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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무가내로 우기는 송현 때문에 시위는 거의 울음을 터트릴 지경이었다. 천민 출신인 그는 서정궁의 주인인 연빈마마를 제외하고는 높으신 분과 개인적으로 말을 섞은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보통의 신분이라면 폐하께서 명하신 일을 수행하는 것이니 이렇게까지 주눅 들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그는 상황이 달랐다. 괜히 가운데에서 자신만 등골 터지는 건 아닐까 싶어 시위는 정빈이 가져온 물건들을 받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강경하게 거부하지도 못한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정말 이리 답답하게 굴 것이냐!”
“정빈마마, 제게 주십시오.”
안 그래도 연빈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요즘 애가 타는 송현은 융통성 없이 구는 시위 때문에 답지 않게 눈꼬리를 삐죽 올리며 신경질을 냈다. 그때, 곁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송현이 고개를 돌리자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시위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서천이었다.
“제가 잘 전달하겠습니다.”
“너, 너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서천의 얼굴을 살피던 송현은 이내 그를 어디에서 보았는지 기억해냈다. 연빈이 연못에 빠졌던 날 서정궁 내관이 고발하였던 자였다. 송현은 얼굴에 의심의 빛이 어렸다. 그날 일이 어떻게 밝혀졌는지는 아직 들은 바가 없었다. 곧장 연빈이 서정궁에 연금되었기 때문이었다. 송현의 시선을 받는 서천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미동이 없었다.
입술을 씰룩거리며 굳게 닫힌 서정궁의 문을 노려보던 송현이 곧 곁에 있는 내관에게 눈짓을 했다. 내관의 품에 들려 있던 상자를 서천이 받아 들었다. 여전히 찝찝함을 다 버리지 못한 음성으로 송현이 말했다.
“그냥 몸에 좋은 것을 좀 챙긴 것뿐이다. 걱정 말고 전해다오. 만에 하나라도 폐하께서 물으시면 내가 자네들을 겁박했다 할 것이니.”
“예, 정빈마마. 책임지고 연빈마마께 잘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서천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닌 연빈의 연못 사건에 연루된 자라는 게 마음에 조금 걸리긴 하였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어쨌든 연빈이 그때 실수로 연못에 빠진 것이라 밝히기도 하였고, 정말 문제가 없으니까 여태 서정궁에 머물도록 했겠지 싶은 마음으로 송현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오늘의 일을 잊지 않도록 하마.”
“살펴 가십시오, 정빈마마.”
서천의 인사를 받은 송현은 닫힌 문을 다시 한 번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곤 몸을 돌렸다. 송현은 이 일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몰랐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황제 폐하께서 잘못하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랬다.
“그걸 정말 전해드리려고?”
서천이 서정궁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막으며 조금 전 정빈과 실랑이를 벌이던 시위인 고준이 물었다. 서천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 내리고는 대답했다.
“응. 나는 어차피 안에서 보초를 서야 하니 들어가서 전해드려야지.”
“그러다가 폐하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어쩌려구…!”
정빈은 물건도 들이지 말란 말은 없었지 않느냐고 우겼으나 그게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건 머리가 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고준이 생각할 때 정빈이야 후궁의 몸이니 들켜도 큰 처벌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들 같은 천한 신분은 오히려 정빈의 죄까지 전부 떠안아 벌을 받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혀 흔들리는 표정이 아닌 서천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너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으로 해.”
“아니, 그게 아니라, 야! 서천!”
그리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서천에게 고준이 목소리를 높였으나 서천은 대답 없이 문을 도로 닫아버릴 뿐이었다.
“어휴, 나도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 건지. 더 할 수 있는 게 없는 고준은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오 태감도 따라오지 마라 물리고, 이한은 홀로 하염없이 물길을 따라 후원을 걷고 있었다. 도무지 잡생각이 떠나지가 않아 기분을 환기시킬 겸 나온 것이지만 아무리 녹이 우거진 풍경을 보고 또 보아도 도무지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세상이 온통 색을 잃은 것 같았다. 한여름의 명하원은 주안성의 어디와 비교해 보아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궁이건만 지금 이한의 눈에는 모조리 볼품없이 초라해 보이기만 했다.
문득 답답하고 서러운 감정과 함께 야속한 마음이 터져 나왔다. 처음부터 자신을 속인 것이면 끝까지 모른 척을 할 것이지 왜 이제 와 이런 말을 하여 수많은 번민을 뒤로하고 겨우 손에 얻은 행복을 이토록 산산조각 낸 건지, 심지어는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황제의 발걸음이 불현듯 멈춘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도대체 왜, 말한 거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말 그대로, 도대체 연화운은 왜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린 걸까.
그대로 두었다면 아무도 모른 채 묻혔을 일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연화운의 몸에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갔느니 무어니 하는 의심을 할까. 게다가 이한은 이미 그에게 온 마음을 다 내어주어 고백까지 하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설령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입 밖으로 쉽게 내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연화운은 굳이 이한에게 제 입으로 모든 사실을 고했다. 이득을 얻기는커녕 겨우 얻은 총애며 권력을 전부 잃어버릴 게 뻔한데도 말이다. 그가 정말 권력이나 재물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꾸미고 거짓으로 행동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 일을 밝힐 이유가 없었다.
“…….”
멈춰 선 이한의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몇 가지 없었다.
누군가에게 들켜 겁박을 받고 있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죄책감에 스스로 견딜 수가 없었거나.
황제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그의 등을 떠밀어 진실을 고하게 만든 거라면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모든 사건을 설명할 수 있었다.
“정말… 연화운이 아니라는 건가….”
정말 연화운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로 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토록 악독하게 굴었던 이가 황제의 연심을 얻은 지금 갑자기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양심 때문에 진실을 말한다? 그건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연화운은 정말로 그 자신이 고한 대로 다른 사람이라는 말인가.
어느 밤.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 울던 화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한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다시 내디디려던 걸음을 다시 붙들고는 그저 한참 동안 거기에 서 있을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서천 시위.”
아진은 정빈이 전해주고 같다는 물건들을 서천에게 받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이리도 단호하게 서정궁의 문을 걸어 잠갔으니 어쩌면 다른 비빈들도 서정궁을 모른 척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 주었다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일이었다.
“서천 시위가 지난번 마마를 구해주었다 들었는데 이렇게 어려운 일까지 해주시다니.”
“별거 아닌 일이었습니다.”
“분명 마마께서 잊지 않고 후에 전부 갚아주실 것입니다.”
아진은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소정이 왜 갑자기 서정궁에서 나가게 됐는지도 몰랐다. 화운은 그냥 일이 그렇게 되었다는 말뿐 더 자세한 것은 알려주시지 않았고, 이후에는 이런 큰일이 생겨버려 더 깊이 묻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마마께서 자신을 구해준 것이 서천이었다고 하니 아진으로서도 그에게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헌데….”
그때,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려는 아진의 걸음을 서천이 붙들었다. 돌아선 아진의 눈에 무척이나 망설이는 듯한 서천의 얼굴이 보였다. 이내, 서천이 말을 이었다.
“연빈마마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아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천을 바라보는 시선에 일순 경계하는 빛이 어렸다. 마마께서 괜찮으시냐 묻는 서천의 얼굴이 지나치게 애틋해 보였기 때문이다. 시위가 굳이 후궁의 상태를 대놓고 염려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거니와 그의 목소리며 눈동자에는 단순한 염려로 보기엔 과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그것은 서천 시위가 걱정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
“마마를 모시는 건 저희 일이니 염려 마시지요.”
이곳은 황궁이고, 후궁들은 모두 황제의 사람이었다. 시위가 사사로이 후궁을 이토록 애틋하게 걱정하였다고 하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황궁에서 그 사실이 어떻게 부풀려지고 왜곡될지는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다. 서천이 다른 의도를 가지고 물은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애초에 의도 같은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곳이 바로 이곳, 황궁이다. 아진은 눈빛으로 마지막까지 그를 향해 경고를 하곤 서둘러 몸을 돌렸다. 안 그래도 마마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마주치지 않도록 각별히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잰걸음으로 저만치 멀어지는 아진을 보던 서천의 입술 사이로 그제야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번 일은 확실히 제 실수였다. 마음 같아선 정빈이 전해온 물건을 직접 가져가 그가 어찌하고 있는지 살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는 아쉬움에 저도 모르게 말이 헛나갔다.
하운아, 하고 그리운 이름 하나를 불러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은 채로 서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쨌든 이제 그는 하운이 아니라 연화운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굳이 과거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어 조금이라도 위험을 부추기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안 그래도 이미 큰일을 겪은 그가 연달아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속상하고 화가 나서. 그토록 그립고 그리웠던 이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쉬이 얼굴 한번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워서.
서천은 그저 서정궁의 전각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