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序章 (1/22)

序章

어둠이 내려앉은 호수 위로 차가운 북서풍이 매섭게 불어댔다.

위락호(瑋樂湖). 대륙에서 가장 넓다고 알려진 호수의 동편과 서편에는 화진국(華晉國)과 대연국(大淵國)의 군선들이 가득 정박해 있었다.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리가 멀었지만 전란의 기운은 감출 수가 없었다.

위락호의 동편, 화진국의 진영을 향해 대나무를 엮어 만든 작은 뗏목이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뗏목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지만 밤의 어둠과 호숫가에 자란 갈대가 모습을 감췄고, 세찬 바람이 소리를 지웠다.

구름이 가득한 하늘은 별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 뗏목 뒤쪽에 앉아 사방을 경계하던 류희겸(柳姬縑)은 하늘과 호수가 구분되지 않는 검은 밤의 풍경에 문득 그날 밤을 떠올렸다.

“목숨 다섯을 살려주신 은인께 목숨 다섯을 더하나이다.”

능하족(稜河族)의 늙은 무녀가 공수를 하며 축례를 읊었다. 구름이 가득한 밤의 초원은 지금처럼 천지가 구분되지 않았다. 주위를 밝히는 것은 부하들이 들고 있던 횃불뿐이었다.

북부 초원에 터를 잡고 있던 능하족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늙은 족장이 죽자 그의 동생이 후계자인 조카를 죽이고 권좌를 차지한 것이었다. 신의 계시를 받은 늙은 무녀는 전대 족장의 며느리인 자신의 딸을 데리고 도망쳤다고 했다.

그들은 살길을 찾아 남서쪽으로 도망쳤으나 추적은 집요했고 스물이 넘던 일행은 다섯으로 줄었다. 늙은 무녀와 그녀의 딸, 그리고 종복 셋이었다. 그들조차 류희겸이 이끄는 기마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객귀가 되었을 운명이었다.

류희겸은 늙은 무녀에게 화진국으로 귀부(歸附)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일군을 통솔하는 장군이었고, 화진국 황제의 질자(姪子)이며, 오랜 명문 무가인 백녕 류가(栢寧 柳家)의 수장이기도 했다. 갈 곳 없는 이민족 다섯 명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늙은 무녀는 신의 계시에 따라 남서쪽으로 향할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결국 류희겸은 그들이 흩어진 짐을 안전하게 마차에 실을 때까지 곁을 지켜주었다.

떠나기 직전, 늙은 무녀가 류희겸에게 축례를 읊었다. 목숨 다섯을 구하였으니, 목숨 다섯을 더할 거라고.

류희겸은 화진국의 수도인 경릉(京堎)에서 나고 자란 명문가의 공자였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선인의 말씀을 배웠고, 귀신도 요괴도 혹세무민하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일군을 이끄는 고모부를 따라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괴이한 것들을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사술로 인하여 썩은 시체가 걸어 다녔고, 사람을 잡아먹던 나무가 불에 타면서 끔찍한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신묘하고 기이한 것들은 많았으나 목숨을 구한 사람의 생을 더하는 것은 생전 처음 듣는 것이었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하늘 아래 제일 고귀하다고 자부하던 제왕들이 영생을 살았을 터였다.

류희겸은 그저 능하족에서 전해 내려오는 의례적인 축복의 말이라고 여겼다. 서쪽 초원을 향해 떠나는 그들의 미래를 부하들과 걱정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그러나 무녀의 축례는 진실이었다.

그는 다섯 번을 되살아났고, 이번이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생이었다. 더 이상의 기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자 두려움이 머리끝까지 솟아올랐다.

류희겸은 초조함에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지난 다섯 번의 생은 모두 오래 살지 못했기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미지수였다.

살얼음판을 걷듯이 모든 것을 조심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많은 것들이 꼬여버렸다. 남은 생도 없었지만 돌아갈 곳도 없어졌다. 겨우 구한 부하들도 하나씩 잃고는 이제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진정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이 덮쳐 왔지만 류희겸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포기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천천히 앞으로 나가던 뗏목이 화진국 군선들이 정박해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곳에는 화진국 군대의 숙영지가 자리했다. 군선을 경비할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병력은 호수 연안에서 숙영지를 세워 머무르고 있었다.

숙영지에서 적당히 떨어진 호숫가에는 화진국의 총지휘관이 머무르는 건물이 있었다. 원래는 귀족의 별장이었는데 이번 전투를 위해 빌린 것이라고 했다.

화진국에서는 명목상 총지휘관으로 19황자인 숙왕(肅王)을 보냈다. 황자에게는 병권이 없었으나 나라 간의 큰 전쟁에 명목상의 지휘관으로라도 출전했다는 것은 그만큼 황제의 신임이 크고 중하다는 의미였다.

별장의 외부 경비는 제법 삼엄했지만 사각이 많았다. 특히 북쪽 담이 수로와 맞닿아 있어서 접근하기 용이했다. 대문에 걸려 있는 숙왕의 깃발을 확인한 류희겸은 북쪽 담벼락의 갈대 그늘에 몸을 숨겼다.

절그럭. 절그럭. 군선을 연결한 쇠사슬이 사나운 강풍에 출렁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위락호는 화진국의 수도 경릉으로 이어지는 대운하의 주요 거점 중에 하나였다. 남부지역과 바다 건너 여러 섬에서 오는 모든 귀한 물품은 이곳을 통과했다.

위락호를 끼고 최고의 무역 도시로 성장한 남영(南渶)에서는 초겨울 북서풍이 불기 시작하면 정박한 배들을 쇠사슬로 연결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다. 그리하지 않으면 밤새 배가 떠내려가기 때문이었다.

류희겸은 이 전쟁이 어떻게 결론 날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쇠사슬로 연결된 배들의 끝은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숨을 죽이며 때를 기다렸다.

*

시간이 조용히 지나갔다. 호수 저편을 살피던 류희겸의 눈에 작은 불빛 여러 개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기다리던 것이었다.

류희겸과 그의 부하 고막영(高幕煐)이 한 번 시선을 교환하고는 그대로 발을 굴렀다. 둘 다 무공을 익힌 고수로 벽을 타 넘는 것은 손쉬웠다. 류희겸이 왼쪽 다리를 살짝 절긴 했지만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넓은 별장 안을 밝히는 횃불은 많지 않았고 경비도 느슨한 편이었다. 류희겸은 고막영과 함께 숙왕이 있을 깊숙한 곳으로 재빠르게 향했다.

그림자에 숨어 담을 몇 개 더 넘자 두 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는 건물이 나타났다. 류희겸과 막영은 소리 없이 병사의 뒤로 각각 다가가 입을 막고 목을 베었다. 목이 갈라지면서 더운 피비린내가 피어올랐지만 사위는 조용했다.

즉사한 병사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던 류희겸은 어떤 예감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화살이 날아와 머리 위를 스쳤다.

텅―! 기둥에 박힌 화살이 떨리는 소리가 불길하게 울렸지만 류희겸은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본채의 상방 문이 열리면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우루루 튀어나왔다.

“류희겸!”

검을 들고 앞장선 사람이 숙왕의 심복인 임약원(任躍元)이라는 것을 알아본 류희겸은 이를 악물었다. 이건 명백히 함정이었다.

오늘 계획을 숙왕이 알았을까? 아무리 숙왕에게 정적이 많다고 하더라도 매일같이 이렇게 많은 인원을 매복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평상시와 달리 경계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류희겸은 숙왕과 손을 잡은 인물들을 떠올렸다. 대연국의 태자와 영왕(瑛王). 태자는 숙왕과 내통한 것이 확실했고 영왕은 숙왕이 보낸 서신의 흔적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 정황상으로는 영왕일 확률이 높았다.

자존심 강한 영왕이 어떤 이유로 숙왕과 손을 잡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궁지에 몰린 영왕에게 어떤 야심이 생겨났을 수 있었다. 어쨌든 자신이 대연국의 진영에서 탈주하고 하루가 꼬박 지났으니 서로 연락할 시간은 충분했다.

미리 대비한 것이든, 혹은 영왕과 뒤로 손을 잡은 것이든 상황은 이미 최악이었다. 매복하고 있던 병사는 쉰 명이 넘었고 임약원은 류희겸도 쉬이 상대하기 까다로운 고수였다. 거기다 담장 저쪽에서 사람들이 우루루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진한재(陣瀚栽)는 어디에 있는가?!”

류희겸은 숙왕의 이름을 커다랗게 불렀다. 조심스러운 성격의 숙왕이 이곳에 있을 리 없다고 확신했지만, 성격 급한 임약원의 주위를 끌기 위함이었다.

“더러운 변절자가 감히 누구를 부르느냐!”

앞으로 막 달려오려던 임약원이 멈춰 서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뒤에 늘어선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검과 활을 겨누었다.

“임약원! 그대는 알고 있잖나. 내가 누명을 썼다는 것을 말이다!”

“적국의 주구가 된 변절자가 말이 많다!”

“진한재가 역모를 획책하다 그 죄를 남준해(南俊海) 장군에게 뒤집어씌웠지. 내가 변절자라면 진한재는 역심을 품은 역적이다!”

류희겸은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활을 들고 있는 병사는 서른 명이 넘었고, 그들이 조준한 화살을 모두 피해 무사히 도망치는 것은 어려웠다.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면 자신이 지껄이는 말이 의심이 많은 황제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바랐다. 죽어서도 진한재가 황제가 되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움찔하며 놀란 임약원이 무어라 하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멀리서 징과 북이 커다랗게 울리기 시작했다. 둥―! 둥―! 둥―!

한밤의 전장에서 변고를 의미하는 소리에 경계하던 병사들의 주의가 흐트러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류희겸은 몸을 날렸다. 고막영 역시 뒤따랐다.

“활을, 활을 쏴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임약원이 명령을 내리자 화살이 날아들었다. 어두운 밤에 빠르게 움직이는 고수를 꿰뚫을 명사수는 없었다. 하지만 날아드는 화살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제가 막겠습니다.”

“막영!”

류희겸은 고막영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멈춰 서지는 않았다. 고막영이 몸을 돌려 다른 쪽으로 내달리는 것을 확인하며 담을 넘자, 뒤쫓던 병사들도 둘로 갈라졌다.

불길한 예감이 등 뒤에 달라붙었다. 이로써 마지막 남은 부하까지 잃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조차 이곳에서 살아 도망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엄습하는 두려움을 떨쳐내며 류희겸은 내달렸다. 외벽을 넘어 수로까지만 간다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 것이다.

필사적인 도주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쏟아지던 화살 중에 하나가 기어코 왼쪽 어깨에 박혔다. 엄청난 충격에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지만 류희겸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그러나 주춤하는 사이 화살을 다리에 한 대 더 맞고 휘청거렸다.

그걸 놓치지 않고 임약원이 치고 들어왔다. 류희겸은 임약원의 검을 세 번 막으며 거리를 벌렸다.

“죽어라!”

임약원이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올 때였다.

콰아앙! 쾅! 콰앙!

연이은 폭음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류희겸을 향해 달려오던 임약원과 병사들이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화진국의 군선이 정박해 있던 곳이, 마치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환한 주황빛으로 타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몰리는 찰나 류희겸은 팔다리에 꽂힌 화살대를 꺾고 필사적으로 담을 넘었다. 뗏목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수로에 몸을 던지자 다시 화살비가 날아들었다.

어두운 수로에 류희겸의 몸이 가라앉자 눈먼 화살들이 피해갔다.

“수로에 숨었다! 찾아라, 어서!”

임약원의 명령에 횃불을 든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류희겸은 힘을 빼고는 수로의 물살에 몸을 내맡겼다.

그러나 임약원은 끈질겼다. 진천뢰(震天雷)를 내던지며 폭발을 일으켰다. 다행히 직격을 피했지만 엄청난 충격에 류희겸은 물속에서도 피를 토했다.

빠른 물살에 흘러가면서 필사적으로 정신을 다잡았다. 초겨울 호수는 차갑기 그지없어서 짧은 순간에도 몸이 차가워졌다. 여기서 정신을 잃었다가는 체온이 떨어져서 죽을 것이다.

류희겸은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오늘은 실패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아직 살아 있으니 뭐든 할 수 있었다.

몸이 회복되면 경릉으로 숨어들어 가는 거야. 진한재가 자주 가는 번루(樊樓)에서 기회를 엿보면 돼. 얼굴에 상처를 내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만들고. 막영도 찾고.

고막영을 떠올리던 류희겸은 눈이 뜨거워지려는 것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암습 후에 쫓기다 헤어지게 되면 화진국의 경릉에서 다시 만나기로 미리 약속했었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그가 살아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음을 다잡은 류희겸은 호숫가로 밀려나기를 기다려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자신을 찾는 횃불과는 아주 멀어졌다. 그리고 저 멀리 화진국의 군선들이 정박한 곳이 커다란 불꽃에 휩싸여 있었다.

위락호에는 매서운 북서풍이 불었고, 바람이 향하는 쪽에 정박한 화진국 군선들은 사슬로 서로를 묶었다. 화공(火攻)을 쓰기 딱 좋은 조건들이었다.

마치 해가 뜬 것처럼 호수와 하늘이 붉게 물든 광경에 류희겸은 조소를 흘렸다. 화진국의 대패는 예정되어 있었고, 명목뿐이긴 하나 총지휘관으로 참전한 숙왕 진한재의 입지는 나빠질 것이다.

모든 것이 암담한 와중에 그나마 기분이 나아지는 것을 느끼며 류희겸은 호수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러나 도주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려다가 피를 토하며 그대로 뒤로 넘어가 버렸다. 구름이 가득한 검은 하늘이, 그리고 훌쩍 자란 갈대가 타오르는 주황빛 불빛에 비쳐 눈에 가득 들어왔다.

“안 돼…….”

팔다리를 허우적거려 보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혼몽할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울컥, 하고 속에서 피가 치솟아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다. 아마도 진천뢰의 충격이 내장은 물론이고 머리까지 뒤흔들어 놓은 게 분명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어깨에 꽂힌 화살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속에서 자꾸 피가 솟았다. 내장이 상했으니 붕대를 감아도 소용이 없을 터였다.

류희겸은 가물거리는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반드시 진한재의 명줄을 끊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던가. 뿌리 깊은 원한을 불태우며 겨우 땅에 손을 짚고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러다 다시 피를 토하면서 갈대 사이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 ◇ ◇

“……류희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류희겸을 기다리는 것은 뿌옇게 흐린 시야였다. 밤인지 낮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희겸! 류희겸, 눈을…….”

류희겸은 귓가에 웅웅 울리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영왕 진혁위(陳奕偉). 그가 화진국의 영역까지 들어왔다는 것은 전투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화진국의 배가 불에 활활 타버렸을 테니, 당연히 대연국이 승리했을 것이다.

대연국의 진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자신의 신원을 보증해 준 영왕을 이용했다. 나중에 영왕이 곤란해질 것을 알았기에 미안한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숙왕 진한재와 손을 잡았다는 증거 때문에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영왕이 숙왕 진한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이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려줬을 수도 있었다. 물론 추측이기는 했지만 전후 사정을 따지면 그럴 듯했다.

영왕에게 묻고 싶었다. 숙왕에게 나를 넘겼냐고.

입술을 달싹거려 봤지만 목소리 대신에 핏물만 흘러나왔다.

“금방 나을 수 있다. 조금만, 조금만 버텨라!”

몸이 식은 탓에 어깨를 잡은 진혁위의 손이 뜨겁게 느껴졌다. 버티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다 못해 떨리는 것처럼 들렸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떨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류희겸. 버텨라. 제발―!”

뿌옇던 시야가 점차 어두워지면서 웅웅거리던 소리가 완전히 뭉개졌다. 마치 꿈 없는 잠에 빠져드는 것처럼 새카만 어둠이 덮쳐 왔다.

여섯 번째, 죽음이었다.

그리고 일곱 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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