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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章 (10/22)

七章

중추절(仲秋節)을 앞둔 태경의 거리는 화진국에서 오는 사신단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같은 뿌리를 지닌 나라라고 하지만 대연국의 번국인 양번국이 화진국에게 점령당한 이후에 공식적인 교류는 완전히 끊겼다. 사이도 험악해졌다.

오 년 만에 방문하는 화진국의 사신단에서 류희겸의 목을 달라고 했다는 신빙성 높은 소문이 퍼졌다. 화진국 출신의 장군으로 노비에서 영왕의 귀비가 된 사내. 황제에게 만독화를 바쳐 충신이 된 류희겸은 유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류희겸에게 보이는 관심은 수많은 흥밋거리 중 하나에 불과했다. 황제가 그를 죽이거나 말거나 자신들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분위기가 달랐다. 대연국이 양번국을 잃은 이후로 화진국에 대한 반감은 꾸준했고, 그 사이에 류희겸이 끼어 있었다.

“왜 지네들이 죽여라 마라 하는 거야? 황제 폐하께 만독화를 바친 충신이라고.”

“그게 부러운 건가 보지.”

“노비로 팔아먹은 게 누군데.”

주점에서 술을 마시며 오가는 이야기가 대부분 이랬다. 화진국에서 류희겸의 생사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류희겸의 가장 큰 약점은 출신이었다. 정확히는 역모를 일으킨 반역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비열한 화진국의 음모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불에 탄 시신이 성벽에 걸렸다고 알려진 류희겸이 노비가 되어 대연국에 나타난 것부터가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주점에 모인 사람들 중 가장 목소리가 큰 사내가 떠들어댔다.

“내가 말이지. 황궁에서 일하는 숙수를 하나 알고 있거든. 숙수에게 술을 한잔 먹이니 재미있는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오더라고. 글쎄, 귀장군이 황제 폐하 앞에서 그랬다는 거야. 조국이 자신을 배신자로 만들었으니, 호양성을 되찾아 황제 폐하께 바치겠다고.”

“어? 황제 폐하께서 살고 싶으면 호양성을 되찾아 오라고 한 거 아니야?”

“에이. 아니야. 귀장군이 먼저였어. 그건 확실해.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 그러라고 했다고 했어. 내가 똑똑히 들었단 말이야. 나 같았으면 눈물 콧물 흘리면서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을 건데, 거기서 호양성을 되찾아 드리겠다고 하다니. 괜히 귀장군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야? 안 그래? 황제 폐하도 대단하시지. 아량 넓게 귀장군을 살려두었으니, 만독화를 바칠 충신이 생긴 거고. 복이 많으셔.”

사내는 대화의 순서까지도 고쳐 가며 소문을 주도해 나갔다. 대필사(代筆士)인 그는 온갖 곳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소문에 밝았다. 입담도 좋아 공짜로 술을 얻어 마시며 이야기를 풀어냈다.

물론 사람들은 그가 돈을 받고 소문을 퍼트리는 전문적인 꾼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저 술과 어울리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집중할 뿐이었다.

◇ ◇ ◇

화창한 가을이었다. 류희겸에 대해 호의적인 소문을 퍼트리라고 명령한 자와 명령을 실행에 옮긴 자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앉았다.

“바보 멍청이 같은 놈이 일을 다 망칠 뻔했어.”

채제승은 태자에 대한 깊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태자라는 인간이 최악인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다.

안용옥이 토지 강탈과 관련된 고발을 당한 것이 며칠 전이었다. 기왕의 행동은 기민하고 빈틈이 없었다. 반면에 태자는 문정후의 비리를 코앞에 들이밀어 줘도 어리바리하게 굴었다. 서천은 척박한 땅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나마 머리가 있는 측근들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멍청함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물론이고, 정적의 약점을 공격해야 한다는 머리조차 없다는 것은 한심하기까지 했다.

“사형이 조금 더 고생해야겠어.”

“어휴. 새삼스럽게 왜 그러십니까. 막 구르고 있는데, 얼마나 더 굴리시려고요.”

“많이?”

가벼운 너스레에 진혁위가 무서운 농담으로 맞받아쳤다. 어지간한 모략은 모두 진혁위의 머리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별다른 문제 없이 순조롭게 일이 흘러가고 있는 것은, 채제승이 진혁위의 손발이 되어 움직여준 덕분이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으니 더 많이 구르기는 해야 했다. 물론 채제승은 기꺼이 그럴 마음이 있었다.

“하하하. 멀쩡한 모습으로만 남겨주시면 됩니다. 아, 그렇지. 태자를 조사하다가 고장유(高張柳)가 큰 덫을 사들였다는 것을 알아냈어.”

고장유는 황후의 외가 쪽 친척으로, 고씨가는 개국 공신 가문이었지만 최근 세가 많이 줄었다. 고장유의 경우 태자가 아닌 황후의 수족처럼 움직였다.

“큰 덫?”

“멧돼지와 곰을 잡는 덫 말이야. 그런데 고씨가는 사냥에 별 소양이 없어. 대대로 문사 집안이잖아. 그런데 고장유가 다른 사람 이름으로 덫을 사들인단 말이야. 너무 수상하지 않아?”

진혁위는 채제승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챘다. 멧돼지와 곰을 잡는 덫이라면 말도 걸려들 수 있었다.

황제는 눈이 내리는 겨울을 좋아했기에, 군사 훈련과 병행되는 수렵제와 별개로 겨울에 종종 황실 사냥 대회가 열리고는 했다.

수렵제나 사냥 대회에서는 곧잘 사고가 일어나는 법이었다. 역사적으로 뒤져 보면 황제의 말이 덫에 걸리는 일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만약 황제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어버린다면 다음 황제로 가장 정통성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당연히 태자였다.

“고장유라면 황후가 일을 도모하는 거 같은데?”

조심스러운 채제승의 추측에 진혁위는 인상을 썼다. 확실히 고장유라면 태자가 아니라 황후가 단독으로 일을 도모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황후의 돌출 행동은 지난 생에 없었던 일이었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좌승상과 그의 아들들이 모두 살아 있었다. 황후 역시도 연금 같은 것은 당하지 않았으니 극단적인 수를 쓸 이유가 없었다.

덫을 쓴다는 것은 낙마를 노리는 것이었다. 낙마라면 운이 좋아야 팔다리가 부러지는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운에 기대어 황제를 노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어쩌면 이건 진혁위가 파악하지 못한 함정일 수도 있었다.

태자와 달리 황후는 제법 수를 쓰는 게 능숙했다. 진혁위는 황후가 무엇을 노리는지 잠시 생각했다.

“황제가 죽으면 좋고, 안 죽는다면 누군가에게 덮어씌울 계획이겠지.”

“그게 쉽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할까? 황제께 고발해?”

“지금 말고 나중에. 증거만 챙겨뒀다가 나중에 매관매직 건과 함께 터트리는 걸로 해.”

“아. 그것도 괜찮겠다.”

“송일양(宋一陽)은?”

“도박에 단단히 빠져 있지. 빚더미에 앉았으면서도 정신을 못 차렸어.”

미래를 아는 진혁위는 황후와 태자, 그리고 기왕의 약점이라고 할 것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증거를 모으고, 증인을 회유하거나 협박하고, 그것도 아니라면 함정을 파야 했다. 황후와 종인령 유월춘의 사이를 겉으로 드러내기 위해 약을 썼던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황후를 옭아맬 것들은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 뇌물을 받고 좌승상에게 관직을 추천했던 매관매직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다만 증거를 찾기 어렵고 증인을 회유하기도 힘들어서 함정을 파는데 꽤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송일양은 황후에게 뇌물을 바쳤지만, 딱 그 시점에 좌승상이 쫓겨나는 바람에 원하는 관직을 얻지 못했다.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온갖 구린 방법으로 모은 돈을 허공에 날려버린 송일양은 그 이후로 도박에 빠져 살았다. 빚이 쌓여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가 사고를 쳐서 황후를 고발하게 만드는 것이 계획이었다.

덫과 매관매직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걸린다면 황후는 단순한 연금 상태로 끝날 리 없었다. 또한 낙향한 모태심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양성 전투는 겨울이 되기 직전에 시작해서 봄이 되고서야 끝날 것이고, 그사이에 기왕은 문정후를, 그리고 태자는 황후를 잃을 것이다. 그것이 진혁위의 계획이었다.

그것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채제승은 물러나겠다고 인사를 하는 대신에 진혁위를 향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채제승이 주군을 뵙습니다.”

진혁위는 채제승의 돌발 행동에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주군이라니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형? 지금 뭐 하는 거야?”

“나중에 황제가 되신다고 하실 때, 충성을 맹세하면 너무 속보일 것 같아서요.”

방긋 웃은 채제승은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나 농담은 아니었다. 채제승은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정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태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진혁위와 손을 잡았다. 물론 진혁위가 황제가 된다면 전심전력으로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혁위가 황제가 되길 바랐다.

“누가 황제가 된대?”

“소인은 왕야께서 황제가 되시기를 바라나, 아니 되셔도 상관없습니다. 소인은 마음을 확실하게 정하였습니다.”

“이러지 마.”

“노골적으로 말씀드리면 서열 정리입니다.”

채제승은 한때 진혁위만큼이나 무서울 것 없이 제멋대로 살았다. 급제를 하고도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사랑 때문에 무림에 투신했다. 일견 자유로워 보이는 삶이었지만, 그가 한 번 정한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을 진혁위는 잘 알고 있었다.

진혁위는 고개를 숙인 채제승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진혁위가 채제승을 끌어들인 것은 그의 원한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생에서 태자에 의해 딸과 장모는 물론이고 부인과 장인까지 모두 잃어버린 채제승은 복수의 화신이 되었다. 사람과 무기를 끌어모아 행행을 나선 태자를 습격했다. 하지만 습격은 실패했고, 채제승은 역도의 수괴가 되어 쫓겼다. 그 와중에도 채제승은 태경의 거리 곳곳에 벽보를 붙여 태자의 악행을 고발했다. 그는 일 년을 넘게 도망쳤지만 결국 남해에서 붙잡혀 죽었다.

운명이 바뀐 채제승과 함께한 것이 벌써 오 년째였다. 태자를 끌어내리고 나면 채제승이 훌쩍 떠나버릴 거라고 여겼기에 충성 맹세는 뜻밖이었다. 어쨌든 채제승은 진심이었고 그의 마음을 돌릴 길은 없었다.

“마음대로 해.”

“물러나옵니다.”

깍듯하게 예를 올린 채제승이 물러났다.

혼자가 된 진혁위는 애매하게 웃었다. 이전 생에서 황제가 되어보았지만, 그리 좋지는 않았다. 하여 제좌를 가지기보다는 멀리 떠나는 것에 더 마음이 기울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위대한 황제가 된다거나, 혹은 대륙을 통일하겠다는 야심 따위는 없었다. 책임감이 강한 류희겸에게 황궁은 넓고 호화로운 감옥이 되어줄 것이었다. 물론, 아이를 갖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진혁위는 긴 계획의 시작을 기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전에 류희겸에게, 자신이 받았던 선물이 하나뿐이라고 강조한 적이 있었다. 그것 때문인지 류희겸은 자신에게 선물할 귀물을 찾고 있었다. 오늘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구할 수 있다는 백진호를 왕부까지 불렀다. 과연 류희겸이 얼마나 대단한 선물을 준비했는지 궁금했다.

*

진혁위가 채제승을 만나고 있는 시각에 류희겸 역시 백진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여름에 류희겸이 사들인 금광에 관해 백진호는 완전히 손을 뗐지만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오늘 류희겸이 백진호를 부른 것은 진혁위에게 줄 선물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언질을 받은 백진호가 가지고 온 패옥들은 모두 훌륭했지만 류희겸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자신이 걸칠 거라면 과분할 정도의 물건이었다. 하지만 진혁위에게 할 선물이었기에 기준이 아주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내일 더 좋은 물건을 가지고 오겠다 한 백진호는 그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류희겸의 손님이 되어 차를 대접받으며 바깥에 도는 소문을 들려주었다.

화진국의 사신단이 곧 도착한다. 그들이 류희겸의 목숨을 내어놓으라고 했다는 것이 알려져서 사람들이 화를 내고 있다. 하남(河南)에서 전례 없는 풍년으로 쌀값이 곤두박질쳤다.

여기까지는 류희겸이 알고 있던 직전 생의 흐름과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언급되는 법이었다.

“영왕 전하께서 혼인을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백진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류희겸은 잠시 놀라고 말았다. 진혁위가 혼인을 한다고? 한순간에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직전 생에서 진혁위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다. 스물두 살의 친왕이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라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온갖 가문에서 매파를 보냈지만 모두 다 쫓겨났다는 것은 제법 유명한 일화였다.

이번에도 매파가 왕부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고 심양설에게 한 번 들은 바가 있었다. 그때는 진혁위의 성격이 여전하구나 싶었다.

그런데 진혁위가 혼인을 한단다. 류희겸은 백진호가 거짓을 고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백진호는 신용을 중요하게 여기는 상인이었다.

친왕이 혼인을 통해 세를 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류희겸은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다. 다만 백진호도 알고 있는 집안일을 자신은 모르는 이유가 궁금할 뿐이었다.

“왕야의 혼인에 대해 아는 바는 없네. 상대가 누구인지는 들었나?”

“문강공의 적녀라고 합니다.”

“그런가.”

류희겸은 잠시 문강공이 누구인지 떠올려보았다.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기는 한데 그게 전부였다.

“영왕 전하께서 한 번 더 승전하고 돌아오시면 혼인을 올릴 거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문강공이 패물을 마련하면서 소문을 퍼트린다고 하는데, 황제 폐하께서 혼인을 명하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헛소문일 수는 없겠군.”

류희겸은 무심히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혀를 찼다. 황제까지 언급하며 헛소문을 퍼트렸다가는 기군망상 죄를 범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황제가 혼인을 명했다는 것만큼은 사실일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진혁위가 자신이 간청하지 않는 이상에야 황제가 혼인을 명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던 것이 떠올랐다. 진혁위가 간청을 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장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

백진호의 폭로에도 류희겸은 시큰둥하게 굴었다. 오히려 그의 옆에 시립해 있던 심양설이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이 되고 말았다.

며칠 전, 심양설 역시 거래하던 가게에서 같은 소문을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혁위에게 물었더니 사실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진혁위는 류희겸에게는 자신이 직접 이야기할 거라고 하면서 잠시 동안 시종들을 단속하라고만 했다.

그런데 백진호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폭로해 버릴 줄은 몰랐다. 낭패한 마음에 심양설은 류희겸의 반응을 살폈다.

“주제넘은 말이오나, 저는 마마가 걱정입니다.”

“내가?”

뜻밖의 말에 류희겸은 백진호를 다시 보았다.

“귀비 마마께서 영왕 전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내원의 싸움은 총애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문강공은 많은 첩을 두었고, 정부인인 양씨가 내원을 장악할 때까지의 싸움이 요란했습니다. 그걸 보고 자란 문강공의 적녀의 성격도 만만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귀비 마마께서 속수무책으로 당하실 수도 있습니다.”

확실히 주제넘은 언사였다. 류희겸이 자존심 강한 귀부인이었다면 백진호를 끌어내어 치도곤을 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래도 백진호는 진심이었다.

뛰어난 장군으로 군공을 세운 류희겸이라고 하지만 내원의 싸움을 잘할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진혁위의 총애가 지극하다고 하지만, 내원에서는 총애만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다.

백진호는 류희겸을 은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영왕부의 내원에서 기를 펴고 떵떵거리며 살기를 바랐다.

조금 전까지 백진호를 원망하던 심양설도 순간 같은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양설이 보기에 류희겸은 능력도 심성도 모자랄 것 없는 훌륭한 주인이었다.

류희겸은 성격도 강단 있었지만 내원을 장악할 생각 자체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내원 안에 사람이 늘어나면 언젠가 된통 당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걱정과 달리 류희겸은 별생각이 없었다. 진혁위가 황제가 되려면 외척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객관적으로 판단했다. 내원의 싸움에 대해서도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진혁위가 한 번 더 승전을 하게 되는 곳은 호양성이었다. 호양성 전투가 끝난 후에 자신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원비로 올 사람을 견제하는 것은 기력 낭비였다.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하도록 하지.”

“마마.”

“왕야께서 다복하게 일가를 이루실 터이니 좋은 일이 아닌가.”

두 사람은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경화당의 시녀가 나타나 영왕야께서 찾아오셨다고 전하자마자 진혁위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모두를 대표해 예를 올린 사람은 류희겸이었다.

“영왕야를 뵙습니다.”

“모두 일어나라.”

사람들을 일으켜 세운 진혁위는 류희겸이 양보한 상석에 앉았다. 진혁위는 한 달여 만에 보는 백진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자주 보는군. 백 대주.”

“그간 평안하셨습니다. 왕야.”

“바빴지. 그런데 백 대주의 얼굴은 좋지 않아 보이는군.”

“일이 있어 먼 곳을 다녀와서 그렇습니다.”

“그래? 그럼 편히 쉬어야겠군.”

“왕야의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눈치가 빠른 백진호는 재빨리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진혁위가 목이 마르다고 하자 심양설 역시 차를 올리겠노라고 하면서 자리를 비웠다.

류희겸은 재주 좋게 사람들을 내쫓은 진혁위의 솜씨에 속으로만 혀를 찼다. 그리고 앉으라는 진혁위의 눈짓에 조금 전까지 백진호가 앉아 있었던 의자에 자리 잡았다.

“다들 내쫓으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일부러 쫓아낸 거 아니다. 백 대주는 정말 피곤해 보였고, 목이 마른 것도 사실이다.”

“예.”

콩을 팥이라고 우기는 진혁위를 이길 수 없었기에 류희겸은 무심히 대답했다. 일부러 쫓아낸 것은 사실이니 혹시나 중요한 전언이 있을까 하고 진혁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백 대주에게서 무엇을 샀기에 다들 꽁지 빠지게 사라져?”

“마음에 차는 게 없어 다른 것을 가지고 오라고 일렀습니다.”

“그래서 백 대주가 눈치를 본 건가? 그의 눈썰미는 제법 괜찮은데 어찌 마음에 차지 않았을까? 귀비가 얼마나 좋은 것을 사려고?”

“아주 좋은 것이요.”

류희겸은 진혁위의 선물을 고르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진혁위가 기대한다고 했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졌다.

“아주 좋은 것이라. 그러고 보니 본왕이 다복하게 일가를 이루면 좋다고 했었지?”

“그걸 들으셨습니까?”

“그래. 들었다. 본왕이 귀가 좀 좋은 편이지. 본왕이 다복한 일가를 이루는 방법은 하나뿐인데. 귀비가 회임을 했느냐? 그렇다면 아주 좋은 선물이 맞긴 해. 그런데 회임을 했으면 백진호가 아니라 옥안인을 불러야지.”

“그게 아닙니다.”

“그럼?”

활짝 웃은 진혁위는 진짜 옥안인을 부를 기세였다. 진혁위의 혼인에 대해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려고 했던 류희겸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왕야께서 혼인을 하실 거라는 소문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랑?”

“문강공의 적녀라고 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혼인을 명하신 것은 왕야의 다복함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류희겸은 다복함을 말한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진혁위가 난감한 듯 얼굴을 살짝 구기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사실 진혁위가 황제의 명으로 혼인을 하는 것은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혼인과 같은 중요한 일을 자신에게 숨긴 것은 속상했다. 아직 믿음이 없으니 그럴 수 있다고 납득하려고 해도 서운한 것은 서운한 것이었다.

“이런, 귀비는 질투도 안 하는군.”

“예.”

“그래도 서운할 터인데? 안 그러냐?”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능력도 있나. 점술사로 나서면 돈을 많이 벌겠네. 류희겸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본 진혁위를 빤히 보았다. 대답을 하지 않은 것으로 긍정이 되어버렸다. 그걸 못 알아차릴 리 없는 진혁위가 답을 재촉했다.

“서운하다면 서운하다고 해야지.”

“왕야께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여기겠습니다.”

서운하다고 하는 대신에 딱딱하게 사정을 살피는 류희겸 때문에 진혁위는 웃었다. 질투 따위는 해주지 않을 줄 이미 알았다.

성격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류희겸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무던하고 무심한 사내가 어떤 식으로 질투를 하는지도 궁금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을 생각하며 진혁위는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얼른 해명부터 했다.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니다. 요즘 귀비와 사이가 한참 좋은데, 황제께서 혼인을 명하셨다고 하기가 그랬다. 그래도 귀비가 걱정할 건 없다. 혼인은 안 할 테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제께서 명하신 혼인입니다.”

소문은 퍼질 대로 퍼졌다. 거기다 황제가 명한 혼인을 안 하겠다는 것은 불효를 넘어서 충성을 의심받을 일이었다. 태자와 기왕이 황제를 기만하는 자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소리칠 게 뻔했다. 직전 생에서도 혼인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던 진혁위는 황제에게 여러 소리를 들었다.

이야기가 심각해지려고 하자 진혁위가 손을 내저어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우소진과 시종들을 내보냈다. 단둘만 남게 되자 진혁위가 말을 이었다.

“황제께서 혼인을 명하신 문강공의 적녀는 주화령이라고 한다. 대찬 여인이지. 지난번에는 본왕과 혼인을 하기 싫다고 정인과 멀리 도망쳐 버렸다. 들어본 적 없느냐? 꽤 유명한 일이었는데?”

“……모릅니다.”

“그 일로 문강공이 황제께 밉보여서 관직을 내놓고 낙향해야 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니, 들었던 것 같기는 한데 기억에서 희미했다.

“이제 오해는 다 풀렸지?”

“오해라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서운하다며?”

“앞으로 왕야께서 혼인을 하게 되시면, 가감 없이 소인에게 알려주십시오.”

류희겸은 최소한의 것을 부탁했다. 적어도 진혁위의 혼인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일 없다. 아, 또 오해하겠군. 알려주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본왕이 앞으로 혼인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

“왜? 못 믿겠느냐?”

“제좌를 가지신다고 하셨잖습니까?”

못 믿는 게 아니었다. 앞으로 혼인을 할 일이 없다니. 그건 불가능했다. 황제가 되려면 강력한 처족이 있어야 했다. 태자와 기왕처럼 혼인으로 세를 불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본왕은 그런 거 없이도 황제가 되었다.”

당당한 진혁위의 말에 류희겸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황제가 될 때까지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그게 가능하기는 해? 설마 황제가 되어서도 혼인을 안 한 건 아니겠지? 끝없는 질문이 튀어나오려고 했기에 류희겸은 침묵을 선택했다.

앞날을 예단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지만, 고집스럽게 자신하는 진혁위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 때 마침 차를 준비한 심양설이 나타났다. 진혁위에게 차를 올린 심양설 역시도 방에 남아 있지 않고 물러났다.

진혁위가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것을 기다린 류희겸은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일찍 퇴궁하셨군요. 이제 여유가 생기신 겁니까?”

최근 진혁위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작년까지만 하여도 세상을 돌아다니며 풍류를 즐기던 진혁위였다. 그러다 희교국의 반란을 평정한 이후로 황제가 던져주는 일거리를 하나씩 맡아 하고 있었다.

화진국에서 오는 사신단을 맞이할 환영 준비를 하게 된 것이 진혁위였다. 거기다 호양성 탈환을 위한 전쟁을 앞두고 기밀 회의에 참석하자 더욱 바빠졌다.

거의 매일 아침 일찍 입궁하여 해가 지고 나서야 영왕부로 돌아왔다. 어떨 때는 아주 늦게까지 일을 해서 석반을 함께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진혁위가 입궁을 하지 않은 휴일은 열흘 전이었다. 그래서인지 밝은 날에 진혁위를 보는 것이 오랜만인 것 같았다.

“맞다. 하고 있던 일이 적당히 마무리되어 시간을 내었지. 환한 낮에 귀비의 예쁜 얼굴도 보고, 내 선물이 무엇인지도 궁금하고, 또 차도 같이 마시고 말이야.”

“모두 다 하셨으니 소인과 함께 후원을 걸으시겠습니까?”

“그것도 좋지. 하지만 그 전에 귀비에게 줄 선물이 있다.”

류희겸은 진혁위가 품에서 꺼낸 봉투를 받아 들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진혁위의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서신의 겉봉이 일반 재질의 종이라는 게 이상했다. 게다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무엇입니까?”

“열어보아라. 마음에 들면 접문이나 해라.”

자신만만한 진혁위의 말에 류희겸은 봉투 안에 들어 있는 종이를 꺼냈다. 그것은 짧은 안부 인사가 적힌 서신이었다.

평안하십시오.

서명도 날인도 없이 짧은 안부 인사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류희겸은 그것이 누구의 필체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류희겸이 알고 있기로 아래쪽으로 삐침이 심한 악필을 쓰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고막영. 직전 생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류희겸 곁에 남았던 부하였다.

수많은 적에게 쫓기다가 길이 갈렸다. 자신이 막겠다며 다른 쪽으로 뛰어간 고막영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지게 된다면 화진국의 수도 경릉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그건 이룰 수 없는 약속이 되었다.

생을 반복하면서 류희겸은 남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감옥 안에서 눈을 뜨면 세상도 다시 되돌려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직전 생에서는 힘들게 대연국으로 데리고 온 부하들을 화진국에 남겼다. 자신의 삶이 끝나더라도 그들만큼은 살아 있기를 바라면서.

그가 살아 있었다. 이번 생에서는.

고막영뿐만이 아니라 손쓸 방도 없이 하나씩 잃은 다른 부하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만, 살아 있다면 충분했다.

회한과, 그리고 기쁨에 먹먹해지다 못해 눈이 뜨거워졌다. 이러다가 울 것 같아서 류희겸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몸을 틀었다.

“기뻐할 줄 알았는데, 왜 울어?”

“안, 웁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목이 잠긴 것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류희겸은 얼굴에 힘을 꽉 주고 일렁이는 감정을 수습했다.

“울려면 본왕을 보고 울어라. 얼굴 감추지 말고.”

“괜찮습니다.”

류희겸은 손을 내리고 진혁위에게 얼굴을 보여주었다. 넉넉하게 웃고 있는 진혁위를 보니까 진정되어 가던 마음이 다시 울컥거렸다.

“접문은 안 하느냐?”

가벼운 미소와 농담에 울렁이던 마음이 조금 가셨다.

“이걸 어찌 왕야께서 가지고 계십니까?”

“그 서신을 쓴 고막영이라는 자가 유배지를 옮기는 와중에 사고가 났다. 갑작스러운 폭우 때문에 배가 전복되었는데, 뒤따르던 감시자가 고막영을 겨우 구했고. 같이 배를 탔던 수형자와 옥졸이 모두 죽거나 물에 휩쓸려 가는 바람에 고막영은 죽은 사람이 되었다. 감시자가 말하기를, 고막영이 제법 눈치가 빠른 자라고 하더구나. 노역을 하다가 편한 곳으로 소속이 바뀐 것이 미심쩍어서 내내 의심을 했단다. 거기다 생판 모르는 남이 강물에 휩쓸려 가는 자신을 구해주니 혹시나 하고 따져 물었다고 했어. 그저 우연하게 구한 거라고 해도, 네가 보낸 사람이냐면서 추궁해서 엄청 곤란했다는 하소연이 있었다지. 그 결과물이다.”

“고막영은 어디에 있습니까?”

“안전한 곳에.”

류희겸은 진혁위가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하지 않은 것을 이해했다. 믿지 못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던가. 그리고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좋았다.

“감사드립니다. 왕야.”

“좋으면 접문을 하라니까.”

“그건…… 나중에 하겠습니다.”

“뭘 나중에 해.”

“지금 하면 접문으로 안 끝나지 않습니까.”

해가 지고 나서야 돌아오는 진혁위는 침전이 아니라 경화당에서 잠을 잤다. 때문에 교합 역시 하루가 멀다 하고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몸을 겹친 날을 따지면 스무 날이 훌쩍 넘었다. 어제는 그냥 잠만 잤으니, 지금 입을 맞추면 그다음으로는 바로 침상으로 향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귀비가 이런 일에만 눈치가 생겼어.”

뚱한 얼굴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진혁위는 류희겸의 생각이 틀렸다고 하지 않았다. 류희겸은 얼른 다른 방안을 제시했다.

“소인과 후원을 걸으시지요.”

“후원에 꿀이라도 묻어놓은 거야? 왜 자꾸 나가자고 해?”

“볕이 좋아서요. 날이 밝을 때 함께 걷는 것은 오랜만이지 않습니까?”

산책은 낮부터 교합을 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꼼수였다. 그래도 진혁위와 같이 걷고 싶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가을의 정원은 혼자 걸어도 운치 있었지만, 둘이 함께라면 더 좋았다.

“흥. 말은 잘해. 그래도 산책은 하자. 귀비의 말대로 오랜만이니 말이다. 나가기 전에 그것은 태워라.”

“……예.”

진혁위가 가리킨 것은 류희겸이 들고 있던 서신이었다. 류희겸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을 위해 물증이 될 만한 것은 남겨두지 않는 것이 옳았다.

류희겸은 심양설에게 작은 화로를 가지고 오라고 명한 다음에 그 자리에서 바로 서신을 태웠다. 서신이 까만 재가 된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돌아와서 귀비랑 놀아야겠다고 진혁위가 농을 하는데 우소진이 다급히 찾아들었다.

“전하. 우소진입니다.”

“무슨 일이냐?”

“지금 당장 입궐을 하라는 황명이옵니다.”

입궐이라는 말에 진혁위도 류희겸도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지금? 무슨 일로?”

“거기까지는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귀비와 산책은 못 하겠군.”

가볍게 혀를 차는 진혁위와 달리 류희겸은 불길함을 느꼈다. 황제가 예고도 없이 황궁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경사스러운 일이라면 미리 알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류희겸은 방금 전에 까맣게 재가 된 고막영의 서신을 힐끗 보았다. 설마, 저것이 문제가 된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혁위에게 한 걸음 거리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엇을?”

“다른 것이 더 남았습니까?”

류희겸은 재가 된 서신을 눈짓했다. 정확하게 알고 싶어 물은 것이었는데, 갑자기 진혁위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런 거 아니다. 형님 중에 누군가가 날 고발했나 보지. 대충 내용도 짐작하고 있다. 그러니 도망칠 생각 따위는 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

“도망쳤다가 붙잡히면 다리가 부러지는 것으로 안 끝난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는 경고의 위험성을 이미 몸으로 경험한 류희겸은 진혁위를 가만히 보았다. 너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확인받으면 여전히 가슴이 따끔했다. 하지만 자신이 도망칠 거라고만 여기는 진혁위 때문에 울컥하는 기분도 들었다.

진혁위가 잘못되면 그의 귀비인 자신 역시 운명을 같이 해야 했다. 하지만 진혁위는 친왕이었고, 역모에 엮이지 않는 이상에야 목숨만큼은 부지할 수 있을 터였다. 도망칠 이유 따위는 없었다.

“소인은 왕야께 맹세했습니다.”

“그래. 그랬지. 예쁘게 하고 기다려라. 늦게 돌아오더라도, 귀비와 놀 시간은 있을 것이다.”

심각함은 조금도 없는 진혁위가 웃으며 안채를 나섰다. 류희겸은 진혁위를 뒤따라 움직였지만 경화당의 정문에서 제지당했다.

“기다려라.”

마치 개에게 이르는 것 같은 명령에 류희겸은 멈춰 섰다. 개라면 주인을 쳐다볼 수밖에 없겠지만, 자신은 말을 할 수 있었다.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평소에는 얌전히 기다리겠다는 말을 잘도 하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무섭게 굴어?

“소인에게도 소심증이 생겼나 봅니다.”

류희겸은 언젠가 진혁위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러자 진혁위가 웃음을 터트렸다.

“본왕을 웃기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무사히 돌아온다니까. 나중에 보자.”

활짝 웃은 진혁위가 손등으로 류희겸의 뺨을 쓸었다. 가볍게 접촉했다 떨어져 나가는 동안에 류희겸은 뻣뻣하게 굳었다.

천무동 앞에서 진혁위가 했던 인사가 떠올랐다. 그때는 손끝으로 얼굴을 쓸었지만 구도나 언행은 그대로 닮아 있었다.

진혁위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류희겸은 한참 동안이나 문 너머를 바라보며 방금 전에 깨달은 것을 되새겼다.

작은 몸짓이 친애의 의미라는 것을 깨닫자 숨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마마. 이제 들어가셔야지요.”

“연무장에 가겠다. 우풍이를 불러라.”

류희겸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잡생각이 많아지는 법이니 몸을 움직여야 했다.

*

진혁위는 한껏 옷을 차려입은 다음에야 황궁에 들었다. 황궁의 분위기는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했고, 가라앉아 있었다.

무사히 돌아오라고 한 류희겸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진혁위는 태평했다. 류희겸에게 말한 대로 누가 어떤 내용으로 자신을 고발했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에 무서울 게 없었다.

태감을 따라 진혁위가 향한 곳은 편전이 아니라 대전이었다. 넓디넓은 대전의 옥좌에는 황제가, 그리고 그 아래는 관복을 입은 사내 두 명과 태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진혁위는 그들을 곁눈질조차 하지 않고 황제 앞으로 가서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왔느냐?”

“부르심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혁위야. 네가 고발을 당했다.”

고발이라는 단어와 황제의 친근함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진혁위는 더더욱 몸을 낮추었다.

“부황의 성심을 어지럽힌 소자를 벌하십시오.”

“어떤 내용인지 알고?”

“소자가 무엇으로 고발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허나 공사가 다망한 부황께서 신경을 쓰시게 만든 것도 불효이옵니다.”

진혁위는 한껏 몸을 낮추며 황제를 달랬다. 고발을 당했다며 황제가 직접 불러 친밀하게 말한 것은 여러 가지를 의미했다. 당장에 일을 키우지 않고 진혁위의 해명을 먼저 듣겠다는 뜻이었다. 황제의 성향을 보자면 그것부터 감사하다고 하는 게 현명했다.

“불효인지 아닌지 봐야지. 혁위야. 네가 천우상단의 주인이 맞느냐?”

“소자가 투자를 하였고 상단 수익의 삼 할을 가지오니 반은 주인이 맞습니다.”

“그래? 그럼 그곳에서 금서를 취급한다는 것은?”

“금시초문입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진혁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황제께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황제가 혀를 차며 낡은 책 하나를 들어 보였다.

“임(某) 모라는 자가 천우상단에서 책을 여럿 주문하여 자택으로 배달받았는데, 그 사이에 금서가 있어 태경부에 고발했다. 그리고 태경부에서는 오늘 아침 일찍 상단에 있는 책을 압수하였지. 그중에도 금서가 있었는데, 천우상단의 주인이 너라고 하니 바로 형부로 알렸다. 형부상서가 꽁지에 불이 붙은 채 내게 왔다. 이걸 들고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해야 할 것이야.”

낡은 서책을 들어 보이는 황제의 추궁은 진혁위도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천우상단은 서역에서 오는 귀한 물품을 주로 거래하는데, 그중에는 서책도 있었다. 한 번에 대량으로 들어오는 서책의 종류는 중구난방이었고, 때로는 금서도 한두 권씩 끼어 있곤 했다.

이전 생에서는 상단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금서를 처리했다가 태자의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서류상으로 진혁위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무사했지만, 상단은 박살 나고 사람이 많이 죽었다.

진혁위는 태자에게 상단의 존재를 알린 배신자가 류희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해 두었다.

지난번처럼 자신이 상단의 주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은 것이 첫 번째였다. 여러모로 위험하기는 했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대신에 이렇게 황제 앞에서 변호할 기회가 생겼다.

“소자는 제일 처음 금서를 발견했다는 임 모라는 고발자를 고발하겠습니다. 그리고 상단에서 압수한 서적을 조사한 관리도 고발하겠습니다.”

“뭐라? 잘못을 했으면 당장에 사죄를 해야지. 네가 누구를 고발해? 저 책이 무엇인지 아느냐?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내용이 적혀져 있단 말이다.”

지금까지 조용히 서 있던 태자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의 시비에도 진혁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제 폐하. 소자는 금서의 불온함을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닙니다. 서역에서 들어오는 서책 중에는 출처를 모르는 것이 많고, 가끔 금서도 하나씩 끼어 있습니다. 하여, 상단에서는 서책 관리를 철저히 합니다. 우선은 금서 목록과 비교하여 골라냅니다. 겉표지와 내용이 다를 수 있으니 그것도 확인합니다. 또한 내용을 해석할 수 없는 글이 적힌 것도 금서와 함께 모두 태경부에 신고합니다. 특히 금서는 따로 목록을 만들어 신고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태경부에 관련 문서가 보관되어 있을 것이옵니다. 또한 상단에도 태경부 관인이 찍힌 문서가 있습니다. 만약을 위해 이렇게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는데, 어찌 배달한 책 사이에 금서가 끼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소자는 확신합니다. 모함입니다.”

“모함이라니? 상단에서 압수한 서책 중에서도 금서가 있다는 소리는 귓등으로 들었느냐?!”

이번에도 태자가 나서서 호통쳤다. 그제야 진혁위는 태자를 보았다.

“그렇기에 서책을 살핀 관리도 고발한다 하였습니다. 태자 마마.”

“뭐라?”

“서책이 압수되었다는 것은 소제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래전부터 태경부에 신고를 하여왔고, 또한 태경부에서 압수해 간 서책이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여서 말입니다. 천우상단은 소량의 서책만 취급하고, 태경부에 신고를 한 후에는 모두 가게 내부에 진열해 놓습니다. 누구나 볼 수 있게 진열해 놓았는데, 어느 바보 멍청이가 거기에 금서를 숨겨놓겠습니까?”

많은 것을 준비해 온 진혁위는 천우상단의 상단주가 너무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서책을 관리했다. 류희겸에 대한 복수심은 진혁위를 움직이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지금은 류희겸이 천우상단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것을 알았으니, 남은 것은 태자를 물 먹이는 것이었다.

“멍, 멍청하니까 거기에 두는 것이지. 아니. 나무는 숲에 숨긴다고, 거기에 금서가 있을 줄 누가 알겠느냐?!”

“그만!”

태자의 말을 막은 것은 황제였다.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던 태자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형부상서. 서책이 가게 내부에만 진열되어 있었던 것이 맞는가?”

“소, 소신은 거기까지는 모르옵니다. 그저 보고만 받았사옵니다.”

“경윤은 어떤가?”

형부상서가 쩔쩔매며 모른다고 하자, 황제는 태경부 경윤을 불렀다. 태경부 경윤은 조심스럽게 답했다.

“창고에는 책이 없어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것만 가져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영왕의 말대로 천우상단에서 금서를 신고한 것은?”

“송구하옵니다.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소신이 승차(陞差)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러하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소신이 죄를 지었사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태경부 경윤은 그 자리에서 엎드려 황제의 자비를 구했다. 그리고 진혁위 역시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 소신이 간언드리옵니다. 나라의 안위와 평안을 위해 법률로 엄히 금지한 금서를 두고 고발이 일어났습니다. 이번 일을 철저히 조사하여 명명백백히 전모를 밝히고 법률의 엄정함을 알려주십시오.”

넓은 대전에 진혁위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조금의 불안도 없는 간언에 태자는 낭패감을 느끼며 이를 악다물었다.

이 모든 것은 태자가 벌인 일이었다. 금서가 배달 왔다고 고발한 임 모와, 압수한 서책 사이에서 금서를 발견한 태경부의 관리 모두 돈으로 매수하여 거짓말을 하라고 시켰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완벽한 계략이었다. 서역에서 들어오는 물건 중에는 수상한 것이 많았고, 그중에 금서를 끼워 넣어 진혁위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황제를 비방하는 금서는 때에 따라 역모로 취급되기도 했다.

황후는 기왕을 처리하고 제좌에 오른 다음에 진혁위를 상대해도 늦지 않는다고 태자를 말렸다. 하지만 태자는 기왕보다 진혁위가 더 눈엣가시였다.

진혁위가 황제에게 질타받는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형부상서가 움직이는 것에 맞춰 대전에서 기다렸다. 황제가 화를 참으며 진혁위를 불러오라 명령했을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태자는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진혁위는 변명 거리를 잔뜩 늘어놓더니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거기다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니 태자는 속이 뒤틀리다 못해 미칠 것 같았다.

“당연히 조사를 해야지. 영왕의 주장이 맞다면, 고발자는 감히 금서로 황자를 무고한 것이 된다. 이번 일의 엄중함을 알리기 위해 익문사를 통해 전모를 밝히겠다.”

“영명하신 결정이옵니다.”

황제가 익문사를 언급하자 고개를 숙이던 태자는 눈을 꾹 감았다. 익문사의 조사에 매수된 이들이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저 손에 들어온 책이 금서인 것을 알아본 것뿐이라고 주장하면 되지만, 그래도 익문사의 조사는 악명 높았다. 그나마 배후를 모르도록 손을 써둔 것이 다행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틀어졌다.

태경부 경윤부터가 문제였다. 태자의 인척이 되는 안용옥이 토지 강탈로 고발당하는 것을 태경부 경윤이 사전에 막지 못했다. 그 일을 빌미로 태자는 태경부 경윤에게 천우상단을 조사하라고 압박했다. 만약 태경부 경윤이 입을 연다면 자신이 엮여 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될 터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태자는 안절부절못하고는 눈을 굴렸다. 우선은 태경부 경윤의 입부터 막아야 했다.

“태경부 경윤은 익문사의 조사를 성실히 보조해야 할 것이다.”

“신명을 다하겠습니다.”

“영왕도 왕부에서 자중하고 있어라. 금방 전모가 밝혀질 터이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부황의 명을 받듭니다.”

“모두 물러가라.”

황제의 축객령에 대전에 든 이들은 조용히 예를 올리고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형부상서와 태경부 경윤은 진혁위에게 다가와 급히 조사를 하다 보니 실수를 하였다는 사죄를 하고는 바삐 사라졌다.

“그러게 천한 방법으로 재물을 탐하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휘말리는 것이다.”

속이 쓰린 것을 이겨내기 위해 태자가 한껏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진혁위는 질 낮은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태자 전하의 고견에 감동하였습니다. 전하의 말씀을 명심하여, 앞으로 언사에 더욱 신경 쓰고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혁위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숙이자 태자는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트렸다. 자신이 먼저 함정을 파놓았다는 사실은 잊은 지 오래였고, 되레 분통이 터졌다. 하지만 더 이상 진혁위를 비난할 명분이 없었고, 무엇보다 편전 앞을 지키고 있는 태감과 시위들의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아바마마께서 명하신 대로 얌전히 근신하고 있는 게 좋을 것이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말이다.”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한 태자는 그대로 뒤돌아 사라졌다. 언젠가 이 수모를 갚아주겠노라 다짐하고 태경부 경윤을 찾으러 갔다.

진혁위는 멀어지는 태자의 뒷모습을 쳐다보지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바보 멍청이가 태자라는 것이 한심하기만 했다.

상단에서 판매하고 있는 서책이 모두 압수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짐작하고 있었다.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황제에게 불려온 것이 놀랍기는 했다.

태자가 직접 고발하지 않고 태경부 경윤과 형부상서를 이용한 것을 보면 잔머리를 굴리는 재주는 있었다. 그러나 일의 선후를 모르는 멍청이라는 것은 여전했다. 천우상단에 대한 계략을 짜느라 기왕의 약점이 될 문정후에게 집중하지 않은 것은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앞날을 미리 알고 있는 것은 남들에 비해 몇 발 앞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었고, 변수는 돌발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래도 이번 생에서만큼은 대전 앞뜰이 피로 물드는 일을 막고 싶었다.

하나씩 하나씩 편집적으로 준비해 온 것들이 이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계획에서 벗어난 것들은 없었다.

그래도 진혁위는 방심하지 않았다. 아직은 멀었다고 생각하며 석양이 지기 시작한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어두워지기 전에 영왕부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서두른다고 서둘렀으나 진혁위가 영왕부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지고 난 다음이었다. 수화문을 들어선 진혁위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진혁위는 수화문을 관리하는 시종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더냐?”

“그것이, 귀비 마마께 변고가 생기셨다 들었습니다.”

“변고?”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고, 운 시위께서 귀비 마마를 보면 붙잡으라고 하였습니다.”

심상치 않은 대답에 진혁위는 뛰다시피 경화당으로 향했다. 경화당에 도착하기도 전에 행등과 횃불이 어지러이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불길함을 확인해 준 사람은 운문형이었다.

“귀비 마마께서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나?”

“반시진쯤 되었습니다. 연무장에 계셨는데, 시중을 들던 우풍이와 함께 모습을 감추셨습니다.”

날카롭게 질책하려는 말을 어렵게 삼켰다. 최근 류희겸의 감시를 느슨하게 하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진혁위 자신이었다.

약간의 자유를 주었더니 이런 식으로 되갚는단 말이지? 그것도 자신이 황제에게 불려간 지금에?

무사히 돌아오라고 인사하던 얼굴을 떠올리며 진혁위는 이를 갈았다. 몇 번이고 장담한 대로 이번에 붙잡으면 다리를 부러뜨리는 정도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배신감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머리는 차가워졌다.

가능성은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던 이유도 이런 상황을 가정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류희겸이 담장을 넘어 도망칠 가능성이 낮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찾아라. 담을 넘은 것일 수도 있다.”

“알겠습니다.”

사나운 명령에 운문형을 비롯한 영왕부의 시위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류희겸은 무력이 뛰어났고 높은 담 따위는 한 번에 넘을 수 있었기에 뒤져야 할 곳이 많았다.

분노에 찬 진혁위는 류희겸이 사라졌다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자신이 직접 그를 직접 쫓을 생각이었다.

도망치다니.

진혁위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다.

*

“일어나세요. 일어나시라고요.”

철썩. 철썩. 사정없이 뺨을 때리는 손길에 류희겸은 억지로 눈을 떴다. 뺨이 얼얼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사내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깼네. 정신이 들어요?”

흐릿하던 시야에 익숙한 사내의 얼굴이 비췄다. 어리둥절함은 찰나였다. 류희겸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순식간에 깨달았다.

황제의 부름을 받은 진혁위가 황궁으로 가고 난 이후에 류희겸은 연무장에서 목봉을 휘둘렀다. 잡생각을 떨쳐 버리고자 격렬하게 움직인 탓에 물을 많이 들이켰다. 준비한 것을 다 마시자 우풍이가 물을 가지고 오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타난 사람은 우풍이가 아니라 이름 모를 시종이었다. 류희겸은 시종이 내원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다. 시종은 우풍이가 물을 가지고 오다가 넘어져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자신이 대신 물을 가져왔다고 했다.

류희겸은 우풍이의 안부를 물으며 물을 받아 마셨다. 물에는 이상이 없었다. 다만 시종에게서 몸을 돌리는 순간에 뒷머리에 강한 충격이 가해지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납치인가. 류희겸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해는 이미 졌는지 등불이 창고 안을 밝히고 있었다.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한 낡은 창고는 사람의 발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은 것 같았다. 자신은 기둥 한쪽에 손목이 묶인 채 고정되어 있었다. 우풍이 역시 자신처럼 한쪽 기둥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최악이었다면 자신은 이미 죽어 연주성의 감옥에서 눈을 떴을 것이다. 창고까지 데려와 일부러 깨운 것은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다는 소리였다.

“깼지요?”

“그래. 정신 차렸다.”

“귀비 마마. 아니. 아니, 너는 그러니까……. 너 맹진화 알지? 알잖아? 그렇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맹진화를 언급하는 시종은 여러모로 어설퍼 보였다. 그래도 류희겸은 방심하지 않고 더욱 긴장했다. 류희겸의 소매 끝에는 얇고 작은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겨우 검지 크기만 한 것이지만 손목을 묶은 밧줄을 자르기에는 충분했다.

류희겸은 시종의 언동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소매 끝에 있는 비수를 더듬었다. 진혁위에게 애원하다시피 하여 비수를 가지고 다닐 수 있게 허락받은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알아. 맹진화.”

맹진화를 언급하자 시종의 눈빛이 번뜩거렸다.

“그렇지요? 알고 있지요? 맹진화. 그녀를 어떻게 했……어? 어떻게 했냐고?”

“모른다.”

“알잖아. 네가 죽였잖아!”

시종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손에 쥔 몽둥이를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하지만 류희겸은 시종에게서 불안을 읽어냈다. 납치는 계획된 것 같았지만, 시종은 그리 담력이 커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위험했다.

“맹진화는 경화당의 시녀가 아니니, 내 소관이 아니다.”

맹진화는 아마도 죽었을 테지만 류희겸은 굳이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요! 당신이 죽였잖아.”

“네 이름이 무엇이지? 맹진화와 어떤 관계이기에 그녀를 이리도 간절히 찾는 것이냐?”

소매 끝에서 비수를 빼내는 것이 힘들었기에 류희겸은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었다. 부드럽게 대화를 유도하자 시종은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시종의 이름은 이원해(李元海)로, 그는 지난가을에 사라진 맹진화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했다. 진혁위와 류희겸의 혼례식 날 이후로 맹진화가 자취를 감추자 이상하다고 여겼다. 총관은 맹진화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알렸지만 이원해는 믿지 않았다. 혼인하자고 약속했는데 자신에게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을 리 없었다.

이원해는 맹진화가 평소에 류희겸을 뻔뻔하다고 비난하며, 협박을 당했다고 억울해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생각해 보면 류희겸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맹진화는 젊고 아름다우니 영왕의 총애를 빼앗길까 봐 손을 쓴 것이 분명했다.

류희겸에게 맹진화의 행방을 물어봐야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일 년 가까이 기회를 엿보다가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

“그녀가 날 두고 사라졌을 리 없다고요. 귀비 마마께서, 당신이 맹진화를 죽였잖아!”

류희겸은 광기 어린 이원해의 눈빛을 보며 인과에 대해 생각했다. 진한재가 보낸 자객에 대해서만 걱정을 했지, 맹진화의 악의가 이런 식으로 남아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도 류희겸은 감상에 빠지지 않았다. 이원해의 주의를 끌면서 밧줄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이원해를 제압하는 것뿐이었다.

“맹진화는 태자의 간자였다.”

“……?!”

이원해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며 류희겸은 다음 말을 이었다.

“주인을 배신한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충격을 받은 이원해가 안절부절못하다 비틀거렸다. 류희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발이 묶이지 않은 것은 천운이었다.

단숨에 거리를 좁힌 류희겸은 이원해의 목에 비수를 꽂아 넣었다. 작고 얇은, 그리고 날카로운 비수가 정확하게 급소에 꽂혔다. 류희겸은 이원해가 어쩔 몰라 하는 것을 보며 비수를 옆으로 비틀어 뽑았다. 손과 얼굴에 피가 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이원해의 목에 비수를 꽂아 넣었다 뺀 류희겸은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주춤주춤하며 뒤로 물러선 이원해가 어리둥절하며 손으로 목을 꾹 눌렀다. 하지만 손가락 틈새로 솟아나는 피를 막지는 못했다.

“날 찔렀어…….”

이원해는 단번에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몽둥이를 휘두르며 류희겸에게 덤벼들었다. 류희겸은 어설픈 공격을 쉽게 피하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이원해는 힘없이 창고 바닥에 쓰러졌다.

류희겸은 이원해의 손에서 굴러떨어진 몽둥이를 멀리 차버렸다. 그 와중에도 이원해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류희겸을 노려보았다.

“너어…….”

이원해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무어라고 말하려는 것을 무시하고 류희겸은 우풍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를 깨우고 싶었지만 손에 피가 묻어 엉망이었다.

쾅쾅쾅! 어째야 하나 생각하는 와중에 창고 문이 커다랗게 울렸다.

“안에 누가 있느냐?!”

“피 냄새가 난다. 어서 열어라!”

“왕야께 알려라!”

시위들의 거친 목소리에 류희겸은 그제야 진혁위를 생각해 냈다. 자신이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해가 졌으니 진혁위가 황궁에서 돌아왔을 수도 있었다. 진혁위에게 이번 일을 설명하려니 막막해지고 말았다.

쾅! 얼마 지나지 않아 낡은 창고 문이 부서지다시피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시위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이원해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귀비 마마.”

“그는 곧 죽을 것이니 내버려 두어라. 아이를, 우풍이를 풀어주고 깨워라. 내 손에 피가 묻어 아이를 만질 수가 없다.”

류희겸의 명령에 시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위 하나는 우풍이의 손을 풀기 시작했고 나머지 시위들은 류희겸의 안부를 물었다.

“영왕께서 귀비 마마를 찾고 계십니다. 어서 가시지요.”

시위의 재촉에 막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밖이 소란해지더니 진혁위가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흉흉한 기세로 나타난 진혁위를 보며 류희겸은 안도했다. 안도하는 자신이 이상했지만 잔뜩 긴장했던 어깨에 힘이 빠졌다.

반면에 진혁위는 기가 막혔다. 왕부의 서쪽 끝이 소란스러워지면서 류희겸을 찾았다는 소리가 진혁위가 연무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들려왔다. 창고 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피비린내에 진저리쳤다.

불길함을 떨치며 안으로 들어서자 험악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뺨과 손에 피를 잔뜩 묻힌 류희겸이 지친 얼굴로 무어라 설명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피가 흥건히 고인 바닥에는 시종이 쓰러져 죽어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정신을 잃은 우풍이가 시위의 등에 업혀 나갔다.

진혁위를 발견한 류희겸이 손짓을 하자, 주변에 있던 시종과 시위들이 뒤로 물러났다. 진혁위는 단번에 류희겸에게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류희겸.”

“제가 죽인 게 맞습니다. 자세한 정황은 따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진혁위는 덤덤히 설명하는 류희겸의 손을 잡아챘다. 류희겸이 손에 쥐고 있는 비수는 내던졌다. 남자의 손목에는 밧줄이 걸려 있었다. 중간에 끊기기는 했지만 손이 묶였던 것은 확실했다. 류희겸이 자의로 모습을 감춘 것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손목이 묶였었군.”

“예. 왕야. 손을 놓으십시오. 피가 묻습니다.”

류희겸이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진혁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종을 힐끗 보았다. 죽은 시종의 얼굴은 눈에 익었다. 외원 청소를 담당하는 그가 류희겸을 창고로 끌고 올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진혁위는 류희겸의 손목에 걸린 밧줄을 풀었다. 피가 묻은 류희겸의 뺨이 발긋하게 부어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너는 괜찮다고만 하지. 우소진. 옥안인을 경화당으로 불러라. 그리고 이곳을 정리해라.”

대기하고 있는 우소진에게 명령을 내린 진혁위는 류희겸의 손을 잡은 채로 창고를 빠져나왔다. 다급하고 거칠게 잡아당긴 탓에 류희겸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을 정도였다.

“왕야. 손을 놓아주십시오.”

“왜? 귀비와 손잡고 다녀도 영왕부 안에서는 시샘할 사람 없다.”

“그게 아니라, 피가 묻는다니까요.”

“이미 묻었어.”

류희겸은 난감했다. 이미 진혁위의 손에 피가 묻은 것은 맞다. 그래도 계속 피 묻은 손을 잡고 가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고 예복이 더럽혀질 수도 있었다.

“왕야…….”

“한 번 더 놓으라고 하면 새신부처럼 안고 갈 것이다.”

한다면 하는 남자의 경고에 류희겸은 입을 다물었다. 호위하는 시위들이 잔뜩 따라오는 상황에서 들어 올려져 품에 안겨 가는 것은 아무래도 사양하고 싶었다.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걸어가면서 류희겸은 진혁위를 슬쩍 보았다. 앞만 보고 걷는 남자는 아무래도 화가 난 것 같았다.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고, 꽉 잡은 손바닥은 뜨거웠다.

황궁에서 일이 안 풀렸던가? 아니면 시종을 죽인 것 때문일까? 또는 모습을 감춘 것 때문일까? 다행히도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있었다.

“소인이 부주의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입 다물어라.”

“왕야?”

“나중에 설명하면 된다.”

앞만 보고 걸어가는 진혁위의 말투가 날카로웠다. 미소가 사라진 얼굴은 북풍한설이 부는 것처럼 차가웠지만 그의 손은 아주 뜨거웠다.

화를 억누르는 남자에게 할 말을 찾지 못한 류희겸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럴 때는 어설프게 입을 열어 화를 자극하는 것보다는 침묵을 선택하는 게 맞았다. 무거운 침묵은 발걸음조차 무겁게 했다.

*

그대로 경화당으로 직행한 류희겸은 당장 씻는 대신 옥안인에게 검진을 받아야 했다.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류희겸이 피를 흘리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대신에 얻어맞은 뺨과 뒷머리가 부어 있었다.

붓기가 가라앉는 탕약을 준비할 것이며, 한동안 무리하지 말라는 옥안인의 말이 끝나고서야 류희겸은 피 묻은 옷을 벗고 준비된 탕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까지 쭉 옆을 지키고 있던 진혁위가 시중을 드는 시종들을 모두 쫓아내고는 명령했다.

“이제 설명해라.”

“이원해는 맹진화를 찾고 있었습니다.”

류희겸은 가능한 사실만을 짧게 전했다. 이원해는 지난가을에 갑자기 사라진 맹진화를 찾고 있었다. 그녀가 평소 이원해에게 류희겸에 대한 험담을 했기에, 류희겸이 맹진화의 실종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은 이원해가 일을 저질렀다.

“시종을 죽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위들이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다음은 아실 겁니다.”

짧은 설명 끝에 젖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른 류희겸은 아무런 말이 없는 진혁위를 가만히 보았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측방을 밝히는 등불은 진혁위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어내서, 화가 가라앉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왕야. 아무 말씀 없으십니까?”

“나는 네가 도망친 줄 알았다.”

“……?!”

“이번에 너를 붙잡아 오면 어느 쪽 다리를 자를까 고민했지.”

“도망간 게 아닙니다.”

“그래. 안다.”

류희겸은 진지하기만 한 진혁위의 모습에 그의 불신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어쩔 수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별로였다. 류희겸은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힘을 주었다.

“소인이 아직 왕야께 믿음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번 일은 네 잘못이 아니다. 감시를 느슨히 한 내 탓이지. 운문형이 계속 지켰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

이를 갈다시피 으르렁거리며, 진혁위는 스스로에게 화가 난 것을 숨기지 못했다. 영왕부의 식속들은 철저한 감시 아래 있다고 여겼다. 적어도 영왕부 내에서는 류희겸이 안전하리라 믿었는데, 그건 오만이었다.

사람은 너무나도 쉽게 죽었다. 시종이 휘두른 눈먼 몽둥이에 류희겸이 죽었을 수도 있었다. 지난번처럼 허무하게 잃지는 않을 거라고 다짐한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무서워졌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류희겸을 품에 안은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처럼.

차라리 지금 죽여버릴까.

그렇다면 류희겸을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할 일도 없을 것이다.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불티가 붙어 타오르는 충동에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아무 의심 없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에 창백한 죽음이 떠오르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건 안 될 말이지. 배신을 하지 않는, 신실한 남자의 시체를 끌어안고 싶은 것이 아니잖아.

진혁위는 스스로를 질책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명료했다. 죽음이 아니라 생이었다. 숨이 끊어진 류희겸이 아닌, 살아 숨 쉬는 류희겸이었다. 충동으로 까맣게 타들어 가는 머릿속을 정리하자 겨우 여유가 생겼다.

“이번 일은 사고입니다.”

“그래. 사고지. 하지만 제 목숨 생각하지 않고 덤벼드는 놈에 대한 대비는 해야지. 하물며 귀비는 적이 많지 않느냐. 본왕의 생각이 짧았다. 적어도 왕부 안은 안전할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뜻대로 하십시오.”

류희겸이 바깥 외출을 하기 시작하면서 왕부 내의 감시와 호위 인력을 줄였다. 류희겸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시선이 사라진 것이 홀가분했지만 진혁위가 필요하다고 하니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으로 그의 믿음을 살 수 있다면 더더욱.

자리에서 일어난 진혁위가 허리를 살짝 숙여 류희겸의 뺨을 쓸었다. 문득 류희겸은 조금 전에 진혁위와 헤어졌을 때 깨달은 것 때문에 살짝 긴장했다. 부드러운 접촉은 친애의 뜻일진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머리는? 어지러운 것은?”

“약간 욱신거리는 것 말고는 괜찮습니다.”

대답이 끝나자마자 진혁위의 입술이 닿았다. 뒷목이 잡힌 채 시작한 입맞춤은 천천히 깊어졌다. 뜨거운 혀를 얽으며 류희겸은 이대로 교합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탕조는 사내 둘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컸고, 전에도 두어 번 씻으면서 교합을 한 적이 있었다.

입맞춤으로 숨이 가빠지면서 아래가 뻐근하게 흥분하기 시작했는데, 진혁위가 갑자기 입술을 뗐다. 류희겸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진혁위를 올려다보았다. 날카로운 기색은 사라지고 남자는 평소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왕야?”

“그리 예쁘게 봐도 안 된다. 쉬어라. 다시 오겠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휑하니 나가버리는 진혁위 때문에 류희겸은 난감해졌다. 지금 하는 게 아닌가? 그럴 수는 있는데, 혼자 흥분해 버린 것이 머쓱했다.

미지근한 물로 얼굴을 문지른 류희겸은 천천히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옥안인이 지은 약도 인상을 찌푸리며 마셨다.

진혁위와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황궁에서 일어났던 일을 전해 들었다. 황제의 명으로 한동안 왕부에서 나가지 않고 조용히 지낼 거라는 진혁위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후에 차를 마시고 잠시 담소하다가 진혁위와 침상에 나란히 누운 류희겸은 눈을 깜빡거렸다. 탕조에서 씻을 때만 해도 분명 그럴 분위기였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로 잠든다는 것이 이상했다. 뒷머리가 부어서 그런가? 그래도 조르는 것처럼 보일까 봐, 하지 않을 거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괜한 서운함과 민망함, 그리고 희미한 열감에 류희겸은 꾸물꾸물 뒤척이다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 숨을 길게 내쉬며 잡생각을 털어내자 이원해를 죽이며 떠오른 의문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커다란 대의뿐만이 아니었다. 사소해 보이는 작은 것들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맹진화를 좋아했던 이원해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류희겸을 납치했다. 류희겸을 죽이든 살리든 이원해는 자신이 무사하지 못할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이원해를 보며 진한재를 떠올렸다. 아무리 고민해도 진한재가 채왕과 남준해 장군을 엮어서 역모의 누명을 씌운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남준해는 류희겸 때문에 진한재 측의 인물이라고 분류되고 있었다. 남준해 역시 진한재의 기백과 학식을 높이 샀다. 만약의 순간이 온다면 분명 진한재의 편에 서줄 수밖에 없었다.

생을 반복하는 동안에 진한재에게 몇 번이나 물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류희겸은 진한재도 모르는 그의 버릇을 알고 있었다. 진한재는 거짓말을 할 때면 왼쪽 손을 꽉 쥐었다. 무엇보다 채왕과 남준해를 역모로 고발한 이가, 진한재의 간자 중에 한 명이었다.

여섯 번이나 죽고 일곱 번째 생을 살고 있어도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깊게 고민하는 것은 성격에 안 맞았지만 그래도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모르겠군.”

“뭘?”

“……안 주무셨습니까?”

등 뒤에서 들리는 진혁위의 목소리에 류희겸은 화들짝 놀랐다. 분명히 숨소리가 고른 것까지 확인했었다.

“깼다.”

의문을 해결해 준 진혁위가 등 뒤에 달라붙었다. 등을 보이면 꼭 이렇게 껴안아 왔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자세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침의 너머로 체온이 훅 느껴져서 소름이 끼치는 바람에 류희겸은 살짝 긴장하고 말았다.

“무슨 생각을 하였기에 이리 놀라느냐?”

“별거 아닙니다.”

“말을 돌리는 게 수상하군. 귀비는 시침 떼는 걸 잘 못해. 무엇이냐?”

진혁위는 집요했다. 류희겸은 목덜미를 간질이는 숨결과 체열을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오늘 시종이 소인을 납치한 것은, 맹진화의 행방을 묻고 복수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게 왜?”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제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한재가 어찌하여 제 고모부님을 채왕과 역모에 엮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고모부님은 진한재와 뜻을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진한재의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그 역시 고모부님을 흠모했습니다.”

설명을 길게 이어가며 긴장이 풀리려고 했다. 그런데 진혁위가 코웃음을 치며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겨우 그딴 걸 생각하느라고 잠을 설친 것이냐?”

“예.”

잠을 설친 이유의 절반 이상은 진혁위 때문이었지만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자신을 끌어안은 손길에 자꾸 신경 쓰였다.

“동기야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발을 밟혔는데 사과를 받지 못해 앙심을 품은 것일 수도 있지.”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는…… 겨우 그런 것으로 앙심을 품지는 않을 겁니다.”

류희겸은 저도 모르게 반박하고 말았다. 군자처럼 구는 겉모습이 가짜일지는 몰라도 진한재가 품은 야심만큼은 진짜였다. 그는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있었고, 대의를 위해 고개를 숙일 줄도 알았다. 사소한 것에 앙심을 품어 악수를 둘 위인은 아니었다.

화진국의 북부 국경지대의 철벽이라고 불리는 남준해의 위상은 드높았다. 남준해의 부재가 가져올 국경지대의 혼란을 생각하면 진한재의 판단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수라고 하더니, 그를 두둔해?”

“그런 거 아닙니다.”

“귀비는 그놈을 퍽 높게 평가하고 있군.”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진혁위의 빈정거림에도 류희겸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진한재를 때려죽이고 싶은 것과 별개로, 그의 능력을 폄하하지는 않았다. 복수를 하려면 적을 잘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이런, 질투가 나려는데?”

“……네?”

갑자기 튀어나온 단어에 류희겸은 어리둥절했다. 질투라고?

“귀비가 다른 남자를 생각하고 있잖아. 그것도 밤잠을 설칠 정도로 아주 절절히 말이야. 아아, 농이었다. 움직이지 마라. 실언이었다고.”

류희겸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진혁위에게 항의를 하려고 몸을 뒤틀어 일어나려 했다. 그 빌어먹을 자식을 두고 그런 농담을 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단단히 끌어안은 팔이 꿈쩍도 하지 않는 바람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 농은 하지 마십시오.”

“알았다. 약조하마. 그리고 귀비의 말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모를 일이니 고민 같은 것은 하지 말고. 그를 잡아 물어보면 되니까. 허니 이제 편히 자라. 머리를 다쳤으니 푹 쉬어야지. 혹시 아픈 것이냐? 아파서 잠을 못 자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예. 아닙니다.”

“귀비는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잘 안 하잖아.”

“조금 욱신거리는 것뿐입니다.”

“아픈 게 아니라면 이제 눈 감아라. 또다시 뒤척이면 옥안인을 불러 수면제를 지어 먹일 것이다. 누누이 말했지만 사람은 잠을 못 자면 안 된다.”

진혁위의 커다란 손이 류희겸의 얼굴을 뒤덮으며 눈을 가렸다. 결국 류희겸은 순순히 눈을 감았지만 속으로는 난감했다.

심각했던 대화와 다르게 심장은 열기를 내며 뛰었다. 진혁위의 체온과 체향에 가벼운 고양감에 휩싸였다. 자신을 꽉 껴안고 있는 진혁위가 자신이 평소와 다른 상태인 것을 눈치챌까 봐 숨조차 크게 내쉴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건지. 자장가라도 불러주랴? 응?”

진혁위가 귀신같이 류희겸이 잠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다시 알아차렸다. 거칠고도 부드럽게 고쳐 안는 손길에 류희겸은 눈을 꼭 감고 억지로 몸에서 힘을 뺐다.

피곤한 하루였지만 류희겸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영왕부에서 처음 잠을 설친 날 이후, 다시 한번 더 불면의 고통에 시달리고 말았다.

◇ ◇ ◇

화진국의 사절단이 태경에 도착한 것은 중추절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오래도록 교류가 이어져 왔기에 오 년 만에 방문하는 사절단에 대한 대접은 소홀함이 없었다.

해가 가장 높이 떠오른 시각에 맞춰 입궁한 사절단은 곧바로 대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황제와 왕공대신들이 엄격한 얼굴로 사신을 맞이했다.

화진국의 사신인 하장춘(夏張春)은 예법에 따라 대연국의 황제에게 절을 올렸다. 부드러운 어조로 빈틈없이 인사부터 한 하장춘은 제일 먼저 류희겸의 신병을 화진국으로 인도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하장춘의 주장은 화진국이 보냈던 친서의 내용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류희겸은 화진국의 대역죄인이니 화진국의 국법에 따라 처결할 것이라고, 대연국 황제의 영명함을 기다린다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황제의 영명함을 언급한 것이 일종의 압박이었다. 공명정대한 황제가 역도를 감싸는 것은 무도한 일이라고 돌려 말한 것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당당하고 오만한 하장춘의 요구에 황제는 넉넉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신은 어찌하여 류희겸을 찾는 것인가? 화진국이 자랑했던 류희겸 장군의 시신은 불에 탄 채로 성벽에 걸린 것이 아니었던가?”

황제의 기습적인 질문은 도발적인 것이었다. 대전 한 곳에 가만히 서 있던 진혁위는 어깨를 흠칫 떠는 하장춘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하장춘은 당황스러울 것이다.

류희겸이 죽지 않고 살아 대연국에 있다는 것은 이미 소문이 날 대로 난 상황이었다. 영왕의 귀비가 되었다는 것도, 귀물을 바쳐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대연국에서는 단 한 번도 류희겸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공표한 적이 없었다.

하장춘이 류희겸을 데려가려면 화진국의 실수부터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본인의 과오가 아니라 나라를 대신하여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하장춘은 노련한 사신이었다. 그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역도 류희겸을 추포하는 과정에 실수가 있었사옵니다! 류희겸은 큰 죄를 지은 역도입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십시오.”

여기까지는 진혁위가 기억하던 것과 똑같이 흘러갔다. 이전 생에서 황제는 사신과 류희겸을 대면시켜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우선 류희겸은 희가의 객여가 아니라 친왕의 귀비였다. 그것만으로도 대우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했다.

“실수라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문제는 아직 있다. 짐의 아들인 영왕의 하나뿐인 측비가 류씨이긴 하나, 그대가 주장하는 역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류씨는 신원이 불확실한 노비였다. 뛰어난 재주로 면천을 받았고 이제는 대연국의 충신이지.”

“폐하. 그는 분명히 류희겸일 것이옵니다.”

하장춘의 목소리는 여전히 컸지만 불안에 떨리는 것이 진혁위의 귀에도 들렸다. 하장춘도 깨달은 것이다. 만약에 황제가 류희겸이라고 다른 자를 내어놓아도 하장춘은 반박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진혁위는 크게 웃고 싶은 것을 참았다. 황제는 자신의 치세에 영토를 잃은 것을 치욕스럽게 여겼다. 오 년 전 양번국을 잃은 것도, 그리고 사 년 전에 호양성을 향해 군대를 보냈다가 대패한 것도 모두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류희겸은 황제의 훌륭한 장기말이었다. 류희겸을 죽이고 살리는 것도, 또한 그를 이용하여 화진국 사신의 고개를 숙이게 만들고, 화진국을 모욕하는 것도 모두 황제의 뜻대로 할 수 있었다.

황제는 체면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때에 따라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

진혁위에게는 다행스러운 일로, 적어도 호양성을 되찾을 때까지는 류희겸의 목숨은 보장된다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 칼자루를 쥔 황제가 느긋하게 물었다.

“직접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찌 그리 확신을 하는가?”

“신이 류희겸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대면하게 해주십시오.”

“내원에 있는 측비가 어찌 사신을 만나겠는가?”

“부디 영명하신 폐하께서 방법을 강구해 주십시오.”

명분에서 밀린 하장춘이 체면 불고하고 답을 구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방법이라. 그렇지. 중추절 연회에 류씨가 참석할 테니, 그때 보면 되겠군.”

“폐하. 너무 번거롭지 않겠습니까?”

“번거로우나 그게 맞다.”

타국의 사신이 친왕의 후궁을 사적으로 만나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의 묵인이 있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황제는 정확하게 선을 그었다. 모두가 보는 곳에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것은 제대로 일을 크게 키우겠다는 의도였다.

이번에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하장춘은 불만을 억누르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하장춘의 얼굴이 피로해 보인다고 쉬는 게 좋겠다고 권유하며 접견을 끝냈다.

사신이 물러나자 황제가 자리를 비웠다. 왕공대신들도 하나둘씩 짝을 지어 대전을 나섰다. 그들에게 묻혀 걸음을 옮기던 진혁위를 불러 세운 것은 10황자와 11황자였다.

“부황께서 명하시어, 소제가 금서 사건의 조사를 맡게 되었습니다.”

“저도요. 둘이 같이 합니다.”

“내일 영왕부로 찾아뵙겠습니다.”

“조사차 방문하는 것입니다. 중추절 인사는 따로 드리러 가겠습니다.”

“선물도 잔뜩 들고요. 그때 귀비께도 인사드리겠습니다.”

진혁위의 동생인 진영서와 진충가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말을 이었다. 며칠 전, 진혁위가 받은 금서 관련 고발 건과 관련된 조사를 총괄하게 된 것은 두 황자였다. 실질적인 조사는 익문사에서 하지만 친왕이 관련된 일이라 표면상으로는 황족이 나서야 했다.

황제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두 황자들에게 이번 일을 맡긴 것은 경험을 쌓으라는 의미였다. 어린 황자들은 처음 맡은 대임에 꾀를 부리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배짱 좋게 일을 부풀리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진영서와 진충가 말고는 적당한 황자가 없기도 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밉보이면 안 되겠군.”

진혁위는 어린 동생들을 보며 웃었다. 동복이 아닌 황자들끼리는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진혁위는 가장 가까운 나이의 동생들과 제법 친하게 지냈다.

별다른 노력은 필요하지 않았다. 태자는 형제들을 질투했고 때때로 시비를 걸었다. 기왕은 모든 형제들을 죽여 없애려고 했다. 그 둘과 비교하면 같이 말을 타고, 격구를 하고, 사냥을 같이 하는 진혁위를 대형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당연히 밉보이시면 안 되죠. 조사는 공명정대할 것입니다.”

“네. 아주 철저하게 할 거예요.”

공명정대를 외치는 진영서와 진충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진혁위는 어린 동생들에게 친절을 베푼 대가에 화사하게 웃었다.

“좋다. 공명정대함을 기대하마. 대신 중추절에는 찾지 마라.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그러는 게 맞다.”

철저한 조사에서 걸릴 건 없지만, 그래도 겉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진영서와 진충가도 진혁위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금방 알아들었다.

“그렇다면 선물만 보내겠습니다.”

“귀비께 드릴 선물은 이미 준비해 놓았거든요.”

“내일 찾아뵐게요.”

인사를 한 진영서와 진충가가 앞서갔다. 진혁위는 태자가 노려보는 것을 느꼈지만 무시하고 길을 갔다. 하지만 앞을 막아선 기왕을 모르는 척하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동생의 귀비는 부황의 깊은 총애를 받고 있음이야. 부황께서 귀비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셨어.”

“황제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그저 감읍할 따름이지요.”

“그래. 부황의 은혜에 감사해야지. 아, 그렇지. 네 귀비의 활 솜씨를 확인할 날을 기대하고 있다. 잊지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소제 역시 기대하고 있습니다.”

진혁위가 유연하게 맞받아치자 기왕이 사납게 웃으며 뒤돌아섰다. 혼자가 된 진혁위는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태자도 기왕도 각각 이번 중추절 연회를 위해 깜짝 놀랄 만한 것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진혁위의 귀에 들어왔다. 진혁위는 태자와 기왕 둘이서 치고 박도록 판을 만들어놓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둘 모두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지난 생에서 충추절 연회는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갔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진혁위는 흥겨운 마음으로 중추절을 기다렸다.

*

심양설의 손이 바쁘게 움직일 때마다 류희겸의 머리에는 아름다운 장신구가 하나씩 늘어났다. 금과 홍옥으로 세공된 작약이 우아하게 머리를 고정시켰다. 그 옆에 크고 작은 비녀들이 자리했다. 류희겸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다가 살짝 머리를 흔들었다. 석양빛에 보석들이 화사하게 반짝거렸다.

“머리가 무겁군.”

“아직 남았습니다.”

미약한 저항에도 심양설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준비된 비녀를 모두 머리에 꽂을 기세였다. 진혁위는 자신의 귀비가 황실 연회에 초라한 모습으로 참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류희겸은 혼례식 때만큼이나 치장에 정성을 쏟아야 했다.

그나마 진혁위의 명령으로 이전에 몇 번 화려하게 꾸민 적이 있기에 아주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머리가 점점 무거워진다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치 첫 출전에서 투구를 썼을 때와 비슷했다.

아주 틀린 비유는 아니었기에 류희겸은 속으로 웃었다. 전장에서 몸을 지키기 위해 갑옷을 걸치는 것처럼, 황궁에서는 화려한 성장(盛裝)을 입어야 했다.

“다 됐습니다. 아름다우십니다. 마마.”

아주 꼼꼼한 손길로 치장을 끝낸 심양설은 뿌듯하게 웃었다. 헌앙한 사내는 다시 한번 더 아름다운 귀비로 변모했다. 황실 연회에 참석하는 황제와 친왕의 부인들의 호화로운 치장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아니, 치장이 문제가 아니었다. 훤칠한 키에 진중한 기백은 내원의 여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차분한 남빛의 정복은 류희겸의 차가움과 점잖음을 두드러지게 했다. 만개한 꽃 같은 화려함이 아니라 장중하게 흐르는 강을 닮은 아름다움이었다.

“다들 고생했네.”

류희겸은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시중을 든 심양설과 시종들을 치하했다. 마지막으로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옥패를 차고 있는데 진혁위가 나타났다.

“이런. 일찍 온다고 왔는데, 귀비가 준비를 모두 끝냈군.”

류희겸은 서쪽으로 지는 해를 등진 진혁위를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활짝 웃는 남자는 비녀를 잔뜩 꽂은 자신보다 훨씬 더 화려한 것 같았다.

직전 생애를 포함해 진혁위가 친왕의 정복을 입은 것을 몇 번이나 봤었다. 그때마다 미남이라기보다는 화려한 미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가벼운 움직임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눈처럼 하얀 얼굴에 깊은 눈매, 쭉 뻗은 눈썹과, 미소를 머금은 붉은 입술은 미남이 아니라 미인이라고 불려야 할 것이었다. 그것도 꽃이 무색할 정도의 미인이었다.

분명 어제도, 오늘 아침에도 만난 얼굴인데 갑자기 진혁위가 천하의 절세미남으로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다 기분도 애매하게 술렁거렸다.

류희겸은 자신이 체한 것인가 의심했다. 연회장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을 것이라 미리 속을 채웠었는데, 체했다면 큰일이었다.

“귀비가 오늘따라 더 어여쁘구나.”

천하제일 미남자에게서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여전히 어색하고 기묘했다. 그래도 아무 말 없이 멀뚱히 쳐다보지 않고 부드럽게 화답할 정도의 여유는 생겼다.

“과찬이시옵니다. 오히려 왕야께서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우십니다. 활짝 핀 꽃이 무색할 지경입니다.”

“어찌 귀비가 이리도 귀에 단 말을 할까? 꽃이 무색하다니. 가슴이 다 간지러울 지경이다.”

“길 가는 사람 아무나 잡고 물어보아도 소인과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아침에는 동쪽에서 해가 뜬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덤덤히 자신이 아름답다 칭찬하는 류희겸의 말투에 진혁위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에게서 진실된 칭찬을 듣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날을 보상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남의 말은 들을 필요 없다. 귀비의 눈에 본왕이 예뻐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잠시만 있어보아라.”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낸 진혁위가 그것을 류희겸의 머리에 꽂아 넣었다. 평범한 비녀가 아니라 진주를 길게 늘어뜨려 놓은 것이라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왕야. 소리가 납니다.”

“그래. 들린다.”

“움직일 때마다 덜렁거려서, 신경 쓰입니다.”

“괜찮다. 곧 익숙해질 것이다. 예쁘니까 빼지 마라.”

“예.”

아주 불편한 건 아니라서 류희겸은 비녀를 빼고 싶다고 청하지 않았다.

“이제 가자.”

류희겸은 진혁위를 따라 움직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진혁위는 진한재를 직접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호양성 전투에 진한재가 참전하도록 만드는 것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어머니 앞에서는 적당히 웃어라.”

막 경화당 중문을 나서려는데 진혁위가 한마디 건넸다. 중추절 연회에 참석하기 전에 정수궁에 들러 진혁위의 어머니인 혜비 금채영에게 인사를 드릴 예정이었다. 지난가을에 진혁위와 혼례식을 올린 이후로 금채영과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난 생을 통틀어 류희겸은 금채영을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혼례식을 올릴 때, 류희겸에게 필요한 것을 챙겨 보내준 사람이 그녀였다. 한 달 넘게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류희겸을 위해 벽사기복의 붉은 예복도 지어 보냈다. 보통 정성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어머니가 되는 금채영에게는 예를 다해 대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진혁위가 적당히 웃으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냐고 빤히 쳐다보자 그가 웃었다.

“지금 귀비는 적장의 목을 베러 가는 장수처럼 보인다.”

농담 아닌 농담에 류희겸은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웃고 말았다. 자신의 표정이 어땠을지 상상을 하니 웃겼다.

“예. 유의하겠습니다.”

“적장의 목을 베는 것은 나중이다.”

“예.”

아직은 나중의 일이었다. 류희겸은 그날을 기대하며 앞으로 걸었다.

*

혜비 금채영은 류희겸의 예상대로 좋은 사람이었다. 첫인사를 하러 온 류희겸이 좋아하는 울금훤을 내어주고 덕담도 아끼지 않았다.

“아가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다.”

금채영은 진혁위의 어머니다웠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내를 아가라고 부르는 금채영의 말솜씨를 진혁위가 물려받은 게 틀림없었다.

자신이 한 말의 위화감은 조금도 느끼지 못한 듯, 온화한 미소를 지은 금채영이 내민 선물은 진주를 엮어 만든 팔찌였다. 어른이 하사하는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결국 진주팔찌는 진혁위의 손에 의해 류희겸의 손목에 끼워졌다.

세 사람의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해가 지자 어전태감이 나타나 황제를 뵈러 갈 시간이 되었다고 알렸다.

중추절 연회에서 후궁들은 황제의 뒤를 따라야 했다. 연회장에서 보자고 한 금채영이 궁녀들을 데리고 황제의 침전으로 향했다. 류희겸은 진혁위와 함께 그녀를 배웅한 후에 걸음을 옮겼다.

“아가래.”

금채영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진혁위가 중얼거렸다. 류희겸은 기묘하게 웃고 있는 진혁위를 빤히 바라보았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욕하는 방법은 많았다.

“이런. 귀비가 화가 났나 보군. 나도 어린 시절에는 아가라고 불렸다. 어느 정도 크고 나니까 이름으로 불러주셨는데, 이 나이에 아가라고 하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긴 하다. 어머니께 귀비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말씀드려야겠다. 그럼 되겠지?”

평소 류희겸에게 눈치 없다고 구박하는 남자의 임기응변은 훌륭했다. 류희겸은 환하게 웃는 남자를 따라 웃고 말았다. 순발력이 빠른 남자는 귀여운 애교에도 능했다.

“예. 부탁드립니다.”

덤덤히 고개를 끄덕인 류희겸은 자신이 진혁위를 귀엽다고 생각한 것을 아직 인지하지 못했다.

*

구름 하나 없는 밤하늘에 둥그런 달이 솟아올랐다.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이 너른 연회장을 밝게 비추었다.

황실의 중추절 연회는 달맞이를 위해 황궁 내 연못에 자리한 야외 전각에서 열렸다. 황실 가족과 황족, 그리고 소수의 공신만이 참석하는 연회장은 호화롭게 꾸며졌다.

등불과 화톳불이 연회장 곳곳을 밝혔고, 대연국과 황실, 황제를 상징하는 커다란 깃발이 펄럭거렸다. 연못 위에는 연꽃 모양의 비단등불 수십 개가 떠다녔다. 또한 황제가 아끼는 열두 폭 옥병풍이 보좌 뒤에서 위용을 자랑했다.

해가 지자 연회장을 찾아온 손님들이 차례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연회장을 찾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상석에 앉은 화진국의 사신들이었다.

며칠 전, 대전에서 황제와 화진국의 사신인 하장춘 사이에 오간 대화를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하장춘은 화진국의 역적인 류희겸을 내어놓으라고 했고, 황제는 영왕의 귀비 류씨가 사신이 찾는 자인지 알 수 없으니 중추절 연회에서 직접 확인하라고 했다.

황제는 류희겸을 내어줄 생각이 없는 게 확실했다. 허니 오늘 연회에 참석할 류희겸이 과연 진짜 그가 맞을지부터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였다.

“과연 참석할까?”

“황제께서 참석하라 하였으니, 얼굴은 비추겠지.”

“진짜가 아니라 가짜가 참석해도 재미있을 것 같아. 그렇다면 화진국의 사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단 말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류희겸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가끔씩 사건이 일어날 때면 한 번씩 언급하고는 잊어버렸다. 하지만 몇몇 이들은 황제가 류희겸을 이용해 호양성을 되찾아 치욕을 되갚아주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금 황제의 총애가 류희겸에게 닿아 있는 것은 맞았다. 그리고 류희겸이 호양성을 되찾기라도 한다면 그 총애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물론 류희겸의 전공은 진혁위의 것이 될 테지만, 권력의 행방에 민감한 이들은 오늘 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저마다의 이유로 연회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태자도 있었다. 사실 태자는 기분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진혁위를 금서와 엮으려고 했던 계책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태경부 경윤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상단에서 금서를 배달받았다고 고발한 자와 상단에서 압수한 서책들 사이에서 금서를 발견한 하급 관리는 모두 사주를 받아 거짓말을 했다고 자복해 버렸다.

그들은 사주한 이가 누구인지 몰랐고, 대가로 받은 금편으로 배후를 추적할 수도 없었다. 거기서 끝이었다. 하지만 태자는 자신이 무사한 것에 안도하면서도 공들여 세운 계책에 진혁위가 걸려들지 않은 것이 너무 분했다.

거기다 안용옥의 일을 제대로 무마하지 못한 것도 신경 쓰였다. 겨우 장원 몇 개를 사들인 일로 자신의 인척인 안용옥을 처벌해야 한다고 떠들어대는 관리들을 불러 좋게 타일렀다. 그런데 그게 황제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오늘 낮에 황제께 불려가서는 죄인을 비호하지 말라는 엄중한 질책을 들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지만 태자는 오늘 또 다른 계책을 준비했다. 능글맞게 구는 진혁위를 확실히 끝장낼 최고의 방법이었다.

혼자서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던 태자는 연회장 입구가 술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진혁위가 나타난 것이었다.

태자는 잘생긴 동생을 질투하고 있었지만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계집애 같은 얼굴을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진혁위의 뒤를 따르는 류희겸 역시 사내 주제에 여인처럼 꾸몄다고 비웃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진혁위의 미모는 원래부터 유명했다. 연회에 참석하는 왕공대신들의 부인과 규수들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들 중에 몇은 진혁위 옆에 선 류희겸을 보고 감탄했다.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는 진혁위 옆에서도 묻히지 않고 당당한 위엄을 드러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작년에 있었던 만월제전을 기억해 냈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웠던 류희겸이 우아한 자태의 귀비가 된 것을 놀라워했다.

진혁위와 류희겸이 그들의 자리를 찾아 앉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은 화진국의 사신인 하장춘을 향했다. 류희겸에게 시선을 고정한 그는 당장에 뛰쳐나갈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거리다 벌떡 일어났다.

모두가 기대하는 순간이 펼쳐지기 직전, 마침 황제가 등장했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황후는 연금 중이었기 때문에 황제의 옆을 따르는 이는 황귀비였다. 그리고 그 뒤로 후궁들이 열을 맞추어 뒤따랐다.

황제의 등장에 연회장에 자리한 이들이 모두 분분히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막 앞으로 뛰쳐나가려던 하장춘 역시 마찬가지였다.

흥겨운 연회가 시작되었다.

*

옥좌에 앉은 황제에게 황실 가족과 왕공대신들이 차례로 예를 올렸다. 그리고 그에 맞춰 황제가 덕담을 했다.

산해진미와 향기로운 술이 끊이질 않았다. 악공들의 연주에 무희들이 아름다운 춤을 추며 흥을 돋우었다. 다음은 문재(文才)가 뛰어난 이들이 나서 중추절과 보름달을 주제로 시를 지었다. 오래전부터 준비한 시는 훌륭했고 사람들의 감탄을 이끌어냈다. 다음으로 다시 무희들이 나와 춤을 추었다.

진혁위의 뒷자리에 앉은 류희겸은 춤을 감상하는 척하면서 연회장의 분위기를 살폈다. 술과 음식이 들어가자 사람들이 느슨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예외인 사람이 몇 있었다. 그중에 한 명이 바로 하장춘이었다.

류희겸은 하장춘과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그래도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화진국 황제의 신임을 받는 그는 치밀한 성격에 출중한 능력을 자랑했다.

굳이 단점을 꼽으라면 술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는데, 오늘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자신만 노려보고 있었다. 얼마나 눈빛이 강렬한지 연회장 반대편에 앉았음에도 시선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류희겸은 굳이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마주 보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오늘 일어날 일은 진혁위도 자신도 둘 다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진혁위는 태자와 기왕이 각각 도모하는 일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내용은 제법 상세하였는데, 진혁위가 그의 형제들에게 얼마나 많은 세작을 심어두었는지 상상하면 오싹할 정도였다.

어쨌든 류희겸은 어떤 사건이든 일어나라는 마음으로 긴장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도 술과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물도 마찬가지였다.

진혁위의 말에 의하면 태자가 음식에 독을 넣었을 거라고 했다. 황궁에서 벌어지는 연회이니 태자가 손을 쓰기 쉬운 편이었다. 또한 독을 자주 쓰는 기왕이 의심받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멍청이가 제법 머리를 썼다고 진혁위가 빈정거릴 정도였다.

황궁의 선방(膳房)에서 만들어지는 연회 음식만큼은 진혁위도 바꿔치기 같은 것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기로 했다.

만독화를 달여 마셨으니 류희겸에게는 세상에 존재하는 독이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이 아니면서도 몸과 정신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었다. 마약이나 최음약이 그러했다. 무엇이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화진국의 사신이 귀비를 노려보고 있다.”

슬쩍 뒤를 돌아본 진혁위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진혁위 역시 자신 앞에 놓인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예. 얼굴이 매우 따갑습니다.”

“그가 일을 벌일 것 같다. 귀비는 준비되었느냐?”

“준비되었습니다.”

“기대해 보마.”

진혁위의 기대와 달리 무희들이 춤을 끝내고 물러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기왕이었다.

“부황. 소자가 기쁜 날을 맞이하여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소자와 영왕은 종종 여러 가지 겨루기를 해왔습니다. 얼마 전, 활 겨루기를 하자고 약조하였습니다. 소자와 영왕의 머리에 사과를 올리고, 소자가 가장 신뢰하는 호위와 영왕의 측비가 서로의 주군과 부군에게 활을 쏘기로 말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겨루기가 아니옵니까? 부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겨루기를 할 수 있도록 부황께서 허락해 주시길 바라옵니다.”

기왕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연회장 내부의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냥 활 겨루기도 아니고 친왕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 활을 쏜다니, 돈 주고도 구경하지 못할 것들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기왕은 자신만만하게 황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류희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오늘 연회에서 황제는 자신을 이용해 화진국 사신을 찍어누르려고 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진혁위를 망신 주기 위해 분위기를 흩트리는 기왕이 황제의 눈 밖에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혁위가 말하기를 기왕은 오늘을 위해 마비약을 발라놓은 활을 준비해 두었다고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며, 맨손으로 만진 자도 느끼지 못하는 미약한 경직으로 화살을 빗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독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진혁위는 기왕의 편협함을 혹평했다. 그리고 혹여 황제가 겨루기를 하라고 허락할 때를 대비해 혜비의 정수궁에 활을 몇 개 가져다 놓았다면서 걱정할 것 없다고도 알려주었다.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진혁위의 준비성에 혀를 내두르며 류희겸은 황제에게 집중했다. 황제는 변덕스러운 성격이었고, 연회의 흥을 돋우기 위해 활 겨루기를 하라고 할 수도 있었다.

“길복(吉卜)의 날에 위험한 겨루기를 하라고 허락할 수 없다.”

황제는 인자한 목소리로 기왕의 청을 단박에 잘라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인 듯 기왕이 당황했다.

“하오나 부황.”

“기왕은 그만하고 앉아라.”

단호한 황제의 명령에 기왕은 두 번 청하지 못했다. 기왕이 자리에 앉자 그와 교대를 하듯이 이번에는 하장춘이 일어났다.

“하장춘이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사신은 무슨 일인가?”

“폐하께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말하라.”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하장춘은 자리에서 벗어나 석기단 아래에 섰다. 그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황제 폐하께서 신(臣)을 중추절 연회에 초대하신 것은, 화진국의 역도의 얼굴을 확인시켜 주시기를 위함이었습니다. 하여 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고 확인하였습니다. 영왕 전하의 측비는 소인이 찾는 역도 류희겸이 맞습니다. 황제 폐하. 화진국의 역도인 류희겸은 엄정한 법률에 따라 본국에서 처결을 받아야 하옵니다. 부디 영명하신 폐하께서 결단을 내려주시옵소서.”

하장춘이 류희겸을 언급할 때마다 화진국의 역도라고 칭하는 것은 류희겸 개인을 향한 악의가 아니라 황제에게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큰 목소리로 연회에 모인 왕공대신들의 주목을 받으려는 것도, 류희겸을 내어놓지 않으려는 황제에게 엄정한 법률을 언급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분명 무례한 언동이었지만,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신이기에 용납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미 예견하고 있던 황제는 인상을 쓰지 않고 넉넉하게 웃었다.

“사신이 급하였나 보군. 영왕의 측비 류씨는 나오거라.”

느긋한 황제의 부름에 류희겸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흥겨운 음악 소리가 울리던 연회장은 고요하기만 했다. 움직이는 사람이라고는 류희겸뿐이었다. 친왕의 귀비와 어울리지 않는 절도 있는 동작에 옷자락이 사락거리는 소리와 장신구가 잘그락거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석기단 앞으로 다가가는 류희겸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하장춘의 눈빛은 매서웠다. 하지만 류희겸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법도에 따른 반듯한 몸짓에는 용맹한 기백이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일어나라.”

“황공하옵니다.”

황제의 명에 류희겸은 당당히 섰다.

“화진국의 사신의 말로는 네가 화진국 출신의 장군인 류희겸이라고 한다. 맞느냐?”

“황제 폐하께 아뢰옵니다. 소인이 맞습니다.”

류희겸이 자신이 맞다고 하자 연회장이 조용히 술렁거렸다. 스스로가 류희겸이라고 하는 것은 역도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는군.”

“예. 저자가 바로 역도 류희겸입니다. 중죄를 지은 자는 화진국의 법률에 따라 벌을 받아야 하옵니다. 정에 휩쓸리어 역도를 품는 것은 영명하신 황제 폐하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황제는 절절하게 외치는 하장춘을 시큰둥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은 류희겸이 예상했던 것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기분이 상할 일도 없었다.

“류희겸. 화진국의 사신이 너를 역도라고 한다. 사실이냐?”

“황제 폐하. 소인의 고숙인 남준해 장군이 모반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를 받았사옵니다. 역적은 구족을 멸해야 하는 중죄입니다. 죄인 류희겸은 황제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어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보십시오. 죄인이 자복하였습니다!”

하장춘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하지만 뒤이어 류희겸이 말을 이었다.

“허나 소인은 죽은 자이기도 합니다. 불에 탄 시신이 성벽에 걸렸으니, 지금 이곳에 있는 자는 허깨비입니다.”

“그, 그것은 실수였다고 이미 말씀 올렸습니다.”

“허깨비가 사신께 묻겠습니다. 류희겸의 호적은 불에 타서 없을 터인데, 어떤 법률로 어떻게 처결을 할 것입니까? 혹여 소인이 돌아가면 불에 타서 없어진 호적을 새로 만들어주기라도 하실 겁니까?”

역적의 호적은 불에 태워버리는 법이었고, 호적이 없는, 존재하지 않는 자를 처결할 수 있는 법률은 없었다. 또한 불에 타서 없어진 호적을 다시 만들었다는 전례도 없었다.

류희겸은 고모부인 남준해의 무고와 억울함을 따져 밝히지 못하는 것이 슬펐다. 하지만 겨우 호적을 이유로 하장춘의 화를 돋우는 것은 부끄럽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명분이 중요했다. 나라 간의 일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곳에서 법리를 따질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하장춘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막중한 임무를 맡은 사신으로 뽑힐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지만 지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그래도, 그래도 당신은 류희겸이 맞잖소.”

“황제 폐하의 은혜를 입어 대연국의 호적이 있는 류희겸이겠지요.”

억지라면 억지였다. 그러나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반격할 말을 찾지 못한 하장춘은 황제를 찾았다.

“황제 폐하. 간악한 역도가 폐하의 성심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부디 영명하신 판단을 내려주십시오.”

“황제 폐하의 은덕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허깨비가 아뢰옵니다. 소인은 폐하께서 죽으라고 명하시면 죽을 것이고, 화진국으로 가라 하시면 갈 것이옵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허리를 숙이는 두 사람의 말이 엇갈렸다. 황제는 고민하는 척도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모두 계획된 것이었다. 황제는 류희겸과 진혁위가 세운 계책이 꽤 마음에 들었다. 허둥지둥거리는 사신을 보자니 오랫동안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말은 아직 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황제는 느긋한 자세로 하장춘을 불렀다.

“사신은 들으라.”

“말씀 듣겠습니다.”

“류희겸은 짐을 위해 용맹하게 싸웠다. 또한 세상에 둘도 없는 귀물을 바치기도 했다. 짐은 충신을 아낀다. 하여 그를 화진국으로 보낼 수 없다. 호적도 없는 허깨비라고 하니 더더욱 그렇다. 화진국에서 류희겸은 이미 죽은 자이고, 대연국에서는 올곧은 충신이다. 사신은 화진의 황제에게 전하라. 짐은 대연국의 충신인 류희겸을 내어줄 수 없다. 화진국에서 류희겸을 대신해 호양성을 되돌려준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

도발에 가까운 황제의 선언에 연회장은 고요해졌다. 황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진혁위 역시 어색하지 않게 놀란 척을 했다.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당연히 화진국의 사신인 하장춘이었다. 대연국에 심어놓은 간자는 여럿이었다. 황궁 심처에 대한 정보는 알 수 없지만, 저잣거리에 떠도는 소문이나 관리들의 술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수집할 수 있었다.

대연국의 황제가 오 년 전에 잃은 양번국에 집착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류희겸을 이용하여 일을 도모하려고 한다는 것은 작년부터 알려져 있었다.

류희겸이 옛 양번국의 수도인 호양성을 전투 한 번 없이 낙성하여 손에 넣은 것은 유명한 일화였다.

그러나 그의 신출귀몰한 방도에 대해서는 화진국의 군부나 조정도 아는 바가 없었다. 당시 작전에 참가한 이들은 몇 되지 않았는데, 대부분이 지난 채왕과 남준해의 역모 사건에 휩쓸려 죽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화진국에서는 류희겸이 대연국에서 살아 있다는 것과, 또한 그가 대연국의 황제에게 호양성을 되찾아드리겠노라고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부터 혹시나 하고 걱정했다. 최악의 가정이 사실로 확인되자 하장춘은 아득해졌다.

의지가 확고한 대연국의 황제를 설득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역도에게 어찌 한 성도와 비견할 만한 가치가 있겠습니까? 한 번 역도는 영원한 역도이고, 또한 변절자는 영원히 변절자이옵니다.”

“이곳에는 역도도 변절자도 없다. 사신은 이곳에 없는 자를 찾지 마라.”

근엄한 황제의 목소리에서는 흥겨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류희겸은 변덕스러운 황제가 끝까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직전 생에서 호양성을 되찾아 황제에게 바치고 난 다음에 자신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쓸모를 다하였으니 손쉽게 버려졌다.

아무리 진혁위가 비호를 해준다고 하더라도 자진을 하라는 황명이 떨어지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류희겸은 호양성으로 진한재를 끌어내어 끝장을 봐야 했다.

“황제 폐하. 소인이 화진의 사신에게 한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한다.”

황제의 허락에 류희겸은 화장춘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장춘이 냉랭한 얼굴로 노려보았지만 류희겸은 개의치 않았다.

“화진의 숙왕이 류희겸의 죽음을 황제께 고했을 것이오. 불탄 시신을 류희겸이라고 하고 성벽에 건 것도 숙왕일 테지요. 역도를 일부러 풀어주었든, 도망친 역도를 찾지 못했든 거짓을 고한 죄를 피할 수 없을 거요. 명예 회복을 하려면 숙왕에게 직접 류희겸을 찾으라 전하시오. 살아 있다고 믿는 류희겸의 목을 베어서, 역도를 도왔다는 의심을 제 손으로 거두라고 말입니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류희겸은 하장춘에게 악의는 없었다. 그러나 화진국의 황제와 진한재를 자극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했다.

“류희겸. 그대가 감히 숙왕 전하를 언급하는가.”

“분명히 전하시오.”

류희겸은 발끈하는 하장춘에게서 몸을 돌려 더 이상 대화 의지가 없음을 피력했다. 그와 동시에 하장춘의 일행이 앉아 있는 자리를 힐긋 보았다.

하장춘의 일행은 그를 포함해 모두 여섯 명이었다. 부사 두 명에, 나머지 셋은 시종 겸 호위였다. 류희겸은 그중 호위 하나의 위치를 확실히 눈에 담고는 의식했다.

직전 생에서도 류희겸은 황제 앞에서 하장춘을 만났다. 지금처럼은 아니지만 자신의 필요성을 황제에게 피력하여 화진국으로 끌려가는 것을 겨우 막았다. 황제에게 예를 올리고 물러날 때였다. 사신의 호위 중에 하나가 숨겨 온 단검을 류희겸에게 휘둘렀었다.

그때의 그 호위가 바로 저기에 있었다. 이름 모를 호위가 황실 연회에서 암습을 시도할 가능성은 반반이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만. 짐의 뜻은 확실히 전했다. 물러가라.”

황제의 명령에 류희겸과 하장춘 모두 예를 올리고는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 때였다. 하장춘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호위가 은밀하게 앞으로 크게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류희겸과 거리가 가까워지는 순간에 그대로 뛰쳐나왔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단검이 들려 있었다.

하장춘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이변을 알아차리고는 헛숨을 내뱉는 순간에 모든 일이 일어났다. 류희겸의 목을 노리고 휘두른 단검의 궤적은 매섭고 날카로웠다. 계속 그를 의식하고 있었던 류희겸은 간발의 차로 단검을 피해내면서 크게 거리를 벌렸다.

첫 공격이 실패하자 호위가 류희겸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이미 비녀를 빼 들고 있었던 류희겸은 어렵지 않게 단검을 튕겨냈다. 동시에 연회장 곳곳을 지키고 있던 금군시위들이 벼락처럼 달려들어 암습을 시도한 호위를 사슬 채찍으로 제압했다.

“꺄아아아아악!”

“암습이다!”

“자객이야!”

비명이 넘쳐흐르는 와중에 호위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류희겸은 지난 경험으로 호위가 혀를 깨문 게 아니라 숨겨놓은 독을 삼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피가 흐르자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조용히 하라!!”

금군시위에게 둘러싸인 황제는 호위가 죽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친교를 나누자고 하면서 자객을 보내다니. 이런 무도한 일이 있나. 너야말로 역도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자객에게 피습당한 당사자인 류희겸은 물론이고 연회장에서 소란을 피운 사람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하장춘이 구르다시피 달려 나와 다시 석기단 앞에 섰다. 금군시위의 감시 속에 그는 감히 고개를 들지조차 못했다.

하장춘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동행인 호위가 어찌하여 어전에 무기를 숨기고 들어와 류희겸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언질받은 것도 없었다.

그래도 수습은 자신의 몫이었다. 어전에 무기를 숨기고 들어오다 못해 칼을 휘두른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사신은 살려 돌려보내는 것이 예법이기는 하나, 황제를 시해하려고 했다면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었다. 어쩌면 목이 잘린 채 소금에 절여져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신, 하장춘이 아뢰옵니다. 이건 결코 소인이나 주군의 뜻과는 무관하옵니다. 통촉하여 주십시오.”

“무관하다? 그래. 그렇겠지. 사신이 찾는다는 역도 대신에 저 시신을 데리고 돌아가면 되겠구나. 화진의 황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똑똑히 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화친을 하러 오면서 칼을 숨겨 오다니. 부끄러운 줄 알라고!”

“황공하옵니다.”

하장춘은 그저 더더욱 깊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연회장 한가운데 서 있던 류희겸은 황제의 호통에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면서 맹렬한 희열을 감추었다.

직전 생에서도 황제는 암살 시도에 불꽃 같은 분노를 드러냈다. 하여 화진국을 향해 선전 포고를 하고 출전하는 병력을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다.

이제, 판은 모두 깔렸다. 남은 것은 진한재가 미끼를 물어주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중추절 연회는 자객의 난입으로 인해 끝나버렸다. 분노한 황제는 금군시위들의 호위를 받으며 떠났다. 그 뒤를 후궁들이 뒤따랐다. 왕공대신들 역시 부산한 와중에 물러나기 시작했다.

오늘 연회는 대연국과 화진국이 화친은커녕 적대하는 사이가 되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법 식견이 넓은 자들은 이번 일이 전쟁의 훌륭한 빌미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황제가 류희겸을 앞세울 것이니, 진혁위에게 줄을 대야 하나 계산하면서 무리를 지어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오늘 연회의 주인공 중에 한 명인 류희겸은 연회장 한쪽에서 진혁위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귀비는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느냐?”

“?”

들뜬 마음에 진혁위 앞에 섰던 류희겸은 난데없는 질책에 눈을 크게 떴다. 진혁위의 얼굴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목에서 피가 난다.”

“예?”

“피가 난다고.”

진혁위가 품에서 영견을 내밀어 류희겸의 목 한쪽을 꾹 눌렀다가 뗐다. 연회장의 불빛은 아주 밝지 않았지만 사위를 구분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진혁위가 보여준 하얀 영견에는 아주 연하게 피가 묻어났다.

류희겸은 자신의 손으로 목을 만졌다. 베였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목이 따끔했다. 아마도 날카로운 검날 끝이 스치면서 미미한 상처가 난 것 같았다. 손끝에 피가 묻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아마, 스친 모양입니다. 괜찮습니다. 아프지도 않고, 피도 나지 않습니다.”

“귀비답지 않게 움직임이 둔했다.”

“머리 장식이 무거웠나 봅니다.”

별것 아닌 상처였기에 류희겸은 대수롭지 않게 농을 던졌다. 호화로운 장신구 때문에 평소보다 머리가 무거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진혁위는 웃지 않았다.

진혁위는 무심한 류희겸의 반응 때문에 속이 탔다. 자객의 검이 한 치만 더 깊었다면 류희겸은 크게 다쳤을 것이다. 본인도 그걸 알고 있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처음 류희겸이 사신과 함께 온 호위 중에 한 명이 암살을 시도할 거라고 할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직전 생에서는 조금 다치기는 했지만 문제없었다면서, 이번에는 제대로 방비하면 쉬이 피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믿었다.

그런데 결과가 이거였다. 벌벌 떠는 것보다야 담이 큰 게 나았다. 하지만 류희겸의 목에서 가느다란 생채기를 발견하자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동시에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 애첩을 내원 깊숙한 곳에 가두어두는 이유를 절절히 이해했다.

진혁위는 류희겸을 좋아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게 싫었다. 다른 놈들의 눈에 닿는 것조차 짜증 났다. 무엇보다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 제일 끔찍했다. 마음 같아서는 부드러운 비단보료가 가득 찬 방에다가 감금해 버리고 싶었다. 아주 달콤한 상상이었다.

“농담할 기분 아니다.”

“죽지도 다치지도 않았으니, 지나간 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귀비는 무서운 게 없구나.”

“전하께서 좋은 연고를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

진혁위는 사람 속도 모르고 과거의 추억을 끄집어내는, 그러면서 웃지도 않는 남자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정말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일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것 같았다.

물론 류희겸은 진혁위의 마음을 알 리 없었다. 그저 심각한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굴었다.

“그래. 약이나 바르러 가자. 흉이 남을까 걱정이다. 손이나 내밀어라. 잡아줄 테니.”

“손을 말씀이십니까?”

“흉한 일을 당한 귀비가 여린 새처럼 떨고 있으니 손을 잡아줄 수밖에. 안 그러냐?”

“…….”

심각하던 진혁위가 평소의 기운을 되찾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여린 새가 되어버린 류희겸이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진혁위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작명 실력은 날이 갈수록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무어라 한마디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는데 때맞춰 진윤홍이 다가왔다.

“영왕. 류 부인. 괜찮습니까?”

평소에 신년 연회에서만 얼굴을 비추던 진윤홍이 중추절 연회에 참석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류희겸은 그녀가 자신과의 짧은 만남을 위해 걸음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윤홍은 죽은 아들의 모습을 자신에게 비춰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객의 기습을 받은 것에 아주 놀란 모양이었다.

“장공주님.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다친 곳은 없습니까?”

“예. 무사합니다.”

“세상에. 천자 앞에서 저리도 흉악한 일을 벌이다니.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다행이야.”

“예. 천지신명께서 도우셨습니다.”

류희겸은 창백한 안색의 진윤홍을 다독였다. 선황의 총애를 받으며 귀하게 큰 진윤홍에게 피를 토하고 죽은 자객의 모습은 충격일 것 같았다.

“그렇지. 천지신명의 도움입니다. 그래도 자객이 자결해 버린 것만큼은 통탄스럽습니다. 흉악한 배후가 누구인지 세상에 밝혀야 하는데 말입니다. 너무 쉽게 죽었어요.”

“예…….”

잔뜩 힘이 들어간 진윤홍의 얼굴은 자객과 그 배후를 씹어 삼켜도 시원찮을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만큼 연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류희겸은 반성했다.

류희겸은 진윤홍을 가냘프고 병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희범영이 죽고 난 후, 죽은 아들에 대한 비밀을 가감 없이 전할 때의 그녀는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그때의 인상이 깊어 강인한 진윤홍의 성격을 몰라보았던 모양이었다.

부드럽게 웃은 류희겸이 다시 괜찮다면서 안전하게 공주부까지 배웅해 드리겠다고 할 때였다. 편전의 태감이 조용히 다가와 진혁위를 찾았다. 황제가 진혁위와 류희겸을 모두 부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먼저 가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고모님.”

진윤홍이 돌아갈 채비를 하는 것을 막은 진혁위가 건너편에서 능군왕 부부 내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희범영에게 다가갔다. 진혁위가 몇 마디 말을 하자 희범영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진혁위가 돌아와 모두를 놀라게 할 말을 했다.

“고모님. 저를 대신해 희범영 장군께서 공주부까지 동행해 주실 것이옵니다.”

“……?”

류희겸은 놀란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얼굴에 힘을 주었다. 희범영과 진윤홍의 사연을 알고도 두 사람을 부러 동행시키려는 진혁위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당황하는 기색을 억누르는 진윤홍을 향해 진혁위가 그럴듯한 설명을 이었다.

“황제 폐하 앞에서도 무도한 놈들이니, 또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고모님께서 귀비와 최근 가까이 지내셨으니 방비하는 게 좋겠지요. 공주부의 시위들이 몇 되지 않은 것이 생각나서 희범영 장군께 부탁드렸습니다.”

“그럼 황궁의 시위들을 부르면 될 거 아니냐?”

“오늘 같은 날은 황궁을 방비하는 데 힘써야지요. 장군부에 가는 길에 공주부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크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니, 희범영 장군께서도 흔쾌히 승낙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능군왕과 왕비께서도 동행하시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진윤홍이 미약하게 저항했지만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어가는 진혁위를 이기지는 못했다. 결국 진윤홍은 능군왕 내외와 희범영과 함께 움직였다.

조용히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류희겸은 슬쩍 진혁위를 보았다. 바로 옆에 황제의 태감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진혁위에게 일부러 그런 거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저 진윤홍의 안전만을 위하여 일부러 희범영 장군과 동행을 권한 것은 아님이 분명했다.

눈이 마주치자 무슨 꿍꿍이냐고 소리 없이 물었다. 그러자 진혁위가 조금 전에 진윤홍에게 사기를 치던 그 미소를 지었다.

“고모님께서는 안전할 것이다. 그럼 우리도 어서 움직이자. 폐하께서 기다리시겠다.”

“예. 따르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진혁위를 향해 류희겸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인지는 왕부로 돌아가는 길에 캐물어야겠다고 마음먹는데 진혁위가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라.”

“?”

“여린 새처럼 떠는 귀비를 위해 손을 잡아준다고 했잖느냐.”

“왕야께서 용맹하게 지켜주시는데, 어찌 떨겠습니까. 이제 괜찮습니다.”

황궁의 태감들이 보는 앞이었기에 류희겸은 적당히 진혁위의 말을 흘렸다. 하지만 진혁위는 그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럼 본왕이 겁 많은 사슴처럼 심장이 두근거려서 귀비의 손을 잡아야겠다.”

“…….”

“왜? 싫으냐? 응? 귀비가 크게 다칠 뻔한 걸 보았더니, 땀이 나고, 숨이 턱 하니 막힌다. 허니 귀비가 손을 잡아주면 좋겠다.”

말로는 진혁위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은 류희겸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눈치가 빠른 태감들은 고개를 숙이며 금실 좋은 친왕 부부의 애정 행각을 못 들은 척했다. 역시나 눈치가 빠른 우소진이 류희겸을 대신하여 나섰다.

“전하. 시간이 꽤나 지체되었습니다.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귀비가 손을 안 잡아주겠다잖아.”

한없이 어른스러운 남자가 떼를 쓰는 어린애가 되어버린 듯했다. 아름다운 얼굴로 짓궂은 미소를 지은 남자는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결코 움직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보였다. 류희겸은 어쩔 수 없이 진혁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드리겠습니다. 전하.”

“응. 그래야지.”

류희겸은 냉큼 손을 잡아 오는 진혁위를 한 번 제대로 때려봤으면 하고 바랐다.

*

황제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화진국 사신을 제대로 망신 주었다는 사실에 호탕하게 웃었다. 노골적으로 전쟁을 언급한 황제는 승전을 기대한다고 한 후에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밤이 깊은 탓에 황궁의 오문까지는 황제의 태감이 배행했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진혁위가 마차가 아니라 말에 올라탔기에 류희겸은 진윤홍에 대해 물어볼 수가 없었다.

홀로 마차에 탄 류희겸은 따끔한 목을 붙잡고는 희범영과 진윤홍을 함께 보낸 진혁위의 의도에 대해 생각했다. 이미 오래전에 다한 인연을 어떻게 할 생각인지 걱정스러웠다.

황궁에서 영왕부까지는 금방이었기 때문에 오래 고민하지 못했다. 영왕부 앞에 도착하자 류희겸은 진혁위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계속 손을 잡고 가자.”

진혁위는 손을 잡고 가는 재미가 들린 듯했다. 잡은 손을 꽉 쥐고는 잡아당기는 것을 류희겸은 거부하지 않았다. 대신에 독설을 던졌다.

“왕야께서 이리도 심약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본왕이 많이 심약하다. 얼른 귀비의 목에 약을 바르러 가야겠다.”

빙긋 웃는 진혁위를 이기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류희겸보다 진혁위의 행동이 빨랐다. 그는 류희겸을 끌어안다시피 하여 뒤로 크게 물러났다.

텅! 화살이 영왕부 정문의 기둥 위쪽에 큰 소리를 내며 박혔다. 뒤늦게 시종들이 몸을 숙였고 시위들이 칼을 뽑아 사방을 경계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살벌해졌다.

“멀리서 활을 날렸다. 붙잡지 못해도 책하지 않을 터이니, 적당히 쫓아내라.”

진혁위의 명령에 시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품에서 벗어나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았다. 영왕부는 태경에서 가장 훌륭한 저택들이 모여 있는 거리에 자리했다. 어느 저택의 높은 지붕 위에서 화살을 날린 범인을 잡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니, 진혁위의 명령은 현명했다.

“운문형은 화살을 가져와라.”

그제야 류희겸은 기둥에 박힌 화살을 보았다. 보름달이 훤한 덕분에 화살에 하얀 종이가 묶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왕야. 독은 없습니다.”

“그건 내가 읽겠다.”

운문형에게서 화살을 받은 진혁위가 종이를 펼쳤다. 가볍게 코웃음을 친 진혁위가 류희겸을 보았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더냐?”

“그렇습니다.”

“귀비도 읽어보아라.”

류희겸은 진혁위가 건네는 종이를 받아 읽었다. 진혁위와 달리 류희겸은 웃지 못했다.

변절자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자결하라.

달필로 쓴 오만한 글이었다. 하지만 류희겸은 부끄러움 따위를 느끼지 못했기에 자결할 생각이 없었다.

“누가 보냈을 것 같으냐?”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직인도 수결도 없는 비방글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었다. 화진국뿐만이 아니라 대연국에도 류희겸을 싫어하는 이들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시켜 멀리서 활을 쏘아 영친왕부의 정문 기둥에 화살을 날리는 것은 아무나 시도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진한재, 태자, 기왕, 그리고 자신을 싫어하는 권력자 몇몇의 이름이 머리에 떠올랐다. 누구든 대담하게 일을 벌였다.

“할 일 없는 인사들의 짓이겠지. 이딴 건 신경 쓰지 마라.”

진혁위는 류희겸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시위가 들고 있는 횃불에 태워버렸다. 까맣게 재가 되어버린 종이에 류희겸은 시선을 두지 않았다. 진혁위가 굳이 말하지 않았어도 신경 쓸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예. 그러겠습니다.”

“약이나 바르러 가자.”

진혁위가 다시 류희겸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도 류희겸은 순순히 그를 따라 움직였다.

*

“빌어먹을.”

씩씩거리며 서재로 들어선 태자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탁자 위에 올려둔 화병을 집어 던졌다. 폭력적인 손길에 바닥으로 내던져진 아름다운 화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태자는 서탁 위에 있는 물건을 한 번에 쓸어 떨어트렸다. 연적과 붓, 벼루, 서책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태자를 뒤따르던 수행태감은 허리를 숙이고 주인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왜? 도대체, 왜 그걸 안 먹냐고?!”

마지막으로 문진까지 내던진 태자는 발을 구르다시피 하며 소리를 질렀다.

큰돈을 들여 선방의 궁녀를 매수해, 진혁위의 상에 놓일 음식과 술에 독약을 탔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극독은 아니었다. 다만 제대로 한입만 먹으면 속을 부글거리게 하여, 갑작스럽게 구토를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매사에 도도하던 놈이 황실 사람들과 화진국 사신 앞에서 망신당하는 꼴을 두고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진혁위는 술도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놈의 측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 변덕이 심한 진혁위는 연회를 즐길 때도 많았지만, 때때로는 목석처럼 자리만 지키기도 했다. 그게 하필이면 오늘이었다.

“미꾸라지 같은 놈!”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던 태자는 문득 의문을 느꼈다. 천우상단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진혁위가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피한 것이 이상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진혁위에게 너무 유리한 우연이었다.

태자는 허리를 숙이고 자리를 지키는 수행태감을 보았다. 천우상단의 일에는 엮인 사람이 많았지만, 이번에 독약을 쓴 것은 수행태감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신중원(申中源).”

“예. 태자 전하. 소인. 여기에 있사옵니다.”

“이상하지 않느냐? 그놈이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피해가잖아? 응? 왜 그럴까?”

“영왕께오서 변덕이 심하다고 말씀 올리지 않았습니까. 거기다 화진국의 사진이 영왕 전하의 측비를 내어달라고 억지를 부리니 음식이고 술이고 입에 들어갈 정신이 없었겠지요. 영왕 전하께서는 측비를 유달리 아끼신다고 소문이 자자하니 말입니다.”

“그건 네놈이 일을 잘했어야지. 7제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내고 선방에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 했다면 한입이라도 먹었을 것 아니냐. 멍청한 것.”

태자는 자신을 오랫동안 수족처럼 따랐던 태감을 의심하기보다는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일 뿐이라 생각하는 길을 택했다. 그래도 성질대로 서탁 위에 남아 있는 것을 신중원에게 집어 던졌다.

고스란히 붓을 얻어맞은 신중원은 태자의 의심이 억울했다. 친왕의 음식에 독약을 타다가 들키면 극형 이전에 고문부터 받을 것이다. 들키지 않기 위해 엄청나게 신경을 썼는데, 노력을 폄하당하자 속이 상했다.

하지만 본심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태자는 수틀리면 아랫것들을 두들겨 패는 성격이었다.

“소인이 더욱 신경 쓰겠습니다.”

“그래. 중양절에 보자.”

태자가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데, 그 때 밖에서 늙은 태감 하나가 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작은 차 통이 하나 들려 있었다. 그걸 알아본 신중원이 태자에게 알렸다.

“전하. 새가 왔습니다.”

“그래? 얼른 가져오너라.”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태감이 신중원에게, 그리고 신중원이 태자에게 차 통을 넘겼다. 태자가 허겁지겁 안에서 꺼낸 것은 찻잎이 아니라 작은 지관통이었다. 보통 전서구의 다리에 달려 있는 크기였다.

“모두 물러나라.”

지관통을 꺼내고 나서야 태자가 정신을 차린 듯 태감 둘을 모두 내보냈다. 신중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 뒷걸음질 치면서 샘솟는 의문을 떨치지 못했다.

태자가 마시는 차의 일부는 황후의 집안에서 운영하는 상단에서 들여왔다. 좌승상이 실각하고도 관계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신중원이 기억하기로 태자가 작은 지관통을 받기 시작한 것은 좌승상이 실각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 하지만 신중원은 지관통을 모태심이 보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태자와 좌승상은 아무렇지 않게 심각한 내용의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입이 가벼운 태자가 지관통에 관해서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무슨 내용인지, 누가 보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관통 안의 작은 쪽지를 확인한 태자는 언제나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이 신기하고도 궁금해졌다.

“아파라.”

신중원이 붓으로 얻어맞은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자 같이 방을 나온 늙은 태감이 말 없이 작은 연고 통을 내밀었다.

“고맙네.”

신중원은 냉큼 연고 통을 받아 욱신거리는 이마에 찍어 발랐다. 태자의 성격은 날이 갈수록 포악하게 변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태감 하나를 두들겨 패다가 팔이 부러지고는, 물건을 집어 던지는 일이 늘어났다.

“태자께서 물건을 너무 자주 던지시는군.”

신중원은 늙은 태감을 의심하지 않고 태자의 흉을 보았다. 아랫것들이 주인의 뒷담화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얼굴에 깊은 주름이 생길 정도로 오랫동안 황궁에서 일한 태감이 승차를 하지 못한 것은 그만한 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주인에게 밉보였기 때문인데, 늙은 태감의 경우는 목에 이상이 있어 말을 하지 못한 이유가 컸다.

조용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늙은 태감은 고자질을 할 성격이 못 되었다. 그래서 신중원은 태자가 지관통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는 말도 서슴없이 했다.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늙은 태감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나는 것은 알아보지 못했다.

*

류희겸은 진혁위가 장담한 대로 경화당에 도착하자마자 목에 연고부터 발라야 했다. 옥안인에게서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료를 받고 나서야 늦은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연회장에서 아무것도 입에 넣지 못했기에 아주 만족스럽게 식사를 끝마쳤다. 화려하고 무거운 머리 장신구를 모두 뺀 것은 그다음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있는 하루의 마무리를 위해 류희겸은 끝까지 노력했다.

“혼자 갈 겁니다.”

“왜? 같이 가자니까.”

“미혹에 빠져 식언을 하시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아니 될 일이지요.”

류희겸은 탕실에 함께 가겠다는 진혁위를 단호한 태도로 거절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겠다고 했던 진혁위였다. 하지만 탕실의 탕조에 함께 들어가면 공허한 약속이 될 것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본왕이 식언을 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소인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겠다고 맹세하실 수 있으십니까?”

“맹세를 하라니. 본왕을 소인배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구나. 혼자 가라.”

진혁위가 툴툴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류희겸은 재빨리 탕실로 향했다.

혼자 남은 진혁위는 우소진의 도움을 받아 손발을 씻었다. 차를 마시며 류희겸을 기다리고 있는데 심양설이 조용히 안으로 들었다.

“왕야를 뵈옵니다.”

“무슨 일이지? 귀비가 날 부르더냐?”

“아닙니다. 귀비 마마께서는 편히 씻고 계십니다. 소인이 왕야께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심각하게 말을 하던 심양설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어 내밀었다. 서신을 받아 든 진혁위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또, 출처를 알 수 없는 서신이었다. 서명도 직인도 없었다. 그러나 아까와 달리 겉봉에는 유려한 국화 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에 류희겸이 했던 말을 떠올린 진혁위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이건 그에게서, 화진국의 진한재에게서 온 것이었다.

“무엇이냐?”

“오늘 경옥이 시장에 갔다가 평소 머릿기름을 사는 행상인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하옵니다.”

“행상인?”

“상점이 아니라 지게를 지고 다니면서 머릿기름을 판다는 이온데, 상품의 질이 좋고 가격도 싸서 아이들이 종종 애용한다 합니다. 저도 한 번 보았는데 선량하고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겠지.”

진혁위는 코웃음을 쳤다. 심양설의 설명만 들으면 간자로서는 아주 완벽한 위장이었다.

“경옥이 제법 붙임성이 좋아 전부터 그에게서 이것저것 덤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오늘 서신과 함께 금편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귀비 마마의 서재에 있는 탁자 서랍에 넣어두라고 말입니다. 답장은 받을 필요 없으니 위험하지 않다고, 간단한 심부름을 하고 금편을 벌라고 부추겼답니다. 평소 아이들에게 단단히 일러둔 터라 경옥이가 그걸 받아 와서는 소인에게 알려 왔사옵니다.”

지난 혼례식 이후에 진혁위는 경화당의 시종들을 철저하게 엄선했다. 고지식하게 충성스럽거나, 혹은 배신보다 배신을 고발할 경우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정도로 머리가 있는 자들을 골랐다.

가족이 위협당할 경우 최선을 다해 구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돈으로 회유하려는 자에 대해 고발하면 사주한 자가 말한 돈의 열 배를 주겠다고도 했다. 경화당의 몇몇 시종들은 누군가가 돈으로 자신을 회유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정도였다.

태경의 시전에서 활동하는 간자가 류희겸에게 보낸 서신이었다. 어설프긴 하지만 답장을 받을 필요 없다고 하니 욕심 많은 어린 여종이라면 혹할 만한 것이었다. 진혁위가 평소 방비를 하지 않았다면, 서신이 류희겸의 손에 들어가고도 남을 일이었다.

진혁위는 굳은 얼굴로 서신을 꺼내어 읽었다.

좁은 새장 속의 푸른 매는 창공을 꿈꾼다.

검은 늑대를 피하여 열사를 건넌다.

국화가 피는 날, 푸른 등을 걸어본다.

구름 너머 드넓은 창공으로 날아간다.

아무 생각 없이 읽었다면 그저 유치한 시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암어(暗語)였다.

푸른 매는 류희겸이었고, 국화가 피는 날은 중양절이었다. 즉, 류희겸에게 사막을 건너 도망치고 싶다면, 중양절에 푸른 등을 걸라며 종용하는 것이었다.

진혁위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서신이 구겨졌다. 국화 문양은 진한재의 상징이라고 류희겸이 자신에게 직접 말했다.

이것은 진한재와 류희겸이 서로 연락하며 탈출 계획을 짜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류희겸은 진한재를 진정으로 증오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진한재가 류희겸을 꾀어내기 위해 쓴 미끼일지도 몰랐다.

의문을 해결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류희겸에게 이것에 대해 아는 것이 있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류희겸이 거짓을 고한다면, 제대로 구분할 자신이 없었다.

거짓말쟁이 정인은 신실한 얼굴로 사람을 속였었다. 암어가 적힌 서신을 손에 들고 있자니 모든 것을 의심하고 싶어졌다.

이것은 불신을 조장하는 독이었다. 손끝을 타고 번진 독이 의심을 한없이 키웠다.

“귀비에게는 직접 알리겠다.”

“명 받듭니다.”

심양설은 조용히 대답하며 물러났다. 진혁위는 서신을 봉투에 집어넣은 채 따로 숨기지 않고 탁자 위에 올려둔 채 류희겸을 기다렸다.

한참 후에 나타난 류희겸의 뺨은 보기 좋게 발그레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심란함과 별개로 류희겸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왜 그리 인상을 쓰고 있느냐?”

“넘어져서―”

“다쳤어?”

“아니요. 탕조를 빠져나오다가 넘어졌는데, 코에 물이 들어갔습니다.”

부루퉁히 대답한 류희겸이 자리에 앉으며 젖은 머리를 닦아냈다. 우풍이와 시녀들이 마른 수건을 들고 류희겸에게 달라붙었다. 무방비한 상태인데도 류희겸에게서는 불안이나 긴장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 왕부나 귀족 가문의 내원을 차지하고 앉은 이들은 부군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황궁의 후궁들 역시도 언제나 꽃같이 단장하고 황제를 기다렸다.

침의만 입고는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말리는 류희겸의 성격이 대범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혹은 그저 익숙해서 막 구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의도는 알 수 없지만, 한번 깨달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처음 류희겸을 귀비로 삼은 것은 분풀이였다. 오해가 풀린 지금도 그와의 관계는 명료하지 못했다. 충성을 바치라고 했으나 서로가 바라는 것은 달랐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류희겸은 어떤 고통과 인내도 참을 위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본인의 이야기를 별달리 하지 않았다. 스스럼없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곁을 쉬이 내어주는 법이 없었다.

“코가 아직도 아프세요?”

“아프지는 않아. 그저 따가울 뿐이야. 나아지고 있어.”

우풍이가 코를 만지작거리는 류희겸을 걱정했다. 나아지고 있다면서도 류희겸은 한 번씩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괜히 귀여워 보여서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러나 이것이 살얼음판 위의 안온함인 것을 인지하기 있기에 가슴 한쪽이 시리도록 서늘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리를 하나 잘라도, 음인으로 만들어 아이를 가지게 해도 자신의 불안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그저 최악을 방비하는 게 전부였다.

류희겸의 모든 것을 가지고, 생을 함께하려면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물러나라.”

진혁위의 말에 류희겸의 시중을 들고 있던 이들이 모두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들이 사라지기도 전에 진혁위는 류희겸을 눈짓으로 불렀다.

“희범영 장군에게 고모님을 부탁한 것은 두 사람의 호의를 사기 위함이다. 자세한 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형태가 잡히면 이야기해 주마.”

“예. 알겠습니다.”

난데없는 설명에 류희겸은 의아했다. 그래도 궁금해 하던 것이기에 조용히 듣고 있는데, 진혁위가 서신을 하나 들어 보였다.

“오늘 경화당의 시비가 네 서재 서랍에 넣어두라고 사주받은 서신이다. 머릿기름을 파는 상인이 은전도 아닌 금전을 쥐여주었다고 하더군. 읽어보아라.”

류희겸은 진혁위가 내미는 서신을 받아 들었다. 겉봉에 그려진 국화 문양은 진한재의 것이었다. 서신을 꺼내어 읽자 진한재의 글씨체가 보였다.

탈출을 도와주겠다는 내용의 서신으로, 직전 생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서신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시기가 지금이 아니라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이라는 것이 달랐다.

만약에 자신이 진한재의 배신을 몰랐더라면, 그를 믿고 대연국에서 도망쳤을 것이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살해되어 시체가 전시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조금 전, 기둥에 활을 쏘아 위협한 것도 진한재의 짓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자결하라고 위협하고는, 도와주겠다는 이가 나타나면 더욱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진한재의 간악함과 치밀함에 혀를 차면서 류희겸은 진혁위의 반응을 걱정했다. 혹시나 이것으로 진한재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하면 어쩌나 싶었다.

류희겸은 얼굴을 굳히고 있는 진혁위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진한재가 보낸 것이옵니다. 필체 역시 그의 것입니다. 지난 생에서도 비슷한 것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확신하지는 못하오나, 아마도 소인을 불러내기 위한 것 같습니다.”

“그래?”

“왕야께서 의심하실 수 있는 거 압니다. 그러나 진한재를 향한 소인의 원한은 바다보다 깊습니다. 그를 죽일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양다리를 잘라서라도 결백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험한 말을 하면 그대로 돌려받는다더니. 내가 업을 쌓았군. 일어나라. 네 다리나 네 목숨은 필요 없다.”

업을 쌓았다는 진혁위의 한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류희겸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의 명령에 따라 천천히 일어났다.

류희겸은 진혁위가 내미는 손에 서신을 다시 돌려주었다. 진혁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서신을 촛불에 태우고는 그릇에 집어 던졌다. 서신은 종이가 타는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까만 재가 되었다.

기묘한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진혁위였다.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다. 나는 너의 원한도 복수심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한 복수심을 경계하고 있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깊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과한 복수심을 경계하다니.

“천제께서 네게 신탁을 내렸다고 가정해 보자. 네가 죽지 않으면 진한재가 천수를 누리고 황제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대신 목을 찔러 자결한다면 진한재를 저승까지 함께 갈 동무로 만들어준다고 하면, 그럼 너는 망설이지 않고 죽겠지?”

“그야 당연히…….”

당연하다고 대답하려던 류희겸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진한재가 천수를 누리고 황제가 되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천제께서 진한재를 저승 가는 길동무로 삼아주신다면 당장에 제 목을 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혁위가 경계하는 것임을 조금 늦게 눈치챘다.

“다른 방도를 찾을 겁니다.”

“현명한 대답이다. 하지만 나는 너를 안다. 너는 네 목숨을 내던지는 데 서슴없을 것이다. 아니라고 하지 마라. 거짓인 거 아니까.”

“소인도 목숨 중한 줄은 압니다.”

류희겸은 가까스로 답을 찾아냈다. 복수에 눈이 멀었어도 자기 목숨은 소중한 법이었다. 하지만 진혁위는 더욱 핵심을 꿰뚫었다.

“네 목숨보다 복수가 더 중하지. 아니더냐? 죽지 마라. 황제의 호의를 사겠다고 자객 앞에 몸을 내던지지도 말고. 나보다 먼저 죽었다가는 맹세고 뭐고 간에, 진한재가 천수를 누리도록 내버려 두겠다.”

“왕야. 사람 목숨이라는 것은 쉬이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전쟁을 앞두고 있지 않습니까. 소인도 죽지 않고 복수하기를 바라오나, 그게 제 뜻대로 되지 않음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이전에도 죽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그러면 된다. 네 목숨은 내 것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죽지 마라.”

억지에 가까운 명령에 류희겸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몇 번이고 생을 반복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쉽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죽지 않겠다는 약속은 쉽게 할 수 없었다.

“괜히 그놈을 네 손으로 직접 죽일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어. 그냥 사람을 시켜 죽여버렸으면 이리 속이 탈 일도 없을 것인데.”

“저는 복수의 방법을 따지지 않습니다.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그가 전쟁터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면 생포해라. 생포해서 왜 그랬냐고 물어보아라.”

류희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진혁위를 바라보았다.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남자는 진심인 것 같았다.

전에도 이유를 물어보라고 했던 말을 들은 것 같긴 했다. 그때는 가볍게 넘겼다면 지금은 무겁게 느껴졌다.

지금껏 진한재만 죽일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고 여겼다. 진한재가 남준해에게 역모의 누명을 씌운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혁위의 명령에 억눌러왔던 욕망이 울컥하고 튀어나왔다.

사실은 진한재의 멱살을 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왜 그랬냐고. 도대체 왜.

이곳에 없는 사람이 환상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들끓어 오르는 감각에 심장이, 머리가,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류희겸은 주먹을 꽉 쥐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생포하여, 이유를 묻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죽지 않겠다고 맹세해라. 천지신명은 물론이고, 너 자신에게. 무엇보다 네 목숨을 먼저 챙기겠다고 말이다.”

진혁위의 요구는 한결같았고, 그래서 류희겸은 망설였다. 맹세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할 맹세가 거짓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그를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호양성을 함락하고 옛 양번국의 땅을 되찾으면 자신의 쓸모는 사라진다. 직전 생에서는 태자와 좌승상이 변절자에게 죽음을 내리라 황제에게 몇 번이고 청했다.

황제가 공식적으로 죽으라 명하지 않은 이유는 그간의 공을 인정하는 의미도 있었다. 또한 희범영의 죽음으로 충격에 빠진 희가에 또 다른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정치적 판단이기도 했다.

지금은 좌승상은 없었지만 태자와 진혁위의 사이가 나쁘니 어떻게 될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 말고도 변수는 너무나도 많았다.

황제가 죽으라고 한다면 죽어야 했다. 진한재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난 다음이라면 얼마든지 기쁘게 죽을 수 있었다.

또한 류희겸은 먼 미래도 생각했다. 운 좋게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황제가 될 진혁위의 옆에 변절자로 불리는 자신이 있는 것은 결코 안 될 일이었다. 그에게는 강력한 처족이 필요했다.

그러나 사천왕상처럼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에게 그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자신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우선은 살아남는다. 그것만큼은 맹세할 수 있었다.

잠시 숨을 들이쉰 류희겸은 다시 무릎을 꿇었다.

“맹세하겠습니다. 제 목숨을 챙기겠습니다.”

“내 거짓말쟁이 정인을 믿을 수밖에. 이리 와서 앉아라. 씻었으니 약을 발라야지.”

“왕야?”

“왜?”

조금 전까지 심각했던 남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언제 챙겼는지 연고 통을 집어 든 진혁위가 어서 앉으라고 눈짓을 했다. 결국 류희겸은 조심스럽게 그의 옆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약을 바르고 나서는 접문을 해라.”

막 자리에 앉으려던 류희겸이 눈을 크게 떴다. 진정 그걸 원하냐는 무언의 질문에 진혁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말입니까?”

소리 높여 다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난 다음이었다. 무엇보다 진혁위가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류희겸은 결국 식언을 할 거냐고 우회적으로 물었다.

“응.”

“정말요?”

“그렇다니까. 목이나 내어라.”

진혁위는 싫으냐고는 묻지 않았다. 목을 기울여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옅은 상처를 드러낸 류희겸 역시도 싫다는 말을 삼켰다.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왔다.

진한재를 죽이기 위해서는 진혁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서로 날을 세우고 오해를 하는 것보다는 교합을 하며 신뢰를 사는 것이 훨씬 나았다.

“따르겠습니다.”

류희겸의 상처에 연고를 바르던 진혁위는 어쩐지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목덜미를 손끝으로 야하게 쓸었다.

흠칫 놀란 류희겸의 목이 순식간에 빨갛게 변했다. 민감하고 정직한 반응에 진혁위는 꽤 만족했다. 이럴 때면 류희겸은 꽤나 귀여웠다.

“다 끝난 거 아닙니까?”

“응. 목이 빨개졌어.”

“그러라고 만지셨습니다.”

“맞아.”

서로 나란히 앉아서는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자세였다. 진혁위는 류희겸의 빨개진 얼굴을 보며 웃었다. 류희겸의 목과 턱을, 그리고 뺨을 더듬자 붉은 기운이 귀까지 퍼져 갔다. 그럼에도 류희겸은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언제까지 하실 겁니까?”

“만지는 게 싫어?”

“그건, 아닙니다. ……간지러워서요.”

유혹을 하는데 간지럽다 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동시에 호승심이 타올랐다.

“이리도 예쁜 얼굴을 하고, 부군의 속을 모르는 소리를 하면 어쩌느냐? 응?”

진혁위는 얄미운 말을 하는 류희겸의 뺨을 양손으로 잡고 입술을 살짝 맞대었다가 떨어졌다. 손을 떼자 이번에는 이마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얼굴이 빨갛다.”

“압니다.”

무뚝뚝하게 대답한 류희겸은 환하게 웃기만 하는 진혁위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정확하게는, 자신도 진혁위를 야하게 만져서 그가 당황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시켜만 준다면 아주 잘할 자신이 있었다.

“류희겸.”

“예.”

“겸아.”

“……?”

류희겸은 당장에 답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는 고모부 내외가 소겸이라고 불렀었지만 그것도 일곱 살이 될 때까지였다.

“왜 놀라? 겸이라고 불린 적이 없느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애칭으로 불러도 되겠네. 겸아.”

“……예.”

“예쁜 이름이다.”

예쁘다는 공격에 류희겸은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에 언제고 받아치리라 결심하며 준비해 왔던 말을 꺼냈다.

“왕야께서도 예쁘십니다. 이름도 예쁘십니다.”

너도 예쁘다는 응수에 진혁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든 말든 류희겸은 단단한 눈빛으로 진혁위를 보았다. 훤앙하시다, 멋지시다는 말 대신에 이제는 예쁘다고 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진혁위는 류희겸이 자기에게 예쁘다고 한 것이 마음에 드는지 눈까지 접어가며 기쁘게 웃었다.

“어여쁜 모습을 오래 보고 싶으니, 죽지 마라.”

“……예.”

진혁위의 미의식을 이해할 수 없던 류희겸은 뜻밖의 말에 한 박자 늦게 대답하고 말았다. 깊은 시선과 마주하자니 이번에는 뺨이 아니라 가슴에 열이 올랐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한 감정이 퍼져 나갔다.

“이제 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진혁위가 손을 잡아끌었다. 엉겁결에 자리에서 일어난 류희겸은 눈을 내리깔며 얼굴에 힘을 주었다.

한 번 일어난 파문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술렁거림이 계속 심해져서 갈비뼈 안쪽을 아프게 만들었다.

◇ ◇ ◇

중추절 연회에 있었던 암습 사건은 다음날이 되자 태경의 거리에 들불처럼 퍼졌다. 사람들은 분통을 터트리며 화진국의 무도함을 비난했다. 화친이 아니라 전쟁을 하자는 것이라며 소리 높였다.

며칠 후, 화진국으로 돌아가는 사절단 행렬은 태경 주민들의 야유를 받았다. 금군시위들이 호위를 하지 않았다면 돌멩이가 날아들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화진국의 새로운 사절이 도착한 것은 보름 후의 일이었다. 화진의 황제는 사절단 일행이 벌인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사죄의 뜻이 적힌 친서와 선물을 보냈다.

그리고 역도의 존재를 참지 못한 시종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해명하면서, 류희겸의 신병을 화진국으로 넘기라고 다시 한번 더 종용했다.

황제의 분노는 대단했다. 친서를 들고 온 사신을 질책하며 선물과 함께 내쫓았다. 또한 정도를 모르는 나라와 친교를 유지할 이유가 없다며, 그들이 강탈한 대연국의 강역을 되찾겠다고 선언했다.

개전(開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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