甜夏 : 달콤한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인 늦여름이었다. 이른 아침, 인적이 드문 거리에 대규모 행렬이 지나갔다. 호화로운 마차 앞뒤로 움직이는 호위들이 오십 명이 넘었다. 보기 드문 행렬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마차 안에 타고 있던 류희겸에게는 닿지 않았다.
영왕부에서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였다. 덜컹거리는 마차에 탄 류희겸은 제 손가락에 끼워진 호갑투를 내려다보며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여섯 번을 죽고 일곱 번을 반복해서 살면서 대연국의 황궁에 든 적은 여러 번이었다. 온갖 사건 사고가 일어나던 황궁은 류희겸에게 살얼음판 위의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구걸하며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오늘부터 황궁은 자신의 집이 될 터였다. 어제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막상 마차에 오르자 온갖 기억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복수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바라는 것을 모두 이루었으니 후회는 없지만 그래도 이럴 때면 절로 긴장이 되었다.
“긴장이라니.”
류희겸은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진혁위가 옆에 있었다면 전장에 나가는 장수 같다는 소리를 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오늘의 입궁은 마치 군사 작전처럼 이루어졌다. 지난 두 달 동안 채제승이 준비한 안가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류희겸은 선황제의 붕어 소식을 듣고서도 당장에 영왕부로 돌아가지 못했다.
감시가 느슨해질 때를 노려 태경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약속된 장소에서 영왕부의 시위들을 만나 물 샐 틈 없는 호위 속에 영왕부로 돌아와 입궁 날을 기다렸다. 예법에 따르자면 즉위식 후에 책봉례를 올리고 입궁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만큼은 진혁위의 뜻이 우선시되었다.
기쁜 날에 옆에 있어주어야지.
진혁위가 보낸 서신에는 굳건한 의지가 적혀 있었다. 결국 류희겸은 예정보다 일찍 입궁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겠지. 자신의 입궁이 예법에 어긋난다 하여 논란이 될까 걱정이었다. 사실 황제의 후궁으로서 사는 것이 어떨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아마도 영왕부에서 지내는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바라는 것은 하나 있다면 자신의 존재가 진혁위의, 황제의 오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복수를 끝내고 덤으로 생을 살고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마음을 다잡는 동안에 마차가 멈춰 섰다. 밖에서 심양설이 도착했노라고 알려주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에서 내린 류희겸은 오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태감을 따라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 품계도 없는데다, 국상 기간이라 입궁 자체는 조용히 이루어졌다.
“귀비.”
오문에서 내정까지의 거리를 가늠하고 있던 류희겸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나 싶어 소리가 나는 쪽을 보자 검은 편복을 입은 진혁위가 서 있었다.
이른 아침의 황궁은 조용해서 적막하기까지 했다. 진혁위의 모습은 흐릿한 곳 하나 없지만 왠지 환상 같았다. 그를 만났다는 기쁨과 함께 의아함이 치솟았다.
“폐하이십니까?”
“그래. 맞다. 어찌 그리 놀라느냐?”
“그야…….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홍복을 누리십시오.”
그야 당신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하려던 류희겸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정중히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일어나라. 편히 왔느냐?”
류희겸은 진혁위가 내민 손을 잡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뜻한 손이 잡히는 것을 보니 일단 환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째서 진혁위가 여기에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폐하의 배려로 편히 왔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귀비를 마중하러 왔다.”
활짝 웃은 진혁위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류희겸은 그게 말이 되느냐고 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즉위식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황제께서 이른 아침에 마중 나올 시간이 있을까 싶었다. 그것도 딱 자신이 올 때에 맞춰서.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던 류희겸은 아연해졌다.
“설마, 기다리신 겁니까?”
“응. 기다렸지. 귀비가 보고 싶어서.”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진혁위가 류희겸 가까이 다가왔다. 그제야 현실감이 든 류희겸은 바짝 긴장했다. 이제 겨우 오문을 지났을 뿐이었다. 황제를 뒤따른 태감과 시위의 숫자가 열 손가락으로 셀 수가 없었고, 오문을 지키는 금군도 적지 않았다.
아무리 놀랐어도 어설픈 모습을 보인 것은 실책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안가에 피신해 있는 동안에 진혁위를 만난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그것도 마치 스쳐 지나가듯이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온전히 진혁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하지만 이곳이 황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다.
“폐하의 크나큰 온정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류희겸은 자연스럽게 예를 올리며 손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는 웃는 얼굴로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순간 당황한 류희겸은 왜 이러느냐고 눈빛을 보냈지만 진혁위는 요지부동이었다.
“내가 전에도 말했었지. 부인이랑 손잡고 다녀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고.”
“폐하.”
“괜찮다니까. 천천히 걷자. 최근에 너무 바빠서 편전에만 붙어 있다시피 하여 몸이 많이 굳었어. 귀비랑 나란히 걷는 것도 오랜만이고.”
화사하게 웃으며 진혁위가 살갑게 말을 하며 손을 잡아끌자 류희겸은 이길 수가 없었다. 손을 뿌리치면 더 소란이 일어나기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직 즉위식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진혁위는 황제였다. 나란히 걷는 진혁위와 류희겸의 뒤로 시위와 태감들이 긴 꼬리가 되어 따라 움직였다.
덕분에 황제가 직접 귀비를 마중 나간 일도, 그리고 두 사람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내정까지 걸어간 것도 많은 이들이 지켜보았다. 황제가 귀비를 지극히 총애한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까지는 금방이었다.
*
“화영궁은 편전과 가깝다. 장현전에서 화영궁까지 빨리 걸으면 일각도 걸리지 않아. 담장을 넘으면 더 빠르지. 담장을 넘어봤다는 건 아니야. 그리 보지 마라. 심양설에게 들었겠지만, 귀비의 시녀들이 대부분 화영궁에 있다. 불편함은 적을 것이야. 화영궁이 후궁전에서 가장 넓은 곳 중에 하나인데, 내원에 꽃나무가 많다. 그리고 후원에는 작은 연무장을 만들어두라 일렀지. 혼자 쓰기는 적당할 것이다. 번거롭게 다른 연무장을 찾을 필요도 없고.”
오문에서 내정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듣는 귀가 많았기에 류희겸은 온천에서 편히 요양을 했다는 말만 할 수 있었다. 반면에 진혁위는 그간의 여러 사정을 알려주었다.
진혁위의 말대로 어지간한 것들은 모두 심양설에게서 전해 들었다. 하지만 연무장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연무장이요?”
“그래. 연무장이다. 하하. 금은보화보다 연무장이 귀비를 설레게 하나 보다.”
진혁위의 말대로 금은보화보다는 반듯한 연무장이 류희겸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사실 연무장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 알고 준비한 것은 진혁위의 정성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이 새삼 선명하게 느껴졌다. 단단한 대지에 발을 딛고 있는데도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이 들뜨고 말았다.
“황공하옵니다.”
“좋으면 좋다고 해라.”
“예. 좋아서 설렙니다.”
그렇게 한마디씩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화영궁에 도착했다. 진혁위가 장담한 대로 웅장한 화영궁의 내정에는 태감과 궁녀들이 무릎을 꿇고 대기하고 있었다. 궁녀들 대부분이 눈에 익은 이들이었다. 류희겸은 그들에게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자마자 진혁위의 손에 이끌려 정방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는 영왕부의 처소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호화로움은 더했고, 규모는 비교할 게 아니었다. 내부가 아름답다, 멋지다, 황제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는 말을 할 새가 없었다.
진혁위가 류희겸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내당(內堂)이었다. 정확히는 내당의 상석이었다.
“여기다.”
“네?”
“앉으면 돼.”
강권 아닌 강권에 류희겸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상석에 앉았다. 진혁위가 교합이 급한 것인가 싶었는데, 그렇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진혁위가 서두른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있는 듯했다.
“여기서 신첩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목기단 위에 마련된 상석의 높이는 꽤 되었지만 키가 큰 진혁위를 올려다봐야 했다. 진혁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너를 이곳에서 보고 싶었지. 내 꿈이었다.”
“……?”
진혁위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류희겸의 뺨을 손등으로 쓸며 온기를 확인했다. 따뜻하고 말랑한 느낌은 류희겸이 살아 있음을 알려주었다.
지난여름, 류희겸이 안가에 몸을 숨긴 이후로 악몽이 찾아들었다. 검은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류희겸을 안고 제발 살아달라 비는 꿈을 꾸었다. 현실과 꿈의 경계를 헤매다가 눈을 뜨면 비어 있는 옆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럴 때면 생을 다시 시작하고 류희겸을 만난 것이 자신의 망상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우소진에게서 류희겸이 장원에서 요양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일이 몇 번 있었다.
천자가 되라고, 그런 당신의 곁에 있겠다는 류희겸의 약속을 믿었다. 그저 자신이 류희겸의 부재를 견디지 못할 뿐이었다.
가장 영화로운 자리에 류희겸을 앉히겠다고 결정했다. 당장에 황후로 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이제 그가 여기에 있다. 기쁘고, 벅차고, 뿌듯하기까지 했다.
“이제 어디 가지 마라.”
“신첩이 어찌 성심을 헤아리오리까. 그래도 이곳이 신첩의 집이라는 것은 압니다.”
무뚝뚝한 대답에 진혁위는 다시 웃었다. 무심한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사람 속을 흔들어놓곤 했다.
“큰일이다. 귀비가 너무 어여뻐서 접문을 하고 싶은데, 접문이 접문으로 끝날 것 같지가 않구나.”
의자 손잡이를 양손으로 짚고 류희겸을 가두다시피 한 진혁위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입술은 닿지 않았다. 류희겸이 손으로 진혁위의 입술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접문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면서요.”
“안 끝내면 되지 않느냐.”
입술이 막혔어도 진혁위는 말을 잘했다. 진혁위가 말을 할 때마다 움직이는 입술이 손바닥을 간질이는 바람에 류희겸은 소름이 돋았다. 부드럽고도 따뜻한 숨결도, 그리고 진혁위에게서 나는 좋은 향기도 모두 자극이었다.
이대로 입을 맞추면 쉽게 멈추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고금의 황제가 후궁에 빠져 정무를 소홀히 하는 일은 비일비재 했다. 대부분 망국의 징조였다. 하나라의 걸왕과 주나라의 은왕이 그러했다. 하지만 자신은 말희도 달기도 아니었다. 아직 즉위식도 치르지 않은 황제를 홀린 요물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안 됩니다.”
“하하하.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우승상을 미리 불러놓았다, 이제 편전에 가야 해.”
단호한 거절에 진혁위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허리를 바로 폈다. 류희겸은 아쉬움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신첩이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좋다. 아, 그렇지. 가기 전에 귀비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
“하문하십시오.”
“얼마 전에 엄조철이 죄를 청했다. 지난여름에 귀비를 습격한 것이 익문사의 일이라고 말이다.”
“……?!”
“그를 어찌할까?”
기왕이 범궐을 시도한 그날, 류희겸은 선대 황제의 부름을 받고 입궁하던 길에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류희겸을 치우겠다 결단한 선대 황제의 지시였다. 익문사가 동원되었기에 류희겸은 선대 황제가 숨을 거둘 때까지 안가에서 숨어 지냈다. 진혁위는 그것을 지금 문책하려는 것일 터였다.
“폐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귀비의 생각이 듣고 싶다. 다친 사람은 귀비니까.”
“신첩은 폐하의 사람입니다.”
“너는 내 사람이지만, 이번 일만큼은 네 의견이 먼저다. 내 마음대로 하면 화나지 않겠느냐? 그의 존재가 끔찍하다면 나는 엄조철의 목을 베어버릴 수도 있고, 먼 곳으로 쫓아내 버릴 수도 있다. 반대로 네가 용서한다고 하면 나는 그를 다시 쓸 수도 있지. 어찌하고 싶으냐?”
나직한 물음에 류희겸은 엄조철의 목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대연국의 정치 구도에 대해 떠올렸다.
화진국도 그러했지만 대신들의 관계는 혼인과 혈연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중에 황제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엄조철은 조금 특별했다. 한미한 가문 출신에다 혼인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뿐인 형제는 출사를 하지 않고 번루를 운영하고 있었다.
익문사의 수장인 엄조철이 선대 황제의 가장 날카로운 칼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외압에 흔들리지 않을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혁위도 엄조철이 보기 드물게 청렴하고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 그를 즉위 초기에 내치는 것은 결코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
솔직히 류희겸은 엄조철이나 익문사에 큰 악감정이 없었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됐다 여긴 것이다. 또 그들은 그저 선대 황제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를 용서한다고 해서 끝나는 일은 아니었다. 만에 하나라도 엄조철이 선대 황제의 명령을 끝까지 이행하겠다고 자신을 노릴 수도 있었다. 혹은 엄조철을 위시하여 익문사 전체가 진혁위에게 등을 돌릴 가능성도 분명 있었다.
여러 가능성을 따지던 류희겸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 냈다. 최종 결정권은 진혁위에게 있으니 자신은 정확하게 결단을 전달하면 그만이었다.
“신첩은 주인의 뜻에 따라 휘둘러진 명검을 탓하지 않겠습니다. 네, 앙금이랄 것도 없습니다. 현명하신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시면 따를 터이니, 뜻대로 하십시오.”
“귀비는 대범한 성격이었지.”
류희겸의 단호한 어투에 진혁위는 감탄했다. 이런 사내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엄조철을 탓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놀라웠다.
저도 모르게 류희겸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 눈을 둥그렇게 뜨는 류희겸이 귀여워서 진혁위는 한 번 더 입술을 맞대고는 뒤로 훌쩍 물러났다.
“폐하?”
“이러다가 진짜 못 가겠다. 늙은 신하들에게 시달릴 짐을 위해 힘이 날 말을 해다오.”
화제를 바꾼 진혁위는 기대를 담아 눈을 빛냈다. 잠시 고민하던 류희겸이 진혁위에게 거의 몸을 맞붙다시피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신첩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좋은 것을 해드리지요.”
입술만 달싹거린 말은 진혁위만 들을 수 있었다. 뜻밖의 유혹에 진혁위는 어리둥절함과 아연함 끝에 웃음을 터트렸다. 무심한 사내는 한 번씩 이렇게 사람을 흔들어놓았다.
“제법이구나. 얼마나 좋은 것을 해줄지 기대해야겠는데. 음, 아마도 내가 더 좋은 것을 해줄지도 모르겠군.”
“신첩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아주 놀랄 것이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진혁위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진혁위를 배웅한 류희겸은 심양설의 안내를 받아 화영궁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후원에 있는 연무장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본당으로 돌아와 화영궁에서 일하는 궁인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금광의 주인인 류희겸은 부자였다. 그렇기에 제 수족이 될 궁인들에게 넉넉히 돈을 쓸 수 있었다. 류희겸은 작은 비단주머니에 은전을 가득 채워 궁인들에게 하사했다.
영친왕부에서 황궁으로 온 궁인들은 류희겸이 관대한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짜증 내는 일 없이 아랫사람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주인은 드물었다. 그리고 명절마다 때맞춰 넉넉하게 상여금을 주는 주인은 없다시피 했다. 묵직한 주머니를 받아 든 궁인들은 한마음으로 류희겸에게 예를 올렸다.
마지막은 당연히 심양설이었다. 그녀의 비단주머니는 다른 궁인들과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무게도 달랐다.
은전이 아니라 다른 것이 들어 있는 부피와 무게에 심양설이 눈을 크게 떴다.
“마마. 이건…….”
“무겁게 넣었네. 사람 마음을 금전으로 살 수는 없는 법이라지만, 묵직한 주머니를 손에 쥐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니까.”
“마마.”
류희겸에게 측근이라고 불릴 사람은 심양설뿐이었다. 우풍이도 있었지만 환관 대신에 군인이 되기를 원한 아이는 황궁에 오지 못했다.
영친왕부에서 경화당의 살림살이는 모두 심양설이 도맡아 했다. 지혜롭고 현명한 그녀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영친왕부에서 지내기가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대 황제가 죽고 영친왕부로 돌아왔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며 류희겸을 반겨준 것이 심양설이었다.
오랫동안 황궁에서 궁녀로 일을 했던 심양설은 황제의 부름을 받고 황궁으로 간 류희겸이 지방의 장원에서 요양하고 있다고 들었을 때 무슨 사달이 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했다.
조용히 기다리면 된다는 진혁위의 말을 믿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졸였다면서 눈물을 보이는 그녀가 너무 고마웠다.
앞으로도 황궁에서 심양설의 도움을 잔뜩 받아야 했다. 그녀에게는 황금을 가득 쥐여주는 게 옳았다.
“잘 부탁하네.”
류희겸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
우소진이 화영궁을 찾은 것은 해가 지고 난 다음이었다. 깊숙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린 우소진은 진혁위가 류희겸을 찾는다고 알렸다.
편전에 엄조철이 불려 왔는데 죽음을 청하고 있다고 했다. 진혁위가 보기 드물게 화를 내면서 입을 닥치라 하였다는 설명에 결국 류희겸은 우소진을 따라 장현전으로 향했다.
몇 번이고 드나들었던 장현전은 평소와 달리 입구부터 살벌한 분위기를 풍겼다. 등불과 화톳불로 환하게 밝힌 내원 안은 완전 무장을 한 시위들로 가득 차다시피 했다. 그리고 내원 한가운데는 익문사 관원의 옷을 입은 남자들이 무릎을 꿇고는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덟 명의 익문사 관원들이 누구인지 류희겸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지난여름에 자신을 쫓은 이들이었다. 편전 안으로 들어서자 익문사의 수장 엄조철 역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류희겸은 엄조철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상석에 앉은 진혁위를 보았다. 편전의 상석에 앉은 진혁위를 보자니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억누르며 정중히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홍복을 누리십시오.”
“귀비는 이리로 와라.”
진혁위의 손짓에 류희겸은 조용히 움직였다. 황제의 옆에 선다는 것은 같은 시선으로 상대를 볼 수 있다는 의미였다.
무슨 상황인 거지? 진혁위가 엄조철을 살리려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죽음을 청하는 엄조철에게 화를 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자신을 부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류희겸이 진혁위 옆에 섰다. 슬쩍 옆을 보자 이쪽을 보고 있는 진혁위와 눈이 마주쳤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으나 왠지 웃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원사가 귀비에게 죄를 정할 것이다. 엄조철.”
“신, 엄조철이 귀비 마마를 뵈옵니다. 지난여름에 마마를 쫓았던 자들은 익문사의 대원들이었습니다. 신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죽여주십시오.”
진혁위의 부름에 엄조철이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기만 류희겸은 당황했다.
이미 언질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진혁위가 적당히 해결할 줄 알았지, 이런 상황에 불려 와서 엄조철의 사과를 받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엄조철에게 기회를 준 것은 후회하지 않았다. 선대 황제를 언급하지 않은 엄조철은 그 자신이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마지막까지도 충성을 지키는 모습은 그가 왜 신임을 받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라면 진혁위에게도 최선을 다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류희겸은 무어라 입을 여는 대신에 다시 진혁위를 보았다. 엄조철의 명줄을 쥐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진혁위였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상석에 앉은 진혁위가 슬쩍 손을 잡아 왔다. 류희겸은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진혁위가 놓아주지 않았다.
“귀비가 용서했다고 해도 원사가 자꾸 죽여달라고 한다. 꽉 막힌 인사 같으니라고. 귀비가 그에게 다시 한번 말해 주거라.”
뜻밖의 상황에 류희겸은 진혁위를 빤히 보았다. 진혁위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기에 류희겸은 엄조철을 보았다.
“본 귀비가 황제 폐하께 고했습니다. 주인의 명을 성실히 이행한 명검을 탓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죽음을 청하실 겁니까?”
“귀비 마마의 하해와 같은 자비로움을 소신이 어찌 모르겠나이까? 하나 주인의 피가 묻은 검은 부러뜨려야 합니다. 소신을 죽이고 바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대원들을 살려주십시오. 그들이야말로 주인의 명을 따른 칼일 뿐이옵니다.”
엄조철은 무릎을 꿇은 채 간곡하게 청했다. 자신이라고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덟 명의 대원들 중에 조카가 있었다.
누이 내외가 일찍 죽고 혼자가 된 어린 조카를 거둔 것은 엄조철의 남동생이었다. 무공에 남다른 조예가 있던 조카는 남동생이 운영하는 번루의 일에는 재주가 없다며 호기롭게 익문사에 들었다. 죽은 매형의 성을 따르고 있기에 그가 자신의 조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서로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과 피로 이어진 아이였다. 황제가 귀비를 쫓은 여덟 명을 정리하라고 했을 때는 목숨을 걸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모두 살리든가 아니면 모두 죽이라고 황제에게 대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혼자만 살 수는 없었다.
엄조철은 류희겸이 무어라 명령을 내리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목숨을 건지면 좋고, 아니더라도 원망은 없었다.
“원사가 저들을 살리고 싶어 하니, 귀비는 뜻은 어떠하냐?”
진혁위의 물음에 류희겸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류희겸은 엄조철의 사정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부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건 엄조철이 훌륭한 상관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진혁위가 자신을 불러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내원에 무릎을 꿇고 있었던 익문사 대원들을 떠올렸다. 엄조철은 명검이라고 불리는 황제의 측근이었지만 그들은 말 그대로 명령을 받은 대로 움직여야 하는 졸이었다. 진혁위의 말 한마디에 그들의 목숨이 자신의 손에 달리게 되었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손을 놓은 후에 예의 바르게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리고 의아하게 쳐다보는 진혁위를 향해 공손히 손을 모았다.
“폐하. 신첩의 청을 하나 들어주십시오.”
“무엇이냐?”
“그날, 신첩은 화살을 두 번 맞았습니다. 화살을 명중시킨 자를 불러주십시오. 상을 내리고 싶습니다.”
상이라는 소리에 진혁위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엄조철도 흠칫 놀랐다. 그래도 진혁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짓을 했다. 내원에 서 있던 대원 하나가 문턱을 넘자마자 바로 무릎을 꿇었다.
“신, 도양원이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귀비 마마를 뵈옵니다.”
특징 없는 얼굴을 한 젊은 사내가 이마를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이며 절을 했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눈짓을 받고 입을 열었다.
“본 귀비가 맞은 화살 두 발은 모두 네가 쏜 것인가?”
“예. 그러합니다.”
“도양원. 네가 그날 가장 실력이 뛰어났다. 그에 상을 주겠다.”
류희겸은 긴 소매 속에 넣어둔 작은 비단주머니를 꺼냈다. 달걀만 한 황금 원보 세 개를 넣어둔 주머니는 원래 우소진에게 주려고 한 것이었다. 평소 많은 도움을 준 그를 치하하고 싶었다. 하지만 우소진은 황제 폐하께 혼날 거라며 극구 거부했다.
결국 류희겸은 비단주머니를 그대로 소매 속에 넣고는 장현전으로 왔다. 우연이 아니었다면 도양원을 불러 상을 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터였다.
황금 원보가 든 비단주머니는 결국 우소진이 아닌 도양원에게 전해졌다. 편전 안에 기묘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류희겸은 모르는 척했다. 주머니를 받아 든 도양원이 얼떨떨한 얼굴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굴었다.
“본 귀비는 가장 날카로운 칼을 벌하지 않겠다. 네 손에 들린 것이 증거다. 더욱 정진하라.”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도양원이 마음에 들어서 상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날린 화살은 위협적이었고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상처가 제법 깊어서 고생하기도 했다. 그래도 진혁위가 가져다준 염호부 덕분에 지금은 흉터조차 남지 않았다. 엄조철을 용서한 지금에 그들을 벌할 마음이 없었다.
진혁위가 자신에게 저들의 목숨을 맡겼으니 제대로, 확실히 하는 게 나았다. 어설프게 용서한다고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요란하게 보여주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엄조철. 귀비의 넓은 아량을 잊지 마라.”
“소신이 귀비 마마께 크나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람이 은혜를 잊으면 검은 머리 짐승이나 다름없습니다. 뼈에 새기어 잊지 않겠습니다.”
“귀비가 살린 목숨이니, 그 목숨을 귀비에게 바치겠다 맹세해라.”
“신. 엄조철. 맹세하겠습니다.”
엄조철이 선창하자 도양원은 물론이고 내원에 있던 나머지 익문사 대원들도 맹세를 외쳤다. 그들은 진혁위의 손짓에 물러났다. 장현전 내원을 가득 채우고 있던 시위 역시 최소한의 인원만 남았다.
자리가 정리되자 먼저 입을 연 것은 진혁위였다.
“황금은 어찌 가지고 있었더냐?”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그보다 신첩이 제대로 한 게 맞습니까? 폐하의 뜻과 달리하여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목숨을 바치라고 한 것은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죽이려고 했다면 귀비를 부르지 않았겠지. 괜찮다. 귀비의 뜻을 존중한다. 은혜를 입었으면 목숨을 바쳐 갚아야 하는 법이다. 딱 이 정도가 좋아. 엄조철은 물론이고 다른 대원들도 모두 귀비의 아량에 감복했을 것이다.”
혹시나 문제가 될까 걱정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진혁위가 근심 없이 웃는 바람에 류희겸은 사기를 당한 기분을 맛보았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굳이 따지지 않았다.
류희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진혁위를 보았다. 편전에는 선대 황제가 쓰던 물건이 대부분 남아 있었다. 그 자리에 진혁위가 앉아 있는 것을 보자니 기분이 정말 이상해졌다.
먼 서쪽으로 떠나자는 것도 마다하며 진혁위가 황제가 되기를 바랐다. 그가 제좌를 가지는 것은 운명일 터였다. 그래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새삼스러우면서도 즉위식을 직접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왜 그리 봐?”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차린 진혁위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류희겸은 진혁위에게서 멀어지며 조금 전까지 엄조철이 무릎을 꿇고 있던 자리에 섰다. 무슨 일이냐고 눈빛을 주는 진혁위를 향해 무릎을 꿇고 정중히 예를 올렸다.
“신첩이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홍복을 누리십시오.”
황룡이 승천하는 병풍을 등 뒤에 두고 앉은 남자는 황제였다. 진혁위가 대전의 옥좌에 앉은 모습도,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는 즉위식도 보지 못하겠지만 이것으로 충분했다.
“하하하. 귀비의 꿈이 이것이었군.”
“그러하옵니다. 신첩이 큰 꿈을 이루었습니다.”
“오늘은 둘 모두에게 좋은 날이구나. 더 좋은 일이 있으니 얼른 화영궁으로 가자. 일이 다 끝났다.”
활짝 웃은 진혁위가 상석에서 내려와 류희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단단히 손을 붙잡은 모양새는 아침과 같았다.
“예. 천천히 걸어가지요.”
“천천히 말고 빨리. 급하거든.”
급하다며 손을 잡아당긴 진혁위는 내달리지 않았다. 그저 태감들이 종종걸음을 해야 할 정도로 빨리 걸음을 옮겼다. 우소진이 제발 천천히 걸음하시라 우는 소리를 해도 통하지 않았다.
아침과 마찬가지로 진혁위는 류희겸의 손을 잡고 긴 꼬리를 단 채 화영궁으로 향했다.
*
두 달은 너무 길었다. 헛숨을 삼키며 류희겸은 오래지 않은 단절이 진혁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했다.
거의 두 달 만에 제대로 하는 교합이었다. 여름 내내 황제의 눈을 피해 안가를 전전하면서 진혁위의 얼굴을 본 것은 한 손에 꼽았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가볍게 입맞춤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서로의 옷자락을 파헤치며 맨살을 탐하는 것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류희겸은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면서 각오를 했다. 편전에서 진혁위의 손에 이끌려 화영궁으로 걸어갈 때는 스스로도 꽤나 흥분을 하고 말았다.
화영궁에 도착하자마자 궁인들을 모두 건물 밖으로 내보내고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정신없이 입을 맞추고, 혀를 빨고, 맨살을 어루만졌다. 두 번이나 절정에 이르러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세 번째로 파정을 나서도 밤새도록 교합을 해도 상관없다 여겼다. 하지만 진혁위가 성기를 꽉 잡고 구멍을 막아 사정을 지연시키는 것만큼은 폭력성을 불러일으켰다.
류희겸은 진심으로 진혁위를 한 대 때려주고 싶어졌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것이냐?”
“흐윽.”
진혁위의 손이 유두를 아플 만치 강하게 비트는 바람에 류희겸은 달뜬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떨었다. 진혁위를 의자처럼 등 뒤에 두고 앉은 자세는 삽입이 깊었다.
거기다 아까부터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진혁위가 손끝으로 유두를 강하게 누르기를 반복했다. 이미 몇 번이고 희롱당한 곳은 퉁퉁 부어 있어 쾌감과 아픔이 동시에 번졌다.
진혁위의 집요한 성격은 교합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났다. 그는 류희겸이 느끼는 곳만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귀와 뒷목덜미, 유두, 배꼽 아래. 그중에서도 유두는 진혁위가 가장 집착하는 곳이었다.
“이제…… 이제 놓아. 읏. 그만.”
계속된 자극을 주면서도 절정은 억지로 틀어막았다. 끝이 없는 쾌감은 고통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계에 다다른 류희겸은 애원하다시피 하며 성기를 붙잡은 진혁위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다.
“아직이다.”
잔뜩 낮은 목소리를 흘린 진혁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무, 힘듭니다.”
“너는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것을 좋아하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진혁위가 말한 대로 한계까지 몰아붙여지면 그만큼 절정의 쾌감은 커졌다. 결국 어떤 것이 쾌감이고 고통인 것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뒤섞이자 짤막하게 이어지던 생각도 끊겼다.
머릿속이 하얗게 진탕되어 어떻게 파정을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야 헐떡이며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어쩌면 잠시 정신을 잃었는지도 몰랐다.
사정의 여운에 몸에서 힘이 빠지자 진혁위에게 기댄 자세가 되었다. 아래는 여전히 꿰뚫려 있는 상황에서 진혁위가 뒷목에 입술을 대었다가 이를 살짝 세워 댔다. 또한 커다란 양쪽 손으로 여기저기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유두를 누르려고 했다. 류희겸은 힘이 없는 와중에도 진혁위의 양손목을 꽉 붙잡았다.
“뭐야?”
“계속 만지면 아픕니다. 이전에, 이전에 말씀드렸습니다.”
핥고, 빨리고, 물린 유두는 부풀어 올라 예민해진다. 옷의 천이 쓸리기만 해도 따가워서 하루 종일 신경 써야 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옷자락에 쓸린다고 했었지. 흐음. 내일 옷을 입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가벼운 농담을 하는 진혁위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침의만 입고 하루 종일 영왕부의 침전에 갇히다시피 한 경험이 있는 류희겸에게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신첩도 폐하의 것을 깨물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하. 귀비의 야망이 커다랗구나. 즐거움은 나중으로 미루자. 지금은 내가 급하다.”
류희겸의 안에 들어와 있는 진혁위의 성기는 다시 단단히 부풀어 있었다. 흐물흐물하게 힘이 빠졌던 류희겸의 것도 진혁위의 손에 반쯤 발기했다.
오싹한 쾌락은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류희겸은 역시 두 달은 너무 길었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밖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부지런한 화영궁 궁인들이 벌써부터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보다 더 일찍 일어난 진혁위는 자신의 품에서 정신없이 잠들어 있는 류희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늦여름의 새벽빛과 등불이 침방을 밝히며 류희겸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차가운 분위기의 미남은 눈을 감고 잠들어 있어도 인상이 쉬이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반듯한 이마, 가지런한 눈썹, 길게 뻗은 속눈썹, 예쁜 코, 예쁜 입술. 예쁜 얼굴. 어디 하나 못난 곳 없이 예쁘기만 한 얼굴은 아무리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진혁위는 제 눈이 어떤 기능을 상실했음을 인정한 지 오래였다. 그래도 예뻐 보이는 것을 어쩌겠는가.
사위는 점점 밝아 오고 있었다. 진혁위는 시간을 가늠하면서 솜털이 보이는 류희겸의 뺨에 손을 뻗었다.
눈앞에 있는 사내가 살아 있는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 몸에 익어버린 나머지 버릇이 되었다. 따뜻하고 말랑한 감촉은 늘 기묘한 충족감을 안겨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뺨을 쓸자 류희겸이 눈썹을 떨며 인상을 찌푸렸다. 진혁위는 얼른 손을 거두었다. 밤새도록 괴롭혔으니 잠은 제대로 재워야 한다는 양심은 있었다.
한참 동안 류희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진혁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느슨하게 풀리는 것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이렇게 류희겸을 품에 안고 있으니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려고 했다.
아직 해야 할 일은 많이 남아 있었다. 희범영을 류희겸의 양부로 삼아야 하고, 책봉례도 제대로 치러야 했다. 류희겸과 관련된 것이라면 사사건건 반대할 대신들을 어르고 달래는 것도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이었다. 따뜻한 체온이, 규칙적인 숨소리가, 부드러운 살결이 가슴을 뛰게 하다못해 아프게 했다. 너무 좋아하면 심장이 시리도록 아플 수 있다는 것을 류희겸을 보며 알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정신없이 빠져들면 어디까지 갈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예뻐서 그래.”
진혁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정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지난겨울 전쟁터에서 맡았던 달콤한 과일 향기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류희겸에게서는 늘 좋은 향기가 났다. 은밀한 살결 냄새는 다시 욕정을 충동질했다.
자고 있는 류희겸을 깨워 다시 교합을 하자고 했다가는 걷어차일 게 분명해서 진혁위는 천천히 몸을 떼었다. 때마침 우소진이 안으로 드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일어났다.”
눈치가 빠른 우소진이 한껏 목소리를 낮춰 진혁위를 불렀다. 역시나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진혁위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자 류희겸이 설핏 눈을 떴다.
“이런, 더 자도 된다.”
진혁위는 나직하게 속삭이며 얼른 류희겸의 눈 위로 손을 덮었다. 류희겸은 깊게 잠을 잤지만 옆자리의 움직임에는 민감했다. 다행히 류희겸은 조금 뒤척이다가 곧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류희겸이 잠든 것을 확인한 진혁위는 조심스럽게 천개를 걷고 침상 밖으로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우소진이 허리를 숙였다.
“곁방에 탕조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알았다. 화영궁의 궁인들에게 큰 소리 내지 말라고 일러라. 귀비가 늦잠을 잘 것이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곁방으로 이동하며 명령을 내리던 진혁위는 코끝을 스치는 향기에 걸음을 멈췄다. 그때와 같았다. 달콤하고 농익은 과일 향기가 온몸을 감싸는 듯 퍼졌다.
진혁위는 뻣뻣하게 침상 쪽을 돌아보았다. 음인이 된 것인가? 혹시나 하고 숨을 멈추고 있는데, 이번에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향기가 사라졌다.
“폐하. 어찌 그러십니까?”
“기다려라.”
우소진이 어리둥절해 하는 것을 두고 진혁위는 침상으로 다가가 천개를 열었다.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류희겸에게서는 아무 향기도 나지 않았다.
“우소진.”
“예. 폐하.”
“조금 전에 과일 향기가 났느냐?”
“황공하오나 소인은 아무 향기도 맡지 못했습니다.”
“그랬겠지.”
음인의 온전한 향기는 짝이 된 양인만이 맡을 수 있다 했다. 달콤한 향기. 좋은 향기. 글로 읽었던 것을 경험한 것이 두 번째였다.
봄날에 선잠을 자며 꿈을 꾼 것처럼 흔적도 남지 않았지만, 진혁위는 이것이 징조라는 것을 알았다. 사내는 음인으로 변하는 것이 오래 걸린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한때는 류희겸이 음인이 되기를 바랐다. 다시 도망치더라도 뒤쫓을 수 있게, 그리고 아이를 가져 어디에도 갈 수 없도록 족쇄를 채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가 음인이 되지 않더라도, 아이가 없더라도 상관없었다. 고지식한 사내는 스스로 한 맹세를 지킬 것임을 믿었다.
둘이서 행복해지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마음먹었지만 그래도 사람의 욕심은 끝없이 커지기 마련이었다.
아이는 류희겸을 닮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
“널 닮은 아이면 좋겠다.”
잠들어 있는 류희겸을 바라보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불쑥 소리가 나왔다.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자 금방 현실이 될 것 같아 들뜨고 말았다.
진혁위는 흥겨운 기분으로 류희겸의 뺨에 입술을 살짝 눌렀다. 그러자 미간을 찡그린 류희겸이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꾸물거리다가 등을 돌려 누워버렸다.
그 모습조차 좋아서 진혁위는 웃고 말았다. 앞으로 함께할 날들에 대한 기대로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