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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62)화 (16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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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약 좀 드셔 보세요.”

아진은 기운이 하나도 없는 화운의 몸을 부축해 제 품에 기대어 앉게 하고는, 앞에서 약그릇을 든 채 울먹이고 있는 서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코를 훌쩍이며 그릇을 전해주던 서서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태의는 부를 수 있게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마마께서 몸이 약하신 것도 다 아시면서!”

빈 쟁반을 두 손으로 꽉 쥔 서서는 드물게 화가 난 표정이었다.

궁에 연금된 후, 매일 조금씩 말라가던 화운의 몸이 오늘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리 되기 전에 벌써 태의를 불러 진맥을 받았을 텐데 누구든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전부 막혀 있으니 도리가 없었다. 아쉬운 대로 이전에 받아 놓았던 약재를 달여 드시게 했지만 차도는 없었고 그마저도 이제는 남은 것이 없어 정빈이 보내온 몸을 보양하는 약에 기대고 있는 실정이었다.

온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운데 화운은 얼음 속에 있는 것처럼 덜덜 떨었다. 아파서인지, 악몽을 꾸는지 연신 흘리는 눈물 때문에 눈가는 발갛게 짓물러선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데 당장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약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화운에게 조금씩 천천히 약을 겨우 넘겨준 아진이 조심스럽게 화운을 다시 눕히곤 몸을 일으켰다. 말없이 화운을 내려다보는 아진의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마마께서 계속 안 좋아지시면 어떻게 해요, 언니? 네?”

불안에 떨며 서서가 물었다. 이제는 폐하께서 매일같이 제 주인의 침실에 머무시니 고생은 전부 다 끝났다고. 앞으로는 우리 마마께 행복한 일들만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서서는 그토록 다정하고 자애로우신 폐하께서 마마를 이렇게 외면하고 계시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서서.”

그때, 여태 어떤 대답도 없이 화운의 얼굴을 보고 있기만 하던 아진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무겁고 비장한지, 서서는 방금까지 칭얼거리던 것을 멈추고 아진을 보았다.

“마마를 잘 보살펴드려.”

“언니…?”

“나 잠시만 나갔다 올게.”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서서가 본능적인 불안함을 느끼며 아진의 손목을 붙들었다.

“가,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요, 언니. 폐하의 명으로 나갈 수가 없잖아요….”

“서서. 만약에 내가 없으면 마마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야 할 사람은 너야. 알고 있지?”

“왜… 왜 그런 얘기를 해요. 언니가 왜 없는데요….”

서서는 이제 아주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진은 무언가를 단단히 결심한 사람 같았다. 그것이 결코 좋은 일은 아닐 거라는 걸 서서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진은 제 손목을 잡고 있는 서서의 손을 세게 붙들곤 말했다.

“서서. 나는 지금의 마마 덕분에 지옥에서 구해진 사람이야. 그러니까 마마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해.”

“같이… 같이 해요, 언니. 응? 우리 마마를 곁에서 잘 모시면 되잖아요.”

아진의 시선이 다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화운에게 향했다. 물론 이렇게 조금 앓다가 나아지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몸이 약한 화운을 곁에서 오래 지켜보았던 아진의 감이 당장 태의를 불러오지 않으면 크게 위험하실 거란 경고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아진은 의원이 아니니 그것은 단지 불안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화운의 생명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만큼은 안일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태의를 불러올게. 마마를 잘 모시고 있어.”

아진은 서서의 손을 다시 한 번 꾹 쥐었다 놓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침실을 빠져나갔다.


“아진 낭자, 제발 진정하십시오. 어찌 이리 무모하게 행동한단 말입니까.”

자문은 사색이 된 채로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아진을 진정시키려 애쓰면 말했다. 하지만 정작 그 앞의 아진의 얼굴은 너무나도 침착해 표정만 봐서는 단도를 쥔 채 스스로의 목을 겨누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칼끝이 닿은 목에 피가 맺히기 시작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아진이 말했다.

“마마께서 위독하십니다. 이대로 두면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요.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내보내 주십시오. 아니면 이 앞에서 자결이라도 하여 폐하께 알릴 것이니.”

“아진 낭자, 일단 그러지 말고 얘기를 좀…!”

“서정궁의 시위들도 그동안 연빈마마께 받은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리 난동을 피운 것을 아시면 폐하께서도 저를 내보낸 일로 큰 벌을 내리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한 번만 저를 좀 내보내 주십…!”

하지만 아진의 말은 제대로 끝을 맺지 못했다. 강한 힘이 순식간에 아진의 손목을 후려쳤고 들고 있던 단도가 바탕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통증이 느껴지는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감싸고 아진이 고개를 돌리자, 무심한 얼굴을 한 서천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검집에서 빼지 않은 검이 들려 있었다.

“서천 시위!”

“태의를 부른다고 해도 폐하의 허락이 없는 한 그는 절대로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겁니다. 허면 나가서 폐하께 읍소라도 할 생각입니까.”

“무엇이라도 해봐야지요! 이대로 마마께서 잘못되시면 어차피 저도 죽은 목숨입니다.”

아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천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폐하께서 친히 명하신 일인데 자신을 멋대로 내보냈다가는 어떤 벌을 받을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진은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이렇게 마마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폐하께서는 비록 오해를 하셨다 하더라도 이렇게 아프신 마마를 그냥 무시하실 분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진은 반드시 폐하를 만나야 했다.

그때, 서천이 입을 열었다.

“아진 낭자가 나가면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전부 다 연루될 겁니다.”

“…….

”…제가 다녀올 테니 아진 낭자는 연빈마마 곁을 지켜 주시지요.”

“서천… 시위가요?”

“서천!”

당황한 자문에 큰 소리로 서천의 이름을 불렀다. 이전에도 연빈과 관련된 일이라면 이상하게 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건 정말 도가 지나친 일이었다. 하지만 서천은 자문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아진을 응시할 뿐이었다.

아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 놀라기도 했지만 그보다 서천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싶었다. 만약 이렇게 나서준 것이 서천이 아니었다면 엎드려 절이라도 할 상황이었으나 지난번 연빈마마의 상태를 물으며 그가 보여주었던 눈빛이 마음이 걸렸다. 아진이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자 서천이 말을 이었다.

“아진 낭자가 연빈마마께서 위독하시다는 말을 하였는데, 그대로 놓아두면 혹시라도 마마께 큰일이 생길까 염려가 되어 감히 전하러 왔다 고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하면 되겠는지요.”

“…네. 고맙습니다. 부탁드려요.”

결국 아진은 고개를 숙이며 서천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기는 했으나 지금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무슨 대가를 치르든 우선은 주인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서천은 아진에게 목례를 하곤 그대로 몸을 돌려 서정궁 밖으로 나섰다. 아진은 불안한 눈빛으로 서천이 나간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어가가 지나가는 길에, 천민 출신의 시위 하나가 무릎을 꿇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천이었다. 호위들이 곧바로 어가 앞을 막아서며 검을 쥐고 서천을 경계했다. 이한이 살짝 손을 들자 가마가 멈췄고 오 태감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감히 어느 놈이 폐하의 길을 막아서느냐! 죽고 싶은 것이냐!”

“폐하! 소인은 서정궁을 지키는 시위입니다!”

피곤한 얼굴로 가마에 깊이 몸을 기대고 있던 이한이 서정궁이라는 말에 허리를 곧추세우며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시위를 응시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이놈이 그래도 어느 안전이라고!”

“됐다.”

한 번 더 고함을 치는 오 태감을 물러나게 만든 건 지극히 낮고 무거운 황제의 목소리였다. 이내 황제가 말을 이었다.

“고개를 들어라.”

황제의 명에 서천이 시선은 여전히 바닥에 둔 채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을 먼저 알아본 오 태감이 ‘너는…!’ 하고 알은척을 했으나 그는 동요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서천의 얼굴을 응시하던 이한이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저자를 언제, 어디에서 보았는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이름을 누구의 입에서 다시 한 번 들었는지도.

갑자기 속에서 불길이 확 번져 나왔다. 서천, 하고 그 이름을 외치던 연화운의 목소리가 똑똑히 기억났다. 연화운이 자신이 ‘하운’으로 살아가던 시절에 관사에서 함께 지냈던 이들을 고할 때 분명히 그 이름을 들은 바가 있었다. 게다가 그는 화운이 연못에 빠졌을 때 구했던 자이기도 했다.

순간적으로 저자는 이미 알고 있었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나도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을 저자에게는 이미 털어놓았던 걸까. 그래서 저자는 하운을 죽음에 이르게 한 연화운을 구하고, 지금 이 자리에 감히 서정궁을 들먹거리며 자신의 앞에 있는 걸까.

팔걸이를 쥔 이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온몸에 열이 올랐다. 당장 가마에서 뛰어내려 저자의 멱살을 쥐고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이한은 불현듯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화운이 정말 그에게 먼저 모든 것을 밝혔다는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단지 가정만으로도 이 정도의 분노를 느꼈다니. 제아무리 총애하는 후궁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결코 선황처럼은 되지 않을 거라 자신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불안으로 허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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