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章
헛숨을 들이쉬며 꿈에서 깨어난 진혁위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정신은 맑지 못했다. 거기다 말간 얼굴의 류희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어서,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현실인지 애매했다. 머리를 풀고 하얀 침의를 입고 있는 류희겸의 모습은 어딘가 환상 같았다.
“깨셨습니까?”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살아 있는 사람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현실인가? 진혁위는 잠시 의심했다.
그는 결코 정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잠시 끌어안았던 온기의 흔적은, 마치 화상처럼 영혼에 새겨져 있었다. 죽어버린 그를 잊지 못하고 계속 갈망하고 갈망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밤마다 꿈을 꾸었다.
“왕야?”
“류희겸.”
“예.”
환상이 착실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꿈이 아니라 현실인지도 몰랐다.
“류희겸이 맞아?”
“예. 저입니다. 악몽을 꾸셨습니까?”
“글쎄…….”
애매하게 대답한 진혁위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손가락 끝에 축축한 땀이 만져졌다. 몸이 안 좋으니 꿈자리가 사나웠다.
“깨어나셨다고 우 공공에게 알리겠습니다.”
“어딜 가려고. 앉아 있어라.”
진혁위는 미련도 없이 일어나려는 류희겸의 팔을 붙잡았다. 이전 생에서도 지금 생에서도 류희겸은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농담에 웃으며 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다정한 말도 곧잘 하며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반면에 지금은 약간의 곁도 내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몸이 힘들어서 그런지 그게 괜히 서운해져서 잡은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 다행히 류희겸이 손을 뿌리치지 않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팔이 아픕니다.”
“아프라고 잡았다. 이제 놓으마. 그런데 귀비가 여기는 어쩐 일이냐?”
“우 공공이 간호를 부탁했습니다. 몸이 미령하시다 들었습니다.”
“별것 아니다.”
정말 별것 아니었다. 체기가 심하여 조금 앓은 것뿐이었다. 속을 비우고 약도 먹었으니 내일 아침이면 깨끗하게 나을 터였다.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는데, 류희겸이 무서운 눈빛으로 다른 것을 지적했다.
“황후께서 만든 간식 때문에 탈이 난 것이지요?”
“머리를 푸니까 예쁘구나.”
“딴소리하지 마십시오.”
“맞아. 황후가 독을 잘 다루지. 심술이 나면 웃는 얼굴로 독을 먹이거든. 태자보다는 똑똑해서 사람이 죽을 정도로 독을 쓰지는 않지만, 그래도 황후가 주는 것은 피하는 게 좋다.”
진혁위는 숨김없이 사실을 전했다. 조향에 능한 황후는 독을 곧잘 썼다. 목숨을 빼앗는 극독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대신에 사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녀가 간식에 섞은 독은 소화 기능을 저하시켜 속앓이를 하게 만드는 것일 터였다.
태연하기 짝이 없는 진혁위의 설명에 류희겸은 까맣게 속이 탔다. 그의 말대로라면 독인 것을 알고도 황후가 내어준 간식을 먹었다는 소리였다.
“독인 걸 아시면서 어찌 드셨습니까? 저처럼 속이 안 좋다 하셔야지요.”
“괜찮다. 독 자체는 문제될 거 없어. 몇 번 먹어봤으니까.”
“……?!”
“독에 내성도 키워두었다. 지금 이건 저녁에 술과 기름진 것을 먹어서 심하게 체한 것뿐이니 곧 괜찮아질 것이다.”
이번에도 류희겸은 할 말을 잃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제멋대로 사는 진혁위도 황궁 암투를 피해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래도 독의 내성을 키웠다는 것은 일부러 독을 먹었다는 소리였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새삼 안쓰러워질 정도였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십시오.”
“무얼?”
“독이라는 것을 알고도 먹지 말란 말입니다.”
힘이 실린 명령조의 말투였다. 전장을 누비던 장군 출신의 귀비의 기백은 무시무시해서 진혁위는 내심 놀랐다. 고분고분하지만 무심한 성격의 류희겸이 이렇게 강한 감정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그만큼 독을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을 걱정하는 것은 분명했다.
아픈 척을 해볼까? 류희겸의 반응이 궁금했던 진혁위는 당장에 행동으로 옮겼다.
“귀비도 알겠지만, 알고도 먹어야 할 때가 있다.
“왕야.”
“이제 그만하자. 말을 많이 하니, 머리가 울린다. 아파.”
아프다고 말하면서 앓는 소리를 내자 류희겸이 멈칫 하며 놀랐다. 얼굴 표정까지도 바뀌는 바람에 진혁위는 속으로 웃었다.
류희겸이 어린아이를 아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지난 생에 희가의 어린 종복을 마치 동생처럼 아꼈던 것을 기억해 내고는 일부러 우풍이를 그에게 붙여두었다. 귀신같이 무섭다는 장군은 어린아이는 물론이고 병자에게도 약한 모양이었다.
“많이 아프십니까? 옥안인을 부를까요?”
평소와 달리 애틋한 온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에 진혁위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애증의 상대가 보이는 자그마한 호의에 기뻤고, 또 그런 자신이 한심했다.
복수하겠다고, 죽여버리겠다고 다짐을 하며 류희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도망가지 못하게 다리를 자르고, 혀를 뽑아 감언이설로 사람을 속이지 못하게 할 거라는 마음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도 않았다.
손에 쥐었더니, 이제는 저 마음을 가지고 싶었다. 이전 생에 가지 못했던 서역으로 함께 떠나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또 머리 한쪽으로는 그를 믿지 말라고 경고가 울렸다.
열이 오른 머리로는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이럴 때는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최고였다. 그래서 진혁위는 아픈 척을 하기로 했다.
“열 때문인지 머리가 아프다.”
“옥안인을 부르겠습니다. 밖에 우 공공 있는가?”
“부르지 마라.”
진혁위는 우소진을 부르려는 류희겸을 말렸다. 귀가 밝은 우소진이 냉큼 반응했지만 진혁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물러나게 했다.
“아프시다면서요. 약을 써야 합니다.”
“약은 이미 먹었다. 그것보다는 귀비가 손을 잡아주면 괜찮아질 것 같다.”
“예?”
“진짜다. 손이나 잡아봐라.”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재촉하는 진혁위를 내려다보던 류희겸은 잠시 망설였다. 농담을 할 정도면 아주 아픈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안색만큼은 나빴다.
“손을 잡아주기 싫어? 그럼 접문은 어떠냐?”
“……?!”
“접문을 해주면 당장에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픈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던 류희겸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농을 하는 진혁위의 성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류희겸은 주변에서 진혁위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 보지 못했다. 함께 자란 조카는 덩치는 커다랗지만 어려서부터 유순한 성격이었다. 입을 다물고 눈물을 흘리는 걸로 떼를 쓰는 것이 전부였다. 학당 동무들도 대부분 점잖았다. 군인들은 성격이 거칠기는 했지만 직설적이었다. 성인군자의 탈을 쓴 진한재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고명한 학자 같았다.
이렇게 사람 속을 들었다 놨다 하며 농을 하는 이는 진혁위가 처음이었다. 직전 생에서도 그를 보며 얄밉다고 생각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오늘만큼은 한 대 때리고 싶어졌다. 그래도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졌다.
류희겸도 크게 아파본 경험이 몇 번 있었다. 대부분은 칼과 창에 베이고 찔린 외상 때문에 고생을 했었다. 그때마다 혼자 누워 있으면 왠지 쓸쓸했고, 누군가 찾아와 곁을 지켜주는 것이 좋았다. 어려서도 나이를 먹어서도 그건 변하지 않았다.
“손을 잡아드리겠습니다.”
“접문이라니까.”
류희겸은 베개 옆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진혁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자유로운 나머지 손으로 진혁위의 얼굴을 덮어 눈을 가렸다. 잡은 손도, 진혁위의 얼굴도 모두 뜨거웠다.
“주무십시오.”
“귀비가 본왕을 긍휼히 살필 줄 알았다.”
“열이 심하십니다. 이제 말은 그만하시고 주무십시오.”
“안 졸리다.”
진혁위가 얼굴을 이리저리 흔들었지만 류희겸은 꿋꿋하게 버텼다.
“다음부터는 독 같은 건 드시지 마십시오.”
“알아도 먹어야 할 때가 있다니까.”
“피할 수 있다면 피하시라는 것입니다.”
“귀비의 잔소리가 무섭구나. 그리할 수 있으면 그리하겠다. 손을 잡아주니 진짜 낫는 것 같다. 시원해서 좋아.”
투정 아닌 투정에 류희겸이 반응하지 않자 대화는 그렇게 끊겼다. 한 손으로는 누워 있는 진혁위의 얼굴을 가리고, 또 한 손으로는 손을 잡고 있는 기묘한 자세였지만 불편하지는 않았기에 한참을 버텼다. 다행히 잠시 뒤척이던 진혁위는 곧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었다.
슬그머니 손을 거두려는데, 진혁위가 반사적으로 깍지를 끼며 꽉 붙잡았다. 그래서 얼굴에서는 손을 뗄 수 있었지만, 손은 계속 잡아주어야 했다.
류희겸은 잠이 든 진혁위를 한참 내려다보며 상념에 잠겼다.
이번 생은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 시작은 백진호가 아니라 진혁위가 자신을 사버린 것이었다. 그와 겨우 한 달을 함께 지냈을 뿐이지만 이렇게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랑비에 옷자락이 젖어가듯 쌓여가는 정이 무서운 법이었다.
진혁위의 약한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 생에는 희범영을 잃고 소리 없이 우는 진혁위를 어설프게 위로했던 적도 있었다.
그때는 상실의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숨겨야 했던 덩치 큰 황자가 안타까웠다. 지금도 독이라는 것을 알고도 먹어야 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그리고 복잡한 감정도 뒤섞였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진혁위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쯤은 모르지 않았다. 그저 단순한 총애라고 치부하기 어려운 감정적인 호의에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만약 자신이 평범한 노비였다면, 복수를 맹세하지 않았더라면, 거친 다정함에 안주했을지도 몰랐다.
만약의 가정을 하던 류희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진한재가 언제 어떻게 진혁위를 매수할지 몰랐다. 진혁위가 제좌를 노린다면 화진국의 장군을 끝까지 품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진혁위의 신임을 받는 것이 최선이기는 하나,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어야 했다. 사람 일이라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더더욱 최악을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한재를 죽여야 한다. 여섯 번을 죽고 되살아나서는 일곱 번이나 같은 생을 반복하면서 단 하나만을 위해 살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수단으로 보아왔다. 이것이 제대로 된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차라리 냉혈한이 되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었다.
직전 생과 마찬가지로 때가 온다면 자신은 떠나야 했다. 비정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래서 모질게 굴지 못하는 스스로가 멍청이 같았다.
“멍청이가 맞아.”
한숨을 삼킨 류희겸은 깊게 잠든 진혁위를 살피면서 손을 빼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귀신같이 알아챈 진혁위가 단단히 손을 얽었다.
“그러지 마라.”
잠결에 웅얼거리는 소리는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때문에 류희겸은 손을 잡은 채 한참 동안 있어야 했다.
◇ ◇ ◇
수렵제 마지막 날에 열리는 연회는 종친과 황자, 무관들과 그의 자제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황제가 주최하는 연회답게 예법은 엄격했다. 상석에는 황제와 황후가 자리했고, 그 아래 단에는 황자와 종친들이, 그리고 고관들이 저마다의 지위에 따라 착석했다. 예부의 관리와 태감들은 연회에 참석하는 귀하신 분들의 명단을 확인하며 좌석 배치를 섬세하게 조절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연회가 열리는 대전에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대전으로 가는 길에 류희겸은 아는 얼굴과 마주하여 인사를 나누었다. 첫 번째는 제현공이었다. 대전으로 가는 길에 만난 제현공은 류희겸을 발견하고는 손자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제현공의 손자들은 덩치는 커다랗지만 아직 앳된 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기개가 있어 비무를 기대하고 있노라고 당당히 말했다.
제현공 다음은 희일준이었다. 류희겸은 희일준의 옆에 서 있는 희범영과 통성명을 할 수 있었다.
“군자라면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하지요.”
의미심장한 희범영의 말에 류희겸은 잔뜩 긴장했다. 희일준이 강직하고 바르게 큰 것은 그의 숙부인 희범영의 영향이었다. 황제가 희범영을 신임하는 것도 그의 성품 때문이었다. 희범영의 말에 맞장구를 친 것은 희일준이었다.
“맞습니다. 은혜는 열 배로 갚아야 하는 법입니다. 아, 왕야. 큰 눈이 내리기 전에 격구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두 분 모두 찾아주셔서 자리를 빛내주십시오.”
“격구회라니. 오랜만이군. 날짜가 정해지면 알려주게. 찾아갈 테니.”
“기대하겠습니다.”
진혁위가 흔쾌히 그러겠노라 대답하는 사이에 류희겸은 잠시 고민했다.
몇 번의 생을 반복하는 동안, 류희겸은 희범영을 존경하며 따랐다. 류희겸의 출신을 알고도 은혜를 갚기 위해 기꺼이 신병을 떠맡기까지 한 데다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주었다. 희범영의 강직하고 어진 성품은 고모부를 연상시키기까지 했다. 기회가 된다면 그의 죽음을 꼭 막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희일준이 문제였다. 희일준은 버릇처럼 팔목에 비도를 차고 다녔다. 전장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작은 무기를 숨기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연회가 열리는 대전에는 황제가 참석했다. 어전에서 무기를 패용할 수 있는 자는 금군시위들뿐인 상황에서, 희일준의 행위는 일종의 역모나 다름없었다.
평소라면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할 테니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조금 후에 희일준은 비도를 꺼내 들고 만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국법을 어긴 것은 맞았기에 결국 탄핵을 받게 되었다.
공신의 자식인 데다 희범영의 후계자인 희일준은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다친 팔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덧나는 바람에 오래도록 고생하게 된다. 또한 그 일로 황제에게 밉보여 희범영이 죽은 후에 험지로 떠돌다가 결국 객사한다.
비도의 존재로 시작된 불운을 막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다친 팔 때문에 고생했던 희일준의 모습을 떠올리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약간의 수고로움으로 희일준이 무사하기를 바랐다.
“대공자.”
“예? 예. 말씀하십시오.”
류희겸이 부르자 희일준이 공손히 대답했다.
“오른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
“오른손을 잠시 보여주시면 됩니다.”
뜻밖의 요구에 희일준은 물론이고 희범영과 진혁위까지 의아한 눈을 했다. 그래도 희일준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희일준은 예복 아래 입은 의복의 소매를 습으로 감쌌다. 그리고 그 아래 비도가 숨겨져 있었다. 류희겸은 오른 손목을 감싼 습을 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안에 든 것을 두고 가셔야 합니다. 티가 납니다.”
“……?!”
무엇을 두고 가라는 것인지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들 알아들었다. 당황한 희일준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이에 희범영이 나섰다.
“귀비 마마의 아량에 감사드리옵니다. 이것은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그러세요. 나중에 뵙겠습니다.”
예의 차린 인사를 한 류희겸은 진혁위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희일준이 희범영에게 끌려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진혁위가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게 티가 나더냐?”
“예.”
“눈썰미가 좋구나.”
진혁위는 속으로 감탄했다. 지금껏 잊고 있었지만, 지난 생에 희일준이 대전에서 무기를 사용하는 바람에 벌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몸이 상하기는 했으나 죽지는 않았기에 별달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사건이었다. 그런데 류희겸은 숨겨놓은 무기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반대로 류희겸은 내심 뜨끔했다. 진혁위가 딱히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너무 뜬금없긴 했다. 다행히 진혁위가 곧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고 보니 귀비의 격구 실력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군. 활은 표적을 맞출 줄 안다고 했는데, 격구는 어떤가?”
“말을 타고 채를 휘두를 줄은 아옵니다.”
“이런. 거창을 휘두르는 귀장군이 채를 휘두를 줄 안다고 자부하다니, 귀비는 격구하면 안 되겠다.”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건네는 농에 류희겸은 반박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격구에서 채를 휘두르며 공을 치는 것이나 전장에서 창을 휘둘러 적군의 목을 베는 것이나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스로 하는 칭찬이라 쑥스럽지만 자신만큼이나 마상에서 거창을 능숙하게 쓰는 이는 드물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화진국에서도 격구는 고관대작의 자제들이 남녀 가리지 않고 즐기는 유흥이자 무예였다. 류희겸의 실력은 출중했고 덕분에 승률은 꽤 좋았다.
“진짜 하지 말라는 건 아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본왕과 짝을 이루어 시합을 해봐야지. 희일준이 같이 오라 하지 않았느냐. 귀비는 잘 모르겠지만, 본왕이 격구도 좀 한다.”
자화자찬하며 어깨를 으쓱이는 진혁위를 보며 류희겸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진혁위가 격구를 좀 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격구 실력보다 잘생긴 얼굴이 더 유명한 것이 문제라고 직전 생에서 희일준에게서 들은 바가 있었다. 격구를 하는 진혁위를 보기 위해 격구장에 규수들이 잔뜩 모였다가 큰 싸움이 난 적이 있었다고도 했다.
“웃으니 보기 좋다만, 농이 아니다. 진짜 꽤 한다.”
“예. 잘하실 것 같습니다.”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는 사이에 이번에는 10황자, 11황자와 맞닥뜨렸다. 열네 살과 열세 살의 황자들은 아직 어렸다. 솜털이 가시지 않은 보송보송한 얼굴을 한 고귀한 황자들은 황후 앞에서 예의 차리던 모습과는 달리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가지는 부산함과 명랑함, 그리고 수줍음을 함께 보였다.
“소제도 희가의 격구회에 갑니다.”
“저도요.”
“이번에는 안 질 겁니다. 형님. 연습 많이 했습니다.”
“저도 연습 많이 했습니다. 어마마마께서 말도 새로 사주셨습니다. 두 마리나요. 한혈마는 아니지만, 멋진 녀석입니다.”
“저도 샀습니다.”
10황자 진영서(陳英瑞)와 11황자 진충가(陳忠佳)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떠들어댔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황자들이 진혁위를 잘 따르는 모습에 류희겸은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직전 생에 류희겸은 먼발치에서 두 황자들을 몇 번 본 것이 전부였다. 인연이라고 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에 대해 아는 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것뿐이었다.
두 황자의 모비들은 서로 사촌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입궁하여 역시나 비슷한 시기에 황자를 낳았다. 서로 사이가 좋아 그들의 아들들 역시 어려서부터 동복형제처럼 지냈다고 했다. 태자나 기왕에 비하여 나이가 어리고 외가도 한미하여 황위 다툼에는 끼지 않았다.
하지만 류희겸이 죽기 직전에 황자들에게도 불행이 닥쳤다. 사냥을 갔다 낙마한 10황자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태자가 손을 썼다는 소문이 은밀히 돌았으니 확인된 건 없었다. 그리고 11황자는 서쪽 국경을 방비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고 출전하게 된다. 그 후로 11황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류희겸도 몰랐다.
이럴 때면 미래를 아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기 힘겨운 상황이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만 제대로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귀비께서도 격구회에 꼭 참석하시라고 웃는 황자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 류희겸은 다시 진혁위와 움직였다.
“황자분들께서 왕야를 많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몇 번 놀아주어 그렇다. 애들은 같이 놀면 친해지니까.”
진혁위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자 금방 대전 앞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태자와 마주쳤다.
황자들은 물론이고 태자 역시 인물이 못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태자다운 위엄을 보이기 위한 치장이 너무 과해, 옷이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형상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턱 끝을 치켜올린 태자의 입가에는 갈무리하지 못한 비웃음이 걸렸다. 원래 욕심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얼굴이라 사람이 더욱 옹졸하고 치졸해 보였다.
“부황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시다. 근본도 모르는 자를 대전에 들이시겠다니. 흥. 친왕이라면 격에 맞는 혼인을 해야 하는 법이다. 좋은 혼처를 알아봐 주랴?”
치졸한 태자는 꼭 그와 어울리는 말로 사람을 비하했다. 태자의 말 한마디에 류희겸은 근본도 모르는 자가 되었고, 그리고 진혁위는 근본도 모르는 자와 혼인한 친왕이 되고 말았다.
황후를 닮은 저열한 공격에 류희겸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이 나설 자리도 아니었고, 출신을 따지면 할 말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대연국과 화진국은 같은 뿌리를 둔 형제 국가였다. 몇 대 전까지는 서로 공주를 시집보내면서 국혼을 하기도 했다. 류희겸의 어머니는 화진국의 공주였고, 따지고 보면 황실의 핏줄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역모에 가담했던 도망자라는 것은 류희겸의 출신이 무엇이든 간에 가장 큰 약점이 되었다.
류희겸은 조용히 침묵을 선택했지만 진혁위는 달랐다. 참을성은 강했지만 개소리를 듣고 그냥 넘어갈 만큼은 아니었다.
“황제 폐하의 자비로움은 사해에 닿아 있지요. 하여 소제의 혼인도 허락해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훌륭한 짝을 만난 소제는 황제 폐하의 너그러움에 감사드릴 뿐이지요. 그런데 태자 전하께서는 다른 마음이시라니, 그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주 진중한 목소리로 안타까워하는 진혁위가 무엇을 말하고 것인지 태자는 조금 늦게 알아차리고는 당황했다. 혼인을 허락한 황제의 뜻에 태자가 반대하고 있다고 쐐기가 박혔다.
황제는 평소 태자에게 관대한 편이었고, 약간의 말실수는 웃으며 넘어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영균의 일로 몸을 사려야 할 때였다.
진혁위와 류희겸의 혼인을 황제가 허락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친왕의 귀비로 삼아 화진국을 조롱하면서도 양번국을 되찾을 때의 명분을 삼기 위해서라는 것이 좌승상의 분석이었다. 태자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황제의 뜻은 확고했다.
그 와중에 사람들이 오가는 대전 앞에서 황제와 뜻이 다르다고 공공연히 말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기왕의 패거리들이 물고 넘어질 게 뻔했다. 모영균이 좌천된 것도 발단은 진혁위였으나 일을 키운 것은 기왕의 사람들이었다.
기왕과 진혁위가 손을 잡았다는 보고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마치 짠 것처럼 태자를 공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태자는 기왕도 진혁위도 모두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여기서 성질대로 굴면 안 된다는 판단력은 있었다. 자신의 배포가 모자라고 남을 시기한다는 것을 결코 인지조차 하고 있지 않은 태자는 애써 말을 돌렸다.
“내 마음을 곡해하다니. 말을 말아야지. 네 녀석의 혼인 축하 하례품을 얼마나 많이 보냈는데. 되었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밑도 끝도 없이 시비를 걸다가 궁색한 변명으로 수습을 한 태자가 그대로 대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놓고 무시를 당했지만 진혁위는 개의치 않았다. 대신에 몸을 기울여 류희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리도 모자란 인간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가까이하면 멍청함이 옮는다. 멀리해라.”
태자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못해 냉정하기까지 했지만 류희겸은 격하게 동의했다.
직전 생에 태자를 본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희일준을 질투하는 태자가 그때도 볼썽사나워서 한 나라의 태자치고는 부족한 게 많다 생각했었다.
대연국의 황제는 노골적으로 황자들끼리 경쟁을 하게 내버려 두고 있었다. 후계자를 고르는 방법은 비정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류희겸은 이전 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다. 기왕은 군사적 능력이 뛰어났지만 황제의 눈 밖에 나버린다. 어느 황자들보다 총애를 받고 있다는 진혁위조차 역모를 일으킨 진서녹에게 정패를 빌려주었다는 이유로 제대로 조사조차 받지 않고 자결을 명받았다.
황제는 뛰어난 후계자가 아니라 그저 말을 잘 듣고 고분고분한 아들을 원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능력은 뒤떨어지지만 황제의 눈치를 보는 태자가 끝까지 살아남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좌승상이 태자 옆에서 통제를 적절히 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하지만 대연국의 대계를 위한다면 황제의 계략은 소인배나 쓸 법한 것이었다.
아직 어린 황자들 중에 자질이 빼어난 이가 있겠지만, 그들이 태자를 상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태자가 황제가 되면 대연국은 빠르게 쇠락할 것이다.
물론 그건 류희겸이 걱정할 게 아니었다.
“들어가자.”
류희겸은 진혁위를 따라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미리 자리한 대신들과 고관들의 시선이 닿았지만 무시했다. 조금 후, 이들 중에 많은 수가 죽고 다칠 것이다.
비명과 피가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곧이었다.
*
연회가 열리는 무환행궁의 대전은 흥이 넘쳤다. 금사가 수놓인 비단이 내부를 장식했고, 커다란 화병에 담긴 색색의 비단꽃이 계절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얇은 비단으로 감싼 사방등이 대전 곳곳에서 어둠을 환하게 밝혔다.
계절은 늦가을이었다. 문이란 문은 모두 활짝 열어놓은 대전에는 쌀쌀한 찬바람이 불어들었다. 하지만 연회에 참석한 장군과 무관 중 어느 누구도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황제가 아낌없이 금자를 푼 덕분에 향기로운 술이 넘쳐났다. 악사들의 연주에 맞추어 아름다운 무희들이 춤을 추며 흥을 돋웠다. 술이 오른 늙은 무관 한 명이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며 잔을 들어 올리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엉터리 시를 지어 좌중을 웃게 만들었다.
평범한 연회였다. 그러나 연회장의 한쪽에 앉은 류희겸은 흥겨움에 동참하지 못하고 계속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직전 생에, 류희겸은 대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접 보지 못했다. 모두 희일준으로부터 전해 들은 것뿐이었다. 다음 생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자세히 캐묻기보다는 흘려들었다.
그랬기에 놓치는 것이 있을까 봐 술도 음식도 손에 대지 않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특히 맞은편에 앉은 진서녹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지는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귀비. 왜 아무것도 먹지 않느냐?”
붉은 옷을 입은 무희들이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을 때였다. 진혁위가 뒤를 돌아보더니 류희겸에게 물었다.
“황공하옵게도 체기가 있어 그렇습니다.”
“귀비가 보기와 다르게 민감하구나. 속이 좋지 않다면 무리하지 마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류희겸은 예의 바르게 답했다. 뒤에서 지켜본 바로는 진혁위 역시 술을 거의 마시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어젯밤에 속앓이를 한 여파겠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비하자면 괜찮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잠시 진혁위와 대화를 하는 사이에 진서녹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류희겸의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는 연회장에서 황자 한 명의 움직임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비하며 류희겸이 감각을 끌어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쉬익. 바람을 가르는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텅. 텅. 텅. 화살이 날아와 벽에 박히자 대전 안이 적막에 휩싸인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암습이다!”
누군가가 커다랗게 외치는 순간에 모든 것이 일어났다. 춤을 추던 무희들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거나 개미처럼 흩어졌다. 술잔을 기울이던 무관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다.
누구보다 빨리 움직인 것은 황제를 지키는 금군시위들이었다. 연회장에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그들은 재빨리 방패를 들고 황제와 황후를 둘러쌌다. 그와 동시에 활짝 열린 문 저편에서 화살이 한 번 더 날아들면서 복면을 쓴 괴한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류희겸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를 노린 세 발의 화살에 역모의 성공 여부가 달려 있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날아온 화살이 황제가 아니라 보좌와 벽에 박히는 순간에 역모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괴한들이 습격을 감행한 것은 대전을 지키는 인원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를 지키는 시위는 겨우 서른 명 내외. 방패를 든 시위들은 계속 날아드는 화살을 막느라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연회에 참석한 무관들의 상당수가 술에 취해 제힘을 낼 수 없는 상황에다가 제대로 된 무기조차 없었다.
반면에 진서녹의 비호를 받아 행궁에 숨어든 괴한들은 예순 명이 넘었다. 무기 역시 그들이 압도했다.
어느 순간에 터진 하얀 연막이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 와중에 괴한들이 패도적인 기세로 덤벼들자 무기가 없는 연회 참석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희일준에게 들은 말로는,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다 보니 행궁을 지키고 있던 금군이 나타나 사태를 수습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만큼 피해가 컸다. 희일준 역시 팔을 크게 다치고 덧나는 바람에 꽤나 고생했었다.
하필이면 때마침 구석에 몰린 희일준이 눈에 들어왔다. 희일준에게 비도를 두고 오라고 한 것을 순간 후회하며 류희겸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어차피 황제의 신임을 사기 위해 용맹하게 싸울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걸 진혁위가 막았다.
“어디를 가려고?”
“당연히 막아야지요. 왕야께서는 여기 계십시오.”
이번에는 진혁위가 막을 새도 없이 류희겸이 괴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괴한의 턱을 치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면서 검을 빼앗는 솜씨가 절묘했다. 그리고는 빼앗은 검으로 복면 괴한들을 하나씩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미치겠군.”
이미 한 번 같은 일을 경험한 적이 있던 진혁위는 피가 튀는 상황에서 류희겸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기대가 무색하게도 류희겸은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달려들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위해 류희겸은 여기서 공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적당히 같이 싸우자 할 생각이었는데 저리도 용감하게 튀어나갈 줄은 몰랐다. 아무리 전장을 누볐던 장군이라고는 하나 감탄만 나왔다.
진혁위는 황제가 있는 상석 쪽을 힐끗 보았다. 방패를 들고 황제를 지키고 있는 시위들의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황제와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황자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 가장 꼴불견은 단연코 태자였다.
“막아라! 막으라고!”
황제를 지키는 시위들의 방패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태자는 덜덜덜 떨면서도 소리 지르기에만 바빴다. 저놈은 황제감이 아니라 그냥 덜떨어진 인간이었다.
“차라리 귀비가 황제감이지.”
누가 들었다면 역심을 품었다고 할 만한 말을 중얼거린 진혁위는 류희겸이 쓰러뜨린 괴한의 검을 주워 들고는 앞으로 뛰쳐나갔다.
“용감한 것도 정도가 있다.”
“왕야께서는 안전한 곳에 계십시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류희겸의 등을 지키며 진혁위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달려드는 괴한의 목을 쳤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합을 맞추자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상황이 조금씩 반전되기 시작했다. 특히 두 사람이 괴한을 쓰러트린 다음에 무기를 무관들에게 넘기면서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습격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행궁을 지키던 금군시위들이 달려오자 전세는 반전되었다.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괴한들은 금군에게 둘러싸인 모양새가 되었다. 괴한들은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몰살당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화려하게 꾸며진 대전 안은 피와 신음이 넘쳐흘렀다.
*
야심한 시각이었다. 저녁에 있었던 역모의 충격에 무환행궁에는 살벌한 전장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다들 뜬눈으로 밤을 지새는 와중에 류희겸 역시 초조한 기분으로 진혁위를 기다렸다. 역당들은 모두 죽거나 붙잡았지만 아직 배후를 밝혀내는 일이 남아 있었다.
류희겸은 해가 뜨기 전에 역당의 입에서 진서녹의 이름과 희교국이 언급되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여러 변수로 인해 언제 어떻게 불똥이 튈지 몰라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마마. 왕야께서 오셨습니다.”
밖에서 번을 서고 있던 시종이 달려와 진혁위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렸다. 류희겸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이에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진혁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전에서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격렬하게 싸웠던 진혁위는 겨우 옷만 갈아입고는 다시 불려갔다. 역모의 배후가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때까지 다른 황친들과 함께 갇혀 있다시피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혁위의 귀환은 배후가 밝혀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셨습니까?”
“안 자고 기다렸느냐?”
“예. 기다렸습니다. 어찌 되었습니까?”
“6형이었다.”
“훈군왕 전하께서요?”
다 아는 사실이지만 류희겸은 모르는 척하고 물었다. 진혁위가 나한상(羅漢床)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당들이 희교국의 병사였다. 아, 귀비는 모르겠군. 6형이, 아니지. 역당의 주괴인 진서녹의 모비인 윤비께서 희교국의 공주셨다. 십여 년 전에 희교국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지. 여러 사정이 얽혀 있었는데, 진서녹이 그에 역심을 품은 것 같다.”
“그렇군요.”
“부황께서 진서녹을 잡아 오라 명하셨다. 곧 잡힐 게다.”
“연회 중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대전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 참담한 일을 벌이고도 제 목숨은 부지하고 싶었나 보다. 겁쟁이 같으니라고.”
원론적인 비난에 류희겸 역시 동의했다. 진서녹이 진정으로 역모를 일으키려고 했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무엇보다, 황제에게 원한이 있었다면 도망칠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기회를 노려야 했다. 방패 뒤에 숨은 황제는 빈틈이 많았다.
“이제 됐다. 피곤하니 자야겠어.”
“주무시고 가실 겁니까?”
“그럼? 이런 날에 쫓아낼 거냐? 탈의나 도와라.”
진혁위가 일어나자 대기하고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이 세숫물과 침의를 가져오는 사이에 류희겸은 진혁위의 탈의를 도왔다.
진혁위가 얼굴과 손발을 씻고 침의로 갈아입자 다음은 류희겸이었다. 이미 목욕까지 마친 류희겸은 곁방에서 침의로 갈아입은 다음에 돌아왔다.
“그렇지. 부황께서 귀비의 용맹함을 칭찬하셨다. 상을 내리실 것이다.”
“상은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조심하십시오. 소인의 출신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귀비의 출신이 문제가 된다고?”
“저는 화진국 사람입니다. 분란거리를 미리 없애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담백한 설명은 냉정하기까지 해서 더 살벌했다.
주인의 잠자리를 돕고 있던 우소진과 심양설은 귀만 쫑긋거렸다. 그리고 진혁위는 소리 없이 혀를 찼다.
류희겸이 틀린 소리를 한 것은 아니었다. 대전에서 용감하게 역당과 싸운 류희겸이지만, 그의 출신을 빌미로 탄핵하려는 이가 지난 생에 분명 존재했다.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최악의 상황을 담담하게 말하는 류희겸을 보자니 기가 막혔다. 원래 그런 성격이라는 것을 알지만, 자신에게 닥친 일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모습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전 생에서도 그것 때문에 애를 많이 태웠다. 누명인데도 불구하고 항변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묵묵히 잡혀갔다. 사내다운 것인지, 세상에 초연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울컥했다. 류희겸의 눈빛은 곧고 단단했다.
저 담담한 얼굴에 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사람이 억울하게 탄핵당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내가 그걸 두고 볼 것 같으냐?”
“소인의 편을 들지 마십시오. 왕야께도 화가 미칠지 모릅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위험해지고 있었다. 우소진을 위시한 시종들은 얼른 뒷정리를 하고는 침방을 빠져나갔다.
“차라리 밉보이겠다. 본왕이 귀비의 편을 들지 않으면 어쩌란 말이냐.”
“왕야.”
“됐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귀비는 신경 쓰지 마라. 이제 자자. 이리 와라.”
중간에 말을 끊은 진혁위가 침상 위에 올랐다. 류희겸이 천천히 다가가자 진혁위가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덕분에 류희겸은 진혁위의 손에 잡힌 채 침상에 앉게 되었다. 침상에 누운 진혁위는 손을 잡은 채로 말을 이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귀비는 너무 무모해. 맨손으로 그러는 거 아니다.”
“자신 있었습니다.”
“용감하군. 확실히 귀비가 없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진혁위는 사실대로 말했다. 이전 생에 금군이 도착하여 역당들을 도륙하기 전의 피해는 지금보다 훨씬 컸다. 그때는 죽었던 사람이 지금은 살아 있기도 했다.
나중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지만, 황제의 눈앞에서 류희겸이 활약한 것만큼은 큰 의미가 있었다. 누가 탄핵을 하든 류희겸을 처벌하는 것은 황제에게 달렸다.
“왕야께서 아니 계셨으면, 제 몸 하나 지키는 것이 전부였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류희겸은 아니라고 겸양을 떠는 대신에 진혁위의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다. 진혁위가 등을 지켜주었기에 제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당신 덕분이라고 하자 진혁위가 활짝 웃었다. 역모가 일어난 이후로 처음 짓는 미소였다.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혼자서 뛰어나간 게 누군데.”
“소인이 마음이 급하여 그랬습니다.”
“말은 잘하는구나. 그래도 내 덕분이라니. 그럼 상을 받아야겠다.”
“……?”
“본왕에게 상을 줘야지. 안 그러느냐? 아, 이런. 귀비가 눈치 없는 인사라는 것을 잊었군.”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들은 류희겸은 아연해졌다. 진혁위가 달라는 상이 무엇인지 반 박자 늦게 깨달았다.
설마? 접문을 하라고? 저도 모르게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자 진혁위가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무십시오.”
“고맙다며? 그런데 접문도 못 하느냐?”
“고마운 것과 접문은 별개입니다. 곤하실 터이니 어서 주무십시오.”
“그냥 해라.”
“그냥 하는 걸로 안 끝나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평소에 진혁위가 접문을 하라고 운을 떼면, 대부분 교합으로 이어지곤 했다. 모르는 척 넘어가기엔 바깥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했다. 이 와중에 몸을 섞는 것은 아무래도 할 짓이 아니었다.
“왜? 하기 싫으냐?”
“바깥 분위기가 수상하니, 자중하십시오.”
“자중은 무슨. 전쟁터에서도 할 건 다 한다.”
“전쟁터가 아니지 않습니까.”
딱딱한 얼굴로 반박하는 류희겸 때문에 진혁위는 쓴웃음을 삼켰다. 세상에 이렇게 무심한 인사가 또 있을까? 이리 열심히 꾀어도 넘어오기는커녕 단단히 벽을 치기만 할 뿐이었다. 저리 딱딱한데, 막상 교합을 하면 어쩔 줄 몰라 하니 더 사람 속이 타는 것이다.
“귀비가 이리도 무심하니, 마음에 찬바람이 드는 것 같다.”
“날이 차갑습니다. 이불을 덮으십시오.”
“하하하. 그걸 농이라고 하는 건 아니지? 안 그러냐?”
잡고 있던 손을 놓은 진혁위는 류희겸의 왼뺨을 슬쩍 꼬집었다. 그럼에도 류희겸은 뭐라 소리를 내지 않고 무슨 짓이냐는 눈빛을 빤히 보내올 뿐이었다.
이래서야 이길 수가 없었다. 진혁위는 한탄했다. 차돌멩이처럼 딱딱한 놈에게 홀라당 반한 자신이 문제였다.
“내가 많이 봐주는 거다. 불이나 꺼라. 이제 자자.”
뺨을 꼬집던 진혁위의 손이 떨어지자 류희겸은 최소한의 불빛만 남기고는 초와 등을 껐다. 다시 자리에 돌아와 눕자 진혁위가 몸을 바짝 붙여 왔다. 늘 있던 일이라 류희겸은 그러려니 했다.
“날이 차가운데, 귀비는 따뜻해서 좋다.”
“예.”
“재미없는 귀비를 위해 본왕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마. 아까 대전에서 눈물 콧물 흘리던 태자가 바지도 흥건하게 적셨다고 누가 그러더구나.”
“……?!”
그 상황에서 바지를 적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류희겸은 흠칫했다.
“싼 거 맞다. 그래서 태자의 얼굴을 볼 때마다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느라 고생했다. 겁쟁이에 오줌싸개라니.”
“진짜입니까?”
“그럼. 궁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파다하더구나. 입을 다물라고 했겠지만, 그게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지. 앞으로 태자 때문에 짜증 날 때마다 오줌싸개라고 생각하면 속이 시원해질 것이다.”
유쾌하게 울리는 목소리에도 류희겸은 따라 웃지 못했다. 대전 안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난전이 벌어지기는 했다. 하지만 한 나라의 태자가 용감히 싸우기는커녕 무서워서 덜덜 떠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컸다.
차라리 제좌에는 진혁위가 더 어울렸다. 능력도 출중하고, 과감하고, 기민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걱정할 바는 아니지.
의도적으로 생각을 멈춘 류희겸은 눈을 감고 내일 일어날 일을 점검했다. 진혁위에게 조심하라고 한 것은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직전 생에 류희겸은 계속해서 견제와 의심을 받았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었다.
이틀 후면 진서녹이 붙잡히고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출신이 문제되면서 분란거리는 미리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그대로 사지로 가게 되어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으니 내일부터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해야 했다.
“긴장이 풀렸나 보군.”
머리 위에서 진혁위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지만 류희겸은 반응을 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이 또렷했는데 눈을 감으니 졸음이 몰려들었다.
가만히 이마를 쓸어 넘기는 손길에도 류희겸은 눈을 뜨지 못했다.
◇ ◇ ◇
성군이라 칭송받는 군주라도 치세 중에 몇 번이나 반란과 역모를 겪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란과 역모가 진압된 다음은 피의 숙청이 이어진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전에 흩뿌려진 피가 닦여나가는 동안 역모의 배후가 밝혀졌다. 역도 중에 몇몇은 중상을 입고도 살아 있었다. 행궁의 방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금군장군은 처벌을 덜기 위해 하룻밤이 채 지나기도 전에 역도들의 입에서 희교국의 잔당이라는 것을 토해 내게 만들었다. 그리고 훈군왕 진서녹의 사주를 받았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미 훈군왕은 무환행궁을 빠져나간 지 오래라는 금군장군의 보고에 황제는 당장에 추포하라고 소리쳤다.
이틀이 지난 후, 말을 타고 서쪽으로 도주하다 붙잡힌 훈군왕은 황제 앞에 무릎이 꿇려졌다. 먼지투성이가 된 훈군왕은 자신이 역모를 일으켰다고 당당히 외치며 황제를 향한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그의 원망은 넓고도 깊어 사관조차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라고 기록해야 했을 정도였다.
황제는 분노했지만 그 자리에서 훈군왕의 목을 치지 않았다. 대신 옥에 가두어 철저한 진상 조사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무환행궁은 그 어느 때보다 살벌했다. 훈군왕이 잡혀 오기 전부터, 그의 종복과 궁인들에게 강도 높은 추국이 행해졌다. 예순 명이나 되는 외인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행궁 안에 숨어들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다 8황자인 경군왕(敬君王)의 정패로 연회 당일에 열두 명의 역당이 행궁 안에 당당히 들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역모와 한패로 엮이게 된 경군왕은 대전 한가운데 엎드려 빌었다. 자신은 결코 역모에 가담한 적이 없으며 훈군왕에게 정패를 빌려준 것뿐이라고 항변했다.
황제의 태감 세 명이 그 자리에 자리해 있었기에 빌려준 것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었다. 하지만 황제는 끝까지 의심을 거두지 않고 경군왕에게 연금을 명했다.
경군왕의 처우가 결정되자 태자가 나서 류희겸의 이름을 거론했다. 희교국과 훈군왕이 참담한 일을 벌인 것으로 보아, 타국 출신의 인물은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충정을 확인할 수 없는 자를 곁에 두시면 안 됩니다.”
태자의 말에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무관 둘도 머리를 조아렸다.
대전에 모인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눈치를 봤다. 황제가 류희겸을 어떻게 쓰려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여기서 태자 편을 드는 것도, 그렇다고 반박하는 것도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결국 류희겸을 변호할 수 있는 사람은 진혁위뿐이었다.
“황제 폐하. 그날 누구보다 몸을 사리지 않고 역도들을 막은 것은 소자의 귀비였습니다. 그는 황제 폐하를 향한 충정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한 번 배신자는 영원한 배신자일 수밖에 없다. 그건 역사가 증명하는 것을 모르느냐?”
진혁위는 류희겸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태자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었다. 능력도 재주도 없는 주제에 남을 시기하고 깎아내리는 것만큼은 탁월했다.
류희겸의 가장 큰 약점은 화진국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고모부가 역모를 일으키려고 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류희겸이 역모에 가담했다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당의 가족은 고개를 들고 살 수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예외는 언제나 있었다.
“유(柔)나라의 승상이었던 주임녕(珠任寧)이 들었다면 무덤에서 피눈물을 흘리겠습니다.”
주임녕은 방진국(彷晉國)의 황자로,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혐의로 쫓기다 유나라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능력이 출중했던 주임녕은 여러 공을 세우고 결국 승상의 지위에까지 오른다. 주임녕의 고사는 류희겸과 딱 들어맞았다.
“그건, 그건 경우가 다르다.”
“황제 폐하. 류희겸이 배신자라면 응당히 목을 베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는 여기 계신 대신들과 함께 황제 폐하를 위해 용감하게 몸을 던졌습니다.”
“응당 해야 할 일인데, 황제 폐하께 생색을 내는 것이냐?”
“예. 폐하의 자비로움에 대연국의 백성이 된 류희겸이 군주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류희겸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을 거라는 것은 누구보다 폐하께서 잘 아실 것이옵니다. 아무 죄도 없는 그가 출신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은 부당한 일이옵니다.”
진혁위는 태자를 상대하는 대신에 상석에 앉은 황제를 향해 계속 말을 했다. 류희겸의 생사여탈권을 쥔 것은 태자가 아니라 황제였다.
필요에 의해 황제는 류희겸을 죽이지 않았고, 진혁위와의 혼인을 허락했다. 하지만 그건 변덕스러운 황제의 기분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류희겸은 이미 전투 없이 호양성을 점령할 방법을 익문사에 모두 전했다. 굳이 그가 없어도 호양성을 되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직전 생에서도 황제는 태보(太保)의 부추김에 넘어가 류희겸을 사지로 밀어 넣었다.
“영왕의 귀비가 영원한 배신자가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주임녕이 될지는 두고 봐야지. 그를 불러라.”
황제의 명령에 태감이 얼른 대전을 나섰고 진혁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운명이라는 건 이리도 쉽게 바뀌지 않았다.
지난 생에서 류희겸의 충정을 의심하며 황제를 충동질한 것은 태자가 아니라 태보였다. 태보는 태자의 사람이 아니었지만, 대신 희범영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이전 생에서 류희겸의 신병을 맡은 것은 희가로, 희범영이 호양성을 되찾아 공을 세울 것 같자 류희겸에게 시비를 건 것이었다.
진혁위가 진서녹의 모반을 막지 않은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미래를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바꾼 미래가 전혀 엉뚱한 결과가 되기도 했다.
채제승의 일이 그러했다. 태자에게 장모와 아내, 어린 딸을 모두 잃은 그는 복수의 화신이 된다. 지금으로부터 삼 년 후, 홍수와 가뭄으로 피폐해진 남양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오래 준비한 반란은 규모도 컸고 오래 갔다.
하지만 진혁위가 태자에 대한 복수를 약속하며 채제승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자, 반란은 지난해 봄에 일어났다. 반란을 진압하러 간 장수가 죽는 것을 보며 류희겸을 만나기까지 가능하면 이전 생과 바뀌는 게 없도록 했다.
진서녹의 모반은 그것과 조금 다른 의미로 손을 대지 않았다. 이번 모반의 결과, 진혁위는 희교국의 잔당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성공적인 진압으로 세를 키우는 발판을 마련하기 때문에 그냥 두고 보았다.
대신 류희겸의 출신을 문제 삼지 못하도록 태보의 다리를 부러뜨려 수렵제에 참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태보가 없으니 태자가 나섰다. 돌발 상황에 대해 준비를 하지 못한 자신의 실책이었다. 진혁위는 애써 침착하려 노력하며 류희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
“한 번 배신자는 영원한 배신자라고들 한다. 그에 대해 영왕의 귀비는 어찌 생각하는가?”
대전에 서서 황제의 하문을 받은 류희겸은 딱딱히 얼굴을 굳혔다. 황자와 종친이, 그리고 대신이 모여 있는 대전 한가운데 사람을 불러놓고 곤혹스러운 물음을 던지는 것은 황제의 고약한 버릇 중에 하나였다.
일곱 번째 생은 이전과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배신자의 충정은 의심해야 한다는 태보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래도 황제의 질문은 그대로였다.
어느 시대에도 배신자가 의심받고 공격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직전 생에서는 내내 그것이 류희겸의 발목을 잡았다. 거기다 대연국의 황제는 신하들을 시험하며 충정을 확인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직전 생에서 황제는 믿음을 주지 못하는 류희겸을 이번 기회에 치워버리려고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배신자 운운하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그래도 류희겸은 무섭지 않았다.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인의 충정을 눈으로 보여드릴 수 없는 것이 그저 통탄스러울 뿐입니다. 황제 폐하.”
“짐은 이미 보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가 있으니, 어찌해야 할까?”
황제의 또 다른 고약한 버릇은 이미 답을 정해두고 상대에게 대답을 하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질문 자체는 직전 생과 조금 달랐지만 확실한 충심을 보이라는 의미는 같았다.
태보가 있었다면 류희겸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나섰을 순간이었다. 하지만 태보가 없으니 대전 안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류희겸은 다시 한번 속으로 혀를 찼다. 황제의 의심을 부추긴 자가 자신을 어떻게 사지로 밀어 넣어야 하는지 꾀를 생각해 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류희겸은 범인이 태자라고 추측하면서 입을 열었다.
“소인이 듣기로, 대연국에는 충정을 확인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역심을 품은 자는 죽어서 돌아온다는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천무동(天無洞)을 말하는 것인가?”
“예. 그러하옵니다. 소인을 그곳으로 보내주십시오. 살아 돌아와 황제 폐하의 근심을 덜어드리겠나이다.”
류희겸은 살려달라고 빌거나 아부를 하는 대신에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태보가 없으니 자신의 입으로 사지에 가겠노라 해야 했다.
무환행궁에서 말을 타고 북서쪽으로 한 시진(두 시간)을 달리면 진연산(辰戀山)이 나왔다. 그리고 진연산 중턱에는 승천을 앞둔 이무기가 산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천무동이 있었다.
천무동은 일종의 금지(禁地)였다. 전설에 따르면 천무동에 사는 이무기는 사람의 충정을 가린다고 했다. 역심을 품은 자가 천무동에 들어서면 다음날 해가 뜨기 전에 죽은 시체로 동굴 앞에 나타났다. 반면에 충정을 확인한 자는 살아 돌아온다고 했다.
역모의 혐의를 받아 마지막 방법으로 천무동에 들어간 이는 백 명이 넘었다. 그러나 살아 돌아온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백오십여 년 전, 억울하게 누명을 쓴 정만현(鄭萬賢) 장군은 천무동에서 두 발로 걸어 나온 후에 대장군의 직위에까지 올랐다. 그 이후로 천무동은 더욱 유명해졌다.
류희겸이 천무동에 가겠다고 하자 대전 안이 술렁거렸다. 천무동은 마지막 기회의 장소였지만, 실상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물론 그걸 반기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태자였다.
“영왕의 귀비가 현명한 결단을 내렸사옵니다. 그에게 충정을 확인할 기회를 주시옵소서!”
태자는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류희겸을 보며 비웃음을 한껏 담아 외쳤다. 죽으러 간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었다. 태자가 나서자 대신들 몇몇도 같은 말을 했다.
예상하지 못한 흐름에 황제는 류희겸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배신자이자 변절자인 류희겸을 영왕의 귀비로 삼아 전면에 내세운 것은 화진국을 도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출신 때문에 계륵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영왕의 귀비에다 역도들과 용감하게 싸운 그를 벌하는 것은 여러모로 부담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류희겸이 천무동에 가겠다고 자처한 것은 꽤나 좋은 일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살아 돌아오면 그의 충정에 입댈 사람이 없을 것이다. 혹은 살아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류희겸 본인의 선택이니 황제의 책임은 아니었다.
살아 돌아오면 충신의 증거이며, 죽어 돌아온다면 잡음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어떤 것이든 황제에게 나쁠 건 없었다.
“용감한 결단이다. 그럼 영왕의 의견은 어떠한가? 너의 귀비가 천무동에 간다는데.”
“소자의 귀비가 황제 폐하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좋다. 영왕의 귀비는 천무동으로 가라.”
황제는 흡족한 마음으로 명령을 내렸다.
*
황제의 명령은 즉시 시행되었다. 대전에서 물러난 류희겸은 입은 옷 그대로 말에 올라탔다.
천무동까지는 금군 열 명이 동행했다. 감시 겸 호위를 하는 금군 외에 배웅을 허락받은 진혁위도 함께 움직였다. 무환행궁에서 천무동까지 한 시진이 넘게 걸렸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었지만 기암괴석에 둘러싸인 천무동 앞은 햇빛 하나 들지 않는 곳이었다. 음산하기까지 한 기운에 훈련을 받은 군마조차 투레질을 하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류희겸은 무심하게 자신이 타고 온 말을 쓸면서 시커먼 동굴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천무동을 보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늘한 느낌은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잠시 귀비와 대화를 나누겠다.”
금군을 뒤로 물린 진혁위가 심각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바람에 류희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남자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직전 생에서 천무동까지 따라와 준 사람은 진혁위와 희일준이었다. 희일준은 태보의 앙심에 애꿎은 류희겸이 피해를 봤다며 미안해 했고, 진혁위는 꼭 살아 돌아올 거라고 위로를 해주었다.
류희겸은 첫 번째, 다섯 번째 생과 여섯 번째 생에서 천무동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첫 번째 생에서는 만월제전에서 입은 상처가 다 낫지 않아 병석에 누워 있던 상황이라 사약을 받았다. 다섯 번째 생에서는 천무동에 들어갔으나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여섯 번째는 살아 돌아와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살아 돌아올 자신이 있기에 괜찮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진혁위를 보자니 괜히 미안해졌다. 무환행궁에서 이곳으로 오는 내내 남자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이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왕이 물을 것이 있다.”
“예. 하문하십시오.”
“천무동은 어찌 알았느냐?”
“궁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천무동에 들어간 이가 백 명이 넘는데, 단 한 명만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은?”
“그것도 들었습니다.”
차분하게 대답한 류희겸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예상과 달리 진혁위는 화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빛에 담긴 것은 의심에 가까운 불신과 혐오였다.
불신? 혐오? 류희겸은 자신이 느낀 것이 진짜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류희겸.”
“예.”
“본왕은, 본왕은 네가 천무동에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게 두 번째다.”
“……!”
아주 조금 늦은 깨달음에 놀란 류희겸은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두 번째라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생각이 미치자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하, 씨발. 진짜군.”
한숨과 함께 욕설을 내뱉은 진혁위가 그대로 검을 뽑아 겨누었다. 날카로운 검끝이 목젖에 닿는 느낌에 류희겸은 침도 삼키지 못했다.
“본왕이 귀비와 부부 싸움 중이다. 다들 대기하라.”
잠시 대화를 한다는 진혁위가 검을 뽑아 들자 멀찍이 서 있던 금군들이 바짝 긴장했다. 부부 싸움이라는 말에 주춤하긴 했지만 그래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진혁위는 이 상황에서도 초연한 류희겸을 보며 분노를 억누르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지난 생의 기억을 가진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사내가 자신을 배신한 그였다.
제 입으로 천무동에 가겠노라 청하는 류희겸에게 무슨 짓을 하느냐고 외치고 싶은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정확히는 의문이 아니라 의심이었다.
누구도 가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류희겸이 천무동으로 가기를 자처한 것은 운명의 엄정함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같은 생을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머리가 맑아졌다.
한 번의 깨달음에 그간 류희겸이 보였던 이상한 행동을 이해했다. 모영록의 검에 숨겨진 세침을 찾아낸 것도, 모영균의 황패를 찾아낸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수렵제에 가고 싶다고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마찬가지였다. 바다 새우가 먹고 싶다고 하여 정패를 쓰게 한 것도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의심은 의심으로 끝나지 않았다. 류희겸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자 확신했다.
다시 만난다면 죽여버리겠노라 맹세했던 것이 떠올랐다. 살아나기만 해달라고 빌었던 것도 기억났다. 그러나 몇 번이고 곱씹던 폭력적인 감정이 이성을 잡아먹었다. 류희겸의 목에 검을 찔러 넣지 않기 위해 진혁위는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원망과 원한이, 그리고 드디어 그를 만났다는 기쁨과 환희가 뒤범벅되었다. 휘몰아치는 감정이 자신의 뜻대로 조절되지 않았다.
“지금 당장, 너를 죽이지 않겠다.”
진혁위는 여기서 류희겸을 죽일 수 없다고 필사적으로 이성을 일깨웠다.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소리를 내뱉었다.
“……감사합니다.”
“살아서 나올 거라고 자신할 수 있느냐? 지난번처럼?”
“예.”
“그럼 되었다.”
진혁위가 천천히 검을 거두었지만 류희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기백은 여전해서 조금의 긴장도 늦출 수가 없었다.
“도망치지 마라. 평생을 도망자 신세가 되기 싫으면.”
“예.”
“다리를 자를 걸 그랬다. 그리하였다면 이렇게 들키지 않았을 텐데. 안 그러냐?”
이번만큼은 류희겸이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리가 잘렸다면 자신이 무슨 짓을 했을지 장담 못 했다. 입을 다물고 있으니 진혁위가 으르렁거리듯 한숨을 쉬었다.
“속이 검은 사람을 믿는 법이 아니지. 움직이지 마라.”
갑자기 진혁위가 손을 뻗어 오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막으려던 류희겸은 힘을 뺐다. 진혁위의 손이 얼굴을 덮었을 때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하지만 진혁위는 얼굴을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손끝으로 더듬었다.
“말랑하고 따뜻하군.”
“……?!”
뜻 모를 말을 한 진혁위가 손을 거두고는 환하게 웃었다. 마치 햇살을 닮은 미소에는 그늘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다시 보자.”
살벌할 정도로 의미심장한 인사를 한 진혁위가 미련이 없다는 듯 등을 돌려 걸어갔다. 멀어지는 진혁위를 보며 류희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진혁위 역시 생을 반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