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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단번에 흔들리게 할 수 있는지 실감한 이한은 크게 숨을 내쉬어 스스로의 마음을 가다듬고 서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의 임무는 서정궁에 사람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헌데 어찌 나를 찾아와 서정궁의 이름을 뱉는 것이지?”
음성에는 사위를 찍어 누르는 위엄이 가득했다. 황제란 본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세상만물의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힘이 있는데, 그런 존재가 부러 목소리 가득 힘을 실어 말을 하였을 때 그 음성이 얼마나 사람을 두렵게 만들지는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일이다. 서천은 자신을 향한 황제의 목소리에 불쾌함을 넘어선 분노가 어려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서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황제가 자신에게 끌어내 매질을 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지금 서천에게 중요한 건 오로지 연빈마마를 구하는 일뿐이었다. 서천은 이미 한번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홀로 힘든 시간을 보내도록 내버려 두었다. 두 번은 안 될 말이었다.
서천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 연빈마마께서 현재 매우 위독한 상태라고 합니다.”
“뭐?”
이한이 거의 일어나다시피 몸을 앞으로 굽히며 되물었다. 깊은 밤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가 순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화운이 위독하다는 말이 이명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서천이 말을 이었다.
“측근궁녀의 말로는 이미 앓아누운 것이 한참 전인데 오늘은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는 것이 보통 위중한 게 아닌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서천의 말이 한 마디 한 마디 이어질 때마다 황제는 그 말끝이 화살이 되어 제 심장을 관통하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한 사람처럼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죄를 고하던 연화운의 작은 몸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연못에 빠지고 난 후 제대로 몸조리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서천의 말이 이어졌다.
“폐하께서 명을 내리시어 궁녀를 밖으로 내보내지는 못하였으나 행여나 연빈마마께서 크게 잘못되신다면 저희가 어찌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여 이리 방자하게 폐하의 앞을 가로막은 소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서천이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허리를 굽혀 머리를 조아렸다.
이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천의 등을 노려보았으나 사실 그는 서천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한은 연화운을 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홀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화운의 모습이 마치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어찌 이리 뻔뻔하고 방자한 자가 있단 말인가. 제게 그토록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해놓고. 이렇게까지 진심이었던 자신을 여태 속여 놓고. 그 마음이 야속하여서. 마지막까지 한번 저를 붙잡아 매달리지도 않던 그 마음이 서러워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서 잠시 그를 밀어내었을 뿐인데 연화운은 그조차도 참아주지 않고 이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다니. 이한은 정말로 그가 야속하고 야속해 체통이고 뭐고 다 버리고 울음이라도 터트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저 ‘서천’이라는 자를 통해 듣게 한 것까지 모든 것이 전부 다 엉망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몰아쉬는 황제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돌아가라.”
한참 만에, 이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저 돌아가라, 그 한 마디였다.
“폐하!”
“돌아가라고 하였다!”
이어지는 명령이 없어 당황한 서천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으나 불같이 기세를 일으킨 황제가 목소리를 높여 서천의 말을 막았다.
“…너의 말은 잘 알았으니 돌아가거라. 더 상황을 악화시키지 말고.”
“…….”
“그날에도, 지금도, 내가 너를 필사적으로 참아주고 있음을 잊지 마라.”
이한의 목소리는 한겨울의 공기마저도 얼려버릴 듯 차가웠다. 서천은 무어라 더 말을 이으려 입을 벙긋거렸으나 한발 앞서 오 태감이 서천에게 눈짓을 하며 다시 한 번 그 말을 막았다. 그제야 여기서 자신이 더 나서면 하운, 아니 이제는 연빈마마가 된 그분에게도 이로울 것이 하나 없다는 판단을 한 서천은 입술을 한번 꾹 깨물고는 천천히 허리를 다시 굽혔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 폐하.”
서천의 인사와 함께 이한의 가마가 다시 움직였다. 이한은 당장이라도 서천을 다시 불러 너는 알고 있었느냐고, 나보다 먼저 그의 비밀을 그에게 들었느냐고, 그렇게 묻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으며 애써 앞을 바라보았다. 거슬리는 사내를 지나치고 나자 또다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연화운의 모습이 떠올랐다. 연화운이 자신에게 이렇게도 잔인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이한이 오 태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서정궁으로 태의를 보내라.”
“…예, 폐하.”
“그리고.”
이한은 잠시 말을 멈췄다. 사실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지난 며칠의 밤이 떠올랐다. 단순히 혼란스럽다거나, 배신감을 느꼈다거나, 연화운의 마음이 제게 없는 것 같아 두려웠던 것뿐만이 아니라 사실 성이한의 밤을 가장 괴롭게 만들었던 건 그리움이었다.
연화운이 보고 싶었다. 그가 진짜 누군지 그딴 것은 하나도 상관없다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이한은 화운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제게는 언제나 온화하고 따사롭기만 하였던 얼굴이. 사실은 죄책감과 외로움으로 점철되었을 밤과 싸우면서도 제 앞에 서면 언제나 온기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담아 주었던 눈동자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한은 그제야, 자신에게는 애초에 단 하나의 길밖에 허락되어 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치열하게 고민했다고 생각했던 며칠의 시간은 사실 서러워 부리는 투정에 지나지 않았다.
“…서정궁으로 가자.”
그리하여 마침내, 황제께서 말씀하셨다. 오 태감은 두 번 묻지 않고 그저 가마를 돌릴 뿐이었다.
화운은 어쩌면 제가 아직 물에 빠진 상태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온몸은 너무 무거웠고 눈을 뜨려고 해보아도 온통 물이 차 있는 것처럼 앞이 젖어 일렁였다. 아주 추운 것 같기도 했다가, 또 불덩이를 속에 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유도 모른 채 슬픈 감정이 북받쳐 화운은 그냥 내쉬기도 버거운 숨을 자꾸만 들썩였다.
“운아.”
목소리가 들린 건 그 순간이었다. 화운은 저도 모르게 숨을 흡, 하고 들이마셨다. 그것은 결코 다시 듣기는 힘들 거라 여겼던 음성이었다. 환청일까. 아니면 꿈인가. 화운은 눈을 뜨려 애쓰며 팔을 들었다. 앞에 아른거리는 형체를 잡고 싶었다. 손에 쥐면 사라질 환상이라고 하더라도 그분을 따스한 온기 하나를 얻고 싶어 바보처럼 내밀게 되는 손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
그때, 아주 뜨거운 체온이 허공에서 떨리기만 하던 화운의 손을 굳세게 잡아왔다. 갑작스러운 열기는 마치 고통처럼 강렬하여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른 화운이 눈을 깊이 감았다 떴다. 뺨으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며 흐릿하기만 하던 시야가 밝아졌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결코 사라지지 않는 모습으로 황제 성이한이 있었다.
비가 내렸다. 이한은 거기에 앉아서 빗소리를 들으며 한참 동안 연화운의 얼굴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태의가 진맥을 보고 침을 놓고 약을 먹이고 나서도 화운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앓았다. 의미 없이 끙끙 앓는 소리들 사이사이에서도 읽을 수 있는 말이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폐하’라는 말뿐이었다. 마치 제게 남은 말은 오로지 그 단어 하나뿐인 사람처럼.
이한은 거기에 앉아 도울 수 없는 화운의 고통을 지켜보며, 제게도 지옥과 같았던 지난날들을 가만히 더듬어 보았다.
처음엔 화가 나고 절망스러워 다른 생각이 전혀 나질 않았다. 자신을 향한 연화운의 마음이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니 가정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와 연화운의 마음 같은 건 헤아려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연화운이 괘씸하고 야속한 마음보다 그가 그리운 마음이 점점 더 크기를 키우면 키울수록. 이한은 연화운이 제게 보여주었던 많은 모습들을 떠올렸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얼굴을 하다가도 두려운 얼굴을 했다. 분명히 모든 것이 좋아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불쑥불쑥 서글픈 얼굴을 해 이한이 어찌 그런 얼굴을 하느냐 물었던 일도 여러 번이었다. 가끔은 이해할 수 없이 아득한 얼굴을 해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처럼 보여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했던 건 또 몇 번이었나.
어느 날은 또 그렇게 묻기도 했다. 제가 다른 사람이라면 어떠하시겠느냐고. 제 손이 지금보다 크고 거칠었다면, 제 얼굴이 지금보다 남자답고 체격이 컸다면, 그랬어도 폐하께서는 저를 이리 봐주시겠느냐고. 연화운은 마치 자신이 지금 이 얼굴이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한에게 자꾸만 그런 것을 묻고 또 물었다.
이한은 그것이 단지 그가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었다. 사실 연화운은 내도록 이한을 향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서. 온전한 자신의 모습으로 이한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그는 그토록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고 있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