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章
오후의 태양이 기울고 있었다. 진혁위는 높은 담이 이어진 황궁의 길을 따라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보름의 연회를 즐기는 중추절과 달리 중양절은 공식 휴일이었다. 중양절에는 전통에 따라 가족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가는 등의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혁위 역시 황제의 부름을 받아 제사에 참석해야 했다. 향냄새가 가득한 제사도, 태자가 시비를 걸어오는 연회도 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간단한 연회가 끝나고 난 다음에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는 것도 일종의 행사라면 행사였다.
혜비 금채영은 평범하게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장성하도록 혼인하지 않은 아들을 걱정했다. 여인이고 사내이고 상관하지 않을 터이니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라고 간절히 말했다.
나이를 스물한 살이나 먹어도 어머니의 잔소리는 듣기 싫은 법이었다. 진혁위는 알아서 하겠다고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정수궁을 나섰다. 황궁까지 배행한 우소진이 그러시면 안 된다고 한마디 하는 것도 그냥 흘려들었다.
사실은 조금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금채영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라고 했을 때부터 누군가의 얼굴이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겨우 접문 한 번 한 게 전부였지만, 입술을 맞댄 사람은 류희겸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희가를 방문했던 그날에 측비가 되겠냐고 물은 것은 반은 진심이었다. 따지고 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류희겸은 화진국 출신의 변절자라고 하지만 신분은 양민이었다. 그리고 천무동에서 살아 돌아온데다가 황제에게 만독화까지 바쳐 충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조금 무리를 한다면 측비로 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류희겸이었다. 측비가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바로 정색하며 질린 얼굴을 했다. 진혁위도 싫다는 사람을 측비로 들여 앉힐 생각은 없었다.
줄기줄기 이어지던 생각이 결론에 이르렀을 때 진혁위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후궁전에서 오문까지 가려면 중문을 몇 개나 지나야 했는데, 그중 하나가 황후궁으로 가는 갈림길에 위치했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황후궁 쪽으로 난 길에서 걸어오는 류희겸과 마주쳤다.
“류희겸이잖아?”
진혁위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류희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류희겸의 행색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걸음걸이는 어딘가 불안했고 열이 오른 듯 붉은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평소라면 예의 바른 미소라도 지을 사람인데 마치 울 것처럼 보였다.
그제야 진혁위는 류희겸이 혼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류희겸이 입궁을 할 때면 희범영이나 희일준이 동행했다. 황제의 충신으로 인정받았지만, 안정되지 못한 류희겸의 신분 탓에 서로 눈이 닿는 거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길 안내를 하는 태감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예삿일이 아니라는 느낌에 진혁위는 류희겸 가까이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느껴졌다.
“무슨 일이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기는. 무슨 상황인지 말을 해야 도와줄 것 아니냐.”
진혁위는 류희겸 앞에 서서는 멀찍이 떨어진 태감이 듣지 못하도록 작고 빠르게 속삭였다. 단순히 귓가에 속삭인 것뿐인데, 류희겸은 뭔가에 놀란 듯 긴장했다.
“류희겸?”
“소인이, 가능한 빨리 황궁을 나가야 합니다.”
“나가기만 하면 돼?”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그러니까 쉴 곳이 필요합니다. 사고는 치지 않았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왕야.”
역시나 작게 속삭이는 류희겸의 목소리는 꺼질 듯이 낮으면서도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고열과 떨림을 보자면 심한 고뿔이거나 열병이었다.
“아파? 아프면 태의를 봐야지. 본왕이 이래 보여도 친왕이다. 태의를 불러주겠다.”
“그게 아닙니다. 황궁만 나가면 됩니다.”
“알았다.”
류희겸이 너무 절박해 보였기에 진혁위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았다. 류희겸을 안내하던 태감에게 은전을 쥐여주고는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황궁을 빠져나왔다.
“다 왔다. 이제 어디로 갈까? 희부? 다관? 아니면 영왕부? 희가의 사람을 불러줄까? 무엇을 타고 왔느냐? 말을 탈 상태는 아닌 것 같은데. 본왕의 마차가 있다. 어떻게 하겠느냐?”
진혁위가 나타나자 대기하고 있던 호위와 시종들이 마차를 대령했다. 평소 말을 타고 다녔지만 오늘은 황제와 금채영에게 바칠 선물이 있어서 마차를 가져온 참이었다.
“마차가 필요합니다. 희부로 가주십시오.”
“좋다. 본왕이 끝까지 책임져 주지.”
간절한 부탁에 진혁위는 흔쾌히 류희겸을 마차에 태웠다. 우소진을 시켜 오문 앞에 있는 희가의 시종들에게 류희겸을 데려간다고 알리라고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 사람이 오르자 마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친왕의 마차는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앉아 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진혁위는 꼿꼿하게 앉은 류희겸의 상태가 갈수록 나빠진다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특히 마차가 덜컹거릴 때면 흠칫 놀라면서 이를 악물었다.
“이제 황궁에서 멀어졌으니 무슨 일인지 말해도 된다. 얼마나 아프길래 그 모양이냐? 칼에 맞았어? 독? 만독화를 먹었으니 만독불침이잖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지금 본왕을 능멸하느냐? 이렇게 식은땀을 흘리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믿어?!”
고집을 부리는 류희겸의 어깨를 붙잡은 진혁위는 생각보다 심한 열기에 놀랐다. 한껏 몸을 움츠리는 류희겸의 반응 또한 정상이 아니었다.
“화상이라도 입은 것이냐?”
“아……닙니다. 읏.”
“뭐가 아니야.”
“손을 놓아. 흡. 놓아주십시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어깨를 잡은 진혁위를 밀쳐내려는 손은 뜨거웠고 힘도 없었다. 거기다 진혁위를 올려다보는 눈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긴 속눈썹이 눈물에 젖어 뭉쳐졌다.
“울 만큼 아파?”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버럭 소리를 지른 류희겸이 다시 진혁위를 밀쳐냈다. 하지만 진혁위는 그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놓아……. 흐읏. 놓아주십시오. 왕야.”
단순히 손을 잡은 것뿐인데 눈을 질끈 감은 류희겸은 자지러졌다. 홍조가 가득한 얼굴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괴롭고 고통스러운데도 습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는 야하게 울렸다.
머릿속에 번쩍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마 싶었지만 진혁위는 류희겸의 상태가 어떤지 조금 늦게나마 알아차렸다.
“설마, 최음약을 먹었어?”
“부디, 놓아, 주십시오.”
고개를 푹 숙인 류희겸의 목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졌다. 목덜미는 물론이요, 귀끝까지 새빨개진 류희겸을 보며 진혁위는 인상을 썼다. 얼마나 독한 것을 삼켰는지는 모르지만, 이 상태가 되고도 지금까지 참은 것이 미련했다.
“미련하기는. 희부에 가자고 할 게 아니라, 사정을 말하고 기루에 가자고 해야지.”
“괜찮,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그거 참는 사내 못 봤다.”
“희부로, 가주십시오.”
“희부에 정인이라도 있는 것이냐?”
류희겸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저었다. 필사적인 절박함이 느껴져서 진혁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기루를 마다하는 것은 그냥 고집이었다. 이런 건 참는다고 참아질 게 아니었다.
당장에 기루로 가자고 밖에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마차가 멈췄다.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긴 했지만 몸을 뜻대로 가누지 못하는 류희겸이 균형을 잃고 진혁위에게 쓰러지다시피 안겨버리기에는 충분한 충격이었다.
“흐윽.”
희미한 신음 소리에 진혁위는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루로 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있음을 떠올렸다.
진혁위는 자신의 품에서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는 류희겸을 고쳐 안았다.
“내가 도와주마.”
“……네?”
“도와준다고. 우리는 접문도 한 사이잖아.”
“?!”
품에 안고 있기에 류희겸이 흠칫 놀라다 못해 숨도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상당했다. 이 와중에도 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된다.”
“싫습니다.”
“무정한 사내로군. 별수 없지. 그럼 기루로…….”
“흐으읏. 읏. 으.”
싫다 하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진혁위는 류희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 순간에 류희겸이 흐느끼다시피 하며 몸을 떨었다. 어느 모로 보나 파정을 한 모양새였다. 열을 내는 남자가 헐떡임조차 자제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내가 자신의 품에서 발기하고 파정했는데도 싫거나 혐오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목이 타고 아래에 열이 몰렸다.
“죄, 죄송합니다.”
진혁위는 자신의 품에서 허둥거리며 벗어나려는 류희겸을 꽉 끌어안았다. 등을 붙잡은 손등 위로 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왕야…….”
덜덜 떠는 류희겸의 저항은 연약하기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혁위는 류희겸의 얼굴을 잡아 올렸다.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린 검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혼란과 수치심, 그리고 욕망이 뒤범벅된 얼굴은 야하기 짝이 없었다.
“허락한다고 해.”
“……?!”
싫으냐고 물으면 당장에 싫다고 대답할 사내가 멈칫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자기도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에 그를 취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싫다는 사람과 억지로 할 생각은 없었다.
간절한 애원은 최후의 양심이자, 스스로에게 하는 경고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싫다고 하면 당장에 마차를 뛰쳐나갈 것이다. 류희겸이 마차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 간에, 그가 바라는 대로 희부에 던져버리고 잊어버릴 거라고 마음먹었다.
“허락한다고 하라고.”
“왕야…….”
류희겸이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눈물에 젖은 속눈썹에 손을 대고 싶다고 생각하며, 진혁위는 거의 입맞춤을 할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내가 무뢰한은 아니다. 그저 접문이 하고 싶을 뿐이야. 그보다 더한 것도. 허락한다고 해. 그다음은 다 내가 책임질 테니까.”
대답 대신, 진혁위의 입술에 바짝 마른 류희겸의 입술이 닿았다. 류희겸의 의지인지, 아니면 마차의 움직임에 몸이 휘청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따질 여력도 없었다. 부드러운 감각에 머리끝까지 저릿저릿하며 희열이 퍼졌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먼저 입술을 머금은 것은 류희겸이었다. 진혁위는 입술을 쓸고 입 안으로 들어온 류희겸의 혀를 빨았다. 오싹한 열기와 더불어 입 안에서는 국화향이 퍼졌다.
*
국화차를 한 모금 마시던 진혁위는 노도처럼 밀려드는 과거의 기억에 쓴웃음을 지었다. 며칠 전, 중양절 연회에서 국화주를 마시면서도 같은 기억을 떠올렸었다. 추억을 담은 향기의 힘이 이렇게나 강력했다.
“차도 함부로 못 마시겠군.”
그나마 국화주나 국화차를 즐겨 마시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가는 술이나 차를 마실 때마다 야한 기억을 떠올려야 할 판이었다.
마차에서 입맞춤을 하며 뒤엉키기는 했다. 하지만 교합까지는 할 수가 없어 왕부에 도착할 때까지 겨우 참았다. 혼자 힘으로 걸을 수가 없었던 류희겸을 업고 침전으로 향했다. 눈치가 빠른 우소진이 시종들을 모두 내보내고 나서야 신음을 흘리는 류희겸의 입술에 다시 입맞춤을 할 수 있었다.
첫 교합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뜨거운 열을 내며 흐느끼는 사내는 야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날, 정신을 차린 류희겸은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며 비장하게 부복했다. 끝까지 머리를 들지 못하는 그에게 농담은 통하지 않았다. 마침 희일준까지 왕부를 찾아와 류희겸을 기다리는 바람에 다음에 보자는 약속만 하고는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류희겸은 자신을 노골적으로 피해 다녔다. 눈만 마주쳐도 사냥꾼을 만난 사슴이라도 된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잽싸게 모습을 감추었다. 너무 대놓고 피하는 게 보여서 부아가 치밀었다.
참을성이 끊어진 것은 화진국과의 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참다 참다 희범영 장군의 진지까지 찾아가 류희겸을 대면했다. 민망하여 그랬다는 류희겸에게 다시는 피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흘러서는 교합 직전까지 가는 일이 생겼다.
그때 정인이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진하게도 말이다.
“진짜 순진했지.”
다시 국화차를 들이킨 진혁위는 아련하고도 부끄러운 추억을 치워버리고는 창밖을 보았다. 다관의 삼 층은 거리를 내려다보기 좋은 위치였다.
수많은 사람이 대로를 분주히 오갔다. 태경의 서시는 사막과 바다를 건너 서역에서 온 이국적인 물건들이 가득했다. 피부가 하얗거나 검은 색목인(色目人)도, 그리고 머리에 터번을 두른 회회인(回回人)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다관의 개인실에 앉아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진혁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대연국의 수도인 태경은 대륙을 통틀어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그런 만큼 간자도 많이 돌아다녔다.
태경의 성문에서는 호패나 상단의 거래증을 확인하지만 그것이 만능은 아니었다. 커다란 마차나 짐에 숨어서 들어오거나 호패를 위조하는 이들이 매년 잡혔지만 뿌리가 뽑히지는 않았다.
돈과 권력, 그리고 사람이 모이는 만큼 정보를 사고파는 이들도 많았다. 발품을 팔아 머릿기름을 파는 상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혁위는 채제승을 시켜 영왕부의 여종을 사주한 뒤를 캤다. 이름은 소혜엽. 그는 태경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로 돈을 받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 일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행적이 확실했기에 간자라고 보기에는 애매했다. 아마도 그 역시 다른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류희겸에게 서신을 보냈을 것 같았다.
몰래 소혜엽을 잡아들여 배후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서시에서 장사를 한다는 상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문제는 서시에서 비단 장사를 하는 상인 역시 다른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쪽은 얼굴만 텄을 뿐, 이름도, 무엇을 하고 사는 건지도 몰랐다. 아주 가끔 나타나 어려운 일을 한 번씩 맡긴다고 했다. 추적은 거기서 끊겼다.
그래도 진혁위는 중양절에 푸른 등을 달지 못하게 했다.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안전이 중요했기에 류희겸에 대한 호위 역시 더욱 강화시켰다.
그 와중에 류희겸은 아무 일 없이 중양절을 보냈다. 원비가 아니었기에 황궁에서 열리는 중양절 제사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다만 연금 중인 황후가 희일준에게 손을 쓸까 염려하여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였다.
복수심에 제 목숨도 아무렇지 않게 내다 버릴 류희겸이 희일준을 챙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희일준이 마치 강아지처럼 류희겸을 따르는 것도 꼴 보기 싫었다. 형님이 생긴 것 같다나? 밝은 성격에 넉살도 좋은 희일준은 어디에서나 인기가 많았다. 류희겸 역시 아닌 척하면서 희일준을 아꼈다.
둘이 화기애애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자면 당장에 떼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희일준이 류희겸에게 도움이 될 걸 알기에 참아야 했다.
“흠.”
진혁위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상태가 단순한 의처증보다 심각하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여기서 더 나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류희겸은 아직도 음인이 아니었다. 이제 곧 전쟁터로 나서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원래 이렇게까지 조바심을 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류희겸과 관련된 일이라서 그런지 초조해지고 만다.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또다시 잃을 수 있다는 불안이 뒤섞이기를 반복했다. 처음에 비하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아직 멀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정군왕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쯧쯧, 혀를 차던 진혁위는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의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나 진영겸을 맞이했다. 한 달여 만에 만난 진영겸의 얼굴은 수척했지만 눈빛은 형형하게 빛났다.
“오셨습니까? 형님.”
“일찍 왔구나.”
“형님이 기다리실까 봐요.”
“내가 늦었다는 거구나.”
“아주 늦지는 않으셨습니다.”
“미안하다. 앉자.”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곧 다관의 일꾼이 나타났다. 일꾼이 주문을 받고 사라지고도 진영겸은 입을 열지 않았다. 진혁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무거운 침묵을 지키던 진영겸이 운을 뗀 것은 차를 내려놓은 일꾼이 물러난 다음이었다.
“며칠 전에 부황의 부름을 받고 입궁했다. 네 말대로 말이다. 그리고는 죽지 않았지. 그러니 이제 말해라. 네 꿍꿍이가 무엇이냐?”
진영겸은 날카롭게 물었다. 중양절을 이틀 앞두고 황제의 부름을 받았을 때, 진영겸은 진혁위의 경고를 떠올렸다. 이 년 만에 만난 황제가 과연 죽으라 명할 것인가 하고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황궁으로 향했다.
황제는 자신의 아들에게 죽으라는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다만 활을 주며 시위를 당겨보라고 했다. 독을 마셔 오른팔을 쓸 수 없게 된 진영겸에게는 가혹한 주문이었다.
쓸모없는 놈이라는 악담이 진영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건 죽으라는 명령보다 더한 것이었다. 황제의 짧은 한마디에 지금껏 위태롭게 유지하고 있던 자존심이 무너졌다. 쓸모없는 황자란 죽어야 하는 법이었다.
이대로 왕부에 돌아가 죽어야겠다는 격렬한 충동에 휩싸였을 때, 진혁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죽지 마라. 살아서 원수의 끝을 지켜봐라.
웃기게도 비참함과 죽음의 충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동시에 진혁위에게 따져 물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진혁위를 정군왕부로 부르는 것도, 그렇다고 자신이 영왕부를 찾아가는 것도 사람들의 눈이 걱정되었다. 하여 복잡한 서시 한가운데 있는 조용한 다관을 약속 장소로 정했다.
진영겸이 알고 있는 진혁위는 황자의 책무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산으로 들로 사냥을 다니며 황위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의 행보는 권력과 조금씩 확실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문 자자한 귀장군을 앞세워 호양성을 되찾아 황제에게 바친다면 판도는 또 달라질 것이다.
그런 그가 병신이 된 형제를 찾아 죽지 말라고 한 의도가 궁금했다.
“서천에서 문정후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농민의 땅을 무차별적으로 강탈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혹시 형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금시초문이다.”
“황제께서는 백성의 땅을 빼앗는 자를 제일 경멸하시죠. 나라의 역적이라고 공언하실 정도로 말입니다. 하여 전 좌승상의 내형인 안용옥을 일벌백계하셨고요. 태자께서 안용옥을 구명하려고 하는 대신에 문정후 장효준을 탄핵해야 하는데, 그럴 생각이 없어 보여서 큰일입니다.”
“설마? 내가 문정후를 탄핵하길 바라느냐? 태자를 대신해?”
뜻밖의 설명에 진영겸은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대꾸하고 말았다. 더 큰 뜻이 있는 줄 알았는데, 겨우 장기말로 쓰려는 모양이었다.
“그랬다간 형님께서 다시 독을 마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2형께서는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너.”
“태자가 문정후를 탄핵하는 게 옳습니다.”
진영겸은 조금 늦게야 진혁위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문정후를 탄핵할 생각이 없는 태자를, 진혁위가 움직이게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아직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형님께서 태자 전하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태자 전하는 모르게 말입니다.”
“태자를 도와?”
“태자 전하에게는 좌승상이 없고, 소제에게는 명망이 없으니 말입니다. 청렴한 학자들이 태자 전하와 함께 문정후를 탄핵한다면 힘이 실리겠지요.”
진혁위는 진영겸을 이렇게 써먹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태자가 예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안용옥은 가산을 몰수당하고 서인으로 강등당해 귀양을 갔다. 그에 반발한 태자가 문정후를 탄핵하는 흐름으로 이어져야 했다. 하지만 천우상단과 금서를 엮는 계략이 실패한 이후로 태자는 자신에게만 집착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좌승상이 실각한 영향이 컸다. 낙향한 좌승상이 태자에게 이것저것 조언하고 있었지만 태자는 그것을 무시했다.
좌승상이 사라지자 태자가 조정에 미치는 영향력도 줄어들었다. 기왕이 제 사람들을 이끌어 일사불란하게 안용옥을 탄핵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니 문정후가 탄핵을 당하더라도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진영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의 외가는 청렴한 학자 집안이었다.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직 재야 학자들의 힘을 끌어모을 정도는 되었다.
“너……. 태자의 밑으로 들어간 것이냐?”
엄청난 오해를 하는 진영겸 때문에 진혁위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낭랑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하하하. 재미있군요.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왜 태자를 도우려는 것이냐?”
“문정후와 서천도독이 위험한 대화를 자주 나눈다지요.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따져 보면 정말 위험한 대화입니다.”
위험하다고 하면서도 진혁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미소를 지었다. 진영겸은 이미 마비되어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오른손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문정후는 기왕의 장인으로 호전적인 성격이었다. 문정후가 서천도독과 함께 무력 반란을 일으킨다 하여도 놀랄 일은 아니다.
오히려 소름 끼치는 것은 따로 있었다. 태자의 부하가 아니라면서 그로 하여금 문정후를 탄핵하게 할 거라고 자신하고, 문정후와 서천도독 사이에 오간 대화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했다.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동생이 제좌를 가지려는 것이다.
한순간의 깨달음에 얼음물에 들어간 것처럼 머리가 차갑게 굳었다. 오른팔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을 때의 절망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병신은 제좌에 오를 수가 없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정확히는, 아직도 홀가분히 털어버리지 못했다.
남은 미련이 질투가 되어 치솟았다. 동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질투를 하고 있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네 밑으로 기어들어 가라고?”
진영겸은 비아냥거리는 스스로의 못남에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진혁위는 그저 화사하게 웃을 뿐이었다.
“형님을 삼 년 동안 찾아간 것은 호의를 사고 싶어서였습니다. 예, 호의입니다. 황제께서는 다복한 일가를 이루셨지만, 우리 형제들 중에 과연 몇이나 살아남을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지요. 하여 형님은 물론이고 동생님들과도 잘 지내려고 노력했습니다.”
“팔도 못 움직이는 병신의 호의를 사서 무슨 영화를 보려고? 네 말대로 태자를 도울까 봐?”
“2형을 미워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진혁위는 굳이 돌려 말하지 않았다. 진영겸은 영명했고 어설픈 설득은 통하지 않았다. 찍어눌렀다가는 반발이 심할 테고, 감화는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진영겸이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옳았다.
“모든 게 네 뜻대로 될 것 같으냐?”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 법은 없지요. 그래도 방도는 많습니다. 형님이 아니면 어렵게 돌아가야 하지만 말입니다. 확답을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태자 전하께서 문정후를 탄핵하는 것은 출진 이후가 될 겁니다.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이 정해지면 움직이십시오. 어설프게 나섰다가 괜히 휩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옛 양번국의 영토를 되찾겠다고 선언한 황제는 모두가 예상한 대로 진혁위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진혁위가 일군을 이끌고 태경을 떠나는 것은 이틀 후였다.
시간은 촉박했지만 진혁위는 진영겸에게 매달리지 않았다. 꼭 그가 아니더라도 방법이 있었다. 또한 이번 일로 그를 끌어들이지 못하더라도 경거망동하지 않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이만 일어납니다.”
진혁위는 굳어버린 진영겸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 제대로 알아들었을 거라 믿었다.
“진혁위.”
막 개인실을 나서던 진혁위는 진영겸의 부름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냉담한 얼굴을 하고 다가온 진영겸이 그대로 진혁위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진혁위와 진영겸의 수행호위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왼손이니까 그리 아프지 않을 것이다. 시원찮은 놀음에 어울려주마. 네 말대로 그놈의 끝을 보고 싶으니까.”
“네.”
“공작새인 줄 알았더니 능구렁이였어. 내가 먼저 간다.”
진혁위를 지나친 진영겸은 씩씩거리며 다관의 계단을 내려갔다. 진혁위의 수행호위가 안절부절못했다.
“전하. 죄송합니다. 막지 못했습니다.”
“괜찮다. 나도 못 피했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일부러 맞아준 것에 가까웠다. 진영겸의 성향을 미루어보자면 저건 긍정의 신호였다. 그러니 피하는 것보다는 요령껏 맞아주는 게 나았다.
“입가에서 피가 납니다.”
수행호위의 말에 진혁위는 욱신거리는 오른쪽 입가를 손끝으로 슬쩍 눌러보았다. 피는 묻어나지 않았지만 따끔한 걸 보니 찢어진 모양이었다.
“돌아가자.”
이 정도 상처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류희겸에게 아프다고 약을 발라달라고 하기에는 좋은 핑계였다.
진혁위는 웃으며 다관을 나왔다.
*
영왕부로 돌아온 진혁위는 바로 경화당을 찾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시종들의 손에는 제각각 물건들이 한두 개씩 들려 있었다.
옛 양번국의 영토를 수복하라는 명령을 받은 진혁위가 출전하면서 류희겸 역시 동행하게 되었다. 몇 달이나 걸릴 원정에서 쓸 물건을 챙기는 것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특히 류희겸은 전투에 필요한 물건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무가 출신에 어려서부터 전쟁터를 오갔던 류희겸은 짐을 챙기는데 능숙했다. 목록을 작성하고 필요한 물건을 사들였다. 이제는 빠짐없이 짐을 싸야 하니 시종들이 바빠졌다.
진혁위는 그들을 가로질러 안채 안으로 들어갔다. 류희겸이 이것저것 지시하며 목록을 확인하고 있었다.
“귀비.”
“왕야. 오셨습……니까? 다치셨어요?”
류희겸이 한달음에 다가와서 매의 눈으로 상처를 살폈다.
“별것 아니다.”
“누가 때린 겁니까? 설마 태자 전하와 대거리를 하신 건 아니겠죠?”
눈썰미가 좋은 류희겸은 진혁위가 누군가에게 맞았다는 것도 금방 알아보았다. 진혁위는 입술이 찢어진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걱정을 해주는 것은 좋은데, 태자에게 맞았냐고 묻는 것은 좀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태자에게 맞을 리가 있겠느냐?”
“그래도 태자 전하께서 때리면 맞아야 하지 않습니까.”
“태자는 담이 작은 위인이라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나를 때리고 싶어도 그러지를 못하지.”
“그럼 누가 때린 겁니까?”
“일부러 맞아주었다. 귀비가 약을 발라주겠거니 하고 달려왔는데, 바쁜 모양이다.”
진혁위는 일부러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이런 쪽으로는 제법 눈치가 있는 류희겸은 누구냐고 캐묻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왕야의 상처에 약을 바를 정도의 시간은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진혁위는 류희겸이 이끄는 대로 내실로 들어서 나한상에 앉았다. 류희겸은 심양설을 시키지 않고 직접 연고를 챙겨왔다. 따가울 거라고 경고한 류희겸이 아주 조심스럽게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날이 좋아서 내실 창으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황금빛 햇살에 반쯤 내리깐 류희겸의 속눈썹이 반짝거렸다.
시선을 빼앗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마치 달리기를 하는 듯이 심장이 뛰었다. 그때와 같았다. 들판에서 그를 보았을 때, 아직 그를 좋아한다고 자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두근거림에 긴장하고 말았다.
바보 같은 애송이가 된 것 같았다.
마치 봄볕에 여린 꽃이 피는 것처럼 말랑말랑거렸다. 여름의 뜨거운 뙤약볕에서 숨을 쉴 수 없는 열기에 휩싸이는 것 같기도 했다. 혹은 한겨울의 혹한에도 따스한 조약돌을 품에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 됐습니다. 금방 나으실 겁니다,”
어떤 위화감도 느끼지 못한 듯 류희겸이 아무렇지 않게 몸을 물렸다.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제야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너는 너무한 사내다.”
“소인이 잘못한 게 있습니까?”
잘못한 거야 없다. 그저 눈치가 없을 뿐이었다. 좋아한다고 온갖 티를 다 내고 있는데도 무던하게 받아넘기는 남자가 나빴다.
“있다. 내가 왜 너를 예쁘다고 하는 줄 아느냐?”
“……왕야의 눈에 예뻐 보여 그런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예뻐 보이는 거랑 말하는 거랑 별개지.”
“그럼 놀리시는 겁니까?”
류희겸이 아주 심각하게 물었다. 반면에 진혁위는 기가 막혔다. 왜 예쁘다고 하는데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럴 때면 혼자 반하고 혼자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억울해서라도 좋아한다고 먼저 말하기가 싫어졌다. 유치하다는 것을 아는데도 심술이 났다.
“귀비가 본왕을 웃겼다. 놀리는 거 아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라. 답을 찾으면 상을 주겠다.”
“알겠습니다.”
진혁위는 반듯하게 대답하는 류희겸을 눈짓으로 불러 옆에 앉혔다.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은 탓에 진혁위의 목소리가 더욱 잘 들렸다.
“그가 출전한다는 소식은 없다. 전쟁이 날 거라는 것은 그네들도 알고 있는데, 준비를 하지 않는 것 같다더구나.”
“화진국의 일을 왕야께서 어찌 아십니까?”
“세상 어디든 간자가 존재하니까. 그래도 여드레 전의 소식이라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
태경과 마찬가지로 화진국의 수도인 경릉 역시 거대한 도시였고 정보를 사고파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 진혁위는 상대의 정보를 빼내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지만, 대연국에서 화진국까지 물리적으로 거리가 먼 것이 제일 난제였다. 아무리 빠르게 연락을 받아도 칠주야의 간극이 생겼다.
지난 중추절 연회에서 류희겸이 숙왕 진한재를 들먹이며 도발한 것은 조금 늦게 화진국에 알려졌다. 진한재는 궁지에 몰렸다. 불에 탄 시신이 류희겸이라고 생각했다고 소리 높였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류희겸의 목을 직접 베어 오겠노라고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화진국 내부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진한재는 단단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그만큼 적도 많았다. 화진에서는 진한재를 두고 갑론을박하느라 전쟁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자신감이 넘쳐 방심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내부 문제로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지난 생에서는 지금처럼 화진국 내부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었다. 지금에 와서 보자면 화진의 황제가 내부 의견을 제대로 규합하지 못하고 미적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내년이면 예순 살을 맞이하는 화진국 황제의 노쇠로 인한 우유부단함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평이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제 손으로 직접 복수하는 것을 고집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왕야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른 방법을 강구하십시오.”
“참전할 확률이 높다. 제법 수완이 좋기는 한데 상황이 좋지 못하거든. 귀비가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진 게 컸지.”
류희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손으로 진한재를 죽이는 것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가 눈앞에 나타나 준다면 어떤 식으로든 사로잡아 이유를 캐물을 것이다. 고신을 해서라도.
저도 모르게 들뜨려던 류희겸은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어떤 식으로든 그가 죽었다는 소식만 들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주먹을 쥐며 기대감을 낮추던 류희겸은 진혁위에게 전해야 할 말을 생각해 냈다.
“낮에 백 대주가 다녀갔습니다.”
“그는 왜? 본왕에게 줄 선물은 이미 샀지 않느냐?”
류희겸은 백진호가 가져온 것들을 몇 번이나 퇴짜를 놓은 다음에야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 지금껏 류희겸은 주변 사람들에게 좋고 싫은 것을 따지는 법이 없었다. 시종들에게는 관대하여 좋은 주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 까다로워지려면 얼마든지 까다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류희겸이 진혁위에게 선물로 내민 것은 박쥐 문양의 푸른 패옥이었다. 류희겸의 높은 안목으로 까다롭게 고른 만큼 진혁위가 보아도 수준 높은 것이었다. 진혁위는 패옥을 당장에 향갑으로 만들어 허리에 차고 다녔다.
이미 선물을 받았지만 또 받아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류희겸이 꺼낸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강남에 유례없는 풍년이라 쌀값이 곤두박질쳤다고 들었습니다. 하여 백 대주에게 강남의 쌀을 사들이라고 했습니다. 가능한 많이요. 금광에서 채굴하는 금으로 살 수 있을 만큼 살 겁니다. 태경 인근의 남원에 창고도 따로 지을 예정입니다. 수운이 있는 곳이라 운반이 편리하니까요.”
“내년을 생각하는 거냐?”
“예. 왕야께 필요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류희겸은 단호하게 말했다. 일 년에 두 번, 혹은 세 번도 연작이 가능한 강남의 생산에 따라 천하의 미곡 값이 결정되었다. 유례없는 풍년으로 올해 쌀값은 바닥을 쳤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내년이었다.
내년에 강남은 평작이었다. 반면에 서북 지역의 진주(晉州)는 지독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쌀값이 폭증했다. 진주와 인근 지역에서는 유민들이 유리걸식했고, 도적이 들끓었다.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미래를 알고 있으면 미리 대비할 수 있는 법이었다. 다행히 올해 강남에서 큰 풍년이 들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텐데.”
“강남에서 두 번째 수확이 시작될 때까지면 충분합니다. 왕야의 명성을 높이고,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무상으로 나누어주려고? 돈이 아깝지 않느냐?.”
“왕야께서 무상으로 나누어주실 겁니다. 그리고 돈은 아깝지 않습니다.”
류희겸은 진지하게 조언했다. 진혁위가 황제가 되려면 왕공대신들의 지지는 물론이요,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직전 생에서 진주의 기근이 심각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미곡을 사재기한 고관들 때문에 쌀값이 폭등했기 때문이었다. 진혁위가 발 벗고 나선다면 진주의 혼란을 최소화하면서도 인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본왕이 아름다운 귀비가 아니라 노련한 책사를 앞에 두고 있는 것 같군. 귀비의 말이 옳다. 민심은 중요하지. 본왕도 한 팔 거들겠다.”
“왕야께서도 쌀을 사들일 생각이십니까?”
“그래. 흉년이면 쌀이 많을수록 좋지.”
웃음을 터트린 진혁위가 가까이 오라고 눈짓을 했다. 류희겸은 밖을 오가는 시종들을 의식하며 허리를 숙였다.
“귀비가 이리도 현명하니, 본왕이 복이 많다.”
다정하게 속삭인 진혁위가 뺨을 감싸며 기습적으로 입술을 맞댔다. 입술이 벌어진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혀는 뜨거웠다. 질척하게 혀를 얽어 오는 움직임에 눈을 감으며 호응했다.
“흐…….”
입맞춤은 깊어졌다. 입천장을 야하게 문지르는 감각에 절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낮에, 그것도 시종들이 바로 옆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와중에 이러는 것이 민망해졌다. 진혁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밀어보았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뒷목을 잡은 손도 여전히 단단했다.
한참을 혀를 얽고 나서야 입술이 떨어졌다. 환한 햇살에 드러난 진혁위의 얼굴에서 욕망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시려고요?”
“해가 높이 떠 있고, 입가에 약을 발랐지만 할 것이다. 모레가 출정이지만 아무 상관 없다. 심양설. 안채를 비워라. 짐은 나중에 챙기고.”
진혁위가 심양설을 소리 높여 부르면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시종들이 거의 발소리도 내지 않고 멀어졌다. 심양설은 착실하게 문까지 닫아주었다.
작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따스한 숨결이 류희겸의 입술을 덮었다. 아랫입술을 슬쩍 물고는 핥아오는 혀의 감촉과 뺨을 감싸는 따스한 손의 힘에 류희겸은 눈을 감았다. 접문을 하며 뺨과 턱을 감싸는 것은 진혁위의 버릇이었다.
아랫입술을 핥은 혀가 입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류희겸은 느릿한 움직임에 맞춰 혀를 얽었다. 깊어지는 입맞춤에 어느 순간 호흡을 뺏기고 말았다. 질척이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리며 흥분을 더욱 부추겼다.
진혁위는 어떻게 해야 상대를 흥분시키는지 알고 있었다. 노련하고 집요한 입맞춤에 흥분하다 못해 노곤하게 녹아버릴 것 같았다.
입맞춤은 좋았다. 하지만 발정이라도 난 듯 교합에 집착하는 진혁위 때문에 걱정이었다. 이제 교합 자체는 격렬하지 않았는데, 몸을 맞대고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특히 최근 들어 진혁위는 팔 안쪽이나 허벅지 안쪽에 치흔이나 순흔을 남기고 있었다. 씻을 때도 잘 보이지 않는 곳이기는 하지만 은근히 신경 쓰였다.
“집중해.”
호흡이 부족하여 허덕거리는 찰나에 진혁위가 입술을 떼며 속삭였다. 눈은 웃고 있었지만 욕망이 담겨 있었다. 그 와중에도 딴생각을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남자가 신기했다.
알았다고 대답하기도 전에 진혁위의 입술이 다시 닿았다. 그에게서는 희미하게 국화향이 났다.
진혁위는 국화차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모양과 향기는 나쁘지 않다고 했지만 입에 넣는 것은 싫다고 했다. 그래서 중양절의 연회가 아니라면 국화차도 국화주도, 굳이 찾아 마시지 않았다.
그런 그가 굳이 국화차를 마셔야 할 상대를 한 명 꼽으라면 황제였다. 설마 황제가 그의 얼굴을 때린 것일까?
“왜 자꾸 딴생각을 해?”
“왕야에게서 국화향이 나서요. 싫어하는 국화차를 마시고, 또 얻어맞아 주신 상대가 누군지 생각했습니다.”
“질투하는 것이냐?”
“혹시 황제께서 왕야께 손을 대신 겁니까?”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었지만 류희겸은 조용하게 물었다. 진혁위가 황제와 문제가 생긴 것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진혁위가 가볍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집중하라니까,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어.”
“아닙니까?”
“아니다. 귀비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접문이나 하자.”
다시 입술을 맞댄 진혁위는 류희겸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시작부터 깊게 입맞춤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구는 진혁위에게, 류희겸은 그저 허덕이며 응할 수 있을 뿐이었다.
*
시종들은 모두 경화당 안채에서 물러났지만 심양설과 우소진은 안채 바깥 입구에서 대기했다. 안에서 크게 부르면 당장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였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우소진은 한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전하께 보약을 지어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마마께도요.”
우소진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심양설이 받아쳤다. 황궁에서부터 진혁위를 모신 두 사람은 서로 손발이 잘 맞았다. 그래서 서로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진혁위가 류희겸을 총애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영왕부의 시종들은, 특히 경화당에 배정된 시종들은 소문이 약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최근 들어 진혁위의 행보는 유별날 정도였다. 영왕부의 침전이 아니라 경화당에서 매일 같이 잠들었다. 특히 교합은 시도 때도 없었다.
진혁위를 오랫동안 수행했던 우소진은 진심으로 주인님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정력이 좋다 하여도 이 정도면 무리가 갈 게 뻔했다.
심양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른 체형이었던 류희겸은 아무리 먹여도 살이 찌지 않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단련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잦은 교합이 원인일 가능성이 컸다.
“전쟁하러 가시는 길에 보약을 딸려 보내면 한소리 들을 건데, 걱정입니다.”
“거기서 약을 달여줄 사람이 없는 게 문제죠.”
보약을 지어도 전쟁터로 떠날 두 사람에게 먹이는 것도 일이었다. 우소진도 심양설도 전쟁터에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차 드세요.”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온 우풍이가 찻잔이 올라간 쟁반을 내밀었다.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어야 하기에 두 사람은 조용히 목을 축였다.
“전하께서 귀비 마마를 많이 총애하시니까, 곧 아기씨가 생기시겠죠?”
우풍이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차를 마시던 우소진과 심양설은 잠시 멈칫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황제의 일곱 번째 아들인 진혁위는 양인이었다. 황제의 권능을 물려받은 그는 사내를 음인으로 만들어 임신시킬 수가 있었다.
널리 알려진 바에 의하면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 음인이 된다고 했다. 우풍이의 말대로 총애가 극에 달했으니 류희겸이 음인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우소진은 진혁위가 류희겸을 음인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양설은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갔다.
문강공의 적녀가 영왕부로 시집오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었다. 류희겸은 순한 성격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원의 싸움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류희겸이 아이를 낳으면 상황이 달라졌다.
보통의 귀족 가문에서 사내 첩이 오래도록 총애를 받지 못하고, 내원을 휘어잡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식을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류희겸이 음인이 된다면 여러 가지 것들이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었다.
“보, 보약을.”
“제가 가겠습니다.
엉거주춤하는 우소진과 달리 심양설은 행동이 빨랐다. 전쟁이고 뭐고, 당장에 옥안인을 찾아가서 몸을 보할 보약을 내놓으라고 해야 할 때였다.
*
“보약이라니? 내일 출진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다음날 아침, 자신의 침전으로 돌아온 진혁위는 전장에 가져갈 개인적인 물품을 챙기다가 우소진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보약이라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소인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심양설이 그러는데 요즘 귀비 마마께서 좋은 음식을 많이 드셔도 살이 내리고 있다 하옵니다. 전쟁터에서 고생하실 터인데, 몸을 보하셔야지요.”
“귀비가 살이 빠져?”
“예. 귀비께서는 가리지 않고 뭐든 잘 드시는 분인데, 도통 살이 붙지 않지 않습니까. 최근에는 품이 헐렁하다고 들었습니다. 귀비 마마와 가장 가까이 계시는 왕야께서 알아보셔야지요. 귀비 마마가 살이 내리신 이유도 굳이 따지자면 왕야의 총애가 지극하여 그렇지 않습니까.”
매끄럽게 이어진 우소진의 간언에 진혁위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 일 년 동안 여러 사건을 겪은 류희겸은 살이 붙을 새가 없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우소진의 말대로 교합이 계속되고 있으니 살이 빠질 만도 했다. 더욱이 품이 헐렁해졌다고 하는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자신의 실책이었다.
“그래도 보약은 필요 없다.”
“왕야. 옥안인 의원이 따라가지 않습니까. 소인이 약을 지어두라 이미 일러두었으니, 그가 잘 챙길 것입니다.”
“전장에서 보약을 먹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귀비 꼴만 우스워진다. 옥안인더러 인삼이나 더 챙기라고 해라. 마른 대추도. 꿀을 넣은 대추차가 몸을 따뜻하게 한다지.”
이미 보약을 준비해 두었던 우소진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지만 진혁위의 뜻은 확고했다. 이미 여러 곳에서 주목받고 있는 류희겸이었다. 혹여 몸이 아파서 약을 먹는다는 헛소문이라도 돌면, 전쟁터에서 어떤 공격을 받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달여 먹는 보약이 아니라 환약으로 만들면 먹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 당장은 만들 수 없었다. 그러니 몸을 보양하는 음식을 먹는 것이 좋을 터였다.
“소인이 봉밀을 더 넣어두겠습니다. 대추차를 매일 같이 끓이라 당부도 하고요.”
“그리해라.”
“꼭 귀비 마마의 섭식에 신경 써주십시오. 마마가 건강하셔야 애기씨도 건강한 법입니다.”
갑작스럽게 우소진이 아기를 언급하는 바람에 진혁위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황궁에서 태감으로 지낸 우소진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야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총애가 지극한 만큼 음인이 빨리 된다고 하나 류희겸은 아직 아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허니 아이가 생기는 것은 그만큼 나중의 일이었다.
진혁위에게는 아이보다 류희겸이 음인으로 바뀌는 것이 먼저였다. 전장에서도 교합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살이 빠졌다면 찌워야지. 네 말대로 귀비는 가리지 않고 잘 먹으니, 간식을 넉넉히 챙겨주겠다.”
가리는 것 없이 뭐든 잘 먹는 류희겸이었다. 간식은 즐기지 않았지만 옆에서 챙겨주면 하나씩 먹었다. 단과자, 설탕과자, 떡, 절편, 건과 등을 끊이질 않게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왕야께서도 잘 챙겨 드십시오. 무탈하신 것이 최고입니다.”
“그러마.”
“소인이 따라가야 하는데, 늙은 몸뚱이가 한스럽습니다.”
“왕부나 잘 지키고 있어라. 그게 네가 할 일이다.”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진혁위가 왕부를 비우는 것은 두 번째였다. 그때도 지금도 텅 빈 왕부를 지킬 사람은 우소진이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시종들이 사건에 얽혀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태자나 기왕이 진혁위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시종들을 단속하고 왕부를 지키는 것은 우소진의 몫이었다.
“물론입니다. 소인만 믿으십시오.”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우소진이 물러나는 것을 보며 진혁위는 웃었다. 생을 한 번 다시 살고서야 주변 사람들의 헌신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소진과 심양설 같이 충성스럽고 유능한 시종은 드물었다.
먼 서쪽으로 떠나는 대신에 제좌를 가지기로 했다. 가진 것도 많았고 지켜야 할 것도 많으니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류희겸은 강남의 쌀로 민심을 얻어 입지를 다지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황제가 된 이후에 구휼미로 쓰일 것이다.
진혁위는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 ◇ ◇
찬바람이 부는 가을의 평원에서 난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옛 양번국의 땅을 되찾기 위해 출진한 대연국의 군은 바로 호양성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국경에 자리한 화진국의 군사 거점을 하나씩 격파하며 전진했다.
거창을 휘둘러 달려드는 적을 처리한 류희겸은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전황을 살폈다. 최전방을 지키고 있는 화진국의 병사들은 용맹하게 싸웠다. 하지만 대연국과의 병력 차이는 두 배가 넘었다. 화진국 진영은 거의 괴멸 직전까지 몰린 상태였다.
물론 단순히 수적 우세만으로 전투에서 이길 수 없는 법이었다. 대연은 정공법 외에, 기병을 활용해 화진의 진영 곳곳을 휘젓고 다니며 전투의 흐름을 바꾸고 있었다.
진혁위는 가벼운 경기병의 진화대(進和隊)를, 그리고 희일준은 철갑으로 무장한 중장기병의 만화대(萬和隊)를 제각각 이끌며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다.
이번 전쟁의 총사령관인 영왕이 직접 기병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려고 하자 여러 장군들이 반대했다. 하지만 진혁위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누구는 군공을 욕심낸 젊은 친왕의 무모한 패기라고 한마디 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자가 직접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진혁위의 무위는 무모한 패기라고 하던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 충분했다.
난전 속에서도 진혁위의 존재는 눈에 확 띄었다. 말을 달리며 기다란 편곤(鞭棍)을 적의 머리에 강타하여 낙마시키는 솜씨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거침없었다.
기병들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가 창과 편곤이기는 했다. 하지만 대대로 황가에서는 무예로 활과 검, 그리고 창을 익혔다. 진혁위가 편곤을 선택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린 시절에 한 번 보았었는데, 마음에 쏙 들었었다. 어렵게 스승을 찾아서 익혔지. 말 위에서는 창만큼이나 유용해. 누구든 공평하게 머리가 깨지거든.’
직전 생에서 진혁위의 입으로 들었던 비화였다. 꽃처럼 아름다운 귀공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흉악했다. 하지만 진혁위의 말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타고난 용력으로 강철로 된 편곤을 내리치면 아무리 투구를 쓰고 있다 하더라도 머리가 깨질 수밖에 없었다.
“류희겸!!”
딴생각을 하면서도 적을 베어 넘기던 류희겸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옆을 보았다. 진혁위가 자신 쪽으로 말을 몰아 오고 있었다.
“왕야!”
“따라와라. 지휘관이 도망치고 있다. 뿔피리를 불어라.”
제 할 말만 한 진혁위가 그대로 류희겸을 지나쳤다. 그사이에 진혁위를 뒤따르던 부관이 뿔피리를 커다랗게 불었다. 집결 신호였다.
류희겸은 다급히 말을 몰아 진혁위를 뒤쫓았다. 진혁위는 전장의 흐름을 예리하게 파악했다. 아군이 밀리는 곳을 찾아내는 게 귀신같았다. 지금도 저 멀리 도망치고 있는 지휘관을 또 어떻게 알아봤는지 모를 일이었다.
여기서 화진국의 지휘관을 놓칠 수는 없었다. 직전 생에서는 살아 돌아간 지휘관이 낙오병을 끌어모아 반격하면서 아군이 큰 피해를 입었고, 종국에는 희범영이 전사했다. 운명을 바꾸려면 반드시 지휘관을 잡아야 했다.
저 멀리 도망치는 무리를 뒤쫓기에는 거리가 상당했다. 박차를 가하며 말을 재촉할 때였다. 류희겸을 앞서가던 진혁위가 활을 꺼내 들었다.
진혁위의 손에서 쏘아진 화살은 백발백중이었다. 도주하던 무장과 말들이 활에 맞아 차례로 하나씩 쓰러졌다. 귀신같은 솜씨에 류희겸이 혀를 내두르는 와중에 마지막 남은 적마저 고꾸라지며 떨어졌다.
류희겸은 진혁위와 활 내기를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
네 번째 승전이었다. 그것도 대승이었다. 호양성을 코앞에 두고 벌어진 승리에 대연국의 군대는 사기가 크게 치솟았다. 승리를 자축하는 의미로 화진의 군 거점지에서 징발한 물자를 대량으로 풀었다. 푸짐한 한 끼 식사에 병사들은 환호했다.
군 지휘부 역시 사기가 드높았다. 지휘부 회의 역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회의실 한쪽 구석에 앉은 류희겸은 장군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했다. 진혁위를 따라 전쟁에 참전한 류희겸은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고 있었지만, 그에게 공식적인 직함은 없었다. 그저 진혁위의 귀비로 함께 동행한 사람일 뿐이었다.
주변에서는 류희겸을 진혁위의 고급 부관 정도로 대우해 주기는 했다. 그래도 지휘부 회의에서는 발언권이 없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대연국의 황제는 중추절에 있었던 암습과 뒤이은 화진국의 옹졸한 대응에 화산같이 분노했다. 반드시 옛 양번국의 땅을 되찾고 대승을 하겠다며 돈과 물자를 쏟아부었다. 직전 생과 비교하자면 단순 병력만 해도 두 배가 넘었다.
순조로운 승리가 예상되지만, 그래도 변수는 존재했다.
많은 군세가 동원되면서 지휘관 역시도 숫자가 늘어났다. 희범영처럼 뼛속까지 무골인 장군도 있었고, 적당히 눈치를 보며 군공을 쌓고자 하는 장군도 있었다. 문제는, 진혁위의 존재 자체를 고깝게 보는 인간이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조태환 장군이었다. 그는 전 좌승상 모태심과 인척인 사람으로 확실하게 태자를 지지하고 있었다.
조태환은 전의 생에서도 노골적으로 진혁위를 견제했다. 지금은 본인이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관심 없는 단순한 장군을 충동질하여 진혁위에게 충정 어린 시비를 걸게 만들었다.
전쟁터에서 애첩을 끼고 온 것은 예와 도에 어긋난다고 하거나, 기병을 이끌고 전장에 직접 나가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한마디 한 것은 조태환이 아니라 다른 장군들이었다.
류희겸과 진혁위가 전장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자 입을 다물었지만, 그렇다고 시비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소장이 조심스럽게 말씀을 올립니다. 이제는 어떻게 호양성을 공략할 것인지 알려주셔야 할 때입니다. 영왕 전하.”
앞으로의 일정을 확인하는 와중에 또다시 조태환의 부추김을 받은 장군 하나가 분위기를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 전쟁의 목표는 호양성을 점령하고 옛 양번국의 영토를 되찾는 것이었다. 공성전은 절대적으로 성을 지키는 쪽이 유리했다. 황제는 육 년 전에 류희겸이 호양성을 점령했던 방법을 이용하여 최소한의 피만 흘리기를 바랐다.
회의실에 모인 장군들은 류희겸이 제대로 된 회전(會戰) 한 번 없이 호양성을 점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기책을 부렸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황제는 그것을 기밀에 부쳤다. 호양성에 도착할 때까지는 기책에 대해 발설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제 호양성까지 겨우 닷새 거리였다. 몇몇 장군들은 호양성의 공략법에 대해 알아야 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시선이 총사령관인 진혁위에게 모였다. 탁자의 상석에 앉아 차를 마시던 진혁위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작전 당일까지는 기밀이라는 것을 말했을 텐데.”
“소장이 걱정이 되어 그렇습니다. 호양성에서 성문을 열고 환영해 주지는 않을 터니 말입니다.”
“그쪽에서 미리 방비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소장들도 알고 있어야 다른 기책을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몇몇 장군들이 동조하고 나서자 회의실 내부가 술렁거렸다. 류희겸은 이 상황에서도 가만히 입을 다문 채 그저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는 조태환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류희겸은 조태환과 악연이 있었다. 직전 생에서 위락호 전투를 앞두고 류희겸의 신병을 맡았던 것이 바로 그였다. 희범영이 죽고 희일준 역시 징계성 원정에서 죽자 류희겸의 거취가 애매해지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래서 류희겸은 조태환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조태환은 우직한 무장이라기보다는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뒤에서 사람을 조종하고 분위기를 주도하려고 했다.
“본왕에게 황제 폐하의 명령을 어기라고 하다니. 이거 위험한 건데. 알지?”
진혁위는 아주 가볍게 말했다. 황제는 훌륭한 핑곗거리였다. 모든 것은 황제의 뜻이다. 난 모른다. 궁금하면 황제에게 직접 물어보아라. 너희들이 나에게 황제 폐하의 명을 어기게 할 셈이냐.
많은 의미가 함축된 반문에 다들 고개를 숙이며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한마디씩 했다. 조금 전까지 부드러웠던 분위기가 엉망이 되는 순간이었다.
류희겸은 희미하게 웃고 있는 조태환이 이것을 노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장군들의 불만을 친왕이 황제의 이름으로 찍어 누르면 어떻게든 원성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혁위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리 궁금하다면 본왕이 인심을 쓰고 비밀을 말해 주지.”
“아닙니다. 소장은 몰라도 됩니다.”
“소장도 마찬가지이옵니다.”
“별거 아니야. 본왕도 기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진짜야.”
소탈한 진혁위의 대답에 회의실에 모인 장군들 모두가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놀라움을 표현했다. 희일준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원체 무뚝뚝한 희범영까지도 한쪽 눈썹을 꿈틀거릴 정도였다.
“기책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황제 폐하와 익문사의 수장, 그리고 본왕의 귀비뿐이다. 본왕도 궁금하여 황제 폐하께 읍소하였는데도 기다리라는 비답(批答)만 들었지. 귀비에게도 졸라보았는데, 귀비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진혁위의 긴 설명에 장군들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진혁위조차 방책을 모른다면 더 이상 논쟁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아니, 좀 그렇잖아. 부부 사이인데 비밀이 있다니. 본왕이 어디 가서 말할 것도 아닌데, 살짝 말해 줄 수도 있는 법이잖아. 그런데 황제 폐하의 엄명이 있다고만 하니 본왕의 여린 마음이 아파.”
조용히 있다가 몇몇 장군들의 시선을 받게 된 류희겸은 진혁위의 입을 막고 싶었다. 왜 갑자기 회의실에서 부부 사이의 비밀 같은 것을 언급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조태환이 미묘하게 얼굴을 굳히는 것을 확인하며 류희겸은 관대한 마음을 가지기로 했다.
진혁위의 너스레에 조금 전까지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어떤 장군은 마치 어린 아들을 보는 듯이 애처롭게, 또는 자애롭게 진혁위를 보았다. 그 시선은 류희겸에게도 향하고 있었다.
“전하. 부부 사이에도 비밀은 있는 법입니다!”
평소 애처가라고 소문난 장군 한 명이 아주 호탕하게 외쳤다. 그러자 다른 장군들 역시 그렇다고 한마디씩 했다. 당사자인 류희겸이 자리에 있었기에 말을 조심하는 것인지, 그저 동조만 했다.
그들은 귀장군이라고 불렸던 류희겸의 무위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는 감탄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장군들이기에 거창을 무시무시하게 휘두르며 적진으로 뛰어드는 류희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전장에서 두려움 없이 활약하는 장군은 보통 성격도 강한 법이었다. 귀장군을 귀비로 삼았으니 그건 진혁위가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면서 다들 마음속으로 외쳤다. 부부 사이에도 비밀은 있어요. 많이 있어요. 왕야.
“한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보니, 다들 부인들에게 감추고 있는 비밀이 있는가 보군. 알았어. 본왕이 입 다물어주겠다. 회의는 이만 끝내지. 호양성에 도착하면 본왕의 귀비가 어떤 기책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될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자고.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간단하게 술을 마시도록 하지. 승전의 날이잖아.”
술 이야기가 나오자 말술을 마시는 장군들이 눈을 빛냈다. 작은 환호와 감탄을 내뱉은 장군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빠져나가고 류희겸과 진혁위가 마지막까지 남았다.
“들었느냐? 부부 사이에도 비밀은 있단다. 귀비의 비밀은 황제께서 명하신 것이니 본왕이 알려달라 조를 수가 없구나.”
황제의 명령으로 류희겸은 호양성을 공략할 방법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지만, 생을 반복하고 있는 진혁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농담이었다. 그랬기에 류희겸은 진혁위를 따라 웃었다.
“곧 아시게 되실 겁니다.”
“그렇겠지. 먼저 들어가 보도록 해라. 연회 때문에 저녁 식사는 같이 못 하겠다.”
“예.”
류희겸은 회의에는 참석했지만 연회나 다른 모임에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공사는 확실하게 구분하려고 했다.
“일찍 돌아오라고 해보아라. 본왕이 귀비에게 꽉 잡혀 산다고 만천하에 자랑을 하게.”
“독주를 멀리하십시오. 왕야께서는 술에 강하고 숙취도 없다 하시지만, 몸에 술 냄새가 배일 때까지 드신다면 결국 몸이 상하실 겁니다.”
“어이쿠. 술 냄새 때문에 잔소리구나. 좋아. 귀비의 말대로 독주는 멀리하겠다.”
어느 나라든 술을 좋아하는 장군들은 결국 독주를 찾았다. 직전의 연회에서 독주를 마신 진혁위에게서는 독한 술 냄새가 났다. 옆에서 자다가 술 냄새 때문에 몇 번 깼던 류희겸은 약속을 받아낸 것에 만족했다.
*
함께 회의실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제각기 갈 길을 갔다. 류희겸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운문형과 함께 움직였다. 그동안 한 번의 암습이 있었기 때문에 운문형이 항시 호위를 했다.
중문을 넘어 숙소로 향하는 와중에 의외의 인물과 마주했다. 바로 조태환이었다.
류희겸은 직전 생에서 조태환과의 악연을 떠올렸다. 자신을 변호하던 부하를 죽인 것도, 그리고 위락호 전투 중에 자신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둔 것도 모두 조태환이었다. 태자의 사주를 받아 진한재와 내통하던 그가 그 죄를 류희겸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했던 것이다. 진혁위가 빼내주지 않았다면 적군과 내통했다며 그대로 목이 잘렸을 터였다.
그 외에도 조태환은 류희겸을 유치하게 괴롭혔다. 부하들에게 류희겸을 따돌리라는 명령을 굳이 내리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처세는 좋아서 명장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류희겸은 이곳에서 조태환을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많은 변수로 흐름이 바뀌면서 남부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조태환이 튀어나와 버렸다.
몇 번의 호된 경험으로 류희겸은 조태환과 직접 엮이지 않으려고 했다. 속이 시커먼 놈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해야 하는 법이었다.
지금까지 조태환을 만나면 별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쳤다. 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조태환이 먼저 다가왔다.
“귀비 마마께 인사를 올립니다. 연회는 이번에도 참석하지 않으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하하. 귀비 마마께서 참석하시어 연회의 흥을 돋워주셔야 술맛이 날 텐데 아쉽습니다. 격구회에서 활약했던 이야기도 듣고 싶은데 말입니다.”
정중하고 부드러운 말투에 류희겸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격구회의 활약을 듣고 싶다는 것은 아부였지만, 친왕의 귀비에게 연회에서 흥을 돋우라고 하는 것은 무례한 언사였다. 교묘한 말투는 여전했다. 모욕적인 말 바로 뒤에 아부를 덧붙였기에 탓하기도 어려웠다. 류희겸은 그냥 흘려들었다.
“재미있게 즐기십시오.”
“한마디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아니요. 본 귀비는 장군과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냉정하게 답한 류희겸은 그대로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조태환이 발을 내밀어 앞을 막았다. 동시에 류희겸을 호위하던 운문형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물러나십시오.”
운문형이 칼자루에 손을 올리고 사납게 경고했다. 긴장감이 높아졌다. 그러나 조태환은 겁먹은 기색 하나 없이 빙그레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소장이 충정으로 말씀 올립니다. 허니 마마께서는 마지막까지 들어주십시오. 마마께서 황제의 총신이라는 것을 아옵니다. 허나 마마의 출신 때문이라도 희의에 참석함은 옳지 않습니다. 마마께 여러 사정이 있다 하나 의혹은 미연에 방지하셔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뱀의 혀로 올리는 충정의 말은 독을 품고 사람 속을 긁어대는 것이었다. 조태환의 말은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직전 생에 조태환 때문에 했던 고생을 생각하면, 그저 왈왈거리는 개소리로만 들렸다. 또한 시시한 시비와 도발에 넘어갈 정도로 자신이 다혈질은 아니었다.
“장군의 충정 어린 간언을 새겨듣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약조를―”
“주제넘게 나서지 마십시오. 본 귀비는 장군에게 약조할 게 없습니다.”
류희겸은 조태환의 말을 날카롭게 잘랐다. 조태환은 정중한 어조로 사람 속을 긁는 말을 아무렇게나 하곤 했다. 류희겸을 향해 끊임없이 변절자라고 언급하며 차별 대우의 정당성으로 삼았다.
직전 생에서는 조태환의 부하라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친왕의 귀비였다. 충정 어린 간언이든 뱀의 말이든 따라야 할 이유가 없었다.
숨죽이며 몸을 낮췄던 직전 생과 달리 류희겸은 말을 아끼지 않았다. 키가 크고 자세가 반듯한 류희겸은 조태환을 서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맑은 얼굴에 감정 하나 담기지 않는 눈빛에서는 기백이 넘쳤다.
조태환은 오랫동안 군에서 경력을 쌓은 백전의 노장군이었다. 그러나 류희겸의 기세에 움찍 놀라고 말았다.
“연회가 즐거우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이만.”
류희겸은 슬쩍 고개를 숙인 후에 조태환을 지나쳤다. 등 뒤에서 조태환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야 그를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
류희겸은 진혁위와 함께 숙소를 쓰고 있었다. 친왕의 숙소는 전쟁터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잘 꾸며졌다. 영왕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야전 지휘관으로 구른 류희겸에게는 황궁이나 마찬가지였다.
숙소에 도착해 잠시 쉬고 있자 옥안인이 꿀에 절인 인삼과 대추차를 들고 나타났다. 진혁위의 개인 의원 자격으로 동행한 옥안인은 매일 같이 류희겸에게 인삼과 대추차를 대령했다.
전쟁터에서 챙겨 먹는 것이 유별나다 싶은데, 진혁위는 한술 더 떴다. 살이 빠졌다면서 매 끼니마다 간식을 챙기며 한 개라도 더 먹으라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덕분에 긴 이동 후 전쟁을 치르는 중인데도 얼굴에 혈색이 좋아졌다.
인삼은 옥안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먹었고 대추차는 곁에 두고 천천히 마셨다. 옥안인이 대추차를 두고 물러나자 이번에는 진혁위의 종사인 고영수가 안으로 들었다. 그의 손에는 목합이 들려 있었다.
“왕야께서 챙기라고 하셨습니다.”
목합 안에서 따끈따끈한 음식들이 나왔다. 우유가 들어간 부드러운 떡부터, 포자, 양고기찜과 돼지고기볶음까지 있었다.
“모두 연회에 나온 음식입니다. 술은 혼자 마시지 말라는 왕야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식기 전에 드십시오.”
진혁위 주변의 여러 잡일을 처리하고 있는 고영수는 싹싹한 성격이었다. 막 젓가락을 들던 류희겸은 그의 오른팔을 살폈다. 화진국의 지휘관을 쫓는 와중에 낙마하여 팔을 다쳤다. 하필이면 발목에 고삐가 걸려 끌려간 탓에 왼팔이 엉망으로 긁혔다. 류희겸이 고삐를 잘라주지 않았더라면 부상은 더 심했을지도 몰랐다.
“팔은 괜찮은가?”
“귀비 마마께서 걱정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의원님에게 보였는데, 조금 긁힌 것뿐입니다.”
팔이 꽤 아팠지만 고영수는 괜찮은 척했다. 사실 약만 잘 쓰면 이딴 상처는 별것 아니었다.
“약은 충분하고? 그대는 영왕 전하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이니 빨리 나아야지. 겨울이긴 하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덧나는 것을 조심하게.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큰 흉이 질 테니. 술은 열흘 정도 마시지 말고.”
“약은 많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류희겸의 진심 어린 걱정에 고영수는 감격하고 말았다.
진혁위는 좋은 주인이었다. 월봉도 다른 왕부에 비해 넉넉했고, 명절이나 절기마다 받는 하사품이나 상여금도 많았다. 부하들을 위해 돈도 약도 아끼지 않았다.
다만 진혁위는 세심함이나 다정함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다쳤으면 제때 약을 쓰라고 하는 것이 전부였다.
고영수는 무림 출신으로 외공까지 익힌 튼튼한 몸이라서 주변 동료들조차 잘 신경 써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다정한 말 한마디에 괜히 울컥하고 말았다. 고영수가 낙마를 하고도 크게 다치지 않은 것도 류희겸 덕분이었다.
전장에서 거창을 들고 적을 거침없이 베어 넘기는 무시무시한 귀비 마마께서는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미인 보기를 돌같이 하는 주군이 류희겸에게 푹 빠진 것도 당연했다. 고영수는 마음이 따뜻해져 싱긋 웃었다.
류희겸은 고영수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마쳤다. 다른 건 몰라도 만독화 덕분에 독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것은 편했다.
남은 음식을 고영수가 내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희일준이 찾아왔다.
“연회는 어쩌시고 오셨습니까?”
“오늘 밤에 번을 서야 하니, 술을 마실 수는 없지요. 마침 집에서 좋은 차가 왔기에 맛보시라고 가져왔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후, 말 위에서는 창을 쓰는 희일준이 류희겸에게 가르침을 청하면서 두 사람은 부쩍 가까워졌다. 그가 차를 가져왔다는 것은 함께 마시자는 뜻이었다. 류희겸은 시종을 불러 희일준이 가져온 찻잎으로 차를 끓이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단한 잡담 끝에 희일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늘 조모님께서 보내신 서신도 도착했는데, 문정후가 서천 지역에서 양민들의 땅을 강탈당한 일로 탄핵당했다고 합니다. 아, 문정후가 누구인지는 아십니까?”
“기왕 전하의 장인어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양민들의 땅을 강탈했다고요?”
차를 한 모금 삼킨 류희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느낌으로 되물었다. 이미 진혁위에게 모두 들어 아는 사실이었지만 이럴 때는 연기가 필요했다.
“서천에서는 원성이 자자했다고 하는데, 땅을 빼앗긴 농민이 노모를 모시고 태경까지 와서는 고발을 했다고 합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양민의 토지를 빼앗는 것을 가장 큰 죄악으로 여기시니 분노가 엄청났답니다. 재야의 학자들도 연명 상소를 올렸다고 하고요. 얼마 전에 안용옥의 일도 있고 하니 엄벌을 내리실 것 같습니다.”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이 양민들을 괴롭히는 관리니까요. 황제 폐하께서 엄벌하심이 옳습니다.”
류희겸은 황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변절자인 자신을 의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아들들을 아끼고 사랑하기보다는 황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장기말처럼 쓰고 버렸다.
천하를 굽어보는 옥좌의 황제는 비정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역사상 아들을 죽이는 황제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도 대연국 황제의 방법은 지지할 수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형제들끼리 싸움을 부추기고, 가장 자질이 떨어지는 아들을 태자로 삼은 것을 제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황제에 대한 류희겸의 불호와 상관없이, 백성의 땅을 강탈하는 탐관오리를 엄벌하는 것만큼은 지지했다.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황제의 권위에 도전한 자에 대한 처결이긴 했지만 말이다.
“저는 태자 전하도, 그리고 기왕 전하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공자.”
류희겸은 갑작스러운 고백을 하는 희일준을 불렀다. 경고의 의미였다.
희가의 후계자로 이제 스무 살이 된 희일준은 나이에 비해 실전 경험이 많은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희범영을 닮아 강직한 성격에 능력도 출중하여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다.
눈에 보이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기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하고 움직이는 신중함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런 그가 정치적 발언이 위험하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예. 위험한 말을 한 거 압니다. 그래도 마마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걸 어쩌나. 순진하게 웃는 희일준을 보며 류희겸은 같이 웃지 못했다.
직전 생에서 희일준과의 사이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가까웠다. 희일준은 류희겸에게 마음을 터놓고 태자도 기왕도 제왕감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특히 태자에 대한 평가는 아주 극악을 달렸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서로 조심스러운 관계였다. 물론 신뢰를 받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약점이 될 만한 말은 남에게 쉽게 하는 게 아니었다.
“희범영 장군이 계셨다면 조심하라 한 소리 들으셨을 겁니다.”
“하하하. 한 소리 하시겠죠. 하지만 숙부님께서도 마마를 믿고 계십니다. 사실 반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정교영의 환생이라고 하시더니, 이번에는 왕언장(王彦章)이라고 하셨습니다.”
“과분한 칭찬입니다.”
왕언장은 후량의 장군으로 철창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 왕철창(王鐵槍)이라는 별명까지 있었다. 창을 다루는 무인에게는 가장 훌륭한 찬사였다.
“과분하기는요. 제가 마마께 창을 배운다고 하니까 다들 부러워합니다. 제 자랑이기도 하지요.”
“화제를 돌리시는 게 너무 자연스러우십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닙니다. 저는 귀비 마마를 믿습니다.”
직설적인 아부였지만 류희겸은 꽤나 기분이 좋아졌다. 내 귀가 이렇게 얇았나 싶어 속으로 심란함도 느끼는데 운문형이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렸다.
커다란 상자를 들고 나타난 사내는 백진호가 보낸 시종인 노준효(盧俊孝)였다. 백진호는 고급 지휘관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종군 상인으로 군과 함께하고 있었다.
진혁위가 이번에 주문한 것은 신선한 과일이었다. 노준효가 열어 보인 상자 안에는 석류와 유자가 가득 들어 있었다.
“모두 좋아 보이는군. 백 대주가 신경을 많이 썼어. 그에게 고맙다고 전하게.”
“예. 마마께서 좋아하셨다고 전하겠습니다.”
“목소리가 좋지 않군. 고뿔이라도 걸렸나?”
“날씨가 건조하여 목이 약간 부었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약을 잘 쓰게나.”
류희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옆에 선 운문형을 보았다. 밖에서 번을 서던 운문형은 손님이 찾아오거나 시종이 안에 들 때면 류희겸의 옆을 지켰다. 가벼운 눈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아들은 운문형이 조용히 자세를 잡았다.
노준효와의 거리를 가늠하며 류희겸은 품에서 전낭을 꺼냈다. 물품 대금과 별개로 심부름꾼에게 사례금을 주는 것은 오랜 규범이었다.
그러나 전낭에서 은전을 꺼내 손에 쥔 류희겸은 운문형에게 건네주지 않았다.
“노준효.”
“예. 마마.”
“꿇어라.”
“예? 무슨 말씀이신지요?”
갑작스러운 명령에 반문하는 노준효만큼이나 희일준도 깜짝 놀랐다. 은전을 전해주면 그만인 것을 갑자기 꿇으라고 하는 것이 이상했다.
“꿇으라고 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강경한 어조에 노준효가 허둥지둥 무릎을 꿇었다. 희일준이 무어라 한마디 보태기 전에 운문형이 그대로 검을 뽑아 노준효의 목에 겨누었다. 검끝이 목에 닿아 피가 살짝 흐를 정도의 위협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난 희일준은 노준효와 류희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마? 무슨, 소인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이까?”
“살고 싶으면 가만히 있어라. 운문형.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면 그대로 찔러도 된다.”
노준효의 울먹임에도 냉정히 명령을 내린 류희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한쪽에 놓아둔 검을 빼어 들고는 노준효에게 다가갔다.
“살, 살려주십시오. 마마!”
“마마. 무슨 일이십니까?”
벌벌 떠는 노준효를 보며 희일준은 다급해졌다. 과일이 좋아 보인다고 칭찬하던 류희겸이 왜 갑자기 검을 뽑아 드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희일준의 제지에도 류희겸은 그대로 노준효에게 다가가 왼손에 든 검집을 그대로 휘둘렀다.
머리를 후려치는 둔탁한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노준효의 이마가 찢어지며 몸이 흔들렸다. 그러나 피는 나오지 않았다.
“역시 인피면구(人皮面具)였군.”
류희겸은 혀를 찼다. 인피면구란 사람의 얼굴과 매우 흡사하게 만든 가면이었다. 보통 무림인들이 많이 썼는데, 성능이 좋은 것은 가면인 것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티가 나지 않았다. 인피면구를 쓰고 다른 사람으로 위장해 나타난 것을 보면 간자, 혹은 살수였다.
“어, 어떻게…….”
“네놈이 알 필요 없다.”
차갑게 일갈한 류희겸은 그대로 살수의 머리를 검집으로 한 번 더 후려쳤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강한 소리에 이어 살수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깨어나면 진짜 노준효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물어보게. 백 대주에게 사람을 보내야 하니 고영수를 불러주고.”
“명 받듭니다.”
운문형이 쓰러진 살수를 짊어지고 나갔다.
폭풍처럼 몰아친 사건에 희일준은 어안이 벙벙했다. 과일을 가져온 상단의 시종이 인피면구를 쓴 살수라니. 그리고 그걸 알아본 류희겸이 신기했다.
“어찌 아셨습니까? 티가 하나도 나지 않았습니다.”
“노준효는 오른손 약지 손톱에 검은 멍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멍이 아니라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제법 눈에 띄는 것인데, 살수는 그걸 간과했습니다.”
“그걸 알아보셨단 말입니까?”
“제가 만나는 사람이 몇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바깥 활동이 적은 류희겸은 교류하는 사람이 적었다. 특히 류희겸을 만나러 직접 찾아오는 사람은 더욱 드물었다. 그들의 특징을 알아두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노준효는 오른손 약지 손톱에 검은 멍이 있었다. 몸집은 살수보다 컸고, 목소리는 맑은 편이었다. 신체 특징이 전혀 다른 사람이 노준효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인피면구라는 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암살 시도는 처음이 아니었다. 보름 전에도 한밤중에 침입하려는 살수를 운문형이 붙잡았다. 그는 사파에 속한 무림인이었다. 인내심이 뛰어난 살수의 입은 고신을 통해 열렸다. 돈을 주면 무엇이든 한다는 해결사라며, 표국을 위장한 정보 단체에서 의뢰를 받았다는 것을 토해 냈다.
진혁위는 채제승에게 표국을 조사하라 시켰다. 하지만 겨우 보름 전이었기에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바가 없었다.
때문에 호위는 더욱 삼엄해졌다. 특히 밤에 번을 서는 영왕부 시위의 숫자가 배로 늘었다. 그런데 이렇게 인피면구를 쓴 살수가 틈을 파고들었다.
류희겸이 인피면구를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운이었다. 화진국에서 국경을 지키던 류희겸은 무림인과 마찰이 한 번 있었다. 술에 취해 주점에서 소란을 일으키던 남자가 인피면구를 쓴 도망자였던 것이다. 그때의 경험이 오늘의 위험을 이겨냈다.
“인피면구를 썼다면 무림인일 텐데. 혹시 배후가 짐작 가십니까?”
“저를 죽이고 싶어 하는 나라와 지금 전쟁 중입니다.”
“그래도 무림인인데…….”
“사주를 했을 수도 있지요.”
류희겸의 덤덤한 반응에 희일준은 인상을 썼다. 무림에는 돈으로 청부를 받는 고수들이 많이 있었다. 무림과 관은 서로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긴 했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희일준은 자신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준 류희겸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다. 단순한 부채감이 아니었다. 류희겸은 좋은 사람이었고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기꺼이 나설 수 있었다.
몇 번이고 만나 교류를 했지만 류희겸은 자신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정중히 예의를 갖추는 이유는 그의 신분과 처지 때문이었다.
류희겸은 제 입으로 자신과 가까이 지내면 오해를 받을 거라고 직접 말했다. 물론 희일준은 상관없다고 대꾸했다. 은인을 멀리하거나, 은인이 어려울 때 나서지 않는다면 그건 염치가 없는 일이었다.
“제가 무림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미 손을 쓰고 있습니다.”
“한 손을 더하면, 더 좋아질 테죠. 어떻게 손을 쓰고 계신지는 모르지만 제 연줄이 제법 괜찮습니다.”
희일준은 류희겸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진혁위에게 먼저 말을 해보겠다는 답을 듣고는 뿌듯하게 웃었다.
*
진혁위가 숙소로 돌아온 것은 해가 지고도 시간이 훌쩍 지난 늦은 밤이었다.
“인피면구라니. 그건 또 어찌 알아보았어?”
암습에 대해 이미 전해 들었던 진혁위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류희겸의 안부를 살피면서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류희겸은 희일준에게 했던 설명을 그대로 했다. 체격과 목소리가 달랐다는 것도 덧붙였다.
“다행히 노준효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습니다.”
류희겸은 최우선으로 노준효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다행히 노준효는 재갈 물고 밧줄에 묶인 채로 짐마차의 건초 속에서 발견되었다. 워낙 사람이 많은 곳이라 수상한 피 냄새를 풍기는 것보다는 기절을 시키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일을 저지르고 난 후, 그에게 덮어씌울 생각이었을 수도 있었다.
“이번에는 어디의 사주를 받았다고 하더냐?”
“같은 표국이라고 했습니다. 원 의뢰인은 모르고요. 그리고 보름 전에 암습한 자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고 합니다.”
“한 번에 여러 명을 쓴 모양이군. 또 다른 놈이 있을지도.”
“예. 그럴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고신을 버티지 못한 살수가 아는 것을 모두 불었다. 이전의 살수의 입에서 나온 것과 같은 표국의 이름이 나왔지만, 서로의 존재는 알지 못하는 듯했다. 이렇게 되면 진혁위의 말대로 또 다른 살수가 있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어지간히도 몸이 달은 모양이다. 이러기도 쉽지 않은데.”
“암습 때 희일준이 같이 있었는데, 그가 무림에 연줄이 있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도움받을 필요는 없다.”
“내일 왕야를 찾아뵙고 직접 말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알았다. 그를 만나보도록 하지. 그것보다, 좋은 소식이 왔다. 그가 화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놈의 수완이 제법이야. 재상들을 제대로 포섭했어. 두 명의 재상이 모두 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야 한다고 간언을 올렸다고 하는군. 이레 전의 소식인데, 출전까지는 조금 걸릴 터이니 시간은 얼추 맞을 것 같다. ……정말 좋은 소식인가 보다. 귀비가 이리 웃는 것을 보면.”
뜻하지 않는 소식에 류희겸은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진혁위의 지적을 받고 표정을 관리했지만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진한재가 온다. 이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사로잡는 것이 제일 좋지만 그럴 수 없다 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삶의 목적은 언제나 하나뿐이었다.
반면에 내면에서 기쁨을 뿜어내는 류희겸을 보며 진혁위는 시큰둥이 물었다.
“왜 이렇게 좋아해?”
“좋아서요.”
“본왕의 귀비는 특이한 취향이야. 금은보화보다 원수를 선물로 주어야 더 좋아하니 어쩌나.”
류희겸은 진혁위의 시답지 않은 농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것보다는 직전 생과의 간극을 따져 보았다.
직전 생에서는 호양성이 점령되고도 화진국이 황군을 보내지 않았다. 화진국은 호양성을 변방에 위치한 국경 요새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어차피 화진의 강역이 아니었던 곳이니 쓸모없는 전쟁을 할 바에야 대연국에게 넘겨버리라는 주장이 대세였다. 지방 군관들이 제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그 소식을 나중에서야 전해 들은 류희겸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로 국력을 갉아먹고 있는 조국의 현실에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자신이 떠날 때부터 그런 기미가 보이기는 했었지만, 너무 빠른 변화였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는 달랐다. 어쩌면 주변 주둔지를 먼저 공격한 것이 영향을 끼친 것인지도 몰랐다. 혹은 진혁위의 말대로 진한재가 손을 썼을 수도 있었다.
화진국의 이른 출전에 어떻게 대응할지도 이미 생각해 두었다. 제일 먼저 내부의 적을 정리해야 했다. 내부 정보가 흘러나가면 이길 전쟁도 질 수밖에 없었다.
“귀비가 좋아하는 것을 보니 나도 좋다.”
진혁위와 나란히 앉아 있던 류희겸은 그의 눈짓에 슬쩍 몸을 숙였다. 눈을 접으며 웃는 진혁위가 부드럽게 입술을 부딪쳐 왔을 때는 놀라지 않았다.
전쟁 중이기는 했지만 진혁위와의 교합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해가 지고 입술을 맞대는 것은 매일 같이 일어나는 일이었다.
긴 입맞춤 끝에 입술을 뗀 진혁위가 가볍게 속삭였다.
귀비가 이렇게 잘 웃었던가?”
“좋은 소식을 들어 기뻐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소식을 가져온 부군에게 좋은 것을 해줘야지. 응?”
“그럼요. 뭐든지 해드리겠습니다.”
충동적인 발언이었지만 류희겸은 진심이었다. 접문은 물론이고 진혁위가 해달라는 것은 뭐든 다 할 수 있었다.
코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던 진혁위가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네가 무엇을 약조했는지 아느냐?”
“압니다.”
“아니다. 모를 것이다. 안다면 뭐든 다 할 거라는 말은 못 하지. 절대 무르지 마라.”
“식언하지 않겠습니다.”
류희겸이 맹세하자 진혁위가 뺨에 살짝 입술을 눌렀다 뗐다.
“귀비가 이리도 용감하게 구니, 본왕은 복받은 사내다. 씻고 오겠다. 잠시만 기다려라.”
“전하. 영수입니다. 정찰대가 돌아왔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다시 입술을 맞대던 진혁위가 멈칫했다. 총사령관인 진혁위는 전투 전후로 많이 바빴다. 지금처럼 불려가는 일이 빈번히 있었다. 특히 귀환한 정찰대의 보고는 반드시 직접 들어야 했다.
“방해꾼이 나타났어.”
“가보셔야지요.”
당장에 그럴 분위기였지만 류희겸은 우선순위를 망각하지 않았다. 그러자 진혁위가 잘생긴 미간을 구겼다.
“그래. 가야지. 가야 하고 말고. 금방 돌아오겠다. 다 해주겠다고 약속한 거 잊지 마라.”
진혁위는 류희겸과 입술을 한 번 더 맞대고는 숙소를 나갔다.
다시 혼자가 된 류희겸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에 진정시킨 심장이 다시 제멋대로 뛰었다. 모든 생을 통틀어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드디어.”
류희겸은 양주먹을 꽉 쥐었다. 직전 생에서 위락호 전투를 앞두고 진한재가 총사령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흥분했다.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면 탈영을 해서라도 진한재를 죽이러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상황이 좋았다. 진한재를 생포하기 위해 진혁위와 함께 전략을 짰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얼마 후에 진한재의 살아 있는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들뜬 기분은 가시질 않았다. 류희겸은 환호의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렇게 기쁨에 사로잡힌 류희겸은 자신이 진혁위에게 한 약속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 ◇ ◇
하얀 구름이 피어오르는 청명한 겨울 하늘에 태양이 높게 떴다. 마른 풀과 흙냄새가 섞인 차가운 바람이 부는 평원 위에 자리한 호양성은 전운에 휩싸여 있었다.
단단히 걸어 잠근 정문 위의 성루에 자리한 수비병들은 잔뜩 긴장한 채로 앞을 바라보았다. 반대편 평원에는 대연국의 대군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상태였다, 서로 활을 쏘아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마주 보는 두 진영의 사이의 긴장은 팽팽하게 이어졌다.
공성전은 수비를 하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높고 두꺼운 성벽은 최소한의 인원으로 수비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연국의 병력은 호양성을 지키는 수비 병력의 몇 배나 되었기에 누구도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연국의 병사들이 전열을 갖추는 사이에 고급 지휘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오늘 있을 공성전과 관련된 전술은 마지막까지 극비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전 군이 전열을 갖춘 지금까지도 그들은 작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지휘관들의 시선은 모두 총사령관인 진혁위에게 모였다. 금빛의 갑옷을 입어도 미남인 것이 드러나는 진혁위가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웃었다.
“정오가 되면 호양성의 동문(東門)이 열린다. 신호는 붉은 연기. 연기가 피어오르면 우익의 만화대가 동문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좌익의 진화대 역시 좌군이 도착할 때까지 동문을 사수한다.”
너무나도 간단한 설명에 장군들은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천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정석적인 공성전의 방법은 정해져 있었다. 성벽을 넘거나, 혹은 성문을 부숴야 했다. 그사이에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발생했기에 공성전이 어려운 법이었다.
진혁위의 말대로 동문이 열린다면 공성전이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다만 모두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제일 먼저 의문을 표한 사람은 진혁위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희범영이었다.
“전하. 동문은 어떻게 열립니까?”
“본왕도 그게 궁금하다. 그래도 익문사가 움직이고 있으니, 문은 열릴 것이다.”
황제의 명령으로만 움직이는 감찰기관인 익문사가 나섰다는 것은 그만큼 비밀스러운 작전임을 의미하는 동시에,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오가 되면 활과 투석기를 동원해서 호양성 수비병들의 이목을 끌고,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면 중앙군을 진격시켜 발을 묶는다. 성벽을 넘을 필요는 없지만, 성벽을 넘겠다는 기세로 진격하라.”
“명 받듭니다.”
“동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그대로 공성전을 벌여야 한다. 하지만 붉은 연기가 피어오를 테니, 장군들은 동쪽을 잘 살피고 신호를 기다려라.”
진혁위의 명령에 장군들은 고개를 숙였다. 가진 의문과 별개로, 전투가 곧이었다.
*
태양이 가장 높게 뜬 정오가 되자 대연국이 먼저 움직였다. 뿔피리와 북, 그리고 깃발로 신호를 보내자 도열해 있던 병력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제일 처음은 궁병이었다. 궁병이 쏘아 올린 화살이 수천 개의 까만 점이 되어 하늘을 뒤덮었다. 동시에 각종 투석기들이 호양성을 향해 큰 돌을 날렸다.
궁병들의 활통이 텅 비워질 때까지 보병은 움직이지 않았다. 공성전이란 보병들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뜨거운 기름과 물, 돌 등을 이겨내고 성벽을 올라 성문을 여는 것이 핵심이었다. 화살을 날려 엄호를 하는 동안 보병이 전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반적인 전투와는 전혀 다른 흐름에 호양성을 지키는 수비병들은 어리둥절했다.
반면에 이미 명령을 받은 대연국의 보병들은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대연국의 지휘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화대는 준비하라.”
대연국의 진영 제일 뒤쪽의 지휘부에서 전황을 지켜보고 있던 진혁위는 하나씩 줄어드는 화살의 개수를 세면서 옆에 선 장군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전 생에서는 화살이 다섯 개가 남을 때에 신호가 왔다.
대연국의 우익에 선 중장기병인 만화대가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모양새가 된 것을 확인한 진혁위는 호양성의 동쪽을 바라보았다.
익문사가 개입했다는 것은 반드시 호양성을 되찾고 말겠다는 황제의 의지였다. 그리고 두 번째 생을 살고 있는 진혁위는 작전이 성공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붉은 연기가 피어오를 것이다.
직전 생에서는 이렇게 편안한 기분으로 기다리지 못했었다. 혹시나 실패할까 봐, 그래서 류희겸이 곤경에 처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초조했었다.
호양성은 평원 위에 세워진 성도였다. 성벽은 높고 튼튼하며 사방으로 나 있는 성문을 닫으면 수성에 용이했다. 정공법으로 공성전을 벌인다면 반년이라는 시간과 막대한 인명피해를 감수해야 할 정도였다.
육 년 전, 류희겸이 제대로 된 전투 없이 호양성을 점령한 방법은 간단했다. 안쪽에서 성문을 열어버린 것이었다.
호양성의 주변 지형은 평원이었지만 그 아래는 암반층이 존재했다. 한때 지하수가 지나갔던 길은 어느새 메말라 석굴이 되어 호양성의 서와 남을 가로질렀다. 그중 몇몇은 말라버린 우물과 방치된 폐가로 이어졌다. 류희겸은 그곳으로 소수의 정예병을 보냈다.
지금처럼 대군이 정문 앞에 도열하면 대부분의 수비병들은 정면에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수비가 느슨해진 동문을 안에서 습격하여 문을 열게 했다.
지난 생에서 처음 류희겸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진혁위는 기가 막힌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아무리 크고 단단한 성벽이라도 성문이 열리면 아무 효용이 없었다.
류희겸은 전장에서 사로잡은 도적들 중에 한 명이 호양성 아래의 석굴을 오가며 밀수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작전을 짰다고 했다. 말을 타고 거창을 제 수족처럼 휘두를 줄 아는 남자는 흘려들은 말의 옥석을 구별하여 자신의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혜까지 지녔다.
“희겸.”
진혁위는 자신의 뒤쪽에 서 있는 류희겸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조용히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나랑 가지 않겠느냐?”
류희겸은 진혁위가 무엇을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총사령관인 진혁위는 이번 전투에만큼은 직접 참전하지 않았다.
평원에서 난전을 벌이는 회전과 달리 공성전은 눈먼 화살에 맞기 딱 좋았다. 류희겸은 물론이고 모든 지휘관들이 진혁위가 직접 전투에 나서는 것을 반대했다.
진혁위는 류희겸의 신변 보호인이자 감시자였다. 진혁위가 전투에 나서지 않는다면 류희겸 역시 그의 옆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직전 생에 직접 동문으로 진격했던 류희겸은 제일 안전한 곳에서 전황을 지켜보는 것이 성격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혁위의 얕은 꾐에 넘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직전 생에서 진혁위는 자신과 달리 지휘부에 남아 있었다.
“오늘은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게 옳습니다.”
“다들 여기에 있으래. 본왕을 아주 섬세한 꽃처럼 다루다니. 너무하는군.”
진혁위의 가벼운 말투에 지휘부에 남아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농담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이전 생과 다름없이 궁병들의 화살이 다섯 발 남았을 때, 동쪽 성문 쪽에서 붉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진혁위의 명령이 없어도 이미 준비하고 있던 만화대가 벼락처럼 뛰쳐나갔다. 뒤이어 진화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호양성의 성루에서도 이변을 알아차린 듯 병사들이 부산해졌다. 하지만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바위들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때맞춰 진혁위가 명령을 내렸다.
“진격하라!”
중앙군의 진격을 알리는 북이 크게 울렸다. 대기하고 있던 보병들은 질서정연하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성문을 뚫기 위한 충차(充差)도 서서히 움직였다.
중앙군은 정문을 지키는 수비 병력을 잡아두기 위한 기만책이었다. 때문에 호양성 성루의 지휘관은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동쪽 성문이 열린 시점에서 이미 수성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호양성의 정문에 걸린 깃발이 바뀌었다.
*
“왕야. 전령이 왔습니다.”
늦은 밤이었다. 넓은 막사에서 호양성 주변의 지도를 살펴보고 있던 진한재는 임약원이 내미는 작은 지관통을 받아 들었다. 전서구의 발에나 달려 있을 법한 것이었다.
전서구는 주변의 지형지물을 익혀 귀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사는 도시에서 도시로 빠르게 이동했다. 다만 다리에 묶어 전할 수 있는 내용이 적고, 전서구가 익히지 못한 도시는 갈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지관통에 적힌 양(陽)이라는 글자는 호양성에서 보낸 것임을 나타냈다. 진한재는 호양성에 간자를 심어두고 전쟁과 관련된 정보를 얻고 있었다. 호양성에서 보낸 전서구는 국경의 도시를 한 번 거쳐 전령이 직접 진한재에게 가져다주는 구조였다.
진한재는 재빠르게 지관통 안의 서신을 꺼내어 읽었다. 그제는 대연국의 군대가 호양성 앞에 진을 쳤다는 전서가 왔었다. 그런데 이틀 만에 또 다른 전서라면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호양성 점령. 한나절. 동문 열림.
짧은 글의 나열이었지만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틀 만에 전서가 올 만도 했다.
“이런.”
“어찌 되었습니까?”
“……호양성이, 넘어갔다.”
눈치 없는 임약원의 물음에 진한재는 이를 악다물며 대답했다. 적어도 자신이 도착하기까지 버티기를 바랐지만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대연의 군대가 호양성에 도착한 것은 이틀 전이지 않습니까? 겨우 이틀 만에요?”
“한나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적혀 있군.”
“결국 변절자가 도운 것이로군요.”
“그렇겠지.”
진한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기분이 별로였다.
육 년 전, 단 하루 만에 호양성을 점령한 류희겸의 계책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화진에서 황제를 비롯한 몇몇만 류희겸이 간자를 이용하여 성문을 열었다고 알고 있었다. 황제는 류희겸에게 그 계책에 대해 입을 다물기를 명했다.
진한재는 비밀통로를 이용했다는 류희겸에게 자세하게 묻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제 목을 졸라 오고 있었다.
본국에서는 여론이 나쁘기만 했다. 승상들이 진한재의 출전에 모두 찬성해 주었지만 그것이 지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논란이 심화되니 시끄러운 것을 멀리 내보내려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황제의 뜻이기도 했다.
진한재는 어디서 어떻게 일이 틀어졌는지 생각했다. 채왕과 남준해 장군을 역모에 엮은 것은 완벽했다. 그리고 염세 시찰을 간 류희겸이 잡혔을 때는 다 끝난 줄 알았다. 감옥에 갇힌 그를 보며 후환을 남겨두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황제는 류희겸을 아꼈다. 혹여 황제가 류희겸을 죽이지 않고 살려둘 것을 대비해 미리 손을 써두었다.
그런데도 류희겸은 살아서 도망쳤다. 문제는, 도망자로 숨어 지내는 것이 아니라 대연국에서 친왕의 귀비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거기에 대연국 황제의 충신이 되었다는 말까지 돌았다.
불에 탄 류희겸의 시체를 성벽에 건 진한재의 입장이 곤란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적들은 진한재가 류희겸을 탈출시키고 황제를 속인 게 아니냐고 공격했다.
일이 너무 많이 꼬이고 말았다. 류희겸이 살아 있는 것도, 그리고 그가 진한재를 지목한 것도 문제였다.
진한재는 아직 조정을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했다. 정적들은 진한재가 이번 전쟁에서 대패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대연국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굼벵이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놈들이 할 법한 생각이었다.
화진국의 국력은 대연국과 비등했지만 군사력만큼은 뒤처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도 상황을 잘 이용하면 이기지 못할 것도 없었다. 위기는 기회이기도 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귀환한다면 정적들의 입을 닫게 하는 것은 물론이요, 앞으로의 정국에서 주도권을 쥘 수도 있었다.
“전하. 소장을 죽여주시옵소서. 소장의 식견이 짧았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임약원이 용서를 구했다. 무림인을 쓰자고 한 것은 임약원이었다. 그의 연줄을 이용해 대연국에 숨어 있는 류희겸을 죽여달라고 사주했다. 하지만 의뢰한 지 반년이 훌쩍 지나도록 류희겸은 살아 있었다.
“아니다. 네 계책은 훌륭했다. 다만 그가 운이 좋았을 뿐이지.”
“주군의 아량에 감사드리옵니다.”
“강경책도 회유책도 통하지 않으니 다른 방법을 써봐야겠다.”
진한재는 류희겸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을 안아야 했다. 그의 탈출을 도왔다는 의혹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리고 지금은 류희겸의 목을 직접 베어야만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류희겸을 죽이기 위해 여러 방법을 찾았다. 큰돈을 써서 무림의 고수에게 류희겸을 죽이라고 사주한 것이 처음이었다. 사절단에 자객을 심어두기도 했다. 변절자는 자결해야 한다고 압박하면서 동시에 도망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했다. 동시에 많은 것을 시도했지만 어느 것도 통하지 않았다.
친왕의 귀비를 죽여달라는 의뢰를 받아들인 무림의 고수는 몇 없었다. 왕부의 경비는 삼엄했고 호위들의 실력이 막강했기에 실패는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사절단의 자객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탈출을 도와주겠다는 서신에 류희겸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것이 의외였다. 대연국 영친왕의 총애가 지극하다니 거기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서로 오래 알고 지냈기에 진한재는 류희겸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반듯하게 자란 그는 제 사람을 아꼈다.
“그에게 서신을 보내겠다. 아무도 모르게 그가 읽을 수 있도록 해라.”
진한재는 그 자리에서 서신을 쓴 다음 임약원에게 내밀었다. 이번에도 과연 그가 침묵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 ◇ ◇
평원 위에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막사는 대연국의 엄격한 군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호양성 전투에서 대승을 하고 시간이 제법 흐른 터라 분위기는 느슨한 편이었다.
저마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군인들 사이를 고영수가 조용히 걸었다. 무공을 배운 고영수는 단단한 체격이었지만 흐릿한 인상의 얼굴에 몸도 키도 크지 않아서 군중 속에 잘 녹아들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사람 뒤를 밟을 수 있는 재주를 가진 고영수는 최근 조태환 장군의 부관을 열심히 따라다녔다. 정확히는 조태환 장군이 바깥과 정보를 주고받는 경로를 파악했다.
진혁위는 태자의 파벌에 속하는 조태환 장군이 내부 정보를 빼돌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지 오래였다. 그것도 태자가 아니라 적국인 화진국에 넘기고 있다고 했다.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중에 하나가 내부의 적이었다. 다행히 적을 알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었다. 밑작업은 오래전에 완수했다. 오늘은 그 결과를 확인하는 날이었다.
또 다른 볼일이 있던 고영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진혁위를 찾았다. 호양성을 점령하고도 진혁위는 여전히 막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호양성의 왕성은 멀쩡했지만,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막사 앞에 도달한 고영수는 입구를 지키고 운문형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무뚝뚝한 얼굴의 운문형은 고지식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먼저 그에게 확인해야 하는 것이 순서였다.
“왕야께서는 계시지요?”
“잠시 기다려.”
“응? 왜요?”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려던 고영수는 멈칫했다. 혹시나 안에 중요한 손님이 와 계시나 싶었다.
“두 분이서 다투시고 있어.”
뜻밖의 설명에 고영수는 눈을 크게 떴다. 진혁위와 류희겸의 사이가 좋은 것은 이미 소문이 날 대로 난 상태였다. 진혁위는 제 막사에서 자는 법이 없었다. 매일 같이 진혁위의 막사 바로 뒤에 붙은 류희겸의 막사에서 밤을 보냈다.
류희겸의 막사는 총사령관의 막사와 비견될 정도로 크고 훌륭했다. 그러나 막사의 천이 두껍다지만 한 겹이었고, 야밤에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완벽하게 막지는 못했다. 그런 이유로 호위들은 평소보다 두세 걸음 떨어져서 번을 서야 했다.
장군들이 공동 지휘관으로 부인을 대동하는 일은 왕왕 있었다. 영친왕이 전쟁터에 함께 설 장군 출신의 귀비를 대동한 것도, 전례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눈꼴 시릴 정도로 사이좋은 두 사람 때문에 전쟁터에서도 금슬이 좋다며 시비조의 말이 한마디씩 나왔다. 그러다가도 두 사람의 무시무시한 무위를 보고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진혁위는 편곤으로 적의 머리를 깨고 다녔고, 류희겸의 거창은 적을 쓸어버렸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사이가 좋은 부부였다. 특히 진혁위가 너무 애틋했다. 그런데 다툰다고? 왜?
멀찍이 떨어진 다른 호위들의 눈치를 본 고영수는 조용히 눈으로 물었다. 그러나 운문형은 설명 대신에 고개를 저었다. 주군의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뜻에 고영수가 투덜거렸다.
“형님은 너무 말을 아껴요.”
“주군이 바로 지척에 계시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운문형의 말이 맞았기에 고영수는 입을 다물고는 막사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곧 운문형에게 뒷목이 잡혀 멀찍이 떨어져야 했다. 고영수가 억울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운문형은 완고했다.
“에이. 너무합니다.”
“그러는 거 아니다.”
이번에도 운문형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기 힘들었다. 결국 고영수는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두 분께서도 다투실 일이 있다니. 역시 부부는 부부인가 봐요.”
부부란 젓가락 하나만으로도 싸울 수 있는 법이었다. 운문형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
일의 발단은 진혁위의 호양성 시찰이었다.
전쟁이란 싸우고 이기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전쟁 중에는 보급과 사기를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또한 전투가 끝난 후에는 뒤처리가 복잡했는데, 호양성과 같은 거대 도시를 점령하고 난 후에는 더 그랬다.
행정과 치안의 공백을 메꾸고 성 내의 혼란을 최소화하는 것이 점령군이 해야 할 일이었다. 다행히 약탈이 없었기에 주민들의 반발은 아주 약했다.
총사령관인 진혁위가 호양성 대로에 나타난 것은 그만큼 도시가 안전하다는 의미였다. 호양성을 점령하고 사흘 후에 이루어진 시찰은 단출했다. 말을 탄 진혁위와 류희겸을 비롯해 스무 명의 호위가 말을 타고 대로를 거닐었다.
사건은 그때 일어났다. 도망치지 못한 화진의 낙오병들이 진혁위의 일행을 습격했다. 그들의 수는 진혁위의 호위 병력과 비슷했다. 실력은 호위병들이 훨씬 뛰어났지만 악에 받친 낙오병들이 죽을 기세로 밀어붙였다. 거기다 지붕 위에서 궁사 넷이 진혁위만 집요하게 노려 저격했다.
진혁위는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화살을 비갑(臂匣)으로 막아냈다. 하지만 진혁위가 탄 말이 화살에 맞았다. 훈련을 받은 군마라 날뛰지는 않았지만 진혁위는 거의 낙마할 뻔했다.
그 모습에 진혁위의 옆을 지키던 류희겸이 지붕으로 뛰쳐 올라갔다. 류희겸이 지붕 위에서 활을 쏘던 궁사들을 모두 처치하면서, 기세를 잃은 낙오병들을 금방 제압할 수 있었다.
재빠른 판단과 과감한 실행력으로 아군의 피해를 줄였으니 결과만 따지면 상찬받을 일이었다. 하지만 진혁위는 공을 치하하는 것과 별개로 화를 냈다.
“무모한 것도 정도가 있지. 왜 위험을 자초해?”
“그게 최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너 말고도 호위는 많이 있다.”
“그게 옳았습니다.”
류희겸은 단호하게 답했다. 지붕 위에서 날아오는 화살이 진혁위에게 집중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진혁위의 말대로 호위들의 실력은 출중했지만, 기습을 막아내느라 허둥대고 있었다.
화려한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탄 진혁위는 훌륭한 표적이었다. 아무리 진혁위라도 한 번에 네 발이나 되는 화살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죽거나 크게 다친다면 지금까지 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판단했다. 그 결과 자신이 다치기는 했어도 진혁위를 지켜냈다. 류희겸은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믿었다.
“내가 죽지 말라고 한 말을 잊었느냐?”
“안 죽었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해? 지금 네 모습을 보아라. 그 꼴을 하고도 안 죽었다는 말이 나와?!”
진혁위는 안 죽었다고 덤덤히 말하는 류희겸의 보며 잇소리를 냈다. 지붕 위에 올라간 류희겸은 진혁위 대신 궁수들의 표적이 되었다. 류희겸은 화살을 모두 피하지 못했다. 왼쪽 이마가 찢어졌고 오른쪽 어깨에 화살을 맞았다.
다행히 둘 다 상처는 얕았다. 이마는 화살이 스친 것뿐이었고, 어깨는 갑옷에 튕겨 나간 화살에 빗겨 맞으면서 촉이 살짝 박힌 정도였다. 그래도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왼쪽 얼굴을 새빨갛게 적셨다. 그 모습에 진혁위의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이마나 어깨의 상처는 붕대를 감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마에 난 상처는 너무 확연하게 눈에 띄었다. 류희겸이 제 자리를 지켰다면 저리 다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인은 무장이고, 여기는 전쟁터입니다. 다치는 건 당연합니다.”
“위험을 자초하지 말란 말이다.”
“왕야께서 위험했습니다. 제가 조금 다치더라도 궁수들을 빨리 제거해야 했습니다.”
대화는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류희겸 때문에 진혁위는 속이 탔다. 류희겸의 말대로 전쟁터에서 다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조금만 실수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진혁위는 류희겸에게 죽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비단금침이 깔린 감옥에 가두지는 않았다. 전쟁터에서 그를 잃는다고 하여도 감수할 작정으로 그를 데려왔다.
하지만 자기가 위험해질 걸 뻔히 알면서도 무모하게 뛰쳐나가는 것은 화가 났다. 그것이 복수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속이 더 엉망이었다.
“본왕이 죽으면 귀비의 복수에 지장이 생기겠지.”
“왕야.”
류희겸은 자신의 호칭이 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내심 흠칫 놀랐다. 그만큼 진혁위의 심사가 뒤틀렸다는 뜻이었다.
“내가 모질게 말을 하겠다. 제대로 들어라. 너는 맹세를 어겼다. 너에게 있어 그게 최선의 판단이었다고 하더라도, 너는 죽을 뻔했다. 운이 나빴다면 화살은 네 머리에 꽂혔을 것이다.”
“그건 발이 미끄러져서―”
“발이 미끄러져서 죽을 뻔했지. 됐다. 네 말대로 살아 있으니 복수의 기회는 남아 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니 이제 물러가라. 조태환의 일을 처리하면 찾아가겠다.”
이대로 말을 주고받아도 서로의 입장 차이는 좁혀지지 않는다. 대화가 이어져도 싸울 일만 남았으니 이대로 끝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류희겸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 힘을 주고는 진혁위를 노려보았다.
“그 자리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왕야셨습니다. 아무리 왕야께서 뛰어난 무인이라 하더라도 한 번에 네 개나 날아드는 화살을 모두 피하실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소인의 판단이 잘못되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류희겸.”
“예. 저는, 소인은 죽지 않겠다 맹세를 했습니다. 하지만 왕야께서 무사하신 것이 먼저입니다. 그건 소인이 복수를 끝낸 다음에도 변치 않을 겁니다. 이만 물러갑니다.”
사나운 기세로 제 할 말을 쏟아낸 류희겸은 진혁위의 허락도 받지 않고 뒤돌아 나가버렸다. 순간 어안이 벙벙해진 진혁위는 류희겸을 불러 세우지 못했다.
누가 누구에게 화를 내…….
기가 막혔다. 화살이 위험하기는 했지만 팔이나 다리에 한 발쯤 맞는다 해도 별거 아니었다. 갑옷으로 무장(武裝)을 했고 투구도 쓰고 있었다. 즉사만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심각한 상처라도 염호부를 사용해 깨끗하게 나을 수 있었다.
진혁위는 한숨을 삼켰다. 충성을 바치라고 했더니 류희겸은 정말 물불 가리지 않고 몸을 내던졌다. 본인이 귀비가 아닌 호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런 일에는 고집이 센 류희겸이 쉬이 제 뜻을 굽힐 것 같지도 않았다.
“전하. 소인입니다.”
어떻게 하나 고민하는 와중에 고영수가 안으로 들었다. 고영수는 조태환이 외부로 빼돌리는 정보의 고리를 마지막까지 캤다.
“아무래도 태자 전하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알아보니까 태자부에 차와 옥을 납품하고 있더라고요.”
“당연히 그렇겠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네 마음이 급하다는 것은 알지만, 굳이 내가 태자를 언급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태자의 미움을 받게 되어 있지만, 그래도 단계가 있었다. 지금 노릴 것은 태자가 아니라 조태환이었다.
진혁위의 설명을 고영수도 이해했다. 현명한 자라면 장수 대신에 장수가 탄 말을 노리는 법이었다.
오늘은 조태환을 멀리 보내는 날이었다. 태자의 수족이 하나씩 잘려나가는 것은 고영수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대망의 그날을 위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명 받듭니다. 아, 그리고 채 대주께 연락이 왔습니다. 여기 서신입니다.”
진혁위는 고영수가 내민 서신을 받아 읽었다. 진혁위는 채제승에게 희일준이 언급한 무림의 인물을 조사하라고 일렀다.
채제승은 희일준과 연이 있다는 혜광(惠光)에 대해 알고 있었다. 혜광은 소림의 명망 높은 장로로, 무림맹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고수라는 것이다. 그가 나선다면 암살을 의뢰받은 표국이 몸을 사릴 거라고 적혀 있었다.
“혜광이 명망 높은 소림의 장로라고 하는군. 무림맹에서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고.”
“오. 좋은 소식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무림맹은 정치를 잘한다고 했습니다.”
고영수는 기연을 얻어 외공을 익히기는 했지만 무림과 큰 인연이 없었다. 그래도 무림맹이 시류를 읽어 정치를 잘한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소림의 장로라면 더 할 것도 없었다.
고영수의 설명에 진혁위는 만족했다. 진한재가 어떤 식으로 류희겸을 죽여달라 의뢰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류희겸처럼 스스로가 죽고 난 후의 안배를 해두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미리 대비해 두는 것이 안전했다.
무림의 인연이란 아무리 황족이라고 하여도 쉬이 맺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희일준의 은혜 갚기는 성공할 모양이었다.
보고를 마친 고영수는 예를 올린 다음에 조용히 물러났다.
탁자 위에 올려둔 서신을 내려다본 진혁위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일들은 놀라울 정도로 잘 풀리고 있었다. 하지만 류희겸의 고집을 꺾을 방도는 생각나지 않았다.
이를 어쩌나 싶은 와중에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막사 안으로 들어선 것은, 얼음을 품은 듯이 잔뜩 굳어 냉정해진 얼굴을 한 류희겸이었다.
*
자신의 막사로 돌아온 류희겸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대신에 막사 한가운데 서서 울컥울컥 치솟는 감정을 억눌렀다.
도와줬는데도 뭐라 그러다니.
류희겸은 억울하기까지 했다. 궁수들이 활을 날리던 곳의 지붕 기와에 낀 이끼에 발이 미끄러진 것은, 그래서 균형을 잡느라 화살을 쳐내지 못한 것은 자신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물론 진혁위의 말대로 죽을 뻔한 것은 사실이었고 따지자면 맹세를 어긴 것이나 다름없는 것도 맞았다.
하지만 류희겸은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했다. 아무리 맹세를 했어도 거기서 누군가 한 명이 죽어야 한다면, 그것은 진혁위가 아니라 자신이어야 했다. 또한 결과적으로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 문제가 될 것도 아니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진혁위가 답답했다.
무엇보다 더 이상 네 말을 듣지 않겠다는 진혁위의 태도에 제일 화가 났다. 대화가 불필요하다고 했을 때는 정말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그냥 참을 걸.”
화가 가라앉자 후회가 밀려들었다. 자신의 판단은 여전히 옳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울컥해서 대꾸한 것은 참았어야 했다.
그렇다고 다시 진혁위를 찾아가서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것은 싫었다. 어떻게 진혁위의 얼굴을 보나 싶어 한숨을 삼킬 때였다. 류희겸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의자 위에 매듭처럼 묶인 하얀 종이가 있었다.
류희겸은 간자는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진혁위의 말을 떠올리며 하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아무 특징 없는 종이를 펼치자 반듯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목월조. 신후연. 고막영. 소용운. 백정방. 원승환. 원승비. 조홍신. 양원.
부끄러움을 안다면 변절자는 자결하라.
아홉 명의 이름을 확인한 류희겸은 종이를 든 채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아홉 명은 모두 연림군 장수들이었다.
네가 죽지 않는다면 이들이 죽을 거라는 협박에 류희겸은 이를 악물었다.
진혁위는 고막영을 빼돌렸다고 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다들 어떻게 되었는지 류희겸은 알지 못했다. 뇌물을 써서 힘들지 않은 노역으로 바꾸어달라고만 진혁위에게 부탁하고는 관심을 끊었다. 그것이 서로에게 좋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직전 생에서는 이런 협박은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혐오스럽다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고모부의 손에 자란 류희겸에게 연림군 장수들은 또 다른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류희겸의 무예는 모두 그들에게서 배운 것들이었다. 함께한 추억은 누구보다 잔뜩 있었다.
그들이 소중하지만 복수를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신이 지금 자결한다고 해도 그들을 살려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냉정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끔찍한 것이 된 기분이었다. 죄책감 또한 덜어지지 않았다.
“하아. 진짜.”
긴 한숨을 내쉰 류희겸은 뜨거워진 눈을 손으로 가렸다. 서신을 보낸 사람은 진한재가 분명했다. 어떻게 해야 죄책감을 자극할 수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한번 시작한 일을 정에 끌려 그르칠 성격도 아니었다. 그것이 비정한 선택이라도 말이다.
눈에서 손을 내린 류희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간 탓에 종이가 구겨져 있었다.
직전 생에서 부하를 한 명씩 잃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당위성을 부여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이라고. 조금씩 무디어져 가는 감정을 모르는 척하며 앞만 보고 나아갔다.
무녀가 축언한 것보다 한 번의 생을 더 살면서 진혁위에게 아홉 명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은 부채 의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그들을 잃게 되었다. 이번에도 고막영만 남는다고 생각하자 오싹해졌다. 어쩌면 운명은 이런 식으로 반복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죽고, 복수 역시도 계속 실패할지도 몰랐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부정적인 생각을 밀어낸 류희겸은 그대로 막사를 뛰쳐나갔다. 밖에서 호위를 서던 운문형이 놀라며 물었다.
“마마. 무슨 일이십니까?”
“왕야를 뵈러 가겠다.”
류희겸은 운문형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진혁위의 막사까지는 금방이었다. 때마침 진혁위의 막사에서 나오는 고영수와 교대를 하듯이 안으로 들어섰다. 류희겸의 기세가 너무 흉흉했기 때문에 운문형과 고영수는 말없이 뒤를 따랐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진혁위는 한꺼번에 세 명이 안으로 들어서자 의아했다. 특히 잔뜩 굳은 류희겸의 얼굴이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둘은 물러나라.”
류희겸의 서릿발 같은 명령에 운문형과 고영수는 멈칫했다. 평소와 다른 류희겸의 모습에 어떻게 해야 잠시 망설이던 둘은 진혁위의 눈짓에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사정을 모르는 운문형과 고영수는 이제야 영왕 부부가 본격적으로 부부싸움을 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호기롭게 나가더니, 왜 또 그런 얼굴이냐?”
진혁위의 물음에 류희겸은 대답 대신에 손에 쥐고 있는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를 받아 읽은 진혁위가 헛웃음을 지었다.
“징그러운 인간이군. 이딴 것 때문에 죽는다는 소리 하지 마라.”
“압니다. 아는데…….”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올라오는 바람에 류희겸은 말을 잇지 못했다. 뜻밖의 모습에 당황한 것은 진혁위였다.
“류희겸.”
“왕야밖에 없습니다. 그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상대는 왕야뿐이어서……. 죄송합니다.”
작게 속삭이면서도 토해 내듯이 말하던 류희겸은 결국 사과를 해버렸다. 예의를 차리지 않고 충동적으로 진혁위를 만나러 온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종이에 적힌 아홉 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진혁위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비정한 선택을 고백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필요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삭히며 버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뭐라도 소리 내어 말하고 싶은 충동에 이렇게 달려오고 말았다. 그러나 막상 소리를 내고 보니, 진혁위에게 부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류희겸은 진혁위가 손을 잡아당기는 대로 순순히 끌려갔다. 손에 잡히는 따뜻한 온기에 다시 한번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울지 마라.”
“우는 거 아닙니다.”
“미리 말을 하지 않아서 귀비를 놀라게 만들었군. 이들은 모두 살아 있다. 걱정하지 마라.”
“……?”
류희겸은 잠시 의아했다.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진혁위가 그런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님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내가 선물을 준다고 했잖느냐. 반은 대연국으로 이미 왔고, 나머지 반은 오고 있는 중이다. 혼인을 한 이라면, 그 일가족도 데려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태경이 아니라 남쪽의 도시에 거처를 마련했다. 허니 이딴 웃기는 협박 따위는 무시해라. 이미 없는 사람을 어찌 죽일까. ……이런, 진짜 울어? 귀비가 이리 마음이 약하다니.”
진혁위의 긴 설명을 듣는 중에 류희겸은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는 진혁위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허둥지둥 눈을 가렸다.
기뻤다. 너무 기뻐서 웃음이 아니라 눈물이 나왔다. 너무 무모한 것 아니냐고 해야 했지만, 그것보다 안도가 먼저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왕야.”
눈을 비비며 겨우 눈물을 그친 류희겸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의자에 앉아 있는 진혁위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이 흐린 시야에 잡혀서 같이 웃고 말았다.
연림군의 장수들이 한 번에 모두 사라지면 어떻게든 진한재의 의심을 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 있는 게 중요했다. 살아 있어야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선물이 마음에 드느냐?”
“예.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사은하겠습니다.”
“왜 이렇게 비장하게 굴어? 내가 낸 물음의 답이나 얼른 찾아라. 선물을 미리 받았다고 해서 입 닦으면 안 된다.”
“겨우 그것으로는 안 됩니다. 은혜를 모르는 무뢰한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귀비는 고지식하군.”
류희겸은 진혁위가 왜 자꾸 자신에게 예쁘다고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알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연림군의 장수들을 대연국으로 데려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들이 진혁위의 인질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기뻤지만 가슴 한쪽이 뻐근하고 아팠다. 웃고 있는 진혁위에게 왜 이렇게 잘해주냐고, 어째서 자신을 좋아하냐고 묻고 싶었다.
그는 자신을 정인이라고 칭했지만 사실 그렇게 불릴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직전 생에서 몇 번이고 몸을 섞기는 했다. 그래도 서로 애틋하게 아끼기보다는 얼떨결에 서로 휩쓸려 도운 것이 전부였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하지만 한 번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류희겸은 침묵을 선택했다. 혼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도, 술렁이는 감정의 정체도 모두 다음으로 미루었다.
나중에, 진한재를 죽이고 홀가분해진 다음에도 답을 찾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울음은 그쳤느냐? 눈이 빨갛다.”
“괜찮습니다.”
“사은을 한다고 했지?”
“예.”
“그럼 다음에는 무모하게 뛰쳐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좀 전에도 말했지만 귀비가 아니더라도 본왕을 지킬 이는 많다.”
더없이 부드럽고 말랑해진 분위기에 편승해 진혁위가 직전에 다투었던 화제를 꺼냈다. 은밀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류희겸은 눈물 맺힌 눈가를 닦으며 웃었다. 이럴 때면 남자는 능구렁이나 다름없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지만, 약속드리지 못합니다.”
“류희겸.”
“소인이 아니라 왕야를 우선으로 지킬 것입니다.”
“이런, 귀비의 고집이 대단하군.”
쯧. 혀를 찬 진혁위가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래도 류희겸은 굳건히 버텼다. 또 싸우더라도 자신보다는 진혁위가 중요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야 했다.
“언젠가 왕야께서 그러셨습니다. 영욕을 함께할 거라고. 왕야께서 변을 당하시면 소인 역시 무사하지 못합니다. 허니 이번에는 왕야께서 져주십시오.”
“이럴 줄 알았으면 귀비를 비단금침이 가득한 곳에 가둘 걸 그랬다.”
“뜻대로 하십시오.”
너를 가두겠다는 말에도 류희겸은 거부하지 않았다. 진혁위에게 그럴 마음도 없어 보였고, 또 있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귀비를 상대로 농담을 못 하겠다. 사은은 다른 방법으로 받겠다. 오늘 저녁에 깨끗이 씻고 기다려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에 무엇이든 해준다고 하거라.”
지금까지 계속 진혁위의 말을 따르겠다고 하던 류희겸이 그제야 멈칫했다. 입꼬리를 올리며 웃으며 웃는 진혁위를 보자니 얼마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진한재가 출진한다는 소식에 너무 기쁜 나머지 무엇이든 다 해준다고 했었다. 솔직히 접문이나, 혹은 그가 보는 앞에서 자위를 하는 정도일 거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진혁위가 바란 것은 자신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그의 앞에서 옷을 벗는 것까지는 아무렇지 않았으나 엎드려서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이미 셀 수 없이 교합한 사이고, 자위까지 해 보인 적도 있었지만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한 번의 경험이 류희겸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진혁위가 재촉하듯 잡은 손에 힘을 주는 바람에 결심이 섰다.
“예. 왕야께서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싫다면 억지로 하지 마라.”
“그런 거 아닙니다.”
“귀비는 사기를 많이 당하겠어. 뭐든 다 하겠다고 하니.”
맞잡고 있던 손을 놓은 진혁위가 이번에는 뺨을 슬쩍 꼬집는 바람에 류희겸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친애의 표현에 속이 간지러웠다.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겁니다.”
“귀비답다.”
“예.”
류희겸의 무뚝뚝한 대답에 진혁위는 피식 웃고 말았다. 고지식한 남자는 교합이 마치 의무를 이행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것이 사람 속을 쓰리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상처받았다.”
툭 하니 한마디 내뱉은 진혁위는 자리에서 일어나 류희겸을 끌어안았다.
“왕야?”
“가슴이 허하여 귀비를 끌어안아야겠다. 그냥 안는 것이니 가만히 있어라. 안 잡아먹는다.”
잠시 당황하던 류희겸은 순순히 안겼다. 류희겸은 진혁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애틋하게 안아주는 남자의 품이 따뜻해서 조심스럽게 기대었다.
*
회의에 모인 장군들은 습격을 받은 진혁위의 안위를 챙기며 다행이라고 한마디씩 했다. 그래도 습격을 무산시키고 패잔병들을 한 번에 정리한 것은 호재였다.
이후에 이어진 회의는 앞으로의 전략에 관한 것이었다. 목표인 호양성은 성공적으로 점령했다. 하지만 화진에서 황군이 진격하고 있다는 첩보를 전해 들었다. 이제는 서로의 입장이 반대가 되어버렸다.
선택권은 대연국에 있었다. 화진의 군대가 호양성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평원에서 회전을 치르는 것이 기본적인 정공법이었다. 혹은 군대가 오는 길목을 지키고 서서 기습을 감행하는 것도 가능했다. 둘 다 일장일단이 있었다.
오랜 논의 끝에 진월강(珍月江)을 건너는 것을 습격하는 것으로 결론 났다. 회의가 끝나자 장군들은 저마다 흩어졌다.
진혁위는 자리를 뜨지 않고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판은 차근히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제일 처음은 조태환의 부관이었다. 겁먹은 얼굴로 잡혀 온 그는 모든 것을 불었다.
“소인은, 소인은 장군님께서 하라는 대로 한 것뿐입니다. 소인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조태환의 명령을 받았다는 그는 진혁위 앞에 놓인 작은 지관통 안에 든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외쳤다. 다음은 조태환이었다.
진혁위는 회의실 안으로 들어선 조태환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어서 오게.”
회의가 다시 있다고 들었던 조태환은 예상과 다른 내부 풍경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무릎을 꿇고 있는 부관, 회의실을 가득 채운 진혁위의 호위들, 그리고 진혁위 앞에 놓인 지관통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조태환을 질리게 한 것은 진혁위 옆에 선 한 남자였다. 엄조철(嚴棗鐵). 그는 익문사의 수장이었다.
호양성의 동문을 연 것은 익문사였다. 이번 전쟁에 익문사가 개입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엄조철까지 여기에 있는 줄은 몰랐다. 황제의 직속 감찰기관인 익문사의 수장이 나섰다는 것에는 많은 의미가 있었다.
조태환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 진혁위의 앞에 놓인 지관통은 분명 자신이 조금 전에 부관에게 맡긴 것이었다. 그 안에는 회의 내용이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자신의 부관이 군사 기밀을 다른 곳에 전하려던 것을 발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까지 인지했다. 그래도 조태환은 당황하지 않았다.
“회의가 있다 들었는데, 소장의 부관이 어찌 잡혀 있는 것입니까?”
“그것보다는 이걸 해명해 보게나. 조 장군.”
진혁위가 탁자에 놓인 작은 지관통을 들어 보였다.
“무엇입니까?”
“조 장군의 부관이 상단에 맡기려던 것이었네. 그를 데리고 나가라.”
진혁위의 명령에 호위 두 명이 조태환의 부관을 끌고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진혁위가 지관통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어 읽었다.
“진월강. 도하. 기습. 주의. 부관이 자복하기로는 조 장군이 하라는 대로 했을 뿐,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더군.”
“소장은 모르는 일입니다.”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은 부관이 어찌 이 내용을 알아냈을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소장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조태환은 끝까지 모르는 척 잡아뗐다. 자신이 서신을 썼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다. 반면에 부관은 현장에서 잡혔다. 부관에게 모든 것을 덮어씌워야 자신이 살 수 있었다.
군사 기밀을 유출하는 것은 큰 죄였다. 적국에 넘겼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대로 극형이었다. 그럼에도 조태환이 위험을 무릅쓰고 기밀을 빼돌린 것은 태자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밀을 받을 상대가 누구인지 듣지는 못했지만 누구인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바로 화진국의 총사령관인 진한재였다.
작전 정보를 넘기면 저쪽에서 진혁위와 류희겸을 저승길로 보낼 거라고 했다. 태자는 진혁위가 죽기를 바라고 저쪽은 류희겸을 죽여야 한다고 했으니 서로 원하는 것을 얻는 작전이었다.
후방에 남아서 지원하기로 한 조태환은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총사령관을 잃은 대연국의 군을 끌어모아 호양성을 수성하여 공훈을 세울 수 있었다. 거기까지는 서로 이야기가 다 끝났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간단하여 엇나갈 일이 없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들킬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결백하다는 것인가?”
“소장이 부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찾아왔습니다.”
조태환이 채 말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회의실 안에 익문사의 관복을 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사내는 엄조철에게 종이를 하나 내밀었다.
종이의 재질을 확인한 엄조철이 입을 열었다.
“조 장군. 최상급의 재질에 조 장군이 늘 쓰는 고급 향까지 입힌 종이가 이 전쟁터에 또 있단 말입니까?”
조태환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종이를 가려 쓰지 않은 것이 증거가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었다.
“부관이 훔쳐갔겠지요.”
“해명은 황제 폐하 앞에서 하십시오. 끌고 가라.”
“너무하십니다. 영왕 전하! 이건 누명입니다. 저는 죄가 없습니다!”
조태환은 억울하다고 반항했지만 익문사의 관원들은 능숙하게 그를 제압하여 끌고 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혁위는 엄조철에게 깍듯하게 예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어찌 되나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제 일을 했을 뿐, 왕야께서 감사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정보를 빼돌리는 인사에게 뒤를 맡길 수는 없지요. 이후는 모두 원사(院使)에게 맡기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십시오. 나중에 뵙겠습니다.”
다시 한번 인사를 한 진혁위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진혁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엄조철은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익문사는 당쟁에 관여하지 않고 황제의 명령에만 따르는 기관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정치판의 세력 다툼에 더욱 민감했다.
지금 태경에서는 태자와 기왕이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서로의 측근이 저지른 비리를 파헤치면서 진흙탕 싸움으로 번져 갔다. 그리고 진혁위는 이곳에서 착실히 공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오래도록 황제를 모셔온 엄조철은 어심의 방향이 태자를 향하고 있음을 오래전에 눈치챘다. 선황제의 적자로 태어났던 황제는 어려서 모후를 잃고 형제들의 위협 속에 자랐다. 그래서인지 적자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위협이 될 법한 아들을 싫어했다. 아들 중에 가장 범용한 자질을 타고난 셋째 황자를 태자로 삼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태자는 실책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번 일도 그랬다.
조태환은 태자의 사람이었다. 그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태자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적에게 정보를 빼돌린 것이 아니라 태자에게 알렸다고 하면 반역죄는 모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태자가 어떤 식으로는 이번 일과 관련이 되어 있다면 조태환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황제의 역정을 살 게 뻔했다.
반면에 진혁위는 이번 일로 깊은 심계를 보였다. 조태환이 군사 기밀을 빼돌린다는 것을 알아내고도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황제에게 재가를 받은 다음에 익문사의 손을 빌렸다. 없는 죄를 조태환에게 뒤집어씌웠다는 역공의 기회를 원천에 차단한 것이었다.
철없이 놀기만 좋아하던 황자의 변모는 놀라울 정도였다. 그의 자질은 태자와 기왕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엄조철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황제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지 앞으로의 황통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피바람이 불겠군.”
엄조철은 조용히 미래를 예견했다.
*
진혁위를 기다리는 동안에 류희겸은 자신의 숙소를 정리했다. 류희겸은 개인 물품은 최소한으로만 챙겼다. 옷을 제외한다면 궤짝 하나를 채우지 못할 정도였다.
원래부터 거추장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기는 했다. 또한 자신의 것이 아닌 물건을 정확하게 구분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물건만 가져왔다.
태경을 떠난 이후로 지금까지 류희겸은 버릇처럼 숙소와 물품을 정리했다. 혹여 외부에서 심어둔 불온한 것들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편집적인 행동이었지만 만약을 대비해 철저한 게 나았다.
시종 없이 제 손으로 붓과 벼루, 먹을 하나씩 챙기던 류희겸은 필갑 안에 가득 들어 있는 붓의 개수까지도 확인했다.
류희겸은 글을 쓸 일 자체가 얼마 없었다. 혹여 자신이 쓴 글이 나쁘게 이용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조심하려고 했다. 유서를 쓴 것 말고는 진윤홍과 희일준에게 안부 서신을 몇 번 적기 위해 붓을 든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진혁위는 최상품의 문방사우를 준비해 주었다. 전장에 가져갈 짐을 쌀 때도 꼭 챙기라고 지시했다. 귀비에게 받을 것이 있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눈치가 없긴 했지.”
붓을 노려보던 류희겸은 미간을 찡그렸다. 자신이 눈치가 없기는 해도 진혁위가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지는 않았다.
지금껏 진혁위는 몇 번이고 연시를 써서 보냈다. 처음에는 경고의 의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경고도, 그리고 연애 놀음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랬기에 답시를 적는 것이 더더욱 힘들었다. 그저 연애 놀음이었다면 적당히 맞장구쳐 주면 되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류희겸은 애증에 대해 생각했다. 목숨과 충정을 맞바꾸었다고 하더라도 지난 과거는 지워지지 않는 법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진혁위는 자신을 향한 미움을 내보이지 않았다. 또한 연림군의 장수들을 나서서 구한 것을 그저 충정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따뜻한 호의와 부드러운 친애가 거칠고 다정하게 주어졌다. 그것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제야 그것을 깨달은 자신이니,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마땅했다.
“큰일이군.”
낮에 있었던 일이 강렬해서인지 다음으로 미루어두기로 마음먹은 감정들이 자꾸 솟구쳤다. 마치 봄날에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 같았다. 의식하지 않으려 하는데도 자꾸 불어오는 바람의 흐름에 머리를 흔들며 정리하고 있는데 때맞춰 진혁위가 안으로 들었다.
이미 밤이 깊어진 지는 오래였다. 진혁위가 돌아올 때기는 했다.
“오셨습니까?”
반가운 마음에 류희겸은 웃으면서 일어났다.
“또 정리를 하고 있었더냐?”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류희겸은 정리하고 있던 물건들을 재빨리 궤짝 안에 몰아넣었다. 진혁위에게 상석을 양보하면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어찌 되었습니까?”
“잘 되었다. 조 장군은 억울하다고 하다가 옥에 갇히고는 입을 다물었다고 하더군. 빠져나갈 길을 찾으려고 하겠지.”
“다른 장군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익문사가 나섰으니 아무 말도 못 하지. 갑작스레 골칫덩이를 떠안은 태자께서 어찌 하실지가 궁금하다.”
진혁위의 흥겨운 반응에 류희겸 역시 기뻤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진한재를 사로잡는 공동의 목표가 생기면서 두 사람은 서로가 알고 있는 정보를 적극적으로 공유했다. 화진국의 사신을 상대하면서 황제의 호의를 산 것이 첫 번째였다. 그리고 예정에도 없던 조태환이 개입하자 그를 배제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류희겸도 진혁위도 조태환을 배후에 두고 전쟁을 치를 생각은 없었다. 특히 진한재를 상대하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도 모자랐다. 기밀을 빼돌리는 내부의 적을 확실히 치워버리기 위해 준비했다.
조태환이 기밀 정보를 빼돌릴 것이라고 확언한 것은 류희겸이었다. 시기를 따지면 태자와 진한재가 이미 손을 잡았을 때였다. 만약을 위해 진혁위가 조태환의 뒤를 캤다. 류희겸이 의심한 대로 조태환은 꼬박꼬박 군사 기밀을 빼돌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확인한 진혁위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 익문사를 끌어들였다. 마침 호양성의 동문을 열기 위해 익문사의 수장이 직접 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태자의 명령으로 기밀을 빼돌린 조태환이 어떤 변명을 할 것인지 기대가 되었다. 그가 살길은 태자를 끌어들이는 것뿐이니 꽤나 볼 만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왕야께서도 이제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직은 괜찮다. 형님들끼리 싸우느라 바쁘니까. 딱딱한 이야기는 그만하자. 잘 씻기는 했느냐?”
“예.”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류희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위의 말대로 잘 씻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류희겸이 비장하게 대답하는 바람에 진혁위는 웃음을 터트렸다.
“적을 죽이러 가는 것이냐? 왜 그리 비장해?”
“왕야께서 무엇을 하라 명하실지 몰라 그럽니다.”
“귀비도 좋아할 것이다.”
류희겸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진혁위가 밤에 요구하는 것들은 결국 좋기는 좋았지만 부끄러움은 별개였다. 대답을 하지 않고 있자니 진혁위의 손등이 얼굴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뚱한 얼굴도 예쁘다.”
예쁘다는 공격은 여전했다. 진혁위의 손이 닿은 뺨에 열기가 빠르게 퍼지는 것을 느끼며 류희겸은 웃었다.
“왕야께서도 어여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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