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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정녕 그날 마마께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저는 어쩌면 영영 알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제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저는 더 이상 마마께서 어떻게 이렇게 변하신 건지 굳이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않아요.”
“…….”
“이제는 상관없으니까요. 마마께서 정말 단순히 기억을 잃으신 건지 아닌지, 저는 다 알지 못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아요. 변하지 않는 건, 마마께서 저를 살리신 분이라는 거예요.”
말 그대로 아진은 어느 순간부터 화운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더 이상은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을 알아내 달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면 마마께서 밝히기 어려워하는 부분을 굳이 파고들 연유가 무엇인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던 저를 지금의 마마께서 구해 주셨어요. 다시 웃게 해 주시고, 행복을 알게 해 주셨어요. 저는 이제 마마 덕분에 아침에 웃으며 눈을 뜨고, 밤에 눈물 없이 잠들어요. 저의 은인은 지금의 마마이십니다. 그러니 마마….”
어둠 속에서도 아진이 미소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화운은 온통 차갑기만 하던 마음 한구석에 아주 작지만 맹렬하게 피어오르는 온기 하나가 있음을 느꼈다. 아진이 말을 이었다.
“제게는 무엇도 미안해하지 마시고, 무엇도 걱정하지 마시고, 저를 떠나보내실 생각은 더더욱 하지 마세요. 저는 언제나… 지금의 마마 곁에서 마마를 모실 것입니다.”
“아진… 나, 나는….”
“마마의 시간을 제가 너무 빼앗았네요. 어서 주무세요.”
화운이 무어라 말을 더하기도 전에 아진은 제 할 말을 마치고 잽싸게 침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화운은 참았던 긴 숨을 토해내며 이불로 제 얼굴을 전부 가렸다. 화운은 내도록 아진을 보며 적어도 저 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좋은 것을 주었을 거라고 자위하며 힘겨운 나날들을 버텼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진 역시 그것을 좋은 것이라 여겨줄지 확신이 없어 같은 무게의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아진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화운이 가장 깊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말해준 것이다. 당신의 거짓이, 기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좋은 것이었노라고.
얼굴을 가린 이불이 뜨끈하게 젖어왔다. 화운은 그 밤이 다 가도록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폐하, 이러다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되옵니다.”
음식은 넘기지도 않고 연신 술잔만 기울이고 있는 이한을 보다 못한 오 태감이 절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한은 과음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과음은 정신을 흐리게 하고, 다음 날 국사를 돌보는 데에도 하등 도움 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황제가 오늘은 저녁도 거른 채로 술만 마시고 있으니 혹시라도 속에 탈이 나진 않으실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한은 오 태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다시 한 번 술 한 잔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진성아.”
“예, 폐하….”
“나는 언제나 내 어머니의 고통을 연민하였으나 그것을 끝끝내 공감하지는 못했다.”
“…….”
“제 아무리 부황을 연모하셨다고 하여도…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감정이기에 황후의 자리에서도 저렇게 아파하시는 건지, 어찌 지금까지도 그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저렇게 과거에 사로잡혀 계시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아버지의 사랑이 나라를 망치는 감정이었다면 어머니의 사랑은 그 자신을 망치는 감정이었다. 이한은 제가 사랑하는 이가 같은 감정으로 저를 돌아봐 주지 않아 아픈 마음이라는 것이 어떠한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진성아… 그런데 이것이….”
“폐하….”
“그런데 이것이 정말 너무 아프구나…. 정녕 이렇게까지 아픈 것이었어….”
술잔은 놓은 이한의 손이 이번에는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할 수 있다면 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어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토록 처참하고, 절망스러우며,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영영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면 제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미치지 않을 재간이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이 정말로 전부 다 거짓이었단 말이냐….”
거짓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는 순간 고통은 몇 배로 더 끔찍하게 이한의 심장을 저며 냈다. 아니, 이제는 심장뿐만이 아니라 날카로운 칼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를 도려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연화운이… 연화운이 내게 보인 그 마음들이 전부…!”
연화운이 정말로 연화운이 아니라 그가 말한 대로 ‘하운’이라면. 그것만으로도 분명 큰 문제가 되겠으나 지금 이한에게 중요한 건 그런 사실이 아니었다. 그 스스로도 믿기 힘들었으나 이한에게는 그가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황제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오른팔이자, 충신의 아들 몸에 사실은 전혀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와 있다는 것이 국가적으로 훨씬 더 어렵고 중요한 일임을 알면서도 지금 이한은 그런 고민 같은 건 하나도 들지가 않았다. 오로지 이한이 알고 싶은 건.
그 사람이. 화운인지 하운인지 알 수 없는 그 사람이. 제 연심의 주인이자 유일한 정인인 바로 그가 자신을 얼마나 진심으로 대해 주었는지. 단지 이 황실에서 살아가기 위해 거짓으로 제 앞에서 진심을 꾸며낸 것인지 아닌지. 오직 그것만이 지금의 이한에게는 중요했다.
“폐하….”
가만히 황제가 토해내는 서러움을 듣고 있던 오 태감이 안타까움에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록 폐하께서 보신 만큼은 아니지만 저 또한 그동안 연빈마마를 뵙고 겪어왔습니다. 외람되오나, 그런 소인이 보기에 연빈마마께서 결코 거짓으로 폐하를 대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이리 괴로워하시는지 미천한 소인에게라도 털어놓으실 수는 없으시겠는지요….”
오 태감은 그 방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오 태감이 알기로 그의 주군은 제 기분을 상하게 하였다고 하여 섣불리 누군가를 벌하는 분이 아니었다. 그런 분이 그토록 총애하였던 이를 하루아침에 벌하였을 때에는 분명 그만큼 이유가 있었을 터인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연빈이 그럴 만한 일을 벌일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아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웠다.
그러나 황제는 오 태감의 말에도 그저 고개를 저으며 술을 또 한 잔 마실 뿐이었다. 오 태감이 황제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든 일을 함께 보고 듣는 측근이기는 하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한은 제 안에서 이 일을 어찌 처리할지 확신이 서기 전엔 입 밖으로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사람이 어찌… 보는 것만으로 그 속을 다 알 수가 있다더냐….”
대신 이한은 오 태감의 말을 쓸쓸하게 반박했다. 연화운이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황제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가장 많이 겪고 보았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그를 믿고 싶은 사람 또한 사실은 성이한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것이 거짓일 때. 그가 다른 목적을 두고 자신의 앞에서 그 모든 것을 꾸며내 황제의 마음을 얻어낸 것이라 하였을 때. 그렇다면 가장 위험해지는 건 황제 그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명의 사내이기 이전에 일국을 다스리는 황제였다. 그가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곧 나라가 나아가는 길이 되고, 그가 믿는 사람 하나가 곧 나라의 미래에 영향을 주는 이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니 황제의 연정이란 얼마나 조심스럽고 또 어려워야 하는 일이겠느냔 말이다.
“내 아버지라고 귀비가 태자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하려 들 여인이라고 꿈에서나 짐작하셨을까….”
급기야는 무도한 자의 이름까지 흘러나오자 오 태감은 더 감당할 수 없어 말을 더하지 못하고 허리를 숙였고 이한은 손에 쥔 술잔을 부수기라도 할 듯 세게 쥐며 눈을 감았다.
해가 뜨면 아무도 알 수 없을 황제의 눈물이 고요하게 뺨을 타고 흘렀다. 이 순간에도 정말로 견디기 힘든 건. 그 무엇보다 이한을 고통스럽게 만든 건. 이런 상황에서도 쉬이 접히지 않는 마음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간절히 보고 싶은 이 한심한 감정이었다.
그 자리에서 화운이 폐하를 은애하는 저의 마음은 진심이었다고 단 한 마디만 해주었다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의심을 전부 버리고만 싶었던 자신이 마음이. 황제의 가장 큰 고통이었다.
황후가 알현을 청했음을 알리러 대전 안으로 들어갔던 오 태감이 다시 나왔다. 표정이 무거운 것을 보니 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아 황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다가온 오 태감이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송구하옵니다, 황후마마. 폐하께서는 지금 급한 일을 처리하고 계시는지라 후에 폐하께서 황후궁으로 가시겠다 하셨습니다.”
황후 보기를 과도하게 어려워하는 오 태감의 얼굴을 보건대, 그 속뜻은 그러니 내가 찾을 때까지는 찾아올 필요가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웬만해서는 황후를 이렇게 얼굴도 보지 않고 돌려보내는 일은 드문지라 함께 서 있던 선이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오 태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황후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어찌 하고 계시는가.”
오죽 답답했는지, 오 태감은 거의 한숨처럼 숨을 한번 깊이 내쉬고는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제는 식사도 거른 채 과음을 하시고… 아무래도 크게 상심하신 듯 보였습니다.”
“연빈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네도 아는 것이 없나?”
“예, 황후마마. 제게도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홀로 속을 끓이시니 행여나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가 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