終章
단 하루 만에 끝난 기왕의 변란에 황제의 병증이 순식간에 악화되었다. 칠주야 동안 이어진 방왕의 장례 기간 내내 황제는 검붉은 피를 한 움큼씩 뱉어냈다. 태의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굳어진 황제의 왼쪽 얼굴과 팔다리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황제는 끝까지 옥좌를 지키고 앉아 기왕을 도와 변란에 참여한 죄인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처벌하는 것까지 직접 보고받았다. 대역죄인인 기왕의 시신이 들판에 버려지고, 역도들의 목이 잘리기까지 채 보름도 걸리지 않았다. 기왕의 가산은 압류되고 그의 식솔들은 죽거나 서인이 되어 제국 곳곳으로 흩어졌다.
변란과 연관된 이들을 모두 색출하겠다고 의욕적으로 움직이던 황제가 쓰러진 것은 도어사(都御史) 유덕비(柳德琵)의 보고를 받은 직후였다.
관리의 부정을 감찰하는 기관인 도찰원(都察院)의 수장 유덕비는 황제의 병증이 나아지지 않는 것을 의심하여 태의원을 조사했다. 그러다 황제의 치료를 위해 밤낮으로 피우는 약향에 폐병을 악화시키는 석융과 규사 등을 섞어 넣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약향을 관리한 태의는 고신을 받기도 전에 황후의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했다. 만독화를 복용한 황제에게 독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폐를 나빠지게 하는 약재와 석분(石粉)을 섞어 넣었다는 것이었다. 그중에 몇몇 석분은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라 황후가 직접 구해다 준 것이라고까지 고하고 말았다.
황제가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황제의 명령에 의해 고신을 받은 황후궁의 궁인들에게서는 더욱 무서운 이야기가 쏟아졌다. 연금 중인 황후를 유일하게 찾았던 사람은 황후의 하나뿐인 아들인 방왕이었고, 그가 황후궁으로 석분을 반입했다는 말이 다수의 궁인들의 입에서 나왔다.
태자에서 폐위되어 황궁을 나간 방왕의 비행도 알려졌다. 기루에서 자신의 사람들을 모아놓고는 불치병에 걸린 부황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곧 황제가 될 거라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모두 귀하게 여길 거라고 약조했다는 것을 전해 들은 황제는 심화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용력을 타고 난 양인의 신체 능력은 범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상처도 병도 빨리 나았지만, 반대로 약으로 다스릴 수 없는 불치병의 경우 병환이 깊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특히 시시때때로 피를 토하며 기맥이 뒤틀린 황제는 그 정도가 심했다.
연이은 비보에 충격을 받은 황제의 몸과 마음은 병마와 심화에 너덜거렸다. 힘들게나마 편전을 지키고 앉아 있던 황제가 자리에 누워 거동하지 못하게 된 것은 기왕이 변란을 일으키고 한 달여가 지난 후였다.
약향은 이미 치워졌지만 한 번 악화된 폐는 손 쓸 수가 없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황제는 쇠약해져 갔다.
대신들은 침전 앞에 엎드려 방왕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리고 태자를 세워야 한다고 청하였다.
성인이 된 황자들은 모두 다섯뿐이었다. 4황자인 정군왕은 몸이 불편하였다. 8황자인 경군왕은 역모에 연류되어 연금을 당한 적이 있었다. 지난해에 막 성인이 된 10황자와 11황자는 아직 봉작도 받지 못했다. 아무 결격이 없는 황자는 7황자인 영친왕뿐이었다.
약간의 이견이 있기는 하였으나 진혁위가 태자가 되어야 하는 상황임에는 모두 동감했다. 기왕이 변란을 일으켰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황제를 지킨 것이 진혁위였기에 명분은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지 못하는 황제는 누운 채로 태자 책봉 조서를 썼다. 하늘의 뜻을 이어받은 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며 국정을 안정시키라 하였다.
가장 더운 여름에 책봉식을 치른 진혁위는 태자가 되었다.
*
눈 밑이 새카맣게 내려앉은 황제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황제를 모시는 궁인들과 태의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조석으로 황제에게 문안을 드리기 위해 찾는 진혁위도 황제의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병증이 심화된 황제는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워하며 매일같이 피를 토했다. 태의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황제의 고통을 줄여주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태자가 된 진혁위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기왕의 변란과 연관된 대신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명하고, 빈자리를 채울 사람들의 인선을 직접 골랐다.
“그라면 잘할 것이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황제는 잔뜩 쉰 목소리로 기왕의 장인 중에 한 명이었던 서창(西廠)의 포정사를 바꾸라고 명령했다. 황제의 머리맡을 지키던 진혁위는 정중하게 답했다.
“네가 혼인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그래도 대학사의 손녀가 아직 어리니 괜찮을 것이다.”
무거운 기침을 한 황제가 갑자기 진혁위의 혼인을 언급했다. 황제는 진혁위가 대학사의 손녀와 혼인을 할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위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소자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해보거라.”
“대학사가 소자를 찾아와 아들의 죄를 청하였습니다.”
“응?”
“대학사의 차남 표상진(表詳眞)이 육 년 전에 당시 태자였던 방왕과 행행을 나간 적이 있는데, 방왕이 한 상인의 집에 있는 벚나무를 베어버리려고 하다가 시비가 붙어 그 집 안주인을 밀쳐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죄가 드러날까 두려워 가솔들을 죽이고 불을 질렀다고 죄를 고하였습니다.”
“?!”
진혁위는 방왕이 행행에서 벌였던 일들을 황제에게 고하였다. 행행 도중에 숙취에 시달리던 방왕은 활짝 핀 벚꽃이 꼴 보기 싫다며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명했고, 그를 말리던 채제승의 장모가 건장한 사내들에게 밀려 넘어져 머리를 다쳐 죽었다.
방왕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채제승의 가솔들을 죽이고 불을 질러 죄를 은폐하려고 했다. 그리고는 태수에게 압박을 넣어 도적들의 짓이라고 공표하게 만들었다.
황제에게서 미리 국혼을 언질받은 대학사는 새로운 황제의 국구(國舅)가 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진혁위는 대학사에게 방왕과 어울려 다녔던 표상진의 죄를 꺼내어 보였다.
능력보다 야심이 컸던 표상진은 방왕과 함께 크고 작은 죄를 많이 저지르고 다녔다. 양민을 죽이다 못해 그 죄를 덮기 위해 불을 지른 것은 표상진 개인의 죄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가족과 일가가 함께 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노회한 대학사는 진혁위가 무엇을 원하는지 금방 눈치챘다. 방왕의 정비인 막내딸과 외손자, 그리고 차남의 목숨을 구명하고 명예로운 퇴직을 조건으로 국구가 되는 꿈을 접었다. 뿐만 아니라 차남의 죄도 직접 고변하여 진혁위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난데없는 진혁위의 고발에 황제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안정을 위해 좋은 것만 듣고 보아야 하는 황제에게 방왕의 죄는 큰 충격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진혁위는 다음 말을 이었다.
“또한 익문사에서 최근 잡아들인 화진의 간자가 방왕이 군사 기밀을 진한재에게 넘겼다고 자백했습니다.”
“그, 무슨…….”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자는 부황의 유조를 받들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무능하다 못해 나라를 팔아먹기까지 한 황자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진혁위는 안타까운 기색 하나 없이 담담하게 황제를 바라보았다.
태자 책봉 조서를 쓴 이후 황제는 철저하게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약향에 손을 쓴 황후를 서인으로 강등시켜 선덕사에 유폐했다. 황제의 약향과 약환에 넣은 석분을 직접 구입한 전 좌승상 모태심을 사사시켰다. 대신들의 만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죄가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황제의 결단을 칭송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다만 방왕만큼은 아무런 벌을 받지 않았다. 방왕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어미가 가져다 달라는 것을 옮기기만 하였다는 황후의 주장을 황제가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죽어가는 황제는 이미 죽어 없는 방왕을 마지막까지 총애했다. 진혁위에게 방왕을 황제로 추존하여 형제의 예를 다하라는 유조를 남기기까지 했다.
지난 생에서 진혁위는 황제의 유조에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역시 일 년도 살지 못하기도 했고, 이미 죽은 자를 추존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형제들은 우애를 나누고, 부모를 공경하며, 나라와 황제에게 충성하라 배우며 컸다. 그러나 사나운 형제들과 후궁전의 어머니들과의 부침 속에서는 제 뜻을 펼치기는커녕 살아남는 것 자체가 힘겨웠다.
어려서는 황자의 삶이란 모두 그런 것이라 여겼다. 모든 원인이 황제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무능한 방왕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한 황제의 총애가, 그리고 자신이 쥔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아들들을 시험하고 경쟁시킨 황제의 욕심이 문제였다.
지난 생에서 진혁위의 어머니는 눈 오는 날 황후궁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청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나중에 황제가 되고 나서야, 그날 부황이 무릎을 꿇은 어머니 옆을 지나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이 내리니 그만하고 들어가라고 손 한번 내저으면 그만이었던 것을 못 본 척했다. 대학사의 손녀와 혼인을 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진혁위가 정면에서 거부한 것에 대한 벌을 어머니가 대신 받은 것이었다. 황제의 무정함은 알고 있었지만 그때만큼은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무능한 아들을 총애해 제좌에 앉히려던 황제는 위정자로서도, 그리고 일가의 가장으로서도 최악이었다. 다시 생을 살기 시작한 후로 진혁위는 황제를 단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다.
“네, 네 형이지 않느냐?”
“형님의 죄와 과오를 명명백백하게 밝히겠습니다.”
“너…… 너는.”
눈을 크게 뜨고 숨을 헐떡이던 황제는 발작을 일으키듯 경련하며 정신을 잃었다. 침상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총관태감이 허겁지겁 황제를 불렀다.
성심을 어지럽히다 못해 황제를 쓰러지게 만든 진혁위는 총관태감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여식의 혼인 문제로 폐서인이 된 황후와 방왕에게 앙금이 남아 있었다.
“태의! 태의는 들라!”
진혁위는 커다란 목소리로 밤낮으로 대기하고 있는 태의를 불렀다. 침방에 날듯이 들어온 두 명의 태의가 황급히 살폈지만 황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태의원의 태의들이 동원되어 황제의 온몸에 침을 놓았다. 그러나 황제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숨만 내쉬다 이틀 후에 숨을 거두었다.
진혁위는 황제가 되었다.
*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은 여름의 더위가 한풀 꺾이고 나서야 열렸다. 대례는 예법에 따라 엄격하고 장중하게 치러졌다.
즉위식이 끝난 후 진혁위는 황친과 고관대신들을 각각 불러 간소한 덕담을 나누고는 내정에 있는 화영궁(華榮宮)으로 향했다. 후궁전에서 손꼽히게 너른 권역을 가진 화영궁은 이제 류희겸의 처소였다.
이미 기별을 받은 류희겸은 궁인들과 함께 화영궁 안뜰에서 진혁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례에 맞춰 예복을 갖춰 입은 류희겸이 정중히 예를 울렸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홍복을 누리십시오.”
“하하하. 즉위식 직후라 그런지, 귀비를 이리 보니 감회가 새롭다. 일어나라.”
진혁위는 류희겸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류희겸은 기왕이 일으킨 변란 이후, 두 달여 동안 태경 곳곳에 있는 채제승의 안가에 숨어 지냈다.
공식적으로 그는 선황제의 부름을 받아 황궁으로 가는 도중에 역도들의 습격을 받아 크게 다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되어 요양을 위해 온천수가 나는 영왕의 장원에서 지내고 있다고 알려졌다.
그리고 진혁위는 선황제의 눈을 가리기 위해 조용히 사람을 풀어 류희겸을 찾아다녔다. 실제로 여러 곳에 의뢰하여 태경 밖에서도 류희겸을 수배하였다.
선황제는 어렵지 않게 속아 넘겼다. 하지만 그동안 류희겸을 제대로 만난 날이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두 달 동안 잠을 자다가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에 소스라치며 놀라 깬 것이 몇 번인지 세기도 힘들었다.
류희겸이 영왕부로 돌아온 것은 선황제가 죽고 난 다음날이었다. 그리고 황궁에 입궁한 것은 바로 그제였다.
그간 요양을 하고 있었던 류희겸의 행적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황제의 명령을 이행한 익문사의 수장과 그의 부하들을 빼고 말이다.
그젯밤에는 익문사의 수장인 엄조철과 여덟 명의 대원들이 모두 류희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관대한 류희겸은 그들에게 죽음을 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팔과 어깨에 화살을 명중시킨 대원에게 황금을 내려 실력을 치하하기까지 했다.
진혁위는 후환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했다. 선황제의 신임을 받을 정도로 우직한 엄조철은 몰라도 여덟 명은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류희겸이 명령에 충실한 부하를 벌해서는 안 된다고 말리는 바람에 마음을 바꾸었다.
대신 허옇게 질린 얼굴로 죽을 각오를 하고 있던 엄조철과 대원들에게 귀비의 아량에 살아남은 것이라 으름장을 놓고는 절을 하라 명하였다. 머리를 땅에 박고 절을 한 아홉 명은 류희겸에게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고는 물러났다.
이후에 엄조철이 따로 진혁위를 찾아와 다시 한번 귀비 마마의 은혜에 감복하였다 고하였다. 그때 알았지만 대원들 중에 하나가 엄조철의 조카였다.
어쨌든 이제는 아무 걱정 없이 류희겸을 밝은 햇살 아래서 볼 수 있었다. 진혁위는 즉위식보다 류희겸이 웃으며 반겨주는 것이 더 기뻤다.
“이제 수경궁(壽慶宮)으로 가셔야지요.”
류희겸은 손을 잡은 채 웃기만 하고 움직이질 않는 진혁위를 조심스레 재촉했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서 후궁전은 비워졌다. 선황제의 후궁들은 대부분 부처에 귀의하거나, 자식이나 형제들에게 의탁했다. 아직 어린 황자녀를 기르고 있는 소수의 후궁만이 태경의 서쪽에 자리한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여 지금 황궁의 내정에는 황태후가 된 금채영만이 남아 있었다.
황제의 즉위식은 나라와 황실의 경사였다. 황제가 된 진혁위는 황태후를 찾아 인사드리는 것이 순서였다. 그런데도 진혁위가 가만히 서서 웃기만 하고 있으니 류희겸은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귀비에게 짐이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황궁은 그다지 좋은 곳이 아니다.”
“……?”
“아주 크고 화려한 감옥이라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지. 나도 동감한다. 귀비를 이곳에 가둔 것이 아주 기쁘고, 그리고 미안하기도 해.”
화사하게 웃으며 미안한데 기쁘다고 고백하는 진혁위 때문에 류희겸이 놀란 것은 잠시뿐이었다.
일찍 돌아가시기는 하였지만 류희겸의 어머니는 화진국 황제와 동복인 공주였다. 또한 류희겸은 어려서부터 고모와 고모부를 따라 황궁을 자주 찾았다. 그래서 황궁에서 벌어지는 정쟁과 암투의 살벌함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진혁위에게 성군이 되라고 한 것은 자신이었다. 황궁이 무서운 곳인지를 모르고 진혁위와 함께 하겠다 한 것이 아니었다. 진혁위가 미안해 할 건 없었다.
그런데도 부드럽고 달콤한 말로 황궁이 그다지 좋은 곳이 아니라 하며, 크고 화려한 감옥에 너를 가두어서 기쁘면서도 미안하다는 남자가 어이없고도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감옥이라 하더라도 둘이 함께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류희겸은 진혁위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스스로가 한 선택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생의 모든 순간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면 고난이 생겨도 잘 헤쳐나갈 것이다.
“하하하. 귀비가 그리 말해 주니 감격스럽다.”
“이제 수경궁으로 가셔야 합니다. 태후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옵니다.”
“귀비가 진정 효자다. 잠시만 기다려라. 오늘따라 어여쁜 귀비에게 줄 것이 있다.”
손을 놓은 진혁위가 품에서 금비녀를 꺼내어 류희겸의 뒷머리에 꽂았다. 류희겸은 비녀를 대례복에 품고 온 남자 때문에 웃지도 못했다. 이런 식으로 비녀를 선물받는 것에 익숙해질까 봐 무서울 지경이었다.
“예쁘다.”
손수 꽂은 비녀의 모양새가 마음에 드는지 진혁위가 뿌듯하게 웃었다. 류희겸은 언젠가 예쁘다는 말이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진혁위가 말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당신도 예쁘다고 응수해 주어야 했지만 이제 남자는 황제가 되었다. 진혁위는 천하의 둘도 없는 미남이었지만, 황제 폐하에게 예쁘다고 하는 것은 너무 예의가 없는 것 같았다.
“신첩이 요양을 하는 동안에 폐하를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음?”
“이렇게 마음 편히 폐하의 옥안을 뵐 수 있어 기쁘옵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채제승의 안가에 숨어 있는 두 달여 동안 진혁위의 얼굴을 본 것은 세 번밖에 되지 않았다.
매일같이 곁에 있던 사람이 사라지자 허전함이 찾아들었다. 침상의 옆자리가 빈 것이 어색하고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그리움은 마치 찬바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불쑥 찾아와 마음을 헤집고 사라졌다. 그러다 진혁위가 예고도 없이 나타날 때면 기쁘고 들떴다. 술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꽤 진땀을 빼야 했다.
당신이 보고 싶었다. 그것이 류희겸이 할 수 있는 정직한 고백이었다.
잠시 눈을 크게 뜬 진혁위가 곧 활짝 웃었다. 여름 끝자락에 피어난 모란처럼 화려하고 화사하였다.
“오늘은 무슨 날인가 보다. 좋은 일만 일어나는구나. 너무 좋아서 심장이 떨려 그러니, 귀비가 손을 잡아주어야겠다.”
“영광입니다.”
류희겸은 엄살을 피우는 진혁위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자 진혁위가 당연하듯 손을 잡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뒤로 황제와 귀비를 수행하는 궁인들이 긴 꼬리가 되어 따라붙었다.
“오늘만큼은 아무 정무가 없으니, 귀비랑 오래 놀 수 있다.”
화영궁을 나서자마자 진혁위가 류희겸의 귀에다 속삭였다. 간지러운 유혹에 류희겸은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황금색 기와가 높이 치솟은 화려한 궁궐 너머로 따뜻한 바람이 불어 두 사람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