯤은 장난이었고, 또 반은 진심이었다. 경연 따위는 내팽개치고 이대로 류희겸과 놀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애첩에 빠진 황제가 어찌 나라를 말아먹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류희겸이 그걸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신첩 때문에 경연에 가기 싫다 하시면 안 됩니다.”
딱딱한 류희겸의 대답은 진혁위의 예상에서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흥겨워졌다.
“하하하. 물론이지. 성군이 되겠다고 귀비랑 약조를 하였으니 어찌 게으름을 부릴까. 경연을 마치고 돌아와 귀비와 재미있게 놀아야겠다. 별거 아니다. 조금만 빨겠다. 이번에는 조심하마.”
마지막 말은 류희겸만 들을 수 있도록 몸을 기울여 귓가에 속삭였다.
임신 초기에는 산부와 태아의 안전을 위해 가급적이면 교합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며 옥안인이 설명했다. 그래도 즐기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직접적인 삽입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었다.
얼마 전에는 류희겸의 성기를 빨다가 이로 긁는 바람에 걷어차일 뻔했다. 그때의 실수를 만회해야 했다.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귀엽게 눈을 한 번 깜빡인 류희겸이 픽 하니 웃는 바람에 진혁위는 심장의 떨림을 맛보았다. 무심한 사내의 철벽이 이렇게 한 번씩 사라질 때마다 들뜨게 된다.
“세상에서 귀비가 제일 예쁘다.”
“대연국 제일미남이신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응. 예뻐. 얼른 갔다 오겠다.”
이러다 안 되겠다 싶어 진혁위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류희겸의 배웅을 받으며 경연에 가는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 ◇ ◇
매실은 영험했다. 진혁위의 입덧은 단번에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매실절임을 먹은 이후로는 조금씩 차도를 보였다. 그렇게 보름이 지나자 입덧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배곯는 황제를 지척에서 모셔야 했던 태감과 문무백관들이 기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번에는 류희겸이 입덧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
한밤이었다. 류희겸은 반듯하게 누운 채로 눈을 깜빡거렸다.
잘 자고 있다가 갑자기 깨는 일은 드물지만 한 번씩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유는 다양했다. 더워서, 추워서, 목이 말라서, 큰 소리가 나서, 볼일이 보고 싶어져서. 어떨 때는 눈을 감고 다시 잠들었고, 또 어떨 때는 곤란함을 해결하고는 눈을 감았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눈을 뜬 것까지는 평범했다. 옆자리에 누워 있는 진혁위의 온기를 느끼며 편한 자세를 찾아 뒤척였다. 그러다 갑자기 허기가 밀려들었다. 정확하게는 폭발적인 식욕이었다.
진혁위의 입덧이 가라앉은 것이 며칠 전이었다. 그리고 서로 교대라도 하듯이 류희겸이 입덧을 시작했다.
다행히도 자신은 진혁위만큼 심하지 않았다. 평소 먹던 것들이 잘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에 먹고 싶은 것들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술떡이었고, 다음에는 생선찜이었다.
많이 먹는 것도 아니었다. 딱 기분 좋게 먹을 수 있을 정도만 입에 들어갔다. 문제는 강력한 식탐이 해소될 때까지 그것만 생각난다는 것이었다.
지금이 그랬다. 웃기게도 이번에는 요리가 아니라 홍나복(紅蘿蔔)이 먹고 싶어졌다. 단단하고, 아삭하고, 달고, 흙내와 풋내가 나는 홍나복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홍나복이 아니라면 고구마도 좋았다.
한번 시작된 욕망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류희겸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저녁을 넉넉하게 먹었으니 배가 고픈 건 아니었다. 겨우 홍나복 하나를 먹자고 자고 있는 진혁위와 궁인들을 깨울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고되고 힘든 훈련을 견뎌 냈으니 이 정도의 충동은 이겨 낼 수 있어야 했다. 이까짓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류희겸은 눈을 질끈 감고 잠을 청했다. 머리를 비우고 숨 쉬는 것에만 집중하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다시 머릿속은 홍나복으로 가득 찼다.
결국 류희겸은 일다경도 되지 않아 눈을 번쩍 떴다. 인내심이 순식간에 휘발되면서 격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당근을 먹을 수 없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분노가 치솟았다. 특히 세상모르고 옆자리에서 편히 자고 있는 진혁위를 향한 미움이 샘솟았다.
류희겸은 진혁위를 두들겨 깨우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가, 곧 그런 자신의 상태에 경악했다. 홍나복 하나 때문에 곤히 잠든 황제 폐하를 두들겨 패고 싶다니.
마음의 평정을 위해 노력하며 류희겸은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러나 홍나복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자 류희겸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진혁위는 침상 바깥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잠귀가 밝은 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 류희겸은 기척을 완전히 죽인 채 조용히 천개를 열고 침상을 빠져나왔다.
맨발에 푹신한 융단이 닿는 것을 느끼며 류희겸은 달빛이 가득한 창과 천개가 드리워진 침상을 한 번씩 둘러보았다. 계절은 봄, 보름달이 뜬 밤, 맨발에 침의만 입고 주방을 뒤지러 갔다가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터였다.
속 편히 잠들어 계시는 황제 폐하를 깨우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지켜보자니 심사가 꼬였다.
결단을 내린 류희겸은 조용히 움직여 서재로 향했다. 그곳에 간식 그릇을 치우지 않았다는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보름달이 환한 덕분에 등불이 없어도 서재를 찾아가는 길을 더듬거리지 않을 수 있었다. 서재까지 가는 동안 열고 닫은 문은 경첩에 기름을 잘 먹여둔 덕분에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마치 황성에 잠입한 도둑이 된 기분으로 서재에 든 류희겸은 서탁 위에 올라가 있는 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예상대로 말린 무화과와 대추가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류희겸은 말린 무화과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달고, 말랑한 무화과는 맛있었지만 기대를 충동시키지 못했다. 실망감이 덮치자 무화과는 진흙처럼 느껴졌다. 류희겸은 무화과를 뱉는 대신에 그냥 꿀꺽 삼켰다.
이제 말린 대추가 남아 있었지만 손이 가지 않았다. 류희겸은 말린 대추를 노려보다가 울적해졌다.
머릿속은 여전히 홍나복이 한가득이었다. 맨발에 침의 차림으로라도 주방을 찾아갈까 진지하게 고민했고, 또 그런 자신이 바보 같아졌다. 무엇보다 홍나복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퍼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아니, 서러움에 진짜 눈물이 나왔다.
“와…….”
이해가 되지 않는 어이없는 상황에 류희겸은 손으로 눈을 덮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여러 고난을 겪어왔다. 그런데 겨우 홍나복 하나 때문에 울어버린 것이 민망하고 또 서러웠다. 거짓말 안 하고 세상을 향해 욕을 내뱉고 싶었다.
홍나복도 못 먹는데, 황제의 총애를 받는 귀비가 무어 대수란 말인가.
그런데 머리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자신답지 않은 것임을 알았다. 입덧이 이렇게나 무서울 줄은 몰랐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서러움은 더욱 깊어졌고 그래서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다.
“류희겸!!”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줄줄 흘러내리던 눈물은 커다란 목소리에 뚝 끊겼다. 침방과 서재는 건물의 끝과 끝에 위치해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멀지 않았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확실히 진혁위의 것이었다.
“류희겸! 겸아!”
다시 한번 제 이름을 듣고 나서야 류희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렸다. 잠에서 깬 진혁위가 비어 있는 옆자리를 확인한 것이다.
직전 생에서 잠든 진혁위를 두고 침상을 빠져 나와 사라진 적이 있었다. 그날의 일을 잊지 않은 진혁위는 잠자리에 예민했다.
충동적으로 침상을 빠져나온 것은 자신의 실수였다. 후회는 한순간이었다. 여기에 있다고 입술을 달싹거리려는데, 펑펑 울었던 꼴을 보여야 한다는 사실에 망설인 것도 한순간이었다.
허둥지둥 눈물을 닦으려는데 진혁위가 서재의 문을 벌컥 열고는 들이닥쳤다.
“여기서 무얼― 무슨, 울었어?”
흉흉한 기세로 류희겸을 찾아낸 진혁위는 예상 밖의 광경에 우뚝 멈춰 섰다. 등불은 없었지만 달빛은 밝았다. 서탁 옆에 선 류희겸의 두 뺨이 흠뻑 젖은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세상에. 류희겸이 울었어? 진혁위는 자신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것을 의심하고 싶어졌다.
때마침 요란한 소란스러움에 번을 서고 있던 태감이 나타났다.
“폐하. 무슨 일이시옵니까?”
“물러가라.”
태감을 돌려보낸 진혁위는 고개를 숙인 채 소매 끝으로 얼굴을 닦고 있는 류희겸에게 다가갔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 진짜 눈물이 맞았다.
“무슨 일이냐?”
“그것이…….”
류희겸은 차마 진혁위를 바라보지 못했다.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홍나복이 먹고 싶어서 눈물이 났다는 말을 도저히 제정신으로 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진혁위가 그냥 넘어갈 위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악몽을 꾼 것이냐?”
“아닙니다.”
“한데 왜……. 아니다. 내가 너무 놀라서 너를 좀 안아야겠다.”
진혁위가 류희겸을 와락 껴안았다. 피할 새도 없었고, 피할 생각도 없었던 류희겸은 미안하고, 난감하고, 부끄럽고, 얼떨떨했다.
잔뜩 화가 난 호랑이처럼 자신을 찾아온 남자도, 그리고 차마 화를 내지 못하는 남자도, 아무 말 없이 끌어안아 주는 남자도 다 좋았다. 뜨겁기까지 한 체열과 꽉 안은 팔의 다정함은 익숙한 것이어서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홍나복을 향한 집착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왜 홍나복이람.
류희겸은 진혁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도 홍나복을 먹으려면 부끄러움과 민망함을 떨쳐 내야 했다.
“폐하.”
“이제 할 말이 생각났느냐?”
“별거 아닙니다. 신첩이…… 신첩이 갑자기 먹고 싶은 것이 생기었는데, 차마 달게 주무시고 계시는 폐하를 깨울 수가 없어 서재로 왔습니다.”
“깨워야지. 귀비가 깨울 거라고 하지 않았더냐. 뭐가 그리 먹고 싶어서 자다가 깼을까? 무화과? 대추?”
진혁위가 서탁 위에 놓인 간식 그릇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류희겸은 홍나복을 위해서 진실을 토해 낼 용기를 긁어냈다.
“아닙니다. 신첩이 먹고 싶은 것은…….”
“응?”
“신첩은, 신첩은 홍나복이 먹고 싶습니다.”
“……?”
류희겸은 진혁위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가 흠칫 굳는 것을 느꼈다. 그가 놀라워하든 의심하든 류희겸의 머릿속에는 온통 홍나복뿐이었다.
“홍나복이라고요.”
한 번 소리 내어 말하자 부끄러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경직된 남자의 품에서 류희겸은 단호하게 말했다.
*
눈물로 젖은 뺨을 한 류희겸의 요구는 오로지 홍나복뿐이었다. 결국 번을 서고 있던 태감이 그릇 가득 홍나복을 대령했다.
진혁위가 직접 등불을 켠 내실에 앉은 류희겸은 순식간에 홍나복 두 개를 해치웠다. 그리고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게 된 진혁위는 인생에 대하여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대신 입덧을 해주느라 먹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류희겸이 야밤에 홍나복이 먹고 싶다며 울고 말았다.
천하의 류희겸이. 무심하고 감정의 기복이 크게 없는 남자가 그깟 홍나복 때문에 뺨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다니 믿기지 않았다.
입덧이야 사람마다 다르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면 유별난 축에 속할 것 같았다. 아마도 씩씩한 아들이 태어나려는 징조일 듯싶었다.
진혁위는 열심히 홍나복을 베어 먹는 류희겸을 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비어 있는 옆자리를 확인하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날카로운 칼날이 심장을 파고드는 것처럼 무섭고 소름이 돋았다. 류희겸의 이름을 커다랗게 부르면서도 혹여나 자신이 악몽을 꾸는 게 아닌가 의심했었다.
옅어진 흉터는 이렇게 한 번씩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쩌면 평생을 가슴 떨려 하며 살지도 몰랐다.
그래도 행복한 얼굴로 당근을 먹는 류희겸을 보자니 마음이 풀렸다. 이렇게 그가 옆에 있으니 놀라고, 숨 막히고, 무서워도 상관없었다. 그것이 인생이었다.
“귀비가 홍나복이 먹고 싶어 울었다고 하면 누가 믿을지 모르겠다. 나중에 아이가 크면 말해야겠다. 나는 입덧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너는 밤에 울었다고 말이다. 아이가 진짜냐고 물으면 그런 일 없다고 잡아떼지 마라.”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이었다. 홍나복을 꿀꺽 삼킨 류희겸이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예. 신첩이 그러하겠습니다.”
“너와 내가 이리 고생한 것을 알면, 아이는 효자가 될 것이다. 다 먹었군. 홍나복을 더 먹겠느냐? 아니면 달리 먹고 싶은 것이 더 있어?”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어느새 그릇 가득 있었던 홍나복이 바닥을 보였다. 손가락 둘을 합친 굵기의 홍나복 일곱 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야무지게 홍나복을 씹어 삼킴 류희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기운이 은은하게 어렸다. 덕분에 진혁위 역시 뿌듯해졌다. 뺨이 다 젖도록 서러움에 펑펑 우는 것보다 배부르게 웃는 게 나았다.
“이쪽으로.”
진혁위의 손짓에 류희겸이 무슨 일이냐는 눈빛을 하며 슬쩍 몸을 숙여 왔다. 아무 의심 없는 행동에 사랑스러워 진혁위는 미소와 함께 입술을 맞댔다.
홍나복향이 나는 입술을 슬쩍 깨문 다음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 달짝지근하고 풋내가 나는 입맞춤은 처음이었다.
“홍나복맛이 난다.”
“신첩이 홍나복을 먹었으니까요.”
입술을 맞대다시피 하며 키득거리던 진혁위는 딱딱한 대답에 웃고 말았다. 무심한 정인은 여전했다. 그래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진혁위는 당근맛이 나는 입맞춤을 한 번 더 했다. 멋지고 훌륭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