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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章 (13/22)

九章

이른 아침이었다. 시종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입던 류희겸은 잠시 멈칫했다. 한순간에 심장에서 치밀어 올라 얼굴로 훅 끼치는 열기가 생경했다.

“불편하십니까?”

“아니다. 계속하라.”

갑옷을 고정시키던 시종이 류희겸의 반응을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류희겸은 잠시 숨을 고른 다음에 손등으로 자신의 오른쪽 목을 슬쩍 눌러보았다. 평소보다는 약간 높은 열이 손등으로 전해졌다. 벌써 사흘째 미열이 계속되고 있었다.

타고난 강골인 류희겸은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금방 눈치채지 못했다. 건강한 체질이었기 평소에는 제대로 먹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어지간한 열이나 이상 증상은 다 사라지곤 했다.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창칼에 베여서 다치더라도 빨리 낫는 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요 며칠 동안 열이 살짝 올랐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친 곳이 있는 것도, 속앓이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감기를 앓은 것도 어릴 때 말고는 없어서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의심 가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 없던 이상 증상에도 옥안인에게 말하는 것이 망설여졌다.

한 달 전쯤이었다. 이른 조반을 먹은 후에 진혁위가 옥안인을 불렀다. 아픈 곳도 없는 류희겸에게 진찰을 받아보라고 했다. 당연히 옥안인은 아무 이상이 없다 머리 숙여 고하고는 물러났다.

류희겸은 무슨 일이냐고 진혁위에게 물었다. 가끔 진혁위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언행을 하곤 했지만 뜬금없이 진찰을 받으라고 하는 것은 이상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본왕은 귀비가 음인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환하게 웃은 진혁위는 아주 평연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는 류희겸의 귀에 화살처럼 박혔다.

류희겸은 그때의 충격을 다시 되새겼다. 음인이라고 했다. 진혁위가 양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류희겸 역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황제의 일곱 번째 아드님은 한 손으로 적의 목을 잡아 꺾을 수 있는 용력의 소유자였고, 사람을 위압할 수 있는 기백을 가졌다.

하지만 진혁위가 양인이기에 자신이 음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그랬기에 충격은 무겁고도 낯설었다.

널리 알려진 바에 따르면, 양인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 음인이 된다고 하였다. 전쟁터에서도 같은 침상을 쓰고 있으니 지극한 총애를 받고 있는 것은 맞았다. 지난 몇 달 동안 교합한 날짜를 따지면 자신이 음인이 되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뒤늦은 이해와 함께 류희겸은 또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언젠가 진혁위가 양위를 하고 서쪽으로 떠나자고 말했던 것은 농담이 아니었던 것이다.

묵직한 충격을 덤덤히 받아들인 류희겸은 말을 아꼈다. 물을 것과 따지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기가 어려웠다.

역사상 사내가 황후가 되는 일도, 태후가 되는 일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화진국에서 왔기에 대연국에 아무 배경도 없는 자신에게는 가당찮은 일이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가 황후가 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음인이 되어 아이를 가지는 것 자체가 상상이 가지 않았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다.

진혁위가 놀라지도 않느냐고 했을 때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만 답했었다. 무심한 귀비답다며 넉넉하게 웃은 진혁위가 미리 알고 있으라고 했다.

그때는 음인이 되는 것도, 아이를 가지는 것도 나중의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이유 모를 미열이 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음인이 되는 것이 무섭지는 않았다. 그저 이제는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했다.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느라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았다. 모든 것을 복수가 끝난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룬 그다음이, 이제는 커다랗게 덩치를 키웠다.

“흠.”

류희겸은 작게 숨을 들이쉬며 어지러운 생각을 저쪽으로 치워버렸다. 모든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특히 오늘은 딴생각을 할 여유 따위가 없었다. 조금 후에 있을 전투에서 계획대로만 된다면 진한재를 생포할 수 있었다.

여섯 번을 죽고 일곱 번을 사는 동안에 류희겸은 진한재를 죽이는 것에만 골몰했다. 그런데 진혁위는 진한재를 사로잡아 이유를 물으라고 했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남준해 장군의 무고가 밝혀진다면 신원 회복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단순히 복수만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고모부와 연림군의 억울함을 밝히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진한재를 생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곧 진혁위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완전 무장을 마친 모습이었다.

“왕야께 인사드립니다.”

진혁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류희겸은 당황하면서도 차분하게 인사했다. 류희겸이 갑옷 입는 것을 도와주던 시종 역시도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아직 준비를 마치지 못했군.”

“예. 금방 끝날 겁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나머지는 내가 하겠다.”

진혁위의 고갯짓에 류희겸의 시종이 조용히 물러났다. 그리고 시종의 자리에 진혁위가 서서 마지막 마무리를 하기 시작했다.

전투가 있는 날이면 진혁위는 더없이 바빠졌다. 그런 그가 일부러 찾아온 것은 분명 얼굴을 맞대고 말해야 하는 중요하고도 급한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조금 전에 태경에서 전서구가 왔다. 미리 말을 해두러 왔지. 전에 말한 대로 태자가 폐위되었다.”

“네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류희겸은 목소리를 키웠다가 입을 다물었다. 태경의 소식이 전쟁터에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보급품과 함께 오는 서신에는 한 달 전의 사건이 적혀 있기 마련이었다. 발 빠른 전령이 혼자 말을 달린다고 하더라도 사흘은 넘게 걸렸다.

진혁위는 태경에 있는 채제승과 전서구를 이용해 정보를 주고받았다. 빠르면 하루, 혹은 이틀이면 급박한 태경의 소식이 진혁위의 손에 떨어졌다.

태경에서 태자와 기왕은 서로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자는 실책을 거듭했다. 선주에서 양민들의 장원을 빼앗은 안용옥을 비호하다가 황제에게 질책을 들었다. 거기에 황후의 인척이 겨울 사냥터에 큰 덫을 깔아놓은 것도 문제가 되었다.

조태환이 군사 기밀을 빼돌려 태자에게 넘겼다고 자백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조태환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태자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적군의 총사령관인 진한재와 손을 잡은 것을 숨겨야 하는 태자는 조태환을 비호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얼마 전부터 조정이 태자를 폐위해야 한다는 논의로 시끄럽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직전 생에서 실책을 거듭한 태자가 폐위되었었다고 진혁위가 말해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어떻게 됩니까?”

“복잡하게.”

“왕야.”

“이전과 마찬가지로 황제께서 태자를 아주 내치지는 않았다. 방왕(芳王)이 되어 태경에 왕부를 받을 것이다. 사고를 많이 쳤으니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일 테지. 귀비도 눈치챘겠지만 황제께서는 적장자에게 제좌를 물려주려고 하신다. 하지만 태자를 폐위시키자 그것을 다르게 해석한 사람이 많았다. 당사자인 방왕이 그랬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기왕이 그랬지. 지금도 다르지 않을 테니 복잡해질 것이다.”

진혁위의 날카로운 설명에 류희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제가 가장 범용한 아들을 태자로 삼은 것이 이상하다 여겼다. 황자들을 대립하게 하여 황권을 강화시키려고 하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황제는 그저 적장자에게 제좌를 물려주고 싶어 그랬던 것뿐이란다.

류희겸은 황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 편애 때문에 가장 멍청한 아들을 후계자로 삼다니.

황자들 중에 가장 능력이 빼어난 것은 진혁위였다. 권력보다는 도락에 심취해 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문무를 두루 갖췄다. 대국을 보고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 그는 훌륭한 황제가 될 것이다.

자신이 살린 남자가 황제가 된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럴 때면 운명이라는 것이 있음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중요한 일전이 있으니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 약조한다. 그러니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지 마라.”

아무 말 없이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진혁위가 오해를 해버렸다. 류희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복잡한 일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진혁위의 말대로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한재를 살린 채로 붙잡아야 했다.

모든 생을 통틀어 가장 고대하던 순간에 진혁위의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또한 아까부터 자꾸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자신의 상태도 걱정되었다.

“다 되었다. 어디 보자. 귀비는 갑옷을 입어도 예쁘다.”

“예.”

“왜 이번에는 본왕에게 예쁘다고 하지 않느냐? 응?”

웃으며 물러나려던 진혁위가 장난스럽게 물어왔다. 꽃처럼 아름다운 사내는 전장 한가운데서도 눈부셨다. 그늘 없는 환한 미소가 햇살이 없어도 빛난다고 생각하던 류희겸은 술렁이는 마음에 살짝 당황했다. 간지러운 호의가 당연하듯 주어지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낯설었다.

“아닙니다.”

“얼굴이 굳어 있다. 잘될 것이니 힘을 빼라.”

굳어 있는 얼굴에 힘을 빼던 류희겸은 문득 어떤 충동에 휩싸였다. 말도 안 되는 것인데 그러고 싶어졌다. 류희겸은 다시 진혁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왕야.”

“그래. 무슨 일인지 말해 보아라.”

“한 번 안아봐도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끌어안는 것이요.”

“……뭐?”

“죄송합니다. 소인이 무례했습니다.”

진혁위의 반응이 좋지 않았기에 류희겸은 재빨리 사과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갑자기 끌어안고 싶다고 하면 이상하긴 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냐?”

“무엇을 말입니까?”

“하아. 내가 말을 말아야지. 좋다. 끌어안아라. 그게 무어 대수라고 사과를 해. 자. 팔을 벌려주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던 진혁위가 곧 태도를 바꾸어 활짝 웃으며 팔을 벌렸다. 류희겸은 천천히 다가가 진혁위를 끌어안았다. 서로 갑옷을 입고 있는 탓에 자세가 이상해졌지만 그래도 두 팔로 안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진혁위 역시 벌린 팔로 마주 안아 오는 바람에 류희겸은 웃었다. 자신이 먼저 안겠다고 했는데 결국은 그에게 끌어안긴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왜 갑자기 안겠다고 해?”

“그냥요.”

“뭐가 그냥이야? 귀비는 그런 성격이 아니잖아.”

“그러고 싶어서요.”

“그러니까 왜?”

“왕야께서 예뻐서 예쁘다고 하신 것처럼, 소인 역시도 안고 싶어서 그러고 싶다 하였습니다.”

언젠가 진혁위가 했던 말을 되돌려주며 류희겸은 소리 없이 웃었다. 정말 그랬다. 하고 싶으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숨쉬듯 네가 예쁘다고 하는 진혁위의 미의식에 관한 의구심이 풀리지 않았다.

“귀비가 그리하고 싶다면 해야지.”

“감사합니다.”

가볍게 대답한 류희겸은 팔을 풀고 물러났다. 그러자 진혁위가 단과자를 빼앗긴 아이처럼 부루퉁히 굴었다.

“안고 싶다며?”

“충분합니다.”

“겨우 이걸로? 본왕은 아니다.”

진혁위가 다시 안기라는 듯이 슬쩍 팔을 벌렸다. 그러나 류희겸은 그대로 공수하며 깊숙한 고개를 숙였다.

“영왕 전하. 무운을 비옵니다. 승전하시옵소서.”

정중한 인사는 비장하기까지 해서 진혁위는 웃고 말았다.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말랑해졌던 사내가 한순간에 딱딱한 무장으로 돌변했다.

이럴 때면 꼬리 아홉 개가 살랑거리는 구미호에게 홀린 것 같았다. 진짜 끌어안기만 하고 맨숭맨숭하게 물러나는 법이 어디 있냐고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귀비는 사람 홀리는 재주가 제법이다. 귀비의 무운을 빈다. 살아 패장이 되는 것보다 죽어 영웅이 되는 것이 낫다는 말은 거짓이다. 살아 영웅이 되면 그만이다. 이겨서 돌아와라.”

“명 받들겠습니다.”

“이번에는 나도 안아보자. 혼자만 만족하고 쏙 빠져나가다니.”

진혁위는 류희겸이 물러난 만큼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멀뚱히 서 있는 류희겸을 와락 끌어안았다. 다행히 류희겸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안겨주었다.

“태경에서 또 다른 소식도 왔지. 귀비가 금광을 사들이는 것을 보고는 익주에서 옥광맥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기억해 냈다. 지명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서 그걸 이번에 사들였지.”

“옥광맥이요?”

“그래. 귀비 덕분이지. 거기서 나온 가장 큰 옥을 귀비에게 주겠다.”

“감……사합니다.”

얼떨한 류희겸의 대답에 얼굴을 보지 않아도 당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빙그레 웃은 진혁위는 류희겸을 품으로 더 강하게 안았다.

이제는 나가셔야 한다며 물러나려는 류희겸을 붙잡고는 아직 시간이 있다며 버텼다. 눈치가 있을 거라면 다들 기다려줄 거라고 하자 류희겸이 더 강경하게 굴었다. 왕야께서 모두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얄미운 말을 엄격하게 했다.

진혁위는 고금의 군주들이 간쟁(諫諍)을 하는 대관들의 목을 잘라버리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류희겸의 목을 조르는 대신에 입술을 베어 물었다.

입술은 달콤했다.

*

늦겨울의 햇살은 창백했고 바람은 차가웠다. 류희겸은 목을 가려주는 목가리개를 끌어 올리며 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를 지켜보았다.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양국의 전세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검은 깃발을 든 화진의 군대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병력 차이도 차이였지만 병사들의 움직임이 달랐다. 특히 희일준이 이끄는 만화대의 활약이 눈부셨다.

“적 좌익이 와해되었습니다.”

“그렇군.”

옆에 있던 운문형의 설명에 류희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진의 좌익이 완전히 와해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중앙군이 분전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을 것 같았다.

류희겸은 중앙군 가운데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화진의 지휘관 무리를 주시했다. 류희겸 역시 눈은 제법 좋은 편이었다. 이리저리 뭉쳐 있는 작은 점들 중에 진한재를 구분할 수 있었다.

진한재는 문무에서 모두 뛰어났지만 야전 지휘관에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 또한 류희겸과 함께 실전을 겪긴 했다. 그러나 그의 전략과 전술은 너무 이상적이었고,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작전을 짤 때가 몇 번 있었다. 바로 이번처럼 말이다.

대군을 이끌고 진격하던 진한재는 몇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중에 하나가 병력을 분산시킨 것이었다. 병법에 따르자면 효율적인 보급을 위해 병력 분산은 필수 불가결했다. 문제는 분산시킨 병력의 집결지가 호양성의 코앞인 진월강이라는 점이었다.

조태환이 빼돌리려고 했던 기밀 작전이 진월강을 건너는 화진국의 군대를 기습한다는 것이었다. 화진국의 군대가 호양성에 도착하려면 반드시 진월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세운 작전이었다.

갈수기에 수위가 줄어든 진월강을 건너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분산된 군대가 차례로 도착하면 각개격파당하기 딱 좋았다. 이론과 현실은 달랐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소준염(蘇俊廉) 장군의 군대였다. 그는 강 너머에서 도발하는 대연국의 군대를 그냥 지켜보지 않았다. 몇백의 기병을 쫓기 위해 단독으로 강을 건넜다가 대패하였다. 소준염은 죽었고, 살아 돌아간 병력은 채 반도 되지 않았다.

병력을 분산시킨 화진국의 군대는 기병을 동원한 대연국의 기습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집결지에 도착한 병력은 처음보다 이 할이 넘게 줄었다.

화진국 병사들은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상태에서 지금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병력을 분산시키고 잘못된 집결지를 택한 결과가 지금 눈앞에서 펼쳐졌다.

충성을 바쳤던 조국이 패전하는 이유를 냉정하게 따지면서도 류희겸은 진한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진한재의 바보 같은 전술을 반대할 장군이 곁에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백했다. 인재를 아끼고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던 진한재가 변한 것이다. 한때 주군으로 모셨던 자의 변모에 씁쓸해졌다.

“중앙군이 밀립니다.”

유독 눈이 좋은 운문형이 시시각각 바뀌는 전황을 알려주었다. 류희겸 역시 화진국의 지휘부가 물러나는 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긴장을 끌어올렸다.

“퇴군합니다.”

“나도 보았다.”

운문형의 말에 류희겸을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백여 명의 진화대 기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준비!”

류희겸이 크게 소리치자 모두 일사불란하게 말에 올랐다. 이번 전투의 목표 중 하나가 화진국의 총사령관인 진한재를 사로잡는 것이었다. 패퇴하는 화진국의 지휘부를 진화대가 몰이하면, 길목에 대치하고 있던 류희겸이 진화대의 정예들과 함께 급습하는 작전이었다.

진화대 기수들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 백여 명을 류희겸이 지휘하게 된 것은 진혁위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이었다. 내부에서 반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류희겸의 실력을 아는 진화대의 기수들이 반대하지 않았기에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믿음에 반드시 보답할 생각이었다. 진혁위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라도 무조건 진한재를 붙잡을 것이다.

각오를 다진 류희겸은 전황을 주시했다. 몰이당한 진한재의 무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한겨울의 산은 헐벗고 있었지만 능선에 숨어 있는 류희겸과 진화대의 모습은 저쪽에서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거리를 가늠하고 있던 류희겸은 곧 출발할 거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진한재의 얼굴이 또렷하게 확인되는 순간에 벼락같이 뛰쳐나갔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경로를 가로막으며 진화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꽁지 빠지게 도망치던 화진국의 지휘부들이 깜짝 놀라며 진월강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쪽에서도 숨어 있던 진화대가 길을 막았다. 사면초가의 순간에 두 번이나 멈칫한 것은 도주의 실패를 의미했다.

주인을 도망치게 하려고 진한재의 호위들이 분전했다. 하지만 류희겸은 덤벼드는 적들을 하나씩 제거하며 진한재만을 주시한 채 앞으로 내달렸다.

진한재의 준마는 호위와 장군들을 따돌리며 앞으로 죽죽 나아가고 있었다. 평범한 군마로는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

“먼저 가겠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류희겸은 자신을 호위하던 운문형에게 소리치며 말을 몰았다. 류희겸의 말은 금을 주고도 사지 못한다는 한혈마로 진한재를 뒤쫓기 충분했다. 단숨에 진한재를 따라잡자 류희겸은 한혈마를 선물해 준 진혁위에게 절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한재!”

류희겸은 목이 찢어져라 진한재를 불렀다. 힐끗 뒤를 돌아본 진한재가 더욱 속도를 높였지만 류희겸은 당황하지 않고 창을 휘둘렀다. 진한재가 검으로 창을 막았지만 무위는 류희겸이 한 수 위였다.

몇 합의 부딪침 끝에 진한재의 검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동시에 류희겸의 거창은 진한재가 아니라 그가 타고 있던 말의 뒷다리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몇 걸음 내달리던 말은 결국 고꾸라졌고 진한재 역시 낙마하여 땅을 굴렀다.

진한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며 류희겸은 지체 없이 말에서 내렸다. 진한재는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충격이 큰 듯 자세가 엉거주춤했다. 투구가 벗겨지고 흙먼지가 묻은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이 배신자가!”

류희겸은 진한재가 자신을 무어라 부르든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 기세는 승냥이의 얼굴을 후려치기 직전의 호랑이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래. 죽여라!”

독기를 품은 눈으로 진한재가 비장하게 외쳤다. 류희겸은 창을 휘둘러 진한재의 턱을 후려쳤다.

퍽. 무거운 타격음에 이어 진한재가 정신을 잃고 넘어갔다. 바닥에 쓰러진 진한재를 내려다보던 류희겸은 이를 악물었다.

“드디어…….”

류희겸은 환희의 탄식을 내뱉었다. 드디어 진한재를 붙잡았다.

작은 안도와 동시에 여섯 번의 죽음이, 감옥 안에서 무시로 일관하던 진한재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진한재를 보고 있자니 당장에 쳐 죽이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원한은 깊고도 어두웠다. 몇 번이나 생을 반복하며 바라고 바랐던 진한재의 죽음을 드디어 실현시킬 수 있었다.

지난 여섯 번의 실패로 인한 불안이 충동을 증폭시켰다. 어쩌면 진한재가 자신처럼 도망칠지도 몰랐다. 시간을 끌었다가 화친의 상징으로 화진국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류희겸은 충동을 억눌렀다. 저 빌어먹을 놈이 고모부를 모함한 이유를 밝혀내야 했다. 그래야 고모부의 누명을 벗기고 신원을 복원시킬 수 있었다. 진한재를 죽이는 것은 그다음이라도 늦지 않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운문형이 달려왔다. 류희겸은 운문형에게서 밧줄을 받아 진한재를 단단히 묶었다.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한재에게서 원하는 것을 알아낼 때까지는 자결 따위는 못 하게 해야 했다.

류희겸은 이제 무서울 것이 없었다.

*

진월강 전투에서 대승한 대연국의 진영은 분주했다. 부상자를 나르고, 시신을 수습하고, 전리품을 챙기자 해가 졌다.

어둠이 내려앉은 대연국의 숙영지는 밤이 깊도록 소란스러웠다. 일찍 잠들지 않고 불을 피우고 승리를 자축하는 병사들의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급한 업무를 끝낸 진혁위는 희범영을 찾았다. 숙영지를 한 바퀴 돌고 왔다는 희범영에게서는 희미한 술 냄새가 났다.

“병사들이 주는 술을 마셨나 보군요.”

“예.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승전의 밤이니 몇 잔 마시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리고 장군은 술에 강하니 괜찮을 겁니다.”

진혁위는 희범영이 술을 마신 것을 개의치 않았다. 숙영지를 돌다 보면 병사들이 술을 한 잔씩 내밀게 마련이었다. 명장이라면 사기를 위해서라도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거절할 줄 알아야 했다. 거기다 희범영은 술이 꽤 강했으니 실수할 일도 없었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차를 한잔 얻어 마시러 왔지요. 괜찮지요?”

“물론입니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희범영의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부관이 물러났다. 희범영의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도락이 차였다. 그는 값비싼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차를 즐기는 시간 자체를 좋아했다.

차가 나오기까지 두 사람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양성을 되찾고 화진국의 황군을 격파했으니 이제 군대를 해산시키고 태경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승전을 알리고 귀환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기까지 군율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을 주고받는 사이에 차가 나왔다.

승전 후에 마시는 술만큼이나 느긋하게 마시는 차도 각별했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나서 먼저 입을 연 것은 희범영이었다.

“소장이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요?”

“화진의 숙왕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주제넘은 발언이지만, 그는 포로로 쓸모가 없습니다. 오히려 애물단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직접적이고 간결한 간언에 진혁위는 쓴웃음을 지었다. 희범영의 말은 모두 옳았다. 적국의 황족은 포로라고 해도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 했다. 황족의 몸값을 받고 돌려보내는 과정이 지난한 만큼 진한재는 까다로운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처우는 본왕의 귀비에게 달려 있지요. 아마도 며칠 안에 명을 다할 것입니다.”

“귀비 마마의 원수라고 알고 있습니다. 포로가 잘못되면, 귀비 마마께서 곤란해지실 수도 있습니다.”

“원수와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법이지요. 본왕이 황제께 말씀드렸더니, 감읍하게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희범영은 며칠 전에 있었던 작전 회의 시간을 떠올렸다. 진혁위가 류희겸에게 별동대를 맡기고, 화진국의 총사령관을 놓치지 말라고 명했다.

내부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류희겸의 출신은 여전히 걸림돌이었고 단독으로 병력을 운용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발언도 있었다.

하지만 진혁위는 강경했다. 류희겸과 화진국의 총사령관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라고 확언하며,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진혁위는 류희겸에게 단호한 지지를 보냈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믿음에 확실하게 보답했다. 화진국의 지휘부가 경로를 따라 퇴각하도록 몰이를 하고 화진의 총사령관을 사로잡았다.

희범영이 알기로 류희겸과 진한재는 사촌지간이었다. 그러나 류희겸이 불에 타 죽었다고 한 것이 진한재였다. 그런 두 사람이 원수라면 피 맺힌 사연이 있다는 의미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복수를 위해 인생을 내 건 이들을 여럿 보았다. 하지만 고국에서 쫓겨나, 노비로 전락하였다가, 친왕의 귀비가 되어, 끝끝내 원수를 제 손으로 잡은 류희겸의 인생은 굴곡지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했다.

희범영은 말을 아끼면서도 선의를 베푸는 데 서슴없는, 그리고 신들린 솜씨로 거창을 휘두르는 류희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복수에 성공한 류희겸을 축하해 주어야 했다.

“귀비 마마께 독주를 선물하겠습니다.”

원수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은 보통 독주인 법이었다. 희범영의 의도를 알아들은 진혁위는 웃었다.

“귀비가 좋아하겠군요. 장군을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장군에게 긴히 할 말이 있거든요.”

“말씀하십시오.”

“우선은 태자가 폐위되어 방왕이 되었습니다. 태경에 왕부를 받았고 며칠 내로 태자부에서 나간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걸…….”

“오늘 아침에 도착한 정보입니다. 장군께 알리고 싶은 것은 따로 있습니다. 희일준의 혼처를 빨리 찾는 게 좋을 겁니다. 태경으로 돌아가기 전에 혼약을 했다는 소리가 나와야 합니다. 방왕이 희일준의 장인이 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방왕의 장녀가 곧 있으면 열넷이거든요. 어리기는 하지만 황가는 일찍 혼인하는 편이니 적당한 나이지요. 적녀는 아니지만 황후가 매우 귀애하여 군주로 봉해진 지 오래이니 객관적으로 보자면 괜찮은 조건입니다. 혼약자가 있는 게 아니면 거절하기도 애매하지요. 무엇보다 황제 폐하의 허락이 떨어지면 거절 자체를 할 수 없게 됩니다.”

“……?!”

“거의 확실합니다. 폐태자와 사돈이 되지 않으려면 빨리 움직여야 할 겁니다.”

진혁위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희범영에게 확신을 담아 말했다. 방왕에게 심어둔 간자는 적극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내부 정보를 잘 빼내 왔다.

방왕은 최근 조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왕에 비해 무력이 부족한 데다 태자라는 지위까지 잃게 된 방왕은 희일준과 희범영으로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방왕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황후의 조언이었다. 아직은 망설이고 있는 단계라지만 방왕이 황제에게 허락이라도 받는다면 거절 자체를 할 수 없게 된다.

지난 생에서 자신의 실책으로 죽음을 맞이한 희범영을 이번 생에서는 지켜냈다. 진혁위는 희범영이 그저 살아만 있어도 좋았다. 그래도 방왕의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진혁위는 희범영의 대답을 기다리며 느릿하게 차를 마셨다. 희범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수하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운 좋게 정보를 들어서 다행이지요. 방왕이 희일준의 장인이 되었다가는 장군이 말라 죽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합니다.”

가벼운 진혁위의 말투는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희범영은 자신의 선택에 기로에 놓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장이 무례한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말하시지요.”

“제좌를 가지실 겁니까? 전하께서 뜻을 보이지 않고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셨으나, 그것이 방도가 되지 않음을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방왕 전하와 기왕 전하. 두 분 중에 어느 누가 천자의 자리에 앉으신다면 전하께오서는 천수를 누리지 못하실 것입니다. 소장의 성정이 이러하여 말이 거친 것을 용서하십시오. 허나 전하께서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전하께서 뜻이 있으시다면 소장이 한 팔 거들 기회를 주십시오.”

희범영과 방왕의 연결을 막으려고 했던 진혁위는 뜻밖의 상황에 놀라고 말았다. 그래도 희범영의 성격상 떠보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장군의 말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발버둥을 쳐야 할 때죠. 하지만 지금 날 따르겠다고 하면 장군이 곤란해질 텐데요.”

“이미 사람들은 소장을 전하의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곤란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가요?”

“전하께서, 그리고 귀비 마마께서 몇 번이나 저와 조카를 살리셨습니다. 주군께서 살려주신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진혁위를 주군이라 칭한 희범영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태경에서는 방왕과 기왕의 대립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었다. 권력에 눈이 먼 이들은 제각각 줄을 서기 바빴다. 하지만 시류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방왕과 기왕이 아니라 영왕 진혁위를 가까이했다.

사실 희범영은 어느 누구도 지지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처럼 희일준을 데리고 변방을 떠돌며 권력 다툼에 휩쓸리지 않으려고만 했다. 고지식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고 희일준의 목숨을 구해준 진혁위를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은혜 갚기만은 아니었다. 범용한 방왕과 폭급한 기왕에게는 제왕의 자질이 없었지만 진혁위는 달랐다.

전쟁터에서 진혁위가 보여준 능력은 눈부셨다. 편곤을 휘둘러 적을 쓰러트리는 무력보다 그의 용인술이 더 눈에 띄었다.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한 것은 물론이요, 거친 성정의 장수들을 어르고 달래다가도 상벌은 명확했다. 성격이 급하기로 유명한 양위조(梁偉趙) 장군조차 진혁위 앞에서만큼은 얌전해졌다.

사람을 제대로 쓰는 것은 제왕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었다. 방왕이나 기왕이 아닌, 진혁위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믿음으로 변하였다.

반면에 진혁위는 얼떨떨했다. 계속해서 호의를 쏟아붓기는 했지만 고지식한 희범영의 마음을 쉬이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진혁위가 희범영을 쓸 일은 훨씬 나중에 계획되어 있었다. 그래도 충직한 희범영이 자신의 사람이 되어준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도 없었다.

“많이 곤란해질 것이니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겁니다. 이만 일어나세요.”

“감사합니다.”

희범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았다.

“이리되었으니 장군에게 위험한 청을 할 수 있겠군요. 나중에 말하려고 했는데, 이번 기회에 해야겠습니다.”

“예. 하명하십시오.”

“귀비의 양부를 계속 찾고 있는데, 눈에 차는 사람이 몇 없어서요. 장군에게 청하고 싶으나 잘못하면 나나 장군이나 함께 눈밖에 날 것 같아서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당장에 양부가 되어달라고는 못 하지만, 나중에 뜻을 이루고 나면 괜찮겠지요.”

진혁위는 활짝 웃으며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던 말을 꺼냈다. 류희겸에게는 좋은 양부모가 필요했다. 희범영이라면 류희겸의 힘이 되어줄 것이다.

“소장에게 과분한 일입니다. 게다가 소장은 혼인을 하지 않아 내자가 없습니다.”

“장군의 내자가 아니라 장군의 인품과 명성을 보고 청하는 일이니 혼인 여부는 상관없지요. 그리고 안쪽 일은 고모님이 도와주실 겁니다. 고모님이 귀비를 아끼거든요. 매번 짐을 잔뜩 보낸답니다. 귀비가 입고 있는 모피로 된 쾌자는 모두 고모님이 보내신 것이지요.”

진실로 진윤홍은 류희겸을 아꼈다. 마치 친아들이 전쟁터에 나간 것처럼 먹고 입는 것을 챙겨 보냈다. 두 사람이 즐겨 마시는 차인 울금훤은 떨어질 일이 없었다. 류희겸도 진윤홍에게 깍듯이 굴었다. 매번 무탈히 잘 지낸다고 서신을 보냈다.

처음 진혁위의 계획은 진윤홍을 류희겸의 양모로 모시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희범영을 끌어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희범영이 이렇게 나오면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진윤홍을 언급하자 희범영이 굳은 얼굴로 당황했다. 그가 흔들릴 것을 예상한 진혁위는 압박을 가하는 대신에 슬쩍 물러났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나중의 일이니 천천히 생각하면 됩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뜻을 이루고 다 좋아지면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진혁위는 거절하지 말아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대신에 빙그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월하노인의 재주는 없지만, 그래도 희범영이 승낙하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

“나, 나는 이제 아는 것을, 으으. 아는 것을 다 말했다…….”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던 임약원이 의자에 묶인 그대로 축 늘어졌다. 류희겸은 피투성이가 된 채 정신을 잃은 임약원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류희겸은 당장에 진한재를 찾지 않았다. 대신에 진한재의 최측근인 임약원부터 심문했다.

충정이 깊은 임약원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지만 고신 앞에서는 강직한 장군도 어쩔 수 없었다. 임약원은 진한재가 벌였던 일들을 모두 토해 냈다.

임약원은 남준해 장군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 진한재가 맞다고 소리쳤다. 그 이유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황제는 젊어서 절명한 능왕을 잊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황제는 남준해에게 능왕의 사인을 조용히 알아보라는 밀명을 내렸다. 남준해는 능왕의 동생인 채왕과 함께 과거 능왕부의 가솔들을 은밀히 조사하고 다녔다.

능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진한재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당연했다. 능왕의 심복 하나를 매수하여 독을 쓴 것이 들통날까 두려워 남준해와 채왕을 역모로 몰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류희겸까지 죽이려고 한 것은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였다.

너무 충격적인 내용이라 처음에는 임약원이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고신을 받으며 거짓된 이야기를 꾸미고 있다기에는 앞뒤 정황이 너무 들어맞았다.

류희겸은 머리 한쪽으로 임약원을 먼저 고신한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진한재라면 죽어도 입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간교한 머리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냈을 게 분명했다.

이성적인 판단과 별개로 끔찍한 진실에 머리가 멍해지고 말았다. 너무 화가 나서 바닥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이…….”

분노는 천천히 차올랐다. 류희겸은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연주성 감옥에서 왜 그랬느냐고 따져 물었을 때, 진한재가 끝끝내 입을 다물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능왕을 죽였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남준해와 채왕에게 역모의 누명을 씌웠다는 것을 제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성인군자의 얼굴을 하며 모르는 척하던 그를 떠올리니 역겨워졌다.

아프도록 꽉 쥔 주먹을 펼 생각을 하지 못한 류희겸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숙영지 한쪽에 포로를 가둔 감옥에는 생포한 화진국의 지휘관들이 갇혀 있었다. 류희겸은 고의적으로 그들에게 임약원이 고신을 받고 자백하는 것을 지켜보게 했다.

사실 류희겸이 의도했던 것은 진한재가 남준해와 채왕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것을 포로들에게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고모부님이 무고하다는 것을 알리려면 자신 혼자 떠드는 것보다는 확실한 증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역모의 누명을 씌운 이유까지 더해지니 의도했던 것 이상이 되었다.

진한재의 사람이든 아니든, 저마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임약원의 입에서 나온 진한재의 죄는 황제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이로써 진한재를 파멸시킬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를 제대로 치료해 주어라. 죽어서는 안 된다.”

고신을 집행한 옥리에게 은전이 든 전낭을 던지며 명령을 내린 류희겸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흉흉한 기세로 감옥을 나가는 류희겸을 뒤따르는 사람은 운문형과 고영수였다. 그들은 진혁위의 명령으로 류희겸을 밀착 호위하고 있었다.

“마마. 이제 숙소로 돌아가시죠.”

“맞습니다. 이제 쉬셔야 합니다. 달을 보니 해시(亥時)가 된 듯합니다. 왕야께서 기다리실 겁니다.”

운문형과 고영수가 서로 한목소리로 류희겸을 말렸다. 그러나 류희겸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림의 은원에 익숙한 운문형도, 방왕에게 원한이 있는 고영수도 모두 류희겸의 마음을 이해했다. 주군으로 모셨던 이의 배신으로 역모죄를 뒤집어썼으니 이가 갈릴 만도 했다. 하지만 밤이 너무 깊었다. 오늘 전투를 치룬 류희겸은 이제 쉬어야 할 때였다.

운문형의 눈짓에 고영수가 진혁위를 찾아 움직였다.

*

진한재가 갇혀 있는 곳은 숙영지의 외곽이었다. 막사를 하나 온전히 그에게 준 것은 황족으로서의 대우였다. 하지만 실제 막사 안에는 네모난 철장이 놓여 있었고, 진한재는 그 안에 있었다. 그리고 막사 밖은 병사 다섯이 삼엄하게 감시하는 중이었다.

생포한 진한재의 처벌과 처우에 대한 권한은 온전히 류희겸에게 있었다. 그랬기에 밤이 늦은 시간이었지만 진한재를 대면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막사 안으로 들어선 류희겸은 철장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진한재를 볼 수 있었다. 컴컴한 내부를 희미하게 밝히는 등불과 철장은 연주성 감옥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와는 서로의 입장이 정반대였다.

“진한재.”

류희겸은 그때 진한재가 그랬던 것처럼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진한재가 눈을 떴다.

그에게는 최소한의 옷만 주어졌고 무기가 될 수 있는 금속 장신구는 모두 압수되었다.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 양발목에는 철로 된 족갑이 채워져 있었다. 낙마해 땅을 구른 탓에 얼굴에는 작은 생채기가 가득했다. 류희겸에게 얻어맞은 턱에도 멍이 생겼다.

겨우 한나절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친왕의 위엄은 사라지고 초췌함만이 가득했다. 그래도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황족에 대한 예우가 형편없군.”

류희겸은 대꾸하지 않고 진한재를 가만히 보았다. 매번 생을 다시 살면서 제일 처음 보게 되는 얼굴이 바로 진한재였다.

진한재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악에 받쳤다. 이유 불문하고 그를 죽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를 죽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천지신명께 빌고 빌었다.

복수를 위해 발버둥 쳤던 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칼에 찔려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져, 사약을 마시고 발버둥을 치다 숨이 끊어졌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형제이자, 친구이자, 그리고 주군이었던 그를 이렇게 만나기 위해. 죽이기 위해.

“날 어쩔 셈이지?”

이번에도 류희겸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하지 못했다. 분노에 찬 자신이 바보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자신을 방해할 것은 이제 없는데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이제는 진한재를 죽이고 끝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고모부의 누명을 벗기고 신원을 복원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냉정해져야 했다. 뜨거운 원망에 잡아먹힐 것이 아니라 차갑게 분노해야 했다.

지금처럼 흥분에 겨워 진한재를 마주 보았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굳은 몸이 쉬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저 얼굴이 일그러질 때까지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참아야 한다. 진한재의 입으로 사실을 말하게 하고, 화진의 황제에게 사실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남준해의 누명을 알게 해야 한다. 류희겸은 깊게 호흡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자 진한재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헛짓하지 말고 죽여라.”

당당하기까지 한 진한재의 요구에 류희겸은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아는 진한재는 죄를 인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무 준비도 없이 그의 죄를 추궁하는 것은 모든 것을 어그러뜨리는 행동이었다.

“기억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고 했던 것을.”

“고국을 배신한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이십 년을 친구로 지냈기에 서로를 향한 말투는 막역하면서도 사나웠다. 류희겸은 잇소리를 내는 진한재를 향해 덤덤히 말했다.

“나는 네가 황제가 되길 바랐다.”

“그런데 왜?!”

진한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분노가 담긴 목소리에는 초조함도 섞여 있었다. 류희겸은 실소가 나오는 것을 참았다. 연주성에 갇혔던 자신만큼이나 진한재도 이유를 알고 싶어 하고 있었다.

잔인하고 유치한 복수심에 류희겸은 그대로 뒤돌아 막사를 나왔다. 차가운 밤바람이 얼굴에 닿고서야 자신이 얼마나 열을 내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이런 상태로 헛소리를 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깊게 숨을 내쉰 류희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흥분하기보다는 침착해야 했다. 그래야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었다.

“왜 그리 서 있느냐?”

무거운 머리로 방법을 궁리하던 류희겸은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렁이는 화톳불 옆에 진혁위가 서 있었다. 왜 그가 여기에 있지?

진한재와 포로들을 가둔 막사는 숙영지 외곽에 위치해서 진혁위의 숙소와는 거리가 제법 있었다.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진혁위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왕야?”

“그래. 이리 와라.”

류희겸은 진혁위의 손짓에 홀린 듯이 가까이 다가갔다. 선 채로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진혁위가 맞았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진혁위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자 류희겸은 왠지 모르게 안도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막막함이 밀려들 때마다 진혁위가 나타났다. 마치 하늘에서 어떤 조화를 부리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떨렸다. 불행히도 사방이 고요했기에 떨림이 모두 전해졌다.

“밤이 늦도록 귀비가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귀비도 없이 혼자서 밤을 쓸쓸하게 지새울까 봐 이리 달려왔지.”

“죄송합니다.”

그제야 류희겸은 진혁위의 뒤에 서 있는 고영수를 알아보았다. 안 보인다고 했더니 그가 진혁위를 데리러 갔었나 보다.

“꽃 같은 얼굴이 많이 상했다. 왜 그러느냐? 저놈이 헛소리를 해? 본왕이 혼내줄까?

부드러운 진혁위의 목소리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그것과 닮아 있었다. 저놈이 괴롭혀? 때려줄까? 유치한 위로인데 어째서인지 기분이 가벼워졌다.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얼굴이 안 좋다니까.”

“제 얼굴이 어떻습니까?”

“피곤해 보여. 따뜻한 걸 마시러 가자. 씻고, 옷도 갈아입고, 그리고 잠도 자고. 잘 먹고 잘 자야 힘이 나는 법이다. 가자.”

여전히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거슬리지 않았다. 류희겸은 진혁위가 잡은 손을 따라 순순히 끌려가 말에 올랐다.

*

숙소에 도착하자 진혁위는 시종들에게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따뜻한 꿀차를 마시고, 씻고, 옷까지 갈아입은 류희겸은 말쑥한 모습으로 침상 끝에 앉은 진혁위 앞에 섰다.

“이제야 괜찮아 보이는군.”

“예.”

“얼른 자라.”

진혁위가 침상을 가리켰지만 류희겸은 버티고 섰다. 그러자 진혁위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왜 그러느냐?”

“진한재는, 그는 형제를 죽인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고모부에게 역모의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래. 영수에게 들었다. 나쁜 놈이다. 그렇지?”

류희겸은 빤히 진혁위를 보았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쉬이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저놈이 나쁜 놈이 맞다고. 믿음을 배신했다고. 단매에 죽이고 싶다고. 토해 내고 싶은 마음이 가라앉았다가 치솟기를 반복했다.

진한재처럼 황제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남자가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진혁위는 황제가 될 것이다. 무환행궁에서 스스로의 목에 칼을 찔러 넣어 죽음을 맞이했을 남자의 운명을 바꾼 것은 자신이었다.

언젠가 진혁위가 폭군이었다고 한 것이 기억났다. 생을 다시 살고 있으니 똑똑한 남자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혁위에게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생각이 정돈되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뒤섞였다. 답답한 마음에 류희겸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날과는 반대로군. 하늘이 고난과 시련을 주는 것은 큰일을 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했었지. 설마 기억 안 나느냐?”

“……납니다.”

“그전까지는 시련이고 뭐고 다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게 팍팍하니 그럴듯한 말을 가져다 붙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네 말에 한번 믿어보자고 생각했지. 고난에 의미가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버틸 만했다.”

류희겸은 멍하니 진혁위를 보았다. 직전 생에 희범영을 잃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진혁위에게 어설픈 위로를 했다. 맹자 고자장의 말을 빌어, 당신의 시련과 고난에 의미가 있을 거라고.

지금은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웃기게도 그게 위로가 되었다. 정확히는 괜찮을 거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딱하게 막혀 있던 가슴 가운데가 천천히 따뜻해졌다.

“너는 하늘이 주신 시련도 고난도 모두 이겨냈고, 원하는 것을 쟁취했다. 슬퍼하지 말고 기뻐해라.”

마지막은 진혁위다운 위로였다. 그의 말대로 원하는 것을 쟁취하였다. 환희로 물든 기쁜 날이었다.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된 슬픈 날이기도 했다.

류희겸은 웃음이 나오는 것과 별개로 뜨거워지는 눈을 손으로 눌렀다. 결코 눈물이 많은 편이 아닌데, 진혁위 앞에서는 어째서인지 눈시울이 붉어질 때가 자주 생겼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바보처럼 울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는 울어도 된다.”

“안 웁니다.”

“귀비는 단단하기가 차돌멩이 같다. 그러나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울고 싶을 때 참으면 병 된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느냐?”

감동을 주고도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말투에 류희겸은 눈에 힘을 주고는 손을 내렸다. 다행히 먹먹했던 머리가 조금 돌아가면서 그에게 무엇을 물어야 할지 가닥이 잡혔다.

벌겋게 충혈되었을 눈이 볼썽사나울 테지만 별수 없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황제가 되실 겁니까?”

“그래. 황제가 되어 귀비를 황후로 삼을 것이다. 왜? 황제가 되지 말까? 둘이서 같이 먼 서쪽으로 떠나버려?”

무거운 물음은 가볍게 되돌아왔다. 류희겸은 오늘 아침과 다름없이 환하게 웃는 진혁위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여기서 자신이 고개를 끄덕이면 진혁위는 모든 것을 다 두고 서쪽으로 갈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진혁위가 버린 제좌를 가질 사람이 방왕이나 기왕이었다가는 세상 끝까지 쫓길 것이고, 남은 사람들도 위험해졌다. 무엇보다 진혁위가 제좌를 가지는 것이 옳았다.

류희겸은 자신이 욕심을 부리고 있음을 알았다. 진혁위는 어디서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가 천명을 받았다고 믿고 싶었다. 진한재를 죽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진혁위를 살리고 황제가 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하늘이 자신에게 준 시련이라고 말이다.

“서쪽으로 가지 마십시오.”

“그럼?”

“황제가 되시면, 없는 죄를 만들어 신하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조해 주십시오.”

순백의 꽃 위에 세워지는 나라는 없다. 어디에서나 피는 흐른다. 그래도 진혁위가 황제가 된다면, 부디 아무 죄도 없는 이를 몰아세워 죽이는 일은 없기를 바랐다. 어려운 부탁에도 진혁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었다.

“귀비의 청은 어렵지 않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사람은 없고, 티끌처럼 작은 먼지로도 신하를 벌할 수 있다.”

“예. 티끌만 한 먼지도 죄가 됩니다. 그래도 성군은 작은 먼지의 진위를 따질 테지요. 칭송받는 성군이 되십시오.”

군주의 마음에 따라 신하의 죄의 무게가 달라진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성군이라면 제 신하를 엄히 살피고 아낄 것이다.

“하하하. 칭송받는 성군이 되라니. 그건 또 처음 들었다. 그래. 귀비가 그리 청하니 성군이라는 것이 되어보겠다. 천지신명께 맹세한다. 자, 이제 누워라. 귀비가 자는 것을 봐야겠다.”

한결같은 진혁위의 명령에 침상에 누우려던 류희겸은 멈칫했다. 진혁위는 갑옷을 벗긴 했지만 아직 편복 차림이었다. 허리에 차고 있는 옥패도 풀지 않았다.

“왕야께서는 안 주무십니까?”

“귀비가 잠드는 것부터 보고. 왜? 잠이 안 올 것 같으면 손이라도 잡아줄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류희겸은 얼른 이불을 덮고 누웠다. 혹여 잡힐까 양손을 이불 아래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진혁위가 너무하다고 웃으면서 투덜거렸지만 모르는 척했다.

화로를 피워둔 숙소 내부는 따뜻하고 이불도 포근했다. 눈을 감았지만 머리에서는 진한재와 함께 한 온갖 기억이 떠오르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염세 시찰을 하기 직전에 진한재와 바둑을 두었다. 서로 이기고 지기를 반복하던 바둑에서 그날은 진한재가 이겼다. 류희겸은 남해에서 유명한 상아로 만든 바둑돌을 선물로 사 오겠노라고 약속하며 헤어졌다.

류희겸은 잠을 청하다 말고 눈을 떴다. 죽여버리고 싶은 놈인데, 그놈과 함께 한 추억이 너무 많았다.

한숨을 내쉬며 눈을 깜빡거리고 있자 갑자기 커다란 손이 시야를 가렸다가 사라졌다. 옆을 보자 진혁위가 눈을 빛내며 노려보고 있었다.

“왜 감았던 눈을 떠?”

“생각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생각이 많아서?”

“여러 가지 것들이요.”

“귀비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것들이 무엇인지 말을 해주어야지.”

류희겸은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빤히 바라보고 있는 진혁위 때문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힘들이지 않아도 진한재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소인이 격구 연습을 하다가 오른쪽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습니다. 열네 살이었습니다. 다리가 부러지니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무료하게 침상에 누워 책을 보고 있었는데, 진한재가 꽃이 만발한 커다란 매화나무 가지를 꺾어 문병을 왔었습니다. 겨울이었거든요. 홍매화가 가득 피어 있었지요. 예. 그와 많은 것을 함께 했습니다.”

“지금 다른 남자 때문에 잠을 설친다고 고백하는 거지? 지아비가 눈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왕야.”

이상한데 꽂혀서 투덜거리는 진혁위 때문에 류희겸은 난감하면서도 기가 막혔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 막 일어나 앉으려는데 진혁위의 손에 저지당했다.

“일어나지 마라.”

“그런 거 아닙니다.”

“누가 모르느냐. 안 자고 버티면서 이상한 소리나 하니까 속이 쓰려서 그렇지. 옥안인을 불러 편히 잘 수 있는 약을 지으라고 해야겠다.”

“바쁜 사람을 부르지 마십시오.”

전투가 끝난 다음이었다. 진혁위의 개인 의원으로 종군한 옥안인도 오늘만큼은 다친 병사들을 치료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옥안인의 손짓 한 번에 목숨을 구할 이가 수두룩한데, 겨우 잠 좀 편히 자자고 방해할 수는 없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원수가 되는 것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 좋았던 것을 애써 잊지 마라. 부정하면 심화만 깊어지고 병을 얻을 수밖에 없다. 어찌 아냐면 본왕이 그러했거든.”

“……?”

“잊지 못하고 붙잡고 있었더니 울화병을 얻었다. 이전에 말이다.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어. 그러니 귀비는 본왕에게 잘해주어야 해. 그렇지. 잘해준다고 약조도 하지 않았더냐.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잠시 기억을 더듬은 류희겸은 조용히 대답했다. 진혁위에게 잘해주겠다고 하였을 때는 직전 생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오해가 풀리지 않았더라면, 자신과 진혁위의 관계는 악연으로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회귀하여 다시 생을 반복하는 것이 지금만큼은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그래. 기억하면 되었다. 이제는 진짜 자라. 손 잡는 것은 싫다고 하니 다른 수가 없다. 가만히 있어라.”

가볍게 경고한 진혁위의 커다란 손이 류희겸의 눈을 덮었다. 몇 번이고 있어왔던 일이기에 류희겸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의 손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순순히 눈을 감았다.

진혁위의 손이 눈을 가리자 완벽한 어둠에 묘한 안도를 느끼며 천천히 긴장이 풀렸다. 그러다 문득 진혁위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었다. 충동은 곧 소리가 되어 나왔다.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하다는 것이냐?”

진혁위의 목소리는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작았다.

“이것저것, 다요.”

“이런. 정말 나는 쉬운 남자다. 고맙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지잖아.”

웃음기가 담긴 진혁위의 한탄에 류희겸도 따라 웃었다. 무어라 대꾸하고 싶은데 순식간에 밀려드는 졸음에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의식을 놓아버렸다.

그렇게 류희겸이 고르게 숨을 쉬는 것을 한참 확인한 진혁위는 조심스럽게 손을 치웠다. 류희겸은 잠시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잠에서 깨지는 않았다. 혹시나 해서 은은하게 피워둔 수면향이 제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고집은 세서.”

입을 가볍게 벌리고 잠든 류희겸을 보며 진혁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돌멩이처럼 단단한 남자는 쉬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분노와 원망을 모두 안으로만 삼켰다. 인내심과 의지가 강했지만 그만큼 속이 썩어버리기 좋았다.

슬프고 힘들 텐데도 기어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삼켜버렸다. 기쁜 일에는 울었는데, 아픈 일에는 끝까지 참아냈다. 말랑말랑한 속내를 보기가 이리도 어려웠다.

그래도 성군이 되라고 한 것에는 놀랐다. 제좌를 가지겠다고 했으나 류희겸이 서역으로 떠나자고 했다면 얼마든지 그럴 마음이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먼 곳으로 류희겸과 함께 훌쩍 떠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성군이 되라고 하니, 당연히 기대에 부응해야 했다.

“화려한 감옥을 택하였군.”

세상 가장 화려한 감옥에서 꽃같이 아껴줄 자신이 있었다. 류희겸은 목이 아프도록 호화로운 보관을 머리에 쓸 것이다. 무뚝뚝한 사내가 귀찮아하면서도 묵묵히 제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선했다.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진혁위는 살그머니 몸을 숙여 류희겸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애석하게도 류희겸에게서는 부드러운 향유와 살 내음만 났다.

한 달 전, 달콤하게 퍼졌던 향기는 이후로 한 번도 맡아지지 않았다.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진혁위는 아쉬움을 담아 한 번 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 ◇ ◇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한 진한재는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해져 있었다.

다른 포로들과 떨어져 단독으로 갇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철창은 겨우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어느 것 하나 황족에 대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거적과 짚이 깔린 바닥에서는 냉기가 올라왔고 천막의 틈 사이로 외풍이 흘러들었다. 음식은 끼니때마다 나왔지만 겨우 구색만 갖춘 것이라 진한재의 입에는 맞지 않았다.

그나마 물은 풍족하게 주어졌다. 오물도 제때 치워졌다. 그러나 어젯밤까지만 해도 따뜻한 침상에서 잠을 청했던 진한재에게는 모든 것이 끔찍할 정도로 불편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진한재는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한 것인지 되짚어보았다. 류희겸이 살아서 대연국으로 도망간 것부터가 문제였다. 암살도, 회유도, 협박도 모두 실패했다.

그래도 전면전을 벌이면 승산이 있다고 여겼다. 대연국의 태자와 태자의 심복이 군의 내부 기밀 정보를 넘겨주었다. 대연국의 정보는 모두 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샌가 끊어져 버렸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이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집결지에 제일 먼저 도착한 소준염 장군은 공을 세우겠다고 단독으로 진월강을 건넜다가 군대를 반이나 잃고 전사해 버렸다. 또한 본대가 대연국의 기습 공격에 제대로 된 반격 한 번 하지 못하고 당한 것도 모두 예상 밖의 일이었다.

병력을 많이 잃자 사기가 떨어졌다. 전투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사이에 자신의 실수는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실패를 인정할 수 없는 진한재는 이를 갈았다. 자신은 이렇게 더러운 곳에 갇혀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시커멓게 때가 낀 손톱을 보자니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거적이 깔린 바닥과 찬바람이 스며드는 철창은 모두 현실이었다.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린 진한재는 결국 류희겸을 원망했다. 살아남아 남준해의 억울한 죽음에 복수하겠다고 날뛰는 류희겸은 진한재가 가장 경계하던 변수였다.

진한재는 끔찍한 현실의 원인을 찾아냈다. 자신의 실수는 연주성에서 류희겸을 죽이지 못한 것뿐이었다.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 아랫것들에게 맡길 게 아니라, 위험 부담이 있더라도 직접 손을 썼어야 했다. 그랬다면 오늘과 같은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매시간마다 후회와 분노를, 체념을 반복하면서도 진한재는 다음을 기약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뼈아프기는 했지만, 경릉으로만 돌아간다면 이 상황을 수습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류희겸과 함께 여러 사람이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겨우 다섯 명이었지만 좁은 막사 안이 꽉 찼다. 그중에 한 명이 유난히 진한재의 눈에 띄었다. 보기 드문 화려한 미남이 대연국의 영친왕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화용월태(花容月態). 설부화용(雪膚花容). 대연국의 영왕을 부르는 별명은 사내에게 붙이기 과한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류희겸이 영왕의 귀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둥서방이 된 것이 아니냐고 비웃는 소리도 있었다. 진한재 역시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남자는 키가 크고 체격도 좋았다. 류희겸의 키도 큰 편인데 그보다 주먹 하나는 더 컸다. 거기에 꽃과 어울리는 얼굴에서 박력이 넘쳤다.

순간 진한재는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웠다. 분명히 같은 친왕이었다. 그런데 그는 티끌 하나 없이 화려한 외모를 뽐내고 있는 것에 비하여, 자신은 지푸라기가 묻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굳었지만 진한재는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끌어내라.”

류희겸이 명령을 내리자 병사들에 의해 진한재가 철창 안에서 끌려 나왔다.

진한재는 아무 말도 없이 병사들이 이끄는 대로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입에 재갈이 물리고 밧줄에 몸이 묶이기 시작하자 눈을 크게 뜨고 류희겸을 보았다. 감히 황족을 능멸하느냐고 외치고 싶었지만 재갈에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날뛰지 마십시오. 자해를 막으려고 재갈을 물렸습니다. 얌전히 계십시오.”

멀찍이 서서 지시하는 류희겸의 말은 정중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진한재는 더욱 화가 났다. 자신은 이런 대우를 받을 신분이 아니었다.

류희겸 역시 진한재의 생각을 모두 읽었지만 무시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반드시 자해를 막아야 했다.

진한재를 단단히 묶은 병사들이 류희겸의 손짓에 의해 조용히 막사를 나갔다. 의자에 묶인 진한재의 앞에 류희겸이 섰다. 진혁위는 류희겸의 뒤쪽에, 그리고 진한재의 뒤에는 운문형이 자리 잡았다.

고요한 정적 속에 류희겸은 진한재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자신을 노려보는 진한재에게는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지금 그에게서 들을 이야기는 없었다. 류희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임약원이 모두 자백했습니다. 전하께서 저의 고모부님과 채왕 전하를 모함했다는 것을.”

아무 예고도 없이 시작된 류희겸의 말에 진한재가 눈을 껌뻑거렸다. 천천히 충격으로 물들어 가는 진한재의 얼굴을 보며 류희겸은 다음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능왕 전하를 독살하였다는 것도 자백했습니다. 황제께서 능왕 전하의 사인을 밝히라 남준해 장군에게 밀명을 내리자, 자신의 죄가 밝혀질까 두려워 남준해 장군과 채왕 전하를 무고하였다고 정확하게 말하였지요. 인정하십니까?”

“으읍. 읍. 으으읍!”

억울한 표정을 지은 진한재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재갈에 가로막혀 억눌린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재갈로 입을 막은 것은 자해를 막기 위함이었지만,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의자에 묶인 채로 몸부림치는 진한재를 보며 류희겸은 복잡한 기분을 맛보았다.

몇 번의 생을 반복하면서 진한재에게 죄를 추궁했을 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지금처럼 화를 내지도 않았고 결백하다 항변하지도 않았다. 감옥에 갇힌 자신에게 변명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랬다는 것을 이제 와 깨닫는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거짓 자백이었을까? 너는 결백해?”

류희겸의 어투가 바뀌었다. 그럼에도 진한재는 다시금 절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배신을 알아차린 것은 대연국의 익문사에서 고신을 받으면서였다. 고모부님을 역모로 고발한 자의 이름을 듣고 익숙한 자라 당황했지. 그가 네가 채왕부에 심은 간자였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내가 얼마나 놀랐을까? 그래. 지금의 너처럼 놀랐다. 연주성 감옥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도 네 짓이라는 것도 깨달았지. 그래서 너를 죽이겠노라 맹세했다. 죽어서라도 다시 태어나 복수를 할 거라고!”

차분하게 이어지던 어조는 마지막에 이르러서 깊은 원한을 담았다. 전장에서 사선을 넘나들던 류희겸의 눈빛은 새파란 분노로 이글거렸다.

깊고도 어두운 원한에 고스란히 노출된 진한재는 순간 겁을 먹었다. 그런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너는 화진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다. 죽여달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죽일 테니까. 어떻게 죽을지는 네게 달려 있어. 황제 폐하께 죄를 자백하는 글을 적어 올려라. 능왕을 죽이고, 그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남준해 장군과 채왕 전하에게 역모의 죄를 뒤집어씌웠노라고. 그렇게 한다면 고통 없이 단숨에 보내준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겠다면, 편히 죽이지는 않겠다.”

류희겸이 눈짓하자 진한재의 뒤에 서 있던 운문형이 움직였다. 운문형은 의자에 묶여 있는 진한재의 왼손 새끼손가락을 잡아 그대로 꺾었다. 아무 대비도 하지 못하고 있던 진한재는 끔찍한 고통에 부들부들 떨었다. 황자로 태어나 귀하게 자란 진한재는 일방적인 폭력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식의 고통에 약했다.

아무리 적국의 이라도 황족에게는 고신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미 황제에게 진한재의 목숨과 처우에 대한 허락을 받아놓은 류희겸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손가락이 부러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잘 들어.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면 팔다리를 자르고, 혀를 뽑고, 눈을 멀게 만들고, 거세를 하여 돼지우리에 던져둘 거야. 이해했어?”

조금 전의 원한이 가신 건조한 협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한재는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한고조(漢高祖)의 부인이었던 여태후(呂太后)가 척부인(戚夫人)을 사람돼지로 만든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살아 있는 사람을 모욕하는 방법 중에 가장 끔찍한 방법이기도 했다.

진한재는 고요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류희겸을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류희겸을 잘 알고 있었다. 정이 많고 반듯한 인사였지만 그렇기에 단호하다 못해 비정해질 수 있었다. 복수에 눈이 멀어 조국을 향해 칼을 들이밀지 않았던가.

살아 돌아가서 재기할 꿈을 꾸고 있었던 진한재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무엇보다 류희겸의 협박이 무서웠다. 자신에게 주어질 고통이 두려웠다.

사람돼지. 그 단어가 가지는 공포의 무게에 진한재는 한 번 더 떨었다. 재갈만 없었다면 살려달라고 빌었을지도 몰랐다. 역도라고 손가락질 받는 것만큼이나 돼지우리에서 살아남는 것은 끔찍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것이 나았다.

죄를 자백하는 글을 적으라 했으니 묶인 손은 풀릴 수밖에 없었다. 한참 방심하고 있을 때에 재갈을 벗고 혀를 깨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진한재의 생각을 모두 읽은 류희겸은 품에서 염호부를 꺼내어 보였다. 연나라를 기원으로 하는 대연국과 화진국은 신궁에서 염호부를 만드는 비술을 똑같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가 염호부를 황친과 백관들에게 나누어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류희겸은 진한재가 만약을 대비해 늘 염호부를 품에 지니고 다닌다는 것을 오래전에 파악한 상태였다.

“이거 보이지? 네가 가지고 있던 염호부다. 혀를 깨문다고 해도 당장에 죽지는 않으니 얼마든지 살려낼 수 있어.”

“……?!”

“기회는 한 번뿐이야. 그러니 헛된 시도는 하지 않는 게 좋아.”

류희겸의 경고는 엄격했다. 그가 아는 진한재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보다는 죽음을 선택할 남자였다. 그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줄 수도 있다는 협박은 반드시 필요했다. 사실 그럴 마음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살아 있는 채로 지옥을 맛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고모부의 누명을 벗기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직 실감이 안 나나 보군.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미리 말하자면 임약원의 자백은 같이 붙잡힌 장군들이 모두 들었다. 증거가 없는, 고문에 의한 자백은 법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다지만 황제께서는, 화진의 황제께서는 분명 움직이실 거야. 능왕을 죽인 게 너라고 하면 돼지 똥으로 뒤범벅이 된 너라도 돌려달라 하실 테지. 난 아무래도 좋아. 선택은 네 몫이다.”

마지막 말을 마친 류희겸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진한재를 두고 막사를 나왔다. 재갈을 문 진한재가 짐승같이 우는 소리를 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류희겸을 뒤따라 진혁위와 운문형이 나오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에서 멀어져 말을 매어둔 곳까지 간 류희겸은 그제야 깊게 숨을 내쉬었다. 겨울의 찬바람에 열이 오른 머리가 그제야 식었다. 냉정하게 굴자고 그렇게나 다짐했는데 도중에 흥분하고 말았다.

“협박하던 솜씨가 제법이던 걸?”

막사 안에서는 두 발자국 뒤에 서 있던 진혁위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류희겸은 진혁위를 돌아보았다. 은은하게 웃고 있는 그는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그렇습니까?”

“그래. 도망칠 곳 없이 몰아붙이는 솜씨가 마치 노련한 호랑이 같았다. 그도 분명 무서웠을 것이다.”

눈꼬리를 휘며 미소를 지은 진혁위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류희겸의 협박 실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귀장군은 그저 전쟁에 이기는, 무력이 뛰어나기만 한 장군이 아니었다. 그는 누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류희겸은 사람돼지로 만들겠다는 협박이 진한재에게 잘 먹힐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 진한재가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그렇게 만들어줄 마음이 있다며 덤덤히 말했다. 적으로 돌린다면 류희겸은 누구보다 까다로운 상대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모습에조차 반할 것 같았다.

진혁위는 자신이 특이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오래전에 인정했다. 류희겸이 피를 뒤집어쓰고 절박하게 싸우는 모습에 넋이 나간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복수를 위해 집요하게 인정사정없이 달려드는 것 또한 좋았다.

“그가 겁을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진혁위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류희겸은 같은 마음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자신이 진한재라도 죄를 인정하고 깔끔하게 죽기를 바랄 것이다.

“이러고 있지 말고, 말을 타고 주변을 둘러보고 오자. 그놈은 기다리라고 하고.”

대연국의 총사령관으로 진혁위가 해야 할 일은 많이 있었다. 전투가 끝난 다음날이라 뒤처리만으로도 충분히 바빴다. 그럼에도 그는 류희겸과 진한재를 둘이서만 만나게 할 수 없다고 따라 나섰다.

난감해진 것은 류희겸이었다. 괜찮다고, 혼자서 할 수 있다고 해도 진혁위를 말릴 수 없었다. 그러나 진혁위가 옆에 있어준 덕분에 울적한 기분이 나아졌다.

진혁위의 말대로 자신이 초조하게 진한재를 기다려줄 필요는 없었다. 말을 타고 달리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갈 것이다.

“예. 그러하겠습니다.”

“말에 올라라. 가자.”

진혁위의 재촉에 류희겸은 말에 올랐다. 두 사람이 움직이자 호위들도 바빠졌지만 류희겸은 개의치 않았다. 진한재 따위는 잊어버리고 진혁위를 뒤따라 평원을 내달렸다.

*

한 시진 동안 말을 타고 돌아온 류희겸을 기다린 것은 십 년은 늙어버린 것 같은 진한재였다. 재갈을 물고 의자에 묶인 채 발광하고 체념하다 다시 발광하기를 반복하던 진한재는 결국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듯했다.

지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진한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류희겸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우선은 친왕의 체면을 위해 진한재를 멀끔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다음으로는 진한재의 죄가 꼼꼼히 적힌 자백서를 같은 내용으로 두 장을 받아냈다. 하나는 화진의 황제에게 보낼 것이었고, 또 하나는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한 것이었다.

진한재가 자백서를 적는 동안에 화진국의 장군급 포로 몇 명이 동석했다. 강압적인 자백서가 아님을 화진의 황제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류희겸은 자신의 노력이 어디까지 통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려고 했다.

자백서를 모두 쓴 진한재는 빠른 죽음을 원했다. 당연하게도 진한재의 마지막을 지켜본 것은 류희겸이었다.

*

그날 밤, 철창을 사이에 두고 류희겸은 진한재의 앞에 마주 앉았다. 조용한 막사 안에서는 등불의 일렁거림과 함께 긴장감이 감돌았다. 자백서를 쓸 때까지만 해도 힘없이 조용했던 진한재가 악의를 숨기지 않았다.

“네가 이긴 것 같지? 남준해 장군의 결백을 밝혀냈다고 다 끝난 게 아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갈 것 같아? 너는 사냥개일 뿐이다. 제 역할을 다했으니 삶아 먹힐 일만 남았지. 안 그래?”

“…….”

“왜 대답을 못 해? 그건 생각 못 했나 보지? 한 번 배신자는 영원한 배신자라는 소리를 매번 듣는다면서 그것도 몰랐어?”

진한재는 최선을 다해 빈정거리면서 류희겸의 속을 긁으려고 했다. 살려달라고 비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겁에 질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승자의 기쁨을 누리고 있을 류희겸에게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으로 마지막 발악을 했다. 너도 나와 다르지 않다고.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 사냥이 끝나면 쓸모가 없어진 개는 삶아 먹는 법이었다.

물론 류희겸도 그걸 알고 있었다. 대연국의 황제 앞에 처음 섰을 때부터 쓸모가 다하면 죽는 법이라고 외쳤었다. 그때는 황제의 호의를 사고 시간을 끌기 위한 아부였지만, 지금은 어떤 끝이든 받아들일 각오가 되었다.

“선후 관계를 오해했군. 복수를 위해 사냥개가 되겠다고, 내가 직접 대연의 황제에게 빌었지. 모든 것을 이루었으니 이제 미련 없어.”

“너는, 너는. 미친 것이냐?! 목숨을 부지했으면 쥐 죽은 듯이 살아야 할 거 아니야?!”

“원수가 되었으니 지옥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먼저 가라. 따라갈 테니.”

류희겸은 철창 사이로 독이 든 작은 잔을 밀어 넣었다.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단숨에 숨이 끊어지는 극독을 술에 탔다.

바닥에 놓인 잔을 내려다보던 진한재는 당장 독을 마시는 대신에 덤덤한 얼굴을 한 류희겸을 보았다.

자신은 황제가 되어야 했다. 오래전부터 꾸던 제좌가 바로 앞에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랜 친구의 훼방으로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자신이 진 것이다. 믿을 수 없지만 도망칠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니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도 진한재는 그냥 허무하게 떠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류희겸에게 상처와 좌절을 주고 싶은 마음에 발악했다.

“네 복수 때문에 무관한 이들이 죽을 것이다. 연림군의 장수들이 무사할 것 같으냐?!”

마지막까지 구질구질하게 구는 진한재 덕분에 류희겸은 아주 조금 남은 회한까지도 털어버렸다. 진한재는 자신의 친구가 아니라 원수라는 것을 다시 다짐했다.

“목월조. 신후연. 고막영. 소용운. 백정방. 원승환. 원승비. 조홍신. 양원. 부끄러움을 안다면 변절자는 자결하라. 그리 적혀 있었지.”

“?!”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진한재를 향해 류희겸은 힘주어 또박또박 설명을 이었다.

“그들은 모두 살아 있다. 네가 협박 서신을 보내기도 전에 모두 대연국으로 데려왔지. 연림군의 장수들을 포기해야 했다면 네 의도대로 정말 괴로웠을 텐데 다행이었어. 만에 하나 고모부님의 신원이 회복된다면, 그들 역시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 빌어먹을. 네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군.”

헛웃음을 지은 진한재가 바닥에 놓인 독 잔을 들고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류희겸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이 아니라 진혁위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곧, 다시 보자.”

마지막 말을 한 진한재가 피를 토하고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류희겸은 숨이 빠져나간 과거의 친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기쁘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아프고, 그것보다 조금 더 슬펐다.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인연이 이렇게 끝나버린 것은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모자랐다. 그래도 류희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단도를.”

자리에서 일어난 류희겸이 손을 뻗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운문형이 검을 쥐여주었다. 류희겸은 운문형의 호위를 받으며 철창 안으로 들어갔다. 옆으로 쓰러진 진한재를 바로 눕히고 가슴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극독을 준비했지만 아주 드물게 독을 마시고도 살아남는 이가 있었다. 만약을 대비하는 류희겸의 손길은 냉철했다. 깊숙이 찔렀던 단검을 빼내자 피는 거의 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진한재는 아직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혈색이 있었다. 류희겸은 움직이지 않는 진한재를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나는 이게 끝이기를 바란다.”

여섯 번을 다시 살아나서 일곱 번째 삶을 살고 있었다. 천지신명께 맹세한 대로 진한재를 죽인 지금 생이 마지막 생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

류희겸이 자신의 막사로 돌아온 것은 늦은 밤이었다. 그곳에는 당연한 것처럼 진혁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보내주고 왔느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별것 아닌 물음이었다. 진혁위는 어제와 같이 어둠을 붉히는 등불 아래서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류희겸은 당장에 달려가 그를 끌어안아 온기를 느끼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건 너무 염치없는 짓이었다. 발과 손이 한 번씩 달싹거리는 것을 참아낸 류희겸은 정중히 손을 모아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영왕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왜 갑자기 인사를 하고 그래?”

“최근에 예를 올리는 것을 등한시하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용서고 뭐고.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아니면 나쁜 일이라도 저질렀어? 어려운 부탁이라도 할 거야? 솔직히 말해라. 귀비가 이러니 무서울 지경이다.”

전쟁이 시작된 후로 사람들 앞이 아니면 류희겸이 정중히 예를 올리는 일이 없었기에 진혁위가 호들갑을 떨었다. 류희겸은 최근에 부끄러울 정도로 진혁위에게 막 대했던 것을 반성하며 예를 차린 것이었다. 또한 각오를 다지기 위함이기도 했다.

진혁위에게 해야 할 말이 많았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저를, 소인을 여전히 원망하고 미워하고 있으십니까?”

류희겸은 굳이 돌려 말하지 않았다. 지독하게 무례한 질문에 웃고 있던 진혁위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입니다. 오해였다고는 하나 소인은 왕야를 배신했습니다. 충정을 바친다 하여 희석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류희겸.”

“다시 여쭙겠습니다. 원망하고 미우십니까?”

이름을 부르는 나직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류희겸이 같은 물음을 던졌다. 진혁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와락 구겼다.

원한과 미움의 흔적은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도 한 번씩 흉터를 들여다볼 때면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직은 추억이 될 수 없는 시린 감정도 함께.

진혁위는 곧은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류희겸과 눈을 마주했다. 지금은 그저 웃어넘길 수 없다는 직감이 왔다.

“네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구나. 머리끝까지 잠겨 숨 막히게 했던 원한은 이제 발끝에 차이는 낙엽이 되었다. 이런 건 아주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뜻밖의 질문에 진혁위는 이번에야말로 숨 쉬는 것을 잊어버렸다. 류희겸의 저돌성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내달리는 남자였다.

진혁위는 류희겸이 어떤 의도로 질문을 던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류희겸이 날린 보이지 않는 화살에 심장을 꿰뚫린 기분이었다.

“원망만 하였다면 너를 사들였던 그날에 목을 베었을 것이다. 언젠가 한눈에 반했다고 하였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티도 많이 냈다. 네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지. 예쁘다는 말이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생각도 못 하고 있으니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맘 상해하지 마라.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인 것이냐? 응?”

반은 타의로, 그리고 반은 자의로 고백을 하게 된 진혁위는 류희겸의 의도가 진심으로 궁금했다. 가끔 그는 상상도 못 할 돌발 행동을 하곤 했다. 지금도 큰 사고를 치려고 이러는 것이 아닌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류희겸은 티 나지 않게 당황했다. 예쁘다고 한 것이 좋아한다는 뜻이란다. 진혁위가 예쁘다는 소리를 시도 때도 없이 한 것이 떠올라 귀가 달아올랐다. 그렇게 티를 냈는데도 자신이 알아듣지 못했으니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당연했다.

류희겸은 난감함에 눈을 질끈 감고 싶은 것을 참았다. 아직 할 말이 많이 있는데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소인이, 소인이 정인이었습니까? 그러니까 이전에 말입니다.”

“정말 작정했구나. 그럼 너는 정인도 아닌 자와 교합을 몇 번이고 하느냐? 나는 아닌데? 나쁜 남자라는 것은 알았지만 너무하는군.”

불만과 웃음기가 모두 담긴 투덜거림에 류희겸은 입술을 달싹거리려다가 다물었다. 그것만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내가 묻겠다. 너는 나를 원망하느냐? 그저 복수를 위해 싫은 것들을 감내하고 있는 것인가?”

질문이 고스란히 돌아왔지만 류희겸은 당장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실 류희겸이 하고자 하는 말이 이것이었다. 생각을 정리한다고 했는데,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그건 답이 아니다.”

“왕야께서도 아시겠지만, 저는 복수를 위해 다른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주위를 둘러볼 여유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비겁한 변명인 거 압니다. 하여 왕야께서 호의를 주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습니다. 예. 그리하였습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복수를 다 끝냈으니 정리를 하고 싶다?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군. 그리 말한다 하여 내가 놓아줄 것 같으냐?”

중간에 말을 가로챈 진혁위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성급한 결론을 맞받아치는 대신에 뒤로 반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진혁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뭐 하는 거지?”

“왕야의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그랬습니다.”

“뭐?”

“왕야가 아니었다면 소인은 복수를 하지 못했을 겁니다. 소중한 인연을 모두 잃고 스스로를 혐오했겠지요.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숨으로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제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네 충성은 이미 내 것이다. 그건 이미 이야기가 끝난 것일 텐데.”

진혁위의 사나운 설명에 류희겸은 희미하게 웃었다. 반년 전의 그것은 충성이라고 불리기보다는 거래의 결과물이라고 하는 게 옳았다. 그래도 그때 역시도 진혁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 생각했었다.

“제 충성은 왕야의 것입니다. 그렇기에 알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안주하는 것인지 경계가 불분명합니다.”

“계속 말을 돌리고 있다. 지금까지 긴 서두가 무엇을 말하기 위함이냐?”

진혁위의 재촉은 서늘하고도 날카로웠다. 아마도 불길한 소리를 할 거라 추측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거 아닌데. 류희겸은 괜히 서운해지려는 것을 다잡았다.

“앞으로 왕야의 호의를 무시하지도, 모르는 척하지도 않겠습니다. 정면에서 맞부딪히겠습니다. 그것이 어찌 될지는 소인도 모르겠습니다.”

진한재의 죽음을 확인한 류희겸은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몇 번이나 죽고 다시 생을 시작하면서 운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급작스럽게 들이닥치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직전 생과 비교하여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어쩌면 태경으로 돌아가자마자 죽으라는 황제의 교지가 내려올 가능성도 있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한 줌 남은 미련이 있다면 바로 진혁위였다.

자신의 최후를 생각하자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구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다음에 말하자며 미루어두었다가는 후회할지도 몰랐다. 그럴 바에야 정제되지 않은 말이라도 자신의 뜻을 전하는 게 나았다.

피하지도 도망치지도 않겠다. 그것이 지금 류희겸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가끔은 당신 때문에 심장이 뛰고, 알 수 없는 술렁임에 이상해질 때가 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진혁위를 좋아하는 마음에는 연정과 고마움이 섞여 있었다. 복잡한 마음이 뒤얽힌 상황에서는 조심스럽게 단어를 선택해야 했다.

류희겸의 고백은 고백이라기보다는 맹세에 가까웠다. 하지만 진혁위는 구겨진 미간을 풀며 웃었다. 진한재가 죽자마자 찾아와서는 비장한 얼굴로 한다는 말이, 제 마음을 모르겠으니 부딪혀보겠다는 것이었다. 다 끝났으니 이제 놓아달라고 할 줄 알았던 진혁위는 깊이 안도하면서도 허탈했다.

“진짜 귀비는 너무한 사람이다. 기껏 하는 말이 모르겠다는 것이라니. 아니지. 귀비치고는 용감한 고백이라고 믿겠다. 그러고 있지 말고 이리 와라. 정말 모르는 척하지 않는지 확인해 보자.”

진혁위는 이리 오라고 손을 내밀었지만 류희겸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뜻밖의 행동에 진혁위는 어리둥절해졌다.

“이번에는 또 무엇이냐?”

“소인의 소원은 하나뿐이었습니다. 큰 아량을 베푸시어 소원을 이루어주신 왕야의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소인의 충성도 목숨도 모두 왕야의 것입니다. 죽으라 명하시면 기쁘게 죽을 것입니다.”

“류희겸. 내 화를 돋울 생각이냐?”

“제 각오가 거기까지 닿아 있음을 미리 알려드린 것이옵니다.”

최악을 준비하는 것은 류희겸의 버릇이었다. 자신이 진혁위의 짐이 된다면 물러나야 했다. 그것이 죽음의 형태라도 류희겸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 류희겸의 각오를 정확하게 알아챈 진혁위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정면으로 부딪치겠다고 하더니 미운 말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럴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둘 것 같으냐? 일어나서 얼굴이나 보여라.”

천천히 일어난 류희겸은 이번에야말로 진혁위 앞으로 다가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진혁위도 자리에서 일어나 류희겸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았다. 류희겸은 무슨 짓이냐고 눈을 크게 떴지만 진혁위는 손을 놓지 않았다.

“왕야?”

“내가 좋아하고 있던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없는 척하고 있었군. 본왕은 귀비가 소인 줄 알았는데, 여우였어. 그것도 꼬리가 아홉 개까지는 아니고, 세 개쯤 달렸고 말이야.”

진혁위가 류희겸의 양뺨을 문지르며 웃었다. 환한 미소에 류희겸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거기까지는 아닙니다. 눈치 없는 것은 맞습니다.”

“웃으니까 예쁘다.”

“왕야.”

“왜? 예쁘다니까. 술을 준비해 두었다. 마시고 일찍 자라. 이런 날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자는 게 좋아.”

뒤늦게 뺨을 놓아준 진혁위가 어제와 같은 말을 했다. 다정한 배려였고 따뜻한 호의였다. 이제는 마음껏 기뻐할 수 있게 된 류희겸은 웃었다. 동시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런.”

당황한 진혁위가 혀를 차며 류희겸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끌어안긴 류희겸은 진혁위의 품을 벗어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에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지.”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것 자체가 큰 축복이라는 것을 류희겸은 몇 번의 생을 반복하며 깨달았다. 말라붙었다고 여겼던 눈물이 한 번씩 솟아올라도 제대로 울 수 있었던 적은 몇 번 없었다.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는 밤에 웅크려 눈물과 비탄을 삼키며 고요한 어둠을 버텼다.

때로는 이 모든 것이 끔찍한 꿈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었다. 자신은 이미 죽었고, 죽어서 무한 지옥에서 끝없는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럴 때면 차라리 꿈이라도 좋고 지옥이라도 좋으니 진한재를 죽이게 해달라고 세상 모든 신들에게 빌고 또 빌었다.

필생의 숙원이 해결되자 허허로워진 공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차올랐다. 그래도 인고의 순간이 모두 지났기에 마음껏 울 수 있었다. 제어하지 못한 눈물을 진혁위 앞에서 드러낸다는 사실이 민망했다. 동시에 단단한 어깨를 빌려준 남자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울음에 먹힌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한 류희겸은 오랫동안 참아왔던 아픔을 흘려냈다. 눈물은 뜨거웠다.

*

꿈도 없이 잠에 빠져 있던 류희겸은 눈을 번쩍 떴다. 익숙한 막사의 천정이 눈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어젯밤의 기억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진한재를 죽인 후에 진혁위 앞에서 울고 말았다. 그저 눈시울을 붉힌 것만이 아니라 진혁위에게 안겨 세상 서럽게 울었던 기억에 류희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일곱 살 아이도 아니고 나이를 먹을 대로 먹어서는 펑펑 울어재낀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쉰 류희겸은 옆을 슬쩍 보았다. 진혁위는 이쪽을 보고는 푹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정신이 맑았기에 다시 잠드는 대신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이 울어서 그런지 퉁퉁 부어 불편한 눈을 몇 번 비볐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도, 그리고 진혁위도 침의를 입은 상태였다. 아마도 진혁위가 옷을 벗겨준 모양이었다. 진혁위의 시중을 받는 일은 자주 있었기에 괜찮았다. 그러나 아무리 감정에 북받쳐 올랐다고는 해도 엉엉 울다가 정신을 잃은 김에 잠이 들어버린 것은 너무한 일이었다.

두 손으로 뺨을 문지른 류희겸은 민망한 기억을 날려버렸다. 그것 말고도 집중해야 할 것이 많이 있었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거의 다 타버린 등불을 한 번씩 보았다. 숙원은 달성했으나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 어제와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다른 목표가 생겼다. 역시나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제부터 자신의 생은 덤이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마음대로 살 수도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골방에 처박힐 수도 있었다.

솔직히 아등바등하며 숙원을 이루기는 했으나 죽어서 다시 눈을 뜨면 연주성 감옥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은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 그래도 살아가야 했다. 마치 내일이 끝인 것처럼. 혹은 영원히 살 것처럼.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복수만을 위해 굴곡진 삶을 살았지만 그래도 완전히 길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을 일깨운 류희겸은 다시 진혁위를 보았다. 침상의 바깥쪽을 차지하고 누운 진혁위를 넘지 않고서야 바닥에 내려설 방법이 없었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진혁위 몰래 침상을 빠져나가는 대신에 이불 밖으로 삐죽 나온 진혁위의 손을 잡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깨신 거 압니다.”

“……그래. 깼다.”

진혁위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힐끗 시선을 주었다. 노곤하게 눈을 깜빡이는 것이 깨기는 했으나 아주 잠을 떨친 기색은 아니었다.

“졸리십니까?”

“왜 손을 덥썩덥썩 잡느냐? 아침에는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몇 번의 다툼 끝에 전쟁 중에는 아침에 교합을 하지 않기로 약속하긴 했다. 진혁위가 못내 아쉬워했었다. 하지만 손 좀 잡았는데 마치 유혹이라도 받은 듯이 구는 진혁위 때문에 류희겸은 웃었다. 별것 아닌 데도 웃음이 나왔다.

“전에 조용히 나가기 전에 왕야를 깨우라고 하셨잖습니까?”

“어딜 조용히 나가고 싶어서?”

“소세를 하시고, 신첩이랑 말을 타러 가지 않겠습니까?”

“신새벽에 말은 왜…….”

진혁위는 말을 하다 말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막 자다 일어난 가운데도 진혁위는 박력 있는 미남이었다.

“찬바람을 쐬고 싶어 그러합니다.”

“방금 무어라고 했느냐?”

“찬바람을 쐬고 싶다 하였습니다.”

“그걸 말고.”

“말을 타러 가자고요.”

“아니, 그거 말고. 내가 무엇을 묻는지 알면서 왜 자꾸 다른 말을 해.”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의식하고 있었기에 류희겸은 진혁위가 무엇을 묻는지 알았다. 다시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세를 하시고, 신첩이랑 말을 타러 가지 않겠습니까? 이리 여쭈었습니다.”

“세상에.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니지? 갑자기 왜 그러느냐? 무섭잖아.”

“맞부딪히겠다고 하였으니 이리하는 것이 옳지요. 왕야께서 그간 소인의, 그러니까 신첩의 무례를 받아주신 거 압니다. 앞으로는 예를 다하겠습니다.”

“진짜 내가 꿈을 꾸는가 보다.”

“꿈이 아닙니다.”

“그래. 꿈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안다. 그저 좋아서 그렇다.”

활짝 웃은 진혁위가 류희겸의 한쪽 뺨을 잡고는 입술을 살짝 맞대었다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입맞춤을 할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왕야?”

“귀비는 사람 속을 애태우는 재주가 있다.”

“그런 재주는 없습니다.”

“하하. 자각을 못 하면 더 무서운 법이라지. 그것도 예쁘다. 안 예쁜 곳이 없어.”

진혁위가 다시 얼굴 이곳저곳에 입맞춤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류희겸은 잠시 뻣뻣하게 굳었다. 부드러운 접촉은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로 간지러웠다. 어제 들었던, 예쁘다는 말이 너를 좋아한다는 뜻이라는 고백이 떠올랐기에 귀가 달아오르기까지 했다.

기분은 좋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진혁위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는 위기감도 함께 느꼈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을 때 진혁위의 입을 손바닥을 단단히 막았다.

“이제 그만하십시오.”

잠시 놀라던 진혁위가 곧 눈을 곱게 접으며 손바닥을 혀로 핥았다. 류희겸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랐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버텼다. 결국 뒤로 몸을 슬쩍 물린 진혁위가 툴툴대었다.

“한참 좋았는데.”

“말을 타러 가자 청하였습니다.”

“알지.”

기습적으로 류희겸의 뺨에 입맞춤을 한 진혁위가 날랜 몸짓으로 침상 아래로 내려섰다. 당당히 자리에 선 그는 류희겸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귀비 덕분에 힘이 넘친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어두운 막사 안은 어두웠다. 그럼에도 류희겸은 진혁위의 미소에 세상이 환히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예.”

짧게 답한 류희겸은 진혁위를 따라 웃었다.

*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대연국의 군대는 숙영지를 정리했다. 전투에서 대승하고 적국의 총사령관까지 죽인 대연의 지휘부는 호양성까지 전선을 물리기로 했다.

진혁위는 화진국의 포로 중에 몇몇과 진한재의 시신을 진월강 너머로 보냈다. 진한재가 작성한 자백서를 함께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호양성으로의 귀환은 신속했다. 정찰병을 보내 화진국의 군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파악하면서 동시에 황제가 보낼 명령을 기다렸다.

닷새가 지나자 태자가 폐위되어 방왕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부분의 장군들은 놀라기는 했으나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태자, 혹은 중앙 권력과 거리가 먼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진혁위는 그런 이들을 중심으로 군대를 구성했었다.

황제의 칙령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이레가 지나고 난 후였다. 호양성과 동시에 빼앗겼던 은락성 역시 되찾으라는 명령이었다. 이동하는 것까지 포함해 한 달 만에 두 번째 성을 점령한 대연국의 군대는 다시 황제의 명령을 기다렸다.

황제의 명령보다 태경에서 채제승이 보낸 전서구가 진혁위에게 도착한 것이 더 빨랐다. 전서구가 가져온 작은 지관통 안에는 암어로 황제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 ◇ ◇

위락호 대전이 끝나고 홀로 태경으로 돌아온 진혁위는 반쯤 폐인으로 지냈다. 승전을 하였으나 권력 다툼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입궁은 최대한 자제했다. 거기다 황제의 역정을 사면서도 혼인을 하지 않겠노라 버텼다.

그해 겨울 내도록 왕부에 틀어박혀 지내면서 술독에 빠져 살았다. 그것조차 답답하면 말을 타고 겨울 사냥을 나섰다. 그러다 겨울의 끝자락에 어머니가 폐렴으로 사망하면서 정신이 들었지만 바깥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칩거에 들어갔다.

시간이 흘러 봄이 되고 북쪽 국경으로 떠났던 기왕이 돌아오면서 정국이 급변했다. 겨울 동안 깊어진 황제의 병색은 봄이 되어도 여전했다. 전과 다름없이 정력적이기는 했으나 한 번씩 창백한 얼굴로 각혈을 한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졌다.

그해 봄은 태자에게 최악의 사건만 연달아 일어났다.

첫 번째는 좌승상이었다. 좌승상이 신사와 불사에서 귀물을 훔치는 둘째 아들의 죄를 알고도 숨긴 것이 들통 난 것이다. 또한 평소에 좌승상 밑에서 험한 일을 하던 하급 관리 하나가 뇌물 때문에 익문사에 붙잡혔다.

좌승상에게 상납할 뇌물을 받다가 붙잡혔는데도 아무런 비호를 받지 못한 하급 관리는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불어버렸다. 이후에 좌승상의 죄가 줄줄이 밝혀지면서 결국 그는 파직되고 말았다.

두 번째는 채제승이었다. 태자의 손에 가족을 잃은 채제승은 태경 곳곳에 벽보를 붙였다. 지금까지 태자가 저질렀던 악행이 속속들이 적힌 벽보는 보이는 족족 뜯겨나갔지만, 사람들의 입은 막지 못했다.

태자의 행행에 동행한 귀족의 자제들이 민가의 여인을 희롱하고 말리는 가족들을 죽였다는 것은 큰 논란거리였다. 태자가 그 사실을 알고도 덮었다는 것은 더더욱 그랬다. 심지어 태자가 직접 나서 일을 저질렀다는 말까지 돌았다.

어전 회의에서 태자의 행행에 있었던 일을 조사해야 한다는 논박이 오갔다. 황제는 태경을 어지럽히는 역도를 쫓으라고만 했을 뿐, 다른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세 번째는 황후였다. 좌승상이 파직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당시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던 진 귀인이 황후와 종인령 사이에 대해 알아냈다. 종인령이 시도 때도 없이 황후궁을 들락날락거리다 못해 아무도 배석하지 않은 채 단둘이서 만난다고 황제의 귀에 속살거렸다.

미모가 뛰어난 진 귀인은 입궁하고 얼마 되지 않아 황후에게 밉보여 큰 수모를 당한 적이 있었다. 황후궁으로 불려갔다가 작은 꼬투리가 잡혀 무릎을 꿇고 제 뺨을 치는 벌을 받았다. 태수의 딸로 귀하게 자란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모욕적인 일이었다. 그 후로 앙심을 품은 진 귀인은 황후의 뒤를 캐다 종인령과의 관계를 알아냈다.

진 귀인의 노력은 결실을 보았다. 병으로 쇠약해진 황제는 황후의 부정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익문사를 동원해 종인령을 구금하고 그의 서재에서 황후와 주고받은 서신을 찾아냈다. 분노한 황제는 황후를 연금시켰다.

그 당시 진혁위는 각각의 사건들에 대한 내막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중에 진상을 알고서는 작은 원한이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다시 생을 반복하면서 상대의 호의를 사고 약점을 찾는데 유용하게 썼지만, 당시에는 그저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상황이 악화될 때마다 태자는 악수를 두었다. 좌승상과 황후를 비호하다 황제의 역정을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마지막까지 태자를 포기하지 않았다. 폐태자라는 강수를 두어 사랑하는 아들이 정신을 차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방왕이 된 태자는 황제의 바람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황제에게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라고 생각한 방왕은 여름 동안 방탕한 나날을 보냈다. 매일같이 왕부에서 연회를 연다는 이야기가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반면에 북부에서 살아 돌아온 기왕은 전처럼 자신의 사람을 끌어모았다. 기왕의 사람들은 방왕의 무도함을 비판하며 비어 있는 태자의 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래 사이가 나빴던 기왕과 방왕은 서로의 얼굴만 보면 으르렁거렸다. 대전을 나서면 서로를 비난하며 다투었다. 그 와중에 가을이 깊어가던 무렵 황제가 조회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그때가 되어서야 황제가 폐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것도 약으로 다스릴 수 없는 폐적증(肺積症)이었다. 완치는커녕 서서히 상태가 나빠져서 죽음에 이를 것이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황궁에 퍼졌다.

강인한 육체와 강건함의 상징인 양인은 병도 상처도 빨리 나았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병의 징후가 급격하게 나빠지곤 했다. 뛰어난 활력 때문에 병마가 쉬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죽음이 기정사실화되자 황궁은 살얼음 위를 걷는 듯 긴장감으로 휩싸였다.

기왕이 움직인 것은 가을과 겨울의 경계인 입동이었다. 기왕은 제 사람들을 끌어모아 황궁에서 왕부로 돌아가는 방왕을 습격했다. 그 자리에서 방왕을 죽인 기왕은 지체 없이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의 수문장이 오문을 열어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벌인 일을 멈출 수 없던 기왕은 황궁을 둘러싸고 공격을 시작하였다.

당시 황궁을 지키는 금군부장 중에 삼 할이 기왕의 편에 붙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다 태경부의 경윤도 기왕의 사람이었다. 황궁은 거의 완벽하게 포위되었고, 안에서 정무를 보고 있던 고관들도 갇히게 되었다.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을 황자가 공격하는 것은 명백한 반란 행위였다. 하지만 황궁에 남아 있는 금군만으로 기왕의 군대를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날 황제의 부름을 받고 입궁해 있던 진혁위 역시 황궁에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황자라는 이유로 황제의 선택을 받았다.

황제는 진혁위에게 밀지와 병부(兵符)를 주며 태경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경해관(慶解關)의 군을 이끌고 역도인 기왕을 처결하라 명했다.

진혁위는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바보 같은 형제의 손에 명줄이 끝나는 것은 더 싫었다.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며 난장판을 만들어보겠노라 각오했다.

밤의 어둠을 틈타 조용히 황궁을 빠져나간 진혁위는 경해관의 군과 함께 돌아왔다. 기어코 황궁의 오문을 넘은 기왕의 목을 베고 그의 동조자를 모두 죽였다. 황궁의 돌바닥이 붉은 피로 흥건하게 고였다.

많은 이의 죽음과 함께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황제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는 충격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심화를 이기지 못한 황제는 겨우 정신을 차려 진혁위를 태자로 삼는다 유지를 남기고는 쓰러진 지 닷새 만에 숨을 거두었다.

진혁위는 그렇게 황제가 되었다.

*

“폐병이라고는 하나, 황제께서 이 시기에 쓰러지신 적은 없지 않습니까?”

전서구로 받은 소식은 여전히 파발보다 빨랐다. 황제가 쓰러졌다는 진혁위의 말에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한 류희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양성에서 귀환한 진혁위는 류희겸에게 지난 생의 일에 대해 모두 알려주었다. 태자가 방왕으로 강등되기 전후의 일은 확실히 복잡했다. 태자에게 일어났던 불행한 일은 이번 생에서도 대부분 일어났다. 다른 것이 있다면 가족을 모두 잃은 채제승의 행동이었다. 진혁위는 채제승의 사건에 개입하였다고 순순히 알려주었다.

류희겸이 놀란 것은 태자가 폐위되고 난 다음에 일어난 사건들의 흐름이 너무 급박하다는 것이었다. 황제가 불치병에 걸리고 북쪽으로 쫓겨났던 기왕이 돌아와 거병할 것은 당시의 류희겸으로서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쨌든 진혁위가 두 형님들의 싸움을 부추기려고 한 이유는 이해했다. 그와 별개로 지금 이 시기에 황제가 갑자기 쓰러진 것은 직전 생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그렇지. 기침이 부쩍 늘어 태의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피운 연초 때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전에는 다음 겨울에 급격하게 나빠졌었다. 지금이 아니지.”

“어찌 된 일일까요?”

“누군가 손을 썼을 것이다. 만독화를 섭취한 황제에게 독은 통하지 않지만, 사람을 상하게 하는 방법은 많이 있으니까.”

류희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독화는 만병통치약이 아니었다. 황제가 폐병의 징후를 보였으니, 증세를 악화시키는 약을 쓰는 것도 방법이었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기왕과 방왕은 아닌 게 확실하다. 아마도 황후가 아닐까 싶다. 종인령 사건 이후에 황후궁의 사람이 많이 바뀌어서 내부 정보를 알기 힘들어졌어.”

황후가 연금당하면서 동시에 황후궁의 사람이 대부분 바뀌었다. 진혁위가 심어둔 사람도 바뀌는 바람에 황후궁의 정보는 단편적으로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방왕도 기왕도 아니니 황후일 가능성이 제일 컸다.

원래 황후는 신년이 되기 전에 연금이 풀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황후의 친척인 고장유가 황실 사냥터에 큰 덫을 설치한 것이 알려지면서 연금이 연장되었다. 그래도 황궁 안에서는 여전히 황후의 영향력이 컸다.

황제의 병이 깊어지면 후계를 위해서라도 방왕을 다시 불러들일 거라는 계산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황후가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많았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곳에 계시면 태경에서 일어나는 일에 기민하게 반응할 수 없습니다. 왕야의 명령을 받는 군대가 있다고 하나, 그래서 더욱 견제받으실지도 모릅니다.”

류희겸의 진지한 조언은 모두 옳은 말이었다. 호양성도 은락성도 모두 대연국 동쪽 끝에 위치해 있었다. 황제가 쓰러진 시점에 태경에서 군권을 쥐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여러모로 공격받기 좋았다.

“곧 귀환하라는 명령이 올 것이다. 네 말대로 황제가 쓰러졌는데, 군권을 가진 황자가 멀리 있으면 좋지 않으니까. 빨리 돌아가서 두 형님들이 싸우도록 해야겠군. 그동안에 눈먼 돌에 맞지 않아야 하고.”

“예. 알겠습니다.”

“전하. 소인입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끝내자마자 바깥에서 고영수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양위조 장군이 진혁위를 뵙기 청한다고 알려 왔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진혁위는 매일 같이 바빴다. 지휘부의 회의를 주관하며 장군들의 신상필벌을 정하는 것부터, 병사들의 군량 보급까지도 신경 써야 했다. 직접 나서야 할 일이 많아지자 진혁위의 하루는 바쁘게 흘러갔다.

은락성을 점령하고 잠정적으로 전쟁이 끝난 지금은 전공을 가려야 할 때라 더욱 심했다. 매일 같이 장군들이 진혁위를 찾았다.

“매일 바빠. 쉴 틈이 없어.”

“힘내십시오.”

“귀비를 두고 가려니 내 마음이 아프구나.”

류희겸의 열의 없는 응원에 진혁위는 투덜거렸다. 어여쁜 귀비와 노닥거리는 것이 좋지 꼬장꼬장하고 성격 급한 장군들과 일하는 것은 별로였다.

“밤에 서찰 정리하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귀비밖에 없다.”

자각 없이 병을 주었다가 약도 주는 류희겸 때문에 진혁위는 웃음을 터트렸다. 뛰어난 무인인 류희겸은 일도 잘했다. 총관의 말에 의하면 류희겸은 왕부의 안살림을 군 예산을 짜듯 엄하게 살폈다고 했다.

이번 전쟁에서도 진혁위의 서류 작업을 여러 번 도와주기도 했었다. 일에 치인 진혁위는 진심으로 류희겸같이 똑똑한 부관이 하나 있기를 바랄 정도였다.

“신첩이 왕야의 힘이 되어드릴 수 있다니 기쁩니다.”

반듯한 류희겸의 대답에 진혁위는 이를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정면으로 맞부딪히겠다고 선언한 류희겸은 소리 없이 울다가 기력이 빠져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에 멀쩡한 얼굴로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류희겸의 언행은 전에 비해 적지 않게 바뀌었다. 무뚝뚝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자주 웃었다.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데 서슴없어졌다.

가장 가시적으로 달라진 것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스스로를 신첩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다음날부터 당장 행동으로 옮겼다.

평소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바람에 진혁위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같은 말을 하라고 했더니 망설임 없이 신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무슨 심경의 변화냐고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류희겸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정면으로 부딪히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냐며 덤덤히 대답했다. 한 번 정한 것을 꿋꿋하게 지키는 사내의 성정에 진혁위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지금껏 류희겸이 스스로를 소인이라고 불러도 내버려 두었던 이유는 따로 없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류희겸이 언사를 조심하기도 했고, 싫어하는 듯하여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 아주 가끔씩 신첩이라고, 서방님라고 말해 보라고 조르면서 류희겸의 난감한 침묵과 어이없어하는 눈빛을 즐겼다.

작은 기쁨이 사라지는 것은 아쉬웠다. 아니, 아직도 서방님라고는 쉬이 입에 올리지 못했기에 즐거움은 남아 있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에 서방님이라고 하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무엇보다 지금처럼 이렇게 한 번씩 류희겸이 바뀌었다는 것을 자각할 때면 웃음이 나왔다. 이제야 진실로 내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일은 많이 있지만, 같이 저녁 먹을 시간은 있다. 나중에 보자.”

저녁 약속을 잡은 진혁위는 류희겸의 배웅을 받고는 회의실로 향했다. 홀로 남은 류희겸은 자리를 정리했다.

영친왕의 귀비로 전쟁에 따라나선 류희겸에게는 공식적인 지위가 없었다. 하여 은락성까지 점령한 지금의 류희겸에게 남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류희겸은 넘쳐나는 시간을 알차게 보낼 줄 알았다.

*

계절은 봄의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한겨울에 치른 전쟁은 승리로 끝났지만 군인들의 훈련은 계속되었다.

류희겸 역시 전쟁 내내 개인 훈련에 집중했다. 또한 희일준의 창술을 지도하는 데 힘썼다.

무가에서 나고 자란 희일준은 무예 실력이 뛰어났다. 검과 활은 물론이고 마상 창술도 훌륭했지만 류희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서로 시간이 맞을 때면 두 사람은 창을 겨루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뿐이었지만, 다음에는 운문형이, 그리고 또 다음에는 희일준의 부관이 참여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만화대의 젊은 장수들도 어울리게 되었다.

말에 오른 류희겸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창을 휘둘렀다. 가장 덩치가 크고 힘이 좋은 장수도 열 합을 넘기지 못했다.

무엇보다 만화대의 젊은 장수들을 매혹시킨 것은 류희겸이 말 위에서 보이는 채찍 실력이었다. 말을 타고 적의 목을 채찍을 감아 낙마시키는 것은 먼 북쪽 유목민이 적을 사로잡을 때 쓰는 기술로, 류희겸은 그것을 자유자재로 선보였다.

류희겸은 채찍보다 창을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래도 마상 편술(鞭術)을 가르쳐 달라는 젊은 부장들의 요구에 흔쾌히 응했다. 겨루기를 하고, 서로의 기술을 선보이고, 의견을 나누는 것으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봄이 다가왔지만 바람은 아직 차가웠다. 희일준이 쉬는 김에 목을 축이자며 사람들을 모아 차를 마셨다.

은락성 동쪽에 자리 잡은 만화대의 연무장은 넓기만 하고 이렇다 할 시설물이 없었다. 들판에서 물을 끓이고 값싼 차를 낡은 잔에 마셨지만 류희겸은 개의치 않았다.

처음에는 친왕의 귀비에게 무례를 범하는 것이라 호들갑을 떨던 장수들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들에게 류희겸은 친왕의 귀비라기보다는, 희범영만큼 귀한 신분의, 무예가 뛰어나고 성격 좋은 상관이나 마찬가지였다.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차를 마시면 온갖 이야기가 오가는 법이었다. 작게는 개인사부터, 크게는 전쟁의 전략전술까지 격의 없이 떠들었다. 오늘의 화젯거리는 바로 희일준의 정혼 소식이었다.

“혼인을 합니까?”

뜨거운 차가 식기를 기다리던 류희겸은 뜻밖의 소식에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진혁위에게서 방왕이 된 태자가 희일준을 사위로 삼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류희겸은 마시던 차를 뿜어낼 뻔했다.

진혁위가 희범영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다고 했지만 혹시나 하고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희일준이 정혼을 했다니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예. 그리되었습니다.”

“우리 공자님 얼굴이 빨개지셨다.”

“그리되었대.”

“혼인을 하신다니 좋으신가 봅니다.”

“소장이 노파심에 미리 말씀드리지만, 혼례식 날에 술은 적게 드십시오. 신부님께 밉보입니다.”

류희겸과 함께 어울리는 만화대의 젊은 장수들은 희일준과 가까웠다. 희일준 역시 류희겸과 비슷하게 숙부인 희범영 밑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하여 만화대의 젊은 장수들과 격의 없이 지내곤 했다.

스무 살과 서른 살 사이의 젊은 장수들 중에 절반 이상이 미혼이었다. 그들은 희일준의 정혼 소식에 부러움을 숨기지 않았고, 또 기혼자 몇은 애도를 표했다.

짓궂다 할 수 있는 놀림에도 희일준은 싫다는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뺨을 붉힌 채 웃기만 했다. 혼인 자체가 좋다는 반증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누구입니까?”

“유성관(柳城關)의 장녀입니다. 할머님들끼리 동향이시라, 서로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음. 그렇습니다.”

류희겸의 두 번째 물음에 희일준은 수줍게 말을 얼버무렸다. 당연하게도 주위를 둘러싼 장수들이 적극적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신부의 이름은 허소윤(許昭贇). 나이는 희일준보다 두 살 어렸다. 두 사람은 원래 소꿉친구였다. 말도 타고 활도 잘 쏘는 허소윤은 여장부로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허가와 희가의 집안 어른들은 두 사람이 혼인을 할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년 전, 여름에 두 사람이 크게 말다툼을 한 이후로 절교를 해버렸다. 너랑은 절대로 혼인 안 하겠다고 서로 면전에서 말해 버리는 바람에 그 후로 얼굴도 보지 못했다.

희일준이 그만하라고 해도 짓궂은 장수들은 폭로를 멈추지 않았다. 젊은 공자님의 연애사에 다들 관심이 많았다.

“축하합니다. 희 공자.”

류희겸은 흐뭇하고도 아련한 마음으로 축하의 말을 건넸다. 사실 류희겸은 희일준과 허소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직전 생에서도 희일준과 허소윤은 절교를 한 상태였었다. 집안 어른들은 두 사람이 화해하고 혼인하기를 은근히 바랐으나, 둘은 서로 쟤만은 절대 안 된다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두 사람이 절교를 하게 된 계기는 사소했다. 어느 여름날, 희일준이 허소윤의 얼굴이 많이 탔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 것이 문제였다.

너울을 쓰지도 않은 채 말을 타고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허소윤의 얼굴이 볕에 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방심(芳心)에 눈 뜬 열여섯 살의 처녀가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적이었다.

충격을 받은 허소윤이 찻잔을 떨어트렸는데, 하필이면 희일준이 아끼는 노안도(蘆雁圖) 위로 차가 쏟아졌다. 두 사람은 크게 싸웠다. 서로 절교장을 보내고 난리도 아니었다며 직전 생에 희범영이 한탄을 담아 말한 적이 있었다.

류희겸은 허소윤을 만난 적이 없으니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짐작조차 못 했다. 하지만 희일준에게는 분명 미련이 있었다. 자신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나중에라도 사과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러다 호양성 전투에서 희범영이 죽고, 희일준 역시 북방으로 쫓겨나다시피 하여 죽어버리자 그들의 인연은 끝나버렸다. 허소윤이 남쪽 지역의 어디로 시집을 갔다는 것이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이었다.

직전 생에서 희일준은 혼인을 하지 않고 죽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운명이 바뀐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희범영은 무사했고, 희일준 역시 오른손이 멀쩡했다. 많은 것이 바뀌고 있는 중에 희일준의 혼인 소식은 무엇보다 반가웠다.

직전 생에서 류희겸은 희일준과 가깝게 지냈다. 희가의 객여로 일신을 의탁하면서 마치 호위처럼 희일준의 뒤를 지키며 하루가 멀다 하고 그에게 창술을 지도했다. 호양성 전투에서도 서로 등을 지키며 같이 싸웠다.

류희겸은 희일준을 아꼈다. 자신이 구하지 못한 사촌 동생과 겹쳐 보기도 했다.

직전 생에서는 희일준이 사지로 가는 것을 그냥 지켜봐야만 했던 것이 씻을 수 없는 회한으로 남았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껏 그의 혼인을 축하해 줄 수 있었다. 그게 너무 좋았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가지고 있는 돈을 탈탈 털어 금광을 산 것은 잘한 일이었다. 금광의 시설은 많이 낡아 새로 지어야 했지만, 가장 중요한 갱도는 튼튼하여 채굴은 순조로웠다. 강남의 쌀을 잔뜩 사들이고도 금은 여유로웠다. 희일준의 혼인 선물로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

류희겸은 한혈마를 물망에 올렸다. 황금을 가지고 있어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 한혈마였다. 처음 진혁위에게서 한혈마를 선물로 받았을 때는 그가 무슨 도술을 부렸나 했었다.

알고 보니 서역과 거래를 하고 있는 상단을 가진 진혁위는 혈통 좋은 말을 잔뜩 사들였고, 태경 서쪽에 커다란 마장을 품은 장원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진혁위가 태경의 황족과 귀족들에게 인기가 많은 이유는 한혈마가 돌아다니는 마장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그때서야 들었다.

직전 생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진혁위는 사내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을 때, 마장에 뛰어다니는 말을 보여준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심양설의 말로는 태경의 돈 많은 호사가들이 황금을 싸 들고 와서는 영왕부 마장의 가장 좋은 수말을 자신의 암말과 짝지어 주십사 부탁한다고 했다. 그때는 그저 웃어넘겼지만 지금은 왠지 호사가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진혁위에게 부탁해 볼까?

잠시 고민하던 류희겸은 금방 포기했다. 자신의 눈치가 별로이기는 하지만, 진혁위가 희일준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이 희일준을 깊이 아끼기 때문이었다. 쓸데없는 질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더 삐뚤어질 남자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혼은 하였는데, 허 낭자께서 조건을 걸었답니다. 공자님이 진실로 사과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공자님이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니까요. 당장에 태경으로 달려가고 싶은데 몸은 여기 있으니 애가 닳아 있습니다.”

폭로는 끝이 없었다. 이곳에 모인 장수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왕천(王玔)은 희일준의 마술 스승이었다.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낸 터라 희일준은 고민거리를 그에게 많이 털어놓곤 했다. 문제는 고민거리가 비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왕 사부!”

왕천의 폭로에 희일준이 뺨을 붉히며 외쳤다. 그러자 왁자지껄 웃음이 퍼졌다.

“전쟁이 끝났으니 곧 태경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에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죠. 황제께서 희 장군님께 이곳을 지키라 명하시면. 윽. 왜 때립니까?”

눈치 없는 장수 한 명이 말을 하다가 옆구리를 얻어맞았다. 사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황제가 새로이 되찾은 강역을 희범영에게 지키라 명한다면 희일준의 귀환은 꽤 늦어질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자, 희일준이 야단을 맞은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졌다.

“서신을 쓰는 것은 어떻습니까?”

류희겸이 온건한 방법을 제시했다. 멀리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다면 서신이 최선이었다.

“제가 글재주가 없습니다.”

“재주보다는 마음을 담아 쓰시면 됩니다. 멀리 있어 당장에 사과하러 갈 수가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요. 허 낭자께서 이해해 주실 겁니다.”

“오오.”

“그것입니다.”

류희겸의 첨언에 장수들의 반응이 좋았다. 다들 감탄하며 좋은 방법이라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길게 쓸 것 없이 핵심만 전하면 된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해라. 다음부터 절대로 안 그러겠다고 맹세하는 것은 무조건 써야 한다. 쓸모 있는 조언은 끝없이 이어졌다.

미혼자도 기혼자도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당장에 서신을 쓰라며 희일준의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훈련이 끝났다.

*

“유성관의 장녀라고?”

“예. 아십니까?”

“두어 번 만난 적 있다. 열셋이었는데, 자그마한 몸으로 기가 막히게 말을 탔지. 귀비의 솜씨에 견주지는 못하지만 어린 여장부였다. 두 사람이 꽤나 친하였는데, 언젠가부터 교류가 없었지. 결국 혼인을 하는군.”

진혁위는 그가 말했던 대로 같이 석반을 먹으러 시간을 내었다. 전쟁이 끝났기에 식탁 위는 전보다 조금 더 호화로워졌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 류희겸은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희일준이 정혼하였고, 상대가 유성관의 장녀라고 말이다.

“신첩이 알기로는 희가의 대공자와 유성관의 허 낭자가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습니다. 두 집안의 어른들도 혼인을 바라고 있었거든요. 잘 어울릴 겁니다.”

“그래. 잘 어울릴 것이다.”

“여쭤볼 게 있습니다.”

한혈마를 희일준의 혼인 선물로 하고 싶다고 하면 진혁위가 싫어할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류희겸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무엇이냐?”

“대공자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하고 싶어서 그런데…….”

“싫다.”

류희겸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진혁위가 싫다고 딱 잘라 말했다. 웃음기조차 없어 여지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류희겸은 포기하지 않았다.

“끝까지 말을 들어보셔야지요.”

“듣지 않아도 다 안다. 본왕이 가진 것 중에 희가의 대공자에게 선물하려고 귀비가 이리 청할 것은 하나뿐이지 않느냐.”

한혈마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진혁위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렸다. 정말 눈치가 귀신같았다.

“무게의 두 배를 금으로 치르겠습니다.”

“그보다 더 많은 금을 주겠다는 사람도 많다.”

진혁위의 말은 사실이었다. 태경에는 부자가 많으니 많은 금을 주고 한혈마를 사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괜히 서운해지려던 류희겸은 문득 이 시점에 자신이나 진혁위가 희일준에게 혼례 선물이라고 한혈마를 주면 문제가 될 거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하는 선물이라고 하나 다른 사람에게는 진혁위가 희범영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고 비춰질 수 있었다.

그렇게 류희겸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다물자 오히려 진혁위가 멈칫했다. 류희겸이 희일준을 아끼는 걸 아는데 왜 아무 말도 없나 싶었다.

“왜 말이 없어? 서운한 거냐?”

“아닙니다. 신첩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런 시기에 왕야께서 대공자에게 혼례 선물로 한혈마를 주었다가는 문제가 될 것입니다. 대공자의 혼인이 언제인지는 모르나,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그가 혼인을 할 때면 다 끝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물은 그때 가서 생각하겠습니다.”

“희일준에게 한혈마를 혼인 선물로 줄 사람은 귀비가 아니라 본왕이다. 귀비는 다른 것을 생각해 두어라.”

“……?”

눈을 둥그렇게 뜨는 류희겸을 보며 진혁위는 빙긋 웃어주었다. 류희겸에게 한혈마를 받은 희일준이 얼마나 좋아할지 안 봐도 눈에 훤했다. 그럴 바에야 자신이 희일준의 호의를 사는 게 나았다. 황금보다 비싼 한혈마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다.

“본왕의 한혈마이니 본왕이 직접 생색낼 것이다. 희일준이 귀비만 좋아하는데, 한혈마로 꼬셔지는지 봐야겠다.”

“대공자가 좋아할 겁니다.”

“그러겠지. 희일준이 본왕을 더 좋아하게 만들겠다.”

“예. 그러십시오.”

당당하기 짝이 없는 진혁위의 선언에 웃음을 터트린 류희겸은 쉬지 않고 수저를 놀렸다. 반나절 내내 창을 휘두른 덕분에 입맛이 돌았다. 매콤하게 볶은 돼지고기도, 삶은 콩도 모두 맛있었다.

“아, 그렇지. 희일준이 정혼을 하였다니 기억이 나는군. 주화령이 정인과 무사히 도망쳤다. 제대로 소문이 퍼져서 문강공이 난감하게 되었어.”

류희겸은 두 박자 늦게 주화령이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황제가 주선한 진혁위의 혼례 상대였다. 진혁위는 그녀가 정인과 도망칠 터이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만만했었다.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결국 진혁위의 말대로 된 모양이었다.

“기억납니다.”

“본왕이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하였지?”

“예.”

“그리 알면 되었다.”

직전 생과 달리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어떤 것은 그대로였다. 주화령이 도망치자 문강공이 곤란해지는 것은 전과 다름없었다.

류희겸은 언젠가 진혁위가 혼인도 하지 않고 황제가 되었다고 한 것을 떠올렸다. 그의 말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쉬운 일도 아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기에 류희겸은 아무것도 예단하지 않았다. 그저 평정심을 유지한 채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매콤한 돼지고기볶음이 맛있었다.

“귀비가 그리 웃으면 무서운데.”

“무엇이 무서우십니까?”

“황제께서 다시 혼사를 주선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 안 하잖아.”

“코앞에 닥치지 않은 일을 걱정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왕야께서 혼인을 하시게 된다면 그때 생각하겠습니다.”

“이런.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았군.”

딱 잘라 말하는 류희겸 때문에 진혁위는 웃고 말았다. 차돌멩이 같은 반응이 류희겸다워서 좋기는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만 좋아해 달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을 남자라는 것이 아쉬웠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성격은 류희겸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했다. 류희겸은 그 자신이 황후가 될 것도, 그리고 다른 후궁이 생기지 않을 것도 믿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혼인과 혈연으로 이어진 처족은 황자와 황제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주기 마련이었다. 힘이 강해진 외척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다 못해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꽤 많았다.

유능한 황제라면 그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하는 법이었다. 물론 황제에 따라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했다.

고금의 역사를 뒤지면 혼인 자체를 하지 않거나, 혹은 황후 없이 후궁만 두었던 황제가 몇 있었다. 때로는 황후의 가문을 멸문지화하면서 황제의 권력을 강화했다.

진혁위는 역사상 처음으로 황후만을 둔 황제가 되어볼 작정이었다. 그것만큼은 정말 자신 있었다.

“본왕은 귀비밖에 없다.”

“예.”

“그러는 거 아니다. 귀비도 답을 해주어야지.”

열의 없는 류희겸의 짧은 대답에 진혁위는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지정해 주었다. 막 고기를 집으려던 류희겸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진혁위는 환하게 웃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니더냐?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와? 나만 한 사내가 또 없을 텐데?”

류희겸은 결국 젓가락을 든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뻔뻔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남자는 이상하게도 미운 구석이 없었다. 그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너와 비무를 하고 싶다고 당당히 청하던 친왕은 언제나 반짝반짝거렸다.

“신첩에게도 왕야뿐입니다.”

예전이었다면 침묵하거나 회피했을 류희겸은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당신뿐이다. 소리 내어 말하자 진정으로 진혁위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생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진한재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다는 것을 아는 것도 오로지 진혁위뿐이었다. 인생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상대는 아주 특별하기 마련이었다.

“귀비에게 본왕뿐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손발이 다 간지럽다.”

“사실입니다. 왕야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하하. 군자는 귀에 단 말을 멀리해야 한다는데, 본왕은 글렀다. 귀비의 말 한마디에 이리도 기분이 좋아진다.”

정말 기분이 좋은 듯 화사한 미소를 짓는 진혁위 덕분에 류희겸은 손발이 간지럽다 못해 가슴이 울렁이는 기분을 맛보았다. 입을 열었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진혁위를 따라 웃고 말았다.

“그렇지. 반계효(潘桂孝)가 귀비에게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다. 만화대만 아니라 진화대도 보살펴달라고 말이다. 편술(鞭術)을 배우고 싶어 한다더군.” 

“아……. 신첩이 실수를 하였군요.”

류희겸은 진혁위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알아챘다. 영왕부의 사병은 대부분 기병으로 진화대에 속해 있었는데, 반계효는 그들을 통솔하는 장군이었다.

희일준에게 창술을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희가의 만화대와 어울리며 훈련을 하게 되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영왕의 귀비인 자신이 영왕부의 사병을 홀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군의 사기를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실수였다.

“실수는 아니다. 만화대의 실력이 부쩍 는 것이 눈에 보이니, 진화대의 녀석들이 배가 아픈 모양이다.”

“대공자에게 창술을 가르치기로 한 약속은 유효하니, 진화대는 태경으로 귀환한 후에 봐주도록 하겠습니다.”

“귀찮지 않으냐?”

“신첩이 무가에서 나고 자란 터라, 익숙합니다.”

평생 검을 쥐고 살았던 류희겸은 왕부의 안살림을 쥐락펴락하는 것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대신에 재주 있는 병사들을 굴려 실력을 키우는 것이 더 좋았다.

“그건 귀비의 뜻대로 해라. 다만 험한 일을 계속하니 귀비의 고운 손이 거칠어져서 걱정이다. 왕부로 돌아가면 심양설에게 살피라 해야겠다.”

“신첩도 더 신경 쓰겠습니다.”

진혁위의 감시 속에 류희겸은 전쟁이 시작되고 매일 같이 얼굴과 손발에 장미수와 향유를 발랐다. 그러나 전투와 훈련이 매일 같이 반복되면서 손에 굳은살이 사라지지 않았다.

언젠가 진혁위가 거칠어진 류희겸의 손을 붙잡고는 꽤나 진지하게 속상해했다. 화살이 스쳐 간 이마에 아주 옅은 흉터가 남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귀비를 귀하게 여겨야 하는데, 험한 일만 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했다.

류희겸으로서는 손발이 거칠어지고 흉터가 남는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도 진혁위가 속상해하니 신경 쓰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갔다. 평화로운 하루였다.

*

닷새 후, 황제의 교지가 도착했다. 한 계절 동안 이어진 전쟁이 끝나고 승전 장군이 된 진혁위는 태경으로의 귀환을 명받았다.

파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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