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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앞까지 함께 걷겠느냐.”
조회를 위해 서정궁을 나서려던 이한이 인사를 올릴 준비를 하고 선 화운에게 말했다. 비록 코앞이기는 하지만 어가가 있는 곳까지 함께 걷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화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내밀어진 이한의 손으로 향했다.
가슴이 뛰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침에 잠에서 깼을 때는 눈을 뜨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지난밤 제게 벌어진 일이 너무나도 믿기지가 않아서, 혹시나 그 일들이 전부 꿈이었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런 기색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인지 파르르 떨리는 눈 위에 입을 맞춰주고, 곧장 입술을 파고드는 것으로 화운의 불안을 전부 날려준 것이 바로 눈앞의 황제였다.
“저의 기쁨입니다, 폐하.”
참을 수 없는 미소가 얼굴 가득 피어올랐다. 화운의 손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한의 손과 겹쳐지고, 두 사람의 손가락이 서로의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얽혔다. 이한의 손을 잡는 것이 물론 처음은 아니었으나 오늘 닿은 온기는 이전에 느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되어 화운을 감쌌다.
화운은 이제야 온전히 그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았으니 모든 것이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한의 손을 잡고 서정궁 전각 밖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화운의 발걸음이 떨렸다.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기분이었다. 따갑게 머리 위로 내리쬐는 여름의 태양이,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전각 앞에 공손히 시립하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이, 얼굴을 스치는 아침의 바람과 폐부를 가득 채워오는 공기가 그늘을 한 겹 벗은 것처럼 더없이 선명하고도 새롭게 전신의 감각을 채웠다. 이 감각을 한 마디로 표현할 유일한 단어가 있다면 아마도 행복일 것이다.
“밤에 다시 오마.”
누가 그러자고 한 것도 아닌데 서로 발을 맞추어 아주 느리게 걸었으나 가마 앞에 당도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한은 아랫것들의 보는 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운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화운은 수줍어 얼굴을 붉혔지만 결코 잡힌 손을 빼내지는 않았다. 결코 얻을 수 없으리라 여겼던 이 아침을 화운은 아주 솔직히,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예, 폐하.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다녀오십시오, 하고 말하는 혀끝이 달큰했다. 폐하께서 두 번 다시 자신을 찾지 않으실 거라 확신했던 밤이 전부 신기루 같았다.
“그래. 다녀오마.”
“예. 황제 폐하를 배웅하옵니다.”
“그래… 그럼 정말 가 보마.”
화운의 인사를 듣고 나서도 이한은 가마에 오르지 않고 계속 비슷한 말을 빙빙 돌려 뱉어가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보다 못한 오 태감이 나서 ‘폐하.’ 하고 눈치를 주고 나서야 이한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애틋한 화운의 손을 놓고 가마에 올랐다. 벌써부터 그리운 마음에 애가 탔어도 황제로서의 의무를 피할 수는 없었다.
“황제 폐하를 배웅하옵니다!”
사뿐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화운의 뒤로 아진을 비롯한 서정궁의 궁인들이 소리를 높여 인사를 올린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차 사방을 쩌렁쩌렁 울리던지. 멀어지는 이한도, 그를 보내는 화운도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던 아침의 일이었다.
“고사이 얼굴이 반쪽이 된 것을 보십시오.”
정빈, 송현이 울상이 되어 말했다. 서정궁에 갇힌 동안 얼마나 연빈이 마음고생이 심했을지를 생각하니 아무리 일이 잘 해결되었다고 하나 송현은 여전히 속이 상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송현은 분명 황제 폐하께서 오해를 하여 연빈에게 괜한 고생을 시킨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람을 고생을 시키더니 하루아침에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황제 폐하의 태도가 달라진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빈.”
어린 누이를 달래듯 송현을 다정하게 달랜 화운이 이번에는 황후, 자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황후마마.”
“되었다. 일이 잘 풀렸으면 된 것이지.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자란의 말을 이어 이번에는 숙비, 비영이 화운을 보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하루만 더 갇혀 있었으면 정빈이 폐하 앞에서 대성통곡이라도 할 기세였다네.”
송현은 부정하지 않고 코만 훌쩍이고 있다. 이번엔 비영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화운이 대답했다.
“…숙비마마께서 도와주신 덕분으로 제가 마음 편히 그날들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얼. 별것도 아닌 일을 두고.”
비영에게 미소를 지어 화답한 화운이 다시 송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빈께서 보내주신 것들 또한 제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그 역시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그거… 제가 연빈에게 전하려고 엄청 고생했어요. 그냥 그렇다구요.”
그제야 송현의 얼굴에도 의기양양한 미소가 어렸다. 화운은 그런 송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눈을 마주쳐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자란은 그곳에 앉아서 더없이 훈훈한 내명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현듯, 제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들이 모두 이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답지 않게 마음이 일렁였다. 그것을 꾹꾹 내리 눌러보며, 황후가 말했다.
“허면 이제는… 정녕 다 괜찮아진 것이냐.”
폐하께서 무엇 때문에 연빈을 그리 가두셨던 건지,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설명할 만한 일이었다면 분명 먼저 무릎을 꿇고 자초지종을 고했을 연빈은 죄를 청하면서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그 행동에서 폐하께서 이 일이 새어나가지 않길 바라셨음을 추측할 수 있었기에 다른 이들도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저 괜찮아진 것이냐는 물음 하나로 황제와 연빈의 사이를 가늠해 보려는 자란을 향해 화운이 고개를 숙였다.
“…예, 황후마마. 황제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았으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을 듣고서도. 분노하여 냉정하게 내치는 것이 당연한 그런 일을 겪고서도. 황제는 자신을 용서해 주셨다. 화운은 그 은혜를 구원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는 앞으로도 평생토록 폐하와 황후마마를 모시며 살아갈 것입니다.”
오로지 이한과 화운만이 알았던 거대한 폭풍이 지나간, 평화로운 날들의 시작이었다.
눈앞에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이한은 오늘 조회가 끝난 뒤 마련한 연주원과의 독대를 떠올렸다. 제 어린 날의 스승이자, 고난을 함께 돌파한 벗이자, 이제는 충성스러운 오랜 신하인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오늘처럼 힘든 날이 없었다.
‘자네에게는 내가 항상 고마운 일이 많아.’
한참 말이 없이 빤히 바라보기만 하시더니 갑자기 그런 말을 내놓는 황제 때문에 당황한 연주원은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저는 폐하의 신하이옵니다. 제가 한 모든 일은 폐하를 위해 신이 응당 해야만 했던 일이었으니 과분한 말씀은 거둬 주십시오, 폐하.’
이한은 그 자리에서 연주원에게 당장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한의 안에서도 아직 해답을 찾지 못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냥 모르는 척 덮고 가면 편할 것이다. 어차피 화운은 앞으로도 평생 황제의 후궁으로 살아가야 했으니 이한과 화운, 두 사람만 입을 다물면 연주원과 그의 부인은 영영 제 아들이 이미 죽은 것을 모르고 살아갈 것이고 그러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다.
허면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일, 황실의 안정과 화운의 안위를 빌미로 이대로 영영 연주원에게 아들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연화운을 지켜야 하지만 동시에, 평생 자신을 따르고 모신 신하를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이한의 마음은 더없이 어렵고 또 어려웠다.
‘나중에… 내가 부르거든 오랜만에 함께 술이나 한잔하지.’
그래서 이한은 우선 그런 말로 연주원과의 이야기를 미루었다. 사실을 밝힌다면 어떻게 밝혀야 하는지, 그런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연주원이 과연 어떻게 반응할 것이고 그 반응이 황실에 미칠 영향은 또 어떠할 것인지. 모든 것을 치밀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다.
멍하니 불길을 바라보고 있던 이한이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지전들을 그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것은 죽은 이가 없는, 그러나 죽은 자를 위한 장례였다. 황궁에서는 금지되어 있는 의식이었으나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너 또한 일생이 힘들고 고단했던 것은 매한가지였겠지.”
주위를 모두 물린 곳에서, 황제는 구천을 떠돌고 있을 어느 혼에게 말했다. 살아생전 그가 벌였던 악행을 죽음으로 미화하고 싶진 않았으나 육신은 생에 남아 있는데 혼령만이 먼 길을 떠나게 되었으니 이한은 그의 넋이 이제라도 안식을 찾을 수 있길 바랐다.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너를 이리 만든 것이 아님을 알아다오. 그리고… 이제는 이곳에 미련을 두지 말고 쉬거라.”
죽음으로 다 갚지 못한 업이 있다면 저승에서라도 남은 저의 업보를 져야 할 것이다. 어쩌면 생을 거듭하여 그것을 계속 지고 가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한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그의 과오를 더 되새기는 일은 그만두기로 하였다.
불꽃이 타올랐다. 그가 죽으며 황제를 원망하였을지, 그리하여 황제가 지금 보이는 이 모든 말과 행동을 끔찍하다 여길지, 그러한 것은 알지 못했다. 다만.
“…이곳에서는 내가, 평생 너를 잊지 않고 기억하마.”
이한은 그저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누가. 누가 나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지?
누군가가 다급한 손짓으로 자신을 잡아챘을 때, 연화운은 발버둥을 치면서도 그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물속은 너무 차가웠고 지상에서도 힘겨웠던 숨은 빠르게 차올라 쉽게 죽음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온기를 가진 생 하나가 연화운을 밖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했고, 그다음에는 화가 났다. 고심하고 또 고심하였던 자신의 계획이 혹시라도 망가질까 봐 초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연화운은 궁금하기도 했다. 만인에게 미움만 받고 있는 자신을. 죽는다면 아마도 이 황궁에서 슬퍼해줄 이 하나 없을 자신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연못에 몸을 던진 이가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는 마치 정말로 연화운이 죽지 않길 바라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자신을 물 밖으로 이끌었다. 연화운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싶으면서도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픈 열망을 느꼈다.
추웠다. 오래 숨을 쉬지 못해 고통스러웠고 고통마저도 서서히 사라지게 만드는 망각이 죽음의 그림자를 이고 전신을 채워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연화운은 여전히 삶의 온기를 느꼈다. 오로지 자신을 붙든 그의 손길에서만 느껴지는 따스함이었다.
가만두지 않으리라. 만약 이 자가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여 기어코 자신을 살려낸다면 그 대가를 아주 톡톡히 치르게 해주리라. 정안궁의 뜰 한가운데에 매달아 매질을 하여 그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도록 하고 말리라. 멀어져가는 의식 사이로 연화운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이라는 것이 본디 그런 것일까. 살아생전에는 절대로 하지 않을 그런 생각들도, 오로지 그 특별한 순간에는 할 수가 있는 것일까.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연화운은 생각했다. 내가 살아난다면 이 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약에 내가 뜻대로 여기서 생을 마친다면. 사랑하는 이에게 이대로 죄책감의 이름이 되어 영영 남을 수가 있다면. 허면 이 차가운 물에 몸을 던져 이토록 절박하게 자신을 살리려 애썼던 이 자는. 이토록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있는 이 이름 모를 자는.
그래.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러지 못하였지만 너는 원하였던 것을 가지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것은 연화운이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벽한 타인을 위해 한 기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