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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57)화 (157/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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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운이 혼절하였지만 황제 폐하의 명 때문에 서정궁은 태의조차 부를 수가 없었다. 당장에 크게 앓는 기색은 없어 화운을 침대에 눕혀 두었으나, 혹시나 늦게라도 마마께서 앓지는 않으실까 걱정이 되어 조용히 침실로 들어선 아진은 불 꺼진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화운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 다가갔다.

재빨리 몇 개의 초를 더 밝히고 침대로 다가가자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인이 보여 아진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간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있었으나 이토록 허망한 주인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마….”

그 모습이 바람이라도 불면 흩어질 것처럼 보여서 아진은 아주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으나 이런 마마의 앞에서 제가 먼저 눈물바람을 일으킨다는 건 안 될 말이었다. 아진의 목소리에 흐릿하게 허공을 보고 있던 화운의 시선이 천천히 아진에게로 향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아진은 절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늘 온화하고 따스하였던 주인의 눈동자가 이토록 온통 깊은 슬픔으로만 가득 차 있다니 제 심장이 다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진.”

그런데도 화운은 울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덤덤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오히려 더 큰 슬픔만을 보여줄 따름이다.

“마마…. 어디 안 좋은 곳은 없으세요…?”

“아진. 생각해 보니 내가 일을 너무 잘못하였어. 조금 더 미리 준비를 해놓았어야 했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아진 너를… 더 좋은 곳으로 보낸 뒤에 고했어야 했는데….”

“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를 어디로… 어디로 보내시려구요? 제가 무얼 잘못하였나요?”

생각지도 못하게 흘러나온 말에 아진이 사색이 되어 물었다. 제가 무엇을 잘못하였나. 어디에선가 자기도 모르게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것인가. 그래서 마마께서 자신을 내쫓으려고 하신 건가. 화운은 분명 아진을 좋은 곳으로 보내야 했다고 말을 하였으나 아진은 그런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한다는 말만 귀에 박혀왔다. 화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고… 아진, 내게는 그저 너무 미안한 마음뿐이야….”

황제에게 사실을 밝힐 결심을 하고 나서 애써 담담한 척을 하였어도 속은 어지럽고 두려워 좀 더 세심하게 앞일을 계획하지 못했다. 앞으로 저를 모셔봐야 고생만 할 게 뻔하질 않은가. 이미 그동안 갖은 고생을 다 하였던 아진을 그 전에 다른 궁으로 보냈어야 했는데, 그 생각을 미처 못한 것이다. 숙비마마를 찾아갔을 때 아진의 거취 역시 부탁을 했더라면. 아니면 정빈에게라도 말을 넣어 부탁했다면 좋았을 텐데. 이미 늦은 후회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네게 너무 미안해, 아진. 이제는 나 때문에 폐하께서 찾지 않으실 궁에서 내도록 고생을 하게 생겼으니….”

“마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세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 무슨 일인지는 소인이 알지 못하나 폐하와의 오해도 결국엔 풀리게 될 테니 걱정 마세요. 네?”

“…….”

“설령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제가 가긴 어딜 가요. 마마께서는 소인을 곤경에 빠진 주인을 버리고 혼자 잘 살겠다고 떠나갈 그런 사람으로 보셨어요?”

결국 아진의 눈가에 참으려고 애썼던 눈물이 맺히더니 뺨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자신의 거취를 염려해 주는 화운의 마음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장 막막하고 슬플 사람은 본인이면서 이런 순간에도 미천한 종을 걱정하고 계시다니.

화운의 손이 아진의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천천히 닦아 주었다. 아진이 절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마. 무슨 일인지 제게 말씀해 주시면 안 되나요? 비록 소인이 아무런 힘없는 종이지만 마마의 아픔을 늘 제가 들어드렸잖아요. 소인에게라도 털어놔 주시면 안 될까요?”

그때 화운은 아주 조금, 아진에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위로를 받고 싶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화운은 아진이 그동안 자신을 농락한 주인의 뻔뻔한 민낯을 알아야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화운은 입술을 깨물고 숨을 한번 깊이 내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진에게 전부 다 털어놓을 수 없는 현실이 답답하고 미안했다.

오로지 자신만 연관된 일이었다면 털어놓았을 것이다. 그 자신만 욕을 먹고 끝날 수 있는 일이라면 아진에게는 반드시 모든 것을 말해 주었을 테다. 하지만 이 일은 황제 폐하의 명성과 연화운의 집안에도 고루 관계가 되어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아직 다 모르는 상황에서 아진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아 그를 더한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화운은 늘 그렇듯 아진의 따스한 위로를 받고 싶은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을 연신 다스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마음 같아선 네게 전부 다 솔직히 말하고 싶어. 그러고 싶지만… 당장은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이해해 주면 좋겠구나. 다만 내가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건….”

“…….”

“아진.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결코 아니야. 나는… 나는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고, 후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너 역시 내게 크게 실망하고 말 테니까….”

자신이 깍듯하게 모시던 이가 사실은 하찮고 보잘것없는 천민이었다는 사실을. 그런 자를 그간 마마, 마마, 하며 떠받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진 역시 배신감과 분노로 두 번 다시 자신을 보고 싶지 않을 터다. 만에 하나 폐하께 무어라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진을 다른 곳으로 보내주시면 안 되겠느냐 빌어봐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서러움이 차오르는 아진의 눈동자를 애써 모른 척한 화운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아진… 나 때문에 너무 슬퍼할 필요 없어.”

후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금 느끼는 그 슬픔마저도 아깝다 여길 테니까.

생각에 생각을 더할수록 심장에 쌓여가는 고통을 견디기 힘들었으나 그건 모두를 감쪽같이 속인 화운이 응당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당장 다시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이는 화운의 얼굴을 살피던 아진은 손등으로 대충 제 눈가를 훔치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은 마마, 밤이 늦었으니 주무세요. 푹 주무시고 일어나셔서 식사하시고… 아직 서정궁에 남아 있는 약재들이 있으니 약을 달여 드릴게요.”

“응. 그럴게. 고마워, 아진.”

화운은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못하는 자신의 말이 답답할 텐데도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아무렇지 않은 척해 주는 아진에게 마음 깊은 고마움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아진은 이전과 똑같은 손길로 화운을 천천히 자리에 눕히곤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고선 밝혔던 촛불을 하나만 남긴 채 모두 끄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침실을 나서던 아진의 걸음이 불현듯 멈춘 건 화운이 제게서 멀어지는 아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다시 몸을 돌려 화운을 보는 아진의 얼굴엔 비장함이 어려 있었다. 아진이 말했다.

“마마. 한 말씀만 드릴게요. 저는 마마께서 기억을 잃으신 이후, 그날 벌어진 일에 대해 아주 많이 생각했어요. 도대체 마마께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정말 기억을 잃으신 걸까. 아니면 단지 그렇게 꾸며내고 계신 걸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빈마마를 파악하는 것이 곧 아진에게는 자신의 삶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태도를 분명히 해야 했다. 마마께서 정말로 변하신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금 자신이 보이는 행동이 훗날 자신의 목을 조이는 수단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화운이 믿기 힘든 말을 하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행동을 하는 날이면 아진은 밤의 어둠에 잠겨 홀로 아주 많은 가정들을 했다.

“처음에는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르실 거예요. 혹시나 이 모든 것이 마마께서 저를 시험하고 계신 거라면 어쩌나 두려웠어요. 그렇다면 마마께 변함없이 잘해드려야 하는지, 아니면 이전의 마마를 그리워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너무나도 어려웠으니까요.”

“아진….”

“그러다 어느 날엔 그런 생각도 했죠. 어릴 때부터 마마를 모시던 제가 생각할 때 도무지 마마께서 하실 법한 일이 아닌 일들을 하시는 걸 보면서… 단순히 기억을 잃었다고 하여 보일 수 있는 모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달라진 마마를 보면서… 혹시 마마께서….”

갑자기 사위를 가득 채워오는 긴장감에 화운이 저도 모르게 이불을 두 손으로 꼭 그러쥐었다. 촛불 하나에만 의지한 방 안의 어둠 속에서, 아진이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는 진심을 꺼내놓고 있었다.

“혹시 마마께서 정말로 다른 사람이신 것은 아닐까…. 그냥 변한 게 아니라 어떠한 이유로 아예 내가 모르던 분이 되신 것은 아닌가….”

물론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한지 아진은 알지 못했다. 불가능하다 보는 것이 당연히 옳은 일이었다. 그 짐작대로라면 영혼이라도 바뀌었다는 소리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하지만 아진은 생각했다. 만에 하나라도. 정말로 세상에 기적이 있고, 업을 지고 가는 혼이 있으며, 악귀가 있고 사자(使者)가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이런 일도 천년에 한 번쯤은 벌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화운은 이제 이불을 거의 코끝까지 끌어올려 제 몸을 숨기다시피 한 채로 덜덜 떨고 있었다. 아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순진하고 착한 아이라 그저 제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줄로만 알았다. 어둠처럼 조금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진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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