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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章 (8/22)

六章

“오늘이 열흘째가 되는 날이다. 준비하라. 왕야께서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늦은 아침이었다. 조반을 먹고 차와 간식을 들고 있던 류희겸은 머리를 조아리는 우소진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오늘은 진윤홍이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진윤홍이 류희겸의 안부를 물으며 정식으로 기별을 넣고 약속을 잡은 것이라 신경 쓸 게 많았다.

류희겸에게 진윤홍은 사사롭게는 시가의 어른이고, 공적으로는 황제의 여동생이었기에 예법에 어긋남 없이 맞이해야 했다. 대부분은 심양설이 준비했지만 류희겸이 챙겨야 하는 것도 여럿 있었다.

류희겸은 원래 쉽게 긴장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도 내원에서 고귀한 신분의 부인을 맞이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전장에 나가는 군인의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진혁위의 전언은 생뚱맞았다.

닷새 전에 차를 같이 마신 이후로 진혁위는 가끔 얼굴을 비췄다. 어제 저녁을 먹으면서 할 수 있던 말을 굳이 우소진을 보내 전하다니 고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왕야께서 이것도 전하라 하셨습니다.”

허리를 숙인 채로 다가온 우소진이 내민 것은 작은 목함이었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너무 뻔해서 류희겸은 웃지도 못했다.

또 무슨 비녀일까 생각하며 목함을 받아 든 류희겸은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화려한 화잠이 아니라 단아한 옥비녀가 자리했다. 연한 푸른빛이 도는 상등 옥으로 만든 비녀의 끝에는 섬세한 매듭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류희겸은 옥비녀 대신, 그 옆에 놓인 쪽지를 손에 들었다. 진혁위의 호쾌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옷고름을 맺어두는 것보다야 마음을 맺어둠이 나으렷다.

如知結衣裳 不如結心腸

꽤나 유명한 맹교(孟郊)의 연시 구절에 류희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보니 진혁위가 이런 걸 좋아하는 건가 싶었다. 희교국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에 진혁위가 보냈던 서신이 경고의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깨달음과 별개로 왠지 팔을 긁고 싶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류희겸은 잠시 고민해야 했다. 얼마 전이었다면 선물만 받으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진혁위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어울려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답장을 쓰는 것이 최선일 것 같은데 떠오르는 게 없었다. 원체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으니 더 막막했다.

혹시나 몰라 류희겸은 우소진에게 물었다.

“왕야께서 연시를 좋아하시나?”

“아닙니다. 아주 질색하십니다.”

“그런가?”

생을 다시 반복하여 진혁위의 성향이 바뀐 건가 했는데 여전히 질색한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달달한 내용을 찾아 적어 보내는 이유는 뭘까 싶었다.

“쓸 곳이 하나 없는 것을 왜 알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런 쪽으로는 도통 관심이 없으셔서 왕야의 모비이신 혜비 마마의 걱정이 크셨습니다. 왕야께서 혼인하실 생각이 없다 하여 애를 태우셨죠. 그래도 혼인을 하시니 이렇게 바뀌시나 봅니다.”

빙그레 웃은 우소진은 맹세코 사실만을 말했다. 어려서부터 명석했던 진혁위는 사서삼경에 어려운 유학 경전을 줄줄 외웠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갖춰야 하는 교양 중에 연시나 애정시만큼은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러니 아무리 혼인을 하였다고는 하나, 진혁위가 직접 연시를 고르고 적어 류희겸에게 보낸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물론 그 말의 진위 여부를 파악할 수 없는 류희겸은 감동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고민했다. 답신을 적어 보내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왕야께 비녀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고, 감사의 인사는 직접 만나 뵙고 하겠노라 전해주시게나.”

류희겸의 정석적인 대답에 우소진은 그러겠노라 하며 돌아갔다. 그가 사라지자 심양설이 나섰다.

“마마. 비녀를 지금 꽂으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막 목함을 탁자 위에 올려두려고 했던 류희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려한 화잠과 달리 푸른빛의 옥비녀는 평소에 꽂고 다녀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것이었다.

“잘 어울리십니다.”

류희겸의 머리에 옥비녀를 꽂아준 심양설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진혁위가 류희겸의 오른발을 다치게 했을 때는 이대로 사이가 소원해지는 건가 싶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전과 다름없이 좋아졌다. 진혁위가 이렇게 애를 태우는 모습을 보니 흐뭇해질 지경이었다.

심양설이 물러나고 혼자가 된 류희겸은 진혁위와의 관계 변화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자신을 죽이지 않고 복수도 도와주겠다는 진혁위를 신뢰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총애를 티 내면 어색해졌다. 주군에게 하례품을 받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자신에게 영왕의 귀비라는 자각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순종적인 노비로 인신의 주인이 된 진혁위를 따르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그것이 부군으로 모시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진혁위가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가 교합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것만이 핵심은 아닐 것이다. 애증을 느끼는 상대에게 충성을 바라고 몸을 탐하는 것은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류희겸은 깊어지려는 생각을 멈췄다. 진혁위가 무엇을 원하든 자신이 가진 것은 다 내어주어야 했다. 사이좋은 부부 놀이를 하자면 얼마든지 맞장구쳐 줄 수 있었다. 그것이 과연 진혁위가 바라는 충성인지는 알 수 없지만.

“흠.”

류희겸은 짧게 숨을 내쉬며 한숨을 참았다. 보드라운 연정이 아니라 어딘가 뒤틀린 애증이 어떻게 결착 지어질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복수만을 향해 달려온 인생이었다.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겠노라 했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진혁위와 얽힌 인연이 그랬다. 무엇이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장담할 수 있는 것은 하나 있었다. 자신은 결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배신자의 삶이란 녹록하지 않은 법이었다. 황제에게 장담한 대로 쓸모가 다하면 죽임을 당할 확률이 높았다.

목숨이 언제나 경각에 달려 있었기에 먼 미래를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다섯 명의 목숨을 더한다는 축례를 받았음에도 여섯 번을 되살아났다. 이유가 있는지, 그저 우연에 불과한지, 이번이 마지막인지, 혹은 다시 생을 더 반복할지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했다.

나름의 추측은 있었다. 원한에 사로잡힌 영혼이 성불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진한재를 죽이고 원한을 끝낸다면 끝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것도 불분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결론은 진한재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혁위의 도움을 받아서.

그렇기에 더더욱 진혁위와의 꼬인 인연을 매듭지어야 했다. 그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마음을 다잡은 류희겸은 탁자 위에 올려둔 검은 목함에 시선을 던지며 애매하게 웃었다.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공유하는 상대가 생긴 것이 꽤나 힘이 되었다.

직전 생에서 부하들과 함께 진한재를 향한 복수를 도모하면서도 생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숨겼다. 그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잃을까 봐 그랬다.

하지만 진혁위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와의 악연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는 백지로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다시 생을 시작한다면, 역시나 다시 생을 살고 있는 진혁위와 만나기를 바랐다.

“나쁜 놈이로군.”

이기적인 바람에 류희겸은 스스로를 박하게 평가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

새하얀 찻잔에 꿀색 찻물이 채워졌다. 맑은 수색과 은은한 차향은 대화를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소재거리였다.

“이 향은, 울금훤이 아닙니까?”

우아한 손길로 찻잔을 들어 올린 진윤홍이 무난하게 말을 꺼냈다. 경화당의 안채에는 류희겸과 진윤홍, 그리고 진혁위가 자리했다. 류희겸이 귀비가 된 후 정식으로 손님을 맞이한 첫 번째 자리는 심양설의 노력으로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였다.

분위기는 살짝 경직되었으면서도 부드러웠다. 진윤홍이 울금훤의 향기에 반응하자 류희겸이 나섰다.

“장공주님께서 무엇을 즐기시는지 몰라 왕야께 여쭈어보았습니다.”

“우리 조카님이 울금훤을 추천하였나 보군요.”

“예. 장공주님께서 울금훤을 좋아하신다 하여 준비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다정다감하게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진혁위는 류희겸의 어설픈 내숭에 웃음을 참았다. 류희겸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물어본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울금훤을 준비한 것은 진윤홍이 울금훤을 즐겨 마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울금훤은 독특한 떫은맛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극명하게 갈렸다. 상대의 취향을 모르고서야 무난하게 준비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순간의 재치를 발휘한 류희겸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이쪽을 향한 눈빛에는 말을 잘 맞추라는 무언의 강요가 담겨 있었다.

진혁위는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평소 류희겸은 친왕의 귀비라는 자각이 없는 듯, 단순하고 편한 무복을 즐겨 입었다. 장신구도 수수한 편이었다. 그래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빈틈없이 예복을 챙겼기에 진혁위는 내버려 두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은은하게 멋을 낸 류희겸의 차림은 이례적이었다. 화봉사를 찾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인으로서의 모습을 감춘 꾸밈은 진윤홍의 호의를 사려는 노력이었다.

지난 생에 류희겸은 진윤홍에게 도움을 몇 번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진윤홍이 죽기 직전에 전한 비밀에 부채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진혁위 역시 진윤홍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고모님은 딱히 싫어하시는 것이 없으니, 귀비가 좋아하는 것을 대접하라고 하였습니다.”

“귀비가 울금훤을 좋아한다고?”

“예. 가장 즐겨 마십니다. 솔직히 떫은 차가 정말 맛있습니까? 저는 싫습니다.”

화술이 좋은 진혁위가 분위기를 가볍게 하며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덕분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진윤홍은 오래 앉아 있지 않았다. 갑자기 쓰러진 류희겸의 건강에 대해 염려하며,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는 다음을 기약하며 짧은 만남을 마무리 지었다.

경화당 앞뜰까지만 배웅한 류희겸을 대신해 왕부의 수화문까지 진윤홍을 수행한 것은 진혁위였다.

“아무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 정말이냐? 남들에게 알릴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수화문까지 걸어가는 길에 진윤홍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천천히 길을 걷던 진혁위는 만사에 의욕이 없던 진윤홍이 돌변한 것이 신기했다. 류희겸에게서 미리 진윤홍의 사정에 대해 듣지 못했더라면 의심을 했을지도 몰랐다.

옥안인의 말로는 류희겸의 영혼이 빠져나갔다고 했다. 굳이 다른 사람이 알아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진혁위는 말을 돌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기를 많이 써서 그렇다 합니다. 지금은 무탈합니다.”

“그럼 다행이다. 피붙이 하나 없는 타지에서 의지할 사람은 너뿐이다. 네가 잘해야 해.”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귀비의 양부를 찾고 있습니다.”

“양부를? 괜찮겠느냐?”

“괜찮지 않을 일도 없습니다. 세는 크지 않아도 귀비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면 되니까 말입니다.”

진혁위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영왕의 장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많으니 류희겸의 양부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 중에 의롭고 현명한 사람을 고르는 게 더 일이었다.

물론 진윤홍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욕심이 나려는 것을 억눌렀다. 화봉사에서 류희겸을 처음 봤을 때부터 특별함을 느꼈다. 우선은 이름에 쓰이는 글자부터 아들과 같았고, 그가 태어난 날은 아들이 죽은 바로 그날이었다.

화봉사에서 부처님께 어떻게 절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내내 류희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다 류희겸이 도적을 만나 쓰러졌다는 소식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무탈하게 일어나기를 매일같이 기도했다.

그가 깨어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에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류희겸을 만나 보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류희겸은 건강해 보였다. 이제 이걸로 끝이라 마음을 다잡고 안도하며 돌아가는데 양부를 구할 거라고 하니 또 마음이 쓰였다.

친왕이 총애하는 귀비의 양부가 되기 위해서는 가문의 힘이 어느 정도 있어야 했다. 일가를 이루지 못한 자신은 아예 자격이 되지 않았다.

그저 미신이고 우연일 뿐이니 아들과 연관 짓는 것은 그만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이해시켜 보았지만 괜한 실망감에 힘이 빠졌다.

“날씨가 더 쌀쌀해지기 전에 귀비와 함께 공주부를 찾아가겠습니다.”

“아픈 사람을 무리시킬 생각 마라.”

“귀비가 씩씩하여 병자 취급하는 걸 싫어합니다. 그리고 울금훤을 같이 마셔주는 사람이 매우 드무니, 고모님을 만나러 간다고 하면 귀비도 기뻐할 겁니다.”

진혁위의 유쾌한 언사에 애써 아쉬움을 삼키던 진윤홍은 웃었다. 양모가 될 수 없다 하여도 이렇게 좋은 인연을 하나씩 이어가는 것도 방법이었다.

“좋다. 그럼 차만 아니라 식사도 하고 가거라.”

“예. 그러겠습니다.”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은 진윤홍은 들뜬 마음으로 마차에 올랐다.

수화문 앞에서 진윤홍을 배웅한 진혁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섰다.

그가 진윤홍의 호의를 사려는 것은 단순히 친분을 다지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존재가 희범영의 가장 큰 약점이 될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진혁위가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과는 별개로, 희범영의 강직한 성품은 앞으로의 일에 방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고지식한 희범영은 황제에게만 충성했고 어느 황자의 편에도 서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하긴 했지만, 그래도 군부에서 발언권이 강한 희범영의 지지를 받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류희겸이 희일준의 목숨을 살리고, 탄핵의 위험으로부터 구한 것도 희범영은 잊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생에 희범영은 정치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마지막까지 류희겸을 챙겼다. 은원을 확실히 하는 그의 성격에 진윤홍까지 엮인다면 어지간한 일이면 류희겸의 도움이 되어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생을 반복하면서 진혁위는 몇 수 앞을 내다보며 안배를 짜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제멋대로 살다가 후회하는 것은 이제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목표를 정했으니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아 있었다.

“우소진.”

“예. 여기 있습니다.”

뒤를 따르던 우소진을 부르자 냉큼 옆으로 다가왔다.

“경화당에 설연주(雪蓮酒)를 보내라. 술과 어울리는 것을 준비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귀비 마마께 전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향기가 좋기로 유명한 설연주를 경화당으로 보내는 이유는 뻔했다. 단순히 저녁 식사만으로 끝내지는 않을 거라는 언질에 우소진이 눈치 빠르게 굴었다.

“됐다. 그보다는 심양설에게 귀비의 차림을 다시 손보라고 일러라. 내가 준 비녀는 많다.”

옥비녀만을 꽂은 단정한 모습도 보기 좋았지만 진혁위의 취향은 좀 더 우아하고 화려한 것이었다. 우소진에게 명령을 내린 진혁위는 편전으로 향했다. 긴 시간을 내려면 남은 일을 처리해야 했다.

*

저녁이 되고 날이 어두워지자 경화당 곳곳에 불이 밝혀졌다.

“왕야께서 곧 오신답니다. 나가셔야죠.”

기쁜 얼굴을 한 심양설의 말에 류희겸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게 무슨 뜻이냐고 소리 없이 물었다. 진혁위가 오니 나가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안뜰에서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런가?”

“예. 그러라고 일부러 사람을 보낸 거랍니다. 어서요.”

심양설의 재촉에 류희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부러 사람을 보낸 것이 마중하라는 의미라는 것은 처음 알았다.

천천히 안뜰로 나선 류희겸은 제 몸에서 나는 달콤하고 시원한 향기를 맡으면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열흘 후에 시침을 들라고 선언한 진혁위는 오늘 아침에도 사람을 보내 다시 확인했다. 진윤홍이 돌아간 후에는 술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랬더니 심양설을 비롯한 시종들이 더 난리였다. 진윤홍을 맞이하기 위해 대청소를 했던 안채를 반나절 사이에 한 번 더 쓸고 닦았다.

멀뚱히 지켜보고 있던 류희겸도 심양설의 등쌀에 이른 목간을 해야 했다. 향기가 넘치는 탕조에서 몸을 담그고, 향유를 바르고, 향기를 입힌 화려한 옷을 입자니 혼례식을 한 번 더 치르는 기분이었다.

류희겸은 머리를 말리며 평소대로 하면 되지,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심양설에게 물었다. 대답은 단순 명쾌했다. 그래야 진혁위가 좋아할 거란다. 결국 류희겸은 심양설이 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확실히 잘 꾸며놓은 것이 보기 좋은 것이 맞긴 했는데, 다 꾸미고 보니 그 정도가 심한 것 같았다.

상투관 없이 땋아 올린 머리에 화잠을 꽂은 것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호갑투를 낀 것은 아무래도 과했다. 화관만 쓰지 않았지, 거의 혼례식과 비슷할 정도로 화려한 치장이었다.

심양설이 지금이 아니면 낄 기회가 없다고, 기껏 선물받은 것인데 패물함에만 들어 있는 것은 아깝다고 해서 그러라고 하긴 했지만 익숙하지 않아서 영 불편했다. 이걸 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손을 가져가고 있는데 진혁위가 나타났다. 류희겸은 얌전히 예를 올렸다.

“영왕야를 뵙습니다.”

“기다리고 있었구나. 일어나라.”

해가 진 안뜰을 밝힌 주황색 불빛에 미소가 도드라지는 진혁위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미남이었다. 활짝 웃는 모습은 마치 꽃이 만개한 것처럼 화사했다. 매번 보았기에 익숙한 것과 별개로 감탄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새삼스럽게 미남의 미소를 인정한 류희겸은 진혁위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었느냐?”

“오신다고 해서요.”

“낮과는 다른 차림이구나. 이쪽도 잘 어울린다.”

“양설이 노력했습니다.”

류희겸의 대답에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심양설은 내심 뿌듯했다.

장군 출신이라서 그런지 류희겸은 꾸미는 데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 평소에는 간편한 무복을 입고 지냈다. 그게 내심 아쉬웠던 심양설은 류희겸의 차림을 다시 손보라는 진혁위의 명령에 열과 성을 다했다.

금실을 수놓은 진청색의 장포에 금으로 된 요대를 차게 하고 색색의 패옥을 늘어뜨렸다. 거기다 곱게 땋아 올린 머리 곳곳에는 화려한 장신구와 비녀를 꽂았다. 헌앙한 미남자는 부유한 왕부의 고귀한 귀비로 바뀌었다.

심양설의 노고를 한눈에 알아본 진혁위는 한껏 칭찬했다.

“예쁘다.”

“과찬이십니다.”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류희겸의 대답에 진혁위는 웃었다. 예쁘다고 해도 반응이 없을 줄 이미 알아서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귀비의 예쁜 모습을 밝은 곳에서 봐야겠다. 안으로 가자.”

여전히 서로의 손을 잡은 채, 류희겸은 진혁위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안채의 복도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서자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탁자 위에 음식이 담긴 접시가 잔뜩 놓여 있었다. 발 빠른 시종들이 술병과 잔을 가져다 놓은 것이다.

“확실히 불빛 아래서 보는 게 더 곱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이라니. 사실인 걸. 본왕이 복이 많아. 석반이 늦었다. 얼른 먹자.”

“예.”

류희겸은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진혁위가 준비된 술병을 들어 보였다.

“한 잔 마셔라.”

“감사합니다.”

“술을 마실 줄 안다고 했었지만, 주량은 말하지 않았지. 얼마나 마시느냐?”

“약하지는 않습니다. 혹시 소인을 취하게 하실 겁니까?”

“오늘은 아니다. 그런데 그게 왜?”

진혁위가 눈짓을 했기 때문에 류희겸은 잔을 들고 내밀었다. 향기로운 술이 작은 잔에 가득 찬 것을 마시지 않고 다음 말을 이었다.

“소인의 술버릇이 고약하다고 합니다.”

“흥미진진한데? 도대체 무슨 버릇이기에 그리 비장한 것이냐?”

“사실은 제 술버릇이 무엇인지 저도 모릅니다.”

“모른다?”

“성인이 되고 딱 한 번 대취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기억이 없습니다. 아침에 깨고 나니 같이 술자리에 있었던 고모부님과 부관들이 다시는 취하도록 마시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류희겸의 열여덟 번째 생일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에는 두어 잔 마시는 것으로 끝냈던 류희겸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남준해와 그의 부관들이 작정을 하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 낀 터라 주는 잔을 다 받아 마셨다. 전장을 구르는 이들이 마시는 술은 아주 독해서 취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취했다고 자각한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다음부터는 깜깜했다. 다음날 아침 숙취 속에 깨어나 남준해에게 불려갔다. 그리고 다시는 취하도록 술을 마시지 말라는 엄명을 들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내지는 못했다. 다들 알아서 좋을 게 없다며 입을 다물었다. 부관 몇몇의 턱과 눈 밑에 멍이 들었던 것을 보면 난동을 부린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어쨌든 그다음부터 가능하면 술은 두 잔 이상 마시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설연주는 향이 좋지만 그만큼 독했다. 남자가 주는 술을 거절하지 못할 터이니, 미리 경고하는 게 좋을 터였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취하지 말라고 당부를 해?”

“아마 난동을 부린 것 같습니다. 같이 술을 마신 이들의 턱과 눈 밑에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하하하. 이런. 귀비에게 그런 무서운 술버릇이 있는 줄은 몰랐다. 깜찍한 모습을 보여줄까 기대했는데, 아쉬워. 그래도 얼마나 난동을 부리는지도 궁금하다. 취하는 것은 오늘 말고 나중에 해보자.”

웃음을 터트린 진혁위는 마치 선전포고를 하는 것처럼 류희겸을 취하게 만들겠노라고 말했다. 류희겸 역시 술에 취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궁금했기 때문에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한 잔만 마셔라. 나머지는 내가 다 마시겠다.”

류희겸은 진혁위에게서 받은 술을 단번에 마셔버렸다. 그리고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선방에서 만들어 올린 음식은 모두 맛있었다. 류희겸은 호갑투가 불편한 와중에도 꿋꿋하게 수저를 움직였다.

식사 도중에 여러 대화가 오갔다. 대부분은 진혁위가 류희겸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는 진윤홍을 찾아뵐 거라며 직접 선물을 고르라고 했다. 뒤이어, 왕부의 살림살이를 하나씩 맡아보라는 말에 류희겸이 먹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소인이요?”

“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귀비 같은 인재를 놀게 하는 것은 멍청한 짓인 것 같았다. 유능한 인재는 일을 시켜야 하는 법이지. 총관에게 말을 해놓았으니 그리 알아라.”

“알겠습니다.”

현재 영왕부에는 류희겸 말고 내원에 사람이 없기는 했으니 살림살이를 맡아보는 것은 아주 틀린 일은 아니었다. 그것도 왕부의 주인인 진혁위가 직접 명한 것이라면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일군을 통솔했던 경험이 있는 류희겸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고, 산학에도 제법 능숙했다. 왕부의 살림살이를 보는 것이야 아주 힘든 일은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진혁위에게 원비가 생긴다면 또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그건 그때의 문제였다. 그래서 류희겸은 원비를 들이시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지 않았다.

진혁위는 황제가 혼인을 강요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지만 그건 올해까지의 일이었다. 호양성을 점령하고 화진국의 군대를 상대로 대승하고 돌아온 진혁위를 원하는 집안은 많았다. 기왕을 대신해 태자와 대립하게 될 진혁위는 황제에게 혼인을 강요받았다.

류희겸이 죽기 전까지 진혁위는 혼인을 하지 않고 버텼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짧은 생각을 이어가던 류희겸은 문득 진혁위가 혼인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가 자신 때문인 건가 의심했다. 설마 싶다가도 자신을 정인이라고 불렀던 것이 기억나 버렸다.

괜한 깨달음에 아연한 기분이 들었다.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진혁위가 의아해 했다.

“왜 그리 보느냐? 술을 더 마시려고?”

“아닙니다.”

“그럼?”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 그랬습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귀비는 말재주가 없다. 그리 말하면 더 궁금해지는데.”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허니 지금은 묻지 마십시오.”

거짓말을 잘하는 재주도 없고, 진혁위가 물으면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다만 지금 꺼낼 화제가 아니라는 눈치 정도는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류희겸이 에둘러 말을 돌리자 진혁위가 웃었다.

“그래. 그냥 넘어가 준다. 그것보다 희범영 장군에게 어떤 선물을 하는 게 좋을지 한번 생각해 보아라. 그냥 선물이 아니고 장군이 좋아할 만한 것 말이다. 내가 장군의 취향을 잘 모른다.”

“희범영 장군께요?”

“그래. 활이 좋을까? 장군이 신궁 소리를 듣잖느냐? 흑각궁이면 어떨까?”

“흑각궁보다는 벼루가 좋을 듯싶습니다.”

“벼루?”

“예. 벼루입니다.”

류희겸은 단호하게 말했다. 명문 무가에서 나고 자란 희범영은 존경받는 장군으로 철마다 하례품을 받았다. 명망 높은 무관인 만큼 무력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직전 생에 희범영이 자신은 벼루나 붓 같은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노라고, 그래서 조금은 아쉽노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흑각궁이나 황금, 비단보다는 벼루가 더 희귀한 선물일 터였다. 바로 곁에 우소진과 심양설이 있어서 자세한 설명은 못 하지만 벼루라면 희범영이 좋아할 거라고 확신했다.

“귀비가 그리 확신하니 좋은 벼루를 구해봐야겠다.”

“희범영 장군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시려는 연유는 무엇입니까?”

“별거 아니다. 그에게 잘 보여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러니, 귀비는 괜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 귀비는 달리 가지고 싶은 것이 있느냐? 금광 말고 뭔가 사는 걸 본 적이 없다.”

“왕야께서 과분하게 챙겨주시니, 뭘 더 가져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이럴 때는 말을 잘하지. 그럼 원수를 죽이고 나서 하고 싶은 것은?”

갑자기 화제가 이상한 곳으로 튀는 바람에 류희겸은 진혁위를 보았다. 빙긋 웃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빈 잔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술병을 든 류희겸은 잔을 채워주면서 복수 다음을 생각해 보았다.

언제나 죽음만을 대비하고 있었던 탓에,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미래는 잘 그려지지 않았다.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생각해 봐라. 무엇을 하고 싶은지.”

순간 류희겸은 꿈속에 나왔던 용이 남해에 갔다고 한 것을 떠올렸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지워버렸다.

“복수를 끝낸 다음에 생각하겠습니다.”

“나는 재미있는 것을 생각해 두었는데, 귀비가 하고 싶다는 게 없으니 말을 못 하겠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진혁위가 술이 가득 찬 잔을 비워냈다. 그가 다시 내민 잔에 류희겸이 술을 채워주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식사가 끝났다. 시종들이 일사불란하게 식기를 치우고 차를 내왔다. 찻잔을 들기 전에 진혁위가 손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모두 물러났다.

류희겸은 진혁위가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나 싶어서 기다렸다. 하지만 진혁위는 별말 없이 차만 마셨다. 할 말 없느냐는 눈빛을 보내자 진혁위가 활짝 웃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거 아닙니까?”

“귀비는 눈도 예쁘다.”

“왕야?”

“당황하면 사슴처럼 놀라는 것도 어여쁘지.”

예쁘다. 어여쁘다. 계속되는 간지러운 말에 류희겸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진혁위가 아무렇지 않게 하는 칭찬은 자신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일전이라면 그냥 입을 다물고 지나쳤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따지고 싶어졌다.

“소인이 어찌 사슴입니까?”

“사슴은 싫으냐? 눈이 어여뻐서 그렇다. 사슴이 싫으면 살쾡이라고 할까? 귀여운 것은 같잖아.”

류희겸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진혁위보다 살짝 작기는 했지만, 그래도 당당히 제 몫을 하는 장정이었다. 빤히 보고 있자니 진혁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 보면 더 예쁘다. 예쁘다는 말이 싫은 것이냐? 그래도 예쁜 것을 어쩌라고. 이제 자러 가자.”

“시종을 부르겠습니다.”

너는 예쁘다고 계속 말하는 진혁위의 공격에 류희겸은 버틸 수가 없었다. 당신의 심미안이 잘못되었다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아니다. 이대로 갈 것이다.”

막 우소진을 부르려던 류희겸은 멈칫했다. 보통은 식사를 하고 난 후에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침의로 갈아입은 다음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대로 간다고?

“가자.”

류희겸은 진혁위가 내민 손을 잡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산책이라도 가나 싶었는데, 진혁위가 향한 곳은 내실 바로 옆에 있는 침방이었다.

침상 앞에 선 진혁위가 류희겸의 손을 살짝 들어 만지작거렸다.

“호갑투가 불편하지는 않더냐?”

“불편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안 해도 된다. 예쁘긴 한데, 영 쓸모가 없지.”

류희겸의 손에서 호갑투를 빼어 탁자 위에 올린 진혁위가 바삐 손을 움직였다. 양팔에 차고 있던 팔찌를 빼고, 머리에 꽂혀 있던 비녀도 능숙하게 뽑았다.

“팔을 들어보아라.”

장신구를 모두 치운 진혁위가 류희겸의 옷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류희겸은 의아하면서도 순순히 몸을 내맡겼다. 한때는 옷을 입혀주고 꾸며주는 것을 좋아했던 진혁위였다. 이번에는 벗기는 것에 흥미가 생겼나 했다.

다섯 겹의 옷이 바닥에 떨어지고 속옷만 남게 되자 류희겸은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의를 맞물리게 하는 매듭을 푸는 진혁위의 손은 거침없었다.

“옷을 다 벗기실 겁니까?”

“그래야지. 그럼 입고 하겠느냐?”

“알몸이면 됩니다.”

“안다.”

류희겸은 그제야 남자가 자신의 알몸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속바지와 버선, 마지막 속옷도 순식간에 벗겨지면서 류희겸은 알몸이 되었다.

이미 서로 보여줄 것은 다 보여준 사이였기에 알몸인 것은 부끄럽지 않았지만, 날씨가 제법 쌀쌀해서 약간 추웠다. 그와 달리 자신을 바라보는 진혁위의 시선이 열기로 짙어지는 것 또한 느꼈다.

“저도 벗겨드리겠습니다.”

“아니. 됐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이건 어찌 생겼느냐?”

진혁위의 손이 류희겸의 오른쪽 옆구리에 있는 흉터를 쓸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류희겸은 소름이 돋아 몸을 떨었다.

“전투에서 다쳤습니다.”

“그럴 것 같았지. 자세하게 말해라.”

“첫 출전이었는데, 방심하다가 베였습니다. 상처가 제법 깊어 고생했습니다.”

사흘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사경을 헤맸다는 말은 삼켰다. 깨어난 후에도 상처가 몇 번 터져서 힘들었다. 그건 진혁위가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하긴. 첫 출전이 언제나 위험하기는 하지. 열여섯?”

“열다섯이었습니다.”

“어렸군. 어린 모습이 궁금해지는데.”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한 진혁위가 입술을 맞대 왔다. 느닷없는 입맞춤에 류희겸은 잠시 당황하다가 혀를 내밀어 진혁위의 것과 얽었다.

맨살에 닿는 비단옷의 감촉이 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허리를 잡아당기던 남자의 손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가볍게 감싸 어루만지는 손길에 류희겸은 제대로 당황했다. 근육이 제멋대로 움칫거리다 못해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류희겸은 항의의 의미로 남자의 어깨와 팔을 꽉 붙잡았지만 애무는 계속 이어졌다. 그의 엉덩이를 붙잡은 손이 천천히 등을 쓰다듬었다. 남자의 손이 맨살을 스칠 때마다 류희겸은 진저리를 치며 떨었다.

말도 안 되는 신음이 흘러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러다가는 알몸으로 진혁위에게 안긴 채 성기를 꼿꼿이 세울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잠, 잠깐만.”

겨우 입술을 뗀 류희겸은 진혁위를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싫으냐? 설마 부끄러워서?”

“그게 아니라……. 왜 여기서 이럽니까? 왕야께서는 옷도 다 입고 계신데 저만 이러고 있는 것도, 흐읍. 좀 그러지 마십시오.”

말을 하고 있는 와중에 진혁위가 다시 손을 움켜쥐어 엉덩이를 자극하는 바람에 류희겸은 숨을 삼켜야 했다. 코앞에 있는 진혁위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면에 미소를 지은 남자가 소리 없이 웃음을 퍼트리고 있는 것이 맞닿은 몸으로 전해졌다.

“이리 맨살을 만지고 싶었다. 손안에서 움찔거리는 게 생생하게 느껴져서 흥이 오른다.”

“왕야.”

“귀비가 이리도 부끄러움을 타다니 신기해. 그런데 어쩌나. 하고 싶은 것이 아직 잔뜩 있는데.”

류희겸은 뭘 하고 싶냐고 물으려다 진혁위의 입술에 막혔다. 그렇게 진혁위에게 끌어안긴 채로 류희겸은 침상에 올랐다.

동시에 술향기가 나는 입맞춤이 계속 이어졌다. 뺨에, 눈가에, 그리고 귓가와 목덜미에 뜨겁고 부드러운 입술이 내려앉으며 류희겸의 열기를 부추겼다.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아랫배가 긴장으로 굳었다. 특히 진혁위가 유두를 핥다 못해 입술 틈으로 세게 짓씹었을 때는 헛숨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흣.”

아프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한 쾌감에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진혁위를 밀치려던 것을 겨우 참으며 허공을 허우적거리던 손으로 요를 움켜쥐었다.

“아픕니다.”

“아프고 좋겠지.”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가 얄미워서 류희겸은 요를 움켜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혁위가 한 번 더 유두를 씹고는 머리를 아래로 내렸다.

남자의 혀가 배꼽 주변을 핥을 때부터 류희겸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더 아래로 입술을 내릴 때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진혁위의 커다란 손이 허벅지를 단단히 붙잡아 벌리다 못해 엉덩이를 들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류희겸의 성기를 단번에 입에 담았다.

“왕야!”

비명처럼 내지른 것은 처음뿐이었다. 이미 성기는 반쯤 발기한 상태였다. 강렬한 자극에 머리가 멍해지다 못해 숨이 막혔다. 부끄러움과 수치심, 그리고 곤란함과 혼란함이 동시에 류희겸을 후려쳤다.

“왕야. 그만하십시오……!”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지만 진혁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등을 웅크리며 남자의 어깨를 손으로 미는 것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더욱 허벅지를 옥죄이듯이 잡히고 말았다.

류희겸은 미칠 것 같았다. 엉덩이가 들린 탓에 진혁위가 제 성기를 입에 담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결국 류희겸은 핏줄이 돋은 손으로 진혁위의 어깨를 붙잡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에게 먹어치워지는 듯한 느낌은 말로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빨리고 있음에도 몸에 열이 확확 올라서 난감했다. 차라리 자신이 진혁위의 성기를 빠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느 순간에 진혁위가 입술을 뗐다. 이걸로 끝인가 하고 눈을 떴던 류희겸의 시야에 진혁위가 붉은 혀로 성기를 핥는 것이 들어왔다.

세상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 음란해서 류희겸은 다시 눈을 감으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진혁위의 손은 족쇄같이 자신을 옭아맸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데일 것처럼 뜨거운 혀가 귀두 끝을 핥고 비벼댔다. 그럴 때마다 신음을 내뱉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어야 했다.

거짓말하지 않고 이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만약 진혁위의 입에 사정이라도 한다면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사정을 안 하는군.”

다행히도 사정을 하기 전에 진혁위가 입술을 뗐다. 남자의 중얼거림에 겨우 눈을 뜬 류희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붉게 번들거리는 진혁위의 입술이었다. 살짝 눈썹을 찌푸린 진혁위의 눈은 깊어져 있었다.

“왜……. 어째서 이러십니까?!”

류희겸은 한껏 붉어진 얼굴로 외쳤다. 난데없는 봉변에 용기가 샘솟았다.

“해보고 싶었어.”

“그렇다고 이러시는 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면 하는 거지. 색깔이 제법 예뻐서 핥아보고 싶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열이 오른 류희겸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눈이 촉촉하게 젖은 류희겸의 모습에 입 안이 마르는 것을 느끼며 진혁위는 웃었다.

구음을 시도한 것은 진짜 무슨 맛이 나는지 핥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류희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덜덜 떠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막상 하고 보니 흥이 났다. 촉각, 시각, 청각, 미각. 어느 것 하나 자극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아래도 뻐근하게 흥분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 더 즐기고 싶어졌다.

“그런데 아프지 않느냐? 사정을 안 했어.”

“아픕니다.”

류희겸은 웃으면서 겸양을 떠는 진혁위를 향해 진실을 말했다. 정말 괜찮지 않았다. 이미 성기는 선액을 흘리고 있었다. 어서 사정하고 싶은데 진혁위는 그냥 웃기만 했다.

“스스로 해보거라.”

“?!”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요구에 류희겸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하는 것을 보고 싶다.”

“그게 왜 보고 싶습니까?”

“이유가 있어야 하느냐? 그냥 보고 싶은 것을.”

눈웃음을 친 남자가 잔뜩 발기한 류희겸의 성기를 손끝으로 꾸욱 눌렀다.

“흑.”

계속 다리가 잡힌 상태에서 류희겸은 몸을 움츠렸다. 저릿한 감각이 순식간에 손끝까지 퍼져나갔다.

“이대로는 괴로울 텐데.”

성기를 찌른 손은 보란 듯이 류희겸의 옆구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조금 전에 짓씹었던 유두를 잡아당겼다.

감질나면서도 신경이 곤두서는 자극에 류희겸은 미칠 지경이었다. 유두를 잡힌 것만으로도 사정을 해버릴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야 진혁위를 걷어차고 싶은데 다리가 잡힌 탓에 불가능했다.

“왕야께서 괴롭히고 계십니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만. 그런데 분해서 화가 난 모습이 어여뻐서 말이야.”

흥겨운 고백에 류희겸은 어이가 없었다. 욱하는 감정과 별개로 유두를 잡아 비트는 손길에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빨리 사정하고 싶었다.

“차라리 제가, 제가 빨아드리겠습니다.”

“그건 나중에 해주면 된다. 지금은 귀비가 하는 것을 보고 싶다.”

“진짜…….”

류희겸은 앙심이라는 것이 이렇게 생겨나는 건가 생각하면서 아래로 손을 내려 제 것을 움켜쥐었다. 누가 보는 앞에서 수음을 하는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기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래도 결국 욕망으로 꿈틀거리는 성기를 쥐자 하나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질척질척 젖은 소리가 울렸다. 뜨거운 숨결이 아무렇게나 튀어나오려고 해서 이를 악물었다.

“아……!”

진혁위의 손이 성기와, 성기를 잡고 흔드는 손을 한꺼번에 잡아 움직였다. 그때부터는 오로지 끝까지 달리는 것뿐이었다. 결국 오래지 않아 절정에 이르렀다.

류희겸은 숨을 헐떡이며 멍한 정신을 바로잡으려고 했다. 그러는 와중에 진혁위에게 잡힌 손이 들리는데 이어, 손가락이 빨리는 감각에 눈을 번쩍 떴다. 정액이 잔뜩 묻어 있는 손가락이 진혁위의 입 안에 들어가 있었다.

“왕야?!”

“음. 맛은 나쁘지 않아.”

애매하게 인상을 쓰고 말한 것이기에 류희겸은 진혁위의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다가 참았다. 돌아올 대답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진혁위가 품에서 영견을 꺼내어 손을 닦아주는 것도 내버려 두었다.

“왕야께서는 이런 걸 좋아하십니까?”

“이런 거?”

“사내의 정을 먹는 거 말입니다.”

류희겸은 몸을 뒤로 물리며 부루퉁히 물었다. 교합이 추구하는 것은 쾌락이라고 해도 성기를 입에 넣거나 정액을 먹는 것은 과한 것이었다.

자신에게 먹으라 시킨 것이 아니고 진혁위가 먹기는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대로 희롱을 당한 탓에 울컥울컥 분함이 계속 솟았다.

이번에는 스스로의 손을 닦던 진혁위가 놀란 얼굴을 하다가 살짝 인상을 쓰며 웃었다.

“이런. 귀비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군.”

“무슨 오해를 하고 있단 말씀이십니까?”

“나는 귀비 말고는 아무하고도 교합을 한 적이 없다. 왜? 못 믿는 얼굴을 하는 것이야? 진짜인데. 이전에도 지금도 귀비하고만 했다고 천제 앞에서 맹세할 수도 있지.”

뜻밖의 고백에 류희겸은 어안이 벙벙했다. 전에도 지금도 자신하고만 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류희겸은 진혁위와의 첫 교합을 떠올렸다. 황후가 준 최음약을 마셔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교합에 대한 기억은 그저 좋고 힘들었다는 것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알몸으로 옆에 누운 진혁위를 보고,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그다음 교합은 호양성 전투를 앞둔 밤이었다. 희범영 장군의 심부름을 갔다가 우연찮게 그런 분위기가 되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제대로 된 교합을 하지 않고 서로를 만지는 것으로 끝냈다.

그때부터 진혁위는 아주 능숙했다. 풍류를 즐기고 놀기 좋아하는 친왕이라고 알려져 있던 진혁위였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하고 한 적이 없다고?

진혁위라면 이런 것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 화려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놀기 좋아하는 왕야께서 자신 외에는 아무하고도 교합하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그게…….”

“뭐가 궁금한지 말해 보거라.”

손을 닦은 영견을 침상 밖에 내던진 후에 빠르게 옷을 벗던 진혁위가 자신만만하게 굴었다. 그래서 류희겸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처음부터, 그러니까 제가 기억하기로, 호양성 전투를 앞두었던 그때부터 아주 능숙하셨습니다.”

“하하하. 그리 말해 주니 아주 기쁜걸?”

순식간에 속옷 차림이 된 진혁위가 웃음을 머금으며 류희겸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조금 벌어졌던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답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음……. 많이 노력했지.”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입술이 덮쳐오는 바람에 류희겸은 따져 묻지 못했다. 입맞춤은 부드럽게 이어졌다.

이번 애무는 조금 전보다 더 집요해졌다. 온몸을 핥고, 만지고, 깨무는 것이 반복되면서 류희겸은 예민하게 달아올랐다. 류희겸은 허벅지 안쪽에 혀를 대는 남자의 잘생긴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이번에는 성기만 빼고 온몸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자신을 괴롭히려는 의도였다.

“읏.”

아프도록 허벅지 안쪽 살을 깨무는 진혁위 때문에 류희겸은 인상을 썼다. 열이 오른 머리로도 한동안 자국이 남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바심이 날 정도로 계속되는 애무 끝에 향유를 바른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하나였던 손가락이 세 개가 되어 구멍을 휘젓는 소리가 억눌린 신음과 뒤섞였다.

아슬아슬하게 몰아붙이는 자극이 류희겸을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너무 조인다. 꿈틀거려.”

집요하게 안을 쑤셔대던 진혁위가 흥겨운 듯 말했다. 버티는 것도 한계였기에 류희겸은 진혁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냥, 읏. 흐. 그냥 하십시오.”

“그러면 하고 싶지가 않지.”

손가락을 빼내며 진혁위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류희겸은 급박하기만 했다. 잔뜩 자극을 받은 구멍 안쪽이 징징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커다란 것으로 쑤셔지기를 바랐다. 진혁위가 속바지와 속곳을 내려 잔뜩 발기한 성기가 드러났을 때는 기대감에 몸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넣어달라고 말해 보아라.”

“……?”

“졸라보란 말이다.”

류희겸은 자신의 허벅지를 잡아 올리는 진혁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욕망이 어려 있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환하게 웃고 있으니 괜히 심술이 나려고 했다.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실 겁니까?”

“당연히 그건 아니지. 흥을 내고 싶었는데 이리 딱딱하게 굴다니.”

진혁위가 류희겸의 오른쪽 발목을 잡아 제 어깨에 걸었다. 잔뜩 애가 달은 곳에 묵직한 성기 끝이 닿자 류희겸은 기대감에 들떴다.

하지만 입구를 뭉개듯이 성기를 비벼대면서도 정작 삽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얼얼할 정도로 울려대는 내벽은 이성을 흐리게 만들었다. 이대로라면 엎드려 애원하게 될지도 몰랐다.

“괴롭히지 말고, 넣으십시오.”

“진짜 애교가 없지.”

커다란 성기가 단번에 안으로 들어왔다. 엉덩이가 들린 채 몸이 구겨진 류희겸은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내벽 전체가 밀어젖혀지며 살덩이가 들어오는 감각은 익숙해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흐윽.”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몸을 가득 채우는 쾌감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끝까지 밀려들어 오는 성기를 내벽이 기뻐하며 빨아 당겼다. 성기가 안을 크게 한 번 휘저을 때는 몸이 덜덜 떨렸다. 열과 압박감에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급했나 보다. 그저 밀어 넣은 것뿐인데, 사정했어.”

숨을 헐떡거리던 류희겸은 자신의 아랫배가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벽을 가득 채운 쾌감이 사라지지 않아서 사정을 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제 앞을 만져 주지 않아도, 뒤로만 갈 수 있겠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진혁위가 류희겸의 다리를 조금 더 들어 올리며 성기를 더 깊이 밀어 넣었다. 한 번 사정은 했지만 열기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기에 입이 바짝 말라 왔다.

들어왔을 때처럼 천천히 물러났던 남자의 성기가 이번에는 강하게 꿰뚫으며 들이박혔다.

뜨겁고 단단한 것이 안을 짓이길 때마다 젖은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야하게 울렸다.

“아읏. 아……. 으흣! 아!”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류희겸은 막지 못했다. 아래로 성기가 강하게 박혀들 때마다 등을 타고 선뜩한 쾌감이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붙잡아라.”

강한 움직임에 류희겸이 자꾸 위로 밀려나가자 진혁위가 류희겸의 팔을 제 목에 감게 했다. 그리고 굵은 성기를 더 깊이 박아 넣었다.

너무 깊다는 소리를 하는 대신에, 류희겸은 고개를 저으며 진저리쳤다. 그는 신음을 삼키며 진혁위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더 이상 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벽을 문지르며 생각해 보지도 못한 곳에 닿았다. 그곳을 두드리며 더 안으로 들어오려는 움직임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느껴져? 내벽이 떨린다.”

“허윽.”

목 안에서 젖은 소리가 허덕이며 내뱉어졌다. 내벽이 제멋대로 경련하면서 남자의 성기를 꽉 조여댔다.

안을 뭉개려고 작정한 듯한 강한 허리짓에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그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정신없이 몰아쳤다. 숨을 쉴 수 없는 압박감과 모든 것을 태울 듯한 열감에 그저 떨 수밖에 없었다.

“너는 내게 관심이 없지.”

“그……. 읏. 아, 앗!”

“눈치는 많이 없고.”

“하읏. 으. 그게 무슨. 아앗!”

진혁위에게서 눈치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듣기는 했지만, 그걸 왜 지금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쾌락이 너무 심해서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열과 땀이 차오른 몸이 서로 맞대고 비벼지며 폭력에 가깝게 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커다란 성기가 격렬하게 안을 치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먼저 사정을 해버렸다. 진혁위의 뱃가죽에 눌려 있던 성기가 정액에 젖었다. 저도 모르게 내벽을 꽉 조이는 순간에 진혁위의 성기가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흐읏.”

“읏!”

진혁위가 몇 번이고 몸을 떨며 뜨거운 체액을 쏟아냈다. 숨을 헐떡이며 정적의 순간을 견디는데, 땀으로 젖은 진혁위의 손이 턱을 쥐고는 입술을 맞대 왔다. 혀를 빨고 핥으면서 천천히 열기를 식히며 정신을 되찾았다.

연이은 사정에 몸이 늘어졌다. 하지만 진혁위의 입맞춤과 젖꼭지를 희롱하는 손길에 마냥 마음 편히 쉴 수 없었다.

“더 하실 겁니까?”

입술이 떨어지자 류희겸은 진혁위에게 물었다. 눈가에 입술을 대던 진혁위가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눈빛을 보내왔다.

“내가 한 번으로 끝낸 적이 있었던가? 응? 혼자서 흥을 내더니, 내 생각은 안 하지?”

“혹시나 해서 여쭈어본 것뿐입니다.”

“몸은 야해빠졌으면서, 입에 단 말을 하는 법이 없지.”

진혁위가 잡은 다리를 비틀어 자세를 고쳤다. 허리가 다시 꺾이면서, 류희겸은 안에 들어와 있는 진혁위의 성기를 민감하게 느끼며 떨었다. 이대로 다시 시작하는 것은 뻔한 수순이었다.

“제가…….”

“응?”

“제가 눈치가 없습니까?”

아까부터 마음에 걸렸던 말이 류희겸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귓가를 애무하고 있던 진혁위가 다시 시선을 주었다.

진혁위에게서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방금 전, 입에 단 말을 하지 않는다는 타박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리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다. 제법 처세는 할 줄 알았지만 아부나 아첨에는 능하지 않았다. 그래도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인가 싶었다. 솔직히 꽤 심란하기도 했다.

자신의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듯 욕망이 담긴 진혁위의 눈에 웃음이 걸렸다. 만개한 미소였다.

“눈치 없단 소리가 싫은 모양이군.”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질투가 많은 부군에게 기루에 갔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데 그게 눈치가 없는 거지. 흥. 과거를 캐묻는 짓은 하지 않겠지만, 속이 쓰리단 말이야.”

며칠 전에 기루를 언급했던 사실을 겨우 떠올린 류희겸은 인상을 썼다. 겨우 그것 때문이냐고 따져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일이 있어 참석만 한 것뿐이었습니다.”

“과거는 캐묻지 않을 거라니까? 자꾸 충동질하지 마라. 본왕이 얼마나 집요하게 굴지 알고? 아무리 귀비가 어여뻐도, 사내의 질투는 무서운 법이다.”

진혁위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류희겸을 향해 질투를 강조했다. 화진국의 명문가 출신인 류희겸은 객관적으로 괜찮은 신랑감이었다. 얼굴도 잘생겼고 언행과 몸가짐에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를 좋아하는 여인이 꽤나 많았을 것이다. 사내 보는 눈이 냉정한 기루의 기녀들에게도 반듯하고도 딱딱한 류희겸이 제법 흥미가 동하는 상대였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질투하는 것만큼이나 꼴불견은 없었다. 또한 눈치 없고 무심한 사내가 아무렇지 않게 흘린 말에 자신 혼자 열을 낼 건 뻔했다. 허니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현명했다.

그것보다는 자신의 아래에 깔려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류희겸을 보는 게 더 좋았다. 지금도 그랬다. 대화를 이어가는 중에도 뜨거운 내벽을 떨며 성기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흠칫거리면서 느끼는 얼굴이 되는 류희겸이 야해빠졌다.

이번에는 우는 것을 봐야겠다고 마음먹는데 류희겸의 손등이 뺨을 슬쩍 쓸었다. 어리둥절하는 사이에, 이번에는 목에 팔이 감기면서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접문이면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뭐?”

류희겸은 대꾸를 하는 대신에 다시 진혁위의 입술을 찾았다. 눈치가 없고 애교도 없다고 하니 먼저 적극적으로 굴기로 했다. 접문이 아니라 다른 걸 바란다면, 얼마든지 더 해줄 수 있었다.

입술을 맞대고 혀를 밀어 넣자 잠시 굳어 있던 진혁위가 입을 벌려주었다. 느리고 어설프게 시작한 입맞춤은 결국 진혁위에게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격렬해졌다. 마지막에는 숨을 헐떡이며 입술이 떨어졌다.

“일부러 이러는 것이냐?”

진혁위가 잔뜩 인상을 쓰며 으르렁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희겸은 다시 입술을 맞대며 빨았다. 진혁위의 목을 끌어안으며 허리에 다리를 감자 자세가 바뀌면서 삽입이 더욱 깊어졌다. 진혁위가 낮게 신음했다.

“약았다. 정말 접문이면 다 되는 줄 알아?”

입맞춤 대신에 진혁위는 류희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화가 난 듯 보였지만, 어쩌면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닙니까?”

“아니지.”

“무엇을 할까요?”

“귀비는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를 타고났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모릅니다.”

“명령을 기다리는 그 말투부터 고쳐라.”

“아…….”

한순간의 깨달음은 진혁위의 입맞춤에 흩어졌다.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진혁위의 성기가 강하게 안을 짓이겼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앓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 다시 시작이었다.

화화몽(火花夢)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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