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四章 (6/22)

四章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동굴 안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행등을 들고 더듬더듬 동굴 안을 더듬어가던 류희겸은 피로를 느끼며 잠시 멈춰 섰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바닥에 요철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동굴 안은 습기가 적은 편이었다. 대신 공기가 차가웠다. 동굴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에 체온이 떨어지고 있었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시야는 어두웠고, 체온은 떨어졌고, 편히 쉴 수가 없었다. 동굴은 생각보다 넓고 길어서 한참을 걸어도 그 자리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에 동굴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다면 겁에 질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진정 무서운 것은 어둠이 아니라 분노에 사로잡힌 사내였다.

“하아.”

류희겸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혁위 역시 생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도 능하족 무녀의 축례를 받았나? 몇 번이나 다시 살고 있을까? 왜 알아채지 못한 거지? 모두 다 기억하고 있는 건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중구난방으로 튀어나왔지만 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진혁위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생을 반복한 이유야 아무래도 좋았다. 세상에는 기이한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는 법이었다.

그것보다 류희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진혁위와의 은원이었다.

직전 생에서 진혁위와 알고 지냈던 이 년 동안에 적지 않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은 분명 배신이었다. 그도 자신도 서로를 배신했다. 다시 생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둘의 기억이 남아 있으니 은원을 정리해야 하는 게 맞았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검끝이 닿았던 목을 손으로 꾹 눌렀다. 찔리지는 않았지만 날카로운 기운에 작은 생채기가 생기는 바람에 손을 대면 따끔거렸다. 만약 분노를 참지 못한 진혁위가 손에 힘을 주었다면 그대로 목이 꿰뚫렸을 것이다.

복수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거라고, 사람을 쓰고 버리는 쓰레기 짓도 할 거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실상은 살아남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몸을 사린 것이 대부분이었다.

류희겸이 실질적으로 믿음을 배신한 사람은 진혁위뿐이었다.

진혁위가 목숨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자신도 할 말은 있었다. 진한재와 손을 잡은 당신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이다.

물론 진혁위가 순순히 이해할지는 미지수였다. 어쩌면 그의 성격대로 검을 들고 생사결을 해서 인연을 매듭짓자고 할 수도 있었다. 맞대결을 하면 때려눕힐 가능성은 반반이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만약에 이긴다 하더라도 친왕을 상해했으니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다.

화진국으로 도망치는 것도 어려웠다. 천무동까지 따라온 금군은 열 명뿐이지만, 자신이 나갈 때쯤에는 스무 명까지 늘어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눈을 피해 달아난다 하더라도 평생을 뒤쫓겠다는 진혁위를 떨쳐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나마 그럴듯한 방법은 천무동에서 구할 귀물로 황제의 신임을 사는 것뿐이었다.

정만현 장군이 천무동에서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대장군의 직위에까지 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천무동에서 천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귀물을 들고 와 황제를 기쁘게 했다.

류희겸 역시 직전 생에서 귀물을 바친 덕분에 작위와 태경 내의 저택을, 그리고 땅을 하사받았다. 개인 사병을 거느릴 수는 없었지만 황실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권한이 생겼다. 물론 지금은 진혁위와 혼인을 한 상태라 작위를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어쨌든 황제의 비호를 받아 살려달라고 빌면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면, 진혁위는 황제도 무서워하지 않고 일을 벌일 것이다. 게다가 영왕부 안에서 은밀히 일어나는 일은 얼마든지 은폐될 수 있었다.

“진짜 비는 수밖에 없군.”

류희겸은 최후의 수단을 중얼거려 보았다.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면 엎드려 비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진혁위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진한재를 죽일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애원하더라도 진혁위의 성격이라면 무슨 멍청한 소리냐며 그대로 목을 베어버릴지도 몰랐다.

피할 수 없으면 맞부딪히라고 배웠고 그렇게 살았다. 자신이 가야 할 길에는 진혁위가 서 있었다. 도망칠 수 없으니 어떻게든 맞서야 했다.

“죽지 않으면 살겠지.”

류희겸은 죽음을 각오했다. 그래도 빌어서라도 목숨을 구걸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니면 혼자 죽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어차피 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힘들게 결론을 내린 류희겸은 준비해 온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멈칫했다. 갑자기 진혁위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내 고약한 정인은 온갖 달콤한 말로 사람을 홀려놓고는 훌쩍 떠나버렸지. 괘씸하게도 말이야.’

진혁위와 교합을 하고 난 다음날 밤이었다. 탕실에서 진혁위가 정인에 대해 언급했었다.

이전 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진혁위가 말한 정인이 자신인 모양이었다. 맹자 고자장을 언급한 것도, 훌쩍 떠나버린 것도 모두 맞았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류희겸은 얼어버렸다.

정인이라고? 내가?

“어…….”

사람이 너무 놀라면 머리가 굳어버리는 법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다.

류희겸은 진혁위가 지칭하는 정인이 자신이 아니라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교합을 하여 방심을 시켜놓고는 훌쩍 떠나버린 것은 맞았지만, 달콤한 말로 사람을 홀려놓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착각을 한다고 해도 그와 자신은 정인이라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진혁위는 정인을 질투하지 않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그가 말한 정인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던 류희겸은 머리를 휘휘 저으며 생각하기를 멈췄다. 진혁위의 말만 듣고 아무렇게나 추측할 수는 없었다.

정인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류희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앞으로 나아갈 때였다.

*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걷고 걸은 끝에 류희겸은 눈에 빛이 흘러드는 곳을 찾아냈다. 서두르지 않고 다시 걸어가자 드디어 동굴의 끝이 나타났다.

황궁의 대전이 들어서고도 남을 공간은 신비스러운 빛에 휩싸여 있었다. 벽 곳곳에 삐죽이 튀어나온 돌들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와중에 공동 한가운데 검고 커다란 것이 존재를 뽐냈다.

명망 높은 유학자들은 산해경(山海經)에 적혀 있는 기이한 동물과 인간, 신은 모두 꾸며진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괴이를 믿고 따르는 것은 사대부로서 멀리해야 하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여섯 번을 죽고 일곱 번이나 같은 생을 살고 있는 류희겸은 다 헛소리라고 여겼다. 여기 자신의 눈앞에 신령스러운 존재가 있었다.

이무기.

머리와 꼬리가 구분되지 않는 커다란 몸집의 이무기가 똬리 틀고 있었다.

몇 번을 보아도 압도되는 존재에 류희겸은 잠시 숨을 참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멈춰 서자 이무기가 눈을 떴다. 커다랗고 샛노란 눈을 뜬 이무기의 박력은 전이나 지금이나 무시무시했다.

“네게서 좋은 향기가 난다.”

동굴 전체에 울리는 목소리는 나이 든 사내의 그것처럼 걸걸하고 위압감이 넘쳤다. 몇 번을 경험해도 소름이 끼쳤지만 그래도 류희겸은 버텨냈다.

“인간.”

“예.”

“좋은 향기가 나는 것을 내놓아라.”

이무기의 재촉에 행등을 내려놓은 류희겸은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꾸러미 안에서 유자와 석류를 꺼내 들었다. 이무기의 시선이 과일을 핥듯이 노려보았다.

류희겸이 이무기를 만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처음 천무동을 찾았을 때는 행등 말고는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다. 공물을 바치라는 이무기에게 줄 것이 없었다. 무엇을 원하시느냐고 물었더니 태양의 과실이라는 답을 들었지만 결국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숨이 끊겼다. 그래서 두 번째인 직전 생에서는 과일을 챙겼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손을 앞으로 내밀자 이무기가 긴 꼬리를 우아하게 움직여 과일을 채어갔다. 커다랗게 입을 벌린 이무기가 과일을 한 번에 꿀꺽 삼켰다.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이곳에서, 태양의 과실을 얼마나 소원했던가.”

이무기의 목소리는 감격과 환희로 가득 찼다. 몸을 떨며 머리를 꼿꼿하게 치켜 든 이무기는 이곳에서 보일 리 없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듯했다.

잠시 기다리자 이무기의 눈이 류희겸을 향했다. 노랗기만 하던 눈이 이제는 생기가 도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 네게 하례한다. 내가 남긴 것을 가져가라. 인간들이 좋아하는 것이다.”

제 말만 한 이무기가 소리 없이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류희겸은 놀라지 않았다. 세상에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법이었다.

그렇게 이무기가 사라지자 밝게 빛나던 돌들이 점점 힘을 잃었다. 완전히 어두워지는 것을 기다리자 이무기가 있던 자리에 푸르스름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류희겸은 행등을 다시 들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빛을 내는 것은 두 송이의 푸른색 꽃이었다.

만독화(萬毒花). 이름은 살벌하지만 독을 가진 꽃은 아니었다. 꽃을 달여 섭취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독을 막아냈다. 음독을 가장 경계하는 황제에게 이것보다 좋은 선물은 없었다. 백오십여 년 전에 정만현 장군은 이 꽃을 황제에게 바쳐 총애를 받았다.

행등을 내려놓은 류희겸은 자리에 쪼그려 앉아 흙을 팠다. 꽃의 뿌리까지 조심스럽게 캐내어 챙겨 온 천에 감싼 다음 꾸러미에 집어넣었다.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허리를 편 류희겸은 이무기가 했던 것처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둠 때문에 머리 위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류희겸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제 겨우 여기까지 왔다.

*

류희겸은 왔던 길을 천천히 되짚어 갔다. 동굴 끝에 다다르기까지는 한나절이 넘게 걸린 듯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은 그보다 훨씬 짧았다. 공기가 달라진다는 느낌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환한 빛이 점처럼 눈에 들어왔다. 입구라는 신호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류희겸은 동굴 밖으로 나와 눈부심에 얼굴을 찌푸린 채 잠시 멈춰 서야 했다. 천천히 시야가 돌아오자 달라진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천무동에 들어갔을 때는 늦은 가을이었고 나뭇가지의 잎사귀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초록색 잎이 무성했다. 녹음으로 가득한 숲이 계절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 역시 직전 생과 똑같았다. 무슨 조화인지 알 수 없지만 동굴 안과 밖은 시간의 흐름이 달랐다. 류희겸이 느끼기로는 겨우 하루가 지났을까 했는데, 밖은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른 상태였다. 직전 생과 같다면 지금은 가을도 겨울도 아니라 늦봄이었다.

류희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록색 잎사귀 사이로 보이는 봄의 하늘은 선명한 푸른색이었다.

“귀비 마마!”

동굴 입구에 서서 하늘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고 있던 류희겸은 자신을 부르는 커다란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앞을 보자 멀지 않은 거리에서 우소진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금군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귀비 마마. 돌아오셨군요! 돌아오셨어요. 소인은 마마께서 무사히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다치거나 아프신 곳은요? 시장하지는 않으시고요? 여섯 달이나 천무동에 계셨는데, 제대로 요기는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소진은 울먹거리면서도 이것저것 안부를 꼼꼼히 챙겼다. 그런 우소진의 옆에 어느새 우풍이가 울망울망한 눈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며 류희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들을 이곳에 보낸 이가 진혁위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소진은 모르겠으나 우풍이는 진혁위의 경고가 분명했다. 네가 도망치면 종복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진혁위는 잘못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린아이에게 약하긴 했지만 얼마든지 비정해질 수 있었다. 다만, 금군들을 뚫고 도망칠 수 없으니 그러지 않을 뿐이었다.

“아픈 곳도 없고, 다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우 공공이 어찌 여기 있는가? 그리고 여섯 달이나 천무동에 있었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모르셨습니까? 마마께서 천무동에 들어가신 지 여섯 달이나 지났습니다. 계절은 벌써 여름이고요. 그리고 이곳에서 마마를 기다리라 명하신 것은 영왕 전하이십니다. 과거, 정만현 장군께서 반년 후에 천무동에서 나왔으니 마마께서도 그럴 거라 하셨는데, 정말 딱 맞았습니다.”

“오래 기다렸겠군.”

“아닙니다. 이곳에 도착한 지는 닷새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직전 생과 같다는 것을 확인한 류희겸은 진혁위의 근황을 물었다. 그가 지금 여기에 없다는 것은 다른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고생이 많네.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났을 줄은 몰랐어. 영왕 전하께서는 무탈하신가?”

“영왕 전하께오서는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서쪽 국경지대인 회녕(回寧)에서 역당들을 붙잡고 계십니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희교국을 세우겠다는 무도한 무리들이 회녕을 어지럽혔는데,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영왕 전하께서 연전연승 중이라고 하옵니다.”

진혁위의 행보 역시 바뀐 게 없었기에 류희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에 우소진의 옆에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었다.

강직한 얼굴의 중년 사내는 류희겸의 눈에 익었다. 이번 생에서는 몇 번 얼굴만 스쳤을 뿐이지만, 직전 생에서는 통성명을 하고는 비무까지 했던 사이였다.

운문형(雲文炯). 무림 출신인 그는 영왕부에서 제일 뛰어난 실력을 가진 시위로 진혁위의 근접 호위를 담당했다. 그런 운문형이 회녕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있는 진혁위의 곁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이유는 너무 뻔했다. 도망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였다.

류희겸은 쓸데없이 꼼꼼한 진혁위에게 어차피 도망 못 친다고 한마디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는 지금 눈앞에 없으니 그저 불만을 속으로 삼킬 뿐이었다.

“마마를 호위할 시위입니다.”

“운문형입니다.”

“잘 부탁하네.”

우소진은 운문형을 아주 간단하게 소개했다. 류희겸은 간단한 인사를 하는 것으로 끝냈다.

때마침 천무동을 지키고 있던 금군의 책임자가 다가왔다. 류희겸이 맞는지 확인하고는 당장에 황궁으로 가야 한다고 재촉했다.

이것만큼은 직전 생과 다를 게 없었다. 금군을 통솔하는 책임자까지 같았다. 이제 남은 것은 황제가 인정하는 충신이 되는 것뿐이었다.

*

여름의 시작을 앞둔 대연국의 황도, 태경의 거리는 영왕의 귀비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사람이 둘 이상만 모이면 류희겸의 이름을 언급했다.

태경에서 류희겸은 제법 유명 인사였다.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전투 한 번 없이 호양성을 단번에 함락한 화진국의 귀장군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작년에는 기구한 사연으로 노비가 되어 만월제전에 참석했다가 영왕의 귀비가 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류희겸이 지난 가을 수렵제에 참석했다가 천무동에 들어갔다는 것은 크게 회자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환행궁에서 훈군왕이 역모를 일으킨 여파로 정국이 요동쳤기 때문이었다. 주모자인 훈군왕은 붙잡혔지만 희교국의 잔당이 복수를 외치며 서부 국경을 넘어온 것이다.

그것 말고도 연말에서 연초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새로운 소식과 소문에 열광했기에 류희겸의 이름은 몇 번 언급되다가 잊혀졌다. 그들에게 류희겸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류희겸이 천무동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 알려지자마자 단번에 주목을 받았다.

황제를 향한 충심이 없다면 죽어 나온다고 알려진 곳이 바로 천무동이었다. 대연국이 건국되고 이백여 년 동안 천무동에서 두 발로 걸어 나온 사람은 백오십여 년 전의 정만현 장군 단 한 명뿐이었다.

사람들은 영왕의 귀비가 충정을 증명했다며 입을 모아 말했다. 거기다 만독화 두 송이를 황제에게 바치다 못해, 황제와 종친,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꽃을 달여 먹고는 극독을 마셔 효능을 증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충신의 귀감이라며 칭송했다.

황제 역시 류희겸에게 수많은 하례품과 함께 충현(忠賢)이라는 호를 내려 기쁨을 드러냈다.

류희겸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연국에서 제일의 충신이 되었다.

◇ ◇ ◇

훈군왕 진서녹의 역모는 여러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진서녹은 물론이고 역모와 관련된 자들 여럿이 목숨을 잃고 가문이 풍비박산 났다.

반면에 역모로 인해 전에 없던 권력을 손에 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진혁위였다.

무환행궁에서 진서녹이 황제를 시해하려고 했던 그날, 진서녹의 외숙부이자 희교국의 마지막 왕자인 만부영(萬釜榮)이 반란을 일으켰다. 멸망한 희교국의 왕성이었던 안화성(安和城)을 되찾은 후에 대연국의 서쪽 국경을 공격한다는 급보에 황제는 진혁위에게 역도를 진압하라 명령을 내렸다.

지금껏 정무 한 번 맡지 않고 놀기 바빴던 진혁위에게 반란 진압을 맡긴 것에 대한 우려가 많았다. 몇몇은 노골적으로 반대했지만 황제의 뜻은 확고했다.

그렇게 겨울이 되어 출전한 진혁위는 악조건 속에서도 승전을 거듭했다. 군공을 쌓으며 태경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는 진혁위에게 급보가 도착한 것은 이른 여름이 막 시작한 무렵이었다.

“붙잡았습니다.”

진혁위의 종사(從事)인 고영수(高怜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총사령관실로 들어왔다. 온몸으로 기쁨을 뿜어내는 고영수와 달리 진혁위는 심드렁히 반응했다.

“어디서?”

“사미족(沙美族)이 붙잡았다고 파발이 왔습니다. 생포랍니다.”

“잘됐군.”

그제야 진혁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부영을 붙잡았으니 이제 지겨운 숨바꼭질은 끝이었다.

대연국의 서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희교국이 멸망하고 번국이 세워진 것은 십여 년 전이었다. 희교국의 수도였던 안화성에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는 잔당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만부영은 열흘 만에 안화성을 점령해 버렸다.

이후 만부영은 초원의 여러 부족과 소국에서 지원받은 군사를 이끌고 대연국의 서부 국경을 침범했다. 그저 그런 국경지대의 소요라고 하기에는 시작부터 피해가 컸다.

반란을 정벌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은 진혁위가 치열한 공성전 끝에 안화성을 되찾은 것은 이른 봄이었다. 불행히도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만부성이 안화성을 탈출하여 서쪽으로 도주하는 바람에 전쟁을 끝낼 수가 없었다.

초원의 부족은 결속력이 약했지만 도망자에게 인색하지 않는 곳이었다. 특히 화술이 좋은 만부영은 자신의 업적을 부풀려 여러 족장들의 환심을 샀다. 때문에 황제군은 광활한 서쪽 초원을 배경으로 만부영과 숨바꼭질을 해야 했다.

진혁위는 대연국에 가치도 없는 초원의 땅을 점령하는 대신에 만부영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 지난 생에 기약도 없이 만부영을 쫓았던 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부영을 숨겨준 자는 토벌을 당할 것이고, 사로잡아 바치는 자는 황금을 받을 거라고 정식으로 포고령을 내렸다. 본보기로 몇몇 부족을 토벌하자 바로 만부영이 붙잡혔다. 이제 남은 것은 그를 태경으로 데려가는 일뿐이었다.

“왕야께서는 안 기쁘십니까?”

무뚝뚝한 얼굴을 한 진혁위를 보며 고영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영수는 영왕부의 시위로 진혁위를 측근에서 모셔왔다. 기쁠 때는 주인이 활짝 웃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쁘다.”

“그런데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그럴 일이 있다.”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채제승에게 본왕이 곧 돌아갈 거라고 전서조를 보내라. 태경 상황이 어떤지도 묻고.”

“알겠습니다.”

진혁위의 최측근 중에 한 명인 고영수 역시 채제승처럼 태자와 악연이 있었다. 정확히는 좌승상과 태자의 욕심 때문에 하급 관리였던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죽었다. 얼마 전, 좌승상이 파직을 당해 귀양을 가자 누구보다 좋아한 것이 고영수였다.

만면에 미소를 짓고 총사령관실을 찾았던 고영수는 진지한 얼굴로 나섰다.

홀로 남은 진혁위는 뚱한 얼굴로 서류를 두드렸다. 기분이 별로인 것은 진짜 별것 아닌 일로, 류희겸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혁위는 류희겸에게 두 통의 서신을 보냈다. 하나는 류희겸이 천무동에 나오기 전에 보낸 것이다. 분명 읽었을 것인데 답장이 없었다.

“그럴 성격이 아니긴 하지.”

진혁위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욕이라도 적어 답신을 보내지 않을까 기대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류희겸이 아니더라도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이 있었다. 만부영을 잡았으니 전쟁은 끝날 것이지만 그 뒤가 더 복잡했다. 군공에 따른 포상을 정하는 건 고질적인 골칫거리였다. 또다시 황제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으려면 줄타기를 잘해야 했다. 질투에 눈이 먼 형제들의 견제도 문제였다.

태자와 기왕은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였다. 하지만 태자도 기왕도 적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모두 다 공격했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었다.

많은 것을 준비했지만 아직은 안도할 단계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머리 한쪽은 류희겸의 이름이 점령하고 있었다.

천무동 앞에서, 류희겸의 목에 검을 박아버리려고 했던 충동은 격렬했다. 금군 앞이라는 것이나 황제의 역정을 살 거라는 것은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죽이지 못했다.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얼굴을 마주하면 자신이 어떻게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죽일지, 살릴지. 혹은…….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생각을 의도적으로 멈춘 진혁위는 인상을 썼다. 지난 반년 동안 번민을 떨쳐내기는커녕 깊어지기만 했다.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것 자체가 믿기지도 않았고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사실 나빴던 기억보다는 좋았던 기억이 더 많았다. 진혁위는 말끔한 왼쪽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지난 생에서는 무환행궁의 대전에서 있었던 난전에서 손등을 베였었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실선 같은 흉터가 남았다.

역모가 일어난 다음날에 류희겸을 만났다. 살벌함이 감돌던 숙영지에서 류희겸은 조용히 제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다가 손의 상처를 알아본 류희겸이 금창약이 있다며 내밀었다. 그는 약을 발라주면서 붕대를 감고 다니라고, 이러다 상처가 덧난다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감히 친왕에게 잔소리냐며 툴툴거렸지만 그래도 얌전히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흉터에서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던 진혁위는 고개를 돌려 창 너머 여름이 시작된 정원을 바라보았다. 긴 고민은 류희겸을 보아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곧 보겠군.”

진혁위는 류희겸을 만날 순간을 기대했다.

*

초여름밤이었다. 대연국의 제일가는 충신으로 이름을 드높인 류희겸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는 하례품 목록을 살피고 있었다.

천무동에서 태경으로 돌아온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만독화를 바쳐 황제에게 대연국의 충신이라 인정받은 류희겸에게 온갖 곳에서 하례품이 밀려들어 왔다.

무게만큼의 은을 줘야 한다는 촉금의 비단과 약재, 향료는 물론이고, 진주나 수정과 같은 보옥에다가 활이나 검과 같은 무구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상대가 보낸 하례품이 목록과 맞는지 확인하고 분류하는 것은 선물을 받는 당사자인 류희겸의 몫이었다.

혼례식 때만 해도 류희겸은 꽤나 의욕적으로 신경 써서 하례품을 챙겼다. 아무리 복수에 눈이 멀었다고는 하지만 돈의 소중함을 모르지는 않았다. 단순한 의식주부터 시작해서 사람 사는 일에는 무조건 돈이 들었다.

무인이 갖추어야 하는 무구는 일반 백성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값이 비쌌다. 관리를 상대하려면 뇌물은 필수였다. 종복을 부릴 때도 월봉 이외의 은자를 쥐여주어야 했다. 그들의 충성과 신의는 돈이 있어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값비싼 하례품 목록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서부 국경지대에 있는 진혁위가 돌아오면 당장에 목이 잘려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흐음.”

길게 숨을 내쉰 류희겸은 활짝 열린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름이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구름이 많아 달이 보이지 않는 여름 하늘은 컴컴하기만 했다. 건물과 담장의 그늘에 몸을 숨기기 좋은 상황이었다.

자연스럽게 영왕부를 탈출할 길을 떠올리던 류희겸은 머리를 내저었다. 이미 진혁위와 맞대면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거기다 운문형의 감시도 살벌해서 탈출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허무하기 죽기 전에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면 어떨까 하는 충동이 계속 일어났다. 류희겸은 한숨을 삼키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결단을 내렸는데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기다림의 시간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진혁위는 직전 생과 마찬가지로 서부 국경지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희교국의 잔당을 진압하고 있는 중이었다.

반란군의 수괴인 희교국의 왕자가 붙잡히려면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했다. 그때까지 피가 마르는 시간일 것이다.

“아직 목록을 보고 계십니까? 이제 주무셔야지요.”

다시 목록에 집중하고 있는데, 따뜻한 차를 가져온 심양설이 잠자리에 들 것을 권했다.

“다 봐야지.”

“무리하지 마세요. 해가 지면 쌀쌀합니다.”

“그러지.”

아직 초여름이었고 햇살은 날로 강해지고 있지만 밤이 되면 쌀쌀해졌다. 류희겸은 더위에 약한 편이긴 했지만 야전을 구른 경험으로 추위는 잘 견디는 편이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대신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다시 한번 더 심양설에게 잠자리에 들라고 재촉을 받는 사이에 우소진이 나타났다. 그는 아주 중요한 소식을 전했다.

“기왕 전하께서 크게 다치셨다고 합니다.”

“기왕께서?”

“예. 쉬쉬하고 있으나, 오늘 새벽에 어린 종복이 휘두른 칼에 사경을 헤매는 바람에 태의원의 태의가 기왕부로 불려갔다고 했습니다.”

“이런.”

냉차를 마시던 류희겸은 가볍게 혀를 찼다. 기왕과 같은 지체 높은 황친이 종복에게 피습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외부에 알려지면, 가솔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주인의 체면을 깎아 먹는 법이었다.

“어린 종복이 자결을 하여 배후를 밝히지는 못할 거라고 합니다.”

“기왕께서 많이 놀라셨겠군.”

“마마께서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영왕야께서도 암습을 받은 거 아시지요?”

조용히 속삭이는 우소진은 누구를 조심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피습의 배후가 누구인지는 자명했다. 기왕의 정적은 태자였다.

“그래서 경화당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지.”

“마마.”

“왕야 없이는 나도 나갈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

진혁위의 명령으로 류희겸은 영왕부 밖이 아니라 경화당 밖으로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경화당 입구에는 시위들이 하루 종일 번을 섰다. 왕부의 주인이 없기에 손님의 방문도 막았다. 제현공의 손자들과 비무 약속도 지킬 수 없었다.

그래도 류희겸은 불편하지 않았다. 책을 읽고 단련을 하면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무엇보다 진혁위 없이 혼자 움직일 생각도 없었다.

“왕야께서는 만부영만 잡으면 곧 돌아오실 겁니다.”

“그래.”

류희겸은 진혁위가 돌아오려면 아직 한 달은 넘게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소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곧은 아니어도, 만부영을 잡으면 돌아오는 것은 맞았다.

우소진과 심양설을 돌려보낸 류희겸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직전 생과는 많은 것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영왕의 귀비가 되면서 생긴 영향인 것 같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황후의 친정인 모씨 일가의 몰락이었다.

신년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좌승상의 아들 모영록이 서도평을 때려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살인 사건을 조사하던 형부에서 모영록과 서도평이 불사와 신사의 귀물을 훔친 도둑이라는 것을 알아내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좌승상이 아들의 죄를 알고도 귀물을 숨겨둔 것까지 밝혀졌다.

대전에서 탄핵을 받은 좌승상은 결국 파직에 이어 귀양이 결정되었다. 좌승상을 가장 거세게 공격한 것은 기왕의 편에 선 고관들이었다. 태자가 애를 썼지만 파직도 귀양도 막지 못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모영록이 감옥에서 목을 매달았다.

직전 생에서는 류희겸이 위청호에서 죽을 때까지 좌승상과 모씨 형제는 승승장구했다. 모영균은 함정을 파서 희일준을 궁지로 몰았고, 모영록은 류희겸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모두 없다. 남관으로 좌천당한 모영균이 만취한 상태에서 갑자기 피를 토하며 고꾸라져 죽었다. 진혁위의 말대로 기왕이 독을 쓴 것이었다. 모씨 가문의 형제 두 명 모두 류희겸이 알던 것과는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물론 바뀌지 않는 것도 있었다. 이로써 황제가 의도한 대로 황자들의 세가 갈렸다.

황제의 적장자는 어려서 일찍 죽었다. 4황자인 정군왕(正君王)은 음독으로 몸이 상해 몇 년 전부터 두문불출 중이었다. 8황자 경군왕은 진서녹에게 정패를 빌려준 것 때문에 연금을 당했다가 결국 모든 직위를 박탈당했다. 그리고 6황자 훈군왕은 역모를 일으킨 혐의로 사약을 받았다.

결국 성인이 된 황자 중에 무사한 것은 단 세 명뿐이었다.

영왕 진혁위는 서부 국경에서 희교국의 잔당을 진압하고 있는 중이었다. 곧 반란군의 수괴인 만부영을 사로잡아 황제를 기쁘게 할 것이다.

기왕은 봄이 되어 연금이 풀렸다. 하지만 자신의 기반이 있던 북서쪽 국경지대로 떠나지 못했다. 태경에 남은 기왕은 가을이 오면 북관(北館)을 공격한 능요족(能曜族)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태자는 태경에서 안전하게 세를 키웠다. 류희겸이 죽기 전까지 황위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분명 태자였다.

평범한 자질의 태자를 보좌한 것은 그의 외숙부인 좌승상이었다. 좌승상은 모략에 능했고 감언이설로 성급한 태자를 편하게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는 태자의 최측근인 좌승상을 일찍 잃어버렸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태자의 외가인 모가에서 서로 측근이 되려고 경쟁 중이라고 했다. 그들의 부추김에 태자가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류희겸이 알고 있는 좌승상은 명분을 만들어 사람을 말려 죽이는 방법을 주로 썼다. 그러나 권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좌승상과 달리 태자는 제 힘을 마구 휘둘렀다.

우소진의 말로는 태자와 기왕의 대립이 노골적이라고 했다. 태자의 사람이 탄핵을 받으면 기왕 쪽에서 공격을 했고, 반대로 기왕의 사람이 실수를 저지르면 태자 쪽에서 덤벼들었다.

신년 이후로 병부상서와 예부상서가 각각 실각하면서 태자와 기왕은 가장 유력한 도당(徒黨)을 하나씩 잃었다. 직전 생과 달리 지금은 기왕, 태자, 영왕. 세 명 중에 누가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보통 이렇게까지 하면 물어야 할 것이 있을 터인데? 제좌를 가질 거냐고.’

지난가을에 진혁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농담처럼 들렸지만 진혁위가 지난 생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직전 생에서 진혁위는 황위에 오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황제의 관심과 형제들의 견제가 괴롭다는 말을 슬쩍 흘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사람은 변하는 법이었다. 두 번이나 같은 생을 살고 있으니 제좌가 탐날 수도 있고, 괴벽이 생길 수도 있었다.

류희겸은 저도 모르게 서탁 서랍을 힐끗 보았다. 그곳에는 진혁위가 보낸 서신이 두 통 들어 있었다.

그것도 처음 서신은 자신이 천무동에서 나오기 전에 도착한 것이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내용일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서신에는 연시가 쓰여 있었다.

붉은 연꽃 향기마저 저물고 옥빛 대자리의 가을날.

비단치마 살며시 걷어들고 홀로 목란 배에 올랐습니다.

저 구름 속의 누가 비단편지 전해주겠습니까?

기러기는 다시 돌아올 때가 되었건만 서쪽 누각엔 달빛만 가득합니다.

꽃잎은 바람에 날려 떨어져 무심히 흐르는 물에 실려갑니다.

마음은 하나 되어 서로를 그리워하는데 시름은 서로 다른 곳에서 하는군요.

이 그리운 정을 다스릴 길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니 도리어 그리움이 더합니다.

紅藕香殘玉簟秋 輕解羅裳 獨上蘭舟

雲中誰寄錦書來 雁字回時 月滿西樓

花自飄零水自流 一種相思 兩處閒愁

此情無計可消除 才下眉頭 卻上心頭

남송(南宋)의 이청조(李淸照)가 쓴 일전매(一剪梅)였다. 남편을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썼다고 알려진 사(詞)는 맑고 섬세한 어조가 특징이었다.

류희겸은 진혁위를 완전히 꿰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런 연시를 쓸 성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마도,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서신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가 왜 이것을 적어 보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기다리라고 경고하려면 이청조의 일전매 말고도 주제가 명확한 것이 많았다.

며칠 전에 받은 서신에도 연시가 적혀져 있었다. 설도(薛濤)가 지은 춘망사(春望詞)의 일부였다.

괴롭힘의 일종인가?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진혁위와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옥에 가두고, 굶기고, 고신을 하는 것이 그다웠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의도를 종잡을 수 없었다. 경화당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지만, 입고 먹고 쓰는 것은 전과 다름없이 주어졌다. 류희겸이 구해달라고 부탁했던 고모부의 부하들도 약속대로 모두 편한 자리로 옮겼다고 우소진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에 류희겸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다시 하례품 목록에 집중하고 있는데 창문 너머로 소란스러움이 전해졌다. 넓은 영왕부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심양설이 나타나 변고가 생겼음을 알렸다.

“마마. 효부(孝部)에서 불이 났다 하옵니다.”

“효부라면, 왕부의 서쪽에 있는 빈집이지?”

“예. 그곳에서 갑자기 불이 크게 났는데, 불똥이 튀어 효부의 전각에도 옮겨붙을 수 있다 합니다.”

심양설이 바깥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영왕부의 담벼락과 맞닿아 있는 효부는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효부에서 불이 치솟아 영왕부에도 불똥이 튀었다. 효부는 비어 있는 집이라 영왕부의 종복들이 담장을 허물고 불길을 진압해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영왕부 동쪽에 자리한 경화당은 효부와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진혁위의 명령으로 류희겸은 경화당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나는 도움이 안 되겠군.”

“우 공공께서 잘하실 것입니다.”

우소진은 평소에도 영왕부의 대외적인 살림살이를 잘 살피고 있었다. 그건 진혁위가 영왕부를 비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류희겸은 석연찮은 느낌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태경과 같은 커다란 도시에서는 종종 화재가 일어났다. 사람이 없는 빈집에 풍등이 떨어지는 경우도 아주 드물지만 있었다. 그래서인지 직전 생에 영왕부에서 불이 났는지 아닌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쩌면 화재가 금방 진압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류희겸은 성동격서(聲東擊西)를 떠올렸다. 불을 지르는 것은 목표의 주의를 돌리는 전형적인 방법이었다.

생을 반복하면서 감정의 어떤 부분은 많이 무디어졌다. 반면에 특별한 사건 사고와 낯선 사람을 무조건 의심하는 강박이 생겼다.

지금의 화재는 그저 운이 나빠 생긴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군 지휘관으로 생사를 넘나들던 본능은 위험을 감지했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그저 직감일 뿐이지만 류희겸은 무시하지 않았다. 본능의 경고가 몇 번이고 목숨을 구했다.

류희겸은 조용히 심양설을 불렀다.

*

벽에 기대어 반쯤 졸고 있던 류희겸은 가벼운 발걸음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건물 바깥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늦은 밤이었다. 효부에서 시작된 화재를 진압하는 데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불길이 제법 크게 번지는 바람에 경화당의 시종들까지 동원되었다.

류희겸은 모두에게 수고했다고 치하하며 최소한의 번만 서게 했다. 심양설에게도 편히 쉬라고 해두었다. 그러니까 저렇게 여러 명이 발소리를 내며 움직일 만한 일은 없었다.

병풍 뒤에 숨어 있던 류희겸은 바깥의 상황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창문을 넘은 사람이 모두 넷이고, 무술을 배운 암살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신발 밑바닥에 털이 붙어 있는지 발소리가 거의 없었다.

발소리의 주인들은 창가에서 잠시 멈추더니 조심스럽게 닫힌 창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왔다.

등불 하나를 밝혀놓은 침방 안은 충분히 사위를 구분할 수 있었다. 침입자들은 곧장 침상으로 향해서 검을 찔러 넣었다.

“없잖아.”

“함정이― 크윽!”

당황하던 침입자가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류희겸의 반대편에 숨어 있던 운문형이 튀어나가 검을 찔러 넣은 것이다.

성동격서를 떠올린 류희겸은 제일 먼저 운문형에게 도움을 청했다. 꼬장꼬장한 성격의 운문형은 처음에는 류희겸의 의도를 의심하며 경계했다. 그래도 그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효부의 화재 때문에 영왕부의 방비가 느슨해졌다는 것만큼은 인정했다. 결국 절충안으로 운문형이 류희겸처럼 경화당 안에 숨어서 방비하기로 했다.

순식간에 한 명의 괴한을 쓰러트린 운문형이 나머지 세 명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운이 나빴다. 하필이면 괴한 중에 한 명이 류희겸이 숨어 있는 병풍 쪽으로 밀쳐졌다. 우당탕탕. 거친 소리와 함께 병풍이 넘어가면서 류희겸의 모습이 드러나고 말았다.

두 명의 침입자를 상대하던 운문형은 다급해졌다. 복면을 쓴 괴한들의 실력이 생각보다 좋아서 쉽게 이길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지킬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류희겸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시위라도 한 명 더 데리고 있을 걸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피하십시오!”

운문형이 소리쳤지만 류희겸은 대답하지 못했다. 병풍을 쓰러뜨린 괴한은 류희겸을 알아보고는 당장에 달려들었다.

류희겸은 당황하는 대신에 자신에게 덤벼드는 괴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손에는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한 비녀가 들려 있었다. 괴한의 팔을 쳐내며 목을 향해 비녀를 찔러 넣는 류희겸의 동작은 깔끔했지만 얕았다.

괴한의 목에 가벼운 상처만 남긴 류희겸은 몸을 빼며 거리를 벌렸다. 무기의 길이 때문에 자신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거기다 등 뒤는 벽이었다.

무환 행궁의 대전에서도 빈손이었던 것은 똑같았지만, 그때는 기습이라도 해서 무기를 빼앗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의 빈틈을 노리는 지금은 무모하게 굴기가 어려웠다.

누가 사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침입자들의 실력은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운문형이 두 명을 간신히 상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방심은 금물이었다.

운문형은 몇 번이고 검을 맞대며 침입자들과 대치했다. 반면에 류희겸은 그저 상대와 노려보기만 했다. 바깥이 시끄러웠지만 신경 쓸 만한 여유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약간의 실수만으로도 끝장날 수 있었다.

버릇대로 거리를 재며 뒤로 반걸음 물러서려던 류희겸은 뒤꿈치가 벽에 걸리는 걸 느끼고는 아차 싶었다. 아주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괴한이 덤벼들었다. 류희겸은 종으로 베어드는 검을 가까스로 피하면서 괴한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아주 잠깐의 시간만 벌 수 있었다.

류희겸은 거리를 벌리려고 노력했지만 침입자는 계속 검을 휘둘렀다. 검을 피하며 품으로 파고들려고 했지만 괴한은 같은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앞섶이 길게 베이면서 구석으로 몰렸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진 류희겸은 팔이라도 하나 내어줄 각오를 했다. 그런데 그 때, 날카로운 소리와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가 동시에 들리며 괴한이 스르륵 무너졌다.

괴한의 뒷머리에 박힌 화살을 확인한 류희겸은 맞은편을 보았다. 괴한들이 들어온 창문 너머로 진혁위가 보이는 듯했다.

어떻게? 안화성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류희겸은 의문을 품는 와중에도 떨어져 있는 검을 재빨리 주워 운문형이 상대하고 있는 괴한의 등을 가차 없이 찔렀다. 나머지 한 명은 운문형이 쓰러뜨렸다.

길게 숨을 내쉰 류희겸은 쓰러진 시체도, 엉망이 된 침방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안채를 나섰다. 설마 자신이 본 사람이 진혁위가 맞나 확인해야 했다. 막 문을 나서는 순간에, 때마침 안뜰을 가로질러 오는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하늘에는 여전히 구름이 가득해서 달빛이 없었지만, 시위들이 들고 있는 횃불 때문에 안뜰이 환하게 밝았다. 그리고 시위들 제일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진혁위가 맞았다.

“왕야?”

“귀비는 검을 내려놓아라.”

류희겸은 진혁위의 얼굴과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검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진혁위의 손이 비어 있으니 어쩌면 이건 아주 좋은 기회일 수 있다는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지금 진혁위를 공격했다가는 등 뒤에 있는 운문형에게서 공격을 받을 것이다. 찰나의 판단 끝에 류희겸은 순순히 검을 내려놓았다.

챙그랑. 안뜰 바닥에 떨어진 검은 맑은 소리를 냈다.

“귀비가 원한을 많이 샀나 보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말을 타고 왔지.”

이 순간에도 농담을 하는 진혁위에게 류희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

이전 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남자는 검을 뽑아 류희겸의 목을 겨누었다. 그때는 격정을 이겨냈지만 지금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거리는 적당히 먼 상태였다. 진혁위가 작정하고 검을 뽑아 덤벼든다면 팔을 하나 내어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테지만,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안은 엉망이겠군. 귀비는 이리 와라.”

“……?”

“이리 오라고.”

진혁위가 손을 잡으라고 내미는 바람에 류희겸은 잠시 멈칫거렸다. 이게 뭔가 싶었지만 그래도 당장에 죽이려는 게 아닌 것은 이해했다. 그래서 진혁위가 바라는 대로 천천히 다가가서 손을 잡았다.

“가자.”

“왕야?”

손을 맞잡자마자 진혁위가 잡아끌다시피 했다. 류희겸은 순순히 끌려가면서도 진혁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체가 널려 있는데, 여기서 자려고 했더냐?”

침방에만 정체 모를 시체가 셋이었다. 하지만 진혁위가 자신을 끌고 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안뜰 구석에 모여 있는 경화당의 종복들에게 침방을 치워놓으라는 명령을 내린 진혁위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왕야. 어디로 가십니까?”

“궁금한 것도 많구나. 내 침전으로 간다.”

“하지만…….”

“조용히 따라와라.”

앞을 보며 걷는 진혁위의 말투도 행동도 단호했다. 류희겸은 손을 뿌리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진혁위도 무서웠지만, 병풍처럼 뒤따르는 시위들도 신경 쓰였다.

무거운 침묵 속에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경화당에서 영왕부의 침전까지는 금방이었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손에 잡혀 침전 안까지 들어섰다. 뒤따르던 시위들은 침전 앞에서 멈췄다. 대신에 침전 안에서 우소진이 나타났다.

“명하신 것을 끝냈습니다.”

“알았다.”

진혁위의 눈짓에 우소진을 비롯한 종복들이 침전을 나갔다. 그리고 진혁위의 손에 끌려간 류희겸은 거의 내팽개쳐지다시피 침상 위에 쓰러졌다.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이번에는 진혁위에게 턱이 붙잡혔다.

“윽.”

짧은 침음을 삼킨 류희겸은 반사적으로 진혁위의 손목을 붙잡았다. 정적이 흐르는 대치 상황은 만월제전이 끝나고 정신을 차린 직후의 상황과 닮았다. 류희겸은 침상에 누운 채 자신의 턱을 붙잡아 내리누르는 진혁위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평소처럼 웃지 않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죽이실 겁니까?”

“본왕의 귀비는 여전히 애교가 없군.”

“예. 없습니다.”

“뜻대로 하라는 것도 여전한가?”

류희겸은 천천히 눈을 한 번 깜박거렸다. 이것 역시 그때 했던 대화였다. 자신은 그때 뜻대로 하라고 했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손목을 꽉 쥐었다.

“죽이려 한다면 저항하겠습니다.”

진혁위는 눈 한 번 깜박하지 않는 류희겸을 보며 웃지 못했다. 태경에 오기까지 온갖 생각을 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그다음은 아무것도 장담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검을 든 채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류희겸을 마주하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아 들고 싶어 팔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그를 끌어안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상반된 감정이 요동치는 와중에 하나만큼은 인정했다.

죽일 수 없겠구나.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말갛게 올려다보는 시선에 원망보다는 욕정이 치밀어 올랐다.

만월제전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검을 휘두른 그를 보고 넋이 나간 것부터가 문제였다. 제정신을 가졌다면 그 모습을 보고 반할 수는 없었다. 다정히 웃는 얼굴이 아닌 무심하고 서늘한 얼굴에 홀려, 그 뺨을 한 번 베어 물어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는 것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미친 게 맞았다. 먼저 반하고는 혼자 애를 태우다가, 배신을 당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성격도 변함없고.”

스스로를 자책한 진혁위는 턱을 잡은 그대로 입술을 맞대었다 떨어졌다. 뻣뻣하게 굳은 채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류희겸을 보자니 진짜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무심하고 눈치가 없는 사내였다. 그렇게 많은 암시를 주었는데도 알아채지 못하는 류희겸에게 또 다른 분노가 생겨났다.

“왕야?”

류희겸은 의아한 기분에 진혁위를 불렀다. 그러나 진혁위는 대답 대신에 다시 입술을 겹쳤다. 이번에는 그저 닿았다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혀가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거칠게 시작한 입맞춤은 지독하도록 무례했지만 곧 질척해졌다. 입 안을 제멋대로 휘저은 진혁위가 떨어져 나가고 나서 류희겸은 급하게 숨을 들이쉬어야 했다.

“매번 하는 것인데, 내가 몹쓸 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구는구나.”

평소처럼 진혁위가 짓궂은 농을 하고 웃는 바람에 류희겸은 혼란스러웠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살려주시는 겁니까?”

“진짜 눈치가 없지. 지금 내가 죽이려는 것처럼 보이느냐?”

류희겸은 이것을 거래라고 받아들였다. 죽지 않으려면 교합을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뜻대로 하십시오.”

비장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진혁위는 헛웃음을 삼켰다. 류희겸이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정정해 주지는 않았다.

어차피 진심을 얻지 못한다면 거래인 것은 맞았다. 그것도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다.

“너는 내 것이지.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내 뜻이다.”

속에 담고 있던 진심을 소리로 세상에 퍼트리며 진혁위는 웃었다.

속수무책이었던 전과 달리 이제 그는 자신의 것이었다. 얽히고설켜 비틀려 있지만 그것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시 몸을 숙인 진혁위는 류희겸의 숨결을 삼켰다.

*

“흐…….”

눈을 감고 있어도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커다란 성기가 아래에 깊이 박혀드는 것만으로도 허벅지가 떨렸다. 신음이 새어 나오지 않게 입술을 꽉 다문 류희겸은 감았던 눈을 떴다.

열이 올라 눈물이 번진 시야에 진혁위의 얼굴이 제일 처음 들어왔다. 그다음은 깊이 연결된 곳이었다.

진혁위의 손에 다리가 단단히 잡혀 허리가 높이 들려졌다. 왼쪽 무릎은 진혁위의 어깨에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머리 옆으로 밀어 눌린 자세로 류희겸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노골적인 체위로 인해 류희겸은 제 아래를 파고들었다가 천천히 빠져나가는 성기를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몇 번이나 사정을 한 탓에 사타구니 사이는 정액으로 젖어 있었다. 그럼에도 성기는 배에 바짝 붙을 정도로 발기했다. 지독하게 음란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류희겸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진혁위의 눈빛이었다. 밤을 밝히는 불빛에 주황빛으로 일렁이는 진혁위의 얼굴은 열기를 품었으면서도 냉정하고, 사납고, 격정적이었다.

진혁위는 별다른 말 없이 몸만 탐하고 있었다.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를 만큼 교합을 하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화가 난 것이라고 짐작은 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교합도 달라졌다. 지금까지 진혁위와의 교합은 약에 취해 정신이 없을 때도 있었고, 성급하게 달려들거나 시간에 쫓기기도 했었다. 쾌락에 허덕이다 못해 괴로움에 몸부림친 적도 있었다. 시작이 어떻든 간에 행위 그 자체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몸이 뜨거워지는 것과 별개로 몸이 버석해지는 기분이었다. 가쁜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이 말라갔다. 몇 번이나 절정에 이르렀는데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흐으윽.”

거의 끝까지 빠져나간 성기가 단숨에 들이박히는 바람에 류희겸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몸이 짓눌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진혁위에게 눌려 바르작거리는 게 전부였다.

“입을 벌려라.”

진혁위에게 턱이 잡힌 류희겸은 다시 눈을 뜨면서 입을 벌렸다. 그러자 진혁위의 오른손 엄지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깨물지 마라.”

입을 벌려 소리를 참지 말라는 요구에 류희겸은 진혁위의 팔을 잡았다.

“그러다 다치십, 흐윽. 읏.”

“지금 누구 걱정을 하느냐. 손가락을 물어보아라.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 테니.”

진혁위의 말대로 지금 류희겸은 다른 사람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천천히 빠져나간 성기가 단번에 깊숙한 곳을 때렸다. 복부에 묵직한 주먹질을 하는 것 같은 강한 충격은 곧장 쾌감으로 치환되었다.

반사적으로 신음을 참으려 이를 다물려다가 엄지에 걸리는 바람에 멈칫했다. 제 것이 아닌 듯한 야한 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하윽. 흣. 하아.”

모든 것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숨결이, 턱을 붙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심장으로부터 뻗어나가는 두근거림이 모두 참을 수 없는 쾌락이 되어갔다. 남자가 안으로 박아 넣을 때마다 몸이 제멋대로 떨리면서 젖은 신음이 샜다.

“고집스럽고, 무모하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쾌락에 눈을 감고 얼마나 버텼는지 모른다. 귀가 멍멍한 탓에 으르렁거리는 진혁위의 목소리가 뭉개져 들렸다.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확인하려고 눈을 떠보았지만 시야가 눈물로 번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친 것 같지만 진혁위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커다란 성기를 깊게 찔러 넣어 내벽을 휘젓기 시작했다. 끔찍한 열이 치밀어 올랐다. 여전히 입 안에 들어와 있는 손가락 때문에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으윽.”

류희겸이 더운 숨을 헐떡이며 눈을 감는 것을 내려다보며 진혁위는 사납게 웃었다. 목숨을 건 거래라고 여기는 듯, 거칠게 다루어져도 끝까지 참아내는 것이 고집스럽기 짝이 없었다.

붉게 변한 목과 뺨이, 땀에 젖어 귓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신음이, 물기 어린 눈빛이 모두 흥분을 자극했다. 그런데 이렇게 품에 안고 있는데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한입에 삼켜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진혁위를 부추겼다. 제 아래에 깔려 있는 남자가 쾌락에 미쳐 울부짖는 모습을 봐야 했다.

진혁위는 제 충동대로 움직였다.

*

계절은 여름이었지만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은 제법 서늘했다. 목덜미에 닿는 서늘한 느낌에 정신을 차린 류희겸은 자신이 누군가에 안겨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뿌연 시야에 푸르스름한 새벽빛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장옷의 끄트머리가 들어왔다. 류희겸은 앞서가는 우소진이 든 행등의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난밤에 진혁위에게 안겼던 교합의 기억은 군데군데 끊겨 있었다. 특히 세 번째 파정을 끝으로는 모든 것이 흐릿했다. 탕조의 뜨거운 물에 잠겼던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자신을 안아서 옮기고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진혁위인 것 같았다. 고귀하신 왕야께서 시중을 들고 있는 것이 송구스럽지 않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사실 혼자 걷겠다고 할 만한 힘이 없었다.

“정신이 드느냐?”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던 류희겸은 진혁위의 귀신같은 눈치에 혀를 찼다.

“예. 아침, 크읍. 아침입니까?”

“목이 상했구나. 아침 맞다.”

대답을 하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진혁위는 금방 침전에 들었다. 그리고는 어젯밤과 달리 조심스럽게 류희겸을 침상에 내려다 놓았다. 류희겸은 당장에 쓰러지고 싶었지만 진혁위가 막았다.

“머리를 닦아야 한다.”

“네.”

머리 위로 수건이 덮였기에 류희겸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도 자신이 하겠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서 진혁위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도무지 진혁위를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 당장은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천무동에서는 어떻게 살아 나왔느냐?”

“……?”

졸지 않으려고 버티던 류희겸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해가 뜨기 직전인데다 등불이 밝혀져 있어 진혁위의 얼굴이 잘 보였다. 심각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장난 같지도 않았다.

류희겸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직전 생도, 지금 생에서도 남들에게는 그저 길을 헤맸다고만 말했다. 하염없이 걸어 동굴 끝에 도착하니 만독화가 있었고, 만독화를 챙겨 되돌아 나왔다고만 황제에게 고했다. 이무기의 이야기는 일부러 뺐다. 신이한 존재를 설명할 자신도 없었고, 잘못했다가는 거짓이라고 충심을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역모에 얽힌 자들의 마지막 선택지가 천무동이다. 원한다고 모두가 갈 수는 없지만, 황제께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겠노라 매달리지. 지난 십 년 동안 천무동에 들어갔다 하루 만에 주검이 되어 나온 이들이 몇인 줄은 아느냐? 오십여 년 전에는 황제의 명을 받은 금군 열이 조사를 위해 동굴에 들어갔으나, 열 명 모두 주검이 되어 동굴 앞에 버려졌다. 동굴 앞에 보란 듯이 널어놓은 시신을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알 수 없어 천무동이 밀지이자 금지가 되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진정 길을 헤맨 것이 맞느냐?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반년이나?”

진혁위의 추궁은 매서웠다. 이렇게 되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그곳에서…….”

쇳소리가 나는 바람에 류희겸은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어젯밤에 하도 소리를 지른 때문에 목이 따갑고 아팠다.

“그곳에서 이무기를 만났습니다. 만독화도 이무기의 것이었습니다.”

“이무기? 세상에 그런 것이 있다고?”

“예.”

“하긴, 생을 반복하는 것도 기이한 일이지. 그렇다면 생을 반복한 연유도 알고 있느냐?”

갑자기 화제가 바뀌는 바람에 류희겸은 잠시 당황했다.

“왕야께서는 아십니까?”

“내가 먼저 물었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모른다.”

진혁위가 선수를 친 때문에 류희겸은 자신도 모른다고 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류희겸은 이번에도 망설였다. 하지만 자신과 같이 생을 반복하고 있는 진혁위에게는 굳이 숨길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능하족의 무녀를 살려준 적이 있는데, 목숨을 더해드린다는 축례를 받았습니다.”

“목숨을 더해드린다는 축례?”

“예.”

“신기한 일이군. 사람 목숨이 더해진다고 더해지는 것이라면 천자들은 만세를 누렸을 것이다.”

언젠가 자신이 했던 생각을 진혁위가 소리 내어 말하는 바람에 류희겸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면 서로 생각이 비슷하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럼 날 배신한 이유는 무엇이지?”

머리를 닦던 진혁위의 손은 멈춰 있었다. 이미 정신이 완전히 돌아온 류희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진혁위를 올려다보았다. 진혁위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얼음을 품은 눈빛으로 류희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류희겸은 헛숨을 들이쉬었다. 엎드려 용서를 빌겠노라 마음먹었지만 왠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아직까지 진혁위는 진한재와 아무 관계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진한재의 이름을 꺼내어도 될지 믿음이 가질 않았다.

류희겸의 흔들리는 눈빛에서 진혁위는 어떤 망설임을 읽었다. 이렇게까지 되었는데도 입을 다물고 있는 사내 때문에 살의가 일었다.

“이래서 내가 너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소인은―”

“됐다. 내키지 않으면 말하지 마라. 네가 무슨 말을 하든지 믿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까.”

“왕야.”

류희겸이 불렀지만 진혁위는 망설이지 않았다. 탁자 위에 따로 놓아두었던 검을 검집째 휘둘러 류희겸의 발등을 내리찍었다.

“윽.”

오른발에 가해지는 엄청난 고통에 류희겸은 짧은 헛숨을 내뱉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방비할 새도 없었다. 욱신거리는 고통에서 단순한 타박상이 아니라 골절이라는 직감이 왔다.

“그 발로는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무슨.”

반사적으로 자신의 발을 내려다봤던 류희겸은 고개를 들었다. 흉흉한 기세로 검집째 검을 들고 있는 진혁위는 분노한 인왕(仁王)의 현신인 것 같았다. 천무동 앞에서의 그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류희겸은 그의 눈에서 분노 외에 다른 것을 보았다.

“아니, 도망쳐도 된다. 하지만 붙잡히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하지 못한다.”

마지막 경고를 한 진혁위가 그대로 뒤돌아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류희겸은 긴장을 풀지 못하고 진혁위가 나간 곳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봐야 했다. 진혁위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세상에…….”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면서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뼈가 부러진 게 분명한 발은 미치도록 아팠다. 꼬여버린 은원은 막막했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방금 전에 깨달은 사실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전을 빠져나온 진혁위의 발걸음은 그의 기분을 대변하듯 거칠고 빨랐다. 검집을 쥐고 있는 손마디가 다 하얘질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갈 곳 없는 분노가 진혁위의 속을 까맣게 태웠다.

류희겸을 믿을 수 없노라 여겼지만, 그래도 이쯤 되면 진실을 말해 주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잘못했다 빌기는커녕 주저하며 망설였다. 류희겸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자신을 향한 명백한 불신이었다.

불신이라고? 날 믿지 못해? 누가 누굴 배신했는데?

진혁위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지난 생에서 태자에게 약점을 잡혀 고생을 하게 된 것도 류희겸이 넘긴 정보 때문이었다. 그래 놓고 신원을 보증한 자신의 뒤통수를 때리고 도망친 그가 오히려 자신을 불신한다니 웃기지 않았다.

아니, 속이 쓰리다 못해 미칠 것 같았다. 결국 그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배신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결국 죽이지 못했다. 헛된 기대도 미련도 버려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진혁위는 검집이 부서져라 손에 힘을 주었다. 검고 질척한, 가눌 수 없는 감정에 화가 났다.

이딴 것이 연심이라니.

무엇이든 파괴하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진혁위는 앞으로만 걸어갔다.

진혁위는 편전에 도착해서야 서평호(西平好)가 뒤따르는 것을 알아차렸다. 서평호는 영왕부의 시위를 통솔하는 장위였다. 그가 얼굴을 비췄다는 것은 어젯밤에 영왕부에 숨어든 놈들에 대해 말할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편전에 들어선 진혁위는 자리에 앉지 않고 서평호를 불렀다.

“서평호. 무슨 일이냐?”

“어젯밤에 붙잡은 놈이 혀를 깨물고 죽었습니다. 왕야.”

“재갈은?”

“할 말이 있다고 하여 풀어주었는데, 바로 혀를 물었습니다. 소관의 불찰입니다. 죽여주십시오.”

진혁위는 부복하는 서평호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고신을 받는 도중에 혀를 깨물어 숨을 끊는다는 것은 어지간히 독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훈련을 받았거나 숨겨야 할 것이 있다는 의미였다.

“일어나라. 죽겠다는 놈을 어떻게 말리지 못한 건 죄가 아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알아낸 것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어, 이름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신원을 알아낼 만한 소지품도 없었습니다.”

“작정을 한 것이로군.”

분노한 와중에도 진혁위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무력 집단이 왕부까지 숨어드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래도 태자와 기왕이 서로 살벌하게 싸우고 있는 상황이니 누구든 다 의심스러웠다. 태자, 기왕, 황후, 황제, 그리고 전 좌승상과 희교국의 잔당까지.

그리고 침입자들이 류희겸을 노렸으니, 황후나 전 좌승상이 가장 유력했다.

“소관의 추측이긴 하지만 괴한들은 무림인인 것 같습니다.”

“무림인?”

서평호가 조심스럽게 언급한 단어에 진혁위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관과 무림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물론 그건 겉으로만 그럴 뿐, 물밑으로는 또 다르긴 했다. 돈과 은원이 얽혀 있으면 관도 무림을 움직일 수 있었다.

“예. 운문형 역시 무림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관군의 검술이 아니라고요.”

“직접 검을 맞댔으니 잘 알겠군. 그래도 용모파기를 그리면 누구인지 수소문할 수 있겠지.”

“예 그렇습니다.”

“용모파기를 그린 후, 시신은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해라. 또한 왕부에 있는 내통자도 찾아내. 누군가가 경화당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줬다.”

경화당을 습격한 괴한이 무림인라면 누구인지 추적은 가능했다. 대신에 그것만으로 배후를 밝혀내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도 진혁위는 끝까지 시도할 생각이었다.

생을 한 번 더 반복하고 있는 진혁위는 적(敵)과 아(我)를 강박적으로 구분했다. 특히 적의 정체를 알고 약점을 잡는 데 열을 올렸다. 자신의 손에 쥔 것이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적이 가장 위험했다. 특히 내부의 적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충성을 맹세한 부하도, 수족처럼 부리는 식솔도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었다. 은편 몇 개면 주인이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잠을 자는지 아무렇지 않게 불어버렸다. 그것이 당연하다 여기는 이들에게 주기적으로 깨달음의 충격을 줘야 했다.

“명 받듭니다.”

예를 올려 인사한 서평호가 물러나자 진혁위는 혼자가 되었다. 차갑게 식은 머리가 손에 쥔 검집의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다시 맹렬히 열을 냈다.

류희겸이 이전 생을 기억하고 있으니 얼굴을 맞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궁금증과 답답함은 더욱 심해졌다.

빌어먹게 과묵하고 고집스러운 사내를 믿으려고 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이성은 류희겸을 죽여버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변명 따위야 들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되지 않았다.

류희겸의 진심을 알고도 미련이 한 번에 털어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하.”

한탄을 닮은 헛숨을 내쉰 진혁위는 검을 내팽개치는 대신에 탁자 위에 올려두며 열이 오른 눈을 감았다. 죽일 수 없다면, 죽일 수 있을 때까지는 살려둬야 했다.

지금은 그저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 ◇ ◇

여름이 깊어지고 있었다. 경화당의 안뜰에는 여름꽃들이 만개하여 화려한 색깔을 자랑했다.

그림자조차 짙어지는 한낮, 경화당 내부에는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진한 약향이 흘렀다. 류희겸은 자신의 발에서 뜸이 치워지고 침이 뽑히는 것을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진혁위의 손에 오른쪽 발등이 박살 난 것은 보름 전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통나무처럼 퉁퉁 부어올랐던 발이 이제는 제 모습을 거의 찾았다. 시커멓던 멍은 노랗게 변한 후에 옅어졌다. 신을 신는 것도 무리가 없었다.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오른쪽 발등은 물론이고 정강이까지 잔뜩 꽂혀 있던 침을 모두 빼낸 옥안인이 조심스럽게 류희겸의 발을 만졌다.

“마마. 살짝 발을 움직여보십시오. 아프십니까?”

류희겸은 옥안인의 말대로 공중에 뜬 발을 좌우로 움직였다. 조금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처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였다.

“조금 욱신거리지만 괜찮다.”

“뼈는 다 붙은 것 같습니다. 보통 한 달은 걸리는데 매우 빠른 속도입니다. 아, 그렇다고 완전히 다 나은 것은 아닙니다. 아직 단단히 연결된 게 아니라 조금만 무리하면 다시 떨어집니다.”

“알고 있네.”

“혼자 걷지 마시고, 다친 발에 힘을 주지 마십시오. 무리하셔도 안 됩니다. 그리고 또……. 섭식은 잘하고 계시지요? 더위 때문에 입맛이 떨어지거나 하면 안 되는데. 혹시 다리 말고 불편한 곳이 있으십니까?”

어제와 비슷한 주의를 주며 질문을 잔뜩 한 옥안인은 탕약을 지어 올리겠노라고 하면서 조용히 물러났다. 그가 사라지자 종복들이 일사불란하게 주변을 치웠다.

류희겸의 옷자락을 정리해 주던 우풍이가 안도하며 말했다.

“벌써 뼈가 붙었다니. 다행입니다. 마마.”

“그러게.”

“더우시죠? 시원한 냉차는 어떠십니까?”

냉차를 권한 것은 심양설이었다. 딱히 차를 마시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심양설이 자신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기에 류희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네.”

“간식도 대령하겠습니다.”

심양설의 손짓에 우풍이가 냉큼 튀어나갔다.

류희겸은 옥안인이 오기 전에 읽고 있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발을 다쳐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훈련은 무리였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책 읽기가 최고였다.

책을 들어 집중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심양설이 부채를 살살 부치고 있었다. 조용한 배려에 류희겸은 쓴웃음을 삼켰다. 발등을 다치고 나서 심양설을 비롯한 측근 시종들이 자신을 깨지기 쉬운 도자기처럼 대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기분이 영 이상했다.

영왕부에는 류희겸이 발을 접질렸다고 알려졌다. 발등의 뼈가 부러진 것은 의원인 옥안인과 류희겸 가까이에서 시중을 드는 측근만이 알고 있었다. 그들은 뼈를 부러뜨린 장본인이 진혁위이고, 그가 보름 동안 경화당에 걸음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걱정했다.

시종들이 냉대받고 있는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류희겸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냉대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고, 속을 들여다보면 그보다 더 심각했다.

꼬이다 못해 엉망진창이 된 인연을 풀어내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진혁위를 배신한 것은 바꿀 수 없는 과거였다. 엎드려 죄를 청할 수는 있으나 진혁위가 과연 용서해 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또한, 그가 화를 낸 것은 자신의 배신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증이라니…….”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다. 혼잣말이었어.”

심양설이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혼잣말을 해버린 류희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며 고개를 저었다. 천무동에서 돌아온 이후로 류희겸의 곁에는 늘 시비와 시종이 따라붙었다. 때문에 혼잣말하기도 힘들었다. 지난 보름 동안 자신이 깨달은 것을 곱씹을 때마다 답답해 한숨이 흘러나오는 것도 마음대로 내쉬지 못했다.

애증(愛憎).

증오와 분노에 휘두른 칼날이 멈추는 법은 없었다. 자신이 진한재를 앞에 뒀다면 조금의 주저도 없이 목을 베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진혁위는 무려 세 번이나 망설였다. 만월제전에서, 천무동 앞에서, 그리고 보름 전에도 죽이지 않았다. 대신에 몸을 탐했다.

류희겸은 진혁위가 언젠가 무심하고 훌쩍 떠나버린 정인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다시금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가 언급했던 정인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직전 생의 기억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그의 정인이 되었던 적이 없었다.

물론 함께 위기를 헤쳐 나오기도 했고, 몇 번 몸을 섞기도 했다. 어쩌면 진혁위는 그런 것에 애틋함을 느낀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자신은 아니었다.

류희겸은 차탁 위에 올려둔 손을 힘주어 쥐었다. 생을 반복하면서 류희겸은 목표를 향해 앞만 보며 달려갔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무심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모부를 닮은 강직한 성격의 희범영은 존경했고, 사촌 동생처럼 수더분하고 착한 희일준과 어울리며 친분을 쌓기도 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건 진혁위도 마찬가지였다.

세상 무서운 것 없이 호방하던 젊은 황자가 황제의 장기말이 되어 이리저리 휩쓸리는 모습이 안쓰럽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진혁위에게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그랬기에 호의를 받고도 배신을 할 수 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진혁위의 마음이 어떻든 상관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한재를 죽여야 한다는 생의 목표는 그대로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인간이 될 자신은 있었다. 가슴 한쪽이 무거워지는 것은 애써 무시했다. 소리 없이 한숨을 삼킨 류희겸은 날짜를 가늠하다가 심양설에게 물었다.

“오늘이 초닷새지?”

“예.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 확실하지 않아서.”

류희겸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천천히 되새겼다. 여러 변수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모영균도 모영록도 죽었으니 태자가 자신의 약점을 잡아 괴롭히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태자와 기왕의 정쟁에 희가에게 앙심을 품어서 사사건건 발목을 잡던 태보가 실각한 것도 전에 없던 일이었다.

만월제전에서 재주를 뽐내어 목숨을 부지하고, 천무동에서 만독화를 가져와 황제의 신임을 사는 것은 모두 계획대로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인생이란 불확실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더더욱 철저한 대비를 해두어야 했다.

류희겸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양설. 혹시 백진호라고 알고 있나? 태환상단의 단주인데.”

“예. 알고 있습니다. 왕부와 거래를 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백진호 단주는 어찌 물으십니까?”

“백진호를 만나야겠으니 왕부로 부르게나.”

“찾으시는 것이 있으시면 소인을 시키십시오.”

“긴히 할 말이 있는데 내가 갈 수 없으니 그를 불러야지. 왕야께서 경화당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셨지만, 사람을 부르면 안 된다고는 하지 않으셨으니 괜찮을 걸세. 정 마음 쓰이면 왕야께 여쭈어보고. 내가 백진호를 꼭 봐야 할 일이 있으니 왕야께서 아량을 베풀기를 청한다고도 전하게.”

심양설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류희겸은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진혁위가 자신을 죽일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진혁위가 백진호를 만나게 해줄 가능성은 반반이었지만 그래도 류희겸은 자신의 직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만약에 자신이라면 상대가 무엇을 하려는지 탐색하고 싶어 할 것이다. 마치 전쟁을 앞둔 장수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리고 류희겸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

다음날, 백진호가 영왕부의 경화당의 안채에 든 것은 해가 높이 떠 있는 한낮이었다.

“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세요. 백 대주.”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법에 따라 인사를 한 후, 얇은 비단으로 만든 병풍으로 가려진 반대편에 앉은 백진호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했다.

현재 태경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류희겸은 한 손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특이한 출신과 이력, 그리고 황제의 총애를 받기까지의 과정은 어느 영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노비를 거래하는 상단의 마당 한구석에 서 있던 남자의 모습을 기억하는 백진호로서는, 날로 드높아지는 류희겸의 명성에 격세지감을 느끼곤 했다.

류희겸과의 인연은 영왕 앞에서 그의 신원을 확인한 것이 끝이었다. 만월제전에서 재주를 뽐낸 류희겸이 영왕의 귀비가 되어 구름 위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영왕과 영왕부와는 계속 인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영왕은 여전히 백진호의 상단에서 귀품들을 주문했고, 때로는 정보를 샀다. 언젠가 귀비가 된 류희겸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가 직접 자신을 부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상단의 주인이 내원을 직접 찾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안주인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상급시녀나, 혹은 총관이 일을 처리하는 법이었다. 얼마든지 아랫사람을 부릴 수 있는 류희겸이 자신을 지명해서 부른 이유가 짐작되지 않았다.

백진호는 돌다리로 두들기고 보는 상인이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진혁위에게 귀비께서 자신을 불렀노라 사실대로 고했다.

진혁위의 반응은 애매했다. 귀비가 시킬 일이 있어서 불렀을 거라고 하면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나중에 보고하라고 했다. 즉, 류희겸이 백진호를 부른 이유를 진혁위도 모르며, 따로 확인하겠다는 뜻이었다.

영왕이 귀비를 아낀다는 것은 저잣거리에서 유명한 이야기였다. 영왕부에서 몇 번이나 귀비가 쓸 화잠을 주문받은 백진호 역시 두 사람의 사이가 좋다고 여기고 있었다. 귀비의 거처인 경화당은 눈에 닿는 곳마다 귀한 것만 가득했다. 하지만 진혁위의 분위기를 보자니 한바탕 부부 싸움을 하고 난 다음의 그것과 같았다.

백진호는 처신을 잘해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느끼며 준비된 냉차로 목을 축였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랐을 걸세. 백 대주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 그러니 너무 긴장하지 말게나.”

“제게 할 말이 있으십니까?”

류희겸이 차맛이나 날씨 이야기를 하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내자 백진호는 긴장했다. 긴장하지 말라고 하면 더 긴장해야 하는 법이었다.

“백 대주가 사람을 하나 찾고 있다고 알고 있네.”

“맞습니다. 그런데 그건 어찌 물으십니까?”

백진호는 잔뜩 경계하며 되물었다. 백진호가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남완에서 차(茶) 장사를 하며 부를 쌓아왔다. 그러나 부친의 오랜 친구이자 하급관리였던 사내가 서류를 조작하는 바람에 백진호의 가문은 역적으로 몰려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가문의 재산 대부분이 하급관리의 손에 떨어졌다.

시간이 흘러 모함을 받았다는 것이 밝혀지기는 했으나 백진호는 어린 동생 말고는 가족을 모두 잃었다. 또한 가문의 재산을 빼돌려 떵떵거리며 살던 하급관리는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백진호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사라져 버린 사내를 찾고 있었다.

흔하다면 흔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류희겸이 굳이 자신을 불러 이야기를 꺼낸 것이 의미심장했다.

“백 대주가 찾고 있는 사람은 건주에 있다네.”

“그게 무슨!”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에 백진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정신을 차리고 도로 앉았다. 이곳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영왕부의 경화당이었고 귀비 앞이었다. 큰 소리 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백진호는 크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소인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용서하네. 놀랄 만도 하지.”

“귀비께서 어찌 제가 찾는 사람을 아십니까?”

“백 대주가 찾고 있는 자의 이름은 본귀비도 알지 못하네. 다만, 그가 건주의 철가(鐵家) 출신이라는 것만 알고 있지. 아, 무림의 사람이기도 하고.”

류희겸이 백진호의 사연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직전 생에 본인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백진호는 일 년여쯤 후에 원수의 위치를 알아내고는 직접 잡아 와 제 손으로 죽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안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의 심장에 꽂힌 칼에 철가의 상징인 곰이 새겨져 있다고 하니 보복이 확실했다. 백진호는 은밀히 일을 벌였겠지만, 철가는 무림 가문이니 꼬투리가 잡혔을 확률이 높았다.

직전 생에서 류희겸은 백진호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복수에 눈이 멀어 사람을 그저 이용만 했었다. 그러나 류희겸이 부하들을 찾을 때, 곤란한 상황에서도 도움을 준 이가 바로 백진호였다. 류희겸은 적어도 백진호가 허무한 죽음만큼은 피하기를 바랐다.

“소신이 어찌 귀비 마마를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건주의 향래(香崍)에 있는 철가를 뒤지게나. 철가는 무림 가문으로 은원을 중히 여기지. 직접 움직이지 말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써야 할 걸세.”

확신에 찬 류희겸의 목소리에 백진호는 망설였다. 유능한 상인으로서의 직감은 류희겸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애초에 류희겸이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도 높았다.

“귀비 마마의 말이 사실이라면, 소신이 마마를 평생의 은인으로 모시고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백진호는 영민한 자였다. 백방으로 찾아다니는 원수의 신원을 류희겸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게 거짓인지 사실인지 따져 묻지 않았다. 건주의 향래에 있는 철가라고 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있으면 철가에서 쓰는 수저의 개수까지도 알아낼 수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철가에서 원수를 찾는다면, 류희겸은 자신의 은인이 될 것이다.

“내가 백 대주를 부른 이유는 따로 있네. 양설.”

류희겸의 부름에 대기하고 있던 심양설이 백진호 옆에 있는 차탁에 목함을 올려놓았다. 검게 옻칠을 한 목함은 아무 장식이 없었지만 묵직함이 느껴졌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열어보게나.”

백진호는 순순히 목함의 뚜껑을 열었다가 놀라고 말았다. 안에는 황금 원보가 가득 차 있었다.

“귀비 마마. 이건…….”

“건주성과 가까운 예흔산(銳欣山)이라는 곳에 폐금광이 있지. 산과 폐광을 모두 사게.”

예상 밖의 하교에 비단병풍 너머의 백진호는 물론이고 류희겸 옆에 서 있던 심양설도 어리둥절하다 못해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의심하고 말았다. 특히 목함에 황금 원보를 직접 채워 넣은 심양설은 류희겸을 당장에라도 말리고 싶었다.

백진호가 찾는 원수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것은 심양설이 전혀 모르는 일이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폐금광을 산다고 황금을 쓰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백진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인으로 부와 명성을 쌓아온 백진호는 폐금광이 얼마나 허망한 꿈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귀비 마마. 폐광이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물며 금광입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쥐어짰을 터인데, 어찌 쓸모도 없을 폐금광을 사려고 하십니까?”

“맞습니다. 마마. 폐광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옵니다.”

원수의 소재를 듣고도 현명하게 대처했던 백진호는 폐금광을 사려는 류희겸을 뜯어말렸다. 심양설까지 한마디 거들었다.

류희겸 역시 폐금광을 사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비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직전 생에서 예흔산에 있는 폐금광을 사들이는 사람은 백진호였다. 아무것도 없다고 여겼던 폐금광에서 금맥이 다시 발견되는 바람에 백진호는 대연국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류희겸은 그의 목숨을 구하고, 가장 큰 재물을 잠시 빌려 쓰기로 했다. 그래서 산과 폐금광의 명의를 백진호의 이름으로 할 생각이었다.

보름 전에 있었던 습격 사건의 배후에 대해서 류희겸이 아는 바는 없었다. 안뜰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심양설의 말로는 진혁위가 하나를 죽였고, 또 하나는 시위들에게 끌려갔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자백을 했는지 전해 들은 바가 없었다.

류희겸은 배후가 궁금하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여럿이었다. 다만 무술에 출중한 괴한들이 군부가 아닌 무림 출신이라는 것은 알아보았다. 그리고 또 다른 깨달음도 있었다.

자신이 진한재를 직접 죽일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우물물이 강물을 침범하지 않는 듯, 무림과 관은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 산더미 같은 황금이면 한 나라의 황자 정도는 죽여줄 무림인을 잔뜩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백진호에게 건넨 황금의 양이면 암살은 한 번 시도로 끝이었다. 하지만 폐금광의 금맥이라면 몇 번이고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었다.

류희겸은 그 일을 백진호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그의 원수를 찾아주었으니, 자신의 원수를 죽일 사람을 찾아달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자신이 뜻하지 않게 죽어도 백진호가 대신 복수할 수 있게 유서를 남길 것이다.

한 나라의 황자를 잡음 없이 죽여야 했기에 폐금광이 필요했다.

“폐금광에서 금이 나올 수도 있지. 나는 운이 제법 좋은 편이거든. 아, 깜박했군. 폐금광은 백 대주, 자네 이름으로 사도록 하게. 여의치 않으면 내 이름을 써도 되나 가능하면 자네 명의로 하고. 물론 그대의 원수를 찾은 다음에 폐금광을 사는 게 맞겠군. 그게 공평하겠지.”

“명의만 빌려드리면 되옵니까?”

“운영도 맡길 생각이네. 그 전에 금맥부터 발견해야겠지만. 구매가 끝나면 당장에 탐광을 시작하고. 그 후에 나를 다시 찾게나.”

당당하게 말을 끝맺은 류희겸은 싱긋 웃었다. 기가 막히고 답답한 심양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면에 백진호는 덤덤히 받아들였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자들은 보통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의 감을 맹신했다. 그래도 폐금광을 사는 것이 원수를 찾은 다음이라는 조건이 붙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소인은 이문을 좇는 상인이지만 신의를 알고 있습니다. 그자를 찾은 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대주의 능력이라면 금방 볼 수 있겠군.”

“물러가옵니다.”

인사를 한 백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났다.

류희겸은 이곳에서 오간 대화가 백진호와 심양설의 입을 통해 진혁위에게 전해질 것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미 서로 생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까발려졌다.

자신이 폐금광을 구매하려는 게 헛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것이다. 백진호가 사들인 폐금광에서 금맥이 터진 것은 당시 태경에서 가장 놀라운 이야기였다.

“지필묵을 준비해 주게.”

명령을 내리자 심양설이 곧 지필묵을 준비해 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류희겸은 심양설을 멀리 물려두고는 두 장의 글을 작성했다.

하나는 진혁위에게 보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를 위한 유서였다. 이제부터는 최악을 대비해 두어야 했다.

작성한 두 장의 서신을 모두 봉한 류희겸은 유서를 패물함의 아래 서랍에 보란 듯이 넣어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심양설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왕야에게 전해주게나.”

“서신이옵니까?”

“사흘 후가 부모님 기일이라 가까운 불사에서 기도를 드리고 싶다는 내용이네. 가문이 풍비박산 나 위패까지 불태워졌을 테니, 세상에 이런 불효자가 또 없지. 내가 직접 왕야께 말씀드릴 수 없는 상황이니 글로 적은 것이야. 왕야께서 안 된다고 하시면 포기할 것이라고 말씀드리게나. 꼭 부탁드린다는 말도 덧붙이고.”

사흘 후가 부모님의 기일이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류희겸의 부모님은 한날한시에 산사태로 돌아가셨다.

부모님의 기일은 매년 챙겼다. 생을 반복하면서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물론 꼭 불사에 갈 필요는 없고, 혼자서 조용히 부모님을 기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불사에 가야 했다.

류희겸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언급하자 심양설은 얼굴을 굳혔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복면을 쓴 괴한들이 경화당을 헤집어 놓은 그날, 진혁위와 류희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심양설은 알지 못했다. 입이 무거운 우소진은 그저 두 사람이 싸웠다고만 언질을 주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류희겸의 발등이 부서진 원인은 괴한이 아니라 진혁위인 것 같았다.

심양설이 류희겸을 모신 것은 날짜로 따지면 아직 석 달이 되지 않았다. 류희겸이 천무동에 있었던 반년을 빼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동안에 진혁위가 류희겸에게 푹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혼례식 전에 잠시 소원해진 적이 있긴 했지만, 이후로는 쭉 사이가 좋았다.

값비싼 비단과 보옥을 떠안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혁위는 거의 매일같이 경화당에서 잠을 청하고 조반을 먹었다. 경화당 시종들은 물론이고 영왕부의 식솔들은 귀비 마마를 향한 왕야의 총애가 지극하다고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천무동에서 살아 돌아온 류희겸이 황제에게 호까지 받자 이러다 원비까지 되는 게 아니냐고도 떠들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진혁위는 류희겸의 발을 부수고는 경화당에서 꼼짝도 못 하게 했다. 보름 넘게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고 있으니 냉대도 이런 냉대도 없었다.

류희겸이야 아무렇지 않은 듯 초연했다. 하지만 주인을 모시는 아랫것의 마음이야 그렇지 않은 법이었다.

무엇보다 심양설은 류희겸이 따로 빼놓은 다른 봉서에 적힌 글을 읽었다. 자신이 잘못 읽지 않았다면 그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전하께서는 비정하신 분이 아닙니다. 마마의 청을 들어주실 겁니다.”

“그러면 좋고.”

“다녀오겠습니다.”

봉서를 손에 쥔 심양설이 침방을 나서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우풍이와 다른 시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 어서 앉으세요. 옥 의원께서 오래 서 계시면 안 된다고 했어요.”

“이제 걸어도 아프지 않다.”

“그래도 걸을 때는 부축을 받으셔야 하잖아요. 어서요. 앉으세요.”

서신을 적기 위해 일어서 있던 류희겸은 우풍이의 부축을 받으면서 의자에 앉아야 했다. 이제 겨우 자신의 허리에 닿는 꼬맹이의 고집을 이길 수가 없었다.

“차를 더 가져다드릴까요? 간식은요? 식사를 하신 지 얼마 되지 않긴 했지만, 과일은 어떠세요? 이번에 굉장히 실한 살구가 들어왔어요. 향기도 좋아요. 과고로 만든다고 하는데, 그 전에 맛을 보세요. 살구 좋아하시죠? 싫어하세요?”

우풍이는 마치 수다스러운 새처럼 종알거렸다. 평소에도 말이 많은 아이는 먹을 것 이야기만 하면 눈을 빛냈다.

노비로 전락하고 익문사에서 취조를 받으면서 류희겸은 짧은 시간에 살이 많이 빠졌었다. 그러나 뭐든 하나라도 더 먹이려는 우풍이의 노력에 류희겸은 예전의 무게를 되찾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도 살구가 맛있다며 울망거리는 눈을 보고 있자니 살구 하나쯤은 먹어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살구가 맛있느냐?”

“먹어보지는 못했지만, 향기는 좋았어요. 드셔보시겠어요?”

“그래. 한번 먹어봐야겠다.”

“얼른 가져오겠습니다.”

활짝 웃은 우풍이가 빠른 걸음으로 물러났다. 이제 시녀가 한 명 남았지만 그녀에게는 시킬 것이 없었다.

류희겸은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패를 내밀었으니 진혁위가 어떤 식으로든 답을 줄 것이다.

“애증.”

류희겸은 다시금 낯선 단어를 중얼거렸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연정도, 연심도 가져 본 적이 없었기에 애증이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누구를 미워하면서도 좋아해 본 적이 있기는 했다. 같이 검을 배운 나이 많은 사형 중에 한 명이 그랬다.

사형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지만 장난기가 심해 늘 류희겸을 놀려댔다. 늘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며 놀리는 사형이 미워 어쩔 줄 몰랐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어린 시절이라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사형을 한 번도 이길 수가 없어서 더욱 그랬다.

첫 출전에서 죽어버린 사형 때문에 한참을 울었다. 그것도 애증이기는 했다. 하지만 진혁위가 느꼈을 감정과는 질이 다를 것이다.

맹렬하게 누군가를 미워하면서도 좋아하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하는지는 그저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또한 보름이라는 시간 동안 진혁위의 마음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서신을 읽지도 않고 찢어버릴 정도가 아니기만을 바랐다.

*

개인 서재에 홀로 있는 진혁위는 흑돌과 백돌이 놓인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흑돌의 활로를 찾아야 했지만, 진혁위의 눈에는 바둑판도 바둑돌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폐금광이라…….”

딴생각을 하느라 손안에 쥔 흑요석으로 만든 검은 돌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진혁위는 신경 쓰지 못했다.

류희겸을 만나고 돌아온 백진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진혁위가 추측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류희겸은 백진호가 찾아다니는 원수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려주고, 폐금광을 사라며 황금 원보를 내놓았다고 했다.

같은 자리에 있었던 심양설에게도 확인을 해야겠지만 진혁위는 백진호가 거짓을 고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백진호의 원수나 폐금광의 위치는 진혁위가 알지 못하거나 특별히 신경 쓰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전 생에서는 진혁위가 백진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얼마 없었다. 그가 예경대부가 만월제전에서 쓸 노비를 구하다가 류희겸을 찾았다는 것과, 폐금광을 사들여 금맥을 발견했으나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 정도만을 알았다.

이번 생에서 백진호와 친분을 쌓은 것은, 그가 류희겸을 사기 전에 미리 중간에서 빼돌리기 위함이었다.

류희겸을 손에 넣은 후로도 백진호와의 친분은 계속 유지했다. 그는 꽤나 유능한 상인이었고 보통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여러 가문의 내부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진호가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것은 대충 눈치채고 있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문제는 백진호가 아니라 그에게 접근한 류희겸의 의도였다. 백진호에게 빚을 지워두려고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이유만큼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백진호를 부르고 싶다는 것도 무슨 꿍꿍이인가 싶다가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아직도 포기를 못 한 모양인지 뭔가 꾸미고 있는 듯했다.

폐금광이라면 돈이 필요한 걸까? 백진호에게 빚을 지우려는 것은 왜? 혼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을 이어가던 진혁위는 결국 혀를 찼다.

한 조각의 신의조차 보여주지 않으려는 류희겸에게 더 이상의 기대를 포기했다. 발등을 부서뜨린 것은 충동적이었지만 머리도 가슴도 차갑게 식었다.

그런데도 또다시 이렇게 휘둘리고 있었다. 이런 꼴을 보지 않으려고 눈에서 치워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해보라지.”

스스로 생각해도 유치한 다짐을 하고 있는 와중에 심양설이 나타났다.

진혁위는 그녀에게 류희겸과 백진호 사이에서 오간 대화를 재확인했다. 백진호가 찾고 있는 원수의 위치를 알려준 것도, 폐금광을 사라고 한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마지막으로 심양설이 뜻밖의 물건을 내밀었다. 바로 류희겸이 보냈다는 봉서였다.

영왕친전(寧王親傳)

안화성에서 그토록 고대했던 류희겸의 서신을 손에 쥔 진혁위는 도대체 무엇을 적어 보냈나 싶어 겉봉을 뜯었다. 이제 와 용서해 달라고 적었다면 비웃어줄 거라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서신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흘 후가 부모님의 기일이니 불사에 가서 추모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영왕 전하의 관대한 자비로움을 바란다는 문장으로 마무리된 글은 아주 정갈하고 힘찬 필체였다.

“이걸 귀비가 직접 썼느냐?”

“예. 그리고…… 왕야께서 안 된다 하시면 따르겠다고 하시면서도, 꼭 부탁드린다고 전하라고도 하셨습니다.”

“하. 이런…….”

진혁위는 진심으로 기가 차서 혀도 차지 못했다. 류희겸의 양친이 모두 돌아가신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시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이게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부터 해버렸다.

아들이 부모님을 공경하고 기일에 추모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막는 것은 되먹지 못한 인간이나 할 법한 짓이었다.

“마마께서 부모님의 위패를 걱정하셨습니다. 가문이 풍비박산 났을 테니, 위패가 멀쩡하겠냐고 말입니다. 원래 마음 약한 소리를 하시는 분이 아닌데, 오늘따라 너무 담담하셔서 더욱 걱정입니다. 또…….”

“또 무엇이냐?”

“전하께 드린 서신 말고 글을 하나 더 쓰셨는데, 소인더러 멀찍이 물러나 있으라 하여 내용이 어떤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따로 말씀해 주시지도 않으셨고요. 그래도 유심히 보고 있어 종이를 접으시는 와중에 몇몇 글자가 눈에 들었습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인의 눈에는 유서라고 쓰신 듯했습니다.”

황궁에서 상급궁녀로 교육받은 심양설은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그래서 류희겸이 쓴 글이 유서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자세한 내용은 읽을 수 없었지만, 유서라고 쓴 것은 분명했다.

때문에 심양설은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평소에 조용한 사람이 한 번 결단을 내리면 무서운 법이었다. 진혁위와 사이가 나빠지다 못해 발도 다치고, 부모님의 기일도 다가오는데, 유서까지 썼다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 너무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진혁위는 달랐다. 유서라는 말에도 여전히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류희겸의 성격에 진정 죽으려고 했으면 이렇게 요란을 떨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이건 일종의 시위였다. 얼마나 대단한 것을 하려 이리 처량하게 구는 것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본왕이 귀비와 함께 불사에 가겠다. 그리 전해라.”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라도, 한번 어울려줄 아량쯤은 있었다.

◇ ◇ ◇

어젯밤부터 흐린 하늘은 날이 밝아도 여전히 구름이 가득했다. 류희겸의 외출 준비를 돕는 심양설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다. 비가 내릴 것을 대비해 지우산과 피풍의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류희겸은 평소와 달리 옷차림에 신경을 많이 썼다. 얼마 전까지는 심양설과 진혁위가 챙겨주는 대로 입었지만 오늘은 류희겸이 직접 골랐다.

푸른빛이 도는 소매가 넓은 편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묶었다. 허리에 찬 옥패도 단정한 것이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진혁위의 취향에 맞춰 금사와 은사가 수놓인 예복을 입었을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무인의 분위기가 많이 가려진 것이 만족스러웠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류희겸은 발에 무리가 가지 않게 느린 걸음으로 경화당을 나섰다. 발은 며칠 사이에 더 나아서 혼자서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경화당에서 영왕부의 대문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활짝 열어놓은 대문을 나서기도 전에 류희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멈칫했다.

대문 앞에는 한눈에 봐도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호화로운 마차의 앞뒤에 서 있었다. 그중에 시위만 해도 스무 명은 되어 보였고, 진혁위 말고도 말을 탄 시위가 다섯 명이었다.

대연국의 수도인 태경에는 불사도 신사도 자리하지 못했다. 불사에 가려면 태경 밖으로 나가야 하니 호위가 있어야 하긴 했지만, 서른 명의 인원은 충분하다 못해 과할 정도였다.

류희겸은 마차 앞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진혁위에게 시선을 주었다. 평소처럼 금사를 수놓은 검은 무복을 입은 남자의 허리춤에는 검이 매달려 있었다. 부처님을 만나러 갈 복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불사에 가서 부모님을 기리는 것을 허락한 남자는 동행을 자처했다. 호의가 아닌 감시의 목적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짐작이 맞았다.

도망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물론, 진혁위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의심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차에 오르시면 됩니다.”

옆에서 심양설이 조용히 말했다. 출발 준비가 끝났기에 류희겸만 마차에 타면 되는 상황이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래.”

마차에 오르기 전에 류희겸은 진혁위에게 짧게 인사했다. 돌아오는 것은 무뚝뚝한 반응이었다. 대화가 불필요한 상황이라 류희겸은 개의치 않고 조심스럽게 마차에 탔다. 발등은 거의 다 나아서 걷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높은 계단을 오르려면 심양설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조심하세요.”

류희겸은 심양설의 손을 붙잡고 조심히 마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하루가 길 것이다.

*

잔뜩 흐렸던 하늘은 기어코 비를 쏟아냈다. 화봉사(和蓬寺)의 대웅전(大雄殿) 처마 끝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마치 폭포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대웅전에 발을 묶인 이들은 하늘만 바라보며 빗줄기가 가늘어지기를 기다렸다.

류희겸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웅전 처마 밑에 서서 비에 젖은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은 류희겸이 다섯 살이 되던 생일날이었다. 비가 내리는 오후에 마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산사태에 휩쓸렸다는데 류희겸은 기억에 없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난 다음이었다.

어렸을 때는 많이 울었는데, 나이가 들고 난 후에는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그래도 매년 생일이 돌아오면 부모님의 기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류희겸의 보호자인 고모부 내외는 언제나 류희겸의 생일을 크게 축하해 주었다. 어렸을 때는 네가 훌륭하게 자라라는 것이 효도라고 했다.

모든 자식들이 그렇듯이 부모님께도, 고모부님 내외께도 모두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다. 군공을 쌓으려고 노력을 했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무리하게 적을 쫓다가 비를 만나 고생했던 것을 떠올리던 류희겸은 피식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이렇게 감상적인 성격이 아닌데, 날이 날인 만큼 기분이 이상하게 술렁거렸다.

“비가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습니다. 어찌할까요?”

“조금 더 기다려보자. 이대로 돌아갔다가는 모두 다 젖을 게다.”

우소진이 묻자 진혁위가 대답했다. 류희겸은 돌아갈 시점을 가늠하고 있는 진혁위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불사까지 동행한 진혁위의 행동은 정중했지만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없었다. 주인 내외의 싸늘한 행동에 시종들이 눈치를 볼 지경이었지만 류희겸은 그러려니 했다. 진혁위의 반응은 이미 예상한 것이었다.

“희일준이군.”

곧 비가 그치지 않을까 시간을 가늠하고 있던 류희겸은 진혁위의 싸늘한 목소리에 앞을 보았다. 진혁위의 말대로 대웅전 앞뜰에 희일준이 나타났다.

화봉사의 입구인 산문부터는 탈것에서 내려 직접 걸어야 했다. 얼마 되지 않은 거리였지만 폭우가 문제였다. 시종이 우산을 희일준 쪽으로 씌어주었지만, 이미 옷자락은 흠뻑 젖어 있었다. 꽤나 안쓰러운 모습이라 류희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무슨 꿍꿍이냐?”

진혁위가 차가운 목소리로 추궁했지만 류희겸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에게는 볼일이 없습니다.”

“설마, 이게 우연이라고?”

“우연은 아닙니다. 그가 여기 올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만큼은 침묵으로 대답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기에 류희겸은 자신이 사실대로 답했다.

“그래서? 무엇을 하려고?”

“조금 더 기다리십시오.”

진혁위의 시선이 뺨에 닿는 것을 느낀 류희겸은 힐끗힐끗 옆을 보았다.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그의 눈빛은 서늘했다.

“무엇으로 얼마나 놀라게 해줄지 기대하겠다.”

웃음기 하나 없이 건조한 목소리는 류희겸이 알고 있는 진혁위와는 많이 달랐다. 그래도 류희겸은 희망적이었다. 다 때려치우고 돌아가자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가능성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별일 안 일어납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귀비는 진짜 사람 속을 뒤집는 데 재주가 있군.”

서로 살벌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두 사람을 알아본 희일준이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다가왔다.

“영왕야를 뵙습니다.”

희일준은 진혁위에게 예를 올렸다. 진혁위와 류희겸의 일행은 대웅전 앞에서 비를 피하는 무리들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해 있어 이목을 끌지 않았다.

“희가의 대공자를 이곳에서 보는군. 화봉사에 볼일이 있나?”

“숙부님의 심부름으로 부처님께 향을 피우러 왔습니다.”

“장군께서 무슨 일로? 말 못 할 사연이라면 그냥 넘어가게나.”

“아닙니다.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매년 이날이면 향을 피우러 가라고 하셨지만, 무슨 일인지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아마도 누군가를 추모하시는 것 같다고만 여길 뿐입니다.”

매년 이곳을 찾는 것이 비밀이 아니라는 희일준의 태도에 진혁위는 류희겸의 의도를 더욱 의심했다. 희일준을 이용해 희범영을 협박하기라도 한다면 박수를 쳐 줄 자신이 있었다.

진혁위는 희일준이 류희겸에게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린 후에 약간의 잡담을 나누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천무동에서 돌아온 류희겸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지냈는지에 대해 빠짐없이 보고받은 진혁위는 두 사람이 제법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황제에게 충현이라는 호를 하사받은 이후 류희겸은 바깥 외출을 하지 않았지만 서신을 주고받은 사람들이 몇 있었다. 그중에 한 명이 희일준이었다.

천무동에서 돌아와 만독화를 황제에게 바친 류희겸에게 많은 사람들이 하례품을 보냈다. 지금도 먼 곳에 있는 태수나 호족들이 보낸 것들이 도착하고 있을 정도였다.

희일준은 희가와 별도의 하례품을 준비했다. 그에 류희겸은 감사의 인사와 함께 격구회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고 안타깝다고, 다음을 기약한다는 답서를 써 보냈다. 두 번 정도 오간 서신의 내용은 평범하게 예의 발랐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의 대화도 오래가지 않고 짧게 끝났다. 가까운 시일 내에 양군왕부가 격구회를 여니 한번 참석해 보시라고 권한 희일준이 예의 바른 인사를 하고는 물러났다.

희일준이 그렇게 사라지자 진혁위와 류희겸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빗줄기가 갑자기 가늘어졌다. 발을 동동 구르며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비가 다 그치고 움직이지요. 지금 가보았자 산문 앞이 부산스러울 겁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이게 전부냐? 겨우 희일준의 얼굴을 보려고 그리 요란하게 굴었다고?”

“아직 조금 더 어울려주십시오.”

“당당하구나. 좋다. 끝까지 어울려주겠다.”

불만스럽게 으르렁거린 진혁위는 자신이 예민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류희겸이 무슨 꿍꿍이로 화봉사까지 찾았는지 느긋하게 지켜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희일준의 등장에 초조해지고 말았다.

지난 생에서 류희겸과 희일준은 꽤나 친밀한 사이였다.

류희겸은 희일준의 호위나 마찬가지였다. 희일준을 본다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류희겸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사석에서 본 두 사람은 의형제처럼 허물없이 굴기도 했었다. 그때의 류희겸은 지금처럼 무뚝뚝하지도, 날을 세우지도 않았다. 희일준은 류희겸을 형이라도 된 것처럼 따랐다.

이번 생에서도 희일준은 목숨 빚을 진 류희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 꼴이 보기가 싫었다.

안다. 이것이 말도 안 되는 질투라는 것을. 미련을 접지 못한 자신을 비웃고 싶은 것과 별개로 류희겸과 희일준이 함께 있는 모습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도 헌화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희일준이 이쪽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다시 가던 길을 갔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류희겸에 옆모습에 회한이 곁드는 것을 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이번 생에서 류희겸이 희일준을 보고 처음으로 웃은 것이 기억나 버리는 바람에 혹이 쓰리다 못해 뒤틀리려고 했다.

소리 없이 욕이 나왔다.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이 이렇게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류희겸에게 이럴 작정으로 자신을 끌어들인 거냐고 따져 묻고 싶은 지경이었다.

“비가 완전히 그쳤습니다. 이제 가시지요.”

비가 그치고 드디어 류희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혁위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류희겸이 뒤를 돌아보았다.

진혁위는 인상을 썼다. 자신을 돌아보는 류희겸의 말간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자신 혼자 이렇게 속을 태우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왕야?”

“가자.”

진혁위는 류희겸이 시간을 세밀하게 계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순순히 움직였다.

화봉사는 태경 일대에 자리 잡은 불사 중에서 가장 위세가 컸다. 대웅전에서 산문까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방문자들을 위해 자갈을 깔아놓았다. 거센 비가 내렸지만 발이 젖을 일이 없었다. 조금 전에 내린 폭우에 화봉사를 찾는 방문객과 마주치지도 않았다.

산문으로 내려가는 길 양쪽은 모두 숲이었다. 나무가 우거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괴한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경계했다.

다행히 커다란 산문이 나타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심 실망하던 진혁위는 산문 너머 저쪽에 보이는 익숙한 사람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문옥장공주(文玉長公主). 진윤홍(陳允洪).

황제의 하나 남은 동복형제가 산문 너머에 서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진혁위는 오른편에 선 류희겸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은 정확하게 진윤홍을 향했다.

“류희겸. 이게 네가 원하던 것이냐?”

“장공주님을 뵈러 온 것이 맞습니다. 왕야께서 장공주께 저를 소개시켜 주시면 됩니다. 부모님의 기일이라 화봉사에 왔고, 또 제 생일이기도 해서 외유를 갈 거라고 말입니다.”

“생일이라고?”

저도 모르게 되묻던 진혁위는 아차 싶었다. 류희겸의 생일은 분명 알고 있었다. 유월 초아흐레.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게, 미안하지도 않는데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예. 사주단자를 읽어보시면 적혀 있습니다.”

“부모님의 기일이 생일이란 말이냐?”

“제가 다섯 살이 되던 생일에 돌아가셨습니다. 마차를 타고 가다가 산사태에 휩쓸렸죠. 저만 살았는데, 기억은 안 납니다. 괜찮습니다.”

그런 건 괜찮다고 하는 게 아니라고 하려던 진혁위는 입을 다물었다. 류희겸이 너무 덤덤하기도 했고, 산문이 가까워지면서 진윤홍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기도 했다.

화봉사의 산문 앞은 조금 전에 내린 폭우로 흙탕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제법 넓은 웅덩이 탓에 진윤홍과 그녀의 일행이 움직이지 못하고 서성였다.

“저기에 돌이 있다. 왕야의 발이 젖지 않게 웅덩이에 가져다 놓아라.”

류희겸이 가리킨 것은 산문 안쪽에 놓인 커다란 돌덩이들이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뒤따르던 시종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에 편평한 돌들이 놓이면서 징검다리가 생겨났다.

흙탕물에 발이 젖는 일 없이 편하게 웅덩이를 넘은 진혁위는 류희겸을 기다려 진윤홍에게 다가갔다. 옥비녀와 짙은 남색의 수수한 옷을 입은 그녀는 공주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고귀한 기품은 숨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고모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런, 누군가 했더니 혁위구나.”

진윤홍이 화사하게 웃으며 진혁위를 반겼다. 쉰에 가까운 나이에도 우아한 미모가 빛나는 진윤홍의 미소는 아름다웠지만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황제의 하나 남은 동복형제인 문옥장공주는 고귀한 태생에도 불구하고 박복한 삶을 살았다. 화친을 위해 번국으로 시집갔으나 이 년도 되지 않아 아들과 남편을 모두 잃고 말았다.

태후는 혼자가 된 딸을 두고 보지 못하고 도로 태경으로 불러들였고, 황제는 형제를 위해 커다란 저택을 하사하며 부귀하게 살도록 해주었다.

누군가는 시집살이를 시킬 시부모도, 속을 썩이는 남편도 없이 호화롭게 사는 장공주를 부러워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의지할 자식 하나 없이 꽃다운 청춘을 홀로 보낸 것이 안타깝다 했다.

세인들의 시선과 입방아에 진윤홍은 바깥 황동을 거의 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태후가 죽은 후에는 황제나 황후가 따로 부르지 않는 이상에야 신년 인사 때만 황궁을 찾았다.

다만 진혁위의 경우는 약간 달랐다. 진혁위의 모비인 혜비와 진윤홍이 어려서부터 교류가 있던 것이 이어지면서, 다른 황가의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매년 중양절과 신년에 선물을 들고 한 번씩 인사를 가는 것뿐이지만 웃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이였다.

“폭우가 심하였는데, 오시는 길이 험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커다란 나무 아래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지. 그런데 조카님이 불사까지 웬일일까? 부처에게 빌 시간에 화살이라도 하나 더 쏘겠다고 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주 어릴 때 했던 말인데,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 마음은 변함없습니다. 오늘은 귀비의 부모님 기일이라 함께 왔습니다.”

“그래. 네가 혼인을 했었지.”

“예. 요란하게 했습니다. 고모님이 보내신 선물을 잘 받았다고 답신도 써서 드렸지요.”

진윤홍은 진혁위에 뒤쪽에 서 있는 사내를 보았다. 진혁위와 혼인을 한 류희겸에 대한 소문은 요란해서, 칩거를 하다시피 한 진윤홍도 이름을 자주 들었다.

눈을 내리깔고 있어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지만, 키가 크고 잘생긴 미남자라는 것은 숨겨지지 않았다.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색 편복을 입은 모습은 장군이 아니라 고고한 학자처럼 보였다. 진혁위가 한눈에 반해 혼인을 강행했다는 소문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오늘이 귀비의 생일이기도 해서 바람을 쐬기로 했습니다. 귀비. 인사드려라. 문옥장공주시다.”

“류희겸이 문옥장공주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뜬금없이 진혁위가 류희겸의 생일을 언급했지만 진윤홍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류희겸에게 집중했다.

“일어나세요. 반갑습니다. 귀비. 갑작스럽겠지만 올해 연치가 어찌 되십니까?”

“경인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럼 스물여섯이겠군요. 태어난 시는요?”

손아랫사람이라고는 하나 엄격하게 따지자면 나이를 묻는 것부터 예의가 아니었다. 평소 말을 아끼는 진윤홍이 류희겸의 태어난 시각까지 물어버리자 진혁위는 의아해졌다.

“고모님. 그는 이미 저와 혼인을 했습니다. 저 몰래 따로 장가를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가끔 사람이 태어난 날과 시가 궁금하여 이런다. 귀비도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진윤홍이 류희겸의 나이를 묻고 태어난 시를 묻자 진혁위가 농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희겸은 예의 바르게 답했다. 진혁위라는 변수가 생겼지만, 여기까지는 직전 생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대답하기 쉬운 것이니 괜찮습니다. 소인은 술시(戌時)에 태어났습니다. 마마.”

“그렇군요. 돌을 놓아주어 고맙습니다. 귀비. 편히 지나갈 수 있겠습니다.”

“장공주 마마. 세 번째 돌이 흔들립니다. 조심하십시오.”

“다정한 분이군요. 나중에 한번 뵙도록 하지요.”

적당한 곳에서 대화를 마무리한 진윤홍은 조심해서 돌아가라는 인사를 하고는 화봉사로 향했다. 부지런한 영왕부의 시종들은 이미 마차와 말을 준비해 대기하고 있었다.

진혁위는 화봉사에 왔을 때와 달리 말을 타지 않았다. 류희겸을 먼저 마차에 밀어 넣은 다음 곁에 앉았다.

궁금한 것이 많이 있었지만 진혁위는 순서를 지켰다. 마차를 출발시키고 요란한 바퀴 소리가 한참이나 울린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도깨비놀음인지 말해라.”

위협적인 목소리만큼이나 진혁위의 눈빛은 사납게 빛났다.

*

류희겸은 망설이지 않고 솔직하게 답했다.

“장공주 마마와 인연이 필요했습니다.”

“인사한 것만으로도 인연이 생기더냐?”

진혁위의 질문은 당연했다. 그저 인사한 것만으로는 인연이 생기지 않는다. 특히 진윤홍처럼 칩거하다시피 하고 있는 사람과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류희겸은 확신이 있었다.

“장공주님의 어린 아들이 죽은 날이, 이십육 년 전 오늘입니다. 예. 그날 제가 났습니다. 그리고 장공주님의 아들 이름은 주희겸(周姬縑)이었습니다. 많은 우연이 겹친 것뿐이지만, 공주님은 제가 당신의 아들이 태어난 거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고모님이 그런 미신을 믿는다고?”

“어려서 죽은 아들을 오래도록 그리워하셨습니다. 나중에는 아니라는 것을 아셨지만, 그래도 그리 믿고 싶어 하셨습니다.”

“인연이 필요한 이유는?”

마치 익문사에서의 취조와 같은 날카로운 질문에 류희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여기서 주도권을 뺏길 생각은 없었다.

“주희겸의 친부는 따로 있습니다. 주희겸의 명자 중에 하나는 친부의 성을 따랐습니다. 예. 왕야께서 예상하시는 그분이 맞습니다. 희범영 장군과 장공주님께서는 연인이셨습니다. 희범영 장군이 매년 희일준을 시켜 헌화를 하는 것은 죽은 아이를 기리기 위함입니다.”

“그게 무슨…….”

“선황께서 두 분의 혼인을 약조하셨으나, 당시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장공주께서 화번국으로 시집을 가셔야 했지요. 제가 이걸 어찌 아냐면 장공주께 직접 들었기 때문입니다. 장공주께서 저를 많이 아끼셨습니다. 왕야께서도 아시겠지만, 일 년 사이에 희범영 장군도, 장공주께서도, 그리고 희일준도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그들을 살려주십시오.”

직전 생과 달리 지금 류희겸은 희범영이나 희일준, 진윤홍과는 친분도 인연도 없었다. 그들을 살리려면 진혁위의 힘을 빌려야 했다.

당당하기까지 한 류희겸의 요구에 진혁위는 어이가 없었다. 놀라운 황궁 비사를 들려준 끝에 사람을 살려달라고 하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그들을 살려달라고?”

“황후는 자신의 외조카와 희일준을 맺어주려고 했습니다. 중양절에 희일준에게 최음약을 먹이려 하였는데, 그걸 제가 대신 마셨습니다. 그때가 맞습니다. 제가 그때 황후궁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왕야 이전에 장공주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전과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황후가 희일준을 포기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그것을 막지 못하니 장공주님이나 왕야밖에 없습니다. 희일준이 황후의 사람이 되면, 희가 역시 태자에게 넘어가게 될 겁니다.”

“본왕이 그걸 신경 쓸 것 같으냐?”

“왕야께서 희범영 장군을 존경하고 따랐다는 것을 압니다.”

“하, 그래. 그때 별꼴을 다 보였지.”

지난 생에 자신이 한 짓이 생각난 진혁위는 울컥하며 으르렁거렸다. 절로 욕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류희겸의 말대로 진혁위는 희범영을 존경했다. 닳고 닳은 욕심쟁이들이 넘쳐나는 곳에서 그는 현명하고 공정한 어른이었다. 그런 희범영이 죽은 것은 호양성을 점령하고 이어진 전투에서였다.

지난 생에서 류희겸의 재치로 호양성은 아주 손쉽게 점령했지만, 곧이어 화진국과의 전면전이 이어졌다. 한참 전공에 욕심을 내던 진혁위는 불필요한 전투는 피하자고 하는 희범영을 설득했다. 전투에서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적의 간계에 희범영 장군이 죽고 말았다.

아무도 진혁위를 탓하지 않았다. 전쟁에서는 누구나 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진혁위는 스스로를 탓하며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비통히 울었다. 우연찮게 그때 류희겸이 바로 옆에 있었다. 류희겸이 맹자의 고자장으로 웃기지도 않은 위로를 하기도 했었다.

따지고 보면 서로 치부가 될 것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류희겸의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는 사실에 이상하게 민망해졌다.

어지럽게 이어지는 대화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지만 진혁위는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류희겸은 어떤 미래를 대비하고 있었다. 바로 류희겸이라는 인간이 없는 미래였다. 반사적으로 도주를 제일 먼저 떠올렸지만,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진혁위는 자신의 고집으로 희범영의 죽음을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희일준이 누구와 혼인을 하든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입에 올리는 대신에 류희겸에게 집중했다.

“류희겸.”

“예.”

“목적이 무엇이냐?”

모든 것을 관통하는 질문에 류희겸은 진혁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포장이 되지 않은 길을 덜컹거리며 굴러가는 바퀴 소리는 꽤나 요란스러웠지만, 그래도 낮은 속삭임이 들릴 정도로 둘의 사이는 가까웠다. 진혁위가 화를 참고 있는 것도 똑똑히 보였다.

여기서 입을 다물었다가는 발등이 부서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저 역시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길게 숨을 들이쉰 류희겸은 단숨에 말했다.

“……뭐?!”

헛웃음을 내뱉은 진혁위는 마치 얼음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굳혔다. 그래도 류희겸은 무시무시한 박력에 밀리지 않았다. 여전히 진혁위를 믿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도박을 할 때였다.

“이미 아시겠지만 유서를 적어두었습니다. 백진호가 찾을 황금으로, 그에게 시킬 일이 있습니다.”

“지금 죽겠다고 시위하는 것이냐? 그렇게 죽고 싶다면 내가 죽여주랴?”

“죽이지 못하시는 거 압니다.”

“뭐?”

“정말로 죽이려 들었다면 지금 저는 여기에 없었을 겁니다. 만월제전에서 죽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진혁위는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힌다는 게 어떤 것인지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죽이지 못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걸 알고 이리도 당당하게 구니 머리에 열이 훅 올랐다.

자신을 바라보는 류희겸의 검은 눈은 단단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속이 쓰린 것과 별개로 류희겸이 이제야 제대로 말을 할 거라는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류희겸. 말이 헛돌고 있다.”

“당신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진한재 때문입니다.”

“진한재? 화진국의 황자? 그자가 왜?!”

“당신이―”

“습격이다!”

류희겸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며 마차가 멈춰 섰다. 진혁위도 류희겸도 서로 놀란 얼굴로 서로를 보다가 재빨리 몸을 숙였다.

곧 열린 창문 너머에서 화살이 날아들어 내부 벽에 박혔다. 동시에 외벽에 화살이 박히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왕야! 기습입니다. 활을 쏘는 이가 열이 넘습니다. 말도 죽었습니다.”

“마차 옆으로 피해라. 곧 나가겠다.”

영왕부 시위들을 통솔하는 서평호가 다급하게 바깥 상황을 알려주었다. 짧게 명령을 내린 진혁위는 류희겸과 함께 밖으로 나와 옆으로 숨었다.

바깥 상황은 엉망이었다. 마차는 끄는 두 마리의 말은 모두 넘어져 있었고, 서쪽에 서 있던 시위와 시종 몇몇도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히 커다란 마차가 엄폐물 역할을 제대로 해주어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재학이를 태경으로 보냈습니다. 경조(京兆)에 알리라고 했습니다.”

“잘했다.”

서평호의 보고에 진혁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서 태경까지는 가까웠다. 영왕부의 마차를 노려 기습을 한 놈들이 그저 화살만 쏘고 물러날 리 없었다.

마차가 멈춰 선 서쪽으로 얕은 구릉이 있었다. 반대편 동쪽은 개활지였기 때문에 화살은 서쪽에서만 날아왔다. 활은 원거리 견제와 습격에 유리했지만 마차로 엄폐하면 아무 쓸모가 없었다. 단순 위협이 목적이 아니라면, 근접전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진혁위가 준비해 온 검을 움켜쥐고 있는데 옆에 있던 류희겸이 옷자락을 잡아 왔다.

“제게도 무기를 주십시오.”

“뭘 믿고.”

“저를 노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냉정한 말에 진혁위는 속으로 혀를 찼다. 몸을 잔뜩 긴장시키고 있는 류희겸의 모습은 기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만약, 류희겸이 도망치기 위하여 계획한 습격이라면 그에게 무기를 줄 수는 없었다.

“내가, 그리고 영왕부의 시위가 너 하나 못 지켜줄 것 같으냐?”

“곧 난전이 일어날 것 아닙니까. 왕야께서 단검을 하나 더 들고 다니시는 거 압니다. 주십시오.”

류희겸은 무기가 필요했다. 영왕부 시위들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을 위해서 제대로 된 무기가 있어야 했다. 발도 살짝 절고 있는 상황에서 머리에 꽂힌 옥비녀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희일준이 손목에 비도를 숨기는 것처럼 진혁위도 작은 단검을 하나 몰래 가지고 다녔다.

“받아라.”

결국 진혁위가 오른쪽 발목에 차고 다니던 단검을 내밀었다. 겨우 한 뼘 크기의 단검이었지만 류희겸은 만족했다.

“연막에 대비해서 복면을 써라. 상대는 무림인일 수도 있다.”

진혁위의 명령에 류희겸은 품에 넣어두었던 영견으로 얼굴의 반을 덮었다. 상대가 무림인이라면 진혁위의 말대로 연막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 때 마침 화살 공격이 멈췄다. 적들이 도망을 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공격을 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긴장을 풀지 않은 류희겸은 버릇대로 퇴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동쪽 개활지는 잡초가 우거져 있어 활을 든 적을 뒤에 두고 도망치기 힘들었다. 결국 태경이나 화봉사 쪽으로 향한 길뿐이었다.

물론 최선은 적을 이 자리에서 모두 쓰러뜨리는 것이지만 류희겸은 낙관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발악해도 차가운 감옥 바닥에 쓰러져 죽는 것을 막지 못했다. 변수가 생겼으니 언제 어디서 죽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은 백진호에게 이미 손을 써두었다는 것이었다. 진혁위에게 진한재의 이름만 언급하고 사연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 게 신경 쓰였지만, 유서를 읽으면 이해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어쨌든 살아남아 보자고 다짐하는 류희겸의 눈에 뭔가가 걸렸다. 동쪽 개활지 쪽의 길 아래 둔덕에 숨어 있는 시종들이었다. 영왕부에서 화봉사까지 따라온 시종은 열 명이 조금 넘었다. 무기도 없고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시종들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류희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심양설이 끌어안고 있는 우풍이였다. 축 늘어진 우풍이의 등 뒤에는 검은 화살깃이 삐죽이 솟아 있었다.

“아…….”

저도 모르게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무가에서 태어나 전장을 돌아다닌 류희겸은 많은 죽음을 보아왔다. 가까운 부관이, 어제 이야기를 나누었던 병사가 싸늘하게 식은 주검이 되는 것은 비일비재했다.

그랬기에 죽음에 무덤덤해졌다. 생을 반복하며 복수에 눈이 멀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사람의 목숨을 수단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럴 때면 속이 텅 비어버렸다. 직전 생에 이곳으로 데려온 부하들을 하나씩 잃을 때, 희범영과 진윤홍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도 그랬다.

이제 겨우 아홉 살인 아이가 주인을 따라 나왔다가 어이없게 죽어버렸다. 태경 밖으로는 처음 나간다며 조잘거리던 우풍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반각은 넘게 걸어야 한다는데도 아이는 들떠 있었다.

“와아아아!”

어지럽고 무겁게 침잠하는 감정에 빠져들 시간이 없었다. 함성 소리에 반사적으로 단검을 움켜쥔 류희겸은 냉정하게 긴장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을 무렵에 연막탄이 굴러와 터졌다. 진혁위의 예견에 미리 대비한 류희겸과 시위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매캐한 냄새가 나는 하얀 연기가 퍼지는 것과 동시에 복면을 쓴 괴한들이 덮쳐들었다.

류희겸은 두려움 없이 혼란 속으로 뛰어들었다.

*

영왕부의 시위들은 실력이 출중했지만 습격을 감행한 괴한들 역시 뛰어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숫자는 괴한들이 배는 많았기에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변수는 뛰어난 무력을 가진 진혁위와 류희겸의 존재였다. 무환 행궁에서 함께 등을 맞대고 싸웠던 경험이 있는 두 사람은 손발을 맞춰 괴한들을 하나씩 쓰러트렸다. 특히 괴한에게서 검을 빼앗아 든 류희겸은 오른쪽 발이 아픈 것을 잊어버린 채 움직였다.

류희겸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낼 여유가 생겼을 때는 상황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다. 손등으로 뺨을 닦다가 손이고 옷이고 할 것 없이 피가 묻었다는 것을 깨달은 류희겸은 숨을 길게 내쉬며 정신을 집중했다.

“류희겸.”

“예.”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류희겸은 긴장을 풀지 못하고 진혁위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얼굴에 붉은 피가 튀어 있었다. 검은 무복은 피가 묻었는지 잘 티가 나지 않았지만 출발할 때의 깔끔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검을 내려놓아라.”

“……아.”

“어서.”

강한 재촉에 류희겸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순간에도 무기를 놓으라고 명령을 내리는 진혁위 덕분에 긴장이 풀렸다.

류희겸은 괴한으로부터 빼앗은 검을 비가 내려 진흙탕이 된 바닥에 내던졌다. 그제야 피냄새가 확 느껴지는 바람에 류희겸은 미간을 찡그렸다.

“왕야께서 주신 단검은 어디에 뒀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됐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왕야께서는요?”

“나도 없다.”

류희겸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바닥에는 복면 괴한이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살아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영왕부의 시위들이 무사하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화봉사까지 동행했던 스무 명 중에 제대로 서서 움직이는 사람은 겨우 일곱뿐이었다. 다급하게 붕대를 감아 지혈을 하는 이들도 여럿 보이기는 했다.

시종들이 숨어 있던 둔덕 아래도 시끄러웠다. 다들 우풍이를 안고 있는 심양설을 둘러쌌다. 류희겸은 다급하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풍이는 살았느냐?”

“예. 정신을 잃었지만 숨은 쉽니다. 어깨에 살을 맞았는데, 의원이 없으니 어찌 손을 써보기가 무섭습니다.”

덜덜 떨리는 심양설의 설명에 류희겸은 마음이 급해졌다. 거리를 따지자면 태경보다는 화봉사가 더 가까웠다. 하지만 그곳에 실력 있는 의원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결단을 내릴 진혁위는 바빴다. 주위를 정리한 시위 둘이 괴한 하나를 진혁위 앞으로 끌고 왔다. 기괴하게 꺾인 두 다리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일부러 부러뜨린 것이었다. 입에는 천으로 만든 끈을 물려 혀를 물지 못하도록 하였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느냐?”

진혁위가 괴한의 다리를 밟으며 물었다. 이미 다리가 부러진 괴한이 비명을 내질렀다.

“우리는, 우리는 도적이다. 마차가 화려해서 털어보려고 했던 것뿐이다!”

“허튼소리.”

“도적이라고― 으아악!”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고?”

“모른다. 모른다고! 으악! 몰라. 죽여라!”

진혁위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괴한은 다리를 밟히면서도 끝까지 모른다고만 외쳤다. 진혁위의 뒤편에 서서 그것을 지켜보던 류희겸은 초조해졌다. 경조에서 사람이 오면 살아남은 괴한들을 넘겨야 했다.

류희겸이 알고 있는 경조윤(京兆尹)은 태자나 기왕의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극히 자기 보신적인 인물이었다. 태자가 압박을 가한다면 괴한들을 넘겨서 이상한 조작을 하고도 남았다.

경조윤에 넘기기 전에 괴한에게 최대한 정보를 캐낸 다음에 죽이는 게 맞았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왕야. 소인이 해보겠습니다.”

“네가? 좋다. 해보거라.”

진혁위의 허락을 받은 류희겸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집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는 괴한의 앞에 서서 그대로 낭심을 후려쳤다.

“끄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괴한이 눈을 까뒤집으며 발작했다. 괴한을 붙잡고 있던 시위들과 자리를 옆으로 비킨 진혁위가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의 따가운 시선이 얼굴에 박혔지만 류희겸은 무표정하게 괴한의 부러진 다리를 차며 정신이 돌아오게 만들었다.

“아는 것을 모두 답해라. 불알이 터져서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씨발, 모른다고!”

모른다는 말을 듣자마자 류희겸은 한 번 더 검집을 휘둘러 낭심을 쳤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약했지만 이미 한 번 제대로 맞은 탓에 고통과 공포는 배가 되었다. 맞는 사람은 물론 보는 사람 역시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진혁위는 새삼 류희겸을 다시 봤다. 과감하다는 것은 알았으나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리고 괴한을 억누르고 있던 시위 두 명은 물론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 대부분은 귀비에게 밉보이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입을 다문다고 네놈이 누군지 못 알아낼 것 같으냐? 네놈이 살던 집 앞에 하초가 없는 알몸으로 버려지고 싶지 않으면 제대로 답해라.”

“너, 너무하시오!”

덜덜 떠는 괴한의 반박에 류희겸은 대답 대신에 검집을 역수로 들었다. 그대로 내려찍으려는 의도가 명백한 자세에 괴한은 아는 걸 다 말하겠노라고 꽥꽥 비명을 질렀다.

구일용은 돈만 주면 사람도 죽이는 청부업을 하는 흑도의 무림인이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막 살았다. 목숨에 미련도 적었다. 그러나 죽음은 피할 수 없더라도 양물이 터져나간 시신이 길거리에 버려지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말하겠소. 말하겠습니다. 제발. 그러지 마시오!”

“사주한 이가 누구냐?”

“소인은 그저 명령을, 명령을 받았습니다. 저기, 저기 죽어 있는 대장에게. 대장도 다른 사람에게 사주를 받은 듯한데, 저 같은 말단은 모릅니다.”

구일용이 턱으로 가리킨 것은 마차 옆에 혀를 내빼고 죽어 있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였다. 대장이 죽었으니 배후를 밝히는 것은 어려웠다.

“지난달에 영왕부를 습격한 것도 너희들이냐?”

“네? 아. 네. 맞습니다. 저희 회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놈들이 갔습니다. 그게 실패하자 대장이 깔끔하게 덮치자고 해서……. 그래서 이곳에 매복해 있다가 지나가는 영왕부의 마차를 공격했습니다.”

류희겸이 검을 고쳐 쥐자 구일용은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말했다. 류희겸은 구일용의 이름과 활동 지역 등을 물어보고는 진혁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진혁위 역시 몇 가지 더 질문을 던지고는 구일용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는 묘한 눈빛으로 류희겸을 보았다.

“귀비가 무서운 재주를 가졌구나.”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다친 사람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화봉사가 더 가깝기는 하지만 의원을 데려오려면 시간이 걸릴 겁니다.”

“왕부로 갈 것이다. 화봉사는 사람의 눈이 너무 많아.”

진혁위가 결단을 내리자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과 시위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상자가 많았기에 가까운 화봉사에 말과 수레를 빌리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마차를 끌 말을 교체하고 위급한 사람을 먼저 타게 했다. 활에 맞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우풍이 역시 심양설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류희겸은 멀어지는 마차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흥분과 긴장이 가시자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조직의 말단이라는 괴한은 습격을 사주한 자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영왕의 귀비를 최우선으로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어디서 구한 것인지 모르나 자세한 용모파기를 보고 얼굴까지 익혔다는 말에 류희겸은 불길함을 느꼈다.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았다. 특히 태자와 황후, 좌승상이 그랬다. 하지만 그들이 배후라면 자신이 아니라 진혁위를 먼저 죽이라고 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길 황제일 수도 있었다. 지금이야 나라의 충신이니 뭐니 하고 치켜세워 주고 있지만 나중이 되면 몇 번이고 곤란에 빠트렸다.

하지만 류희겸은 다른 사람을 의심했다. 바로 진한재였다.

자신이 황금을 써서 화진국의 황자를 죽이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진한재 역시 사람을 써서 대연국 친왕의 귀비를 암살하려고 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직전 생에서는 없었던 일이지만 여러 변수로 인해 진한재의 입장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사실 이유도 대충 짐작 갔다. 자신이 살아서 입을 놀리면 놀릴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진한재였다.

빌어먹을 개새끼. 당장에 죽일 수 없는 상대를 향해 류희겸은 욕설을 내뱉었다. 진한재야말로 지독한 악연이었다. 친구이자 주군의 배신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얽혀들었다. 이번만큼은 그를 확실하게 죽여야 했다.

진한재를 죽이기 전에 진혁위와 꼬인 인연부터 풀어야겠다고 한숨을 내쉬던 류희겸은 잠시 멈칫했다. 동쪽으로 펼쳐진 개활지 저쪽에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푸른 옷을 입고 있는 사내가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웃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의식이 훅 꺼졌다.

“마마!”

제일 처음 류희겸의 이변을 알아차린 것은 서평호였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본 진혁위의 눈에 비친 것은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진 류희겸의 모습이었다.

숨을 멈춘 진혁위는 그대로 류희겸에게 달려가 그를 품에 안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피에 젖은 얼굴은 지난 생에 마지막 순간과 겹쳐 보였다. 미약한 숨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류희겸.”

진혁위는 축 처진 류희겸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왜 쓰러진 거지? 다친 곳은 없었는데.

조금 전에 쓰러졌는데도 불구하고 진혁위가 붙잡은 손과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혹시나 싶어 여기저기 만져 보았지만 상처는 없었다. 끔찍한 장면에 충격을 받아 쓰러질 정도로 마음이 여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진혁위가 잘 알고 있었다.

“류희겸.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정신 차려라. 류희겸!”

몇 번이고 뺨을 쳐보지만 류희겸이 눈을 뜨지 않는 바람에 진혁위는 무서워졌다. 이렇게 또 허무하게 잃는단 말인가. 이번에는 바로 옆에 있었는데.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진혁위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그때와 달리 미약하나마 숨을 쉬고 있었다.

“내 말을 준비해라! 어서!”

류희겸을 안아 들어 올린 진혁위는 커다랗게 소리쳤다. 이번만큼은 그냥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

류희겸을 안고 내달린 진혁위는 먼저 보낸 마차를 단숨에 지나쳤다. 영왕부까지 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옥안인을 데려와라! 어서!”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진혁위는 옥안인을 찾으며 자신의 침전으로 향했다. 침상에 류희겸을 눕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옥안인이 달려왔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흉흉한 기세로 서 있는 진혁위를 보며 대경했다.

“왕. 왕야. 그 피는……!”

“나는 다친 곳이 없다. 얼른 귀비를 살펴라. 갑자기 쓰러졌다. 다친 곳은 없는데,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진혁위의 재촉에 옥안인은 얼른 류희겸을 진찰했다. 류희겸 역시 진혁위의 말대로 피투성이였지만,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 신중히 촉진을 하고, 맥도 짚고, 침도 놓았다. 코 밑에 향도 피워보았으나 반응이 없었다.

옥안인은 유능한 의원이었다. 담이 작아 잘 놀라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장에서도 활약하며 산전수전 다 겪었다. 하지만 류희겸이 왜 쓰러졌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냐?”

옥안인이 쩔쩔매고 있자 진혁위가 날카롭게 물었다.

“소, 소신도 모르겠나이다.”

“멍청한 놈. 의원이 모른다면 누가 안단 말이냐?!”

“그것이. 갑자기 쓰러진다면 보통은 머리나 심장의 문제이온데, 귀비 마마에게서는 이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머리는 상처도 없고, 부푼 곳도 없습니다. 맥도 규칙적으로 뛰고 있습니다. 몸이 차가운 것은 보통 과한 실혈 때문인데, 귀비 마마는 상처 하나 없으십니다. 하여 소신은 귀비 마마께서 쓰러진 연유를 모르옵니다. 죽여주십시오.”

제자리에서 엎드린 옥안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자비를 구했다. 옥안인은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피칠갑을 한 진혁위는 그 존재만으로도 무서웠다.

반면에 진혁위는 이 모든 게 믿기지 않았다. 멀쩡히 서 있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졌는데, 이유를 모르겠단다.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는 류희겸의 모습은 이전 생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하. 씨발. 이런 개 같은 일이!”

거칠게 욕설을 하는 진혁위에게 어느 누구도 진정하라 말을 건네지 못했다.

“무슨 짓을 해서든 깨워라. 귀비가 잘못되면 네 목도 잘릴 것이다.”

“예? 예. 왕야.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옥안인이 다시 넙죽 엎드리는 것을 뒤로한 진혁위는 그대로 침전을 나섰다.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류희겸을 계속 보고 있자니 뭐라도 부숴버릴 것 같았다.

“왕야. 씻을 물을 준비하라 일렀습니다. 탕전으로 가시지요.”

조용히 진혁위의 옆에 선 우소진이 말을 걸었다. 얼굴과 손에 묻은 피가 까맣게 말라붙은 진혁위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그제야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진혁위는 와락 인상을 쓰다가 곧 냉정을 되찾았다. 미칠 것같이 짜증 나는 상황이었지만 무엇이 먼저인지 모를 정도로 이성을 잃지 않았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부상자가 올 것이다. 크게 다친 이들이 여럿이니, 옥안인에게 준비하라 일러라. 그리고 귀비도 깨끗하게 씻기고.”

“더 하명하실 것은 없으십니까?”

“채제승을 불러라. 조용하게.”

“알겠습니다. 이제 가시지요. 왕야. 씻으셔야 합니다. 깨끗하게 씻으신 후에 귀비 마마를 뵈러 가시면 됩니다.”

우소진의 간곡한 청이 멍멍하게 귀에 울리는 것을 들으며 진혁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미쳤지만, 속이 답답하여 더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 또 허무하게 잃을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