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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59)화 (159/167)

159

황제의 측근태감이 되어서 폐하의 상태를 함부로 발설한다는 건 중죄에 속하는 일이나 작금의 황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설령 벌을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오 태감은 황후마마께서라도 나서 폐하를 살피실 수 있다면 기꺼이 벌을 받을 것이다. 자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선에게 눈짓을 했다. 선이 들고 온 찬합을 오 태감에게 넘기자 자란이 말했다.

“우선은 연자탕을 가져왔으니 폐하께 전해주게. 이후에 어찌할지는 나도 생각을 좀 해볼 테니.”

“예, 황후마마. 감사합니다.”

“폐하를 잘 부탁드리네.”

“성심을 다해 폐하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오 태감의 인사를 받으며 황후는 굳게 닫힌 대전의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이제는 제법 모든 관계가 제법 안정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폐하께서 이 정도로 동요하시는 걸까. 가마에 오르는 자란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과연 쉽게 조용해지지는 않는 황궁이었다.


이한은 대전에 우두커니 앉아 오늘 아침 조회 때 보았던 연주원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한은 그가 어떤 식으로든 이 일에 대해 말을 꺼내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아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모를 리가 없는데도 그는 달라 황제의 앞에서 다른 티를 내지 않았다. 다만 이한이 그의 깊은 눈동자에서 근심의 빛을 보았을 뿐.

말하지 않아도 분명 집안이 왈칵 뒤집혔을 것이다. 언제 그리 박대를 했냐는 듯 품에 얼러 총애를 쏟아부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하루아침에 그를 처소에 연금까지 해버리다니. 변덕도 이런 변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주원은 황제의 변덕을 탓하기는커녕 그 또한 사정이 있겠거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머리로는 그에게 무엇이라도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도대체 뭐라 말을 한단 말인가. 자네 아들이 스스로를 다른 사람이라고 우기고 있어 내가 그리 하였다는 말 같은 건 당연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한은 제게 깊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돌아나가는 주원의 쓸쓸한 발걸음을 차마 잡지 못했다.

그사이 황후에게 황제의 말을 전한 오 태감이 다가왔다. 이한은 그가 자신의 앞에 놓아주는 연자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황후는 돌아갔느냐.”

“…예, 폐하.”

“별다른 말은 없었고.”

“예. 그저 폐하의 옥체를 염려하실 뿐이었습니다.”

오 태감의 대답에 이한은 한숨을 한번 내쉬곤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감은 황제의 눈꺼풀 위로 깊은 피로가 내려앉았다.

밤새 조금도 잠을 자지 못했다. 술을 마셔도, 취해도 소용없었다. 눈을 감으면 연화운의 얼굴이, 그의 목소리가, 자신을 한번 붙잡지도 않던 그의 야속함이 떠올라 가슴이 찢어지고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아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속 시원하게 떠오르는 답이 없다. 연화운이 정말 그 ‘하운’이라는 자라는 것을 믿기는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단지 헛소리로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보통 이토록 밤을 괴롭게 하는 문제가 생기면 이전엔 늘 황후와 의논하곤 했으나 이 일은 황후에게도 쉽사리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연화운이 정말로 다른 사람이어도, 혹은 연화운이 정말 미친 것이라도. 어느 쪽도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황실의 체면이 상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거나, 황궁에 혼란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이한이 홀로 이렇게 속을 끓일지언정 누구에게도 이 일이 알려지지 않길 바라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이 일이 한번 외부로 퍼져나가게 되면 연화운은 온전히 황제의 후궁으로, 이 황궁에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정말 다른 영혼이 연화운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거라면 그는 당연히 ‘연화운’으로서 황궁에 남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물며 천민 출신의 시위라니, 연씨 집안을 비롯해서 누구도 그를 그냥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연화운이 미친 것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야 워낙에 연주원의 세력이 막강하니 대놓고 그에게 맞서는 자가 없지만 연화운이 미쳤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그것을 트집 잡아 어떻게든 연주원을 깎아내리려는 이들이 생길 게 분명했다. 다른 이와 혼이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후궁을 버젓이 정안궁에 내버려 둘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다. 진실이 무엇이든 이한은 이대로 연화운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연주원이 굳건해야 황권이 안정된다는 그런 얄팍한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그 핑계로 자신의 눈까지 가리는 건 불가능했다. 어떤 식으로든 그가 자신을 속여 왔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상황에서도 이한의 가장 큰 두려움은 그를 잃는 것이었다.

그러니 사랑이란 이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불필요하며,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감정인지.

“어찌 한 번을 잡지도 않는단 말이냐….”

고개를 숙인 채로, 이한이 울음처럼 속삭였다. 나를 향한 너의 마음도 전부 거짓이었느냐고 묻는 자신의 말에 한 마디의 변명조차 하지 않던 연화운이 야속했다. 그를 연금시키고 돌아서는 이한의 발걸음을 잡지조차 않은 그의 냉정함이 화가 나고 서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하를 향한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고. 다만 죄스러워 이야기할 수 없었던 것뿐 사실은 마음 깊이 폐하를 은애하고 있었다고.

그리 한마디 말만 해주었더라도 이한은 이토록 절망스럽고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폐하….”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황제의 모습을 애타게 지켜보던 오 태감이 입을 열어 저의 주군을 불렀으나 이내 입을 다시 다물었다. 어느 때는 하늘과도 같이 거대하였던 황제의 어깨가 하염없이 작고 연약해 보여, 오 태감은 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폐하께서 황후마마조차도 보지 않으신단 말씀이십니까?”

황후의 말을 초조한 얼굴로 경청하던 송현이 이내 울상이 되어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비영과 함께 황후궁으로 올 때까지만 해도 황후마마라면 무언가 사정을 아시지 않을까 했던 기대가 모조리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비영이 극구 말려 직접 가진 못했지만 황후마마마저도 헛걸음을 하셨다면 자신은 찾아간다고 해도 폐하를 만날 일은 요원할 게 분명했다. 입술을 삐죽거리던 송현이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 아무리 그대로 폐하께서 오랫동안 마마를 보지 않기야 하시겠습니까. 폐하를 뵙게 되면 연빈을 용서해 달라 그리 청을 하실 것이지요?”

“연빈이 무슨 잘못을 하였는지 알고 황후마마께서 무턱대고 청을 하시겠어.”

자란 대신 대답을 한 건 비영이었다. 이치에 맞는 말이었으나 정작 그렇게 말하는 비영 역시 간절한 표정으로 황후를 바라보고 있는 건 매한가지였다. 잠시 그 둘의 시선을 받아내던 자란이 말했다.

“폐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그리 하시지는 않았을 테지.”

답답하고 속이 터지는 상황과는 별개로 자란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그들의 황제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자기 기분에 따라 후궁을 연금하는 분은 아니었다. 게다가 후궁을 궁에 연금하는 건, 그것도 연빈처럼 집안의 힘이 결코 작지 않은 후궁에게 그런 벌을 내린다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여간 큰 잘못을 한 것이 아니고서야 납득을 하기 힘든 처벌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 해보아도 연빈이 그 정도로 과한 잘못을 폐하께 저질렀을 거라곤 생각이 되질 않아 비영과 송현은 아침부터 고민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심각해진 두 사람의 얼굴을 또 잠시 바라보던 자란이 제가 생각한 바를 천천히 내놓았다.

“혹시… 연빈이 기억을 되찾은 것은 아니겠나.”

자란의 말에 앞에 앉은 두 사람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란의 말은 단순히 그가 잃었던 기억을 되찾았다는 말이 아닐 터다. 그것은 분명 연빈이 다시 ‘예전의 연빈’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겠냐는 말이었다.

송현이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등골이 오싹해지며 전신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예전으로 다시 돌아간 연빈을 상상만 해도 송현은 정신이 다 혼미해질 것 같았다. 그 악귀 같은 연빈을 다시 대해야 하는 것이 끔찍한 것은 물론이고, 더없이 다정한 눈길로 저를 챙겨주던 지금의 연빈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면 절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송현과는 달리 금세 안정을 되찾은 얼굴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비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황후마마.”

“어찌 확신하지?”

“만약 이전의 연빈으로 되돌아갔다면… 그 성질머리에 지금까지 순순히 서정궁에 갇혀 있겠습니까.”

“아…!”

송현이 짧은 탄성을 터트렸다. 조금 전까지 사색이 되어 있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비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랬다면 벌써 궁녀 몇이 호되게 매질을 당해 실려 나왔거나, 아니면 연빈 본인이 문에 도끼질이라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하. 그도 그렇구나.”

송현만큼은 아니어도 혹시나 연화운이 예전으로 돌아갔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던 자란이 그제야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으로는 다소 어이가 없긴 했지만 동시에 아주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추측이었다.

“어쨌든 폐하를 뵙게 되면 내 좀 더 알아볼 테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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