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章
태경은 이른 봄에 닿아 있었다. 한낮에 활짝 열린 창 너머로 봄기운을 품은 찬바람이 불어 들었다. 강한 봄바람이 영왕부의 편전 내부를 한 바퀴 크게 돌았다.
검게 옻칠한 탁자 위에는 서신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서신의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격구회, 비무회, 시회, 생신연 등의 각종 축하연에 참석해 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모두 영왕 앞으로 온 것이었지만 당사자인 진혁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신 채제승이 가져온 명단을 유심히 살폈다.
진혁위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채제승은 미남 사제의 인기에 대해 생각했다.
지난겨울, 동쪽으로 출병하여 승전하고 돌아온 진혁위의 위상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작년에 희교국의 마지막 왕자였던 만부영의 반란을 진압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호양성을 단 하루 만에 점령한 것은 호사가의 입을 통해 널리 퍼졌다. 이후에 화진의 황군을 상대하여 총사령관까지 죽이며 대승을 거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도 빼앗긴 강역을 되찾은 진혁위를 공개적으로 칭찬하며 치켜세웠다. 그러나 진혁위는 자신의 공을 과시하지 않았다. 그저 황족으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겸손히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더욱 기뻐한 것은 당연했다.
이후 진혁위는 영왕부와 황궁만을 오가며 전쟁의 사후 처리에 매진하고 있었다. 장군들이 세운 공로를 정리하고, 점령한 성도와 땅을 안정화시키는 일에 집중했다.
당금 태경 제일의 인기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진혁위는 최고의 신랑감이기도 했다. 진혁위와 혼인을 하기로 했다고 소문이 난 문강공의 적녀가 정인과 도망쳐 버린 것은 지난겨울에 가장 큰 논란거리였다. 황제의 체면을 제대로 구겨버린 문강공은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을 해야 할 정도였다.
스물한 살의 친왕인 진혁위의 원비 자리는 아직도 공석이었다. 수많은 매파가 영왕부의 문턱을 넘었으나 모두 퇴짜를 맞고 돌아갔다.
채제승의 눈에는 진혁위의 행보가 이상하게 보였다. 착실히 군공을 쌓고, 정무에 참석하고, 퇴청 후에 황족이나 고관들과 어울리며 친분을 쌓는 것은 확고한 의도를 가진 행동이었다.
먼 서쪽으로 떠나는 대신에 제좌를 가지기로 선택한 진혁위는 힘을 키우고 있는 중이었다. 황제란 개인의 재능만이 아니라 수많은 이해 관계자의 지지가 있어야 될 수 있는 법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다면 진혁위가 혼인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황자의 가장 커다란 지지 세력은 당연히 외가였고, 그다음이 처가였다. 특히 황자는 처첩을 여럿 두어 제 세력을 늘리는 것이 정석이었다. 방왕과 기왕이 경쟁을 하듯 혼인을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혁위는 귀비 한 명이 전부였다. 그것도 배경이라는 것이 하나 없는 타국의 장군 출신이었다. 그가 아무리 류희겸을 총애한다고 하나 권력과는 별개의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채제승이야 권력과 무관한 삶을 선택했기에 부인 하나만 보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제좌를 가지려는 진혁위는 상황이 달랐다.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채제승은 입을 다물었다.
얼마 전에 아버지와 형님이 자신을 찾아왔다. 무림에 투신한 탓에 집안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던 채제승이다. 그런데 진혁위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알려지자 가문에 힘이 되어야 한다며, 진혁위와 형님의 딸의 혼사를 성사시킬 수 있게 힘을 써달라는 압박이 들어왔다.
여기서 자신이 혼사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의도가 변질될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제 와 권력을 탐한다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채제승이 그렇게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진혁위가 명단을 끝까지 확인했다.
“생각보다 수가 적군.”
“확실한 사람들의 이름만 표기했습니다. 이름이 적힌 자들의 수하나, 반응이 미적지근한 동조자들의 이름은 뺐습니다.”
진혁위를 주군으로 모시기로 한 이후로 채제승은 깍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진혁위 역시 그것을 어색함 없이 받아들였다.
“서천에서 오는 이들은 확실하게 확인하고 있지?”
“그것 때문에 제 허리가 휠 지경입니다.”
“멀쩡해 보여.”
“아이고. 힘들다니까요. 그런데 진짜 기왕이 일을 벌이기는 할 모양입니다.”
채제승은 과로를 하소연하다가 자신이 알아낸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렸다. 기왕은 지금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진혁위가 출병하여 태경을 떠나 있는 동안에 채제승은 어느 때보다 바쁘게 일했다. 황궁과 태경 안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를 파악하고, 황제, 황후, 태자, 기왕의 동향을 살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정리하여 진혁위에게 전하는 일은 그저 바쁘다는 말로 축약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겨울 동안 기왕의 움직임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의욕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고 무력에 대한 집착을 보였다.
서천에서 양민들의 토지를 강탈한 문정후와 서천도독이 실각하면서 기왕의 세력은 쪼그라들었다. 아직 기왕의 사람들이 적지는 않았지만 내실은 단단하지 못했다. 태자가 폐위되어 방왕이 되었으나 기왕 역시 사정이 좋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기왕이 문정후의 휘하에 있던 퇴역 군인들을 조심스럽게 태경 인근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너무 은밀해서 진혁위의 지시가 없었더라면 채제승도 모르고 지나쳤을 정도였다. 내부에 심어둔 간자조차도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내전을 일으키기에는 세력이 안 되니, 범궐(犯闕)을 하겠지. 정적은 폐태자가 되어 황궁 밖으로 나왔고 황제도 아프니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범궐, 말입니까?”
“금군부장 둘을 회유했으니 사형의 말대로 일을 벌이기 딱 좋지. 때에 맞춰 태자를 죽이고, 오문이 활짝 열린 황궁으로 쳐들어가 병든 황제를 겁박해 황태자 교지를 받아내기까지 하룻밤도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걸?”
지난 생에 겪었던 일을 소리 내어 말하니 마치 예언처럼 들리는 바람에 진혁위는 피식 웃고 말았다. 역사를 뒤져보면 황제를 겁박하여 황태자 교지를 받아내는 일은 의외로 많이 있었다. 시와 운이 따르면 가능성은 꽤나 높았다. 기왕이 노리는 것도 그것이었다. 물론 지난 생에서는 실패했지만 말이다.
“전부터 궁금했던 것인데, 혹시 영험한 신통력을 가진 사령이나 점복을 만나고 계십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왕야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모두 들어맞아서 말입니다. 앞날을 내다보시는 것 같아서요. 거기에 옥광맥이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앞날을 내다보지는 않았지만 미리 살아보기는 했던 진혁위는 내심 뜨끔했다. 폐금광을 산 류희겸처럼 일확천금을 노리려다가 너무 주목을 받았나 싶었다. 그래도 태연한 얼굴로 대꾸할 정도의 배짱은 있었다.
“운이 좋아서 그래.”
“매우 좋으셨죠. 가채굴을 해보니 최상등급의 옥이 나왔다고 합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셔야 할 겁니다.”
운이 좋다고 눙치자 채제승은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고 넘어갔다. 최상급 옥이 나올 것을 미리 알았던 진혁위는 놀라는 대신에 화제를 바꾸었다.
“기왕이 언제 일을 도모할지가 관건이야. 반드시 정확한 날짜를 알아야 해.”
“막지 않으실 겁니까?”
“기왕이 방왕을 죽일 터인데, 막으면 안 되겠지. 사형의 숙원을 그가 이루어줄 거야.”
기왕의 역모를 발고하여 진혁위에게 도움이 될 방향을 생각하고 있던 채제승은 눈을 크게 떴다.
차도살인이 처음 계획이었다. 방왕과 기왕이 서로를 공격하다 서로를 죽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방왕에 대한 원한은 여전히 깊었다. 진혁위의 수족이 되어 힘든 일을 도맡은 것도 복수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느새 복수는 당연한 것이 되었고, 머릿속은 진혁위를 제좌에 앉히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깨달음은 놀라웠지만 다행이라 여겼다. 삶이란 강물처럼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한곳에 고이지 않고 나아가 대해(大海)에 다다르는 여정을 다시 시작한 것은 좋은 일이었다.
물론 방왕을 죽일 수 있게 된 것은 더 좋았다. 무엇보다 심화로 고생하는 부인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이다.
“그거 좋은 일이군요. 거사 날짜를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우선은 태경과 서릉에 숨어 있는 퇴역병들에게 사람을 붙여두도록 하겠습니다.”
활짝 미소를 지은 채제승은 의욕적으로 말했다.
이후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의논을 마치고 채제승이 물러나자 진혁위는 남은 서신을 살폈다.
대부분은 연회 등에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지만, 아닌 것도 몇몇 있었기에 제대로 읽어봐야 했다. 그중 하나가 경군왕의 서신이었다. 안부를 묻는 평범한 내용이었지만 답신을 적어야 하는 것이었기에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재작년 가을 수렵회에서 역모를 일으킨 진서녹에게 정패를 빌려주어 연금되었던 경군왕이 신년이 되어 연금 상황에서 풀려났다. 오랜 조사 끝에 역모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으나, 고의가 아니더라도 사사로이 정패를 빌려주어 혼란을 도왔다는 이유로 연금은 오래도록 이어졌었다.
경군왕의 무죄가 밝혀지고 난 후 진혁위는 절기에 맞추어 선물을 보냈다. 굳이 따지자면 다른 형제들에게 보인 호의와 별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지난 생에서 연금이 풀린 경군왕은 결국 방왕에게 회유되었다. 정확히는 황제가 경군왕에게 방왕의 사람이 되라고 압박했다.
형제들 중에 가장 성격이 온화한 경군왕은 역모에 연관되어 한 번 연금을 당했던 것 때문에 몸을 사리고 싶어도 황제의 압박을 버텨내지 못했다. 그리고 방왕과 함께 황궁에서 돌아오는 길에 기왕의 습격을 받고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많은 것이 전과 달라졌다. 이번에는 경군왕이 방왕의 사람이 될 시간 자체가 없겠지만 미리 주의하는 게 좋았다.
지체 없이 경군왕에게 답신을 적던 진혁위는 문득 정리되지 않은 의문이 떠올랐다.
자신이 진서녹에게 정패를 주지 않았던 것은 류희겸 때문이었다. 지난 생에 일어났던 일을 알고 있었으니 새우를 먹고 싶다 하여 혹여라도 자신의 정패가 훈군왕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던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때 자신이 정패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진서녹에게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조금 당황하기는 했었다. 이전 생에서는 진서녹이 자신에게 정패를 빌려달라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워낙 많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에 당시에는 변수라고 여기며 넘어갔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이전 생에서 류희겸의 손에 이끌려갔던 시기가 공교로웠다.
황후를 만나 독이 든 다과를 먹고 돌아오던 때였다. 잠시 숨어야 한다며 류희겸이 인적 드문 곳으로 손을 잡아끌었다. 그가 자신을 유혹한다는 착각에, 숨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따져 묻지 않았었다.
어쨌든 류희겸 덕분에 진서녹을 피할 수 있었다. 만약에 이전 생에서 진서녹을 만났다면 아무 의심 없이 정패를 빌려주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경군왕의 신세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우연이긴 할 텐데.”
우연이라고 넘어가기에는 의문이 아주 깔끔하게 해소되지 않았다. 진혁위는 오늘 저녁에 류희겸에게 숨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경군왕에게 보낼 서신을 마무리할 때 반계효가 나타났다. 그는 영왕부 휘하 기병인 진화대를 통솔하는 장군이었다.
“무슨 일이냐?”
“전하. 귀비 마마께서 쓰러지셨다고 하옵니다.”
“뭐?”
반계효의 다급한 설명에 막 붓을 놓던 진혁위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진혁위의 시선을 받은 반계효가 다음 설명을 이었다.
“그것이, 귀비 마마께서 말을 타고 훈련을 지켜보고 계셨는데, 말에서 내리시는 와중에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넘어지신 것은 아니고 말고삐를 잡은 채로 무릎을 꿇었는데, 혼자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영수가 귀비 마마를 업고 경화당으로 갔습니다. 왕야께서 빨리 아셔야 할 것 같아 소장이 직접 왔습니다.”
“알았다.”
진혁위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장에서는 절대 죽지 않을 것 같던 사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쓰러졌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편전을 나서는 진혁위의 걸음은 날랜 호랑이처럼 빨랐다.
*
진혁위와 함께 태경으로 돌아온 류희겸은 전처럼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진윤홍을 만나러 진혁위와 함께 공주부로 발걸음한 것 말고는 왕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대신 영왕부의 진화대 장수들과 훈련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 달여 동안 훈련은 거의 매일 같이 있었다. 마상 책술을 배우고 싶다고 한 장수들은 열정적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채찍을 쓸 수 없었기에 허수아비가 동원되었다. 처음에는 헛손질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훈련을 거듭하면서 이제는 능숙하게 채찍을 휘둘렀다. 아직 말을 내달리며 허수아비의 목을 정확하게 휘감는 이는 없었지만 정확하게 맞추기 시작했다.
“실력이 제법 늘었어.”
말에 올라 훈련을 지켜보던 류희겸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고영수가 따라 웃었다.
류희겸의 호위는 보통 운문형이 도맡아 했다. 그러나 오늘은 운문형이 쉬는 날이었기에 고영수가 따라붙었다.
병사들에게 훈련이란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진혁위가 공들여 키운 기병은 대부분 실력이 뛰어났다. 평소에도 태만하거나 게으름 피우는 이들은 없었지만 류희겸이 훈련에 참석하고부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지난 전쟁 동안에 류희겸은 희일준에게 마상 창술을 가르치다, 희가의 만화대와 어울리며 그들에게 마상 책술을 선보였다. 처음에는 책술에 흥미를 보인 만화대 장수들이 장난처럼 훈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실력이 눈에 띄게 좋아지자 영왕 휘하의 진화대 장수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영왕의 귀비께서 어찌하여 만화대에 비기(祕技)를 알려주냐고, 영왕의 신임을 받는 자신들이 먼저 배워야 한다고 말이다. 결국 반계효가 나서서 진혁위에게 진언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진혁위는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하는 대신에 류희겸에게 잘 말을 해주겠노라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류희겸 역시도 태경으로 돌아간 이후에 봐주겠노라고 한 약속을 지켜주었다.
류희겸은 거창을 휘두르는 솜씨만큼이나 매서운 지휘관이었다. 장난처럼 시작한 훈련이었지만 어느새 다들 진지해져 있었다. 정확히는 류희겸이 매섭게 몰아붙이자, 혼자 뒤처질 수 없다는 호승심에 열심히 한 덕분이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본 고영수는 류희겸이 타고난 장군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개인 무력이 뛰어난 것만이 아니라 부하들의 굴리면서 이끌 줄 알았다.
실수에는 관대하나 게으름에는 용서가 없는 호랑이 같은 귀비 마마가 무섭다고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고영수 역시 류희겸이 그저 마음 넓고 착한 귀비 마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굳이 따지자면 류희겸은 지장(智將)과 맹장(猛將)에 가까웠다. 진혁위와 달리 상냥하여 좋아하였으나, 상관으로 만나면 무서운 것은 똑같았다. 그래도 호의에는 다정히 답하여 준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만수절(萬壽節)에 입궁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래. 입궁하게 되었다.”
엿새 후면 황제의 탄신일인 만수절이었다. 작년에는 천무동에 들어가 있었던 류희겸은 처음 맞이하게 되는 황제의 생신이었다.
각혈을 하며 쓰러진 황제에게 큰 병이 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욱 화려한 연회가 열릴 거라고 했다.
원래는 친왕의 원비만이 황실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 이번에 군공을 세운 류희겸은 특별히 연회에 참석해도 좋다는 황제의 허락이 떨어졌다.
진혁위와 머리를 맞대고 이 시기의 만수절에 일어났던 사건을 떠올려보았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래도 직전 생과는 많은 것이 바뀌었기에 조심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것이온데, 마마께서도 그거 아십니까? 요새 황궁에서 화전(花鈿)이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화전?”
“예. 화전이요. 이마를 치장하는 것인데, 마마께서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무엇인지는 안다. 그게 왜?”
화전이라면 여인들의 화장법 중에 하나였다. 미간 사이에 꽃이나 달과 별 등의 무늬를 그려 넣는 것으로, 때로는 새의 깃털이나 보석, 혹은 꽃잎을 붙이기도 했다. 고대의 화장법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 번씩 유행하고는 했다.
“심 상궁이 마마께서 화전을 하지 않겠다고 하실까 걱정하는 것을 들어서 말입니다. 다들 화전을 하는데 귀비 마마만 안 하시면 눈에 띄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마마께서 싫어하실 수도 있어 심 상궁이 고심하고 있기에 소인이 은밀히 알아보겠다고 하였습니다. 뇌물로 맛있는 당과도 얻어먹었지요. 화전은 괜찮으시겠습니까?”
진혁위의 신임을 받는 고영수는 정보를 수집하는 데 능했다. 말재주가 좋은 고영수는 재미있는 대화 상대이기도 했다. 고영수가 말하는 심 상궁은 심양설이었다. 류희겸의 치장에 열과 성을 다하는 심양설이 화전을 두고 어찌하나 고심하는 것은 당연했다.
친왕의 측비가 공적인 자리에서 갖춰야 하는 정복과 머리 장식은 호화로웠다. 특히 진혁위가 류희겸의 머리를 비녀로 치장하는 것을 즐기는 바람에 더욱 그랬다. 류희겸은 머리 장식보다 훨씬 무거운 투구를 쓰고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 더 마음 편했다.
하지만 화전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얼굴과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무겁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화전이야 싫을 것도 없다. 어울리지 않을 테지만.”
“어울리실 겁니다.”
“그런가?”
“마마께서는 거울도 안 보시나 봅니다. 태경 거리에 마마보다 잘난 사내가 몇이나 있으려고요. 뭘 입고 뭘 하셔도 잘 어울리실 겁니다. 왕야께서도 곱다고 하실 것이옵니다.”
고영수의 정직한 아부에 피식 웃던 류희겸은 훅 치밀어 오르는 열기에 인상을 썼다. 두 달 전부터 시작된 이상 증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주기는 제멋대로고 증상의 강약도 왔다 갔다 했다. 다만 조금씩 심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버티지 말고 옥안인에게 진맥을 받아야 하나 생각하면서 열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열과 함께 어지러움까지 덮쳤다.
심상찮은 기운에 류희겸은 낙마를 걱정하며 말에서 내렸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무사히 두 다리를 땅에 디뎠으나 버티고 설 힘이 없어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마마?”
눈앞이 순식간에 까매진 류희겸의 귀에 고영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식은땀이 흐르고, 심한 이명에, 숨 막히는 것은 기절하기 직전과 비슷했다. 다행히 시야가 천천히 돌아오면서 기절만큼은 하지 않았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조금, 조금 어지러울 뿐이네.”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고영수가 부축해 주었음에도 류희겸은 제 발로 설 수가 없었다. 이상을 알아차린 반계효까지 다가왔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류희겸은 고영수의 등에 업혀 경화당으로 향했다.
제힘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류희겸이 나타나자 경화당은 난리가 났다. 웃기게도 침상에 누워 물을 마시자 멀쩡해졌다. 열은 남아 있었지만 어지러움도 힘 빠짐도 사라졌다.
그러나 이제는 괜찮다고 해도 심양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갑자기 쓰러졌다는 것은 분명 안 좋은 곳이 있다는 뜻이라며 침상 위에서 꼼짝도 하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침상에서 꿀차를 홀짝이고 있는 와중에 옥안인이 헐레벌떡 나타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혁위도 모습을 드러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진혁위의 감시 속에 옥안인이 류희겸을 진맥했다. 진단은 피로였다. 피로가 쌓여 맥이 불안정하다는 것이었다.
“피로라고? 겨우 피로 때문에 귀비와 같은 건장한 사내가 제 몸을 못 가눈단 말이냐?”
“그러니까…… 최근에 마마께서 심력을 쓰실 일이 많으셨지 않습니까. 승전은 하였으나, 마음이 놓이니 긴장이 풀리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보통 그렇지요. 그리고 심력에 기력이 따라갑니다. 기맥이 불안정하고, 열이 나고, 어지럽고. 모두 기력이 약하여 일어나는 증상입니다.”
경화당의 침방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진혁위의 매서운 물음에 옥안인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처방은 간단했다. 편히 쉬고, 보양식을 먹는 것이 전부였다. 옥안인은 보약을 지어 올리겠다며 물러났다.
그저 기력이 쇠한 것뿐이라는 진단에 류희겸은 내심 안도했다. 음인으로 변모하는 증상인가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귀비가 이렇게 연약할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연약하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 없었던 류희겸은 충격을 받았다. 진혁위가 애틋하게 손을 잡아 왔지만 슬그머니 뿌리쳤다.
“신첩은 연약하지 않습니다.”
“알아. 귀비는 호랑이처럼 용맹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린 사슴만큼이나 약하지.”
또다시 사슴이었다. 류희겸은 왜 자꾸 사슴에 비유하느냐고 따지고 싶은 것을 참았다.
“금방 나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신첩이 편히 쉬려면 왕야께서 자리를 비켜주셔야 합니다.”
“내가 왜?”
“황공하옵게도 신첩의 기력이 떨어진 이유의 절반 정도는 왕야께 책임이 있으십니다. 아니라고 하지 마십시오.”
전쟁터에서도 식지 않던 총애는 태경으로 돌아와서는 더욱 심해졌다. 진혁위는 하루도 류희겸과 떨어지지 않고 나란히 잠자리에 들었다. 때문에 경화당은 진혁위의 침전이 되어버렸다.
기력이 쇠한 것은 단지 복수를 끝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의 매일 교합하니 힘이 빠지는 것은 당연했다.
“본왕이 연약한 귀비를 괴롭힌 것이냐? 응?”
“왕야께서 노여워하실까 두려워, 감히 신첩이 답하지 못하겠나이다.”
“?!”
문장은 나긋하지만 어조는 그렇지 못한 무심한 대답이었다. 진혁위가 놀란 표정을 짓는 게 웃겨서 류희겸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럴 때면 진혁위가 귀엽기는 했다.
“연약한 귀비처럼 대답하는 게 어렵습니다. 왕야께서 신첩을 괴롭혔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책임이 있다 하였지요.”
“하하하. 잘못했다가는 귀비의 원성을 사겠구나. 그래. 편히 쉬려면 본왕이 사라져야지. 한동안 훈련은 멀리해라. 반계효에게는 본왕이 말해 두겠다.”
“예.”
류희겸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맛있는 것을 잔뜩 먹고, 푹 자고 나면 좋아질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날 밤, 갑자기 상태가 나빠진 류희겸은 고열에 시달리며 앓기 시작했다.
*
열 때문에 정신없이 아픈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번 생에서 여러 번 다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심한 적은 없었다. 열이 심한데다, 머리는 무겁고, 입은 바싹 말랐다. 그리고 힘이 들어가지 않고 축 늘어진 몸은 마치 심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혼몽한 와중에 진혁위가 옥안인을 협박하는 것이 들렸다. 귀비가 잘못되면 네놈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말에 자신의 상태가 심각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복수를 성공하였더니 긴장이 풀려 심력과 기력이 떨어졌다는 것은 이해했다. 진혁위와 거의 매일 같이 교합을 하였으니 더 심해진 것일 수도 있었다.
진한재를 죽였으니 이대로 생이 끝나더라도 원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련은 남았다. 이제 겨우 평범한 생을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진혁위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봐야 하는데. 희일준에게 혼례 선물을 주어야 하는데. 고막영이랑 연림군의 장수들이 잘 살고 있는지도 보고 싶은데.
삶에 대한 의지보다는 미련이 주렁주렁 남았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이대로라면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의 생각이 너무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오는 것과 별개로 다시 연주성 감옥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여 무서워졌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 소름이 끼치는 바람에 류희겸은 눈을 번쩍 떴다. 괴로울 정도로 높았던 열이 느껴지지 않았다. 목이 따가운 것도, 팔다리가 아픈 것도 사라졌다. 묘한 기분에 류희겸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해가 진 듯 창밖은 어두웠는데 침방 안은 밝았다. 주위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류희겸은 심양설을 찾았다.
“심양설?”
“깨어났군.”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었던 공간에 한 남자가 나타나서는 불쑥 말을 걸었다. 깜짝 놀란 류희겸은 잔뜩 몸을 긴장시켰다가 힘을 뺐다. 낯설지만은 않은 얼굴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천무동의 이무기. 이제는 용이 된 신령스러운 존재였다.
지난번에 은혜를 갚겠다는 용에게 복수를 끝내고 난 다음으로 미루겠다고 했었다. 그때는 그냥 꿈인 줄 알고 넘겼다. 그런데 같은 꿈을 연결해서 꾸는 것은 뭔가 의미심장했다.
류희겸은 침상에 앉아 멍하니 용을 올려다보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복수를 하고 난 다음이라고 했잖아.”
“혹시 제가 아픈 게, 당신 때문입니까?”
이전에는 혼만 빼서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정신을 잃고 한 달은 넘게 누워 있어야 했다. 이번에 앓는 것도 용이 만나려고 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괜한 오해다. 내가 생령을 뽑은 전적이 있기는 하지만, 일부러 아프게 하지는 않아. 차라리 전처럼 생령을 뽑아버리면 그만이지. 네가 아픈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다. 너는 지금 음인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니까.”
“……?!”
충격은 천천히 다가왔다. 기력이 바닥난 게 아니라 음인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란다.
양인과 음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래도 옥안인의 말로는 별다른 증상은 없을 거라고 했다. 약간의 미열이 전부이며, 음인이 되면 당사자나 진혁위가 금방 알아차릴 터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도 말해 주었다.
“원래는 아프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제게 문제가 생긴 겁니까?”
“문제라면 문제지. 너와 상성이 나빠.”
“어떤 상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음인은 양인에게 육신이 종속된다. 헌데 너는 누구에게 종속되기를 싫어하지. 육신은 변하려는데 본성이 저항하고 있으니 이리 아픈 거야. 본래라면 너는 음인이 되기 힘들어. 네 짝이 집요하여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지.”
류희겸은 용의 설명이 무슨 뜻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원래는 음인이 되기 힘들다는데 진혁위의 집요함 때문에 가능해졌다고 하니 괜히 쑥스러워졌다.
음인이라. 류희겸은 뒤로 미루어두었던 일이 또 당장에 현실이 되었음을 느꼈다.
“그럼…… 제가 음인이 됩니까?
“그야 네게 달렸어. 끔찍하게 싫다면 안 될 것이고, 되고 싶다 하면 될 것이고. 그냥 내버려 두면 반반? 에잇. 왜 이딴 설명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얼른 소원이나 말해라. 황금이 좋다고 해. 인간은 황금을 좋아하잖아.”
은혜 갚기에 집착하는 용이 황금이 좋다고 소리를 높였다.
세상 근심이 돈으로 사라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맞았다. 복수가 끝났으니 산더미 같은 황금을 달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었다. 정말 눈앞에 있는 남자가 신령스러운 용이라면 황금만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운명을 바꾸는 게 아니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래. 황금이다. 황금이라고 하자.”
“당신께서 신령스러우신 모습으로 화진의 황제에게 현몽(現夢)하여 남준해 장군과 채왕 전하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라 해주십시오. 신원을 복원시켜 명예를 지켜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남준해 장군도 채왕 전하도 모두 죽은 사람입니다.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류희겸은 오해가 없게 조심히 단어를 골라 단호하게 말했다. 진한재의 시신과 자백서를 화진으로 보낸 지 두 달이 훌쩍 지났다. 국경을 넘어 마차로 이동한 진한재의 시신은 보름이 넘어 화진의 수도인 경릉에 도착했다.
진한재가 쓴 자백서가 황제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은 진혁위가 심어둔 간자가 소식을 전해주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것을 공론화시키지 않았다. 대신에 자백서가 사실인지 조사하고 있었다.
문제는 관련자가 대부분 살해당했거나 자취를 감추고, 자살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을 밝히는 것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꿈이 아니라면, 정말 용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황금보다 황제의 꿈에 나타나 남준해 장군의 억울함을 풀라고 하는 것이 더 좋았다.
용은 상서로운 존재이며 황제의 상징이기도 했다. 류희겸이 알고 있기로 화진의 황제는 이런 징조를 잘 믿었다. 꿈에 용이 나타난다면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날지도 몰랐다.
작은 희망을 걸고 류희겸은 소원을 말했다. 그런데 용이 얼굴을 구겼다.
“싫어. 현몽하여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은 딱 질색이야. 황금을 달라고 해.”
용이 황금을 강조하며 배짱을 부렸다. 류희겸은 싫다는 용의 결정을 쉽게 바꿀 수 없음을 눈치챘다. 그러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신령스러운 존재이시여. 저는 욕심 많은 인간입니다. 하여 매년, 정월 초하루에 이 방을 가득 채울 황금을 받길 원하옵니다.”
“……매년?”
매년 정월 초하루에, 작은 집 한 채 크기의 황금을 원한다고 하자 용이 크게 눈을 떴다. 그리고 그게 맞느냐고 되물었다. 류희겸이 생각해도 어마어마한 양이었지만 시침을 뚝 떼고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매년입니다.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제가 원하는 곳에서 이 방을 가득 채울 양의 황금을 받고 싶습니다.”
“그건 너무 많잖아.”
“황금을 주겠노라 하신 것은 당신이옵니다. 한계를 정하지 않으셨지요. 신령스러운 존재께서 약속을 어기실 것이옵니까?”
류희겸은 정색하며 용을 상대로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용의 실수는 한계를 정하지 않고 황금을 주겠다고 한 점이었다.
고금의 신화와 전설을 보면 신령스러운 존재의 약속은 중요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대부분 허술한 면이 있어 인간에게 골탕 먹곤 했다.
매년 집채만 한 황금을 받는다면 그것대로 좋았다. 화진의 황제와 고관들에게 뇌물을 찔러 넣어서라도 고모부님의 억울함을 풀겠다 마음먹었다. 물론 이것이 꿈이 아니어야 했지만 말이다.
매년 방을 가득 채울 정도의 황금은 용에게도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용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와. 와……. 인간은 욕심 덩어리라더니. 그 많은 황금으로 뭘 하려고.”
“쓸 곳은 많습니다.”
“인세의 황금을 다 모아도 네 욕심을 채우지 못할 거야. 좋아. 화진국의 황제에게 현몽하여 네 말을 전해주겠다. 그것을 바라는 것이지?”
용의 항복에 류희겸은 다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제 부탁이라는 것은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나도 알아. 젠장. 황금을 주겠다고 했으니 황금도 주겠다. 저기, 저 상자 안에 들어갈 만큼. 다른 말 하기 없기야.”
과연 용은 배포도 컸다. 용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침방 한쪽에 놓아둔 커다란 상자였다. 류희겸의 개인적인 물건을 넣어두는 상자는 우풍이가 들어갈 정도로 꽤 큼지막한 크기였다.
“감사합니다.”
용에게 원하는 것을 얻어낸 류희겸은 침대에서 일어나 예를 올렸다. 반쯤 협박을 한 것이나 다름없지만 고마움은 제대로 전달해야 했다.
“흥, 아주 예의 없는 놈은 아니구나.”
콧방귀를 세게 낀 용은 속이 후련하다는 듯 굴었다. 류희겸 역시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웃었다. 이게 꿈이라고 해도 나쁘지 않았다.
*
류희겸은 눈을 깜빡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 있었는데, 어째서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에 침상에 누워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다 나았던 몸이 아프고 무거웠다. 열과 함께 목덜미에 땀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몇 박자 늦게 자신이 꿈을 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은혜를 갚겠다는 용이 나타났다. 첫 번째는 그냥 꿈이라고 여기며 넘겼었다. 그런데 연속해서 같은 꿈을 꾸니 왠지 기대가 생겼다. 황금보다 더 좋은 것을 받아서 더욱 그랬다.
화서지몽(華胥之夢)인지, 아니면 진짜 용이 은혜를 갚는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했다.
“정신이 드느냐?”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며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옆에서 진혁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의자에 앉아 있는 진혁위가 눈에 들어왔다.
꿈과 달리 최소한의 등불만 켜져 있는 침방 안은 어두웠다. 짙은 음영이 드리워진 진혁위의 얼굴은 어딘가 거칠어 보였다.
“제가……. 신첩이 얼마나 누워 있었습니까?”
“하루 꼬박 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았군요.”
“속 편한 소리를. 하루 내내 정신도 못 차리고 앓았는데. 열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기나……. 하…….”
진혁위가 말을 하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두운 쪽으로 사라지는 바람에 류희겸은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뭘 잘못했기에 화를 내나 싶다가, 진혁위가 많이 걱정했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도 하루 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한 달 넘게 정신을 잃고 누워만 있었다.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여기며 진혁위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나간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류희겸은 진혁위를 불렀다.
“왕야? 안 계십니까?”
깔깔한 목소리가 고요한 침방에 울렸다. 그러자 침방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나며 진혁위가 돌아왔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때는 구겨졌던 얼굴이 지금은 멀쩡했다.
“감정이 격해져서 큰 소리가 날 것 같아 자리를 피했다. 하아. 열이 심해서 위험해질 뻔했으니 괜찮다는 소리는 하지 마라.”
“그렇습니까?”
“그래. 눈도 못 뜨고 끙끙 앓았다. 몸은 어떠냐?”
“열이 나고, 몸이 무겁습니다. 감기에 걸린 적이 오래되었는데 그때와 비슷합니다.”
“감기는 아니랬다만, 옥안인이 미덥지 못하다. 어째 기력이 쇠하였다는 말밖에 안 해. 이리 열이 나고 아픈데도.”
류희겸은 반사적으로 용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음인이 되어가고 있는 중인데, 본성이 그걸 거부하고 있어서 아픈 거라고 했다. 신빙성은 있으나 꿈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었기에 류희겸은 말을 아꼈다.
“시장하지는 않느냐? 목이 마르지는 않고?”
물에 적신 수건을 짠 다음에 땀이 밴 이마를 닦아주는 진혁위의 손길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류희겸은 진혁위가 지금껏 간호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제야 깨달았다.
“손을 잡아주시겠습니까?”
“응? 손이야…… 잡아주지. 당연히. 그런데 많이 아픈 것이냐? 귀비가 이러면 무섭다니까. 아프면 아프다고 해라.”
손을 잡아주면서도 진혁위가 너스레를 떠는 바람에 류희겸은 웃고 말았다. 자신의 손이 뜨겁기 때문인지, 아니면 젖은 수건을 쥐고 있어서 그런지 진혁위의 손이 서늘해서 좋았다.
“신첩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
“예. 천무동의 이무기가 용이 되어 나타났는데, 용이 된 것이 신첩 덕분이라며 은혜를 갚겠다고 말입니다.”
류희겸은 차근차근 꿈에 대해서 설명했다. 처음에는 진한재를 죽여달라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원을 말했다. 그러나 용이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실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소원은 복수를 끝내고 난 후에 말하겠다고 다음으로 미루었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다. 그러다 이번에 또 용이 은혜를 갚겠다며 꿈에 나타났다. 황금을 주겠다는 용에게 화진의 황제에게 현몽해 달라고 부탁했다. 남준해와 채왕의 억울함을 풀어 명예를 회복시키라고 말해 달라고 말이다.
반쯤 협박을 한 덕분에 소원도 이루고 황금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이 꿈인지 진짜인지 모르겠노라고 진혁위에게 모두 말했다. 그런데 진혁위는 다른 것에 더 집중했다.
“그러니까, 지난번에 한 달 넘게 정신을 잃었던 이유가 용이 생령을 뽑아가서 그랬다는 것이지? 신령스러운 존재가 어찌 그리도 무도한가. 은혜를 갚겠다고 황금을 주면 뭐 해. 그때 귀비의 몸이 얼마나 상하였는데.”
“노기를 가라앉히십시오. 그저 신첩의 꿈일 수도 있습니다.”
“만독화를 이무기가 주었다면서. 꿈일 리 있겠느냐? 그것도 두 번이나 꾸었다면서.”
“그럴까요?”
“화진의 황제 꿈에 용이 나오면 놀라겠지. 좋은 소식을 기다리면 되겠다.”
“예.”
류희겸은 그러겠노라 대답은 했지만 마지막까지도 만약의 가능성을 놓지 않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었다. 진혁위는 꿈이 아닐 거라고 했지만 너무 간절히 바라면 환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려면 신년에 용이 황금을 가져다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신년까지는 아직 반년이나 더 남아 있었다.
“물을 마시겠느냐?”
“목이 마르지 않습니다.”
“우선 마셔라. 땀을 많이 흘려서 마셔야 해.”
진혁위가 물을 챙기러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손을 놓았다. 허전한 손에 아쉬움을 느끼며 류희겸은 진혁위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꽤나 애처로운 모습이었기 때문에 제자리로 돌아온 진혁위는 더욱 마음을 쓸 수밖에 없었다. 류희겸에게 물을 마시게 하고, 얼굴을 닦아주고, 이불까지 꼼꼼히 덮어주고는 다시 손을 잡아주었다.
“이제 자라.”
“잠이 다 깼습니다.”
“눈 감으면 잠이 올 것이다. 눈부터 감아라.”
류희겸은 순순히 감았다. 정신이 맑았는데 하루 종일 정신을 잃은 탓인지, 눈을 감자 의식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제가, 제가 진한재를 죽인 것이 맞습니까? 꿈이 아니지요?”
기력이 빠진 류희겸은 의식이 가물거리는 와중에 진혁위의 손을 꽉 붙잡았다. 문득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차가운 연주성 감옥 안에서 죽어가고 있고, 찰나의 순간에 좋은 꿈을 꾸는 것일 수도 있었다.
진한재를 죽이기 전까지는 지옥에 빠져 생을 반복하는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런데 막상 복수를 하고 나니 이것 또한 꿈일 것 같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꿈이 아니다. 본왕은 이리 차근차근 고생하는 꿈은 안 꾼다.”
진혁위가 단언하는 바람에 류희겸은 혼몽한 와중에도 웃고 말았다. 정말 이게 자신의 꿈이라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너무하다 싶었다.
몇 번이고 죽으며 생을 반복할 게 아니라, 연주성 감옥을 탈주하여 야밤에 진한재의 숙소에 침입해 그의 목을 베어버리는 것이 제일 간단했다.
노비로 잡혀가 진혁위를 만날 일도 없었다. 음인이 되기 위해 이렇게 아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두려움이 가셨다.
“귀비가 무사히 깨어나면 뺨을 꼬집어주마. 아프면 현실이라 했다.”
진혁위의 낮은 목소리에 류희겸은 다시 웃어야 했다.
지금껏 몇 번이고 진혁위의 존재만으로 위안을 얻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직전 생을 공유하는 존재라는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진혁위는 좋은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어쩌는지 알 수 없어도, 적어도 자신에게는 아낌없이 도움을 주는 귀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류희겸은 음인이 될 수 없었다. 황제가 될 진혁위에게 자신은 큰 흠결이었다. 진혁위는 황후가 되라고 했지만 그건 안 될 말이었다. 타국 출신의 황후는 대신들이 그냥 두고 보지 않을 터였다. 음인이 된 자신이 낳은 아이 역시 정통성을 의심받을 것이다.
때가 되면 자신은 사라져야 했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그러니 음인이 되어 일을 더 꼬이게 만드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던 류희겸은 먹먹한 기분에 인상을 썼다. 영웅의 꿈은 스러졌지만 일생의 복수는 이루었다. 덤으로 남은 생에 후회가 없기를 바라며 올바른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가슴이 아팠다.
서쪽으로 떠나자고 했으면 어땠을까.
진혁위가 황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도 진혁위와 같이 멀리 떠나버린다면 이런저런 고민을 하지 않고 홀가분히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둘 모두 적당히 재주가 있으니 밥을 굶지는 않을 터였다. 아무 걱정 없이 남해를 구경하며 돌아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렇게나 뻗어가는 상상의 끝에 류희겸은 웃음을 삼켰다. 진혁위처럼 귀하게 큰 친왕을 고생시킬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남자에게는 천하의 가장 높은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황제가 될 남자에게 떠돌이 무인이 되자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류희겸은 자신의 무모한 욕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그가 좋았다.
연정인지, 그저 편안한 것인지, 혹은 감사한 마음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굳이 구분해야 하나 싶었다. 좀 더 진혁위를 편하게 대할 수 있겠다 생각하며 류희겸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류희겸이 규칙적인 숨을 내쉬며 잠에 빠져드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진혁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열이 너무 심한데다 정신도 못 차려서, 옥안인은 이대로라면 위험해질 거라고까지 했다.
진혁위는 어젯밤부터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또 이렇게 잃는 건가 싶어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와중에 다행히도 열이 내렸다.
세상 가장 고귀한 자리를 주고 모두의 우러름을 받도록 해주겠노라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럴 때면 그저 무탈하고 건강해 주기만을 바라게 된다.
“아프지 마라.”
진혁위는 잠든 류희겸을 향해 간절히 말했다.
◇ ◇ ◇
따스한 바람이 살랑거리는 봄에 황제의 생신연이 성대히 열렸다. 문무백관과 황친들이, 번국과 동맹국의 사신들이 만수절 연회에 참석하여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붉은 비단꽃이 드넓은 대전을 가득 채웠다. 향기로운 술과 음식이, 흥겨운 음악이, 무희들의 아름다운 춤이 가득한 연회는 흥겨웠다. 모든 것은 완벽하였으나 그 아래 균열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황제는 얼굴에 분을 발랐으나 병색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태자에서 폐위가 된 방왕은 술과 여색에 빠져 지낸다는 소문이 퍼졌다. 문정후를 잃은 기왕은 적극적으로 힘을 키우고 있었고, 승전을 하여 호양성과 은락성을 되찾아온 영왕의 기세도 대단했다.
범처럼 장성한 황자들의 갈등은 노골적이었다. 특히 원래부터 사이가 나빴던 방왕과 기왕은 황제가 각혈을 하여 쓰러졌다는 소문이 돌자 그 정도가 심해졌다. 서로의 실수를 꼬투리 잡아 싸우기 바빴다. 지금도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평화로운 시절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자신하지 못했다. 현명한 자들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반대로 영달을 좇는 이들은 누구에게 줄을 대야 하나 눈치를 보았다.
저마다의 욕망이 조용히 들끓는 대전 안에서 류희겸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무희들의 춤사위에 집중했다. 군공을 인정받아 영친왕의 귀비로 연회에 참석했지만, 워낙 성대한 자리라 눈에 띄지 않았다. 화려한 정복과 머리 장식도, 그리고 미간에 그린 화전도 더욱더 호화롭게 치장한 사람들 덕분에 묻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눈앞에 있는 산해진미에 손을 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황궁에서는 입에 아무것도 넣지 말아야 한다는 진혁위의 충고는 아직도 유효했다. 다행히 과일은 의심 없이 먹을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배가 차지 않았다.
허기짐을 느끼며 류희겸은 마지막 살구를 집어 들었다. 완연한 봄이지만 하남에서 공수한 여름 과일들이 여럿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어주었다.
“몸이 안 좋은 것이냐?”
류희겸의 앞에 앉아 있던 진혁위가 뒤로 슬쩍 몸을 돌리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닷새 전에 고열로 시달린 이후로 진혁위는 류희겸을 병자처럼 다루었다. 편히 쉬며 양생에 집중해야 한다는 옥안인의 진단에 경화당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은 물론이고, 만수절 연회에도 참석하지 말라고 했다.
물론 류희겸은 반대했다. 드는 자리는 몰라도 나는 자리는 티가 나는 법이었다. 게다가 특별히 황제가 참석하라 하였는데, 와병을 이유로 빠지는 것은 꼬투리 잡히기가 좋았다.
무엇보다 류희겸은 고열에 시달려 하루 종일 앓았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생생했다. 한나절 연회에 참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진혁위는 네가 무쇠라도 되냐며 침상 위에 누워서 꼼짝도 하지 말라고까지 했다.
때문에 지난 며칠 동안 얼굴만 마주치면 서로를 설득하다가 화를 냈고, 결국 말다툼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래도 결국에는 류희겸이 이겼다.
류희겸은 오늘 아침 일찍부터 단장을 끝마치고는 진혁위의 침전으로 찾아가서는 대기했다.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한 진혁위가 귀비의 고집이 황소 같다고 혀를 찼다. 그래도 류희겸을 두고 지나치는 대신, 몸이 안 좋아지면 바로 돌아올 거라고 엄포를 놓으며 연회 참석을 허락했다.
연회에 참석한 이후로 진혁위는 괜찮냐고 아픈 곳은 없냐고 계속 물었다. 몸이 좋지 않다고 하면 당장에 왕부로 돌아가자고 할 기세였다. 그럴 때마다 류희겸은 멀쩡하다고 피력해야 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귀비가 연약하니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이제 아픈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앞을 보십시오. 청해국의 사신입니다.”
“알았다.”
류희겸의 타박에 진혁위가 몸을 반듯이 하고 앞을 보았다. 문무백관과 각국의 사신들이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며 하례를 올리는 자리였다. 황제와 가까운 자리에 배정받은 진혁위는 바른 몸가짐을 보여야 했다.
흥겨운 연회는 계속 이어졌다.
*
커다란 산호를 진상한 재번국의 번왕이 황제의 만수무강을 비는 것으로 만수절 연회가 끝났다. 황제는 모두의 건강을 빌어준 다음 대전을 나섰다. 남은 사람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그사이에 방왕과 기왕이 서로 신경전을 벌였다. 서로 자기의 사람을 잔뜩 데리고 대전을 나서려다 입구에서 마주쳤는데, 누가 먼저 나갈지 다툼이 있었다.
이전이었다면 예법에 따라 태자가 먼저인 것이 맞았다. 하여 기왕은 태자에게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멀찍이 떨어져 움직였다. 하지만 이제는 서로 같은 친왕이니 기왕이 방왕에게 양보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현시점에서 기왕은 황제의 장자였다. 적자는 아니었으나 형제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자신이 방왕에게 꿀릴 것이 없다는 기왕의 생각이 행동으로 고스란히 나타났다.
평소라면 거칠 게 없었던 방왕이 달라진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는 분개했다. 서로 시비를 걸듯 한마디씩 주고받다가 결국 기왕이 보란 듯이 방왕 앞을 지나쳐 먼저 나가버렸다. 방왕이 소리를 지르며 폭발했지만 기왕은 이미 멀어지고 난 다음이었다.
두 황자의 불화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속으로 혀를 찬 것은 당연했다. 그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진혁위와 류희겸은 방왕이 씩씩거리며 사라지고 나서야 천천히 움직였다.
“좋은 연회였는데, 마지막이 소란스럽구나. 그렇지 않으냐?”
진혁위와 류희겸의 곁으로 진윤홍이 다가와 한마디 했다. 이미 연회가 시작되기 전에 한 차례 인사를 나누었던 세 사람은 함께 황궁을 나가기로 약속했었다.
“고모님.”
“다른 약속은 없는 것이지?”
“예. 오문까지 모시겠습니다.”
진윤홍을 위시하여 류희겸과 진혁위가 뒤를 따랐다. 다음은 공주부와 영왕부의 늙은 태감들이 발소리를 죽이고 움직였다. 가벼운 환담을 나누며 걸음을 옮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편전태감이 다가와 황제가 진혁위를 불렀다고 알려왔다.
지난 중추절 연회가 끝나고서도 황제의 부름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진혁위만 찾는다고 했다.
진혁위는 편전태감을 따라가고 류희겸은 진윤홍과 함께 오문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오문으로 가는 길에 진윤홍이 좋은 찻잎을 손에 넣었다며 류희겸을 공주부로 초대했다.
원래라면 신년 연회에만 겨우 참석하던 진윤홍이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류희겸을 만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겨우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지만 진윤홍은 그것으로도 좋았다. 지금처럼 기회를 보아 차를 마시자고 권할 수도 있었다.
류희겸이 진혁위에게 먼저 물어봐야 한다고 할 때였다. 이번에는 어린 태감이 다가와 진혁위를 찾았다. 황제의 부름을 받고 갔다고 하자 태감이 안절부절못하더니 류희겸의 손에 쪽지를 쥐여주고는 황급히 사라졌다.
“마마. 소인에게 주십시오. 소인이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읽겠다.”
너무 이상한 상황이라 우소진이 나섰다. 하지만 류희겸은 직접 쪽지를 펼쳤다.
명화원(明華園) 함정
자그마한 글씨로 적힌 내용에 류희겸은 고개를 번쩍 들어 진혁위가 사라진 쪽을 보았다. 명화원은 황궁의 외조(外朝)와 내정(內廷) 사이에 위치한 화원이었다. 정확히는 내정에 속한 곳으로 외부 사람은 함부로 발 디딜 수 없었다.
그곳에 함정이 있다고?
문득 황제가 진혁위를 부른 게 아닐 수도 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누군가 황제를 팔아 그를 유인한 걸지도. 그렇다면 진혁위가 위험했다.
“무슨 일입니까? 놀란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류희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자 진윤홍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류희겸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왕야께서, 영왕 전하가 위험합니다. 우소진……. 아니다. 거기, 이리로 오너라.”
류희겸은 마침 옆을 지나가고 있는 태감 중에 가장 날래 보이는 이를 불렀다. 지목당한 태감이 조용히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나는 영친왕의 귀비다. 이름이 무엇이냐?”
“우삼조(禹三早)가 귀하신 분을 뵈옵니다.”
“우가의 태감이군. 명화원에 출입할 수 있느냐?”
“우가의 우삼조가 맞습니다. 그리고 명화원에 출입할 수 있습니다.”
우삼조가 고개를 조아리자 류희겸은 우소진을 슬쩍 보았다. 우소진은 그가 우가의 아이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가는 유서 깊은 환관 가문이었다. 형편이 어려운 집 아이들이 우가에 팔려가다시피 양자로 들어가서 환관으로 길러졌다.
류희겸은 마침 곁을 지나던 태감이 우가의 환관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머리에 꽂힌 비녀를 하나 뽑아 우삼조의 손에 쥐여주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우삼조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류희겸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몸을 움츠렸다.
“영왕 전하께서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고 명화원으로 갔을 것이다. 빨리 달려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비녀를 보여드리고, 명화원으로 들어가지 말고 입구에서 장공주 마마를 기다리라 말씀 올려라. 내가 그리하였다고 해. 네가 일을 잘한다면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얼른 가라. 영왕께서 명화원에 들어가시면 안 된다. 얼른.”
사나운 재촉에 우삼조가 후다닥 뛰어갔다. 아주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경거망동할 수 없는 황궁에서는 최선이 맞았다.
“귀비. 영왕이 위험하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급작스러운 상황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진윤홍이었다. 류희겸이 너무 절박해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쪽지에 ‘명화원 함정’이라고 적혀져 있습니다. 누가 보낸 것인지는 모르나, 진실로 명화원에 함정이 있다면 영왕께서 위험에 빠지실 겁니다. 황제께서 영왕 전하를 부른 게 아닐 테니까요. 혹은 제가 이 쪽지를 보고 명화원으로 걸음 하기를 바라는 자의 술책일 수도 있습니다. 장공주 마마.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립니다. 영왕 전하를 도와주십시오. 혹여 이 쪽지가 거짓이고 황제께서 부르신 게 맞다면, 부디 장공주 마마께서 영왕 전하를 붙잡았다 하여주십시오.”
류희겸은 간절하게 부탁했다. 갈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고 싶었다. 하지만 명화원은 내정에 위치했고 후궁전과도 가까웠다. 아무리 자신이 친왕의 귀비라고 하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어쩌면 이 쪽지 자체가 자신을 명화원으로 보내려는 함정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동복누이인 진윤홍은 달랐다. 그녀는 후궁전 어디든 갈 수 있는 신분이었다. 명화원에 함정이 있다는 쪽지의 진위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진윤홍만이 진혁위의 힘이 되어줄 수 있었다.
“조카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데 도와야지요. 명화원까지 가는 것은 어렵지도 않습니다. 귀비는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세요. 귀비의 말대로 이 쪽지가 함정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본 공주가 경신법을 조금 익혔습니다. 그래서 걸음이 빠르니 걱정하지 마세요.”
류희겸의 부탁을 받아들인 진윤홍은 그대로 몸을 돌려 명화원으로 향했다. 경신법을 익힌 것이 진실인 듯, 그녀의 발걸음은 치렁치렁한 예복을 입고도 무척 빨랐다. 진윤홍을 뒤따르던 태감이 눈에 띄게 뒤처질 정도였다. 류희겸은 진윤홍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꼼짝하지 않았다.
“마마. 영왕 전하를 모셔간 주 태감은 오래도록 황제 폐하를 모신 편전태감이옵니다. 그가 거짓을 고할 리 없습니다. 황제께서 부르신 게 맞을 것이옵니다. 소인은 오히려 그 쪽지가 의심스럽습니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슬그머니 류희겸의 옆으로 다가온 우소진이 조용히 말했다. 우소진의 말대로 늙은 태감은 편전태감이었다. 어쩌면 황제가 부른 것이 진짜고, 이 쪽지가 함정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류희겸은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은 채 모든 가능성을 따졌다. 대전에서 오문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대로에 서 있는 자신을 해코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명화원으로 간 진혁위와 진윤홍이 더 위험했다.
류희겸의 불길한 예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진혁위가 명화원에서 일어난 살변(殺變)의 용의자가 된 것이다.
*
“황제 폐하께서는 부벽정에 계시옵니다.”
사시사철 꽃이 피는 명화원은 역대 황제들이 아끼는 산책로 중 하나였다. 명화원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곳은 서쪽에 있는 부벽산(浮碧山)이었다.
인공적으로 암석으로 쌓아 올린 언덕은 황궁에서 가장 높은 곳 중에 하나였다. 역대 황제들은 부벽산 꼭대기에 있는 부벽정에서 태경 시내를 내려다보기를 즐겼다.
태감과 함께 부벽산으로 향하는 동안에 진혁위는 황제가 무슨 일로 자신을 불렀는지 추측하고 있었다. 만수절에 굳이 따로 부를 이유는 몇 없었다. 아무래도 혼인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을까 싶었다.
문강공의 적녀가 도망쳐 버리는 바람에 혼사를 주선한 황제의 체면이 왕창 구겨졌다. 이전 생과 마찬가지로 문강공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시일이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황제가 당장에 진혁위에게 혼인을 하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넌지시 이름 정도는 던져 줄 것 같았다.
부벽정으로 올라가는 완만한 경사의 계단에 막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
위에서 떨어져 내린 사람을 반사적으로 받아 안은 진혁위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품에 안긴 여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구름처럼 틀어 올린 머리를 장식한 화려한 비녀와 화사한 비단옷을 보면 궁녀가 아니라 후궁인 것이 분명했다.
등 뒤에는 단검이 꽂혀 있었다. 진혁위는 단검의 손잡이가 익숙한 것을 보며 혀를 찼다. 상아와 금으로 마감한 호화로운 단검은 진혁위가 열다섯 살 생일에 황제로부터 하사받아,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이었다.
위쪽에서 태감 한 명이 쪼그려 앉아 풀을 뽑고 있는 것을 보기는 했다. 별것 아니라고 보아 넘겼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진혁위는 재빨리 후궁을 바닥에 내려놓고 얼굴을 확인했다. 최근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는 정빈(情嬪)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 그녀는 죽은 게 확실했다. 풀을 뽑고 있던 태감을 쫓기 위해 몸을 날리려는 와중에 누군가가 커다랗게 소리쳤다.
“살변이다! 살변이 났습니다! 살변이 났습니다! 영왕 전하께서 정빈 마마를 죽였습니다!”
진혁위는 소리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황제가 부른다며 자신을 안내하던 태감이 혼비백산 도망치며 살변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황궁에서 잔뼈가 굵은 태감의 행동치고는 너무 요란했다. 특히 얼굴도 보지 않고 정빈이라고 정확히 말한 시점에서 진혁위는 이것이 함정이라고 재차 확신했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황제의 후궁을 죽였다는 누명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빈의 시신은 완전히 식지도 않았으니 발뺌하기도 어려웠다.
누구의 계략인지 몰라도 대범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오는 것이야 쉽다. 하지만 후궁을 죽여 머리 위로 떨어트린다는 생각은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한낮의 명화원에서 일을 벌이는 것은 보통 강심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만수절 행사 때문에 명화원에 인적이 드문 것도 변수였다. 이대로라면 제대로 된 목격자가 하나도 없을 수밖에 없었다.
살변이라는 커다란 외침에 명화원에 있던 태감과 궁녀가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가장 발 빠른 것은 역시나 명화원을 지키는 시위들이었다.
진혁위는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서 진윤홍을 발견했다. 류희겸과 같이 있어야 할 그녀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그녀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시위들이 달려와 정빈을 확인하고는 어찌 된 일인지 물었다. 진혁위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
황제의 편전 중에 하나인 장현전에 끔찍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내실 한가운데 무릎을 꿇은 진혁위에게 편전 안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꽂혔다. 진혁위는 만수절에, 황궁 안에서, 황제의 후궁을 살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하여 소인이 살변이라 외치며 혼비백산 도망쳤습니다.”
무릎을 꿇은 진혁위 옆으로 편전태감 주일정(周一正)이 부복하여 자신이 본 것을 황제께 고하였다.
영왕 진혁위가 황제 폐하를 만나 뵙고자 하여 자신이 장현전으로 안내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명화원에서 볼 일이 있다 하여 그리로 모셨다. 그런데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부벽산에서 정빈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큰소리로 다투더니, 뒤돌아 가버리는 정빈의 등에 칼을 꽂았다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느냐?”
“뒤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소인이 귀가 조금 어두워 정확하게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이건 잘못된 것이다,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 하고 정빈 마마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황제의 질문에 주일정이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듣기에 따라서는 진혁위와 정빈의 사통까지 의심되는 정황이었다.
오래도록 황제의 태감으로 일한 주일정은 주변으로부터 신뢰가 두터웠다. 뒤이어 명화원에 있었던 태감과 궁녀, 그리고 시위가 한 명씩 나서서 증언을 이었다. 그들은 직접 살해 장면은 보지 못했으나 진혁위가 축 늘어진 정빈을 안고 있었다고 같은 말을 했다.
누가 보아도 진혁위가 정빈을 살해한 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이었다.
“네가 감히 이런 참담한 짓을 저질렀느냐?!”
황제는 무릎을 꿇은 진혁위를 향해 소리쳤다. 사통은 둘째치고 황자가 황궁에서 황제의 후궁을 죽인 것은, 말 그대로 황제의 권위에 정면으로 대든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무릎을 꿇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진혁위는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대로라면 누명을 쓰고 죽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소자는 결백을 주장합니다. 주 공공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거짓이옵니다.”
“이놈. 네 옷에 정빈의 피가 묻어 있다.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 사실대로 고해라!”
진혁위의 당당한 말에 황제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래도 진혁위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다행히도 진혁위에게는 자신을 비호할 증인과 증좌가 몇 있었다.
“첫째. 소자가 황제 폐하를 뵈러 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 공공이 소자에게 황제 폐하께서 찾으신다 하였습니다. 같이 있던 소자의 귀비와 영왕부의 태감은 증인이 될 수 없으나, 고모님께서 주 공공의 말이 틀리고 소자의 말이 맞음을 확인하여 주실 겁니다.”
“윤홍이가?”
“예. 고모님이 소자와 같이 있었습니다.”
진윤홍이 증언할 거라고 하자 황제의 눈빛이 바뀌었다. 숨을 고른 진혁위는 다음 말을 이었다.
“둘째는 정빈 마마께서 찢어진 옷자락을 손에 꽉 쥐고 계셨습니다. 정빈 마마께서 손톱이 부러질 정도로 강하게 움켜쥔 옷자락은 괴한의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시위가 확인하여 줄 겁니다.”
진혁위가 옆을 바라보자 지금껏 대기하고 있던 시위가 찢어진 옷자락을 내밀었다. 시위는 정빈의 손아귀에 있던 것을 자신이 직접 빼냈다며 아뢰었다.
총관태감이 그것을 받아 황제에게 보였다. 질이 좋지 않은 옷자락은 진혁위의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확실히 네 옷은 멀쩡하구나.”
“주 공공의 말로는 소자가 정빈 마마를 등 뒤에서 찔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정빈 마마의 손에 다른 사람의 옷자락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자의 옷에 묻은 피가 증거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리듯이 피가 묻어 있는 것은 머리 위로 떨어지던 정빈 마마를 받아내느라 그런 것입니다.”
차분한 증언에 황제는 진혁위가 아니라 그 옆에 부복하고 있는 주일정을 보았다. 진혁위의 주장은 모두 주일정의 증언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네 말대로라면 누군가 정빈을 죽이고는 네게 덮어씌운다는 것이다?”
“예. 소자가 부벽산에 오를 때, 그곳에서 풀을 뽑고 있는 태감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와 주 공공의 관계가 의심스럽습니다.”
“주일정. 할 말이 있느냐?”
황제의 부름에 주일정이 부복하며 아뢰었다.
“아닙니다! 폐하. 소인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들었사옵니다. 핏자국이야 상황에 따라서 위로도 쓸리고 아래로도 쓸립니다. 그리고 소인의 옷도 뜯어진 곳 없이 멀쩡합니다. 칼을, 칼을 확인해 보십시오. 멀리서 보아도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시위가 황제에게 내밀어 보인 것은 상아와 황금으로 손잡이를 마감한 단검이었다. 진혁위는 오래전에 황궁에서 잃어버린 단검의 존재에 한 번 더 혀를 차야 했다.
당시 태자는 형제들이 황제로부터 받은 물건을 매우 탐냈다. 더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형제들이 황제의 관심을 받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못했다.
진혁위는 태자가 달라는 물건은 대부분 주었다. 상아 단검 역시 태자가 가지고 싶다 하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4황자인 정군왕의 생일 선물을 탐내다가 황제에게 한 소리 들은 태자는 진혁위의 단검에 욕심 내지 않았다.
그리고 진혁위의 생일이 한 달쯤 지났을 때 단검이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진혁위의 처소였던 영진전(英眞殿)의 태감과 궁녀를 조사하였지만 누가 단검을 훔쳐 갔는지 밝히지 못했다. 진혁위는 태자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넘어갔다.
그때는 잃어버린 단검이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명백한 자신의 실책이었다.
아름다운 단검의 존재는 황제도 알아보았다.
“저것은…… 기억난다. 내가 영왕의 생일에 주었던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이것이 정빈을 죽이는 데 사용된 것이냐?”
“소자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소자가 열다섯이 되었다 하여 하사하신 것이옵니다. 상아와 금의 마감이 아름다웠지요. 안타깝게도 소자는 그것을 한 달도 되지 않아 잃어버렸습니다. 당시 영진전의 태감과 궁녀들을 모두 조사하였으나 도둑이 누구인지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조사하면 소자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을 것이옵니다.”
진혁위의 주장에는 허점이 없었지만 황제가 의심을 거두기에는 부족했다. 모든 정황이 진혁위에게 불리했고, 그것들을 다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폐하. 장공주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이번 변고에 대하여 아뢸 말씀이 있다 하십니다.”
“그렇지. 윤홍이 있었지. 장공주를 들라 일러라.”
때마침 총관태감이 진윤홍의 존재를 알렸다. 황제의 허락에 진윤홍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정중히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진윤홍이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그래. 일어나거라.”
황제의 손짓에 일어난 진윤홍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황망하실 와중에 이리 찾아뵌 것은 황제 폐하께 이번 일에 대하여 아뢸 것이 있어 그러하였습니다.”
“나 역시 확인할 것이 있다. 영왕과 저기 있는 주 공공이 무슨 대화를 하고 너와 헤어졌는지 말하라.”
“예. 저와 영왕이, 그리고 영왕의 귀비가 영화문(榮華門)을 나서기 전이었습니다. 태감이 한 명 찾아와 황제께서 영왕을 찾는다 하였습니다. 하여 영왕이 태감을 따라갔고, 저와 영왕의 귀비만이 따로 움직였습니다.”
“그래?”
차분한 진윤홍의 설명에 황제는 물론이고 장현전에 자리한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주일정에게 향하였다. 그러자 주일정이 덜덜 떨며 외쳤다.
“그, 그것이! 영왕 전하께오서 소인에게 그리 말하라 시켰습니다! 황제께서 찾으신다고 해야 의심을 받지 않는다고―”
“닥쳐라!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느냐?!”
진윤홍의 일갈에 주일정은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어야 했다. 지금은 세상을 등지다시피 하며 칩거하는 진윤홍이었지만, 과거에는 선황제의 이쁨을 독차지한 오만한 공주였다. 아랫것이 하는 헛소리는 얼마든지 잘라낼 수 있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 진윤홍이 황제에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 앞에서 큰 소리를 내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너무 빤히 보이는 거짓이라 흥분하였습니다.”
“너무 빤히 보이는 거짓이라고?”
“예. 제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네가 보았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직접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영왕의 귀비와 이야기를 하던 중에, 소녀였을 적에 명화원에 숨겨놓았던 상자를 기억해 냈습니다.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생각난 차에 가져와야겠다 싶었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황궁에 쉬이 걸음을 하지 않아 이번이 아니면 또 잊어버릴 수가 있으니 말입니다. 하여 영왕의 귀비를 두고 혼자 명화원으로 걸음했습니다. 작은 돌을 치워야 했기에 명화원 입구를 지키고 있는 시위 둘을 불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다 막 산에 오르던 영왕을 보았는데, 그 때 위쪽 암석에 가려져 있던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왔습니다. 저는 영왕이 습격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저기 있던 태감이 살변이라고 외쳤을 때도, 영왕이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영왕이 아니라 정빈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진윤홍은 몇 가지 사실을 숨긴 채 긴 설명을 이었다. 명화원 한구석에 숨겨놓았던 상자가 있는 것은 진실이었지만, 그건 명화원에 갔어야 했던 핑계를 생각하다 보니 떠오른 것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운이 좋았다. 류희겸과 헤어진 진윤홍은 지체 없이 명화원으로 향했다. 경신법을 배운 덕분에 류희겸이 보낸 어린 태감을 따라잡다 못해 제쳐 버리고는 먼저 명화원에 도착했다.
명화원 입구를 지키는 시위들은 진혁위가 이미 지나갔다고 알려주었다. 그래도 진윤홍은 포기하지 않고 시위들을 데리고 진혁위를 찾아다녔다.
혼신을 다한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명화원을 헤매던 진윤홍은 진혁위의 머리 위로 사람의 그림자가 떨어져 내리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것도 또 다른 증인이 될 시위 두 명과 함께였다.
선황제의 단 하나뿐인 적녀로 태어난 진윤홍은 귀하게 자랐다. 여린 꽃처럼 애지중지 총애를 받은 그녀에게는 언제나 훌륭하고 좋은 것만 주어졌다. 손끝에 물 한 번 묻히지 않았고, 턱끝으로 부릴 태감과 궁녀들이 늘 뒤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궁에서 벌어지는 여러 암투와 계략의 무서움을 모르지는 않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호화로운 황궁에는 그만큼 짙게 어둠도 드리워져 있었다. 황후였던 어머니가 후궁들과 벌였던 다툼은 소리 없는 전쟁을 방불케 했다.
지난 이십여 년간 칩거하다시피 살고 있던 진윤홍의 귀에도 방왕과 기왕의 사이가 나쁘다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 바깥 활동을 시작하자 더 자세한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였다면 다음 제좌를 누가 가지든 신경 쓰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을 테지만, 류희겸과 인연을 쌓으면서 말 그대로 아픈 손가락이 생겨났다.
류희겸이 자신의 아이가 아님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 마음이 쓰이기 시작하자 멈출 수가 없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그런 법이었다.
진혁위가 잘못된다면 류희겸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 하여, 진혁위가 정빈을 죽였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두고 볼 수 없었다.
차분한 진윤홍의 진술은 진실성 있게 편전을 울렸다. 특히 진혁위의 주장과 딱 맞아떨어지면서 상황을 반전시켰다.
“정빈이 위에서 떨어진 것이 사실이냐?”
“떨어졌는지 습격을 하였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정빈은 혼자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대편으로 도망가는 그림자가 있어 저를 뒤따르던 시위에게 잡아 오라 명했습니다.”
“잡았어?”
“예. 잡았습니다. 그를 데려와라.”
진윤홍의 명령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공주부의 늙은 태감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곧 시위 두 명이 입에 수건을 물린 태감 하나를 끌고 들어왔다. 태감은 주위를 살피다가 주일정을 확인하고는 눈에 띄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바로 죽은 정빈의 태감이었다.
“저놈은 정빈의 태감인데?”
“저는 그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허나 그가 부벽산 반대편으로 도망친 것은 확실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시위들 모두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자, 네가 아는 것을 모두 황제께 고하여라.”
태감을 붙잡고 있던 시위가 입에 물린 수건을 치웠다. 그러자 태감이 벌벌 떨며 더듬더듬 말을 했다.
“소인은, 소인은 주 공공이 하라는 대로 하였을 뿐입니다. 주 공공이 황제 폐하께서 정빈 마마를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부벽산에서 폐하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칼로 정빈 마마를 찌른 것은 주 공공입니다. 소인은 아닙니다. 입 다물지 않으면 소인도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부디 살려주십시오.”
“그렇다는 것은 정빈이 영왕을 습격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정빈이 영왕에게 떨어졌다는 것이냐? 네가 정빈을 밀쳤고?”
진윤홍이 중간에 빠진 중요한 내용을 찾아내 물었다. 그러자 태감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하옵니다. 그것도, 정빈 마마의 시신을 떨어트리라는 것 역시 주 공공이 시켰습니다. 소인은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모두 주 공공이 시켰다는 말에 엎드려 있던 주일정이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것이 다 끝장이었다.
처음부터 무모한 계획이기는 했다. 진혁위 옆에 계획에 없던 진윤홍이 있었던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래도 진혁위가 정빈에 깔렸을 때는 모든 게 다 끝난 줄 알았다. 시신을 끌어안고 있는 진혁위는 누가 봐도 살인을 저지른 후였다.
하지만 진혁위의 반론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무엇보다 진윤홍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서 상황을 뒤집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황궁에서 황제의 후궁을 죽이고 진혁위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계략을 짠 것은 황후였다. 주일정이 무모한 계략에 동참하게 된 것은 황후에게 약점을 잡혔기 때문이었다.
유서 깊은 환관 가문 출신의 주일정은 여타 형제들과 달리 혼인을 하지 않고 홀로 지냈다. 하지만 그에게는 혼인을 올리지 않은 부인과 딸이 있었다. 황후가 그들의 존재를 알아내고는 위협하는 바람에 지금껏 간자 노릇을 해왔었다.
처음에는 별거 아니었다. 황제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황후에게 알려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위험한 일들이 하나씩 맡겨졌고, 결국 영왕을 모함하는 일을 직접 벌이게 되었다.
날짜와 장소를 엄선하면서 그래도 성공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으니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고신을 받아 배후가 황후라는 소리를 했다가는 가족들이 위험했다. 그들은 주일정을 기억하고 죽음을 슬퍼해줄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어차피 죽게 된 마당이니 그들을 지켜야 했다. 주일정은 미리 준비해 둔 것을 찾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소매 안으로 손을 넣었다.
“황제 폐하. 저 태감의 안쪽 옷소매가 찢어져 있습니다.”
황제에게 정빈의 태감이 입은 옷이 찢어져 있다는 것을 알린 것은 총관태감이었다. 황제의 명령에 시위들이 정빈이 손에 쥐고 있던 옷감과 찢어진 옷소매를 비교해 보았다. 뜯어진 부분이 딱 맞아떨어졌다.
범인으로 몰린 정빈의 태감이 발작적으로 머리를 땅에 박으며 외쳤다.
“소인이, 소인이 정빈 마마를 죽인 게 아니옵니다! 주 공공이 정빈 마마의 등을 찌르는 바람에, 마마께서 소인의 팔을 붙잡고 쓰러지셔서, 그래서 그렇습니다!”
“사악하구나. 폐하. 이런 일을 일개 태감 따위가 계획했을 리 없습니다. 배후가 누구냐? 주일정. 누가 네게 이런 무서운 짓을 하라고 시켰느냐?”
용의자로 몰린 탓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진혁위 대신에 진윤홍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배후라는 단어에 편전 내부는 다시 차갑게 얼어붙었다. 여전히 엎드려 있던 주일정이 비통하게 소리쳤다.
“배후는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마라.”
“황제 폐하! 오래전에 영왕께 고자라 놀림을 당한 것이 소인의 한이었습니다. 그 한을 풀지 못하여 아쉬울 따름입니다!”
“막아라! 자결을 하려 한다!”
주일정은 실패를 대비해 미리 준비했던 말을 하고는 소매 속에 숨겨 넣었던 환약을 재빨리 입에 털어 넣었다. 진윤홍이 자결을 한다고 외치자 시위들이 움직였지만 주일정을 막지는 못했다. 주일정이 입에서 피를 쏟아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끔찍한 상황에 황제는 대로(大怒)하였다. 죽은 주일정을 치우라고 한 다음에, 정빈의 태감에게서 모든 것을 토해 내게 만들라고 소리쳤다. 시신도, 태감도, 그리고 증언을 한 이들도 모두 물러났다.
편전에 남은 사람은 황제를 지키는 시위들과 총관태감, 그리고 진혁위와 진윤홍뿐이었다.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진혁위가 무릎을 꿇은 채로 부복했다.
“황제 폐하. 경사스러운 날에 소란을 일으킨 소자를 벌하십시오. 소자는 주 공공을 고자라 욕한 적이 없습니다. 허나 죽은 자와 대질을 할 수 없으니, 그가 오해를 하고 앙심을 품어 이런 무도한 일을 벌인 것은 소자의 책임입니다.”
진혁위는 황제에게 죄를 청하였다. 황궁 한가운데서 정빈을 죽였다는 누명은 벗겨졌으나, 주일정에게 원인을 제공했다는 의혹은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진혁위는 발뺌하는 대신에 기꺼이 자신을 벌하라며 먼저 나섰다. 황제의 부담을 덜어주어야 신임을 받을 수 있다는 계산된 행동이기도 했다.
천하의 주인인 황제는 작게는 황궁이라는 거대한 저택의 가장이기도 했다. 어떤 이유로든 황제를 모시는 편전태감이 후궁을 죽인 것은 가장으로서 관리 감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황제의 잘못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이라 미리 청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다.
진혁위가 잘못하였다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보고 진윤홍이 나섰다.
“폐하. 영왕을 벌하지 마십시오. 이런 무도한 일은 태감이 혼자 벌일 수 없습니다. 배후를 밝혀야 합니다.”
“윤홍이 말이 맞다. 정빈의 태감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보겠다. 그것보다 날벼락을 맞은 영왕이 놀랐을 것이다. 혁위야. 벌을 청하지 마라. 네 잘못이 아니다. 왕부로 돌아가서 쉬어라. 이 아비가 태의와 약을 보내겠다.”
진윤홍이 배후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황제는 말을 돌렸다. 진혁위는 황제가 배후를 찾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랬기에 조금 더 몸을 낮추었다.
“소자, 왕부로 돌아가 폐하의 부름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라.”
자발적으로 연금을 하겠다는 진혁위의 말에 황제의 허락이 떨어졌다.
“황제 폐하의 은혜에 감읍하옵니다.”
정중히 예를 차려 인사를 올린 진혁위는 그제야 겨우 무릎을 펴고 일어날 수 있었다.
*
장현전을 나온 진혁위와 진윤홍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류희겸과 우소진이었다. 황제의 명령으로 불려 와 대기하고 있었다는 류희겸이 굳은 얼굴로 무사하셔서 다행이라고 하자, 진혁위는 괜찮다며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바로 진윤홍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그때 마침 진윤홍이 사건 장면을 본 것도, 그리고 정빈의 태감을 잡아 온 것도 모두 예상 못 한 일이었다. 진윤홍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정빈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썼을 것이다.
류희겸의 뒷배를 만들어주기 위해 진윤홍에게 정성을 쏟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진윤홍은 진혁위가 무사한 것은 모두 류희겸 덕분이라고 했다. 류희겸이 명화원으로 가달라고 했기에 운 좋게 그 장면을 보았다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세한 것은 류희겸에게 들으라고 한 진윤홍은, 진혁위의 어머니인 혜비가 걱정하고 있을 테니 정수궁으로 가보겠다며 먼저 떠났다. 나중에 영왕부로 찾아가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장현전 앞은 긴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장소였다. 진혁위는 류희겸과 황궁을 빠져나와 마차에 올랐다.
“고모님을 어찌하며 명화원으로 보낸 것이냐?”
진혁위는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류희겸에게 물었다. 류희겸은 처음 보는 태감에게 쪽지를 받은 것부터 설명했다. 쪽지에 ‘명화원 함정’이라고 적혀져 있었고, 진윤홍에게 명화원으로 가서 진혁위를 도와달라 부탁한 것까지 모두 밝혔다.
“명화원이 내정에 위치해 있기도 했고, 또한 쪽지가 신첩을 명화원으로 불러내려는 계책일 수도 있어서 쉬이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장공주께서 흔쾌히 응하여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아니었다면 왕야께서 큰 봉변을 당하셨을 겁니다.”
다행이라고 말하는 류희겸은 떨림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영화문에서 진혁위가 살변의 용의자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제의 부름을 받고 장현전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멀었는지 모른다.
황궁에서 황제의 시위들을 모두 뿌리치고 진혁위를 탈출시킬 방법 따위는 없다는 데 좌절하며 최악을 상상했다.
진혁위는 보기보다 훨씬 더 결벽한 성격이었다. 전의 생에서 진서녹의 역모를 도왔다는 혐의를 받은 진혁위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스스로 목에 칼을 꽂아 넣었다. 이번에도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속이 새카맣게 탔다.
장현전 앞에서 기다리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너무 괴로웠다. 다행스럽게도 죽은 정빈의 태감을 끌고 온 진윤홍이 편전에 들기 전, 전후 사정을 짧게나마 알려주었기에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고모님이 귀비 덕분이라고 한 이유를 알겠다.”
“신첩 덕분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명화원에 함정이 있다 알려준 자 덕분입니다. 왕야께서는 누가 쪽지를 보낸 것인지 아십니까?”
류희겸은 은밀히 진혁위에게 쪽지를 건네주었다. 둥글둥글한 글씨체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본 진혁위는 쓴웃음을 삼켰다.
만수절 연회에서 황제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총관태감이 어찌 시간을 내어 쪽지를 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위험을 피했다.
어려서부터 황후의 계략에 당한 적은 많았으나, 기를 죽이기 위한 가벼운 모함이 대부분이었다. 오늘처럼 꼼짝 못 할 치명적인 덫은 처음이었다.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변을 준비하면서도 최악을 예상했다. 이대로 겨우 목숨만 건지고 변방으로 쫓겨나는 것이 최선의 결말이라는 것에 분통이 터졌다.
그런데 지금까지 자신이 이리저리 뿌려두었던 호의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한꺼번에 돌아왔다.
총관태감도 진윤홍도 모두 필요에 의해 끌어들인 것뿐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도움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정빈을 죽였다는 의혹을 끝끝내 벗지 못했을 것이다.
진혁위는 쪽지를 잘게 찢고는 그대로 입 속에 넣어 꿀꺽 삼켰다. 그 모습에 류희겸은 대경 질색했다.
“왕야?”
“증거는 미리미리 없애야 하는 법이다. 이것을 보낸 자는 총관태감이다.”
“총관태감이요?”
먹지 않아도 되니 뱉으라고 하려던 류희겸은 진혁위가 총관태감을 언급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 되묻고 말았다. 총관태감은 황궁에서 황제 다음의 권력자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진혁위를 돕는다고?
“귀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니 아주 귀엽다.”
“농이 나오십니까?”
“아아, 화내지 마라. 별거 아니다. 우연을 가장하여 총관태감을 한 번 도운 적이 있다. 그의 딸이 황후의 인척과 혼인을 하여 아주 불행해졌었거든. 혼인은 막을 수 없었으나, 재빠르게 불행한 시집살이를 끝낼 수 있게 해주었지.”
진혁위의 간단한 설명에 류희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를 알고 있으니 불행한 사람을 돕고 호의를 살 수 있었다. 류희겸도 백진호의 복수를 도와 그의 신의를 얻었다.
“은혜를 갚은 것이군요.”
“그래.”
“혹시 이번 일의 배후가 누군지는 아십니까?”
“대충 짐작은 간다. 귀비가 의심하는 그 사람이 맞을 것이다. 황궁에서 이리 과감하게 일을 저지를 사람은 또 없다.”
누구인지 지목을 하지 않아도 배후가 누구인지는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황후였다. 류희겸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진혁위가 계속 말을 이었다.
“열다섯 살 생일에 황제께서 상아와 금으로 마감한 단검을 하사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잃어버렸는데, 그것이 이번 사건에 사용되었다. 진짜 꼼짝도 못 하고 당할 뻔했어. 확실히 방왕보다 황후가 더 무섭다. 연금 중에도 이리 큰일을 저지르다니. 재주도 좋지. 호양성을 되찾고 승전하여 돌아온 것이 황후의 심기를 거슬렸나 보다. 지금껏 눈에 띄지 않고 잘 지내왔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지.”
“이번 일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황제께서도 황후를 의심할 테지만, 일은 크게 키우지 않으실 거다. 편전태감이 후궁을 죽였다고 하면 황제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귀비. 어찌 왜 그리 심각한 얼굴이냐? 누가 귀비에게 무어라 했느냐?”
“아닙니다. 신첩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 속상하여 그렇습니다.”
“이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니. 그리 말하지 마라. 귀비가 고모님을 명화원에 보내어 내가 살았다. 모두의 도움을 받았지. 아주 헛살지는 않은 것 같아 기쁘다.”
아무렇지 않게 감상을 말한 진혁위가 류희겸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하지만 류희겸은 따라 웃지 못했다.
승냥이 같은 황자들 사이에서 진혁위는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진혁위가 워낙 노련하게 위험을 피하였지만, 그래도 손쓸 방도 없이 계략에 빠지면 위험했다.
위험해질 일 없게, 먼 서쪽으로 떠나는 게 나았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해서는 안 될 말이기 때문이었다.
발을 빼기에는 이미 늦었다. 대마(大馬)가 되어 벌판을 달리고 있는 진혁위가 황제가 되어야 모든 것이 끝나는 판이었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손을 마주 잡고는 힘을 주었다.
“왕야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모두 되갚아 주면 그만이다. 왕부로 가면 귀비는 약부터 먹어야겠다. 안색이 나빠.”
“신첩은 괜찮습니다. 신첩보다는 왕야께서 더 놀라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 놀랐다. 망아지처럼 심장이 마구 뛰니, 돌아가면 귀비 옆에 붙어 있을 것이다.”
“예. 따뜻한 차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명령을 따르겠다는 듯이 진지하게 대답하는 류희겸 때문에 진혁위는 웃고 말았다. 아무리 스스로를 신첩이라고 지칭해도 류희겸의 군인 같은 태도는 쉬이 바뀌지 않았다.
이럴 때면 류희겸이 아무리 어렵고 힘든 부탁이라도 흔쾌히 받아들인다는 것을 진혁위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전처럼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노라고 할지도 몰랐다.
“오늘은 귀비의 손을 잡고 자야겠다.”
“예.”
“귀비가 먼저 접문을 해주길 기다리마.”
오늘은 네가 먼저 유혹하라는 언질을 주자 류희겸이 눈을 크게 뜨다가 곧 옅게 웃었다. 어이없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예. 그러겠습니다.”
“접문 말고 다른 것도 해야 한다.”
“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씩씩하게 대답하는 류희겸 때문에 진혁위도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생을 다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궁지에 몰리게 되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마련이었다. 그래도 무뚝뚝하면서도 신실하게 곁을 지켜주는 정인이 있기에 날 선 마음이 가라앉았다.
동시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계략에 빠져들지 않을 유일무이한 권력을 가져야 했다.
“귀비가 무엇을 해줄지 기대하겠다.”
진혁위는 진심으로 기대했다.
*
“……하여 황제께서 영왕부로 태의와 약을 보내겠다 하셨답니다.”
황후를 지척에서 배행하는 상궁이 작은 목소리로 장현전에서 일어났던 일을 고했다. 상궁이 설명을 하는 동안에 의자에 앉아 있던 황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러다 진혁위가 무사히 왕부로 돌아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찻잔을 쥐고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아름다운 융단 위로 깨진 찻잔이 나뒹굴었다. 놀란 상궁이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황후 마마. 노기를 가라앉히십시오.”
“장공주라니!”
“최근, 장공주가 영왕과 교류가 잦았습니다.”
“누가 그걸 모르느냐?! 같은 말을 전에도 들었다. 금붕어 머리 같으니라고. 됐다. 나가라. 꼴도 보기 싫다!”
황후의 노성에 상궁은 깨진 찻잔을 치우고는 재빨리 방을 나섰다. 호화롭게 꾸며진 내실에 혼자가 된 황후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짜증과 답답함에 속이 문드러지려고 하는데 해소할 방법이 없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진혁위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였다. 혹시나 하고 하나씩 빼돌려 두었던 황자들의 물건 중에 진혁위의 보검이 있었다. 편전태감을 손에 넣어 일을 벌였으니 성공할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계획에 없던 진윤홍의 개입으로 모든 게 틀어지고 말았다.
황제의 하나뿐인 동복누이인 진윤홍은 정치나 권력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황후인 자신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리나 그뿐이었다. 방왕에게 힘을 실어달라 그리 눈치를 주었는데도 진윤홍은 깔끔하게 무시했었다. 그녀가 어느 누구의 편을 들지도 않았기에 그냥 두고 보았었는데, 결국 일을 틀어지게 만들었다.
분한 마음이 가시질 않은 황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종인령 유월춘 때문에 연금을 당했을 때는 황망했다. 그래도 사사로이 종인령을 움직여 황친들을 압박한 것이 들통 난 것에 비하면 이만한 것이 다행이라고 여겼다. 황제가 자신을 내치지 않은 것은 태자를 아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연금을 당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황후는 좀 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황제가 자신의 연금을 풀어주기를 마냥 기다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것보다는 황제가 죽고 태자가 제좌에 오르는 것이 더 나았다.
한순간의 깨달음에 황후는 과감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황실 사냥터에 곰덫을 설치한 것을 일찌감치 들키고 말았다. 그 일로 자신의 외가가 박살 나고, 그들을 비호하던 태자가 황제의 역정을 사서 폐위되었다.
초조함이 극에 달한 황후는 폐병을 앓는 황제의 향로에 증상이 악화되는 약을 섞었다. 황제는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상태가 천천히 나빠지고 있었다.
그사이에 황후는 방왕의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하고자 마음먹었다. 기왕은 오래도록 황후의 눈엣가시였다. 그랬기에 그를 보내버릴 수 있을 약점을 두어 개 정도 쥐고 있었다.
문제는 진혁위였다. 제멋대로 사는 인간인데도, 눈에 띄는 문제를 찾을 수 없었다. 진혁위의 측비가 화진국 출신이라는 것이 흠결이었지만, 호양성을 되찾은 후라서 손을 대기도 어려웠다.
그랬기에 황후는 과감하게 진혁위를 노렸다. 황후는 자신 있었다. 진혁위가 죽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권력을 잃고 태경에서 쫓겨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진혁위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일을 사주한 주일정이 그 자리에서 독을 먹고 죽었으니 배후가 밝혀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몇 번이고 계속된 실패에 황후는 답답해졌다.
“어찌…….”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하였지만 요즘은 골치 아픈 일만 계속 일어났다. 하나뿐인 아들은 폐위가 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부황에게 버림받았다며 좌절한 것도 잠시였다. 태자부를 벗어나 감시가 없어지자 제 사람을 불러 모아 연회를 열어 흥청거리기 바빴다.
친정 오라버니는 권력을 모두 잃고 낙향하고 말았다. 구심점을 잃은 집안 어른들은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연금을 당한 이후로 바깥과 소통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모든 것이 끔찍할 정도로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황후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실패는 잊어버리고 또 다른 계략을 짜기 위해 고심에 빠졌다.
*
만수절에 일어난 정빈의 죽음은 조용히 묻혔다. 대외적으로는 앙심을 품은 정빈의 태감이 그녀를 죽인 것으로 알려졌다. 영왕의 이름이 언급되기는 했지만 그저 목격자 중에 하나로 끝났다. 진짜 목격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조작된 죽음은 곧 잊혔다. 대신 황궁은 곧 다른 소문에 휩싸였다. 황제의 병증이 단순한 폐병이 아니라 식분(息賁)이라는 것이었다. 식분, 혹은 폐적증이라고 불리는 병은 약으로 다스릴 수 없는 불치병이었다.
궁녀와 태감 사이에 돌던 소문이 결국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소문에 황제는 분노했다. 태의의 진단은 간단한 염증이기 때문이었다.
소문을 퍼트린 주범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신에 태의원이 뒤집어졌다. 황제를 오랫동안 보필한 태의들이 몇 번이고 진맥을 했지만 폐적증이라고 확진을 내리지 못했다. 그에 다시 분노한 황제가 각혈을 하고 쓰러졌다. 황제의 증상이 악화되자 태의들은 그제야 폐적증이 맞다고 하였다.
황제가 치료 불가능한 병에 걸렸다는 것이 알려지자, 한 번 뒤집어졌던 태의원은 이제 존재조차 하지 않은 것처럼 숨을 죽였다. 황궁의 분위기는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변하였다.
황자들 역시 언행을 조심하였다. 방왕은 매일 같이 황제를 뵈러 황궁을 찾았으며, 기왕은 태자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멈췄다.
가장 동요한 것은 불치병에 걸린 황제였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악수(惡手)를 두기 시작했다.
◇ ◇ ◇
만수절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날이었다. 봄이 끝나가고 있었지만 찬바람이 불어댔다.
옷깃을 여미며 장현전의 내실 안으로 들어선 진혁위는 상석에 앉은 황제와 마주했다. 상석 뒤로는 황제가 아끼는 거대한 승룡도(乘龍圖) 병풍이 자리해 있었다.
평소라면 병풍을 배경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당당했던 황제의 풍채는 어딘가 볼품없어졌다. 눈빛도 형형하고 얼굴색도 전보다 좋았으나 전체적으로 기력이 빠진 것이 눈에 보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한순간에 황제의 상태를 알아본 진혁위는 정중히 예를 올렸다.
“혁위야. 그간 어떻게 지냈느냐?”
“부황의 병환 소식에 계속 밤잠을 설쳤습니다. 하여 부름을 받고 지체 없이 달려왔습니다. 부황께서 이리도 강녕하신데, 태의들이 오진을 한 것이 아닌가 믿고 싶습니다.”
진혁위는 만수절 이후로 영왕부에게 칩거하다시피 하였다. 황제의 부름을 받은 것도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진혁위는 제일 먼저 황제의 안부부터 챙겼다. 속마음은 아니더라도 불치병에 걸린 황제에게 효자처럼 보여야 했다.
“태의들이 아주 멍청이들은 아니지. 하늘이 복만은 주지 않는 법이니 너도 명심해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네게 소홀하였다. 특히 문강공의 일이 그렇게 되었는데, 손을 놓고 있었어.”
“부황께서 공사가 다망하신 것을 소자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허리를 숙이며 예의 바르게 답한 진혁위는 황제의 의도를 단번에 읽었다. 혼인 문제라면 이미 예상한 바였다.
“아비라면 당연히 아들의 혼사를 끝까지 책임져야지. 그간 따로 마음에 드는 상대가 생겼느냐? 아직도 영왕부를 찾는 매파를 모두 내쫓고 있다지?”
“번잡스러운 것이 싫어 그렇습니다.”
“그건 여전하구나.”
“소자는 이대로 조용히 사는 것도 좋습니다.”
진혁위는 혼인 따위에는 관심 없다고 피력했다. 물론 황제가 그걸 그냥 두고 보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게 어디 조용히 사는 것이냐? 사내리면 응당 다복하게 일가를 이루어야지. 대학사 표경신(表莖晨)의 손녀인 표연주(表蓮珠)를 본 적이 있느냐?”
“모르옵니다.”
“열다섯이지만 학식이 높은 재녀라고 하니, 너와 잘 어울릴 것이다.”
넉넉한 웃음을 지은 황제의 목소리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처럼 단호했다. 지난 생에서도 황제의 입에서 표연주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진혁위는 웃지 않았다. 그때는 황제의 혼인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여 역정을 샀었다.
대학사는 방왕의 장인으로, 그의 막내딸이 방왕의 원비였다. 방왕의 원비는 첫아이를 낳다가 병을 얻었다. 이전 생에서는 좌승상이 그녀를 치워버리고 모씨 가문의 규수를 태자비로 만들려고 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위락호 대전이 끝나고 진혁위가 태경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녀는 살아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황제가 진혁위에게 대학사의 손녀와 혼인을 하라고 한 것은 의도가 명백했다. 인척 관계를 통하여 방왕의 사람이 되라는 노골적인 위력 행사였다.
방왕은 어려서부터 형제들을 시기하면서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 탓에 그를 따르는 형제들이 아무도 없었다. 형제들보다는 오히려 방계의 군왕들과 더 가깝게 지냈다.
지금껏 황제는 그것을 지켜보며 황자들 사이의 균형을 유지했다. 하지만 불치병에 걸린 것을 알자 방왕의 힘이 되어줄 형제를 안배하려고 굴었다. 너무 빤한 편애였다.
진혁위는 황제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좋아하는 이에게 하나라도 더 좋은 것을 챙겨주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제일 변변찮은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려는 것은, 그리고 다른 아들들을 아무렇지 않게 희생시키려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소자가 대학사를 찾아가겠습니다. 다만 성지는 천천히 내려주십시오. 표 낭자가 열다섯이라 하셨잖습니까. 당장에 혼인을 하라 하면 겁을 먹을 것입니다. 대학사의 허락을 받고 표 낭자를 만난 후에 부황께 아뢰겠습니다.”
지난 생에 황제가 주선하는 혼사를 거절했다가 큰 낭패를 보았던 진혁위는 신중히 답했다. 죽음을 언도받은 황제는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었다.
가능한 시간을 벌어야 했다. 황제가 폐적증에 걸렸다는 소식에 기왕은 몸을 잔뜩 낮추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모아놓은 퇴역 군인들은 여전히 태경과 주변 도시에 대기하는 상태였다.
기왕은 방왕과 달리 제법 눈치가 빨랐다. 황제가 진혁위에게 대학사의 손녀와 혼인을 명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릴 터였다. 방왕이 황제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거침없이 욕망을 폭발시킬 것이다.
가능한 빨리 기왕의 귀에 오늘 소식이 전해지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 그것이 좋겠지. 대학사에게는 내가 말해 두겠다. 그만 물러가거라.”
“물러가옵니다.”
예를 올린 진혁위는 조용히 물러났다.
*
진혁위가 내실을 나서는 것을 지켜본 황제가 옆에 서 있던 총관태감을 손짓으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반기는 눈치가 아니지?”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주어를 말하지 않았지만 황제가 가리킨 상대는 진혁위였다. 진혁위가 혼사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은 은연중에 드러났지만, 총관태감은 민감해질 수 있는 주제를 능숙하게 피했다. 딱히 그의 대답을 원한 게 아니었던 황제는 혀를 찼다.
“명석한 놈인데, 이상한 것을 아끼는 버릇이 있어.”
황제는 이번에도 진혁위가 무엇을 아끼는지 말하지 않았다. 총관태감은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렸지만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쓸모가 다했으면 버릴 줄도 알아야지.”
쓸모를 언급하는 황제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여러 아들들 중에서 진혁위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명석했다. 하지만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여 밖으로 나돌았다. 황제는 굳이 진혁위를 안에 잡아두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기왕과 방왕을 경쟁시켜 균형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적당히 성장한 진혁위를 방왕에게 붙여주려고 하니 류희겸이 마음에 걸렸다. 진혁위야 제법 머리가 좋으니 대학사의 손녀와 혼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터였다. 하지만 그가 류희겸을 내칠 것 같지 않았다.
류희겸의 출신은 언제나 문제였다. 화진국의 반역자로, 그리고 노비로 대연국에서의 삶을 시작한 그에게 어떤 세력이 붙을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네 말대로 쓸모를 다했으니 죽으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호양성을 되찾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류희겸을 당장에 내칠 수는 없었다. 진혁위의 체면도 봐줘야 했다.
원래는 시간을 두고 해결할 생각이었지만 이제 모든 것이 촉박했다.
시간에 쫓긴 황제는 또다시 성급한 결정을 내렸다.
*
황제를 만난 후 그대로 퇴궁한 진혁위는 채제승을 만나 기왕에게 정보를 흘리라 지시를 내리고는 왕부로 돌아왔다. 채제승에게 주문했던 비녀를 받아 온 진혁위는 곧장 경화당으로 향했다. 경화당 안뜰에서는 류희겸이 목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만화대의 훈련을 지켜보던 류희겸이 갑자기 쓰러진 이후에, 진혁위는 류희겸의 외부 활동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진혁위의 개인 연무장도 사흘에 한 번씩 쓸 수 있게 했다.
그랬더니 류희겸은 경화당 안뜰에서 목봉을 휘둘렀다. 정확히는 보법 중심의 단련이라 그의 움직임은 격렬하기보다는 유연했다.
완전히 집중한 듯 류희겸은 진혁위의 등장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진혁위는 굳이 인기척을 내기보다는 그의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방위를 바꾸며 몸을 돌리던 류희겸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류희겸의 발이 꼬이면서 휘청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진혁위는 웃음을 터트렸다.
“넘어지겠다.”
“왕야?”
“그래.”
“아, 오셨습니까?”
화사하게 웃던 진혁위는 천천히 다가오는 류희겸에게서 열기를 느꼈다. 지친 기색도 없고 땀도 거의 흘리지 않은 것 같은데 열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더우냐? 열이 여기서도 느껴진다.”
“아……. 음. 움직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무리하지 말라니까. 이제 쉬어라. 할 이야기도 있다.”
진혁위는 류희겸과 함께 경화당의 곁채로 향했다. 창을 활짝 열어놓으면 봄의 화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곁채에서는 차를 마시기 좋았다.
심양설이 재빠르게 차를 내어 온 다음에 물러났다. 류희겸과 단둘이 된 진혁위는 황제와 오갔던 이야기를 전하였다.
대학사의 손녀와 혼인을 하라는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는 말에도 류희겸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만 끄덕였다.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질투는 안 하느냐?”
“혼인하지 않으실 거 압니다.”
너무 덤덤한 대답에 진혁위는 웃고 말았다. 질투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막상 닥치니까 섭섭하면서도 웃겼다. 류희겸은 외면하지도 모르는 척하지도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무심한 성격의 남자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다.
언젠가 질투를 해주면 얼떨떨하고 좋겠지.
진혁위는 간지러운 미래를 상상하며 웃었다. 류희겸이 어떤 얼굴로 질투를 할지도 기대되었다.
“귀비가 본왕의 애를 태우는구나. 미리 말해 두자면 황제께 성지는 천천히 내려달라고 했다. 이 소식을 기왕이 들으면 상황이 달라질 테니 말이다.”
“기왕이 금군을 매수하였다 하셨지요.”
“그래. 이번에도 성공했다.”
“태경 시가지가 전쟁터가 될 수도 있겠군요. 노파심이긴 하지만 왕부가 위험해질 것 같습니다. 거사 날짜에 맞춰 사병들을 왕부로 집합시킬 수 있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공주부에도 수비 병력을 보내어 미리 방비했으면 합니다. 기왕이 감히 장공주님을 위협하지 않겠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으니 말입니다.”
류희겸은 기왕과 직접적으로 얽힌 일이 몇 없었다. 하지만 야심이 넘치는 기왕이 힘과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성향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모반을 일으켜서라도 황제가 되겠다는 그의 과격함이 어떤 식으로 표출될지 몰랐다. 단순히 황궁을 습격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친왕이나 군왕들을 함께 제압하려 들 수도 있었다.
직전 생과 달리 희범영은 살아 있었고, 진윤홍 또한 정정했다. 많은 것이 바뀌었기에 더욱 방심할 수 없었다. 무엇이든 철저하게 대비해야 했다.
“왕부의 연무장을 정비하라고 시키면 된다. 다들 모여 청소하고 갑옷을 정비하라고 하면 군말하지 않을 것이다.”
“신첩이 왕부를 지키겠습니다.”
류희겸은 비장하게 말했다. 진혁위는 거사 당일에 황궁에 있어야 하니, 왕부를 지킬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적장의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식의 박력 넘치는 기세에 진혁위는 웃었다. 애교도 없고 질투도 하지 않는 류희겸은 용맹했다.
“용맹한 귀비를 둔 본왕은 복받은 사람이다. 귀비에게 왕부를 맡기겠다.”
“예. 맡겨주십시오.”
“아, 그렇지. 내일 경군왕이 왕부를 찾을 것이다. 귀비가 따로 준비할 건 없고 얼굴만 한번 보이면 되는데…….”
류희겸은 호쾌하게 말을 하다 마는 진혁위 때문에 어리둥절했다. 미간을 찌푸린 것이 분위기가 이상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재작년, 무환행궁에서 진서녹에게 정패를 빌려준 경군왕이 날벼락을 맞았지. 본왕은 귀비가 새우를 먹고 싶다고 한 덕분에 정패를 남해로 보내어 무사했다.”
“…….”
“지난 생에서는 진서녹과 마주쳐야 했을 순간에 귀비가 내 손을 잡고 인적이 없는 곳으로 데려갔지. 그때는 내가 마음에 들어 그러는 줄 알았다.”
갑자기 무환행궁의 일을 꺼낸 진혁위 때문에 멈칫했던 류희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진혁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경군왕을 언급하던 진혁위는 류희겸이 쓰러지기 전에 떠올렸던 의문을 기억해 냈다. 그저 우연이라고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리 내어 말을 했더니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
특히 류희겸이 동요하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표정은 그대로였으나 당혹스러워하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귀비의 표정을 읽기가 쉽지 않은데, 이번에는 알겠다. 뭔가 있군.”
“왕야.”
“없습니다, 라고 하지 않는 걸 보니 확실해. 말해라. 난 비밀이 싫다. 네가 진서녹과 연수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미리 알았느냐?”
살벌하게 웃고 있는 진혁위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반드시 답을 들어야겠다는 기세를 풍겼다.
류희겸은 섣불리 입을 여는 대신 진혁위의 눈을 마주 보았다. 능하족 무녀의 축례를 받고 생을 반복하고 있기는 했지만, 원리가 어떤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섯 명의 생을 더하겠다는 축례보다 한 번 더 살고 있으니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여섯 번을 죽고, 일곱 번째 생을 살고 있었다.
진혁위에게 굳이 비밀로 할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진혁위가 실망하고 오해하는 것도 싫었다.
그럼에도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죽음은 비참하기만 했다. 어떨 때는 채 한 시진도 살지 못했다. 칼에 찔리고, 독약을 마시고, 그리고 이무기의 손에 죽었다. 직전 생에서는 폭발에 휩쓸렸다.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피하고 싶었다.
여섯 번을 죽는 동안, 진혁위가 자신보다 두 번이나 먼저 죽었다는 것 또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괴이한 일은 흉사로 취급받기 마련이었다. 여섯 번이나 죽고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진혁위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걱정이었다. 진혁위라면 그저 웃어넘길지도 몰랐지만, 그래도 스스로가 길한 일이 아니라 여기고 있으니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결단을 내린 류희겸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왕야께서 생각하시는 비밀이 아닙니다. 그저 말하고 싶지 않아 그랬습니다.”
“이제 와서?”
“왕야께서도 언제 승하하셨는지 말씀해 주시지 않은 것과 비슷합니다. 저를, 신첩을 믿지 못하여 그러신 게 아니라는 거 압니다. 그저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어서 그렇지 않습니까. 신첩도 그러합니다.”
진혁위는 이전 생에 류희겸이 죽고 일어난 일들을 하나씩 알려주었다. 그러나 위락호 대전이 끝나고 다음 해에 황제가 된 진혁위가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또한 그가 언제 다시 생을 시작한 것인지도 마찬가지였다.
방왕이 채제승의 가족에게 위해를 가한 것은 자신이 연주성 감옥에서 눈을 뜨기 사 년 전의 일이었다. 진혁위가 역당이 될 채제승을 끌어들였다는 것은, 적어도 그가 자신보다 훨씬 빨리 생을 다시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하나씩 주어지는 정보로 류희겸은 진혁위가 언제 죽고 언제 다시 살아났는지 추측했다. 그러나 진혁위가 언급하고 싶지 않아했기에 따로 묻지 않았다.
당신 역시 그렇지 않냐고 묻자 진혁위가 웃음을 터트렸다.
“맞다. 말하기 싫었다. 꼴사나웠거든. 네가 죽고, 네가 그렇게 죽고 나서 다음 해 가을에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일 년쯤 더 살았지.”
“……?!”
“왜 그리 놀라느냐? 오래 살지 못했다고 했잖느냐. 심화가 깊어 울화병으로 죽었다. 맞다. 울화병이다. 그게 꼴사나워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평생에 가지고 싶은 것은 하나뿐이었는데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속이 문드러졌다. 지랄 맞은 성격이지. 열흘 밤낮을 불면으로 보내다가 쓰러졌고, 다시 눈을 떴더니 열여섯 살의 생일 직전이더군. 나는 다 말했다. 그러니 너도 말해라.”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는 듯 진혁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류희겸은 당황하고 말았다. 오래 살지 못했다고 했지만 황제가 된 후 겨우 일 년이라니.
사인이 울화병이라는 것과, 열여섯 살에 다시 눈을 떴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진혁위의 입으로 직접 듣자 기분이 이상했다. 특히 속이 문드러졌다는 그의 말이 고백처럼 들려서 더 그랬다.
류희겸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추슬렀다. 남자가 모두 말하였으니 이제는 자신 차례였다.
마른침을 삼키던 류희겸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을 옷자락에 쓸었다. 이상하게도 적에게 쫓길 때보다 지금이 더 긴장되었다.
해가 진 초원에서 능하족 무녀가 했던 축례는 토씨 하나 잊지 않았다. 그때 맡았던 서늘한 초원의 향기조차 기억나는 듯했다.
“능하족 무녀의 축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목숨 다섯을 구하였으니, 목숨 다섯을 더할 거라고 말입니다.”
“……다섯 목숨?”
“신첩이 구한 사람은 무녀를 포함하여 능하족 다섯 명이었습니다. 무녀가 목숨 다섯을 더할 거라 하였기에 여섯 번의 생을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신첩은 여섯 번을 죽고 일곱 번째 생을 살고 있습니다. 하여 축례가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류희겸은 가능한 단순히 설명하며 진혁위의 답을 기다렸다. 자신을 이상하고 흉한 것이라 여기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섯 번을 죽고 일곱 번째를 살고 있다고?”
“예. 그러합니다.”
“그때마다 나를 만났느냐??”
“……?”
“나는 그때의 기억이 없다. 나를 만나 무엇을 했느냐?”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류희겸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반면에 진혁위는 진지했다. 여러 번 죽고 다시 살고 있다는 류희겸의 고백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이미 자신도 생을 한 번 더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니 여러 번도 가능한 법이었다.
류희겸이 복수에 눈이 먼 것처럼 굴었던 것도, 진한재를 죽인 것이 꿈이 아니냐고 물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 여섯 번의 죽음을 겪고 나면 아무리 차돌멩이같이 단단한 사내라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깨달음과 이해와 동시에 본능적인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것은 지난 한 번뿐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다섯 번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얼굴을 잔뜩 굳힌 류희겸의 얼굴에서 생각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동요하는 감정이 느껴지는 듯했다.
“왜 말을 못 해?”
“별일 없었습니다.”
“내 귀에는 별일 있는 것으로 들린다.”
“직전 생을 제외하고는, 그전에는 왕야와 통성명조차 한 적 없습니다. 진짜입니다.”
“그리 말해도 나는 알 수가 없는 걸. 자세히 말해라.”
류희겸은 웃으면서도 눈을 형형히 빛내는 진혁위가 집요한 성격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아무래도 다 말해야 할 듯싶었다.
“다섯 번 중에 두 번은 연주성 감옥에서, 그리고 한 번은 대연국으로 건너오는 중에, 그러니까 다시 생을 시작한 후에 채 하루도 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은 모두 수렵제가 끝나고 죽었습니다. 왕야를 만날 시간이 없었습니다.”
“내가 비무를 하자고 찾아가지 않았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처음은 신첩이 아예 운신을 못 하였고, 다른 한 번은 왕야 앞에 나설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단어를 선택한 류희겸은 최대한 간소하게 설명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만큼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진혁위가 그걸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수렵제가 끝나고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어 죽었다는 것은 없다. 다 털어내라.”
결국 류희겸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집요한 남자는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류희겸의 기억력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은 편이었다. 여섯 번이나 다시 살았지만 죽음의 순서를 헷갈릴 일은 없었다.
처음은 만월제전에서 부상을 심하게 입어 수렵제에 참석 자체를 하지 못했다. 진서녹이 역모를 일으키자 신원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사약을 받았다.
생을 다시 시작하고 연속으로 세 번은 채 하루도 살지 못했다. 연주성 감옥에서, 대연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죽었다.
다음으로 순순히 노비가 되어 대연국으로 끌려오고 나서도 역시나 역모에 휩쓸려 죽었다. 정확히는 충성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며 천무동으로 보내졌다. 이무기를 만난 것이 그 생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직전 생이 되어서야 만월제전에서 중상을 입지 않았다. 비무를 하자며 찾아온 진혁위를 만나 통성명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류희겸은 덤덤히 설명을 이어갔다. 막상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니 아주 끔찍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진혁위는 초탈한 것 같은 류희겸 때문에 속이 쓰렸다. 류희겸이 말한 여섯 번의 죽음은 그리되었다는 것으로 끝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진혁위는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삶의 고난을 꿋꿋하게 이겨낸 자에게는 찬사를 보내는 게 맞았다.
“고난을 이겨낸 귀비가 자랑스럽다.”
“아닙니다.”
“아니기는. 궁금한 것이 더 있다. 지난번에 내 손을 잡아끌어 진서녹을 피한 이유는 무엇이냐?”
“……진서녹이 경군왕이 아니라 왕야의 정패를 빌렸었습니다.”
“내가 단순히 연금을 당한 게 아닌 모양이군. 어찌 되었지?
류희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진혁위의 눈치는 정말 귀신같았다. 강도 높은 취조를 받는 기분을 맛보며 류희겸은 잠시 숨을 고른 다음에 입을 열었다.
“결백을 증명하신다 하여 자결하셨습니다.”
“두 번 다?”
“예.”
“그때나 지금이나 지랄 맞은 성격인 건 여전했군. 죽어야 할 나를 귀비가 살렸다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진혁위는 이전의 죽음을 알지 못했지만 류희겸의 말을 믿었다. 신실한 얼굴로 거짓말을 하던 사내가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도 마음 쓰였던 일인 듯싶었다.
“그런데 왜 나를 도왔느냐? 네 말대로라면 다른 인연이라고 할 게 없었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희일준을 따라 행궁 안에 들었다가 우연찮게 왕야를 보고는…… 충동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우연이었다. 무환행궁에 따라가지 못한 처음과 달리, 두 번째는 진혁위의 죽음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진혁위는 황제 앞에서 진서녹에게 정패를 빌려준 것뿐이라고 결백을 주장하였으나 통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죽음으로 증명하겠다며 황제에게서 자결을 허락받았다. 무섭도록 아름다운 황자가 제 목에 칼을 꽂아 넣는 광경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그랬기에 직전 생에서 무환행궁에서 진혁위를 보았을 때 동요했다. 비무를 하자며 선물을 가지고 방문한 젊은 황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떠올랐다. 진혁위 뒤로 진서녹이 따라오는 모습을 확인하자 몸이 절로 움직였다.
남색가라고 소문 난 황자를 으슥한 곳으로 이끄는 바람에 가당찮은 오해를 받기는 했다. 그래도 충동적인 선택으로 진혁위를 살린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가 진한재와 연수를 하였다 생각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충동적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었다.
“충동적이라. 귀비가 그럴 때가 있기는 하지. 그런데 무엇이 싫었던 것이냐? 내게 말하지 못할 게 없는데. 다른 게 더 있느냐?”
“아닙니다.”
“그럼?”
다른 건 없었지만 류희겸은 잠시 망설였다. 결국 자신의 입으로 이것까지 말해야 했다.
“너무……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하다고? 뭐가? 몇 번이나 다시 생을 반복하는 것이? 이런. 귀비가 차돌멩이처럼 단단한 줄 알았더니, 역시나 마음 여린 사슴이었어.”
“왕야.”
“이상하다 여길 거 없다. 한 번이나 여섯 번이나 다르지 않으니까. 덕분에 내 목숨을 살렸고, 네 복수를 끝냈으니 좋은 일이다.”
너무나도 간단한 결론이었다. 그렇기에 류희겸은 안도했다. 동시에 자신과 다른 진혁위의 배포에 감탄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좋은 일보다는 슬프고 억울한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진혁위를 살렸고, 자신의 복수를 끝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 마음먹자 웃을 수 있었다.
“귀비가 겨우 웃는구나. 딱딱하게 굳은 얼굴도 예쁘지만, 웃으면 더 예쁘다. 손을 줘봐라.”
류희겸은 반사적으로 진혁위가 내민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진혁위의 귀비가 되고 난 이후에 늘상 있는 일이었기에 류희겸의 동작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어색함도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귀비가 악몽을 꾸는 거 안다.”
“……예. 부끄럽게도 그러합니다.”
“꿈이 아니다. 본왕과 이리 손잡고 있는 것은 귀비의 오랜 노력의 결과다.”
예상 못 한 위로에 류희겸은 눈을 크게 떴다. 지난번에 자신이 진혁위에게 질문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혼몽한 와중에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닌가 의심했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을 꿈꾸며, 홀로 차가운 감옥 바닥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는 진혁위가 좀 더 직관적인 답을 주었다. 이렇게 차근차근 고생하는 꿈은 꾸지 않는다고 말이다. 웃긴데도 묘하게 납득이 가서 안도하며 잠이 들었다.
“이리 차근차근 고생하는 꿈은 아니 꾼다 하셨지요.”
“맞다. 아무리 악몽이라고 하나 이리 길고 자세하게 고생하는 것은 말도 안 되지.”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리던 진혁위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술렁이는 마음에 류희겸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상하게도 진혁위의 가벼운 불평불만이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좀 더 용기를 내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지만, 능하족 무녀의 축례는 다섯 목숨을 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허나 저는, 신첩은 여섯 번을 다시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또다시 생을 반복할지도 모릅니다.”
“그게 마음에 걸리느냐?”
“예.”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귀비는 축례라도 받았다만, 본왕은 이유조차 모른다. 다음에 또 만나면 오해하지 말자. 귀비가 만월제전 노비로 팔리기 전에 본왕이 빼돌리러 갈 터이니, 제대로 기억하고 있어라.”
진혁위는 망설임 없이 답을 내놓았다. 자신 역시도 다시 생을 반복한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진실을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다음을 준비하는 게 현명했다.
호쾌한 해결법에 류희겸은 다시 웃고 말았다. 복수를 끝냈더니 미루어두었던 걱정거리들이 밀려들었다. 켜켜이 쌓인 먼지같이 속을 답답하게 했던 것들이 진혁위의 몇 마디 말에 깨끗이 사라진 것이 신기했다.
다시 생을 반복하더라도,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 기뻤다.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눈을 뜨더라도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 아니라 진혁위를 다시 만날 걸 기대할 것이다.
“예.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봄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이루어진 언약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으나 류희겸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 ◇ ◇
봄은 느릿하게 지나갔다. 황제의 병환 소식에 모두들 몸을 사렸다. 그러나 기회를 노리려는 사람은 언제나 있는 법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조용히 다음 보위에 오를 황자가 누구인지 의견을 모았다.
불온하고 위험한 기운이 태경의 거리에 조금씩 퍼지고 있었다. 그사이, 화진국 황제의 친서가 도착했다.
*
해가 지고도 늦은 밤이었다. 류희겸은 황궁에서 늦게 돌아온 진혁위를 초조한 마음으로 맞이했다.
진혁위는 화진국의 황제가 보낸 친서의 내용을 전해주었다.
“화진의 황제께서 결단을 내리셨군요.”
류희겸은 담담히 말했다. 친서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화진국의 소식은 진혁위로부터 전해 들었다.
용이 약속한 대로 화진의 황제에게 현몽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화진의 황제는 이전까지 미적거리던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역모를 획책한 혐의로 역적이 되어 죽은 채왕과 남준해 장군의 신원을 복원시켰다. 반대로 역적이 된 진한재의 시신은 사지가 찢겨 들판에 버려졌다.
모두 류희겸이 바라 마지않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도착한 친서로 인해 류희겸의 존재가 붕 떠버리고 말았다.
친서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화진의 현 황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 호양성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맹세였다. 나머지 하나는 류희겸의 신변에 관한 것이었다. 사절을 보내어 류희겸을 보내어달라고 한 것은 실수였다고,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알렸다.
화진의 황제가 체면을 살리기 위한 정치적으로 타협한 것이었다. 류희겸은 이곳에 살아 있으나 화진국에서는 죽은 자였다. 대신 역모의 누명을 벗고 전공을 세운 장군으로 이름이 남았다.
류희겸은 자신이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맹세했던 대로 진한재를 죽였고 그에 더하여 고모부 남준해의 누명을 벗긴 것은 바랄 것 없는 성과였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진혁위였다.
화진국에서 죽은 자로 취급한다고 해도 자신은 류희겸이 맞았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근본 없는 놈이 되고 말았다.
“황제가 소심하군. 용이 현몽하였을 텐데, 너를 영웅으로 만들지는 못할망정 내치다니.”
진혁위가 혀를 쯧쯧 차며 화진의 황제를 비난했다. 류희겸은 고개를 저었다.
“적이 되어 호양성을 빼앗아 갔으니 곤란하겠지요.”
“속도 좋다. 화도 안 나느냐?”
류희겸은 화가 난다고 대답하는 대신에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진혁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신첩은 왕야의 도움을 받아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고모부님의 누명을 벗기기까지 했으니, 더 바랄 것도 없습니다.”
“왜 이리 비장해? 무슨 말을 하려고?”
진혁위는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류희겸에게서 어떤 각오를 읽었다. 등불에 선명하게 드러난 얼굴은 바늘 하나 들어가지 못할 만큼 단단해 보였으나, 그리하여 더 불길했다.
“내일이 거사의 날이지만, 그렇기에 더 복잡해지기 전에 먼저 말씀드립니다. 신첩을 버리십시오.”
“……뭐어?!”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말에 진혁위는 자신의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버리라고?
“왕야께서 보위에 오르시는데 신첩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하, 지금 뭐 하자는 것이냐?!”
진혁위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지만 류희겸은 제 뜻을 꺾지 않았다. 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자신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번에 온 친서 때문에 확실하게 마음을 굳혔다.
“내일이면 큰 소란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신첩이 죽었다고 하여주십시오.”
“그래서? 놓아달라고?”
“신첩의 목숨은 왕야의 것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왕야를 위해 죽겠습니다.”
쾅! 류희겸이 말을 끝내자마자 진혁위가 탁자를 거세게 내리쳤다. 커다란 소리가 울렸지만 류희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말 죽음을 각오한 태도에 진혁위의 속이 더욱 뒤집어졌다.
날 위해 죽겠다고? 개소리도 이런 바보 같은 개소리가 없었다.
“궤변이다. 날 위해 죽겠다는 소리가 나와?!”
“왕야. 그래야 합니다.”
“귀비가 본왕의 속을 뒤집어놓는 재주가 제법이었지. 바로 며칠 전에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조했으면서, 이제는 죽겠다고?! 그것도 날 위해서라고?!”
진혁위는 끝까지 꼿꼿하기만 한 류희겸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류희겸도 굽히지 않았다.
“그게 옳습니다.”
“옳기는 뭐가 옳아!”
“신첩이 공을 세웠다고는 하나, 그것 말고는 모든 것이 왕야의 약점이 될 것입니다. 노비에, 타국 출신의 배반자입니다. 다행히 역모의 누명은 벗었지만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허깨비지요. 그런 자를 옆에 두시면 안 됩니다.”
낮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하는 류희겸의 눈빛은 선명했다. 그래서 진혁위는 더욱 기가 막혔다.
류희겸이 영왕의 귀비로 있는 동안에 매번 받았던 공격이었다. 그는 노비에, 타국 출신의 배반자다. 모국에서 역모를 일으켰다 도망친 자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는 지겨울 정도로 들었다. 그만큼 류희겸의 입지는 위태로웠다.
진혁위가 류희겸에게 힘 있는 양부를 찾아주려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양부로 희범영을 낙점했지만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가장 좋은 때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인 모양이었다. 황제나 형제들의 견제를 받든지 말든지 희범영을 붙여주었어야 했다.
때늦은 후회와 별개로 아주 화가 나지는 않았다. 류희겸이 무엇 때문에 죽겠다고 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용한 죽음이 황제가 될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모두 류희겸이 강직하고 저돌적인 성격이기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말이다.
제좌가 지고의 자리라고 하나 진혁위는 목표를 혼동하지 않았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네가 문제가 되기 전에, 내가 황제가 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네가 죽고 내가 황제가 되는 것은 말이 되는 것 같으냐? 됐다. 보위고 뭐고 서쪽으로 가면 그만이다. 내일이 거사일이니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군.”
류희겸은 진혁위가 너무 시원하게 황위를 포기해 버려서 당황했다. 원래 권력에 집착하지 않는 성격이기는 했다. 그래도 진짜 황제가 되지 않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자신이 때를 잘못 선택한 것 같았다.
“그러지 마십시오. 왕야께서 황제가 되셔야 합니다.”
“류희겸. 네가 뭘 잘못 알고 있다.”
“……?”
자리에서 일어난 진혁위가 류희겸 앞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류희겸이 무릎을 꿇고 허리를 편 채 진혁위를 올려다보았기에 서로의 얼굴이 아주 가까웠다. 묵직한 침묵에 어울리지 않게 미소를 지은 진혁위가 오른손으로 류희겸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네가 아니면 황제가 될 이유가 없다. 네게 가장 영화로운 자리를 주겠다 마음먹었기에 황제가 되고자 한 것이지, 달리 옥좌에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게…….”
“황제야 내가 아니어도 된다. 하지만 나는 네가 아니면 안 돼.”
고백이 조용하게 울렸다. 눈을 깜빡거리지도 못하고 진혁위를 올려다보던 류희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진혁위의 입맞춤에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부드럽게 닿은 입술과 달리 입 안으로 밀려든 혀는 난폭했다. 모든 것을 핥아먹기라도 할 듯이 굴면서 류희겸의 넋을 뺏었다. 류희겸은 혀를 빨고 응하는 것만으로도 헐떡거렸다.
입맞춤은 점점 깊어졌다. 설마 싶은 마음에 류희겸은 진혁위의 어깨를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뺨을 쓸고 있던 진혁위의 손이 어느새 목 뒤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성감을 자극하는 입맞춤에 허리에 힘이 빠지기 직전에야 진혁위가 입술을 뗐다.
흥분과 당혹감, 그리고 혼란함에 휩싸인 류희겸은 얼굴을 맞대다시피 한 진혁위를 보았다. 조금 전과 다름없이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은 서늘했다.
“딴생각 하지 마라. 네가 도망친다면 세상 끝까지 쫓아갈 테니까. 죽기라도 한다? 황제고 뭐고 다 엎어버릴 것이다. 성군이 아니라, 고금은 물론이고 먼 미래에도 없을 폭군으로 이름을 남기겠다. 자신 있다.”
위험한 협박에 류희겸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폭군이라니. 무서운 것은 진혁위가 헛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멍하니 있자니 진혁위가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에 도로 엉덩이를 붙였다. 진혁위가 다시 뺨을 쓸었다.
“왜 아무 말도 없느냐.”
“당신께서, 왕야가 아니면 누가 있습니까?”
겨우 정신이 돌아온 류희겸은 어렵게 할 말을 찾았다. 진혁위가 서역으로 떠나면 황제가 될 사람이 없었다. 정군왕은 오른팔이 마비되어 두문불출한 지 오래였다. 진서녹에게 정패를 빌려주었다가 연금이 되었던 경군왕은 성격이 유약했다.
그들이 아니라면 진혁위보다 어린 황자들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경험이 일천했다.
“아무나 되라지. 기왕이나 방왕만 아니면 그럭저럭 꾸려갈 것이다.”
“하오나―”
“됐다. 본왕을 황제로 만들고 싶다면 귀비가 마음을 고쳐먹어라. 본왕이 한 경고도 잊지 말고. 더 이상 말하면 싸우겠다. 생각을 정리해라.”
한 번 더 가볍게 입맞춤을 한 진혁위가 그대로 뒤돌아 나가버렸다. 한참 동안 굳어 있던 류희겸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왜…….”
진혁위가 여기에 없는데도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네가 아니면 안 돼. 고백도 협박도 모두 류희겸의 상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자신에게 가장 영화로운 자리를 주기 위해 황제가 되겠다 마음먹었다니. 그게 남자의 진심이라서 더 무서웠다.
류희겸은 어지러운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진혁위에게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이번에는 가슴이 술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시렸다.
“서역으로.”
진혁위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서쪽으로 떠나자고 했다. 그건 류희겸도 꿈꾸었던 것이었다.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둘이서만 천하를 유람할 수 있다면 바랄 게 없었다. 그러나 류희겸은 진혁위가 황제가 되는 것도 보고 싶었다. 후자가 더 간절했다.
어쩌면 미련 때문인지도 모른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영웅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고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은 남아 있었다. 진혁위의 부인이 아니라 영친왕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할 법한 생각이었다.
진혁위는 답을 내놓았다. 서쪽으로, 누구도 찾지 못할 곳으로 떠나는 것 역시 괜찮은 방법이었다.
호화로운 비단금침이 아니라, 바람 부는 초원에서 낡고 쿰쿰한 냄새가 나는 천을 뒤집어쓰고 잠들며 하늘의 별을 헤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류희겸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다른 방법이 있는데도 미련은 쉽게 털리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도 좋지만, 옥좌에 미련이 없다는 진혁위가 황제가 되는 것이 순리였다.
생을 반복하며 살고 있는 것이 하늘의 시련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진혁위를 살리고 그가 황제가 되는 것에 어떤 거대한 뜻이 있다고 믿었다. 그저 복수만을 위해 아등바등 발버둥 친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을 했노라고 말이다.
문제는 역시나 자신이었다. 타국 출신의 귀비. 살아 있는 허깨비. 분명 어떤 식으로든 황제가 된 진혁위에게 정치적 부담을 줄 것이다. 그럼에도 혹시나 어떻게든,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욕심이 많아.”
류희겸은 스스로를 비난하며 고개를 들었다.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방의 가구와 물건은 대부분 진혁위의 손을 거친 것이었다. 복수를 하기 전에도, 그리고 하고 나서도 류희겸은 이곳에 큰 애착을 가지지 않으려고 했다. 좋은 사람들이 자신을 아껴주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이제는 선택의 때가 왔다. 그러나 쉬이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다.
*
훌쩍 뒤돌아 가버렸던 진혁위는 밤이 깊어서 다시 경화당에 나타났다. 홀로 고민을 거듭하던 류희겸은 갑작스러운 진혁위의 등장에 어리둥절했다.
“왕야. 어쩐 일이십니까?”
“당연히 자러 왔지.”
“예?”
“자러 왔다고. 왜 놀라? 본왕이 딴 곳에서 잘 줄 알았더냐?”
전쟁터에서는 물론이고 전쟁이 끝나고 태경으로 돌아와서도 진혁위가 류희겸과 떨어져 잔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조금 전에 차가운 바람과 함께 나가버린 남자가 이리 나타날 줄 몰랐던 류희겸은 당황스러웠다.
“생각을 정리하라고 하셔서…….”
“잠은 자야지. 설마 밤을 샐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겠지?”
“그야 물론 아닙니다.”
“얼른 준비해라.”
진혁위의 재촉에 류희겸은 부산히 움직였다. 얼굴과 손발을 씻고, 심양설의 도움을 받아 침의로 갈아입었다. 분위기가 심상찮은 것을 알아차린 심양설이 술상을 차려 올릴까 물었지만 류희겸은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풀고 침방으로 돌아오니 진혁위는 이미 준비를 마치고는 침상에 앉아 있었다.
“이리 와라.”
진혁위의 손짓에 류희겸은 순순히 다가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혁위가 내민 손을 잡으며 조용히 물었다.
“교합을 하실 겁니까?”
“하고 싶어?”
“아니요.”
“그럼 얼른 누워라. 누누이 말했다시피 사람은 제대로 자야 한다.”
언제나처럼 잠의 중요성을 짧게 강조한 진혁위가 류희겸의 손을 살짝 잡아끌었다. 류희겸은 저항하지 않고 안쪽 자리에 얌전히 누웠다. 진혁위가 옆자리를 차지하고 눕자 대기하고 있던 심양설이 등불을 하나만 남겨두고는 물러났다.
실내가 컴컴해졌지만 잠이 오지 않은 류희겸의 눈은 말똥말똥 했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는 대신에 옆을 슬쩍 보았다. 등불 때문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진혁위의 옆모습이 마치 그림자처럼 보였다.
정말 이러고 자? 진혁위는 싸울 것 같다며 자리를 피했지만, 실상은 싸운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다니. 의아함은 가시지 않았다.
“왜 그리 보느냐?”
진혁위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류희겸은 생각을 바꾸었다.
“괜찮으십니까?”
“뭐가?”
“화나신 거 아닙니까?”
이럴 때면 자신이 눈치가 썩 좋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화가 난 것 같은데, 행동은 그렇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화난 거 아니다. 사실은 귀비 혼자 생각하게 두려고 했는데, 갑자기 옛날 기억이 나더군. 본왕이 잠들어 있을 때 귀비가 훌쩍 사라져 버렸지. 그래서 부랴부랴 찾아왔다.”
“그건…….”
“그건 본왕이 방심한 거지. 그래서 오늘은 말짱한 정신으로 귀비를 꼭 껴안고 자야겠다.”
옆에서 감시하겠다는 소리에 류희겸은 놀라지 않았다. 과거의 전적이 있는데다가, 죽겠다고 자신의 입으로 말했으니 진혁위가 야단스레 굴 만했다.
“왕야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안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진혁위가 갑자기 몸을 돌려 류희겸을 끌어안았다. 이제 류희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짙은 그늘이 진 진혁위의 옷자락뿐이었다.
“왕야?”
“하나만 묻자. 나를 좋아하기는 하는 것이냐?”
“물론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지만 류희겸은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좋아한다.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다.
“연정인지, 충성인지, 혹은 편안함인지는 아직도 모르겠고?”
“예.”
“아주 무심하지는 않군.”
“……?”
류희겸은 진혁위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진혁위는 류희겸이 의아해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이렇게 조용히 끌어안고 있으면 류희겸의 심장 뛰는 소리가 느껴졌다. 좋아하냐고 물으니 그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놀란 것인지 동요하고 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아주 무심하지 않으니, 아직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사실 류희겸이 자신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아무 문제 없었다. 그래도 기왕이면 혼자 애를 태우는 것보다는 서로 아껴주는 게 나았다. 그 마음이 꼭 연정이 아니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자신도 어여쁘고 애틋한 감정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진혁위의 최우선 사항은 류희겸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야 사랑하든 미워하든 할 수 있었다. 세상 가장 영화로운 자리도 나중의 문제였다.
류희겸은 이미 한 번 도망친 전적이 있었다. 지금과 그때는 서로 사정이 다르긴 했다. 그러나 한 번 결정을 내린 류희겸은 용의주도하게 움직일 줄 알았다. 혼자 생각을 정리하게 두지 못하고 부랴부랴 찾은 것도 그런 연유였다.
이럴 때면 류희겸이 음인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아쉬웠다. 그랬다면 아주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텐데.
“희범영에게 귀비의 양부가 되어달라 청했다.”
“……예?!”
품 안에 있던 류희겸이 놀라다 못해 기묘한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진혁위는 웃었다. 반대로 류희겸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진혁위를 올려다보려고 했다. 그러나 진혁위가 꽉 끌어안는 바람에 버둥거리는 것으로 끝났다.
“희범영이 싫으냐?”
“싫은 게 아니라. 놀라서 그렇습니다.”
“그가 허락했다. 전쟁 중이라 양부가 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자고 했지. 본왕이 옥좌에 올라 청하면 그림이 좋을 거라 여겼다. 희범영이 황제의 개가 되었다는 소리를 듣겠지만, 그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귀비가 허깨비가 되었다고 슬퍼 마라. 귀비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더냐. 이곳에서 호적이 생겼다고. 새로운 류희겸으로 살면 된다.”
머리 위로 울리는 진혁위의 말에 류희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네가 문젯거리가 될 거라고 여기지 마라. 언제나 방법은 있다. 다 싫으면 서역으로 떠나면 되고.”
힘들고 어렵지만 방법이 있다는 것을 류희겸도 알았다. 무결한 황제는 없다. 다만 류희겸은 어떤 식으로든 진혁위의 오점이 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다시 욕심이 났다.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혹은 마른 들풀에 불이 붙은 것처럼.
류희겸은 열이 오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당찮은 마음이었다.
“서역으로 가자. 그곳에는 새하얀 돌로 건물을 짓는다고 들었다. 또한 전설 속의 동물을 조각하여 건물 위에 세워둔다지.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상상이 가지 않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보면 되겠지. 안 그러냐?”
“생각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십시오.”
“이런. 다 넘어온 줄 알았더니. 그래. 지금은 자라.”
한 번 더 자라고 종용한 진혁위가 류희겸을 고쳐 안았다. 넉넉한 품에 안긴 류희겸은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복잡했기에 선잠을 자다 깨기를 계속 반복했다.
몇 번이고 눈을 뜰 때마다 진혁위의 품에 안긴 것은 그대로였다. 한 번씩 자세가 바뀌기는 했지만 단단한 팔이 계속 감긴 상태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진혁위가 낮은 목소리로 자라고 속삭이며 어깨를 두드렸다.
류희겸은 진혁위가 밤을 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어디 가지 않을 테니 편히 자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그의 품에 기대어 불면의 밤을 함께 보냈다.
◇ ◇ ◇
다음날은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로 보였다. 진혁위는 화진국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들의 명단을 확정하기 위해 입궁하였다. 그리고 류희겸은 경화당 안뜰에서 목봉을 휘둘렀다.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영왕부의 연무장에서 사병들의 대대적인 점검이 있었다. 병장기를 옮기고, 연무장을 쓸고 닦으면서 수리할 곳을 찾아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있어왔던 일이었기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이 끝나고는 간단한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모두 의욕적이었다.
아무 일도 없이 해가 졌다. 그리고 해가 진 직후 사건이 일어났다. 황궁의 편전태감이 영왕부를 찾은 것이었다.
“영왕의 귀비 류씨는 입궁을 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시오.”
“류씨가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작년 여름과 똑같은 광경이었다. 어명을 내리는 태감도 바로 그 사람이었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하늘에 해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라면 해가 지고 나서 황제의 부름을 받는 것은 이상했다.
“장 공공. 해가 졌습니다. 폐하께서 늦은 시각에 소인을 찾으시는 이유를 아십니까?”
“마마께 아뢰옵니다. 영왕야께서 늦게까지 황궁에서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되신 황제 폐하께서 석반을 함께 드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다 마마를 불러 치하하겠다고 하셔서 이리 노비를 보내셨습니다. 영왕부에 도착할 때면 해가 질 거라 하시어, 마마를 위해 마차와 함께 금군시위도 보내셨습니다.”
태감의 말대로 영왕부 앞에는 마차와 금군시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가 신경을 썼다는 티가 많이 났기에 류희겸은 적절한 대답을 골랐다.
“황제 폐하의 은혜에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지금 류희겸이 입고 있는 무복으로는 입궁이 어려웠다. 태감에게 양해를 구한 류희겸은 경화당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심양설의 도움을 받아 치장을 하는 류희겸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지금껏 황제가 석반을 먹자고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황제가 즉흥적인 성격이긴 했다. 작년 여름에도 아무 예고 없이 류희겸을 황궁으로 불러들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았다.
오늘 기왕이 범궐을 시도한다.
만약 황제가 기왕의 거사에 대해 알았다면 오늘 자신을 보란 듯이 부를 리 없었다. 황제의 성격이라면 금군을 기왕부로 보내어 쓸어버렸을 것이다.
문제는 과연 시간 맞춰 황궁에 들어갈 수 있냐는 점이었다. 기왕의 거사는 해가 지고 퇴궁을 한 방왕을 노리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퇴궁 후에 기루에서 술을 마시고 노는 방왕을 덮친다고 했다.
이제 막 해가 졌으니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영왕부에서 황궁까지는 반시진도 걸리지 않았고, 또한 방왕이 즐겨 찾는 서시의 기루와 영왕부는 서로 반대편이었다. 어쩌면 아무 일 없이 황궁에 도착하는 게 가능할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건 모두 가능성뿐이었다. 가장 안전한 것은 변란이 일어날 때까지 왕부에서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진혁위에게 영왕부를 지키겠노라고 맹세했다. 왕부에 모인 사병들을 지휘할 반계효의 실력을 의심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한 말을 지키고 싶었다.
아프다고 쓰러질까. 류희겸은 최선의 방법을 떠올렸다. 하지만 피를 토하고 쓰러지지 않는 이상에야 황제의 부름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기왕이 범궐을 다음으로 미룬다면 자신의 행동은 황제의 미움을 살 것이며, 진혁위는 더욱 곤란해질 것이다.
허리띠에 향갑을 늘어뜨리는 것으로 꾸밈을 마치자 류희겸은 심양설만 남기고 나머지 시종들을 내보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심양설이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조용히 써야 할 것이 있어서.”
서재로 향한 류희겸은 지필묵을 꺼내어 빠르게 글을 적었다. 먹이 완전히 마르기도 전에 종이를 접어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봉투 겉에 영왕 친전이라고 적은 다음에 서탁 서랍 안에 두었다.
그 광경을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본 심양설이 혹시나 하며 물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마마? 무엇이옵니까?”
“때가 되면 쓰이게 될 거네. 장 공공이 오래 기다렸으니 얼른 가세나.”
류희겸은 설명을 기다리는 심양설을 두고 경화당을 나섰다. 황궁까지 가는 길에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다.
*
마차가 인적이 드문 대로를 천천히 움직였다. 류희겸은 마차의 창문을 조그맣게 열어두고는 이동 경로를 살폈다. 우선 마차가 황궁으로 가는 것은 맞는 듯했지만 류희겸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황제가 보낸 마차는 보란 듯이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마차를 호위하는 금군시위의 수가 겨우 다섯밖에 되지 않았다. 말을 탄 지휘관이 제일 앞에 섰고, 한 명은 말고삐를 잡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마차 뒤에 섰다. 태감 둘은 바로 마차 뒤에 바짝 붙어 따라왔다.
모두 합쳐 일곱 명밖에 되지 않는 호위였다. 거창한 것을 좋아하는 황제가 보냈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숫자였다.
왕부를 나와 마차에 오르는 순간부터 류희겸은 함정이 아닌가 의심했다. 한 달 전쯤에 진혁위가 살변의 누명을 쓸 뻔했던 일을 떠올리면 편전태감이라고 하더라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류희겸은 배후로 황후가 아닌 황제를 의심했다. 태감은 몰라도 금군시위를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황제뿐이었다.
이유를 추측하는 것은 쉬웠다. 자신이 쓸모를 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년 전, 황제 앞에서 목숨을 구걸할 때 쓸모를 다 하면 죽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바뀌었다.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자에게 이유 없이 죽으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아무리 황제라도 부담이 될 것이다.
직전 생에 희가의 객여일 때조차 황제는 죽음을 명하지 않았다. 대신에 태자의 최측근인 조태환 장군에게 보내졌다. 그리고 지금은 영왕의 귀비이니 다른 방법으로 치워버리려고 하는 것일 터였다.
이미 예상했기에 놀라울 것은 없었다. 방법도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가장 손쉬운 것은 시위들이 돌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목격자를 걱정했다면, 괴한이 불시에 습격하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북대가에 위치한 영왕부에서 황궁으로 향하는 길에는 고급 저택만이 가득했다. 마차가 서로 지나칠 수 있는 도로는 넓고 깨끗했지만 사각지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높은 담장 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작정하고 덮치면 제대로 대응하기도 힘들었다.
감히 친왕의 귀비를 노리는 무도한 자들은 얼마든지 만들어 내는 게 가능했다. 태경의 치안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불한당들이 존재했다. 그들도 아니라면 화진국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바로 어제 화진국에서 류희겸은 죽은 자라는 친서가 왔다. 화진국에서 보낸 자객이라고 하면 그럴듯했다. 작년 중추절에도 사절단에 자객이 끼어 있었으니 잘 먹힐 것이다.
류희겸은 입매를 당겨 한숨을 참았다. 모든 것이 그저 자신의 괜한 걱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습격이 있다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어려웠다. 머리에 꽂은 비녀 하나만으로 자객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비도라도 하나 숨겨 올 걸. 류희겸은 뒤늦게 후회했다. 황궁에서 무기를 숨기고 있다가 발각되면 끝장이었기에 조심했더니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저 자신의 기우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칫거리는 것과 동시에 비명이 들려왔다.
“뭐야?!”
“기습이다!”
“아악!”
외침과 비명이 커다랗게 울렸다. 동시에 마차가 덜컹거리면서 옆 벽에 화살이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마차의 벽을 화살 두 개가 관통하기까지 했다.
류희겸은 지체 없이 화려하고 치렁치렁한 겉옷을 벗어재꼈다. 화살이 박힌 마차의 반대편 벽을 발로 차서 넘어뜨린 다음에 몸을 빼냈다.
어둠이 내려앉은 대로 양쪽으로는 인적이 보이지 않았다. 마차 앞뒤로 달아둔 등불만이 일행의 처참한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마차를 끌던 말은 이미 쓰러졌다. 지휘관이 타고 있던 말도 마찬가지였다. 쓰러진 말을 방패 삼아 몸을 숨기고 있는 지휘관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다른 금군시위들과 태감들도 상태는 비슷했다. 대부분 화살에 맞아 쓰러지거나 휘청거리는 상황이었다. 순식간에 모두 제압당한 것을 보면 숨어 있는 자들의 숫자가 상당하며 실력도 뛰어나다는 의미였다.
그나마 화살이 북쪽 담벼락에서만 날아든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양쪽을 에워쌌다면 류희겸도 마차에서 나오자마자 활을 피하지 못했을 터였다. 짧은 순간에 상황을 파악한 류희겸은 지체 없이 반대편 남쪽 담을 넘었다.
이것이 황제의 함정이라면 괴한의 정체는 익문사의 대원일 터였다. 맞서 싸우는 것보다는 도망치는 게 나았다.
“도망친다!”
“쫓아라!”
누군가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류희겸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담장 안쪽은 사람이 살고 있는 저택이었다. 위치로 보아 아마도 좌부시랑의 집일 테지만, 류희겸은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사람들의 눈에 띄어야 살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생각을 정리했냐고 묻는 진혁위에게 시간을 더 달라고 했다. 그에게 안겨 반쯤 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하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진혁위는 웃으면서 황궁으로 떠났다. 그 전에, 너뿐이라는 고백과 함께 경고를 잊지 말라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부드럽고 달콤한 속삭임에 류희겸은 기다리겠노라 답했다.
혹시나 몰라 유언 아닌 유언을 적고 나오기는 했다. 세상일이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니 만약을 대비해 준비한 것이었다.
복수를 끝냈으니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고 여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진혁위를 위해 죽겠다고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우선은 살고 봐야 했다.
조용하던 좌부시랑의 저택이 류희겸과 추격자의 등장으로 난리가 났다. 저택을 지키는 시종들이 나섰지만 전력을 다해 뛰고 있는 이들을 뒤쫓는 것도 역부족이었다.
류희겸은 몸이 훤히 드러나는 지붕으로 오르지 않았다. 철저하게 길과 문을 따라, 때로는 담을 넘어 남쪽으로 내달렸다.
이렇게 되면 영왕부와는 멀어지지만 바로 동시의 북쪽 거리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자신을 습격한 놈들의 정체는 모르지만, 사람이 많은 대로 한가운데에서 일을 벌일 수는 없을 터였다.
쉬익! 쉬익! 등 뒤에서 화살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명중하는 화살은 없었지만 류희겸은 직전 생에 쫓겼던 날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도 한밤에 화살에 쫓겨 담을 넘었다.
불길함은 곧 현실이 되었다. 눈먼 화살이 류희겸의 왼쪽 상박을 스쳤다. 다행히 꽂히지는 않았지만 거의 관통하다시피 스쳐 지나갔다. 뒤이어 넓은 소맷자락에도 화살이 하나 꽂혔다.
“젠장.”
끔찍한 충격과 고통에 휘청거렸지만 류희겸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멈추는 것은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앞만 보며 달리고, 담을 넘기를 반복하자 결국 대로에 다다랐다. 예상대로 동시의 북쪽 대로에는 해가 진 후에도 사람의 왕래가 많았다.
날이 어두운데다 류희겸이 짙은 색의 옷을 입고 있기에 팔에서 흘리는 피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넓은 소맷자락에 화살이 꽂혀 있는 탓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류희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크게 외쳤다.
“도적들이, 도적들이 나타났소! 태경부에 고발하시오! 도적들이 나타났소이다!”
자신을 뒤쫓아 오는 괴한들을 의식한 외침이었다. 이쯤 되면 괴한들이 추격을 그만두지 않을까 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대로 한복판이니, 사주한 자가 누구든 여기서 일을 더 크게 벌이는 것은 전략적으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하지만 괴한들은 끈질겼다. 류희겸이 넘은 담을 그대로 따라 넘었다. 그리고는 활이 아니라 검을 뽑아 들었다.
흔치 않은 구경거리를 보려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한밤에도 번쩍거리는 검을 보고 혼비백산 도망쳤다. 그리고 류희겸 역시 구경꾼들과 함께 동시 쪽으로 도망쳤다.
괴한의 숫자는 모두 여덟이었다. 제대로 된 무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면 그나마 넷까지는 어떻게든 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빈손으로 여덟 명을 정면으로 상대했다가는 끝장이었다.
냉정하게 판단을 내린 류희겸은 동시 안쪽 거리를 내달렸다. 소맷자락에 화살을 꽂은 귀공자가 검은 복면을 쓴 괴한에게 쫓기는 광경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다. 하지만 몸을 사리기만 할 뿐,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류희겸은 시장 거리에서 가장 큰 기루를 찾았다. 동시와 서시의 성격은 달랐지만 밤이 되면 기루가 있는 환락가가 성시를 이루었다. 특히 커다란 기루에는 자경 조직이 있었다. 기루 안에만 들어서면 어떻게든 괴한들을 따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대로에 사람이 꽤 많아서 화살이 날아오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류희겸은 최선을 다해 내달렸다. 막 환락가에 다다를 때쯤이었다. 마주 오는 사람들의 무리 중에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익숙한 얼굴이라고 생각이 번뜩 스치고 지나갈 때였다. 그 역시 자신을 알아본 듯했다. 순간 류희겸은 눈이 마주친 사내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채제승. 진혁위의 사형이었다. 이 년 전에 연무장에서 처음 만난 그의 얼굴이 또렷이 기억났다. 그는 진혁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 채제승을 위험에 말려들게 할 수 없었던 류희겸은 그를 못 본 척 지나치려고 했다.
그 때 벼락처럼 날아온 화살이 류희겸의 왼쪽 어깨에 정확하게 꽂혔다. 앞으로 달려가던 힘과 화살이 꽂힌 충격에 몸이 휘청거리다가 앞으로 고꾸라지다시피 하며 헛발을 디뎠다.
순간 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직전 생에서도 화살에 맞아 쫓기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진한재를 죽였으니 여한은 없었다. 그러나 진혁위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다음 생에서 다시 보자는 약속은 그저 위안일 뿐이었다. 죽지 않고 그를 봐야 했다.
삶에 대한 미련만큼이나 이런 식으로 죽을 수 없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이를 악물며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채제승이 끼어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채제승은 물론이고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칼을 뽑아 들고 괴한들과 대치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놈들아!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도둑들이 설치는 것이냐?! 여기 보시오. 도둑들이 나타났소!”
채제승이 커다랗게 소리를 치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모였다. 류희겸처럼 일방적으로 쫓기는 것이 아니라 칼을 뽑아 서로 맞대치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채제승은 류희겸의 얼굴만 알아본 것이 아니었다. 류희겸이 팔을 다친 것도, 그리고 소맷자락에 화살을 꽂고 있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달려오고 있는 검은 복면의 괴한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단숨에 알아차렸다.
영왕의 귀비인 류희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꽤 있었다. 누가 의뢰한 것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눈에 띄었으니 다행이었다.
기왕의 거사 시간에 맞춰 채제승은 물건을 운반한다는 핑계로 거리에 나왔다. 정보원이 아니라 거리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다.
괴한의 수는 여덟이었고, 채제승의 일행은 그까지 포함해 모두 일곱이었다. 사람 수는 하나 적지만 실력에서도 밀릴 일은 없다고 채제승은 자부했다.
“감히 시장 거리 한가운데서 복면을 쓰고 나다니다니! 세상 햇빛 아래 당당히 서지 못하는 무도한 놈들이렸다! 한 놈이라도 태경부에 가져다 바치면 필시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채제승이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서로 시선을 주고받던 괴한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류희겸을 쫓아왔던 길이 아니라 동시의 거리 양쪽에 있는 건물 담장과 지붕을 넘어 사라졌다. 그들이 모습을 감추자 거리는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채제승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류희겸에게 다가갔다.
“소인이 누구인지 기억하십니까?”
“얼른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저들은 모두 활을 가지고 있습니다.”
류희겸은 방심하지 않았다. 활을 가지고 괴한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을 날릴지 몰랐다. 채제승은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높은 건물이 가득한 동시의 거리에서는 화살이 날아오면 피할 길이 요원했다.
“저쪽으로 가지요.”
채제승이 가리킨 것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기루였다. 화월루(花月樓). 층층마다 등불을 환하게 밝힌 삼 층짜리 커다란 건물은 류희겸이 가려고 했던 곳이기도 했다. 어깨에 꽂힌 화살을 부러뜨린 류희겸은 채제승의 일행에 둘러싸인 채 기루로 향했다.
기루 앞을 지키는 호위도, 그리고 사환도 채제승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류희겸의 어깨에 꽂혀 있는 부러진 화살을 보고도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채제승은 사환에게 바깥 창이 없는 방을 달라고 했다. 보통 바깥 창이 없는 곳은 인기가 없기 때문에 사환은 자리가 있다며 앞장섰다.
사환이 안내한 곳은 이 층의 안쪽 방이었다. 사환에게 금편 하나를 건넨 채제승은 화월루에 의탁하고 있는 의원을 부르라고 했다. 그리고 다친 곳을 치료할 수 있는 약과 붕대를, 마지막으로 구색 갖춰 적당히 술과 음식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금편을 받아 든 사환이 활짝 웃는 얼굴로 문을 닫고 사라졌다.
작지 않은 방에는 류희겸과 채제승, 그리고 채제승의 동행 여섯이 함께했다.
“저들은 모두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편히 앉으십시오. 화월루의 의원이 태의원 출신입니다. 실력은 있는데 여자를 좋아하여 쫓겨났지요.”
류희겸은 채제승의 말대로 의자에 앉았다. 거칠어졌던 숨이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긴장이 풀리지는 않았다.
태경에서 한 손에 꼽히는 기루인 화월루의 방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흥겨운 음악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그럼에도 괴한들의 실력을 생각하면 방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고 황궁으로 가고 있던 길에 습격을 받았습니다.”
류희겸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채제승이 진혁위의 손발처럼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만을 간단히 전하더라도 비워진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차릴 거라 믿었다.
잠시의 침묵과 함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류희겸의 믿음대로 채제승은 황제의 부름과 습격에 어떤 인과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래도 모르는 척하면서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감히 친왕의 귀비를 습격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들이군요.”
“화월루라고 해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실력이 대단했습니다.”
“우선은 상처부터 보여주십시오. 지혈이 시급해 보입니다.”
“아주 심하지는 않을 겁니다.”
류희겸의 말과 달리 상처는 제법 심했다. 특히 왼팔 상박의 상처에서 피가 많이 흘러 옷소매를 빨갛게 적셨다.
침착하게 지혈을 하는 사이에 화월루의 의원이 나타났다. 채제승의 장담대로 의원은 실력이 출중했다. 류희겸의 어깨에 꽂힌 화살을 뽑은 후,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를 감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의원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주변을 정리하고 사라졌다.
그사이에 화월루의 사환이 술과 안주, 그리고 류희겸이 갈아입을 겉옷을 가져왔다. 류희겸이 입고 있던 짙은 색의 화려한 예복은 상처를 치료하느라 거의 찢다시피 하여 벗겨진 탓에 다시 입을 수가 없었다.
류희겸은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는 행색을 바꾸었다. 당장에 쓰러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괴한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다. 괴한들이 황제의 명령을 받은 익문사의 정예라면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남는 무기가 있습니까? 있으면 주세요. 저도 같이 싸우겠습니다.”
“무기는 드릴 테지만, 싸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마. 화월루 지하에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비밀 통로요?”
“이런 기루에는 비밀 통로쯤은 다 있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화월루처럼 큰 기루라면 비밀 통로 하나쯤은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채제승이 아는 것이 이상했다.
“그걸 어찌 아십니까?”
“하하하. 소신이 이곳 루주와 아는 사이라서 그렇습니다. 그곳으로 빠져나가면 기루의 안가가 나오고, 그리고 그 뒤가 소신의 안가입니다. 그곳까지 괴한들이 따라오지는 못할 겁니다.”
류희겸은 자신만만한 채제승을 보며 그와 진혁위가 정말 많은 것을 준비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괴한들에게 쫓기는 와중에 채제승을 만난 것은 운이 좋다는 말로 부족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동시 한가운데서 채 대인을 만난 것은 하늘의 보살핌이십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은원을 돌고 도는 법이지요. 소신이 영왕 전하께 입은 은혜를 조금 갚은 것뿐입니다.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 어서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류희겸은 채제승과 함께 움직였다. 상처는 아프고 식은땀이 났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채제승의 동행들 중에 둘만 함께 했다. 주위를 살피며 자연스럽게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입구에서 거한이 구르다시피 뛰어들어 왔다.
“기왕이, 기왕이 방왕을 죽였소! 기왕이 병사를 이끌고 황궁으로 향하고 있소이다. 변란이요. 변란!”
커다란 목소리가 화월루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흥겨운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화월루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곧 웅성거림과 함께 방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왔다.
류희겸은 소란스러움을 뒤로 하고 지하로 내려갔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듣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지하에는 흰머리가 성성한 노인이 행등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은 아무 말도 없이 채제승에게 행등을 건네주고는 비밀 통로의 문을 열었다.
류희겸은 채제승을 따라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한참을 걸어가다가 채제승이 불쑥 말을 걸었다.
“소신이 방왕과 원한이 있다고 말씀드렸던가요?”
“우리가 만난 게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하하하. 그렇지요. 살짝 말씀드리자면 소신은 방왕에게 원한이 있습니다. 하여 지금 아주 기쁩니다.”
류희겸은 채제승의 뒤쪽에 섰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채제승이 활짝 웃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원한을 갚았으니 기쁠 만도 했다.
“무사히 빠져나가면 채 대인께 독주를 선물하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류희겸의 무뚝뚝한 응원에 채제승은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오래도록 공들여 왔던 복수의 마무리는 통쾌하기만 했다. 안전을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 있는 부인에게 얼른 이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
모든 것이 좋았다. 복수를 하고 은혜도 갚았다. 이제 남은 것은 진혁위가 옥좌에 오르는 것뿐이었다. 행등을 들고 어두운 통로를 나아가는 채제승의 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
태경에서 제일이라고 알려진 흥희루(興喜樓) 앞에 호화로운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대연국에서는 신분에 따라 마차의 크기와 꾸밈이 정해져 있었다. 금실을 수놓은 붉은 비단으로 치장한 거대한 마차의 주인은 방왕이었다.
흥희루의 사환들과 호위들은 대로 한편을 가득 채운 거대한 마차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태자에서 폐위된 방왕이 최근 하루가 멀다 하고 흥희루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황친과 귀족의 자제들이 환락을 탐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허나 황제가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다들 몸을 사리고 있는 중에 방왕만큼은 눈치 없이 기루를 찾았다.
다들 저래서 폐위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방왕 본인에게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진혁위였다. 전쟁이 끝나고 군공을 정리한답시고 늦게까지 남아 일을 하는 진혁위를 보고 있자니 속에서 화가 솟구쳤다.
분기를 가라앉히려면 미녀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게 즉효였다. 황후는 이럴 때일수록 자중해야 한다고 당부를 거듭했지만 방왕은 그저 잔소리라며 흘려들었다.
태자에서 폐위가 되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진 줄 알았다. 하지만 황궁을 나와 황제의 감시가 사라지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살 수 있음을 깨달았다. 다른 형제들이 평소에 이러고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인생은 즐기며 살아야 하는 법이었다. 술과 미인들을 떠올린 방왕은 빙그레 웃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그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방왕을 죽여라!”
“역적을 죽여라!”
완전무장을 한 군인들이 말을 탄 채 방왕의 마차를 습격했다. 방왕의 시위들이 분전했지만 숫자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흉흉한 기세에 눌려 그 자리에 주저앉은 방왕은 기어서라도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창이 그의 등을 꿰뚫었다.
“여기 방왕과 황후가 황제 폐하의 약에 독을 탔다!! 보위를 찬탈하려는 극악무도한 두 모자는 역적이다. 기왕께서 역적을 단죄할 것이다!”
비명과 소란을 덮어버리는 커다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창에 꿰뚫리고도 절명하지 않은 방왕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분노에 몸부림쳤다. 미천한 놈이 미쳤다고 입을 벌렸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창에 꿰뚫렸어도 염호부만 있다면 살 수 있었다. 다 나은 다음에 기왕을 찢어 죽이겠다. 어지러이 이어지던 방왕의 생각은 충격과 함께 끊겼다.
다시 한번 더 창을 맞은 방왕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살변에 흥희루 앞을 오가던 사람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사라졌다.
소란스러운 밤의 시작이었다.
*
방왕이 죽은 것을 확인한 기왕은 병사들을 이끌고 황궁으로 진격했다. 기왕의 기세는 대단했다.
하지만 황궁의 서문 중에 하나인 곤녕문(坤寧門)을 열어주기로 했던 금군시위 대장의 부하 하나가 거사 직전에 발고하면서 기왕은 황궁 담을 넘지 못했다.
기왕의 범궐 시도 소식에 황궁이 발칵 뒤집어진 것은 당연했다. 특히 방왕이 기왕의 손에 살해되었다는 것을 전해 들은 황제는 피를 토하며 쓰러지다 못해 한동안 정신을 잃었다.
가까스로 깨어난 황제는 금군 대장에게 기왕을 죽이라고 분노에 찬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기왕이 끌어모은 병사의 수가 적지 않았다.
내분을 겪은 금군시위는 기왕의 병사를 압도하지 못했다. 드넓은 황궁을 수비하기에는 빠듯하기만 해서 수세적으로 방어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곤녕문 앞은 전쟁터처럼 변했다. 주요 출입구 모두 기왕의 병사들이 지키고 선 탓에 황궁은 반쯤 고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태를 파악한 황제는 재빨리 결단을 내렸다.
진혁위를 편전으로 불러 칙서와 함께 병부를 내렸다.
“영왕에게 황군을 통제할 권한을 주겠다. 제 형제를 죽이고, 감히 황제에게 검을 겨눈 대역죄인을 죽여라!”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병부는 황제로부터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음을 입증해 주는 물건이었다. 병부를 받아 든 진혁위는 무거운 예를 올리고는 편전을 빠져나왔다.
깊은 밤이었다. 여름에 가까운 계절이었으나 밤이 되면 차가운 바람이 진혁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황궁 내부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지만 저 멀리서는 비명과 함성이 뒤섞여 퍼지고 있었다. 모두 이전 생에 겪었던 상황이기에 진혁위는 당황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예상대로였다. 시일이 앞당겨진 것도 진혁위가 의도한 것이었다. 그는 바보 같은 형제들의 패악을 오래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병부와 칙서를 손에 쥔 진혁위는 대기하고 있던 금군시위 다섯을 거느리고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기왕이 황궁의 주요 출입구를 모두 봉쇄했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황궁은 드넓었다. 관리가 되지 않는 작은 개구멍은 언제나 존재했다. 그리고 진혁위에게는 높은 담벼락을 뛰어넘을 실력이 있었다.
내정을 가로질러 북쪽 담을 넘은 다음에, 인근의 황실 마장에서 말을 타고 경해관까지 가는 것이 계획이었다.
기왕의 병사들에게 쫓겼던 지난 생과 달리 이번에는 여러 안배를 해두었다. 금군시위들까지 동행하기 때문에 미리 준비했다는 것을 숨겨야 했다. 그래도 최단 시간 내에 경해관까지 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시위와 함께 막 편전의 중문에 다다를 때쯤이었다. 담벼락에서 소태감 하나가 진혁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복이 영왕 전하를 뵈옵니다.”
“무슨 일이냐?”
배정받은 곳에서 잡일을 주로 하는 소태감들은 보통 심부름꾼으로 쓰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름 모를 소태감은 진혁위에게 작게 접힌 쪽지 하나를 내밀고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진혁위는 지난 명화원 사건에서 류희겸이 쪽지를 받은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당시 위험을 알려준 총관태감은 우연히, 오늘이 월에 한 번 있는 휴무일이라 자택에서 쉬고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쪽지였다. 하지만 펼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女己弓京
뜻 모를 내용에 진혁위는 인상을 썼다. 총관태감의 글씨체가 아닌 것도, 그리고 파자(破字)라는 것도 금방 알아보았다.
비(妃), 그리고 강(弶).
앞은 자신의 귀비인 류희겸을 뜻함이 분명했다. 그리고 뒤는 동물을 잡을 때 쓰는 덫이라는 의미였다. 류희겸과 덫. 두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진혁위는 다급히 소태감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소태감은 모습을 감춘 다음이었다.
쪽지를 손에 쥔 진혁위는 생각에 빠졌다. 총관태감은 황궁에 없었지만, 그를 따르는 태감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한 명이 쪽지를 보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쪽지를 보낸 태감을 찾아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자신만만하던 진혁위는 갑작스러운 변수에 혀를 찼다. 방비를 단단히 해둔 영왕부에서 류희겸이 덫에 걸릴 일이 무엇인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래도 태감이 알릴 일이라면 지난번처럼 황후가 손을 썼거나, 아니면 황제가 손을 썼다는 의미였다.
혹은 이것 자체가 함정일 수도 있었다.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진혁위는 경해관으로 가야 했다.
이럴 때면 류희겸이 음인이 아니라는 것이 통탄스러웠다. 무사하다는 것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이리 심장이 떨리지 않을 것이다.
“천필영(千弼英).”
“예. 전하.”
진혁위를 뒤따르던 금군시위 중에 하나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진혁위는 허리띠에 달려 있는 옥패 중에 하나를 끌러 그에게 내밀었다.
진혁위는 황제가 자신에게 붙여줄 금군시위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중에 셋을 자기 사람으로 회유했다. 특히 열여섯에 눈을 뜨자마자 무예 실력이 출중한 천필영을 끌어들이기 위해 공을 들였다. 천필영이라면 황궁을 빠져나가 영왕부까지 가는 것은 쉬울 것이다.
“너는 영왕부로 가라. 왕부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난 후, 경해관으로 와라. 이걸 보여주면 왕부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옥패를 받아 든 천필영이 그대로 몸을 돌려 뛰어갔다. 남은 시위들 중에서 진혁위가 영왕부의 안위를 살피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변란이 일어났으니 집과 가족의 안위를 알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물며 진혁위는 자신의 비를 매우 총애한다 알려져 있었다.
“가자.”
진혁위는 나머지 시위들을 이끌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떤 함정인지 모르지만 지금은 앞을 향해 달려야 할 때였다.
*
밤이 끝나기 전에 경해관에 도착한 진혁위는 병부와 황제의 칙서로 모든 병력을 소집하였다. 그리고 해가 뜨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태경으로 출발했다. 가는 길에 인근에서 훈련 중인 희범영에게 기별하여 만화대를 합류시켰다.
진혁위가 이끄는 황군이 태경에 도착한 것은 정오가 되기 직전이었다. 태경의 외성을 오갈 수 있는 일곱 개의 문은 모두 단단히 닫혀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밀지를 받은 덕정문(德正門)의 수문장은 진혁위가 도착하자 기민하게 문을 열었다.
경해관의 병사와 만화대의 기병이 일사불란하게 황궁을 향해 진격했다. 밤새도록 곤녕문을 공격하면서도 아직 황궁으로 진입하지 못한 기왕의 병력과 부딪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곤녕문 앞은 칼과 창을 든 병사들로 뒤엉켰다.
완전무장을 한 진혁위는 전열에서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대신에 중앙에서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 전투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는 진혁위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어젯밤에 영왕부로 보냈던 천필영은 흉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영왕부는 공격받지 않았다. 하지만 기왕이 변란을 일으키기 직전에 류희겸이 황제의 부름을 받아 황궁으로 향했다고 했다.
류희겸이 황궁에 도착하지 않은 것은 천필영도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필영은 영왕부에서 황궁으로 가는 길을 뒤지다가, 대로 한가운데서 멈춘 마차를 발견했다. 마차를 호위하던 금군시위와 태감은 모두 죽어 있는 상황이었다.
혼란한 상황이라 사건 현장은 방치되어 있었다. 다행히 마차에 타고 있어야 할 류희겸은 보이지 않았다. 마차 벽이 부서져 있는 것과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자면 류희겸이 반대편 담장을 넘어 도망친 것 같았다.
천필영의 추격은 거기에서 끊겼다. 기왕이 변란을 일으킨 탓에 반대편 담장 너머의 저택은 소란스러웠다. 하인들이 횃불을 들고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천필영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경해관을 출발하기 직전에 그 모든 내용을 전해 들은 진혁위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화진국에서 도착한 친서는 조용히 묻혔다. 황제는 어전 회의에서 호의적으로 류희겸의 이름을 몇 번 언급하고는 넘어갔다.
황제의 성격이 변덕스러운 만큼 갑자기 류희겸을 불러 친서에 대해 말을 하려고 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궁으로 가는 길에 습격이 있었다는 것은 배후가 황제라는 뜻이었다. 태감이 보낸 덫이라는 쪽지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진혁위는 푸른 하늘 아래 장대하게 솟아오른 황궁의 담 너머를 노려보았다.
이전 생에서도 황제는 류희겸을 거추장스러워했다. 하여 희범영이 죽자, 희범영과 사이가 나빴던 조태환에게 류희겸의 신병을 맡겼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 직접 손을 쓴 것이리라.
류희겸이 도망친 것은 다행이었지만, 황제가 보낸 자객들을 따돌릴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황궁으로 가던 길이라면 제대로 된 무기조차 없었을 터였다.
최악에 최악만을 가정하자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악몽이 떠올랐다. 바람 부는 갈대들 사이에서 피투성이가 된 류희겸을 끌어안고 애원하던 기억이 진혁위를 괴롭혔다. 전쟁에서 이기고 황제가 되었는데도 자신이 바라던 것은 끝끝내 가질 수 없었다.
손등에 핏줄이 돋아나도록 주먹을 꽉 쥔 진혁위는 들끓어 오르는 살기를 억눌렀다. 여기서 기분대로 날뛸 수는 없었다.
이대로 류희겸을 찾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기왕을 죽이고 태경이 안정을 찾아야 사람을 동원하여 뒤질 수 있었다.
어제 아침, 류희겸은 잠을 제대로 못 잔 얼굴을 하고 배웅을 해주었다. 아직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류희겸은 웃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차가운 목마름에 숨이 막혔다.
태경을 모두 뒤져서라도, 아니면 황제의 멱살을 잡아서라도 류희겸의 행방을 찾아낼 것이다.
“기왕이 도망칩니다.”
진혁위의 옆을 지키고 있던 천필영이 전황을 알렸다. 처음부터 병력의 수도, 기세도 모두 진혁위 측이 우세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기왕이 제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난 생에서 황궁 담을 넘은 기왕은 그 자리에서 죽었지만 지금은 흐름이 달라졌다. 태경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기왕은 우리에 갇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절망에 빠진 기왕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그가 태경 밖으로 도망치기라도 했다가는 지금까지의 노고가 무산이 될 터였다.
“쫓는다.”
진혁위는 자신을 둘러싼 기병대를 이끌고 기왕을 뒤쫓았다. 패퇴하는 기왕의 호위는 거의 백여 명에 가까웠으나, 그를 쫓는 진혁위의 호위는 그 배가 넘었다.
태경의 가장 큰 대로에서 때아닌 추격전이 벌어졌다. 진혁위는 무리해서 따라잡는 대신에 활을 꺼내 들었다. 평소 자신이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희범영에게서 빌린 활은 꽤나 좋은 것이었다.
진혁위가 말을 달리며 시위를 놓을 때마다, 기왕의 호위들이 하나씩 화살에 맞아 낙마했다. 백발백중이었다. 전통(箭筒)에는 화살이 서른 개뿐이었으나, 텅 비자 기왕의 호위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거리도 가까워졌다.
바둑판처럼 정비된 태경의 대로를 내달리는 기왕은 이를 악물었다. 최전선에서 직접 전투를 치른 기왕은 피투성이였다. 전투의 격렬함에 잔뜩 흥분한 기왕은 자신이 패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특히 화살이 하나씩 날아올 때마다 호위가 낙마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자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방왕은 멍청했고, 영왕은 놀기에 바빴다. 나머지 형제들도 모두 다 쓸모없는 머저리들뿐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진혁위와 대학사의 손녀를 혼인시키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서야 어심의 방향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방왕을 태자에서 폐위시킨 것도 그저 눈속임이었음을 이해하자마자 참을성이 끊어지고 말았다.
금군 대장 둘을 회유한 기왕은 거사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방왕을 죽이고 바로 황궁으로 입성하여 황제에게 입태자 조서를 받아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약속된 곤녕문은 열리지 않았다. 거기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한낮에 진혁위가 일군을 이끌고 나타난 것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깃발을 보면 경해관과 희가의 군병이었다. 황궁에 남아 있어야 할 녀석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그래도 기왕은 좌절하지 않았다. 태경을 무사히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길은 있었다. 서쪽에는 여전히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건재했다. 그들을 규합하여 다시 제좌를 노릴 것이다.
그렇게 재기를 다짐하던 기왕의 말에 화살이 꽂혔다. 머리에 활을 맞은 말이 달리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기왕 역시 튕겨나가다시피 하여 낙마하였다.
“주군!”
“전하!”
기왕의 낙마에 호위들이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섰다. 그사이에 진혁위와 희가의 만화대가 그들을 따라잡으며 난전이 벌어졌다.
숫자부터 압도한 만화대가 기왕과 호위들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것은 당연했다. 낙마한 기왕은 엎드린 채로 수많은 검과 창에 맞아 절명했다.
“항복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죽여라! 대역죄인들이다!”
진혁위는 무자비하게 외쳤다. 난전이 끝나기까지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람 하나 없는 거리는 붉은 피로 물들었다. 상황을 정리하라 명령을 내린 진혁위는 황궁의 반대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곤녕문에서 남쪽으로 내달리다가 동쪽으로 기수를 꺾은 기왕의 무리가 멈춰 선 곳은 동시의 남쪽 길이었다. 그리고 기왕의 준마에 화살을 날린 것은 동시의 높은 건물 지붕 위에 선 어떤 사내였다.
거리가 멀었기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혁위는 사내가 류희겸임을 알아보았다. 몸의 윤곽이, 그리고 움직임이 류희겸과 꼭 닮아 있었다.
어떻게 류희겸이 동시의 건물 지붕 위에 섰는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류희겸이 살아 있었다.
안도하다 못해 감격한 진혁위는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진혁위가 가지고 싶은 것은 제좌도 나라도 아니었다. 세상 가장 귀한 사람이 무사함에 전율이 일었다.
진혁위는 당장에라도 류희겸에게 달려가고 싶은 것을 참았다. 동시 쪽에서 화살이 날아온 것을 눈치챈 이들이 몇 있었다. 류희겸의 존재를 드러내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게 나았다.
무슨 연유로 류희겸이 동시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왕부로 돌아가면 류희겸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진혁위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 ◇ ◇
기왕의 죽음으로 전쟁터 같았던 태경은 하루 만에 안정을 되찾았다. 태경 안에 숨어든 역도의 잔당들 탓에 금군이 거리를 경계했지만 사람들의 일상은 어제와 다름없었다.
진혁위는 해가 지기도 전에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병부를 바쳤다. 제 임무를 완수한 진혁위에게 황제의 치하가 쏟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방왕의 죽음에 크게 상심한 황제의 병증은 단 하루 사이, 눈에 띄게 악화된 상태였다. 특히 화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탓에 왼쪽 얼굴과 다리가 마비되었다.
천하를 호령했던 황제는 병든 노인의 모습으로, 이미 죽은 기왕을 향한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대역죄인 기왕을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시신을 들판에 버리라 외쳤다. 또한 기왕의 아들을 죽이고 나머지 식솔들은 모두 서인으로 강등하여 제국의 각지로 유폐하라 명했다.
진혁위는 무릎을 꿇은 채로 황제의 자비를 베풀어 달라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시는 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일벌백계해야 한다는 황제의 뜻은 확고했다.
오히려 황제는 진혁위에게 태경 곳곳에 숨어 있는 대역죄인의 잔당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병부로 불러들인 경해관 병력은 제자리로 돌려보냈지만, 금군 기병에 대한 명령권을 위임하는 것으로 진혁위에 대한 강한 신임을 표하였다.
“그렇지. 내가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어제저녁에 내가 류희겸을 불렀다. 화진에서 온 칙서에 대해 할 말이 있어 그랬는데, 지금껏 아무 소식이 없구나. 장 공공이 영왕부로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왕의 변사 소식을 듣고는 너무 놀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영왕부에게 기별하여 류희겸의 안부를 물어라. 변란에 휩쓸린 것이 아닌가 걱정이다.”
조금 전까지 노기등등했던 황제가 자상한 목소리로 류희겸을 걱정했다. 류희겸을 함정에 빠뜨린 당사자가 보이는 기만에 진혁위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 낮에 동시의 건물 지붕에 서 있던 류희겸을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들끓는 분노를 갈무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었다.
“소자가 찬찬히 알아보겠습니다. 그보다 부황의 옥체가 강녕하시는 것이 소자는 물론이고 만백성의 바람이옵니다. 소자의 귀비는 운이 좋은 자이니, 부황께서는 크게 마음 쓰지 마시옵소서. 부황께서 무탈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옵니다.”
진혁위는 황제가 듣고 싶은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자신의 귀비보다 아버지인 황제가 더 중요하다는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황제는 병들고 노쇠하였지만, 건재했다. 황제의 말 한마디에 목이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네가 늦게라도 철이 드니 이리도 든든하구나. 영왕은 태경을 안정시켜라. 두려움에 떠는 백성들에게 태경이 안전함을 보여주어라.”
“신명을 다하겠나이다.”
황제의 명령에 진혁위는 정성을 다하여 대답했다.
*
진혁위가 영왕부로 돌아간 것은 아주 늦은 밤이었다. 태경을 안정시키라는 황제의 명령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을 처리했다. 그러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시간을 내어 왕부를 찾았다.
이미 류희겸이 왕부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진혁위는 침전이 아니라 경화당으로 직행했다. 주인이 없는 건물은 최소한으로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영왕 전하를 뵈옵니다.”
홀로 안뜰에서 기다리고 있던 심양설이 진혁위에게 인사를 올렸다. 진혁위는 그녀를 지나쳐 경화당 안채로 향했다. 역시나 경화당은 텅 비어 있었다.
소름 끼치는 적막함에 진혁위는 그제야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껏 류희겸이 경화당을 비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이곳에 오면 늘 류희겸이 있었다. 멀리 가보았자 진혁위의 개인 연무장이 전부였다.
류희겸의 부재가 선명하게 와 닿았다.
“귀비는 어찌 떠났느냐?”
“평소와 크게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급히 서신을 남기셨습니다.”
“서신?”
“예. 그러하옵니다. 서재에 있습니다. 소인이 가지고 오겠습니다.”
“내가 가겠다.”
짧은 순간을 기다리는 것조차 싫었던 진혁위는 직접 서재에 들어섰다. 같이 따라온 심양설이 서탁 서랍에서 서신 봉투를 꺼내어 진혁위에게 내밀었다. 겉봉에는 영왕 친전이라고 적혀 있었다.
심양설을 내보내고 혼자가 된 진혁위는 그 자리에서 서신을 꺼내어보았다. 먹이 마르지 않은 상황에 급하게 봉투에 넣은 모양인지 종이는 서로 달라붙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서신을 펼치자 류희겸이 쓴 게 분명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지난번 유서보다 더 불친절한 내용이었다. 도대체 무슨 약속을 지킬 것이냐고 여기에 없는 류희겸에게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왕이 변란을 일으킬 것을 알고도 황궁으로 향한 남자가 무슨 마음으로 이걸 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혁위의 품속에는 두 개의 서신이 더 있었다. 하나는 류희겸이 보낸 것이었고 또 하나는 채제승이 보낸 것으로, 저녁 늦게 영왕부로 도착한 것을 우소진이 가지고 있다가 진혁위에게 건넨 것이었다.
류희겸은 괴한에게 쫓기다 채제승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다고, 왕부로 당장에 돌아갈 수 없으니 화봉사에서 몸을 숨기고 있겠노라고 적어 보냈다. 거의 통보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오히려 체제승이 보낸 서신에 더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괴한에게 쫓기던 류희겸을 동시 거리에서 만나 안가에 몸을 숨기게 된 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했다. 그리고 괴한들의 정체가 익문사의 대원으로 추측되니 왕부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채제승은 안가의 안전은 자부하지만 류희겸이 태경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는 것도 알렸다. 익문사라면 시신을 확인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 이유였다. 체제승도 익문사의 무서움을 알기에 상단의 일꾼으로 위장하여 화봉사로 갈 거라고 알려주었다.
진혁위는 서신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익문사가 아무리 무섭더라도 류희겸이 태경을 빠져나갈 이유는 될 수 없었다. 기왕이 일으킨 변란에 휩쓸렸으나 무사히 목숨을 건졌다고 하고, 영왕부로 돌아와 자신의 보호를 받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류희겸은 영왕부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태경을 나가려고 했다. 최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지식한 남자는 문젯거리가 되지 않겠다며 그대로 모습을 감출 수도 있었다. 혹은 자진의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렇게 놔둘까 보냐.”
진혁위는 이를 악문 채 으르렁거렸다. 싸늘하게 죽은 시신보다는 훌쩍 모습을 감추는 게 나았다. 그렇다면 살아 있다 믿고 세상 끝까지라도 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바보 같은 일이었다. 류희겸은 바로 지척에 있었다. 화봉사까지 갈 필요도, 세상 끝까지 쫓을 필요도 없었다.
류희겸의 서신을 소중히 갈무리한 진혁위는 조용히 경화당을 나섰다.
*
깊은 밤이었다. 하루 종일 변란을 겪은 태경의 거리에는 개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았다. 넓은 대로를 걷는 것은 오로지 창을 들고 열을 맞춰 걷는 금군뿐이었다. 매일같이 떠들썩하게 불야성을 이루던 동시와 서시의 환락가도 오늘만큼은 모두 불을 끈 채 침묵에 빠졌다.
동시의 서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채제승의 안가에 몸을 숨기고 있던 류희겸은 잠을 설치고 있었다. 상처 때문에 침상에 눕지 못하고, 벽에 기대어 앉아 졸고 있던 류희겸은 심장을 조이는 열 때문에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자 고통이 더욱 생생해졌다.
괴한이 날린 화살 중에 하나는 왼쪽 어깨에 꽂혔고, 또 하나는 왼쪽 상박을 관통하다시피 했다. 화월루의 의원이 솜씨 좋게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하지만 오늘 낮에 도망치는 기왕에게 화살을 쏘는 바람에 상처가 벌어지고 말았다.
도망치는 기왕에게 화살을 쏜 것은 우연과 충동의 결과였다. 하필이면 류희겸이 활을 쥔 채 경계를 서고 있는데, 기왕이 안가 뒤쪽 길에 나타난 것이다. 기왕이 태경을 빠져나가기라도 한다면 진혁위의 일이 꼬이는 것을 염려하여 그의 말에 화살을 쏘아 발을 묶었다.
기왕을 죽이는 데 일조를 했지만, 아물어가던 상처를 터트려버린 류희겸은 채제승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채제승이 모셔온 화월루의 의원에게 다시 상처를 치료받았다.
안가에 있던 해열제와 진통제도 먹었다. 하지만 상처는 제법 깊고 심각해서 약만으로 좋아질 건 아니었다.
열과 고통에 시달리며 졸다가 깨기를 반복하던 류희겸은 머리 위에서 들리는 작은 인기척에 눈을 번쩍 떴다. 초여름밤에 부는 바람에 건물이 삐꺽거리는 것이 아니라 분명 사람이 지붕의 기와를 밟고 지나가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듯, 몸놀림이 가벼워서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확실했다.
머리끝이 쭈뼛 서는 느낌에 완전히 잠에서 깬 류희겸은 품에 안고 있던 검을 천천히 쥐었다. 자신이 지붕 위를 걷는 자의 존재를 파악한 것처럼 반대도 가능했기 때문에 숨소리조차 조심해야 했다.
체제승의 안가는 동시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거리를 맞댄 건물에서는 늙은 목공 장인이 작은 가게를 운영했다. 그리고 안쪽으로는 안채와 별채가 나란히 자리한 상태였다.
안채는 목공 장인 혼자서 썼고, 이 층으로 지어진 별채에는 채제승과 류희겸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워낙 평범한 곳이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곳을 찾아낸 괴한의 실력이 대단하다 생각하며 류희겸은 천천히 침상에 내려섰다.
불 하나 켜지 않은 방 안은 컴컴했다. 하지만 남쪽으로 난 창으로 달빛이 들어 그림자를 구분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발소리는 하나뿐이었다.
별채는 작았다. 이 층의 동쪽 끝 방을 류희겸이 차지했다. 밤손님이 어느 쪽으로 들어올지는 알 수 없었다. 방문이든 창문이든 몸을 드러내는 순간, 일격에 처치해야 했다.
류희겸은 인기척에 집중했다. 무슨 조화인지 잘 닫혀 있던 창문이 살그머니 열렸다.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활짝 열린 창문으로 시커먼 덩어리가 살그머니 들어왔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류희겸은 그대로 검을 뽑아 검은 덩어리를 베었다.
챙! 완벽한 일검은 괴한에게 막혔다. 순간 류희겸은 당황했지만 본능적으로 검을 흘리면서 괴한을 찔렀다. 하지만 그것조차 막히고 말았다.
“희겸?”
익숙한 목소리에 류희겸은 멈칫했다. 그래도 맞댄 검을 거두지는 않았다.
“설마…….”
“그래, 나다.”
류희겸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검을 내렸다. 달빛에 드러난 괴한의 외형은 눈에 익은 것이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어도 아름답고 날카로운 눈매를 알아보지 못할 건 아니었다.
검을 거둔 진혁위가 천천히 복면을 벗었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있냐는 말을 하려는 순간에 닫힌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채제승이 나타났다. 검을 들고 류희겸 옆에 선 채제승이 곧 진혁위를 알아보았다.
“왕……. 아니. 어떻게 여기에 계십니까?”
크게 소리를 지르려다가 가까스로 멈춘 채제승이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류희겸도 같은 마음으로 진혁위를 보았다.
“동시에 있는 안가가 여기라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 사형이잖아.”
“그야 그렇지만.”
“귀비는 이대로 나와 함께 왕부로 돌아갈 거야. 귀비의 실력이라면 지붕을 타고 가는 것이야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준비해라. 가자.”
마지막은 류희겸을 향한 명령이었다. 짧고 차가운 명령은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기세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류희겸은 움직이지 않았다.
“못 갑니다.”
“뭐?”
“왕부로 갈 수 없습니다.”
“류희겸.”
“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위험하다고요. 뻔히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순식간에 부외자가 된 채제승은 팽팽히 맞선 두 사람이 싸우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부싸움에는 끼어들면 안 된다는 금과옥조 같은 옛말이 있었지만, 지금은 때와 상황이 나빴다.
“자, 잠시만요. 큰 소리를 내시면 안 됩니다. 여기는 왕부처럼 넓은 곳이 아니라서 큰 소리가 나면 옆집까지 다 들립니다. 그러니까, 지하로 가시지요. 이야기는 그곳에서 나누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요령 좋게 끼어든 채제승이 가장 시급한 중재안을 내놓았다. 진혁위와 류희겸이 동시에 범을 닮은 눈빛으로 노려보는 바람에 순간 움찔하기는 했지만 채제승은 미소를 잊지 않았다.
“더 이야기할 것 없어. 귀비는 나와 함께 이대로 돌아가면 되니까.”
“지하로 가겠습니다.”
단칼에 거절한 진혁위와 달리 류희겸은 거침없이 방을 나섰다. 결국 진혁위도 지하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재빠르게 지하로 이동했다. 재빠르게 등불을 밝힌 채제승은 이야기를 나누시라고 하고는 자리를 비켰다. 지하실 문이 닫히자마자 입을 연 것은 진혁위였다.
“번거로운 일을 하는군.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왕야께서야말로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신첩이 어떻게 왕부로 돌아갑니까? 게다가 복면을 쓰고 야행을 하시면 어찌 하십니까? 설마 혼자 오신 건 아니겠지요?”
“혼자 안 왔다. 이미 벌어진 일을 따져 묻고 싶거든, 여기가 아니라 왕부에 돌아가서 해라.”
“계속 같은 말씀만 하십니다. 왕야께서는 신첩과 이야기를 하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류희겸은 고집을 부리는 진혁위에게 강하게 경고했다.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할 때 진혁위가 어떤 생각인지 알고 있었다. 다른 소리를 들을 생각이 없다고 강력하게 피력하는 것은 그만큼 화가 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침착해 보이는 남자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여유와 웃음이 없는 것은 확실했다.
“본왕이 이곳에 온 이유는 귀비를 데려가기 위해서이다.”
“황제께서 신첩의 죽음을 원하셨습니다. 익문사가 움직이고 있으니 이곳은 물론이고 왕부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익문사가 두려웠더라면 더더욱 왕부로 돌아가야지. 감히 그놈들이 왕부의 담을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익문사는…….”
“익문사는 귀비가 걱정할 게 아니다.”
류희겸의 말을 가로챈 진혁위는 가능하면 화를 억누르려고 했다. 처음에는 류희겸을 왕부로 데려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거기다 어둠 속에서도 퀭한 얼굴을 하고 있는 류희겸을 보자니 속이 탔다. 화살에 맞아 다쳤다는 글을 보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말간 얼굴을 한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익문사를 걱정하며 왕부로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류희겸에게 도망칠 생각이냐고 따져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하지 않은 일을 추궁하는 멍청이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류희겸이 또다시 무릎을 꿇고 죽이라 한다면 기절시켜 왕부로 업어갈 계획을 세웠다. 미움과 원망을 받더라도 안전해질 때까지 다리에 족쇄를 채워둘 것이다. 어디에도 가지 못하도록.
스스로 생각해도 미친 것 같았다. 그래도 그를 잃는 것보다는 나았다.
“왕야. 익문사가 아니라 황제 폐하가 무서운 것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안다. 하지만 귀비를 눈에 닿지 않는 곳에 두려니 불안해서 그렇다. 숨으려면 왕부에 숨어라. 왕부에도 숨을 수 있는 방이 여럿 있다.”
류희겸은 불안하다며 날이 선 진혁위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조금 늦게 깨달았다. 직전 생애에서처럼 자신이 말없이 사라질까 봐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갑자기 숨이 막혔다. 자신의 배신이 기억에 남은 진혁위가 때때로 예민하게 구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진혁위는 과거의 상처가 낙엽이 발길에 채일 정도라 하였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 정도로 끝나지 않는 법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무리해서 직접 찾아올 정도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언제나 여유롭기 그지없던 남자에게서 절박함을 읽어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애처롭고, 슬프고, 안타깝고, 그리고 이상하게도 기쁘기까지 했다.
“손을 주십시오.”
“뭐?”
“왕야께서 불안하시다니 손을 잡아드리겠습니다.”
잠시 멈칫하던 진혁위는 순순히 류희겸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운 손을 느끼며 류희겸은 가능한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 왕부로 갈 수는 없습니다.”
“류희겸.”
“그간에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류희겸의 한마디에 진혁위가 눈을 크게 떴다. 잡은 손에도 힘을 꽉 주었다. 류희겸도 지지 않고 손에 힘을 주며, 불꽃이 튈 것 같은 진혁위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황제가 되십시오.”
“서역으로 가는 게 아니라?”
“제가, 신첩이 옆에 있겠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느냐?”
“압니다. 땅이 검다는 서역에는 나중에 가겠습니다. 언젠가 왕야께서 말씀하셨지요. 양위를 하고 서역으로 가자고 말입니다. 생각해 보니 왕야의 말씀대로 하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류희겸은 천천히 진혁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잡은 손에 한 번 더 힘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괴한들에게 쫓길 때는 살아서 진혁위를 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겨우 목숨을 구하고 나서는 진혁위가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그러다 일군을 이끌며 기왕을 쫓는 진혁위를 보며 그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진혁위가 제좌에 오르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욕심이었다.
그리고 류희겸은 그 욕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희범영의 양자가 되더라도 자신은 진혁위의 가장 큰 오점이 될 터였다. 시간이 흐른 후 후대에서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언젠가 진혁위가 말했던 대로 그와 영욕을 함께 할 것이다.
진혁위가 천천히 웃었다. 일렁이는 등불에 비친 남자가 꽃이 피는 것처럼 활짝 웃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신첩이 욕심이 생겨 그렇습니다. 성군이 되어주신다고 약속하신 거 기억하고 있습니다.”
류희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진혁위는 올곧은 시선을 마주하며 다시 웃었다. 사람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지금도 류희겸이 어떤 마음으로 함께 하겠다고 하는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맹세는 언제나 진심이고 진실이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진혁위는 그대로 류희겸을 껴안으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달콤한 향기는 맡아지지 않았다. 대신에 품을 꽉 채우는 묵직함과 온기, 그리고 살냄새가 감동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랬지. 너는 용맹한 황후가 될 것이다.”
“음……. 그건 어려울 겁니다.”
“가장 영화로운 자리를 주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하지만…….”
진혁위는 부정적인 말을 하려는 류희겸의 입을 입술로 막았다. 사막을 헤매다 물을 마시는 것을 닮은 절박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진혁위는 이곳이 창문 하나 없는 지하실이라는 사실을 내심 아쉬워하며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천천히 입술을 떼자 류희겸의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진혁위는 부드러운 뺨에 입술을 대고는 속삭였다.
“네가 무어라 하든 황후가 될 것이다.”
“그건 두고 보겠습니다.”
“내가 이길 것이다. 자, 이제 돌아가자.”
“안 됩니다.”
“자꾸 왜 이러느냐?”
“왕부에 숨을 곳이 많다고 하셨지만, 안전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도망친 신첩을 찾기 위해 익문사는 가장 먼저 왕부부터 뒤질 겁니다.”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얄미운 말만 골라 하는 류희겸 때문에 진혁위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책사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류희겸의 말에는 틀린 것이 하나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왕부에 숨은 세작을 모두 털어낼 수는 없었다. 류희겸이 생사 불명으로 모습을 감췄으니 가장 먼저 왕부를 뒤질 것은 분명했다.
진혁위는 류희겸이 태경을 떠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에만 집중하여 스스로의 시야가 좁아졌음을 인정하였다. 아무리 불치병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황제는 마지막까지 조심해야 할 상대였다.
“네 말이 맞다. 그래도 화봉사에 숨는 것은 아니다. 사형에게 안가가 몇 개 더 있으니 차라리 그곳으로 가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류희겸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뜻에 따르겠다 대답하는 바람에 진혁위는 쓴웃음을 삼켰다. 이럴 때면 조바심을 낸 자신이 바보 같았다. 하지만 류희겸이 달리 마음을 먹었다면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무슨 약속을 지키겠다고 글을 남긴 것이냐?”
“다음 생에서 만나면 서로 알아보겠다고 한 것이요. 그리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맞다. 그랬지.”
짧은 한 줄의 글이 유서였다는 소리에 진혁위는 류희겸을 꽉 끌어안았다. 급박한 상황에 약속을 기억한 그가 사랑스러웠고, 또 안타까웠다. 초연하다 못해 세상에 미련이 없어 보이는 류희겸에게 소중한 것들을 잔뜩 만들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너만 있으면 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는 복수를 했고, 나는 너를 가졌으니 각자의 한을 풀었다. 다음 생은 없다 여기고 이 생을 살자. 같이 행복해지는 것이다.”
“……예.”
진혁위는 한 박자 느리게 대답한 류희겸의 심장이 거칠게 뛰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행복이라는 단어에 놀란 모양이었다.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용맹한 사내는 이렇게도 사랑스러웠다. 진혁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류희겸의 입술을 다시 찾았다.
이제는 행복할 일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