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章
영왕의 혼례식 날에 있었던 모영균의 행패를 공론화한 사람은 능군왕이었다. 친왕의 혼례식에서 무도한 짓을 벌인 모영균을 일벌백계해야 한다는 상소문에 정국이 들썩였다.
좌승상의 장자이자 황후의 조카, 그리고 태자의 사촌인 모영균은 큰 뒷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만큼 적도 많았다. 모영균의 무도한 행위에 가장 적극적인 공세를 펼친 쪽은 태자의 정적인 기왕의 사람들이었다.
고관들이 모이는 대전은 매일같이 모영균에 대한 탄핵 논쟁으로 시끄러웠다. 황제는 물론이고 어느 정도 머리가 있는 이들은 모영균이 영왕을 상대로 일을 도모하다가 실패했음을 모르지 않았다. 모영균의 독단이 아니라, 그의 뒤에 태자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것은 좌승상의 장자가 영왕의 혼례식날에 신혼동방을 뒤엎었다는 것이었다. 모영균은 술에 취해 길을 잘못 들었다고 변명했으나 그날의 일을 지켜본 사람이 적지 않았다.
상대가 일반 사대부 가문이었다면, 하다못해 고관의 집안이기만 했어도 상당한 금편을 풀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친왕이었다. 그것도 황제가 총애하는 황자였다.
모영균을 공격하는 이들은 그 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특히 평소에 예를 가장 중하게 여기는 광록대부(光祿大夫)는 신하가 친왕의 혼례식에 훼방을 놓고도 처벌받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황실을 가볍게 볼 거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모영균처럼 다른 황친들의 혼례식에서도 행패를 부리는 이들이 늘어날 거라고도 했다.
황권에 대한 도전은 세상 모든 황제의 역린이었다. 모영균의 목을 잘라 본을 보여야 한다는 광록대부의 주장은 극단적이었지만 황제를 움직이기 충분했다.
보름 동안 이어지던 논쟁을 끝낸 것은 황제였다.
강상죄(綱常罪).
그것이 모영균의 죄목이었다.
*
“황패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좌천되었다. 남관(南館)의 소기(小旗)가 될 것이다.”
류희겸에게 모영균의 처결을 알려준 것은 진혁위였다. 그제와 어제, 대전 안에서 어떤 설전이 오갔는지 알고 있던 류희겸은 놀란 눈을 해야 했다.
모호하게 굴던 황제가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린 것이 신기했다. 그것도 파직이 아니라 좌천을 시켰다. 태자부의 시위를 통괄하는 장위가 일반 병사 열 명을 지휘하는 소기로 좌천된 것은 굉장히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폐하께서 영명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감히 친왕의 혼례식을 훼방 놓았는데, 황제께서 그냥 두고 보시겠느냐?”
“좌승상은 자신의 장자가 험하기로 소문난 남관에서 소기로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류희겸은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랐다. 모영균의 처벌은 예상보다 강했지만,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태자와 황후, 좌승상이 건재한 이상, 모영균이 중앙 정계에 복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로써 진혁위는 태자와 완전히 척을 지고 말았다. 그 사실을 돌려 말하자 진혁위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귀비가 노련한 정치인처럼 말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온다. 하고 싶은 말을 해라.”
“왕야께서는 괜찮으시겠습니까?”
“했던 말을 또 하게 만드는구나. 어차피 사이가 나빴다. 그리고 나보다 더 사이가 나쁜 이가 있지. 그가 마무리를 할 것이다.”
“기왕 전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잘 알고 있군. 멍청하고 나태한 태자 형님과 달리, 2형께서는 지랄 맞은데 기민하지. 2형이 모영균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기왕의 무서운 점은 목표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추진력과 음험함이었다. 특히 기왕은 모영균과 은원이 있었다. 기왕이 총애하던 시첩이 모영균에게 희롱당하며 쫓기다가 물에 빠져 죽은 일이 있었다. 남관으로 쫓겨난 모영균에게 기왕이 독을 쓸 것이라 진혁위는 확신했다.
“모영균에게 변고가 일어난다면 왕야께서 의심받으실 겁니다.”
“괜찮다. 독을 즐겨 쓰는 것은 내가 아니라 기왕이라는 것을 태자도 안다.”
흥겹게 말하는 진혁위를 보며 류희겸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단번에 이해했다.
태자와 기왕이 황위를 두고 다투는 정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변방으로 나돌며 군공을 쌓는 기왕과 태경에서 황제의 비호를 받고 있는 태자는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거기다 모영균이 독살을 당한다면 대립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또한 진혁위가 태자와 기왕의 대립을 일부러 유도할 것까지도 알아차렸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것이 진혁위가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눈치가 빠르군.”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귀비의 생각이 맞다. 태자와 기왕이 싸우게 만들 것이다.”
“왕야…….”
거침없는 진혁위의 언사에 류희겸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하지만 진혁위는 화사한 미소를 흩뿌리며 슬쩍 몸을 기울인 채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보통 이렇게까지 하면 물어야 할 것이 있을 터인데?”
“무엇을 물어야 합니까?”
“제좌를 가질 거냐고.”
“……!”
너무 놀란 류희겸은 눈을 크게 뜬 채 굳어버리고 말았다. 제좌. 황제의 자리. 태자와 기왕이 서로를 물어뜯다가 자멸한다면 진혁위가 차기 황제가 될 수도 있었다.
작은 깨달음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신이 알고 있기로는 진혁위는 제좌에 관심이 없었다. 직전 생에서 진혁위는 커다란 권력을 손에 넣기는 했지만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권력보다는 말을 타고 야행을 다니는 것이 더 즐겁다고 본인의 입으로 똑똑히 말했다. 그래서인지 진혁위는 정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농담 아닌 농담을 하며 여유롭게 웃었다. 화사한 미소를 짓는 얼굴만 봐서는 진심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내실 안에는 자신과 진혁위 두 사람뿐이었다. 진혁위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우소진과 경화당의 살림을 맡아 하는 심양설은 옆옆 방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밀한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었다.
그러나 대화의 무게 자체가 류희겸이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하하하. 뱀에 물린 사슴처럼 놀란 귀비의 모습이 이렇게 어여쁠 줄 몰랐다.”
“놀리지 마십시오.”
웃음을 터트리는 진혁위 때문에 류희겸은 김이 팍 샜다. 농담에 휘둘린 것이 조금 울컥하기도 했다.
“농이 아니다. 그래서, 물어보지 않을 것이냐?”
“소인이 어찌 감히 입에 담겠습니까?”
“왜? 귀비와 본왕은 이제 영욕을 함께 할 것이다. 귀비는 황후가 되고 싶지 않은가? 본왕이 제좌를 가지면 귀비는 황귀비가 될 터인데.”
대화가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었기에 류희겸은 대답 대신에 침묵을 선택했다. 그러자 진혁위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귀신보다 무섭다는 귀장군이 이렇게까지 담이 작을 줄은 몰랐다. 황귀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럼 이건 어떠냐? 나와 함께 멀리 떠나는 것은.”
“……?”
“서쪽으로 멀리 가면 검은 땅에 하얀 얼굴을 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지. 색목인을 본 적 있느냐? 나는 몇 번 보고 이야기도 나누어보았다. 눈과 머리 색만 다를 뿐이지,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더구나. 나는 서역이라는 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 내가 간다면 귀비도 함께 가야 한다. 영왕부에 오도카니 앉아 지아비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재미있을 테니 말이다.”
뜻밖의 제안에 이번에도 류희겸은 입을 열지 못했다. 제좌를 언급할 때보다 더욱 가벼운 태도였지만, 농담이 아니라는 것은 눈치챘다.
자꾸 직전 생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때도 진혁위는 같은 말을 했다. 멀리 떠나고 싶다고. 검은 땅과 하얀 얼굴을 한 사람이 있다는 서쪽으로 같이 가는 게 어떻겠냐고. 지금처럼 느긋하게 웃으면서 그리 물었다.
그때는 농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진혁위의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진혁위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깨달았다.
제좌를 가질지, 아니면 모든 것을 버리고 서쪽으로 떠날지.
무서울 게 없는 영왕만이 할 수 있는 오만한 선택이었다. 제좌를 가지지 못한 황자의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기란 어려운 법이었다.
“역시 눈치는 나쁘지 않군. 귀비는 본왕의 사람이니, 무얼 결정하든 따라야 할 것이다.”
“예.”
“목소리에 힘이 없다.”
“영왕야를 따르겠습니다.”
“귀비는 거짓말을 잘 못해. 그래도 귀여워서 넘어가 준다.”
눈을 휘며 가볍게 코웃음을 치는 진혁위를 향해 류희겸은 진심이라고 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귀엽다 하는 게 어이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의 말대로 거짓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진혁위가 황제가 되는 것도, 혹은 서역으로 멀리 떠나는 것도 류희겸에게 있어서는 진한재를 죽여야 하는 목표와 상관없었다. 그래도 진혁위가 넘어가 준다고 하니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왕야. 석반이 준비되었사옵니다.”
우소진이 다가와서는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왔기에 자리를 옮겼다.
탁자 위에는 류희겸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연근과 밤, 소고기를 함께 끊인 탕과, 돼지고기를 말려 맵게 볶은 것이었다.
진혁위도 류희겸도 딱히 음식을 가려 먹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간단한 대화를 하며 식사를 하는 와중에 류희겸은 마치 지금 생각났다는 듯 준비된 말을 건넸다.
“황공하오나, 왕야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이라고?”
“예.”
“귀비가 부탁이라니, 안 들어줄 수가 없지. 무엇이냐?”
“바다 새우가 먹고 싶습니다. 구워 먹을 수 있게요.”
류희겸은 식탐이 없었다. 귀하게 자라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모두 최고급이었지만 먼지투성이의 전장을 나뒹구는 것이 일상이 되면서 상한 게 아니라면 아무거나 잘 먹게 되었다. 그런데도 굳이 새우가 먹고 싶다고 청한 것은 진혁위가 정패(正牌)를 쓰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황족의 정패란 일종의 만능 통행증이었다.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한 태경에서 바다 새우를 구하려면 남해(南海)밖에 없는데, 젓갈이 아니라 소금에 절인 생물을 상하기 전에 손에 넣으려면 상선이 아니라 관선을 이용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진혁위는 심부름꾼에게 정패를 쥐어줄 수밖에 없었다.
류희겸은 식탐 많고 제멋대로인 귀비처럼 굴어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혁위의 말대로 그와 자신의 영욕은 이미 엮인 상태이니 앞으로 다가올 위험을 막아야 했다.
“겨우 바다 새우가 먹고 싶어서 거창하게 부탁을 하다니. 안 들어줄 수가 없구나. 싱싱한 바다 새우를 구해주마.”
“감사합니다.”
다행히도 진혁위는 별다른 의심 없이 바다 새우를 구해주겠노라 약속했다. 다시 식사가 이어졌다.
맛깔스럽게 볶아진 돼지고기를 입에 넣었던 류희겸은 순간 느껴지는 쓴맛에 인상을 썼다. 특별히 가리는 거 없이 먹기는 했지만, 이건 쓰다 못해 입 안이 아팠다.
“우욱.”
어지간했으면 그저 조용히 뱉었을 텐데 저도 모르게 구역질이 튀어나왔다. 진혁위와 우소진의 시선이 입을 가리는 류희겸에게 닿았다.
“귀비?”
“잠시……. 으…….”
류희겸은 품에 넣은 영견을 꺼내어 입을 가리고는 음식물을 내뱉었다. 아직도 입 안에는 쓴맛이 가득 남아 있었다.
“맛이 이상하여 그랬습니다.”
“맛이 이상하다고?”
얼른 물을 마셔 입을 헹구는데 진혁위가 놀란 얼굴을 했다.
“좀…… 많이 썼습니다.”
“우소진.”
진혁위의 부름에 우소진이 젓가락을 들고는 류희겸이 마지막으로 먹었던 돼지고기볶음을 먹었다. 그제야 류희겸은 음독에 생각이 미쳤다. 다행히 우소진은 류희겸처럼 놀라지 않았다.
“무엇이냐?”
“호장과(葫薔果)의 맛이 납니다. 왕야께서도 아시다시피 호장과가 쓰고 맵지 않습니까?”
“아……. 그렇지.”
우소진이 호장과라고 하자 이번에는 진혁위가 돼지고기볶음을 먹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호장과가 맞다.”
“호장과요?”
“귀비는 모를 수도 있겠다. 서쪽 끝에 있는 제남(堤南)에서 나는 향신료다. 쓴맛이 특징이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우소진, 너는 의원을 불러오너라.”
“그저 쓴맛이 났을 뿐입니다. 그리고 원래 그런 맛이라지 않으셨습니까?”
“칼에 찔려도 아픈 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 귀비가 쓴 거 하나 먹었다고 얼굴이 사색이 되는 걸 보니 걱정이 되어서 그런다. 그리고 호장과가 귀비의 몸에 안 좋을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 향신료가 독이 되기도 하지. 우소진은 무얼 하느냐. 어서 의원을 부르지 않고.”
진혁위의 재촉에 우소진이 잰걸음으로 뛰쳐나갔다. 별거 아니라고 재차 말했지만 진혁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생소한 걸 섭취하면 배탈이 날 수도 있다. 배탈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느냐. 미리 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 등등의 말을 하며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야 한다고 피력했다.
오래지 않아 영왕부에서 상주하는 의원이 나타났다. 류희겸은 그에게 진맥을 받고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받고 나서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
촉.
고요한 침방에 야릇한 소리가 울렸다. 침상 위에서 진혁위와 뒤엉킨 류희겸은 입 안을 희롱하는 젖은 혀를 빨면서 합환주의 효능에 대해 생각했다.
자귀나무꽃으로 담갔다는 합환주는 최음약이나 미약이라고 불리는 것들과 달리, 평소보다 민감해지면서 기분이 나른해지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교합을 할 때면 묘하게 위력을 발휘했다.
합환주를 마신 것은 만월제전이 끝나고 진혁위와 몸을 섞은 이후로 두 번째였다. 그 뒤로 계속되는 교합에 쾌감을 느끼곤 했지만 확실히 합환주를 마시니 느낌이 달라졌다.
혀를 빨리고 옷 위로 어루만져진 것뿐인데도 오싹함에 몸이 떨렸다. 그때마다 류희겸은 자신을 내리누르고 있는 남자의 어깨를 강하게 부여잡아야 했다.
“하아…….”
입술이 떨어지자 탄식을 닮은 한숨이 흘러나오는 바람에 류희겸은 부끄러워졌다. 몇 번이고 교합을 했지만 아직 쾌감을 담은 소리를 내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류희겸에게 진혁위와의 교합은 응당 해야 하는 일이었다. 적국에 사로잡혀 포로가 되면 살아남기 위해 뭐든 해야 하는 것과 비슷한 거라고 여겼다.
직전 생에 진혁위와 몸을 섞은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적극적으로 즐기는 것도, 쾌락에 젖어 울부짖는 것도 성격에 맞지 않아서 힘들었다.
“예민해졌어.”
“…….”
“확실히 합환주의 효능이 좋은 것 같다.”
귓가를 지분거리던 진혁위가 흥겨움을 드러냈다. 류희겸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 대신에 신음이 새어 나오려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밤의 정적 속에 입맞춤과 애무가 이어지면서 침의가 벗겨지는 소리가 번졌다. 느슨하게 묶여 있던 침의의 매듭은 쉽게 풀렸고 류희겸의 상체는 금방 알몸이 되었다.
모양은 좋으나 결코 부드럽다 할 수 없는 커다란 손이 옆구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류희겸은 움칫거렸다.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거친 손이 주는 감각은 이상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흐…….”
류희겸의 바지를 벗겨 내리며 엉덩이를 움켜쥐는 진혁위의 움직임은 거침없었다. 발긋하게 달아오른 귓가를 핥고 깨물다가 턱으로, 목으로 내려오던 입술이 종국에는 유두에 혀를 대자 류희겸은 허리를 뒤틀고 말았다.
직전 생에서는 진혁위와 교합을 한 것이 이 년 동안 몇 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례날로부터 보름이 겨우 넘었는데도 열 번을 꽉 채웠다. 그것도 다급하게 스쳐 지나가듯이 한 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합환주의 효과가 아니라도, 교합을 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게 달랐다. 그리고 그걸 참는 게 힘들었다.
뱃가죽을 길게 핥아 올리던 남자가 기어코 유두를 강하게 머금어 빨았다. 류희겸은 자신에게 달라붙은 남자의 머리통을 쳐내고 싶은 충동과 신음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이겨냈다. 심리적으로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애무는 부드러운 고문과 닮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왼쪽 유두가 흠뻑 젖도록 빨아댄 진혁위가 한참 만에 떨어져 나갔다. 그제야 눈을 뜬 류희겸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자신의 얼굴은 더할 테지만, 그래도 혼자 흥분한 것보다는 나았다.
“소리를 듣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하느냐?”
“…….”
“입을 다물려고 노력하는 게 더 음심을 들끓게 하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응? 이것도 방중술의 일환인가? 사내의 애를 태우니 말이다.”
가벼운 희롱에 류희겸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덕분에 진혁위는 더욱 흥겨워졌다. 고집스럽고 딱딱한 사내는 제법 놀리는 맛이 있었다.
예민한 곳을 건드리면 움찔거리며 놀라다가도 꾹 참는 모습에 속이 간질거리며 웃음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훅 달아올랐다. 억눌린 신음을 들으면 펑펑 울게 만들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다.
좀 더 안달을 내며 매달려 왔으면 좋겠지만, 류희겸은 결코 그럴 사내가 아니었다.
“그냥 하십시오.”
“귀비는 달콤한 말을 못 하는구나. 너무 딱딱하다.”
“재주가 없어 그럽, 으…….”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말만 하는 게 괘씸해서 진혁위는 허리를 부드럽게 만지작거리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려 류희겸의 성기와 음낭을 동시에 꽉 붙잡았다. 마치 뭍 위에 오른 물고기처럼 푸드덕거리는 류희겸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고집스레 입을 꼭 다물었다.
본격적으로 강약을 조절하며 문지르자 류희겸의 얼굴은 물론 목과 가슴까지 붉어졌다. 그러다 눈을 감아버리고는 아예 고개도 돌려버렸다. 류희겸의 반응은 늘 같았지만, 그래서 더 귀여웠다.
“이러는 것도 귀엽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부끄러움에 류희겸은 눈을 더욱 질끈 감았다. 세상에. 귀엽다니. 누가 귀엽냐고 따지고 싶은 것을 참았다.
저번에는 어여쁘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귀엽단다. 확실히 진혁위의 심미안에는 문제가 있었다. 피에 젖은 얼굴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에 반했다고 할 때부터 알아보았다.
더 악질적인 것은 자신이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말을 보탠다는 것이었다. 수치심으로 잔뜩 붉어진 뺨에 내려앉는 입술은 흥겨운 키득거림을 품고 있었다.
이미 전희로 잔뜩 달아오른 류희겸이 파정을 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몸을 일으켜 손을 닦아낸 진혁위는 그제야 상의를 벗었다. 희롱을 하며 즐기는 것도 좋으나 이제 한계였다. 제대로 자극한 적 없는데도 자신의 성기는 뻐근하게 발기한 상태였다.
류희겸의 다리 사이에 파고든 진혁위는 준비된 향유로 손을 듬뿍 적셨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리고 있는 류희겸을 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인정사정없이 거창을 휘두르는 장군께서는 잠자리에서 수줍음이 많았다.
확실히 잠자리의 방중술을 아는 게 분명하다고 제멋대로 확신한 진혁위는 류희겸의 다리를 넓게 벌려 꽉 다물린 입구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한 차례 파정으로 힘이 빠졌을 텐데도, 은밀한 곳은 침입자를 허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진혁위는 거침없이 약한 곳만 찔러 눌렀다. 그럴 때마다 향유로 흠뻑 젖은 점막이 꿈틀거리며 손가락을 잘라 먹을 듯 조였다.
질끈 눈을 감고 있던 류희겸은 저릿한 감각에 몇 번이고 몸을 뒤틀었다. 진혁위가 찌르는 대로 아래에서 저릿함과 열기가 함께 훅훅 치솟았다. 어느새 세 개로 늘어난 손가락은 마치 성기라도 되는 것처럼 부드러운 안쪽 살을 짓누르며 쾌감을 더욱 부추겼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탁한 목소리로 긴 한숨을 내뱉은 진혁위가 손가락을 빼내며 자세를 바꾸었다. 다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던 류희겸은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긴장하지 마라. 너만 아프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귀비가 익숙해지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려나?”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진혁위는 단호하게 류희겸의 허벅지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잔뜩 부풀어 오른 성기를 좁은 입구에 대고 비비다 단번에 찔렀다.
“허윽…….”
류희겸은 숨을 삼키며 충격을 견뎠다. 손가락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두꺼운 부피감의 성기가 여린 살을 밀어내며 들어오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강한 삽입에 헛숨을 몇 번이고 들이쉬어야 했다. 음모가 둔부에 닿을 때까지 밀어붙인 진혁위가 탄식을 내뱉으며 류희겸의 팔을 잡았다.
“목에 팔을 감아라.”
류희겸은 하라는 대로 순순히 진혁위의 목에 팔을 둘렀다. 지난 경험으로, 앞으로의 움직임을 버티려면 뭔가 붙잡는 게 좋다는 것을 알았다.
귀비가 된 류희겸은 손과 발을 섬세하게 관리받았다. 대신 검을 쥐어야 했기에 손톱은 바짝 깎아두었다. 교합 도중에 손에 힘을 주어도 진혁위의 등과 어깨에 상처를 내지는 않았다. 그래도 붉은 흔적이 남기는 했는데, 진혁위는 그걸 또 좋아했다.
이상한 취향이라는 생각은 진혁위가 슬쩍 자세를 바꾸는 바람에 흩어지고 말았다. 커다란 것이 더 깊이 들어오면서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렸다.
“딴 생각 하지 마라.”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기는.”
류희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진혁위가 입술을 겹쳤다. 뜨거운 혀가 얽히고 빨릴 때마다 젖은 소리가 퍼졌다. 그저 입맞춤일 뿐인데 류희겸은 현기증을 느꼈다. 온몸이 심장이라도 된 것처럼 쿵쿵 울려댔다. 특히 결합된 아래가 그랬다.
숨이 모자라다 못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고 여기는 순간에, 입술을 떼지 않은 진혁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에 파묻혀 있던 성기가 짧게 물러났다가 깊게 처박혔다.
“흑.”
“윽.”
맞닿은 입술에서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신음이 흘러나왔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
커다란 성기가 안을 깊게 파고들었다.
“흑, 이제 그으. 흐윽. 읏. 아.”
자리에 엎드린 채 엉덩이를 쳐들고 있던 류희겸은 예민한 곳을 푹푹 찔러드는 흉포함에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신음을 내질렀다. 한 번 입을 열었더니 소리가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진혁위와의 교합은 매번 이랬다. 끔찍한 쾌락에 속절없이 떨다 못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첫 교합 때부터 진혁위는 집요하긴 했으나 오늘은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자신이 몇 번이나 절정에 이르는 동안 진혁위는 지친 기색 없이 열정적이었다. 깊게 파묻어 강하게 움직이는 진혁위의 움직임에 따라 몸이 음란하게 흔들렸다.
모든 것이 지독하게 뜨거웠다. 이마에 맺힌 땀도, 요를 그러잡은 손끝도, 허덕이며 내뱉는 숨결도 모두 뜨거워서 불에 타는 것 같았다.
“아, 아으, 윽…….”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류희겸은 몸을 뒤틀었다. 이제는 진짜 한계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흐물흐물 발기한 자신의 성기에 손을 뻗었다.
첫 교합에 손목을 묶었던 흰 끈이 이번에는 성기 밑둥을 단단히 감고 있었다. 파정해야 이제 아무것도 나오지 않겠지만 괴로움으로부터 빨리 해방되고 싶었다. 그러나 끈을 풀기도 전에 진혁위에게 손이 막히고 말았다.
“좀 더 버텨라.”
“그만…… 그만 끝내고 싶. 하윽.”
“오늘따라 귀비가 보채는구나.”
웃음기가 담긴 진혁위의 목소리에 류희겸은 울컥했다. 이게 보채는 거라니. 괴롭히고 있는 게 누구인데.
“괴, 롭히지 마십시오.”
“괴롭히는 거 아니다.”
“맞습니다.”
“파정이 빠른 것은 귀비가 아니더냐. 벌써 몇 번이나 싼 줄 세어볼까? 응?”
쾌감뿐만이 아니라 수치심 때문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 류희겸은 눈을 감으며 입을 꽉 다물었다. 첫날처럼 합환주를 마시라고 한 것은 진혁위였다. 흥을 내자며 내미는 것을 거절하지 않고 마셨더니 몸이 민감해져 버렸다. 자기가 줘놓고 민감해진 것을 탓하다니. 욕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있는데 진혁위가 손으로 앞 목을 움켜쥐어 왔다.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이 목이 잡힌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상체가 들어 올려졌다. 아래는 여전히 결합된 상태였다. 엎드려 있다가 무릎으로 버티고 선 자세로 바뀌자 안을 찌르는 성기의 위치가 더욱 깊어졌다. 아찔한 감각에 진저리를 치고 있는데 이번에는 진혁위의 손가락이 입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소리를 참지 마라.”
“왕야……. 윽. 허윽.”
커다란 성기가 잔뜩 열이 오른 곳을 사납게 박혀들었다. 안으로 찔러드는 커다란 것이 여린 살을 짓이길 때마다 류희겸은 야한 소리를 내뱉었다. 입 안에 들어와 있는 손가락 때문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흐느끼는 울음과 성기가 안을 찔러들며 질척이는 젖은 소리가 음란하게 겹쳤다.
안을 깊숙이 때려 박는 것처럼 강한 허리짓이 계속 이어졌다. 결국 견디다 못한 류희겸은 자신의 성기를 붙잡고 있는 진혁위의 손을 긁다시피 떼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진혁위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류희겸은 미칠 것 같았다. 버티고 선 무릎에서 자꾸 힘이 빠져 무너지려는 것처럼 이성이 허물어지려고 했다. 그 와중에 발산할 수 없이 차곡차곡 쌓이는 쾌락이 무서웠다.
“이제, 흐응. 윽. 그만, 놓아…….”
“이리 보채면 더 흥이 난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에 류희겸은 머리를 흔들며 진저리 쳤다. 자신의 언행이 진혁위를 자극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정신이 나가기 전에 이 괴로움을 끝내야 했다.
간절한 애원에도 진혁위는 거센 추삽질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몸을 바짝 더 붙여 왔다.
“흐…….”
긴 신음과 함께 뜨겁게 열이 오른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흘렀다. 어지럽고, 자지러지는 쾌감에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어느 순간부터 뒤를 헤집어놓는 자극만이 류희겸을 지배했다. 흐느끼며 몸을 뒤틀다 갑작스레 진혁위의 손이 사라지며 해방감이 찾아왔다. 끔찍한 환희에 류희겸은 몸을 굳히며 몸을 떨었다.
그동안에도 진혁위의 움직임은 계속 이어졌다. 성기를 잡은 손은 이제 아랫배를 꾹 눌렀다.
“아……. 읏. 잠깐.”
“진짜, 조인다.”
“왕야……. 윽.”
“괜찮아.”
욕정을 숨기지 못한 진혁위의 목소리는 낮고 탁했다. 사정으로 힘이 빠진 류희겸은 진혁위가 찔러 올리는 대로 휘둘렸다. 잔열이 남은 상태에 가해지는 자극은 여전히 쾌감으로 받아들여졌다.
눈물에 젖은 시야는 초점이 맞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버티는 사이에 진혁위가 안으로 길게 박아 넣었다. 꽉 끌어안겨 있던 탓에 진혁위와 팔과 몸이 꿈틀거리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잔뜩 민감해진 몸 안에서 뜨거운 것이 확 퍼졌다.
“하.”
진혁위가 짧은 탄식을 하며 성기를 몇 번 더 쳐올렸다. 몸을 굳히고 거친 숨을 한참이나 몰아쉬었다.
쾌락의 여운보다 드디어 끝났다는 사실에 류희겸은 안도했다. 하지만 진혁위는 몸을 물리지 않았다. 대신에 류희겸을 껴안은 자세 그대로 한 몸처럼 자리에 천천히 쓰러졌다.
류희겸은 접합부가 그대로 이어진 채라는 사실이 불안했다. 몇 번의 경험으로 남자가 흥이 나면 이대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야. 비켜주십시오.”
“좀 더 이대로 있자.”
“힘듭니다.”
“천하의 귀장군이 엄살을 떠는구나.”
등 뒤에 달라붙은 남자의 입술이 젖은 목덜미에 닿는 바람에 류희겸은 움찔 떨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일일이 반응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잘 겁니다.”
“누가 잠들지 말라더냐. 자도 된다.”
자도 된다고 하면서도 진혁위의 입술은 목덜미에서 떠나지 않았다. 또한 끌어안은 손은 뱃가죽을 만지작거렸다.
더 이상 손을 쳐낼 힘이 없었던 류희겸은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깨끗하게 씻고 싶었지만 진혁위가 계속 지분댈 것 같아서 잠시 눈을 붙이는 게 낫다 싶었다.
그렇게 의식이 멀어지는 류희겸과 다르게 진혁위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처음, 류희겸과의 교합은 복수에 가까웠다. 지난 생에 자신을 배신한 류희겸에 대한 분풀이기도 했다. 하지만 혼례식 후부터는 교합이 기꺼웠다.
오늘, 류희겸에게 합환주를 마시게 하여 흥을 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호장과를 먹고 가볍게 구역질을 하는 류희겸을 보며 언젠가 보았던 여인의 입덧 같다고 생각하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을 맛보았다. 자신은 양인이었고 상대를 음인으로 만들어 남녀 가리지 않고 임신을 시킬 수 있었다.
양인, 혹은 진인(眞人), 금인(金人)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범인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신체 능력과 위압감, 그리고 상대를 음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대대로 황가의 사내아이에게서만 이런 능력이 나타나기에 양인의 힘은 황제의 권능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양인의 지극한 총애를 받은 이는 음인으로 변화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즉, 상대가 음인으로 변화할 만큼 잦은 교합을 해야 했다.
양인은 자신의 짝이 된 음인을 육체적으로 종속시킬 수 있었다. 음인은 제 짝인 양인이 아니라면 교합 자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음인이 수태하는 아이는 모두 짝인 양인의 자식이었다.
또한 양인은 자신의 짝이 어디에 있는지 강하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기는 하지만 들은 바가 그랬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혁위는 희열을 느꼈다. 지난번처럼 류희겸이 야밤에 도망을 친다 하더라도 그를 뒤쫓을 수가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내일이 되면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노라 마음먹은 진혁위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류희겸의 뒷목을 살짝 핥았다. 땀 때문에 짭조름한 맛이 났다. 한 번 더 혀를 대자 류희겸이 이상하게 웅얼거리며 고개를 숙여 피했다.
커다랗고 무뚝뚝한 사내가 이럴 때만 귀엽다고 생각해 버리는 자신이 어이없었다. 그래도 움찔거리며 반응하는 게 재미있어서 계속 만지게 된다. 아직 류희겸의 안에 들어 있는 성기도 꿈틀거리는 내벽의 움직임에 다시 힘을 받기 시작했다.
피곤에 지쳐 잠들어 있는 상대에게 이러는 건 안 된다. 그러나 교합을 많이 해야 그를 음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욕망과, 억누를 수 없는 욕정이 진혁위를 충동질했다. 스스로가 제대로 미쳐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이런 파렴치한 짓도 할 수 있는 법이었다.
진혁위는 류희겸의 배를 잡아 고정시키고는 반쯤 빠져나와 있던 성기를 밀어 넣었다. 단단하고 강건한 몸은 자신에게 꼭 맞아 들었다.
가볍지 않은 자극에 작게 앓는 소리를 내던 류희겸이 정신을 차리며 몸을 굳혔다. 꽉 조여드는 내벽에 감싸인 성기는 순식간에 크기를 키웠다.
“으……. 왕야?”
“내가 못 참아서 그런다.”
“갑자기 그러시면. 이제는 더 못합― 흣.”
진혁위는 성기를 더욱 깊이 밀어 넣으며 류희겸의 성기를 한 손으로 쥐었다. 하도 쥐어짜서 흐물흐물해진 것은 힘이 없었지만 류희겸은 얕은 신음을 내뱉으며 착실하게 반응했다.
“왕야께서는 지치지도 않으십니까?”
“귀비가 이리도 다정하게 조르니, 더 힘이 난다.”
“저는 조른 적이 없습니다.”
성기를 쥔 손을 떼어내려는 류희겸의 몸짓은 강경해서 진혁위는 웃음을 삼켰다. 평소에 말을 적게 하고 기운을 죽였지만, 그래도 일군을 이끌었던 류희겸은 제법 성격이 강한 편이었다. 이전 생에서도 한 번 더 하려고 달려들었더니 이제는 못 한다며 걷어차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은 류희겸에게 불리한 자세였다. 뒤에서 붙들린 채 꿰뚫려 있으니 버둥거리는 것도 어려을 터였다. 거기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서 그런지 상명하복이 몸에 배어 있었다. 강하게 밀어붙이면 결국 응하고 만다.
“그야 알지. 잠시만 즐기자.”
“잠시는 무슨……. 흑. 으윽.”
진혁위는 류희겸의 항의를 무시하고 천천히 허리짓을 하며 밀어붙였다. 결국 우직한 사내는 몸을 떨면서도 버텼다.
이러니까 더욱 괴롭히고 싶어진다. 사나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진혁위는 류희겸의 목을 물면서 꽉 끌어안았다.
*
다음날 오전, 옥안인은 영왕의 서재로 불려갔다.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가 더 많은 옥안인은 영왕부에서 상주하는 의원이었다.
그는 실력은 좋으나 태중의 아이를 사내로 바꾸는 비술이 있다고 사기를 치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우연찮게 그 자리를 지나가던 진혁위가 힘을 써준 덕분에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옥안인은 노비 신분이긴 했지만, 그래도 실력이 있어 영왕부 내에서는 나름 입지가 탄탄했다. 다만 담이 작아 주인인 진혁위 앞에서는 언제나 뱀 앞의 쥐가 된 듯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예를 올린 옥안인은 고개를 숙여 진혁위의 명을 기다렸다.
“귀비에게 아무 이상이 없더냐.”
“예. 귀비께서는 아주 건강하십니다.”
“다른 것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왕야께서 무엇을 하문하시는 것인지 소신은 이해하지 못하였나이다. 통촉해 주시옵소서.”
옥안인은 덜덜 떨며 자비를 구했다. 어제저녁에 갑자기 호장과를 먹어 구역질을 했다는 귀비를 진맥했으나 아무 이상 없이 건강했다. 그래서 다른 것이 있냐고 묻는 진혁위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인이 음인이 되기까지 빠르면 보름이면 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사내는 얼마나 걸리는지 아는가?”
조금도 예상 못 한 질문이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옥안인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것이, 그러니까……. 소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씀드리면, 그게 보름이라고 알려져 있기는 하온데.”
“더듬지 말고 간결하게 말하라.”
“왕야께서도 아시다시피 양인은 모두 황가의 혈맥을 이은 분들이신지라, 자세한 내용은 태의원의 기밀로 취급되옵니다. 소신이 아는 것은 그저 의원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알려진 것들뿐이라 정확하지 않습니다.”
“상관없다. 아는 것만 고하면 된다.”
“전양(前梁)의 양훤제(梁喧帝)가 아낀 상재가 입궁 보름 만에 음인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건 쉬지 않고 교합을 하여 그렇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음인이 되기까지 수개월이 걸립니다. 그리고…… 여인이 아니라 사내의 경우는 시간이 더 필요하옵니다.”
옥안인은 자신이 아는 것만 빠르게 설명했다. 양인의 총애를 받은 이는 음인이 된다는 것은 널리 퍼져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총애의 기간이 얼마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정확히는 음인으로 변화하는 기간을 가늠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쉬지 않고 교합을 한다면 보름이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또 평생을 함께 살아도 음인이 되지 않는 경우도 꽤 많았다.
옥안인은 진혁위와 류희겸의 첫 번째 교합이 약 한 달 전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사이에 교합을 하지 않은 날도 있으니, 진혁위가 보름 운운한 것을 이해했다.
“사내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은 처음 들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기는 하오나, 소신이 알고 있기로는 그러하옵니다.”
“그럼 교합을 자주 할수록 쉬이 음인이 된다는 것은 사실이냐?”
“예. 그건 사실입니다. 또한 말씀 올리기 황공하오나, 평생을 함께해도 음인이 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건 알지.”
진혁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잦은 교합을 한다 하여도 음인이 되지 않는 일이 왕왕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태자였다. 태자의 경우 첩이 열이 넘는데, 그중에 음인이 된 이는 단둘뿐이었다. 음인인 짝을 몇 명이나 거느리느냐는 양인의 능력이자 힘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태자가 양인치고는 힘이 약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꽤 퍼졌다. 시샘 많은 태자가 형제들을 더욱 시기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럼, 양인이 제 짝인 음인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가능한가? 구체적인 거리에 대해 알려진 바가 있는가?”
“양인이 짝이 된 음인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옵니다. 그리고 이건…… 세간에 전해지는 야사이온데, 월지(鉞至)의 효문제(孝文帝)가 총애하던 귀인이 태후를 저주해 폐서인이 되어 남해로 쫓겨났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해에서 죽었는데, 그 소식이 전해지기도 전에 효문제가 귀인이 이제 없다며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월지의 수도가 동련(東鍊)이었으니, 남해라면 아주 먼 곳도 가능하다는 것이군.”
“야사이니 정확하지는 않사옵니다.”
고금의 황제와 관련된 야사는 많고 많았다. 그중에는 황제의 능력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 몇몇 있었지만 정확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진혁위는 양인과 음인에 관련된 것을 이것저것 물었고, 옥안인은 자신이 아는 것들을 성실하게 대답했다.
한참 후에 옥안인이 물러나고 혼자가 된 진혁위는 알아낸 것들을 되짚다가 헛웃음을 삼켰다. 결국 잦은 교합 말고는 달리 시일을 앞당길 방도가 없었다. 거기다 음인이 되지 않을 가능성까지 있었다.
아니, 류희겸을 꼭 음인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도망쳐도 뒤쫓아 잡을 수가 있었다.
지난 생에서 류희겸을 허무하게 놓친 것이 제일 큰 후회로 남았던 진혁위는 도주의 가능성에 대해 계속 신경 썼다. 정 안 된다면 진짜 다리 하나 정도는 자를 의향이 있었다.
“수개월이라.”
진혁위는 기간을 가늠해 보다가 류희겸을 수렵제에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던 것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썼다.
이전 생을 알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특히 수렵제에서 일어나는 일은 자신에게 필요했기에 이런저런 준비를 해두었다. 문제는, 이전 생의 사건들이 반복된다면 반년 정도의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수렵제의 참석 명단에 이미 류희겸의 이름이 올라가 있기는 했지만 방법은 있었다. 귀비가 아프다고 하고 수렵제에 데려가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류희겸을 영왕부에 혼자 두고 자신만 수렵제에 가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정말 다리를 부러뜨릴까.”
위험한 말을 중얼거린 진혁위는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웃었다. 다리를 자르는 게 아니라 부러뜨릴 거라고 바뀐 것은 그저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다. 복잡하던 마음이 갈피를 잡아 어느 한곳으로 흐르려고 했다.
마침내 도달할 곳이 어디인지 뻔하지만 진혁위는 모르는 척 내버려 두었다.
◇ ◇ ◇
태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무환행궁(懋晥行宮)은 늦가을의 수렵제가 열리는 곳이었다. 동쪽으로는 광대한 숲이, 남쪽으로는 호수가, 그리고 서쪽으로는 드넓은 초지가 펼쳐져 있는 무환행궁은 대대로 대연국의 금군이 기마 훈련을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황제가 주최하는 수렵제는 단순한 사냥 대회가 아니라 군례의식이었다. 일사불란하게 말을 몰고, 활을 쏘며 무기를 점검하고, 병법에 따라 움직이는 고강도의 훈련이 이어졌다.
일 년에 두 번, 황제가 친히 인솔하는 기병의 군사 훈련에 황자들이 동행하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황제에게는 열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에 이미 사망하거나 와병 중이거나, 아주 어린 황자를 제외한 일곱 명의 황자가 수렵제에 참석했다.
북서쪽 국경을 지키고 있던 기왕 역시 황제의 부름을 받고 소수의 호위병력과 함께 무환행궁을 찾았다. 하지만 빠듯한 일정에 홍수로 불어난 강물을 제때에 건너지 못하는 바람에 뒤늦게 행궁에 도착하고 말았다.
수렵제의 일정은 총 이레로, 첫날과 마지막 날은 황궁과 무환행궁을 오가는 데 쓰였다. 나흘은 수렵과 훈련을, 그리고 나머지 하루는 연회를 열었다.
기왕이 도착한 것은 훈련이 마무리되는 다섯째 날이었다. 황제는 기왕의 실수를 용서하는 대신에 크게 질책했다.
“하여, 기왕께서 소남대(昭枏垈)에 연금당하셨다 합니다.”
“그런가?”
기왕의 처결에 대해 류희겸에게 전한 것은 심양설이었다. 류희겸의 공식 지위는 영왕의 귀비였다. 하지만 출신 때문에 류희겸은 영왕과의 동행이 아니라면 무환행궁의 숙소인 경휴원(瓊休園)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물론 경휴원을 나가지 않더라도 류희겸이 바깥소식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심양설은 유능하고 부지런했다.
“예. 폐하의 진노가 대단하시어, 수렵제가 끝날 때까지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말라고 하셨다 들었습니다. 아마 내일 있을 연회에도 참석하지 못한답니다.”
“소남대가 여기서 가깝지?”
“제법 가깝습니다.”
“괜히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모두에게 소남대 근처에는 얼씬도 말라고 하게나.”
가벼운 명령을 내리고 심양설을 돌려보낸 류희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몇 번이나 반복된 삶에서 바뀌지 않는 것이 늘 있었다. 때맞춰 강을 건너지 못해 가을 수렵제에 기왕이 늦는 것이, 그리고 그것 때문에 황제의 진노를 사서 연금당하는 것이 그랬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기왕은 천천히 몰락했다.
직전 생에서 황제는 기왕의 힘을 하나씩 빼앗아갔다. 기왕의 세력이 황제가 정한 기준보다 커졌기 때문이었다.
태자가 멍청한 머리로 태경에서 황제에게 아부를 하며 지냈다면, 기왕은 폭급한 성격으로 전장에서 군세를 키웠다. 그리고 태경에는 그러한 기왕을 지지하는 세력도 잔뜩 있었다. 군권에 민감한 황제의 뜻을 읽지 못한 기왕은 그렇게 눈 밖에 나버렸다.
기왕은 황제의 의도된 배제에 몇 번이고 실책을 반복하며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반대로 영왕 진혁위가 기왕을 대신해 힘을 얻었다. 자신이 위락호에서 죽기 전까지의 흐름이 그랬다.
“아직은 먼 미래지.”
류희겸은 손끝으로 책을 두드리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점검해 보았다. 이번 수렵제에서 중요 인물은 기왕이 아니라 훈군왕(勳君王)이었다. 하지만 지금 류희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은 진혁위였다. 정확히는 며칠 전에 진혁위가 한 말이었다.
황제가 될지, 혹은 멀리 떠나버릴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는 진혁위의 내심에 류희겸은 자신의 계획이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다.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는 진한재를 죽이는 것이었다. 황귀비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복수도 하지 못한 채 서역으로 떠날 생각도 없었다.
류희겸은 도망을 쳐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영왕부의 경비는 꽤나 삼엄한 편이었다. 그래도 내부에서 순찰 정보를 알아내어 몸 하나 빼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례품으로 받은 패물과 은자를 적당히 챙기면 화진국의 경릉까지 가는 여비로 충분했다.
문제는 진혁위의 반응이었다. 황제의 교지를 받고 정식으로 혼인을 했으니 자신이 벌이는 일은 모두 진혁위가 책임을 져야 했다. 친왕의 측비가 도망쳤다는 것은 단순한 망신이 아니었다. 거기다 자신은 타국의 장군 출신이었기에 진혁위는 정치적 비난까지 받을 것이다. 친왕의 체면에 정치적 책임을 더한 원한이면 빚쟁이처럼 쫓을 게 뻔했다.
진혁위뿐만이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류희겸은 대연국 황제의 자비와 아량에 목숨을 부지했다. 이대로 도망쳐 버리면 황제의 명예에 먹칠을 하게 되는 것이니, 익문사에서 모든 역량을 동원해 자신을 사로잡으려고 할 것이다.
“진퇴양난이군…….”
최악의 미래를 가정하던 류희겸은 무거운 한숨을 삼켰다.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책임은 자신의 몫이었다. 다만 복수를 완수하지 못하는 것이 두려웠다.
직전 생과 마찬가지로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다시 살아난 이유를 모르는 상황이라 더더욱 그랬다. 어린 시절, 첫 전투를 앞둔 그때처럼 손끝부터 차가워지는 바람에 주먹을 꽉 쥐었다.
류희겸은 길게 숨을 내쉬며 초조함을 떨쳤다. 먼 미래는 천천히 고민해야 했다. 우선은 내일 연회에 있을 사건에서 황제의 신임을 확실히 얻는 것이 먼저였다.
“마마. 왕야께서 오셨습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와중에 심양설이 나타나 진혁위가 돌아왔다고 알려왔다. 류희겸은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환행궁에 온 이후, 갑옷을 입고 다닌 진혁위가 돌아왔을 때 옷시중을 드는 것은 류희겸의 일이 되었다.
“영왕을 뵙습니다.”
안뜰까지 나간 류희겸이 예를 올리자 진혁위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라. 오늘은 같이 가야 할 곳이 있으니, 바삐 움직이자.”
“소인이 가야 할 곳이 있습니까?”
진혁위에게 손이 잡힌 채 움직이던 류희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일 연회가 있기 전까지는 자신은 경휴원을 나가지 못한다고 알고 있었다.
“귀비가 인기가 많아서 그래. 내가 말을 안 했지만, 귀비를 비무에 초청하고 싶다는 서신이 산더미처럼 왔더랬지.”
“그렇습니까?”
“이것저것 따지기 싫어 다 거절했는데, 제현공께서는 포기를 모르시는 분이었어.”
내실에 들어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 진혁위가 전한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만월제전에서 뛰어난 무위를 보인 류희겸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졌다. 그 와중에 태자부의 시위들과 벌인 비무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이자 온갖 곳에서 비무 초청과 면담 신청이 들어왔다.
이것저것 따지기 귀찮았던 진혁위는 초청도 신청도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한 번 쫓기 시작한 적은 반드시 죽인다는 전설적인 위업을 가지고 있는 제현공은 끈질겼다. 황제와의 친분을 적극 활용하여 함께 다과를 즐기자는 명분을 만들어 류희겸을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
“소인이 무엇을 주의해야 합니까?”
류희겸은 진혁위의 옷 매듭을 묶으며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손자와 비무를 시키겠다고 황제를 움직인 것을 보면 제현공은 보통 성격이 아니었다.
“제현공의 명성은 들어보았을 텐데? 화통하시지만 그만큼 사람 보는 눈이 깐깐하시다. 과묵한 것은 좋으나 비굴하게 굴지 마라. 제현공은 당당한 이를 좋아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결국 자기 손자들이랑 한번 비무를 붙여보고 싶어 그러는 거니까. 손자들이 덩치는 산 만한데, 아직 어려. 열둘이랑 열다섯이던가? 열다섯 살짜리는 곧 무관이 되어 서쪽 국경으로 떠날 터인데, 제현공이 어린 손자들에게 여러 경험을 하게 해줄 모양이야.”
“제현공께서는 엄격하신 분이신 것 같습니다.”
“엄하기는. 세상 둘도 없는 팔불출이지. 어느 할아버지가 손자를 위해 친왕의 귀비에게 비무를 청하겠느냐?”
류희겸은 말없이 동의하면서 진혁위가 장의를 걸치게 도와주었다. 소맷자락이 길고 풍성한 장의가 구겨진 곳이 없도록 여기저기 살피며 정성껏 모양을 잡았다.
“제현공은 뛰어난 무장을 아끼신다. 큰 부침은 없을 터이니 평소대로 용감히 굴어도 된다. 대신 아무거나 먹지 마라. 차든 과실이든 입술을 적시는 정도에서 끝내라.”
“예.”
조심해야 하지만 평소대로 해도 괜찮다는 상충된 조언에도 류희겸은 그러려니 했다. 원래 밖에서는 아무거나 먹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진혁위가 옷을 모두 갈아입었다. 진혁위는 키가 크고 체형이 좋은데다 얼굴까지 잘생겨서 어떤 옷을 입든 잘 어울렸다. 푸른빛이 도는 짙은 회색 비단에 은실로 수를 놓은 옷은 차분해서 그의 화려한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류희겸은 새삼 진혁위의 미모에 놀라면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여섯 번의 회귀를 포함해 이십팔 년을 살아오면서 누군가의 옷시중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제 손으로 옷을 갈아입히고 꾸미는 것이 이렇게 뿌듯할 줄은 몰랐다.
언젠가 진혁위가 자신을 보고 헌앙하다 했지만, 그 말은 그에게 그대로 돌려주는 게 맞을 듯했다.
“지금, 웃은 거 맞지?”
“……?”
진혁위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류희겸은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자신이 웃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웃었잖아.”
“잘 모르겠습니다.”
“웃었어. 확실해. 무슨 생각을 했기에 웃은 것이냐?”
집요한 물음에 류희겸은 당혹스러웠다. 당신의 미모에 감탄하고 있던 중이라고, 예쁜 옷을 입혀 꾸미는 것이 즐거웠노라고 사실대로 고할 수는 없었다. 그냥 넘어가면 될 터인데. 속으로 한숨을 삼킨 류희겸은 머리를 굴렸다.
“왕야께서 헌앙하다 생각했습니다.”
“내가 했던 말이구나.”
“예.”
“내 얼굴이 잘나기는 했지. 그래도 예쁘기는 귀비가 더 예쁘다.”
화사하게 웃는 진혁위를 보며 류희겸은 반박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미의 기준이 잘못된 것 같다. 낯간지럽지도 않느냐. 거울을 보아라. 당신이 더 예쁘다. 그러나 입 밖에 내었다가는 수습할 수 없는 말이기에 침묵을 선택해야 했다.
물론 진혁위는 무심하다 못해 어이없는 눈빛을 하는 류희겸의 속내를 모두 읽었다. 지금이야 류희겸이 말을 아끼다 못해 인색하기까지 했지만, 이전 생에서는 그에게 잘생겼다는 소리를 몇 번 들었다. 어쨌든 자신의 잘난 얼굴을 보고 미소 지은 것은 좋았다.
“가자.”
눈을 곱게 접어 웃은 진혁위가 당당히 앞장섰다.
*
류희겸이 황제와 제현공을 만난 곳은 무환행궁의 인공호수 옆에 자리한 누각이었다. 고아하게 꾸며진 누각은 늦가을의 풍취를 즐기며 어울리기에 훌륭한 장소였다.
대연국의 황제와 함께 하는 다과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럽게 흘러갔다. 진혁위의 충고대로 제현공은 만만찮은 성격이긴 했으나 류희겸에게는 적당히 호의를 보였기에 예의 차리는 점잖은 대화가 오갈 수 있었다. 물론 중간에 한 번 위기가 있긴 했다.
“만월제전에서 영왕야와 왕야의 귀비께서 맞대결한 비무가 대단했다던데, 소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명하시어 두 사람에게 다시 겨루어보라 하시면 아니 됩니까?”
어려서부터 황제와 어울려 지낸 제현공만이 할 수 있는 부탁이었다. 거기에 황제는 한술 더 떠, 그럴까 하고 뜸을 들였다. 결국 진혁위가 나서 혼인한 지 열흘밖에 되지 않은 부부에게 검을 들고 싸우라 명하시면 안 된다고 황제를 말렸다.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황제가 7황자는 애처가 팔불출이라고, 그렇지 않냐고 제현공의 동의를 구했다. 당연히 제현공은 그렇다면서 거들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황제와 노장군의 입심은 늙은 생강처럼 매웠다. 진혁위는 귀비를 아낀다고 당당히 말했고, 류희겸은 그저 조용히 눈만 내리깔았다.
일정이 바쁜 황제는 다음 약속 때문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에 맞춰 류희겸이 제현공의 손자와 비무를 약속하는 것으로 다과 자리는 파하였다.
황제께 예를 올리고 누각을 빠져나온 진혁위와 류희겸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황후의 태감이었다.
“황후 마마께서 황자 전하들을 모두 초대하시어 소인이 경휴원으로 영왕야를 모시러 갔었습니다. 경휴원의 궁인이 영왕야께서 황제 폐하와 담소 중이라 하여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황자 전하들께서는 황후 마마를 뵙고 있다고 하오니, 황후궁으로 걸음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황후 마마께서 영왕야의 귀비께도 참석하시라 명을 내리셨습니다.”
조심스러운 태감의 언사에 류희겸은 불길함을 느꼈다.
모영균이 좌천되면서 진혁위는 태자와 제대로 척을 졌다. 아무리 다른 황자들이 모두 모였다고는 하지만 이 시점에 황후를 만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선택권이 없었던 류희겸은 진혁위를 보았다. 느낌이 나빴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기는 했다.
“황후 마마께서 본왕의 귀비도 부르셨다고?”
“예. 그러하옵니다.”
“다른 형제님들 중에 비빈을 동행한 이는 아무도 없는데, 굳이 본왕의 귀비를 동석케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죄송하옵니다. 소인은 그에 대해 들은 바가 없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며 매끄럽게 대화를 피하는 태감에게선 알아낼 게 없었다. 충직한 태감이라면 주인의 내심을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법이었다.
진혁위 역시 황후의 부름이 수상하다 여겼다. 류희겸만이라도 돌려보내고 싶으나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씩씩하게 황제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니 칭병도 어려웠다.
“황후 마마께서 부르시니 걸음을 해야지. 같이 가자.”
“예. 그러하겠습니다.”
진혁위는 순순히 대답하는 류희겸의 손을 잡았다. 몸을 돌린 태감이 앞서 몇 걸음을 걷는 것을 보고는 몸을 숙여 류희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거나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명심해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류희겸을 보며 진혁위는 다시 웃었다. 거짓말쟁이 남자는 이럴 때만큼은 더없이 든든했다.
*
“영왕야 입시요.”
진혁위를 따라 황후가 머무르는 전각에 들어선 류희겸은 자신에게 와르르 꽂히는 시선을 느꼈다. 전장에서 수만의 적을 상대한 류희겸에게 열 명도 되지 않는 사람들의 눈빛이야 무섭지 않았다. 다만 자리가 주는 위압감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상석에는 황후가, 그리고 그 아래 좌우로 황자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황제에게는 열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황후 소생의 적장자인 1황자는 어려서 요절했고, 5황자와 9황자, 12황자, 13황자 역시 오래 살지 못했다. 4황자는 몸이 불편하여, 그리고 14황자와 15황자, 16황자 아직 어려서 수렵제에 참석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왕은 연금 중이었다.
나머지 여섯 명의 황자들이 황후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 모여 있다는 것은 어떤 상징이기도 했다. 태자가 기세등등한 얼굴로 진혁위를 노려보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당히 앞으로 걸어간 진혁위가 상석에 앉은 황후를 향해 예를 올렸다.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류희겸은 진혁위를 따라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지만 그뿐이었다. 대연국의 예법에 따르면 친왕의 측비인 자신은 황후가 말을 걸 때까지 입을 뗄 수 없었다.
“어서 오세요. 아드님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일 기회가 드물어, 함께 차를 마시자 불렀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황후 마마.”
“황제 폐하를 뵈었다지요. 다 이해합니다. 일어나서 편히 앉으세요.”
“황후 마마의 배려에 감읍하옵니다.”
황후는 끝내 류희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혁위가 황후가 가리킨 의자에 앉을 동안에 류희겸은 조용히 그 옆에 서며 속으로 혀를 찼다.
내명부의 수장이자 만백성의 어머니라는 황후의 수작이 저열했다.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야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7황자이자 봉작을 받은 친왕인 진혁위를 말석에 앉힌 것은 너무한 처사였다.
황후가 앉은 상석을 기준으로 오른편으로는 태자와 6황자와 10황자가 순서대로 앉았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8황자와 11황자가 앉아 있었다.
화진국이든 대연국이든 황실 예법은 엄격했다. 아무리 진혁위가 늦게 도착했다고 하지만 봉작을 받기는커녕 성인도 되지 않은 황자보다 낮게 대우하는 것은 무시와 박대가 분명했다. 그나마 다른 황자들과 똑같이 차와 다과를 내어주는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태자는 진혁위에게 비웃음을 던졌고, 6황자와 8황자는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10황자와 11황자는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얼굴을 굳혔다.
직전 생에서 황후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진혁위를 괴롭혔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래도 오늘의 일이 모영균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친정 가문의 장자가 불명예스럽게 좌천당했으니 분풀이를 하는 모양새였다.
류희겸은 직전 생에 없던 작은 변수가 만들어낸 변화가 새삼 두려웠다.
그런 류희겸의 복잡한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황자들은 예의 바르게 대화를 이어갔다. 대화를 주도한 것은 역시나 황후와 태자였다. 황후가 수렵제에 있었던 일들을 물으면 태자가 대답하고 나머지 황자들이 부연 설명을 하는 형식이었다.
황자들은 황후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지만 그래도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했다.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류희겸은 맞은편에 앉은 6황자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6황자. 훈군왕. 진서녹(陳徐綠).
그가 내일 역모를 일으킨다.
실패한 역모는 두 번이나 류희겸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역모의 잔당을 처리하는 와중에 류희겸의 출신이 문제가 되어 사약을 받았다. 그게 첫 번째 생이었다. 다섯 번째 생에서는 사지로 끌려갔다. 다행히 여섯 번째 생에서는 목숨을 부지했지만 진서녹을 향한 감정은 미묘했다.
“영왕의 귀비는 어떠한가?”
딴생각을 하던 류희겸을 부른 것은 황후였다. 다행히 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던 류희겸은 당황하지 않았다.
활에 일가견이 있는 황후는 때때로 시우회(矢友會)를 열곤 했다. 황후가 올해는 큰 눈이 오기 전에 시우회를 열 것이라며, 류희겸에게 실력이 어떠냐고 물었다.
류희겸은 거창으로 유명했지만 활도 곧잘 다루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재주를 뽐내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일이었다.
“활로 표적을 맞힐 줄은 아옵니다.”
“영왕의 귀비는 겸손하군. 그대의 실력을 시우회에서 뽐낼 기회를 드릴 테니, 준비하도록 하게나.”
“황후 마마의 말씀을 따르옵니다.”
“아, 그렇지.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영왕의 옆자리에 앉도록. 여봐라. 영왕의 귀비에게 차를 내어드려라.”
황후는 온화한 목소리로 류희겸을 챙기는 척했지만, 그래서 지금껏 일부러 세워둔 것이 더욱 티가 났다. 그러나 심약함이나 칼끝 같은 자존심과는 거리가 먼 류희겸은 아무렇지 않게 황후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궁녀가 류희겸의 탁자에 찻잔을 올렸다. 그와 함께 황자들의 간식도 바뀌었다. 작은 녹색 경단 위에 잣으로 꽃모양을 만든 모양새가 아름다웠다.
“본후가 만들었습니다. 많이 달지 않게 하려 했는데, 다들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존귀하신 분이 직접 만들었다고 하며 권하자 황자들이 저마다 경단을 입에 넣고 차를 마셨다. 류희겸은 경단은 손에 대지도 않고 차는 겨우 입술만 적셨다. 진혁위의 당부가 있기도 했지만, 황후의 모략을 경험한 적이 있기에 아무거나 입에 넣을 수 없었다.
직전 생에서 황후는 희일준과 외조카를 혼인시키려고 하면서 최음약을 술에 탔다. 그걸 류희겸이 마시는 바람에 꽤나 곤혹스러운 하루를 보냈었다.
그것 말고도 독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몇 개 더 있던 류희겸은 몸을 사렸다. 하지만 황후는 그냥 두고 보지 않고 매서운 벌처럼 정확하게 지적했다.
“영왕의 귀비는 경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황송하옵니다. 소인이 낮부터 체기가 있어 차만 마셨습니다.”
류희겸은 황후가 일부러 시비를 건다는 것을 알기에 적당한 변명거리를 내밀었다. 아프다고 하는데 굳이 먹으라고 권하는 것은 인자한 황후께서 할 법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아픈 사람을 불러내었군. 그러고 보니 영왕도 속이 안 좋습니까? 경단에 손을 대지 않았군요.”
이번에는 황후의 화살이 진혁위를 향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 소자 역시 입맛이 없어 그러하였습니다.”
“그래도 황후 마마의 정성이니 입이라도 대어라. 7제는 속이 멀쩡하지 않느냐.”
진혁위가 웃으며 부드럽게 넘어가려는 것을 태자가 걸고넘어졌다. 눈치를 보던 어린 황자들도 맛있다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류희겸은 황후와 태자가 경단을 먹이려는 것이 너무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황후의 정성이라고까지 하는데 진혁위가 먹지 못하겠노라 하기 어려워 보였다.
결국 진혁위가 경단을 하나 먹고는 황후의 솜씨를 칭찬하는 것으로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부드럽게 대화가 이어지며 황후가 만들었다는 간식이 두 번 더 나왔다. 그때마다 진혁위는 간식을 하나씩 입에 넣어야 했다.
*
류희겸이 칭병을 했기에 황후는 모임을 길게 끌지 않고 황자들을 돌려보냈다. 황후는 마지막까지 온화한 미소로 배웅했다. 하지만 류희겸은 방심하지 않았다.
“경휴원에 돌아가시면 삼킨 것을 토용하옵소서.”
황후의 전각을 빠져나와 경휴원으로 걸어가는 길에 류희겸은 진혁위의 안색을 살폈다. 경단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가능한 빨리 뱉어내야 했다.
“내 걱정을 하는 것이냐?”
“아무것도 먹지 말라 한 것은 왕야셨습니다.”
“그랬지. 그래도 귀비가 안달하는 모습을 볼 줄은 몰라서 놀랍다.”
조바심을 내던 류희겸은 태평하기 짝이 없는 진혁위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대거리를 하는 대신에 진혁위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서 경휴원으로 가야겠습니다.”
단호한 류희겸의 손길에 진혁위는 내심 놀랐다. 무심하고 세상일에 관심이 없는 듯 초연하던 류희겸이 이리 구는 것이 신기했다. 거기다 손을 잡고 끄는 모양새가 이전 생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필이면 장소 역시 무환행궁이었다. 그때는 그것이 유혹인 줄 알고 한껏 들떴었다. 지금은 유혹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귀비가 이리 적극적으로 구니까, 설렌다.”
“……?!”
“먼저 손잡아 준 것이 처음인 거 아느냐?”
“예. 처음 맞습니다. 허니 어서 가시지요.”
가벼운 농담에 류희겸이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럼에도 어서 가야 한다고 비장하게 구는 바람에, 진혁위는 웃고 말았다.
“7제. 잠시 나 좀 보세.”
그렇게 실랑이를 하며 몇 걸음을 걸어가던 두 사람은 진혁위를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뒤쪽에서 6황자 진서녹이 다가오고 있었다. 류희겸은 슬그머니 진혁위의 손을 놓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6형께서 무슨 일입니까?”
“부탁할 게 있어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어딘가 건조한 대화에 류희겸은 긴장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원래 어떤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진서녹이 무엇을 부탁하려는지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네 정패를 잠시 빌려다오. 황제께 진상할 산호 때문에 정패를 보냈는데, 문주(文州)에 급히 갈 일이 생겼다. 관선만 타면 되니, 잠시만 쓰자.”
황족의 정패가 있다면 진서녹의 말대로 관선에 사람을 태워 보내는 것은 별것 아니니, 두 사람의 친분이 상당하다면 잠시 빌려주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정패를 빌려준 것 때문에 진혁위는 역모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았다. 진서녹이 진혁위의 정패를 이용해 무환행궁에 역모를 실행할 괴한들을 들이기 때문이었다.
직전 생에, 진혁위와 훈군왕 진서녹은 정치 행보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진혁위도 진서녹도 태자나 기왕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당을 형성하지도 않은 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두루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진혁위가 거리낄 것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다녔다면, 진서녹은 몸을 낮추고 검소하고 조용하게 지냈다.
황자의 위세는 보통 외가의 지지와 황제의 총애로 갈렸다. 두 개를 모두 가진 진혁위와 달리 두 개 모두 가지지 못한 진서녹은 황제의 친자들 중에서 제일 눈에 띄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서녹에게 야심이 없다는 건 아니었다. 그는 태자나 기왕만큼이나 황제가 되고 싶어 했다. 아니, 정확하게 야심이라기보다는 복수에 가까웠다.
진서녹의 모비인 윤비(贇妃)는 대연국 서쪽 끝에 있는 소국인 희교국(禧喬國)의 공주였다. 대연국과 희교국의 화친과 사대의 상징으로 황제와 혼인한 윤비는 미색이 대단해서 많은 총애를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희교국이 변방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곤경에 처하여 도움을 청했을 때, 황제는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희교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가족을 잃은 윤비는 시름시름 앓다가 명을 다했다. 그게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진서녹은 살아남은 외가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수렵제에서 역모를 일으키다 실패하였다. 그리고 류희겸은 출신이 불길하다는 이유로 역모 후에 사약을 받았고, 진혁위는 역모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아 자결했다. 순서로 따지면 류희겸이 사약을 받은 것보다 진혁위의 자결이 더 먼저였다.
직전 생에서는 우연찮게 진혁위와 진서녹의 만남을 막았지만 이번에는 우연에 기댈 수가 없었다. 진혁위와의 혼인을 통해 운명을 함께 하게 되었으니 역모 따위에는 휘말리지 않아야 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린 류희겸은 까다로운 후궁을 흉내 냈다. 신선한 바다 새우가 먹고 싶다 하여 진혁위가 정패를 쓰게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진혁위의 손에는 정패가 없었다.
“저 역시 남해에 구할 것이 있어 정패를 보냈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어쩔 수 없군. 내 다른 방법을 찾아보마. 나중에 보자.”
진혁위가 빈손을 내어 보이자 진서녹은 깔끔하게 물러났다.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류희겸은 미리 방비한 자신의 준비성을 내심 칭찬했다.
“다시 손을 잡아라.”
“……?”
혼자 뿌듯해하던 류희겸은 진혁위의 명령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잡아?
“왜 놀라느냐? 조금 전까지는 내 손을 잡고 끌고 가려고 했으면서.”
“그야 경휴원에 가려고 그랬습니다.”
“그래. 빨리 가려면 얼른 잡아라.”
진혁위가 노래하듯 말하며 손을 내밀었지만 류희겸은 잡지 못했다. 이번에는 황후의 태감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늙은 태감은 황후가 류희겸을 위해 하례품을 준비했는데, 깜박하고 전해주지 못했다며 다시 찾는다고 알렸다.
사람 괴롭히는 방법도 다양하다고 생각하며 류희겸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황후의 하례품은 하얀 바탕에 푸른빛이 도는 최상급 옥비녀였다. 하례품과 함께 황후는 덕담도 잊지 않았기에 류희겸이 진혁위와 숙소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다.
마음이 다급해진 류희겸은 옥안인을 불러 진맥 후에 토용할 약을 지으라고 명했다. 쓴 약을 싫어하는 진혁위가 약사발을 손에 든 채 툴툴거렸다.
“환자 취급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을 드셨는지 알 수 없으니, 조심하는 게 낫습니다.”
“이리 민감하게 굴면, 내가 죽을병에 걸린 것 같지 않느냐?”
진혁위는 약을 안 마시려고 버텼지만 류희겸은 그걸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류희겸에게도 자신이 민감하게 굴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열다섯 살 생일을 앞두고 같이 자라다시피 한 종복이 독을 먹고 죽은 적이 있었다. 백녕 류가의 가주 자리를 두고 한참 싸울 때였다. 종조부들 중에 한 명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독을 쓴 사람이 누군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다음부터 류희겸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독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과거에 소인의 종복이 독을 먹고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절명한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입니다.”
“종복이 아니라 귀비가 먹었어야 할 독이었나 보군.”
“예. 허니 어서 마시십시오.”
“하나 더 묻겠다. 독을 쓴 자가 누구인지 아느냐?”
“아마도 제 종조부들 중에 한 명이었을 겁니다.”
뜻밖의 질문이었지만 류희겸은 순순히 대답했다. 가족들끼리 다툼을 하다 죽이려고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종조부?”
“류가는 화진의 건국 공신 가문입니다. 어린 가주를 치워버리고 부와 명예를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어른들이 있었습니다.”
“다들 욕심이 많지.”
“아직 반 남았습니다. 다 마시십시오.”
류희겸은 진혁위가 약을 다 마시지 않고 그릇을 내려놓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결국 진혁위가 그릇을 비우고, 먹은 것을 다 게워내는 것까지 매의 눈으로 감시했다. 평소 세심함과 거리가 먼 류희겸이었지만,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는 성격이었다. 결국 진혁위는 약을 다 마셔야 했다.
“귀비가 이렇게 집요할 줄은 몰랐다.”
“소인도 왕야께서 쓴 약을 싫어하시는지 몰랐습니다.”
“흥. 이런 거 안 먹어도 다 낫는다.”
물로 입 안을 헹구고 영견으로 닦은 진혁위가 투덜거리는 것을 류희겸은 그러려니 했다. 그나마 진혁위의 안색에 큰 변화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황제와 황자들과의 석반 약속이 있던 진혁위는 기다리지 말라는 말을 하고는 경휴원을 나섰다. 덕분에 류희겸은 오랜만에 홀로 잠자리에 들었다.
*
“마마. 우소진이옵니다.”
류희겸은 잠귀가 밝았다. 깊게 잠들었지만 외부의 소란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특히 생을 반복한 후에는 더욱 그랬다. 자신을 부르는 우소진의 목소리에 류희겸은 단번에 눈을 떴다.
등불이 켜져 있는 방안은 아직 어둑어둑했다. 풀벌레 우는 소리만 들어도 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야심한 시각에 우소진이 자신을 부르는 이유를 생각하자 정신이 번쩍 들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입니까?”
“왕야께서 찾으십니다.”
“설마, 지금 돌아오신 건가?”
“아닙니다. 돌아오신 지는 꽤 되셨습니다.”
말을 얼버무리는 우소진에게서 불길함을 느낀 류희겸은 천개를 걷어냈다. 늦은 밤에도 옷을 갈아입지 않은 우소진이 침실 입구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왕야께서 진정 나를 찾으시는가?”
“예.”
여전히 우소진이 말을 아꼈기에 류희겸은 무슨 일이냐고 따지는 대신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소진은 진혁위의 우직한 충복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모르기에 베개 밑에 둔 비녀를 소매 속에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앞장서게나.”
“날이 차갑습니다. 옷을 걸치십시오.”
“바로 지척인데 번거롭네. 가지.”
류희겸은 머리를 풀고 침의만 입은 채 우소진을 따라 움직였다. 진혁위가 머무는 전각은 경휴원의 내원을 가로지르면 금방이었다. 늦가을의 밤바람은 차가웠지만 침의로 잠깐 버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구름 하나 없는 밤하늘에 조금 이지러진 달이 환해서 굳이 행등까지는 필요 없었다.
우소진의 안내를 받아 정방의 침실 안으로 들어선 류희겸은 단번에 이상함을 눈치챘다. 사람이 들었는데도 침상에 누워 있는 진혁위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소진을 보자 그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천천히 침상으로 다가가자 어른거리는 주황빛 등불 아래 하얗게 질린 진혁위의 얼굴이 보였다. 안색이 나쁜 것이 어딘가 아픈 것 같았다.
진혁위 역시 자신 못지않게 잠귀가 밝았다. 그런 그가 사람이 다가와도 모른다는 것은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언제부터……. 아니, 옥안인은?”
“이미 다녀갔습니다. 돌아오신 직후에 체기가 있다 하시어, 약을 쓰고는 드신 것을 다 토하셨습니다. 한숨 주무시면 낫는다 하였는데 제법 크게 앓으십니다.”
“체증이라고?”
“예. 옥안인의 말로는 장의 힘이 약해져 그렇다 합니다.”
체증이 심하면 장이 꼬여 사람이 죽기도 했다. 하지만 류희겸은 황후가 준 간식이 문제였을 거라고 직감했다.
“왕야께서 깊이 잠드신 것 같은데, 나를 찾으신 게 맞는가?”
“앓으시는 중에 마마의 명자를 부르셨나이다.”
“내 이름을?”
“예. 왕야께서는 어려서부터 원체 튼튼하시어 이렇게 앓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어린 시절에 다리가 부러진 것 말고는 흔한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습니다. 헌데 이리 혼몽하신 와중에 귀비 마마를 부르시니, 황공하옵게도 소인이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사내가 약할 때 부르는 이름이 진심이지 않겠습니까? 왕야께서 중간중간에 한 번씩 정신을 차리시니, 그때까지 부디 곁을 지켜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주인을 걱정하는 우소진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진혁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있어봐야 도움이 될 건 없었다. 옥안인을 부르라고 할 요량으로 입을 막 열 때였다.
“……희겸. 류희겸.”
아주 작게 부르는 목소리에 류희겸은 옆을 돌아보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남자가 자신을 부른 게 맞았다.
그제야 남자가 여태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귀장군. 귀비.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이 아니라 이름을 불리는 건 꽤나 이상했다,
“보십시오. 귀비 마마를 찾으시지 않습니까.”
“그렇군. 내가 자리를 지킬 터이니, 차가운 물과 수건을 다시 준비하게나.”
진혁위는 열이 꽤 심한 듯했다. 지금까지 우소진이 그를 돌본 듯 탁자에는 물이 담긴 대야와 젖은 수건이 있었다. 류희겸이 명령을 내리자 우소진이 그러겠다며 대야와 수건을 챙겨 나갔다.
진혁위와 둘이 된 류희겸은 침상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직전 생에서 진혁위의 팔에 붕대를 감아준 적이 있기는 했지만 간호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희겸.”
마치 속삭이는 듯한 부름에 류희겸은 흠칫 놀랐다. 무슨 꿈을 꾸기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지 궁금해졌다.
*
오래되어 빛이 바랜 기억은 어떤 식으로든 왜곡되기 마련이었다. 선명하게 반짝이거나, 때로는 어두침침하게 바뀐 기억들이 마치 낙인처럼 새겨져서 사라지지 않았다.
진혁위에게 류희겸이 그랬다.
스무 살의 진혁위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황위도 정쟁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였다. 제멋대로 살았다가 죽어야 할 때가 오면 후회 없이 죽겠다고 광오하고 치기 어린 뜻을 품었다.
그때 류희겸을 보았다. 화진국이 자랑하던 귀장군이 피에 젖은 얼굴로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에 가슴이 뛰었다. 너무나도 생소한 감정이었기에 처음에는 그것이 호승심인 줄 알았다.
당시 대연국에서 진혁위와 대등하게 검을 겨룰 상대는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양인의 용력을 타고난데다 꾸준한 노력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등장한 고수에 흥분한 진혁위는 하례품을 잔뜩 챙겨 류희겸을 만나러 갔다. 류희겸은 비무를 피하려고 했지만 진혁위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결국 비무 약속을 받아내고 돌아오는 길에 괜히 들뜬 기분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 후에 다시 류희겸을 만난 것은 열흘 후에 열린 수렵제였다. 말에 올라 천천히 이동하던 진혁위는 희일준의 옆에 서 있던 류희겸과 눈이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진혁위를 알아본 류희겸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무해하고, 무의한, 별것 아닌 인사였다. 하지만 진혁위는 그 광경을 좀 더 특별하게 기억했다.
늦가을의 하늘은 푸르렀고, 태양 빛은 옅은 온기를 품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원은 메마른 풀로 뒤덮였다. 기마가 부산히 움직이며 먼지를 만들어내던 그곳에, 류희겸은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동그란 머리통이, 날카로운 턱 선이, 늘씬한 체형이, 그리고 그늘진 눈매가 선명히 담겼다.
인생에 다시없을 아주 특별한 순간이었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지나쳤다. 다음날 류희겸이 손을 잡아끌지 않았더라면 그저 비무에 대한 기대감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무환행궁 밖에 임시로 설치한 군영에서 지내고 있던 류희겸을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그날, 희일준과 함께 무환행궁을 찾은 류희겸이 자신의 손을 잡아 으슥한 곳으로 이끌었다.
잠시 숨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류희겸의 변명에 진혁위는 웃었다. 남색가라고 소문난 자신의 손을 잡아 인적이 드문 외진 곳으로 이끈 이유는 뻔했다. 심지어 인기척을 살피면서도 꽉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핑계가 너무 허술하군.’
‘……?’
‘본왕이 사내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반쯤은 농이었다. 하지만 섬세한 속눈썹 아래 날카로운 눈동자가 혼란함에 흔들리는 모습에 괜히 마음이 동했다. 자신이 사내를 좋아한다고 소문이 나 있긴 했지만, 실은 사내도 여인도 관심이 없었다. 누구나 예쁘고 아름답다 하는 이를 보아도 시큰둥할 뿐이었다.
그러나 류희겸의 말간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매서운 눈 끝에 입술을 대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건 아주 낯선 감정이었다. 가슴이 아프고, 두근거렸다.
‘그게…….’
‘본왕이 제법 눈치가 빠른 편이다.’
진혁위는 류희겸의 의도를 제멋대로 넘겨짚으며, 그의 눈가에 입술을 대었다가 떼었다. 순식간에 얼음처럼 굳어버린 류희겸이 손을 놓았지만 이번에는 진혁위가 붙잡았다.
‘왕야. 그런 것이―’
‘이제 와 감히 본왕을 능멸하려느냐?’
거절의 말을 잘라낸 진혁위는 활짝 웃으며 류희겸을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잡은 손에는 더욱 힘을 주었다. 류희겸에게서 당혹스러움을 읽었지만 그냥 무시하고 입술을 맞댔다.
숨도 쉬지 못하고 긴장한 류희겸의 입술은 예상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입맞춤은 처음이었기에 그저 입술만 닿았다가 떨어져야 했다. 왜 지금껏 제대로 입맞춤도 해보지 않았을까 후회하던 순간이었다. 그래도 휘둥그레 눈을 뜬 채 어쩌지도 못하고 있는 류희겸의 모습을 보자니 흥겨워졌다.
‘오늘 밤에 본왕의 전각으로 와라. 사람을 보내겠다.’
‘아닙니다. 왕야를 능멸하려던 것이 아니고, 정말 잠시 숨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유혹한 게 아니라고?’
‘예. 진짜입니다.’
필사적인 류희겸의 모습이 웃기면서도 아쉬웠다. 조금 더 우겨볼까 했지만 아니라는 사람에게 매달리는 것은 별로였다.
‘아쉽군.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는데 말이다.’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가보겠습니다.’
진혁위는 뒷걸음질을 치는 류희겸을 붙잡지 않았다. 아직은 여물지 못한 감정을 제대로 자각하지는 못한 채, 입맞춤을 연습해 봐야 하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을 했었다.
간질거리고 반짝거리는 기억에 행복해지는 것은 잠깐이었다. 꿈이라는 것이 언제나 그렇듯 예고도 없이 다른 기억을 보여주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아침이었다. 검은 재가 날리는 호수는 음울했다. 누렇게 시든 갈대 사이에 피와 물에 젖은 류희겸이 쓰러져 있었다.
배신을 하고 도망친 그를 붙잡으면 죽여버리리라 이를 갈았다. 하지만 막상 다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믿기지가 않았다. 얼음처럼 차가워진 그를 붙잡고 외쳤다.
‘류희겸. 눈을 떠라!’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렸다. 이렇게 허망하게 죽으면 용서하지 않을 테다. 염호부가 있으니 다친 것쯤이야 금방 나을 수 있다.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죽은 것처럼 축 늘어져 있던 류희겸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나 힘이 풀린 눈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입술이 달싹거리긴 했지만 검붉은 핏물만이 새어 나왔다.
‘버텨라. 제발!’
간절한 바람도 소용없었다. 작은 경련을 끝으로 류희겸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끔찍한 악몽이었다.
자신의 의지가 통하지 않는 꿈은 최악의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죽어가는 그를 붙잡고 무기력하게 이름을 외쳤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먹먹하게 목이 막혔다.
미칠 것 같은 악몽을 끝내고 싶었다.
화화몽(火花夢)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