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章
류희겸은 눈을 깜박거렸다. 차가운 돌바닥의 냉기와 습하고 눅눅한 공기, 그리고 곰팡이와 녹슨 철, 먼지, 오물이 뒤섞인 악취가 코를 찔렀다. 흐릿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철창 너머에서 흔들리는 주황빛 횃불이었다. 모든 것이 익숙했다.
류희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위락호가 아니라 연주성(蓮州城)의 감옥이었다.
명계의 염라대왕 앞이 아니라 연주성 감옥 안이라는 것은 자신이 다시 과거로 돌아왔다는 의미였다. 달빛이 비치는 작은 창도, 더러워진 수의도, 강철로 된 수갑에 묶여 벽에 고정되어 있는 것도 여전했다.
“다섯 번이 아니었던가.”
류희겸은 멍하게 중얼거렸다. 분명 능하족의 무녀는 다섯 명의 목숨이 더해졌다고 했다. 그는 다섯 번을 회귀했고, 모두 여섯 번의 생을 살았다. 그런데 다시 이곳에서 눈을 떴다.
한 번 더 회귀한 것이다.
뜻밖의 사실이 희열로 다가왔다. 무녀의 축례와 다른 회귀의 횟수를 의심하기에 앞서, 진한재에게 원한을 갚을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중요했다.
바로 직전의 여섯 번째 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오래 살지 못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네 번째 생에서는 연주성 감옥 안에서 눈을 뜬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죽었고, 첫 번째와 다섯 번째 생은 석 달 만에 목숨을 잃었다. 반면에 여섯 번째 생은 이 년을 넘게 버텼다.
이번 생에서는 아는 것이 더 많으니 제대로 된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천지신명께 복수를 맹세했지만 다섯 번을 되살아나고도 한을 풀지 못했다. 한 번 더 복수를 다짐한 류희겸은 뜨거워진 눈을 감았다.
화진국의 명문 무가에서 태어난 류희겸에게는 부귀영화가 약속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황제와 동복인 양정공주였고 아버지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장군이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산사태에 휩쓸려 일찍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류희겸은 고모 내외의 손에 사랑받으며 바르게 컸다. 성정은 곧고 예의가 발라 많은 이들이 그를 아꼈다.
물론, 마냥 평탄하기만 한 인생은 아니었다. 백녕 류가의 가주 자리를 두고 집안 어른들과 살벌하고 싸우고, 그 와중에 암투로 인해 무고를 당하기도 했다. 강도 높은 훈련을 받으며 어린 나이에 사람의 피를 손에 묻혔다.
나이를 먹으면서 단단하고 신중한 성격이 되었지만 본질적으로 류희겸의 목표는 단순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아끼고 나라에 충성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명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친구이자 주군이었던 숙왕 진한재의 배신이 죽을 만큼 아팠다.
새로이 눈을 뜰 때마다 원한은 더 깊어갔다. 복수를 한다 하여도 이대로라면 지옥조차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원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광기에 사로잡힌 자의 흔한 다짐대로 지옥에 떨어지든 원귀가 되든 아무래도 좋았다.
류희겸의 원수가 된 진한재는 화진국의 열아홉 번째 황자였다. 류희겸의 어머니는 황제와 동복 황녀였으니, 그와 진한재는 사촌 사이였다.
어려서부터 황궁을 출입한 류희겸은 자신과 같은 해에 태어난 진한재와 곧잘 어울렸다. 류희겸의 어머니와, 고모, 진한재의 어머니인 덕비는 서로 친인척 간이었고, 그래서 친분은 더욱 깊었다.
19황자인 숙왕 진한재는 모든 능력이 출중했으나 지고의 자리를 노리기에는 너무 늦게 태어났다.
화진국은 전통적으로 황태자를 세우지 않고 황제의 유언으로 후계자를 정했지만 황제는 노골적으로 적장자인 능왕(能王)을 총애했다. 숙왕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은 능왕은 오래전부터 세력을 만들고 키웠다. 모두가 능왕이 황통을 이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능왕이 왕부의 서재에서 밤을 보내다 죽은 것이 삼 년 전의 일이었다. 황제는 침통해 하며 죽음의 원인을 밝히라 했으나 그저 심장이 멈춘 거라는 결론만 나왔다.
모호한 사인을 두고 괴괴한 뒷말이 많이 나왔지만 능왕은 금방 잊혔다. 권력은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고, 곧 황자들 간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숙왕의 외조부는 승상이었고 고관대작과 문인들을 세력으로 두고 있었다. 외조부의 지원하에 숙왕은 세를 크게 불려갔고 거기에 류희겸 역시 한 팔 거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인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른 명에 가까운 황자들 중 숙왕만큼 뛰어난 자가 없었다. 그는 지혜롭고 현명했고, 아랫사람을 부당하게 휘두르지 않았으며, 대의를 알고 있었다.
류희겸은 진심으로 자신의 친우이자 주군인 숙왕이 권좌에 오르기를 바랐다. 하지만 숙왕은 믿음을 배반했다.
“류희겸.”
아주 오랜만에 듣는 숙왕의 목소리에 류희겸은 정신을 번뜩 차렸다. 기억과 다름없이 철창 너머로 숙왕이 나타났다.
강직한 문인의 얼굴을 한 숙왕은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초가 심했나? 얼굴이 말이 아니군.”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류희겸은 구역질이 나려는 것을 참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자신의 고모부에게 반역의 누명을 씌운 장본인이 서글퍼 하는 모습은, 몇 번이나 봐도 냉정하게 굴기 힘들었다.
황후에게는 능왕 말고도 황자가 하나 더 있었다. 사가에 비해 황가에서는 적자와 서자의 차이를 두지 않는 편이었지만 위세 높은 황후의 적통 소생이라는 것은 커다란 강점이었다. 특히나 12황자인 채왕(彩王)은 능왕과 빼어 닮아 황제를 기쁘게 했다.
그런 채왕이 류희겸의 고모부인 남준해 장군과 함께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발고가 있었다. 증좌도 증인도 명백해서 황제의 진노는 대단했다고 한다.
남부지역의 염세 시찰에 동행하고 있던 류희겸은 황제가 보낸 금군사자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나라에 충성하고 황제를 따르는 남 장군이 역모에 가담했다는 것은 정적의 음모가 분명했다.
하지만 류희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자리에서 금군사자의 목을 베고 남 장군의 무고함을 주장하여 거병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랬다가는 역모죄가 확정될 것이기에 류희겸은 순순히 붙잡혔다.
경릉으로 압송되는 길에서 류희겸이 알아낸 것이라고는 채왕과 남 장군이 붙잡혔다는 것뿐이었다. 류희겸은 남 장군의 억울함을 황제께서 밝혀주기만을 바랐다.
그랬기에 첫 번째 생에서는 숙왕의 등장에 안도하며 반가워했다.
“부황께서 너를 데려오라 명하셨어. 이번 일에 부황의 진노가 대단해.”
숙왕이 한 번 더 침통하게 말했다. 이 시점에서 고모부 남준해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 숙왕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미 남 장군의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는 것도 몰랐다.
고종사촌인 남선광(南善廣)은 추포 과정에서 사살당했고, 고모부인 남 장군은 고신으로 생긴 상처가 악화되어 감옥에서 비명횡사 했다. 그리고 남 장군의 아내이자 류희겸의 고모인 류 부인은 자택에서 목을 매달았다.
그 사실을 모두 알고도 숙왕은 거짓을 말하며 류희겸을 안심시키려 했다. 채왕과 남 장군이 손을 잡고 역모를 일으킨다고 고변을 한 작자가 숙왕이 심어놓은 끄나풀이라는 것을 지금의 자신이 모를 것이라 확신하니 할 수 있는 짓이었다.
“남 장군의 충성심은 부황께서도 알고 계시네. 그가 무고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아.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황제 폐하를 믿고 기다려야 해.”
류희겸은 지금 자신의 손에 작은 날붙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다시 살 것도 없이 지금 이 순간에 숙왕을 죽인다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회귀의 시작점은 언제나 같았다. 연주성 감옥에 갇혀 아무 손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처음 보게 되는 이가 숙왕이라는 사실은 악몽보다 지독했다.
죽기 직전에는, 복수에 집착하지 않고 달리 살았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도 가졌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은 숙왕을 보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희겸? 왜 말이 없나?”
류희겸이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자 숙왕이 의아해 했다. 실로 류희겸은 할 말이 없었다.
지난 다섯 번의 회귀에서 류희겸은 숙왕에게 원망과 저주의 말을 내뱉기도 했고, 정보를 캐기 위해 내심을 감추고 이것저것 묻기도 했고, 왜 그랬냐고 추궁도 했다. 하지만 숙왕은 끝까지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뗐다.
이제는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한재.”
고귀하신 숙왕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이 친한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류희겸이 속고 있다는 것을 숙왕이 믿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무슨 말이든 해라.”
“손바닥으로는 하늘을 가릴 수 없는 법이다.”
“……?!”
“명심해라.”
류희겸이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내뱉자 숙왕이 잠시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그는 곧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이니까. 긴 이동에 피곤한 모양이다. 쉬어라. 날이 밝은 후에 다시 보자.”
애틋하게 위로를 한 숙왕에게 류희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끝까지 표정을 흩트리지 않은 숙왕이 천천히 돌아나가는 것을 류희겸은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다.
가눌 수 없는 분노와 회한으로 머리가 뜨거워졌다.
진한재가 황제가 되기를 바랐다. 살벌한 정쟁에 몸을 담았으니 정적의 모함을 받아 쓸려나가는 것도 각오했다. 하지만 주군으로 모셨던 숙왕이 자신을 배신할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결코 숙왕을, 진한재를 용서할 수 없었다.
“하아.”
긴 한숨을 내쉰 류희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앞으로 벌어질 사건 중에는 자신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새벽에 일어날 일이었다.
류희겸은 숨을 고르며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았다. 다시 회귀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또 한 번 기회가 주어졌으니 놓칠 수 없었다.
지난 생은 이 년을 넘게 살았으니 기억할 것도 많았다. 이번에야말로 복수에 성공하려면, 해야 할 것들을 찬찬히 되짚어봐야 했다.
◇ ◇ ◇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중한 일을 맡기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근육과 뼈에 고통을 주고, 몸을 굶주리게 하고, 생활을 궁하게 하고, 하는 일마다 어지럽힌다. 그 이유는 마음을 흔들어 참을성을 기르고, 불가능한 일을 능히 해내게 하기 위함이다.
天將降大任於斯人也 必先勞其心志 苦其筋骨 餓其體膚 窮乏其身行 拂亂其所爲 是故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
맹자 고자장의 글이었다.
류희겸의 스승인 차정하(車靜夏)는 괴짜였다. 술과 풍류를 좋아하는 그는 성실하지는 않았으나 흐름을 꿰뚫어보는 식견이 있었다.
스승은 언제나 영웅의 시련을 언급했다. 영웅은 인내와 고통 속에서 성장하면서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했다.
‘굶주려 봐야 배고픔이 뭔지 알 수 있는 법이지. 주지육림에 둘러싸여 세상의 고단함을 논하는 건 바보짓거리야. 그러니까 시련이 닥치면, 사람이 크게 되려면 여기저기 다치고 굴러도 봐야 해.’
단순명료한 정론에 당시 어렸던 류희겸은 고개만 끄덕였다. 굶주림도 고단함도 아직은 알지 못했지만, 스승님의 외침대로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았다.
나이를 먹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고난과 아픔이 사람을 크게 하고 단단히 만든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러나 주군이자 사촌이고, 친우이기까지 했던 자에게 배신당하고 여섯 번이나 과거로 회귀한 것이 무엇을 위한 시련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미 돌아가신 스승님께 묻고 싶었다. 하늘은 제게 무엇을, 어떤 중한 일을 맡기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외쳐 보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섭섭하다고 생각하면서 류희겸은 천천히 깨어났다.
눈을 깜빡이자 몇 번이나 반복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밀수선 짐칸의 감옥이었다. 연주성 감옥의 돌벽이 아니라 더러운 나무벽은 새삼스러웠다.
류희겸은 어지러운 머리를 짚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양손목에는 수갑을 차고 있었고, 강철로 된 족쇄에 양발목이 묶여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자신 말고도 여기저기에 웅크려 앉은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어두컴컴했지만 어디선가 햇살이 들어와서 밖이 낮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몇 번의 회귀로 이 배가 대연국으로 향하는 밀수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사고파는 인신매매단의 배였다.
“안 바뀌었군.”
조용히 중얼거린 류희겸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일깨웠다. 약 때문인지 머리는 지끈거렸고 팔다리에는 힘이 없었다.
류희겸은 지금 자신에게 닥친 상황이 우연의 결과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연주성 감옥에서 누군가가 약을 써서 자신의 정신을 잃게 했다. 아마도 숙왕의 짓일 것이다. 감옥에서 갑작스레 죽으면 황제에게 의심을 살 수 있으니, 도주를 하는 바람에 사살했다고 하기 위해 판을 꾸몄다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저승 명부에 이름을 올릴 뻔한 류희겸이었으나 운명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연주성 감옥에서 두 명의 옥졸이 류희겸을 빼돌렸다. 그들이 류희겸을 죽일 장소로 계획된 창고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도박장의 졸개였다. 두 옥졸 중 한 명이 도박 빚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옥졸이 류희겸을 빼돌려 죽이라는 위험한 명령을 수락한 것도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착수금조차 도박으로 날려버린 옥졸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정신을 잃고 수레에 실려 있는 류희겸을 넘기라는 졸개의 요구를 순순히 따랐다.
류희겸이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의 사정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밀수선에 함께 탄 수다스러운 졸개가 동료들에게 이것저것 떠드는 것을 주워들은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천우신조로 살아남은 것을 감사했다. 그렇게 석 달을 더 살고 죽었다.
처음 회귀를 하고, 자신이 과거로 돌아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류희겸은 인신매매단에 팔리는 것보다는 황제 앞에서 남 장군이 숙왕의 모함을 받았다고 고변하는 것이 낫다 판단했다.
그는 수면제가 들어 있는 물을 마시지 않고 버텼지만 횃불에도 수면초가 태워진다는 것을 몰랐다. 또한 수갑에 묶인 팔이 자유롭지 못했다. 반쯤 약에 취한 상태로 반항을 하다가 옥졸이 휘두른 칼에 깊게 찔려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세 번째의 삶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네 번째는 순순히 물을 마시고 잠에 빠져들었다가 인신매매단의 단주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자 그는 괜한 일에 얽히면 안 된다며 그 자리에서 류희겸을 죽였다.
새로 주어진 다섯 번의 기회 중에 세 번을 하루도 지나지 않아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결국 류희겸은 연주성에서 탈주하는 것도, 인신매매단에게 손을 쓰는 것도 다시 시도할 수 없었다. 인신매매단에 팔려 대연국으로 건너가는 것은 류희겸으로서는 막을 수 없는 운명이었다.
“운명이라.”
류희겸은 무릎에 얹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하늘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한 일을 맡기려는지 알 수 없지만, 반복되는 생에 바라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숙왕의, 진한재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짐할수록 류희겸의 정신과 마음이 조금씩 망가져 갔다. 스스로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류희겸은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복수였다.
깊게 숨을 들이쉰 류희겸은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에 눈을 떴다. 곧 인신매매단의 단주가 선창에 내려와 신분을 물을 것이다.
류희겸은 처음부터 신분을 숨길 마음을 먹었다. 자신의 신분을 제대로 밝혀봤자 바로 살해당하거나, 다시 진한재의 손에 떨어질 게 뻔했다. 그래서 류희겸은 신분을 숨기고 거짓으로 탈주병이라고 말하기로 했다.
군인 출신이고, 싸움에 소질이 있다고 하면 단주가 흡족해 할 것이다. 그리고 대연국에서 특수한 쓸모를 지닌 노비로 팔려가게 된다.
그건 지난 여섯 번의 생에서 세 번이나 반복된 일이었다. 대연국 황제 앞에서 목숨을 걸고 결투를 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 ◇ ◇
화창한 날이었다. 초가을이었지만 대연국의 수도 태경(泰京)의 낮은 아직 여름의 열기가 남아 있었다.
태경에서 노비매매로 유명한 상단은 이른 오전부터 소란스러웠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어서 움직여라.”
노비들을 감시하는 관리자들은 덩치가 크고 행동이 거칠었기에 노비들은 순순히 그들의 말을 따랐다. 창고 한쪽에 있던 류희겸도 무리를 따라 마당 한쪽에 섰다.
정방형의 마당에는 덩치가 좋은 젊은 남자 노비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조금 있다 찾아올 귀한 손님은 무예에 능한 노비를 찾을 것이다.
류희겸은 이곳에서 자신을 사갈 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백진호(白眞昊). 대연국 수도인 태경에서 나름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상인으로, 그는 가을의 중요 황실 행사 중에 하나인 만월제전(滿月祭戰)에 쓰일 노비를 구하는 중이었다.
전쟁을 통해 크고 작은 나라를 통합한 대연국은 대대로 용력(勇力)이 뛰어난 무인을 귀하게 여겼다. 중양절을 보내고 구월의 보름달이 떠오르면 재주 있는 노비나 죄수끼리 투전을 붙여 승자에게 상을 내리거나 면천을 해줬다. 그것이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황제가 주최하는 제전이 되자 경쟁이 심해졌다.
당연하게도 제전에서는 무가나 장군가에서 출전한 노비들이 대대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문관들의 노비들은 그저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두고는 했는데, 그중에 승부욕이 강한 예경대부(禮經大夫)만큼은 예외였다.
예경대부는 매년 큰돈을 들여 각지에서 그러한 노비들을 사들였다. 귀한 한혈마를 돈이 있다 한들 쉽게 살 수 없는 것처럼 무예가 뛰어난 노비 역시 구하기 어려웠으니, 겨우 구한 노비들을 귀히 다뤘다.
그러나 예경대부가 내보낸 노비들은 늘 성적이 시원찮았다. 특히 작년에는 노비가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지는 바람에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작년 제전이 끝나자마자 예경대부는 더욱 혈안이 되어 값비싼 노비를 사들여 훈련시켰다. 그런데 하필이면 금년, 가을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숙소에 큰불이 나는 바람에 공을 들여 준비한 노비들이 많이 상하고 말았다.
예경대부에게 선을 대고 있던 백진호가 만월제전에 쓸 노비를 찾으러 직접 파순상단(波順商團)까지 걸음했다가 때마침 그곳에 있는 류희겸을 알아보았다. 사 년 전, 류희겸이 양번국(陽藩國)의 호양성(湖陽城)을 함락했을 때, 백진호가 그곳에 있었다고 했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다. 백진호의 눈에 띄어 대연국의 황제 앞으로 끌려가는 것은 한 번도 바뀌지 않는 사건이었다.
류희겸이 바꿔야 할 것은 백진호와의 관계였다. 직전 생에서 이 년이나 살았기 때문에 백진호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태경에서 거상으로 이름난 그의 호의를 산다면, 미래를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이쪽입니다. 백 대주님.”
때가 되자 상단주가 직접 백진호를 안내하며 나타났다. 류희겸은 백진호를 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누가 좋겠습니까?”
“자네 일인데, 내가 나서면 되나?”
“도움을 주겠다고 부득불 따라오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왕야(王爺).”
“어허. 대인이라고 부르기로 했잖나. 나는 여기 없는 사람이라니까. 그리 부르면 이런 곳까지 행차할 막되먹은 본왕 때문에 다들 떨 거 아닌가.”
왕야라는 단어에 주위가 한 번 술렁거렸다. 그리고 당황한 것은 류희겸도 마찬가지였다.
황자들이 넘쳐 나는 화진국과 달리 대연국의 황실은 자손이 귀한 편이었고, 현 시점에서 왕야라고 불릴 황족은 몇 명 없었다. 지난 생들을 되짚어 보았을 때 백진호는 늘 혼자였는데 왜 왕야라고 불리는 귀한 분이 동행하고 있는지 류희겸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왕야라고 불리는 남자의 목소리와 말투가 너무나도 귀에 익었다. 설마, 아니겠지. 류희겸은 지난 생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그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직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저들은 왜 족쇄를 차고 있나?”
이번에는 이전 삶에서처럼 백진호가 류희겸과 함께 서 있는 무리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자 상단주가 얼른 설명을 이었다.
“아, 청강(靑江) 건너에서 온 노비들입니다.”
“그러니 묶어놓았군.”
류희겸과 그 주변 노비들의 발목은 강철로 된 족쇄로 묶여 있었다.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대륙의 동과 서에 자리 잡은 화진국과 대연국의 기원은 대륙 최북단에서 발원한 연(淵)나라로, 그들은 같은 조상을 둔 형제국이었다.
연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두 나라는 처음에 동연(東淵)과 서연(西淵)으로 서로를 칭했다. 그러다 동연은 화진국으로, 그리고 서연은 대연국으로 국명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으나 대가 바뀌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다. 강을 가로지르지 않는 국경에는 서로 번국을 두어 대치했다.
인신매매 또한 성행했는데, 상대 나라의 양민을 잡아 와 노비로 파는 일이 흔했다. 남쪽 여러 섬의 작은 나라들에서, 그리고 청강 너머 화진국에서 여러 경로로 넘어온 이들이 노비가 되어 대연국 전역으로 팔려나갔다.
원해서 노비가 된 이가 흔하겠느냐마는, 특히 화진국에서 넘어온 이들은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대연국에서는 화진국 출신의 노비를 가까이 두고 쓰기보다는 장원이나 광산 등에서 노역을 시키곤 했다.
그래서 화진국 출신의 노비는 팔려가기 전에는 형구로 단단히 구속해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
“출신이 출신인지라 조심해야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몰라 준비했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눈을 봐야 알지. 고개를 들어라.”
명령에 류희겸은 고개를 들고는 재빨리 백진호와 그 옆에 선 남자를 살폈다.
“…….”
검은색의 편복(便服)은 수수했지만, 화려한 외모와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만으로도 그가 귀한 신분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키도 체격도 훌쩍 큰 미남자는 장난기가 묻어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난 생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어려 보였지만 그가 맞았다.
영왕 진혁위.
대연국의 7황자인 진혁위를 여기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류희겸은 당황했다. 직전 생에서 가장 이상하고 복잡한 인연으로 엮인 이가 바로 진혁위였다.
류희겸은 진혁위가 숙왕 진한재와 손을 잡은 증거를 본 기억을 떠올리고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여기서 감정을 드러냈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 있었다.
잠깐의 순간에 평정을 되찾는 사이에, 백진호가 류희겸에게 관심을 보였다.
“너, 이름이 무엇이냐?”
“겸이라고 합니다.”
류희겸은 백진호를 보며 덤덤히 말했다. 가능하면 그의 옆에 서 있는 진혁위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겸이라. 성은?”
“탈주병이라 버렸습니다.”
류희겸이라는 이름은 나름 유명했기 때문에 류희겸은 이름을 숨겼다. 그래도 지난 세 번의 경험으로 백진호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리라 확신했다.
“오, 체격이 괜찮고 균형도 잘 잡혔군. 손바닥을 보여라.”
이번에 끼어든 것은 진혁위였다. 전에 없던 상황이었지만 류희겸은 진혁위를 향해 순순히 손바닥을 보였다.
“검을 오래 쥔 손이군. 얼굴도 마음에 들고. 좋아. 이자는 내가 사겠다.”
진혁위가 정확하게 류희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전 생과 달리 류희겸을 사는 것은 백진호가 아니라 진혁위가 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변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류희겸은 알지 못했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조용히 고개만 조아렸다.
*
예경대부가 부탁한 노비를 구해 자신의 집으로 보낸 백진호는 진혁위와 동행해 영왕부로 향했다.
백진호는 진혁위가 산 노비가 류희겸이라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알렸다. 영왕부 청방의 외실에 앉아 막 찻잔을 들어 올리려던 진혁위가 잠시 행동을 멈췄다.
“류희겸? 화진국의 귀장군(鬼將軍) 말인가?”
“예. 맞습니다.”
“그자는 죽었을 텐데? 그리고 그 사내가 귀장군이라는 것을 자네가 어찌 알아?”
진혁위의 의심은 타당했다.
류희겸은 화진국의 유명한 장군이었다. 사 년 전, 화진국의 장군 류희겸은 스물한 살의 나이에 대연국의 번국인 양번국을 함락했다. 특히 양번국의 수도인 호양성을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함락해 손에 넣은 것으로 유명했다. 때문에 대연국에서도 류희겸의 이름은 명장으로 드높았다.
그런 류희겸이 한 달 전쯤에 역모 사건에 휩쓸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대연국까지 전해졌다. 도주를 하다가 붙잡히기 직전에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고 하는데, 검게 탄 시신이 경릉의 성벽에 걸렸다던가.
하지만 백진호는 진혁위가 산 노비가 류희겸이라고 확신했다.
백진호는 사 년 전에 화진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호양성으로 사람을 찾으러 갔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화진국의 공격에 오도 가도 못 하고 있다가 호양성이 함락당하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그때 점령군으로 호양성을 행진하는 류희겸을 보았다. 당당한 체구지만 섬세하게 생긴 미남자가 평범한 사내는 들지도 못할 큰 창을 휘두르는 귀장군이라고 불리기에, 과연 진짜인지 의심했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사 년 전에 호양성에서 발이 묶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대로를 행진하던 그를 직접 보았습니다. 귀장군이라고 불리던 그가 냉철한 미남이라서 기억에 남았습니다.”
“신기한 우연이로군.”
“황제께 고해야 합니다.”
백진호는 진지하게 말했다. 유능한 상인인 백진호는 그만큼 신중하고 의심도 많았다. 가장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자면, 귀장군 류희겸이 죽음을 위장하고 간자가 된 것일 수도 있었다. 류희겸의 신분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세상에는 희귀한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다.
최선은 황제께 류희겸의 존재를 알리고 손을 떼는 것이었다. 화진국의 유명한 장군을 잡았으니 황제께 치하를 받을 건 분명했다.
“당연히 고해야지. 그런데 말이야. 귀장군이 그리 생겼을 줄 누가 알았을까? 거창을 휘두른다고 하던데, 얼굴은 꼭 백면서생 같던걸? 안 그런가?”
찻잔을 내려놓은 진혁위가 즐거운 얼굴로 딴소리를 했다. 아니 그러냐고 물었기에 백진호는 대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진혁위의 말대로 류희겸은 귀장군이라는 별명과 어울리지 않는 단정하고 섬세한 미남이었다.
“확실히 무인이 아니라 문인처럼 생겼습니다.”
“그렇지? 옥골선풍이었어. 얼굴이 너무 취향이라 옥첩에 이름을 올릴까 했는데, 안타깝군.”
뜻밖의 말에 백진호뿐만 아니라 청방에 시립한 영왕부의 태감 우소진(禹紹珍)까지 놀란 눈으로 진혁위를 바라보았다. 옥첩에 이름을 올린다는 것은 정식으로 혼인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황제의 일곱 번째 아들인 진혁위는 여인을 멀리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의 친모인 혜비(惠妃)가 혼사를 추진하려고 할 때마다 훼방을 놓는 것은 꽤나 유명했다.
진혁위는 우아하고 화려하게 생긴 미남자로 인기가 많았다. 그의 모습을 보고 속앓이를 하는 규수들이 꽤 있었고, 여러 가문에서 혜비에게 매파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진혁위가 극구 거부하며 방해했기 때문에 약관이 지난 지금까지도 영왕부의 내원은 텅텅 빈 상태였다.
고귀한 황족치고는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여러 소문이 퍼졌다. 백진호는 진혁위가 남색가라고 들었다. 그것도 어여쁜 미동이 아니라 건장한 사내를 좋아한다고 말이다. 진혁위가 어울려 다니는 친우와 객인들이 모두 건장한 장부였기 때문에 난 소문이었다.
하지만 진혁위를 오랜 시간 동안 모셨던 우소진은 자신의 주인께서 남색가이기는커녕 침방에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모르겠으나, 황궁이나 왕부에서 진혁위는 시침을 받은 일 자체가 없었다. 애가 탄 혜비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혁위의 침방에 미동을 들였다가 난리가 나기도 했었다.
백진호도 우소진 태감도 서로 아는 것이 달랐지만 진혁위가 혼인을 생각했다고 한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노비를, 그것도 타국의 장군이었던 사내를 첩도 아니고 비로 맞이하고 싶다니 말이다.
노련한 우소진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옥골선풍이라는 사내가 주인의 취향이라면 그와 비슷한 이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가 그리 마음에 드셨습니까?”
“얼굴과 눈. 냉기를 품은 싸늘한 눈빛이 좋았어.”
“왕야께서 차가운 미인을 좋아하시는지 소인은 몰랐습니다.”
“그래. 차가운 미인이지. 이대로는 아쉬운데 부황께 그를 달라고 할까? 혹여 간자일 수도 있으니 다리 한쪽을 자른 후 달라고 하면 되겠군.”
진혁위의 확언에 백진호와 우소진은 다시 한번 더 놀랐다.
황제는 7황자인 진혁위를 특이할 정도로 아꼈다. 약관이 되도록 혼인을 하지 않겠다 고집을 부리는 진혁위에게 네 뜻대로 하라고 할 정도였다.
다른 형제들이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와중에 진혁위는 사냥을 하고, 값비싼 말을 사 모으고, 산천을 유람하고 다녔다. 그래도 황제는 게으르다 질책하지 않고 신년이면 다른 형제들과 비슷한 하사품을 내렸다.
진혁위가 류희겸의 한쪽 다리를 잘라 후궁에 집어넣고 싶다고 하면, 어쩌면 황제는 그러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진혁위가 류희겸의 다리를 잘라서라도 가지고 싶어 할 정도로 마음에 들어 한다는 의미였다.
“부황께 보내기 전에 귀장군의 사연을 알아야겠다. 시커멓게 불탄 시체가 성벽에 매달렸다는데, 어찌 여기까지 왔을까. 우소진. 그를 불러오라.”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허리를 숙여 절을 한 우소진이 청방을 빠져나갔다.
“백 대주. 그대도 어찌 귀장군이 여기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남아 있게나. 얼마나 재미있는 사연인지 들어보자고.”
“예. 왕야.”
호탕하게 웃으며 차를 마시는 진혁위를 보며 백진호는 얌전히 대답했다. 큰돈을 만지는 상인으로 살아오면서 높은 곳에 있다가 몰락한 자를 여럿 보았다. 호랑이도 무서워한다는 귀장군의 사연이 얼마나 기구한지 들어보고 싶었다.
*
시위를 따라 영왕부를 가로지르는 류희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직전 생에 영왕부에 걸음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내부의 모습은 기억과 비슷했지만 자신의 처지는 이제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 세 번의 생에서 자신을 산 사람은 백진호였지만, 이번 생에서는 진혁위가 되었다. 백진호가 자신의 정체를 아는 만큼 황궁으로 가 정체를 추궁당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진혁위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생각하자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족쇄는 풀리지 않았다. 청강 너머에서 건너온 화진국의 탈주병 출신이니 조심하며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족쇄가 풀렸다고 하더라도 몸 성히 영왕부를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왕부의 시위들은 숫자도, 실력도 만만찮기 때문이었다. 결국 몸을 낮추고 영왕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운명의 변덕인지, 혹은 자신이 모르는 어떤 변수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전 생애와 같은 흐름을 만들어내야 했다.
시위를 따라 류희겸이 도착한 곳은 수강전(壽康殿)이라는 현판이 걸린 편전이었다. 수강전 앞에 대기하고 있던 태감이 앞장서 류희겸을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선 류희겸은 상석에 앉아 있는 진혁위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발목은 여전히 족쇄로 묶여 있었지만 절하는 것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절도 있게 공수하며 고개를 숙인 류희겸은 진혁위의 말을 기다렸다.
“고개를 들어라.”
진혁위의 명령에 류희겸은 눈을 내리까는 대신 고개를 들어 진혁위를 마주 보았다. 맞은편 상석에는 진혁위가, 그리고 한 단 아래에는 백진호가 빗겨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하얀 피부, 곧게 뻗은 눈썹과 깊고 선명한 눈매, 높게 솟은 콧날, 모양 좋은 입술. 사람의 눈을 잡아끄는 화려한 미남자는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눈꼬리를 접으며 만들어낸 미소가 아름다웠다.
“씻고 나니, 훨씬 인물이 사는군. 백옥 같아졌어.”
진혁위의 목소리에는 웃음과 어울리는 흥겨움이 담겨 있었다. 백옥 같다는 말은 보통 칭찬이었지만, 때로는 희롱의 뜻이기도 했다.
조금 전에 진혁위가 류희겸을 향해 옥골선풍이라고 칭하며 옥첩에 이름을 올릴까 했다는 말을 들은 태감과 백진호는 꽤나 의미심장한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진혁위의 취향이 고약하다고 속으로만 생각했고, 당사자인 류희겸은 아무것도 몰랐기에 가벼운 칭찬으로 여겼다.
류희겸은 옥골선풍이라는 단어는 자신보다 진혁위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과한 칭찬이시옵니다.”
“사실인 걸. 그것보다, 여기 백 대주가 말하길 그대가 화진국의 귀장군이라고 하더군. 버렸다는 이름이 류희겸인가?”
“맞습니다. 소인이 류희겸이옵니다.”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류희겸은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예의를 갖춰 정중히 대답했다.
“탈주병이라고 하더니, 순순히 인정하는 꼴이 우습지 않나?”
“이미 왕야께서 알고 계시온데, 아니라고 잡아떼는 건 멍청이나 할 짓입니다.”
이전 생에서의 인연으로 류희겸은 진혁위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호탕한 성격의 남자는 귀에 단 아부보다는 간결한 설명을 선호했다. 또한 다소 예법이 틀리더라도 깐깐히 따지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기만을 혐오하는 진혁위에게 류희겸은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그러자 진혁위가 웃음을 터트렸다.
“입심이 좋구나. 화진국의 귀장군을 손에 넣었다고 황제께 고하기 전에, 이곳까지 팔려 온 사연이 궁금하다. 귀장군의 시신이 경릉의 성벽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게 바로 엊그제거든. 죽었다는 사람이 어찌 이곳에 있게 된 것이냐?”
“저의 고모부이신 남준해 장군이 역모 혐의로 추포되었다는 것을 염세 시찰 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경릉으로 압송되는 와중에 연주성 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잠에서 깨어나 보니 청강을 건너고 있던 밀수선 안이었습니다. 저를 밀수선에 태운 졸개의 말로는 연주성의 옥졸이 도박 빚을 대신해 저를 넘겼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토록 기구한 사연이라니. 귀신보다 무서운 류희겸 장군이 도박 빚에 팔렸다고?”
“제가 들은 것을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에는 별별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지. 그렇다면 미쳐 버린 화진국의 황제가 귀장군을 간자로 보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어찌 생각하나?”
부드럽게 울리는 진혁위의 목소리는 근사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역사를 짚어보면 고귀한 황족조차 간자로 쓰이는 일이 꽤나 있었으니 그의 의심은 온당했다.
아니다 싶은 것은 단칼에 내치는 진혁위의 성격을 알기에 류희겸은 속으로 혀를 찼다. 풍류남이라고 알려진 진혁위는 적에게 자비가 없는 사내였다.
“저를 밀수선에 태운 자가 전말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관련자들을 조사하십시오.”
류희겸은 머리를 조아리며 강하게 항변했다. 여기서 간자로 의심받고 목이 떨어지는 것은 억울했다.
지난 생에서도 같은 이유로 대연국 황제의 직속 감찰기관인 익문사(益文社)에서 철저한 조사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인신매매단 몇 개가 박살 나긴 했지만 자신이 간자라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귀장군에 대한 조사는 본왕이 아니라 황제께서 하실 것이다. 귀장군과 한번 실력을 겨루고 싶으나 황제께 멀쩡히 보여드려야지. 알 건 다 알았으니 해가 지기 전에 황제께 고하러 가야겠군. 우소진. 황궁으로 갈 채비를 하고. 아, 귀장군을 데려가 좋은 것을 먹여라. 익문사에 들어가면 한동안 맛난 음식을 못 먹을 테니까.”
웃음기 담긴 진혁위 농담은 농담이 아니었다. 익문사의 취조는 고신을 동반했고 음식도 최소한으로 주어졌다. 세 번이나 익문사에서 취조를 당해본 기억이 있는 류희겸은 진혁위의 사나운 농담에 속으로만 쓰게 웃었다.
그래도 앞으로 진혁위와는 계속 얽힐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신임을 얻을 생각은 없다 하더라도, 악연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영왕야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이만 물러가옵니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류희겸은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다. 다음 목적지는 신선도 멀쩡히 나오기 힘들다는 익문사였다. 고신을 당하고,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토해 내게 될 것이다.
부모님처럼 여겼던 고모부 내외가 돌아가셨다는 소식도, 채왕과 고모부를 역모로 고발한 자의 이름도 그곳에서 들었다. 진한재에 대한 복수를 맹세한 곳도 익문사였다.
다시 한번 끔찍한 일이 반복될 것이다.
시종을 따라가며 류희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세 번이나 겪은 일이니 이제는 그럭저럭 무디어져서 버틸 만했다. 다만 반복해 생을 살며 고신으로 인해 다치는 곳이 매번 달라졌다. 욕심이 있다면 팔다리만큼은 멀쩡하게 나오는 것이었다.
◇ ◇ ◇
가을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대연국의 황궁인 중현성(重賢城)을 출입하는 고관들 사이에 특이한 소문이 하나 돌기 시작했다.
화진국의 장군인 류희겸이 익문사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류희겸은 이미 대연국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사 년 전, 신출귀몰한 묘책으로 양번국을 함락한 젊은 장군의 이름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역모에 가담한 류희겸의 불탄 시체가 화진국 수도인 경릉 성벽에 내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죽었다는 자가 살아서 익문사에 있다고 하니 다들 그 사연을 궁금해 했다. 하지만 익문사의 관원들은 하나같이 입이 무거웠고, 관련자들도 모두 말을 아끼는 상황에서 여러 추측이 넘쳐 났다.
누군가는 역모에 실패하자 목숨을 구하려고 투항한 것이라고 했고, 죽음을 위장해 간자로 잠입했다는 주장도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익문사의 취조는 고신과 함께 진행되었다. 겨우 목숨만 붙여놓는다는 익문사의 고신은 험하기 짝이 없었다. 따라서, 류희겸의 결말은 다들 비슷하게 예상했다. 오래지 않아 류희겸의 목이 태경의 성벽에 걸릴 거라고 한마디씩 하며 그를 잊었다.
하지만 고관들의 예상과 달리 류희겸은 멀쩡한 몸으로 폐현을 위해 대전에 섰다.
*
넓고 화려한 대전 한가운데 선 류희겸은 얼굴이 초췌하기는 했으나 크게 상한 곳이 없었다. 익문사에서 한 달 가까이 취조를 받은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류희겸 역시 자신이 멀쩡한 몸으로 대전에 선 게 이상하다 여겼다.
지난 몇 번의 생에서 익문사의 취조는 언제나 혹독했다. 황제를 보기 위해 대전에 섰을 때면 늘 한 군데는 망가진 상태였다. 몽둥이로 얻어맞아 머리가 깨지기도 했고, 단근질을 당해 가슴에 심한 화상을 입기도 했다.
바로 직전의 생에서는 왼쪽 발목을 다쳤다. 나중에 같은 곳이 심하게 부러지면서 뛸 때마다 다리를 살짝 절게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이번에는 잠을 못 자게 한 것 외에는 매질도 단근질도 없었다. 여전히 식사는 엉망이었지만, 익문사에서 몸을 상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우연찮게 익문사 관리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는데, 황제가 몸에 상처를 내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류희겸은 이전과 상황이 달라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작은 변수로 인해 이후의 사건 전개가 조금씩 바뀌는 것은 몇 번이고 있었다. 어쩌면 백진호가 아니라 진혁위가 자신의 주인이 되고, 그가 황제에게 자신을 넘긴 것이 기로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류희겸은 지레짐작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황제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삶을 반복하는 동안 익문사의 취조가 끝나면 류희겸은 언제나 대연국의 황제와 대면했다. 한 달 동안의 취조와 조사로도 류희겸이 간자라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간자가 아니더라도 타국의 장군이니 목을 베는 것으로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화진국 백녕 류가의 수장, 귀장군 류희겸이라는 명성이 황제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 틈을 파고들어야 했다.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사이에 황제가 나타났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당연히 총관태감과 익문사의 수장이 함께였는데, 그 뒤를 영왕 진혁위가 따르고 있었다.
전에 없던 진혁위의 등장에 류희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또다시 그였다.
지난 생에서 진혁위와 얼굴을 맞대고 간략하게나마 인사를 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인연이 얽히고, 제대로 긴 이야기를 나눈 것은 더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자꾸 만나는 것은 진혁위가 변수로 작용한다는 의미였다. 그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전부였다.
황제가 옥좌에 앉는 것을 보고 류희겸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를 올렸다.
“대연국의 황제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지체 없이 일어선 류희겸은 황제를 보지 않고 눈을 내리깔았다. 죄인 신분에도 족쇄나 사슬로 묶이지 않았지만, 대신에 그의 좌우로 가면을 쓴 금군시위들이 섰다.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했다.
“네가 류희겸이라고?”
“그렇습니다.”
“불세출의 명장이라지?”
“세간에서 소인이 어떻게 불리는지 관심 없사옵니다. 폐하.”
류희겸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여기까지는 지난번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다. 살려달라고 빌지 않은 것으로 황제의 관심을 끌었다. 이번에도 대연국의 황제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배포 하나는 좋구나. 짐이 너를 살려둬야 하는 이유를 말해라. 아직 죽일지 살릴지 정하지 못했으니, 네 말을 들어보고 정하겠다.”
다짜고짜 류희겸에게 떨어진 명령은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매번 황제에게 기회를 달라고 청했다. 처음에는 화진국의 숙왕 진한재에게 복수하겠다고 솔직하게 말했고,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생에서는 재주를 바치겠다고 엎드렸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지만, 여섯 번째 생을 살고는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기회를 달라 청하고 재주를 바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번 생에서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대연국의 황제를 대해야 했다.
변덕이 심한 황제는 아부에 약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비굴하게 구는 것은 또 싫어했다. 심기를 맞춰주기 까다로웠지만 방법은 있었다.
“소인이 함락했던 양번국을 황제 폐하께 돌려드리겠나이다.”
공수를 하고 고개를 숙인 류희겸의 담담한 선언에 대전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겁다 못해 차갑게 얼어붙은 분위기를 깬 것은 진혁위였다.
“폐하. 소신이 장담하지 않았습니까? 무서운 게 없는 자라고 말입니다.”
낭랑한 목소리는 어딘가 즐겁게 들리기까지 했지만 류희겸은 진혁위를 보지 않았다. 대신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섰다. 그는 자신이 던진 패가 황제에게 통할 거라 자신했다.
양번국은 원래 화진국의 봉토였는데, 칠십여 년 전에 대연국에서 차지하고는 번국을 세웠다. 그리고 그걸 명분으로 사 년 전에 류희겸이 양번국을 공격해 되찾은 것이었다.
대연국의 황제는 그의 치세 중에 영토가 줄어드는 치욕을 그냥 두고 볼 성격이 아니었다. 이미 대연국에서는 사 년 전에 빼앗긴 양번국을 되찾기 위해 착실히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류희겸은 그 점을 미리 파고들었다.
진혁위의 흥겨운 추임새 때문인지 황제는 흥미를 보였다.
“무서운 게 없으니 주인을 물겠다고?”
“소인은 주인에게 버림받은 사냥개이옵니다. 억울한 누명을 벗을 방법이 없으니, 변절자가 되어 주인을 물어뜯겠습니다.”
“주인은 무는 개는 죽이는 법이다.”
“예. 제 쓸모는 거기까지입니다. 쓸모를 다하면 죽이십시오. 폐하.”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한 배짱 아부는 진심이기도 했다. 몇 번의 생을 반복하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혼자서는 큰일을 도모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진국과 대연국은 아직 그렇게까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양번국을 두고 대립이 심화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전면적으로 두 나라가 싸운 적은 없었다. 그래도 타국의 장군 출신에다가, 역모를 꾀한 변절자라 불리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죄인이자 노비인 자신의 죄를 사해주는 것도, 상을 내리는 것도, 신분을 높여주는 것도 모두 황제의 권한이었다. 누구보다 황제의 신임을 받는 게 중요했다.
황제는 초패왕(楚霸王)과 우미인(虞美人)의 경극을 즐겨 봤다. 난세의 영웅이 궁지에 몰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뛰어난 무인을 아끼는 황제에게 자신의 비극적인 상황을 드러내며 능력을 선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류희겸은 스스로를 속으로나마 항우에 비견하는 게 부끄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황제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는 더한 것도 할 수 있었다.
필생의 목표는 진한재의 목숨이었다. 그것을 거두기 위해서라면 변절자라는 이름도 개의치 않았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황제에게 인정받는 변절자가 되어야 했다.
“배짱이 마음에 드니 살려두겠다.”
“황공하옵니다.”
“흠, 그러나 버림받은 개라 하더라도, 변절자는 설 자리가 없지. 영왕. 그가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느냐?”
이전 생에서는 익문사의 수장이 황제의 질문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진혁위를 향했다. 류희겸은 조심스럽게 숨을 삼키며 긴장했다. 진혁위라는 변수로 인해 가장 중요한 사건에서 빠졌다가는 끝장이었다.
“사흘 후에 있을 만월제전에서 귀장군의 무위를 보고 싶습니다. 귀장군의 실력이라면 황제 폐하의 은덕을 입을 수 있을 겁니다.”
“오, 그렇지. 만월제전에서 재주를 뽐내면 되겠군.”
진혁위가 만월제전을 언급하는 것에 류희겸은 속으로 안도했다. 황제 역시 예전과 같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죄인은 만월제전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나?”
“용맹함을 아끼시는 황제께서 사은을 베푸시는 행사라고 알고 있습니다. 만월제전에서 세 번을 이기면 어떤 죄든 사면받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다. 세 번을 이기면 노비도 죄수도 양민이 되고, 다섯 번을 이기면 짐으로부터 상을 받을 수 있지. 그리고 열을 쓰러뜨리면 작위를 가질 수 있다. 다섯은 쓰러뜨려라. 그래야 네가 쓸모 있어질 것이다.”
노비와 죄인을 싸우게 하는 제전은 연나라에서 시작된 풍습이었다. 화진국에서는 아무리 천하다 해도 목숨을 걸고 싸우게 하는 것이 야만적이라 하여 몇 대 전에 폐지되었다. 하지만 무예를 숭상하는 대연국에서는 행사의 규모가 커졌다.
목숨을 건 결투를 하여 셋을 이기면 양민이 되고, 다섯을 이기면 황제로부터 상을 받고, 그리고 열을 이기면 작위가 하사된다. 그러나 이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에 작위를 받은 이는 단둘뿐이었다.
류희겸의 목표는 대연국의 만월제전에서 역사상 세 번째 작위를 받는 것이었다.
“열 명을 이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폐하.”
“하하하! 짐은 포부가 큰 자를 좋아한다. 좋아. 기대하겠다.”
황제의 호탕한 웃음은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허락의 의미였다.
“황제 폐하의 은덕에 감읍하옵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류희겸이 엎드려 절했다. 그것으로 폐현은 끝났다.
*
류희겸이 대전을 나서자 황제가 진혁위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혁위야. 너는 저자가 몇이나 쓰러뜨릴 것 같으냐?”
“열을 쓰러뜨릴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아홉에서 끝날 겁니다. 부황.”
이름이 불렸기에 진혁위는 황제에 대한 호칭을 달리 불렀다. 권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황제였지만 때에 따라 친근함을 드러내어 비위를 맞춰야 했다.
“아홉? 어째서 아홉이냐?”
“열 번째는 소자가 나서서 귀장군을 상대할 테니까요.”
진혁위의 선언은 도발적이다 못해 파격적이었다. 황제는 물론이요, 총관태감과 익문사의 수장까지도 놀란 눈을 하고 진혁위를 보았다.
만월제전의 참가자는 신분 상승과 사면을 노리는 노비와 죄인었다. 추첨으로 다섯 명을 상대하고 나면, 그 자리에 있는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 도전자는 대부분 명성을 원하는 젊은 무관들이었다. 물론 황족이 나선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매우 드물었다.
“네가 직접? 어째서?”
“귀장군의 무위에 대한 소문이 크게 부풀려졌다 하더라도, 그의 장담대로 쉽게 열을 이길 수 있을 것이옵니다. 허나 화진국의 장군이 대방(大方)이 되어 작위를 받게 된다면 여러모로 시끄러워질 수 있습니다. 아홉이 딱 좋습니다.”
황궁의 정치는 복잡한 법이었다. 류희겸을 향해 기대하겠다고 호탕하게 말했던 황제도 잠시 머뭇거렸다.
류희겸을 제전에 세우는 것은 일종의 과시였다. 화진국에서 자랑하던 장군을 비천한 노비로 만들어 웃음거리가 되게 하고, 재주에 따라 아량을 베푸는 대연국 황제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대방은 제전에서 열 명을 모두 쓰러뜨린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로, 작위를 받을 수 있는 증거였다. 그러나 진혁위의 말대로 아무런 공훈도 없는 타국의 장군에게 작위를 준다면 실력이 뛰어난 무관들이 불만을 품을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계산한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진이 빠져 지친 상대를 이겼다는 불명예는 괜찮으냐? 응?”
“소자가 그런 걸 따지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부황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다만 소자가 귀장군을 이기게 되면, 그를 주십시오.”
“그를 달라고?”
“귀장군 같은 인사가 양민이 되었다고 해서 저잣거리에 셋집을 얻어 살 수는 없지요. 어딘가에 적을 두어야 할 텐데, 소자가 데려가겠습니다. 그리고 처음 제가 그를 샀습니다. 부황.”
진혁위가 강력하게 소유권을 주장했다. 따지고 보면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기에 황제는 흔쾌히 허락했다.
“좋다. 그를 가지거라.”
“황공하옵니다. 폐하.”
황제의 허락을 받은 진혁위는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게 숙여 절을 했다.
◇ ◇ ◇
가을에 있는 황실 행사 중 하나인 만월제전이 열리는 음력 구월 보름의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푸르렀다. 만월제전은 그 이름대로 보름달이 뜨는 밤에 열리는 행사였으나, 관전자들의 편의를 위해 낮 시간으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태경의 동쪽에 자리한 초지에는 만월제전을 위한 준비가 빈틈없이 끝난 상태였다. 며칠 전부터 준비한 임시 월대와 천막은 높이 솟았고, 색색의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황제가 주최하는 만월제전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권력의 정점에 가깝다는 의미였다. 행사를 주관하는 예부(禮部)에서는 한 달 전부터 좌석 배치에 온 힘을 쏟았다.
참석자들은 저마다 화려한 가을 예복을 입고는 천막 아래 자리를 잡았다. 옥좌를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사내들이, 그리고 왼쪽에는 여인들이 자리했다.
황제의 축례로 제전이 시작되었다. 행사의 성격 탓에 참석자들에게는 술이 아닌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술을 챙겨 온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황제가 자리하고 있으니 대놓고 마시지는 못했다.
올해 가을 제전은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특히 사람들의 관심이 모인 것은 화진국의 류희겸 장군이 죄인 신분으로 제전에 출전한다는 것이었다.
류희겸은 대연국에서도 유명한 장군이었다. 역모를 일으켜 불에 타죽었다는 류희겸이 살아서 나타나 죄인이 된 것을 구경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무위로 이름난 그가 과연 몇이나 쓰러뜨릴 수 있을지 내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제전에 출전한 이들의 승패는 내기의 대상이 되곤 했다. 특히 올해는 류희겸의 등장으로 그 열기가 뜨거웠다.
“셋은 이기겠지?”
“셋이 무언가. 한 손으로 거창을 휘두르는 귀장군인데. 열은 손쉬울 걸세.”
“귀장군이고 뭐고, 그는 대방은 되지 못할 거네. 왜냐고? 그 이야기를 못 들었나? 열 번째가 되면 영왕께서 직접 나서실 거라고 하더군. 내가 확실한 곳에서 들었어.”
영왕 진혁위가 황제의 허락을 받아 개입할 것이라는 소문은 적잖게 퍼져 있었다. 누군가는 판돈을 잘못 걸었다고 후회했고, 정세를 읽을 줄 아는 이들은 황제의 판단이 옳다고 여겼다. 타국의 장군이었던 자가 대연국에 공을 세우지 않고 작위를 받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한마디씩 했다.
그렇게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초록의 풀밭 위에서 대치한 두 사람이 살벌하게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탄성이 터졌다. 붉은 피가 튀면 사람들은 더욱 환호했다.
생사결(生死決)이었다. 상대가 죽거나, 전투 불능이 되거나, 혹은 항복을 외치면 대결이 끝났다.
해가 가장 높이 떠올랐을 때 시작된 제전은 후반부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함성은 전보다 커졌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예부상서(禮部尙書)에게 향했다.
만월제전을 관리하는 예부상서의 앞에는 출전자들의 명패가 담긴 커다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출전자들의 상대는 상자에서 뽑히는 명패의 순서대로였다. 모두들 예부상서가 류희겸의 이름이 적힌 패를 뽑아 들기를 희망했다.
승자에게는 일 각(십오 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자 예부상서가 상자에서 명패를 뽑았다.
“다음 출전자는…….”
예부상서가 류희겸이 아닌 다른 출전자의 이름을 부르자 다시 한번 탄식이 흘러났다.
*
만월제전의 출전자들은 전후좌우가 막힌 가림막 안에 모두 모여 있었다. 하얀 가림막에 시야는 모두 막혔지만 뻥 뚫린 하늘 너머로 환호와 탄식, 비명을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한 번 가림막을 나가면 돌아오지 않았다. 죽거나, 불구가 되거나, 운이 좋으면 살아남아 명예를 얻었다.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한 명씩 줄어들 때마다 긴장감이 조금씩 높아졌다. 누구는 혼자서 몸을 움직였고, 또 누구는 무리를 이루며 가림막 안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들 중 다섯이 넘는 무리 하나가 가림막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류희겸을 향해 적의 넘친 시선을 보냈다.
만월제전의 출전자들은 면천과 사면을 원하는 노비와 죄인으로 구성되는 게 전통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주체하는 정례 행사가 된 이후로는 각 가문에서 특별히 훈련받은 노비들을 앞다투어 참가시켰다.
최근 십여 년 동안 그런 성향은 더욱 강해져, 근래 들어 죄인이 만월제전에 이름을 올린 적은 없었기에 류희겸의 존재는 특별했다. 그것도 그냥 죄인이 아니라 화진국의 귀장군이었다는 것은 다른 출전자들의 호기심과 적개심을 모두 불러일으켰다.
“나라면 그냥 콱 혀 깨물고 죽었을 텐데.”
“유명한 장군이라더니, 부끄럽지도 않나 봐.”
자기네들끼리의 대화치고는 목소리가 컸기에 가림막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가림막 안에는 최소한의 질서 유지를 위해 금군시위들이 지키고 서 있었지만 그들은 출전자들 사이에 폭력이 동반된 다툼이 일어나고 나서야 제압하는 게 전부였다.
류희겸은 자신을 향한 질 낮은 악의에 반응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그냥 흘려 넘길 수 있었다.
그것보다 류희겸은 자신의 몸 상태에 만족했다. 머리가 깨지고, 화상을 입고, 발목을 다쳤던 이전 생과 달리 지금은 아픈 곳 하나 없어서 기분이 좋을 정도였다. 제 실력을 발휘할 수만 있다면 열 명을 이기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이보시오. 당신이 정말 귀장군인 겁니까? 귀장군? 류희겸?”
자리에 앉아 손을 쥐었다 펴면서 감각을 끌어올리던 류희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덩치가 큰 사내 세 명이 앞에 서 있었다.
세 명 중에 제일 앞에 서 있는 사내가 누구인지 류희겸은 알고 있었다. 이양조. 만월제전에서 류희겸이 제일 처음 상대하게 되는 출전자로, 성격이 급했지만 실력만큼은 최고였다.
이양조가 직접 찾아와 시비를 거는 것은 이 시점에서 한 번도 빠짐없이 일어나는 일이었다. 노비들이 아무리 훈련을 했다고 하더라도 어려서부터 무예를 배워 전장을 누빈 류희겸과 비교할 게 아니었다. 일부러 시비를 걸어 전의를 떨어뜨리려는 한다는 것을 류희겸도 잘 알고 있었다.
“왜? 벙어리신가? 웃기네. 화진은 벙어리도 장군이 될 수 있나 봐? 말을 해보라니까.”
“저리 가라. 너와 할 말 없다.”
류희겸은 점잖게 무시했지만 애초부터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화진 새끼들은 배알도 없나 보다. 역적은 죽어야지. 목숨 부지하려고 별 지랄을 다 한다. 안 그래?”
입이 험한 이양조의 비아냥거림에 그를 따라온 사내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노골적인 비난은 류희겸을 조금도 흔들어놓지 못했다.
역적은 천년이 지나도 손가락질받는 법이었다. 자신의 억울함은 풀 수 없지만, 아직 복수는 남아 있었다. 그러니 이런 모욕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역적과 말을 섞으면 간자라고 오해받는다는 것을 모르나?”
살벌한 경고에 가림막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류희겸은 세 명의 사내들이 움찔하고 놀라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익문사에서 한 달 가까이 지내는 동안 사적인 대화는 극도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뭐든지 의심하고 보는 익문사에서 류희겸이 화진국에서 보낸 간자라고 여기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혹은 언제든 대연국을 배신할 거라고 믿는 것 같았다.
“씨발, 이 새끼가 터진 입이라고.”
이양조가 씨근덕거렸지만 덤비지는 못했다. 가림막 안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바로 퇴장이었다.
“장군이고 뭐고, 걸리면 죽었어. 퉤.”
침을 뱉는 시늉까지 한 이양조가 물러나자 류희겸을 힐끗거리며 바라보는 이들도 사라졌다. 간자로 오해받고 싶지 않은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양조가 호명되어 나가는 것을 보며 류희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양조 다음은 자신이었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류희겸의 이름이 불렸다. 가림막을 나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붙는 것을 느꼈지만 류희겸은 앞만 바라보았다.
호명의 순서도, 제전의 진행 순서도 그대로였다. 이름이 불리면 황제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한 다음에 무기를 받고 대결을 하게 된다.
기본 무기는 검과 방패였다. 류희겸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거창이 아닌 검을 골라 대전자 앞에 섰다. 맞은편에 선 이양조가 이글거리는 눈빛을 하고 잔뜩 투기를 내보이고 있었다.
“씨발. 운이 좋다고 생각해. 당장에 죽여주지는 않을 테니까.”
도발 아닌 도발에 류희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난 생에 이양조를 세 번 만나, 세 번 모두 그를 죽였다. 다친 몸으로 어설프게 살려두기에는 자신의 상태가 나빴고 이양조의 실력이 꽤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했지만, 그렇다고 이양조를 살게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류희겸은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어설픈 자비는 사치였다. 당장은 압도적으로 이기는 것이 우선이었다.
쿵!
대결의 시작을 알리는 북이 울리자마자 류희겸은 지체 없이 검을 뽑아 들어 휘둘렀다. 단단히 준비한 듯 이양조가 검을 흘려 냈지만 류희겸이 밀어붙인 탓에 그대로 손잡이를 놓치고 말았다.
검을 바닥에 떨어트린 이양조는 당황하며 거리를 벌렸다. 류희겸 역시 당장에 이양조를 쫓는 대신에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검을 주워라.”
“……뭐?”
“당장에 죽일 생각은 없다.”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이양조는 얼굴을 엉망으로 구겼지만 당장의 자존심보다는 검을 손에 넣는 게 먼저였다. 그의 생각으로, 자신이 검을 놓친 것은 잠시의 방심 때문이었지 결코 실력 때문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검을 쥐어 든 이양조는 벼락같이 류희겸에게 달려들었다. 역적 주제에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는 류희겸을 최대한 잔인하게 죽일 생각이었다. 귀장군이라고 불리는 놈을 죽이면 자신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양조의 패기는 그의 목이 베이며 절명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패자는 바닥에 쓰러졌고 승자는 황제를 향해 예를 올렸다.
붉은 피가 얼굴에 튄 류희겸을 향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
대연국에서 류희겸이라는 이름은 괴이한 자를 뜻하기도 했다. 신출귀몰한 지략으로 양번국의 호양성을 전투 한 번 없이 함락시킨 그를 경외하면서도 귀장군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소문 속의 류희겸은 십 척 거구에 뿔 달린 괴물이었다. 하지만 대기실 가림막에서 나온 사내는 괴물은커녕 준수한 미남이었다.
키가 컸고 체격도 훌륭했다. 하얀 무복에, 돋보이는 하얗고 섬세한 얼굴은 한 손으로 거창을 휘두르는 괴력을 가지고 있는 장군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들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저자가 류희겸이 맞냐고 속닥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막상 대결이 시작되고 검이 맞부딪히자 다들 숨죽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류희겸의 무위는 압도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화진국의 명문 무가인 백녕 류가에서 나고 자란 류희겸은 어려서부터 무예를 갈고 닦았다. 타고 난 신체적 조건이 훌륭했고, 재능도 뛰어났다. 멀쩡한 몸으로 제전에 선 류희겸의 손속은 무자비한 검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 대전자인 이양조만이 스무 합을 넘겼을 뿐이었다. 그 뒤로 네 명은 열 합도 버티지 못하고 패배했다.
셋을 쓰러트려 사면을 받은 류희겸은 다섯을 이겨 황제의 치하를 들었다.
여섯 명째부터는 명패 추첨이 아니라 지원자를 받았다. 지원자는 속출했다. 특히 호승심이 큰 젊은 무관들이 앞다투어 나섰다. 선택권이 있는 황제가 적당한 무관들을 골랐다.
그때부터 대결은 치열해졌다. 류희겸의 우위는 여전했으나 조금 전과 같이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하얀 무복에 붉은 선혈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류희겸은 이겨갔다.
여덟 번째 대전자의 어깨에 칼을 박아 넣는 것으로 류희겸은 항복을 받아냈다. 다음 대결까지는 일 각의 휴식이 주어졌다.
휴식 시간 동안 시위에게 칼을 반납한 류희겸은 황제와 가장 먼 곳에 준비된 의자에 앉아 숨을 골랐다. 단내가 나는 입에 준비된 차를 들이부었다.
노비나 죄인들과 달리 무관들은 노련하게 강약을 조절할 줄 알았고, 그래서 더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팔다리에 생긴 검상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에 류희겸은 쿵쿵 뛰는 심장을 천천히 진정시켰다.
일 각이 지났다는 북이 울리자 황제가 지원한 대전자 중에 한 명을 지목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류희겸은 아홉 번째 상대를 맞이했다. 그는 누구보다 실력이 뛰어났다. 치열한 접전 끝에 결국 승리한 류희겸은 다시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붕대를 받아 오른쪽 허벅지에 난 상처를 급하게 감은 류희겸은 인상을 썼다. 아까 생긴 상처였는데 걷어차인 때문에 더 심해지고 말았다. 긴장하지 않으면 걸을 때마다 절뚝거릴 판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았다. 지휘관으로서 류희겸의 가장 큰 장점은 물러날 때를 잘 파악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몸 상태로는 마지막 한 명을 더 상대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다.
일 각이 지나고 마지막이자 열 번째 대전자를 고를 때였다. 뜻밖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향해 예를 올리자 주위가 술렁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류희겸 역시 크게 숨을 들이켰다.
영왕 진혁위가 지원자로 나선 것이다.
당신이 또 왜. 류희겸은 멀리 보이는 남자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아무리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출전자로 지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황족이, 그것도 직계 황자가 직접 나서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류희겸은 황제가 그를 제외할 거라고 확신했지만, 놀랍게도 자신의 상대로 지목을 당한 사람은 진혁위었다.
“영왕. 진심이냐?”
“물론입니다.”
“좋다. 네가 해보아라.”
“신명을 다하겠나이다. 황제 폐하.”
진혁위가 황제에게 미리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류희겸과 다수의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당황했다. 그러나 류희겸은 곧 황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자신에게 작위를 주지 않기 위해, 대방이 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황족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없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풍류를 즐기는 한량이라고 알려져 있는 진혁위의 실력은 엄청났다.
직전 생에 진혁위가 청하는 비무를 적당히 피하고 다녔다. 딱 한 번 검을 맞댄 적이 있지만, 일부러 져주는 것이 힘들었을 정도로 그의 무위는 상당했다.
전장에서 적으로 만났다면 살을 내주고 뼈를 끊는 것이 최선인 상대였다. 상처를 입은 몸으로는 그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기지 말라는 것이지. 류희겸은 작위는 물 건너갔다고 혀를 찼다. 이기기보다는 잘 싸우고 잘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귀장군이 많이 지쳐 있으니 일 각의 시간을 더 주십시오.”
“허락한다. 일 각의 시간을 더 주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하고 있던 류희겸은 황제께 인사를 올리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사이 진혁위가 다가왔다.
금실로 수를 놓은 검은 무복을 입은 진혁위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옥패를 길게 늘어뜨리기까지 한 차림은 피가 튀는 대결과 어울리지 않았다.
류희겸은 태양 아래 빛나는 그의 외모가 사람들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똑똑히 보았다. 여인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는 술렁임이 커지다 못해 아예 자리에서 일어난 이도 있었다. 저러고도 남색가라고 하니 여인들이 한숨을 쉴 만했다.
대전자의 가림막이 있는 공터 앞에 자리한 승자의 쉼터는 찻잔을 올릴 수 있는 작은 탁자와 낮은 의자가 전부였다. 거기까지 느긋하게 걸어오는 진혁위의 뒤로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영왕 전하를 뵙습니다.”
“됐다. 앉아라.”
쉼터에는 의자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류희겸은 망설였다. 하지만 오래 고민할 새도 없이 시종이 의자를 하나 더 가져다준 덕분에 류희겸은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진혁위와 어깨를 맞대다시피 하며 나란히 앉을 수 있었다.
“일 각으로는 충분하지 않겠지만, 붕대를 감을 시간은 충분하겠지. 왼팔에도 붕대를 더 감아. 피가 심상치 않은데.”
류희겸의 오른쪽 허벅지 말고도 왼쪽 팔에도 피가 꽤 흐르고 있었다. 슬쩍 왼쪽 팔을 본 류희겸은 고개를 저었다.
“보기만큼 심하지 않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궁금할 것도 많을 터인데, 아무것도 묻지를 않는군. 그럼 먼저 말하지. 최선을 다해라. 생사결이니, 본왕은 귀장군을 죽일 생각이다.”
“……?!”
“본왕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오늘 이 자리에서 목이 잘릴 것이다.”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면서도 진혁위가 활짝 웃었다. 수려한 외모는 환한 태양 아래에서 더욱 빛이 났지만 류희겸은 어이가 없었다.
이전 생에 자신이 진혁위와의 비무를 피한 것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류희겸이 알고 있는 황족 중에 변덕스럽지 않은 자는 거의 없었다. 서로의 실력을 겨루어보자며 대인의 풍모를 보이다가도 생채기를 입으면 돌변하는 것이 황족이었다. 그렇다고 방어만 하면 얕보는 거냐고 화를 냈다.
물론 나중에서야 진혁위가 화통한 성격에 뒤끝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공개적인 장소에서 황족에게 상해를 입히고 망신을 주었다가는 황제의 눈 밖에 날 수 있었다. 적당히 상대하다 항복을 외칠 생각이었는데, 그게 아니라 목숨을 걸고 덤벼들라는 주문은 예상 밖이었다.
류희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진혁위가 콧잔등을 살짝 찌푸렸다.
“본왕이 농을 하는 것 같으냐?”
“아닙니다.”
“심장이나 목을 노려도 된다. 숨만 붙어 있으면 살 수 있으니까. 그러니 귀장군도 본왕의 손속이 매섭다 한탄하지 마라. 본왕을 만족시킨다면 염호부(炎護符)를 써서 멀쩡히 고쳐 줄 테니.”
“영왕야의 명대로 제 실력을 다 보이겠나이다.”
진혁위의 태도는 가볍기 그지없었지만 류희겸은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참으며 대답했다.
신궁에서 만드는 호부 중에 염호부라는 게 있다. 보통 귀신과 액을 쫓는 호부와 달리 염호부는 목숨만 붙어 있다면 외상을 모두 낫게 하는 기적을 선보였다. 하늘의 말씀을 전하는 신궁이 황실의 존경을 받는 진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염호부였다.
천금보다 비싸다는 염호부는 모두 황제의 것이었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족들이 한두 개 정도를 하사받아 보물처럼 모시고 있었다. 그걸 쓰겠다는 것은 진짜 죽일 마음이 있다는 뜻이었다.
목이 떨어지지 않으려면 진짜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아까와는 다른 시종이 소반을 들고 나타나 탁자 위에 주전자와 잔을 놓았다. 진혁위가 직접 잔을 채워 한 모금 마시더니 그걸 류희겸에게 내밀었다.
“마셔라. 꿀차다.”
“……?”
계속 딱딱하게 굳어 표정 관리를 하던 류희겸의 얼굴이 이번에야 무너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마시던 것을 주는 것은 법도에도 맞지 않았고, 하필이면 그게 꿀차인 것도 이상했다. 해괴한 것을 다 본다는 듯한 류희겸의 눈빛에 진혁위가 웃음을 터트렸다.
“독은 안 들었다. 단 게 들어가야 힘이 나지 않겠느냐. 부상자와 싸우는 것도 재미없는데 기력까지 빠져 있으면 무슨 흥이 날까. 마셔라. 팔 아프다.”
아직도 내민 손을 거두지 않고 있는 진혁위가 재촉했다. 사방이 트인 공개된 장소라 거절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류희겸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손을 모아 잔을 받았다.
“잘 마시겠습니다. 영왕야.”
류희겸은 망설이지 않고 잔에 든 것을 마셨다. 진혁위가 먼저 마셔 보였으니 독이 들었을 걱정은 하지 않았다. 꿀차는 따뜻하고 이름만큼이나 달았다. 배를 넣고 끓였는지 시원한 배향도 났다.
“한 잔 더 마셔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신 다음에 잔을 내려놓자 진혁위가 다시 가득 채웠다. 류희겸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 속에 꿀차를 한 잔 더 마셨다.
진혁위의 말대로 단 게 들어가자 머리가 맑아졌다. 피로와 긴장으로 좁아졌던 시야가 확 넓어졌다.
제전이 열리는 전장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웅성거리며 흩어졌다. 누군가는 차를 마시고, 누군가는 진혁위를 바라보는 눈빛이 뜨거웠고, 또 누군가는 옆에 앉은 사람과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자신의 필사적인 몸부림이 그들에게 재미있는 볼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혼자라는 사실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단단한 땅이 아니라, 출렁이는 뗏목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검은 구렁텅이를 헤매는 느낌에 류희겸은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힘주어 꽉 쥐었다.
천세에 남을 영웅이 되고자 했지만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복수에 대한 집착뿐이었다. 하늘이 자신을 어디에 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진한재의 목을 취하려면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게 먼저였다.
머리를 흔들며 복잡한 감정을 털어낸 류희겸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다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진혁위와 눈이 마주쳤다.
“본왕에게 할 말이 있는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실없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에서는 여전히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일 각을 더 쉬게 한 것도, 그리고 꿀차를 마시게 한 것도 모두 진혁위의 목적이 있는 호의라는 것을 알았다.
지난 생에서 비무를 하자고 졸라대던 진혁위는 호승심이 강했다. 서로의 실력을 알아보는 비무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생사결이라고 공언한 남자가 얼마나 사나울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래도 살아남아야 했기에 류희겸은 독하게 마음먹었다.
*
진혁위와 류희겸의 대결은 시작부터 살벌했다.
선공을 한 것은 진혁위이었다. 서로 마주 서서 정중히 인사를 하고 자세를 갖추자마자 진혁위가 질풍처럼 튀어나가며 검을 내질렀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류희겸은 심장을 노리고 찔러드는 검을 피했지만, 검로를 바꿔 이어지는 공격에 왼쪽 어깨를 크게 베이고 말았다.
처음부터 기세를 빼앗긴 류희겸은 한동안 수세에 몰려 뒷걸음질만 쳐야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뒤로 훌쩍 몸을 물리는데 진혁위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러다 진짜 목이 잘릴 것이다!”
커다랗게 소리를 지른 진혁위가 류희겸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가까스로 검을 쳐낸 류희겸은 이를 악물었다. 신중하게 검을 나눌 거라는 예상이 빗나가 버렸다. 약간의 방심에 공격의 틈은커녕 숨 쉬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 틈을 만들어내는 것이 실력이었다.
공격다운 공격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막기에만 급급하던 류희겸은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에 팔을 비틀어 공간을 벌렸다. 잠깐의 순간에 망설이지 않고 검을 내리그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깊이가 얕아 진혁위의 앞섶만 베었다.
길게 베인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면서 동시에 진혁위의 턱 밑에 아주 얕고 작은 생채기가 생기면서 피가 흘렀다.
손등으로 피를 닦아낸 진혁위가 씩 웃었다.
“이제야 할 마음이 생겼군.”
류희겸은 여유를 부리는 진혁위를 향해 대답을 하는 대신에 매섭게 검을 찔렀다. 그때부터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서로가 원수라도 된 듯 살초만 쓰면서 크고 작은 상처가 하나씩 늘어났다.
앞서 있었던 대결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모습에 구경꾼들은 놀라며 감탄사만 연신 내뱉었다. 심약한 자들은 피가 튈 때마다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무예를 익힌 무관들은 훌륭하다 칭찬하기에 바빴다. 가장 높은 곳에 앉은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류희겸은 초조함에 휩싸였다. 지난 생에 진혁위의 기량은 분명히 자신보다 한 수 아래였다. 어디 한군데 크게 다칠 각오를 한다면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동귀어진도 자신할 수 없었다. 체력도 기력도 바닥이었고 오른쪽 허벅지에서도 힘을 실을 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어금니를 악물며 류희겸은 진혁위의 목을 향해 날카롭게 검을 찔러 넣었다. 그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다.
류희겸의 필사적인 공세에도 대결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결국 먼저 치명적인 빈틈을 보인 것은 류희겸이었다.
머리 위로 내려치는 진혁위의 검을 막는 순간에 오른쪽 허벅지의 고통에 휘청거리고 말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진혁위가 검날을 빗겨 류희겸의 왼쪽 어깨에 검을 박아 넣으면서 다친 허벅지를 찼다.
끔찍한 아픔에도 류희겸은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오른쪽 무릎을 굽히며 자세를 무너뜨렸다. 진혁위가 그대로 류희겸의 정강이를 밟아 누르자 우드득 하고 끔찍한 소리가 났다.
“으윽!”
뼈가 부러지는 고통에 류희겸의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노련한 경험 덕분에 류희겸은 이를 악물며 뒤로 거리를 벌렸지만 진혁위가 쉽게 따라붙었다.
“끝이다.”
작게 속삭인 진혁위가 손잡이 끝으로 류희겸의 옆머리를 후려쳤다. 류희겸이 정신을 잃고 뒤로 넘어지자 승자를 향한 환호와 박수가 초원의 하늘 위로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 ◇ ◇
감옥과 선창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세 번의 생을 제외한 모든 생에서 류희겸은 제전에 참가해 다섯 명을 쓰러뜨렸다. 이후 류희겸의 신병을 맡은 인물은 위무장군(魏武將軍) 희범영(姬範嶺)이었다.
화진국에 백녕 류가가 있다면 대연국에는 희가(姬家)가 있었다. 대연국의 개국공신 가문 중의 하나인 희가의 희범영은 황제의 신임을 받는 장군이었다.
류희겸은 희범영과 직접적인 인연이 없었다. 대신 그의 조카인 희일준(姬一俊)을 우연찮게 살려준 적이 있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희범영이 수고롭게도 매번 류희겸의 호적을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제전에 참석한 류희겸은 자유와 명성을 얻었지만 큰 부상을 입었다. 특히 첫 번째 생이 심했다. 겨우 목숨만 붙어 한 달여 가까이를 자리를 보전하고 누웠다. 그때 들인 약값 역시 모두 희 장군이 부담했다.
그다음부터는 부상의 정도가 약해졌다. 대전자들의 특징을 파악했기 때문에 바로 직전 생이자 여섯 번째 생에서는 오른 팔뚝에 긴 검상만 입는 것으로 끝났다. 그때도 여전히 류희겸의 신병을 맡은 사람은 희범영 장군이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여섯 번째 생에서는 진혁위가 나타났다. 무거운 선물 상자를 여럿 들고.
전에 없던 일이었기에 류희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진혁위와 가까워져야 했기에 조심스럽게 굴었다. 반면 진혁위는 처음부터 적극적인 호의를 감추지 않았다.
‘훌륭했어. 오랜만에 피가 들끓었다고.’
굉장한 무위였다고 칭찬을 거듭한 진혁위가 비무를 하자고 들이댔다. 류희겸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영왕야와의 비무가 어떤 식으로 끝나게 될지 무서웠다. 제전에서 다친 팔이 아직 다 낫지 않았다고 비무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소인이 아직 오른팔이 낫지 않아 비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귀장군의 팔이 다 나은 이후에 비무를 하면 되지 않나.’
‘귀하신 분이 어찌 위험한 비무를 하려 하십니까.’
‘꼭 본왕이 질 것처럼 말하는군. 승패의 결과를 장담하나? 본왕이 귀장군을 때려잡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팔 하나는 자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도 류희겸을 귀장군이라 부르던 진혁위는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두고 보자는 날 선 위협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 말겠다는 호승심이었다. 사내치고는 화려한 외모와 약관의 나이에 어울리는 치기가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잘생기고 집요하신 왕야께서는 기어코 비무 약속을 잡고는 돌아갔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희범영 장군이 입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까지 걸어 단순한 구두 약속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사실 진혁위와의 첫 만남이 인상 깊었던 것은 집요한 비무 요청 때문이 아니라 그가 들고 온 하례품 상자 때문이었다.
남부의 넓은 평야를 봉작지로 하사받은 영왕의 씀씀이는 통이 컸다. 상처에 바르는 약, 귀한 약초, 비단, 패옥, 그리고 작은 자개함에는 은자가 가득 들어 있었다. 진혁위가 준 은자는 나중에 부하들을 찾을 때 아주 요긴하게 썼다.
그렇게 처음으로 만난 진혁위는 스무 살이라는 나이에 어울리는 사내였다. 활기차고 호전적이며 잘 웃었다. 그러나 이번은 조금 달랐다. 여전히 활달하고 호전적이었으나, 말투나 눈빛이 어딘가 모르게 서늘했다.
직전 생에서 이 년 동안 지켜본 진혁위는 화가 나면 크게 소리치는 대신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눈도 입도 웃고 있었지만 말속에는 뼈가 담겼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약을 강하게 썼다고?”
류희겸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가 다시 감았다. 어찌 된 일인지 몸에 힘이 빠져서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와…… 왕야.”
“그새 귀가 먹었느냐? 약을 강하게 썼냐고 두 번째로 묻는다.”
부드럽게 들리는 진혁위의 목소리에 류희겸은 혼몽한 와중에도 속으로 혀를 찼다. 이전 생의 경험으로 진혁위가 상당히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절제된 분노는 지휘관으로서는 괜찮은 장점이었지만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가 절절맸다.
“소, 소인이 평소보다 약을 강하게 썼습니다. 염, 염호부를 쓰면, 몸이 회복되는 동안에 고통이 큽니다. 그래서 진통제와 수면제를 함께 처방했사온데……. 이리 잘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류희겸은 두 번째로 혀를 찼다. 약을 썼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의원 같은데 아무래도 심약한 성격인 듯 말을 계속 더듬다가 결국 죽여달라고 해버렸다.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진혁위는 죽여달라고 하면 진짜 죽여버렸다. 직전 생에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읍소하는 부하의 목을 그 자리에서 잘라버렸다. 물론 그때는 전시이기도 했고, 읍소하던 부하가 제 목숨 하나 살리자고 부하들을 사지로 밀어 넣었으니 죽을죄를 지은 것도 맞았다.
기억이 뒤섞이면서 정신이 더욱 혼몽해졌지만 류희겸은 억지로 눈을 뜨려고 했다. 정신이 돌아왔으니 불쌍한 의원이 졸도하기 전에 알리는 게 좋았다.
“죽여달라고 하면 못 죽일 것 같으냐?”
“소신이 실언은, 실언을 했습니다. 부디 조금만 더 지켜보시옵소서. 강건하신 분이오니 곧 정신을 차릴 것이옵니다. 화색이 돌아왔으니……. 왕야. 보, 보십시오. 지금 깨어나셨습니다!”
덜덜 떨던 의원이 반색하며 소리를 치는 순간에 류희겸은 완전히 눈을 떴다. 또렷해지는 시야에 침상의 높은 천장과 하늘거리는 천개가 보였다. 그리고 불쑥 진혁위의 얼굴이 나타났다.
“정신이 드는가?”
화려한 외모의 남자가 눈을 휘며 웃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묻고 싶은데 입술만 뻐끔거릴 뿐,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소리가 안 나오는 모양이군. 마실 차를 대령해라. 뜨겁지 않게. 준비된 것도 가져오고. 귀장군이 크게 다쳐 염호부를 사용했다. 수면제와 진통제를 세게 썼더니 이틀이나 깨지 못했어.”
“아…….”
류희겸은 왜 이렇게 힘이 없는지 이해했다. 이틀이나 굶었으니 팔다리가 축축 처지는 것은 당연했다.
“달리 아픈 곳은?”
여전히 소리가 나오지 않았기에 류희겸은 고개만 저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우소진이 찻잔을 들고 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목부터 축여라.”
우소진이 대령한 찻잔이 진혁위의 손에서 다시 류희겸의 손으로 옮겨졌다. 목이 말랐고 차가 뜨겁지 않았기에 류희겸은 한 번에 잔을 비워냈다. 그제야 정신이 맑아진 기분이었다.
“왕야. 여긴 어디입니까?”
“당연히 본왕의 왕부지. 황상께 귀장군을 달라 했다. 처음 귀장군을 산 건 본왕이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류희겸은 한숨을 삼켰다. 원래는 희 장군이 자신의 신병을 맡았었는데, 이번에는 진혁위였다. 확실히 그가 변수였다.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에 우소진이 술잔을 들고 왔다. 진혁위가 류희겸의 손에 들려 있는 빈 잔을 가져가고는 술잔을 내밀었다.
“합환주다.”
“……?”
“그 합환주가 맞다.”
반사적으로 술잔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던 류희겸은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합환주라고? 합환주는 부부가 된 신랑신부가 첫날밤에 마시는 술이었다. 보통 잠자리에 도움이 되는 약효가 있었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하려는데 진혁위가 맞다고 쐐기를 박아주었다.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자 진혁위가 가볍게 웃었다.
“웃긴 얼굴을 하는군.”
“왕야?”
“미약을 쓸까도 생각해 봤는데, 그건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라서 말이지. 그래서야 쓸모가 없지. 이건 미약보다 효과가 낮지만 적당히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더군.”
짧은 설명을 한 진혁위가 술을 단번에 마셨다. 그리고는 우소진에게 빈 잔을 돌려주고 술이 가득 찬 새 잔을 받았다.
“내가 왜 너를 샀다고 생각하나?”
진혁위의 말투가 바뀌었다. 스스로를 본왕이라고 지칭하지 않았고, 류희겸을 귀장군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충격을 받은 류희겸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진혁위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류희겸은 진혁위가 자신을 산 것은 그저 변덕이라고 생각했다. 배포가 큰 진혁위는 마음에 드는 물건을 쉬이 사들이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이런 의미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럴 수 있기는 했다. 진혁위는 남색가였다. 그것도 미동이 아니라 건장한 사내를 좋아했다. 직전 생에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그가 들이대는 바람에 몸을 섞게 되었다.
이번에는 조금 달리 접근할 계획이었는데 첫 만남이 달라졌더니 더 이상하게 되고 말았다.
진혁위의 턱이라도 후려쳐서 기절을 시켜 이 상황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후환이 두려웠다. 그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친왕이었고, 집요한 성격이었다.
“불손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진혁위가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듯 캐물었다. 이럴 때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최선이 아니었기에 류희겸은 진혁위를 보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피할 수 없다면 맞서 싸우라고 가르침을 받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귀장군은 어찌 맞설 건가?”
“뜻대로 하십시오.”
목적을 위해서라면 명예도 자존심도 필요 없는 류희겸은 간단하게 결정을 내렸다. 이미 도망칠 퇴로조차 없는 상태에서 멀쩡한 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순응하는 게 최선이었다. 무엇보다 미약에 취하는 것보다는 합환주를 마시는 것이 나았다.
류희겸은 당면한 흐름에 몸을 내맡겼다. 그런데 진혁위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이리 쉽게 포기한다고?”
“영왕야께서는 소인이 어찌하길 바라십니까?”
“본왕을 때려눕힐 줄 알았지.”
“목이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마셔라.”
류희겸은 진혁위가 내민 술을 거절 없이 받아 마셨다. 과일과 꽃 향기가 나는 술은 제법 독했다.
빈 잔이 치워지는 사이에 진혁위가 신을 벗고 침상 위로 올라왔다. 그의 가벼운 손짓에 우소진과 의원, 그리고 시종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침상의 천개가 내려가고, 향이 피워지고, 곧 인기척이 사라졌다.
정적 속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진혁위였다. 그의 목소리는 살벌하게 울렸다.
“귀장군은 본왕에게 주먹을 휘두르지 않을 자신이 있나?”
“……?!”
“험하게 다뤄질 텐데, 견딜 수 있냐고 물었다.”
류희겸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험하게 다뤄진다고? 눈빛으로 보낸 의문에 진혁위가 곧 행동으로 답을 주었다.
다짜고짜 류희겸의 턱을 움켜잡은 진혁위가 그대로 그를 밀어 넘어뜨렸다. 기습에 가까운 행동에 오래도록 단련한 류희겸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다행히 진혁위가 다른 한 손으로 주먹을 막았다.
“이것 봐.”
류희겸의 턱을 한 손으로 누르고 손목까지 붙잡은 진혁위가 웃었다. 반면에 류희겸은 인상을 썼다. 잡힌 턱이 아팠고 또 살갗에 닿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쳤다.
“갑자기 그러시면…….”
“험할 거라고 했잖나.”
“꼭 그러셔야 합니까?”
“당연하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직전 생에서 진혁위는 성급하기는 했어도 험하게 굴지는 않았다. 이렇게 턱을 잡고 밀어뜨리고는 압박하는 일도 없었다.
“제가, 제가 반항하기를, 원하십니까?”
강하게 붙잡힌 턱이 꽤나 아팠기에 류희겸은 말을 끊어서 해야 했다. 반항하기를 원한다면 반항해 줄 수도 있다.
“그랬다가는 귀장군의 다리가 부러질 것이다.”
“왕야……께서,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겠습니다.”
“뜻대로 하라고 했잖느냐. 제가 한 말을 그새 잊은 모양이지?”
물론 그랬지만 이런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괜히 억울한 마음에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진혁위가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몸에 올라타고는 품에서 하얀 끈을 꺼내 류희겸의 손목에 감더니 침상의 기둥과 묶기 시작했다.
류희겸은 도대체 몇 번째로 놀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직전 생에 몇 번이나 몸을 섞었는데도 진혁위가 이런 취향인지 꿈에도 몰랐다.
“묶으시는 겁니까?”
“귀장군이 맨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데, 어찌 자유롭게 둘까.”
정식으로 무예를 배웠으니 두 손이 자유롭다면 사람의 목을 꺾어버릴 수 있었다. 물론 그래봤자 자신도 죽을 터이니 그럴 일은 없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목숨은 소중합니다.”
“그렇겠지. 그럼 이건 본왕이 귀장군을 믿지 못해서라고 하지.”
농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한 진혁위가 끈을 단단히 묶고는 류희겸을 몸으로 내리눌렀다.
류희겸은 묘한 상황에 난감해졌다. 오른쪽 팔이 위로 길게 뻗어 고정된 자세도 그러려니와 진혁위의 체중과 침의 너머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자극처럼 느껴져서 이를 악물었다.
“이 얼굴이 마음에 들었어.”
진혁위가 류희겸의 얼굴을 손등으로 쓸며 웃었다. 열기에 들뜬 눈빛과 이를 드러낸 모습은 만족스러운 사냥감을 잡은 맹수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눈빛이 차갑고 무심한 것도 좋았고.”
“읏.”
뺨을 쓸던 손이 넉넉하게 머리를 잡아 귀 뒤를 만지작거리는 바람에 류희겸은 반사적으로 진혁위의 팔뚝을 붙잡았다. 그의 팔을 밀치려고 했지만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탓에 그저 바르작거리는 것으로 끝났다.
“이 정도는 반항으로 여기지 않을 테니, 다리가 부러질 걱정은 마라.”
살벌한 농을 한 진혁위의 손이 뺨에서 목으로 쓸어내려 가다가 옷깃을 파고들었다. 서슴없이 움직이는 손이 맨살에 닿자 류희겸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오싹함에 어깨를 움츠렸다. 검을 오래도록 잡은 진혁위의 손은 거칠고 뜨거워서 더 자극적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류희겸은 입술을 깨물었다.
직전 생에서 최음약을 한 번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거의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쾌락에 흐느낀 것뿐이었다.
지금은 정신이 또렷했지만 그래서 더 곤혹스러웠다. 그저 맨살에 닿은 것뿐인데도 아래가 거의 다 서고 말았다. 합환주뿐만이 아니라 피워놓은 향도 뭔가 효능이 있는 것 같았다.
노골적으로 아래를 더듬으며 내려가는 손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류희겸은 진혁위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반쯤은 오기였다. 차가운 눈빛이 좋다고 하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 마음껏 노려본다 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사이에 활짝 옷깃을 벌려 몸을 쓸던 진혁위의 손이 배꼽 아래에 멈췄다. 어떤 기대감과 짜릿한 흥분에 류희겸은 숨을 참았다.
“선혈을 뒤집어쓰고도 무심한 얼굴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람이 저리도 미칠 수 있는 건가 싶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넋이 나갔었던 것 같기도 해.”
일종의 고백에 가까운 말에 류희겸은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전 생에서도 자신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피가 들끓었다고 했었다. 이 정도면 진혁위는 이상한 것을 좋아하는 취향이 분명했다.
피를 뒤집어쓰고 칼을 휘두르는 모습에 넋이 나갔다니. 아직 이성이 남아 있었던 류희겸은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꿀꺽 삼켰다.
“왜? 농을 하는 것 같나?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모두 진심이다. 이제 손에 넣었는데. 어찌 할까.”
진심이란다. 이전 생에 그가 선물을 잔뜩 들고 비무를 하자고 청하던 것이 그런 의미였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곧 흩어졌다. 바지 속으로 파고든 커다란 손에 성기가 잡히면서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자, 잠깐.”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어보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제야 진혁위의 시선을 피해 눈을 감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뜨거운 손이 거칠게 쓸어 만질 때마다 시야가 하얗게 부서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직전 생에서 진혁위와 몇 번이고 몸을 섞었다. 어쩌다 최음약을 먹었을 때도 진혁위와 했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이런 감각은 익숙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몸이 붕 뜨면서 열기가 머릿속을 잠식했다.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올까 봐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목에서 억눌린 신음이 울리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파정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가 추락하는 감각에 몸을 떨면서 숨을 허덕였다.
“빨라.”
진혁위의 놀리는 것 같은 말투에 울컥한 류희겸이 이를 악물었다. 합환주 때문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술이 효과가 좋군.”
흥겨움을 감추지 않은 진혁위가 손수 류희겸의 침의를 벗기기 시작했다. 류희겸은 옷깃이 스치며 치솟는 성감에 인내심을 발휘했지만 다시 발기하고 말았다.
오른 손목이 묶여 있는 탓에 상의를 풀어헤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하의는 속곳까지 순식간에 벗겨졌다.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진혁위 탓에 헐벗은 하체와 발기한 성기를 숨길 수가 없었다. 뜻대로 하라고 했지만 그래도 수치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엎드려.”
“……?!”
“엎드리라 했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고 있던 류희겸은 진혁위를 보았다. 욕망을 품은 그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이 상황에서 엎드리면 어떤 자세가 될지 뻔했다. 안 그래도 열기로 붉어진 얼굴이 불타듯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하라는 것은 뭐든 다 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류희겸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몸을 뒤집었다. 팔에 묶인 끈이 조금 꼬이기는 했지만 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무릎으로 버텨 서면서 주춤주춤 엉덩이를 치켜든 류희겸은 진혁위를 향해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미친놈. 차라리 익문사에서 고신을 받는 것이 더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윽.”
교차한 팔 사이로 얼굴을 파묻던 류희겸은 엉덩이 사이로 흘러내리는 차가운 느낌에 긴장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입니까?”
“향유를 부었다.”
위험한 게 아니라고 알려주는 진혁위의 손에 오른쪽 엉덩이가 잡혀 벌어지면서 조금 더 깊숙한 곳에 차가운 것이 흘러들었다. 침상에 깔린 요를 손으로 꽉 쥐고 있는데, 이번에는 뜨거운 것이 엉덩이 사이에 닿았다. 전희도 없는 삽입에 아래가 억지로 벌어졌다.
“흐윽.”
“좁아.”
류희겸의 엉덩이를 단단히 붙잡은 진혁위가 불만스럽게 으르렁거렸다. 반대로 류희겸은 희게 질린 채 소리 없이 욕을 쏟아냈다. 이전 생에 경험한 남자의 성기는 무척이나 컸다. 향유를 뿌리고 막 쑤셔 넣는다고 해서 될 게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폭거에 류희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버티는 것뿐이었다. 조금씩 길을 내던 성기가 결국 끝까지 밀고 들어왔을 때는 겨우 숨만 헐떡거렸다.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닌 건 알지?”
다음을 예고한 진혁위가 천천히 성기를 빼냈다. 속살이 딸려나가는 감각에 류희겸의 목에서는 앓는 신음이 울렸다. 엉덩이가 높이 치켜들려져 치부가 드러났다는 사실에는 가능하면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성기가 거의 끝까지 빠져나가자 다시 향유가 쏟아졌다. 움칫 떠는 것은 잠깐이었다. 끝만 걸쳐 있던 성기가 단숨에 안으로 처박혔다.
“……!”
사나운 충격에 류희겸은 잠시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억눌린 숨을 토해 내자마자 강한 삽입이 이어졌다.
퍽. 젖은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폭력적인 소리가 계속 울렸다. 거센 힘에 버티기 위해 류희겸은 요가 찢어지기 직전까지 움켜쥐었다.
전희도 없는 삽입에 이은 강한 추삽질은 고통스러워야 했다. 하지만 합환주의 효능 덕분인지 어느 순간부터 고통이 쾌락으로 바뀌었다.
이미 배꼽에 닿을 정도로 아프도록 발기한 성기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앞으로 밀리는 힘에 맨살이 침의와 요에 쓸리는 것도 자극이었다.
무엇보다 진혁위가 사납게 박아댈 때마다 치솟는 쾌감이 끔찍할 정도로 좋았다.
생을 다시 살기 전까지 남자를 경험해 본 적은 없었다. 지금 이 몸으로 뒤가 열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전 생에 느꼈던 쾌락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류희겸은 이성을 놓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묶이지 않은 손으로 성기를 쥐고 흔들고, 엉덩이를 흔들며 어서 더 세게 박아달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아무 데도 만져지지 않았는데, 그저 구멍을 쑤셔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흥분하는 것은 합환주 탓이라고 여겨도 수치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자괴감을 더하고 싶지 않았다.
“으. 으윽……. 윽.”
입술을 꾹 다물었기에 짐승처럼 앓는 소리가 목 안에서 울렸다. 굵직한 성기가 박아들 때마다 아랫배가 통째로 울려댔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쾌감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귀가 웅웅 울리면서 순간순간 시야가 하얗게 사라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허리 들어.”
다리가 풀려버리는 바람에 무릎이 무너지면서 엉덩이가 처지자 진혁위가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허리가 아니라 허벅지가 붙잡혀 엉덩이가 들려졌다.
잠시 멈췄던 추삽질은 더욱 강해졌다. 희겸은 이를 악물며 요에 얼굴을 파묻었다. 끔찍한 쾌감에 절정은 순식간이었다. 누구도 만져 주지 않았던 성기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졌다.
“하아. 잘라 먹을 듯이 조여.”
몸이 수축하면서 커다란 것을 쥐어짤 듯이 꽉 물자 진혁위가 낮은 목소리로 위협했다. 거칠게 박아대기만 하던 성기가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는 잘게 찔러댔다.
류희겸은 겨우겨우 신음을 참아내며 덜덜 떨었다. 끝 모를 쾌락과 열기에 이성이 점점 잠식되어 갔다.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흔들고 말았다. 수치도 민망함도 엷어지고 오로지 본능적으로 쾌락만을 좇았다. 그나마 필사적으로 소리가 나오는 것만은 막았다.
배 안쪽이 뭉개지고 뒤가 녹아났다. 진혁위가 박아 넣을 때마다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쾌감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결국 오래지 않아 두 번째 사정이 이어졌다. 그 여파로 의도치 않게 진혁위의 성기를 조였다. 낮게 으르렁거린 진혁위가 단단히 엉덩이를 부여잡고는 커다란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추삽질을 했다.
깊숙한 곳까지 들이박은 진혁위가 몸을 굳히며 사정했다. 잔뜩 자극받은 내부가 뜨거운 것으로 젖어가는 것 같은 감각에 류희겸은 그저 몸을 떨었다.
진혁위의 사정은 길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더 깊은 곳에 닿으려는 듯이 짧게 박아 넣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헐떡이는 소리만이 침상에 내려앉았다. 류희겸은 땀과 눈물에 젖은 눈을 깜빡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진혁위가 몸을 물리기를 기다렸다.
“울부짖는 걸 듣고 싶었는데. 너무 참을성이 강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진혁위가 혀를 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류희겸은 기가 막혔다. 남자의 취향이 이렇게나 고약한 줄은 몰랐다. 속으로 욕을 하는 것은 잠시였다. 등줄기를 쓰다듬는 손길에 저릿한 감각이 등을 타고 올라 몸이 튀어 올랐다.
“흑.”
정사의 순간에도, 절정에 이를 때도 튀어나오지 않은 신음이 부지불식간에 흘렀다. 그저 가볍게 쓰다듬은 것뿐인데 몸이 떨렸다. 진혁위의 성기를 품은 안이 징징거리며 울렸다. 아직 합환주의 기운이 가시지 않고 남아 있었다.
몸이 제 것 같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뒤에 힘이 꽉 들어가자 진혁위가 헛웃음과 함께 한마디 했다.
“이런. 꽉 물고 놓아주지를 않으면 어떻게 하나?”
“끝난 거, 아닙니까?”
“끝나길 바라지 않는 것 같은데? 응?”
놀리듯 말을 한 진혁위가 다시 등을 길게 매만지자 류희겸은 몸을 굳히며 인상을 썼다. 어정쩡하게 발기해 있던 성기가 진혁위의 손길 두 번으로 완전히 발기하고 말았다. 또한 안을 채운 진혁위의 것도 크기를 키워 꿈틀거렸다.
“다시, 하실 겁니까?”
“당연하지.”
당연하다고 하면서도 진혁위가 몸을 물렸다. 성기가 빠져나가는 감각에 작게 도리질을 치던 류희겸은 진혁위의 손에 의해 바로 눕게 되었다.
그제야 진혁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정염 어린 얼굴은 사납고, 매혹적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류희겸은 그저 한 대 후련하게 때릴 수 있다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다.
“분한 모양이야.”
“…….”
류희겸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로 젖은 눈을 하고는 도전적으로 진혁위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눈싸움을 하게 된 류희겸은 제 꼴이 어떤지 모르고 있었다. 손목이 묶여 고정되어 있었고, 상의는 풀어 헤쳐져 좌우로 열려 가슴이 다 드러나 있어 단단한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또한 헐벗은 하체는 몇 번이고 유백색 정액이 흩뿌려져 엉망이었다.
귀장군이라는 명성이 괜한 게 아닌 듯이 곳곳에 흉터가 도드라진 피부는 붉게 달아올랐다. 만지지도 않은 성기는 음모 사이에서 다시 꼿꼿하게 발기해서 꺼덕거리고 있었다. 냉철한 서생 같은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했지만 쾌감에 어쩔 줄 몰라 하기보다는 분기를 애써 감춘 티가 났다.
그 모든 것이 진혁위를 자극하고 있다는 것도 류희겸은 알지 못했다.
“사람을 이리도 홀리다니.”
류희겸은 자신이 뭘 어떻게 해서 홀리게 했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정확히는 진혁위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흔들렸던 이성이 다시 돌아왔지만 그래서 몸이 달았다는 것을 더 선명하게 느꼈다.
몇 번이나 절정에 이르렀는데도 한참이나 모자랐다. 남자의 것을 품었던 뒤가 허전함에 움찔거리며 자극을 원하고 있었다. 갈망이 심해져서 몸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그걸 숨기느라 주먹을 꽉 쥐고는 진혁위를 노려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 노려보기만 할 것이냐?”
“뜻대로 하라 말씀드렸습니다.”
“뻣뻣하기는. 이러니까 괜한 심술을 부리고 싶어진다니까.”
위험한 단어를 내뱉은 진혁위가 류희겸의 오른쪽 발목을 잡아 자신의 어깨에 걸면서, 동시에 왼쪽 종아리를 잡아 밀어붙였다. 허리가 들뜨면서 류희겸은 잔뜩 발기한 제 성기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정액이 잔뜩 번들거리는 고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러모로 고약한 상황에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지만 진혁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즐거운 듯 웃으면서도 정염을 품고 있는 얼굴은 어딘가 냉정하기까지 했다.
“진짜 울려봐야겠군.”
“고약하십니다.”
“맞아.”
아주 간단하게 자신의 성정을 인정한 진혁위가 하체를 들이밀었다. 잔뜩 젖은 입구에 닿은 뜨거운 것이 미끈거리며 비벼졌다. 초조함, 불안감, 기대감, 그 모든 것이 한데 엉켜서 쾌감을 갈구했다. 그저 닿은 것뿐인데도 몸이 떨리며 열이 번졌다.
“멋진 얼굴이야.”
느릿하게 삽입하던 진혁위가 흥겹게 중얼거렸다. 몸이 벌어지면서 점막이 성기를 정신없이 집어삼켰다.
류희겸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날것의 감정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을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핥아먹을 듯이 바라보는 진혁위의 시선에 숨이 막혔다.
고통이 순식간에 쾌감으로 치환되었다. 뜻대로 하라고 했지만 치밀어 오는 감각을 감당하기가 힘들어졌다.
결국 류희겸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 ◇
날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새벽이었다. 방을 환히 밝히는 등불에 진혁위는 죽은 듯이 잠이 든 류희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남자의 얼굴은 눈을 감고 있어도 짙은 피로로 가득했다. 몇 번이고 눈물이 흐른 눈가는 붉게 부어 있었고, 살짝 벌어진 입술에는 하얀 거스러미가 일었다. 뺨도 훌쭉해서 마치 환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밤새도록 괴롭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색에 미친 건 아닌데.”
혼자서 변명하던 진혁위는 그냥 자신이 미쳤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류희겸의 뺨을 손등으로 슬쩍 쓰다듬었다.
류희겸은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그의 얼굴을 보고 반한 건 맞았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채 검을 휘두르는 모습에 숨이 멎을 뻔했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건 정말 생소한 감정이었다.
진혁위는 마음에 드는 것은 저돌적으로 얻어내는 성격이었다. 류희겸이 타국의 장군 출신이라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류희겸의 마음을 얻을 생각도 없었기에 험하게 다루었다.
“왕야. 분부하신 것들을 대령했습니다.”
문 너머에서 우소진의 목소리가 들려와 진혁위는 정신을 차렸다.
“들여라.”
천개가 반쯤 걷히고 황동대야와 수건 여러 장이 침상 위에 놓였다. 진혁위가 몸을 돌려 직접 수건을 물에 적시자 우소진이 황급히 말렸다.
“왕야. 어찌 그러십니까. 소인이, 소인이 하겠습니다.”
“손끝이라도 대면, 어디 한 군데 잘릴 줄 알아라.”
진혁위의 웃음기 담긴 경고는 농담처럼 들렸지만 주인의 성정을 아는 우소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물에 젖은 수건을 손에 든 진혁위가 직접 류희겸의 얼굴을 닦는 것을 보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전에 없던 일에 우소진은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우소진의 주인인 진혁위는 고귀한 황자였다. 산과 들로 사냥 다니기를 즐기는 진혁위는 거친 음식과 잠자리에 익숙했고 제 일을 스스로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의 시중을 드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정성스럽게 다른 사람의 몸을 닦는 모습은 진혁위와 어울리지 않기도 했다.
우소진은 한 달 전에 있었던 일부터 하나씩 떠올렸다.
그날, 백진호를 만난다고 외출한 진혁위는 웬 노비를 하나 데려왔다. 외모가 단정한 사내를 향해 옥골선풍이라고 칭찬하는 바람에 주인의 취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옥골선풍의 사내는 화진국의 류희겸 장군이었기에 익문사로 보내졌다.
그리고 이틀 전, 진혁위는 만월제전에서 돌아오며 다 죽어가는 사내를 하나 데려왔다. 우소진은 그가 한 달 전에 만났던 류희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보았다.
진혁위는 다리가 부러지고 어깨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류희겸을 위해 귀하디귀한 염호부를 사용했다. 그리고 다 죽어가던 남자를 살리다 못해 곁을 지키며 직접 간호까지 했다. 약을 너무 써서 깨어나지 않는다고 역정까지 냈다.
결국 류희겸이 깨자마자 교합을 한 후에, 직접 시중까지 들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귀장군이라고 불리는 사내인가 싶지만, 어쩌면 혜비 마마의 오랜 숙원이 풀어질 수도 있었기에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수건으로 맨살을 닦는 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종종 손가락도 예쁘네, 여기에도 흉터가 있군, 줄줄 흘러내려. 같은 말이 진혁위의 입에서 튀어나왔지만 우소진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내보냈다. 자신은 여기에 없는 사람이었다.
“침의를 다오.”
진혁위의 부름에 드디어 다시 이곳에 있는 사람이 된 우소진은 준비한 침의를 건네고는 대야와 수건을 정리해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종에게 두고 다시 돌아왔다.
그사이 진혁위가 류희겸에게 옷을 거의 다 입혔다. 마지막으로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기까지 했다.
“씻겠다.”
“탕조는 곁방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막 침상에서 빠져나오려던 진혁위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류희겸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는 애틋한 손길로 이마에 드리워진 머리를 넘겼다.
“귀비(貴妃)로 삼아야겠다.”
“예. ……예에?”
너무 놀란 나머지 우소진은 이상하게 대꾸해 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주인이 귀장군을 귀비로 삼아야겠다고 했다.
황궁과 마찬가지로 왕부에서 귀비의 존재란 몇 가지를 상징했다. 보통 가장 총애받는 측비에게 주는 봉호였다.
귀비로 삼는 것이야 영왕 진혁위의 고유 권한이긴 했지만 그 전에 너무 갑작스러웠다. 또한 류희겸의 출신 때문에 혼인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왕야. 귀비라 하셨습니까? 시첩이 아니고 귀비가 확실하옵니까?”
“귀가 먹었느냐? 귀비가 맞다.”
“왕야. 황제 폐하께서 혼인을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황자의 혼사였다. 단순히 시첩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측비로 삼을 거라면 황제의 윤허가 있어야 했다.
“허락하실 거다. 정 안 되면 다리 하나를 자르든가, 눈을 멀게 하면 되지.”
조금 전까지 몸을 섞은 상대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것도 애틋하게 바라보고 머리를 쓰다듬는 지금에는 더더욱 그랬다.
우소진은 도통 주인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리를 자르고 눈을 멀게 해서 귀비로 삼는다면 류희겸의 원망을 살 게 분명했다. 시작부터 두 사람의 사이가 험악해지는 것은 막아야 했다.
“귀비가 되실 분이 다리를 잃고, 눈을 잃으면 얼마나 불편하시겠습니까. 그런 일은 안 일어나는 게 좋습니다.”
“하하. 맞다. 그런 일은 없는 게 좋지.”
진혁위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다리가 없으면 재주를 뽐낼 수 없고, 앞이 보이지 않으면 서늘한 눈빛이 사라진다. 다리나 눈을 앗는 것이 최후의 수단이긴 했다. 그래도 둘 중에 하나를 고른다면 역시나 다리일 것이다.
물건도 사람도 제 쓸모가 있는 법이었다. 기구한 사연을 가진 귀장군이 왕부의 내원에 갇혀 사는 것도 괜찮은 마무리였다.
위험한 결정을 내린 진혁위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침상을 빠져나왔다.
*
어른거리는 그림자와 햇살을 느끼며 류희겸은 눈을 깜빡거렸다. 침상 천정에 새겨진 호랑이 부조가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자신의 방에 저런 부조가 있었던가 생각하다가 곧 이곳이 영왕부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동시에 어제 낮과 밤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미친놈…….”
옆자리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느껴졌기에 류희겸은 작게 욕을 내뱉었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직전 생에서 진혁위와 몸을 섞은 것은 열 번도 되지 않았다. 그것도 서로 엇갈린 탓에 길게 만나지 못해 늘 가볍게 끝났었다. 이렇게 오래, 격렬하게 한 것은 처음이었다. 어느 부호가 어린 첩을 들여 하루 종일 끼고 놀았다는 이야기 같은 것은 듣기만 했었지, 자신이 당사자가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분명 어제 침상에서 뒹굴기 시작했을 때는 해가 떠 있었다. 그리고 까무룩 정신을 잃다시피 하고 잠든 것은 푸르스름하게 날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몇 번이나 절정에 이르렀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중간부터는 파정을 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혹사도 이런 혹사가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관절과 근육이 아픔을 호소했다. 말에서 떨어져 팔다리가 부러졌을 때와 비슷했다. 잔뜩 괴롭힘을 당한 엉덩이도 끔찍하게 아팠다.
“윽…….”
신음을 삼킨 류희겸은 겨우겨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격렬한 정사로 이렇게까지 몸이 엉망이 될 수 있는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곳에 없는 진혁위를 향해 소리 없이 욕설을 줄기줄기 내뱉은 류희겸은 길게 한숨을 삼켰다.
“기침하셨습니까?”
목이 말라 물을 마시기 위해 길게 늘어진 천개를 걷자마자 우소진이 나타났다. 그는 진혁위가 어린 황자였을 시절부터 그를 모시던 수행태감이었다. 왕부를 받아 황궁을 나온 진혁위에게 왕비도 애첩도 한 명 없는 시점에서 왕부의 실세인 우소진은, 영왕 진혁위의 가장 가까운 측근 중에 한 명이었다.
“영왕야의 태감이시군요.”
류희겸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척 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소진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우소진이라고 합니다. 우 공공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마마.”
“마마……요?”
“혹시 모르시옵니까?”
“예. 소인은 우 태감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릅니다.”
우소진의 의문 어린 시선만큼이나 류희겸 역시 어리둥절했다. 왜 우소진이 자신을 마마라고 부르고, 뭘 모른다고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아이고. 소인이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우 태감이 아니라 우 공공이라고 하시고요. 혹시 영왕야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던 겁니까?”
“그 말씀이 뭔지 모르나, 아무것도 못 들은 것은 맞습니다.”
몸을 섞을 때부터 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대부분 진혁위만이 일방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기절하고 잠든 이후의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영왕야께서 귀비에 봉하셨습니다. 왕부의 옥첩에는 이미 이름을 올리셨습니다.”
“……귀비라고 하셨습니까?”
“예. 마마.”
류희겸은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며 머리를 짚었다. 귀비란다.
위계가 명확한 황실의 내명부와 달리 왕부의 내원은 저마다 성격이 달랐다. 정부인인 원비(元妃)를 제외하면 모두가 첩이긴 했지만 측비를 여럿 두고 힘을 실어주는 곳도 많았다.
황궁에서와 마찬가지로 귀비는 그 이름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로 영왕부처럼 내원이 텅 비어 있는 상황에서는 안주인이나 다름없었다.
진혁위는 양인(陽人)이었다. 황족 중의 황족이라는 증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양인은 신이한 용력을 타고났다. 또한 여인과 사내를 가리지 않고 음인(陰人)으로 만들어 아이를 가지게 했다. 그런 이유로 황족은 사내를 처첩으로 삼아 내명부나 옥첩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화진국에서 대역죄를 짓고 도망쳐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 노비에 죄인이었다. 만월제전에서 황제로부터 면천받고 사면도 받았지만 왕부의 귀비가 될 만한 신분은 아니었다. 그것도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영왕의 귀비라면 더욱 그랬다.
류희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우 공공.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셨습니까?”
“영왕야께서 황제 폐하께 청을 하러 가셨습니다. 소인이 감히 어심을 짐작할 수는 없으나, 영왕야시라면 허락을 받아 오실 겁니다. 황제께서 영왕야를 많이 아끼십니다.”
그건 류희겸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영왕 진혁위는 류희겸이 죽을 때까지 미혼이었다. 그와 혼인을 하고 싶어 하는 태경의 명문가들이 한둘이 아니었음에도 끝끝내 혼인하지 않았다.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던 류희겸은 어떤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다. 어쩌면 이전 생과 달리 영왕부의 내원에 비빈이 있을 수도 있었다.
“우 공공. 영왕부에 다른 마마가 계십니까?”
“영왕부 내원에는 귀비 마마뿐이십니다.”
“시첩은 어떻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 다른 것이어서 류희겸은 다시 머리를 짚었다. 정말 진혁위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얼굴이 취향이라 노비로 사들인 것이나, 만월제전에서 보인 뛰어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남색가라 하니 자신을 품고 마음에 든 것일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텅 빈 내원에 자신을 귀비로 들어앉히는 것은 그저 기벽이라고 하고 넘어가기에는 이상했다. 오히려 귀비가 아닌 시첩이었다면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눈치 빠른 우소진은 류희겸의 심각한 분위기를 읽어내고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영왕야께서는 입궁하셔서 늦게 돌아오실 겁니다. 그리고 영왕야께서 경화당(慶花堂)을 준비하라 명하셨는데, 내원이 오래 비어 있던 터라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그때까지는 이곳에서 지내시라 하셨습니다.”
“이곳이라면…….”
류희겸은 불길한 예감에 혹시나 하고 물었다. 실내는 아주 훌륭한 장식품으로 꾸며져 있었다. 귀한 손님을 위한 객당이라고 하기에는 사적인 물건이 몇몇 보였다.
“양능전(楊能展)입니다. 영왕야의 침전이지요. 하루아침에 귀비로 봉하신 것도 그렇고, 침전에서 지내라 하신 것도 그렇고. 왕야께서 마마를 무척이나 위하십니다.”
우소진이야 한숨을 삼키는 류희겸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한 말이었다. 침전은 왕부의 주인이 오롯이 쉬는 곳으로 원비조차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으니, 이곳에서 지내라고 한 것은 배려이자 총애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혁혁한 공을 세우며 전장을 누빈 장군이었던 류희겸은 총애를 받고 있다는 소리에 웃을 수가 없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직전 생에서도 진혁위는 적극적으로 호의를 보였다. 이번 생에서 일찍 만난 것이 변수가 되어 이렇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자신이 이런 총애는 조금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마. 안색이 나쁘십니다. 의원을 부르오리까?”
“아닙니다. 멀쩡합니다.”
“그럼 시장하시지는 않으십니까? 아니면 씻으시겠습니까? 곁방에 탕조를 들이겠습니다.”
우소진은 류희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상냥히 원하는 것을 물었다. 류희겸은 더 이상 노비가 아니라 영왕의 귀비였다. 아직 정식으로 혼인을 한 것은 아니고, 황제의 허락을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영왕부 안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왕에게 두 개밖에 없는 염호부 중에 하나를 써서 상처를 모두 낫게 한 것도, 귀비로 봉한 것도, 침전에서 머무르게 하라 한 것도 모두 진혁위가 직접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우소진은 오래도록 모신 주인께서 류희겸의 어떤 점을 보고 반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비빈 한 명 없이 내원을 텅 비워두었던 주인이 직접 데려온 귀비를 귀하게 모시는 것은 신하 된 도리였다.
류희겸이 노비였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월제전에서 스스로의 재주로 양인이 되었다는 것은 큰 영예였다. 거기다 어머니가 화진국의 공주였다니 출신은 오히려 고귀했다.
거기다 성격도 좋은 듯싶었다. 귀비로 봉해졌다는 소리에 당황하면서도 의연하고 침착하게 굴었다.
“우선은 씻겠습니다.”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탕조를 곁방에 들여라.”
우소진이 뒤를 돌아 명령을 내리자 입구에 서 있던 시종이 재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작은 시동이 우소진의 눈짓에 조용히 다가왔다.
“우풍이(禹豊二)입니다. 경화당으로 가시기 전까지 이 아이가 귀비 마마를 곁에서 모실 겁니다.”
“우풍이가 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한 우풍이는 열 살도 되지 않은 듯 몸집이 작았다. 그래도 무릎을 꿇고 바짝 긴장해서 올려다보는 얼굴이 어딘가 또랑또랑해 보였다.
류희겸은 전쟁터에서는 누구보다 비정한 장군이었지만 일상에서는 작고, 어리고, 귀여운 것에 약했다. 특히 어린아이에게 모질게 굴지 못했다.
“몇 살이냐?”
“아홉 살입니다. 마마.”
“필요하면 부르겠다. 쉬고 있어라.”
“예. 마마.”
우풍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방 입구 바깥쪽에 서는 것을 본 류희겸은 우소진을 힐끗 보았다.
“혼자 있겠습니다. 탕조가 준비되면 알리세요. 우 공공.”
류희겸은 명령을 내리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단호하게 말하자 우소진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시종들을 데리고 침방을 나갔다. 그래봤자 우풍이처럼 침방 입구에 대기하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류희겸은 그들에게서 관심을 끊고는 생각에 빠졌다.
여섯 번째 회귀한, 일곱 번째 생은 이전과 많은 것이 달라졌다.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졌는데, 일이 이상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지난 생에서도 진혁위는 예상을 뛰어넘는 행동을 종종 했지만 이런 건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영왕의 귀비라니. 몇 번이나 회귀하면서 이런 신분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확히는 그럴 시간이 없기는 했다.
류희겸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차근히 떠올렸다. 만월제전 다음에는 가을에 있을 황실 수렵제에 꼭 참석해야 했다. 만월제전에서 죄인 신분을 벗어났다면, 황실 수렵제에서는 황제의 신임을 받게 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다.
과연 영왕의 귀비라는 신분으로 한 달 후에 있을 황실 수렵제에 참석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무조건 가야 했다.
진혁위의 태도가 기묘하기는 했다. 그래도 반했다고 하면서 데려와 귀비로 삼았을 정도면 어느 정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가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데려가도록 마음먹게 할 방법을 골몰하던 류희겸은 애교나 베갯머리 송사라는 단어를 떠올리다가 훅 밀려드는 자괴감에 미간을 찡그렸다.
조금 더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감정적으로 휘둘리는 것은 좋지 못했다.
지금 현 시점에서 진혁위가 진한재와 손을 잡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황위에 관심도 없고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진혁위의 성격으로는 그러지 않을 확률이 높긴 했다.
진한재와 연수를 했다면 자신을 귀비로 봉할 게 아니라 만월제전에서 죽여 없앴을 것이다. 익문사에 갇혀 있는 동안 얼마든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니 말이다.
어떤 가능성에 류희겸은 버릇대로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계획은 단순했다. 가장 좋은 것은 황제의 신임을 얻어 이 년 후에 있을 위락호 대전에서 진한재를 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이대로 탈주한 다음에 화진국의 경릉에 숨어들어 진한재를 암살하는 방법이 있었다. 이곳에 남아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는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 직전 생의 깨달음이었다.
영왕의 귀비라는 지위가 어떤 변수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정식으로 혼인을 할 수만 있다면 영왕의 귀비는 그리 나쁘지 않는 신분이었다.
황족과 혼인한 사내의 행동반경은 극과 극이었다. 내원 깊숙한 곳에서 옴짝달싹도 못 하고 갇혀 있다시피 하거나, 혹은 부군과 함께 전쟁터에 나갈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위락호 전투에 참전하는 진혁위를 따라가는 것은 꽤나 매력적이었다. 물론 그러려면 황제의 신임을 사는 것만큼이나 진혁위의 신뢰를 쌓아야 했다.
“신뢰라…….”
류희겸은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혁위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애매하긴 했지만, 사이를 돈독하게 만드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구김이 없는 진혁위는 의뭉스럽게 구는 것을 싫어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대화를 미루어보아도 비위를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표출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렇게 득실을 하나씩 따지고 있는데 우풍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탕조를 준비했습니다. 마마.”
수줍게 웃으며 우풍이가 마마라고 부르는 바람에 류희겸은 속으로 흠칫거리다가 쓴웃음을 삼켰다. 마마라고 불리는 것도 한동안은 견뎌내야 했다.
*
“귀비?”
편전의 외실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황제의 목소리 끝이 고르지 못했다. 옆을 지키고 있던 총관태감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지난 구월 보름의 제전에서 대방이 되기 직전까지 갔던 류희겸에게 황제는 하사품을 내렸다. 류희겸의 실력에 매우 흡족해 한 황제는 비단과 칠보 기물, 옥패, 산호까지 값비싼 물품을 잔뜩 보냈다.
류희겸은 황궁에 출입할 수 없는 신분이기에 진혁위가 대신하여 황제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가면서 황제가 류희겸은 어찌하고 있냐고 물었고, 진혁위가 그를 귀비로 삼고 싶다고 답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에 황제는 진짜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황제의 반응을 정확하게 예상하고 있던 진혁위는 빙그레 웃었다.
“소자가 처음 그를 샀을 때부터 그리 마음먹었습니다. 부황.”
“그래서 달라고 했었더군.”
“예. 그러하옵니다. 그래서 귀장군이 귀비가 되면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진혁위의 가벼운 말장난에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귀신같이 무섭다는 장군이 영왕의 귀비가 된다면 재미있는 일이었다.
염호부를 써서 류희겸의 상처를 치료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는 제법 신의가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보니 반반한 얼굴에 반한 모양이었다.
“귀장군이 귀비라. 화진에서 자랑하는 장군의 꼴이 우습게 되었구나. 그러나 그가 귀비가 되면 짐에게 되찾아 준다던 양번국은 어떻게 받아낼 것이냐?”
“방법이야 많지요. 영왕의 내원에 있는 사람은 류희겸일 수도 있고 류아무개일 수도 있습니다. 폐하.”
“이런. 꾀만 늘었구나. 혁위.”
대놓고 이중 호적을 만들겠다는 소리에 기어코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황제는 류희겸의 배짱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크게 쓸 마음은 없었다. 그가 호양성을 되돌려준다고 했던 것도 온전히 믿지 않았다. 그저 제전에서 괜찮은 볼거리가 생겼다고 여겼을 뿐이다.
폐현을 마치고 물러난 류희겸이 양번국의 호양성을 점령할 수 있는 방도를 알렸다고 익문사에서 보고를 올렸을 때는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긴 했었다. 그래도 그때 그의 쓸모는 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진국에서 과거에 자랑했던 류 장군이 몰락하여 영왕의 시첩이 되는 것도 괜찮은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를 좀 더 다른 방법으로 쓰고 싶었다.
류희겸이 영왕의 귀비가 되어 화진국을 향해 칼날을 들이미는 것은 꽤나 멋진 모양새였다. 그가 군공을 쌓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모두 진혁위의 것이 되어버리니 뒷말이 나올 일도 없었다.
“귀비가 된 것은 류희겸이어야지. 영왕의 귀비가 된 류희겸이 양번국을 되찾으면 화진의 황제가 얼굴을 구기지 않겠느냐?”
“뒷목을 잡고 쓰러질지도 모르지요.”
“맞다. 그러면 좋지.”
황제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화진국의 황제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뒷목을 잡고 쓰러지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이제 너도 약관이 되었으니 밖으로만 나돌지 말고 아비의 일을 도와야지. 귀비는 이제 네 사람이니 너 역시 출전하게 될 것이다.”
“성심을 다해 부황을 따르겠습니다.”
어떤 반론도 허락하지 않는 황제의 명령에 진혁위는 허리를 숙이면서도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황제가 판을 새로 짜려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에게는 모두 열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에 살아 있는 황자는 열한 명이었고, 가장 세력이 큰 것은 2황자인 기왕과 3황자인 태자였다.
황후 소생의 3황자인 진선예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황자들에 비해 여러 자질이 평범하다 못해 모자랐다. 태자라는 위명에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무장으로 명성을 쌓아올린 2황자 기왕의 세력에 밀릴 지경이었다.
멍청한 적장자를 태자로 두고 다른 형제들을 경쟁시키는 황제의 의도는 뻔했다. 황제는 아들들 중에 한 명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태자를 세우고도 후계자에 대한 태도를 모호하게 굴면 황자들은 황제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진혁위는 중립을 지키며 경쟁에서 한 발 물러나서는 유유자적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황제가 그를 권력 투쟁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황제의 의도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북서쪽 국경에서 군공을 세우고 있는 기왕의 대항마로 쓰려는 것일 수도 있었고, 혹은 나중에 태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황제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다만 다른 것을 더 졸라볼 수는 있었다.
“부황. 소자와 류 씨의 혼인을 명하는 성지를 내려주십시오. 그의 양친이 없으니 조용히 혼례를 치르겠습니다.”
“성격도 급하지. 좋아. 성지를 내려주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내원에 사람을 들였으니, 네 어미의 뜻대로 혼인도 좀 하고.”
“다른 건 몰라도 혼인만큼은 신중히 하고 싶습니다. 소자가 얼굴을 많이 본다는 것을 부황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더니, 딱 그 짝이구나.”
“황공하옵니다.”
진혁위와 황제의 다정한 대화는 친근한 부자 사이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래도 진혁위는 방심하지 않았다. 혼인 역시 황제가 명령한다면 자신의 의지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물론 황제가 혼인을 강요하지 않겠노라 약조는 해주었지만, 그건 황제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뒤엎어질 수 있었다.
“아, 그리고 태자가 그의 재주를 높이 사서 시위로 삼고 싶다고 하더구나. 허나 이미 네게 준다고 약조한 게 있으니 그건 안 된다고 했지.”
“소자가 일찍 말씀드리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래도 태자가 자신의 시위들과 류희겸의 실력을 겨루고 싶다고 계속 졸랐다. 그건 알아서 하라고 했다. 류희겸에게 적당히 상대해 주라고 해라.”
황제가 진혁위와의 약속은 지켰지만 태자의 체면을 세워주어야 하니 너도 그러라고 은근히 압박했다. 이번에도 역시 거절은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권좌에 뜻이 없음을 피력하는 진혁위는 형제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며 친분을 쌓았다. 특히 황후의 아들인 태자는 좀 더 까다롭게 상대했다.
멍청한데다 욕심도 많은 태자는 형제들을 모두 질투했다. 시비를 걸다시피 해서 형제들의 소중한 것들을 빼앗았다.
진혁위는 태자가 원하는 것이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다 내주었다. 하지만 태자에게 류희겸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황제가 새로 판을 짜기로 한 것은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아무리 자신이 류희겸의 소유권을 주장해도, 귀비로 삼겠다고 해도 황제가 태자에게 넘기라고 한다면 그래야 했다. 그에 비하면 서로 실력을 겨루는 비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인기가 많군요. 태자 전하께 밉보이지 않으려면 접대를 하라고 해야겠습니다.”
“하하하. 그럴 수도 있겠다. 나머지는 네가 태자랑 이야기하고. 이제 물러가 보아라.”
황제의 하명에 진혁위는 깊게 절을 하고는 물러났다.
*
광대한 황궁 동편에 자리한 태자부는 이름에 어울리는 위용을 자랑했다. 편전의 내부는 태자의 성향에 맞춰 화려하게 꾸며졌다.
상석에 앉은 태자는 오만한 얼굴로 진혁위를 내려다보았다.
황제에게 류희겸을 달라고 한 것은 오늘 낮의 일이었다. 태자는 화진국 출신의 류희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진국의 장군이었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태자는 늘 자신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를 시기했다. 물론 본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류희겸이 양번국의 호양성을 탈환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 것은 예정된 일이라고 병부상서(兵部尙書)에게 언질을 받았다.
류희겸을 시위로 두면 그의 공적은 태자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류희겸의 주인이 된 진혁위 역시 손에 넣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조언을 해준 사람은 태자의 외숙부이자 지낭(智囊)을 담당하고 있는 좌승상(左丞相)이었다.
태자는 류희겸이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을 이해했다. 물론 진혁위의 사람을 빼앗아 온다는 의미도 있었다.
황제나 태자를 최측근에서 지키는 시위는 매우 영예로운 일로 고관의 자제들이 출세하는 길이었다. 태자는 류희겸을 자신의 시위로 두는 것은 손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는 태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저 며칠 데리고 있으면서 태자의 시위들과 겨루기만을 허락했을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진혁위와 얼굴을 맞댄 태자는 심기가 꼬여 있는 상태였다. 진혁위를 압박해서라도 류희겸을 시위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진혁위가 뜻밖의 단어를 언급했다.
“귀비라고?”
태자는 황제와 같은 질문을 했다. 황제가 조금 놀라고 끝났다면, 태자는 속으로 진혁위를 비웃었다. 온갖 좋은 혼처를 마다하고 기껏 내원에 들어앉힌 것이 타국의 장군이라니 멍청한 놈이었다.
“예. 귀비입니다. 아직 혼례를 올리기 전이기는 하나 폐하께서 성지를 내려주셨으니 귀비가 맞습니다. 하여 태자부에서 오래 머무르며 비무를 하기에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네 말대로 아직 정식으로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 싸고도는 것이 아니냐.”
“소제가 귀비를 아낍니다.”
“하, 세상에 둘도 없는 팔불출이 여기 있군.”
“신혼 아닙니까.”
“유난스럽기는. 누구는 신혼이 없었나.”
태자가 비웃든 말든 진혁위는 류희겸이 귀비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가 태자부에 머무르지 못한다고 못을 박았다.
황제가 태자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하니, 시위들과 비무를 하긴 해야 했다. 류희겸이 그저 영왕부에 머무르는 객손님이거나, 혹은 시위의 신분이었다면 태자부에서 며칠이고 머물러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성지를 내린 상황이니 태자가 손을 쓰지 못하게 딱 하루뿐이라고 못 박을 수 있었다. 달리 방법을 찾지 못한 태자도 마지못해 그러라고 하는 게 전부였다.
“류희겸이 제 손으로 빼앗았던 양번국을 다시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허언으로 부황을 실망시키는 것보다 기뻐하시게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너 역시 귀비 덕을 보고 말이다.”
“소제도 귀비 덕을 보고 싶습니다.”
웃는 낯으로 속내를 음험하게 드러내는 태자를 보며 진혁위는 능글맞게 대꾸했다. 태자가 류희겸을 시위로 삼겠다고 한 이유가 너무 명백했다.
류희겸이 빼앗았던 성을 되찾아 드리겠노라고 황제에게 공언을 한 것은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하지만 황제가 양번국을 되찾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정세를 읽을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황제가 류희겸을 앞세우리라는 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태자는 멍청했지만 그를 지지하는 이들 중에는 명석한 이들이 꽤나 있었다.
“흥. 사내대장부가 겨우 처 덕이나 보려 한다니. 웃기지도 않는구나.”
“그것도 제 복이지요. 이만 물러가옵니다. 전하.”
한껏 빈정거리던 태자는 진혁위가 그저 웃기만 하자 결국 손을 내저으며 내보냈다. 그렇게 물러난 진혁위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복도를 걸었다.
진혁위는 태자의 성격을 잘 알았다. 류희겸을 내놓지 않았으니 앞으로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올 게 뻔했다. 황제의 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기에 태자는 더욱 기를 쓰고 덤벼들 것이다.
넋 놓고 당하지는 않겠으나 당장에 태자를 치워버릴 수 없는 것이 성가시고 안타까워 진혁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류희겸의 등장에 어심이 움직일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그를 내원에 숨겨두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아 진혁위는 속이 쓰라렸다.
*
영왕의 침전에서 정신을 차린 이후, 류희겸은 시종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편히 지냈다. 목욕물은 따뜻했고, 저녁은 훌륭하게 차려졌다. 비는 시간은 우소진이 가져다준 책을 읽고 간식을 먹으며 보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영왕의 침전은 안락했지만 그래도 불편한 점은 있었다. 목욕을 하고 주어진 새 옷이 여전히 침의였다. 심지어 신발도 주지 않았다.
옷을 달라고 해도 우소진은 곤혹스럽게 웃으며 몸에 맞는 새 옷을 준비해야 하니 이대로 있어달라고 했다. 아마도 짐작컨대 진혁위가 명령을 내린 것 같았다.
충성스러운 시종을 탓할 수 없었던 류희겸은 결국 침전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진혁위를 기다렸다.
류희겸이 진혁위의 얼굴을 본 것은 해가 지고 난 늦은 저녁이었다. 입궁을 위한 화려한 예복을 입은 진혁위를 보며 류희겸은 항의하는 대신에 인사부터 했다.
“영왕 전하를 뵙습니다.”
“옷을 주지 않았다고 입술을 댓 발 내밀고 있을 줄 알았더니, 얌전히 기다렸나 보군.”
진혁위는 자리에 앉자마자 시비 아닌 시비를 걸며 옆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류희겸은 제자리에 서서 버텼다.
“왕야의 배려 덕분에 편히 지냈습니다.”
“우소진에게 신경 쓰라고 했지.”
“소인이 귀비가 되는 것이옵니까?”
류희겸은 돌려 말하는 대신에 과감하게 의도를 물었다. 눈에 힘을 주고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는 귀신을 잡는 장군다운 패기가 어려 있었다. 그래서 진혁위는 빙그레 웃었다.
“이제 귀비가 되었으니 소인이 아니라 신첩이라고 해야지.”
“……?!”
조금 늦게 진혁위의 말을 알아들은 류희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친왕의 귀비가 되었으니, 영왕에게 스스로를 신첩이라고 지칭하는 게 옳기는 했다. 하지만 너무 놀란 탓에 머리가 이해를 거부했다.
세상에. 신첩이라니. 명문가의 장남으로 나고 자라 장군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류희겸으로서는 차마 소리 내어 말하기 어려운 단어였다.
류희겸이 복잡한 얼굴을 하고 꽁꽁 얼어 있자 이번에도 진혁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귀비는 얼굴만 봐도 재미있어. 신첩이라 하기가 어려운가?”
“…….”
무례인 줄 알지만 말을 하면 더듬을 것 같아서 류희겸은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있는 진혁위의 눈가에는 아까부터 개구진 미소가 계속 맺혀 있었다. 이전 생의 경험 덕분에, 사람을 내려다보는 오만함이 아니라 정말 재미있다는 흥겨움이 담긴 것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남을 곤란하게 만들어놓고는 재미있어 하다니. 참으로 고약한 성격이었다.
“우선은 앉아. 올려다보기 힘들다.”
류희겸의 키가 훌쩍 컸기에 진혁위는 높은 의자에 앉고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결국 류희겸은 진혁위의 손짓대로 자리에 앉아야 했다.
“망극하게도 폐하께서 혼인을 허하셨다. 경화당으로 가면 신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입에 익는다.”
“정말…… 황제 폐하께서 혼인을 허락하셨습니까?”
“당연하지. 성지를 내려주시기로 했다. 그리고 귀비가 세울 군공은 본왕의 것이 되겠지.”
“자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어찌 그리 딱딱한가. 지아비가 아니라 마치 군대 상관을 대하는 것 같아.”
신첩에 이어 이번에는 지아비였다. 아찔한 단어에 다시 헛숨을 삼킨 류희겸은 미간을 구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성격입니다. 왕야.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설마 못 알아들어서 설명을 해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황제 폐하께 양번국을 되찾아 드리겠노라고 한 것은 귀비잖나.”
“하지만 소인이 귀비가 되면…….”
“본왕과 함께 전장으로 나갈 것이다. 황제 폐하께 드린 약조를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예.”
예상대로의 흐름에 류희겸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황제의 명령으로 전장에 나서는 것은 이전 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귀비에게 전할 말은 따로 있다. 태자께서 귀비를 시위로 쓰겠다고 황제께 청했다가 거절당했지. 그런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시위들과 겨루기를 시키고 싶다고 매달렸어. 황제께서 멍청한 태자의 체면을 세워주시기로 했고, 귀비는 하루 낮 정도 태자부 시위와 어울려야 한다.”
마치 노랫가락처럼 흥겹게 말을 이어가던 진혁위가 마지막에 이를 드러냈다. 대놓고 멍청한 태자라고 욕할 만큼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직전 생에 이 년 동안 대연국에서 살았던 류희겸은 황궁의 세력 판도에 관해 훤히 꿰뚫고 있었다.
화진국의 경우 태자로 세우지는 않았지만 황제는 유독 적장자인 능왕을 총애했다. 그가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기 전까지 화진국에서는 능왕이 차기 황제가 될 거라고 확실시되었다. 질투를 많이 받았으나 후계 구도가 명확했기 때문에 혼란은 없었다.
반대로 대연국은 태자가 있음에도 황제가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태자와 기왕에게 번갈아가며 힘을 실어주었다가 빼앗기를 반복하며 두 사람의 균형을 맞췄다. 젊은 황자들을 억누르며 황권을 유지하기 좋은 방법이었다.
다만 그 정도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황자들의 싸움 역시 심각했다. 무엇보다 태자가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범재라는 것이 제일 문제였다.
능력은 되지 않는데 욕심이 많았다. 태자의 정적은 기왕인데도 불구하고, 황위 싸움에서 물러나 있는 온갖 형제들을 시기했다. 특히 일 년 후쯤 되면 두각을 드러내는 진혁위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류희겸은 자신이 복잡한 상황에 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혼인을 하게 되면 자신의 공은 곧 진혁위의 공이 된다. 태자나 기왕이 그걸 가만히 두고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소인을 어찌 하실 겁니까?”
“무엇을 말이냐?”
“귀비로 삼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과연 진혁위가 무슨 의도로 자신을 귀비로 봉한 것인지 궁금했다.
고귀한 핏줄을 가진 사람들의 혼사가 흔히 그렇듯, 친왕의 내원은 대부분 정치적인 관계의 결과물이었다. 특히 진혁위와 같은 황자는 보통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내원에 비를 들일 수 있었다.
화진국의 장군 출신인 자신을 시첩도 아니고 귀비에 봉하는 것은, 그저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아니, 진혁위라면 진짜 마음에 들어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의 입으로 직접 설명을 듣고 싶었다.
“반했다고 했을 텐데? 왜? 못 미더우냐?”
“그럼 앞으로 왕야께서는 소인을 어찌 쓰실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진혁위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얼굴이 취향이라고,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보고 반해서 귀비로 삼았다고는 했다. 하지만 자신을 손에 넣는 것으로 군공을 쌓게 된다는 것을 진혁위가 몰랐을 것 같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진혁위는 직전 생에 제멋대로였던 영왕과는 달랐다. 어쩌면 그에게 황위를 향한 야심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혼인을 하게 되면 서로의 영욕이 함께 묶인다. 그가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가만히 바라보며 진심을 살펴보았지만 진혁위는 그저 뜻을 알 수 없는 모호한 미소만을 지었다.
“여전히 상관을 대하는 태도야.”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와서 말투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귀비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지는 않겠지. 그래. 귀비를 어찌 쓸 것이냐 물었지. 당연히 귀하게 아껴야지. 본왕의 하나뿐인 귀비이지 않느냐.”
농담이나 다름없는 가벼운 대답에 류희겸은 실망하는 대신에 한 번 더 물었다.
“무엇을 하실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눈치 하나는 빠르구나. 허나 묻지 마라. 나는 그대를 완전히 믿지 않는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진혁위의 목소리 역시 평연했다. 하지만 짧은 대답에 류희겸은 잔뜩 긴장하고 말았다.
믿지 않는다. 그건 둘의 관계를 아주 명확하게 나타내는 말이었다. 영왕의 귀비로 아끼기는 하겠으나 그 외의 것은 알려 하지 말라는, 선을 긋는 뜻이었다.
류희겸 역시 자신의 처지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 화진국 장군 출신의, 믿을 수 없는, 가진 것도 없는 사내. 얼굴이 마음이 들어 귀비로 삼았다고 하나 그게 동맹의 근거가 될 수는 없었다.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태자부에는 언제 가는 것이옵니까?”
“이레 후.”
“태자부의 시위들과 겨룰 때, 이겨야 합니까?”
“누구든 이길 수 있다 자신하는군.”
“태자 전하의 역정을 사셔도 괜찮으십니까?”
이번에도 류희겸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진혁위와 태자의 사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태자가 시비를 걸어도 진혁위는 적당히 빠져나갔다. 이번 비무는 진혁위와 태자의 기싸움이기도 하니, 승패의 행방이 중요했다.
당신의 뜻은 어떤지 궁금하다고 묻자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던 진혁위가 곧 한쪽 입술 끝을 삐죽이 올리며 웃었다. 어딘가 간지러워하는 표정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특하게도 본왕의 걱정을 하는 모양이군. 당연히 모두 이겨라. 욕심 많은 태자는 제가 가지지 못하면 부숴버리는 성격인데, 그런 놈에게 잘 보여봤자 무얼 하겠느냐.”
류희겸은 이전 생에 경험했던 태자의 저열함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태자보다는 태자의 주변 인물들이 권력을 등에 업고 설쳐댔다. 그들에게 적이라고 찍히면 내도록 괴롭힘을 당할 게 뻔했다. 영왕의 귀비가 되어 왕부의 내원에만 있으면 또 달라지겠지만, 진혁위가 자신을 그렇게 쓰지는 않을 것 같았다.
“성지는 내일 내려올 것이다. 그리고 혼례는 스무 날 후다. 귀비는 부모님이 안 계시니 약식으로 해야겠다.”
“식을, 식을 올리는 겁니까?”
“그래.”
“농이 아니시고, 진짜입니까?”
“진짜 맞다.”
진짜라는 말에 류희겸은 아연해졌다. 황제의 명령으로 영왕과 혼인을 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과 진혁위의 결합은 정치적인 문제였다.
직전 생에서 양번국을 대연국의 황제에게 되찾아주고 난 후에 자신의 위치는 꽤나 기묘해졌다. 군공을 세웠으나 타국 출신이라 하례품은 내려 받아도 그 이상의 치하는 받지 못했다. 태자를 위시한 대신들의 반대가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타국의 장군이 작위를 받아 세를 얻으면 그 밑으로 불온한 세력이 모일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난 생에서의 문제는 진혁위와의 혼인으로 해결될 수 있었다. 자신이 세운 공은 모두 영왕 진혁위의 것이 된다. 황제가 그걸 알고 혼인 명령을 내린 것이리라 예상했다.
진혁위의 시첩이 아니라 측비로 삼은 것은 진혁위의 강력한 주장이라고 하니 그것도 그러려니 했다. 영왕부 내원의 주인은 진혁위이니, 내원의 서열을 정하는 것은 그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혼례식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화진국에서 넘어온 류희겸은 대연국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부모도, 가족도, 친지도 없기에 제대로 된 혼례식을 올릴 수가 없었다. 이미 영왕부에 들어와 살고 있으니, 황제의 혼인 명령만으로 부부가 될 수도 있었다.
혼례식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지금까지 진혁위가 하라는 대로 조용히 따르기만 하던 류희겸은 왜냐고 묻고 말았다.
“혼례식은 없어도 되지 않습니까?”
“없어도 되는데, 어머니께서 꼭 식을 올려야 한다고 하셔서 말이다. 내가 두 번 혼인하지 않을 걸 아시는 게지.”
“두 번 혼인하지 않으시다니요?”
“언젠가 어머니께서 어떤 이와 혼인을 할 것이냐 물었는데, 그때 나와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이가 좋겠다고 했었지. 아, 얼굴도 취향이어야 한다고 했고. 허니 천지간에 귀비 말고 누구와 혼인을 하겠냔 말이지. 어머니께서 아들의 신혼동방 꾸미기를 간절히 희망하시는데, 내가 효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진혁위와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잘생긴 남성이 취향이라는 말에 류희겸은 정말 고약하다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참으로 까다로운 조건에 진혁위의 모비인 혜비가 얼마나 속이 탔을지 괜히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진혁위가 두 번 혼인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싶었다. 직전 생에 자신이 죽을 때까지 진혁위는 비빈은커녕 첩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황자였고, 지금처럼 황제가 명령하면 누군가와 혼인을 해야 했다.
“그리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라.”
“황제께서 명하시면 혼인을 하셔야 합니다.”
“설마, 천하의 귀장군께서 본왕이 또 다른 부인을 들일까 걱정되는 것이냐?”
진혁위가 농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류희겸은 왜 그걸 그렇게 해석하냐고 따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화진국에서 일군의 장군이었던 류희겸은 매서운 독설가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내키는 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오라…….”
“내가 간청하지 않는 이상에야, 황제 폐하께서는 혼인을 명하지 않을 것이다. 귀비는 걱정하지 마라.”
“황제께서 혼인을 명하지 않으실 거라고 어찌 아십니까?”
“그리 약조를 해주셨거든. 황제께서는 식언하시는 분이 아니다. 믿어라.”
대화가 제자리를 맴돌았다. 그러니까 황제가 왜 그런 약속을 해주었는지 다시 물으려다가 참았다. 아무래도 진혁위가 말을 해줄 것 같지 않았다.
“할 말 다했으니 이제 씻고 자야겠다. 폐하를 뵙고, 태자랑 실랑이를 하고, 모비께 인사까지 드리느라 진이 다 빠졌다.”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적당히 눈치를 본 류희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밖으로 나가면 우소진이나 우풍이가 알려줄 것이었다.
물러간다고 막 인사를 하려는데 진혁위가 얼굴을 구겼다.
“뭘 자리를 비킨단 말이야? 여기서 같이 자야지.”
“같……이요?”
“당연하지. 왜 놀라? 설마, 오늘도 내가 그대 몸을 취하기라도 할까 봐 무서운 것이냐? 내가 그리 무도하지는 않다. 어제 그리 괴롭혔으니 며칠은 쉬어야지.”
“그게 아닙니다. 영왕부에는 빈방이 많으니, 제가……. 그러니까 소인이 그곳으로 가면 왕야께서 편히 쉬실 수 있으십니다.”
사실 같이 자자는 말에 류희겸은 진혁위를 속으로 욕했다. 어젯밤에 그렇게 하고는 또 하는 거냐고.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진혁위가 말했지만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영왕부에 빈방이 넘치는데 왜 굳이 자신과 같이 자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류희겸의 의문은 곧 진혁위가 풀어주었다.
“본왕이 귀비와 같이 자야 더 마음이 편하다. 씻고 올 테니,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라.”
호탕하게 명령을 내린 진혁위가 일어나자 우소진이 탕실을 준비했다고 이르며 따라붙었다. 침전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본 류희겸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직전 생에도 진혁위에게 휘둘릴 때가 있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주종의 입장이 되다 보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같이 자야 마음이 편해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불편하기만 할 게 뻔했다.
“마마. 옷을 갈아입으세요.”
소리 없이 한숨을 삼키고 있는데 우풍이가 갈아입을 옷을 들고 앞에 섰다. 침의를 입고 밖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저녁도 먹고 간식도 먹었다. 잠자리에 들려면 다시 갈아입어야 했다.
“옷을 갈아입으신 후에는 머리를 빗겨드리겠습니다.”
우풍이의 또랑또랑한 얼굴과 하얀 침의를 번갈아보던 류희겸은 검과 말을 빼앗긴 패장의 기분으로 항복했다. 막 옷을 갈아입으려고 매듭을 푸는데 우소진이 나타났다.
“귀비 마마. 왕야께서 부르십니다.”
“왕야께서는 지금 탕실에 가신 거 아닙니까?”
“예. 탕실로 부르셨습니다.”
류희겸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부르니까 가야 했다. 반쯤 풀었던 매듭을 묶고 있는데, 이번에는 우풍이가 밖이 춥다면서 장의를 가져왔다. 침전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 신도 주어졌다.
하루 종일 보지 못했던 갈색 신을 내려다보며 류희겸은 이걸 진혁위의 얼굴에 던져 버릴까 하는 아주 못난 생각을 하다가 접었다. 아직은 납작 엎드릴 때였다.
*
장의를 걸친 류희겸은 우소진을 따라 탕실로 향했다. 이제 막 옷을 벗어 알몸이 된 진혁위가 천천히 수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탕 안으로 들어와라.”
“이미 씻었습니다.”
“한 번 더 씻으면 된다. 옷은 벗지 말고, 아니다. 옷을 벗지 않아도 자극적이겠군. 그냥 거기 있는 게 낫겠다. 우소진. 귀비에게 의자를 가져다주어라.”
진혁위가 명령을 내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우소진이 등받이 없는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류희겸은 진혁위의 손짓에 따라 의자에 앉았다. 우소진이 나가자 다시 수증기가 어리는 탕실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같이 씻으려고 했지. 그런데 여기서 옷을 벗겼다가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할 것 같아서 참는 중이다. 말동무나 해라.”
“예.”
류희겸은 묘한 기분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위는 확실히 자신을 귀비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래. 깨고 나서는 뭘 했느냐?”
“책을, 맹자를 읽었습니다.”
“맹자. 좋지. 거기에 본왕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중한 일을 맡기려고 하면, 그만큼 큰 시련을 준다는 것이지. 내 고약한 정인이 전한 말인데, 인상 깊었다. 귀비는 어떤가?”
하필이면 맹자의 그 구절이었다. 류희겸은 인상을 찌푸리지도 못하고, 웃고 있는 진혁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직전 생에 진혁위에게 맹자의 저 구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영왕 진혁위는 한창 공을 쌓아 기세를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대연국의 황제는 군사적으로 힘을 키우고 있는 기왕을 집중적으로 견제했다. 반면에 진혁위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기왕을 대신할 존재로 만들었다. 황제의 총애에 기왕과 태자가 동시에 진혁위를 전방위로 공격하며 깎아내렸다.
호양성을 점령하고 바로 직후, 희범영 장군이 전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그를 믿고 의지하던 진혁위의 상심이 컸기에 류희겸은 맹자의 구절을 인용해 위로를 해주었다.
그때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맹자의 고자장을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그 구절을 싫어하는 것은 여전했다.
“저는, 소인은 싫어합니다.”
“그래?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귀비의 시련은 꽤나 커다랗잖나.”
“하늘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상심하지 마라. 천제의 말씀을 듣는다는 신궁의 대신녀조차도 모를 것이다.”
“예.”
짧은 대답에 대화가 그대로 끊겼다. 류희겸은 지금의 자신이 썩 좋은 대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원래 그런 성격은 아니지만 말조심을 하려니 어쩔 수 없었다.
“귀비는 말재주가 없구나.”
“송구하옵니다.”
“그럼 본왕의 정인에 대해 궁금한 건? 응? 질투 안 나?”
진혁위의 장난기 어린 물음에 류희겸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남자에게 정인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나 싶었다. 과거에 만났던 사람 같으니 자신이 모를 수도 있었다. 진혁위의 정인이었던 자가 누구든지 간에 자신은 질투할 이유가 없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궁금하지 않습니다. 투기도 하지 않습니다.”
“귀비답게 딱딱한 말이다. 내 고약한 정인은 온갖 달콤한 말로 사람을 홀려놓고는 훌쩍 떠나버렸지. 괘씸하게도 말이야.”
“……?”
천하의 영왕이 차였다는 고백에 류희겸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아연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진혁위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꼭꼭 숨기려고 했는데. 귀비의 재주가 너무 뛰어나서 그게 힘들어졌어.”
류희겸은 자신이 귀비로 봉해진 이유를 듣고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에 든 이를 꼭꼭 숨기는 것이 진혁위답기는 했다.
스무 살의 황자는 직전 생에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행동했다. 그러나 또 지금은 그 나이의 청년처럼 보였다.
세상 무서울 것 없어 보이는 진혁위는 사실 위태로운 위치였다. 태자와 기왕이 그를 압박했고, 황제는 그를 키워 기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만들려고 했다. 권력에 야심이 없던 진혁위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쟁에 휘말렸다.
미래를 안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바꿀 수는 없었다. 특히 힘이 없다면 필사적인 노력이 허무한 발버둥이 되곤 했다. 그래서 진혁위와 깊게 엮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시작부터 꼬여버리고 말았다.
“무엇을 그리 생각하고 있느냐?”
“소인이 황제 폐하께 양번국을 되찾아 드리고 나면, 소인은 어떻게 되는 것이옵니까?”
“이런. 귀비가 잔걱정이 많구나. 하하하. 그건 몰랐어.”
진혁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탕실에 울렸다. 한참이나 웃고 난 그가 젖은 손으로 얼굴을 쓸면서 말을 이었다.
“아직 안 정해졌지만, 황제 폐하께 성을 되찾아 드리고 난 다음에는 다리 하나쯤 잘라 내원에 처박아 둘 의향은 있다. 뭘 그리 놀라. 농이 아니라 진담이니까. 귀비가 도망치지만 않는다면 팔다리는 멀쩡할 것이다.”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며 류희겸은 진혁위를 찬찬히 살폈다.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그중에서 진혁위의 성향이 이전 생에 겪었던 것보다 더 과격해진 것은 확실했다.
이전의 그는 냉정하게 결정을 내리고 빠르게 실행에 옮기긴 했지만 잔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태연히 협박하며 옥죄는 모습이 너무 능숙해서,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구음을 해본 적이 있느냐?”
“……예?”
딴 생각을 하고 있던 류희겸은 놀라서 되물었다. 구음이라고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정확하지 않았다.
“구음을 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는데, 왜 그리 놀라? 그래서? 경험은 있고?”
“아니, 아니요. 없습니다.”
아연한 기분에도 류희겸은 당장에 즉답했다.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진혁위의 성기를 빠는 장면이 떠오르고 말았다. 이미 할 거 다 한 사이이긴 했지만 진혁위의 것을 입에 넣기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다른 건 다 몰라도 입에 담기에는 좀 많이 컸다. 전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그게 자신의 몸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게 지금도 신기할 정도였다.
“이런, 정색을 하다니.”
“놀리지 마십시오.”
진혁위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물에 흠뻑 젖은 모습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지만 류희겸은 놀림을 당한 기분이었다.
“놀리는 거 아니다. 진짜 하려고 했다. 교합을 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입을 쓰려고 했는데……. 흐음. 그건 나중에 해야겠다. 나가도 좋다. 침전에서 기다려라.”
손을 내저은 진혁위의 축객령에 류희겸은 인사를 하고 얼른 탕실을 나왔다.
문을 나서자마자 시원한 가을 공기에 정신이 맑아졌다. 얼마나 진혁위에게 휘둘렸는지, 탕실에서 시간을 보낸 것은 잠시뿐이었는데도 기운이 다 빠졌다.
“귀비 마마.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류희겸을 따라 온 우풍이가 행등을 들고 앞장섰다. 겨우 한나절이 지났을 뿐인데, 이제 귀비 마마라고 불리는 것이 아주 어색하지만은 않았다. 류희겸은 쓴웃음을 삼키며 우풍이를 따라 움직였다.
*
류희겸은 열여섯 살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혼약을 했다. 상대는 태사의 증손녀인 모백화(牟柏花)로 류희겸보다는 두 살이 어렸다. 집안끼리는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으나 서로의 얼굴을 본 것은 혼약을 하던 그날이 처음이었다.
몸이 약해 또래보다 더 어려 보이던 모백화와는 혼인을 하지 못했다. 고모부와 함께 남방의 국경을 위협하는 금월국을 정벌하고 돌아오자 어린 혼약자는 기침병으로 죽고 난 후였다.
이후에 혼약을 한 번 더 했었지만, 전장을 돌아다니느라 자연스럽게 파혼이 되고 말았다. 그 이후로 류희겸은 계속 혼자였다.
나이를 스물다섯이나 먹는 동안 여인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침상에서 누군가와 함께 자는 것은 진짜 오랜만이었다.
혼자 자는 게 익숙했던 류희겸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있었다.
졸리기는 한데, 잠이 안 와. 진혁위를 등지고 누워 있던 류희겸은 불면의 밤에 한숨을 삼키며 반듯하게 누웠다. 자세를 바꾸고 눈을 감아보지만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다.
깨끗하게 씻고 돌아온 진혁위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침상으로 향했다. 군인답게 주인이 내린 명령에 복종하기로 마음먹은 류희겸은 그의 옆에 따라 누웠다. 키도 덩치도 큰 진혁위에 맞춘 침상은 성인 남성 둘이 눕기 충분했다.
오랜 야전 생활로 불편한 잠자리에는 이골이 난 상태라서, 류희겸은 어디서든 쉽게 잠들었다. 아무리 명문가 출신의 지휘관이라고 하더라도 들판에서는 피풍의 하나에 의지해 자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오늘은 평평한 침상에 부드러운 금침을 깔고 누웠다. 편안하기 그지없는 잠자리인데 옆에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 잠을 설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 예민한 성격이었나 의심스럽기도 했다.
여인과 같이 침상에 누웠을 때를 떠올려보았는데, 잘 잤던 것 같았다. 사실 타인과 나란히 누운 것이 낯설어서가 아니라 진혁위라는 존재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그가 아무 위협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다.
피곤하고 머리는 무거우니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면 어떻게든 될까 싶어 다시 진혁위를 등지고 돌아누웠다.
“자는 것도 일이군.”
“아직도 못 잔 것이냐?”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류희겸은 등 뒤에서 들리는 진혁위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굳었다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은 깊었지만 침방에 밝혀둔 등 때문에 진혁위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이미 눈을 뜨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제가 깨웠습니까?”
“잠이 안 와서 뒤척인 건가?”
“어……. 네,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주무십시오.”
류희겸은 사과부터 했다. 잘 자는 사람을 깨운 건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다행히 진혁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다. 그리 있지 말고 누워라.”
“제가, 소인이 곁방으로 가겠습니다.”
“가긴 어딜 가. 누우라니까.”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묶을까?”
협박은 치사했지만 효과적이었다. 류희겸은 삶의 부조리함을 속으로 욕하며 침상에 누웠다. 괜한 반항심에 등을 보이고 눕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화가 났군.”
“예.”
될 대로 되라 싶은 마음에 류희겸은 사실대로 말했다.
“등을 보이면 더 편하지.”
“……?!”
진혁위가 몸을 붙이며 한 팔로 류희겸을 끌어안았다. 밀착한 상체의 온기와 목덜미에 닿는 숨결에 류희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돌덩어리처럼 굳었어.”
몸이 맞닿아 있기에 류희겸은 진혁위가 키득거리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울컥하긴 했지만 무어라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미친놈이라고 독설을 쏟아냈다가는 수습할 수 없다는 이성은 남아 있었다. 길게 숨을 내쉬며 화를 가라앉히자 진혁위가 다시 소리 없이 웃는 게 전해졌다.
“참을성이 강해. 그래서 놀리는 재미가 있다고 하면 화내려나.”
류희겸은 진혁위가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데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다. 그래도 반발해 봐야 본전도 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고 버텼다.
“사람이 잠을 못 자면 하루 종일 병든 병아리가 되는 법이다. 편히 자고, 내일 조반을 같이 먹자. 진짜 한마디도 안 할 거냐? 좋다. 내일 아침까지 나와 나란히 누워 있지 않으면, 혼인이고 뭐고 다리를 잘라 경화당에 처박아 둘 테니까. 그러니까 그냥 자라.”
무서운 협박을 한 진혁위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류희겸을 끌어안은 자세를 살짝 고치고는 조용해졌다.
류희겸은 한참 동안 굳어 있었다. 진혁위의 작아진 숨소리는 규칙적이었지만 잠들었는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기묘한 자세 때문에 직전 생에서 진혁위와 마지막으로 보냈던 시간을 떠올렸다.
그때 역시 지금과 같은 자세로 진혁위에게 안겨 있었다. 초겨울, 등불이 일렁이는 늦은 밤이었다. 잠든 진혁위를 두고 침상을 빠져나와 진한재를 죽이러 향했다.
위락호에서 큰 전투가 한 번 끝나고 난 다음이었다. 간자로 몰려 감옥에 갇힐 뻔한 것을 진혁위가 영왕의 이름으로 결백을 보증하다시피 해주었다. 그런 그를 두고 잠적한 것은 배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진혁위는 그때 진한재와 손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증거는 확실했다.
핵심은, 그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점이었다. 현 시점에서는 자신도 진혁위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자신만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무게에 류희겸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가끔 이렇게 불쑥 튀어나오는 기억이 무거워질 때가 있었다.
눈을 뜨고도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악몽은 류희겸을 좀 먹었다. 차가운 호수의 바람과 물비린내, 출렁거림, 폭음, 절망적인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여섯 번이나 맞이한 죽음은 언제나 가혹했지만, 마지막은 특히 강렬했다.
“자라니까.”
뒤에서 감싸 안은 진혁위가 몸을 조금 더 밀착시키는 바람에 느슨해지려던 류희겸은 다시 긴장하고 말았다. 잠결인지, 아니면 아직 깨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목 뒤에 닿는 숨결이 간질간질하다 못해 소름이 돋는 것 같아 류희겸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히 해라. 귀비가 잔다.”
잠결에 류희겸은 진혁위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여기가 어딘가 의문을 가지다가, 어찌된 일인지 떠올렸다. 만월제전에서 목숨을 건졌으나 영왕의 귀비가 되고 말았다.
꿈자리는 사나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밤의 호수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악몽에 몇 번이고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진혁위가 자라고 도닥이는 바람에 꼼짝도 못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정말 말 그대로 진혁위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엉겨서 잠을 잤다.
수면 부족에 다시 잠에 빠지려는데 옆자리에서 진혁위가 일어나서는 침상을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잠을 설쳤던 탓에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류희겸은 억지로 눈을 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으로 사위가 푸르스름했다. 이미 침상에서 일어난 진혁위는 우소진을 옆에 두고 소세 중이었다.
“벌써 일어났느냐?”
영견으로 얼굴을 닦던 진혁위가 시선을 주었다. 류희겸은 대답을 하지 않고 그대로 일어나 앉았다.
“더 자라.”
“일어났습니다.”
침상 끝에 걸터앉은 류희겸은 이대로 일어나야 하나 잠시 방황했다. 그러나 일어나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당황하고 말았다.
혼인을 한 적이 없으니 아침에 일어난 부부들이 무엇을 하는지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진혁위를 보았다.
“같이 어울려주고 싶으나, 나는 일찍 가볼 곳이 있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라.”
“침전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까?”
어제 하루 종일 침전에 갇혀 있었던 류희겸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진혁위의 명령으로 옷도 신도 없이 마냥 그를 기다렸었다.
영견을 우소진에게 넘겨주던 진혁위가 류희겸을 힐끗 보았다. 그의 눈과 입술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
“옷과 신은요?”
“밖에 나갈 일이 없는데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우소진. 어제와 마찬가지로 귀비에게 옷도 신도 주지 마라. 침전 밖으로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왕야의 명을 받듭니다.”
대야를 챙겨 나가려던 우소진이 움찔 놀라다가 고개를 숙이며 뒷걸음질 쳤다. 그래도 류희겸은 포기하지 않았다.
“적어도 침전의 앞뜰은 거닐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신도 없이, 침의만 입고?”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랬다간 본왕이 미친 귀비와 혼인을 한다 소문이 퍼질 것이다.”
두 사람이 짧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우소진이 옷을 들고 돌아왔다. 하지만 진혁위는 그를 세워두고는 류희겸에게 다가가 손으로 턱끝을 잡아 올렸다. 류희겸은 고개를 들어 진혁위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류희겸의 눈빛에 진혁위는 픽 하니 웃었다. 제법 감정을 잘 감추는 류희겸의 얼굴에서는 어떤 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눈시울이 긴 눈매로 올려다보니 도발적이었다.
깨끗하고 섬세한 얼굴을 가졌으면서 눈빛만큼은 호랑이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화진국에서 자랑하는 젊은 장군다웠다.
그러나 그런 뻣뻣한 사내를 괴롭히는 게 꽤나 흥겹다는 것을 류희겸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젯밤에 억눌렀던 음심이 솟았다. 시간만 있으면 침상으로 쓰러뜨렸을 것이다.
“다리를 잘라버리겠다는 것은 농이 아니다. 얌전히 기다려라.”
“태자부 시위들과의 비무가 나흘 후입니다. 아무것도 못 하게 하실 겁니까?”
“응.”
“왕야.”
장군 출신이라 그런지 왕야라는 부름이 호통을 치는 것 같았다. 턱을 놓은 진혁위는 손등으로 류희겸의 뺨을 쓸었다. 아주 애틋한 행동이었지만 류희겸은 별다르게 반응하지 않았다.
“왜? 다 이길 수 있다며? 자신 없느냐?”
“계속 침전에만 있으면 몸이 굳어버립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모른다.”
대놓고 놀리자 류희겸의 왼쪽 눈가가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화가 났다는 신호였다. 그래도 그는 한 번 숨을 삼키며 기분을 가라앉힌다.
“저를, 소인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족쇄를 채우십시오.”
딱딱하고 무식한 제안이 융통성 없는 류희겸다워서 진혁위는 진심으로 웃었다. 가식 없이 진심으로 부딪쳐 오는 것은 귀장군이라고 불리는 남자의 성격이었다.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리도 마음에 차는 것이 넘치니 진심으로 흥이 났다.
“족쇄도 매력적이지만, 그래도 오늘까지는 얌전히 있어라. 한 번 크게 배신을 당하고 나니 의심병이 생겼다.”
“내일이면 옷과 신을 주실 겁니까?”
“본왕의 귀비는 꼼꼼하군. 그래. 주겠다.”
“얌전히 기다리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진혁위는 우소진을 데리고 곁방으로 갔다. 그리고 역시나 원하는 대답을 들은 류희겸은 침상에 앉아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혁위의 정인이 어떻게 배신했기에 의심병이 생겼다고 하는 건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혼인을 하겠다 약속하고는 도망친 건가. 아니면 사기라도 쳤나. 직전 생에서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으니 이번 생에 바뀐 일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가 누구일까 잠시 생각에 빠지던 류희겸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 단서도 없는 상황에서 추측은 무리였다. 나중에라도 진혁위에게 물어보리라 마음먹은 류희겸은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어차피 일찍 일어나 봐야 할 일도 없었다. 모자라는 잠이나 더 자야겠다 마음먹고는 눈을 감았다. 커다란 남자가 하나 빠진 침상은 아주 넓고 쾌적해서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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