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章
어려서부터 황제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온 진혁위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봉작을 받아 왕부에서 살기 시작한 후로 중요 행사와 제전에 참석하기 위해서만 황궁을 찾았다. 그래도 입궁을 할 때면 어머니께 문안 인사를 올리러 정수궁에 걸음했다.
“어떠냐?”
혜비 금채영(金彩英)이 내민 것은 짙은 쪽빛 천에 은실로 새가 수놓인 향낭이었다. 시와 서화에 능한 금채영은 자수와 바느질에도 재주가 있었다. 진혁위가 어렸을 때는 그의 옷을 직접 지어주기까지 했다. 지금도 계절별로 향낭을 만들어주었다.
금채영의 정성에 진혁위는 예의 바르게 감사의 말을 했다.
“빛깔이 곱습니다.”
“향은?”
“향도 좋습니다.”
“다행이다. 그렇지. 내가 또 줄 게 있다. 이건 새아가를 위해 만들었다. 붉은색과 금색은 부귀함뿐만 아니라 강건함을 상징하지. 이걸 덮어주면 새아기가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이야.”
이번에는 화사한 붉은색의 장의를 들어 보인 금채영이 나긋하게 웃었다. 커다란 꽃이 수놓인 장의는 건장한 사내가 입을 만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액막이 의미였으니 문제없었다.
“아, 그렇지. 혁위야. 새아가가 어떤 꽃을 좋아하느냐?”
“예?”
“한참 수를 놓다가 생각해 보니 새아가가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있더구나. 다음에는 새아가가 좋아하는 꽃을 수놓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모란? 작약? 연꽃? 사내이니 국화나 매화?”
“음. 모릅니다.”
“이런. 지아비가 무심하구나. 새아가가 깨어나면 꼭 물어보거라. 알겠지?”
“예, 그러겠습니다.”
다정다감한 금채영의 말에 진혁위는 그냥 웃었다. 확실히 자신은 류희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이 없었다.
“사소해 보이더라도 그런 것을 잘 챙겨야 하는 법이란다.”
이어지는 금채영의 조언은 너무나 평범했지만 진혁위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놓는 것을 좋아하고 아들과 며느리의 옷을 제 손으로 직접 짓는 것을 즐기는 금채영은 살벌한 황궁의 후궁전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도 자태가 고운 금채영은 젊은 시절에 미색이 대단하여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마음이 여리고 소심한 데다 어려서 입궁한 탓에 후궁전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늘 숨죽여 지냈다.
그녀는 다른 후궁들과 어울리지 않고, 수를 놓고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황제의 총궁으로 화려하고 부귀한 삶을 살기보다는 단란한 일가를 이루는 것이 더 어울리는 성격이었다.
다른 후궁들은 그녀에게서 진혁위와 같은 아들이 태어난 것을 부러워하면서도 비웃었다. 어미가 저리도 변변치 못하니 아들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제대로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고 말이다.
사실 진혁위는 어머니에 대한 정이 별로 없었고, 효자도 아니었다. 다른 황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모의 손에 큰 탓도 있지만 원래 성격이 그러했다. 어려서는 근심 많은 어머니의 충고가 귀찮다고 여겼고, 잘난 아들이 되기보다는 제멋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다 못해 다시 한번 생을 반복하면서 금채영을 다시 보게 되었다. 황궁에서 황제의 아들을 무탈하게 키워낸 것만으로도 그녀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황후나 황귀비의 세력에 들지 않고 홀로 조용히 숨죽여 지내는 것 또한 그랬다.
그런 이유로 진혁위는 다시 생을 반복하면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효자 흉내를 내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예전처럼 어머니의 잔소리가 듣기 싫다고 문안 서신만 보내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앞으로 일 년이 더 지난 후, 금채영은 폐렴으로 목숨을 잃었다. 지난 생에 진혁위의 회한이 있다면 류희겸을 잃은 것과 어머니의 사랑을 귀찮아한 것이었다.
“차회에 가서 딴 사람에게 눈길 주지 마라. 그랬다가는 혼날 줄 알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귀비만큼 어여쁜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네 마음이 그러니 황후께서 너무하시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 새아가가 아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조용히 갔다가 조용히 돌아오면 됩니다. 황후 마마의 면은 세워드려야지요.”
대가의 부인들이 여는 차회는 몇 가지 목적으로 구분되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차를 즐기며 회합을 가지는 자리였고, 또 하나는 차회를 빙자하여 젊은 남녀가 맞선을 보기도 했다.
미혼의 황자가 결혼 적령기에 이르면 황후는 차회를 열어 명문가의 부인과 규수를 초대하여 차를 대접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미혼의 황자와 후궁전의 어른들이 참석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현 황후는 회합과 맞선을 통합시켜 차회의 규모를 키웠다. 황자들 말고도 왕공과 황친의 자제들도 초대했다. 매년 여름이 끝날 무렵에 열리는 차회는 황후의 위세를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진혁위도 이전 생과 이번 생을 살면서 열여섯이 되기 전에 황후의 차회에 참석했었다. 얌전히 앉아 있기는 했으나 어떤 규수가 어여쁘냐는 황후의 물음에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결국 그 일로 황제에게 불려가기까지 했었다. 진혁위는 황제의 앞에서 여리고 가느다란 규수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말했다.
용감하다 못해 무도하기까지 한 발언이었으나 황제는 그저 웃음을 터트리며 네 마음에 드는 규수가 나타나면 혼인을 하라고 해주었다. 다복하게 일가를 꾸리고 살면서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하는 황자에게 내리기에는 파격적이기까지 한 배려였다.
황제의 총애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진혁위가 열여섯이 되어 황궁을 나갈 때는 친왕으로 삼아 남부 곡창지대를 봉작지로 하사했다.
어렸을 때는 황제의 총애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나이를 한참 먹고 나서야 황제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진혁위가 봉작을 받을 때도 태자와 기왕의 대립은 노골적이었다. 기왕은 한창 혼인을 통해 세를 키우고 도당을 만들었다. 거기에 4황자까지 가세하면서 정치판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황제는 성격이 강한 진혁위가 황제가 되겠다고 요란스레 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혼인을 하여 세력을 키우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진혁위는 스무 살이 되도록 측비 하나 없는데도 황후의 차회에 참석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올해는 황후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측비를 들였으니 지금부터라도 혼인을 하여 세를 키울까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황후 측의 사람과 연을 닿게 하려는 의도도 있을 터였다.
너무 빤히 보이는 수작이었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초대를 받았으니 황후의 체면을 세워드리는 것이 아들의 도리였다.
좌승상이 실각을 하고 그의 아들 둘이 모두 비명횡사를 하고 말았지만 황후도 태자도 위세가 꺾이지는 않았다. 황후의 숙부들과 그의 아들들이 정계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황후와 태자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면서도, 좌승상을 대신할 만한 구심점이 없기에 잡음이 많았다.
능력이 되지 않는 태자가 조급해 하자 새로운 측근들이 기왕과의 대립을 부추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황후가 중간에서 조율하고 있기에 태자가 버티고 있었다. 여기서 황후가 사라지면 태자는 말 그대로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진혁위는 황후에게 원한이 있었다. 어려서 괴롭힘당한 것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전 생에 금채영이 폐렴으로 죽은 것은 황후 때문이었다.
황후에게 꼬투리를 잡힌 금채영은 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에 무릎을 꿇고 빌다가 풍한이 깊어져 폐렴을 얻었다. 약도 제대로 듣지 않아 겨울이 가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진혁위는 분노했다. 효자는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죽음에 초연할 수는 없었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황후를 빠른 시일 내에 치워버려야 했다.
황후의 비리는 잔뜩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황제를 움직이다 못해 황후를 끌어내릴 만한 것도 몇 되었다.
태경은 물론이고 지방에 흩어져 있는 황족을 감독하고 보좌하는 종인부(宗人府)의 수장인 유월춘(兪月椿)과 황후는 어려서부터 가문끼리 친한 사이였다. 부모님들끼리 혼인 이야기가 오갔다는 것은 양가의 오랜 하인들만이 아는 이야기였다.
황족과 황친을 관리, 감독하고 비리를 감찰도 하는 종인부의 수장이 가지는 힘은 막강했다. 그래서인지 황후는 종인부의 수장인 유월춘을 이용하는 데 주력하고 있지만, 유월춘은 황후에게 아직 마음이 남아 있었다. 혼인을 하여 자식도 여럿 두었으면서.
유월춘이 황후를 위해 여러 일을 도모하면서 두 사람은 사사로이 만나고 있었다. 황후가 황궁 밖을 나갈 수 없으니 주로 유월춘이 황후궁을 찾았다. 황궁의 엄격한 예를 지키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물론이고 비빈이 정사에 간섭할 수 없다는 규율도 여긴 것이다.
황태후가 안 계신 상황에서 황후가 황후궁은 물론이고 후궁전을 장악하고 있기에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고 있긴 했다. 하지만 한 번 틈이 생기면 순식간에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황제는 의심이 많았다. 아무리 황후가 황제의 유순하고 현명한 조력자라고 하더라도 부정을 의심받기 시작하면 끝이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차회도 멋질 것 같습니다.”
진혁위는 중의적인 의미로 난장판을 기대했다. 그 때 마침 미시(未時)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황후의 차회가 곧이었다.
*
차회가 열리는 황후궁의 후원은 호화롭게 꾸며졌다. 다른 후궁들과 다르게 황후궁에는 넓은 후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몇 대 전의 황제가 황후를 위해 궁을 하나 허물고 꽃이 만발하는 화원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늦여름의 햇살을 가리기 위해 후원 곳곳에 새하얀 차양이 드리워졌다. 바람을 일으키는 풍륜과 늙은 호박보다 큰 얼음은 차회의 사치스러움을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늘은 청명했고 바람은 적절하게 불었다. 우아한 다기에서 은은한 차향이 피어오르는 와중에 예의 바른 대화가 오갔다.
황후가 여는 차회에 참석하는 인원 대부분은 고관대작의 대부인들과 그들의 자녀였다. 결혼 적령기의 자녀들을 황후와 비빈들, 그리고 황자들에게 선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특혜이자 힘이기도 했다.
황자녀와 혼인을 하여 황제를 장인으로, 시부로 두는 것은 가문의 경사였다. 특히 아직 원비가 없는 황자들과 연을 맺는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런 탓에 저마다 미모와 재치가 뛰어난 자식들을 데려와 차회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들었다.
차회의 흐름을 이끄는 것은 황후의 인척이라고 할 수 있는 대귀족가의 대부인이었다. 그녀는 유려한 말솜씨로 차회에 참석한 대부인들과 규수들에게 말을 건네며 대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했다. 오늘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10황자 진영서와 11황자 진충가가 주목을 받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진혁위의 차례가 되었다.
“영왕께서도 원비를 맞이하셔서 혜비 마마의 근심을 덜어드려야지요.”
“맞습니다. 아직 측비 한 분뿐이시잖습니까.”
“중양절 연회에는 왕비 마마와 함께 참석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진혁위의 하나뿐인 측비가 한 달 가까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그런데도 왕비를 맞이하라고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잘생긴데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진혁위는 인기가 많았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저마다 어느 정도 황후와 인연이 있었지만, 그래도 영왕비의 자리라면 욕심을 내기 충분했다.
“본왕과 어울려 대등하게 검을 겨룰 수 있는 자가 어여뻐 보이니 별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과 엮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진혁위는 가벼운 말투로 거절했다. 대연국에서도 진혁위와 호각으로 싸울 만한 사람은 두 손으로 겨우 꼽을 정도였다. 그들 모두 조정에 출사한 군인이니 진혁위의 왕비가 되기는 어려웠다.
“여인 중에 영왕 전하와 검을 겨를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지요. 하(夏)나라의 엽국희(葉菊熙)가 살아 돌아와야 할 터인데.”
“강건한 영왕 전하와 제대로 겨루기를 할 사내도 드물지 않습니까?”
“영왕비 마마를 뵈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어요.”
진혁위에게 사내를 좋아하는 기벽이 있다 아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웃어넘겼다. 황제가 진혁위에게 네 마음에 드는 사람과 혼인을 하라고 한 것은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류희겸을 측비로 들일 수 있었던 것도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영왕도 다복하게 일가를 이루어야 할 터인데, 어찌하려고 합니까?”
황후가 쐐기를 박듯이 진혁위의 진심을 확인하려고 했다.
“소자가 마음에 드는 이를 들여야 아껴줄 수 있지요. 어여쁘지 않으면 얼굴조차 보기 싫어질 터인데, 그렇다면 다복이고 뭐고 아무 소용이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황후 마마께서 세심히 살펴주시는데, 소자의 성격이 이러하여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영왕의 마음에 드는 이를 찾으라고 하셨으니 죄송하다 하지 마십시오.”
“망극하옵니다.”
“영왕과 견주어 검을 겨울 수 있는 자를 찾길 바랍니다. 자, 차를 듭시다.”
적당한 곳에서 대화를 끊은 황후는 우아하게 차를 들이켜며 속으로만 웃었다. 진혁위가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은 황후로서는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다.
객관적으로 진혁위는 꽤나 괜찮은 신랑감이었다. 미남에다, 호탕한 성격에, 축첩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호감을 보이는 이들이 많았다. 진혁위는 또한 양인에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지금껏 한량으로 살아오기는 했으나 최근 희교국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면서 출중한 실력을 뽐냈다.
본인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혼인을 통해 세를 키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에 드는 이와 혼인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황후로서는 좋은 징조였다.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자라고 하더라도 처가의 지지 없이는 보위를 가질 수 없는 법이었다.
황후는 진혁위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의 간계에 걸려 모영록이 좌천을 당하고 말았다. 모영록이 아무 비호도 받지 못하는 곳에서 기왕이 보낸 독을 마시고 죽은 것도 따지고 보면 진혁위 탓이었다.
하지만 황후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지금 다급한 것은 진혁위가 아니라 기왕이었다. 좌승상이 실각하면서 황후의 친정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것은 모두 기왕 때문이었다. 지금도 태자를 몰아붙이며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었다.
기왕만 치워버리면 진혁위 따위야 천천히 말려 죽일 수 있었다. 그의 천한 귀비까지 말이다. 그렇기에 황후는 진혁위가 바보 같은 고집을 부리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꺄아아악!”
악의를 숨기며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황후는 경박하게 들리는 비명 소리에 인상을 썼다. 차회에 참석한 손님들도 비명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끊이지 않는 비명과 함께 우당탕거리는 소란은 황후궁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뜻밖의 상황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일반 사가에서도 저런 비명이 들려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법도가 엄정한 황후궁에서라면 더더욱 그랬다.
진혁위는 다른 사람들처럼 놀란 표정을 지으며 황후궁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상궁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상궁이 황후의 귓가에 무엇을 속삭이는지는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온화하던 황후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지는 것은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그건 차회에 참석한 사람들 역시 목격하였다.
“황후 마마. 무슨 일이옵니까?”
진혁위가 차마 묻지 못하는 것을 어린 후궁이 물었다. 그사이에도 황후궁에서 소란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황후는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누가 봐도 수상했다. 그 와중에도 비명과 소란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불길함이 사람들 사이에 전염되었다.
“경순! 경순! 어디에 있소! 경순! 이거 놓아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사내의 목소리에 황후는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모경순(牟璟順). 그것은 황후의 이름이었다.
그 순간 황후는 아무 생각할 수 없었다. 갑자기 황후궁을 방문한 유월춘이 난동을 피우고 있다는 상궁의 말에는 당황했다.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적당한 선에서 수습될 줄 알았다. 하지만 유월춘이 커다랗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게 들리자 아득해졌다.
황후의 이름을 알고 있는 몇몇 대부인들 역시 황망한 눈빛으로 주변 사람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들은 지금 상황이 평범한 소란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황후 마마. 소란이 커질 듯하오니, 차회를 파하심이 어떠신지요.”
“맞습니다. 모두의 안전이 중요하…….”
“경순! 도대체 어디 있냔 말이다!”
다들 상황을 수습하려고 노력했지만 사내의 목소리는 바로 지척에서 들려왔다. 불길함을 느낀 몇몇 참석자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야 했을 정도였다.
황후의 이름을 부르는 괴한은 곧 정체를 드러냈다. 봉두난발의 한 사내는 망측하게도 겉옷을 벗어던지고는 바지가 줄줄 내려가다 못해 일부는 찢겨 있기까지 했다. 거기에 핏줄이 선 눈은 번들거리기까지 해서 광인의 모습이나 다름없었다.
“꺄아!”
“어머니!”
해괴하고 망측한 괴한의 등장에 대부인들은 비명을 지르는 어린 딸을 품에 안았다. 누군가는 뒤로 물러나려다가 의자에 발이 걸려 바닥에 나뒹굴었다. 탁자가 넘어지며 아름다운 다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지는 아수라장 속에 광인은 한 걸음씩 황후에게 다가갔다.
“경순이 여기 있었어! 여기에. 왜?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냐!”
광인이 횡설수설 말을 할 때마다 황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궁과 궁녀들이 황후에게 달라붙어 피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용감한 태감들이 광인 앞을 막아섰지만 역부족이었다. 태감이 넷이나 달라붙었지만 광인은 괴력을 내며 모두 떨쳐냈다.
“오지 마라. 오지 마!”
발작적인 황후의 외침은 공허했다. 상황이 점점 위태로워지자 진혁위는 극양군(克陽君)의 차자와 함께 움직였다. 광인은 발악을 하듯 날뛰면서 진압이 어려웠다. 그러다 금군시위들이 달려오면서 겨우 광인을 붙잡을 수 있었다.
평화롭던 차회는 그렇게 박살 난 채로 끝을 맺었다.
*
“으하하하! 내가 그 난장판을 봤어야 하는데. 거시기가 덜렁덜렁거렸단 말이지.”
오늘 오후에 열린 황후의 차회에서 일어난 혼란을 전해 들은 채제승이 자신의 무릎을 치며 경박하게 웃었다. 진혁위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마지막에 몸부림을 치던 유월춘의 바지와 속곳이 모두 뜯겨나가면서 잔뜩 발기한 성기가 훤히 드러났다.
“최악이었지. 약을 너무 세게 썼던 모양이야. 그렇게 날뛸 줄은 몰랐어.”
보기 싫었던 장면을 뇌리에서 얼른 지워버린 진혁위는 투덜거렸다.
“어설프게 하는 것보다는 확실한 게 낫지. 그래서 이렇게 쾌거를 올렸잖아. 안 그래?”
“그건 맞아.”
채제승이 희희낙락하는 모습에 진혁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일은 모두 채제승의 계략이었다.
황후궁의 궁녀를 회유하고, 황후의 필적을 흉내 내어 유월춘을 불러낸 것도, 그에게 미약과 마약이 섞인 차를 마시게 한 것도 모두 채제승의 노력이었다.
태자를 향한 그의 원한은 무시무시했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거라며 무색무취한 약을 어렵게 구하며 대비한 것도 채제승이었다.
“황제께서 어찌하실지 궁금하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실까? 응?”
“그러니까 제대로 소문을 퍼트려야지.”
“물론. 걱정할 것 없어. 내일이면 태경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야. 덜렁덜렁이면 다들 좋아한다고.”
진혁위는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탕탕 두드리는 채제승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황제의 변덕을 믿지 못했다.
황제와 황후는 서로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정치적 동반자였다. 황후는 황제가 무엇을 하든 적극 지지했다. 하여 황제는 황후가 후궁전에서 부리는 행패를 적당한 수준에서 눈감아 주었다.
무엇보다 체면을 중시하는 황제지만, 황후궁에서 난동을 일으킨 외간 남자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보여준 행보를 보자면 유월춘을 파직시키는 것으로 최대한 조용히 수습하려고 할 터였다.
진혁위는 유월춘의 파직만을 바라고 일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사라지면 황후의 힘이 크게 줄기는 할 테지만, 제일 좋은 것은 황제의 손으로 황후를 끝장내는 것이다.
오늘 차회에 참석한 사람은 쉰 명이 넘었다. 아무리 단속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입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내일이면 차회에서 난동을 피운 광인이 유월춘이라는 것이 태경의 저잣거리에 퍼질 것이다.
물론 그것만이라면 황후는 그저 피해를 받은 사람일 뿐이었다. 채제승이 할 일은 황후와 유월춘이 서로 연모하여 혼담이 오간 사이였다고 소문을 퍼트리는 게 중요했다. 서로를 잊지 못하고 사사로이 만나 정을 통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다 못해 기왕을 움직이게 만들 것이다.
두 사람이 정을 통하지는 않았지만 사사로이 만난 것은 사실이었다. 거기다 유능하기는 하나 치밀하지 못한 유월춘은 황후가 보낸 서신을 태우지 않고 모두 모아두고 있었다. 서재를 뒤지면 지금껏 황후가 유월춘에게 시켰던 일들이 모두 까발려진다.
황후가 사사로이 종인부의 수장과 연락을 주고받은 것은 정치적인 문제였다. 서로 정을 통한 게 아니더라도 황제의 분노를 사기는 충분했다. 좌승상이 있었다면 유월춘의 서재를 싹 비웠겠지만 지금은 그것까지 생각하고 지휘할 사람이 태자 측에 없었다.
“영왕야. 연락이 왔습니다.”
“들라.”
진혁위의 시종이 서신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꽃시장 한쪽에 위치한 다루(茶樓)는 채제승이 운영하는 곳으로, 접선할 때 쓰는 장소였다.
겉봉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서신을 받아 펼쳐 본 진혁위는 활짝 웃었다. 안에는 단 두 글자만 적혀 있었다.
대노(大怒). 황제가 이번 일에 제대로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아주 좋은 징조였다.
“어떠냐?”
“직접 봐.”
진혁위는 잔뜩 기대하고 있는 채제승에게 서신을 넘겼다. 그러자 채제승도 좋아라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잘됐군.”
“그렇지.”
이번 생에 진혁위가 가장 고심하고 공을 들인 일 중에 하나가 황궁에 사람을 심는 것이었다. 그중에 총관태감에게 빚을 지운 것은 최고의 성과였다.
태감부의 수장이자 황제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는 총관태감은 황후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황궁의 권력자였다. 눈치가 빠르고 기민한 그는 황제의 오랜 충복이기도 했다.
총관태감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하나 있었다. 명문가의 규수들과 다름없이 귀하게 자란 딸은 황후의 먼 친척과 혼인을 했다. 총관태감은 딸이 고생하지 않게 어마어마한 지참금을 쥐여 보냈다.
문제는 딸과 결혼한 사위가 속이 시커먼 나쁜 놈이었다는 점이었다. 겉으로는 다정하고 예의 바른 준걸처럼 보였으나 남편으로는 낙제점이었다. 고자의 딸이라고 부인을 무시하고 축첩을 하다못해 손찌검까지 했다. 총관태감의 딸은 아버지가 황후와 사이가 나빠질까 봐 입을 다물고 버텼다.
진혁위는 총관태감을 은밀히 불러 남편에게 맞아 턱이 시퍼렇게 멍든 딸을 만나게 해주었다. 총관태감을 만난 딸이 펑펑 우는 것을 보며 진혁위는 그 자리를 비켜주었다.
황후와 황제의 체면 때문이라도 총관태감의 딸이 이혼을 하는 것은 어려웠다. 대신에 총관태감은 비밀리에 사위를 죽였고, 진혁위는 그 사실을 모르는 척해 주었다.
대연국에서는 남편이 죽었을 때, 자식이 없고 시부모를 봉양할 남편의 형제가 있다면 부인은 친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재혼까지도 가능했다.
지옥과 같았던 결혼 생활을 끝낸 총관태감의 딸은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게 이 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총관태감에게 빚을 지운 진혁위는 간단한 부탁을 했다. 필요할 때 황제의 기분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황제와 대신들 사이에 오간 대화나 정무에 관련된 것이 아닌, 그저 기분만 살펴봐 달라고 하는 어렵지 않은 부탁을 총관태감은 별 거부감 없이 들어주었다.
타인의 손에 들어간다면 증거가 될수 있을 서신에는 아무 설명 없이 황제의 기분을 나타내는 단어만이 적혀 있었지만, 직접 얼굴을 맞대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하기도 했다. 사람과 쉽게 사귀는 진혁위의 친화력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기대해도 좋아. 내일 오후가 되면 황궁 깊숙한 곳에 앉아 계시는 황제 폐하의 귀에도 무조건 들어갈 테니까.”
채제승이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에서 총관태감이 보낸 서신을 태워버렸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눈 진혁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까지 나가 진혁위를 배웅한 채제승은 다시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으면서 인상을 썼다. 일은 너무나도 잘 풀리고 있었다. 좌승상은 실각했고, 황후도 벼랑 끝으로 몰렸다. 황후만 잘 처리되면 이제 남은 것은 태자뿐이었다.
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지만 이런 날을 위해 인내했다. 오랜 인내는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또 안 마셨잖아.”
채제승은 인상을 풀지 못하고 진혁위 앞에 두었던 찻잔을 노려보았다. 진혁위가 즐겨 마시는 용화음(龍和音)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진혁위의 변화는 미묘했다. 여전히 잘 웃었지만 화사하게 빛나는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고 먹고 마시던 것이 딱 끊겼다. 용화음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것이 벌써 보름째였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진혁위가 요란하게 총애하던 귀비가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채제승 역시 태자의 패악질에 크게 다친 아내의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이 있었기에 진혁위의 마음이 어떤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괜찮을 거라고 위로의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정인이 무탈하게 깨어날 때까지는 결코 괜찮아지지 않을 테니까.
“느낌이 안 좋은데.”
언제나 최악을 준비하는 게 버릇이 된 채제승은 불길함에 인상을 썼다. 이대로 류희겸이 깨어나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지금껏 채제승이 류희겸을 만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목봉을 위압스럽게 휘두르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세상 무서울 것 없이 굴던 진혁위가 티 나게 챙기는 것도 신기했다.
이십 년 넘게 혼인을 하지 않고 있던 진혁위가 화진국의 귀장군을 귀비로 삼았다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뭔가 계산이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류희겸에게 빠져 금은보화를 떠안긴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결국 그렇게 된 거냐고 헛웃음을 지었다. 사내인 류희겸에게 여인이 쓸 화려한 화잠을 선물한다고 우소진이 우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었을 때는 단단히 빠졌구나 싶었다.
가장 놀란 것은 따로 있었다. 진혁위는 채제승에게 류희겸의 고모부인 남준해 장군 휘하의 부하들 중에 노비가 된 이를 구제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채제승이 알고 있는 진혁위는 사람과 쉽게 가까워졌지만, 곁은 잘 내어주지 않았다. 그런 그가 위험을 감수하고도 화진국의 일에 개입하는 것을 보면 진심이 된 듯했다. 그러기에 더욱 걱정스러웠다.
지난가을, 류희겸이 천무동에 들어갔을 때는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태연하던 진혁위였다. 헌데 이번에는 힘겹게 버티고 있는 모습이었다. 오랫동안 준비한 대계를 내팽개칠 성격은 아니었지만, 사람 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법이었다.
“얼른 깨어나셔야 합니다.”
채제승은 천신이 아닌 류희겸에게 기원했다.
*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영왕부로 돌아온 진혁위는 바로 경화당으로 향했다. 원래부터 조용했던 경화당은 주인이 쓰러진 후로는 더 고요해졌다.
류희겸이 깨어나면 바로 알리라고 일러두었다. 황궁에서도 다루에서도 낭보를 기다렸으나 아무 소식이 없었다. 영왕부로 돌아온 진혁위를 마중한 우소진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경화당에 들어설 때면 혹시나 하고 기대하게 되지만, 짙은 약향은 떠나기 전과 똑같았다.
“영왕야를 뵙습니다.”
물병을 들고 안채에서 나오던 심양설이 진혁위를 발견하고는 예를 올렸다.
“귀비는?”
“침을 맞고 계십니다.”
“옥안인이 애를 쓰는군.”
그날 이후로 옥안인이 류희겸의 신병을 돌보고 있었다. 침을 써서 류희겸을 일어나게 할 수는 없지만 자극을 주어 몸이 굳는 것은 막아낸다고 했다.
진혁위는 옥안인에게 류희겸이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동안에 어느 한군데 상한 곳이 생기지 않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인지 옥안인은 매일 아침저녁 지극정성으로 류희겸에게 침과 뜸을 놓고 약을 지어 올렸다.
속으로 혀를 찬 진혁위는 안채로 들었다. 심양설의 말대로 옥안인이 류희겸의 곁에서 침을 뽑고 있었다.
“영, 영왕야를 뵙습니다.”
소리 없는 진혁위의 등장에 옥안인은 침을 쥔 채로 무릎을 꿇었다. 얼굴에 침을 잔뜩 꽂은 류희겸을 본 진혁위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던 일을 계속해라. 귀비를 저리 둘 것이냐?”
“예. 그러겠습니다.”
진혁위의 명령에 옥안인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침을 마저 뽑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진혁위가 호랑이같이 눈을 빛내며 지켜보고 있는 탓에 침을 뽑는 옥안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옥안인은 원래 진혁위를 무서워했다. 사기꾼으로 쫓기고 있을 적에 진혁위의 손에 의해 구해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진혁위의 손에 도륙 나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기에 두려움이 머리와 가슴에 쿡 박히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진혁위가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얼마 전에 류희겸이 어째서 깨어나지 못하느냐고 호통을 칠 때는 기절을 할 뻔했다.
실수를 했다가는 목이 달아날지도 몰랐기 때문에 옥안인은 정신을 집중했다. 그나마 진혁위가 침을 놓을 때 도착하지 않은 것이 천운이라고 여겼다.
옥안인이 침을 다 뽑자마자 진혁위가 축객령을 내렸다.
“얼른 나가라.”
“귀비 마마께 약을 지어 올리겠나이다. 따뜻할 때 드시게 하시옵소서.”
“안다. 어서 나가.”
진혁위의 재촉에 옥안인은 예를 올리고는 침방을 나갔다. 지금부터 석반을 들 때까지 둘만 있을 생각이라는 것을 눈치챈 우소진 역시 조용히 뒷걸음질을 쳤다.
모두가 사라지자 자리에서 일어난 진혁위는 금채영에게서 받아 온 붉은 장의를 류희겸에게 덮어주고는 침상 끝에 걸터앉았다. 붉은색과 대비되어 더욱 창백해 보이는 류희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진혁위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위락호에서 죽은 류희겸의 시신을 관에 넣고도 뚜껑을 덮지 못하고 지금처럼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오갈 데 없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온갖 것을 다 집어 던지고 걷어찼다. 차마 망자를 조각 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멱살은 잡았다. 이리 죽으면 다 끝이냐고, 왜 그랬냐고, 말을 해보라고 소리쳤다.
생을 반복하면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지금은 기분대로 행동하지 않을 정도의 참을성이 생겼다. 그러나 속은 시커멓게 썩어가고 있었다.
열여섯 살의 몸에서 눈을 뜬 이후로는 류희겸을 다시 만나기 위해 살아왔다. 다시 그를 만나면 죽여버리겠노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그러나 결국은 죽이지 못했다. 오히려 다시 마음을 빼앗겼다. 이전 생과는 다른 사람이니 괜찮지 않을까 마음이 말랑하게 변해버렸다.
류희겸 역시 생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역시나 칼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자신을 바보 멍청이라고 욕하는 것도 이제는 지겨웠다.
마음은 여전히 오락가락했다. 지금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류희겸의 멱살을 잡고 외치고 싶었다. 세상에 미련이 없어 이러는 것이냐? 이리하여 나를 괴롭히는 것이냐?
살려달라 빌지 않은 류희겸은, 당장에라도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진짜 유서를 남겼다. 백진호에게 금광에서 캔 황금을 써서 화진국의 황자인 진한재를 죽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진한재를 죽여야 하는 이유도, 진혁위에게 남기는 말도 없었다.
씩씩거리며 패물함에 들어 있던 유서를 꺼내 읽은 진혁위는 기가 막히다 못해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사내라는 것을 알고도 기대한 자신이 잘못이라고 인정해야 했다.
“진한재.”
진혁위는 류희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언급했다. 진한재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화진국의 19황자. 숙왕. 지난 생에 위락호에서 화진국의 대군을 이끌었던 총지휘관이었던 사내였다.
이번 생에서 류희겸에 대한 정보를 끌어모으면서 두 사람이 제법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진혁위는 화진국의 내부 정보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은 알지 못했다.
그래도 백진호에게 원수를 알려주고 폐금광의 황금을 써서 죽이려고 하는 이유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만큼 원한이 깊다는 것이었다. 제 손으로 죽이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죽이고 싶을 만큼.
류희겸에게 원한을 살 법한 것이야 하나밖에 없었다. 고모부가 역모를 획책했다는 누명을 썼다고 했으니, 그 배후가 진한재라는 소리였다.
진혁위는 자신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건 류희겸의 입으로 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진한재라고 한 것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했다.
“일어나라. 일어나서 내게 말해.”
진혁위는 어제 했던 말을 다시 했다. 혹시나 하고 바랐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류희겸은 여전히 침상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왕야. 석반 시간이옵니다.”
나갔을 때처럼 조용히 안으로 들어온 우소진이 진혁위를 불렀다. 진혁위는 류희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귀비가 영영 깨어나지 않을 모양이다.”
“왕야. 소인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네가?”
“옥안인의 말로는 혼이 빠져나간 것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류희겸이 정신을 잃은 지 열흘이 되어갈 때쯤에 옥안인이 어떤 가능성을 제시했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체온이 낮으며, 맥박도 느린 것은 혼이 빠져나간 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라는 것이었다. 책으로 보기만 했기에 확언할 수는 없으나, 보통 이런 자들은 서서히 몸이 쇠약해져 죽는다고 말하는 바람에 진혁위의 노여움을 샀다.
“태사령(太史令)에게 보이는 것이 어떠십니까? 왕야께서 신령을 싫어하시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아야지요. 황제 폐하께 청하면 들어주실 겁니다.”
“태사령은 안 된다. 그는 태자의 사람이다.”
“그렇습니까?”
“정확히는 좌승상의 인척이지.”
풍수와 음양, 천문, 점복 등을 관장하는 태복감의 수장인 태사령은 황제를 독대하여 직언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신궁을 손에 쥔 황제는 천자의 위엄을 내세우며 괴력난신을 맹신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귀가 얇아 결정적인 순간에 태사령에게 부추김을 당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진혁위는 태사령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생을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보고도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간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아직 좌승상의 영향력이 남아 있을 태사령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류희겸이 불길하다고 황제에게 고하기로도 한다면 진혁위의 힘으로는 수습이 불가능했다.
“허면 신사의 사령이라도.”
“허튼소리. 귀비에 대한 헛소문이 저잣거리에 나돌게 둘 성싶으냐?”
차갑게 일갈한 진혁위가 의자 손잡이를 강하게 두드리는 바람에 우소진은 황망히 고개를 숙였다. 진혁위가 신령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도 망령되게 입을 놀린 자신의 잘못이었다.
“소인이 실언을 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알면 되었다. 다시는 신사고 사령이고 언급하지 마라.”
“명심하겠나이다. 이제 석반을 드시러 가시지요.”
“입에 뭘 넣고 싶지 않다.”
“조반도 몇 술 드시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뭐라도 드셔야 합니다. 이러다가 왕야께서도 쓰러지십니다. 몸이라도 상하시면, 나중에 깨어난 귀비 마마께서 슬퍼하실 겁니다.”
망부석이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진혁위를 향해 우소진은 간곡하게 청했다. 류희겸이 쓰러진 이후로 진혁위는 자는 것도 먹는 것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 정도가 심해서 옆에서 지켜보는 우소진의 속이 다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우소진이 아는 진혁위는 호탕한 성격에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것처럼 굴었다. 겨우 열여섯 살에 산적 무리를 도륙하고도 그날 저녁에 아무렇지 않을 얼굴로 석반을 들었다.
이리 예민하고 초조하게 구는 진혁위는 처음이었다. 이러다가 류희겸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진혁위도 큰일이 날까 봐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슬퍼하기는. 좋아하겠지.”
“예?”
“아니다. 석반을 들러 가겠다. 귀비가 좋아하는 꼴은 못 보겠다.”
우소진은 진혁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었다. 그래도 진혁위가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니 그저 다행이라 여겼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혁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 ◇ ◇
류희겸은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사위는 컴컴했지만 자신이 경화당의 침방에 누워 있다는 것은 알아차렸다. 침상의 기둥도 천개도 모두 익숙한 것이었다.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류희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침방이 맞기는 한데 뭔가 이상했다.
다친 사람들을 영왕부로 보낸 다음에 갑자기 정신을 잃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릎이 꺾이며 넘어지는 와중에 의식이 끊겼다. 주위에 진혁위도 영왕부의 시위도 있었으니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다행히 영왕부로 무사히 돌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무엇인지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위화감에 류희겸은 침방 내부를 둘러보았다. 가구나 물건은 화봉사로 떠나기 전과 다름없었다. 화병에 꽂힌 꽃은 바뀐 것 같지만 그래도 생생했다.
한참을 여기저기 살피던 류희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촛불이 모두 꺼져 있어 사위가 컴컴했다. 그런데도 침방 안의 물건이 모두 제대로 보였다.
“무리해서 데려왔더니, 깨어나는 게 늦었어.”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류희겸은 그대로 굳었다. 곧이어 마치 신기루처럼 자신 앞에 나타난 인영의 모습에 아연해지고 말았다. 맞은편에 선 사내는 자신과 꼭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는 것뿐이었다.
류희겸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의심했다. 동시에 무림에서는 사람의 얼굴로 된 가면이 있다는 것도 기억해 냈다.
“누구냐?”
류희겸은 잔뜩 몸을 긴장시키며 물었다.
“알 텐데.”
“말장난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이미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인간.”
인간이라는 단어에 류희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인간이라고 부른 존재는 단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하고 활짝 웃고 있는 사내는 이무기였다.
이무기라니. 류희겸은 컴컴한 동굴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커다랗고 길쭉한 생물을 떠올렸다. 노란색 눈동자는 위협적이었지만 자신에게 아무 해도 가하지 않았다. 검은 이무기에게 과일을 주고 만독화를 받아온 것이 인연의 전부였다.
직전 생에서는 이무기를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 어떤 변수가 이렇게 직접 이무기를 찾아오게 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도 신령한 생물이니 신중하고 조심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쯤은 알았다.
“예.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제 모습을 하고 계십니까?”
“별거 아니야.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라서. 다른 사람으로 할까?”
“예.”
류희겸이 대답하자마자 이무기의 모습이 바뀌었다. 수염이 있는 중년의 사내였다. 근엄하게 생겼으나 이무기가 활짝 미소를 짓고 있는 바람에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다.
“누구입니까?”
“정만현. 장군이라고 했어.”
정만현 장군이면 류희겸 이전에 천무동에서 만독화를 가지고 나온 적이 있었다. 류희겸은 진실로 눈앞의 존재가 이무기라는 것을 확실하게 믿었다.
“제게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하문하십시오.”
“너 뭐냐?”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류희겸은 인상을 썼다. 이무기에게 악의가 있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너는 뭐냐고 묻는 것은 이상했다.
“류희겸입니다.”
“이름 말고.”
“무엇이 궁금하신지 자세히 물으십시오.”
“흐음. 너는 인간이 맞잖아. 헌데 어찌 살아 있는 거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무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짐작은 했지만 류희겸은 모르는 척 굴었다. 그러자 이무기가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니 씩 웃었다.
“내가 승천을 앞두고 죄를 지어 천년 동안 동굴에 갇혀 지내야 했지. 별로 안 좋았어. 축축하고, 어둡고, 제대로 먹을 건 없고. 그러다 태양의 과실이 먹고 싶어졌는데, 그게 별로 안 좋았어. 집착은 한 가지 생각만 하게 만들었거든. 천년이 지나고도 빌어먹을 집착 때문에 동굴을 떠날 수가 없었어. 정만현이 준 사과 씨로는 만족하지 못했고. 그런데 무슨 운명인지, 네가 태양의 과실을 가져왔단 말이지. 그걸 먹고 하늘에 올랐어. 신기한 일이야. 안 그래? 일신을 옭매는 것이 없어졌으니 여기저기 돌아다녔어. 바다라는 게 궁금해서 남해에도 갔었고. 그러다가 네 놈이 무얼 하나 궁금해서 찾았는데, 이상하더란 말이지. 이무기일 때는 몰랐지만, 용이 되고 나니 인간의 명운을 보게 되었단 말이야. 아무리 봐도 너는 죽어야 할 사람인데, 그런데 지금 이렇게 살아 있잖아?”
빙긋 웃으며 이어지는 긴 이야기에 류희겸은 몇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무기는 더 이상 이무기가 아니라 용이 되었다. 그리고 말이 많은 용은 궁금한 것도 많은 것 같았다.
류희겸은 용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용을 속여 화가 미치는 것보다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기연을 얻었습니다.”
“어떤 기연이지?”
“목숨이 더해질 거라는 축례를 받았습니다. 하여, 생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딱 맞춰 가져왔구나. 그렇지? 그때 날 보는 게 처음이 아니었던 거지?”
“예. 맞습니다.”
생을 반복하고 있다고 말해도 용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궁금했던 것의 답을 알아낸 것이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근엄한 중년 사내의 얼굴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소원을 들어주겠다.”
“……소원이요?”
“그래. 은혜를 입었으니 갚아야지.”
“사람을 죽여주십시오.”
순간 진한재를 떠올린 류희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자신의 삶의 목표이자 소원은 하나뿐이었다. 용의 힘을 빌려 진한재를 죽일 수 있다면 평생의 숙원이 단번에 해결되어 버린다.
자신이 사라져 버린다면 진혁위가 곤란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것보다는 복수가 먼저였다. 죄책감을 이겨낸 기대감에 심장이 뛰다 못해 숨이 턱 막혔다. 이게 꿈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는데 용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벌을 받고 있는 동안에 사람을 죽였다고 엄청 혼났거든. 젠장. 충성을 시험한다는 인간이 주변에 얼쩡거리는데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이상한 거지. 어쨌든 이번에 다시 사람을 죽이면 더 크게 벌을 받을 거야. 타락할지도 몰라. 용이 타락하면 무서워진다고. 딴 소원을 빌어라. 오래 살고 싶다면 천년 된 삼산을 구해다주마. 황금은 어떠냐? 인간치고 황금 싫다는 사람 없잖아. 안 그래? 평생 쓰고도 남을 황금을 줄게.”
용은 가슴을 펴며 호언장담했다. 긴 수명과 부귀영화. 모두 매력적이었지만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기에 류희겸은 내심 실망했다. 진한재만 죽일 수 있다면 둘 다 딱히 필요 없었다. 게다가 황금은 앞으로 잔뜩 생길 예정이었다. 류희겸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태경을……. 그러니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먼 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가능합니까?”
용의 힘을 빌어 아무 제약 없이, 화진국의 수도인 경릉까지 갈 수 있다면 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진한재의 등 뒤에 놓아달라고 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날붙이만 손에 들려 있다면 진한재를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다시금 희열이 피어오르려는데 용이 고개를 저었다. 용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누군가를 죽이러 가려는 거군. 그것도 안 돼.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명검을 달라고 해. 그건 가능하니까.”
“명검은 필요 없습니다.”
“까다롭군. 황금이 좋다니까.”
혹시나 하는 기대는 순식간에 꺼졌지만 그래도 류희겸은 실망하지 않았다.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뭔데?”
“이거, 꿈입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류희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긴장이 가시자 이상한 위화감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초와 등이 모두 꺼져 있는데도 방이 묘하게 밝았다. 마치 달빛이 방 안에 가득한 것 같았다. 거기다 바깥에서는 풀벌레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으니 방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릴 텐데도, 밖에서 번을 서는 이의 반응이 없었다.
류희겸은 화서지몽(華胥之夢)이 아닐까 의심했다. 자신이 바라는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용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꿈이야.”
“그렇군요.”
꿈속에서 꿈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류희겸은 쓴웃음을 삼켰다.
“억지로 데려오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지만, 깨어나면 곧 괜찮아질 거야.”
“억지로 데려왔다니요?”
“네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혼만 빼 왔거든. 괜찮아. 죽은 거 아니다. 생령이니 깨어날 수 있어. 아무 이상 없을 거야. 내가 장담해. 그것보다 빨리 소원이나 말해. 천년산삼? 황금? 명검? 응?”
“잠시만요. 생령이라니…….”
“안 죽었다니까. 깨어나면 괜찮다.”
싱글벙글 웃으며 용이 괜찮다고 했지만 류희겸은 괜찮지 않았다. 생령이란다. 이 정도면 꿈치고도 이상했다. 아무래도 얼른 깨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소원이나 말해라.”
디급한 용의 재촉에 류희겸은 피식 웃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신령스러운 존재가 소원을 들어준다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
눈을 깜박거린 류희겸은 이곳이 어디인지 잠시 생각하며 기억을 되짚었다. 복면 괴한들의 습격을 받은 후에 쓰러져서는 괴상한 꿈을 꾸었다. 용이 된 이무기가 나타나서는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류희겸은 길게 숨을 내쉬며 주위를 향한 오감을 끌어올렸다. 사위가 환한 것으로 보아 밤이 아니라 낮인 듯했다. 그리고 바깥에서 새 소리도, 마당에서 물을 뿌리는 시녀들의 말소리도 들려왔다. 이번에는 꿈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며 류희겸은 천천히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팔팔했던 꿈속과 달리 팔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오른손을 내려다보니 달달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꽤 오래 누워 있었던 모양이었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마마? 마마! 깨어나셨군요!”
류희겸은 커다란 목소리로 사람을 부르자 심양설이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뭔가를 닦고 있었던 듯 그녀의 손에는 수건이 들려 있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심양설이 울 것 같은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분위기를 보자니 자신이 꽤나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것 같았다.
“괜찮네. 내가 얼마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한 달이 훌쩍 넘었습니다.”
“이런……. 몸이 안 좋은 이유가 있었군.”
꿈을 꾼 것은 아주 잠시였는데, 한 달이 넘게 지났단다. 류희겸은 자신의 몸 상태가 안 좋은 이유도 깨달았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제대로 먹은 게 없을 테니 손이 떨릴 만도 했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왕야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다고요.”
“왕야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어전회의가 있어 입궁하셨습니다.”
“그래?”
류희겸은 날짜를 가늠했다. 그날로부터 한 달이 넘었다면 거의 여름의 끝이었다. 직전 생에서 진혁위는 희교국의 반란을 진압한 공적으로 어전회의와 편전회의에 참석하며 정계에 발을 딛는다. 그때보다 빨리 태경으로 돌아왔지만 진혁위의 행보는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마마가 깨어나셨다는 것을 아시면 왕야께서 좋아하실 겁니다. 너는 가서 우 공공께 귀비 마마께서 정신을 차렸다고 전하거라. 얼른.”
심양설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시비가 빠른 걸음으로 물러났다. 류희겸은 문득 우풍이를 떠올렸다. 마지막에 보았던 것이 등에 화살을 맞아 정신을 잃은 모습이었다.
“풍이는?”
“살았습니다. 뼈를 다친데다가 여름이라서 상처가 덧나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무사합니다. 이제 곧잘 팔을 움직입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류희겸은 자신이 정신을 차린 것보다 우풍이가 무사하다는 것이 더 기뻤다.
“우선은…… 뭐라도 드셔야 합니다. 그래야 힘이 나지요. 그다음에 씻으시고요.”
“그래. 그런데…… 이것은 뭔가?”
고개를 끄덕이던 류희겸의 눈에 여름 이불 위에 덮여 있는 붉은색 화려한 장의가 들어왔다. 화려한 꽃이 수놓인 장의는 어느 모로 보나 여성용 예복이었다. 이걸 자신이 왜 덮고 있는지 의아했다.
“혜비께서 마마의 무탈함을 바라시며 보내신 옷입니다. 붉은색은 액을 막고 복을 부르니까요. 혜비께오서 직접 수를 놓으셨다 합니다.”
“혜비 마마의 정성으로 깨어났군.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어.”
진혁위와 혼인을 한 지 일 년쯤 되었지만 류희겸은 금채영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아들이 혼인을 하는 것만으로 기뻐하며 신혼동방을 꾸미고, 류희겸의 혼례복을 준비한 것도 모두 금채영이었다.
직전 생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진혁위의 모비인 혜비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라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진혁위처럼 황후나 황귀비 등의 후궁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어도, 아들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이리 정성을 쏟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혜비의 처소에서 궁녀 생활을 시작했던 심양설은 류희겸의 반응에 흐뭇하게 웃었다. 심양설 역시 금채영이 보낸 장의가 효력을 발휘했다고 믿었다.
“그렇지요. 정성이 통했나 봅니다. 우선은 몸부터 추스르세요. 일어나시지 마시고요. 꿀을 넣은 꽃차부터 준비하겠습니다.”
심양설이 명령을 내리자 시녀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꿀차를 마시기 전에 소식을 듣고 달려온 우소진이 눈물 바람을 보였다.
“영왕 전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왕야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말로 다 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마마께서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당장에 달려오실 겁니다.”
콧물까지 흘린 우소진이 물러가자 심양설이 나섰다. 한 달 넘게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류희겸은 중환자처럼 취급받았다.
꿀차를 마신 다음에 약간의 죽을 먹고, 목욕을 하는데 심양설이 하나하나 모두 챙겼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말려주는 것도 심양설의 몫이었다.
긴 머리를 말려 묶어 올릴 때였다. 황궁에서 편전태감이 류희겸을 찾아왔다. 편전태감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황제뿐이었다. 의관을 정제한 류희겸은 태감을 맞이했다.
“영왕의 귀비 류씨는 입궁을 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시오.”
“류씨가 황제의 명을 받듭니다.”
우선 정중히 예를 올린 류희겸은 편전태감의 분위기를 살폈다. 금군시위가 나타나 강제로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입궁을 하라고 명을 내린 것을 보면 아주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황명은 좋은 징조라고 볼 수 없었다. 직전 생애에서도 황명에 의해 입궁하였다가 역적으로 몰린 적이 몇 번 있었다.
“장 공공. 황제 폐하께서 무슨 일로 부르시는지 아시는지요?”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에 대해 노비가 아는 것이 없사옵니다.”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편전태감은 그저 공손히 허리를 숙일 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태감들끼리 서로 감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황궁의 태감은 입이 무거워야 오래 목숨을 유지하는 법이었다. 입을 한 번 잘못 놀렸다가는 조용한 곳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디로 가는지만큼은 알려주시지요.”
“장현전이옵니다.”
장현전(張玄殿)은 황제와 대신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편전 중에 하나였다.
편전태감이 나타날 때부터 류희겸은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채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탄핵하거나 모함했을 것이다.
지난 생에서는 화진국에서 데려온 부하들의 신변 때문에 꼬투리를 잡혔다. 또한 화진국의 사자가 가져온 친서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제 부하는 없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보자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골치 아프겠군. 의심 많은 황제와, 그의 의심을 부추기는 대신들에게 둘러싸여 충성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류희겸은 의연히 굴었다. 어차피 최악이야 역적으로 몰려 목이 잘리는 것이었다. 백진호만 무사하다면 복수만큼은 할 수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폐금광을 사둔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진혁위에게 약간의 연민이 있다면 백진호에게 자신의 유서를 전달해 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 패물함에 넣어둔 유서를 확인했다.
심양설이 아주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진혁위가 유서를 보았노라고 알려주었지만 류희겸은 개의치 않았다.
마지막을 준비한다는 것이 이리도 든든한 줄은 몰랐다.
◇ ◇ ◇
황후궁의 후원에서 벌어진 사건은 바람보다 빠른 속도로 황궁 담을 넘었다. 차회에 참석한 인원만 오십 명이 넘었다. 대부분 왕공과 대귀족의 대부인들과 그들의 여식들이었고, 집으로 돌아간 그들이 내원에서 조용히 속삭이던 이야기는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저잣거리의 화제가 되었다.
종인령 유월춘이 망측한 모습으로 차회에 난입하여 발광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였다. 바지와 속곳이 찢기는 바람에 사내의 중요한 부위가 덜렁덜렁거렸다는 말에 다들 민망해 하면서도 웃음을 터트렸다.
자세한 사정이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누군가는 종인령이 실성했다고 욕을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횡액을 당한 황후를 걱정했다.
그 와중에 은밀한 소문이 하나가 퍼졌다. 바로 종인령과 황후가 부정한 관계라는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러했다. 두 사람은 어려서 혼약을 한 사이였다. 하지만 집안 사정으로 황후가 당시 친왕이었던 황제와 혼인을 했다. 첫정을 잊지 못한 두 사람이 지금까지 남몰래 만나고 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물고를 당할 불경한 내용이었지만 그랬기에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차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입에서 종인령이 황후의 명자를 마구 부르고, 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냐며 외쳤다는 말이 나오면서 신빙성은 더해졌다.
음인인 황후는 황제의 아이만을 가질 수 있었고, 다른 양인들과는 정을 통하지 못했다. 하지만 양인이 아닌 일반인들과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점점 덩치를 키워나간 소문은 황제의 귀에 닿다 못해 조정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황제는 황후의 차회를 망친 종인령을 파직하는 것으로 조용히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
종인령이 황후궁에서 마신 차에 미약과 마약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차를 내어준 궁녀는 고신을 받으면서도 결백을 주장하다가 죽어버렸다. 배후는 밝히지 못했지만, 어쨌든 미약과 마약이 든 차를 마시게 된 종인령이 계략에 빠진 것은 맞았다.
하지만 종인령과 황후가 부정한 관계라는 소문이 퍼지자 조용히 마무리하고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황후가 차회를 열고 있는 시점에 종인령이 황후궁의 안채까지 들어간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황후궁의 궁녀 몇몇에게서 종인령이 자주 황후궁을 찾아 사사로이 만나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조정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를 조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부정한 관계는 아니더라도 종인령과 황후가 사사로이 만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매일같이 성토했다.
태자의 모후이자 후궁전을 장악한 황후에게는 적이 많았다. 기왕 측의 중진들이, 그리고 후궁전에서 딸과 가족을 잃은 고관들이 조정의 일에 개입한 황후를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야무야 사건을 덮으려고 했던 황제 역시 마음을 돌렸다. 명분도 명분이지만, 황후가 사사로이 조정의 관리와 만났다는 것은 황제의 위엄과도 관련된 일이었다.
황제가 종인령에서 파직된 유월춘을 조사하라고 명한 지 하루가 지나지 않아 물증이 나타났다. 유월춘의 서재에서 발견된 서신이 황후와의 관계를 알려주었다. 황후가 종인령을 움직여 종인부의 힘으로 여러 황친들을 핍박한 정황이 드러나 있었다.
제대로 체면을 구긴 황제는 분노했다. 황후에게 연금을 명하고 종인령은 광산으로 보내버렸다. 조정에서는 황후의 처우에 두고 논박이 계속 이어졌다. 이번 일은 단순히 내명부에서 일어난 소란이 아니라 조정의 기강과 관련된 문제였다.
강경파들은 황후를 폐하거나 사사(賜死)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건 너무 과하다는 반박도 있었지만 힘을 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황제가 결단을 내리지 않았기에 어전회의는 며칠 동안 시끄러웠다.
그렇게 여름의 열기가 기울어갈 때였다. 동쪽 국경에서 내달려온 파발이 화진국의 친서를 가져오면서 정국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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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왕 전하. 왕부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귀비께서 깨어나셨다고 하옵니다.”
대전으로 향하던 진혁위는 늙은 태감이 전한 소식에 우뚝 멈춰 섰다. 정오가 살짝 지난 오후였다. 이른 새벽에 영왕부를 나서기 직전에 본 류희겸에게서는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았었다.
“귀비가 깨어났다고?”
“예. 우소진이 사람을 보냈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늙은 태감은 진혁위의 눈에 익은 자였다. 어전에 들지는 못하지만 굵은 주름이 생길 때까지 황궁에서 버틴 태감은 우소진과 제법 친분이 있었다. 그가 굳이 자신을 찾아와 거짓을 고할 이유는 없었다.
진혁위는 고개를 돌려 오문(午門) 쪽을 바라보았다. 마음은 당장에라도 왕부를 향해 뛰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 후에 대전에서 어전회의가 있었다. 희교국의 반란을 진압한 후 황제의 하교로 처음 참석하는 어전회의였다.
기분대로 회의에 빠졌다가는 황제의 명을 대놓고 어긴 것이니 뒷수습이 어려웠다. 진혁위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류희겸이 정신을 차렸다고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운문형을 붙여놓았으니 쉬이 놓치지 않을 것이다.
진혁위는 늙은 태감에게 은자가 들어 있는 각낭을 통째로 넘기며 회의가 끝나는 대로 왕부로 돌아갈 거라는 기별을 넣으라고 명했다.
“귀비께서 깨어나셨다니, 다행한 일이옵니다!”
진혁위와 함께 대전으로 걸어가던 장군이 커다랗게 외쳤다. 옆을 지나가던 대신들도 그 소리를 듣고는 진혁위에게 다가와 축하를 건넸다.
반란의 주동자인 희교국의 마지막 왕자를 사로잡아 승전을 한 진혁위는 최근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황제는 기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엄청난 하례품에 친왕의 격을 높여주기까지 했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사은이었지만 어심의 방향에 사람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화봉사에서 돌아오던 길에 도적을 만난 귀비가 한 달 넘게 정신을 잃고 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황제가 태의까지 보내어 살폈지만 차도는 없었다.
화진국에서 이름 높은 장군에서 노비로, 그리고 영왕의 귀비가 되고 황제에게 만독화를 바쳐 부귀영화를 누릴 일만 남은 류희겸의 끝이 허무하다고 다들 한마디씩 하며 잊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몇몇은 영왕이 새로운 부인을 맞이하지 않을까 발 빠르게 계산했다.
진심이야 어떠하든 경사를 축하하며 눈도장을 찍으려는 이들이 진혁위 곁으로 모여들었다. 마지막에는 기왕까지 마주했다.
“근심을 덜었구나. 그래서인지 얼굴에서 화색이 돈다. 잘되었다.”
가벼운 축하 인사를 한 기왕은 호탕하게 웃으며 지나쳤다. 모든 것이 좋아질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진혁위는 방심하지 않았다.
지난 생에 진혁위는 아직 희교국의 마지막 왕자를 사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도 오늘 어전회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 알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칼날이 류희겸을 향해 휘둘러질 것이다.
진혁위는 전장에 나서는 군인처럼 각오를 다지며 대전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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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국과 화진국은 같은 조상을 뿌리로 둔 형제 나라였다. 오랫동안 꾸준히 교류를 하고 국혼을 하며 화친을 유지했다. 그러나 천천히 그 사이가 멀어지다가, 오 년 전 화진국이 대연국의 번국을 차지하며 틀어졌다.
화진국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과거 양번국 일대는 화진국의 영토였는데, 호양성을 차지한 군벌이 대연국에 투신을 하면서 땅의 주인이 바뀌고 말았다.
원주인이 영토를 되찾는다는 명분에 대연국은 반발했다. 하지만 마침 공교롭게도 대연국의 북서쪽의 국경지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진흉족(津凶族)과의 대규모 접전이 계속되면서 조용히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대연국과 화진국은 겉으로는 친교를 유지하면서도 미묘하고도 노골적인 신경전을 벌였다. 대규모 사신단이 몇 번 오가기는 했지만, 전과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화진국에서 사신단을 보내겠다는 친서가 온 것도 이 년 만이었다. 문제는 친서에 사신단의 방문을 조율하자는 내용 외에, 화진국의 역당인 류희겸을 내달라는 것도 적혀 있는 것이었다.
대진국의 황제는 류희겸을 살려두는 것으로 양번국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었다. 황제의 뜻을 알고 있는 대신들은 아예 화진국의 사신단을 본국에 들이지 말라고 고했다. 천무동에서 살아 돌아와 만독화를 바쳐 대연국의 충신이 된 류희겸을 달라는 것은 후안무치한 짓이라고도 했다.
물론 류희겸을 옹호하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친왕의 귀비 류씨가 충신이라는 것은 대연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허나 류씨가 화진국에서 역모를 일으켰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류씨의 흠결에 화진국에서 이리 기세등등하게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류씨가 황제 폐하의 충신이라면 명예로운 죽음으로써 충정을 표해야 합니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사의준이 깊게 머리를 조아리며 류희겸이 자결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쳤다. 대전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진혁위는 진절머리를 쳤다.
지난 생에 진혁위는 이 시점까지 만부영을 쫓고 있었다. 화진국에서 친서를 보내온 것을 두고 류희겸의 자결에 대해 논의가 있었다는 것은 전해 듣기만 했다. 그때도 미쳤다고 속으로 욕을 했었는데, 지금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기가 막혔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류희겸이 죽음으로 충정을 증명해야 한다는 웃기는 소리를 한 사의준은 태자 측의 사람이었다. 본의 아니게 태자와 척을 진 때문에 류희겸의 이름이 대전에서 언급되자 바로 공격이 시작되었다.
방탕한 황자로 지낸 진혁위는 지금 시점으로 따지면 대전에 든 적이 몇 번 없었다. 하지만 생을 반복하고 있기에 정쟁의 협잡함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제좌를 가지기보다 서역으로 떠나는데 더 매력을 느끼는 것도 편협한 싸움이 끔찍하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태자만 깔끔하게 죽여 채제승과의 약속을 지키고 먼 곳으로 떠나버리는 것에 더 마음이 기울 지경이었다. 죽음을 위장하면 황제나 기왕에게 쫓길 염려도 없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도 진혁위는 류희겸을 옹호하지 않았다. 태자 측에서 류희겸이 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적극 반대할 이들은 따로 있었다.
“신(臣) 태경부윤(太京府尹) 표동하가 아뢰옵니다. 영친왕의 귀비가 자결하는 것이야말로 화진국에서 바라는 일이옵니다. 그의 충정은 양번국을 되찾는 것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화진국이 가장 꺼리는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영친왕의 귀비를 살리시고 화진국의 사자를 내쫓으소서.”
기왕의 일파 중에 한 명인 표동하가 류희겸의 쓸모를 알렸다. 그가 나서자 기왕 쪽의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태자와 기왕의 대립은 계속 심화되고 있었다. 특히 지난가을 수렵제에 늦어 연금을 당한 기왕은 기어코 군 지휘권까지 빼앗겼다. 기왕은 봄이 될 때까지 태경의 왕부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왕이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자기 사람들을 단단히 집결시켜 태자를 견제했다. 최근 어전회의나 편전회의는 태자와 기왕의 기싸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모든 형제들과 사이가 나쁜 태자와 달리 기왕은 형제들과 제법 유한 관계를 유지했다. 형제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대형이라는 위치에서 포용력을 보였다. 특히 노골적으로 황위에 관심이 없는 티를 내는 진혁위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태자가 진혁위를 공격하면 기왕이 막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류희겸이 자결을 해야 한다는 사의준의 주장도, 그리고 류희겸을 살려서 귀하게 써야 한다는 표동하의 주장도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대신들은 류희겸이 죽어야 한다 살아야 한다 하며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그 와중에도 진혁위는 입을 다물었지만 속으로는 욕을 했다. 한 달을 넘게 정신을 잃고 있었던 류희겸이 기적적으로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 바로 조금 전이었다. 대전 앞에서 소란이 있었으니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터였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린 이를 향해 자결을 해야 한다, 살려야 한다고 떠들어대고 있으니 속이 뒤틀렸다. 그래도 진혁위는 꾹 참았다.
무엇보다 무어라 떠들든 마지막에 결정을 내리는 것은 황제였으니 불필요한 말을 얹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태자가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폐하. 소자는 영왕의 뜻이 궁금하옵니다. 모두 영왕의 귀비가 충정을 증명해야 한다고 하는데, 영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태자의 말을 들으니 짐도 궁금하구나. 영왕은 어찌 생각하느냐?”
지금껏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황제의 지목에 대전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해졌고, 진혁위는 속으로 혀를 찼다.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는 태자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미 만독화를 바쳐 충신이 된 류희겸의 충정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황제의 의심병은 익숙해질 게 아니었다.
거기다 황제는 자연스럽게 진혁위까지도 시험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적당히 황제의 입맛에 맞게 아첨을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속이 뒤틀렸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낼 만큼 진혁위는 멍청하지 않았다. 아주 태연하게 손을 앞으로 모아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께 아뢰옵니다. 소자의 귀비는 이미 황제 폐하께 약조를 드렸습니다. 호양성을 되찾고, 자신의 쓸모가 다하면 목숨을 내어놓겠다고 하였습니다.”
차분히 울리는 진혁위의 대답에 대전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황제와 류희겸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으니 쉬이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었던 진혁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벌써 일 년 전의 일이었다. 익문사의 취조를 받다 황제 앞에 선 류희겸은 호양성을 되찾아 드리겠다며 자신의 쓸모를 피력했다. 주인을 문 개는 쓸모가 다하면 죽이는 법이라고 과감히 말하여 황제의 환심을 샀다.
황제 역시 그날을 기억해 냈다. 당당히 제 목숨을 내걸던 류희겸을 살린 것은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쓸모 때문이었다. 류희겸을 앞세워 호양성을 수복한 후에 실추된 명예를 되찾고 화진국을 조롱하려 했다. 영왕이 그를 측비로 삼겠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 않은 것도 화진국에서 자랑하는 장군을 비웃으려는 의미가 컸다.
의심이 많은 황제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제 충정을 증명한다며 천무동에 자청해서 들어간 류희겸이라면 호양성을 되찾고 난 다음에 죽으라고 명한다면 죽을 거라고 여겼다.
다만 황제가 혹시나 하고 의심하는 것은 진혁위였다. 첫눈에 반해서 류희겸을 샀다고 말했었다. 첫정이라서 그런지 총애가 지극하다는 이야기는 황제의 귀에도 한 번씩 들어왔다. 혼인을 한 지 일 년이 지났지만 류희겸이 천무동에 들어간 시간과 진혁위가 반란을 진압한 시간 동안에 떨어져 있던 것을 따지면 그들은 아직 신혼이었다.
혹시나 진혁위가 반발하지 않을까 슬쩍 떠보았는데, 꽤나 만족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충현의 충정은 짐은 물론이고 만백성이 다 아는 사실이다. 짐은 그의 충정을 죽음으로 확인하지 않겠다. 허나 나라 간의 화친은 태평성대를 위해 꼭 필요한 법. 화진국의 사신을 맞이하여 형제국의 우의를 다지겠다.”
황제는 류희겸을 충현이라 칭하며 총애를 드러냈다. 하지만 화진국의 사신을 쫓아내야 한다는 기왕 쪽의 주장은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아무도 황제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고, 그대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회의는 곧 끝났고 황제는 대전을 빠져나갔다. 웅성거리며 남은 대신들 사이로 태자가 제 사람들을 끌고 사라졌다. 그리고 기왕은 진혁위에게 다가왔다.
기골이 장대하고 풍체가 좋은 기왕은 전형적인 무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외모만큼이나 기질 역시 직설적이었다.
“영왕. 어전회의는 처음이던가? 신고식이라고 여기고 넘겨버려. 똑똑하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야.”
“형님의 말씀을 새겨듣겠습니다.”
“그럼 되었다. 너랑 한잔 마시고 싶은데, 계속 시간이 맞지 않는구나. 어떠냐?”
“소제가 요즘 그럴 정신이 없습니다.”
“아, 그렇지. 그럼 나중을 기약하도록 하지. 또 보자.”
짧게 인사한 기왕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태자가 형제들을 질투하고 노골적으로 견제한다면, 기왕은 아량 넓은 대형처럼 굴면서 조용히 독을 보냈다. 허니 누구 하나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대하고, 아름답고, 화려한 아귀다툼이 벌어진 대전을 천천히 빠져나온 진혁위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
대전을 나온 진혁위는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류희겸을 보러 당장에 영왕부로 뛰어가고 싶은 것을 참으며 진혁위는 늙은 태감을 따라 움직였다. 황궁의 편전 중에 하나인 장현전의 내실에 들자 황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니, 자리에 앉아라.”
진혁위는 황제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태감이 곧 차를 내어왔다.
“소자를 빨리 보내주십시오. 귀비를 보러 가야 합니다.”
“성격도 급하구나. 문강공(文剛公)의 여식인 주화령(周花怜)을 아느냐?”
“통성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얼굴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문강공이 상소를 올렸다. 너를 보고 한눈에 반한 여식이 가슴앓이를 하다못해 자리를 보전하고 누웠다고. 몇 번이고 매파를 보냈으나 그때마다 거절을 당했다며 급한 마음에 상소를 올린다고 말이다.”
차를 마시던 진혁위는 놀랐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제가 그걸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요즘 영왕부에 얼마나 많은 매파가 찾아오는지 부황께서는 모르실 겁니다. 일일이 상대하기도 번거로워서 모두 다 거절하고 있습니다.”
“너답구나. 그래도 이제는 원비를 들여야지.”
황제의 권유 역시 기억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았다. 지난 생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그때보다 시기가 빠른 것은 희교국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시기가 앞당겨진 탓이라고 추측했다.
진혁위는 황제의 의도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다. 지금껏 혼인을 하지 않고 방탕하게 사는 것을 눈감아 준 것은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지금은 혼인을 통해 세를 불려야 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오 년 전과는 권력 구도가 바뀌었다. 태자는 좌승상을 잃고 황후까지 추문에 얽히면서 세가 약해졌다. 그에 비해 황제에 의해 힘이 빠져야 했던 기왕은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불구가 된 4황자도, 역모에 휩쓸린 8황자도 모두 쓸 만한 패가 아니었다.
지난 생에서는 힘이 빠진 기왕을 대신해 태자를 견제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래도 기왕과의 대립을 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문강공은 꽤나 강력한 처가가 되어줄 것이다.
전에는 결혼을 하지 않을 거라고 극구 거부하는 바람에 황제의 역정을 샀다.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지금은 좀 더 여유롭게 웃을 수 있었다.
“부황께서 소자에게 시키실 일이 있으니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호양성을 되찾고 난 후에 신년이 되면 소자가 혼담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오. 그렇지.”
“그때가 되면 소자와 혼인을 하고 싶어 하는 이가 산더미처럼 늘어나 있겠지만, 약조는 꼭 지킨다고 전해주십시오. 황제 폐하께서 중매를 서주시는 것 아닙니까.”
“하하하. 좋다. 내 문강공에게 그리 말을 해두겠다.”
“예.”
진혁위는 호쾌하게 대답했다. 지난 생과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혼인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문강공의 여식인 주화령이 상사병에 빠진 상대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내였다.
출사는 했으나 한미한 가문 출신인 사내가 문강공의 눈에 차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진혁위를 사위로 점찍어 두고 있던 문강공은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황제에게 매달렸다. 영달을 좇는 속물다운 뻔뻔함이었다.
이번 일은 진혁위가 굳이 손을 댈 필요도 없었다. 지난 생에서는 진혁위가 호양성을 점령하고 태경으로 돌아오기 직전, 주화령이 길거리에서 사내와 끌어안고 있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결국 주화령과 사내는 야밤을 틈타 사라지고 말았다. 서쪽 국경 어디선가 목격되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이후로 본 자가 없었다.
이후 황제가 몇 번 더 진혁위에게 혼인을 하라고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황제의 역정을 샀지만 의심 또한 사지 않았다. 덕분에 마지막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다 엎어버릴 수 있었다.
“너는 황후를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평화로운 대화 끝에 황제가 덫을 깔았다. 진혁위는 황제의 고약함에 속으로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무릎을 꿇었다.
“소자를 용서하십시오. 황후 마마를 처벌하여야 한다 하면 어머니께 불효를 하는 것이고, 용서하여야 한다 하면 고심하고 계시는 황제께 불충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말은 잘하는구나. 일어나라. 내가 답답해서 그런다. 이번 일 때문에 골치가 다 아프다.”
황제의 손짓에 진혁위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미리 답을 정한 황제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시험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진혁위는 황제가 황후를 사사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시간을 끄는 대신에 당장에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실권을 빼앗고 연금을 하거나, 혹은 폐서인을 시킬지를 두고 고민하고 있는 게 뻔했다. 폐서인은 모르겠지만 연금으로 끝난다면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진혁위는 다음 단계를 계획했다.
“황제 폐하. 영왕의 귀비 류씨가 들었사옵니다.”
“이제 왔군. 들라 하라.”
영왕의 귀비 류씨. 류희겸을 지칭하는 소리에 진혁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입구 쪽을 보았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 정말 류희겸이 내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눈을 감고 누워 있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창백한 얼굴은 전보다 생기가 없었지만 기백은 여전했다. 겹겹이 껴입은 예복도, 매끄럽게 빗어 올린 머리도, 곧은 걸음걸이도 모두 반듯했다.
진혁위는 감격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처음 알았다. 당장에 일어나 껴안고 싶은 것을 참느라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아마도 황제는 화진국의 친서와 사신단 때문에 류희겸을 불렀을 확률이 높았다. 대신들 앞에 류희겸을 세워두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진혁위는 조용히 류희겸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걸어온 류희겸은 편전의 정중앙에 서서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복을 누리소서.”
“일어나라.”
“황공하옵니다.”
황제의 명령에 류희겸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상황을 살폈다. 편전에 불려왔는데 대신들은 보이지 않고 진혁위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직전 생에서는 대신들이 있는 대전 한가운데 세워 충성을 확인하려고 했다. 그때와 다른 상황이라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티를 내지 않았다.
“몸은 어떤가?”
“황제 폐하의 보살핌에 무탈하옵니다.”
류희겸이 너무 깨어나지 않자 황제가 태의를 보냈다는 것을 심양설에게 전해 들었다. 허니 황제에게 인사부터 하는 것이 좋았다.
“화진국에서 친서가 왔다. 너를 내어놓으라 하더군.”
“소인이 황제 폐하의 걱정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죽으라 명하십시오. 죽겠습니다.”
그대로 무릎을 꿇은 류희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겠다 말했다. 혼신을 다한 연기였지만, 절도 있는 모습은 황제를 만족시켰다.
“죽지 말고 살아서 호양성을 내게 가져오면 된다. 일어나라.”
“폐하의 은덕에 보답하겠나이다.”
“화진의 황제가 조급한 모양이야. 사신단을 보낸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다. 사신이 와서 무슨 말을 할 것 같으냐?”
“소인을 내어놓으라 할 것입니다. 그것도 아니면 역모를 일으킨 역적이니 죽여야 한다고 할 것이고, 역도를 품은 대연국은 무도한 나라라 매도하며, 황제 폐하의 성심을 어지럽힐 것입니다.”
생을 반복한다는 것은, 같은 상황에서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류희겸은 황제의 성향을 알고 있었다. 성군으로 불리기를 바랐지만 실상은 담이 작고 지는 것을 싫어하는 소인배였다. 누구 하나 믿는 사람 없이 의심하고 시험하기를 반복하며 충성을 검증했다.
대연국을 방문한 화진의 사신은 황제 앞에서 무도한 말을 내뱉었다. 황제에게 류희겸을 죽이는 것이 황제의 위신을 세우는 것이라고 충동질했다. 황제는 류희겸을 살리는 것이 화진의 황제를 골탕 먹이는 것이라고 여겨 그에게 죽으라 명하지 않았다.
황제는 다른 사람의 조언에 반대되는 결정을 내리곤 했다. 죽이라고 하면 살렸고, 부와 명예를 손에 넣으면 축하해 주면서도 의심했다.
호양성을 되찾아 드리겠다 맹세하고, 만월제전에서 뛰어난 재주를 뽐내고, 천무동에서 살아 돌아와 만독화를 바쳐도 자신은 황제의 총신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 재주가 아까워서라도 버리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류희겸은 화진국의 사신이 황제에게 고할 말을 그대로 전했다. 정제되었으나 직접적인 단어는 거칠었다. 그러나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사신은 보통 달변가가 뽑히지.”
“소인에게 명을 내리십시오. 그들을 죽이라고 하면 죽이고, 모욕하라고 하면 모욕하겠습니다.”
류희겸은 황제의 입 안 혀라도 되는 것처럼 강경하게 굴면서도 선을 지켰다. 그걸 황제가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일이 잘못된다 하더라도 류희겸의 독단으로 벌인 것으로 마무리하며 책임을 물으면 그만이었다.
“죽이지는 말고, 나머지는 네 뜻대로 해보거라. 재미있는 것을 보고 싶다.”
“신명을 다하겠나이다.”
“그래. 물러나도 좋다. 영왕. 너도 같이 가거라.”
황제의 하명에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진혁위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류희겸 역시 예를 올리고는 진혁위의 뒤를 따랐다.
편전을 빠져나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류희겸은 눈앞에 걸어가는 커다란 등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지금 당장은 화진국에서 올 사신들보다 눈앞에 등을 보이고 걸어가는 사내를 상대하는 것이 더 걱정이었다.
*
광대한 황궁 심처에 위치한 편전에서 오문까지는 가는 길에 진혁위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앞만 보며 걸었다. 류희겸은 그저 부지런히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일행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대화가 없는 것은 괜찮았지만 걸음이 빠른 것은 힘에 부쳤다. 한 달 넘게 누워 있었더니 몸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기본 체력과 근력으로 버티고 있긴 했지만, 황궁에 오기 전에 먹은 것이 꿀차와 맑은 죽뿐이라 기력이 없었다.
결국 한참을 걷다가 결국 휘청거리며 멈춰서고 말았다. 어지러움에 갑자기 발이 붕 뜬 느낌이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진혁위가 아니라 류희겸의 옆에 있던 우소진이 황급히 팔을 잡아주었다.
“아, 괜찮습니다. 잠시 어지러웠던 것뿐입니다.”
“어지러워?”
앞서가던 진혁위가 어느새 바로 앞에 다가와 있었다. 어지러운 이마를 짚던 류희겸은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자세를 바로 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잡아라.”
“왕야?”
“어지럽다며? 왜? 나랑 손잡는 것도 싫으냐?”
류희겸은 자신 앞에 내밀어진 손과 진혁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평소처럼 웃지도 않고 심각하게 투덜거리는 모습은 낯설었다.
“황궁에 보는 눈이 많습니다. 혼자 걸을 수 있으니, 대신 조금 천천히 가주십시오.”
“흥. 볼 테면 보라지. 부인의 손을 잡고 간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것이냐. 기억하고 있을 테지만, 무환행궁에서는 네가 먼저 손을 잡았다.”
코웃음을 친 진혁위가 류희겸의 손을 잡고는 끌어당겼다. 결국 류희겸은 진혁위를 따라 나란히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꽉 붙잡은 진혁위의 손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울 정도였다.
“손이 차다.”
“왕야의 손이 뜨거운 게 아닙니까?”
“귀비의 손이 차갑다.”
“예.”
확신을 가지고 손이 차다고 하니 류희겸은 그러냐고 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개가 될 것이냐?”
“그래야 목숨을 부지합니다.”
“달리 할 말은 더 없고?”
“황궁을 나가면, 다하지 못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류희겸은 그렇게 진혁위의 손을 잡고는 황궁을 가로질렀다. 중간에 궁인들과 몇몇 관리들을 마주쳤지만 모두 허리를 숙여 길을 비켜주었을 뿐, 말을 걸지 않았다.
힘이 없는 와중에도 류희겸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생을 반복하기 전에는 대연국의 황자와 측비가 되어, 대연국의 황궁에서, 부군의 손을 잡고 걸을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었다. 인생이란 이렇게나 예측할 수 없었다.
천천히 걸어 오문을 나오자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류희겸이 마차에 오를 때, 마지막까지 손을 잡아준 진혁위가 짧게 경고했다.
“기절하면 물을 뿌려서라도 깨울 것이다.”
“예.”
“대답은 잘한다.”
진혁위는 같이 마차에 타는 대신 말에 올랐다. 황궁에서 영왕부까지는 금방이었다.
*
다행히 류희겸은 기절하지 않고 영왕부까지 버텼다. 진혁위는 영왕부에서도 류희겸의 손을 잡고 끌었다. 느린 걸음으로 도착한 곳은 왕부의 침전이었다.
“앉아라.”
진혁위의 손길에 이끌려 의자에 앉은 류희겸은 다시금 어지러운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거짓말하지 않고 땅이 울렁거렸다. 이대로는 긴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안색이 나쁘다.”
“기력이 없어 그렇습니다. 우 공공. 꿀차를 가져오게나. 단걸 먹어야겠어.”
류희겸이 명령을 내리자 우소진이 금방 대령하겠다고 하며 날래게 달려 나갔다. 맞은편 의자에 앉은 진혁위는 우소진이 꿀차를 들고 나타날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차를 대령한 우소진도 눈짓으로 내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희겸은 천천히 꿀차를 마셨다. 단게 들어가자 조금씩 머리가 맑아졌다. 향기로운 꽃향기에 문득 만월제전에서 진혁위에게서 꿀차를 얻어 마신 것이 기억났다. 그때도 이렇게 진혁위와 얽힐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오늘따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의 묘리를 깨닫는 것이 웃겨서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왜 웃느냐?”
얼굴을 굳히며 가만히 있던 진혁위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퉁명스러운 말투와 찡그린 얼굴은 진혁위답지 않았다.
“지난 만월제전에서 왕야께 꿀차를 얻어 마신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런 말을 한다고 내가 넘어갈 줄 아느냐? 이제 말해라. 진한재를 죽이고 싶은 것이 나를 배신한 이유라고?”
진혁위가 성마르게 재촉하는 바람에 류희겸은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진한재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을 안다면서 왜 배신을 했는지는 모르냐고 되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저는 진한재를 주군으로 모셨습니다.”
“……?!”
“가장 친한 친우였고, 형제처럼 여겼고, 또한 훌륭한 황제가 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가장 날카로운 칼이 되어, 가장 단단한 방패가 되어 영웅이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주인을 위해 날카로운 검이 되어 잘 쓰이기를 바랐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명예롭지 않더라도 죽으라 명했다면 기쁘게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한재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기만했다.
이곳이 아닌 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짓는 류희겸은 진지했다.
그 모습에 진혁위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고지식한 장군이 멍청한 주군에게 목숨을 바치는 일은 흔하다면 흔했다. 그런데 류희겸의 입에서 그 소리를 들으려니 괜히 속이 뒤틀렸다.
“그가 널 배신했군.”
“고모부님을 역적이라고 고발한 사람이 진한재가 심은 간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당신을 믿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게 왜?”
“당신이 진한재와 손을 잡은 걸 알고 있습니다.”
“……무슨.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적에 진혁위는 어리둥절했다. 누구랑, 무얼 했다고? 하지만 류희겸의 눈빛은 서늘했다.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그날, 왕야의 화로에서 타고 남은 서신을 보았습니다. 국화 문양의 직인이 찍힌 서신 말입니다.”
“직인이 찍힌 서신이라니……. 아, 설마 그거? 승전을 드리겠다고 헛소리를 적어놓은 거?”
“예. 국화 직인이 진한재의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니라고 하실 겁니까?”
“웃기지 마라. 내가 진한재와 손을 잡아?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서신을 덥썩 믿을 정도로 내가 바보인 줄 아느냐? 그게 함정일 수도 있는데? 설마, 겨우 그것 때문에.”
버럭 화를 내다가 이를 악무는 진혁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무서울 정도였다. 격렬한 반응에 류희겸은 눈을 깜박거렸다. 진한재와 손을 잡은 게 아니라고? 진혁위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자신이 오해를 했다는 의미였다.
“왕야. 그와, 진한재와 손을 잡은 게 아닙니까?”
“당연하지. 하. 이 무슨 바보 같은 일이. 좋다. 다시 확인하자. 그 밤에 그렇게 사라진 것이 서신 때문이었다고?”
“조금 더 복잡합니다.”
“말해라.”
“그날, 옥에 갇힐 때 조태환(趙太煥) 장군이 말하기를 저의 죽음을 바라는 이가 화진국에 있다고 했습니다. 예. 태자와 진한재가 한 편이 되었습니다. 진한재는 태자에게 화진국의 진영에서 약점이 될 만한 곳을 알려주어 승전을 하도록 도왔고, 그다음 저를 죽여달라 했습니다. 명령 불복종으로 옥에 갇힌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왕야께서 저를 감옥에서 빼내어 주셨지만, 왕야 또한 진한재와 손을 잡은 걸 알았으니 언젠가 저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여겼습니다. 또한 그곳에 남아 있었다면 조태환 장군의 손에 죽었을 겁니다.”
담담한 류희겸의 설명에 진혁위는 기가 막히다 못해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을 싫어한 게 아니라, 태자의 사주를 받은 게 아니라, 그저 살기 위해 도망을 친 것뿐이란다.
류희겸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만약에 사실이라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갈 곳 없는 분노가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혼자서만 가까운 사이라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재확인받는 것도 기분을 더욱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진혁위는 용암처럼 튀어나오려는 분노를 꾹꾹 눌렀다. 아직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하나만 더 묻자. 태자에게 천우상단(天宇商團)에 대해 말을 한 것이 너냐?”
“천우상단이요?”
“모르는 척하지 마라. 내가 양화 거리에 있는 상단에서 서역의 보석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기억은 나지만, 그게 왜……?
류희겸은 진혁위가 갑자기 천우상단에 대해 이야기하는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에서 진심을 읽어낸 진혁위는 다시 속이 쓰렸다.
사대부가 상업에 종사하여 축재하는 것을 천하다 여겼지만 황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문의 이름으로 상점을 사들이고, 믿을 만한 종복에게 운영을 맡겼다.
진혁위도 상점을 여럿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역으로 오가는 천우상단은 주인이 드러나지 않게 아예 숨겨놓았다.
그게 좌승상의 손에 박살 났다. 서역에서 들어오는 물품 중에 황제를 모욕하는 책이 있다는 이유였다. 오래도록 준비한 상단과 사람을 잃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대외적으로 천우상단의 주인은 따로 있었기 때문에 진혁위는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자가 노골적으로 증거가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지 않냐며 속을 긁어댔다.
마침 그때가 류희겸이 태자 휘하의 조태환 장군 밑으로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천우상단에 대해 태자에게 흘릴 사람은 류희겸밖에 없다고 여겼다.
위락호에서 전투를 준비하는 시점에 천우상단이 박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화가 났다. 옥에 갇힌 류희겸을 구한 것도 반쯤은 사실 확인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다.
오랜 원한이 서로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욕이 나오려는군. 모두 다 오해라고? 설마? 널 믿을 수가 있어야지.”
“믿지도, 용서하지도 마십시오.”
“용서하지 마라? 내가 널 죽이지 못한다고 얼마나 자신하느냐?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을 몰라? 햇볕 한 줌 들지 않은 지하에 가둬두고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진혁위는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고 이리 배짱을 부리나 싶었다.
목을 졸라버리고 싶다는 충동은 오랜만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류희겸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했다.
“오해여도, 오해가 아니어도 왕야께서 구해주신 은혜를 저버린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저는 왕야가 아니라 복수를 선택할 것입니다. 저의, 소인의 바람은 하나뿐입니다. 허니 소인의 목숨을 거두시고, 백진호에게 유서를 전해주십시오. 진한재를 저승길 동무로 데려가게 해주십시오.”
이마를 바닥에 댄 류희겸은 살려달라고 비는 대신에 고지식하고 뻔뻔하게 자비를 구했다. 자신 역시 진혁위를 믿지 못했다. 하지만 진혁위가 본인의 입으로 약속한 것을 지킨다는 것만큼은 믿었다.
어차피 자신의 목숨은 생을 다시 반복할 때부터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죽음을 앞두고는 언제나 막막했었다. 이번만큼은 죽은 후에도 다음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그란 뒤통수를 내려다보던 진혁위는 숨이 턱 막혔다. 류희겸이 제 목숨보다 복수를 더 바라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몸이 절로 움직였다.
진혁위는 거친 손길로 류희겸의 목덜미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죽음에 대비하는 얼굴은 긴장감으로 굳어 있었다.
“눈치 없는 귀비는 간신 따위는 못 되겠다. 네 목숨은 원래 내 것인 걸 잊었더냐? 그걸로 내 화가 가라앉을 것 같지 않은데. 응?”
화사한 미소와 달리 진혁위의 목소리는 얼음을 품고 있는 듯 차가웠다. 눈빛은 오싹할 만큼 날카로웠다. 류희겸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자신이 가진 것 중에 목숨 말고 무엇을 주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제가 무엇을 드려야 합니까?”
“네 손으로 진한재의 목을 자르고 싶지 않느냐? 남에게 맡기는 대신에 말이다.”
“……?!”
“진한재의 목을 주겠다.”
“왕야.”
류희겸은 활짝 웃는 진혁위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내 손으로 진한재의 목을 자른다고? 끔찍하게 달콤한 말이라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반면에 진혁위는 열렬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류희겸 때문에 더욱 진하게 웃었다. 진한재의 이름이 이렇게나 잘 먹힐 줄은 알았지만, 그래서 더욱 속이 쓰렸다.
류희겸을 용서할 수도, 그렇다고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진혁위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류희겸은 내 것이라는 소유욕이었다. 죽여달라고 비는 놈의 목을 잘라주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미끼를 던져서 제 스스로 복종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진한재의 목을 주고, 네 충성을 받겠다. 그래. 목숨이 아니라 충성이다. 말 잘 듣는 개처럼 납작 엎드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믿음을 증명해라. 내가 널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게 말이다.”
충성이란다. 류희겸은 웃고 있는 진혁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진한재를 제 손으로 죽일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충성은 다른 문제였다. 어쩌면 알량한 자존심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몰랐다. 충성을 바치겠노라는 말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았다.
“변절자의 충성을 믿지 마십시오. 아니, 변절자는 충성을 하지 못합니다.”
류희겸은 후회할 말을 했다. 그리고 진혁위는 맹랑한 말을 하는 류희겸을 보며 웃었다.
살려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충성을 믿지 말란다. 그러면서 형형히 빛나는 눈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이런 성격이라 그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지금만큼은 얌전히 고개를 숙이기를 바랐다. 쓰린 속이 더 쓰려지려고 했다.
“고지식한 건지, 멍청한 것인지 모르겠군. 네가 신의를 바치면 그만이지, 변절자를 왜 찾는 것이냐? 왜?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서 싫은 것이냐?”
“제가 가진 것을 왕야께 모두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충성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이리도 꽉 막혔으니, 너는 출세를 못 했을 것이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보아라. 무엇을 얼마나 줄지 기대하겠다.”
“신명을 바치겠나이다.”
진혁위가 붙잡고 있던 목덜미를 놓았기에 류희겸은 다시 엎드려 예를 올릴 수 있었다. 그제야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목표에 가까워졌다. 희열로 온몸에 열이 훅 치밀어 올랐다.
“일어나라.”
“예.”
진혁위의 하명에 류희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엎으려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몸을 일으키자 바닥이 울렁거렸다.
조금 전처럼 가벼운 현기증이라고 여기며 잠시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차 하는 순간에 몸은 이미 기우뚱거리며 넘어지고 있었다.
“희겸?!”
볼썽사납게 바닥에 쓰러진 류희겸의 의식은 아직 실낱같이 남아 있었다. 진혁위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류희겸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욕을 하고 말았다. 한 달을 누워 있기는 했지만 몸 상태가 이 정도로 엉망인 줄은 몰랐다.
진혁위 앞에서 정신을 잃은 것은 한두 번도 아니었다. 만월제전에서, 그와 교합을 하면서, 그리고 직전 생에서도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그래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시야는 순간 새카매졌다.
*
“류희겸!”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류희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느새 진혁위에게 안겨 상체가 반쯤 세워진 상태였다.
“정신이 드느냐?”
진혁위가 바로 코앞에서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류희겸은 의식을 잃은 것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왕야…….”
목소리에조차 힘이 없어서 류희겸은 당황했다. 정말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도대체……. 한 달 동안 제대로 먹은 거 하나 없이 누워만 있었으니.”
쯧, 하고 혀를 찬 진혁위가 류희겸을 안아 들어 올렸다. 류희겸은 괜찮다고, 내려달라고, 걸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운 것이 여전해서 제대로 설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가 없었다.
가뿐한 걸음으로 침방에 들어선 진혁위가 류희겸을 침상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침상 끝에 걸터앉은 진혁위가 커다랗게 우소진을 불렀다.
“우소진!”
“찾으셨습니까?”
재빠르게 나타난 우소진이 고개를 조아렸다.
“옥안인을 불러라. 귀비의 상태가 나쁘다.”
“편히 쉬셔야 하는데, 급히 움직이셔서 그러실 겁니다.”
“다 아는 이야기 늘어놓지 말고, 옥안인이나 데려와라. 어서.”
“얼른 대령하겠나이다.”
우소진이 후다닥 물러나는 발소리를 들으며 류희겸은 자신을 돌아보는 진혁위와 눈이 마주쳤다. 기분이 별로인지 표정이 냉랭했다.
“얼굴이 말이 아니군.”
“예.”
딱히 더 할 말이 없어서 류희겸은 멀뚱거리며 진혁위를 보았다. 그러자 냉랭했던 진혁위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 기분이 더 나빠진 것 같았다.
“졸리면 자라.”
험악한 인상과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진혁위가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졸리지 않습니다.”
“궁금한 게 있다.”
“하문하십시오.”
“지난 생에 어떻게 죽은 것이냐?”
뜻밖의 질문에 류희겸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버릇처럼 경계심이 먼저 일었다.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가진 걸 다 주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렇다면 네가 알고 있는 것도 다 토해 내야지.”
그렇게 말하면 또 납득이 되었다. 굳이 미주알고주알 떠들 필요는 없겠지만, 진혁위가 물으면 제대로 답하는 게 옳았다. 신의를 비치려면 숨기는 것이 없어야 했다.
“진한재를 죽이러 갔다가, 진천뢰에 당했습니다.”
“자세히 말해라.”
“위락호의 동쪽에 있는 귀족의 별장이 화진국 총사령관의 숙소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매복이 있었습니다. 매복에게 쫓기다가 활에 맞아 수로에 빠졌고, 물속에서 진천뢰가 터졌습니다. 그것 때문에 장이 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살아 있었던 것이 운이었군.”
“예. 그런데 왕야께서는…….”
류희겸도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겨서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왠지 캐물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왔다. 하지만 진혁위가 재촉했다.
“왜 말을 하다 마느냐? 내가 왜?”
“어찌 저를 찾아내셨습니까?”
결국 류희겸은 말을 끝맺었다. 위락호는 넓었다. 갈대가 가득한 호숫가 끝에 쓰러져 있던 자신을 진혁위가 어떻게 발견했는지 궁금했다.
아주 순수한 의문이었다. 그런데 진혁위의 구겨진 미간이 더 구겨졌다.
“근처에서 야전이 있었다. 후퇴하는 화진의 군졸들을 도륙했지. 해가 뜨고 돌아가는 길에 우연찮게 찾았다. 먼 곳으로 떠난 줄 알았는데, 그곳에 누워 있었어.”
기억을 떠올리던 진혁위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지난 생에, 류희겸의 마지막 모습은 끔찍했다. 팔은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고, 검푸르게 멍이 든 얼굴 한쪽은 부풀어 올랐다. 말라붙은 피와, 검은 재, 호숫가의 진흙으로 뒤범벅이 된 모습은 시체라고 해도 무방했다.
류희겸을 찾은 것은 우연이었다. 오합지졸로 후퇴하던 화진국의 병력을 처치하고 돌아갈 때였다. 시체들이 즐비한 호숫가에서 기이한 이끌림을 느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나빴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그곳에서 류희겸을 찾지 못했더라면 미친놈처럼, 그를 찾아 대륙을 뒤지고 다녔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과거를 잘라내지 못하고 끌어안았으나 뒤엉킨 실타래는 여전했다.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감정이 짜증나고, 화가 나는데도 벅찼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도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에게 마음이 흐르고 있었다. 목을 조르고 싶으면서도 입을 맞추고 싶었다.
얌전히 고개를 숙이게 만들어 복종시키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바로 직전이었다. 그런데 겨우 쓰러진 것 한 번 때문에 이렇게 안전부절못하는 것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데, 류희겸이 더 할 말이 있느냐는 식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그 모습조차 귀엽고 안타까워 보이는 것이 연심일 것이다. 빌어먹게도 말이다.
“왜 그리 보느냐? 손이라도 잡아줄까?”
“……?!”
“손을 잡고 있으면 아픈 게 조금 나아진다. 진짜 잡아줘?”
복잡한 감정과 별개로 가벼운 농담이 흘러나왔다.
손을 잡고 싶은 것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류희겸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눈빛을 보내는 것도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거침없이 하며 살아온 진혁위는 자유로운 천성대로 움직였다.
“싫다 좋다 말을 해야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류희겸이 어정쩡하게 대답하는 사이에 옥안인이 나타났다. 류희겸을 살핀 옥안인은 탈진이라고 진단했다.
“약은 이미 지어두었습니다. 기력이 많이 쇠하셨으니, 섭식과 양생에 힘쓰셔야 합니다.”
“잘 먹고 잘 쉬어야 한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원래 강건하신 분이시니, 금방 좋아지실 겁니다.”
“그렇다면 시침은 언제쯤 들 수 있겠느냐?”
“예? 그, 그러니까……. 그것이…….”
진혁위의 물음에 당황한 옥안인은 말을 더듬었다. 한 달은 넘게 의식을 잃었다가 오늘 깨어나서는, 기력이 쇠하여 기절까지 한 사람 앞에서 시침은 언제 할 수 있냐고 묻는 것은 양심의 문제였다. 그래도 진혁위가 무서웠던 옥안인은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옵니다.”
“정확한 시일을 말해라.”
“열흘, 열흘이면 기력을 되찾으실 겁니다.”
“알았다. 귀비. 열흘 후다.”
진혁위가 류희겸을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진맥을 위해 베개에 기대어 앉아 있던 류희겸은 진혁위의 확언에 어이가 없었다. 그 역시 옥안인과 마찬가지로 진혁위의 양심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의심했다.
그래도 류희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주겠다는 맹세에는 분명히 자신의 육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심각할 필요 없다. 어차피 인생은 한 번뿐인데, 삶을 즐겨야 할 것 아니냐?”
마치 우국충정의 결의를 다지듯 심각한 얼굴을 한 류희겸을 보며 진혁위는 가볍게 말했다. 한 번 죽었다 깨어나도 삶의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즐기며 살아야 했다.
진혁위는 둥그렇게 눈을 뜬 류희겸의 뺨을 손등으로 한 번 쓸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피부는 말랑하고 부드러웠다.
“네 목을 조르고 싶을 때가 간간이 있다.”
“……왕야?”
“한두 번은 후려치고 싶었고, 또 여러 번은 어딘가에 가둬놓을까 고민했고, 진짜 다리를 자를 뻔도 했다. 내가 성질을 부려도 그러려니 해라. 아직 울분이 남아 있어 울컥할 때가 있다.”
“예.”
밑도 끝도 없는 위협에 잠시 얼었던 류희겸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울분이 남아 있다면 어쩔 수 없었다.
“귀비가 편히 쉴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겠다. 경화당에 돌아가려면 죽 한 그릇을 비우고, 한숨 자고 난 다음이어야 한다. 우소진. 들었느냐?”
“예. 똑똑히 들었사옵니다.”
“귀비가 경화당으로 돌아갈 때는 걷게 하지 말고 교자(轎子)에, 아니, 가마에 태워라. 나중에 확인해 보고 지시한 대로 안 되었다면 물고를 낼 것이다.”
“소인이 꼼꼼하게 살피겠나이다.”
세세하게 명령을 내린 진혁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옥안인을 데리고 침방을 나섰다. 우소진은 진혁위를 따라 나가지 않고 류희겸에게 다가갔다.
“피곤하시면 잠시 눈을 붙이고 계십시오. 심양설을 불러 마마를 모시라 하겠습니다.”
“부탁하네.”
“아, 그렇지. 드시고 싶은 것은 없으십니까? 이럴 때 몸이 원하는 것이 보약이라 하지 않습니까.”
“딱히……. 음. 맑은 생선탕이 좋겠군.”
딱히 먹고 싶은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가장 만들기 쉽고 먹기 쉬운 것을 골랐다. 영왕부에는 늘 싱싱한 재료가 들어왔고, 숙수의 실력도 좋았다.
“아침에 싱싱한 생선이 들어왔는데, 잘됐습니다. 소인이 얼른 대령하겠습니다.”
만면에 미소를 지은 우소진이 바쁜 걸음으로 물러났다. 드디어 혼자가 된 류희겸은 어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하아.”
류희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을 천천히 풀리자 열이 오른 머리와 눈이 본격적으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일이 마무리될 줄은 몰랐다. 목숨을 내어놓았는데 살아서 진한재가 죽음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희열과 기대감에 떨리는 것과 별개로, 그것이 진혁위의 변덕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죽이지 않더라도 괴롭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발등뼈를 부수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리를 잘라버리는 것도, 혹은 빛 하나 들지 않는 곳에 가두는 것도 가능했다.
그럼에도 진혁위는 자신에게 진한재의 죽음을 약속하고는 충성을 요구했다. 기회를 주려는 것인지, 혹은 시험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은 모르는 게 더 많았다. 이전 생에 자신을 정인이라 여겼다지만, 배신자와 계속 교합을 하겠다는 이유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진혁위라면 여인이든 사내이든 부족하지 않을 텐데. 울분이 남아 울컥한다면서. 왜? 애증이라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류희겸은 어지러운 생각을 이어가다가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 ◇
태경의 늦여름은 요란한 소문과 함께 끝나가고 있었다. 종인령이 황후가 연 차회에서 광인처럼 난동을 부린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혼약을 한 두 사람이 부정한 관계를 가져 왔다는 소문이 점점 덩치를 키워가다가, 황후가 종인령을 이용해 황친들을 핍박한 것이 드러났다.
결국 종인령은 파직 후에 광산 노역형에 처해졌고, 황후는 금보와 금책을 빼앗기고 연금을 당했다. 황후에 대한 처결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은 상황에서 또 다른 소문이 퍼졌다. 태자가 황제의 아들이 아닐 거라는 의심이었다.
황후는 음인이었으니 황제의 아이만을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황제와 태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헛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태자는 살이 찐 것 말고는 황제를 그대로 빼어 닮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백성들은 자극적인 소문을 좋아했다.
“하하하! 태자께서 분통이 터진 모양이다. 태감 하나를 두들겨 패다가 손목이 부러졌다니. 최근에 들었던 이야기 중에 제일 재미있다.”
굵은 선의 미남자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4황자. 정군왕. 진영겸(陳瑛謙).
삼 년 전, 음독을 당하여 쓰러진 이후로 진영겸은 은둔 중이었다. 손님조차 가려 받는 진영겸 앞에는 진혁위가 앉아 있었다.
“형님께서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내가 오래도록 바깥소식에 귀 닫고 지내다가, 최근에서야 이것저것 하나씩 주워듣고 있거든. 그간에 일어난 일을 챙겨 듣다 보니 재미있는 것을 알았다.
“무엇인지 소제에게도 알려주십시오.”
“눙치지 마라. 편히 사는 것도 이제 끝났구나. 싫다고 하던 권력을 손에 쥔 감상이 어떠냐?”
진영겸은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진혁위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가 독을 마시고 오른팔 얼굴에 문제가 생긴 것은 삼 년 전의 일이었다. 겨우 죽지는 않았지만 팔과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대학사의 인정을 받은 문재에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던 진영겸은 한순간에 없는 사람처럼 잊혔다.
그 직후에 모비가 돌아가시고 외가 역시 그간의 비리가 밝혀지면서 쓸려나갔다. 나쁜 일만 계속되고 있는 진영겸을 꾸준히 찾는 형제는 진혁위뿐이었다.
처음에는 몇 번 이러다 말겠지 하고 여겼다. 하지만 삼 년 내내 진혁위는 한결같았다. 매년 명절과 절기마다 선물을 보내고 때로는 직접 찾아왔다.
그가 들고 오는 선물이야 별것 아니었다. 모피나 약재 등은 진영겸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그것보다는 이제 아무 쓸모가 없어진 형제를 찾아오는 진혁위의 속내가 궁금했다.
일곱 살 차이가 나는 동생은 잘생긴 얼굴과 활달한 성격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환심을 샀다. 진영겸 역시 진혁위를 좋아했지만 언젠가 자신의 정적이 될 거라 여겨 거리를 두었다. 그건 야망이 좌절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제멋대로 살던 진혁위는 권력을 손에 넣었다. 태자와 기왕이 대립하는 와중에 진혁위가 세력의 균형 축으로 끼어들었다. 누가 봐도 황제의 입김이 들어간 결과였지만, 어심은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었다.
한때 지고의 자리를 꿈꿨던 진영겸은 진혁위에 대한 삐뚤어진 마음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제좌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진혁위가 어떤 마음인지도 알고 싶었다.
“감상이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차피 제 것이 아닌 걸요.”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했다가는 미움을 받을 것이다.”
“괜찮을 겁니다. 다들 겸손하다 할 테니 말입니다,”
“하하하. 성격은 여전하구나.”
뼈가 있는 진혁위의 농담에 진영겸은 웃음을 터트렸다. 거침없이 구는 진혁위는 확실히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부러움에 진영겸은 속이 쓰렸다.
“할 말 다 했으면 이제 그만 가라. 피곤하다.”
진혁위와 진영겸의 만남은 오래지 않고 늘 짧게 끝났다. 차를 마시고, 적당히 근황을 이야기하다가, 진영겸이 피곤하다며 진혁위를 내쫓다시피 했다. 평소 진혁위는 별말 없이 순순히 물러났는데, 오늘은 달랐다.
“돌아가기 전에 소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냐? 좋다. 말해라.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삼 년이나 정성을 들였는지 궁금했다.”
시비 아닌 시비에도 진혁위는 그러려니 했다. 잘난 인간이 팔을 못 쓰게 되고, 삼 년이나 은둔하며 사람을 만나지 않다 보면 삐뚤어질 수밖에 없었다.
진영겸의 외조부인 조만준(曺萬俊)이 비리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었다. 황제가 힘을 썼다면 조만준을 파직하고 귀양 보내는 것으로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조만준 일가를 치워버렸다.
거기에 진영겸이 휩쓸리지 않은 것은 팔을 못 쓰게 된 황자에 대한 배려였지만, 그걸 당사자가 달가워할 리 없었다.
“얼마 후에 황제께서 형님을 부르실 겁니다.”
“……부황께서 그리 전하라 하시더냐?”
날카로운 미소를 짓던 진영겸이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외가를 지키지 못한 진영겸이 황제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니요. 소제가 넘겨짚었습니다.”
“넘겨짚었다고?”
“죽지 마십시오.”
“……뭐라?”
뜻 모를 요청에 진영겸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밑도 끝도 없이 죽지 말라고 하면 이상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죽지 말라고 했습니다.”
“황제께서 날 죽인다고 하시더냐?”
이제는 진영겸이 이를 드러내며 화를 냈지만 진혁위는 덤덤했다. 지난 생에 진영겸과의 사이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진영겸에게 독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도 알지 못했고, 지금처럼 일부러 찾아와 만나지도 않았다.
지난 생에서 황제는 화진국의 사신단이 오간 후에 진영겸을 불러 독대했다. 그때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진혁위가 아는 바는 없었다.
황제와 독대하고 왕부로 돌아간 진영겸은 그날 밤에 스스로 목에 칼을 찔러 넣어 자결했다. 아마도 황제가 진영겸에게 자결을 종용했을 거라고 추측만 할 수 있었다.
제 편이 아니라면 독을 보내며 제거부터 하는 기왕이나, 잘난 형제들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태자에 비해 진영겸은 제대로 된 놈이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올곧았다.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고사처럼 너무 강직하여 부러졌다.
진혁위로서는 진영겸이 죽는다 하여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전 생과 달리 삼 년 동안 그에게 정성을 쏟은 것은 어떻게든 써먹을까 하여 대비한 것뿐이었다. 그가 죽는다 해도 아직 어디에 쓸지 정하지 않은 패를 하나 잃는 것뿐이라 큰 타격은 없었다.
그러다 마음이 바뀐 것은 좀 더 미래를 내다보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은 쓸 데가 없어도, 앞으로 진영겸이 필요할 순간이 올 터였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소제도 모릅니다. 그래도 죽지 마십시오.”
진혁위가 던진 불친절한 실마리에 진영겸은 얼굴을 굳혔다. 황제의 성향을 알기에 진혁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죽지 말라고? 어심이 그러하다면 내가 어찌 살겠느냐?”
“납작 엎드리면 됩니다.”
“뭐?”
“한 달 넘게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던 소제의 귀비가 얼마 전에 깼습니다. 무심하고 차돌멩이처럼 딱딱한 귀비이긴 하지만,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누워 있는 것보다는 눈을 뜨고 노려보는 게 더 어여쁘지요. 마찬가지로 죽지 않고 살아 있어야 형님을 그리 만든 자의 끝을 보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도발에 가까운 설득이 진영겸에게 잘 먹힌 것인지 진혁위로서는 알 수 없었다.
진영겸은 어딘가 류희겸과 닮아 있었다. 올곧다고 하여 성인군자이지만은 않았다. 류희겸처럼 복수에 눈이 멀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인사였다. 그 방법이 없어 숨죽여 있었을 뿐이지, 기회가 주어진다면 영혼까지 불태울 것이다.
딱딱하게 굳다 못해 허옇게 질린 진영겸의 얼굴을 보자니 설득은 잘 먹힌 듯싶었다.
“소제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의자에서 일어난 진혁위는 예를 올렸다. 꾹 다문 진영겸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진혁위는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
일확천금을 꿈꾸는 이들이 바라 마지않는 소리가 백진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금맥이 발견되었습니다.”
두 달 만에 류희겸을 만난 백진호는 잔뜩 들떠 있었다.
백진호는 처음 류희겸에게서 원수에 대한 정보를 들었을 때는 반의반도 믿지 않았다. 폐금광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류희겸이 한 말은 모두 다 들어맞았다.
향래에 있는 철가에서 원수의 존재를 확인하고, 폐금광에서 금맥을 발견한 백진호는 류희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한 달 넘게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 있던 류희겸이 정신을 차렸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찾아뵙기를 청하고는 이렇게 달려왔다. 사재를 털다시피 하여 선물을 잔뜩 가져온 것은 당연했다.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리고 날씨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낸 백진호는 원수를 찾았다고 알렸다. 평생에 걸쳐 은혜를 갚겠노라 맹세했다. 그리고 지체 없이 폐금광에 대해 알렸다.
폐금광에서 금맥이 발견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백진호가 가져온 선물보다 폐금광에서 발견된 금맥이 더 큰 돈이었다. 그런데 류희겸의 반응은 백진호가 예상했던 것보다 시큰둥했다.
“그거 다행이군.”
예법에 따라 병풍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하는 탓에 백진호는 류희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웃지 않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귀비 마마. 기쁘지 않으십니까?”
“당연히 기쁘지.”
기쁘다고는 하지만 류희겸의 목소리는 어딘가 냉정해서 백진호는 의아했다. 하지만 상인의 촉이 백진호의 호기심을 말렸다. 백진호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예. 기쁜 일이지요. 채광꾼의 말에 의하면 금맥이 깊은 곳에 있지만, 그래도 그 양이 상당할 거라고 자신하였습니다. 소인은 귀비 마마의 혜안에 몇 번이고 놀랐는지 모릅니다.”
“백 대주의 이름으로 사들였겠지?”
“예. 소인의 명의를 빌려드리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나, 광산을 운영하는 사람만큼은 귀비 마마의 사람을 쓰셔야 합니다.”
백진호는 양심 있는 상인이었다. 류희겸이 명의를 빌리고 운영도 맡기겠다고 했지만 그건 안 될 일이었다. 명의는 빌려줄 수 있지만, 금광을 관리할 사람은 류희겸이 따로 뽑는 게 맞았다.
“그와 관련해서는 왕야께 여쭈어보게.”
“왕야께요?”
“금광은 영왕야께서 관리하실 테니, 왕야께서 소유권을 넘기라 하시면 내 의견을 묻지 말고 그냥 드리게.”
무심한 하명에 백진호는 고개를 들어 병풍 너머의 류희겸을 쳐다봐야 했다. 그리고 그건 류희겸 옆에 서 있던 심양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부군이라고 하지만, 금맥이 발견된 금광의 소유권을 넘긴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금광의 관리가 어려우시다면 소인이 사람을 추천해 올리겠나이다.”
“그럴 필요 없네. 왕야께 말씀드려 의견을 구하게나.”
백진호가 우회적으로 그러지 말라고 말렸으나 류희겸은 강경했다. 결국 백진호는 알겠노라 대답하고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마마. 그러시면 안 됩니다.”
“무엇을 말인가?”
“금광이옵니다. 마마께서 쥐고 계셔야지요.”
심양설은 조용한 목소리로 조언했다. 영왕부처럼 커다란 살림살이를 꾸리는 곳은 보통 안주인이 돈줄을 쥐고 있었다. 물론 세세한 부분은 총관의 손을 거치지만, 총관을 쓰고 해임하는 것은 안주인의 권한이었다.
또한 안주인이 혼인을 할 때 들고 온 지참금은 가문과 남편의 재산과는 별개의 영역이었다. 류희겸이 하례품으로 받은 여러 선물들도 온전히 본인을 위해 쓸 수 있었다. 황제가 내린 황금으로 산 금광 역시 류희겸의 것이었다.
현명한 안주인이라면 남편의 총애에만 기대지 않는 법이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출가할 때를 위해, 그리고 안락한 노년을 위해서는 자신만의 재산을 꽉 움켜쥐고 있어야 했다. 금광 같은 귀한 것이면 더더욱 그랬다.
물론 류희겸 역시 심양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솔직히 류희겸도 진혁위에게 금광을 넘기려니 속이 쓰렸지만, 이건 충성과 신의와 관련된 것이라 어쩔 수 없었다.
금력을 이용해 진한재를 죽이려는 계획은 이제 시도할 수 없었다. 금광을 가지고 있으면 혹 스스로의 힘으로 진한재를 죽이고 도주하려 하는 것이 아니냐며 진혁위의 오해만 살 것이 뻔하니, 아예 깔끔하게 넘겨 자신의 각오를 보여주는 게 나았다. 그리고 진혁위가 양심이 있으면 금광에서 나는 황금 또한 사용하여 진한재를 죽여줄 거라고 믿어야 했다.
“내가 왕야께 강한 처족이 되어드릴 수 없으니, 이런 선물이라도 드려야지.”
“갑자기 선물이라니요. 설마, 왕야께서 눈치라도 주신 겁니까?”
“그럴 리가. 왕야께서 그러신 적 없네.”
“선물 같은 거 안 드려도 왕야께서는 이미 잔뜩 가지고 계십니다. 금광이 큰 재물이라고 하나, 왕야께서 가지고 계신 것에 비하면 그리 귀한 것이 아닙니다. 왕야의 성격이라면 금광이 필요 없다 하시며 다시 돌려주시려 하실 겁니다. 그때 모르는 척하고 다시 받으십시오. 그러시겠다고 해주세요. 마마께서도 이제 상점이나 장원을 가지셔야 합니다. 왕야께서 돌려주신다고 하시면 받으시는 겁니다. 예?”
절절하기 짝이 없는 심양설의 애원에 류희겸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주인의 앞날을 세세하게 걱정하는 심양설은 좋은 시녀였다.
하지만 류희겸은 먼 미래를 계획할 생각이 없었다. 황제의 환심을 사는 데는 성공했지만, 화진국 출신이라는 점이 언제나 발목을 잡았다. 결국 쓸모가 다하면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시기는 빠르면 화진국의 사신단이 방문한 직후, 길어야 위락호 대전까지였다. 그런 사정을 심양설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기에 류희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왕야께서 돌려주신다 하면 모르는 척하고 받도록 하지.”
“꼭 그러셔야 합니다.”
“이제 산책을 갈 터이니, 우풍이를 불러오게.”
“마마. 산책은 나중에 하시고, 단것을 드시고 잠시 쉬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자애롭게 미소 지은 심양설이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간식을 권했지만 류희겸은 넘어가지 않았다.
지난 닷새 동안 류희겸은 자신의 몸이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매일같이 깨닫고 있었다. 옥안인과 심양설이 조석으로 챙겨주는 보약과 보양식에 기력은 어느 정도 되찾았다. 하지만 전에 비해 몸이 둔해져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한 달 넘게 정신을 잃고 누워 있다 정신을 차린 첫날에는 거의 잠만 잤다. 다음 날에도 병든 닭처럼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다행히 셋째 날부터는 정신을 차렸지만 몸이 무거운 것은 여전했다.
연무장에서 제대로 몸을 단련하고 싶었지만 옥안인이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류희겸은 자신이 화진국의 장군이었다고, 하루 종일 훈련을 했다고, 말을 타고 전장을 누볐다고 주장했지만 옥안인은 요지부동이었다.
닷새 동안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은 진혁위 역시 연무장 출입을 금지한다는 말만 우소진을 통해 전해 왔다. 때문에 심양설과 우풍이는 류희겸을 마치 섬약한 환자처럼 대했다. 자꾸 보양식과 단걸 먹이고, 낮잠을 청하고, 격한 움직임을 막았다.
그렇다고 류희겸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제는 우풍이를 앞세워 영왕부 곳곳을 돌아다니며 긴 산책을 했다. 그리고 오늘은 다른 계획이 있었다.
“단것은 너무 많이 먹어서 이제는 움직여야 해. 우풍이를 부르게나. 풍이가 아니면 운문형과 같이 갈 테니.”
“아닙니다. 풍이가 함께 할 것입니다.”
경화당의 주인인 류희겸은 관대한 편이었다. 까다롭게 굴지도 않았고 시종들의 자잘한 실수에도 별말 없이 넘어갔다. 심양설의 의견도 존중하고 대부분 따랐다. 대신에 한 번 결단을 내리면 그대로 밀어붙였다.
이미 주인의 성향을 파악하고 있던 심양설은 다시 간식을 권하는 대신에 시비에게 우풍이를 데려오라 명했다.
류희겸은 우풍이를 기다리며 적당히 식은 차를 들이켰다. 연무장을 쓰려면 옥안인이 아니라 진혁위의 허락을 받는 것이 먼저였다. 닷새 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진혁위를 향해 미끼를 던져두었으니 이제 남은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아직은 여름의 향기를 품고 있는 가을 햇살이 내려 쬐는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청명했다.
타박. 타박.
류희겸의 옆에 선 우풍이의 발걸음 소리는 경쾌했다. 그리고 호위를 하며 뒤를 따르는 운문형의 절도 있는 걸음걸이는 조용하기만 했다.
영왕부는 다른 저택들과 마찬가지로 건물과 건물을 구분하는 높은 담장 사이에 좁은 길이 이어졌다. 길안내를 맡은 우풍이는 영왕부 곳곳을 잘 알고 있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새로운 곳을 신나게 안내했다.
류희겸은 천천히 영왕부의 길을 익혔다. 전략 전술의 기본은 지형지물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경화당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지만, 이제 비밀이 모두 까발려졌으니 몸을 사릴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의도를 알아서인지 운문형이 탐탁지 않아 하는 게 느껴졌지만 류희겸은 모르는 척했다.
영왕부를 한 바퀴 돌고는 내원 안쪽에 있는 화원의 정자에 앉아 쉬고 있는 사이에 진혁위가 나타났다. 닷새 만에 만나는 남자를 향해 류희겸은 반듯하게 예를 올렸다.
“영왕야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금광이라니. 그걸 왜 날 준다고 하느냐?”
정자의 상석에 앉은 진혁위가 다짜고짜 금광부터 말했다. 류희겸은 닷새 동안 얼굴 한 번 비춰주지 않은 진혁위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도 금광을 던지면 직접 나타날 거라고는 예상했다.
진혁위의 손짓에 류희겸은 자리에 앉았다. 우풍이도 운문형도 모두 정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면 오가는 이야기가 모두 들리는 거리였지만 류희겸은 딱히 말을 가리지 않았다.
“신의의 증거입니다.”
“금광이?”
“소인의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수단 중에 가장 유용한 것을 왕야께 드렸습니다.”
거침없는 발언에 진혁위는 잠시 당황하다가 웃었다. 말을 아끼지도 않고 몸을 사리지도 않은 류희겸은 진정 오랜만이었다. 그래도 진혁위는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있단 말이지?”
“금광만큼 확실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더냐?”
“영왕부를 탈주하여 화진국의 수도인 경릉에 숨어드는 것이 최선이겠으나, 가능성은 삼 할……. 아니, 이 할도 되지 않습니다.”
도망치는 방법도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류희겸은 거침없었다. 진혁위가 운문형을 호위로 계속 붙여두는 것에는 감시 목적도 분명히 있었다. 서로 알고는 있었으나 지금껏 침묵하고 있었던 것을 수면 위로 드러내자 진혁위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귀비가 이런 성격이었지. 지금껏 답답하지 않았더냐? 응?”
“그리 말씀하시니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하라.”
“왕야께서 어떤 방법으로 소인의 소망을 들어주실 겁니까? 위락호입니까?”
진한재의 목을 주겠다고 한 말에 홀라당 넘어가기는 했다. 하지만 뒤늦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위락호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 이전에는 진한재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답을 원하는 류희겸의 눈빛은 냉정하게 빛났다. 차분하게 타오르는 열의를 마주한 진혁위는 흥이 났다.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숨죽이던 것이 저돌적으로 당당히 맞부딪쳐 오는 것은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다.
“방법이 있기는 한데, 맨입으로 알려주기가 싫다.”
“……?”
“귀비가 재주껏 내 입을 열어보아라.”
잔뜩 긴장하고 있던 류희겸은 가볍게 농을 하는 진혁위 때문에 어이가 없어졌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진혁위는 이렇게 사람의 넋을 빼놓는 발언에 능숙했다. 저리도 빙그레 웃으며 여유롭게 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정강이를 한 번씩 차주고 싶은 충동이 불쑥 치솟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놀아달라는데 적당히 어울려주긴 해야 했다. 그것도 진혁위의 마음에 드는 방법으로 말이다.
“접문을 할까요?”
“눈치가 없기는. 그런 건 말로 하기 전에 행동으로 옮겨야지.”
자신이 이런 방면에는 눈치가 없다는 것을 류희겸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서 발끈하는 대신에 자리에서 일어나 진혁위 앞에 섰다.
“소인이 조금 무거울 것입니다.”
“무얼 하려고?”
“미리 말씀드리면 재미없지 않겠습니까?”
“좋다. 뭐든 해보거라.”
원래는 진혁위의 무릎에 앉을 생각이었던 류희겸은 제 무게 때문에 계획을 바꾸었다. 진혁위의 오른팔을 치우고 팔걸이에 슬쩍 걸터앉았다.
무엇을 하려는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진혁위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오른손으로 그의 허벅지 위를 짚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옷깃을 재껴 그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자 수려하던 진혁위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느냐?”
“기루에 갔을 때―”
“뭐?”
“기녀들이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너, 지금.”
류희겸은 날카로워지는 진혁위의 눈을 왼손으로 덮었다.
출사하고 진한재와 어울리다 커다란 연회가 열리는 기루에 드나든 적이 몇 번 있었다. 술과 여인이 가득한 연회는 성향에 맞지 않아, 가능하면 기루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곳에서 본 게 몇 있었다.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여인들이 사내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렸다. 커다란 덩치의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내를 자극하는 데는 제법 괜찮은 방법이었다. 편복 아래 진혁위의 허벅지 근육이 움찔거리며 떨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러면 대부분 좋아했습니다.”
슬쩍 몸을 기대며 속삭이는 류희겸의 목소리는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진혁위는 더 어이가 없었다.
류희겸이라면 얼굴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접문이나 겨우 할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기루에서 기녀들이 했던 것을 따라 한다며 과감하게 굴었다. 커다란 손이 허벅지 안쪽을 거침없이 움켜쥐었다.
속에서 뜨거운 열이 훅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이라도 허벅지를 움켜쥐고 눈을 가린 류희겸의 손을 내칠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 하는지 두고 보자는 오기도 생겼다.
“자세가 나쁩니다.”
“그래서?”
“눈을 가린 손을 치우겠습니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눈을 가린 왼손을 치우고 몸을 더 바투 붙였다. 뺨을 맞대다시피 한 상태에서 이번에는 진혁위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로 속삭였다.
“소인이 이제 제법 기력을 되찾았나이다. 하여 오늘 밤에 시침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달콤함과는 거리가 먼, 멋없는 유혹이었다. 그래서 진혁위는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애교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내가 이렇게 사람 속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도 분명 재주였다.
허벅지를 더듬는 손길은 과감했다. 뻔한 수작에 모르는 척하고 그냥 넘어가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류희겸에게 놀아나는 것은 별로였다.
“귀비의 재주가 신통찮다. 저리 가라. 본왕은 꽤나 쉬운 남자라서, 접문이면 된다. 이런 것 말고 말이다.”
진혁위는 류희겸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저리 가라는 말에 류희겸은 속상해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반성했다. 접문이면 될 것을 일을 크게 키워 실패하고 말았다.
“하나만 확인해 주십시오. 위락호에서 그를 붙잡으셨습니까?”
“아니. 대연이 대승을 거두는 와중에, 놈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일 년 후쯤에 그가 태자가 되었지.”
“……?!”
뜻밖의 이야기에 류희겸은 뻣뻣하게 굳었다. 불구대천의 원수가 기어코 태자가 되었단다. 자신이 진한재를 죽이지 않으면 황제가 되는 것이 운명인 것 같았다.
잠시 숨을 멈추고 화를 가라앉히던 류희겸은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위락호에서 패퇴한 진한재가 금방 태자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문득 진혁위가 언제까지 살아 있었는지 의문이 생겼다. 그러나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아 진혁위를 빤히 보았다. 시선을 어떻게 오해했는지 몰라도 진혁위가 사납게 웃었다.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왕부와 마차를 습격한 놈들은 분명히 그놈의 사주를 받았을 것이다. 놈을 빨리 죽여야 귀비의 목숨이 안전해진다. 허니 화진국에서 오는 사신을 충동질해서, 진한재가 호양성 전투에 참전하도록 만들 수 있겠느냐?”
“왕야.”
“전장에 끌어들이면 놈을 사로잡을 수 있지. 그러면 귀비의 손으로 놈의 목을 벨 수 있고. 본왕이 약속한 대로 말이다.”
위험한 제안이었지만 류희겸은 흔들렸다. 진혁위의 말대로 진한재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빨리 손을 쓰는 게 좋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잡으려면 전쟁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화진국의 사신을 충동질해 진한재를 호양성 전투로 불러들이는 것이 가능할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만약 진한재가 호양성 전투에 총사령관으로 참전하게 된다면, 미래가 바뀌게 된다.
수월하게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제일 문제였다. 호양성 전투에서 희범영의 죽음을 막으려면 변수는 가능하면 없는 것이 좋았다.
저도 모르게 희범영과 진한재를 두고 고민하던 류희겸은 이를 악물었다.
생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소망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진한재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진혁위에게 희범영을 살려달라고 부탁했던 것이 기만이 되어버렸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뒤죽박죽 뻗어나가던 생각은 어느 순간에 멈춰버리고 말았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복수를 위한 와신상담은 몸만 고된 것이 아니다. 때로는 은인조차 져버리는 비정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매번 마음을 다잡아도 심장에 비수가 꽂히듯이 아팠다. 자신이 후안무치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안색이 나쁘다. 몸이 아픈 것이냐?”
“잠시 생각할 게 있어 그렇습니다. 왕야. 그의 존재는 변수가 될 것입니다.”
“왜? 놈이 불세출의 천재라도 되느냐? 위락호를 돌이켜보면 아닌 것 같은데? 작은 변수에 많은 것이 바뀌는 것은 맞다. 허나 호양성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펼칠 수 있는 전술은 뻔한 것이다. 호양성을 공략한 화진의 장군들도 아주 바보가 아니었지만 당할 수밖에 없었다. 놈이 할 수 있는 것은 내부에 간자를 심는 게 전부일 테고. 물론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 모든 것은 전장에서 결정될 것이다. 허니 놈을 끌어들여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자신만만함이 부러웠다.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진한재를 죽이고 희범영을 살릴 수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었다. 류희겸은 한 줌의 희망에 아주 작은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귀비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오래 끌 생각은 없다. 이번에 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황금으로 사람을 사서 처리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금광은 귀비가 가지고 있어라. 황금이 세상 근심을 모두 해결해 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제법 살 만해지니까. 아, 그래. 아무리 신의라고 하지만, 무슨 배짱으로 금광을 넘겼느냐? 응? 속이 쓰리지는 않았고?”
말을 이어가던 진혁위가 순식간에 화제를 바꾸었다. 가벼운 물음에 류희겸 역시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제법 쓰렸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본왕이 재물만큼은 모자라지 않게 가지고 있으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 말하거라.”
“재물은 필요 없고, 다른 청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연무장을 쓰게 해주십시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기력을 찾아 움직이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습니다. 산책만으로는 몸을 기민하게 만들기 어려우니, 예전처럼 연무장에서 단련하고 싶습니다.”
류희겸이 진혁위에게 금광을 넘긴 이유 중에 하나는 직접 얼굴을 보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연약한 귀비가 되어 보살핌을 받는 것도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거침없는 요구에 진혁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귀비답구나. 좋다. 연무장 사용을 허락한다. 다만, 오늘 말고, 내일부터.”
“감사드립니다.”
“귀비를 찾는 사람이 많다. 다른 사람은 다 제쳐 두더라도 제현공의 손자들과 비무는 빨리 해결해야겠다. 약속한 것이 한참 전이니까. 그리고 고모님께서도 너를 보고 싶어 한다. 간단한 병문안을 하겠다고 말이다. 이건 가까운 시일 내에 약속을 잡겠다. 네가 벌인 일이니 수습을 해야지.”
일방적인 통보였지만 류희겸은 납득했다.
지난가을 수렵제에서 제현공의 손자와 비무를 약속한 것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갔다. 반년은 천무동에서 보냈고, 돌아와서는 진혁위가 없었기 때문에 바깥 외출을 자제했다. 그리고 진혁위가 국경에서 귀환한 이후에는 발등뼈가 부러지고 정신을 잃는 바람에 시간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 계속 미뤄둔 약속은 얼른 마무리하는 게 좋았다.
진윤홍과의 인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장에 죽을 각오를 하고 희범영과 진윤홍을 살려달라면서 일을 벌였으나, 진혁위의 말대로 제대로 수습을 해야 했다.
“예. 소인이 바로잡겠나이다.”
“본왕은 비무가 걱정이다. 귀비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지만, 갑자기 쓰러지지 않았느냐. 비무 도중에 팔다리에 힘이 빠져 검이라도 놓치면 한동안 얼굴을 못 들고 다닐 터이니 제대로 준비해야 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음.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인다. 운문형!”
진혁위가 커다랗게 이름을 부르자 정자 밖에 서 있던 운문형이 입구까지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내일부터 귀비가 훈련을 할 터인데, 같이 어울려라.”
“명을 받듭니다.”
“너무 진지하게 하지는 마라. 비무가 아니라 훈련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진혁위의 손짓에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린 운문형이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류희겸은 기분이 복잡했다. 어차피 운문형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감시하고 있으니 훈련을 돕는 거야 별거 아니었다.
영왕부 최고의 무인이라고 할 수 있는 운문형의 실력은 대단했다. 대련을 통해 긴장감을 끌어올리기에는 최적의 상대였으니 자신이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진혁위가 자신의 실력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별로였다. 이유도 없이 갑자기 쓰러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괜히 울컥했다.
“겨우 열여섯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안다. 애송이들이니 세 합이 지나기도 전에 끝나겠지. 본왕이 소심증이 돋아 그런다고 여겨라.”
눈웃음을 치며 화사하게 미소를 흩뿌리는 진혁위를 보며 류희겸은 그에게 어떤 꿍꿍이가 있음을 느꼈다.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자신만만한 남자와 소심증이라는 단어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따져 물을 수가 없으니, 물은 물이고 술은 술이라는 마음으로 넘어갔다.
“왕야께서 과분하게 신경을 써주시니,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귀비가 힘들어하는 것은 싫다.”
“예.”
“다음 일정까지 제법 시간이 있다. 차를 마시고 가라고 권해보아라. 어서.”
차를 마시고 가라고 권하라는 이상한 화법에 류희겸은 어이가 없었다. 그냥 같이 차를 마시자고 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어렵게 말을 꼬나 싶었다. 이번에도 류희겸은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주인께서 바라시니 들어드려야 했다.
“날씨가 좋으니 소인과 함께 차를 마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바람이 좋으니 이곳에서 마시겠다. 본왕은 용화음을 좋아한다. 싫어하는 것이 뭐냐고 물어라.”
“왕야께서는 울금훤(蔚金暄)을 싫어하시지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하. 기억난다. 귀비가 울금훤을 좋아했지.”
현생이 아닌 이전 생의 기억에 류희겸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떫은맛을 싫어하는 진혁위는 울금훤을 왜 마시는지 모르겠다며 툴툴거렸다. 그때 오갔던 대화를 이리도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신기했다.
“오늘 귀비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제대로 털어봐야겠다.”
한껏 기세를 올린 진혁위가 우풍이를 불러 차를 내어 오라 명했다. 우풍이가 바쁘게 뛰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화당 시종들이 다과를 즐길 도구와 간식, 차를 잔뜩 들고 나타났다.
따스한 햇살이 내려 쬐는 아름다운 화원에, 짙은 차향과 함께 조용한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