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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60)화 (160/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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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황당한 방식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마음의 짐이 조금 가벼워진 자란이 말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황제 폐하는 마음을 주는 것에 서툴고, 연화운은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눈치가 없으니 이 일 역시 막상 들여다보면 별것 아닌 오해 때문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었다. 자란은 조금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화운의 손끝이 종이 끝을 애달프게 매만졌다. 마음 같아선 품에라도 안아보고 싶었지만 행여나 여린 종이가 상하기라도 할까 세게 만질 수도 없었다.

한 장 한 장 새겨진 마음들을 얼마나 읽고 또 읽었는지 이제는 눈을 감고도 전부 외울 수가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고도 아쉬워 화운은 자꾸만 그 글자들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다시는 더해지지 않을 멈춰버린 마음들이, 그러나 화운에게는 앞으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제 곁을 지켜주게 될 기억들이 바로 여기에 박제되어 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많이 서신을 적어볼걸. 아주 조금만 더 뻔뻔하게 굴어 단 몇 줄이라도 그분의 마음을 남겨놓을걸.

헛된 후회를 되뇌며 화운은 오로지 그것만이 자신에게 허락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러움을 삼켜 그 문장들을 마음에 담고 담았다.

“마마!”

“아진…?!”

아진이 높은 목소리로 화운을 부르며 침실로 들이닥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몇 번이나 불러도 안에서 대답이 없자 혹시나 마마께서 또 정신을 잃으신 건 아닌지 걱정이 된 아진이 급하게 들어온 것이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는지 화운은 그때까지 아진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침대에 앉아 있던 화운은 눈에 띄게 화들짝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걸 황급히 뒤로 감추었다. 제대로 다 숨겨지지 않아 옆으로 삐죽 튀어나온 종이뭉치를 본 아진의 표정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더 이상 마마의 앞에서 유난한 티를 내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화운이 홀로 침실에서 누가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들여다보고 있던 건 다름 아닌, 그간 황제 폐하께서 보내오신 서신이었다.

심장이 바닥까지 꺼져 내리는 듯한 감각을 애써 참아내며, 아진은 그 서신을 보지 못한 척 고개를 숙였다.

“마마. 밖에서 마마를 불렀는데 대답이 없으셔서 걱정이 되어 들어왔어요.”

“아… 미안. 내가 못 들었나 봐.”

“네, 그러셨나 봐요. 뭐 필요한 건 없으시구요?”

“응. 괜찮아.”

사실 이 순간 누구보다 가장 고통스러울 건 그 자신일 텐데도 화운은 아진을 향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아진의 눈에는 그 미소가 차라리 우는 것보다도 더 슬퍼 보였으나 마마께서 이리 힘겹게 버티고 계신데 제가 먼저 무너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진은 애써 마찬가지로 화운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마마. 그럼 나가 볼게요. 편하게 쉬세요.”

“그래…. 아, 아진. 잠깐만.”

그때, 돌아서는 아진을 이번에는 화운이 불러 세웠다. 아진이 몸을 돌리며 ‘네?’ 하고 묻자 화운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만약… 만약에 앞으로 내 녹봉이 깎인다고 해도… 당분간 전처럼 아이들에게 녹봉을 주는 건 문제없겠지…?

“…….”

“만에 하나 내가 녹봉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너희들은… 내무부를 통해 받을 수 있는 거지?”

애쓴 보람도 없이 아진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이들의 녹봉 같은 것을 먼저 걱정하고 있는 주인 앞에서는 도저히 허물어지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순식간에 젖어가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아진이 말했다.

“마마, 왜 그런 것을 걱정하세요. 폐하께서 어떤 오해를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마마께선 잘못한 게 없으시니 그게 무엇이든 금방 풀릴 거예요. 설령… 설령 그게 아니라고 해도….”

입꼬리를 올려 웃어야 하는데. 이까짓 것 조금 지나면 쉽게 풀릴 아무것도 아닌 일이니 괜히 마마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여서는 아니 되는데. 물색없는 눈물은 왜 자꾸만 차오르고 목소리는 왜 이렇게 떨려대는지. 아진은 한심한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어도 그런 건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마마께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아셨죠?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볼게요. 푹 쉬세요!”

종이 되어 주인이 계신 방을 나갈 때는 반드시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함을 알고 있지만 그대로 있다간 정말로 그 앞에서 펑펑 울며 황제 폐하를 향한 원망이라도 늘어놓을 것만 같아 아진은 화운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침실을 빠져나왔다.

“언니… 괜찮아요?”

뛰다시피 전각 앞으로 달려 나온 아진의 창백한 낯을 본 서서가 다가와 물었다. 아진은 눈물을 몇 번 떨궈내고는 소매로 남은 것을 힘주어 쓱쓱 닦고서 숨을 몇 번 크게 내쉰 뒤 서서를 향해 말했다.

“서서. 지금 서정궁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전부 다 불러와 줘. 내관들까지 전부.”

“…왜요?”

“할 말이 있어. 아주 중요한 말이니까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모아 줘.”

어딘지 모르게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아진의 말에 서서가 재빨리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진은 그 자리에 서서 주인의 침실을 돌아보았다.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가슴을 하고서 겨우 폐하께서 주신 서신을 손에 쥐고 슬픔을 견뎌내고 있을 가여운 주인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였다.

“언니. 아이들을 다 모아 왔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서서가 다가와 말했다. 아진은 뜰 앞에 모여 서 있는 궁인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정안궁에서 오래 함께 지내던 아이들이었다. 아진은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곤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최근의 일로 너희의 마음이 불안할 것을 모두 알고 있어.”

갑자기 아진이 왜 자신들을 부른 건지 몰라 다소 걱정되는 마음으로 자리에 왔던 이들이 아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진이 그런 이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잠시 폐하께서 마마를 오해하여 이런 일이 생겼으나 머지않아 해결이 될 것이야.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경고할게. 마마께서 이런 일을 당하셨다고 하여 누구라도, 너희 중에 누구라도 감히 마마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하려 들거나, 세 치 혀를 쉽게 놀려 허튼소리를 늘어놓는 이가 있으면 내가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알아들어?”

부러 할 수 있는 가장 날카롭고 딱딱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 일도 무사히 넘어갈 거라고 믿었지만, 아진은 모든 부분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했다. 폐하의 총애를 잃은 후궁이 자신의 처소에서 한낱 종들에게 알게 모르게 멸시를 받는 것은 이 황궁에서 찾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예전의 연빈이었다면 이런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황제의 총애가 없었어도 연빈에게는 아버지가 있었고, 설령 그것조차 없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코 천한 것들이 자신을 무시하도록 내버려 둘 위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연빈은 달랐다. 지금의 그는 아랫것들이 총애를 잃은 후궁이라 하여 은근슬쩍 방자하게 굴더라도 결코 그것을 벌하실 분이 아니었다. 아진의 걱정은 바로 거기에 기인하고 있었다.

헌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아진의 말을 듣고도 앞에 모인 이들이 다들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을 않고 있는 것이다. 아진의 낯빛이 더더욱 어두워졌다.

“…다들 왜 대답이 없어? 내 말을 따르지 않겠다는 뜻이야?”

한편으로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정안궁에 있던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나이가 어려 모두 순하고 얌전한 편이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예상한 대로만 흘러가는 법인가. 혹시라도 속으로 예전의 마마께 당한 일을 아직 품고 있는 이가 있다면 이번 일을 어떻게 이용하려 들지 알 수 없었다.

아진의 재촉에도 말이 없는 이들의 모습에 불안이 한층 고조되었을 때, 어린 궁녀 하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입을 열었다.

“언니는 무슨 당연한 말을 하세요? 저희도 다 보는 눈이 있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마음으로 느끼는 게 있는 사람들이에요.”

“……?”

“그간 마마께서 저희를 얼마나 귀하게 대해 주셨는데… 이깟 일로 저희가 마마를 무시할 거라고 여기다니요? 언니는 도대체 저희를 뭘로 보신 거예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마찬가지로 ‘맞아요!’, ‘당연한 말을 왜 이렇게 무섭게 하고 그러세요?’ 하고 맞장구치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긴장으로 뻣뻣해졌던 어깨가 그제야 노곤하게 풀리며 굳어진 아진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결국 이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던 거다. 비록 이전에는 정안궁에서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고초를 당했지만 그것은 지금과는 다른 연빈마마께 당한 일이었다고, 이들도 하나같이 그리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마마는 다른 분이시라고. 지금의 마마는 자신들에게 더없이 자애롭고, 관대하셨으며, 늘 곱고 어여쁘신 분이었다고. 그러니 우리도 그런 마마를 늘 최선을 다해 모실 거라고. 지금 아진을 향해 볼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들은 모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답답하기만 했던 마음에 그제야 아주 작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라, 결국 아진은 그들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누가 나를 들여보내 달랬느냐? 이것만 전해주면 된다질 않아!”

서정궁 외문 앞에서 소란이 일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시위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정빈, 송현이었다. 폐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하셨다고 버티는 시위에게 송현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푹 쉬며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러니까 폐하께서 사람을 들이지 말라고 하셨지, 이런 나무상자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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