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章
천천히 잠에서 깨어난 류희겸이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사람의 묵직한 온기였다. 주변은 푸르스름하게 밝았고 새소리가 작게 들렸다. 새벽인가 보다 하고 눈을 깜빡이던 류희겸의 시야에, 자신의 바로 앞에 누워 있는 진혁위의 얼굴이 들어 왔다.
침상 바깥쪽에 자리 잡은 진혁위는 잠버릇 같은 것과 인연이 없는 것처럼 반듯이 누워 있었다. 주위가 아주 밝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얼굴 윤곽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반듯한 이마, 날카로운 콧날, 긴 속눈썹. 절세가인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화려한 미남자는 눈을 감으니 인상이 순해 보였다. 그러나 잘난 얼굴에 속으면 안 되는 법이었다. 남자는 발정 난 짐승이었다.
짐승. 울림이 사나운 단어에 류희겸은 울컥했다. 체력이 좋은 남자는 정력도 넘쳐났다. 또 끈질기기까지 해서 사람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쥐어짰다.
이전에도 몇 번 날을 지새운 경험이 있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달랐다. 하룻밤이 아니라 이틀을 꼬박 사람을 괴롭혀댔다.
밥 먹고 자는 것 말고 하는 건 몸을 섞는 것뿐이었다. 씻는 것조차 곁방에 탕조를 들여 하는 바람에 이틀 내도록 침방을 나가지 못했다. 끼니를 챙기고 있는 심양설 보기가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당당한 목소리로, 방탕하게 뒹굴어보고 싶었다며 활짝 웃는 남자를 이길 수 없었다.
지난 이틀 동안의 기억을 떠올린 류희겸은 편안하게 잠든 진혁위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욱신거리는 허리와 엉덩이 때문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끄응…….”
류희겸은 끙끙거리며 겨우 일어나 앉았다. 그 때, 지금까지 조용히 누워 있던 진혁위가 류희겸 쪽으로 돌아누우며 팔을 허리에 감아 왔다.
“왜 일어나?”
“잠시 밖에…….”
막 잠에서 깼다고 하기에는 진혁위의 목소리가 너무 생생해서, 류희겸은 굳어버리고 말았다. 진혁위가 깨면 다시 교합을 하자고 달려들 것 같아서 딴 방에 갈 생각이었다. 적어도 침방만큼은 벗어나고 싶었다.
“밖에?”
“예. 잠시……. 혹시 제가 깨운 겁니까?”
“누워라.”
“왕야?”
“내 잘난 얼굴을 보고 감탄하는 줄 알았더니, 또 몰래 도망칠 생각이더냐?”
류희겸은 앞으로 닥칠 재난을 약간이나마 늦출 의도였지만, 진혁위에게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빤히 올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직전 생에 그와 헤어졌던 순간을 떠올린 류희겸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진혁위에게 류희겸의 말은 변명처럼 들렸다. 물론 자신도 류희겸에게 도망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냉철한 이성과 별개로, 감정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류희겸의 행동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아니, 그때는 류희겸이 일어나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고서야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일찍 일어나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그는 그 길로 모습을 감추었다.
후회는 한 번으로 충분했다. 진혁위는 류희겸의 손목을 꽉 잡았다.
“그럼 다시 누워라.”
“네.”
강한 어조의 명령에 류희겸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진혁위가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강한 손길에 허리가 아팠지만 류희겸은 티도 내지 못했다.
“자라.”
“오늘은 돌아가실 겁니까?”
“돌아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처럼 들린다.”
“더 이상 못 합니다.”
“안다. 그러니까 자라.”
잠을 강요하며 진혁위의 손이 류희겸의 얼굴을 덮었다. 시야가 완전히 가려지는 바람에 류희겸은 눈을 깜빡거렸다. 경직된 가운데도 작년 가을에 무환행궁에서 자신이 했던 행동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웃느냐?”
진혁위가 소리 없는 웃음을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류희겸은 사실대로 말했다.
“제가, 소인이 무환행궁에서 왕야의 눈을 가렸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귀비가 눈을 가려준 덕분에 잠이 잘 왔었지. 그러니 귀비도 얼른 눈을 감아라. 얼마 못 잤으니, 눈을 감으면 잠이 올 것이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달리 부드럽고 조용했다. 진혁위에게 손을 치워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류희겸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확실히 눈을 감으니 졸리는 것 같았다.
“다음에는…….”
“응?”
“다음에는 왕야를 깨우겠습니다.”
류희겸이 알기로 진혁위는 제법 잠귀가 밝았다. 잠들어 있는 남자 몰래 침상을 빠져나갔다가는 난리가 날 것 같으니, 다음에는 깨워버리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래. 그게 낫겠다.”
농담이라고 생각하는지 진혁위의 대답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못 할 줄 알고? 반드시 깨워야겠어. 가물거리는 와중에도 류희겸은 단단히 다짐했다.
그렇게 다시금 잠에 빠져든 류희겸이 고른 숨을 내쉰 지 한참 후에야 진혁위가 손을 거두었다.
“방심을 할 수가 없군.”
가볍게 투덜거린 진혁위는 한참 동안이나 잠든 류희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류희겸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환한 낮이었다.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아침에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왕야께서 양능전으로 돌아가셨다는 심양설의 설명에 류희겸은 내심 안도했다. 허리가 제법 아팠지만 자리에 눕는 대신에 의욕적으로 움직였다.
연무장에서 한참 동안 목봉을 휘두르며 뭉친 근육을 풀었다. 땀을 잔뜩 흘린 다음에 경화당으로 돌아오니 우소진이 와 있었다.
“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연무장에서 돌아오신 것이옵니까?”
싱글벙글 웃으며 예를 올리는 우소진의 얼굴에서 류희겸은 불길함을 느꼈다. 그의 미소가 왠지 이틀 전의 그것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 공공이 무슨 일인가?”
“왕야께오서 설석주(雪夕酒)를 보내셨나이다.”
“설석주?”
“벌꿀술이옵니다. 설석주는 향과 맛이 좋기로 유명하온데, 태경에서 설석주를 만드는 장인이 한 명뿐이라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왕야께서 귀비 마마께 맛을 보여주신다 하여 작년부터 여기저기 선을 대었는데, 마침 오늘 왕부에 도착했지 뭡니까. 왕야께서 얼른 귀비 마마께 가져가라 하셔서 이리 왔습니다.”
류희겸은 우소진의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술에 취하면 난동을 부릴지도 모른다고 말을 했는데도 술을 보낸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또한 오늘 석반을 함께 들자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오늘?”
“예.”
이건 영락없이 이틀 전과 같은 수순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류희겸은 혹시나 싶었지만 진혁위가 양심이 있으면 교합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 생에 처음으로 진혁위와 교합을 하고 난 다음날에도 그냥 같이 잠만 잤었다. 그 이후로도 식사를 같이 하고 잠만 같이 잔 적이 몇 번 있었다.
“알았네. 왕야께 기다리겠다고 전하시게.”
류희겸은 별 의심 없이 진혁위를 환영하겠노라 전했다. 그리고 해가 지고 나서야 자신의 추측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 ◇
“귀비는 손이 예쁘다.”
뜬금없는 칭찬이었다. 류희겸은 자신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는 남자를 보았다. 활짝 웃는 진혁위에게서는 진심만이 느껴졌다.
이른 아침, 류희겸은 제원백작부(濟原伯爵府)에서 여는 격구회에 참석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껏 영왕부에서 칩거하다시피 했던 류희겸은 진혁위와 함께 대외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은 오랫동안 미루어두고 있었던 제현공의 손자들과 비무를 했고 다음은 희일준을 만났다. 그리고 오늘은 격구회였다.
제현공의 손자들과 비무를 하고, 희일준을 만난 것이 사적인 만남이었다면, 사람들이 모이는 격구장을 찾는 것은 공식적인 외출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양설은 짙은 검은색 비단에 검붉은색 당초문의가 수 놓인 무복을 준비했다. 거기에 금과 옥으로 장식한 요대에 옥패와 향낭을 달았다. 태자부의 비무회에 갔을 때보다 더욱 화려한 차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옆에서 구경하던 진혁위가 마지막에 반지를 끼워주면서 해괴한 말을 했다. 손이 이쁘단다.
얼마 전에 눈이 예쁘다고 했을 때만큼이나 류희겸은 기가 막혔다. 진혁위의 미의식에 대한 진지한 의문이 생기려고도 했다. 오랫동안 검과 창을 잡은 자신의 손은 섬섬옥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모양은 괜찮지만 굳은살과 흉터가 꽤 있었다.
“왜? 본왕이 농담을 하는 것 같아?”
“소인의 손이 예쁘지는 않습니다.”
“내 눈에는 예쁜데. 모양도 좋고, 적당히 부드럽고, 제법 희고, 손등에 도드라진 핏줄도 멋지다.”
낯간지러운 칭찬에 류희겸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남자의 미의식에 대한 의문은 물론이고, 조금의 어색함도 느끼지 못하는 듯 예쁘다고 말하는 능력이 신기했다.
칭찬을 들었으니 화답을 해야 하는데 썩 괜찮은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 어색했다.
그런 류희겸의 망설임을 고스란히 들여다본 진혁위는 웃었다. 이런 찬탄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인지 예쁘다고 하면 어이없어하는 눈빛이 고스란히 읽혔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당황한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놀리고 싶어졌다.
“이럴 때는 입 다물고 있는 거 아니다.”
“소인의 손을 예쁘다고 해주시니, 황공하옵니다.”
“황공할 게 아니라, 기쁘다고 해야지.”
“쑥스럽습니다.”
“하하. 그럼 됐다. 매일같이 훈련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여기서 더 나빠지는 것은 별로인데. 양설. 어찌 방법이 없겠느냐?”
류희겸의 손을 잡고 있던 진혁위의 물음에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심양설이 대답했다.
“장미수로 매일 손을 씻고, 향유를 바르면 부드러워지실 겁니다.”
“그래. 그게 좋겠군. 귀비는 훈련을 하는 만큼 더욱 신경 써라.”
“예. 귀비 마마께 더욱 신경 쓰겠습니다.”
심양설의 똑 부러진 대답에 만족한 진혁위는 복잡한 얼굴을 한 류희겸을 보며 활짝 웃었다. 어지간해서는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사내는 예쁘다는 칭찬에 약한 편이었다. 정확히는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어색해 했다.
류희겸은 무심한 사내였다. 스스로를 치장하고 꾸미는 데 인색했고 다른 친왕의 후궁들처럼 부군에게 총애를 받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금은보화를 떠안겨도 예의를 차려 인사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그에게 귀비라는 사실을 각인시키고 귀비답게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꽤나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제 몸뚱아리를 험하게 다루지 않게 하는 것은 중요했다.
“귀비는 손이 예쁘니 잘 가꾸어라.”
“예.”
류희겸은 떨떠름해 하면서도 곧잘 답했다. 눈치가 없는 남자는 정확한 명령은 충실하게 따랐다.
진혁위는 예쁜 손에 준비한 반지를 하나 더 끼워주었다. 고귀함이 느껴지는 화려한 치장은 진혁위의 취향이었다. 무엇보다, 하나뿐인 귀비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영왕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기도 했다.
“귀비가 이리도 어여쁘니, 누가 훔쳐 갈까 걱정이다.”
진혁위의 눈에는 류희겸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미인이었고, 미인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류희겸의 눈빛이 흐려지는 것을 무시해 버렸다.
예로부터 진실은 핍박받는 법이었다.
*
푸른 하늘 아래 준마들이 달렸다.
격구가 열리는 격구장인 조원정 안은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댔다. 격구장 한 면에 준비된 관람석에 앉은 진혁위는 눈으로 조용히 류희겸을 좇았다.
류희겸은 승마에 아주 능숙했다. 몇 번이고 실전을 경험한 그의 몸놀림은 무가나 귀족가의 공자들이 보이는 것과 질이 달랐다. 마상에서 격구채를 휘두르는 것이 마치 땅 위에 서서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네 발이 모두 하얀 준마를 타고 격구채가 마치 거창이라도 되는 듯이 이리저리 휘두르며 내달리는 류희겸의 옆에는 아무도 다가가지 못했다.
말을 타고 격구채를 휘두르는 위용은 연무장에서 목봉을 들고 연습하는 모습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장에서 거창을 들고 적의 목을 베어버리는 그가 얼마나 무시무시할지 상상하는 게 무서워질 정도였다.
오늘의 격구회는 제원백작부의 대부인이 연 것이었다. 격구는 오랫동안 인기 있는 놀이였고 태경에는 두 손으로도 셀 수 없는 격구대가 존재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황실 격구대부터, 친한 친구들과 가족들끼리 모여 만든 격구대도 있었다.
격구는 격구채를 이용하여 나무로 만든 채구를 경기장 양끝에 위치한 구문에 넣는 단순한 규칙이 전부였다. 하지만 삼 인 이상이 참여하게 되면, 진법을 이용한 일종의 모의 전투 형식을 띠게 된다.
기본 방어진과 공격진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것이라 류희겸은 어렵지 않게 희일준의 친인들과 함께하는 격구대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경기장 오른쪽 끝에서 거침없이 내달리던 류희겸은 자신 쪽으로 굴러온 채구를 강하게 쳤다. 채구는 화살이라도 된 듯이 날아가 상대편의 구문 안으로 들어갔다.
북 치는 소리와 환호성, 그리고 득점이오! 라는 외침이 한데 뒤섞이는 와중에 진혁위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진짜 어이가 없었다. 저러고도 그냥 말을 타고 채를 휘두를 줄 안다고만 했던 류희겸이 가증스러울 지경이었다.
“영왕 전하의 귀비께서는 정교영(鄭橋永)의 환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진혁위의 옆에 앉은 희범영이 감탄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교영은 채나라의 장수로 날개 달린 말을 타고 폭포를 올랐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만큼 승마술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는데, 류희겸을 그의 환생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상찬이었다.
류희겸과 진혁위를 초대한 것은 희일준이었기 때문에 영왕부는 희가의 자리에 같이 앉게 되었다. 류희겸과 희일준이 경기를 뛰고 있는 상황에서 희범영의 대화 상대는 진혁위였다.
“귀비가 들으면 좋아하겠군요.”
“격구대 대주들이 영왕 전하와 귀비께 귀한 선물을 들고 직접 찾아뵙고자 할 것 같습니다. 귀비 마마와 영왕 전하만 모신다면, 승은 따놓은 당상일 테니 말입니다.”
“하하하. 그럴까요?”
“두 분께서 짝을 이루어 격구를 하시면 맞설 상대가 없을 겁니다.”
평소 과묵한 희범영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무뚝뚝한 아부가 아무렇게나 튀어나왔다. 희범영은 태경의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젊었을 적에 격구에 빠져 살았다. 그래서 류희겸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만월제전에 참석하지 않았던 희범영은 류희겸에 대한 것을 소문으로만 들었다. 태자부 시위들과의 비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무환행궁에서 역도들을 상대하는 류희겸의 일격이 얼마나 매서운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희범영에게 류희겸은 은인이었다. 말에 깔린 희일준을 살려 돌려보낸 것은 목숨 빚이었다. 류희겸이 희일준의 팔목에 숨긴 비도를 찾아낸 것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무환행궁에서 역도들을 상대한다고 비도라도 꺼내 들었다면,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될 소지가 충분했다. 희범영은 황제의 신임을 받는 성공한 장군이었고 적이 꽤 있었기 때문이었다.
류희겸의 됨됨이는 그때 알아보았다. 비도를 숨긴 것을 알고도 이용하지 않은 것은 그저 가벼운 호의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류희겸의 빼어난 실력이 희범영의 관심을 끌었다. 그 역시 뛰어난 무인을 아끼는 대연국의 사람이었다.
진혁위는 그런 희범영의 생각을 손에 잡힐 듯이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진혁위는 거기에 온전히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다.
말 위에서 몸을 기울여 속닥거리고 있는 류희겸과 희일준이 너무 사이가 좋아 보였다. 정황상 전술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는 것뿐일 텐데도 괜히 신경이 쓰였다.
이전 생에서도 두 사람은 제법 가깝게 지냈다. 희일준은 형을 따르는 듯이 굴었고, 류희겸 역시 동생을 돌보듯 했다. 그때는 둘의 사이가 친밀해 보여도 별생각이 없었다. 정확히는 류희겸에게 몰두해서 그의 주위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희일준만이 아니라, 류희겸이 다정하게 구는 모든 것들에 질투가 나려고 했다.
경기장 안의 사람들 대부분이 류희겸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양설이 심혈을 기울여 꾸민 류희겸은 영왕의 귀비라기보다는 귀족가의 공자처럼 보였다. 누구는 그저 그의 실력에 감탄한 것뿐이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충분히 반하고도 남을 모습이었다.
질투의 감정은 불에 타오르는 얼음처럼 차갑고도 뜨거웠다.
분위기를 전환할 겸 류희겸을 데리고 나온 것을 후회하던 진혁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이 이렇게 속 좁은 인간인 줄 몰랐다.
“주인님. 도착하셨습니다.”
조용한 시종의 부름에 진혁위는 희범영에게 양해를 구하고 격구장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는 진윤홍이 막 들어서고 있었다.
이번 생에 진혁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세력을 형성했다. 상대의 약점을 잡아 이용하는 것은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었다. 혹은 태자와 황후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가장 어려운 것은 상대의 호의를 사 느슨한 관계를 형성하는 경우였다. 총관태감의 여식이 불우한 결혼 생활을 끝마치도록 도와주어 호의를 산 것처럼, 상대가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아주 사소한 동기였다. 확실한 내 편은 아니지만 그들이 베푸는 호의는 생각보다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진윤홍과 희범영을 우연처럼 만나게 하는 것은 세심하게 진행해야 하지만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다. 류희겸에게 호의를 보이는 두 사람에게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것이 오늘의 목표였다.
“고모님. 오셨습니까?”
“오는 길에 마차에 문제가 생겨 늦었다. 내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니지?”
“마침 딱 시간에 맞췄습니다. 지금 가시면 귀비의 활약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진혁위가 막 말을 끝내자마자 북소리와 환호가 울렸다. 누군가가 득점을 했다는 신호에 진윤홍이 인상을 썼다.
“이런 곳을 찾은 지가 오래되었더니, 큰 소리가 시끄럽구나.”
“귀비의 활약을 보시면 좋아지실 겁니다. 가시지요.”
활짝 미소를 지은 진혁위는 진윤홍을 격구회를 연 대부인의 자리로 안내했다. 희범영의 자리는 대부인이 앉은 상석의 바로 옆옆이라서 그 앞을 지나가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진윤홍이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기에 진혁위는 일부러 알렸다.
“저는 이쪽 자리에 있을 겁니다. 희범영 장군이 동석을 권해서요.”
“……그래.”
“귀비가 경기를 끝내고 돌아오면 같이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진혁위는 진윤홍의 동요를 모르는 척하며 대부인의 좌석으로 향했다.
대부인과 진윤홍은 소녀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고 오래도록 교류를 이어오고 있었다. 진윤홍이 류희겸을 보기 위해 사람이 많은 격구회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던 것도 대부인의 덕이 컸다.
대부인에게서 류희겸에 대한 찬사를 잔뜩 들은 진혁위는 오래 지나지 않아 자신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장공주님이 오셨군요.”
예의 바르게 진윤홍을 언급하는 희범영에게서는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진혁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웃었다.
“귀비가 격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하여서요.”
“두 분이서 친분이 있으십니까?”
“이전에 귀비가 아팠을 때 병문안을 오신 적이 있는데, 그때 마음이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글쎄 귀비도 고모님도 모두 울금훤을 즐겨 마신다고 하더군요.”
“울금훤이라니. 사이가 좋아질 수밖에 없군요.”
“장군도 그리 생각하지요? 떫은 차를 즐겨 마시는 것을 이해할 수는 없으나, 그래서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무뚝뚝한 희범영이 그답지 않게 가벼운 농을 하는 바람에 진혁위 역시 웃으며 대꾸했다. 그 때 다시 류희겸이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보이며 점수를 냈다.
“마침 귀비가 활약을 해주는군요.”
진혁위는 자랑스럽게 류희겸을 칭찬하며 진윤홍이 앉아 있는 쪽을 보았다. 그녀 역시 류희겸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자신이 원한 광경에 진혁위는 대단히 만족스러워졌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 희범영과 진윤홍의 사이를 의심할 만한 소문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진윤홍의 동복형제인 황제나 황제를 오랫동안 지척에서 수행한 총관태감이라면 혹 알 수도 있었지만, 그들에게서 직접 확인하기에는 의도가 너무 수상해 보여서 포기해야 했다.
진윤홍과 희범영은 철저히 서로를 외면한 채 살아왔다. 공주부에서 두문불출하는 진윤홍은 말할 것도 없고, 희범영 역시 사교 활동이 적은 편이었다.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신년회가 열리는 자리가 전부였다.
이십 년도 전의 연정이 아직 남아 있는지 진혁위는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존재했다. 특히 희범영처럼 우직한 성격의 사내라면 더욱 그랬다.
진윤홍은 황족의 여인이기에 재혼을 하지 못했지만, 희범영은 쉰에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독신으로 지내고 있는 것을 보면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대외적으로 희범영이 혼인을 하지 않은 이유는 형님의 아들인 희일준을 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진실은 당사자만이 아는 법이었다.
희범영은 오랜 기간 화봉사에 꽃을 바치며 주희겸의 명복을 빌었다. 물론 죽은 아이를 기리는 마음이겠지만, 과연 장공주에 대한 미련과 연정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진혁위는 자신이 월하노인(月下老人)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용할 건 다 이용하는 욕심 많은 인간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니기를 바랐다.
경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류희겸의 눈부신 활약에 희일준이 속한 격구대가 승을 챙겼다.
*
류희겸은 제법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다. 말을 몰며 채를 휘두르면서도 진혁위가 진윤홍과 함께 관람석에 오르는 것을 알아보았다. 진윤홍이 격구회에 참석할 거라고 듣지 못했기에 진혁위의 꿍꿍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굳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슨 일인지 의아해 하는 기운을 내색하지 않았다.
크게 이기고 제자리에 돌아와 진혁위가 진윤홍에게 인사를 하러 가자고 할 때도 별말 없이 따랐다. 격구를 좋아하는 백작가의 대부인이 열렬하게 반기는 것도 예의 바르게 받아냈다.
대부인의 반응은 유별났다. 가까운 시일 내에 격구회를 또 열 테니 멋진 기량을 한 번 더 보여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다. 결정권이 없는 류희겸을 대신해 진혁위가 초대장을 보내주면 참석하겠다고 답할 때도 조용히 동의했다.
제자리로 돌아오고 나서 진혁위가 대화를 주도할 때도 류희겸은 크게 나서지 않았다. 진혁위도 희일준도 입담이 좋았기 때문에 격구회 내내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류희겸이 입을 연 것은, 격구회가 끝나고 마차를 타고 제원백작부로 이동할 때였다.
“왕야께서 장공주님을 부르신 겁니까?”
“맞아. 고모님께서 귀비의 활약을 보면 좋아하실 것 같아서 초대했지. 솔직히 그렇게 잘할 줄 몰랐어.”
“미리 말씀해 주셨어야지요.”
“귀비가 긴장하여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까 봐 그랬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류희겸은 진혁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희범영과 진윤홍을 만나게 하려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말을 돌리는 것을 보면 자신에게 말을 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 빤히 바라보자 진혁위가 싱긋 웃었다.
“아까는 그냥 넘어갔다만, 솔직하게 말해 봐라. 공이 화살처럼 날아가는 건 어떻게 하는 거야? 연습만 하면 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 정말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고?”
진혁위는 류희겸의 눈빛의 의미를 모르는 척하고 화제를 돌렸다. 진윤홍을 이용할 것이라고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딱히 방법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래?”
“그리하겠다 마음먹으면 그렇게 됩니다.”
전형적인 천재의 발언에 진혁위는 아주 조금 재수 없다고 여겼다. 희범영도, 희일준도, 그리고 진윤홍과 대부인도 어떻게 그렇게 공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냐고 물었다. 류희겸은 꾸준히 연습했다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실상은 특별한 기술 없이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단다.
사실 진혁위도 뛰어난 재주가 여럿 있었고, 특히 활은 독보적이었다. 다른 사람이 활을 어떻게 잘 쏘냐고 물으면 꾸준한 연습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긴 했다.
격구 역시 제법 자랑할 정도의 재주가 있었지만 류희겸과 비교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류희겸에게 자신도 격구 좀 한다고 어깨를 으쓱였던 것이 민망해지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류희겸에게만큼은 잘나 보이고 싶었다. 유치하기까지 한 마음이었지만, 그보다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사양이었다.
“활로 표적을 맞춘다는 귀비의 실력도 다시 확인해 봐야겠다. 채를 휘두를 줄 안다는 귀비의 실력이 이렇게 대단하니, 활도 잘 쏠 거라 기대된다.”
진혁위는 류희겸이 활을 쏘는 것은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승마 실력도 전투 실력도 발군이라는 것은 안다. 그래도 활만큼은 자신이 더 잘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생을 한 번 더 살게 되면서 호승심이나 위기감 같은 것은 없어졌다 생각했는데, 류희겸이 상대라서 이기고 싶어졌다.
“소인이나 목표 중에 하나는 움직이지 않아야 그럭저럭 맞출 수 있습니다.”
진혁위의 마음을 알 길 없는 류희겸은 무난하게 대답했다. 활은 무장의 기본 소양이었다. 하지만 말을 탄 상태로 움직이는 표적을 맞추기는 어려웠다.
“기마궁술은 어렵지.”
“왕야께서는 어떠십니까?”
“내가 사냥을 좀 한다.”
“왕야와 활로 내기를 하면 안 되겠군요.”
“우선은 표적도 귀비도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해보자.”
그렇게 한담을 나누는 사이에 백작부에 도착했다. 천천히 마차에서 내린 류희겸은 진혁위와 함께 연회장에 들어섰다.
제원백의 대부인이 여는 격구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기가 많았다. 어마어마한 지참금을 들고 시집온데다 사업 수완도 좋아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대부인은 격구회를 여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격구회를 마친 후, 백작부에서 여는 연회는 화려하기로 유명했다.
붉은 비단꽃으로 꾸며진 연회장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류희겸을 향한 호기심 어린 시선이 격구장에서보다 좀 더 확연했다. 그래도 황제 앞에서의 숨 막히는 긴장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류희겸은 화려한 옷차림이었지만, 수려한 외모가 그에 묻히지 않았다. 미남이라고 소문 난 진혁위와도 짝을 맞추어 잘 어울렸다. 특히 정직하고 곧은 눈매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연회장에 자리한 이들은 대부분 높은 가문 출신으로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다. 치열한 전장에서 일군을 이끈 류희겸에게는 평범한 서생이 가질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격구장에서 말을 타고 격구채를 휘두를 때의 기백도 대단했지만, 냉정하고 차분한 분위기는 쉬이 가질 수 없는 힘이었다.
류희겸은 사람들의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얕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화진국에서 장군으로 지낼 때도, 직전 생에 희가의 비호를 받던 객인일 때도 당당해야 했었다. 그리고 영왕의 귀비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연회장 깊숙이 들어선 류희겸은 안쪽에 서 있는 인영을 발견하고는 잠시 멈칫했다. 화려한 금실로 수를 놓은 붉은 예복을 즐겨 입는 남자는 기왕이었다.
작년 수렵제에 늦게 도착한 것이 빌미가 되어 기왕은 서북 지역의 군권을 반납하고 태경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연금 형식으로 왕부에서 조용히 지내던 기왕은 올해 봄에 황궁 출입이 허락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태자부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 태자와 달리 기왕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인맥 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그를 닮아 과격한 성향의 귀족들을 포섭했다.
기왕은 성급하고 폭력적인 성향이었지만, 그래도 태자에 비하면 제법 처세에 능했다. 그런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연회를 찾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류희겸이 기억하기로 제원백은 정치적으로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황제의 줄을 잡은 황제파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백작부의 연회는 파당을 만들지 않은 사람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장소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제원백이 기왕을 초대하고, 또 기왕이 굳이 백작부의 연회에 참석한 것은 제원백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일 것이다.
직전 생과 마찬가지로 현재 기왕과 태자 사이의 세력 싸움은 지난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좌승상의 몰락으로 지낭을 잃은 태자가 변화하는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기에 기왕이 일방적으로 몰리는 일이 없었다. 서로 팽팽히 힘의 균형을 이루는 와중에 기왕이 제원백을 포섭한 것은 꽤나 큰 변수였다.
무엇보다 제원백작부와 희가는 서로 인척 사이였다. 어쩌면 오늘 기왕이 일부러 연회에 참석한 것은 희범영을 노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설마 희범영이 목적일까? 류희겸은 오늘 연회에 참석한 거물들을 떠올리며 옆에 선 진혁위를 힐끗 보았다. 진혁위는 자신을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는 기왕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느낌이었다.
“내가 불렀다.”
“……?”
“허니 걱정하지 마라. 형님은 내가 상대하마.”
고개를 슬쩍 숙여 속삭이는 말은 류희겸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진혁위가 기왕을 불렀다고? 무슨 일로? 하지만 진혁위는 다른 설명을 하는 대신에 그저 웃으며 기왕을 바라볼 뿐이었다.
류희겸은 본능적으로 오늘 연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임을 예감했다. 그리고 진혁위가 그것을 자신에게 숨겼다는 것도 알아챘다.
왜? 내가 알아서는 안 되는 걸까? 온갖 의문이 떠올랐지만 거침없이 태자에게 다가가는 진혁위에게 물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형님을 뵙습니다.”
“오. 7제구나. 이런 연회에 네가 빠질 일이 없지.”
진혁위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그제야 기왕이 아는 체를 했다. 기왕은 호탕하게 웃음을 지으며 진혁위를 반기는 척했다. 하지만 그의 눈이 웃지 않는다는 것을 류희겸은 알아차렸다.
“소제는 놀기 좋아하니까요. 헌데 형님께서는 어쩐 일이십니까?”
“제원백의 초대를 받았다.”
“그렇습니까? 오랜만에 형님과 술을 마시게 되어 좋습니다.”
“이것으로 퉁 칠 생각은 말아라. 진짜 제대로 마셔봐야지.”
“제대로 마셨다가는 소제가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두 사람은 사이좋은 형제처럼 보였다. 늘 진혁위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것처럼 구는 태자와 달리 기왕은 그래도 겉으로나마 형제들에게 대형의 풍모를 보이며 다정한 척 연기했다.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르던 류희겸은 이전 생의 기억을 맹렬히 되짚어 보았다. 제원백작부의 연회가 유명했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사실이 떠오르지 않았다.
류희겸은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하는 대신에 몸을 긴장시켰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동시에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은 진혁위를 향한 섭섭함을 억눌렀다.
*
미친놈. 류희겸은 상석에 앉은 기왕을 보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왜? 무서우냐?”
기왕이 진혁위를 향해 도발했다 그러자 연회장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진혁위를 향했다.
화려하다고 소문난 백작부의 연회는 기왕과 영왕, 그리고 장공주까지 참석하면서 그 격이 더욱 높아졌다. 술도 음식도 모두 훌륭했다.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간간이 가희가 노래를 하는 것으로 흥이 돋았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당연히 연회를 연 백작부의 대부인이었다. 그녀는 매끄러운 말솜씨로 흥겨운 주제의 대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했다.
그다음은 진혁위였다. 그는 팔불출 남편이라도 된 것처럼 류희겸의 격구 솜씨를 기왕에게 자랑했다. 격구장에서 류희겸의 신묘한 기술을 두 눈으로 목격했던 사람들이 저마다 말을 얹자 기왕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격구 실력이 뛰어난 진혁위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며 덕담도 했다.
화기애애하게 술이 오가는 순간에 기왕이 진혁위에게 교묘한 제안을 했다. 이전에 마무리하지 못한 승부를 이곳에서 가르자고 말이다. 진혁위가 발을 빼지 못하도록 무섭냐고 도발까지 했다.
교묘하고 악질적인 함정에 류희겸은 욕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류희겸이 직접 본 일은 없지만, 직전 생에 희일준에게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진혁위와 기왕은 무모한 내기를 한다고 했다.
황자들이 무예를 겨룰 때는 서로 몸이 상하지 않도록 활쏘기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기왕은 서로의 호위들끼리 서로 활을 쏘고 피하게 하는 위험한 내기를 강요했다는 것이었다.
서로 맞출 때까지 활을 쏘는 것이 아니라 화살 열 발로 가름하지 못하면 승패를 다음으로 미루었다. 호위들의 실력이 비등하여 몇 번이고 내기는 계속되었다.
호위의 실력은 황자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못 하겠다고 하면 겁쟁이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흥겨운 연회에서 보이기에는 살벌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신 대부인께 실례이기도 하고요. 다른 날을 잡아보지요.”
“재미있는 볼거리를 누가 싫어하겠느냐? 대부인도 좋아하실걸? 이런 볼거리는 흔치 않은데 마다할 리 없지. 안 그렇습니까? 부인.”
진혁위가 부드럽게 다음을 기약했지만 기왕은 끈질겼다. 대부인이 난처한 웃음을 짓든 말든 기왕은 제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기왕의 강한 어조에 연회를 즐기던 사람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고수들이 서로 활을 쏘아대는 내기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니지. 매번 하는 대로라면 식상하지. 이번에는 네 측비가 어떠냐? 지난 수렵제에서 활약을 했다는 실력을 보고 싶은데. 화진의 장군 출신이니, 검만큼이나 활도 잘 다룰 게 분명하니까 제법 재미있을 것 같구나.”
비릿한 미소를 지은 기왕이 턱끝으로 류희겸을 가리켰다. 뜻하지 않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지만, 류희겸은 동요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본부인이 아닌 첩이 사람들 앞에서 재주를 뽐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여인이라면 금이나 비파 등의 악기를 연주하며 하얗고 고운 손과 뛰어난 연주 실력을 자랑했다. 사내 첩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 앞에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혹은 검무를 추곤 했다.
물론 상대에게 활을 쏘고 피해야 하는 위험한 내기에 형제의 측비를 지목한 기왕의 언행은 분명 무례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진혁위가 허락한다면 류희겸이 나서야 했다.
설마 이것도 계획된 것일까? 진혁위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류희겸은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무표정한 얼굴로 옆자리에 앉은 진혁위를 보았다.
진혁위는 기왕을 쳐다보며, 눈꼬리까지 접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늘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미소였지만 류희겸은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아무래도 이건 계획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소제의 귀비가 제법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평소대로 하면 재미가 없지요. 음, 소제가 더 재미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냐?”
“형님과 제가 과녁이 되는 것입니다.”
“뭐?!”
기왕의 큰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류희겸 역시 눈을 크게 뜨고는 진혁위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혁위는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형님과 소제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두고는, 형님의 호위와 소제의 귀비가 각각 활을 쏘게 하는 겁니다. 맞출 때마다 다섯 걸음씩 뒤로 물러나는 거지요. 연회장 끝까지 물러나게 되면 사과보다 작은 과일을 머리에 올려두고요. 오싹하지 않습니까? 주군과 부군을 쏴야 하는 두 사람의 손이 바들바들 떨릴 테니 말입니다. 무서워서 못 하겠다고 하면 지는 겁니다.”
진혁위의 명랑한 목소리가 연회장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기왕의 무모한 제안을 진혁위가 웃으며 맞받아쳤다. 호위와 귀비의 활 실력을 기왕과 진혁위가 감당해야 하는 내기가 되어버렸다.
류희겸은 무모하게 판을 키워버리는 진혁위의 배짱에 기가 막혔다. 화살이 머리에 박힐 수도 있는데 무섭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잘못하면 크게 다치십니다.”
“두 분의 용맹함을 이 자리에서 볼 수 있다면, 커다란 영광이겠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위험하다 말렸지만 또 다른 이는 아부를 하며 부추겼다. 두 황자의 대립은 기왕의 말대로 재미있는 볼거리였다.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기왕은 인상을 썼다. 진혁위의 요사스러운 말솜씨 때문에 이번에는 자신이 겁쟁이가 될 상황이었다.
오만한 성격의 기왕은 지는 것을 싫어했다. 자신의 능력과 재주가 형제들 중에 특출하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실력이 비등한 진혁위를 굴복시키려고 집요하게 굴었다.
기왕은 자신에게 고분거리면서도 거리를 두는 진혁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제 휘하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하면서도 종종 독을 보냈다. 태자와 사이가 나쁜 진혁위를 이용할 생각도 있었지만, 제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는 놈이라면 처리하는 게 맞았다.
이번에 굳이 류희겸을 물고 늘어진 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네가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류희겸을 공격하겠다는 뜻이었다. 제멋대로인 진혁위가 귀비를 유별나게 총애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어떤 식으로든 발끈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진혁위는 오히려 판을 키워버렸다.
기왕은 자신의 뒤쪽에 서 있는 호위의 실력을 믿었다. 하지만 한 번의 실수에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내기는 위험했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자존심과 만약의 위험으로 갈등하게 되었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기왕은 진혁위를 노려보았다.
진혁위에게 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무엇보다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하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좋다. 그리 한번 해보자.”
“좋습니다.
“기왕. 그리고 영왕.”
두 사람이 합의를 보는 순간에 끼어든 이가 있었다. 바로 진윤홍이었다. 연회장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이는 기왕과 영왕이었지만, 진윤홍은 두 사람의 고모였다. 그녀가 고요한 목소리로 두 사람을 부르자 자연스럽게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순간 가라앉았다.
“형제의 다툼이 보기 좋지 않습니다.”
“고모님. 이건 다툼이 아닙니다. 평소 자주 하던 내기라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고모님께서 걱정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형님. 이번 건은 다음을 기약해야겠습니다.”
“무서워서 못 하겠다고 하면 지는 거라며? 말을 꺼냈으면 책임을 져야지.”
진혁위가 한 발 물러났지만 기왕은 더욱 사납게 달려들었다. 황실의 어른인 장공주를 존중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책임은 지겠습니다.”
“다음으로 미룰 생각 따위는 하지 말고, 당장 이 자리에서―”
기왕은 지금 이 자리에서 결판을 보자고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아아악!”
조용하던 연회장에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기왕과 영왕의 대립을 숨죽여 지켜보던 사람들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정적 속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그곳에는 화려한 붉은색 무복을 입은 청년이 비틀거리며 물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백작부의 시종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피 묻은 부엌칼을 들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무슨 일인지 알아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죽어라!”
“으아악!”
“뭐야?!”
남자 시종이 어설프게 부엌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얼어붙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 도망치기 시작했다. 흥겹던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
연회장에는 기왕을 따라온 호위가 있었다. 그들은 혼란 속에서도 칼을 휘두르던 시종을 금방 제압했다. 칼에 등을 찔린 청년도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사라졌다.
엉망이 된 연회로 가장 난감해진 사람은 백작부의 대부인이었다. 상황은 금방 끝났지만 흩뿌려진 피 때문에 연회를 계속 이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손님들에게 사과를 하며 연회를 끝냈다.
진혁위와 류희겸은 대부인과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그리고 진윤홍과 희범영, 희일준에게도 각각 인사를 한 후 마차에 올랐다.
백작부에서 영왕부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마차가 굴러가는 동안 류희겸은 생각에 빠졌다.
직전 생에 백작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 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연회장에 출입할 수 있는 시종이 부엌칼을 숨겨 들고 와서 귀족 자제를 찌른 일은 아주 드문 일인데도 말이다.
아무리 생을 다시 살고 있다 하더라도 모든 사건 사고를 다 기억하고 있기란 어려웠다. 특히 직접 보거나 듣지 못한 것은 처음 겪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격구 실력이 좋은 희일준은 여러 격구회에서 초대를 받지만 이맘때까지는 팔의 상처가 계속 덧나서 바깥 활동을 조심하고 있었다. 희일준과 함께 활동했던 류희겸 역시 희가에서만 대기했다.
뭔가 소문이 돌았던 것 같지만 류희겸이 아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류희겸은 옆자리에 앉은 진혁위를 힐끗 보았다. 그가 일부러 기왕을 연회에 부른 것은 아마 칼부림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혁위가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해라.”
조용히 있던 진혁위가 먼저 입을 여는 바람에 류희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무엇을?”
“시종이 칼에 찔릴 것을 말입니다.”
“귀비는 몰랐던 모양이지?”
“몰랐습니다.”
진혁위는 확답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몰랐냐는 반문으로 시종이 칼을 휘두를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음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기왕 전하를 연회에 부른 연유와 관련이 있습니까?”
“있다.”
이번에는 진혁위가 단번에 긍정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진혁위는 칼부림 사건의 전말도, 그리고 기왕을 연회에 부른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제게 말씀하지 않으신 이유가 있는 겁니까?”
진혁위가 알려주지 않는다면 류희겸으로서는 무슨 일이냐고 캐물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신이 알면 안 되는 이유만큼은 알고 싶었다.
“미리 말해 주지 않아서 섭섭한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섭섭한 게 맞았다. 그래도 류희겸은 티를 내지 않았다.
“내가 귀비를 온전히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랬다. 허니 너무 마음 상하지 마라.”
웃음기를 머금은 부드러운 진혁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늘 없는 화사한 미소에도 역시나 미안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류희겸은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을 맛보았다. 진혁위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했으나, 그의 신뢰를 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지적받을 줄은 몰랐다.
얼마 전에 그간의 오해가 풀어지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진혁위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긴 한데, 당연한 것과 별개로 기분이 별로였다.
“마음이 상한 모양이다. 표정에서 다 드러난다.”
진혁위는 굳이 시비 아닌 시비를 걸었다.
류희겸은 제법 제 감정을 감추는 데 능숙했다. 표정 관리도 잘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그의 심정을 말해 주고 있었다. 대놓고 믿지 못하겠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서로의 운명이 한데 묶인 상태였기 때문에 류희겸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믿음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신중하게 굴어야 했다. 아직 대계를 이루기 위한 행보에서, 류희겸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송구합니다.”
“괜찮다. 황제 앞에서나 실수하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는 사실에 류희겸은 반성했다. 벌써 진혁위에게 지적받은 게 두 번째였다.
진혁위가 입을 다물자 마차 안은 조용해졌다. 딱딱한 침묵 속에 마차가 영왕부에 도착한 것은 한참 후였다.
마차에 내려 왕부의 수화문까지는 나란히 들어섰다. 두 사람은 경화당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잠시 멈춰 섰다.
“석반을 함께 먹겠다. 준비하고 있어라.”
“예.”
이제 거일 매일 같이 저녁을 함께 먹고 있었기 때문에 류희겸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런데 진혁위가 몸을 돌려 양능전으로 향하지 않고 류희겸을 향해 말했다.
“아직도 마음이 상했느냐?”
“아닙니다.”
“그럼 마음이 상했던 것은 맞다는 거군.”
허를 찌르는 질문에 류희겸은 이번에도 아니라고는 하지 못했다. 마음이 상한 것은 맞으니 거짓말을 하는 것도 우스웠다.
류희겸은 고개를 숙이는 대신에 진혁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남자를 보자니 속이 조금 뒤틀렸다. 그래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왕야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서 그랬습니다.”
“딱딱한 대답이로군. 그리 알면 되었다. 나중에 보자.”
“예.”
“대답은 잘하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걸음을 옮긴 진혁위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린 류희겸은 천천히 경화당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의미심장한 대화에 격구회까지 동행했던 심양설이 눈치를 보았지만 류희겸은 모르는 척했다. 대신 그녀에게 저녁 식사 준비를 제대로 하라 이르고는 내실의 창가에 섰다.
혼자가 된 류희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오늘 격구회에 참석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제현공의 손자들과 비무를 한 것을 시작으로, 이제부터 대외적인 활동을 한다는 의미가 강했다. 격구회에서 보자는 희일준의 요청 때문이기도 했고, 바깥 외출을 하고 싶은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다.
진혁위 역시 이번 외출에 목적이 있을 수 있었다. 백작부에서 벌어질 사건을 자신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은 이유는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이해는 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달리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 마음이 상하기에는 모순이 있었다. 그저 냉정한 사실을 마주한 것뿐이었다.
따지자면 자신 역시 진혁위를 완전히 믿지 못했다. 충성을 바치겠다고 했지만, 그것이 순수한 신의라고는 할 수 없었다.
“불신의 충성이라.”
창밖을 내다보며 류희겸은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진한재를 죽이기 위해 진혁위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를 위해 목숨을 내걸 수도 있지만 그건 진정한 충성심은 아니었다. 배신자의 신의는 충성이라고 불릴 수 없다고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충격을 받은 것은, 자신이 그만큼 진혁위에게 의지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자신에게는 가족도, 친구도, 주군도, 부하도 없었다. 직전 생에 함께 했던 이들은 이제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랬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진혁위에게, 마치 불빛에 홀린 반딧불이처럼 끌려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시 생을 반복하면 그의 기억이 남아 있기를 바랄 정도로.
인정을 하자 속이 시원해졌다. 동시에 자신의 처지에 쓴웃음이 나왔다.
청운의 꿈을 꾼 것이 아주 오래된 옛날 일인 것 같았다. 다시 살게 되며 복수를 하겠노라 천지신명에게 맹세를 했다. 죽음도 무섭지 않았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가다가 가끔은 이렇게 혼자라는 생각에 막막할 때가 한 번씩 있었다. 이번에는 죽음 이후의 안배를 해놓았음에도 그랬다.
역시나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였다.
류희겸은 자신의 상태를 진단해 보았다. 생을 반복하는 내내 불안함과 막막함, 초조함이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여섯 번의 생에서 몇 번은 이런 감정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빨리 죽었다. 직전 생에서는 불안한 와중에도 마음을 터놓을 부하들이 있었다. 이번 생에서 부하들을 화진국에 남겨둔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허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쓸쓸한 것인지도 모르겠군.”
혹은 외로운 것일지도.
자신의 상태를 냉정하게 판단하면서 혼잣말을 하던 류희겸은 곧 무언가를 깨달았다. 쓸쓸하고 외로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혼자는 아니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에 류희겸은 숨을 들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의자에 앉는 대신에 방을 나섰다.
“마마. 씻으실 물을 준비했습니다. 밖에 나가시려고요?”
물이 든 주전자와 대야를 든 시녀들을 데리고 막 안채로 들어서던 심양설이 류희겸과 마주쳤다. 류희겸은 그녀를 지나쳤다.
“왕야를 뵈러 갈 것이네.”
“기별을 넣을까요?”
“아니. 지금 찾아갈 거야.”
“중한 일입니까?”
“그래.”
“소인이 뒤따르겠습니다.”
간단하게 대답한 류희겸은 심양설이 따라오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당장 진혁위를 만나야 했다.
*
영왕부에는 진혁위와 이야기를 나누는 선객이 있었다.
“왕야께서는 지금 손님과 계십니다.”
편전 앞을 지키던 우소진이 안절부절못했다. 그건 류희겸을 뒤따르던 심양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부터 류희겸은 경화당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되었다. 영왕부의 연무장에서 단련을 했고, 아침저녁으로 왕부의 후원을 거닐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편전을 직접 찾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류희겸의 돌발 행동에 우소진도 심양설도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최근 들어 한창 사이가 좋은 두 사람이 밖에서 싸우고 돌아온 건가 싶었다.
“그럼 기다리도록 하지.”
그들의 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류희겸은 편전 앞에 섰다. 진혁위가 돌아가라고 할 때까지 버티고 있을 생각이었다.
기다림은 오래 가지 않았다. 편전을 나서던 채제승이 류희겸을 보고는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마.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주.”
“오늘 격구회에서 굉장하셨다면서요? 제가 차씨가의 셋째와 친분이 있는데, 그가 침을 튀며 마마를 칭송했습니다. 가히 신선의 경지라고 말입니다.”
“과찬입니다.”
짧은 대화만으로도 류희겸은 채제승이 정보에 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이리 빨리 아는 것은 능력이었고, 채제승은 그것을 류희겸에게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랑 같지만, 저도 격구 좀 합니다. 영왕 전하보다 아주 조금 더 잘하지요. 하여, 마마와 함께 격구를 할 영광을 누릴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엄지와 검지로 아주 조금의 차이를 표현한 채제승이 짓궂게 웃었다. 긴장하고 있던 류희겸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체제승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지만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랬기에 부드럽게 대꾸했다.
“영왕 전하께서 아주 조금의 차이에 동의하는지요?”
“물론이지요. 비록 마지막으로 겨루었을 때가 팔 년 전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마마. 왕야께서 들라 하셨습니다.”
류희겸과 채제승이 가벼운 농을 주고받고 있는데 우소진이 불쑥 끼어들었다. 류희겸은 고개를 조아리는 우소진을 보았다. 고의적인 방해였다. 우소진의 성격을 생각하면 진혁위의 명령일 게 뻔했다.
“영왕 전하께서 마마와 제가 길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채제승이 여전히 짓궂은 얼굴로 정중히 예를 올리며 물러났다. 그를 보낸 류희겸은 우소진을 따라 편전 안으로 들어섰다.
우소진이 안내한 곳은 편전 가장 안쪽에 위치한 내실이었다. 진혁위의 취향에 맞게 묵직하고 화려하게 꾸며진 내실은 류희겸이 처음 발걸음하는 곳이었다.
진혁위는 내실의 상석에 자리한 의자의 팔걸이에 기대어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류희겸은 무릎을 꿇고 정중히 예를 올렸다.
“왕야를 뵙습니다.”
“인사는 되었다. 일어나라. 사형이랑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나눈 것이냐?”
“채 대주가 언젠가 같이 격구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길지 않았던 대화를 한 줄로 답한 류희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혁위의 기분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흥. 사형과 어울릴 생각 마라. 전에도 말했지만 사형은 승부에 대한 집착이 좀 있어. 사형의 격구채에 얻어맞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자리에 앉아라.”
가볍게 코웃음을 친 진혁위가 자리를 권했다. 그사이 진혁위의 손짓에 우소진과 심양설이 조용히 내실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귀비가 무슨 일로 편전까지 찾아왔을까?”
진혁위는 류희겸이 자리에 앉자마자 핵심을 물었다. 류희겸이 영왕부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 편전까지 직접 걸음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조금 전에 시무룩했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빛이 생생했다. 분위기가 차분하지 않았더라면 결투를 신청하러 온 거라고 믿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왕야께서는 소인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랬지.”
“그래도 오늘 기왕을 백작부의 연회에 부른 이유를 알려주십시오.”
뻔뻔한 요구를 하면서도 류희겸은 진혁위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충성을 바쳐야 하는 주군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무례한 언행에 기가 막혔는지 진혁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소인은 기왕이 위험하다는 것 말고는 많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혹여 소인이 뜻하지 않는 실수를 할까 두렵습니다.”
“그것뿐이냐?”
“주제넘는 말씀이지만, 소인 역시 왕야를 믿고 싶습니다.”
류희겸은 진혁위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진혁위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 역시 진혁위를 믿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신의는 생을 반복한다는 비밀을 공유하며 그의 존재에 안도하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신뢰도 믿음도 말로 약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단단하게 쌓아가야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류희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하여, 정면으로 부딪혀 보기로 했다. 이건 일종의 도박이자 선택의 갈림길이었다. 진혁위가 이번에도 안 된다고 하면 다시는 시도하지 않고 얌전하게 굴 것이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시큰둥하게 굴던 진혁위는 흥겨운 기분을 애써 감추었다. 올곧은 류희겸의 눈빛만 보아도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류희겸과 같이 고지식한 성격의 인간은 이럴 때 마음을 접으면 돌이킬 수가 없었다.
류희겸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그가 고개를 숙이고 목숨을 바치겠노라 한 것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한재가 엮이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기왕의 일을 류희겸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그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모든 정보를 그와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여 일부러 불신한다고 말하여 선을 그었다.
고요하기만 하던 류희겸의 얼굴에 퍼져나가던 동요를 지켜보면서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서로를 불신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류희겸에게 꽤나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그래도 류희겸은 조용히 몸을 숙이는 대신에 빠른 판단을 내리고는 이렇게 다가왔다. 올곧은 남자의 선택이 기꺼웠다.
“이렇게 들소처럼 앞만 보고 들이박는 것은 또 처음이군. 그래. 신의란 서로 있어야 하는 법이지. 기왕의 일은 별거 아니다. 부엌칼에 찔린 사내는 안용옥(安龍鈺)의 삼남인 안명인(安明仁)이다. 피는 제법 흘렸지만 상처가 얕아서 죽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지난번에는 그랬지. 안용옥이 누군지 아느냐?”
“그게……. 좌승상과 관련된 사람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좌승상의 내형(內兄)이다. 정부인의 둘째 오라버니지. 선주(宣州)의 태수인데, 욕심이 많은 자라 사채를 동원해 인근 마을에 있는 커다란 장원을 몇 개 빼앗았다. 그 수가 제법 교묘하여 태경까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안명인을 찌른 백작부의 시종이 장원을 빼앗긴 이의 아들이다. 원수를 갚으려다가 실패했는데, 다행히 태경부(太京府)에 고발을 할 수 있었지. 그게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조사가 시작되었고, 최후에는 문정후(文正侯)가 재산을 몰수당하고 목이 저잣거리에 걸리지. 어떠냐? 우연치고는 굉장하지?”
“갑자기 문정후는 왜 언급하시는 겁니까?
땅을 빼앗은 것은 선주의 태수인 안용옥이었는데, 왜 갑자기 문정후가 재산을 몰수당하고 죽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문정후 장효준(張孝俊)은 기왕의 장인이었다. 기왕과 함께 서북 지역의 이민족을 패퇴시키며 무장으로 명성을 쌓은 그의 가장 큰 단점은 욕심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서천(西川) 지역의 농민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고, 반항하는 자들을 죽이거나 노비로 만들었다.
서천에서 장효준에 대한 원성은 어마어마했지만, 변경의 일은 태경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장효준이 선량한 농민의 땅을 강탈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장효준의 실각은 기왕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그게 오는 겨울이었으니 시기상으로는 맞았다. 하지만 안용옥과는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다.
“안용옥이 고발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장효준의 일이 밝혀지거든. 좌승상이 손을 썼지.”
“하지만 지금 좌승상은 없지 않습니까?”
“다 방법이 있다. 태자는 멍청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아주 머리가 없지는 않거든.”
거기까지는 이해했다. 태자가 안용옥의 일을 덮으려고 장효준의 일을 터트렸던 것이다. 그래도 아직 의문은 남아 있었다.
“그럼 기왕을 연회에 부르신 이유는요?”
“태경부 경윤인 표동하가 실각했기 때문이지. 지난번에는 그가 백작부 시종의 말을 듣고 기왕에게 안용옥의 비리를 전하는데, 이번에는 그게 불가능하니 기왕을 직접 움직여야지.”
“아…….”
좌승상이 몰락하면서 이전 생애와 비교하여 여러 가지 것들이 많이 바뀌었다. 태경부 경윤이 실각한 것도 태자와 기왕과의 세력 다툼이 전보다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문정후가 서천에서 농민들의 토지를 마음대로 강탈할 수 있었던 것은 서천도독(西川都督)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지. 두 사람이 의형제거든. 서로의 자식을 혼인시키기도 했고. 여하튼 이번 일로 기왕은 손발이 잘리는 것이니,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야.”
문정후 장효준과 서천도독은 기왕의 가장 큰 무력 중에 하나였다. 직전 생에서 기왕은 토지 강탈 사건으로 장인 문정후와 힘을 지닌 서천도독을 모두 잃어버린다.
진혁위가 기왕을 견제하는 것은 황제의 뜻에 따른 것이었지만, 이 정도의 일은 증거가 있어야 수사가 가능한 법이었다.
좌승상을 비롯한 모씨가의 몰락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류희겸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결국 비어버린 틈을 메꾸는 것은 진혁위의 몫이 되고 말았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류희겸은 입을 다물고 진혁위를 쳐다보았다.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준비했는지 이제야 깨달은 자신의 멍청함을 한탄했다.
“왜 말이 없어?”
“왕야께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뭘?”
“결정하셨습니까?”
언젠가 진혁위는 농담처럼 말했다. 제좌를 가질지, 아니면 서역으로 떠날지 결정하지 못했다고. 지금까지 보인 그의 행보는 모든 것을 두고 서역으로 갈 사람 같지 않았다.
황제가 될 거냐는 우회적인 질문에 진혁위가 활짝 웃었다. 흥겨움에 기쁨이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굳이 둘 중 하나만 선택할 필요가 있느냐? 본왕은 욕심이 많다. 황제가 되어 귀비를 황후로 삼은 다음에, 귀비가 낳은 아들이 장성하면 양위를 하고 둘이서 서역으로 가는 것이지. 어떠냐? 완벽하잖아.”
가벼운 말투만큼이나 내용은 허황되었다. 자신이 황후가 되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에게 양위를 하고, 둘이서 서역으로 떠나는 것은 농담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가, 진혁위가 황제가 될 것이다.
벗이자, 형제이자, 주군이었던 진한재가 제좌에 오르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운명은 또 다른 황제가 될 사람 앞에 자신을 데려다 놓았다.
생을 반복하면서 자신으로 인해 가장 크게 운명이 바뀐 사람은 진혁위였다. 무환행궁에서 스스로 목에 칼을 찔러 넣어 죽었을 남자를 살리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짧은 깨달음에 소름이 돋았다. 진혁위가 황제가 된다. 그렇다면 그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생을 반복한 것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그리 쳐다보면 오해한다.”
“지난번에, 제좌를 가지셨습니까?”
도발적인 질문이었다. 이번에도 진혁위는 웃었다. 그러나 방금 전과 달리 입가에 맺힌 미소는 위험해 보였다.
“어땠을까?”
확답 대신에 반문이 돌아왔지만 그것은 긍정의 뜻이었다. 결국 자신이 목숨을 구한 진혁위가 황제가 되는 것이 운명이라는 의미였다.
류희겸은 문득 그가 몇 살까지 살았는지 궁금해졌다. 생을 반복하고 있으니 지금의 나이보다 더 많은 것은 확실했다. 자신이 죽고 나서 당장에 황제가 될 수는 없었을 테니, 적어도 몇 년은 더 살았을 것이다.
“소인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물어라.”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괜찮다.”
“왕야께서는…… 실제 연치가 어찌 되십니까?”
몇 살까지 살다가 죽었냐고 묻는 것은 너무 무례했다. 에둘러 물었지만 진혁위가 못 알아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껏 어떤 식으로든 대꾸를 하던 진혁위가 빙긋 웃으며 아예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류희겸은 더욱 찜찜함을 느꼈다.
“소인에게 알려주실 수 없으십니까?”
“그럴 리가 있나. 그저 그러기 싫을 뿐이다.”
“왕야?”
“천수를 누리지는 못했다. 폭군이 될 뻔했는데, 잘됐지.”
진혁위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류희겸은 아주 잠깐 생각이 멈췄다. 황제가 되었는데도,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고? 여러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었다. 반란? 역모? 암살? 짚이는 것은 많았으나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놀랐느냐?”
“예. 많이 놀랐습니다.”
“그리 궁금하다면 재주껏 내 입을 열어보거라.”
“접문을 할까요?”
“이번에는 그리 쉽지 않다. 기녀들이 했다는 그것도 싫으니 다른 것을 궁리해라.”
언제는 쉬운 남자라서 접문이면 된다더니, 이번에는 아니란다. 류희겸은 잠시 갈등했다. 진혁위의 죽음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절실하지는 않았다. 진혁위의 반응도 애매모호했다. 말해 주기 싫다고 하면서도 재주껏 입을 열어보란다. 그건 일종의 명령과도 같았다.
류희겸의 짧은 갈등을 읽고도 진혁위는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았다. 사실, 류희겸에게 말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다만 비밀을 알고 싶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어야 한다 깨닫게 할 생각이었다.
진혁위가 류희겸에게 또 다른 비밀이 있다 의심한 것은 오래되었다. 천무동에 대해 이야기하던 류희겸은 이무기에 대한 설명을 생략했다.
류희겸이 굳이 이무기의 존재 자체에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무동에 들어간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린 이무기에게서 만독화까지 받아 돌아왔는데, 별다른 일이 없었을 리 만무했다.
굳이 추궁하지 않은 것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서로를 위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들이박은 류희겸의 태도는 기꺼웠지만 아직은 그것뿐이었다. 이무기만이 아니었다. 진한재를 죽일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내던질 류희겸을 신뢰할 수 없었다.
류희겸과 함께 할 수많은 것들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꼭 평화로울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왕야께 답을 들을 수 있도록 소인이 고민하겠습니다.”
“그럼 됐다. 이제 경화당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어라. 예쁘게 하고.”
예쁘게 하고 있으라는 말에 류희겸은 잠시 멈칫했다. 최근 들어 자주 듣는 칭찬은 아무래도 익숙해질 게 아니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인에게 예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나름 비장한 마음으로 한 부탁이었다. 그런데 진혁위가 웃음을 터트렸다.
“본왕이 귀비에게 예쁘다고 하는 이유를 모를 줄 알았다.”
“이유가 있습니까?”
“당연하지. 예뻐 보여서 예쁘다고 하는 것이다. 귀비가 어찌 생겼든 본왕의 눈에 예뻐 보이면 그만이지 않느냐. 부끄럽다면 익숙해질 때까지 참아라. 아니면 뻔뻔해지든가.”
“왕야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자기 눈에는 예쁘다고 우기는 진혁위를 이길 수가 없었던 류희겸은 항복했다.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익숙해질 때까지 참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물러가옵니다.”
“그래. 아, 그렇지. 본왕은 귀비를 믿지 않는다. 그리 알아라.”
“?!”
고개를 숙여 예를 올리던 류희겸은 저도 모르게 진혁위를 바라보았다.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시선을 마주한 채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너를 믿을 수 없다. 그건 냉정한 사실이었다. 진혁위의 짧은 경고는 날카로운 얼음가시가 되어 가슴에 박혔다.
“명심하겠습니다.”
류희겸은 정중히 답했다.
◇ ◇ ◇
가을 하늘은 화창했다. 진혁위는 선명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자세를 잡은 류희겸을 보며 빙긋 웃었다. 검을 들고 선 류희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백에 심장이 떨릴 정도로 오싹했다.
“본왕이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서로 검을 들고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는 감상이었지만 진혁위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을 고대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지난 만월제전에서 활약한 류희겸을 보고, 그와 한번 검을 맞대고 싶다고 생각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각인처럼 머리에 새겨졌다.
진혁위는 충동을 억누르는 대신에 욕망을 행동으로 옮겼다. 선물을 들고 희가에 몸을 의탁한 류희겸을 찾아가 비무를 신청했다. 몇 번이고 거절하는 것을 무시하고 부상이 다 나으면 비무를 하자고 억지로 약속을 잡았다.
기다림은 지루하면서도 감미로웠다. 하지만 류희겸이 수렵제에서 일어난 역모 사건에 휩쓸리면서 다음을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류희겸이 들어간 천무동은 죽어서야 나오는 곳이었다. 모두들 입을 모아 그가 죽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기적처럼 류희겸은 살아 돌아왔다. 회녕에서 역당들을 토벌하다가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진혁위는 전율했다. 희교국의 마지막 왕자를 잡지 못해서 속이 새카맣게 타는 상황에서도 류희겸에게 하례품과 함께 비무를 잊지 말라는 서신을 보냈다.
승전을 하고 태경에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 중에 하나가 류희겸과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
자신이 비정상적으로 류희겸에게 집착한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래도 연무장 중앙에서 류희겸과 마주 서 있으니 심장이 두근두근거리다 못해 긴장감에 손끝까지 저릿했다. 이 감각은 희열에 가까웠다.
“선공을 하십시오.”
무표정한 얼굴을 한 류희겸이 무심히 꺼낸 말에 진혁위는 콧잔등을 살짝 찌푸렸다. 비무나 대련에서는 실력이 월등한 자가 한 수 양보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건 류희겸이 자신을 하수로 본다는 뜻이기도 했다.
“본왕에게 선공을 하라고 한 것이냐?”
“왕야께서 선공을 하셔야 합니다.”
“왜? 본왕의 실력이 못미더워?”
무환행궁의 대전에서 류희겸은 귀신처럼 역도들을 베어 넘겼다. 하지만 그건 진혁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실력을 자부하던 진혁위는 선공을 하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게 아닙니다.”
“그럼 뭔데?”
“왕야께서 왕야이시기 때문입니다.”
“…….”
“선공하십시오. 그게 옳습니다.”
빌어먹을. 진혁위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황제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고귀한 신분이기에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별로였다.
마음 같아서야 선공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진혁위는 류희겸의 입장을 생각했다. 황족에게 선공을 양보하는 것은 불문율에 가까운 예의였다. 만약에 선공 양보 없이 비무를 했다가 말이 잘못 퍼져 나가면 류희겸이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에게 만독화를 바친 류희겸은 충신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그런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잔뜩 있다는 것을 진혁위는 알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자신이 물러나야 했다.
“좋다. 후회나 하지 마라.”
검을 고쳐 잡은 진혁위는 잠시 자세를 잡고 투기를 끌어올렸다. 허초 따위는 없이 류희겸의 목을 노리고는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진혁위는 힘으로 밀어붙일 계획이었다. 양인인 진혁위는 용력을 타고났다.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면 검을 맞부딪히는 것만으로도 팔에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류희겸은 정면으로 검을 들어 막는 대신에 슬쩍 흘려내며 뒤로 물러났다. 다시 벌어진 거리에 진혁위는 와락 얼굴을 구겼다.
“제대로 안 할 거냐?!”
“이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겁쟁이의 방법이지!”
피와 살이 튀는 살벌함을 바라던 진혁위는 류희겸을 도발하며 다시 달려들었다. 살초와 허초를 번갈아 쓰면서 류희겸을 몰아붙였다.
노련한 류희겸은 진혁위의 공격을 모두 받아냈다. 때때로 날카로운 반격을 시도하긴 했지만 류희겸이 수세에 몰려 방어하기만 하는 형국이었다. 결국 류희겸이 검을 놓치는 것으로 비무가 끝났다.
“소인이 졌습니다.”
“다시 해.”
“왕야?”
“일부러 져주었다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진혁위는 손을 앞으로 모아 쥐고 예를 올리는 류희겸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비무 자체는 격렬했고, 류희겸이 밀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진혁위는 류희겸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음을 눈치챘다. 정확히는 방어에만 치중하면서 공격은 최소한으로만 했다.
이건 모욕이었다. 선공을 하라고 한 것보다 더 자존심이 상했다.
“소인이 방어하는 데 급급하여 그랬습니다.”
“변명하지 마라. 네가 감히 본왕을 능멸해?!”
“왕야. 소인이 왕야를 이기려면 살을 내어드리고 뼈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비무이지 생사결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끝내는 것이 좋습니다.”
타이르는 듯한 부드러운 어조에 진혁위는 울컥했다. 류희겸의 말이 맞다는 것은 알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아이처럼 떼를 쓰는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였다. 또한 겨우 네댓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류희겸이 훨씬 더 어른스러운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무효야. 다시 해. 이번에는 방어만 하지 말고.”
“소인이 왕야와 검을 겨루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합니다.”
“난 이렇게 이기는 게 싫다.”
진혁위는 제대로 류희겸을 이기고 싶었다. 깨끗한 류희겸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퍼졌다. 아주 잠깐 생각에 빠졌던 류희겸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왕야의 뜻대로 하십시오.”
“좋다. 그럼 다시 비무를 하는 거야. 제대로 말이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이대로 마무리하시지요. 소인이 비무 중에 손목을 살짝 삐었습니다.”
“손목은 또 왜?”
진혁위는 멀쩡해 보이는 류희겸의 손목을 노려보았다. 당장에 비무를 피하기 위한 엄살 같았다. 그래도 아프다고 하는데 거짓말이냐고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사실은 힘으로 몰아붙인 터라 혹시나 싶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한 번 참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희가의 군의가 진찰하더니, 류희겸의 손목에 문제가 생겼다면서 침을 놓고 붕대를 감았다. 결국 비무는 그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비무 후에는 식사를 대접받았지만 희가의 객인인 류희겸이 동석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왕부로 돌아가기 전에 따로 그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내일 사람을 시켜 손목에 바를 약을 보내겠다.”
“아닙니다. 약은 충분히 있습니다.”
“내가 보낸 게 더 좋을 거다. 받아.”
“감사합니다. 왕야. 그리고…… 별거 아니지만, 소인이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잠시 머뭇거린 류희겸이 품에서 작은 비단주머니를 꺼냈다. 아무 수도 놓이지 않는 주머니의 푸른 비단은 제법 좋은 것이었다. 진혁위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걸 받아 들었다.
“이걸 왜?”
“승전하신 왕야께 진상하는 것치고는 보잘것없습니다. 그저 받아만 주십시오.”
진상품이라는 말에 진혁위는 그 자리에서 주머니를 열었다. 안에 든 것은 모란무늬가 투각된 검붉은 옥이었다. 크기는 작지만 귀한 옥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여인들이 쓰는 게 아니냐?”
진혁위는 기분 좋은 것을 감추며 삐딱하게 물었다. 꽃무늬 장식은 사내들은 잘 쓰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모란은 더욱 그랬다.
“송구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창고에 넣어두십시오.”
“왜 꽃이냐 물었다.”
“시장에서 보았는데, 보자마자 왕야가 생각나서 그랬습니다.”
간지러운 말에 진혁위는 입꼬리가 실룩거리는 것을 참지 못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사람 홀리는 기술이 제법이었다.
자신의 선호도와 별개로 꽃을 선물하는 것은 직설적인 찬사와 구애의 의미였다. 기방에서 마음에 드는 화기에게 꽃을 던지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청혼서와 함께 꽃이나 꽃무늬 장신구를 보내는 것은 대연국의 오래된 전통 중에 하나였다.
진혁위는 류희겸이 무슨 생각으로 모란무늬 장신구를 선물이라고 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유혹일까? 속을 알 수 없는 덤덤한 얼굴은 너무나 깨끗해서 음흉한 마음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천무동으로 들어갈 때도 류희겸은 저 얼굴이었다. 대전에서 역도들을 베어 넘기며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도, 황제 앞에 무릎을 꿇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입맞춤을 하고 난 다음에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를 떠올린 진혁위는 류희겸의 입술을 지그시 보았다.
“류희겸.”
“예. 왕야.”
“오늘 밤에 마차를 보낼까?”
“……예?”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류희겸이 눈을 크게 떴다. 고요한 남자의 동요에 진혁위는 흥겨워졌다.
“접문까지 한 사이인데, 이렇게 의미심장한 선물을 하면 그런 뜻이잖아. 안 그래? 꽃이라고.”
“어…….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왕야.”
필사적인 부정에 진혁위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닌 줄은 알았다. 그래도 그러냐고 넘어가기에는 자신의 성격이 그다지 너그럽지 못했다.
“처음에는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두 번째는? 본왕이 눈치가 없지는 않다니까. 마차를 보내는 것보다는 매파가 나을까? 부황께 진언을 드리면 측비로―”
“왕야.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다른 선물을 진상할 터이니, 그것을 돌려주십시오.”
감히 친왕의 말을 가로막다 못해, 진상한 물건을 돌려달라는 것은 엄청난 무례였다. 진혁위가 평범한 친왕이었다면 류희겸에게 호통을 치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진혁위는 그러지 않았다. 새파랗게 질린 류희겸의 얼굴을 보자니 되었다 싶었다.
“한 번 준 걸 돌려달라는 것은 무슨 법도냐. 나는 이게 마음에 든다.”
“왕야.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됐다. 농이니까 그리 질리지 마라. 그리고 오해할 만한 선물은 하는 거 아니다. 너랑 나랑 으슥한 곳에서 접문도 한 사이인데, 이런 걸 주면 구애라고 생각할 거 아니냐.”
“반드시 명심하겠나이다.”
눈에 띄게 안도하는 류희겸의 모습에 진혁위는 다시 한번 접문을 하면 어떨까 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문제는 장소가 나쁘다는 것이다. 단둘이 마주 보고 있기는 했지만, 사방이 트여 있었다. 또 멀지 않은 곳에는 희일준과 운문형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 무서운 것 없이 제멋대로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살았다. 남색가라고 공공연히 알려져 있기도 했다. 그래도 싫다는 사내를 희롱하는 무뢰배는 되고 싶지 않았다.
“좋은 것을 받았으니 보답하마.”
“아닙니다. 약소한 것이니 왕야께서 받아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나도 약소한 것으로 준비하겠다.”
막무가내로 밀고 나가는 것은 진혁위의 특기였다. 그렇게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말을 타고 영왕부로 돌아가는 내내 품에 넣어둔 비단주머니가 묵직하게 느껴져서 흐뭇하게 웃었다.
왕부에 도착하고 나서도 옥을 들고는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류희겸은 창고에 넣어두라고 했지만 진혁위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고운 옥은 곁에 두고 써야 하는 법이었다.
진혁위는 우소진에게 옥을 주며 허리띠에 다는 장신구로 만들라고 일렀다.
아주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
악몽이 아니라 행복한 꿈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류희겸에게 선물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특별한 추억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왔다.
그나저나, 옥을 어디에 두었더라.
진혁위는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옥의 행방을 떠올렸다. 류희겸이 선물한 옥은 새로운 향갑의 장신구가 되었다. 한동안 애용하고 다니다가, 호양성 전투에서 진창에 구르는 바람에 끈이 끊어진 후에는 따로 목함에 보관해 두었다. 그러다 목걸이로 만들었는데, 목에 걸고 다니지는 않았다. 아마 서탁 서랍 한쪽에 잘 있을 것이다.
기억을 더듬던 진혁위는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사위는 희미하게 밝았다. 뜰에서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그리고 바로 옆에서는 사람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라고? 화들짝 놀란 진혁위는 몸을 일으켰다. 옆을 보자 반듯하게 누워 있는 류희겸이 보였다. 류희겸의 시신은 화장을 해서 강에 뿌렸다. 그런데 그가 여기 있다고?
의문과 함께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은 생을 다시 살고 있었고, 류희겸을 만나 귀비로 삼았다. 이곳은 황궁이 아니라 영왕부였다.
한순간의 깨달음에 순간 얼어버렸던 진혁위는 천천히 긴장을 풀었다. 행복한 꿈은 지난 생의 기억이었다.
“희겸.”
이름을 불렀지만 류희겸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도 진혁위는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남자는 살아 있었다. 진혁위는 류희겸의 고요한 얼굴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눈에 담았다.
나쁜 남자였다. 으슥한 곳으로 사람을 데려가지 않나, 의미심장한 선물을 하지 않나. 그런데도 본인은 달리 의도가 없었단다.
나쁜 남자는 무심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를 못했다. 돌멩이처럼 딱딱한 남자의 마음을 얻는 것보다 하늘의 별을 따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짙은 감정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커다란 원동력 중에 하나였다. 애증, 집착, 후회, 회환. 진혁위는 류희겸의 모든 것을 가지겠다고 결정했다.
황제가 되고, 아들에게 양위를 한 다음에 서역으로 떠나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류희겸은 자신이 농담을 한 줄 알았지만 진혁위는 그걸 해낼 작정이었다. 꿈은 크게 가져야 하는 법이었다.
우선은 딴생각을 못 하게,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류희겸을 음인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전에 한 번 시도하려고 했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금도 그리 여유롭지는 못했다.
호양성으로 출전하는 것은 화진국의 사신을 돌려보내고 중양절이 지나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약 한 달 정도 남은 시간 동안에 류희겸을 음인으로 만드는 것이 먼저였다. 가능하면 진한재를 만나기 전에 끝내고 싶은데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음인을 만들고 난 다음에는, 올해가 가기 전에 류희겸을 임신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금채영과 진윤홍의 말대로 류희겸에게 가족이라고 불릴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심양설, 우풍이, 희범영, 희일준이라는 인연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라면 확실한 족쇄가 되어줄 것이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제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지려는 류희겸이었다. 그랬기에 복수를 끝낸 다음에 그를 붙잡아둘 것이 필요했다. 아이가 있다면 도망칠 수야 있어도, 제 목숨을 스스로 버리지는 않을 터였다.
아이를 가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류희겸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새파랗게 질릴 것이다. 그다음은 상상이 가질 않았기에 더욱 기대가 되었다.
진혁위는 손을 뻗어 류희겸의 뺨을 손등으로 슬쩍 쓸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각이 퍼져 나가서 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런데 류희겸은 수면을 방해받은 것이 귀찮은 듯 인상을 쓰더니 곧 등을 돌리며 누워버렸다. 류희겸은 잠귀가 꽤 밝았지만 늦게까지 교합을 하며 진을 빼놓으면 아침까지 푹 자버렸다.
진혁위는 류희겸의 등 뒤에 달라붙다시피 하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흠칫하고 류희겸이 놀라는 것이 맞닿은 몸으로 느껴졌다. 잠에서 깬 것이다.
“깬 거 안다.”
“예…….”
류희겸의 목소리에는 졸음이 묻어났다.
“지난번에, 내게 선물로 주었던 모란무늬 옥을 기억하느냐? 검붉은색이었는데.”
“음……. 예. 기억합니다.”
“그걸 다시 선물받고 싶다.”
반쯤 졸면서 대답하던 류희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란이 투각된 검붉은 옥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었다.
직전 생에서 희교국의 반란을 진압하고 태경으로 돌아온 진혁위가 비무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며 연통을 보내왔다. 비무 날짜가 정해진 후, 류희겸은 천무동까지 동행해 준 진혁위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무엇이 좋을까 고민하는 와중에 희일준을 따라 시장을 구경하다가 그것이 눈에 띄었다.
크기는 작았지만 귀한 옥이라 가격이 꽤 비쌌었다. 좋은 것을 보고 나니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진혁위와 황제에게 받은 은자는 화진국에서 부하들을 데려오느라 대부분 써버렸기 때문에 가진 돈을 거의 다 털어 넣어야 했다. 그래도 진혁위에게서 쓴 것보다 더 많은 선물을 받았기에 후회는 없었다.
어쨌든 옥을 산 전후 사정은 선명했다. 하지만 옥을 어느 가게에서 샀는지는 애매했다.
“죄송합니다. 그걸 어디에서 샀는지 기억나지가 않습니다.
“딱 이맘때쯤이었는데. 희부가 서시(西市)와 가까우니 그곳이 아닐까?”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진혁위의 말대로 희부는 서시에 가까웠고, 희일준이 자주 다니는 가게도 주로 그곳에 있었다. 서시를 뒤져 본다면 찾을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좋다. 그럼 서시부터 뒤져 보자. 오늘은 약속이 없으니 같이 움직이면 되겠지. 시장 구경도 하고, 번루에도 가고.”
“예.”
이미 귀한 옥을 많이 가지고 있는 진혁위가 왜 갑자기 모란무늬 옥을 가지고 싶어 하는지 류희겸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시장 구경은 좋았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이제 자라.”
“예.”
진혁위는 품에 안긴 류희겸이 천천히 힘을 빼더니 곧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것을 느꼈다. 밤새도록 잠을 설치던 처음에 비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익숙함은 무서운 법이었다.
느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특히 너를 믿지 않노라고 한 이후로, 류희겸은 진혁위에게 제법 다정해졌다. 의무에 가까운 모습이긴 했지만 반복하다 보면 몸에 익는 법이었다.
진혁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류희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그에게서는 따듯한 향기가 났다.
*
화창한 정오의 가을 하늘 아래, 거리는 사람으로 넘쳐났다. 태경의 번화한 시장인 서시는 서역에서 온 사람들과 물건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규모가 크고 화려한데다 볼거리도 많아서 금시(金市)라고도 불렸다.
높고 커다란 건물이 가득한 서시의 거리에서 류희겸은 옥을 산 가게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기억해 내지 못했다. 세 번이나 허탕을 치고 가게를 나온 류희겸의 눈빛이 달라졌다.
“천천히 해도 된다.”
진혁위는 세 번째로 같은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류희겸은 여전히 사냥감을 쫓는 맹수처럼 눈을 빛냈다.
“금방 찾아드리겠습니다.”
“괜찮다니까.”
“다음은 저쪽입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류희겸이 길 건너편의 커다란 점포를 가리켰다. 사람을 헤치며 씩씩하게 걸어가는 류희겸을 뒤따르던 진혁위는 쓴웃음을 삼켰다. 목표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성격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집중할지는 몰랐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진혁위의 계획은 서역에서 온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면서 류희겸의 취향도 알아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서시에 도착한 류희겸은 점포에 있는 옥장신구만 쓰윽 훑어보고는 그대로 돌아 나왔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냐고 물어볼 기회 같은 것은 없었다.
그래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가는 것은 너무했다. 진혁위는 냉큼 류희겸의 옆에 붙어서 손을 잡았다.
흠칫 놀란 류희겸은 처음보다 현저히 느리게 걸으면서 진혁위에게 시선을 주었다. 진혁위는 손을 꽉 잡으며 눈으로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왕……. 주인님.”
진혁위는 친왕의 신분을 숨기고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래서 밖에서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다. 진혁위가 류희겸의 이름을 부르기로 한 것에는 둘 다 이의가 없었다. 하지만 류희겸이 진혁위를 부를 때가 문제였다. 진혁위는 서방님을 고집했고 류희겸은 대인이나 어르신을 제안했다. 약간의 신경전 끝에 주인님이라고 결정 났다.
밖에서 들으니 주인님이라는 울림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류희겸이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아무도 안 본다. 그냥 가자.”
진혁위는 빙그레 웃으며 류희겸의 손을 잡아끌었다. 서시의 거리는 혼잡했고, 사내 둘이서 손을 잡고 가는 것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물론 눈에 띄지 않는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화려한 미남인 진혁위를 쳐다보는 시선은 많았다. 진혁위가 친왕이라는 것을 모르기에 길을 가다가도 멈춰 서서는 뒤돌아볼 정도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옆에서 걷는 류희겸에게도 시선이 머물렀다.
류희겸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앞만 보고 걸었다. 다행히 진혁위는 가게 앞에서 손을 놓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급 장신구를 취급하는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일꾼이 싹싹하게 반겼다.
“옥을 보고 싶네. 이 정도 크기의, 옥패로 쓸 수 있는 것으로.”
“이쪽으로 오시지요.”
일꾼을 따라 가게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류희겸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온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희일준을 따라 서시의 가게를 찾은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거기다 햇수로 따지면 이 년 전의 일이라 옥장신구를 산 곳이 어디인지 흐릿했다. 벌써 세 번이나 허탕을 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느낌이 좋았다. 예감대로 류희겸은 안쪽에 위치한 선반에서 검붉은색의 모란무늬 옥장식을 발견했다.
류희겸은 기쁜 마음에 얼른 셈을 치루었다. 옥을 담을 작은 목함도 따로 샀다. 이전에는 돈이 없어 비단주머니에 담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번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싶었다.
“부인께 선물하시는 겁니까?”
입구에서 류희겸을 안내한 일꾼이 아니라, 포장을 맡은 상급일꾼이 붙임성 좋게 물었다. 부인이라는 단어에 류희겸은 옆에 선 진혁위를 의식했다.
그는 부인이 아니었다. 그래도 부군에게 준다고 하자니 진혁위의 신분이 드러날까 조심스러웠다. 가게 안에서도 그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영왕 진혁위의 미모는 한 번 보면 잊기가 힘든 것이었다.
혹시나 몰라 류희겸은 다른 단어를 찾았다. 고민은 깊지 않았다.
“정인에게 줄 겁니다.”
“예. 그러시군요. 여기 있습니다.”
일꾼은 다른 것은 묻지 않았다. 옥이 든 목함을 받아 든 류희겸은 그대로 진혁위에게 내밀었다.
“찾았습니다.”
류희겸은 일꾼이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은 보고도 모르는 척했다. 정인에게 준다고 해놓고 바로 옆에 있는 미남자에게 내밀었으니 무슨 일인가 싶을 것이다. 그래도 제법 눈치가 있는 일꾼인 듯,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목함을 받아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진혁위가 정말 기쁜 듯이 활짝 웃었다.
“이게 맞다. 그런데 말이다.”
“예. 말씀하십시오.”
“내가 정인이냐?”
“혼인을 하였으니까요.”
류희겸은 덤덤히 답했다. 언젠가 진혁위가 도망갔다고 한 정인은 바로 자신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는 정인이라 할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정식으로 혼인을 했으니 정인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혼인을 하였다고 해서 다 정인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도망갔다고 한 정인이 저이지 않습니까.”
“이런, 드디어 눈치챘군. 그래. 네가 맞다.”
아무 동요 없는 류희겸의 물음에 진혁위는 웃음을 삼켰다. 진혁위는 지금도 그때도, 류희겸이 자신을 정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데 친왕의 작위도 걸 수 있었다. 그래도 류희겸 스스로가 자신을 정인이라 칭한다는 사실만큼은 만족스러웠다.
“이제 번루에 가자.”
마침 중반을 먹을 때였다. 막 가게를 나서려는데 류희겸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주인님께서 갑자기 옥을 찾으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소중한 거라서.”
“예?”
“네가 준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지 않느냐.”
“……?!”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실에 류희겸은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진혁위에게서 많은 것을 받았지만, 자신이 선물이라고 진상한 것은 장식옥이 전부였다.
“내 정인이 무심하다. 그렇지?”
“……네.”
류희겸은 인정해야만 했다. 어떤 사정이었든 무심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진혁위의 애처로운 엄살과 호소는 효과가 있었다. 류희겸은 진혁위에게 어울릴 만한 선물 목록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걸 찾았으니 되었다.”
“소인이, 제가 잘하겠습니다.”
“하하하. 살다 보니 네게서 그런 소리까지 듣는구나. 얼마나 잘해줄지 기대해 보겠다. 아, 그럼 다시 손을 잡을까?”
“아니요.”
“잘해준다면서?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아니다.”
진혁위는 툴툴거렸지만 아까처럼 갑자기 손을 잡아 오지는 않았다.
류희겸은 진혁위와 나란히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마차가 아니라 자신의 발로 사람들이 넘쳐나는 거리를 걷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정확히는,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었다.
진혁위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류희겸은 따사로운 햇살과 사람들의 소음을 마음껏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