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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64)화 (164/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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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느냐.”

이한은 최근에 느꼈던 모든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무색할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제야 제 앞에 잇는 이가 환상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화운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이한이 조심스럽게 그를 부축했다. 이한의 손이 닿은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몸을 웅크리며 화운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어찌… 어찌 예에 계시는지….”

황제에게 모든 사실을 고할 적에 이미 다시는 그분의 용안을 뵙지 못할 것을 각오하였던 화운이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황제가 아닌 그 누구라도 이렇게 자신을 기만한 사람을 다시 보고 싶진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건 분명 환상도, 무엇도 아닌 황제 폐하였다. 화운은 일어나 인사를 올려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이한을 바라보았다. 매일 폐하께서 주신 서신을 읽고 또 읽으며 그리워하였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으니 눈치도 없이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비록 내쳐지기를 각오하였으나, 이렇게까지 그분이 그리워 견디기 힘들 줄은 미처 몰랐다. 어차피 홀로 황제를 그리워하던 건 과거의 제가 줄곧 해오던 익숙한 일이었으니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막상 마주한 현실은 전혀 달랐다.

단 하루조차 힘들었다. 오늘은 아니 오시려나 보다, 하는 감정이 아니라 앞으로 영영 찾지 않으실 거라 생각하니 하룻밤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서정궁 아이들의 앞에서는 줄곧 괜찮은 척을 했지만 사실 화운은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견디기 힘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런 고통이 죽는 날까지 영영 끝나지 않으면 어쩌나, 남은 일생을 이마만큼의 그리움을 견뎌내며 살아야 하면 어쩌나, 화운은 처음으로 그러한 것들이 진심으로 두려웠다.

“제가…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그런데 지금 눈앞에 황제가 있었다. 화운은 혹시라도 이게 꿈일까 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만약 꿈이라고 한다면 평생토록 깨고 싶지 않았다.

이한은 대답 대신 아주 깊게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믿기 힘든 사실이 그의 안에 혼재되어 있었지만 연화운을 눈앞에 두자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괜찮아진 것처럼 느껴져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오래 지난 것도 아닌데 벌써 어떻게 그를 이 궁에 가두고 찾지 않을 수가 있었는지 믿기 힘들었다.

한참 만에 이한이 입을 열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

“네가 정말 미치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연화운이 아니라 하운….”

황제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을 때 화운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으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운아, 하고 다정하게 불러주시는 목소리에 멋대로 제가 불린 것처럼 위안을 삼았던 적은 있었으나 실제로 폐하께서 그 이름을 제대로 입에 담아주신 건 처음이었다. 심장이 너무 거세게 뛰어 귀가 다 멍멍할 지경이었다. 화운이 그 자리에서 숨을 헐떡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이 이한은 말을 이었다.

“하운이라고 하는 시위인지. 솔직히 아직도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어.”

당연한 일이다. 화운 역시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 아니었다면 믿기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솔직히 ‘연화운’이 연씨 집안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미친 사람이라 내쫓겼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화운은 묵묵히 이한의 말을 듣고 있었다. 폐하께서 다시 찾아주신 것을 좋게 여겨도 될지, 아니면 마지막 자비로 여겨야 할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고민을 하면 할수록,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

“네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보다 내 밤을 더더욱 힘들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이한은 다시 되돌리기도 싫은 밤들을 떠올렸다. 호흡을 하는 것조차 고통이기만 하던 끔찍한 시간들 동안 이한을 가장 힘들게 했던 질문들이 이 순간에도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한은 창백한 화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눈을 마주쳤다. 자신이 얼마나 진심인지, 이 순간이 얼마나 절박한지 그가 알아주길 바라며 이불만 꼭 쥐고 있던 화운의 손을 잡았다. 놀란 화운이 손을 빼내려 했으나 놓아주지 않았다. 이한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화운을 흔들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다시 묻겠다.”

이한의 목소리가 속절없이 떨렸다. 자신이 진짜로 좋아했던 이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이한이 지금 눈앞에 있는 이와 사랑에 빠진 순간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어느 날, 어느 시를 명시할 순 없지만 그가 물에 빠져 다른 사람이 된 이후라는 건 헷갈릴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일이다. 그러니 연화운이 미쳤다면 이한은 미친 그를 사랑한 것이고, 그가 ‘하운’이라면 이한은 분명, 그 ‘하운’이라는 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한은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 것은 제쳐두고 오로지 확신하지 못한 한 가지를 묻기로 했다.

“운아.”

그건 이전과 같은 애칭이었으나 결코 그때와 같은 무게가 아니었다.

“정말로… 정말로 너는 내게 진심이 아니었느냐.”

“…….”

“연심은 오로지 나 혼자만 가지고 있던 감정이었던 것이냐.”

몇 번이나 내면에 있는 자신을 알아 달라 그토록 절절하게 묻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저를 버리지 말아 달라 애원하던 그 모든 것은 정말로, 정말로 아무 의미 없는 연기일 뿐이었느냐.

이한은 작은 손을 쥔 자신의 손에 힘을 주곤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우습게도 그가 자신을 가엽게 여겨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비참하고 구차한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대로 화운을 잃는 것보다 더 비참한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황제는 태양 같은 위엄으로 만물을 내려다보는 천자이지만, 여기에 있는 성이한은 한 사람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보잘것없는 사내에 불과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에 담은 이 사람이 죽는 날까지 유일한 자신의 정인일 것임을 이한은 확신했다. 어떤 식으로든 연화운을 잃으면 이한은 제 남은 삶이 어머니의 불행을 닮아 가리라고 생각했다. 황제로서의 자리를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은 거기까지였다. 성이한은 영영 그와 함께 행복하였던 날들에 붙들려 오로지 그날들만 반복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이한은 가진 모든 서럽고 처량한 마음을 전부 내보이며 화운에게 매달렸다.

“네가 정녕 나를 너의 황제로 인정한다면.”

“폐하….”

“내가 네게 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였는지 네가 조금이라도 안다면.”

화운은 애원하고 싶었다. 더 이상 황제가 자신을 이렇게 밀어붙이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이한은 멈추지 않고 곧장 화운에게로 걷고 또 걸었다.

“…딱 한 번만 네 진심을 솔직하게 말해다오.”


가끔은 하지 말아야 하는 수만 가지의 이유를 두고서도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선택을 하게 될 때가 있다. 화운, 아니 하운에게는 그것이 황궁으로 들어오는 일이었다. 삶에 있어서 좀처럼 모험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 어느 천민이, 욕심을 가져본 적이 없고 미래를 꿈꿔본 적이 없는 한 사내가, 오로지 한 사람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불확실한 미래에 몸을 던졌다. 하운은 아마도 그 일이 제 생에 유일한 한 번의 선택이 될 거라 여겼다.

그리고 지금 여기, 이제는 연화운이 되어버린 사내는 생각했다.

자신이 천한 존재라서, 죄인이라서, 그분을 뻔뻔하게 속여 왔던 배신자라서.

황제 폐하는 너무나도 자애로우신 분이라서. 마음이 여리고 다정한 분이시라서.

지금이라도 그분이 원하는 답을 내놓는다면 분명 자신을 어떻게든 용서하려 애쓰실 분이시라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

그 모든 것이 바로 이 자리에서 화운이 제 마음을 전부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안 되는 이유였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최악인 사람이어서는 안 됐다. 염치가 있는 인간이라면 이제라도 황제 폐하의 귀한 마음을 돌려드려야 함을 알고 있었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하지만 눈앞의 이한은 자꾸만 말했다.

“네가 나에게 정체를 숨겼든 무엇을 했든 그런 건 전부 차치해버리고.”

나는 그것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나는 네가 해야 할 말을 묻는 것이 아니라고.

“…운아. 너는 나를 은애하느냐.”

이한은 그저 화운의 마음을 묻고 또 물었다.

“…….”

저는 폐하를 은애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폐하를 모신 것뿐이니 죄인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화운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눈을 딱 감고 그 말 한마디를 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일 테다. 화운의 진심은 오로지 그 자신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누군가 짐작했다고 한들 당사자가 아니라고 부인하면 누가 그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가 있단 말인가. 애초에 화운은 황제 폐하께, 그리고 죽은 연화운에게 지은 죄를 받기 위해 모든 것을 고했으니 오롯이 죄인으로 남기 위해서 화운에게 허락된 말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폐하, 저는….”

화운은 이한에게 잡혀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이한의 표정이 순식간에 허물어졌으나 화운은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저는… 폐하, 저는….”

몇 번이나 그를 부를수록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황제 폐하를 처음 보았던, 그 태양처럼 찬란했던 날과 새로운 몸으로 그분을 다시 마주하였던 모든 날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화운은 제 옷자락을 움켜쥐고, 입술을 한번 꽉 깨물었다. 지난 생에는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온전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는 혼(魂)이 이윽고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

“이 미천한 자가 감히….”

가서는 안 될 이유가 만 가지 가득한 길로,

“제가 감히… 감히 폐하를 연모하였나이다….”

오로지 단 한 가지 마음을 손에 쥔 채로 그 혼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주제를 모르는 이 죄인을 부디 벌하여 주시옵소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게는 성이한이 단 하나의 욕심이자 유일하게 원하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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