嚴冬 : 혹독히 추운 겨울
차가운 바람이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겨울이었다. 이른 아침에 열리는 조회에 참석한 대신들이 입을 열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토해졌다.
대전 안은 겨울의 추위조차 무색하게 날선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대연국의 북서쪽 끝에 위치한 번국인 여번국(呂藩國)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여번국의 왕은 야심이 넘치는 인물로 기왕의 장인 중에 한 명이었다. 지난봄에 기왕이 일으킨 변란에 군사를 지원한 것이 드러나면서 궁지에 몰리자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거병의 명분은 신제(新帝)의 폭정이었다.
황제의 즉위 초반에 혼란과 반발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국경 끝자락에 위치한 여번국의 반란은 대연국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 어려웠다. 하지만 번국의 반란은 내전을 의미했고, 다른 번국과 번진에 불온한 영향을 미치곤 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재빠른 토벌을 하자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토벌군의 지휘관으로 누구를 임명할지를 두고 대신들 사이에 기 싸움이 일어났다.
대규모 반란을 진압하는 것은 큰 군공이었고, 황제의 신임을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대신들은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장군들을 천거했다.
실리적인 이득이 걸려 있기에 대립은 첨예했다. 상대가 천거한 장군의 약점을 잡고 늘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질 기미를 보였다.
대전 안의 뜨거운 열기는 토벌군 지휘관을 천거해 보라는 황제의 말 한마디에 시작된 것이었다. 보좌에 앉은 진혁위는 대신들의 공방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즉위식을 치르고 이제 겨우 백여 일이 지난 후였다. 진혁위는 느슨하게 국정을 장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의제가 생기면 대신들에게 던져 두고는 원하는 것을 챙겼다. 물론, 황제의 의중을 읽고 적극적으로 편을 들어주는 이들이 있어서 가능한 방법이었다.
진혁위가 원하는 장군은 많은 천거를 받았다. 대신들 사이에서 고성이 오가기 직전에 진혁위는 희범영을 토벌군의 지휘관으로 삼겠노라 했다.
무인을 숭상하는 대연국에서도 희범영은 존경받는 장군이었다.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희범영에게도 정적이 존재했다.
“신, 금묵임(金墨林)이 황제 폐하께 아뢰옵니다. 황제 폐하께옵서 희범영 장군을 아끼심을 모르는 이는 없사옵니다. 하나 여번국으로 희범영 장군을 보내는 것은 쥐를 잡는데 거도를 휘두르는 모양새이옵니다. 무도한 역도들을 일벌백계하여야 하나, 불측한 이들이 황제께서 겁을 먹어 그런다 할까 두렵습니다. 부디 뜻을 거두어주십시오.”
진혁위는 고개를 깊게 숙인 금묵임의 관모를 노려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금묵임은 진혁위의 외당숙이었다. 능력은 그저 그랬지만 선황제 시절부터 착실하게 황제를 지지하면서 자리를 지켰다. 기름칠을 한 매끄러운 혀는 지금까지 진혁위에게 여러모로 힘을 실어주었다.
황제가 된 진혁위는 외당숙의 체면을 세워주기는 하였으나 중용할 생각은 없었다. 매끄러운 혀를 가진 금묵임은 행실도 가벼웠다. 게다가 황제의 눈 밖에 나는 것도 모르고 도당을 만들며 세를 키우고 있었다.
금묵임이 제 딸을 황후로 만들 꿈에 부풀어 있음을 진혁위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현재 후궁전은 텅텅 비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후는 없고 후궁은 귀비 한 명뿐이었다.
국상 기간이 끝나자마자 대신들은 황실의 다복함을 위해 간택령을 내려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주청을 올렸다. 진혁위는 부드럽게 거절하였으나 통하지 않았다.
때마침 진혁위의 외가인 금씨 가문의 규수들이 황태후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 황궁을 방문하기로 하면서 상황은 더욱 의도와 다르게 흘러갔다.
이번에 황궁을 찾은 금씨 가문의 규수들 중에 한 명이 후비가 되고, 그 후로 간택령이 내려지는 것이 수순이라고 다들 믿고 있었다.
특히 황제의 외당숙이자 황태후의 외사촌이 되는 금묵임은 자신만만했다. 제 딸이 태경제일미라며 반드시 황제의 눈에 들 거라고 말하고 다닌다는 것이 진혁위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금묵임의 자신감에는 그럴듯한 근거가 있었다. 황제의 처족은 귀비의 양부가 되는 희범영의 희가 하나뿐이었다. 희범영은 뛰어난 무관이었지만 정략에는 재주가 없었다. 황제가 순탄히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외가인 금씨 가문에서 황후가 나와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었다.
금묵임으로서는 희범영이 더 이상의 군공을 쌓지 못하게 훼방을 놓는 것이 미래를 위한 포석일 터였다. 그랬기에 진혁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외가의 어른인 금묵임에게 자중하라 한 번 언질을 주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반발한 것은 그만큼 금묵임의 욕심이 크다는 의미였다.
진혁위는 굳이 금묵임의 말을 받아주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금묵임을 말릴 이들은 많았다. 희범영에게는 적만큼이나 아군도 많이 있었다.
“신, 양진복이 아뢰옵니다. 번국의 반란이 어찌 한낱 미물과 비견되겠나이까. 역도들을 일벌백계하려면 압도하여야 하옵니다.”
“신. 남명선이 황제 폐하께 아뢰옵니다. 토벌군 지휘관으로는 희범영 장군이 적임자이옵니다.”
여러 대신들이 희범영을 비호하였다. 여번국은 쥐가 아니며, 무도한 역도들은 거도는 물론이고 가진 것을 모두 동원하여 토벌해야 한다고 외쳤다.
결국 여번국의 반란을 토벌하는 지휘관은 희범영이 되었다.
*
“희범영 장군이 여번국에 가게 되었다.”
진혁위가 화영궁을 찾은 것은 늦은 밤이었다. 국상 기간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국 각지에서 상주문이 잔뜩 올라오면서 진혁위의 일이 잔뜩 늘어났다. 게다가 여번국의 반란까지 겹쳐지면서 진혁위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저녁 시간만큼은 류희겸과 함께 보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은 날들이 생겨났다. 그래도 가능하면 화영궁에서 잠을 청하려고 노력했다. 오늘도 편전에서 밤을 지새울 뻔한 것을 겨우 시간을 내었다.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었는지 침의로 갈아입은 류희겸이 웃는 얼굴로 반겨주었다. 진혁위는 류희겸에게 와락 덤벼들고 싶은 것을 참았다. 어젯밤에도 그러다가 류희겸에게 한 소리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얌전히 류희겸에게 몸을 내맡겨 옷시중을 받았다. 정복을 벗고 침의로 갈아입는 동안에 진혁위는 오늘 있었던 중요한 일을 류희겸에게 알려주었다.
조회에서 오간 모든 일들을 류희겸과 논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류희겸의 양부가 된 희범영의 출전 소식만큼은 자신의 입으로 말해야 했다.
“출전은 언제입니까?”
“나흘 후에. 그는 승전할 것이다.”
“신첩도 그리 믿고 있습니다.”
류희겸은 진혁위가 갈아입은 침의의 허리 매듭을 묶으면서 담담히 대답했다. 진혁위가 황제가 되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미래는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희범영이라면 번국의 반란을 무사히 진압할 거라고 믿었다.
“여번국의 왕인 오관(吳瓘)은 그리 뛰어난 장수가 아니다. 지난번에도 맹탕처럼 당했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직전 생애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진혁위가 말하는 지난번이란 한 번 일어났던 일을 의미했다. 진혁위가 오래 걸리지 않는다 했으니 그럴 것이다. 희범영에 대한 믿음과 별개로 류희겸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여번국의 왕이 최악의 수를 두었습니다.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는군요.”
“모두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지.”
“그렇지요. 다 되었습니다.”
침의의 마지막 매듭을 묶은 류희겸은 몸을 뒤로 물렀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우소진이 물이 담긴 세면기를 들고 나타났다. 의자에 앉은 진혁위는 우소진의 시중을 받아 얼굴과 손발을 씻었다.
그사이에 두 사람의 대화는 끊이질 않았다. 주제가 바뀌어 이번에는 내일 입궁할 금씨 가문의 규수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의 입궁하는 명목은 집안 어른인 황태후에게 문후를 올리기 위함이었다. 모든 준비는 황태후가 했기에 류희겸은 손댈 일이 없었다. 다만 금씨 가문의 규수들이 입궁하는 이유가 너무 빤하였기에 진혁위가 예민하게 굴었다.
외가의 아이들이 황태후에게 인사를 드리러 온다는데 막을 명분이 없다는 사실에 부루퉁해졌다. 그리고는 류희겸에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모레 오후에 잠시 차를 마시기로 했습니다.”
“귀비가 그리 청했겠지? 말하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안 그러냐?”
“맞습니다.”
“그러지 말랬더니. 아예 안 보는 게 낫다.”
진혁위의 주장은 한결같았다. 아예 서로 만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황태후의 체면도 챙겨야 했다. 집안의 아이들이 방문했는데, 하나뿐인 며느리가 얼굴을 내비치지 않으면 곤란한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류희겸은 황태후인 금채영에 대해 아는 것은 몇 없었다. 그래도 조용하고 내향적인 성격인 그녀가 일반적인 시어머니와는 다르다는 것쯤은 쉬이 파악했다.
금채영은 처음 진혁위와 함께 문안 인사를 간 류희겸에게 자주 얼굴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진혁위와 함께 찾아오면 그만이라고 날짜를 지정해 주었다.
한번 인사를 드리러 가면 오래 붙잡지도 않았다. 차를 한 잔 마시거나 혹은 식사를 한 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금채영은 다정다감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아들의 측비를 위하여 벽사기복의 붉은 예복을 직접 지어 보내는 것은 보통 정성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겨우 차를 마시는 것뿐인데요.”
“귀비가 너무 무르군. 정말 그것뿐이라고 생각해?”
“그럼 다른 것이 있습니까?”
“많이 있지.”
발을 씻고 닦는 것까지 마무리되자 진혁위의 손짓에 우소진과 대기하고 있던 궁녀들이 조용히 물러났다. 침방을 나간 그들의 인기척이 모두 사라지자 진혁위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혼자 움직이지 말고, 궁녀든 태감이든 잔뜩 데리고 다녀라. 심양설이 있더라도 내실은 물론이고 문 닫힌 건물 자체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운 나쁘게 헐벗은 규수랑 맞닥뜨릴 수도 있으니까.”
“……!”
화사한 미소에 어울리지 않는 노골적인 설명에 류희겸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설마 싶은데 진혁위는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너무 과한 염려 같으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귀비는 짐의 후비이지만, 사내이기도 하지. 사내가 귀하게 큰 규수의 속살을 보았으면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귀비가 부인을 둘 수 있는 게 아니니, 그 책임은 귀비의 부군인 짐의 몫이 되겠지. 왜? 아닌 것 같아?”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신첩이 무지했습니다.”
진혁위의 물음에 류희겸은 순순히 항복을 선언했다. 나이가 찬 규수들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추문이었다. 사내와 은밀한 곳에 있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만으로도 본인은 물론이고 가문 전체의 명예가 추락하게 된다. 사내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덜하지만 평판이 떨어지는 것은 비슷했다. 추문을 수습하는 방법은 상대와 혼인을 하는 것뿐이었다.
지체 높은 규수의 속살을 보았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 대신에 부군인 진혁위의 몫이 되는 것도 맞았다.
상상만으로 아득해지는 상황이라 류희겸은 진혁위가 아예 얼굴을 맞대지 말라는 이유를 이해했다. 후궁 암투는 살벌한 법이었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귀비가 모후의 체면을 위해 나선 것임을 안다. 이미 약조한 것을 무를 성격이 아니라는 것도. 대신에 내가 한 말을 명심해라. 작고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덫을 놓고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헌데, 신첩이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이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자세히 알고 계시는 것 같아서 궁금해졌습니다.”
“비슷한 것이 있기는 했지. 짐은 친왕 시절부터 꽤나 탐나는 신랑감이었으니. 오해하지 마라. 나는 결백하다. 혼인 같은 거 안 했다니까. 설마? 질투하는 것이냐?”
자신의 결백함을 피력하던 진혁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류희겸을 빤히 보았다. 멀뚱히 서 있던 류희겸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빛을 했다.
“투기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는 것은 투기할 일이 생기면 하겠다는 것이지?”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나도 류희겸다운 대답에 진혁위는 상심하는 대신에 미소를 지었다. 무심한 정인은 쉬이 변하지 않았다.
“귀비가 투기할 일은 만들지 않겠지만, 그래도 좀 궁금하단 말이지.”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귀비가 어찌 투기할까 하고 말이야. 불같이 화를 낼까? 찬바람이 쌩쌩 불까? 혹은 없는 애교가 생길까?”
느긋하게 의자에 앉은 진혁위는 류희겸에게 은근한 눈짓을 보냈다. 혹여나 류희겸이 먼저 다가와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애교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먼저 접문쯤은 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류희겸은 심각한 얼굴로 제자리에 버티고 섰다.
“폐하께서 투기할 일을 만들지 않으신다 하시니, 신첩이 투기할 일은 없을 겁니다.”
류희겸의 정중한 대답에 진혁위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무심함도 무뚝뚝함도 여전한 사내에게 너무 과한 것을 바란 자신의 잘못이 컸다.
꿈이 너무 컸어. 그래도 진혁위는 포기하지 않았다. 접문이야 자신이 먼저 하면 그만이었다.
“내 꿈이 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게 있다.”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일어난 진혁위는 류희겸을 끌어안은 다음에 침상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팔을 뻗어 류희겸의 허리를 안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류희겸이 뒤로 물러나면서 진혁위의 손을 피해버렸다.
명백한 거절의 몸짓이었다. 허공을 헤맨 손을 거두지 못한 진혁위는 인상을 썼다. 문제는 류희겸이 놀란 눈을 하고는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
“그것이……. 신첩이 놀라서 그렇습니다.”
류희겸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매서운 눈초리로 조심하라고 강조하는 진혁위와 대화를 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등불에 드러난 진혁위의 얼굴이 전보다 마른 것 같아 보여서 안쓰러워졌다.
그러다 진혁위가 일어서자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마치 위험한 적을 마주한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왜 그랬는지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진혁위가 손을 뻗자 본능적으로 피해버리고 말았다.
뒤로 물러나고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인식할 수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과 회피는 자신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심장이 벌렁거리며 심각하게 뛰었다.
“놀랐다고?”
“그게, 신첩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긴장하고 놀래어……. 지금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어설프게 설명을 하던 류희겸은 얼른 진혁위의 손을 잡았다.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맹렬하게 뛰던 심장은 금방 가라앉았다. 그러니 지금은 미간을 와락 구긴 진혁위를 달래는 것이 먼저였다.
“어디 아픈 것이냐?”
상냥하고도 다급한 진혁위의 물음에 류희겸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놀란 것과 아픈 것이 무슨 상관인가 싶다가 진혁위가 자신을 염려한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자신이 가벼운 헛기침만 해도 진혁위는 고뿔에 걸린 것이 아니냐며 수선을 피웠다. 물론 그것이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염려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살이 쪄야 한다며 보약을 먹으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의미였다. 그랬기에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신첩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럴 리가. 귀비가 얼마나 용맹하고 담대한데, 겨우 손짓 한 번에 놀라다니. 태의를 불러서 진맥을 봐야겠다. 우소진. 있느냐?”
“괜찮습니다. 폐하.”
류희겸이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진혁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기어코 태의를 불러,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에게 류희겸을 진맥하게 했다. 두 명 모두에게서 아무 이상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안심했다. 물론 류희겸은 자신의 상태에 의문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
한바탕 소란이 가라앉고서야 두 사람은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
자리에 반듯하게 누운 류희겸은 눈을 깜빡거렸다. 침방이 아주 캄캄하지 않게 등불을 하나 밝혀둔 덕분에 침상 덮개의 투각과 짙은 그림자가 눈에 잘 들어왔다. 새와 꽃, 구름이 새겨진 무늬를 바라보던 류희겸은 작게 한숨을 삼켰다.
평소에는 베개에 머리가 닿으면 별다른 노력 없이 잠드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쉬이 잠이 오질 않았다.
잠자리는 어제와 다름없이 편하기만 했다. 피곤한 일도 없었다. 진혁위에게 의논해야 할 일이 있기는 하지만 급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걱정거리가 있기는 했다. 보기에 따라 심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제도 그제도 똑같은 걱정거리가 있음에도 잘 잤으니 이유가 될 수 없었다.
“흐음.”
작게 한숨을 내쉰 류희겸은 몸을 뒤척이며 진혁위 쪽으로 돌아누웠다. 등불 덕분에 바르게 누워 있는 진혁위의 옆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있는 진혁위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심장에 열이 훅 치솟았다.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감각에 류희겸은 인상을 썼다.
불규칙적이고 뜬금없는 열감이 시작된 것은 지난겨울이었다. 그때는 음인으로 변모하기 위한 증상이라고 인지하면서도 복수에 눈이 멀었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내정은 비어 있었고 진혁위의 후궁은 자신 하나뿐이었다. 진혁위는 너만 있으면 된다고 하였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황제의 하나뿐인 후궁이 음인이 되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로 문제였다. 황제가 양인으로서의 힘이 약하다거나, 후궁이 부덕하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퍼질 수 있었다. 그리고 결과론적으로는 후궁 간택령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릴 것이다.
솔직히 음인과 관련해서는 인력으로 되지 않는 일이라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진혁위의 부담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진혁위가 보위에 오르고 자신이 음인이 되는 것과 관하여 서로 한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귀비는 음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진혁위에게는 조금의 의구심도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류희겸의 걱정은 깊어갔다.
용의 말로는 종속되기 싫어하는 본능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음인이 될 것이라고 한 것이 거짓인 듯싶었다. 용을 만나고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심장이 이리도 뜨거운데 왜 그대로냐고.
류희겸은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몸뚱이가 원망스러워질 지경이었다.
“하아.”
“왜? 잠이 안 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몸을 뒤척이며 반대편으로 돌아누우려는데 진혁위의 팔에 가로막혀 버렸다. 언제 깼는지 이쪽으로 몸을 돌린 진혁위가 눈을 뜨고 있었다.
“신첩이 깨운 것입니까?”
“아? 응. 설핏 깼는데 날 보는 귀비의 눈빛이 열렬하여 잠들지 못했지.”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무엇 때문에 우리 겸이가 잠을 못 잘까? 응?”
잠기운이 묻은 진혁위의 목소리는 다정하기만 하였다.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얼굴에 류희겸은 다시금 심장이 뜨거워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감질 나는 열감이 고민거리라고 진혁위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떤 충동이 불쑥 솟구쳤다. 낯설고도 이상한 충동에 류희겸은 입을 다물었다.
“왜 말이 없어?”
“주무십시오.”
“눈동자가 흔들린 거 봤다. 왜 그래? 말 못 할 것이냐?”
말 못 하는 비밀에 민감한 진혁위가 눈을 빛내는 바람에 류희겸은 잠시 망설였다. 비밀은 아닌데 소리 내어 말하기가 애매하다 못해 면구스러웠다. 하지만 진혁위의 오해를 받을 수는 없었다.
“폐하.”
“그래.”
“신첩이…….”
“무엇이냐?”
“신첩이 폐하께 순흔을 남겨도 되겠습니까? 음, 아프게 말고 살짝이요.”
진혁위의 재촉에 말을 꺼낸 류희겸은 그 순간에 후회했다. 진혁위가 놀란 눈을 하고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더욱 그랬다.
“귀비가 맞느냐? 설마, 여우가 둔갑한 것은 아니겠지?”
“신첩이 실언을 하였습니다. 못 들은 걸로 하십시오.”
호들갑을 떠는 진혁위에게 얼른 사과를 한 류희겸은 등을 돌려 누웠다. 충동적인 행동은 이렇듯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심장을 뜨겁게 한 열은 어느새 뺨을 타고 올랐다.
민망함에 땅으로 꺼져 버리고 싶은데 진혁위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진혁위는 류희겸의 등에 반쯤 달라붙다시피 하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제대로 들었어. 그리 등 돌리지 마라. 당연히 된다. 어디에 남길 것이냐?”
“괜찮습니다.”
“귀비가 예뻐해 준다는데, 내가 잘못하였다.”
“주무십시오.”
“자꾸 그러면 내가 순흔을 남겨도 되느냐? 딱 좋은 곳이 보인다.”
진혁위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류희겸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귀 끝이 빨갛게 변한 채 돌아누운 류희겸은 귀엽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말 한마디 잘못해서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협박 아닌 협박에 류희겸은 진혁위를 끝까지 외면하지 못했다. 슬쩍 뒤돌아보자 진혁위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어디에 할 것이냐?”
“목덜미나…….”
“목도 좋지.”
“옷깃으로 가려지는 곳에 하겠습니다.”
자리에 누운 채 진혁위를 올려다보게 된 류희겸은 근사한 목덜미와 옷깃 사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매일같이 대소 신료들 앞에 서야 하는 황제 폐하의 목에 순흔을 남겼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귀비가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다. 이런 적은 처음이잖아.”
열기를 담은 류희겸의 눈은 먹이를 노리는 매의 그것처럼 냉철하기까지 해서 진혁위는 오싹해졌다. 류희겸은 부끄러움은 제법 탔지만, 교합에서는 적극적인 편이었다. 어지간한 것은 싫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뭔가를 하겠다고 먼저 나선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러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류희겸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사실 순간 치솟았던 충동은 입술을 대어 순흔을 남기려는 욕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은, 잠결에 환히 웃는 남자를 보며 한입에 와락 삼켜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과격한 충동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남자의 어딘가에 흔적은 남긴다고 생각하자 들뜨고 말았다. 교합 도중에 진혁위의 어깨를 깨문 적이 몇 번 있기는 했지만 일부러 순흔을 남기려는 것은 처음이었다.
류희겸은 홀린 듯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턱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격렬하게 뛰는 맥박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자세가 나쁩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갈까?”
“그것보다는…….”
몸을 일으킨 류희겸은 진혁위의 어깨를 잡아 밀었다. 순식간에 자세가 바뀌면서 진혁위의 상체를 반쯤 올라타고는 내리누르는 모양새가 되었다. 진혁위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올려다보는 모습이 귀여웠다.
“귀비가 기습의 달인이었군.”
“그렇지 않습니다.”
“막 심장이 두근거린다. 무엇을 해줄 것이냐?”
진혁위가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반대로 류희겸은 목마름을 느꼈다. 커다란 덩치의 남자를 한입에 삼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음에도 충동은 아주 사라지지 않았다.
사위는 여전히 어두웠다. 새카만 밤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천개 너머로 일렁이는 주황색 등불뿐이었다. 여린 불빛과 짙은 그림자가 만들어 낸 조화는 미소 짓고 있는 남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숨 막히게 했다.
갈증은 다시금 심장의 열기로 번졌다. 류희겸은 소리 없이 숨을 들이쉬면서 진혁위의 얼굴을 손으로 붙잡았다. 이전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얼굴 하나만큼은 어디에 견줄 데가 없었다.
“태경 제일의, 대연국 제일의 미남을 부군으로 둔 것이 신첩의 복입니다.”
무심한 얼굴을 한 류희겸의 고백에 진혁위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표정은 담담한데, 뺨은 붉고, 곧은 시선에는 열기가 담겨 있었다. 거기다 고조 없는 목소리로 예쁘다고 칭송하는 것이 다 따로 놀았다.
그럼에도 류희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홀린 것처럼 말이다.
“예쁜 부군에게 무엇을 해줄 것이냐?”
“말씀드린 대로 순흔을 남길 것입니다.”
흐트러짐 없이 답을 한 류희겸은 웃고 있는 진혁위의 뺨과 귓가에 입술을 대었다. 느긋하게 웃던 남자가 입술이 닿자 멈칫 놀라는 것이 좋았다.
뺨에, 귓가에, 그리고 턱과 목덜미까지 차례로 부드럽게 입술을 붙였다 떼기를 반복하다가 옷깃을 벌렸다.
단단한 목덜미가 탐났지만 욕망을 꾹 눌렀다. 이미 요사스러운 귀비라는 소리를 듣고 있기는 하지만, 더한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아무 눈에도 닿지 않는 곳에 입술 자국을 남겨야 했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쇄골 아래에 입술을 대고는 강하게 빨다가 입술을 떼었다. 문제는 주위가 아주 밝지 않아서 흔적이 남았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혹시나 몰라 류희겸은 같은 곳을 한 번 더 빨았다. 탄력 있는 살갗을 와락 씹어버리고 싶은 것도 참아 내며 고개를 들었다.
“다 했습니다.”
“다 했다고?”
“예.”
아까부터 류희겸의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주던 진혁위는 어이가 없어졌다. 결백한 류희겸의 얼굴에는 아무 의구심도 없었다.
정말 이걸로 끝내려고? 원래 이런 인사인 줄 알았지만 이번만큼은 너무했다.
“너무하지 않느냐? 유혹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귀비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줄 알고 얼마나 기대했는데.”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라고 하면 다 되는 줄 알아?”
이번에는 진혁위가 류희겸의 허리를 잡고는 자세를 뒤바꾸었다. 다시금 진혁위를 올려다보게 된 류희겸은 어리둥절했다. 아까와 달리 서로의 다리가 얽히는 바람에 진혁위의 성기가 단단해진 것이 허벅지로 느껴졌다.
“흥분하셨습니다.”
“그래. 했지. 네가 책임져야 해.”
얼굴을 코앞으로 들이민 진혁위가 속삭이며 몸을 맞댔다. 류희겸은 진실로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진혁위의 몸이 맞닿으면서 느껴지는 온기에 몸이 떨렸다. 오싹한 감각이 척추를 따라 번지면서 아까부터 몇 번이고 뜨거웠던 심장도 제멋대로 뛰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열감과 흥분은 닮으면서도 달랐다. 어쩌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신첩이 책임지겠습니다.”
“어떻게?”
“제대로 하겠습니다.”
류희겸은 아래위로 나누어진 진혁위의 침의 사이로 손을 슬쩍 집어넣었다. 손바닥으로 맨살을 매만지자 남자의 근육이 긴장하며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귀비?”
“신첩이 이런 적이 없기는 합니다.”
눈을 크게 뜬 진혁위를 빤히 바라보며 류희겸은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서슴없이 진혁위의 성기를 바지째로 붙잡았다. 손안에 잡힌 성기는 사납게 커져 나갔다. 남자의 것이 얼마나 커지는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한 번씩 실감할 때면 놀라웠다.
류희겸은 성기를 잡은 손을 아래위로 흔들며 흥분을 부추겼다. 과감하기 짝이 없는 손짓에 진혁위는 숨이 막혔다. 류희겸의 말대로 이런 적이 없기는 했다. 자신이 해보라고 밀어붙여야 겨우 움직이던 사내가 지금은 무심한 얼굴로 적극적으로 굴었다.
이러니까 홀딱 빠지지. 진혁위는 류희겸의 입술을 맞대며 속삭였다.
“진짜 여우가 둔갑한 것 같다. 내 겸이는 어디 갔느냐?”
“여우 아닙니다.”
“그러게나. 여우랑은 이런 거 할 수가 없지.”
장난스럽게 키득거린 진혁위가 부드럽게 입술을 겹쳐 왔다. 이번에는 맞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입술이 먹혔다.
몇 번이나 이어지는 입맞춤을 하며 서로의 침의를 잡아 뜯다시피 벗겼다. 알몸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다시 류희겸이 진혁위를 타고 오른 모양이 되었다. 류희겸이 알몸을 맞대며 속삭였다.
“신첩이 책임을 진다 하였으니, 그리하겠습니다.”
“기대해 보겠다.”
류희겸의 모습이 사뭇 진지하여 진혁위는 몸을 내맡겼다. 이렇게 류희겸이 적극적으로 구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류희겸이 천천히 부드럽게 입술을 맞대 왔다. 다정하면서도 정직한 입맞춤은 류희겸의 성격과 닮아 있었다.
깊게 섞은 혀는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갔다. 대신 류희겸의 입술이 곳곳에 닿았다. 뺨과 턱, 목덜미, 가슴까지 이어지는 애무에 진혁위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류희겸의 움직임은 묘하게 자신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혀로 핥고, 이로 깨물고, 입술로 부드럽게 빨아들일 때마다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잡아먹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이러다가 잡아먹히겠다.”
가벼운 농담에 배꼽 근처를 핥던 류희겸이 소리 없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덥썩 진혁위의 성기를 물어버렸다.
“흣.”
진혁위는 헛숨을 내뱉었다. 이미 잔뜩 발기한 성기는 류희겸의 입 안에서 크기를 키웠다. 축축하게 뜨겁게 감싸는 여린 살의 감촉은 이성을 잃기 딱 좋았다. 무엇보다 제 것을 삼킨 류희겸의 입술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어지러울 지경이라 진혁위는 눈을 꽉 감았다.
구음을 좋아할 수 없는 이유는 너무 간단했다. 욕심대로 움직였다가는 류희겸이 다칠 수밖에 없었다.
진혁위는 류희겸의 머리를 쥐어 잡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류희겸의 아래를 파고들어 가고 싶었다. 저 몸을 끌어안고 끝까지 밀어 넣어 류희겸을 잔뜩 울리고 싶은 충동이 쾌락을 더욱 키웠다.
파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혁위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류희겸을 일으켜 세웠다. 류희겸은 그냥 봐도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뺨은 발그레했고, 선명하면서도 열이 오른 눈빛은 몽롱했다.
진혁위는 류희겸을 제 무릎 위에 앉히고는 살짝 입술을 머금었다. 제 것을 머금었던 입 안을 싹싹 핥아 대며 물었다.
“오늘따라 왜 이리 적극적이냐?”
“그야 폐하께서 어여쁘시어 그렇습니다.”
“하하. 귀비도 예쁘다.”
입맞춤을 이어가며 진혁위는 침상 벽 쪽에 놓인 서랍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붉은 옻칠을 한 작은 서랍장에는 교합에 쓰이는 물건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고운 색의 향이 좋은 향유를 모으는 것은 진혁위의 작은 취미 중에 하나였다.
향유병을 꺼내 들자 류희겸이 목을 끌어안아 왔다.
“신첩이…… 급합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소리였지만 류희겸은 정말 급했다. 몸이 맞붙자 흥분한 성기가 배에 닿아 진혁위의 배에 비벼졌다. 전에 없던 갈급함에 이대로 성기를 잡고 흔들고 싶은 충동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진혁위가 가볍게 몸을 떨며 웃었다.
“네가 이리 구는 거 처음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이 갈 지경이야. 진정 여우에게 홀린 것인지 모르겠다.”
흥겹게 속삭인 진혁위가 엉덩이를 벌려 왔다. 향유가 듬뿍 발린 진혁위의 손가락이 안으로 밀려오는 이물감에 류희겸은 인상을 쓰면서도 기대감에 절로 몸을 들썩거렸다.
맹세코 이렇게 몸이 단 적은 없었다. 손가락이 안을 휘젓는 것만으로도 절정에 이를 것 같았다.
“힘을 빼야지. 너무 조인다. 손가락이 잘려나갈 것 같아. 급하다면서.”
“그,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더듬거리며 답한 류희겸도 난감했다. 힘을 빼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말을 하는 순간에도 진혁위의 손가락을 빨아들일 것처럼 아래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이래서는 내 손가락을 정인으로 삼을 것 같은데. 아니야? 응?”
진혁위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안을 파고드는 손길은 그러지 않았다. 류희겸의 목을 빨며 가장 느끼는 곳만 문질렀다. 손가락은 어느새 세 개로 늘어났다.
“으흑. 읏. 흐으.”
의도된 자극에 류희겸은 덜덜 떨면서 도리질을 쳤다. 굵은 손가락이 푹푹 여린 내벽을 찔러 댈 때마다 교합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자꾸 무릎이 미끄러졌다. 그럴 때면 진혁위의 성기가 고환과 회음을 찌르며 문질러졌다. 더운 숨결이, 맞닿은 살결이, 아래를 찔러 대는 손길이 모두 끔찍할 만큼 좋았다.
“말랑해져 간다.”
“이제. 흐윽. 윽. 이제 그만. 흣.”
“응?”
“그만 놔주세― 아윽. 읏. 하악.”
류희겸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단단히 허벅지를 잡은 진혁위 때문에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럴 때면 남자의 손은 족쇄 같았다.
“폐, 폐하. 잠시. 읏. 앗. 이제 그만이요.”
“무얼 그만하라고. 네 안은 이 손가락을 좋아하고 있는데.”
진혁위의 손가락은 정말 성기라도 된 것처럼 움직였다. 류희겸은 손가락보다 더 강한 자극을 원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계속해서 신음만 튀어나왔다.
“하아. 아. 읏. 폐하.”
아래를 헤집을 때마다 물기를 머금은 질척거림과 달뜬 신음 소리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한참을 덜덜 떨고 나서야 류희겸은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몸에 기대어 축 처진 채 숨을 몰아쉬었다. 손가락만으로 사정해 버린 것이 민망했고 힘이 빠졌다.
“이제는 내가 못 참겠어.”
다정히 뺨에 입술을 댄 진혁위가 류희겸의 엉덩이를 잡고 들어 올렸다. 엉덩이 사이로 잔뜩 발기한 성기의 끝이 닿았다. 이미 잔뜩 풀려 있는 구멍은 성기 끝을 어렵지 않게 물었다.
“제가…….”
“응?”
“제가, 신첩이 하겠습니다.”
“뭘?”
물음에 답하지 않은 류희겸은 진혁위의 어깨를 짚고 무릎에 힘을 주며 상체를 세웠다. 자세가 바뀌자 삽입이 깊어졌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놀란 얼굴을 보며 천천히 몸을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의도를 이해한 진혁위가 허리를 잡아주며 웃었다.
“네가 이러니 너무 좋다.”
“예……. 읏.”
호기롭게 시작한 것은 좋았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크게 발기한 성기를 품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그래도 여린 살이 조금씩 뜨거운 기둥을 삼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모든 감각이 아래로 몰려갔다. 진혁위가 어루만지는 등과 허리에 불꽃이 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류희겸을 흥겹게 만드는 것은 진혁위의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상기된 얼굴이었다.
발그레한 뺨을 깨물고 싶다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을 맞댔다. 시작부터 깊어지는 입맞춤이 흥분을 더했다. 흥분이 커지며 허리가 들썩거리자 삽입은 수월해졌다. 어느 순간에 진혁위의 성기가 모두 밀려들었다.
몸이 갈라지는 느낌조차 쾌감이 되는 바람에 진저리가 쳐졌다. 진혁위가 입술을 떼고는 속삭였다.
“다음도 해줄 것이냐? 응? 그리하면 좋을 것인데.”
“……예.”
류희겸은 잠시 숨을 고르자마자 답했다. 여기까지 했는데 다음이라고 못 할 건 없었다. 진혁위가 좋아한다니 더 그랬다.
다시 진혁위의 입술을 삼킨 류희겸은 격랑 속으로 뛰어들었다.
*
황제의 귀비가 된 류희겸의 일과는 왕부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무장에서 단련을 하는 것은 여전했다. 처소 밖으로는 거의 걸음을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황궁 살림을 본격적으로 맡아 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황태후인 금채영이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황제의 하나뿐인 후궁으로서 내정의 안살림은 모두 류희겸의 몫이었다. 정확히는 진혁위가 그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황제의 내정에는 류희겸 말고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신경 쓸 일이 많았다. 특히 황실과 황제의 개인 자산과 귀품에 대한 목록을 확인하고 정비하는 것은 대단히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원래는 자신의 일이 아니었지만 황제 폐하의 명령은 지엄했다.
류희겸은 황제의 개인 자산을 관리하는 내수원(內需院)을 감찰하다시피 뒤졌다. 지루한 대조 작업 끝에 내탕고(內帑庫)에 있던 그림과 귀품들이 꽤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선황제가 죽고 신황제가 즉위하면서 감시가 느슨해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수원 소속의 태감이나 궁녀의 소행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것을 어디까지 수면 위로 드러내게 할 것이냐였다.
“어찌할까요?”
조반을 먹던 중에 상황을 설명한 류희겸은 진혁위의 의중을 물었다. 황실의 물건은 당연히 황제의 것이었고, 진혁위의 의지가 가장 중요했다.
원래는 어젯밤에 의논을 했어야 했는데, 소란이 있었던 탓에 이제야 말을 꺼내게 되었다. 졸인 조개를 젓가락으로 집던 진혁위가 가볍게 웃었다.
“귀비의 뜻대로 해라.”
“태후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신첩이 뜻대로 하자면 많이 소란스러워질 것입니다.”
“무엇을 얼마나 하려고?”
“집안의 도둑은 일벌백계해야 합니다.”
일군을 이끄는 장군이었던 류희겸은 기본적으로 부하들에게 관대했지만, 예산에 관해서만큼은 꼼꼼하고 까다로운 상관이었다. 특히 돈을 착복하는 이들은 용서하지 않았다. 한번 관리가 느슨해지기 시작하면 비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시종들이 주인의 물건을 하나씩 훔쳐 파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것을 관리 감독하는 것이 주인의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황실 재산 목록에 올라가 있는 귀품을 빼돌리는 자들을 찾아내어 엄벌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음? 이거 맛있다.”
매콤하게 졸인 조개를 삼킨 진혁위가 감탄했다.
“폐하께서 조개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신첩이 기쁩니다.”
“내가 조개를 좋아한다고?”
“예.”
“내가 조개를 좋아하느냐?”
진혁위는 뒤에 서 있는 우소진을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자신은 딱히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었다. 국화차나 닭 껍질 등을 좋아하지 않는 것 외에는 특별히 호불호랄 게 없었다. 우소진도 생소한 듯 놀란 눈을 답했다.
“향채와 향신료를 좋아하시는 것은 알고 있으나, 조개는 금시초문입니다.”
“그렇지. 향채와 향신료를 좋아하는데. 조개는 몰랐다.”
“향신료를 넣어 조개를 매콤하게 조리했습니다.”
이번에 대답한 것은 맞은편에 앉은 류희겸이었다. 진혁위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조개 요리를 보았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된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매콤한 조개는 확실히 맛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류희겸이 자신도 몰랐던 선호를 알아본 점이 더 감동이었다.
“귀비 덕분에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좋아.”
“황공하옵니다.”
“아, 그렇지. 집안 단속은 제대로 하는 게 맞다. 익문사를 시켜 철저하게 조사해라.”
“폐하. 신첩이 익문사를 써서는 안 됩니다.”
황제 직속 감찰 기관인 익문사를 쓰라는 것은 그만큼 사안을 심각하게 다루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류희겸이 익문사에게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큰 문제가 될 터였다.
“내가 명령을 내리겠다. 귀비는 조사한 결과를 받아들면 된다.”
“명 받들겠습니다.”
“귀비가 일을 잘하니 든든하다.”
“황공하옵니다.”
“귀비는 엄한 황후가 되겠다.”
진혁위의 덕담 아닌 덕담에 류희겸은 입을 다물었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진혁위의 의구심을 샀다.
“응? 왜 대답을 않느냐?”
“신첩이 어찌 황후에 대해 논하겠습니까?”
류희겸은 신중히 단어를 골랐다. 화영궁에서 진혁위와 단둘이 이른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시중을 드는 태감과 궁녀들은 모두 자신과 진혁위의 측근들뿐이었다. 그래도 말이 언제 어떻게 새어 나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었다.
무엇보다 류희겸은 자신이 황후가 될 거라고 확신하지 않았다. 진혁위는 가장 영화로운 자리를 주겠노라고 했지만 사람의 앞날이란 모르는 법이었다. 류희겸은 미래를 단정하지 않았다.
진혁위는 황권에 위협이 되는 처족이 필요 없다 하였지만 정치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아무리 진혁위가 황제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황제이기에 여의찮은 일이 생기는 법이었다.
류희겸은 진혁위에게 부담을 줄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의 오점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뿐이었다.
나름 둥그렇게 대답했다 여겼다. 그러나 진혁위는 눈매를 접으며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보통은 심기가 뒤틀어졌을 때 짓는 표정이라 류희겸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잠시 잊고 있었다. 귀비는 염려가 많은 사람이었어.”
“예. 신첩이 그러합니다.”
“하나 묻자.”
“하문하십시오.”
“귀비가 황후가 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가벼운 목소리로 던진 진혁위의 질문에 류희겸은 잠시 멈칫했다. 빙그레 웃고 있는 진혁위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류희겸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황후가 되지 못하여도 괜찮습니다.”
“그럼 후궁전이 여인들로 가득 채워진다면?”
“폐하께서 어떤 연유로 하문하시는지 알지는 못합니다. 하나 폐하께서 하시는 일에 고충이 많다는 것은 압니다. 신첩은 폐하의 결정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단호한 류희겸의 대답은 모두의 귀감이 될 만한 것이었다. 적어도 주인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우소진과 심양설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심양설은 진혁위에게 야속한 마음이 조금 들었지만, 주인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정말 그러하냐?”
“예. 물론입니다.”
류희겸은 진심이었다. 울적한 기분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진혁위의 반응이 이상했다.
“충성을 바치라 한 것이 이리될 줄은 몰랐다. 네가 그리 말할 거라 짐작하고 있었지만, 심란한 것은 어쩔 수 없군.”
“폐하?”
“먼저 일어나겠다. 이건 일부러 피하려는 거 맞다. 계속했다가는 안 좋은 소리를 할 것 같아 그렇다. 따라오지 마라.”
입을 닦고 일어난 진혁위가 그대로 훌쩍 뒤돌아 나가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갈팡질팡하던 우소진 역시도 진혁위를 따라나섰다.
진혁위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던 류희겸은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진혁위가 휑하니 사라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한번 갸웃거린 류희겸은 심양설을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당황한 모습이었다.
“내가 실수한 것이 있었던가?”
“아닙니다.”
심양설은 류희겸 편을 들어주었다. 그녀가 생각하기로는 류희겸은 가장 훌륭한 답을 했다.
“폐하께서 화가 나신 건 맞는 거지?”
“심란하시다 하셨습니다.”
“갑자기 왜…….”
심란하다는 말은 류희겸도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추측조차 되지 않았다. 류희겸은 진혁위가 나간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이유를 말해 줄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 ◇
류희겸은 공적인 자리에 나서야 할 일이 생길 때면 치장에 많은 신경을 썼다. 특히 진혁위가 황제에 오른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웬만한 것은 대부분 심양설에게 내맡겼다. 오랫동안 황궁에서 궁녀로 있었던 심양설의 안목을 믿었다. 다만, 때때로 그녀가 머리에 꽂는 비녀의 개수가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곤 했다.
한 번씩은 너무 과하지 않느냐고 약한 항의를 할 때도 있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황태후궁에 방문한 금씨 가문의 여아들과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귀비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는 빈틈이 없어야 했다.
“다 되었습니다. 마음에 드십니다.”
“마음에 들어. 수고했네.
최후의 비녀 한 개까지 모두 머리에 꽂은 심양설의 물음에 류희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 속의 자신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화려한 귀비로 변모해 있었다.
류희겸은 거울에 비친 화려한 장신구를 보았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황금과 보석으로 된 봉황이었다. 황제의 귀비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한다며 얼마 전에 진혁위가 마련해 준 것이었다.
특히 홍옥이 알알이 늘어진 것은 오늘 아침에 도착한 것이었다. 화려하고 섬세한 장식은 진혁위의 취향이었다.
진혁위가 류희겸의 머리에 꽂을 장신구를 선물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우소진 편으로 도착한 비녀를 받아 들고는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제 조반을 먹다가 훌쩍 나가버린 진혁위는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화영궁을 찾지 않았다. 진혁위가 편전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일이 밀려 있는 날이면 진혁위는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하물며 지금은 여번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상황이었다.
어젯밤, 우소진이 찾아와 진혁위의 말을 전했다. 자신은 편전에서 밤을 지샐 것이니 귀비는 먼저 잠을 청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이전에 몇 번 있었던 일이었고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단순하지 않았다. 어제 아침에 뜻 모를 말을 하고는 뒤돌아 나가버린 진혁위에게 무엇 때문이냐고 묻지 못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정확히는 가슴에 날카로운 가시가 쿡 박힌 것처럼 따끔거렸다.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알지.
류희겸은 이곳에 없는 진혁위에게 소리 없이 투덜거리며 한숨을 삼켰다. 평소라면 빙긋 웃으며 하고 싶을 말을 다 할 남자가 심란하다며 그냥 나가버렸다. 비녀를 보낸 것을 보면 아주 마음이 상한 것은 아닌 모양이지만, 그래도 계속 신경 쓰였다.
진혁위의 말대로 류희겸은 신중한 성격이었다. 그는 문제가 생기면 바로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정황을 파악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고 진혁위의 얼굴을 마주하고 난 다음에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는 것을 알지만 조바심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편전으로 달려가고 싶을 정도였다.
“호갑투입니다.”
류희겸이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에 심양설이 호갑투를 대령했다. 마지막으로 호갑투까지 손가락에 낀 류희겸은 천천히 일어났다.
“날이 춥습니다.”
심양설이 여우 털이 달린 피풍의를 가져와 류희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추위에 강한 류희겸은 무복만 입고 야외에서 단련을 하곤 했지만 오늘은 옷차림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탄을 넣은 작고 귀여운 손난로도 손에 쥐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류희겸은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진혁위가 아니라 차회에 집중할 때였다.
*
금채영이 준비한 작은 차회는 거의 완벽했다. 최고급으로 준비한 차와 다식은 모두 훌륭한 것이었다. 커다란 화로가 따뜻하게 데운 다실에 부드러운 차의 향기가 퍼지면서 바깥이 겨울이라는 것을 잊게 만들었다.
상석에 앉은 금채영을 중심으로 류희겸과 어린 규수들이 양쪽으로 마주 보며 자리했다. 차와 다과를 마시며 덕담과 환담이 오갔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일부러 발을 뺀 류희겸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황태후가 된 금채영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온 금씨 가문의 여인들은 모두 다섯이었다. 열여섯 살 전후의 어린 규수들은 저마다의 미모가 빛났다. 금씨 가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여인이 있었다. 이름은 금상란. 금묵임의 고명딸로 진혁위의 육촌이었다. 소문대로 그녀의 미색은 꽤나 돋보였다.
어린 소녀라고 얕보지 말라던 진혁위의 경고는 류희겸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금상란은 별 문제 없이 활달하게 대화를 이끌고 있었다. 솔직히 류희겸은 그녀에게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류희겸은 느긋하게 방관자 역할에 충실하였다. 하지만 약간의 방심은 곧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희범영 장군께서 여번국에서 일으킨 반란을 토벌할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들었습니다. 희범영 장군께오서는 귀비 마마의 양부이시니,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장군께서는 맡은 바 소임을 다하실 것이오.”
“소녀도 장군께서 승전하실 거라 믿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희범영 장군을 굳게 믿고 계시니까요. 아, 그렇지. 귀비 마마께서도 장군이었고, 귀비가 되신 이후에도 전장에 참여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쉽지 않으십니까? 소녀에게 친척 오라버니가 많이 있는데, 지난 전쟁에 참전한 오라버니들이 귀비 마마의 무력이 뛰어나다 말하였습니다. 귀비 마마의 실력이라면 군공을 세워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영웅이 되셨을 텐데요. 아니 그렇습니까?”
열여덟 살의 금상란이 활짝 웃는 얼굴로 물었다. 사근사근하면서도 명랑한 목소리에서는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귀하게만 자란 규수의 순수한 의문처럼 들렸다.
설마, 그럴 리가.
류희겸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금상란을 보았다. 진혁위에게서 눈치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듣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류희겸은 사람을 파악하는 데 능숙한 편이었다. 순진한 얼굴을 한 금상란의 눈빛에서 어떤 감정을 읽었다. 굳이 따지자면 야심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었다.
진혁위의 경고가 없다 하더라도 금상란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악의로 해석하자면 한때 장군이었던 사내가 황제의 후궁을 하고 있다는 조롱일 것이다.
또한 대답을 잘못했다가 여러모로 오해를 사기도 좋았다. 아쉽다고 하면 배신자가 욕심이 많다 할 것이고, 스스로를 영웅이라 추켜세우면 자만한다 할 것이었다.
류희겸은 대답도 하기 전에 정신적으로 지치는 기분이었다. 후궁 암투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하는 건가 싶었다.
차회 내내 류희겸은 대화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며 직접적인 질문에만 간단하게 대답하곤 했다. 스스로 들어도 딱딱한 대답이었기에 담이 작은 규수들은 류희겸을 대화에 끌어들이지 않았다.
류희겸은 살갑지 않은 도도한 귀비로 차회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이미 금채영에게도 허락을 받아놓았다. 무례한 부탁이었지만 금채영은 차회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류희겸의 뜻을 이해해 주었다.
그런데 금상란이 순진하고 무해한 얼굴을 하고 덫을 흩뿌렸다. 방심했다가는 된통 당할 수도 있는 함정이었다.
“금가의 상란 소저는 본 귀비가 선황제로부터 충현이라는 호를 받았다는 것을 듣지 못했나 봅니다. 이미 충분하여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류희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딱딱하게 받아쳤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부터 영웅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 황제의 인정을 받은 충신이 되었다. 황제에게 만독화를 바쳐 호를 받은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살짝 어색해지려는 분위기인데, 금채영이 무던하게 말을 이어받았다
“그렇지. 귀비가 선제 폐하께 만독화를 바쳐 충현이라는 호를 받았었지. 나도 깜빡 잊고 있었구나. 귀비의 이름은 정만현 대장군처럼 길이 이름이 남겠어.”
“하지만 만독화라고 하여도 모든 독을 막는 게 아니잖아요. 석분이 선제 폐하의―”
“그만. 그 이상의 말은 네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실언하려는 금상란을 막은 것 역시 금채영이었다. 단호한 어조의 경고에 금상란이 분기를 감추며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죄송합니다. 황태후 마마. 소녀가 실언을 하였어요. 궁금한 것이 많아 그랬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조심하거라.”
“예.”
얌전히 꼬리를 내린 금상란이 입을 다문 것은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류희겸을 건드렸다.
“귀비 마마. 지난가을에 흉년이 든 진주에 구휼미를 보내시었다지요. 진주에서 마마의 칭송이 드높다 들었습니다. 귀비 마마께서는 그 많은 쌀을 준비하신 것을 보면 앞날을 내다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귀비 마마의 혜안에 감복하였습니다.”
금상란은 생긋 웃으며 답하기 미묘한 칭찬을 던졌다. 사실 칭찬도 아니었다. 구휼미를 턱 하니 내어줄 정도로 쌀을 창고에 쌓아둔 류희겸의 치부를 비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고도 금상란은 순수하게 감탄하는 것처럼 굴었다.
금묵임의 하나뿐인 적녀로 귀하게 자란 금상란은 세상 어려운 것 없었다. 심지어 지난여름에 진혁위가 태자가 되자 금묵임에게서 네가 황후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종고모인 금채영은 황태후가 되었다. 금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서 금채영이 자신을 황후로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인 진혁위 역시 외가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금묵임의 주장이었다.
금묵임의 한마디 한마디가 금상란의 욕심을 자극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황후가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 금상란에게 류희겸은 당연히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황제를 홀린 요부. 요악한 남창. 금묵임은 류희겸을 그리 폄하하였다. 적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배신자 주제에 몸을 팔아 호의호식한다고, 황제의 눈을 가려 후궁을 텅 비게 만들었다며 비난했다.
황제의 하나뿐인 귀비에 대한 온갖 나쁜 말을 들은 금상란은 류희겸을 만만하게 보았다.
실제로 본 류희겸은 천박한 남창이라기보다는 위압감이 넘치는 사내였다. 머리에 꽂은 장신구는 마치 황금관을 쓴 것처럼 화려했다. 자줏빛이 도는 짙은 푸른색의 비단예복은 오히려 간결하여 날카로운 외모를 더욱 빛냈다. 화려함과 냉철함이 공존하는 류희겸에게는 범접하기가 어려운 위엄이 있었다.
그러나 금상란이 주눅 든 것은 처음뿐이었다. 그저 류희겸이 분수에 맞지 않는 값비싼 장신구를 두른 것 때문이라고 여겼다. 흉년이 든 진주에 구휼미를 보낸 것으로 교만하다는 탄핵을 피한 요부답다고까지 생각해 버렸다.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생각한 대로 생각한 금상란은 표독한 자존심을 고운 미소에 숨기며 류희겸의 심기를 긁어 댔다. 원래부터 잘하던 일이라서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악의를 받은 류희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조용히 받아주기만 했다가는 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혜안이랄 것은 없지요.”
“그럼요?”
“태경의 부자들 중에 커다란 창고 가득 쌀을 채우지 않은 자가 없을 겁니다. 그들은 다들 쓸 데가 있어 쌀을 내놓지 못했지만, 본 귀비는 황제 폐하의 근심을 덜어드리기 위해 쌀을 내어드렸습니다.”
태경의 부자들은 대부분 고관대작들이었다. 네 아버지의 창고에도 쌀이 가득 쌓여 있지만 내놓지 않았다고 돌려 말한 류희겸은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반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다섯 명의 규수 중에 셋이 얼굴을 굳혔다. 나머지 둘 중에 하나는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아예 눈치를 채지 못한 듯했다. 그리고 화제를 꺼낸 금상란의 생긋 웃는 미소는 깨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강심장이었다.
류희겸은 속으로 몇 번째일지도 모를 혀를 찼다. 후궁전이 사람들로 채워지면 이런 짓을 평생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다 못해 아득해졌다. 어제 진혁위에게 했던 말을 취소하고 후궁을 들이지 말라고 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이번에도 굳은 분위기를 수습한 것은 금채영이었다.
“오래 이야기를 했더니 이제 곤하구나. 이제 모두 물러가도록 해라. 귀비는 잠시 남고.”
금채영의 말에 류희겸을 비롯해 다섯 명의 규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채영에게 예를 올린 규수들이 물러나자 금채영이 류희겸에게 말을 걸었다.
“귀비는 자리에 앉거라.”
“예.”
“갑자기 남으라고 하여 놀랐지?”
류희겸이 자리에 앉자 금채영이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류희겸의 자리는 금채영의 바로 곁이었다. 하여 그녀가 씁쓸하게 웃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일부러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호응하지 않았던 류희겸은 사과부터 하였다. 황태후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차를 마시는 자리에 참석해 놓고는 훼방꾼처럼 굴었으니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류희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놀라지 않았습니다. 제가 무뚝뚝하게 굴어 태후 마마께 심려를 끼쳤사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런, 무릎을 꿇으라고 남으라 한 것이 아니다. 얼른 일어나거라.”
“감사합니다.”
금채영의 다급한 손짓에 류희겸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의자에 앉지 않고 그대로 버티고 섰다.
“앉지 않고?”
“자리에 서서 마마의 말씀을 경청하겠습니다.”
“고지식한 성격이구나. 그래.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내 오라버니 셋 중에 한 명은 명을 달리하였고, 둘은 외지에서 한직을 전전하며 지내고 있지. 그리고 사촌 오라버니가 되는 금묵임이 가장 크게 승차하였고, 도움도 몇 번 받았어. 하여 그의 요청을 마냥 거절하지는 못했지.”
평소에 금채영은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지만 속내를 쉬이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가 무겁게 말을 이어갔다.
선황제 시절에 후궁들의 암투는 살벌했다. 아무리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어도 사방에서 공격받았다. 결국 친정 가문이 한번 크게 쓸려나갔다.
오라버니들이 모두 한직을 전전하고 있는 와중에 가장 승승장구한 것은 사촌인 금묵임이었다. 진혁위는 그를 좋아하지 않아서 큰 교류가 없었다. 하지만 금채영은 후궁 시절에 금묵임의 도움을 몇 번 받은 전적이 있었다.
진혁위가 황제가 되자 금묵임이 큰소리를 냈다. 금채영을 찾아와 이번에는 금가(金家)에서 황후가 나와야 되지 않겠냐며 호소했다.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기에 그의 청을 완전히 내치지 못한 금채영은 친정 가문의 규수들이 황태후가 된 자신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오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오늘의 일이 일어나기까지의 복잡한 사정은 류희겸도 알고 있었다. 하여 금채영의 입장도 이해했다.
“태후 마마께서 집안의 어른이시니 당연한 일입니다.”
“귀비가 그리 말해 주니 내가 마음이 조금 놓이는구나. 내가……. 내가 좀 더 단호하게 굴었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어. 황제께서는 귀비만 있으면 된다 하였는데도 말이야. 내가 강단이 없어 귀비를 힘들게 만들고 말았군.”
“태후 마마.”
“아이들은 조용히 있다가 돌아갈 터이니 귀비는 그리 알아.”
금채영은 자신의 그릇을 잘 알았다. 암투는 싫었고 잘하지도 못했다. 그랬기에 선황제 시절에 괜한 시비에 얽히지 않으려고 몸을 낮추며 살았다.
황태후가 되고도 마찬가지였다. 황궁에서 가장 큰 어른이 되었으나, 균형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진혁위는 귀비만 있으면 된다고 강경하게 말하였다. 시끄러운 것은 딱 질색이라며 귀비와 알콩달콩 살 거라고 하는 아들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가문의 영광을 언급하는 친척 오라버니를 무시하지도 못했다.
솔직히 금채영은 미색이 출중하고 명민하게 구는 금상란을 눈 여겨 보고 있었다. 금상란을 황제의 침전에 밀어 넣지는 않더라도 몇 번 얼굴을 맞댈 기회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살갑게 굴던 아이가 류희겸 앞에서는 뾰족한 가시를 숨기지 못했다. 금상란이 후궁전의 한 자리를 차지하면 어떻게 될지 빤히 보이는 상황이었다.
자신은 작은 궁 안에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지냈다. 하지만 황궁의 큰 어른이 되자 후궁들을 단속하며 균형을 잡을 만한 구심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부끄럽고 답답하였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류희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태후 마마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이제 귀비도 돌아가 보도록 하거라. 내 나중에 부를 터이니, 그때까지 편히 쉬도록 해라.”
“태후 마마. 마마께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무슨 일이냐?”
물러가라 하였는데도 류희겸이 버티고 서 있자 금채영은 의아하였다.
“폐하께서 후궁전에 사람을 들이신다 하면 제가 가장 먼저 환대할 것이옵니다. 제가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니니 새로운 이들과는 그저 예를 다하는 것이 전부겠지만, 폐하의 뜻을 받들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소임이니까요. 그래도, 황제께서도 금상란을 눈여겨 보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황제께오서는 사람 보는 눈이 날카로우십니다.”
“귀비 말이 맞다. 황제는 그러실 분이지.”
“태후 마마께서 그 누구보다 황제 폐하를 위하신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효자이시니, 태후 마마의 근심을 덜어드릴 것이옵니다.”
금채영은 눈을 빛내며 확언하는 류희겸을 보다가 조금 늦게 웃었다. 황제의 귀비는 독특한 이력만큼이나 행동거지 역시 일반적인 사람들과 완전히 달랐다.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으나 심지가 곧고 단단하다는 것은 금방 알아보았다.
지금도 그러했다. 어조는 딱딱했지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을 알았다. 자책하지 말고 황제를 믿어보라는 말에 이상하게도 답답하던 마음이 살짝 풀렸다.
“귀비가 근심 많은 이 사람을 위로하여 주니 기쁘오. 무섭고 화려한 새장에 큰 매가 들었으니, 답답하겠어.”
“마마. 저는 아주 큰 꿈이 있습니다. 외람되오나, 무엇이냐 여쭈어주십시오.”
“귀비의 큰 꿈이 무엇인가?”
류희겸의 뜻 모를 청에 금채영은 순순히 어울려주었다.
“먼 훗날 흰 머리가 된 황제 폐하와 함께 서역의 하얀 건물을 보는 것이옵니다. 황공하옵게도 황제 폐하께서 그리 약조하여 주셨지요.”
“황제께서 귀비를 크게 귀애하는군.”
“태후 마마는 먼 훗날까지 기다리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황제 폐하가 황궁을 지키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곳은 새장이 아니옵니다. 어디든 가실 수 있으십니다.”
이번에야말로 금채영은 제대로 놀라고 말았다. 선황제가 승하하고 나면 황태후를 제외한 나머지 후궁들은 대부분 제 살길을 찾아 황궁을 나간다. 황태후 역시 황궁에만 붙어 있지 않았다. 황제가 된 아들 덕을 보며 전국에 있는 불사와 신사를 찾아다닌다. 반쯤은 유람이었다.
지금껏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류희겸의 말에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이제 자신에게 그럴 선택권이 생겼다는 것을.
“귀비의 말이 맞아. 덕분에 내 눈이 뜨였어.”
“송구합니다.”
“만에 하나라도 황제께서 금상란을 선택한다면, 그리 보는 눈이 없으시냐 내가 타박하겠다. 아니면 머리를 싸매고 눕기라도 해보아야지. 한 번도 그래 본 적 없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아. 생전 안 해보던 일을 할 거라 생각하니 갑자기 들뜨는구나. 귀비는 걱정하지 마라. 이제 물러가 보아.”
조금 전까지 수심이 어리던 금채영의 얼굴에 홀가분한 미소가 지어졌다. 류희겸은 정중히 예를 올렸다.
*
류희겸이 다실을 나와 건물 밖으로 나가자 금상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규수들도 모두 건물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귀비 마마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어색한 분위기를 잊어버린 듯 금상란이 웃으며 류희겸 앞으로 다가왔다. 류희겸은 그녀를 무시하는 대신에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입니까?”
“괜찮으시다면 저희들과 어울려주세요. 아까는 소녀가 잘못하였습니다. 소녀가 귀비 마마께 궁금한 것도 많고, 가까워지고 싶어 그리하였습니다. 소녀가 사가에서 아주 좋은 차를 가지고 왔답니다. 서역에서 온 것인데, 맛이 독특하여 귀비 마마께 맛보여 드리고 싶어요.”
조곤조곤한 어조와 고운 미소는 금상란이 진정으로 류희겸와 친해지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조금 전의 기묘한 악의를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이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특히나 금상란의 고운 얼굴은 사내는 물론이고 여인들도 좋아할 만했다.
류희겸은 진혁위와 닮은 금상란을 냉정히 바라보았다. 그녀에게서 악의를 느끼지 못했다 하더라도 차를 마시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상란 소저의 마음은 고마우나 일이 있어 함께 차를 마시지 못하겠습니다. 편히 쉬세요.”
“그러지 마시고 차를―”
평이하게 거절의 말을 한 류희겸은 막 걸음을 떼려 했다. 그때 금상란이 류희겸의 팔을 잡아채려는 듯 손을 뻗었다. 류희겸은 그 손이 닿기 전에 몸을 슬쩍 뒤로 물렸다.
순간 금상란의 손이 허공을 헤맸다. 동시에 몸의 중심이 앞으로 쏠려 허둥지둥하다가 무릎을 꿇는 자세로 넘어졌다.
“아앗.”
무릎을 모질게 찧은 금상란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아가씨!”
“상란아!”
궁녀와 다른 규수들이 깜짝 놀라며 넘어진 금상란을 일으켜 세웠다. 금상란은 혼자 넘어졌지만 억울한 눈으로 류희겸을 보았다.
“소녀에게 어찌 이러십니까?”
“무례하다. 어디서 경망하게 구는 것이냐?!”
류희겸 대신에 나선 것은 심양설이었다. 상급 궁녀인 심양설의 엄한 호통에 금상란이 울먹거렸다.
“소녀가 귀비 마마와 친해지고 싶어―”
“금가의 상란 소저는 낯선 사내와 친해지고 싶다면 팔을 붙잡나 보군.”
류희겸은 궁색한 변명을 하려는 금상란의 말을 가로챘다. 딱딱한 어조에 순간 금상란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소녀는 그저―”
“본궁은 사내다. 네가 팔을 덥썩 붙잡아서는 안 되는 상대다. 알고 한 것이든, 모르고 한 것이든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니 반성하라.”
다시 한번 금상란의 말을 막은 류희겸의 목소리는 무섭게 울렸다. 한때 전장을 지휘한 류희겸의 기백은 귀하게 큰 규수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울먹이던 금상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대가의 규수로 품행이 바르지 못하다는 지적은 부끄러워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류희겸이라는 사람 자체가 무서웠다. 분하고, 겁이 났고, 그것에 다시 화가 났다.
분기를 이기지 못한 금상란이 눈물을 흘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애처로운 광경이었으나 류희겸은 금상란을 달래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금상란을 지나쳐 황태후궁을 나섰다.
수경궁 밖에는 류희겸이 타고 온 가마가 대기하고 있었다. 가마를 타고 화영궁으로 돌아오자 심양설이 류희겸을 응원했다.
“훌륭하셨습니다.”
“그런가? 내가 연약한 규수를 핍박한 것 같아.”
“핍박이라니요. 아닙니다. 귀비 마마의 위엄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금가의 규수께서 잘못한 게 맞습니다. 마마께서 사내가 아니라 여인이라도 하더라도 감히 귀비 마마의 팔을 마음대로 잡아서는 안 됩니다. 마마께서는 아니 그러시겠지만, 웃전에 따라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는 무례입니다. 태후 마마께서 조용히 돌려보낸다 하시니 다행한 일입니다.”
“태후 마마께서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어.”
류희겸은 금채영을 걱정하며 화장대 앞에 앉았다. 조금 전과는 반대로 심양설이 류희겸의 머리에서 장신구를 하나씩 빼기 시작했다.
“소인이 주제넘게 말씀 올리지만, 태후 마마께 순행을 권하신 것은 정말 잘하시었습니다.”
“말을 하다 보니 그리되었네.”
“태후 마마께서는 삼십 년 가까이 황궁에만 계셨습니다. 소인들이야 때로 황궁 밖에도 나가고 가족들도 만나고 하는데, 태후 마마께서는 그런 적이 없으셨습니다. 지금은 폐서인이 된 모씨 때문에 피서 행궁에도 자주 가지도 못하셨지요. 태후 마마께서는 괜찮으시다 하셨지만, 그게 괜찮은 일이 아니니까요.”
“그렇지. 날이 풀리면 태후 마마께서 꽃나무가 많은 신사에 참배하러 가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대장공주님께 동행해 주십사 부탁드리면 그리해 주실 듯싶네.”
“좋은 생각이십니다. 두 분 다 좋아하실 겁니다.”
황궁에서 오래도록 금채영을 모셨던 심양설이 마치 자신의 일인 듯 좋아했다. 예기치 않게 일이 커졌지만 류희겸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실수 아닌 실수에 자책하던 금채영에게 순행을 권한 것은 우연이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기뻐한다면 좋은 일이었다.
류희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다가 슬쩍 웃었다. 아직 자신의 머리는 까맣기만 했다. 흰 머리가 된 황제와 머나먼 서역에 있는 흰 건물을 보러 갈 날이 언제가 될지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그때를 기다리는 것은 삶의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대장공주님께 서신부터 써야겠어.”
장신구를 모두 치워버린 류희겸은 당장에 서재로 향했다. 이런 일은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
수경궁 안뜰에서 있었던 소란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관련자들의 귀에 들어갔다. 황태후는 금상란을 불러 행실에 조심하라 주의를 주었다. 진혁위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금상란의 아버지인 금묵임은 늦은 저녁에 황제를 찾아 눈물을 쏟아 냈다.
“폐하. 상란의 무릎에 큰 멍이 들었다 하옵니다. 귀비 마마께서 너무하시옵니다. 상란은 귀비 마마의 체격에 반절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이온데, 어찌 위협을 하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금묵임의 읍소는 편전 안에 애달프게 울렸다. 상석에 앉은 진혁위는 금묵임의 머리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오늘 낮에 황태후궁에서 일어난 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진혁위의 귀에 닿았다. 다실에서, 그리고 안뜰에서 오간 대화는 한마디도 빠짐없이 알고 있었다. 하여 금묵임이 말하는 위협은 과장이자 거짓말이었다.
“짐이 들었던 바라와는 다르군. 금상란이 귀비의 팔을 끌어안으려고 했다던데.”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곳에 사람이 몇이나 있었는지 아는가? 종숙은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를 입단속시켜야 할 텐데.”
“폐하. 누군가가 황제 폐하의 혜안을 흩트리고 있습니다. 황제께서 직접 듣고 직접 보지 않으신 일들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음을 알아주십시오.”
고개를 조아란 금묵임은 절개를 지키는 충신처럼 절절히 외쳤다.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금묵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금묵임은 금상란이 전한 사실을 자기 좋을 대로 믿어버렸다. 류희겸이 딸의 손을 내치며 물러나면서 위협을 했다고 말이다. 진혁위가 보는 눈이 많았다고 하는 경고도 류희겸의 술수라고 여겼다.
진혁위가 황제가 된 순간 금씨 가문의 번영은 약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금상란이 황후가 된다면 자신은 승상이 될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류희겸도 희범영도 치워버려야 했다.
욕망이 금묵임의 눈과 귀를 막아버렸지만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금묵임을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진혁위에게 더욱 잘 보였다.
외종숙이 씹어 먹지 못할 야심을 꿈꾸든 말든 진혁위는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가 류희겸을 황제의 혜안을 막는 요부로 걸고넘어진다면 문제가 달라졌다.
황제가 된 진혁위는 류희겸에 관한 소문과 민심을 세심하게 조율하고 있었다. 누명을 쓰고 쫓겨난 귀장군. 선대 황제에게 만독화를 바친 충신. 양번국을 되찾아온 지략가. 등등의 류희겸이 칭송받을 수 이야기를 채제승을 통해 거리에 퍼트렸다.
류희겸의 말대로 그의 출신은 꽤나 큰 약점이었기에 여러 가지 것들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다. 희범영을 류희겸의 양부로 삼으면서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 사람들이 좋아할 이야기를 만들어 흘리기도 했다.
후궁전을 비워놓은 것도 자신의 취향 때문이라고 공공연히 알렸다. 원래부터 남색가라 알려진 진혁위는 동등하게 검을 겨룰 수 있는 사내를 좋아한다고 조회에서 당당하게 말해 두었다. 물론 대신들은 취향이야 바뀔 수 있다면서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명분을 하나씩 만들어두고 있는 와중에 금묵임이 훼방을 놓고 있었다.
선을 넘지 말라고 그렇게 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한 금묵임을 털어버릴 방법은 많았다. 다만 성군이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나름의 정성을 쏟아야 하는 것이 까다로웠다.
“금상란에게 태의와 약을 보내어 위로할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제 물러가라.”
“물러가옵니다.”
진혁위의 명령에 금묵임은 재빠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금묵임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놓치지 않은 진혁위는 몇 번째인지도 모를 쓴웃음을 삼켰다.
황제가 되면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상주문과 장계를 처리하는 것은 지루했지만 그럭저럭 보람찼다. 하지만 제 분수를 모르고 뻗대는 이들을 어르고 달래야 하는 것은 성정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우소진을 불러 금상란에게 태의와 약을 보내라 이른 진혁위는 탁자 위에 쌓인 상주문을 집어 들었다. 오늘 저녁에 류희겸의 얼굴을 보려면 얼른 이것들을 해치워야 했다.
*
그날 밤, 류희겸은 뜻밖의 상황에 직면했다.
심양설이 검게 옻칠을 한 작은 찬합을 류희겸에게 내밀었다. 넉넉한 미소를 지은 심양설은 아주 특별한 조언을 해주었다.
“소인이 율황고(栗黃糕)를 만들었습니다. 꿀에 절인 밤을 넣어 만든 떡은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간식이옵니다. 이걸 들고 폐하를 찾아가세요.”
“폐하께서는 편전에 계실 터인데? 어찌 내가 가겠는가.”
심양설과, 심양설이 들고 온 찬합을 번갈아 바라보던 류희겸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오늘 저녁에도 우소진이 찾아와 황제께서 공무가 바빠 밤이 늦어야 화영궁을 찾아올 것이라 하셨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기에 류희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늦게나마 찾아오는 것이 어디냐고 안도했다.
어제 아침에 있었던 일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여야 할 터인데 진혁위는 계속 바빴다. 조바심이 나기는 했지만 늦은 밤이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니 간식을 들고 편전에 가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편전은 황제가 대신들과 국사를 논하고 정무를 처리하는 곳이었다. 후궁인 자신이 황제의 부름도 없이 편전에 걸음을 했다가는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가셔도 됩니다. 밤이 늦지 않았습니까? 대신들도 대부분 퇴궐하였을 겁니다.”
“그래도…….”
“마마께서 간식을 챙겨드리면 폐하께서도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우 공공에게 들었는데, 폐하께서 축시(丑時)가 넘도록 일을 하신다 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부군을 챙길 사람은 내자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선황 시절에 많은 비빈들이 간식을 들고 편전을 찾았습니다. 조금의 흠도 되지 않습니다.”
심양설의 설득이 아주 틀린 말이 아니라 류희겸은 아주 짧게 고민했다. 선례도 많이 있다니 마음이 기울어졌다.
“알았네.”
류희겸은 심양설이 내민 찬합을 받아 들었다. 여하튼 간식을 핑계 삼아 조금이라도 일찍 진혁위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괜찮았다.
*
세상 모든 일에는 처음이 있었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밤에 간식이 든 찬합을 들고는 황제의 편전 앞에서 기다리던 류희겸은 처음으로 야숙을 했던 때를 떠올렸다. 이른 봄에 천막 하나 없이 피풍의를 뒤집어쓰고 맨몸으로 초원에서 밤을 지새우던 기억은 아직도 새로웠다.
바람은 불어대고 멀리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가득 찬 하늘에는 별이 쏟아질 듯 가득했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불침번을 서는 것 또한 처음이라 감기는 눈을 부릅뜨느라 고생했다.
그랬기에 지금의 일이 나중에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가 궁금했다. 어쩌면 낯선 민망함이 될지도 몰랐다.
“마마. 폐하께서 얼른 안으로 듭시라 하셨습니다. 내실은 따뜻하옵니다. 어서 드십시오.”
진혁위의 허락을 받으러 갔던 우소진이 뛰다시피 다가와 류희겸을 안으로 안내했다. 장현전 내부 장식은 기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입궁 첫날에 들었던 장현전은 선황제 시절 그대로였지만, 지금은 같은 장소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화려하면서도 고아한 멋이 있는 내실에 들어서자 훈기가 몸을 감쌌다. 바깥이 겨울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따뜻했다.
“우 공공의 말대로 내실이 따뜻하군.”
“폐하께서 상주문의 비답을 적고 계시는 중이십니다. 금방 마무리하신다 하였으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알았네.”
우소진도, 그리고 심양설도 모두 눈치껏 조용히 내실을 빠져나갔다. 혼자가 된 류희겸은 찬합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는 내실을 천천히 서성거렸다.
진혁위의 얼굴을 보겠다고 호기롭게 편전까지 왔다. 진혁위에게 물어볼 것은 하나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로 밥을 먹다 말고 훌쩍 떠났는지 답을 듣고 싶었다.
“귀비.”
진혁위의 목소리에 류희겸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진혁위가 내실에 들어 있었다.
“귀비가 간식을 가지고 오다니.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그리 서 있지 말고 여기 앉아……라.”
진혁위가 활짝 웃으며 류희겸의 어깨를 안으려고 팔을 뻗었다. 그 순간에 류희겸이 손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제 밤처럼 헛손질을 한 진혁위와 류희겸 사이에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또 피했군.”
“이번에도 놀래어……. 아픈 거 아닙니다. 태의를 부르지 마십시오.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류희겸은 얼른 진혁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한번 크게 놀란 심장은 금방 평정을 찾았다. 자신도 왜 놀라는지 알 수 없지만 아픈 건 아니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진위를 확인하려는 진혁위의 눈이 날카롭게 류희겸에게 닿았다. 다시 손을 뻗어 류희겸의 얼굴과 어깨, 팔을 만지며 상태를 확인했다.
“무서울 것 없는 귀비가 나를 보고 놀랐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신첩도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이유를 모르니 태의에게 보여야지. 우소진.”
괜찮다는 말은 진혁위에게 통하지 않았다. 진혁위는 기어코 태의를 불렀다. 그제 밤과 마찬가지로 부름을 받고 온 두 명의 태의가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고서야 진혁위가 굳은 얼굴을 폈다.
“귀비가 연약하여 큰일이다.”
“신첩은 튼튼하옵니다.”
“그렇겠지. 간식이나 내어보거라. 무엇을 가지고 온 것이냐?”
류희겸은 탁자 위에 올려둔 찬합에서 떡이 든 접시를 꺼내어 진혁위 앞에 놓았다. 찬합 안에 뜨거운 돌을 넣어 온 덕분에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떡은 식지 않고 아직도 따끈따끈했다.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거라 하여 심양설이 챙겨주었습니다.”
“율황고로군.”
“하나 드셔보시옵소서.”
“내가 어제 아침에 엉뚱하게 군 거 안다. 울컥 하는 기분에 귀비에게 싫은 소리를 할까 봐 자리를 피했다. 어제오늘 계속 바빠서 귀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사실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면 되는데, 차분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어.”
떡을 집지도 않은 진혁위가 한꺼번에 쏟아 내는 말에 류희겸은 눈만 깜빡거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고 온 것이기는 한데, 진혁위가 먼저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그렇게 눈을 깜빡거리면 예쁘다는 거 알면서 그러는 거지?”
“……?”
“하하하. 귀비가 놀라니까 더 예쁘다.”
“무엇 때문에 심란하셨는지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류희겸은 진혁위에게 말려드는 대신에 핵심을 짚었다. 그러자 진혁위가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며 웃었다.
“이럴 때면 눈치가 빠르지. 내가 너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다.”
“하명하십시오.”
“폐하. 신첩만이 폐하의 짝이고 정인이옵니다. 후궁전에는 아무도 들이지 마세요.”
“……!”
웃음기가 담긴 명랑한 목소리가 조용한 내실에 울렸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류희겸은 뻣뻣하게 굳은 채 웃고 있는 진혁위를 보았다.
“왜 말을 못 하느냐?”
“신첩이, 감히 신첩이 어찌 그리 말하겠나이까.”
“그럴 줄 알았다. 나는 너만 있으면 되는데, 너는 다른 이가 있어도 된다고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아. 그게 후궁의 귀감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러지 마라. 내가 네게 다른 남자나 여자를 만나도 된다고 하면 어떻겠느냐? 따르겠다고 할 거야?”
오늘 낮에 수경궁에서 오갔던 대화는 한마디도 빠짐없이 진혁위의 귀에 들어왔다. 금상란은 입으로 죄를 지었다. 그리고 류희겸이 금상란에게 냉담하게 굴었고, 그리고 위축된 금채영에게 순행을 권하였다. 차회의 결과 자체는 제법 괜찮았다.
다만 진혁위가 신경 쓰이는 것은 류희겸이 후궁전에 사람을 들어온다면 가장 먼저 환대한다고 했다는 점이었다. 어제 아침에 류희겸이 후궁에 사람을 들이게 된다면 힘을 실어주겠노라 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대의를 아는 류희겸이 할 법한 말이었다. 하지만 류희겸이 그럴수록 진혁위는 속이 말이 아니었다.
자신이 제대로 믿음을 주지 못한 것인가 후회스럽기도 했고, 또한 류희겸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연정인지, 충정인지, 혹은 편안함인지 모른다고 하였지만 진혁위는 상관없었다. 류희겸 같은 사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챙기며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란함을 온전히 떨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나 속 좁은 사람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 더 나쁘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류희겸에게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나았다.
아니나 다를까 크게 눈을 뜬 류희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류희겸은 당황하면 손을 한 번 폈다가 주먹을 쥐는 버릇이 있었다.
“폐하. 그렇지 않습니다. 신첩이 어찌…….”
“그것 봐라. 너도 싫지 않느냐.”
“하오나 폐하. 신첩만이 폐하의 짝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과분하게도 폐하께서는 신첩에게 많은 것을 약조해 주셨지요. 하나 앞날이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느 날 폐하께서도 어쩌지 못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신첩은 폐하의 가장 큰 지지자이자 신하입니다. 무리한 약조를 해달라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찌 못할 순간 따위는 만들지 않는다. 그럴 바에야 다 엎어버리지. 성군이 되겠노라 약조하였지만, 귀비가 걸려 있으면 달라질 것이다.”
“그럴수록 신첩이 폐하의 오점이 될 뿐입니다. 신첩이―”
진혁위를 말리려던 류희겸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침묵을 진혁위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신첩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짓말하는 거 티가 난다. 그냥 말해라. 귀비는 날 못 이긴다.”
“신첩이…… 신첩이 음인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후계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길게 숨을 들이쉰 류희겸은 가장 큰 근심거리를 천천히 말했다. 인력으로 되지 않은 일을 굳이 언급하여 진혁위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황제의 후계 문제는 언제나 민감한 문제였다. 예고도 없이 열감이 불쑥 오르내리고 있으나, 음인이 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최악의 순간을 대비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었다.
류희겸은 각오를 다지고 가만히 진혁위를 보았다. 잠시 놀란 듯한 진혁위가 곧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런. 진실로 내가 잘못하였구나.”
“폐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진혁위가 류희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류희겸의 허벅지를 붙잡다시피 하면서 몸을 기댔다. 허벅지 위에 턱을 괴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류희겸은 혼이 나갈 것 같았다. 아무리 진혁위가 자신의 부군이라고 하나 그는 황제였다. 지고하신 천자께서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은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잠, 잠시만요. 이러지 마십시오.”
“뭘? 내 부인에게 애교를 부려볼 것이다. 그리고 여기 아무도 없다.”
류희겸이 진혁위를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했지만 진혁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의 경험으로 알지만, 이럴 때면 진혁위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찌 이러십니까?”
“애교를 부릴 거라니까? 대연국 제일의 미남의 얼굴이 예쁘지 않느냐?”
“폐하.”
예쁘기는 예쁘다. 그러나 황제께서 이렇게 가벼이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말이 짧은 부름으로 끝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혁위가 예쁜 얼굴로 화사하게 웃었다.
“내가 너만 있으면 된다고 한 것은 말 그대로다. 음인이 되는 것이나 아이가 생기는 것이나 아무 상관 없다. 음인이 되지 않아도 되고, 아이가 없어도 돼.”
“예?”
순간 류희겸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이가 없어도 되다니? 황제에게는 후계자가 필요했다.
“아이가 아니라 네가 있어야 해.”
“폐하.”
“네게 확신을 주지 못하고 불안케 하였으니 내 잘못이지.”
천천히 울리는 진지한 말에 류희겸은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아래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열감이 심장을 뜨겁게 하는 것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마치 뜨거운 물에 머리끝까지 잠긴 듯 따뜻하고 숨이 막혔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감동을 주는 것은 진혁위의 특기였다. 그래도 류희겸은 미혹되지 않았다.
“신첩은, 폐하께 부담이 되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부담이 되지 않게 하는 것 또한 내 몫이지. 네가 음인이 되지 못하여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어. 방법이 있으니까. 왜? 못 믿겠느냐? 황제에게 후계자가 없으면 형제에게, 혹은 조카에게 물려주는 법이다. 요즘 4형이 얼마나 일을 잘하고 있는지 귀비는 모르려나? 4형의 장자인 진유옥 역시 제법 명석했지. 한 오 년쯤 후에 진유옥에게 양위를 하고, 4형을 나랑 같이 상황(上皇)으로 앉히고 난 다음에 둘이서 서역으로 가면 돼. 홀랑 튀어버리는 거지.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귀비는 음인이 될 터이니까. 그건 내 장담한다.”
진혁위의 흥겨운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어이가 없다가 감탄을 하기를 반복하던 류희겸은 입을 다물었다.
정군왕은 오랜 칩거를 마치고 진혁위를 도와 대임을 맡고 있었다. 진혁위의 말대로 지금 당장 후계자를 고민해야 한다면 정군왕과 그의 아들들이 가장 앞줄에 놓이는 것은 당연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준비한 진혁위의 꼼꼼함이 놀라웠다. 하지만 자신이 음인이 되는 것은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건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설명을 안 한 게 있다. 책을 찾아보니, 양인은 짝이 된 음인에게서 좋은 향기를 맡을 수 있다 하더군. 네게서도 달콤한 과일 향기가 난 적이 있다.”
“신첩이 음인이 되었습니까?”
“아니. 처음 향기를 맡은 것은 지난 전쟁 때였다. 다음은 네가 입궁하던 날 밤이었고. 이후에도 한 번 더 있었지. 새우를 잔뜩 구워 먹고 잠든 밤이었어. 나는 네가 천천히 변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서 굳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잘못이었어. 근심할 것 없다. 내가 다 알아봤다. 천천히 변하기도 한댔다. 사내는 특히 더 그렇다고 했다.”
음인이 되지 않아도 된다면서도, 너는 음인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하는 것은 진혁위다웠다. 류희겸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신첩은…… 이제 근심하지 않겠습니다.”
“좋다. 그럼 내 말을 따라 해라. 폐하. 신첩만이 폐하의 짝이고 정인이옵니다. 후궁전에는 아무도 들이지 마십시오. 웃지만 말고 해보아라. 내가 이리 애교를 부리니, 한 번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애교가 아니라 애원을 하다시피 하는 진혁위는 집요했다. 류희겸은 눈꼬리를 접어가며 웃는 남자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손끝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이, 그리고 자신을 향해 웃는 미소가 모두 따스했다.
류희겸은 진혁위를 선택했다. 그가 황제가 되기를 바랐다. 그의 옆에 있고 싶었다. 그랬기에 그의 오점이 될 것을 알면서도 황제의 귀비로 남았다.
황제의 가장 충직한 신하로 목숨을 바치겠노라 맹세했다. 세월이 흘러 약속과 맹세가 퇴색되어 버린다 하여도 자신의 선택에 한 점 후회가 없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너뿐이라고 속삭인다. 꽃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당신께서 황제이시기에 신첩은 그리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저의 짝인 당신을 믿을 뿐입니다. 언젠가 먼 서쪽의 검은 땅에 있는 하얀 건물을 같이 보러 가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말을 듣지 못했음에도 진혁위는 웃었다. 차돌멩이 같은 사내는 이럴 때조차 쉬이 귀에 단 말을 해주지 않는다.
그래도 먼 미래의 약속은 충성 맹세만큼이나 신실한 것이었다.
진혁위는 류희겸을 타고 오르다시피 하며 몸을 일으켰다. 빤히 바라보고 있는 류희겸에게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폐하?”
“예뻐해 달라니까?”
달콤하게 속삭인 진혁위가 다시 입술을 맞댔다. 혀가 얽혔다. 혀끝이 입천장을 훑는 느낌에 류희겸은 열을 느꼈다.
황제가 정무를 보는 편전에서 이러면 안 되는 법이었다. 그럼에도 하지 말라는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인내심을 쥐어짠 류희겸은 진혁위의 어깨를 밀어냈다. 다행히도 남자는 입술을 떨어트려 주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폐하.”
“왜?”
“편전이지 않습니까?”
“편전이 뭐?”
짧게 대화를 하는 사이에도 진혁위는 계속 입술을 맞댔다. 막무가내로 구는 장난스러운 유혹은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가벼운 입맞춤과 함께 진혁위가 허리를 감싸 안아 왔다. 오싹함에 전율하던 류희겸은 정신이 다잡으며 진혁위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체통을 지키십시오.”
“짐의 귀비는 철벽이 따로 없군.”
진혁위가 투덜거리면서 손바닥을 핥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의 느낌에 류희겸은 소리 없이 떨었다. 다정한 입맞춤이, 맞닿은 몸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그리고 애정이 담긴 미소가 너무 좋아서 숨이 쉬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지금껏 오락가락하는 열감은 음인이 될 징조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심장이 뛰고, 열이 오르고, 때로는 어찌할지 모를 정도로 바보처럼 당황했다.
제멋대로 술렁이는 감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무언가에 쫓기듯 초조하고 당혹스러운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진혁위가 좋았다.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데도 들끓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살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어찌 대답이 없느냐?”
손가락을 야금야금 깨물던 진혁위가 은근히 재촉했다. 다시 한번 숨이 막히고서야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감정이 흘러넘친다는 것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제야 오롯이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은 곧 환희가 되었다.
그제 밤처럼, 그를 한입에 삼키고 싶은 폭력적인 충동과 더불어, 꽃을 닮은 미소를 지을 줄 아는 남자가 귀하고 소중하여 품에 안고 싶어졌다.
보드라운 감정은 역동적인 격류가 되어 불꽃이 되었다. 진혁위를 끌어안고 싶어 저절로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억눌렀다. 깨달음과 별개로 참아야 할 때라는 것은 알았다.
“신첩은 화영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류희겸은 진혁위에게 잡힌 손을 빼내었다. 그리고는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는 진혁위의 모양 좋은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진혁위가 슬쩍 혀를 내밀기에 피하지 않고 슬쩍 눌렀다 뗐다. 노골적인 유혹에 진혁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이러고 간다고?”
“아주 늦더라도 화영궁에 납셔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중까지 기다릴 필요 없다. 지금 당장 가면 되지.”
“일은 다 마치시고 오십시오.”
류희겸은 진혁위의 입을 다시 막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갈급하다 하더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하는 법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유혹적인 미소를 흘리던 진혁위가 결국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번에야말로 여우가 둔갑한 건 줄 알았더니, 짐의 귀비가 맞군. 그래도 이대로 훌쩍 가버리지 마라. 애달파 하는 부군을 조금은 예뻐해 줘야지.”
진혁위가 반짝거리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간지러운 애교에 류희겸은 두말 않고 입술을 맞대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고운 낭군께서 예뻐해 달라고 하니, 당연히 그리해 주어야 했다.
◇ ◇ ◇
정오부터 내린 눈은 오후 내내 그칠 기미 없이 켜켜이 쌓여갔다. 지난 며칠 동안 금씨 가문의 규수들로 활기가 돌았던 황태후궁은 오랜만에 고요함에 빠져들었다.
모두가 크고 작은 화로를 끼고 몸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을 때였다. 금상란 역시 화로 옆에서 금묵임과 마주 앉아 조용히 독대했다.
“폐하의 용안을 뵙지도 못하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태후 마마께서는 조용히 있다가 돌아가라고만 하시고요. 아버지. 어쩌지요?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요? 태후 마마께서 다른 말씀 없으셨나요?”
초조함이 가득한 금상란의 채근에도 금묵임은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진혁위가 태자로 세워질 때부터 금묵임은 금채영을 찾아가 금씨 가문의 번영을 피력했다. 그에 관심을 보이던 금채영이 어째서인지 며칠 전부터 냉랭하게 굴었다.
아무리 금상란이 미색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보고 말이라도 나누어봐야 눈길이 가는 법이었다. 금묵임은 그 자리를 황태후가 마련해 주리라 믿었다. 솔직히 황태후가 은밀히 금상란을 황제의 침전에 보내면 그걸로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도 황태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틀 후면 금상란을 비롯한 아이들은 모두 제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애가 탄 금묵임은 며칠 전부터 황태후에게 제발 도와달라 애원했다. 가문의 번영과 영광도 들먹였다. 하지만 황태후는 아이들을 잘 데리고 있다 조용히 돌려보내겠노라고 딱 잘라 선을 그었다.
금묵임은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황태후가 혜비였던 시절에 재물을 댄 것이 자신이었다. 사람이란 은혜를 입으면 갚아야 하는 법이었다. 물론 진혁위가 황제가 되면서 빠른 승차를 하긴 하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가문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딸이 황후가 되고, 자신이 국구가 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도 황태후가 모르는 척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금묵임은 이를 으득 갈았다. 황태후가 소심한 것은 예전부터 알았으니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었다. 이제 살길은 스스로 찾아봐야 했다.
“그 남창은 어찌하고 있으냐?”
황제의 귀비를 스스럼없이 남창이라 칭한 금묵임은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건 금상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날 이후로 얼굴조차 본 적 없어요.”
“천하디천한 것이 황제 폐하의 혜안을 흐리고 있다. 그것부터 처리해야 해.”
금묵임은 노비 출신의 후궁에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작고 여린 딸아이를 밀친 것으로 보아 군인 출신답게 성정이 포악하고 사납다고만 여겼을 뿐이었다.
그런데 황궁 안에서 소문이 이상하게 퍼졌다. 귀비에게 예의 없이 군 금상란의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소문의 출처는 뻔했다. 교활하고 욕심 많은 남창이 황제의 혜안을 흐리다 못해 없는 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렇게 손 놓고 당할 수만은 없었다.
“내가 준 것을 가지고 있느냐?”
“예. 하지만 황제를 뵐 방법이 없으니 무소용합니다.”
“방도가 없으면 궁리를 해야지. 황제보다는 천한 것을 불러내기 쉬울 것이다. 그에게 써라.”
“하, 하지만 잘못하면 제 평판만 나빠집니다.”
금묵임의 명령에 금상란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자신의 화장갑 안에는 비약이 들어 있는 푸른색 자기병이 있었다. 기회가 왔을 때 황제에게 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귀비에게 쓰라니. 잘못했다가는 자신의 신세만 망치고 끝날 수도 있었다.
“그놈이 네 옷을 찢게 한 다음에 사람을 불러라.”
“아버지.”
“황제의 후궁이 요란하게 사고를 친다면 책임질 사람이 누구겠느냐?”
은밀한 속삭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상란은 한순간에 알아차렸다. 자신은 금묵임의 하나뿐인 적녀이며 황태후의 종조카였다. 그런 자신이 사내 후궁에게 희롱을 당한다면 책임질 사람은 응당 황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금상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자신을 망신 준 류희겸에게 되갚아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어요.”
“잘할 자신이 있느냐?”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머리를 맞댄 두 부녀는 조용히 계략을 짰다. 황궁의 벽에도 귀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대화는, 제국의 주인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
“금씨 부녀가 비약을 쓸 거라 마음먹었더구나.”
바둑판을 내려다보고 있던 진혁위는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류희겸이 황급히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았다. 류희겸의 눈에는 황망함이 어려 있었다.
눈이 내리는 겨울날에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바둑만큼 좋은 것도 드물었다. 바둑 실력은 류희겸이 조금 더 좋았다. 그러나 지기 싫어하는 진혁위 때문에 재미로 두는 바둑은 한 번씩 과열되곤 했다.
길게 이어지는 바둑을 두며 하루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진혁위는 후궁에게 허락되지 않는 정치와 관련된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진혁위는 류희겸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현명함을 믿었다. 특히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정확하게 핵심을 짚어 내는 조언은 귀한 것이었다.
필요에 의해 류희겸에게 말하지 못하는 일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금묵임과 금상란이 꾸미고 있는 가당찮은 계략은 반드시 류희겸이 알아야 할 것이었다.
“비약이요?”
“그래. 비약이다. 눈을 뜨고 있는데,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라고 하지.”
“설마, 편전의 태감이 연류되어 있는 것입니까?”
류희겸의 비약적인 추측에 진혁위는 쓴웃음을 삼켰다. 황제에게 비약을 먹이려면 측근을 회유해야 하는 게 맞긴 했다. 비약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자신을 걱정해 주는 류희겸 때문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아니라, 귀비에게 쓸 것이라던데.”
“……신첩에게요?”
뜻밖의 말에 류희겸이 눈을 크게 떴다. 내게? 왜? 소리 없는 의문에 진혁위가 답해 주었다.
“전에도 말했지 않느냐? 귀비가 사고를 치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세상에.”
“욕심에 눈이 멀었지. 쯧.”
진혁위는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이전 번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류희겸에게 경고를 하긴 했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멍청하게 굴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황궁에 입궁한 금씨 가문의 규수들 중에 금상란의 언행은 제법 구설수에 올랐다. 후궁의 비어 있는 전각을 하나씩 돌아다니며 내부를 구경하고 이곳이 마음에 든다며 야단스럽게 굴었다는 이야기가 진혁위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금묵임과 금상란이 이루지 못할 꿈에 부풀어 있는 것이야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류희겸에게 계략을 벌인다면 문제는 달라졌다.
욕심에 눈이 먼 금묵임은 선을 제대로 넘었다. 자신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대역죄나 강상죄로 처벌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물론 그럴 마음이 있었다. 그것도 확고하게.
“신첩은 그들을 만날 일이 없습니다.”
“내일이면 차를 마시자고 불러낼 것이다. 명화원에서 판을 벌이고, 귀비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다가 쓰러져 버릴 테지.”
과격하기 짝이 없는 예언이었다. 그러나 비약을 쓸 마음을 먹었다면 일을 크게 벌이는 것이야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신첩은 오늘 밤부터 아파야겠군요.”
“현명한 선택이다.”
진혁위는 분란을 싫어하는 류희겸의 선택을 존중했다. 덫을 보고 건드리기보다는 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외람되오나, 폐하께서 어찌하실지 알려주십시오.”
어느새 꼿꼿하게 앉은 류희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는 귀비가 되었다고는 하나 성격이란 쉬이 바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뛰어난 장군 출신의 사내는 어느새 충직한 신하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고지식한 사내답다 싶었다. 그리고 저 모습에 반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눈을 접으며 웃은 진혁위는 손 안에서 굴리던 검은 돌 하나를 바둑판 위에 두었다. 회심의 한 수였다. 그러나 곧 류희겸이 흰 돌을 놓아 검은 돌을 악수로 만들었다. 한 수 물러달라고 하고 싶은 것을 참은 진혁위는 사활을 찾아 눈을 빛냈다.
“제 분수를 모르는 금묵임은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비약 말고도 그가 저지른 잘못은 많이 있다. 돈을 받고 관직을 파는 것은 대역죄지. 왜? 내게 처가가 없으니 외가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을 하려거든 관두거라. 금묵임을 내치고 외숙부들을 불러오면 되니. 그러면 어머니께서 좋아하실 것이다.”
류희겸을 황제의 혜안을 흐리는 요부라 음해하던 금묵임은 이미 자신의 눈 밖에 났다. 경고를 무시한 채 알량한 혈연관계를 믿고 날뛰는 자를 내버려 두는 것이 더 문제였다.
금묵임을 대신할 외가의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진혁위는 황제가 되자마자 지방관으로 전전하는 외숙부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때가 되면 처세도 능력도 괜찮은 그들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일 생각이었는데, 그걸 조금 앞당기면 그만이었다.
“대역죄라 하심은…… 사안이 심각해질 것입니다.”
“당연히 심각해야지. 황제의 외종숙을 좌천시키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니까.”
계략은 누구나 짜고, 누구나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를 상대로 한 계략이 들통났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법이었다.
진혁위는 일을 적당히 크게 키울 계획이었다. 매관매직은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이니 이참에 황제의 친족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보여줄 참이었다.
그렇게 류희겸과 이야기를 하며 바둑을 이어가는 와중에 우소진이 나타났다. 내각대학사인 정군왕이 급히 황제를 찾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눈이 이렇게나 내리는데, 퇴청을 안 하고 있다니.”
“급한 일일 것입니다. 편전 앞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니 얼른 일어나십시오. 날이 차갑습니다.”
류희겸의 재촉에 진혁위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가지 말라고 붙잡는 대신에 얼른 가라고 하는 것이 너무 류희겸다웠다.
“일을 너무 잘하는 형님이 오늘은 훼방꾼이 되어버렸어.”
즉위 초기에 대신들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진영겸을 내각대학사에 제수하였다. 내각대학사는 황제의 직무를 바로 옆에서 돕는 고문관이었다. 품계는 높지 않으나 그 중요성은 승상에 못지않았다.
진영겸은 일을 잘하였지만, 대신에 꼼꼼하다 못해 깐깐하기까지 하여 적당하게를 몰랐다. 물론 그래서 내각대학사를 삼은 것이지만 말이다.
손에 쥐고 있던 바둑돌을 통 안에 집어넣은 진혁위가 일어나자 류희겸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피풍의를 진혁위의 어깨에 걸치고 묶는 것까지 모두 류희겸이 직접 하였다.
“이거 받으십시오.”
나갈 준비를 끝나자 류희겸이 내민 것은 작은 손난로였다. 법랑으로 만든 작은 집기 안에 뜨거운 돌과 솔방울을 넣어 쥐고 다니면 손 시림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진혁위는 의아했다. 아주 어렸을 때는 몰라도 어느 정도 나이가 차고는 손난로를 들고 다닌 적이 없었다.
“이걸 왜?”
“눈이 내리니까요.”
“편전까지 금방이다.”
“손이 따뜻해집니다.”
진혁위는 류희겸이 쥐여주는 손난로를 얼결에 받아 들었다. 검은색 법랑에는 황금색 새가 그려져 있었고, 법랑을 감싼 짙은 보라색 비단에는 용이 수놓아져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기품과 정성이 느껴졌다.
기대감 어린 미소를 짓고 있는 류희겸을 보며 진혁위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화영궁에서 편전까지 걸어서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손난로는 고귀한 여인들이 쓰는 것이었다. 사내들은 보통 소매에 손을 넣거나 털토시를 썼다.
그런데도 굳이 손난로를 쥐여주는 류희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류희겸의 성격을 보자면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인 듯해서 더 그랬다.
“이 계절에 글을 많이 쓰시면 손이 차가워져서 걱정이었습니다. 화로에 손을 쬐는 것보다 이걸 옆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쥐면 금방 따뜻해집니다.”
눈에 미소를 담으며 웃는 류희겸을 보며 진혁위는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얼마 전부터 그랬다. 무심한 남자가 묘하게 살갑게 굴었다. 잘 웃고, 가까이 붙고, 스스럼없이 만지고, 또 이렇게 자꾸 챙겨주었다.
복수를 끝낸 이후로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여우가 둔갑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싫은 건 아니었다. 당연히 좋았다. 그러나 불안하기도 했다. 아픈 걸까? 누군가가 부추기는 걸까? 혹은 이상한 것을 보고 읽은 걸까?
얼마 전에 간식을 챙겨 편전을 찾은 것은 심양설이 등을 떠민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손난로는 심양설이 아니라 류희겸이 생각해 낼 법한 것이었다.
진혁위는 류희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류희겸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조차 파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로 류희겸이 변모한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걱정이 되는 것은 또 있었다. 얼마 전부터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손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수상했다. 태의는 아픈 곳이 없다고 했지만 혹시나 하는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진짜 아픈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하나뿐이었다.
잠시 말을 하지 않고 있자 류희겸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손난로를 쥔 진혁위의 손 위로 슬쩍 손을 얹은 류희겸이 차분히 속삭였다.
“혹여 신첩이 폐하를 곤란케 한 것입니까? 불편하시다면 신첩에게 다시 주시면 됩니다.”
목소리는 부드러우나 마지막 경고와 같은 말에 진혁위는 정신을 차렸다. 곤란한 것도 불편한 것도 없었다. 게다가 류희겸이 일부러 챙겨준 물건을 거절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아니다. 마음에 든다. 따뜻해.”
“다행입니다.”
“귀비의 말대로 곁에 두고 쓰겠다.”
“신첩의 마음을 알아주시니 기쁩니다. 우 공공. 번거롭겠지만 손난로가 식지 않도록 신경 써주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맡겨두십시오. 마마.”
우소진의 예의 바른 대답에 류희겸은 진혁위의 손을 놓고는 한 걸음 떨어졌다. 그리고는 살짝 삐뚤어진 진혁위의 피풍의를 바로 잡았다.
“폐하께서 늦게까지 편전에 계시게 된다면, 이전처럼 신첩이 간식을 들고 찾아가겠습니다. 괜찮겠지요?”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는 진혁위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진혁위가 의아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류희겸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손난로를 진혁위에게 쥐여준 것은 효용성 때문이었다. 금씨 가문의 규수들을 만나러 가면서 손난로를 직접 써보니 매우 따뜻했고, 자연스럽게 진혁위를 떠올렸다.
편전 안이 따뜻하기는 하지만 붓을 쥐고 글을 쓰다 보면 손이 차가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손난로를 가까이 두고 있으면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미쳤다. 거추장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진혁위가 필요 없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었다.
들뜬 마음이 표정과 언행으로 조금씩 새어 나온다는 것을 류희겸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차가운 날에 진혁위가 따뜻하기만을 바랐다.
류희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이좋은 두 사람의 모습에 아랫사람들이 흐뭇해 하는 것은 덤이었다. 심양설도 우소진도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류희겸의 명을 받고 손난로를 감싸는 비단에 수를 놓은 심양설은 뿌듯하기까지 했다.
오로지 진혁위만이 태의원의 태의들을 모두 불러 류희겸의 건강 상태를 제대로 알아보겠노라 단단히 마음먹었다. 아무 이상이 없다 하더라도 보약은 꼭 먹일 생각이었다.
“당연히 괜찮지만 늦지 않을 것이다. 형님 빼고는 다 돌아갔다니까.”
“예. 기다리겠습니다.”
“금방 돌아오겠다.”
진혁위는 확신에 찬 약속을 하며 돌아섰다. 눈이 오는 날에는 어디 가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과 붙어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 ◇ ◇
다음 날. 밤새도록 펑펑 내린 눈은 아침이 되자 거짓말처럼 그쳤다. 파란 하늘이 나타나자 황궁의 모든 태감과 궁녀들이 부산히 움직이며 눈을 치웠다.
그건 화영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원의 눈이 치워지는 와중에 류희겸은 후원에 준비된 작은 연무장에서 목봉을 휘둘렀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을 때쯤, 황태후궁 소속의 늙은 태감이 류희겸에게 찾아왔다.
“규수들이 귀비 마마께오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노라 하였습니다.”
목봉의 한쪽 끝을 바닥에 댄 채 당당한 선 류희겸은 허리를 깊숙이 숙인 늙은 태감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전한 말은 단순했다. 금씨 가문의 규수들이 명화원에서 눈과 매화를 구경하며 차를 마시기로 하였는데, 류희겸을 초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류희겸이 찾아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다 덧붙인 말은 의미심장했다. 그것이 고전적인 협박임을 아는지 태감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진혁위의 경고는 영험한 점쟁이처럼 딱 들어맞았다. 그래도 막상 닥쳐보니 절로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내일이면 사가로 돌아갈 규수들이 마지막까지도 부지런하다 싶었다.
자신이 그들의 청을 무시한다면 일어날 일은 뻔했다. 류희겸을 기다리던 다섯 명의 규수들 중에 한두 명이 감기로 앓아누울 것이다. 귀비가 어린 규수들을 핍박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은 물론이요, 감기로 앓아누운 이는 몸이 다 나을 때까지 황궁에서 머무를 수순이었다.
자신이 그저 전쟁터만 돌아다녔던 무인이었다면, 그리고 진혁위가 없었더라면 이런 계략에 눈뜬장님처럼 당했을 수도 있었다. 이런 일은 보통 명분을 얻는 쪽이 이기기 마련이었다.
늙은 신하가 머리를 풀고 석고대죄하며 황제를 압박하는 것도 비슷한 방법이었다. 충정 어린 신하가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황제는 폭군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할 것인지 이미 진혁위와 논의를 끝낸 후였다. 금상란이 기어코 놓은 덫을 부러 밟을 필요는 없었다.
“금가의 소저들에게 전하라. 본궁이 체기가 너무 심하여 한 발 내딛기가 힘드니, 안타깝게도 그대들과 어울릴 수가 없다. 눈과 매화를 즐기고 돌아가라. 본궁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조금 전까지 목봉을 휘두르며 땀을 흘리고 있던 류희겸은 금가의 규수들과 어울리기 싫어 꾀병이 났다고 대놓고 말했다. 물론 황궁에서 구르고 구른 늙은 태감은 류희겸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었다. 이럴 때는 높으신 분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현명했다.
“물론입니다. 마마의 말씀을 전하겠사옵니다.”
태감은 머리를 깊숙이 조아리며 물러났다. 그러자 태감의 뒤편에 서 있던 심양설이 가까이 다가왔다. 어제 진혁위와 바둑을 두던 자리에 시립해 있었던 심양설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었다.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볼 일이 없는데, 조심할 것이 또 있겠나?”
“이미 독심을 품었으니 얼마든지 일을 벌일 수 있지요. 금가의 규수가 화영궁을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귀비 마마가 아프시니 병문안을 하겠다면서요.”
심양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진혁위와 류희겸의 사이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만큼 가까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안함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혼인을 하고 이 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류희겸은 음인으로 변하지 않았다. 양인을 부군으로 두고도 음인이 되지 않는 부인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류희겸은 황제의 단 하나뿐인 후궁이니 시간이 갈수록 여러 말들이 나왔다. 사내여서 안 된다든가, 혹은 죄를 지은 자에게 하늘이 벌을 내렸다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후궁의 위세는 황제의 총애에 달려 있는 법이었다. 황제의 유일한 후궁으로 총애를 듬뿍 받고 있는 류희겸의 위세는 다른 누구와 비교할 게 없었다.
하지만 후사를 가지지 못하는 후궁의 끝은 좋지 않았다. 대신들이 간택령을 내려야 한다고 주청을 올리는 것도 후사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금씨 가문의 규수들까지 후궁의 한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황궁에 들었으니 류희겸의 속이 말이 아닐 터였다. 겉으로는 아무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심양설은 류희겸을 걱정했다.
계략을 미리 알고 있다 하더라도 돌발 상황은 언제든 일어나는 법이었다. 선황제 시절에 후궁전에서 어떤 암투가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심양설은 방심할 수가 없었다. 특히 류희겸이 이런 암투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 더욱 걱정이었다.
“그렇게까지 한다고?”
“후궁전에서는 감히 입에 담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곤 합니다. 금가의 규수가 화영궁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지었다고 벌을 청한다면, 결국 규수들을 화영궁 안으로 들여야 할 것입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로군.”
“선황제 시절에 스스로 제 손에 상처를 내고는 다른 사람을 무고한 후궁도 있습니다. 예. 그렇게까지 합니다. 제대로 된 증인이 없으면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지요.”
최악의 가정이었지만 류희겸은 웃어넘기지 않았다. 세상에는 미친 짓을 저지르는 인간이 많이 있었다. 자신도 한때 복수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다. 귀하게 자란 열여덟 살의 규수가 그렇게까지 할까 싶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법이었다.
“우선은 아픈 사람처럼 굴어야겠어.”
아프기는커녕 힘이 넘쳐 났다. 병자 행세를 잘할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얌전히 자리에 앉아 금가의 규수들이 어떻게 나올지 두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따뜻한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아, 그 전에 옷부터 갈아입으시고요. 지금 무복은 너무 눈에 띕니다.”
“아프다는 사람이 무복을 입고 있으면 안 되겠지.”
남을 속이려면 스스로를 속이라고 했다. 류희겸은 침의만 입고는 침방에 틀어박힐 작정이었다.
*
일군을 지휘하는 장군이었던 류희겸은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병법에서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그리고 미리 이기고 싸우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였다.
계략에 대응하는 것도 비슷했다.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고 시작부터 판을 엎어버리는 것이 필승의 전략이었다.
류희겸은 금상란의 초대를 피하는 것으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선택했다. 병환이 있다는 것은 훌륭한 핑곗거리였다. 황궁에서 류희겸보다 높은 사람이 황제와 황태후뿐인 상황에서 병증의 진위 여부를 가리자고 따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대로 조용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바람은 빗나가고 말았다.
“무릎을 꿇고 죄를 청하고 있습니다. 마마.”
궁녀 한 명이 화영궁 문밖의 상황을 류희겸에게 알려주었다. 금상란은 물론이고 나머지 금가의 규수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죄를 청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류희겸은 칭병하여 차를 마시자는 금상란의 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심양설이 우려한 대로 금가의 규수들이 문병을 왔고, 그것을 거절하자 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기는 했으나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류희겸은 쓴웃음을 지으며 심양설을 보았다.
“폐하도 자네도 앉은 자리에서 천리를 보았군.”
“비슷한 일을 많이 보아서 그렇습니다. 이제 어찌하시겠습니까?”
“저리 구는데, 쫓아낸다고 쫓겨나지 않겠지. 다실에 들이고 본궁이 홀대하여 감기에 걸렸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게 큰 화로를 가져다 두게. 규수들마다 시중을 들 궁녀를 각각 한 명씩 붙여주고.”
류희겸은 가능한 환대하라고 지시했다. 적어도 핍박받았다는 소리 따위는 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황제 폐하께 연락하여 사정을 설명하고,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화영궁을 찾아달라 부탁한다고 전하게.”
류희겸의 가장 든든한 아군은 누가 뭐래도 진혁위였다. 초대받지 않는 손님을 쫓아내기 위해 황궁에서 가장 강한 권력자의 힘을 빌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
화영궁에서 공식적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호화로운 원당에 금가의 규수들이 차례로 들었다. 원당(元堂)의 상석에는 긴 주렴이 내려져 류희겸의 모습을 완전히 가렸다.
그 앞에 선 다섯 명이 여인들이 단정한 자세로 예를 올렸다.
“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홍복을 누리십시오.”
흠잡을 것 없는 몸짓을 보며 류희겸은 쓴웃음을 삼켰다. 한겨울임에도 화사한 옷차림은 매화를 구경하는 풍류와도 어울렸다. 하지만 그 이면은 외양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본궁이 아무 준비도 없이 손님을 맞이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말을 할 때마다 머리가 울려서 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 테니, 무슨 죄를 청할 것인지 얼른 말을 하고 돌아가시오.”
류희겸은 친절하게 예를 받아주지 않았다. 금가의 규수들은 한 시진 가까이 다실에서 기다렸다. 커다란 화로로 내부는 따뜻했고, 차와 다과는 넘치게 제공되었다. 궁녀들이 부족함 없이 수발을 들었다. 하지만 그 자리가 결코 편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오래 기다리게 했다고 사과하는 대신에 무례를 지적하라는 것은 심양설의 조언이었다. 류희겸은 심양설의 노련함을 믿었다.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어색하기는 했지만 불청객을 빨리 내쫓으려면 까다로운 귀비가 되는 것이 나았다. 무엇보다 명분은 자신에게 있었다. 아프다는 사람을 부득불 찾아와 인사를 올리고 죄를 청하겠다는 쪽의 잘못이었다.
그러자 금상란이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주변의 다른 규수들도 다들 금상란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소녀가 마마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전에 무례를 범한 것은 소녀가 귀비 마마와 친해지고 싶어 그러하였습니다. 소녀가 감히 마마를 뵙고 사가의 올케언니처럼 친근하게 느끼어 그런 것입니다. 소녀의 잘못임을 압니다. 하니 이리 박대하지 마시고 벌을 내려주십시오. 마마의 꾸짖음은 달게 받았습니다.”
무릎 위로 다소곳이 손을 모은 금상란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죄를 청하였다. 가련하고 처연한 모습에 류희겸이 용서해 주어야 할 상황이었다.
류희겸은 금상란이 무엇을 바라고 이러는 것인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여기서 비약이 든 차를 내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저 용서를 받으려고 여기까지 찾아와 무릎을 꿇는 것도 납득할 만한 이유가 아니었다.
금상란에게 무슨 짓이냐고 따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녀를 용서한다고 하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용서하겠습니다. 일어나세요.”
“감사합니다. 귀비 마마. 그리고…… 실은 이렇게 무리하게 마마를 찾아뵈려고 한 것은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금상란의 목소리는 어떤 각오를 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류희겸은 잠시 멈칫했다. 용서를 받았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축객령을 내려야 하는데 상황이 이상해졌다.
“무엇인가?”
“이곳에서 말씀 올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본궁은 듣지 않겠다.”
“그것이……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청강 건너에 있는 귀비 마마의 가문과 관련된 것이옵니다.”
무릎걸음으로 주렴 바로 밑으로 다가온 금상란이 속삭이다시피 했다. 힘없는 끝맺음에 원당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청강 건너는 화진국을 의미했다. 금상란이 말한 가문이 류희겸이 양자로 입적한 희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류희겸이 화진국의 장군 출신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굳이 류희겸 앞에서 출신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류희겸은 화진국에서 죽은 사람이고, 또한 대연국에서 새로운 호적을 받아 희범영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인연을 끊었다고는 하나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류희겸의 가장 아픈 손가락은 화진국에 남겨둔 가솔들이었다. 남준해가 대역죄로 죽었을 때부터 그들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복수를 끝낸 류희겸은 진혁위에게 부탁해 화진국에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알아냈다. 남씨 가문과 류씨 가문의 사람들은 대부분 죽거나 노비가 되었다. 남은 가솔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역모를 일으켰다는 누명이 벗겨지고 남준해의 신원이 복원되면서 살아남은 이들이 떳떳이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었다. 뿔뿔이 흩어졌던 가솔들도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고 들으며 안도한 것이 류희겸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데도 금상란이 청강 너머를 언급하며 어설픈 계략을 펼쳤다. 이쯤 되자 류희겸은 금상란이 무엇을 준비했는지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았다.
“청강 너머라면 더더욱 이 자리에서 말을 해야지. 그에 관해서 본궁은 숨기는 것이 없다.”
“그……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안 될 일이라 그렇습니다.”
잔뜩 목소리를 낮춘 금상란의 연기는 제법 그럴 듯했다. 길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힌 류희겸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렴을 걷고 금상란 앞에 섰다.
류희겸은 평소처럼 아무 치장을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머리에는 화잠 하나 꽂지 않고 검은색 편복을 걸친 류희겸은 화사한 옷차림의 규수들과 비교되지 않을 박력을 내뿜었다.
“금가의 규수는 들으라.”
류희겸을 한껏 올려다보게 된 금상란은 저도 모르게 주눅 들었다. 류희겸을 처음 만났을 때는 분수에 맞지 않은 화려한 비녀를 꽂고 금실이 수 놓인 예복으로 사람의 기를 누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크고 무서운 사내의 모습이었다.
남창 주제에. 겁을 먹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금상란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약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말씀, 말씀하십시오. 귀비 마마.”
“이제 조용히 처소로 돌아가라.”
“마마?”
“세 번 말하지 않겠다. 이대로 일어나서 돌아가라.”
단호한 명령에 금상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류희겸의 싸늘한 눈빛에 뭔가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평소의 금상란이라면 눈치껏 조용히 물러나 다음을 기약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번이나 계속된 실패가 금상란의 눈을 멀게 했다.
금상란은 황제의 눈에 들 자신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미모로 태경제일미가 되고도 남는다는 칭송을 들었다. 미소 한 번이면 사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진혁위는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
진혁위의 얼굴을 본 것은 입궁 첫날에 인사를 드릴 때가 마지막이었다. 류희겸 때문에 무릎이 까지자 태의와 약을 보내주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믿었던 황태후는 가문에서 황후가 나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오히려 금상란에게 조용히 지내다가 돌아가라고만 했다.
결국 마지막 수단이었던 비약을 류희겸에게 쓸 각오까지 했다. 매화를 보며 차를 마시자고 류희겸을 불러내기 위해 공을 들여 명화원의 정자를 꾸몄다. 하지만 류희겸은 체기가 있다며 청을 거절했다.
갈 곳 없는 분노는 오기가 되었다. 누가 이기나 싶은 마음에 그대로 화영궁을 찾아 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긴 기다림에 찬바람을 맞아 쓰러지는 것은 바라는 바였다. 만약에 안으로 불러들여 준다면 어떻게든 단둘이 될 상황을 만들 생각이었다.
류희겸이 화진국에서 대역 죄인으로 가문이 풍비박산 났다는 것은 금상란도 알고 있었다. 누명이 벗겨진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들은 바가 없지만, 류희겸이 반응할 미끼로는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류희겸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뭔가를 알아차렸는지 눈빛에는 경멸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자니 속이 뒤틀리다 못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짧은 순간에 분노에 잠식된 금상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겁먹은 개처럼 도망칠 수 없었다.
“귀비 마마께서는 속이 참으로 좁으십니다.”
“금가의 규수는 언동을 바르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금상란의 돌발 행동에 심양설이 호통을 쳤다. 그럼에도 금상란의 시선은 류희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황제의 혜안을 흐리는 요악한 남창은 뻔뻔하기도 하지. 제 고국을 배신한 변절자 주제에. 나였다면 대명천지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 목을 매어 죽었을 텐데.”
끔찍하기까지 한 폭언이 쏟아지자 원방 안에 든 화영궁의 궁인들은 물론이고, 금씨 가문의 다른 규수들조차 할 말을 잃었다. 대부분은 금상란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황제의 귀비 앞에서 저렇게 굴 수 없었다.
하지만 금상란의 무례함은 모두 계산된 것이었다. 보통의 사내들은 쉽게 흥분하고 쉽게 폭력을 썼다. 남창이라는 소리를 듣고 참을 수 있는 사내는 없었다. 하물며 류희겸은 거친 군인 출신이니 얼굴을 후려칠 게 뻔했다.
이곳에 자리한 사람은 모두 화영궁의 궁인과 금가의 규수들뿐이었다. 서로 말이 갈리면 결국 폭력을 행사한 류희겸이 불리해지기 마련이었다.
류희겸이 뺨을 때리기 좋게 금상란은 한껏 턱을 치켜들었다. 황제의 후궁이 되지 못하더라도 천한 남창 하나 끝장내 버리고 말겠다는 독기를 품었다. 혹시 얼굴에 상처라도 난다면 황제가 책임을 져줄지도 모르니, 얼마든지 도박을 할 수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금상란의 예상과 달리 류희겸은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그만!”
커다랗게 소리를 지른 것 또한 류희겸이 아니었다. 금상란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원당 옆의 와실과 이어진 문에서 진혁위와 금채영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금상란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째서라는 의문은 곧 함정이라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류희겸이 일부러 불러놓지 않고서야 이렇게 형편 좋게 나타날 수가 없었다.
“태후 마마. 이것은, 이것은 함정이옵니다. 귀비께서 소녀를 함정에 빠트린 것입니다!”
“입 다물어라. 귀비는 조용히 돌아가라 했거늘. 망발을 내뱉은 것은 네 입인데, 무엇이 함정이란 말이냐? 내가 이 자리에서 직접 듣지 못했다면 어찌 네 방자함을 알았을까?!”
금채영의 호통에 금상란은 눈을 질끈 감고 무릎을 꿇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금상란이 아는 금채영은 분란을 싫어하고 소심한 사람이었다. 친정 가문의 종조카에게 과한 처벌을 내리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아닙니다. 소녀는 절대 그럴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너무 화가 나여 그리하였습니다. 소녀가 잘못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위험을 인지한 금상란은 펑펑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금채영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황제. 이 아이의 처벌은 내가 해야겠소.”
“예. 모후. 뜻대로 하십시오.”
“금상란을 상주의 장덕사에 평생토록 유폐한다. 금상란은 입에 담지 못할 말로 귀비와 황제를 모욕하였으니 그 죄는 깊고 무겁다. 공덕을 쌓아 죄를 씻어라.”
“태후 마마!”
평생이란 말에 금상란은 비명을 질렀다. 사실상 감옥에 가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음으로 나선 것은 진혁위였다.
“태후께서 네 목숨을 살리셨구나. 지금 이 순간부터 금상란에게 묵언을 명한다. 다른 누군가가 네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죄를 지은 혀를 뽑겠다.”
“……?!”
진혁위의 서슬 퍼런 명령에 놀라 눈물을 그친 금상란은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정말 혀가 뽑힐까 봐 차마 소리를 내지 못했다.
“끌고 가라. 처소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딴짓을 할 수 없게 바로 곁에서 감시해라.”
진혁위의 지시에 태감들이 움직여 금상란의 양팔을 붙잡았다. 금상란은 끌려가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다시 눈물을 터트린 금상란이 원당을 나가자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금가의 규수들도 조용히 사라졌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당연히 금채영이었다.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류희겸의 안부를 물었다.
“귀비가 많이 놀랐겠소. 괜찮으신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저 귀만 간지러웠습니다.”
금채영의 물음에 류희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무례한 폭언에 놀랄 정도로 곱게만 살아오지는 않았다.
“귀비는 담대하군. 황제께서 화영궁에 가자고 할 때는 영문을 몰랐소. 대화를 엿듣는 것은 무슨 경우인가 싶었지. 하나 이제 알겠어. 내가 눈이 멀었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런 험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태후 마마.”
“귀비는 걱정 마시오. 내가 자초한 일이니, 이 손으로 다 처리하겠소.”
“마마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황제께서는 귀비를 잘 다독이고, 잠시 수경궁에 들러주시오.”
“예. 곧 찾아뵙겠습니다.”
마지막까지 류희겸을 챙긴 금채영이 원당을 나섰다. 그녀를 배웅한 류희겸과 진혁위는 궁인들을 물리고는 원당 옆의 와실로 이동했다.
“괜찮으냐? 너무 마음 쓰지 마라.”
진혁위가 류희겸의 얼굴을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다독였다. 류희겸은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에 웃었다. 금채영도 그렇고 진혁위도 그렇고 자신을 마음 여린 귀비처럼 대하는 것이 신기했다.
전장에서 적의 목을 베다 보면 온갖 소리를 듣게 마련이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양친까지 싸잡아 모욕하고 저주했다. 귀장군도 일종의 멸칭이었다.
물론 금상란이 가장 아픈 손가락을 건드리기는 했다. 하지만 화진국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으니 참고 넘길 수 있었다.
“태후 마마께 말씀드린 것처럼 귀만 조금 간지러웠을 뿐입니다.”
“나는 안 괜찮았다.”
“……?!”
“모후께서 나선 것은 날 위해서였을 것이다. 모후가 아니었다면, 나는 금상란을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감히 짐의 총비에게 폭언을 내뱉다니.”
이를 드러낸 으르렁거리는 진혁위의 얼굴은 사나워져 있었다. 류희겸은 진혁위가 제대로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만약에 금채영이 먼저 나서지 않았더라면 진혁위는 금상란에게 사약을 내렸을지도 몰랐다. 황제가 후궁 때문에 육촌을 죽였다는 소문이 나도는 것을 막은 금채영이 현명했다.
“폐하. 심화를 가라앉히십시오. 욕심에 눈이 먼 자의 망발은 한 귀로 듣고 흘리면 됩니다.”
“정말 잘 참았다. 귀비를 도발해 폭력을 쓰게 만들려고 한 것일 테지. 쯧. 영악해.”
“바로 옆방에 두 분이 계시는데 신첩이 참아야지요.”
“날 부른 것도 현명했다. 아니었다면 귀비만 당할 뻔했어.”
류희겸이 진혁위를 부른 것은 만에 하나의 상황에서 자신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금상란이 마음먹고 분탕을 친다면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심양설의 말대로 스스로의 손에 상처라도 내면 수습이 불가능했다.
다행히 금상란은 스스로 자멸했다. 진혁위가 금채영까지 모시고 온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어쨌든 도움이 되었다.
류희겸은 금상란에게 더 이상의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요악한 남창. 그것은 류희겸뿐만 아니라 진혁위를 모욕하는 말이기도 했다. 자신이 진혁위의 명예에 지워지지 않을 오점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을 직접 겪고 나니 속이 새카맣게 탔다. 진혁위는 자신만 있으면 된다고 했지만, 세상 어느 누가 정인의 앞길을 막고 싶겠는가.
조용히 떠날까 하는 생각은 잠시 하다 말았다. 자신이 도망가면 폭군으로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겠다는 진혁위의 으름장이 무서웠다. 하지만 그것보다 말도 안 되는 욕심이 생겨났다.
“신첩이 폐하께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금상란을 용서하라고만 하지 마라. 그러면 화낼 것이다.”
“후궁전에 사람이 채워지고,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면 신첩은 제 명에 살지 못할 듯싶습니다. 이런. 농입니다. 하니 얼굴을 펴십시오.”
“농이 아닌 것 같다.”
진혁위가 류희겸의 마음을 제대로 짚어 냈다. 그렇기에 류희겸은 차분하게 말할 수 있었다.
“신첩은 후궁전에 사람이 드는 것을 반대할 수 없지만, 싫어한다고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 예. 싫습니다.”
언젠가 진혁위가 졸라보라던 말과 비슷한 의미였다. 그때 류희겸은 진혁위를 믿는다고 하였으나, 마음을 전하지 않았다. 당신 옆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 싫었다. 그렇게 소리 내어 말하자 속이 시원해졌다.
진혁위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다가 곧 환히 웃었다. 꽃이 만개한 것처럼 웃을 줄 아는 남자에게서는 순간 기쁨이 넘쳐났다.
“내가 좋은 것이지?”
“……?”
“귀비도 날 좋아할 줄 알았다. 내가 좀 잘난 사내잖아.”
밑도 끝도 없이 자신감을 뿜어내는 진혁위 때문에 류희겸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전이었다면 무슨 소리냐며 어이없어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진혁위가 제대로 넘겨짚었다.
“예, 폐하께서는 잘난 사내시죠.”
“그게 아니라, 좋아한다고도 해야지.”
“신첩이 폐하를 많이 좋아합니다.”
“딱딱한 고백이 이리도 달게 들리다니. 나도 너밖에 없다. 짐의 짝은 귀비뿐이야. 짐의 치세 동안 후궁전은 비어 있을 것이라 천지신명께 맹세한다. 나중에 제라도 올려야 하나? 아니면 칙서라도 내릴까?”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진혁위가 류희겸의 손을 잡았다. 류희겸 역시 데일 것같이 뜨거운 진혁위의 손을 꽉 붙잡았다.
“나는 무도한 짓을 벌인 금상란도, 그녀를 그리 기른 금묵임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귀비는 걱정할 것 없다.”
“신첩은 폐하를 믿습니다.”
“그래.”
“태후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실 터이니, 수경궁으로 가보셔야지요.”
“천천히 가도 된다. 나는 심란한 귀비가 침상에 눕는 것을 보고 가겠다. 우소진. 태의를 불러라. 오늘 하루는 귀비가 많이 아파야겠다. 심심하더라도 조금 참아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사기를 치라는 주문에 류희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체기 때문에 규수들의 초대와 인사를 거절했으니 침방에서 조용히 지내야 하는 것은 맞았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손에 이끌려 그대로 침방으로 향했다. 다급히 불려 온 태의에게 진맥도 받은 후 침상에 누웠다. 진혁위는 편히 쉬고 있으라고 하며 떠났다.
본의 아니게 병자가 된 류희겸은 어쩔 수 없이 게으름을 부려야 했다. 심양설에게 궁인들을 단속하라고 이르고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금상란이 수경궁에서 바로 장덕사로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금묵임 역시 근신을 명받고 퇴궐했다는 것이 류희겸의 귀에 들어왔다.
요란한 하루는 그렇게 끝났다.
*
화영궁에서 일어났던 이들은 은밀하게, 그러나 빠르게 사람들의 입을 타고 퍼져 나갔다. 황궁 담을 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귀비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금상란은 그날 저녁에 황궁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상주의 장덕사로 향했다. 가족들과 만나 인사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금상란의 부친인 금묵임은 자택에서 근신할 것을 명받았다.
일련의 일들을 전해 들은 이들은 모두 금상란의 무도함을 비난하며 목숨을 건진 것이 다행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딸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금묵임이 황제의 신임을 잃을 것이라 내다보았다. 금묵임이 아무리 황태후를 등에 업고 있다 해도 황제와 황제의 하나뿐인 총비를 싸잡아 모욕한 금상란의 죄는 사해지지 않을 만큼 컸다.
후궁전 일각에서 일어난 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하지만 금상란을 시작으로 황제의 후궁전이 채워질 거라고 기대했던 이들은 애써 실망을 감추고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황제의 장인이 되고자 다시금 간택령을 주청했다.
지금껏 부드럽게 간택령을 거절하던 황제는 돌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도한 말을 입에 담은 금상란은 아비를 보고 배운 것이며, 또 그들과 어울리는 친우들 역시 같은 말을 주고받지 않았겠냐며 운을 뗐다.
금묵임도 금상란도 모두 발이 넓고 사람들과 두루 친하게 지냈다. 특히 금묵임은 여기저기 끼지 않는 곳이 없었다. 금묵임과 술잔을 기울이며 황제의 귀비를 욕했던 몇몇 대신들은 허옇게 질린 얼굴을 잽싸게 숙여야 했다.
한편으로 평소 금묵임과 사이가 나빴던 정적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장에 금묵임을 추국하여 무도한 자들을 발본색원하여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했다. 목숨줄이 간당간당한 이들은 금묵임이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뿐이라고 사건을 축소하려고 했다.
대전 안이 저마다의 주장으로 시끄러워지는 와중에 어사대부(御史大夫) 양춘(梁瑃)이 금묵임의 매관매직을 고발하였다. 백관의 비위와 불법을 감독하고 탄핵하는 어사대부의 탄핵에 대전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황제를 모욕한 것과 매관매직 중에 무엇이 더 큰 죄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둘 다 단순 파직만으로 끝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노회한 대신들은 황제가 금묵임을 단죄할 것을 눈치챘다. 또한 간택령을 언급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 내렸다.
이번에는 이견이 생기지 않았다. 매관매직은 망국의 징조이며 철저히 조사하여야 한다고 다들 한소리로 뜻을 모았다.
그날, 대전에서는 간택령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
◇ ◇ ◇
검은 밤이었다. 눈송이가 끝도 없이 떨어졌다.
진혁위와 류희겸은 어김없이 바둑판을 마주 보고 않았다. 흑돌과 백돌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아주 약간이나마 우세한 것은 흑돌이었다. 초반에 백돌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집을 지켜 낸 덕분이었다.
흑돌을 쥐고 있던 진혁위는 아주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는 류희겸은 이쪽 시선을 알아채지 못하고는 심각한 얼굴로 바둑판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진혁위는 새삼스럽게 편안함을 느꼈다. 한밤에 눈이 내리고 있고, 커다란 화로가 내실을 따뜻하게 데웠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진혁위의 예상대로 금묵임의 비위 사건은 점점 덩치를 키워가고 있었다. 매관매직에 연관된 이름이 열 손가락을 넘어갔다. 그들 대부분이 금묵임과 함께 류희겸을 모욕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정국은 얼어붙었다. 진혁위는 간택령을 주청하는 이는 간신이라고 단단히 못 박아놓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간택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볼 일이었다. 생각해 둔 방법도 몇 있으니 걱정할 건 없었다.
어쨌든 평화로운 밤이었다.
“어허. 바둑 두는 사람은 어디 갔나 보군.”
류희겸이 장고하자 진혁위가 슬쩍 농을 건넸다. 친왕의 체면을 위해 일부러 비무에서 패배하던 사내는 사실 승부욕이 강했다. 특히 바둑에서 그랬다.
바둑 실력이 조금 더 좋은 류희겸이 이렇게까지 고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가벼운 농담에 류희겸이 날카로운 시선을 주더니 곧 돌을 착수했다. 악수는 아니었지만 국면을 전환시킬 만한 활로는 아니었다. 진혁위는 망설임 없이 다음 흑돌을 놓았고, 류희겸은 다시 바둑판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진혁위는 류희겸을 재촉하는 대신에 한쪽에 쌓인 귤을 집어 들었다. 강남에서 관선을 타고 온 귤은 눈 내리는 날이면 더욱 각별하게 맛이 있었다.
색깔이 고운 귤을 반으로 쪼개자 새큼한 향기가 퍼졌다. 순간 진혁위는 다시 류희겸을 보았다.
황제의 총애받는 황자로 귀하게 자란 진혁위는 어린 시절에 제 손으로 귤껍질을 까본 적이 없었다. 진혁위를 돌보던 태감과 궁녀가 손끝이 노래지도록 수고했던 것도 이젠 추억으로, 나이가 들고서는 스스로 했다.
원래는 귤껍질을 한 번에 몽땅 까고 먹었다. 그러다 류희겸이 사과를 쪼개듯 귤을 반으로 갈라 먹는 것을 보고는 따라하기 시작했다. 껍질을 까는 것도 먹기도 편해서 어느새 손에 익어버렸다.
의식하지 않던 것을 깨닫자 웃음이 나왔다. 부부는 닮는다는 것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 모양이었다.
“먹어보거라.”
흥겨운 기분으로 귤을 깐 진혁위는 류희겸에게 건넸다. 류희겸은 감사하다 인사하면서도 귤을 받아 입에 넣는 순간까지도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쩌면 돌을 던진 류희겸이 부루퉁히 구는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에 들뜰 때였다. 갑작스럽게 달콤한 향기가 훅 끼쳐 왔다.
이번에 몇 번이나 맡았던 바로 그것이었다. 상큼하고도 달콤한, 농익은 향기. 내실을 가득 채우며 머리를 어지럽게 하던 달콤함은 전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사라졌다.
대신에 류희겸의 존재감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향기가 아니라 기척이라고 불려야 할 것이었다.
낯선 감각에 진혁위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한때 진혁위가 태의원과 문집청을 뒤지며 음인의 변화에 대해 알아봤던 적이 있었다. 평소 교류가 있었던 능군왕이 때가 되면 다 알 것이라고 언질을 주었다.
능군왕이 말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저 좋은 향기만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가슴에 와 닿는 것 같았다.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류희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순간이었다. 바둑판을 보고 있던 류희겸이 고개를 들었다.
의구심 가득한 류희겸의 눈빛이 진혁위에게 닿았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다시 진혁위를 보았다. 미간이 찌푸려진 것이 의미심장했다.
“왜 그러느냐?”
“그것이. 음……. 향이 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침향이나 단향이 아니라, 화작향(花作香) 같은 것이요.”
진혁위는 양인뿐만이 아니라 음인 역시 제 짝에게서 좋은 향기를 맡는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는 전율했다.
얼마 전까지 류희겸을 괴롭히던 문제였다.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했지만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류희겸이 이상한 것을 보는 눈빛을 보내 와도 어쩔 수 없었다.
“내게서 향이 나는 것이냐?”
“글쎄요?”
“맡아보거라.”
진혁위가 팔을 내밀자 류희겸은 의아해 하면서도 코를 킁킁거리며 향기를 맡았다. 그러다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합니다. 폐하께서 평소 쓰시는 향이 아니라……. 음, 꿀향기가 납니다.”
“꿀?”
“예. 꿀과 꽃이요. 혹시 꿀차를 쏟으셨습니까?”
류희겸의 의문은 타당한 것이었다. 그것이 너무 류희겸답고 사랑스러워서 진혁위는 결국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폐하?”
“축하할 일이 생겼으니 술을 마셔야겠다. 아니지. 태의부터 불러야겠군. 우소진.”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우소진을 부른 진혁위는 술을 준비하고 태의를 빨리 부르라고 명했다. 바둑돌을 만지작거리던 류희겸은 우소진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조용히 물었다.
“축하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태의는 어찌 부르십니까? 아프신 겁니까?”
“네가 음인이 되었다.”
“……?”
“네가 음인이 되었다고. 그러니 태의를 불러 확인하려고 한다.”
“……진짜입니까?”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말에 류희겸이 조금 늦게 반응했다. 음인이라고? 자신이?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류희겸은 천천히 굳어버렸다. 머리로는 이해를 했는데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진혁위가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그래. 진짜다.”
“신첩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안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 보통은 별다른 징조가 없다고 하던데. 그리고 내가 이전과 다른 것이 느껴지느냐? 향기 말고.”
“아픈 곳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전과 다른 것은 없습니다. 향기는 조금 전에 비하면 거의 나지 않습니다.”
류희겸은 뭔가 다른 것이 있어야 하나 걱정했다. 갑작스럽게 내실을 가득 채운 향기는 금방 사라졌다. 지금도 진혁위에게서 꿀을 넣은 화차 향기가 나기는 했지만, 아주 옅었다.
자신이 음인이 되었는지 확신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향기를 맡기 전에 열이 치밀어 오르기는 했다. 혹시나 음인이 되려는 징조가 아닐까 의심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음인이 되었다면 기쁜 일이었다. 이것으로 진혁위의 부담을 하나 줄일 수 있었다. 아이를 가지는 것은 아직 상상이 가지 않기는 했다. 옥안인의 말로는 음인이 되면 임신은 시간문제라고 했으니 차근히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거 아느냐? 음인이 되면 교합이 특별해진다는 글을 보았다.”
“……?!”
“아주 좋은 거라고 했으니 기대가 크다. 그리고 양인은 언제 어디서나 제 짝의 기척을 알아차릴 수 있다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가능하다고 하더군. 귀비가 어디에 있더라도 찾아갈 수 있어. 그래서 정말 기쁘다.”
뜻밖의 사실이었지만 류희겸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매번 도망가면 다리를 자를 거라고 하던 남자의 소원이 이렇게 풀린 것이 웃겼다. 그리고 진혁위가 좋다면 자신도 좋았다.
“신첩은 잘 모르겠습니다. 음인도 양인의 기척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까?”
“거기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내일이면 알 수 있겠지. 조금만 기다려―”
진혁위는 다정한 말을 하며 손을 뻗었다. 바둑판을 두고 맞은편에 앉은 류희겸의 뺨을 쓰다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류희겸이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리는 바람에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진혁위도 류희겸도 서로를 바라보고는 굳었다. 특히 진혁위는 몇 번이나 반복된 류희겸의 이상 반응에 걱정부터 들었다.
태의들은 아무 이상이 없노라고 했다. 류희겸은 긴장하고 놀란 것이라고 했지만 왜 그런지는 본인도 설명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놀란 것이냐?”
“예. 갑자기 손이 다가와 놀랐습니다.”
“네가 담대한 사내인 것을 안다. 그리고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내 어여쁜 사슴이 놀라 도망가는데,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걱정이야.”
짙은 근심이 묻어나는 농담에 류희겸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강건한 몸을 타고났고 크게 아픈 적도 없었다. 전쟁터를 내달리며 살았었는데, 진혁위 앞에서는 연약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 웃기고도 왠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전에 일이 있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폐하의 손이 닿으면 신첩이 저도 모르게 긴장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손이 다가오면 놀라 피하는 것 같습니다. 아픈 곳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손이 닿으면 왜 긴장하는데?”
“신첩도 잘…….”
모르겠다고 말을 하려던 류희겸은 입을 다물었다. 진혁위의 손길에 긴장하는 것은 무서워서도, 아파서도, 그리고 실수를 할까 싶어서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것은 성감에 가까웠다. 교합을 할 때 진혁위의 손이 맨살에 닿으면 번지는 오싹한 흥분과 닮아 있었다.
순간의 깨달음에 류희겸은 아연해졌다. 해답은 명쾌했다. 그러나 당신 손짓에 흥분했다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웠다.
“얼굴이 하얘졌다 빨개졌다 하는 걸 보니 뭔지 아는 모양이군. 무엇인데 그러는 것이냐?”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니까 말해 주는 게 어렵지 않겠지.”
진혁위가 눈을 형형하게 빛내는 바람에 류희겸은 난감해지고 말았다. 집요한 남자를 이길 방법이 없으니 순순히 항복하는 게 최선이라는 판단과 별개로 민망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신첩이 긴장한 것은…… 아마도 흥분하여 그런 것 같습니다. 심한 것은 아니고 살짝 오싹한 정도입니다. 예. 흥분이라고 한 거 맞습니다.”
단숨에 말을 마친 류희겸은 눈을 크게 뜨는 진혁위에게 한 번 더 확인해 주었다. 그러자 진혁위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이리 단 말이 또 있을까. 지금까지 공을 들인 것이 이리될지 몰랐어.”
“언제 익숙해질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신첩이 다시 피하더라도 마음 상해 마십시오.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닙니다.”
“이유를 알았으니 마음 상할 것도 없다.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만져 보면 되겠지. 이번에는 피하지 마라.”
미리 예고를 한 진혁위는 손등으로 류희겸의 뺨을 슬쩍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감촉은 여전했다. 동시에 류희겸이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긴장을 이겨 내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어여쁜 정인이 예쁜 짓을 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좋아한다.”
진혁위의 고백에 류희겸의 눈이 흔들렸다.
“좋아한다고 했다. 그냥 네, 라고 대답하지 마라.”
“저도, 신첩도 폐하를 좋아합니다.”
아주 희미하게 뺨을 붉힌 류희겸이 대답했다. 연정인지, 충정인지, 혹은 편안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고백이었다. 진혁위의 광대는 한껏 위로 치솟았다.
“내가 더 좋아한다.”
“아……. 네. 압니다.”
간단히 긍정해 버리는 류희겸 때문에 진혁위는 결국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보다 더 좋은 날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행복할 일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음에 진혁위는 마음껏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