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二章 (3/22)

二章

황제가 예경대부를 불러 진혁위와 류희겸의 혼사를 명한 것은 만월제전이 끝나고 나흘 후였다. 성지를 받아 든 예경대부로부터 시작된 영왕의 혼사 소식은 황궁의 담을 넘어 태경의 거리에 퍼졌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영왕과 귀장군의 결합이 그저 호사가의 입에 오르내릴 흥밋거리가 아님을 알아챘다. 류희겸이 양번국을 되찾아 바치겠다고 황제께 진언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하게 퍼져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황제가 혼인을 허락한 것은 영왕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고 예측했다.

그것과 별개로 황제가 총애하는 영왕의 혼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영왕의 첫 번째 혼례를 축하하는 하례품이 영왕부로 밀려들었다. 상대가 화진국의 장군 출신이라고 하지만 황제가 성지를 내린 시점에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황제가 하례품을 보내자, 다들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왕의 모비인 혜비를 비롯한 후궁의 비빈들이, 황실의 종친이, 그리고 영왕의 형제들이, 태경에 살고 있는 문무백관과 명문가의 가주들이 하례품 목록을 작성했다.

혼례식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영왕부도 단장을 하느라 하인들이 바빠졌다. 그리고 그런 외부의 소란스러움과 별개로 진혁위는 느긋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표국의 상인이며, 태경의 물밑에서는 모르는 게 없다는 정보상인 남자는 진혁위의 사형 중에 한 명인 채제승(蔡悌承)이었다.

십여 년 전, 어린 황자였던 진혁위는 활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함께 스승에게 배웠던 사형제들 중 채제승은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前) 시강학사(侍講學士)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진혁위처럼 떠돌이 병이 있었다. 급제를 하고도 출사하지 않고 전국을 유람하다 무림과 연이 닿아 정림표국(靜林鏢局)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능력이 출중하여 출사를 기대했던 아들이 무림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전 시강학사는 사흘을 자리보전하고 누웠다.

여러 가지 사건이 겹치면서 결국 채제승은 채가에서 내놓은 자식이 되었지만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잘 지내고 있었다.

진혁위의 옆자리에 앉은 채재승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명하신 대로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왕야.”

“뭐야. 원래 하던 대로 해.”

“소인이 아주 기분이 좋아서 말입니다.”

“사형. 소름 끼쳐.”

“하하하. 기뻐서. 그렇다. 기뻐서.”

서글서글한 미남인 채제승은 진혁위와 막역한 사이였다. 명문가에서 내놓은 자식과 황제의 총애를 받는 왕야였지만 두 사람에게는 공동의 적이 있었다.

절치부심 기다려왔던 복수가 이제 시작된다는 사실에 채제승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채제승은 태자에게 원한이 있었다. 사 년 전, 남양(南陽)으로 원행을 간 태자의 기행으로 인해 겨우 두 살밖에 되지 않은 첫 딸을 잃었다. 그리고 손녀를 보호하려던 장모 역시 죽고 말았다. 어머니와 딸을 잃고 큰 화상까지 입은 그의 부인은 시름시름 앓다가 거의 죽을 뻔했다.

건주(建州)로 표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채제승은 집안에 들이닥친 횡액에 망연자실했다. 태자가 너무 까마득한 신분이라 복수가 요원한 것이 원통했고 부인이 죽을까 봐 가슴을 졸였다.

그때 마침 진혁위가 채제승을 만나러 남양으로 찾아와 주었다. 진혁위는 아직 봉작은 받지 못했으나 7황자의 권세로 영약을 사들이고 은퇴한 태의를 불러 화상을 입은 채제승의 부인을 돌보게 했다.

그리고 채제승은 언젠가 모두 되갚아 주겠노라 약속한 진혁위와 손을 잡았다. 진혁위 역시 황후의 손에 외가가 반파되다시피 했기에 같은 아픔이 있었다.

남양에서 태경으로 거점을 옮긴 채제승은 차근히 태자와 기왕의 약점과 비밀을 끌어모았다. 사 년을 기다린 후에야 진혁위의 명령이 떨어졌다. 단번에 태자를 끌어내릴 수 없기에 기왕의 손을 빌어 서로를 깎아 먹게 만들 계획이었다. 이른바 차도살인(借刀殺人)이었다.

칼을 갈아온 복수를 이제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채제승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발했다.

“이제 시작이니까 물어보는 건데, 결정을 내렸어?”

채제승은 가장 중요한 단어를 빼고 물었다. 옥좌. 천자의 자리.

채제승과 진혁위는 사 년 동안 꾸준히 태자와 기왕의, 그리고 그들의 측근 정보를 모았다. 계획대로 손을 쓰기만 한다면 태자와 기왕 모두 끝낼 수 있었다.

그리되면 다른 황자들에게도 기회가 생겼다. 허나 진혁위는 제좌(帝座)에 대한 야망을 보이지 않았다.

황자라고 해서 모두가 황제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가 되지 못하는 황자는 열에 아홉은 어떤 이유로든 죽게 되어 있었다. 진혁위는 대외적으로 황위 싸움에서 물러났으나, 송곳처럼 튀어나온 그를 다른 황자들이 그냥 두고 보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일 년 전, 채제승이 물었을 때, 진혁위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때 이미 진혁위는 서역을 오가는 상단의 주인이었다. 진혁위의 옥좌를 노릴지, 대연국에서 사라질지 저울질하고 있다는 말에 채제승은 고개만 끄덕이고 넘어갔다.

하지만 이제 제대로 시작했으니 마음이 달라진 건가 궁금했다. 진혁위가 제좌를 노린다면 채제승은 온 마음을 다해 보필할 생각이었다.

“아직이야.”

“흐음. 혼인을 한다기에 마음이 바뀌었는 줄 알았지.”

채제승의 예상과 달리 진혁위는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채제승은 진혁위를 살짝 떠보았다.

태경에서 한 손에 꼽히는 미남인 진혁위는 미녀를 멀리했다. 그렇다고 미동을 가까이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귀장군이라고 불리는 사내를 귀비로 봉하였다는 것은, 또 다른 혼인을 위한 준비일 수도 있었다.

황족도 귀족도 모두 혼인을 통해 세를 불린다. 미래를 준비하려면 큰 힘을 가진 장인을 얻는 게 좋았다. 하지만 진혁위가 코웃음을 쳤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귀비 마마께서 황제 폐하께 양번국을 되돌려 드리겠노라 공언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그 공이 모두 영왕의 것이 될 것이라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던 걸?”

“흥. 황제 폐하의 뜻인 걸.”

“황제 폐하께서 귀비와 혼인하라 명하셨다고?”

“내가 혼인을 하겠다고 하니, 이제부터 집안일을 도우라고 하셨어. 귀비의 다리를 잘라 내원에 두겠다고 했는데도 굳이 류희겸의 이름을 쓰겠다고 하시니 별수 있나.”

진혁위가 던지는 몇 가지 정보에 채제승은 머리를 굴렸다. 소문대로 황제가 진혁위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황제가 황자들의 힘의 균형을 다시 맞추려고 한다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었다.

다만 채제승이 의문인 것은 류희겸의 존재였다. 만월제전에서 화진국 장군 출신이었던 류희겸의 활약은 유명했다. 그리고 류희겸을 박살 낸 진혁위가 그를 영왕부로 데려갔다는 것 역시 저자에서 한동안 시끌거렸던 이야깃거리였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는 귀장군과 영왕의 혼인을 황제가 명하였고, 또 그다음에는 류희겸과 태자부의 시위들이 비무를 한다고도 알려지면서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

조각난 정보들을 하나씩 모으던 채제승은 크고 작은 사건을 관통하는 뭔가가 있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아직 갈피가 잡히지 않아 진혁위에게 뭔가를 묻기는 애매했다.

채제승은 곧 본업에 집중했다.

“하여, 결행일은 언제로 할까?”

“가능한 빨리.”

“당장은 어려워. 서도평이 워낙 새가슴이라 고발을 하게 만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테니.”

“그건 괜찮아. 신중히 해. 다시없을 기회이니까.”

장수를 노리려면 말을 쏘라는 격언에 따라 채제승과 진혁위는 태자의 외숙부인 좌승상 모태심(牟泰芯)을 제일 처음 노렸다.

황후의 남동생인 모태심은 태자의 가장 큰 지지자였다. 처세에 능한 좌승상에게는 큰 흠이 없었다. 첫째는 급제하여 태자의 시위가 되어 승승장구 중이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문제가 있었다.

태자의 외사촌이 되는, 그리고 좌승상의 차자인 모영록(牟潁麓)은 명문가의 자제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쁜 부류였는데, 또래의 귀족 자제들과 어울려 사고를 치고 다녔다. 특히 태경 인근의 불사나 신사의 귀물을 훔치는 것을 몇 년 전부터 즐겨 했다.

그의 패거리에 감찰어사(監察御史)의 독자인 서도평이 있었다. 동갑에 어려서부터 친구인 두 사람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정확히는 심약한 서도평이 막무가내인 모영록에게 끌려다니고 있는 형국이었다.

서도평은 내심 모영록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모영록이 서도평을 샌님이라고 몇 번 흉을 보았는데, 그게 본인의 귀에 들어갔던 것이다.

채제승이 할 일은 서도평을 부추겨 모영록이 불사에서 귀품을 훔쳤다는 것을 고발하게 하고, 두 사람이 다투게 하는 것이다.

몸싸움 끝에 모영록이 서도평을 죽이게까지 하면 그다음은 쉬울 것이다. 기왕의 가까운 측근의 입을 빌려 모영록이 불사와 신사의 귀물을 훔친 것과, 좌승상이 그걸 알면서도 귀품을 몰래 처분한 것까지 고발해 탄핵하게 하면 그만이었다.

“그래. 확실하게 해야지. 그리고 부탁이 있습니다. 왕야. 소인을 귀비 마마께 소개시켜 주십시오.”

“싫어.”

“아니, 왜 그래? 얼굴은 뵈어야지. 혹여 태경 길거리에서 험한 일을 당하실 때,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도움을 드려야 하지 않겠냐.”

“험한 일을 당하기는. 길거리 왈패들은 다 때려눕힐 텐데.”

“세상일이란 모르는 법이다?”

“모르기는 뭘 몰라.”

진혁위는 뚱한 얼굴로 투덜거리면서도 채제승의 말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채제승은 이름난 표국의 주인이었고 태경의 정보를 꽉 쥐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류희겸과 채제승이 마주쳐야 할 순간이 온다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터였다.

잠시 콧잔등을 찌푸린 진혁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시각 류희겸은 영왕의 개인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류희겸이 주력으로 쓰는 무기는 거창이었다. 하지만 출신이 출신인 만큼 그에게 쇠붙이가 달린 무기는 주어지지 않았기에 긴 목봉을 들어야 했다.

정확한 보법을 밟아 무게 중심을 이용해 휘두르는 목봉에서는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기본 자세를 한 차례 끝낸 류희겸은 한 손으로 목봉을 짚고 서서는 숨을 골랐다. 하지가 지나자 날씨가 본격적으로 더워졌다. 크게 몸을 움직였더니 얼굴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마마. 수건입니다.”

대기하고 있던 우풍이가 잽싸게 다가와 수건을 내밀었다. 부드러운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류희겸은 연무장 밖으로 나가 준비된 냉차를 마셨다.

류희겸이 영왕부에서 눈을 뜨고는 닷새가 지났다. 귀비 마마로 불린 것도 닷새째였다.

옷도 신도 없이 지낸 것은 잠시뿐이었다. 진혁위는 약속을 지켰다. 류희겸에게는 옷도 주어졌고 영왕부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진혁위의 개인 연무장도 언제든 이용해도 좋다고 허락이 떨어졌다.

류희겸은 연무장에서 창술을 연습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 닷새 동안 류희겸은 귀비 마마로 살았다. 진혁위가 직접 붙여준 시종들은 유능하고 조용했다.

진혁위는 닷새 내도록 그를 귀비라고 불러댔다. 류희겸은 여전히 진혁위의 침전에서 지냈다. 조반과 석반은 같이 먹었고, 진혁위는 한 번씩 차를 마시자고 류희겸을 불렀다. 닷새 사이에 두 번 더 몸을 섞었다. 이전 생과는 다른 흐름이었지만 류희겸은 편히 지냈다.

정확히는 편안하다기보다, 미리 고민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대로 조용히 지내다가 진혁위를 따라 가을 수렵제에 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다음부터가 진짜였다.

그래도 한 번 한 혼인은 무를 수가 없었다. 강력한 가문을 배경으로 두었다면 이혼을 시도할 수 있었겠지만, 대연국에서 류희겸은 노비 출신으로 면천받은 자에 불과했다. 황자를 상대로 이혼할 수 있을 리가.

이렇게 된 것, 영왕의 귀비라는 신분을 복수에 도움이 되게 만들어야 했다. 혼인은 진혁위와 자신의 운명을 한데 묶었다. 앞으로 운명을 함께할 진혁위와의 관계를 적당히 유지해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귀비라고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자각이 없었다. 소첩이라는 말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진혁위가 소첩이라 하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계속 신경 쓰였다. 진한재를 죽일 때까지는 간도 쓸개도 모두 빼주고 속없이 굴 수 있었지만,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었다.

“마마. 더 필요한 것은 없으세요? 물을 더 드릴까요?”

류희겸은 우풍이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아이의 다정한 배려에 류희겸은 괜찮다고 하고는 다시 연무장 가운데 섰다.

봉을 부여잡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우풍이에게 여종이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여종의 이름은 맹진화(孟眞花)였다. 침전을 관리하는 여종 중의 한 명으로 청초한 미인이었다.

류희겸은 봉을 가볍게 휘두르면서 맹진화가 우풍이를 따로 불러 연무장 구석에서 무어라 말을 하는 것을 살폈다. 거리가 있어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깨를 옹송그린 우풍이의 태도를 보자면 혼이 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귀비라고 불리고는 있으나 권한도 위엄도 없는 류희겸이 하인들 사이의 일에 나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저 여종의 태도가 바르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우풍이가 잘못을 했다면 자신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 혼을 내는 게 옳았다.

아직 혼인은 하지 않았다고 하나 영왕부 내에서 귀비라고 불리는 류희겸의 지위는 진혁위 다음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런데도 보라는 듯이 훤히 트인 곳으로 데려가서 류희겸의 시중을 들고 있는 우풍이를 핍박하는 것은 의도가 너무 빤했다.

입장이 입장인지라 류희겸은 당장에 개입하는 대신에 어떻게 될지 가만히 두고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맹진화가 우풍이와 함께 연무장 쪽으로 다가왔다.

“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무슨 일이냐?”

맹진화가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자 류희겸은 목봉을 멈추었다.

“죄송하지만 우풍이를 데려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일이 생겼다고?”

“우풍이가 본인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풍이가 무엇을 소홀히 했지?”

류희겸의 끈질긴 질문에 맹진화는 조금 당황했다.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응당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당황은 곧 짜증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황제의 성지를 받았다고는 하나 타국 출신의 죄인이라면 조용히 숨죽여 지내야 했다. 그런데도 제 주제도 모르고 연무장을 쓰며 웃전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꼴사나웠다.

마음 같아서야 알아서 뭐 하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래도 웃전을 상대한다는 이성은 있었다. 류희겸을 귀비라고 부르며 대우하는 것은 영왕부의 주인인 진혁위였다.

빠르게 화를 억누른 맹진화는 부드러운 미소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말투가 뾰족해지는 것은 막지 못했다.

“아랫것들의 일에는 험한 것이 많으니, 귀하신 귀비 마마께서는 모르시는 게 좋습니다.”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하게 만들 것이냐?”

맹진화의 대답은 오만방자했고 류희겸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원래 류희겸은 모시기 편한 주인이었다. 하지만 명문가에서 나고 자랐고, 군대의 엄격한 규율에 익숙해 있기에 얼마든지 까다롭고 무섭게 굴 수 있었다.

류희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에 압박을 받은 맹진화는 살짝 겁을 먹었지만 곧 비웃음으로 이겨냈다. 실권이 없는 주인의 허세만큼 애처로운 것도 없었다.

“우풍이가 후조방 뒤뜰 담당인데, 그곳이 어질러져 있었습니다.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나 가장 쉬운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있으니, 부디 귀비 마마께서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매끄럽게 혀로 우풍이를 비난하고 류희겸을 바보로 만든 맹진화는 속으로 웃었다. 후조방 뒤뜰이 어지럽혀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그저 나뭇잎 몇 개 굴러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당당히 거짓을 고하는 맹진화를 움직인 것은 시기와 질투, 그리고 악의였다. 류희겸을 괴롭힐 수 없으니, 그의 시중을 들고 있는 우풍이를 걸고넘어진 것이다.

맹진화는 진혁위의 모비인 혜비를 모시던 궁녀였다. 가문은 보잘것없었다. 신분 높은 상급궁녀가 아니라 허드렛일을 주로 하는 시비였다. 그럼에도 미색이 출중해 혜비가 곁에 두고 아끼다 못해, 진혁위가 왕작을 받아 왕부로 나갈 때 맹진화를 같이 보냈다. 혜비는 맹진화가 진혁위의 시첩이 되기를 의도한 것이다.

처음 혜비의 의중을 전해 들었을 때, 맹진화는 자신감이 넘쳤다. 혜비의 처소인 정수궁(情修宮)에서 그녀보다 예쁜 궁녀는 없었다. 시시한 가문 출신임에도 반반한 얼굴을 가졌기에 귀인의 눈에 띄어 팔자를 바꾸는 것이 소원이었다.

한때는 황제의 눈에 들어 성은을 입어 당당히 후궁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날이 지날수록 늙고 까다로운 황제보다는 젊고 훤칠한 영왕의 시첩이 더 낫다고 여겨졌다.

그렇게 부풀었던 맹진화의 희망은 금방 깨져 버리고 말았다. 혜비의 배려로 영왕부의 침전에 배치되기는 했지만, 영왕은 맹진화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영왕부에 온 지 삼 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계속 시비 일만 하고 있었다. 영왕의 총애도, 부귀영화도 모두 허무한 꿈속의 일이 되고 말았다.

사정을 안 혜비가 혼사를 알아봐 주겠다고 했지만 맹진화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영왕부에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시간만 지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이번에 류희겸이 너무나도 손쉽게 귀비가 되는 것을 보고는 굴욕감을 맛보았다. 타국 출신의 사내를 귀비로 삼겠다는 영왕을, 그리고 그것을 허락한 황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

태경에서 난다 긴다 하는 명문가의 규수라면 그나마 이해라도 할 수 있었다. 자신은 시첩도 되지 못하고 힘든 일을 하고 있는데, 역모를 저질렀던 사내가 귀비라고 뻔뻔하게 얼굴을 쳐들고 있으니 속이 쓰리다 못해 화가 났다. 그동안 켜켜이 쌓였던 불만이 불손한 언행으로 드러났다.

류희겸은 맹진화의 속사정을 알지 못했지만 악의를 읽어낼 수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못 본 척하고 넘어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었다. 하지만 불안한 눈빛으로 눈치만 보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우풍이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제 일을 못 하는 시종은 쓸모가 없는 법이지. 같이 가서 보자. 얼마나 어질러져 있는지 확인하고 우풍이에게 벌을 주겠다.”

“꼭 귀비 마마께서 가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풍이야. 앞장서라. 거기, 심양설(沈良雪). 이쪽으로 오너라.”

류희겸은 때마침 연무장 옆을 지나가는 여종을 불렀다. 심양설 또한 영왕의 침전에서 일하는 중년의 상급시녀였었다.

바깥일을 주로 하는 맹진화와 달리 영왕부의 수모(手母)로 진혁위의 옷시중을 드는 그녀의 직급은 높았다. 황제의 교지를 받아 옥첩에 귀비로 이름을 올린 류희겸의 부름에 심양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귀비 마마. 부르셨습니까?”

“잠시 시간 있느냐?”

“예. 있사옵니다. 무슨 일이시옵니까?”

“같이 가야 할 곳이 있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잠시만 시간을 내거라. 풍이야. 가자.”

우풍이가 눈치를 보며 길을 안내했다.

연무장에서 후조방의 뒤뜰까지는 금방이었다. 맹진화가 어질러져 있다고 주장한 뒤뜰은 깔끔하기만 했다.

“어디가 어질러져 있느냐?”

“누군가, 그사이에 치웠나 봅니다.”

류희겸의 추궁에 맹진화는 재빨리 변명거리를 만들어냈다. 영왕부의 시종들은 부지런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치웠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누군지 찾아서 치하를 해야겠다. 제 일도 아닌데 부러 손을 썼으니 장한 일이지. 맹진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굳이 찾으시지 않으셔도―”

“굳이 찾겠다면?”

말을 중간에 자르며 압박하는 류희겸의 매서운 시선에 맹진화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도 않고 깐깐하게 구는 류희겸이 꼴사납다고 여겼다. 그래도 겉으로는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냈다.

“영왕부의 시종들은 상을 바라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일부러 거짓을 고한 것은 무엇을 바라고 한 일인지 묻겠다.”

뻔뻔하게 대꾸하던 맹진화가 그제야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중간에 합류한 심양설은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눈치채고는 속으로 혀를 찼다. 며칠 전부터 티 나게 우풍이를 괴롭히던 맹진화가 기어코 일을 저지른 모양이었다. 이제라도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인데, 불행히도 맹진화는 그러지 않았다.

“소인은 귀비 마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고 했다면 근본이 악한 것이고, 알고 했다면 더 멍청한 짓이다. 용서는 한 번뿐이니 잘 새겨들어라. 가자. 풍아.”

류희겸은 맹진화의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왔던 길로 걸음을 옮겼다. 뒤뜰에 남은 맹진화는 분노에 차서 부들부들 떨었다.

심양설은 맹진화를 어설프게 위로하는 대신에 사실만을 전했다.

“좋은 주인이시네. 벌을 받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여기는 게 좋아.”

“뭐가 좋은 주인이에요.”

“매질을 당할 수도 있었어. 그걸 몰라?”

“몰라요!”

끝까지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맹진화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뒤돌아 뛰어갔다. 홀로 남은 심양설은 그제야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맹진화의 사정은 같이 혜비의 처소에서 궁녀로 지냈던 심양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왕의 총애를 받는 귀비에게 날을 세워봤자 상황이 더 나빠질 뿐이라고 말을 해도 욕심 많은 맹진화가 알아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명문가의 어린 시종으로 시작해 혜비와 영왕의 신임을 받아온 심양설은 이 일을 영왕 진혁위에게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맹진화는 영왕의 침전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내원에도 출입할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일어날 게 뻔하니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

“귀비 마마, 고맙습니다.”

연무장으로 돌아오자마자 우풍이는 꾸벅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부터 했다.

영왕부에서 가장 어린 시종인 우풍이를 아끼는 사람이 많았지만 반대로 작정하고 괴롭히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에 맹진화에게서는 종종 화풀이를 당했는데 최근 들어 그 정도가 심해졌다.

언변이 좋은 맹진화 때문에 우풍이는 자기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당하기만 했다. 벌을 받는다고 밥을 굶는 일도 있었다. 식탐은 없지만 그래도 한참 클 나이라 배를 곯는 일은 억울하고 슬펐다.

오늘도 뒤뜰이 어질러져 있다고 할 때, 또 굶는구나 하고 자포자기했는데 귀비 마마가 도와주어서 너무 좋았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느냐?”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들 잘 도와줍니다.”

우풍이는 반사적으로 맹진화를 변호하고 말았다. 주인에게 고자질하는 것은 시종들 사이에서는 금지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자주 있지 않으니 아주 거짓말도 아니었다.

물론 류희겸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달리 더 추궁하지 않았다.

이전 생에서 류희겸 역시 출신 때문에 무시당하고 괴롭힘당하는 일이 몇 번 있었다. 목숨이 위험할 정도가 아니면 일일이 날을 세우기보다는 적당히 넘어갔다. 그래도 원망을 샀으니 맹진화의 이름과 얼굴은 똑똑히 기억해 두기로 했다.

“나중에 이 일로 문제가 생기면 말하거라.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마.”

“네. 감사합니다.”

류희겸은 다시 연무장 가운데 섰고, 우풍이는 곁에서 대기했다.

훈련에 매진하던 류희겸은 진혁위와 채제승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시 기본 자세를 한 차례 마치고 나서야 관전 중인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왕야를 뵙습니다.”

류희겸은 정중히 공수를 하며 예를 올리다 아차 싶었다. 아무리 귀비라고 불려도 군인으로 몸에 밴 습관이 하루아침에 고쳐지지 않았다.

“귀비가 이렇게 씩씩해. 괜찮다. 일어나라.”

“왕야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여기는 본왕의 사형이다.”

진혁위의 옆에 선 호리호리하게 생긴 남자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인상이 흐릿해서 그런지 이전 생에서 봤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채제승입니다.”

“류희겸입니다.”

류희겸은 자신을 향해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는 채제승에게 인사했다. 딱딱한 무인의 인사였다.

“마마의 무위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소인이 감히 비무를 청합니다.”

“안 돼.”

채제승의 비무 신청을 거절한 것은 진혁위였다.

“왕야. 저는 귀비 마마께 청했습니다.”

“귀비는 지금 나랑 같이 갈 곳이 있어.”

“지금 갑자기요?”

“원래 가려고 했어. 그리고 귀비는 사형보다 더 강해. 사형은 만월제전을 못 봤지? 사형은 아차 하는 순간에 나동그라질걸? 그러다 다치면 형수님이 슬퍼할 거야. 참아.”

“제가 뭘 다칩니까?”

“다칠 거야. 귀비는 손속에 자비가 없어.”

두 사람의 대화가 너무 막역해서 류희겸은 놀라고 의아한 기분이었다. 언제나 사람을 내려다보던 진혁위에게 이렇게나 절친한 사람이 있었나 싶었다.

“왕야께서 저의 실력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비무는 당사자이신 귀비 마마의 의중이 제일 중요하지요. 답을 내려주십시오. 마마.”

“귀비. 사형의 부인은 무섭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할 자신 없다면 하지 마라.”

“영왕야.”

“사실이잖아. 형수님 무서워.”

결정권은 류희겸에게 주어졌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본 류희겸은 간단히 결정했다. 눈치가 있다면 여기서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뻔했다.

“채 대인. 왕야께서 같이 가야 할 곳이 있다고 하니, 채 대인과의 비무는 다음에 해야겠습니다.”

“다음이라 약조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마마.”

“흥. 언제가 될 줄 알고. 귀비는 이제 그만하고 나와 가자. 사형은 돌아가. 우소진이 사형을 배웅해 주고.”

상황을 정리한 것은 진혁위였다. 류희겸은 진혁위를 따라 움직였고, 그 뒤로 시종들이 따라붙었다. 채제승을 배웅할 우소진 태감만이 옆에 남아 있었다.

채제승은 내원 쪽을 향해 걸어가는 진혁위 일행을 바라보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스무 살이 되도록 혼인을 하지 않은 진혁위는 여인도 사내도 멀리했다. 예쁘고 고운 것은 알겠으나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고 화려한 얼굴로 말했다.

태화루(太和樓)에서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인다고 유명한 화기(花妓)도, 태경 제일미인이라는 우통정(右通政) 원심의 장녀인 원설소도 진혁위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래서 진혁위가 귀비를 맞이한 것은 정치적인 의도라고 여겼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했다.

특히 진혁위의 태도가 그랬다. 선을 긋는 말투이나 눈빛은 미묘하다. 류희겸은 무심했지만 중요한 것은 진혁위였다.

어쩌면 류희겸을 귀비로 맞이한 것이 정치적인 이유가 아닐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어이가 없어졌다.

그 진혁위가?

거기다 류희겸은 차갑게 생긴 미남자이기는 했으나 사내를 홀릴만한 재주는 없어 보였다.

아니, 솔직히 특별하긴 했다. 저런 단정하고 섬세한 얼굴로 목봉을 저리도 용맹히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특이한 것을 좋아하는 진혁위의 성격이라면 류희겸의 그런 면모에 반했을 수도 있었다.

거의 정답에 가깝게 유추한 채제승은 피식 웃었다. 스무 살이 되고서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진혁위를 축하해 줘야 했다.

“왕야께서 귀비를 많이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왕부의 태감답게 입이 무거운 우소진이 조심스럽게 긍정했다.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채제승은 궁금증을 눌렀다.

일신의 변화는 사람의 언행과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법이었다. 특히 첫정은 더욱 그랬다. 채제승은 류희겸이라는 존재가 진혁위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아주 조금 걱정되었다.

*

내원으로 가는 길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진혁위였다.

“사형은 실력이 상당해. 지는 것을 싫어하고, 설렁설렁하는 것도 싫어하지. 져주었다가는 원망만 들을 것이다. 그러니 비무는 없다. 그리 알아.”

“명심하겠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류희겸은 채제승이 진혁위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전 생에서는 진혁위가 선물을 잔뜩 들고 와서는 비무를 하자고 했고, 지기 싫어했고, 또 져주었더니 화를 냈다.

반사적으로 사형과 많이 닮으셨다고 하려던 류희겸은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진혁위와 비무를 한 것은 이번 생이 아니었다.

“왜 말을 하려다가 마느냐. 하고 싶은 말은 해라.”

입술을 달싹거렸던 것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진혁위가 채근했다. 류희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두 분이서 많이 친해 보였습니다. 사형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관계이신지 궁금했습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진혁위와 채제승은 아주 막역해 보였다. 류희겸이 기억하기로는 진혁위가 평어를 쓰는 상대가 없었다. 황제와 그의 형님들 말고는 하대를 받지도 않았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광경이라서 신기하기도 하고, 또 궁금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 같은 스승님 밑에서 활을 배웠다. 삼 년을 넘게 붙어 지냈더니 진짜 형제들보다 더 형제 같지.”

“예.”

“귀비는 독자라고 알고 있다.”

“독자가 맞습니다. 그래도…… 사촌이랑 형제처럼 같이 자랐습니다.”

많은 것이 생략된 대답을 하던 류희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같이 자란 사촌도, 부모님처럼 따르던 고모 내외도 모두 죽고 없었다.

대연국의 황제가 보낸 금군사자에게 붙잡힌 것이 겨우 두 달 전이었다. 그러나 여섯 번의 회귀로 말미암아 체감상으로는 삼 년 전의 일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 마음은 무디어지고 슬픔은 희석되기 마련이지만 진한재에 대한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간다.

울렁이는 마음이 다잡아지지 않는데 나란히 걷던 진혁위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류희겸도 자연스럽게 따라 섰다.

“류희겸.”

“예.”

대답과 동시에 진혁위의 손이 날아와 뺨을 쳤다. 철썩, 울리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손등으로 가볍게 친 것뿐이지만 마치 칼로 베인 듯이 뜨끔했다.

“황궁에 가서도 살기를 퍼트리면 뺨을 맞는 것으로 안 끝난다.”

폭력에 이은 진혁위의 경고는 살벌했다. 목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실책에 류희겸은 자신의 바보 같음을 인정했다.

“왕야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배려는 무슨. 다 왔다. 여기가 경화당이다.”

차가운 경고를 한 진혁위가 경화당 안으로 들어섰다. 활짝 열린 문 안쪽 중정에는 이미 시종들과 시비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경화당의 중정에는 단풍이 든 나무와 가을꽃들이 만발했다. 특히 국화가 만개한 화분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진혁위는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류희겸과 함께 지낼 시종들이라고 했다. 모두 류희겸의 눈에 익은 시종들로, 심양설이 경화당의 살림을 책임질 상급시녀라고 했다. 그녀에게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한 류희겸은 진혁위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고급 가구와 장식품으로 꾸며진 내부 역시 화려했다. 그럼에도 과하지 않아 류희겸의 취향에 맞았다.

“어떤가? 마음에 들어?”

“곳곳에서 꾸민 이의 공과 수고스러움이 느껴집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머물면 된다.”

“예. 알겠습니다.”

“귀비는 딱딱하게 말하는 재주가 있어. 모두 나가 보아라.”

창가의 의자에 앉은 진혁위가 손짓을 하자 시종들이 모두 물러났다. 앉으라는 소리가 없기에 류희겸은 그를 보고 섰다.

“본왕은 아직 결정을 하지 못했다. 궁금하지 않아도 무엇이냐고 물어보아라.”

“무엇을 결정하지 못하셨습니까?”

“귀비를 믿지 못해서 알려줄 수 없다.”

“……?!”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말장난에 류희겸은 울컥하고 말았다. 알려줄 수 없다면 왜 물어보라고 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진혁위가 웃음을 터트렸다.

“화가 났나 보네.”

“예.”

“거짓을 고하지 않는 것은 좋다. 귀비를 믿을 수 있을 때가 되면 알려줄 수 있겠지. 아, 그리고 이곳에서만큼은 신첩이라고 해야지.”

“……?!”

“경화당에서는 신첩이라 하라고 했잖느냐. 기억이 안 나?”

기억은 나지만 류희겸은 신첩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기 싫었다. 특히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는 진혁위의 앞이라 반발심이 더 컸다.

“꼭 그리 말해야 합니까?”

“왜? 싫으냐?”

“소인은……. 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류희겸은 솔직하게 말했다. 귀비라고 불리고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무뚝뚝하고, 애교도 없고, 신첩이라고도 하지 않고. 먼저 반한 사람이 진다더니, 딱 그 짝이다.”

“황공하옵니다.”

부루퉁하니 불만 어린 투덜거림에 류희겸은 고개를 숙였다. 사실 반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진혁위는 무심한 얼굴이, 차가운 눈빛이, 피를 뒤집어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었다. 귀비로 봉하고, 귀한 선물에, 불편한 것이 없도록 시종을 붙여주었다. 모든 것이 과하게 주어졌다.

하지만 진혁위의 태도는 마음에 담은 정인을 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믿지 못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것은 둘째치고, 미소 짓는 얼굴과 달리 눈빛은 냉정했다. 세 번의 정사에도 전희나 애무 없이 삽입만이 주를 이루었다.

류희겸은 도무지 남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몸을 섞는 게 목적이라고 여기는 것이 제일 편했지만, 그래도 개운하지 않았다.

“무심하기까지 하고. 이래서야 귀비를 데리고 멀리 갈 마음이 안 생기잖아. 오는 보름에 수렵제에 데려가기에도 애매하고, 두고 가기도 애매하고.”

“데려가십시오.”

“가고 싶어?”

“바깥 구경을 하고 싶습니다.”

가을 수렵제에 진혁위가 데려가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었기에 류희겸은 재빨리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냈다.

화진국에서 인신매매단의 배에 실려 대연국으로 팔려 나올 때는 계속 갇혀 있었다. 익문사에서도 작은 감옥 안에서 나갈 수 없었다. 팔다리에 족쇄 없이 자유로운 하늘을 본 것은 만월제전뿐이었다. 이후에는 영왕부에서 계속 맴돌았다.

“바깥 구경이라. 좋다. 그럼 접문을 해보아라.”

“……?”

“접문 말이다.”

해괴한 요구에 류희겸은 괴괴하게 눈을 크게 뜨고는 진혁위를 보았다. 접문이란 입술을 맞대는 것이었다. 그걸 하라고? 왜? 굳이? 그걸? 입맞춤이야 그냥 하면 될 일이었다. 그걸 왜 굳이 하라고 시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것도 싫어? 내가 늙은 호색한 같아? 흐음. 딴 건 생각 안 나는데. 접문을 해. 싫으면 관두고. 수렵제에 안 가고 싶으냐?”

“왕야.”

“할 건 다 한 사이에 접문이 뭐 어때서. 왜 이상한 걸 보는 눈이야? 흥. 아쉬운 게 누군데.”

근엄하고 어른스러운 말투는 사라졌다. 여유로운 놀림이 어느새 빈정 상한 툴툴거림으로 바뀌었다.

어린애처럼 구는 진혁위의 모습에 류희겸은 난감함을 떨쳐 버렸다. 간도 쓸개도 내다 버린 지 오래였다. 무엇보다 가을 수렵제에는 꼭 가야 하니 망설일 것도 없었다.

“접문이면 됩니까?”

“더한 것도 해주려고?”

“어떤 걸 원하십니까?”

“지금은 접문이면 된다.”

지금이라는 말은 나중이 있다는 의미였기에 류희겸은 어이가 없어졌다.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입술 끝을 올리고 웃고 있던 진혁위가 어서 하라고 눈짓을 했다.

류희겸은 한 걸음 진혁위를 향해 다가갔다. 진혁위가 앉아 있기에 눈높이는 류희겸이 머리 하나쯤 더 높았다.

제정신으로 누군가에게 입을 맞추려고 하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기에 류희겸은 어색함에 잠시 버벅거렸다. 그러다 눈도 감지 않고 허리를 빠르게 숙여 정말 말 그대로 입술만 살짝 닿았다가 떨어져 나왔다.

“겨우 이거?”

진혁위가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따져 묻는 바람에 류희겸은 항변했다. 자신의 노력을 겨우라고 폄하하면 억울했다.

“접문을 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이게 무슨 접문이야. 바람이 스쳐 지나간 줄 알았네. 제대로, 다시 해라.”

류희겸은 인상이 구겨지는 것을 참았다. 하라면 못 할 줄 아나 보다. 이번에는 망설임도 없이 도전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두 손으로 진혁위의 어깨를 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시 입술이 맞닿자 적막 속에서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만 울렸다.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는 소리를 다시 하지 못하게 입술을 꾹 누른 다음에 진혁위의 아랫입술을 혀로 살짝 핥고는 떨어져 나왔다.

어딘가 놀란 진혁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민망함은 한순간에 가시고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더 합니까?”

다음은 혀를 집어넣다 못해 입술을 깨물어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도전적인 물음에 모호한 표정을 짓던 진혁위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살이를 많이 알았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래. 귀비와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

“……왕야?”

“짧은 인생을 즐겨야지.”

완전히 동문서답이었기에 류희겸은 무엇이냐고 묻는 대신에 진혁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진혁위의 눈빛이 아주 반짝반짝거렸다.

“무엇을 즐길 거냐고 물어보지 않을 것이냐?”

“무엇을 즐기실 겁니까?”

“해가 밝은 낮에 귀비를 희롱할 것이다. 이리 와서 앉아보아라.”

진혁위가 손으로 두드린 곳은 옆자리가 아니라 그의 무릎 위였다. 희롱이라는 단어와 진혁위의 손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류희겸은 아연해졌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인 주제에 진혁위는 정말 늙은 호색한처럼 굴고 있었다. 체통을 지키라고 하려다가 짧은 인생을 즐기겠다는 그를 그런 이유로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멈추었다.

“왕야. 소인은 무겁습니다.”

류희겸은 고귀한 왕야의 고약한 애정 놀음에 맞춰주기 전에 아주 중요한 사실부터 환기시켜 주었다.

자신의 키와 체격은 진혁위보다 살짝 작기는 했지만 그래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지난 두 달 동안 근육이 많이 빠졌다고는 해도 가녀린 규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장정의 무게로 고귀하신 왕야를 깔고 앉는 건 여러모로 부담이었다.

“당연히 무겁다는 거 안다. 싫어? 감히 본왕의 무릎에 앉을 수 있는 영광이 또 있을 것 같아? 명령이라도 해야 하나?”

“무겁다고 하지 마십시오.”

궤변 아닌 궤변에 류희겸은 결국 다리를 모아 안장에 타는 것처럼 진혁위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 조심스럽게 다리에 힘을 주어 무게를 분산시켰다.

민망함에 진혁위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는데, 커다란 손에 허리가 잡혔다.

“왜 그리 불편하게 굴어. 편히 앉아라.”

“그게…….”

“그게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왕야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하라는 대로 편하게 앉자 딱딱한 진혁위의 허벅지에 온전히 무게가 실렸다.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라 류희겸은 얼굴에 힘을 주며 미간을 찡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왜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이냐?”

진혁위가 아니라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류희겸은 고개를 돌렸다. 바로 코앞에서 활짝 미소 짓는 진혁위는 정말 즐거워 보였다.

“무겁지 않으십니까?”

“깃털만큼 무겁다.”

눈꼬리를 접으며 즐겁다는 듯 웃고 있는 진혁위를 보며 류희겸은 할 말을 잃었다. 뭘 먹으면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이 그리 좋은 걸까?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의문은 입술이 맞닿는 바람에 곧 사라지고 말았다.

뜨거운 혀가 한바탕 안을 휘젓고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등을 더듬던 진혁위의 손은 옷자락 안으로 슬그머니 파고들었다.

“하실 겁니까?”

설마 하는 마음에 류희겸은 다급하게 물었다. 코를 맞대다시피 한 진혁위의 얼굴에서 흥겨움과 욕망이 읽혔다.

“할 거다.”

“아직 낮입니다.”

“처음 교접했을 때도 밤은 아니었지.”

진혁위의 손가락 끝이 뺨에 닿았다 아랫입술을 슬쩍 더듬고는 사라졌다. 마치 다정한 정인을 대하듯 하던 진혁위가 애매하게 인상을 썼다.

“귀비는 애교는 물론이고, 눈치도 없군.”

“……?”

“접문을 하라고 해야만 하고. 잘난 낭군이 이리 애가 타서 살갑게 굴면 어여뻐해 줘야지. 귀여우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만 깜빡거리지 마라. 답답해서 속이 시커멓게 탄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거리고 있던 류희겸은 순간 기가 막혔다. 도대체 뭐부터 따져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진짜 눈치는 버리고 온 게 분명해.”

부루퉁하니 투덜거린 진혁위가 다시 입맞춤을 해 오는 바람에 류희겸은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그와의 잠자리는 사나웠지만 접문은 부드럽고 진득해서 순식간에 머리가 몽롱해졌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물고 빨던 진혁위가 떨어졌을 때, 류희겸의 뺨은 붉게 달아올랐다. 은밀한 자극에 몸이 반응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그걸 그러려니 하고 무덤덤하게 넘기지 못했다.

“해가 있어서 그런지, 귀비가 뺨을 붉힌 게 다 보인다. 그건 좋군.”

아무렇지 않게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는 진혁위 때문에 류희겸은 괜히 울컥했다.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진혁위의 손에 허리가 잡히고는 그대로 들어 올려졌다. 덩치 때문에 거의 짐을 떠메는 것과 비슷한 자세가 되었다. 그의 손은 단단했지만 그래도 불안해서 목을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왕야?”

“의자가 작아서 안 되겠다. 침상으로 가자.”

진혁위의 걸음은 거침없었다. 침방이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류희겸은 굳이 내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수렵제에 따라갈 수 있게 되었으니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 ◇ ◇

진혁위가 경화당을 나선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우소진은 해가 훤히 떠 있는 낮부터 방사를 즐긴 주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훌륭한 태감이라면 주인의 심기를 살펴 입을 열 때와 열지 않을 때를 구분할 수 있어야 했다. 한껏 기분이 좋아 보이는 진혁위에게 귀비 마마께 푹 빠지신 것 같다는 말을 굳이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편전의 서재에 앉아 서신을 쓰던 진혁위가 갑자기 생각난 듯 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비녀를 찾는 연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진혁위는 영왕부에 선물로 들어온, 보석으로 세공된 화잠(花簪)을 모두 가져오라고 했다. 영왕부에는 여인들의 머리에 꽂는 아름다운 비녀를 쓸 사람이 없었다.

우소진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이 떠올랐지만 설마 싶었다. 그는 사내인데 화려한 화잠이 쓸모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찌하기는. 귀비에게 줄 것이다.”

“하오나, 귀비 마마께서는 사내이지 않습니까?”

자신의 예감이 너무 잘 들어맞은 탓에 우소진은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가 사내인지 모르더냐?”

“그런데 왜 비녀를 주려 하십니까?”

“내가 주고 싶어서 그런다. 그 머리에 예쁜 비녀를 꽂아봐야겠거든. 잘 어울릴 거야.”

우소진은 주인의 고약한 취향에 웃을 수가 없었다. 양인은 사내를 부인이나 첩으로 들이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여인처럼 옷 입히지는 않았다. 아니, 입히기도 했지만 류희겸과는 어울리지 않을 터였다.

“말씀 올리기 황공하오나, 귀비 마마께서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장에서 군공을 세운 장군이셨지 않습니까?”

“좋아하지 않을 테니 더 즐거운 법이다.”

정말 즐거운 듯 웃는 진혁위 때문에 우소진은 속으로 가슴을 쳤다. 황궁이라는 작은 세계에 갇혀 살았던 태감이라도 연애가 뭔지는 알았다. 세간에 떠도는 통속 소설책은 무료한 황궁 생활에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였고, 또한 요령 좋은 태감들은 하급궁녀들과 연애도 했다.

좋아하지 않을 선물을 하는 게 즐겁다니. 한눈에 반했다고는 하나, 이건 망한 연애였다. 우소진은 애타는 마음으로 진혁위를 말렸다.

“왕야. 그리하시면 미움받으시옵니다.”

“겨우 그거 가지고 토라질 사람이 아니다. 얼른 가서 비녀나 가지고 오너라.”

“보석비녀보다는 옥으로 만든 것이나, 혹은 금으로 만든 상투관이 어떠신지요.”

“가져오라니까.”

진혁위의 재촉에 우소진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는 예물을 둔 창고로 가서 비녀를 모두 챙겨 왔다.

십수 개나 되는 비녀 중에 고르고 골라 두 개를 집어 든 진혁위는 비녀를 더 주문해야겠다고 하다가, 아예 장인을 수소문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한바탕 비녀를 고르고 난 직후에 심양설이 진혁위를 찾아왔다. 진혁위는 그녀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무슨 일이냐?”

진혁위는 경화당의 상급시녀인 심양설이 따로 찾아온 것은 류희겸과 관련된 일이라고 짐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오늘 낮에 일어났던 사건을 언급했다.

심양설은 맹진화가 우풍이를 괴롭히려는데 류희겸이 개입했고, 그로 인해 맹진화가 류희겸에게 앙심을 품었을 거라고 가감 없이 전했다. 진혁위에게서 류희겸을 모시라는 명령을 받은 심양설은 자신이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 판단 내렸다.

“맹진화에게 혼처를 찾아주어 영왕부 밖으로 내보내셔야 합니다. 혜비 마마께서 혼처를 찾아주어라 하신 지 시일이 꽤 지났으니, 괜찮을 겁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만, 맹진화는 두어라.”

간곡하게 진언을 올렸던 심양설은 예상과 다른 진혁위의 말에 당황했다. 진혁위가 건조하게 설명을 이었다.

“맹진화가 태자부의 한 궁녀와 친분이 깊어 자주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왕부를 오가는 이들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더구나.”

“소인이 멍청한 아이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였나이다. 벌하여 주십시오.”

고개를 숙인 심양설은 한탄과 분노를 드러냈다. 영왕부의 모든 시종들이 목숨을 걸어 충성을 한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배신은 결이 다른 문제였다.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보다 네가 할 일은 따로 있다. 혼례를 치르게 되면, 밖에서 사람이 많이 들어온다. 혼란함에 태자가 손을 쓸 수 있으니 맹진화가 밖에서 들여오는 것들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이다. 귀비가 화진 출신이니 작은 것 하나로 큰 시비에 얽히게 되어 있다. 이해했느냐?”

“그렇다면 맹진화는 더더욱 영왕부에서 내보내야 합니다.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지 않습니까.”

“아니, 허튼짓을 하게 만들어 현장에서 붙잡아야지. 누군지 알면 감시가 쉽지 않겠느냐.”

누가 배신자인지 미리 알고 있다면 대비가 쉬운 법이었다. 심양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아들었다.

“예. 제대로 감시하겠습니다. 그리고 귀비 마마께는 어찌 말씀을 드릴까요?”

“귀비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하겠다.”

“알겠습니다. 물러가옵니다.”

예를 올린 심양설이 조용히 물러나자 진혁위는 힘을 빼고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

태자의 외가와 처가는 모두 쟁쟁한 가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외가는 적극적으로 태자의 손발 노릇을 하며 세를 키웠다.

아직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태자의 면을 봐서라도 그들을 초대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분란을 일으키길 좋아하는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정쟁도 암투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는 것이 더 싫었다. 시비를 걸어온다면 열 배로 되돌려 줘야 했다.

“어쩌려나.”

비녀가 들어 있는 함을 손끝으로 두드리던 진혁위는 류희겸을 떠올리다가 피식 웃었다. 세상없이 딱딱한 사람이 보석비녀를 받고 질색하는 모습을 상상니 기분이 풀어졌다.

◇ ◇ ◇

류희겸과 태자부 시위들의 비무가 있는 날이었다. 비무 장소가 태자부에 있는 연무장이었기 때문에 경화당의 시종들은 물론이고 류희겸도 일찍부터 외출 준비를 하느라 부산했다.

탕조를 들여 깨끗하게 몸을 씻은 류희겸이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그걸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진혁위가 한마디 했다.

“갈아입는 걸 도와주겠다.”

옷을 집어 들던 류희겸은 물론이고, 환복을 도와주려고 옆에 서 있던 심양설과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도 모두 놀란 눈으로 진혁위를 돌아보았다.

영왕부의 식솔들 중에 진혁위가 화진국에서 온 귀장군을 지극히 총애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경화당이 꾸며지기 전까지 류희겸은 영왕의 침전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류희겸이 경화당으로 옮기고 나서는 진혁위가 그곳에 살다시피 했다. 교합이 없어도 진혁위는 경화당에서 잠을 자고 류희겸과 함께 조반과 석반을 들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조반을 들고 경화당을 나선 게 아니라, 태자부에 가기 위해 무복을 입고 치장을 하는 류희겸을 구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용히 앉아 계시던 분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정신을 먼저 차린 것은 류희겸이었다.

“왕야?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본왕이 직접 옷을 갈아입혀 주겠다고 했다.”

“영왕야. 시중드는 일은 시종들에게 맡겨주십시오.”

진혁위를 말린 것은 심양설이었다. 고귀하신 황자께서 타인의 시중을 드는 것은 망극한 일이었다.

“하고 싶은 걸. 류희겸. 그대는 어떠냐? 싫어?”

화사하게 웃는 진혁위를 보며 류희겸은 잠시 생각했다. 이곳에서 가장 고귀하시고 고집이 강한 분의 말씀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잘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왕야께서 도와주시면 삼생의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삼생의 영광은 무슨.”

허락이 떨어지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진혁위가 시종들을 뒤로 물리고는 장포를 받아 들었다.

진혁위는 제 입으로 말한 것처럼 능숙하게 시중을 들었다. 열두 겹의 복잡한 예복보다 입고 벗기 편한 무복이기는 하지만 끈과 매듭을 만지는 진혁위의 손은 야무졌다.

“잘하지?”

“예.”

“그럼 할 말이 없느냐?”

“감사합니다.”

“태자부에서 돌아오면 귀비에게 옷시중을 받아봐야겠다.”

“예. 그러하겠습니다.”

그냥 듣기에는 격의 없이 나누는 평범한 대화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나이 든 시녀들에게는 그저 부부의 사이가 좋은 것으로만 보였다. 특히 심양설은 흐뭇하다 못해 감격스러운 기분이었다.

심양설은 진혁위의 유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뒤를 따라다니며 어린 황자를 반쯤 키우다시피 했다. 진혁위가 봉작을 받고 황궁을 나올 때도 혜비의 부탁을 받고 왕부로 따라 나오다 못해 내원 살림을 맡아 할 정도로 신의가 깊었다.

성격이 밝고 활달하여 마냥 아이 같던 7황자는 어느 순간 갑자기 어른스러워졌다. 원래 사내아이들이 다 그렇다고 하지만 진혁위는 그 정도가 심했다.

미남에다가, 성격도 좋고, 하인들에게도 공정하고, 능력도 출중한 황자였다. 어디 한군데 잘나지 않은 구석이 없는 사내가 가까이 두는 곁붙이 하나 없이 스무 살이 되도록 혼자 지냈다. 여인이고 사내고 도통 관심이 없어서 혜비만큼이나 심양설도 걱정했었다.

그런데 귀비에게 이리 살갑게 구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눈치가 없는 류희겸은 시종들의 분위기를 읽지 못했다. 반대로 진혁위는 모두 알고 있어도 모르는 척 넘어갔다.

“다 됐다. 헌앙하군. 본왕이 눈이 높긴 해.”

옥패를 걸고 요대까지 채워준 진혁위가 자화자찬하며 활짝 웃는 바람에 류희겸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지난 생에서 진혁위와 몇 번이고 몸을 섞었지만 이렇게 밀접하게 오랜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다. 그래서 남자가 꼼꼼한 손길을 가진 것도, 아무렇지 않게 떼를 쓰는 것도, 그리고 낯간지러운 말을 쉽게 하는 것도 이번에야 알았다.

“멋진 공자님이라 시선을 한 몸에 받겠어.”

류희겸이 영왕부에 실려 온 것은 아흐레 전이었다. 영왕부의 침전에서 경화당으로 거처를 옮기고, 연무장을 오가는 것 말고는 바깥으로 걸음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류희겸을 위해 진혁위가 태경 도심을 구경시켜 주겠노라고 나섰다. 태자부에서의 비무는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이후 시간에는 말을 타고 태경 시가지를 한 바퀴 돌고, 번루에 갈 예정이었다.

직전 생에 이 년이나 태경에서 살았던 류희겸은 시장 거리도, 번루도 몇 번이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이니 아는 척하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우소진. 가져오너라.”

진혁위의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우 태감이 작은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분명 귀한 것이 들어 있을 상자를 보자마자 류희겸은 긴장했다.

류희겸은 진혁위로부터 많은 것들을 받았다. 대부분 값비싼 금은보화였다. 무게만큼 은을 주어야 한다는 비단도, 멋진 화병도 있었다.

그러나 많고 많은 하사품 중에 진혁위가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따로 있었다.

며칠 전, 진혁위가 선물이라고 화잠을 가져왔다. 홍옥, 청옥, 백옥, 진주 등의 보석이 장식된 화려한 보석 세공 비녀는 여인들이 쓰는 것이었다.

굉장히 들뜬 진혁위의 명령에 류희겸은 올려 묶은 옆머리에 크고 작은 비녀를 꽂아야 했다. 잘 어울린다고 웃음을 터트리는 진혁위를 향해 류희겸은 속으로만 욕을 쏟으면서 여인의 차림을 하고 치장을 해야 하냐고 물었다. 다행히 진혁위는 그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어젯밤에도 비녀를 하나 가져와 머리에 꽂게 했다.

아름다운 비녀는 모두 함에 들어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상자를 보자니 진혁위가 비녀를 꽂고 외출을 하자고 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류희겸의 우려와 달리 상자 안에는 검은 구슬팔찌가 들어 있었다. 진혁위가 팔찌를 류희겸의 오른 손목에 채웠다.

“아직 요패가 나오지 않았다. 이 팔찌가 영왕부의 시위라는 증명이 되어줄 것이다. 얌전히 본왕을 따라다녀서 이 팔찌가 쓰일 일이 없도록 해라.”

“얌전히 영왕야를 따라다니겠습니다.”

오늘만큼은 얌전하게 진혁위를 따라다니겠노라고 다짐한 류희겸은 공수를 하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진혁위에게 뻣뻣하다는 핀잔을 듣고 말았지만 류희겸은 개의치 않았다.

*

가을 하늘은 화창했다. 태자부의 가장 넓은 연무장 가운데 검은 시위복을 입은 사내가 나뒹굴었다. 우참정(右參政) 차종후의 셋째인 차주영은 나름 실력이 뛰어난 무인이었다. 그런 그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다가 결국 졌다.

손목을 부여잡고 끙끙거리며 일어나는 차주영과 그 앞에서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서 있는 류희겸의 모습에 구경꾼들은 저마다 탄성을 내뱉었다.

만월제전에서 활약한 류희겸이 태자부의 시위들과 비무를 벌인다는 것을 황궁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때맞춰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태자부를 찾아들었다.

류희겸과 비무회에 참석하는 시위는 모두 일곱 명이었다.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태자부 시위들이 따로 뽑기를 해야 했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오늘 태자부에서 열리는 비무회의 류칙은 여덟 명이 단판 승부로 최후의 승자를 가리는 방법이었다.

모두 일곱 번의 비무 중에 가장 돋보이는 사람은 류희겸이었다. 지금 쓰러진 차주영을 비롯해 앞선 두 명이 모두 무기를 놓치고 바닥을 뒹굴었다. 압도적인 실력이었기에, 만약을 위해 목검을 사용한 게 다행일 정도였다.

차주영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비무회의 승자는 류희겸으로 결정되었다. 류희겸은 홀로 상석에 앉은 태자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류희겸. 재주가 신묘하여 귀장군이라고 불릴 만하다.”

승자를 치하하는 말치고는 고약했다. 귀장군이라는 별호는 멸칭에 가까웠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쓸 만한 단어는 아닌데도 굳이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태자의 심기가 틀어졌다는 의미였다. 류희겸은 자신이 태자의 눈 밖에 났음을 알고 있었다.

태자부에서 열리는 비무회 소식을 듣고 은퇴한 고관과 휴무일을 맞은 백관들이 움직였다. 대연국은 뛰어난 용력을 가진 무인을 귀하게 여겼다. 류희겸의 화진국 출신이라고 하지만 재주까지 천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평가가 후했다. 덕분에 태자부의 연무장은 구경꾼으로 북적거렸다.

태자부에 이렇게 많은 손님이 드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태자부의 주인인 태자는 마냥 좋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상석에 앉아 있는 태자의 얼굴은 엉망으로 구겨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태자부에서 제일간다 자부하는 시위들이 실력 차이만 보이고는 쓰러지는 상황이라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일 것이다.

무엇보다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자의 자존심이 엉망으로 구겨졌으니 버럭버럭 소리를 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희겸은 정중히 답했다.

“황공하옵니다. 태자 전하.”

“비무회의 승자에게 청벽(靑甓) 벼루를 하사하겠다.”

태자의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태감이 승자의 상품인 벼루를 류희겸에게 건넸다. 그렇게 공식적으로 비무회가 끝났다. 몇몇 구경꾼들은 자리를 떴지만 대부분은 태자와 진혁위, 류희겸에게 인사를 하며 대화를 이었다.

그중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좌승상의 차자인 모영록이었다. 그는 대놓고 류희겸에게 들이댔다.

“류 대인의 무위가 너무 훌륭하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들 만월제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매끄러운 말솜씨로 자신을 치켜세우는 모영록을 보며 류희겸은 인상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멀끔한 얼굴에, 값비싼 비단옷을 입은 모영록은 훌륭한 귀공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류희겸은 그가 얼마나 질이 나쁜지 알고 있었다.

직전 생에 류희겸을 가장 많이 괴롭힌 인물이 바로 모영록이었다. 모영록 때문에 익문사의 고신으로 다친 다리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에는 절게 되기까지 했다.

다시 시작하는 생이었지만 사람의 성격도 행동도 쉬이 변하지 않는 법이었다. 류희겸은 경계를 풀지 않으면서 정중히 답했다.

“과찬이십니다. 공자님.”

“과찬이라니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못 알아볼 리 없지요. 과연 화진국에서 이름 높은 장군이다 싶었습니다. 심장이 덜덜덜 떨리지만 그래도 사내다 보니 호승심이 생겼습니다. 비무를 청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이런 장난 같은 목검 말고 진검으로 말입니다.”

자신만만한 모영록의 도전에 주위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구경하던 이들의 이목이 단숨에 집중되었다.

“공자님. 진검은 위험합니다.”

“위험하지요. 하지만 원래 비무는 진검으로 하지 않습니까? 설마, 겁이라도 나시는 건 아니시죠? 천하의 귀장군께서? 위험하다고 피하면 겁쟁이지, 사내대장부가 아닙니다.”

류희겸의 거절에도 이어지는 모영록의 도발은 저열하면서도 직접적이었다.

구경꾼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흥미 위주로, 또는 순수하게 류희겸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모영록의 도발을 반기며 류희겸을 고깝게 바라보는 시선도 분명히 존재했다.

직전 생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던 류희겸은 이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모영록이 무슨 수를 쓸지도 알았다.

최선은 모영록과의 비무를 피하며 쓸데없는 분쟁을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은 겁쟁이라고 불려도 상관없었지만, 실질적 보호자인 진혁위의 명예도 걸려 있는 점이 문제였다.

“영왕야께서 허락하시면 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화살을 진혁위에게 돌린 류희겸의 목소리는 무뚝뚝했다. 대신 진혁위를 바라보는 시선은 명령만 내리면 저딴 자식을 밟아버리겠다는 강력한 눈빛이었다.

당연히 진혁위는 류희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보았다. 얼굴은 무심한데 강력한 의지를 내뿜는 눈동자는 더없이 형형하게 빛났다. 이러니 반하지 않을 수가 있나.

모영록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진혁위도 진즉에 알아차렸다. 그래도 류희겸이 무슨 짓을 할지 궁금해진 진혁위는 그에게 장단을 맞춰주기로 하고 거절부터 했다.

“곧 혼인을 해야 할 사람에게 피를 보게 할 수 없지. 모영록. 다음을 기약하는 게 어떻겠나?”

“혁위야. 귀장군이 피 보기를 무서워할 리가 있겠나? 영록이 말대로 원래 비무는 진검으로 해야 하는 건데, 오늘은 너무 심심했어. 안 그렇습니까?”

중간에 끼어든 태자가 호응을 구한 상대는 진혁위가 아니라 주위에 몰려든 구경꾼들이었다. 심심하지 않았냐는 물음에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심할 만도 했습니다. 너무 싱겁게 끝나버렸으니까요. 그래도 모영록이 제 혼약자를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태자의 속을 가볍게 긁은 진혁위가 모영록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냉정한 눈빛에 모용록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진혁위와 모영록은 같은 나이였고, 출사하지 않고 한량으로 사는 것은 똑같았다. 그러나 세간의 평가는 달랐다. 모영록은 사고나 치고 다니는 소인배라면 진혁위는 도량 넓은 황자라고 추켜세웠다. 태자만큼이나 진혁위에게 열등감과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는 모영록은 전의를 불태웠다.

“한 수 가르침을 받지요.”

“그렇게까지 나서면 별수 없군. 비무를 허락하기 전에 모영록에게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예. 말씀하십시오. 영왕야.”

“진검을 쓰는 비무는 생사결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니, 서로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해야겠다. 괜한 시비가 생기는 것은 사전에 방지해야지.”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요. 진검 비무로 인해 목숨을 잃는 일이 왕왕 생기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모영록은 자신 있게 받아쳤다. 무관으로 출사는 하지 않았지만 실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물론 류희겸을 너끈히 이길 수야 없지만, 방도는 따로 준비해 두었다.

그렇게 류희겸과 모영록의 비무가 결정되었다. 류희겸도 진혁위도 진검을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태자부의 시위들이 쓰는 연습용 검을 빌리기로 했다.

검을 가지러 간 사이, 젊은 공자 하나가 모영록에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누가 봐도 검이 든 상자였다. 뚜껑을 열자 금으로 상감한 검은색 검집의 검이 드러났다.

“혹시나 몰라 저는 검을 준비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웃는 모영록을 보며 류희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모영록의 손에 들린 것은 기억 속의 검이었다.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 함정이 맞았기에, 류희겸은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아주 멋진 검입니다.”

“제가 성인이 되었을 때, 조부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쉬이 보기 힘든 귀물입니다. 비무 전에 견식을 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모영록은 류희겸의 정중한 요청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분위기상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대연국에서 상대의 무구를 칭찬하고 견식을 청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진검 비무를 하자고 청을 한 것도 자신이었고, 검을 들고 와 자랑까지 해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혹시나 류희겸이 뭔가를 알아챌까 걱정하면서도 모영록은 검을 넘겼다. 류희겸의 손에 검이 들리자 시위들이 태자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만약을 위해 대비하는 것은 시위의 기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영록은 얼른 류희겸에게서 검을 돌려받고 싶었다.

류희겸의 손이 신중히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그러다 손잡이 끝을 장식한 테두리의 어떤 부분을 꾹 누르자 칼막이 부분에서 세침이 우수수 떨어졌다.

류희겸의 행동을 신중히 살피던 사람들이 일순 숨을 멈췄다. 특히 검의 주인인 모영록은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검의 손잡이에서 가느다란 독침이 튀어나가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장의 암기였다. 검을 만든 장인도, 조부도 돌아가셨기에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자신과 검을 관리하는 시종뿐이었다. 설마, 시종이 배신을 한 건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휩쓸었지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것보다는 이 상황을 수습하는 게 중요했다.

비무를 하자고 했으면서 검에 암기를 숨기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었다. 류희겸을 향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모영록에게 꽂혔다. 특히 바닥에 떨어진 세침과 모영록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본 류희겸의 시선이 서슬 퍼랬다.

“하하하. 깜빡, 깜빡 잊은 겁니다. 아니.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모영록이 더듬거리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지만 그걸 믿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모 공자님. 견식을 끝냈습니다.”

류희겸은 비난의 말을 하는 대신에 모영록에게 검을 내밀었다. 류희겸의 박력에 밀린 모영록이 주춤하는 사이에 검을 낚아챈 것은 진혁위였다. 그는 모영록을 향해 검을 내던지다시피 했다.

“정정당당하지 못한 자와 비무를 할 수는 없지. 태자 전하를 보아 이 일을 문제 삼지 않겠다. 허나, 모영록. 이제 다른 이에게 비무를 청하지 마라. 태자 전하. 흥이 깨졌으니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래.”

상황을 수습할 능력이 없는 태자는 얼떨결에 그러라고 했다. 예를 올린 진혁위와 류희겸은 그대로 연무장을 나가버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태자가 벌떡 일어나자 구경꾼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분노에 차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모영록은 형인 모영균(牟潁筠)의 눈짓에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겼다. 모영록은 자신의 잘못 따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이런 모욕을 준 류희겸과 진혁위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

“감히 내 얼굴에 먹칠을 해?!”

태자가 편전에 무릎을 꿇은 모영록을 걷어찼다. 그 힘에 뒤로 넘어진 모영록은 다시 무릎을 꿇어앉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경험한 태자의 성격으로는 여기서 한마디 말을 보태면 더욱 화를 낼 게 뻔했다.

모영록의 짐작대로 태자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황이었다. 시위들이 류희겸에게 모두 나자빠진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는데, 그 와중에 외사촌 동생이 암기를 들켜버리고 말았다.

모영록이 진검 비무를 청할 거라고 했을 때, 나름 방도가 있는 줄은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암기일 줄은 몰랐다.

비무회가 끝나고 난 후에 모영록이 제멋대로 저지른 일이긴 했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자신에게 책임이 없었다. 하지만 모영록은 자신의 외사촌 동생이었다. 다들 모영록이 자신의 명령을 받았을 거라고 여겼을 게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미칠 것 같았다.

“방법이 있다고, 자신 있다고 하더니 그게 암기였어? 그리고 그걸 또 들켜?!”

“저도 들킬 줄은―”

“전하. 고정하십시오. 건강을 해치십니다.”

급히 변명을 하려는 모영록을 가로챈 것은 모영균이었다. 태자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 몸을 낮추며 말렸지만 그건 헛수고였다.

“고정? 고정하게 생겼느냐?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저놈이 내 사주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할 텐데?!”

“전하.”

“비무회를 열라고 한 것은 네 아비인 좌승상이고, 류희겸 따위야 손쉽게 이길 수 있다 한 것은 네 입이고, 암기를 숨겨 망신을 당한 것은 저놈, 네 동생이다. 너희 형제들이 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 다들 멍청해. 멍청하다고!”

“황공하옵니다.”

버럭 소리를 지르는 태자의 노기에 모영균은 고개를 숙이며 이를 악물었다. 태자의 능력이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그래도 그가 차기 황제였기에 아버지는 태자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모씨 가문이 아니었다면 태자는 오래전에 기왕의 손에 끝났을 것인데, 본인만 그걸 몰랐다. 그래도 여기서 발끈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모영균은 머지않은 미래를 도모했다. 태자와 태자비는 혼인을 한 지 오래였지만, 팔 년 전에 딸을 하나 낳고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태자의 많은 후궁들이 낳은 아들은 다섯이었고 양인은 단둘뿐이었다. 그중에 한 명을 낳은 후궁이 모씨 가문의 모 상재였다.

태자에게도 모영균에게도 육촌이 되는 모 상재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좌승상인 모태심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태자가 황제가 되고, 가슴병을 앓고 있는 태자비가 순조롭게 죽어주기만 한다면 모씨 가문은 이 대에 걸쳐 황후를 배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때가 되면 태자도 필요 없어진다. 오래지 않아 다가올 미래를 위해 참으라는 아버지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모영균은 얼마든지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었다.

“황공합니다. 전하. 모두 소신이 동생을 감독하지 못한 탓입니다.”

“잘 아네. 그래서 어쩔 것이냐? 응?”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일을 도모하고 있지 않습니까.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류희겸은 물론이고 영왕까지 단번에 칠 수 있습니다.”

모영균이 차분히 다음 계획을 설명하자 그제야 태자가 진정했다. 태자도 모영균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아무리 류희겸이 만월제전에서 활약했다고 하나, 그의 출신은 여전히 약점이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물증이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끝장날 수 있었다. 류희겸을 비호하는 진혁위 역시 발뺌은 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치욕을 되돌려 줄 생각을 하자 기분이 조금 풀어진 태자는 굳은 얼굴을 풀었다.

“그래. 그것이 있었지. 만반의 준비를 해라.”

“신명을 다하겠나이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그래. 영왕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자.”

비죽이 웃는 태자를 보며 모영균은 멍청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저 고개를 깊숙이 숙이기만 했다.

*

대연국의 수도 태경은 북쪽에 자리 잡은 황궁을 중심으로 좌우로 서시(西市)와 동시(東市)가 발달했다. 서쪽에 고관대작의 저택이 밀집되어 있는 만큼 고급 기루와 번루도 모두 서시에 몰려 있었다. 선청(鮮靑) 호수를 끼고 삼 층 높이의 유명한 번루들이 즐비했다.

진혁위가 류희겸을 데리고 간 곳은 만 가지 맛과 향을 음미할 수 있다고 소문난 천향만객루(天香萬客樓)였다.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삼 층의 객실에 자리하자 준비된 음식과 술이 탁자 위를 가득 채웠다.

돼지고기튀김과, 생선찜, 오리구이, 닭고기볶음 등등. 모두 술과 어울리는 요리였다.

“술은 좋아하나?”

손수 술병을 든 진혁위가 류희겸의 잔을 채워주었다.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얼마나 마실 수 있지?”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습니다.”

“취하기는 한다는 소리군.”

평소 류희겸의 성격 같으면 왜 그걸 그렇게 이해하냐고 한 소리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적당히 마시겠습니다.”

“기대해 보지.”

술자리는 부드럽게 이어졌다. 대화를 주도한 것은 진혁위였다. 주제는 조금 전에 있었던 비무와 모영록에 관한 것이었다.

“눈썰미가 좋았어. 그걸 한눈에 알아보다니.”

“운이 좋았습니다.”

류희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밀고 나갔다. 황궁에서 빠져나오는 길에 진혁위가 같은 것을 물었을 때도 같은 대답을 했다. 다행히 그때도 지금도 진혁위는 깊이 캐묻지 않았다.

“모영록의 아비인 좌승상 모태심은 황후의 남동생이자 태자의 외숙부가 된다. 대전에서 모태심의 권세는 상당하지.”

“제가, 잘못한 것입니까?”

갑작스러운 좌승상에 대한 설명에 류희겸은 혹시나 하고 물었다. 지금 진혁위는 권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좌승상과 태자와 척을 지어서 좋을 게 없었다.

“설마, 모영록이 얼마나 개자식인데. 망나니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그나마 머리가 있어 체면을 차리는 척하기에 악행이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 온갖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녔다. 비겁하게 암기를 숨기는 놈에게 잘못할 건 없다. 그놈이 사과를 하라고 하면 비웃어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비웃을 것이다.”

“왕야의 말씀대로 잘못했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왕야께서는 괜찮으신 겁니까?”

“내 걱정을 해주는 것이냐?”

“왕야께서 곤란해지시는 게 아닙니까?”

“곤란해질 게 무엇이냐. 태자 전하께서 날 싫어하는데. 아니지. 태자께서는 좋아하는 형제들이 없으시지. 태자 일당이나 황후가 부른다면 어떤 핑계를 대든 피해라. 선물을 받으면 의심부터 하고. 내 미리 말하지만, 그들은 음험하다.”

진혁위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류희겸은 태자 일당이, 황후가 얼마나 음험한지 몸소 경험했다.

직전 생에 모영록이 던진 암기에 다리를 심하게 다쳤고, 그의 형인 모영균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태자에게 약점이 잡혔다. 또한 황후가 건넨 술에는 최음약이 들어 있었다. 다행히 진혁위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황후궁에서 멀쩡하게 걸어 나올 수 있긴 했다. 물론 약 때문에 황궁을 빠져나오고 나서는 진혁위와 한바탕 뒹굴기는 했지만.

민망한 과거의 기억에 류희겸은 찡그려지려던 미간에 힘을 주었다. 역시나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니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진혁위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정국을 양분하고 있는 태자와 기왕의 사람들을 각각 언급하며 가까이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직전 생에서 류희겸이 알던 것과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다만 태자와 기왕을 각각 지지하던 황자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에 진혁위의 설명에 진지하게 호응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길게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술잔이 오갔다. 이 시기에만 마실 수 있는 국화주는 훌륭했다. 수운으로 실어 온 바다 생선을 튀긴 요리를 먹으며 국화주를 한입에 털어 넣는데, 복도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천향각은 방과 방끼리는 벽으로 막혀 있었지만, 밖으로 창이 열려 있었고 복도는 얇은 종이를 바른 가리개로 가려져 있어 밖에서 말하는 소리와 사람이 지나다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구를 지키고 있던 진혁위의 수행호위가 말을 걸었다.

“대인. 희가의 대공자가 뵙기를 청합니다.”

진혁위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들이라고 하자, 곧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희가의 대공자라고 했을 때부터 류희겸은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희일준. 희가의 가주인 희범영 장군은 부인도 자식도 없었다. 그래서 조카인 희일준을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직전 생애까지 만월제전이 끝난 후 류희겸의 신병을 맡은 것은 희가였고, 그래서 류희겸은 희일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올해로 열아홉 살이 된 남자는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키도 덩치도 커다랬다. 얼굴은 강직해 보였지만, 순하게 웃을 수 있는 사내였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류희겸은 상대가 누군지 몰라야 했다. 그래서 어려운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일준이 영왕야를 뵙습니다.”

공수를 한 희일준이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었다. 무인답게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진혁위는 희일준을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라. 그래, 희가의 대공자가 무슨 일인가? 본왕이 여기에 있는 것은 또 어찌 알고?”

“이곳에 약속이 있었는데, 복도에 주복홍이 서 있기에 영왕야께서 계신 줄 알았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뵙고자 청한 것은 여기 계시는 류희겸 장군을, 그러니까 류 대인을 뵙고 싶어서였습니다.”

“류희겸을? 왜? 그대도 비무를 청하려고?”

만월제전에서 활약한 류희겸과 검을 겨루고 싶어 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최근에는 태자부 시위들과 비무를 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진혁위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하지만 진혁위의 예상은 빗나갔다.

“비무도 청하고 싶지만, 그것보다 류 대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감사의 인사?”

의문 어린 진혁위의 시선이 슬쩍 닿았을 때, 류희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번 생에서는 희일준의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 모른다고 해야 했다.

“오 년 전, 홍가강(洪佳江)에서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그런 인연이 있었다고? 좀 더 자세하게 듣고 싶다.”

“부끄럽게도 전투에 낙마하여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 말에 깔려 꼼짝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장군께서 구해주셨습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여기지 않았는데, 이렇게 기회가 되었으니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류 대인. 소인은 희일준이라고 합니다. 은혜를 잊지 않고 꼭 갚겠습니다.”

희일준은 류희겸을 향해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강직한 성품이 엿보이는 언행에 류희겸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를 도운 것은 결코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다.

오 년 전, 류희겸은 이진국(利振國)과 대연국의 소규모 전투가 끝난 직후의 전장을 마주했다. 북쪽 초원을 가로지르는 홍가강에 자리하고 있는 이진국은 화진국과 대연국 모두와 적대를 하고 있는 나라였다. 국력은 세 나라 중에 가장 약했지만 기마병만큼은 최강이었다. 하지만 이진국의 군대는 전투가 끝난 직후라 류희겸이 이끄는 병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도망쳤다.

우연찮게 전장의 전리품을 획득하게 된 부하들을 두고 류희겸은 말에서 내리다가 갈색 말에 깔려 있던 병사와 눈이 마주쳤다. 몸도 얼굴도 앳된 소년은 급히 죽은 척을 했다. 입고 있는 갑옷은 대연국 기병의 기본 무장이 아니라 좀 더 화려한 것이었기에 그가 귀한 집 자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굳이 소년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시기에 대연국과 사이가 나빠져서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살아 있는 대연국 병사와 부상병을 따로 모으라 명했다. 그리고 말에 깔린 소년은 류희겸이 직접 구하고는 갑옷과 무장을 벗겨 살려 보냈다.

그 인연이 이렇게 이어졌다. 몇 번이나 회귀하며 생이 반복되는 동안 희일준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잊지 않고, 화진국의 변절자와 가깝게 지낸다고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류희겸을 비호해 주었다. 만월제전이 끝나고 희가의 도움을 받은 것도 희일준 덕분이었다.

희일준은 언제나 같은 말을 했다. 은혜를 잊지 않고 꼭 갚겠다고.

몇 번이나 반복되어도 변함없는 모습이 그리우면서도 미안하고 반가워서 류희겸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말고기를 얻으려고 그랬습니다. 공자님.”

“죽은 척하다가 눈이 마주쳤었는데, 모르는 척해 주셨지요.”

“그건 기억나지 않습니다.”

“류 대인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는 것뿐입니다.”

희일준은 눈치가 아주 없지 않았다. 류희겸이 자세하게 언급하기를 저어하자 대화를 끝맺고는, 진혁위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희일준이 사라지자 먼저 입을 연 것은 진혁위였다.

“그리 서 있지 말고 앉아라.”

“예.”

“희일준의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우연찮게 그리되었습니다.”

진혁위의 손짓에 따라 자리에 앉은 류희겸은 에둘러 대답했다. 하지만 진혁위는 그걸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나쁜 버릇이야. 내가 물으면 숨기는 것 없이 대답해라.”

“오 년 전에, 소인이 이끄는 부대가 이진국과 대연국의 소규모 전투가 끝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진국의 기병을 쫓아내고 전리품을 챙겼습니다. 말고기를 얻으려고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보급 사정이 좋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말에 깔린 소년이 죽은 척하는 것을 보고 모르는 척했다가, 마음 편히 말고기를 구하려고 부상병과 생존병들을 따로 모아 보내주었습니다.”

“살려준 게 맞군.”

“예.”

“그래서, 조금 전에는 왜 웃었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웃었잖아. 좋은 술을 먹여도 얼굴을 굳히고 있더니.”

추궁 아닌 추궁에 류희겸은 천천히 자신이 웃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복수를 맹세하고 회귀를 반복하면서 웃을 일이 잘 없었다. 그래도 직전 생에서는 이 년이나 살면서 즐거운 일이 꽤 있었다. 이번 생에서는 조금 전에 희일준을 향해 웃은 게 처음인 것 같기는 했다.

그런데 진혁위가 그걸 왜 걸고넘어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웃는 게 보기 싫은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류희겸은 적당히 타당한 이유를 생각해 냈다.

“인연이 이렇게도 닿을 수 있나 싶어 그랬습니다.”

“그래. 신기한 인연이지.”

부루퉁하게 동의한 진혁위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보며 류희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웃은 게 기분 나쁜 것 같으니, 여기서는 가만히 있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마실 것 다 마시고, 먹을 것 다 먹었으니. 이제 가자.”

술잔을 내려놓은 진혁위가 훌쩍 일어나 버렸다. 갑자기 진혁위의 태도가 바뀐 것이 의아스러웠지만 그 이유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잠시 고민하던 류희겸은 곧 진혁위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대로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

류희겸이 왕부의 경화당에 돌아온 것은 해가 지기 직전이었다. 진혁위는 류희겸을 경화당 앞까지 배웅하고는 나중에 석반을 먹자고 하며 서재를 찾았다.

영왕인 진혁위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중에서는 왕공대신들에게서 온 서신들을 읽고 답하는 것도 있었다.

“밖에서 심기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책상 위에 찻잔을 올려두던 우소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래도록 진혁위를 모신 우소진은 주인의 심기를 잘 읽었다. 건성으로 서신을 읽고 있는 진혁위의 기분이 별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웃는 얼굴로 귀비와 함께 왕부를 나가신 분이 왜 이러나 싶었다.

“귀비를 찾는 사람이 많아.”

쥐고 있던 서신을 내려놓은 진혁위가 의자에 기대어 앉으며 한마디 했다. 잘생긴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지만 짜증이 난 게 분명해서 우소진은 조용히 대꾸했다.

“귀비 마마께서 재주가 출중하시니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그건 귀비 마마께 비무를 청하는 서신입니까?”

“맞다. 이게 다 귀비를 보고 싶다는 내용이다.”

요즘 영왕의 앞으로 오는 서신이 부쩍 늘었는데, 대부분이 류희겸과의 비무를 청하는 것이었다.

대연국에서는 학문을 익히는 것만큼이나 무예를 갈고 닦는 것도 중요하게 여겼다. 친분을 다지기 위한 비무회는 시회나 격구회처럼 자주 열렸다. 개인적으로 비무를 청하는 일도 많았다.

만월제전에 참석하지 않은 우소진은 류희겸이 얼마나 사납게 싸웠는지 건너건너 들어오는 이야기로만 들었다. 진혁위와 호각으로 싸웠다고 하니 그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우소진이 생각하기로, 이곳에 기반이 없는 류희겸이 무위로 명예를 쌓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귀비 마마께서 뛰어난 재주를 가지셨으니 인기가 많으신 게 아닙니까.”

“흥. 이놈들이 과연 귀비와 비무만 하고 싶을까?”

“아이고. 다들 꿍꿍이가 있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일일이 고르기 힘드시면 모두 다 거절해 버리십시오. 전하.”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이걸 누가 보낸 줄 아느냐? 제현공(齊賢公)이 보냈다. 손자들을 데리고 오겠다는구나.”

“제현공이면 평안대장군(平安大將軍)이셨던 분이 아닙니까. 무서운 분이지만 무예가 뛰어난 자를 아주 아낀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기회에 친분을 쌓아두는 것도 좋은 일이지요.”

“좋기는 무슨. 늙은이들이 재미있겠다 싶으니 덤벼드는 게지.”

진혁위는 수북이 쌓인 서신들을 보며 혀를 찼다.

비무를 청하는 서신은 크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하나는 영왕 진혁위에게 줄을 대려는 자. 또 하나는 비무를 가장해 류희겸에게 해코지를 가하려는 기왕과 태자의 세력들. 마지막은 진심으로 류희겸과 실력을 겨뤄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었다.

제일 까다로운 것이 마지막이었다. 제현공과 같이 정쟁에 신경 쓰지 않는 고지식한 무가의 사람들이었다. 특히 평안히 은퇴한 노장군들은 진혁위조차 무시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잘못 어울렸다가는 도당을 만든다는 소리를 듣기 딱 좋아서 꽤나 곤란하다는 점이었다.

태자를 치기로 한 것은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채제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황제가 힘을 실어주려고 하는 바람에 관심을 분산시킬 필요가 컸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직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지고의 제좌를 노릴지, 아니면 저 멀리 떠나버릴지.

진혁위는 가볍게 콧방귀를 끼었다. 계획대로 류희겸을 내원에 잘 숨겼다면 결정을 내릴 시간이 충분했을 터였다.

“역시 다리를 잘라버릴 걸 그랬어.”

“왕야. 자꾸 그리하시다가 귀비 마마께도 험한 말을 하시면 어쩌시려고요. 조심하셔야지요.”

“걱정 마라. 이미 했다.”

진혁위를 향해 충언을 하던 우소진은 주름진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이미 망해버린 연애를 어디서부터 수습해 드려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우소진이 한탄을 하든 말든 한 번 찌푸려진 진혁위의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진혁위는 자기 자신에 대해 냉정하게 관조할 줄 알았다. 기분이 이렇게 저조한 이유는 서신 때문이 아니었다.

“웃었어.”

“예? 무어라 하셨습니까?”

“네게 한 말이 아니다. 나가 보아라.”

우소진을 쫓아낸 진혁위는 구겨진 미간을 한 번 더 구겼다. 오늘 오후의 기억이 마치 그림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비녀를 선물해도 그저 얼굴을 굳히고 마는, 향기로운 술을 마셔도 눈가가 조금 풀어지는 것 말고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류희겸이 희일준을 보고 웃었다. 무심하다 못해 목석같은 인간이 부드럽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사실 류희겸의 미소를 보자고 데려온 것은 아니었다. 지난 경험을 반석 삼아 류희겸을 내원에서 꼼짝도 못 하게 가두어두려고 했다. 거기엔 류희겸의 의사 따위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다. 애교 없다, 눈치 없다 타박하기는 했지만 류희겸에게 정말 애교와 눈치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희일준을 향해 웃는 모습을 보고는 속이 시렸다. 가슴을 죄는 불유쾌한 감각이 질투라는 것을 알지만 인정할 수가 없었다.

욕이 절로 나오려고 했다. 질투라니. 정인이라 믿었던 이가 훌쩍 떠나버렸던 것만큼이나 불합리한 기분이었다.

“전하. 우소진입니다. 들겠습니다.”

“들라.”

깊어지려는 생각을 털어버린 진혁위는 우소진을 안으로 들였다.

“무슨 일이냐?”

“채진의 짐에서 이런 게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우소진이 내보인 것은 하얀 손수건에 싸인 작고 검은 환약 대여섯 알이었다. 일반적으로 시종들이 가지고 있는 소화제나 진통제 종류의 환약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우 태감이 굳이 내미는 것을 보면 특별한 게 분명했다.

“무엇이냐?”

“옥안인(玉雁仁)의 말로는 독이라고 합니다.”

채진은 영왕부의 외원에서 잡일을 하는 종복이었고, 옥안인은 영왕부에서 상주하는 의원이었다. 그리고 채진은 얼마 전에 기왕의 간자가 되었다.

“2형께서는 늘 한결같아서 좋아.”

진혁위는 환약을 손수건째로 받아들고는 혀를 찼다.

기왕이 형제들과 정적을 견제하는 방법은 언제나 똑같았다. 형제나 정적의 수하나 종복들의 약점을 잡아 독을 손에 쥐여주었다.

가족이 인질로 잡힌 이들은 실패를 가정하고 주인이 마실 차에, 음식에, 우물에 독을 뿌렸다. 대부분은 성공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열에 하나 정도는 독을 마셔 죽거나 불구가 되었는데, 그중에 한 명이 4황자였다. 어느 황자보다 명석하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가 깨어났는데 오른팔과 오른 얼굴이 굳어버렸다. 중독된 것은 명백했으나 누가 어떻게 독을 썼는지는 끝끝내 알 수 없었다.

태자와 기왕에 이어 제좌를 노리던 4황자는 봉작을 받은 이후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진혁위 역시 몇 번이고 기왕에게 독살 위협을 받았다. 하지만 봉작을 받아 왕부로 나오면서 수하들과 종복에 대한 관리 감찰을 강하게 하여 지금처럼 사전에 독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왕의 방법은 늘 같았기에 큰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채진을 죽이고 내다 버려라.”

진혁위는 냉정하게 명령을 내렸다. 채진의 약점은 가족이 아니라 술이었다. 술 때문에 사람을 크게 상하게 하고는 기왕의 손에 걸려들어 주인을 배신했으니 죽여야 했다.

“이것은 잘 버려두어라. 쓰고 싶은 곳이 있으면 쓰고.”

“살벌한 말씀 마십시오. 소인이 이런 흉한 것을 쓸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독환약을 받아들며 약한 소리를 한 우소진이 서재를 빠져나갔다. 진혁위는 책상 위에 쌓인 서신들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기왕이 독을 보내는 시기는 대중없었다. 그래도 태자가 손을 쓰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던 진혁위는 공교롭다 여겼다.

태자가 움직일 장기말은 맹진화가 분명한데, 아직도 그녀가 어찌 나올지 파악하지 못했다. 태자는 멍청하지만 그의 밑에 있는 수하들은 꽤나 악독했다. 오히려 독을 보내는 기왕이 얌전한 편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다 귀찮군.”

황제가 되고자 하는 생각이 없는 진혁위는 암투가 귀찮았다.

살아남기 위해 정적의 정보를 모으고 아랫사람을 감찰하고 있기는 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을 내다 버리고 멀리 떠나버리면 그만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아직 때가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한 진혁위는 답장을 쓰기 위해 서신을 정리하다가 한 번 더 미간을 찌푸렸다. 답장을 써야 한다는 귀찮음 때문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떠오른 류희겸 때문이었다. 마치 냇물이 흘러 드넓은 대해로 가는 것이 당연한 것과 같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각은 어색했다.

“쯧.”

진혁위는 혀를 찼다.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것이 이렇게 화가 날 줄은 몰랐다.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가볍게 연애 놀음을 하자는 것이 진지해져 버렸다. 놀이는 놀이에서 끝내야 했다.

◇ ◇ ◇

영왕의 혼례식이 열린 것은 청명한 가을날이었다. 류희겸의 사정으로 혼례식의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자인 영왕의 명성만큼이나 호화스러운 혼례식이었다.

특히 하나뿐인 아들의 혼례에 감격한 혜비는 아낌없이 황금을 썼다. 신혼동방은 혜비가 직접 보낸 붉은 비단으로 호화롭게 꾸며졌다.

아직 해가 높게 떠 있어 환하게 밝은 신혼동방에 오도카니 앉은 류희겸은 복잡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신혼 첫날밤을 기다리는 신부의 두려움이나 혼란이 아니라 과거의 회한에 가까웠다.

스물다섯이 될 동안 류희겸은 약혼을 두 번 했지만 혼인은 한 적 없었다. 류희겸을 어려서부터 돌본 고모가 혼인을 시키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연이 닿지 않았다. 염세 시찰을 떠나기 직전에, 고모가 엄포를 놓았다. 올해가 가기 전에 무조건 혼인을 결정 지을 거라고.

여섯 번을 죽는 동안에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기억이 신혼동방에 앉아서야 생각났다. 저승에 계시는 고모가 화려한 수가 놓인 붉은 비단쓰개를 쓰고 있는 자신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하실지 문득 궁금했다.

고모는 여장부셨다. 그렇게 혼인을 미루다가 결국 상대가 대연국의 황자냐고 한소리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무디게 퇴색되었던 그리움이 오늘따라 짙어졌다. 회귀하는 시점이 언제나 연주성 감옥에 갇힌 그때라는 것이 한스러워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달만 빨랐으면 어떻게든 손을 쓸 수 있을 텐데.

바뀌지 않는 과거를 원망하는 것은 소용이 없었다. 그럼에도 가슴 한쪽이 계속 무거움을 호소했다.

“마마. 시장하시지요.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져왔습니다. 드셔보세요.”

눈을 내리깔며 무릎 위에 올려둔 손등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류희겸은 고개를 들었다. 붉은 쓰개 너머로 우풍이가 탁자 위에 떡이 담긴 그릇을 올려두는 것이 보였다.

“고맙구나.”

“떡이 맛있어요.”

“그래.”

“드시고 싶은 거나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제가 가져올게요.”

“괜찮다.”

“과일이 좋겠어요. 그리고 왕야께서는 꼭 오실 거예요. 신랑이니까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한 우풍이가 그대로 뒤돌아 신방을 나가는 것을 보며 류희겸은 쓴웃음을 삼켰다. 어린아이의 위로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경사스러운 혼례식인데도 불구하고 우풍이는 물론이고 경화당의 시종들은 자신을 불쌍하고 가련한 신부로 여기고 있었다.

사실 혼례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류희겸이 한 일은 거의 없었다. 혼례복을 맞추기 위해 신체 치수를 재고, 자신 앞으로 온 선물을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친영이 생략된 상황에서, 혼례식은 영왕부에서 치러졌다. 교배(交拜)와, 동뢰(同牢), 합근(合巹) 등의 의식이 끝난 후에 류희겸은 신혼동방에 홀로 남았다. 그리고 진혁위는 축하연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평범한 혼례식의 풍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풍이가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고, 시종들이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는 것은 진혁위 때문이었다. 태자부에서 비무회를 하고 돌아온 그날 이후로 진혁위의 태도가 급변했다.

류희겸에게 침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라고 엄명했던 날 이후로, 교접이 없어도 두 사람은 늘 한 침상을 썼다. 조반과 석반은 늘 같이 먹었다.

류희겸이 침전을 나서 경화당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화잠과 장잠 등의 비녀를 비롯한 값비싼 것들은 모두 경화당으로 향했다. 영왕부의 시종들은 두 사람의 혼인이 황제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고 자기네들끼리 떠들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태자부에서 비무회가 열린 다음날부터였다. 그때부터 바로 어제까지 열흘이 넘는 기간 동안 진혁위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또한 류희겸은 경화당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진혁위의 변화에 경화당 시종들이 귀비 마마께서 벌써 냉대를 받는 거냐고 당황한 것은 당연했다.

열흘이 넘도록 진혁위를 못 만난 류희겸은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연애 놀음이 끝난 건가 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처음부터 진혁위는 류희겸을 경화당에 처박아 둘 거라고 공언을 했었다. 오히려 다리 하나를 잘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먹을 것이나 쓸 것들도 딱히 나빠지거나 하지 않아서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그러다 심양설이 영왕야께서 최근 바쁘시다고, 하지만 혼례식에서는 얼굴을 비춰주실 거라고 에둘러 위로해 준 덕분에, 시종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창문 너머에서 시종들이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어쩌면 진혁위가 신혼동방을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려하고 있었다.

오늘 혼례식 내내 진혁위는 흥겨운 신랑의 모습이었다. 류희겸은 진혁위가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는지 궁금했지만, 아무래도 좋다고 여겼다. 가을 수렵제에 동행하기로 한 약속만 깨지 않으면 된다. 진혁위가 한 번 제 입으로 약속한 것은 어떻게든 지키는 남자라는 것을 믿었다.

밤에 보면 확답을 받아봐야 하나.

그날, 번루에서 돌아올 때 진혁위의 기분이 묘하게 나쁘긴 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괜히 심기를 건드려 수렵제에 데려가지 않겠노라고 해버리면 곤란했다.

진혁위의 분위기를 살펴야겠다고 결정을 내린 류희겸은 떡을 입에 넣었다. 이른 아침부터 치장을 하며 부지런히 움직였는데, 하루 종일 입에 넣은 것이라고는 술 한 잔과 차가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떡이 달고 맛있었다.

“마마. 소인입니다.”

이번에는 심양설이 나타났다. 그녀가 찻잔을 떡 그릇 옆에 살짝 놓았다. 떡을 먹자 차를 마시고 싶었던 류희겸은 기분이 좋아졌다.

“고맙네.”

“마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허리를 숙인 심양설의 조용한 말에 막 찻잔을 들어 올리려던 류희겸은 멈칫했다. 쓰개 때문에 심양설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 진지함이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

“놀라지 마세요. 맹진화가 안채 서재에 숨긴 서신을 발견했습니다. 왕야의 명이 있어 맹진화는 붙잡지 않았고, 서신만 따로 빼돌려 왕야께 전했습니다.”

심양설이 전한 내용에 류희겸은 다시 한번 더 굳어버리고 말았다. 서재에 숨겨둔 서신. 어딘가 익숙했다. 직전 생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서신의 내용은 아는가? 맹진화는 어찌 잡았나?”

“감히 입에 올리기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을 맹진화가 숨긴 걸 몰랐다면, 마마께서 오해를 받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맹진화는, 왕야의 명으로 계속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맹진화가 태자부의 궁녀에게 왕부의 일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런.”

“또한 왕야께서 마마에게 전하라 하신 것이 있습니다. 손님이 찾아갈 테니 일을 크게 키우라고 말입니다. 그리 말을 하면 마마께서 아실 거라고요. 신혼동방에 누가 손님으로 찾아온다고 하시는 건지 소인은 도통 모르겠습니다.”

류희겸은 대충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눈치챘다. 태자 쪽에서 맹진화를 이용해 증거를 심어두었으니 이용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럼 혹시…… 축하연에 모씨 형제들이, 그러니까 모영록이나 모영균이 참석했나?”

“좌승상의 장자인 모영균이 참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례품을 잔뜩 들고 와서는 왕야께 동생의 무례를 사죄하였는데, 뻔뻔하기도 한……. 설마, 그가 찾아오는 건 아니지요?”

왕부의 내원에 친지가 아닌 사내가 방문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무엇보다 오늘은 혼례날이었다. 사내 손님이 찾아오는 일은 천부당만부당했다. 하지만 그 설마 하는 일이 곧 일어날 것이다. 류희겸은 확신했다.

“양설. 확인할 것이 하나 있네.”

한 번 경험한 일이 있어, 류희겸은 차분히 명령을 내렸다.

*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경화당의 수화문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사내 여럿이 경화당에서 일하는 어린 사내 시종을 봐야겠다며 들이닥친 것이다.

신혼동방이 차려진 내원의 전각에 외부에서 온 사내들이 드나드는 것은 무례를 넘은 폭거였다. 시종들이 막으려고 애를 썼지만 사내들은 모두 태자부의 시위였다. 몸이 건장하다 해도, 일반 시종들이 당해내기란 역부족이었다. 결국 네 명의 사내들이 경화당의 안뜰을 점거하고 섰다.

“어서 어린 시종 놈을 데려와라. 그래야 물러나든 말든 할 게 아니냐!”

사내들을 대표하며 버럭버럭 소리를 내지른 이는 모영균이었다. 친왕의 혼례날에 소란을 피운 것으로 꼬투리를 잡히면 불경죄로 탄핵을 받다 못해 귀양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모영균은 자신만만했다.

예전부터 회유해 놓은 영왕부의 시비를 시켜 경화당의 안채에 류희겸이 간자라는 증거를 심어놓았다. 그것도 만약을 대비해 혼례식 당일인 오늘 일을 도모했다.

시비에게서 증거를 심어두었다고 연락이 온 것은 바로 반 시진 전이었다. 그사이에 증거가 사라졌을 리 만무했기 때문에 모영균은 자신만만했다. 류희겸이 간자라는 증거만 찾는다면 영왕부 내원에서 소란을 피운 것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서 나오너라! 여길 다 뒤지기 전에!”

“여기는 영왕야의 귀비께서 머무르시는 내전입니다. 외간 사내가 와서 소란을 피울 곳이 아닙니다.”

안채에서 나온 것은 류희겸이 아니라 심양설이었기에 모영균은 실망했다. 그래서 더욱 행패를 부렸다.

“나는 태자부의 장위(長尉)인 모영균이다. 여기에서 일하는 어린 종복이 내 옥패를 가져갔다. 그것은 선황 폐하께서 하사하신 황패(皇佩)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안다면 어린 종복 놈을 내놓아라!”

“모 장위께서는 귀물을 경화당에서 일하는 어린 종복이 가져간 것을 어찌 아십니까?”

“여기 있는 손환 시위가 보았다. 영왕부에서 일하는 어린 종복은 한 명뿐이라고 하던데, 경화당의 귀비는 도둑놈을 숨겨둘 작정인가?!”

무서울 게 없는 모영균은 류희겸이 들으라는 식으로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그 때 드디어 붉은 비단쓰개로 얼굴을 가린 류희겸이 우풍이와 함께 나타났다.

“드디어 나타나셨군요! 귀비 마마. 저 종복이 내 옥패를 가져갔습니다. 어서 내놓으라고 하십시오!”

“아닙니다. 소인은 절대 그러지 않았습니다.”

우풍이가 그 자리에서 부복하며 덜덜 떨었다. 하지만 모영균은 그걸로 넘어갈 위인이 아니었다.

“다들 아니라고 하지. 저놈을 뒤져라!”

모영균의 명령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내 셋이 우루루 움직여 우풍이를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걸 막은 것은 류희겸이었다.

류희겸은 모영균을 노려보았다. 그의 수법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거짓 증거를 심어 만천하에 공개해서는 사람을 궁지에 몰았다. 직전 생에, 모영균의 함정에 빠져 부하를 하나 잃고서 얼마나 분기를 삼켰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류희겸은 모영균을 충동질했다.

“모 장위,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자신이 있나?”

“귀비께서는 황패가 무엇인지 모르십니까? 황패를 찾은 다음에 죄를 가름하겠습니다.”

“우풍이에게는 없다.”

“그럼 여기 어딘가 숨겼겠지요. 마마. 안으로 들어가 옥패를 찾아봐야겠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 무례를 범하고도 당당하다니, 부끄럽지 않느냐? 조용히 물러간다면 용서해 주겠다.”

“일을 크게 만드십니다. 좋습니다. 뒤져라!”

뒤지라는 명령에 사내들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시종들이 안채만은 안 된다는 마음으로 몸을 던져 막았지만, 이번에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실랑이 속에 사내들이 안채를 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본당을, 나중에는 서재를 뒤졌다.

모영균은 월대 위에 서서 꼼짝도 못 하고 얼어버린 류희겸을 보며 한껏 비웃어주었다. 일을 크게 벌이기는 했지만 화병 안에 들어 있을 옥패가 나오면 명분도 충분했다. 또한 옥패를 찾으려다가 서랍 안에 숨겨둔 간자의 서신을 발견했다고 하면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

서재 입구와 가장 가까운 화병에 옥패를 숨겨두라고 했다. 그리고 서신은 검은색 겉봉에 싸여 있어 한눈에 봐도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황궁의 내부 지도까지 끼워두었으니 증거로서는 충분했다.

종복의 무고를 믿는 류희겸이야 태평할 것이다. 하지만 서랍 안에 숨겨둔 증거가 나온다면 붉은 비단 아래 가려진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지 궁금했다.

흐뭇하게 웃으며 안뜰에 당당하게 서 있던 모영균은 시간이 지나도록 발견했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 와중에 사내 한 명이 다가와 귓가에 아무것도 없다고 속삭였다.

“그럴 리가 없다. 얼른 찾아라.”

재촉을 하면서도 모영균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명히 서재 화병 안에 숨겨놓았다고 했는데, 그걸 이렇게까지 오래 찾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설마, 함정일까. 회유한 지 오래인 영왕부의 시비가 이제 와 배신을 했다고? 모영균은 최악의 가능성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 때였다.

“이게 무슨 소란인가?!”

화가 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모영균은 뻣뻣하게 굳었다. 뒤를 돌아보니 영왕이 수화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황제의 사촌인 능군왕(能郡王)과 능군왕비(能郡王妃)가 함께 했다.

그들의 등장에 경화당의 안채를 뒤지고 있던 사내들이 사색이 되어 안뜰로 뛰쳐나왔다.

“모영균. 감히 본왕의 귀비를 겁박하는가?!”

상황을 파악한 진혁위가 모영균을 향해 사납게 외쳤다. 모영균은 강력하나 어설픈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영왕야. 그게 아니오라, 저기 있는 종복이 저의 황패를 훔쳤습니다. 선황제께서 하사하신 황패 말입니다.”

“그게 본왕의 혼례식날, 신혼동방을 뒤질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나?!”

“황패가 어떤 의미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황패의 의미가 아니라, 일의 선후를 옳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황제가 하사한 황패는 일종의 면벌부로, 역모만 아니라면 어떤 죄든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상징이었다.

모영균은 아홉 살의 나이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려던 선황제를 몸으로 막아 황패를 하사받았다. 어린 소년에게는 과한 선물이었으나 선황제의 뜻은 확고했다.

선황제의 뜻이 담긴 황패와 친왕의 혼례식 중에 무엇이 더 소중한지 우열을 가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진혁위의 말대로 모영균은 앞뒤 가리지 않고 일을 벌였다. 어린 종복이 황패를 훔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영왕에게 알려 조용히 처리하는 게 옳았다.

모영균 역시 자신의 실수를 잘 알고 있었다. 류희겸이 간자라는 증거만 찾는다면 이런 소란 따위야 얼마든지 무마될 수 있었지만, 지금 자신의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모영균은 더욱 뻔뻔하게 굴었다.

“저 종복이 황패를 어떻게 팔아먹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황패입니다. 영왕야!”

“잠시. 모 장위는 이것을 보라.”

진혁위와 모영균의 대립에 앞으로 나선 것은 능군왕이었다. 그가 품속에서 옥패를 꺼내어 앞으로 내보이자 모영균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그리 찾던 황패가 능군왕의 손에 있었다.

순간 모영균은 능군왕과 영왕이 손을 잡은 것인가 의심했다.

능군왕은 정치에는 관심 없는 황친이었지만, 드넓은 봉작지와 외가에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태경에서도 손꼽히는 거부였다. 금권 역시 권력이었기에 능군왕은 꽤나 큰 입김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결합은 또 다른 변수였다.

머릿속에서 앞으로의 정세를 계산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이럴 수는 없었다.

“그, 그것이 어떻게…….”

“연회장에 떨어져 있던 것을, 경훈공(慶勳公) 대부인이 주워 내게 주었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이리 무도한 일을 벌이다니. 이대로 넘어갈 거라 생각하지 마라. 내 황제 폐하께 고할 것이다. 감히 황패를 핑계로 친왕의 혼례식을 훼방 놓다니.”

“그게, 제가 착각을 하였습니다.”

“시위들은 무얼 하느냐. 당장에 저놈을 끌어내라!”

분기탱천한 능군왕의 명령을 받은 시위들이 모영균과 사내들을 끌어내는 것을 지켜보며 류희겸은 커다란 소매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모영균은 황패를 가지고 있으니 벌은 받지 않겠지만 그래도 통쾌했다.

상황이 진정되자 능군왕과 능군왕비가 진혁위에게 인사를 하고는 경화당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남은 진혁위가 류희겸에게 다가왔다.

“놀라지 않았느냐?”

“예.”

“아기 새처럼 떠는 것은 용감한 귀비와는 어울리지 않지. 그럼 되었다.”

웃음기가 묻어나는 칭찬 아닌 칭찬에 류희겸은 진혁위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거추장스러운 쓰개를 치워버리고 싶은 것을 참는 사이에 진혁위가 류희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조심조심 걸어 도착한 곳은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류희겸이 앉아 있던 침상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밤에 하자.”

“예.”

“잘했다.”

진혁위는 길게 말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나갔다. 다시 혼자가 된 류희겸은 천천히 침상에 걸터앉았다.

건너편 서재에서는 시종들이 어질러진 것을 치우느라 부산했지만 류희겸의 귀에는 그 소란이 들어오지 않았다.

직전 생의 악연 중에서 태자와 모씨 부자는 정말 최악이었다. 모영록의 비겁한 수법에 다리가 망가졌고, 모영균의 함정에 빠져 부하를 잃고 태자의 마수에 걸려들었다.

그들을 향한 원한은 깊었지만 이번 생에서 그걸 제대로 갚을 길은 막막했다. 그래서 사소한 것들은 무시하고 진한재를 죽일 생각만 했는데, 무슨 일인지 우연찮게 모씨 형제에게 되갚아 줄 수 있게 되었다. 옥패를 핑계로 간자의 증거를 찾아내는 방법은 그대로였기에 제대로 대비할 수 있었다.

물론 모영록을 망신 주고 모영균을 궁지에 모는 것은 제대로 된 복수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저 악연만 더 쌓였을 뿐이었다. 정적을 제거하는 방법은 철저하게 몰락을 시키거나 죽이는 것뿐이었다.

류희겸은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은 모략과 음모에 능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목표를 향해 우직하게 싸워나갔었는데,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할지도 몰랐다.

*

등불 하나 없는 창고를 밝히는 것은 작은 창 너머로 흘러드는 달빛뿐이었다. 재갈을 입에 물고 밧줄로 온몸이 기둥에 묶인 채 창고에 갇힌 맹진화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몇 번이고 생각했다.

황궁에 있었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태자부의 궁녀에게 서신뭉치와 옥패를 건네받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혼례식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던 탓에 누구도 자신의 행동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서신과 옥패를 경화당의 안채 서재에 숨긴 것도 마찬가지였다. 신혼동방에서 신랑 신부가 술잔을 들어 올릴 때, 맹진화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서신은 안채의 서재 서탁 서랍에, 그리고 옥패는 화병 안에 숨겨두었다.

모든 것은 완벽했다. 모영균이 경화당을 습격해서 난장을 피울 때도 경화당 밖에서 다른 시종들과 함께 고소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옥패와 서신이 발견되어 류희겸이 끌려가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볼 생각에 기뻤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신이 숨겨둔 것들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맹진화는 눈치가 매우 빠른 편이었기에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일을 했다. 자신이 한 일이 들키지 않았으리라는 자신감은 있었다. 오히려 문제는 태자 쪽이었다. 일부러 함정에 빠트리려고 자신이 거짓말을 했으리라 오해를 받을 수 있었다.

도망을 쳐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이었기에, 창고에서 의자를 가지고 오라는 지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혼자가 되자 영왕부의 노복들에게 붙잡혀 창고에 갇히고 말았다.

어디서 잘못된 거지. 설마 눈치챈 건가. 맹진화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혼자서는 어떤 답도 내리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해가 진 것은 오래였고, 밤은 깊어갔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혼례식에서 시비 하나 사라져도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배가 고팠다. 피가 통하지 않아 팔다리가 저렸다. 하지만 그것보다 사람을 묶고 재갈을 물린 시점에서 이미 처우는 정해진 상황이나 마찬가지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찌나 밧줄을 꽁꽁 묶어놓았는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덜컹. 이대로 끝날 수 없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드디어 창고 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처음에 나타난 것은 행등을 든 노복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무서운 얼굴을 한 우소진과 건장한 시종 몇이 더 따라 들어왔다

“읍. 읍!”

맹진화는 반가움과 두려움에 자신이 여기 있다고 외쳤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러시냐고, 자신은 혜비께서 보낸 사람이라고 읍소하고 싶었지만 재갈 때문에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은자 몇 냥에 주인을 배신했단 말이지.”

“읍. 으읍. 읍.”

설마 하고 의심하고 있었던 맹진화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서신과 옥패를 숨긴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우소진의 눈빛은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맹진화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태자부의 궁녀 배영화에게 영왕부의 정보를 조금씩 흘리며 약간의 은전을 받고 있었다. 하인들끼리 주변 이야기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은전도 명절이면 으례 받는 것이라서 대가성이 없다고 제멋대로 생각했다.

그러다 맹진화가 류희겸을 따라 입궁하자, 배영화가 함께 일을 도모해 보지 않겠냐고 접근해 왔다. 화진국의 간자가 분명한 사람을 내쫓자며, 경화당의 안채 서재에 증거를 숨겨놓으라고 했다. 제대로 숨겨놓기만 하면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한다는 말에 맹진화는 희열을 느꼈다.

대가로 주어진 금전도 탐났지만, 그것보다 류희겸이 간자로 몰려 감옥에라도 갇히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하겠노라 승낙했다.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되고 말았다.

입에 물린 재갈이 원망스러웠다. 그자는 간자가 맞다고. 영왕야께서 속고 계신다고. 진실을 전해야 하는데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얼굴이 눈물로 젖으며 맹진화는 가련한 모습이 되었지만 우소진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주인을 배신한 종복은 용서받을 수 없었다.

우소진의 눈짓에 대기하고 있던 종복들이 맹진화의 재갈을 풀고는 강제로 입 안에 약을 흘려보냈다. 기왕이 보낸 독약은 효과가 좋아 맹진화는 몇 번 몸부림치다가 곧 축 늘어졌다. 맹진화의 죽음을 확인한 우소진은 은밀히 처리하라 명하고는 창고를 빠져나왔다.

종종걸음으로 편전으로 가자 혼례복을 입은 진혁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소진은 좋은 날이니 흉한 일은 나중으로 미루자고 했지만 진혁위는 강경했다. 직접 맹진화를 보기 위해 걸음하겠다는 진혁위를 겨우 말릴 수 있었다.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러냐.”

“허니 여기서 이러시지 마시고 어서 가셔야지요. 귀비 마마께서 기다리실 겁니다.”

연회는 이미 끝난 후였고 손님들도 모두 돌아간 다음이었다. 그런데도 진혁위는 신혼동방에 발걸음을 하지 않을 모양새라 우소진은 애가 탔다. 경화당의 시종들과 마찬가지로 우소진 역시 진혁위가 열흘 넘게 경화당을 찾지 않은 것을 신경 쓰고 있었다.

“신랑인 나보다, 어찌 네가 더 동동거리느냐?”

“혼례 첫날밤에 신부를 홀로 두시는 일은 하지 않으시겠지요? 그러시면 제가 혜비 마마께 벼락을 맞습니다.”

“그게 뭐 대수라고. 어머니께서 널 죽이시겠느냐?”

“전하.”

우소진은 간절히 진혁위를 불렀다. 아무리 진혁위가 제멋대로라고 하나 첫날밤에 신부를 박대하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낮에 험한 일이 있었으니 귀비 마마를 위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자.”

“예.”

한참을 고민하던 진혁위가 결국 무거운 엉덩이를 들자 우소진은 활짝 웃으며 뒤를 따랐다.

*

경화당에 도착한 진혁위를 맞이한 것은 침상 기둥에 기대어 쪽잠을 자고 있는 류희겸이었다. 진혁위는 붉은 쓰개조차 벗지 않은 채 잠들어 있는 류희겸을 굳이 깨우지 않았다. 대신에 심양설과 우소진을 내보내고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류희겸의 숨소리를 들었다.

진혁위가 알고 있는 류희겸은 사람의 기척에 민감했다. 잠귀도 밝아 자신이 조금만 뒤척여도 금방 깨곤 했다. 방사 후에 완전히 지치지 않고서야 잠든 얼굴을 쉬이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는 걸 보면 꽤나 깊게 잠든 모양이었다.

붉은 비단쓰개 너머에 있을, 보이지 않는 얼굴을 그리며 진혁위는 소리 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때, 도대체 왜 그랬느냐고.

하지만 그건 지금의 류희겸이 대답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배신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진혁위는 길게 숨을 내쉬며 평정을 유지했다. 같은 생을 두 번 살다 보니 한 번씩 시간의 선후 개념이 혼란스러워지곤 했다.

스물네 살에 죽은 진혁위가 다시 눈을 뜨자 열여섯 살이 되어 있었다. 무슨 조화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같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황위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손에 쥐고 있지 않다면 그저 장기말로 쓰이다가 치워질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식솔과 종복들을 감시하고 태자와 기왕의 정보를 모으는 것도 모두 지난 생에서 경험으로 얻은 지혜였다.

열여섯 살에 눈을 뜨고 사 년이 흐르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대로 판을 깔아놓았다. 다만 눈앞의 사내만큼은 여전히 종잡을 수 없었다.

지난 생에서 류희겸을 노비로 사들여 황제에게 바친 것은 백진호였다. 진혁위는 이번 생에 백진호가 류희겸을 사기 전에 먼저 손에 넣을 계획이었다. 죽이든 살리든. 류희겸을 보고 난 다음에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말간 얼굴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자신을 직시해 오는 눈을 마주했을 때, 자신이 그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육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쌓인 원망을 거의 모두 내던졌다고 여겼다. 하지만 다시 살아 있는 그를 확인하자 복잡한 감정이 요동쳤다. 배신의 원망이, 상실의 절망이, 그리고 왠지 모를 감격과 기쁨이 뒤섞였다.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모두 보류했다. 자신이 받은 것을 되갚아 주겠다 마음먹고는 가볍게 연애 놀음을 해보았다. 배신 자체를 못 하게 내원에도 가두었다. 또한 손에 쥔 그를 마음대로 흔들어도 보았다.

자신이 반쯤 미치기는 했지만 분풀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마음 가는 대로 했다. 만월제전에서 류희겸의 어깨에 칼을 꽂아 넣고 다리를 부러뜨린 것도 같은 의미였다.

애석하게도 딱딱한 사내는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폭력에 굴하지 않았고, 귀한 것을 받아도 웃기는커녕, 힘든 일에도 얼굴 한 번 제대로 찡그리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더 애태우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천신께, 부처께,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령스러운 존재에게 이건 너무 부당한 것이 아니냐고 항의하고 싶을 정도였다. 제 뜻대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 끔찍했다.

이전 생에, 류희겸의 배신으로 태자에게 목줄을 잡혔었다. 그 일만 생각하면 살의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그가 피범벅이 되어 마지막 숨을 내쉬던 모습도 함께 떠오르며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이 서늘한 감정을 털어내려면 다리를 잘라버려야 하는 것인지, 목을 잘라버려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생각에 앞서, 그를 쉬이 놓지 못하리라는 것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류희겸.”

혼란스러운 마음을 인정한 진혁위는 조용히 류희겸을 불렀다. 기둥에 기대어 잠들어 있던 류희겸이 움찔하고 놀라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냥 잘까……?”

류희겸의 혼잣말은 딱딱한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어딘가 어설펐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보이는 바람에 진혁위는 부지불식간에 웃고 말았다.

작은 인기척이었지만 그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린 류희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붉은 쓰개를 내던지는 것과 동시에 머리를 틀어 올려 꽂은 비녀를 뽑아 들며 뛰쳐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화려한 혼례복을 입고 느긋하게 앉아 있는 진혁위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는 자객이 아니라 귀비의 신랑이다. 그러니 긴장 풀어라.”

무엇이 재미있는지 입술 끝을 올리며 웃고 있는 진혁위 때문에 맥이 빠진 류희겸은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 정신이 돌아와서는 다시 일어나 예를 올렸다.

“영왕야를 뵙습니다.”

“딱딱하기는. 예는 되었다. 앉아라.”

“감사합니다.”

류희겸은 자리에 앉으면서 바닥에 내던진 쓰개를 슬쩍 보았다. 진혁위를 기다리며 오기로 쓰고 있었던 것인데 이렇게 자신의 손으로 벗어 던지게 될 줄은 몰랐다.

“피곤했던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괜찮다. 불편한 자세로 자고 있는 모습이 애처로워서, 차마 깨우지를 못했다.”

“예.”

앞뒤가 맞는 말이 아니었지만 진혁위의 성정을 아는 류희겸은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진혁위는 무심하게 구는 류희겸을 보며 다시 웃었다. 무뚝뚝하게 반응할수록 더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을 그는 모를 것이다.

“그래도 신랑도 알아보지 못하고 쓰개를 그리 내던지면 쓰나. 또 비녀는 왜 그리 꽉 쥐고 있고. 다시 머리에 꽂아야지.”

“죄송합니다. 소인이 당황하여…….”

류희겸이 허둥거리며 비녀를 제 귀 뒤에 꽂는 사이에 진혁위는 발치에 떨어져 있는 쓰개를 집어 들었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류희겸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꽤나 재미있었다.

쓰개를 손에 든 진혁위는 맨 얼굴이 된 류희겸을 보았다. 잠시 당황했던 류희겸은 다시 평정을 찾은 다음이었다.

“맹진화가 숨겨둔 황패는 어찌 찾았느냐?”

“심양설이 숨겨진 서신을 찾았다고 하는 것을 듣고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생각했습니다. 신혼동방을 뒤지려면 그럴듯한 핑계가 있을 거라 싶어 주변을 더 살펴보라 일렀습니다.”

“현명한 행동이었다. 황패가 발견되었다면 꽤 곤란해졌을 게다. 우풍이가 훔쳤으니 네가 사주했다고 할 위인들이니까.”

맹진화를 감시하던 시비가 황패를 놓친 것은 실수였다. 하지만 그 실수 때문에 류희겸이 정쟁에 휩쓸릴 수도 있었다. 적어도 우풍이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심양설이 조심스럽게 내미는 황패를 확인한 진혁위는 자신의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소인이 모씨 가문 형제들과 완전히 척을 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널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날 노린 것이다. 마음 쓰지 마라. 원래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귀비의 재치 아니었다면 나도 꽤나 곤혹스러워졌을 것이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말하거라. 상을 줄 테니. 아주 값비싼 걸 말해라.”

“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세 번은 권하지 않을 터이니, 한 번 더 생각하고 거절하는 게 좋을 것이다.”

진혁위는 류희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한 번 더 부추겼다. 물욕이 없는 남자가 무엇을 가지고 싶어 할지 궁금했다.

“사람을 사고 싶습니다.”

“사람?”

“고모부께서 지휘하시던 연림군(燕林軍)에 장수는 모두 아홉이었습다. 지금 연림군은 해체되어 일반병들은 퇴역을 하거나 다른 군에 편입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장수들은 대부분 광산에서 노역을 하고 있을 거라 예상됩니다. 그들을 사주십시오. 노역을 하고 있는 죄인은 돈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남은 노역 기간 동안 편히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 소인이 바라는 상입니다. 부담스러운 청이라는 거 압니다. 생각해 보시고 거절하셔도 됩니다.”

값비싼 걸 말하라고 했을 때 류희겸은 금은보화가 아니라 연림군의 장수들을 떠올렸다. 직전 생에 류희겸이 연림군의 장수를 찾으려고 했을 때 세 명은 혹독한 노역으로 죽은 지 오래였다. 여섯 명 중에 네 명을 대연국으로 데려왔으나 사건 사고에 휩쓸려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번 생에서 자신이 어떻게 되든지, 그들만큼은 모두 살리고 싶었다.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노역을 하고 있는 죄인을 사서, 편한 일을 할 수 있게 해라? 이곳으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소인의 출신은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예전의 부하들을 가까이 두는 것은 소인에게도 왕야께도 위험합니다. 부담스러우신 것도 압니다. 다시 말하지만 거절하셔도 됩니다.”

거절해도 된다고 거듭 말하는 류희겸의 딱딱한 말투에는 기대감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서 진혁위는 저도 모르게 발끈했다. 내가 겁쟁이냐고, 그것도 못 할 것 같으냐고 따지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진혁위는 지난 생에 류희겸이 데리고 다녔던 사내들을 기억했다. 그들 모두 말로가 좋지 않았다. 류희겸의 말대로 화진국에 남는 것이 그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좋다. 그들을 사주마.”

“영왕야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류희겸은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예를 올렸다. 류희겸의 벅찬 표정과 절도 있는 동작에 진혁위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렇게나 신중하고 은원에 철저한 인간이 자신을 배신한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인 류희겸을 보는 진혁위의 머릿속은 다시금 복잡해졌다. 이전 생의 류희겸을 정인이라 지칭했지만 실은 자신 혼자 속절없이 빠져든 것뿐이었다.

눈앞에 있는 류희겸은 자신이 그리워하고 미워한 그와는 다른 이였다. 괜한 분풀이라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었다. 또한 여전히 끌리고 있다는 것을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진혁위는 오랜 고민을 종결시켰다. 연애 놀음이 놀이로 끝나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면 그만이었다. 혼인을 하였으니 죽이든 살리든 이제 그는 자신의 것이었다.

“귀비는 일어나서 자리에 앉아라.”

“왕야의 명을 따릅니다.”

순순히 침상에 앉은 류희겸에게 다가간 진혁위는 손에 쥔 붉은 쓰개를 그의 머리에 덮었다. 류희겸은 예상하지 못한 진혁위의 행동에 흠칫 굳었다.

“왕야?”

“진짜 초야는 아니지만, 그래도 혼례날에 신부의 쓰개를 벗겨주는 것은 신랑의 몫이지.”

“예.”

류희겸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밤이 늦도록 진혁위가 얼굴을 비추지 않았음에도 류희겸이 쓰개를 벗지 않고 꿋꿋하게 버틴 이유가 그런 연유에서였다. 아예 소박을 맞았으면 모를까 뒤늦게라도 나타난 진혁위에게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신랑의 몫이라며 제 입으로 말한 진혁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했다. 잠시 기다리던 류희겸은 고개를 들어 앞에 선 진혁위를 보았다.

“혼인을 하였으니, 이제 귀비는 이제 내 사람이다.”

“……예.”

“대답은 잘하지.”

그제야 쓰개가 벗겨지면서 류희겸은 흥겹게 웃고 있는 진혁위를 볼 수 있었다.

“귀비는 얼굴이 예쁘다.”

“……?!”

“손도 예쁘지.”

“왕야?”

난데없는 칭찬에 류희겸은 진혁위의 인지 능력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자신의 얼굴이 그럭저럭 생긴 건 알지만 예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검을 오래 쥐어 굳은살이 배기고 상처가 잔뜩 난 손도 마찬가지였다.

의혹에 찬 류희겸의 시선에도 진혁위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자신의 눈에 예뻐 보이면 그만이었다.

“오늘 밤은 귀비를 잔뜩 울려야겠다. 귀비는 우는 모습도 예쁘거든.”

화사하게 웃은 진혁위는 류희겸의 턱을 잡고는 그대로 밀어 침상 위로 쓰러뜨렸다. 험한 취급에도 새신부가 된 사내는 저항 한번 하지 않고는 서늘한 눈으로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리 목석같이 굴어도 결국엔 쾌감에 흐느껴 우는 것이 매력이라고 생각하며 입술을 맞댔다.

그날 밤, 진혁위는 자신의 말을 착실히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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