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67)화 (167/167)

167

화운은 하염없이 연못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간 겪었던 수많은 생각들이 바람처럼 머물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스스로 경험해 놓고서도 쉽게 믿을 수가 없는 일들이 어느새 기억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정안궁에 돌아가면….”

한참 말이 없는 주인의 곁을 묵묵하게 지키던 아진이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간 연못에서 벌어진 일들 때문에 아진은 이제 연못이라면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런데 제 주인은 그저 온화한 시선으로 물결이 이는 수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그 표정이 전처럼 아진을 불안하게 하지는 않아서,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아진은 주인의 말을 들었다.

“연못가에 꽃을 심어야겠어.”

“연못가에요?”

“응. 나는 꽃을 잘 모르지만, 가장 화려하고 어여쁜 꽃을 찾아서 연못 근처에 가득 심어 놓을래.”

“…….”

“계절이 되어 꽃이 만발하면, 폐하께서 언제나 그 꽃을 보실 수 있게.”

화운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웃거리던 아진은 ‘폐하’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나서야 주인의 마음을 짐작했다. 아무래도 손수 심은 특별한 꽃을 폐하께 선물처럼 보여드리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진의 짐작은 절반만 맞았다. 화운이 선물로 꽃을 준비하는 건 맞았고, 폐하께서 보시기를 원하는 것도 맞았으나 그것은 폐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화운은 본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그가 무슨 생각으로 물에 뛰어들었는지, 그의 혼령이 있다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지 그런 건 영영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을 죽이고 싶을 것이다. 남의 몸을 차지한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그가 그토록 사랑하여 갈구하고 또 갈구하였던 폐하의 마음까지 빼앗아 갔으니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존재라고 원한을 품어 주위를 맴돌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눈에 화운이 심은 꽃 따위는 간사한 짓거리에 지나지 않을 테지.

화운은 고개를 숙여 이번에는 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더없이 익숙해진, 때때로 정말 자신의 얼굴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이 얼굴로, 이 이름으로 살아가는 한 죄책감을 다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어느 날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본래 이것이 내 것이었던 양 그렇게 이 삶을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다.

하물며 ‘연화운’에게는 여전히 그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할 부모님이 있질 않나. 아무리 화운이 황제 폐하께 모든 죄를 고하고 용서를 받았다고 하여도 ‘연화운’의 부모에게 진 빚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 일을 해결하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 될지, 해결하기 전까지 견뎌야 할 죄책감의 무게는 또 얼마나 무거울지 알 수 없었다.

삶의 어느 순간에는 여전히 죽은 이를 향한 죄책감에 숨이 막힐 것이고, 어느 날은 악몽에 시달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화운은 괜찮았다. 전처럼 숨이 막히게 막막하고 끔찍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연화운의 부모님을 마주하고 그들에게 죄를 비는 날이 올 것이나 그날이 두려움에 잠식되어 울고 싶을 만큼 겁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냐.”

왜냐하면 이제는 그 모든 일들을 화운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언제 다가왔는지 등 뒤에서 따스한 목소리가 들렸다. 깊이 잠겼던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물러갔는지 아진도 사라지고 그곳에 다정한 눈매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황제가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화운은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놀라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황제의 손이 화운을 향해 내밀어졌다. 화운은 아주 잠시 그 강하고 단단해 보이는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그 위에 얹어 마주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살짝 날린 화운의 머리카락이 그의 흰 뺨을 간질이자 홀린 듯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은근슬쩍 뺨을 문지른 이한이 말했다.

“혹시 내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느냐.”

간지러운 질문에 화운은 순간 얼굴을 붉혔지만, 그는 이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 채로 조용히 대답했다.

“저는… 늘 폐하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말문이 막힌 건 이한이었다.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부러 장난을 건 것인데 이렇게 가슴을 때려오는 대답을 내어줄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한이 한 걸음, 화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아 있는 그대로 말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라 화운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다가선 이한이 한 팔로 화운의 허리를 감싸 품으로 당겼고, 화운은 놀라 다시 시선을 올려 이한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깊고 검은 눈동자에, 도무지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는 열망이 어려 있었다.

“폐하, 보는 눈이 많습니다….”

화운이 방어적으로 말했지만 이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이미 주위를 다 물려 아무도 없는데 보긴 누가 본다고 그러느냐.”

“하오나….”

“설령 본다고 하여도 상관없다. 내가, 내 사람과 함께하겠다는데 누가 감히 토를 달 것이야.”

이한이 더 다가오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가슴을 짚은 화운의 옷이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꽉 쥐었다. 황제가 말한 내 사람, 이라는 단어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몇 번이나 폐하의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하였던 날들이 바람처럼 흘렀다.

갑자기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는 화운의 반응에 잠시 당황한 이한이, 이내 그 마음을 짐작하겠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고작 이런 말로 감동이라도 했느냐.”

“폐하… 저는… 저는 정말….”

“두고 보거라. 앞으로는 이런 말 같은 건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만큼… 너를 행복하게 해줄 터이니.”

총천연색의 여름이 드리워졌다. 이한은 자신이 그 아름다운 색들을 어찌 눈에 담을 수 있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색을 온전히 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았다. 그러니 황제가 아닌 성이한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 화운이 제게 안겨준 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 존재에게 해주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대해도 좋을 것이야.”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속삭이듯 말한 이한이 그대로 입술을 겹쳐왔다. 허락을 구하듯 혀끝으로 입술 사이를 간질이자 눈을 꼭 감은 화운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뜨거운 살덩이가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기분이 아랫배를 저릿하게 만들어 화운은 이한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지만 이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틀어 더 깊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코끝으로 흐트러지는 화운의 숨결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여린 입안을 하나하나 맛보는 혀끝에 단물이 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토록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내 곁으로 오기 위해 그리도 험한 길을 돌아왔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죄다 자신의 죄인 것만 같아 속이 다 허물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지금까지 늘 이한의 움직임에 수동적으로 따라오기만 하던 화운의 혀가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멀어지는 이한의 혀를 따라와 그 끝을 살짝 건드리고는 물러났다. 이한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확 떼곤 멍한 표정으로 화운을 내려다봤다. 그사이 차오른 숨을 몰아쉬는 화운은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젖고 붉어진 입술과, 발긋해진 눈가, 그리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보여줄 것이 분명한 은밀하고도 사랑스러운 반응까지. 무엇 하나도 이한이 그냥 참고 넘길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만… 안으로 들어가겠느냐.”

이한의 물음엔 이면이 있었다. 당장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 먹고 싶어 하는 사나운 짐승 같은 눈동자가 이면에 담긴 뜻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 눈빛이 겁이 나기는커녕 오히려 온몸을 열에 들뜨게 만들어버리니. 화운은 홀린 것처럼 민망함도 잊고 눈을 느리게 한 번 깜빡이고는 ‘예, 폐하.’ 하고 대답했다.

황제의 입매가 멋들어지게 호선을 그렸다. 커다란 황제의 손이 화운의 손을 단단히 감싸 쥐었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은 채 서정궁의 뜰을 걸었다.

“머지않아 정안궁으로 돌아가면 네게 비 첩지를 내려주마.”

“…괜찮습니다, 폐하. 저는 그런 건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당장 귀비의 자리에 올리고 싶으나 법도란 것이 본래 이리 귀찮은 것이니 할 수 없지.”

“폐하…!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누가 들을까 겁이 납니다!”

“왜 화를 내느냐? 안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주겠다는데도 이러니, 원.”

장난스럽게 화운을 놀리는 황제의 눈동자에 지난날에는 가져본 적이 없던 빛깔의 행복이 어렸다. 화운의 눈동자에 꼭 같은 색이 있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찬란한 여름이 흐르고 나면 청량한 가을이 오고, 그렇게 계절이 흐르다 보면 살을 에는 바람에 몸을 움츠려야 하는 겨울도 올 것이다. 매서운 바람은 때때로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서럽고 고독하게 만들기도 하겠으나 두려워할 일은 아니었다. 겨울이 제 아무리 춥고 길어도 결국에는 또다시 따사로운 봄볕 아래 모든 추위가 녹아내릴 것이니,

이렇게 서로의 손을 잡고 그 모든 계절을 함께하는 한, 두려운 날들은 앞으로도 영영 없을 터였다.

“첩지 같은 것은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저는….”

“따로 원하는 것이 있느냐?”

“저는… 폐하께서 제 곁에 있어만 주시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 말이 끝났을 때, 화운의 두 다리는 더 이상 바닥을 딛지 못했다. 뜰을 가로지르는 짧은 순간마저도 견디기 힘들어진 이한이 그대로 화운을 품에 안아 올렸기 때문이다.

놀란 화운의 짧은 비명이 들렸다. 멀리 떨어져 몰래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정궁의 아이들이 웃음을 참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자신들 앞을 지나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못 본 척했다.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로 찬란한 태양이 눈이 부시게 쏟아졌다.

이것은, 기막힌 운명의 장난으로 온통 미움을 받았던 어느 사내와 그가 가진 단 하나의 꿈이었던 황제의 이야기였다.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완결.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