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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화운의 고백을 들었을 때, 이한은 그제야 자신이 화운을 보지 않았던 그 시간 동안 세상 또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연화운이 없는 곳에서 이한의 세상은 그저 흑과 백으로만 이어져 있는 공간이었다.
‘제가 감히… 감히 폐하를 연모하였나이다….’
헌데 화운이 그런 말을 꺼낸 그 입술로부터 색이 번졌다. 파리한 그의 입술 색이 먼저 보이고, 창백한 얼굴과 옅은 녹색의 침의가 차례로 보이더니 급기야 화운으로부터 온갖 색들이 피어나 이한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으로 전부 번져나갔다. 눈앞의 이 사람을 이대로 잃었다면 자신은 분명 평생 동안 색이 없는 세상에서 부유하듯 살았을 거라고, 누군가 일러주는 것 같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 울고 있는 화운의 뺨을 감쌌다. 화운은 잠시 그 손길을 피하려는 듯 몸을 움츠렸으나 이한은 그가 물러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뺨에 닿은 손바닥으로부터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던 모든 번뇌를 전부 다 태워버릴 만큼 격렬한 화염이었다.
다시 한 번 듣고 싶었다. 화운의 입에서 한 번만 더, 자신을 연모한다는 말을 흘러나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한은 되묻지 않았다.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화운이 얼마나 자신을 깎아내고 또 깎아냈을지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화운은 연정을 말하고 있었으나 그건 사실 죄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제에게야 이것이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이겠으나 화운에게는 천자를 능멸하는 죄악이었음을 이제서야, 그 절절하고도 고통스러운 고백을 듣고서야 이한은 깨달았다. 더 이상 그를 몰아붙이고 싶진 않았다.
대신 이한은, 천천히 화운의 얼굴을 끌어당기며 허물어진 마음의 틈으로 드러난 속내를 속삭였다.
“네가… 힘들었겠구나….”
“폐하…!”
“아니, 잠깐만. 그냥 내 말을 들어.”
감히 염치가 없어 그런 망극한 말을 들을 수가 없던 화운이 서둘러 그 말에 반박하려 했지만 이한이 먼저 그를 막았다. 황제의 엄지손가락이 찬찬히 화운의 젖은 입술을 매만졌다. 보지 못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고새 다 터버린 입술에서 그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아, 이한은 그간 저 역시 그토록 고통스러웠음은 안중에도 없이 마음이 애달팠다.
그렇게까지 하지는 말걸. 단번에 믿기 힘들었어도. 그의 진심이 자신에게 향한 것이 아니면 어쩌나 겁이 나고 두려웠어도. 그래도 그렇게 화를 내며 도망쳐버리지는 말걸. 그것이 결코 과한 처사가 아니었음을 알면서도 이한은 이번에도 그런 후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달라졌다는 화운의 말을 믿지 않고 그를 몰아붙였던 그때처럼.
“홀로… 이 모든 것을 네가 홀로 감당하게 하여서….”
가장 두려웠던 것이 사라지자 이한은 연화운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내도록 혼자 감당하고 있었을 많은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수많은 죄책감을 견뎌야만 했을 그에게는 자신이 절절하게 내뱉었던 고백마저도 어쩌면 고통이었으리라.
“네가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아무것도 알아주지 못했으면서 내 감정만을 네게 강요해서 내가 정녕 네 앞에 면목이 없는 것이야….”
화운은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저었다. 무어라 입을 열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냐 이한의 말을 막지도 못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폐하께서 짊어지셔야 할 죄는 그 무엇도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 자신의 앞에서 눈물처럼 사죄를 토해내는 그분의 마음이 너무나도 귀하고 소중하여 화운은 제 뺨을 감싼 이한의 손바닥에 연신 고개를 기대며 어깨를 들썩였다.
“…나의 운아.”
마침내, 황제 폐하께서 자신의 정인을 불렀다. 한 치의 어긋남 없는, 그것은 정녕 유일한 자신의 연인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이제 두 번 다시는 너를 아프게 하지 않으마.”
그러니 제아무리 연화운이라도. 아무리 모든 죗값과 고통을 혼자서 지고 가길 결심하였던 사내라도. 이토록 애틋한 마음 앞에 어찌 허물어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리하여 그때 화운의 입술이, 천천히 이한의 손바닥에 닿았다. 그건 마치 아주 신성한 의식과도 다름없이 보였다. 뜨거운 입술이 이한의 손바닥에 한 번, 그다음엔 손등에 한 번 내려앉았다. 살결에 닿아오는 숨결 하나하나가 곧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경배였고 또한 고백이었으니.
결국 참지 못한 이한이 그대로 화운을 끌어당겨 입을 맞춘 건 당연한 일이었다. 화운 역시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입술을 열어 맞이했다. 뜨거운 숨결이 순식간에 하나로 얽히고 이한의 두 팔이 다급하게 화운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제게로 당겨 안았다. 서로에게 닿는 곳곳에서 견디기 힘든 열기가 피어올랐다. 이한은 그가 버거워할 것을 알면서도 작은 입안으로 어떻게든 더 깊이 파고들어 여린 안쪽을 전부 물고 핥았다.
천년을 견뎌낸 것 같은 갈증이 일었다. 이한의 손이 다급하게 화운의 옷깃을 헤집었고 화운은 그런 이한의 손길을 무엇 하나 쳐내지 않았다. 연신 화운의 입술을 깨물고 다시 그 사이로 뜨거운 혀를 밀어 넣길 반복하던 이한이 크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떨어트린 건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화운을 넘어트리기 직전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이한을 보는 화운의 눈동자에는 누구의 앞에서도 보인 적이 없는 열망이 어려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자마자 이한은 곧바로 그에게 다시 달려들고 싶었으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쥐어 그 짐승과도 같은 욕망을 참아내며 이한이 말했다.
“네가… 네가 몸이 좋지 않으니….”
“…….”
“더 지나면… 너를 밤새 아프게 만들지 않을 자신이 없다….”
이한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오늘밤 이 선을 넘어가면 자신은 분명 또다시 연화운을 한계 너머까지 괴롭히고 울게 만들고 종국에만 그만해 달라 빌며 애원하게 만들 터다. 틀림없이 그랬다. 이한은 정상적인 상태라면 모를까 여태 앓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이에게 그리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물러서지 않은 건 화운이었다. 바람에도 꺾일 것 같은 들꽃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화운은 이한의 경고에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멀어진 이한에게 다가가며 떨리는 두 손으로 지엄하신 황제의 얼굴을 감쌌다.
처음으로. 정말 이제 와 처음으로 온전하게 허락을 받은 이 마음을 화운은 오늘밤만큼은 참고 싶지 않았다.
“폐하….”
화운은 제 손길에 오히려 겁먹은 얼굴을 한 이한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손을 대면 화운이 전부 부서져 망가지기라도 할 것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화운은 아주 천천히, 서툴지만 더없이 깊은 진심을 담아 이한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대었다 떨어졌다. 숨결과 타액이 섞이는 농밀한 입맞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담백한 움직임이었지만 그 찰나의 접촉이 이한에게 끼친 영향은 전혀 달랐다.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화운이 속삭였다.
“미천한 소인이 감히 폐하께 간청하옵니다….”
“너… 네가….”
“제가 꺼려지는 것이 아니시라면… 폐하, 부디 이 밤 저를 내치지 말아주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운은 자신을 덮쳐오는 거대한 해일을 온몸으로 받았다. 오래도록 결코 잊히지 않을 밤이었다.
동이 틀 무렵 잠에서 깬 이한은 곧바로 제 품에 안겨 있는 기분 좋은 온기를 느끼며 미소 지었다. 지나간 지옥 같았던 밤이 과연 정말로 있었던 건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마음이 평온했고 피로 같은 건 하나도 느껴지질 않았다.
화운은 이한의 어깨에 거의 얼굴을 파묻다시피 하고 잠들어 있었는데, 그것이 꼭 하얀 토끼나 무엇이나 하여간에 자그마한 동물이 안겨 있는 것 같아 귀엽기 짝이 없었다. 이한은 순간 볼을 찔러보고 속눈썹을 간질여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몸이 다 낫지도 않은 사람을 밤새 몰아붙였으니 잠이라도 푹 자게 해야 할 것 같아 꾹 참았다.
물론 감은 눈 위로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는 일까지는 참지 못했지만.
밤새 울어 붉게 짓무른 눈가에 몇 번이나 입술을 내리던 이한이 이내 화운을 품으로 조금 더 당겨 안고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화운과 자신 사이의 문제는 이제 해결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외에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들이 아직 많았다.
이한은 먼저, 이미 한참 전에 죽은 본래의 연화운을 떠올렸다. 아무리 사사건건 악독한 일을 벌여 종국에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 되었어도 아무도 모르게 홀로 죽음을 맞이한 걸 떠올리면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황제의 온전하고도 유일한 연심을 오로지 자신에게만 달라고 악을 쓰던 ‘연화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 이한 자신의 생각은 어떠했던가. 연화운 개인에 대한 감정은 말할 것도 없이 최악이었음은 물론이오, 과거의 이한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가 한 개인에게 사사로이 특별한 감정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랬던 이한이 이제는 바로 그 ‘연화운’의 외형을 하고 있는 한 사내 때문에 울고, 웃고, 그 하나를 위해 자신의 오랜 신념마저도 꺾어버리게 되었으니. 죽음을 알아주는 이가 없어 ‘연화운’의 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면 지금 이런 상황을 어찌 보고 있을까.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오랫동안 화운이 혼자 앓고 있던 무거운 마음의 짐을 이제는 황제가 나누어 지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으음….”
그때, 이한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던 화운이 작은 신음을 터트리며 몸을 뒤척였다. 이한이 반사적으로 쉬이, 하고 달래며 등을 토닥여 주자 화운이 자연스럽게 이한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이한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최대한 화운이 불편하지 않게 자세를 고쳐 그를 안은 이한은 기분 좋은 속도로 울려오는 화운의 심장 박동을 느꼈다.
마음이 무거운 일과, 처리가 어려운 일은 아직도 분명히 남아 있었다. 이것을 하나하나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는 정말로 치열하게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품에는 이토록 사랑스러운, 단연코 하나뿐인 사람이 있어서.
이한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품 안의 이 사람만 곁에 있어 준다면 다른 건 어떻게든 해결해 나갈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